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삼국 초기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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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초기의 문화〔槪說〕[편집]

부족연맹체적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삼국의 문화는 현존하는 것이 적어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삼국시대인들은 원시사회의 유풍을 일면 답습하면서도 그들의 생활 모습을 차츰 달리해 간 것 같다. 삼국 초의 문화에 있어서는 시조신(始祖神)에 대한 제사 의식이 행해졌으며, 또한 제천 의식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어 갔던 것 같다.삼국이 정립(鼎立)되어 가기 훨씬 이전에 벌써 그들의 생활을 표현하는 노래가 나타났다. 추수감사제에 온 씨족원이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음주와 가무(歌舞)를 즐겼다는 것은 벌써 가사(歌辭)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일이며, 특히 고구려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黃鳥歌)』는 유명하다. 또 『삼국사기』에는 유리왕 5년에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으니 이것이 가락(歌樂)의 시초이다”라고 하였으나 확실치 않으며, 유리왕 9년(32)에는 오늘날의 한가위(秋夕)가 처음으로 마련된 듯하다.사회 체제가 점차 정비됨에 따라 삼국의 각 사회에는 그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 복장의 모양과 빛깔이 각각 달리 제정되었다. 또 장례하는 풍습은 원시적인 유습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지배층의 무덤은 그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장대하게 구축되었고 많은 부장품(副葬品)을 매장하였다.사회 구조의 변화는 일상 생활 전체에 걸쳐서 생활을 점차 제약하게 되었다. 즉, 부족의 족장 세력이 왕권에 흡수됨에 따라 귀족층이 형성되어 갔고, 이들은 자기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 신분 사이에서만 혼인하였다. 아직 신분 계층은 뚜렷이 형성되지 않았으나, 각 신분 사이에는 자유로운 결혼이 행해지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황조가』[편집]

黃鳥歌

기원전 17년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이 지었다는 노래. 왕비 송(宋)씨가 죽자 계실(繼室)로 맞아들인 화희(禾嬉)와 치희(雉姬)가 서로 사랑을 다투었다. 한(漢)의 여자인 치희는 견디지 못해 본국으로 갔다. 왕이 사냥 후 돌아와 이 말을 듣고, 쌍쌍이 노는 꾀꼬리를 보고 치희를 그리는 마음에서 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삼국사기』에 한역(漢譯)되어 전한다.

한가위[편집]

음력 8월 15일의 추석명절. 그 유래는 신라 유리왕 때의 적마경기(績麻競技)에서 찾는다.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조에 의하면 6부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고 왕녀(王女) 두 사람이 각각 거느리게 하여 7월 16일(旣望)부터 날마다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길쌈(績麻)을 하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하고 8월 15일에 이르러 그 승부의 결정에 따라 진 편에서는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였고,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는데, 이를 가위(嘉俳)라 하였다. 이 놀음에서 『회소곡(會蘇曲)』이란 노래가 생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