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고대국가의 형성과 문화/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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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槪說〕[편집]

삼국의 하나로 한반도(韓半島)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국토로 하였던 고대국가의 왕조(王朝)이다.

흉망[편집]

일찍이 부족국가로 압록강 중류 동가강(?佳江:현 桓仁地方) 유역을 중심으로 한 사방 2천리의 심산계곡(深山溪谷)에서 흥기한 고구려족은 이곳이 대륙의 금속문화 전래의 통로여서 기원전 3세기 경부터 국가 건설의 토착(土着) 세력이 결집되어 갔다. 『삼국사기』의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37년에 부여족의 주몽(朱蒙:東明王)이 일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졸본부여(卒本夫餘:桓仁地方)에서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어쨌든 강한 부족을 중심으로(고구려 5부족) 집권국가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는데, 1세기 초부터 이미 왕호를 제정하고 예(濊)와 한(漢)의 창해군(滄海郡)을 없애고, 기원전 75년 한의 속현인 현도군을 반도에서 몰아내고,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에서 부족연맹체를 굳혀 태조왕(太祖王:53

145) 때부터 옥저(沃沮)를 복속시키는 등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왕 때로 본다.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 옥저·동예(東濊)를 부속시키고, 남으로는 살수(撒水:淸川江)에 미치고,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북으로는 한의 현도군을 몰아내어, 121년에는 요동(療東)지방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한 틈을 타서, 요동에서 세력을 떨치던 공손씨(公孫氏)는 낙랑군을 점령하고 그 남부에 새로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여 고구려와 충돌이 거듭되었다. 북부 중국의 위(衛)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구련성(九連城) 지방을 공략했다. 그 2년뒤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丘儉)의 침입을 받아 싸웠으나 마침내 수도 환도성(丸都城:通溝)이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난간 일이 있다.미천왕 때는 계속 중국을 공략하여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3년에 낙랑·대방(帶方) 두 군을 반도에서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대륙과 통할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되어 후일 남으로 뻗을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무렵 한반도 남부에서는 마한(馬韓) 지역의 부족연맹 세력이 점차로 백제란 고대왕국으로 출발, 근초고왕 때는 북상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케 하였다. 고구려는 이때 북상하는 세력과 남하해 오는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의 양면 협공을 받았다.그러나 꾸준히 발전하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數林王:371

383) 때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하였으며,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게 되고,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던 시기는 바로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했던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로,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이에 고구려 영주(英主) 광개토왕(廣開土王:391

412)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일대 정복사업을 수행하여 재위 22년 동안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광개토대왕은 신라에 원병(援兵)을 보내어 왜(倭)를 섬멸하고, 남으로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완전히 차지했으며, 오랫동안 한족(漢族)과 투쟁하던 요동지방을 차지하고 읍루(?婁)를 정벌하여 동예(東濊)를 병합하여 만주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대제국을 건설하여 처음으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능비(陵碑)에 기록되어 있다.이 위업을 이어 받은 장수왕(長壽王:413

491)은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성으로 천도하여 남진책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고, 중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동맹을 맺어 고구려 세력에 대항코자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위(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고구려군은 이윽고 491년(장수왕 63)에 백제의 국도 한산(漢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원한을 풀었다. 이로써 백제는 고구려 세력에 몰려서 그 국도를 남쪽인 웅진(熊津:公州)으로 옮기게 되었고, 고구려의 판도는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아산만(牙山灣)에서 죽령에 이르는 선까지 미치게 되어 고구려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고대 제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 후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 국가인 수·당(隨唐)의 거듭된 침략으로 국난을 겪으면서도 이를 물리쳤다.한편 고구려의 남하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신라는 당(唐)과 친교를 맺고 나·당은 공격 목표를 고구려로 돌렸다. 특히 고구려 정복을 서두른 것은 신라가 아니라 당이었다. 당은 몇 차례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번번히 패하였으며 백제를 멸망시키자,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 침공에 화살을 겨누었다. 그러나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에 평양성을 공격한 나·당 연합군은 완강한 고구려 군민의 항전으로 패퇴하고 말았다.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신흥 대제국으로서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쇄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국토 방위의 선두에 서 왔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666년에 죽자 그의 아들 남생(男生)·남건(男健)·남산(男産) 사이에 막리지(莫離支)의 자리를 둘러싼 내분이 벌어졌다. 그 결과 남생은 아우들에게 쫓겨 국내성에 가서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한편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는 신라에 투항했다.나·당 연합군은 667년(보장왕 26)에 또다시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여 당은 이세적(李世勣)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설인귀(薛仁貴)를 부장(副將)으로 50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에 쳐들어 왔으며, 신라도 이에 호응하여 왕제(王弟) 김인문(金仁文)으로 하여금 27만군을 이끌고 북진케 하였다. 남북으로 대적을 맞이한 고구려는 한달을 버티다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보장왕이 드디어 항복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28왕 705년 만에 멸망하였. 당의 장 이세적은 보장왕을 비롯한 다수의 귀족과 20여 만의 고구려인을 납치하여 갔다. 당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하여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道號府)를 설치하고 설인귀를 도호에 임명하였으며, 그 밑에 9도독부와 42주(州)·100현(縣)을 설치하고 고구려인 중에서 도독·자사(刺使)·현령(縣令) 등을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옛 땅도 백제의 그것과 마찬자지로 당의 군정하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정치제도[편집]

고구려가 부족연맹체적(部族聯盟體的)인 지배체제에서 벗어나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율령정치(律令政治)가 시작된 소수림왕(371

383) 때의 일이며, 그것이 더욱 정비된 것은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고구려의 중심 세력은 본래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의 5부족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왕은 부족연맹장이 되었다. 왕은 선출에서 세습제로 변하였는데 초기는 소노부(消奴部)에서 동명성왕(태조왕) 이후는 계루부(桂婁部)에서 세습하였다 한다.초기에는 국왕 밑에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주부(主簿)·우대(優台)·승(丞)·사자(使者)·조의(?衣)·선인(先人) 등을 두었는데, 이 관계(官階)는 그 후 발전 과정을 통하여 427년 평양 천도 이 후에 재정비되었다. 관료의 등급은 대체로 12등급으로 분화·발달되었는데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衣頭大兄)·대사자(大使者)·소형(小兄)·제형(諸兄)·선인(仙人) 등으로 나뉘어졌다. '형’은 연장자로, 가부장적(家夫長的) 족장의 뜻을 나타내며 부족연맹에서 고대 국가로 전환하면서 여러 족장 세력을 이러한 관등에 흡수한 것 같다. ‘사자’가 붙은 것은 씨족원으로부터 등용된 것으로 공부(貢賦) 징수의 직역(職役)을 뜻하는 것 같다. 대대로(大對盧)와 막리지(莫離支)는 수상격인 고구려 최고의 관직으로 대대로가 평시 행정 담당의 수상이다. 막리지 밑에는 중외대부(中畏大夫)·대주부(大主簿)·고추대가(古雛大加) 등을 두었는데 각각 내정(內政)·외정(外政)·재정(財政)을 맡아보았다.지방은 동·서·남·북·중의 5부(部)로 나누고, 5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道使)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각 내부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하여야 했다. 원래 부족 세력의 근거지였을 여러 성(170)은 고구려 왕국의 사적·행정적 단위로 통합되어 있었고 또 부세(賦稅) 등 지방민에 대한 통치가 행해지기 마련이었다.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로서 국왕 자신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조직도 일원적으로 편제되어, 국내성·평양·한성(漢城:載寧)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고,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맡았다.법속(法俗)은 반역자, 항복한 자, 패전한 자,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도적은 원물의 12배를 배상시키면(一賣十二法),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았다. 한편, 신분 계급에 따라 집과 의관(衣冠)에 차이가 있었고, 3월 삼짇날은 수렵대회를 열어 상무(尙武) 정신을 길렀다.

경제·사회[편집]

왕국 영역 내의 모든 토지는 왕토(王土)라는 의미에서 토지 국유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 원칙에 입각하여 토지는 분배되었다. 왕실 직속령(直屬領)이었던 것은 물론 전쟁시의 뛰어난 훈공에 의해서 국왕으로부터의 상사(賞賜) 형식으로 수여되는 사전(賜田)이나 식읍(食邑)은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의 원천이 되었다. 사전(賜田)은 세습적인 상속이 인정되었고, 식읍은 자손에게 상속될 수 없었으며, 이들 토지 수급자(受給者)는 국가에 조세(租稅)를 납부하였다. 귀족들에 의한 토지의 사적지배(사유화 과정)는 족장(귀족)·사원(寺院)을 중심으로 장원(莊園)이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귀족들은 토지뿐 아니라 경작하는 예민(隸民)까지 마음대로 지배하였다.고구려의 세제(稅制)는 세(稅)와 조(組)가 있었는데, 인두세(人頭稅)에 해당하는 세(稅)로는 개인에게 해마다 포(布) 5필(疋)이나 곡식 5석(石)을 거두었고, 조(組)는 민호(民戶)를 3등급으로 나누어 상호(上戶)는 1섬(一石), 중호(中戶)는 7두(斗), 하호(下戶)는 5두(斗)를 징수하였다.고구려의 산업은 농업을 위주로 했으며, 국가에서는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농사를 담당한 것은 피지배계급인 일반 농민이었다. 한편 사회 계급은 분화되어 귀족·평민·노예가 있었다. 귀족은 관직과 토지 소유의 특권을 가졌고, 평민은 경작과 납세와 군복무의 의무를 지녔으며, 노비는 포로·죄인·채무자·귀화인들로 이루어졌는데, 인권은 무시되었다.

문화[편집]

고구려의 문화는 고구려인의 강건한 기질 위에 한문화(漢文化)와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이룩되었다. 지배층의 복식은 한(漢)·흉노에서 수입한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되었고, 전사(戰士)들은 머리에 쓴 적(?)에다 깃털을 꽂는 이른바 절풍(折風)을 썼다. 고구려인은 또한 거대한 분묘와 석총(石塚)을 만들었고, 많은 물건을 시체와 함께 부장하였다.한자와 한문학이 고구려에 유입되기는 3국 중에서 가장 빨랐으며, 372년(소수림왕 2)에는 이미 국가에서 유학(儒學)의 교육 기관으로 태학(太學)을 세웠고, 민간에서는 각처에 경당(?堂)을 세워 미혼의 자제들에게 독서(讀書)와 궁술(弓術)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인들 사이에는 유교의 경전(經典)이나, 사기(史記)·한서(漢書) 등의 사서(史書)가 읽혀졌다. 옥편(玉篇)·자통(字統)과 같은 사전류(辭典類)가 유포되었으며, 특히 지식인 사이에는 중국의 문선(文選) 같은 문학서가 많이 읽혔다.한자의 사용에 따라서 국가적인 사서(史書)의 편찬도 일찍부터 행하여졌다. 그리하여 일찍이『유기(留記)』100권이 편찬되었으며, 이것을 600년(영양왕 11)에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간략히 하여 『신집(新集)』5권을 편찬케 하였다. 한자 사용의 근거는 통구의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414)의 비문(碑文)과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약 1,800자(字)의 비문으로 능히 알 수 있고, 특히 광개토왕의 비문은 중요한 사료(史料)가 되고 그 고굴(告掘)한 예서(隸書)의 자체(字體)는 서예(書藝)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구려의 종교는 원시 신앙과 불교·도교로 대별할 수 있는데 원시 신앙으로는 자연물 숭배, 천신(天神)·지신(地神)·조상신(祖上神)의 3신(三神) 숭배와 샤머니즘(shamanism)적 신앙이 있었고, 특히 나라에서는 부여신(河伯女)과 고등신(高登神:晝夢)을 시조신(始祖神)으로 해마다 4회 제사를 지냈다. 불교의 전래는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에서 중 순도(順道)가 불상(佛像)과 불경을 전래한 것이 그 시초이며, 그 2년 뒤에는 다시 진(晋)에서 중 아도(阿道)가 들어왔는데, 소수림왕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건립하여 위의 두 불승(佛僧)을 거주케 함으로써 국가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던 것이다.불교가 왕실에 의하여 이와 같이 환영되었던 것은 불교가 때마침 국민에 대한 사상 통일의 요구에 부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가 지녔던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이 왕실에 크게 영합되었기 때문이다.곧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한편, 도교(道敎)는 고구려 말기인 624년(영류왕 7)에 당고조(唐高組)가 양국간의 친선정책으로 도사(道士)를 보내와 전한데서 비롯되었다.고구려의 시가로는 유리왕(?璃王)이 지은 「황조가(黃鳥歌)」와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을지문덕의 「오언시:五言詩」 등이 한시(漢詩)로서 전하고, 그 밖에 「내원성가(來遠城歌)」 「연양가(延陽歌)」 등이 가명(歌名)만 『고려사 악지(高麗史樂志)』에 전한다.건축·미술에 있어서는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는데 그것은 통구와 평양 지방에 집중되어 있어 다행이도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古墳)을 통해서 그 자취를 엿볼 수 있다. 궁실(宮室)이나 사찰(寺刹) 등 건축물로서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고분의 구조를 통하여 당시의 귀족 계급의 호화로운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으로는 석총(石塚)과 토총(土塚)의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석재(石材)를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린 장군총(將軍塚)은 통구 지방에 남아 있는 고구려 석총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관(棺)을 안치한 큰 석실(石室)을 축조하고 그 위에 봉토(封土)를 덮은 토총 형식의 대표적인 것은 평양 부근의 쌍영총(雙楹塚)이다. 이와 같은 석실(石室)의 구조와 벽화(壁畵)에 의해서 고구려인의 건축술과 미술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곧 쌍영총의 현실(玄室)과 전실(前室) 사이에 세워진 각(角)의 두 석주(石柱)와 투팔천정(鬪八天井), 또 그림으로 나타낸 천정의 장식은 고구려의 건축 양식을 엿보게 한다.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고구려인의 신앙·사상이나 풍속·복식(服飾) 등을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실로 삼국시대 미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쌍영총의 섬세·화려한 필치로 그려진 인물화나 무용총(舞踊塚)의 무인(舞人)·가인(歌人)의 그림은 고구려인의 풍속·복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대묘(大墓)의 청룡(靑龍)·백호(白虎) 등 사신도(四神圖)는 강건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잘 나타낸 기운이 생동하는 걸작품이다. 이 밖에 수렵총(狩獵塚)·각저총(角抵塚) 등의 고분이 유명하고 또 수산리(守山里)와 안악(安岳) 제3고분이 발굴되어 건축·미술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광개토왕의 거대한 능비,

고분의 웅대한 규모 등이 고구려인의 기우(氣宇)의 광대함을 말하여 주고, 벽화는 물론 고구려의 와당(瓦當)에서도 무늬를 통하여 고구려인의 웅건한 기백을 느낄 수 있게 한다.불교 미술면에서는 중국의 북위(北魏)풍을 받아들여서 불상이나 불화(佛畵) 또는 탑파(塔婆) 등 우수한 미술품을 많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족이나 유물이 극히 드문 것은 매우 유감이다. 다만 평양 근처에서 발견된 소형의 이불(泥佛)과 연가(延嘉) 7년이 새겨진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이 당대(當代)의 양식을 잘 나타낸 불상조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문자왕(文咨王:491

519) 때 제작된 금동 불상이 1972년 충북 유성군에서 발견되었다. 고구려 문화는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고구려의 화공(畵工)·학승(學僧)이 일본으로 가서 불교문화를 전하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은 저명한 사실이며, 화가 담징(曇徵)이 그린 벽화는 그 대표적인 일례이다.가무(歌舞)를 매우 즐겼다는 고구려인의 시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음악인 왕산악(王山岳)이 진(晋)의 칠현금(七鉉琴)을 개량(改良)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다 하고 100여 곡(曲)의 악곡(樂曲)을 지었다고 전한다.

대외관계[편집]

6세기 경 중국의 수(隨)나라가 중원(中原)을 통일했을 무렵, 반도(半島)의 정세는 일변해 갔다. 당시 형세는 고구려·백제의 세력이 남북으로 연결되고 수·신라는 동서로 연결되었다. 이런 때에 고구려 영양왕(?陽王)의 요서(遼西) 공격이 발단이 되어 598년(영양왕 9) 수와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영양왕의 요서 공격은 수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취해진 조치인 듯하나 수의 문제(文帝)는 이를 구실로 598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그러나 수군의 침공은 요서 지방에서 고구려군에 의해 저지되고, 그 위에 장기간에 걸친 풍우와 질병으로 수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후 수 문제의 패배는 그의 아들 양제(煬帝)로 하여금 설욕전을 꾀하게 하였으니, 수양제는 멀리 서역(西域)의 여러 종족과 북방의 돌궐족(突闕族)을 복속시킨 다음, 고구려 공격을 위한 대규모의 전쟁 준비를 갖추었다. 양제는 612년(영양왕 23)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고구려 침공의 길에 올랐다. 수군의 규모는 전투병 113만에, 치중(輜重)부대는 그 갑절이었으며, 수군(水軍)도 참전하였다.수나라 대군의 침공을 받은 고구려는 방어 제1선인 요동성을 고수하여 수군(隨軍)을 수 개월 동안 그 곳에서 저지하였다. 초조해진 양제는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宇仲文)으로 하여금 좌우대장으로 삼아 30만의 별동부대를 이끌고 평양성을 급히 공격케 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은 유도작전을 써서 적군을 평양성 가까이까지 끌어들인 다음, 그들을 포위 공격하였다. 식량 부족과 후방과의 연락 두절로 당황한 적군이 총퇴각을 시작하자 을지문덕은 미리 매복시켜 둔 군사로 살수(撒水:淸川江)에서 일대 섬멸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전사상(戰史上) 길이 빛나는 살수대첩이다. 그 후 수양제는 두 차례나 침입하였으나 번번이 패하고 결국 수나라가 멸망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수(隨)를 이어 중국대륙을 통일한 당(唐)은 처음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도모하더니 반도의 정세변화에 따라 고구려 내정을 간섭하고 드디어 침략의 구실을 만들게 되었다. 고구려는 당 태종이 즉위하여 고구려에 은근히 압력을 가하자 미리 그 공격에 대비하여 요하(遼河) 지방의 국경선에 천 여리의 장성(長城)을 구축하였다.이 장성 구축은 631년에 시작되어 10여 년의 세월이 걸려서 완성된 것이다. 642년 고구려에서는 귀족 사이의 내분으로 말미암아 천리장성의 공사 책임자였던 연개소문에 의한 정변(政變)이 일어나게 되었다.그는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신라의 한강 점유로 배신을 당해 적대 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에 대해 공격을 펴니 신라는 이 사실을 당해 호소하였고, 당은 신라에 대한 공격 중지를 거듭 권고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사신을 감금했다. 이에 당 태종은 644년(보장왕 3)에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수륙 양면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여 왔다. 당장(唐將) 이세적(李世勣)은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 방면으로, 장량(長亮)은 4만 3천 여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해로로 평양을 향하여 떠났다.위기에 처한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 하에 신성(新城)·건안성(建安城)·안시성(安市城) 등 요동 지방의 요새를 굳게 지켰다. 특히 안시성에서의 방어전은 치열하여 60여 일간의 교전 끝에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안시성 공격에서 대패한 당군은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총퇴각하고 말았다. 육로군(陸路軍)의 패보를 들은 수군도 침공을 중단하고 돌아갔다. 당 태종은 그 후에도 647년·648년·655년에 거듭 고구려 침공을 감행해 왔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구려와 수·당과의 싸움은 동아의 패권을 다투는 일대 결전이었던 것이다. 그 후 당은 계획을 바꾸어 신라와 맹약을 맺고, 백제·고구려의 순위로 나·당 연합군을 구성하여 드디어 고구려를 멸망케 했다.광개토왕 비문(廣開土王碑文)에 의하면, 왜인은 이해관계가 일치되는 가야연맹을 돕기 위하여 신라를 침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남진을 막으려고 지금의 황해도까지 침입하였다가 섬멸당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는 404년(광개토왕14)

407년 경으로 고구려에서는 광개토왕이 신라의 청원병(請援兵) 요청으로 왜군을 섬멸하였으니, 이것이 고구려가 일본과 가진 관계의 처음이었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위치 관계로 백제만큼 밀접하지는 못하였으나 고구려 문화가 동류(東流)되었다. 특히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인의 집단적 이주가 있어 일본 문화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담징(曇徵)·혜관(惠灌)·도징(道澄) 등을 들 수 있다. 담징은 5경에 통하고 지묵(紙墨)·맷돌 제조까지 전하여 일본의 교학(敎學) 및 미술공예계에 활약하였고, 혜관은 일본 삼론종(三論宗)의 시조가 되었다. 도징도 일본에 가서 삼론(三論)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교류와 영향을 반증(反證)하는 것으로 일본에서 발견된 다까스마쓰총(高松塚)의 벽화가 이를 입증해 준다.

예맥[편집]

濊貊

옛 중국의 동북 변경 밖에 살던 민족으로 한민족(韓民族)의 근간(根幹)이 되는 민족. 일명 맥(貊·?·?白) 혹은 예(濊·穢·▩). 예맥은 원주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2

3세기경에 남쪽으로부터 한족(漢族), 서쪽으로부터 유목민의 압박을 피해, 지금의 만주 동부에서 한반도의 동부·중부에 걸쳐 정착한 듯하다.예맥족은 옛날 숙신(肅愼)과 동호(東胡) 사이에 개재(介在)하여 송화강·흑룡강·압록강 등의 유역과 함경·강원도 지방에 걸쳐 활동한 대민족으로 역사상 부여·고구려·예맥·옥저 등으로 부르는 여러 족속을 포괄한다.

주몽[편집]

朱蒙 (전 58

전 19)

일명 동명왕(東明王). 고구려의 시조. 성은 고(高), 이름은 주몽 외에 추모(鄒牟)·상해(象解)·도모(都慕).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죽고 금와(金蛙)가 즉위,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부인으로 삼았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가까이했다는 말을 듣고 유화를 유폐하였다.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알에서 남아(男兒)가 나와 성장하니 주몽(부여의 속어로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 불렀다.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을 받던 중 대소(帶素) 등 금와왕의 일곱 왕자가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자 화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로 내려와 기원전 37년에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하고, 성(姓)을 ‘고’라 했다. 이듬해 송양국(松讓國)의 항복을 받고 기원전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 다음해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으며, 다시 기원전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키는 등 국가의 토대를 이룩했다.

고구려의 5부족[편집]

高句麗-五部族

고구려를 형성한 여러 부족 중에서 가장 유력하여 연맹 세력의 핵심이 된 세력.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의 5족.노(奴)는 나(那)로도 표현되는 부족 단위의 정치적 사회, 즉 부족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왕(聯盟長)은 처음 이 5족의 족장에 의하여 선거되었던 듯하다. 왕위를 세습하게 된 후에도 수상직(首相職)인 대대로(大對盧)는 5부에서 천거하였고, 혹은 여러 부가 서로 싸워 승리한 부에서 대대로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므로왕은 어느 고정된 부족에서만 선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노부에서 계루부(高氏)로 교체되면서 왕실은 고정되었다.

소노부[편집]

消奴部

고구려 5부족의 하나. 초기에는 5부족 중 가장 강대한 부족으로 맹주(盟主) 역할을 하여 왕위를 계승하다가, 고구려의 건국 시조 동명왕이 계루부에서 나와 세력을 폄으로써 주도권을 빼앗겼다.

계루부[편집]

桂婁部

고구려 5부족의 하나로 일명 내부(內部)·황부(黃部). 처음에는 5부족 중 소노부가 강하였으나 계루부가 점차 강하여져서 왕족을 이루었다.각가(各家)의 적통(嫡統, 長子)은 모두가 대가(大加)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계루부는 6대 태조왕(太祖王) 때부터 5부족을 영도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다.

고추가[편집]

古雛加

고구려 때 왕족이나 귀족에 대한 칭호의 하나. 왕족인 계루부에 있어서는 각가(各家)의 적통 장자. 옛 왕족인 소노부 및 왕비족인 절노부에서는 적통대인(嫡統大人:部族長)을 일컬어 ‘고추가’라 하였다. 이는 신라의 거서간(居西干), 백제의 길사(吉師)와 같이 존귀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상가[편집]

相加

고구려의 부족장인 대가(大加) 가운데서 그들의 대표자격으로 선출된 사람. 관련된 대가 관내의 부족을 대표·지배한 상가(相加)는 국왕과 더불어 권력의 주축을 이루었다.

대로[편집]

對盧

고구려의 관직으로 왕 직속하의 제1위 벼슬. 패자(沛者)와 더불어 왕을 보좌하여 국정(國政)을 총리(總理)하는 수상격(首相格)이었다. 대로는 왕이 직접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족 중 우세한 부족에서 선출되었다. 다른 부족의 대변자 역할을 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졌다.

고구려의 하호[편집]

高句麗-下戶

주로 생산 활동에 종사한 피지배층 하호는 고구려 본족(本族) 중의 범죄자·낙오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피정복민이었으며 전쟁 때 포로가 된 중국인들도 있었다.이들 하호는 신분적으로 노예와 구별되었으나 사회 경제적 위치는 노예에 준(準)하는 예민(濊民)으로서 대부분 정복당한 원주지에 살면서 농경을 포함한 생산활동을 거의 전담하였고, 일부는 고구려에 이주되어 토지의 개척과 농경 등에 사역(使役)되었다. 또 전시에는 지배자의 사병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서옥제[편집]

壻屋制

고구려 시대의 결혼 풍속.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혼인이 결정되면 여자 집에서는 큰집(大屋) 뒤에 작은 집(小屋)을 지어 이를 서옥(壻屋)이라 하고, 저녁에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여자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같이 잘 수 있으며, 자식을 낳아 커야 남자는 아내를 데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치 데릴사위제와 흡사한 결혼 풍속으로 한국의 원시사회가 모계제사회(母系制社會)였다고 주장하는 근거의 하나이다.

동맹[편집]

東盟

고구려에서 10월에 행하던 제전(祭典) 의식. 동명(東明)이라고도 함. 『위지(魏志)』 고구려전(傳)에 의하면 “나라 동쪽에 큰 수혈(隧穴)이 있어, 10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수신(隧神)을 제사지내며, 목수(木隧)를 신좌(神座)에 모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신은 주몽의 어머니로 민족적인 신앙의 대상이며, 목수는 나무로 만든 곡신(穀神)을 의미한다. 전 부족적인 제례(祭禮)였던 이 의식에서는 부족원이 무리를 지어 연일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