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4 ~ 6세기경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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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6세기경의 한국〔槪說〕[편집]

대륙에서 후한(後漢)이 망하고 위(魏)·촉(蜀)·오(吳)의 삼국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점차 감소되고 있던 이 시기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대체로 두 가지 특징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 하나는 고대국가체제의 정비요, 다른 하나는 정복국가(征服國家)에로의 등장이다.한국의 고대국가체제 정비는 부족국가체제의 지양(止揚)에서 이루어진다. 종래 부족장의 권한이 강대한 상태에서는 지방분권적인 사회조직이 유지될 뿐 강력한 왕권(王權)이 존재할 수 없었다. 부족연맹(部族聯盟) 사회의 우두머리라 할 부족연맹장으로서의 왕도 각 부족장의 통치권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강력한 전제왕권(專制王權)의 행사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왕권의 세습이나 왕권의 부자상속(父子相續) 같은 것도 기대할 수 없었고, 다만 선거에 의해서 왕좌(王座)가 변동되었다. 부여(扶餘)에서 수한(水旱)의 책임을 왕에게 돌려 왕을 죽이거나 혹은 대치시킨 것이나, 고구려의 오족(五族) 사이에서 왕권의 이동이 있었던 사실 및 신라의 삼성(朴·昔·金)이 왕위를 번갈아 이어받았던 것은 이러한 것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부족연맹장의 세력은 점차 증대되고 부족장의 권한은 점차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부족장을 중앙으로 끌어올려 적당한 지위를 주어 귀족으로 편제(編制)시켰다. 신라의 골품제(骨品制)에서 나타난 진골(眞骨)을 비롯한 각 두품(頭品)이나 17의 관등, 또 고구려와 백제에서 보이는 관등의 성립 등은 이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었을 듯한 편제화(編制化) 과정에서 나타난 고대적 관계(官階)라 할 것이다. 부족연맹장이었던 왕은, 이제 종래의 부족장들에 의해서 선출당하던 연약한 왕권의 소유자가 아니라 왕권을 세습할 수 있고, 부자(父子)의 계열로 이를 상속시킬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또 하나, 고대왕권의 구축과 고대국가체제의 정비에는 제도적인 면에 앞서서 사상(思想) 통일이 요청되었다. 과거의 지방분권적이고 부족적인 사상체계를 고대국가적인 사상체계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보다 포괄적이고 고차원적인 이념과 윤리강령(倫理綱領)이 필요하였다. 한국의 고대에 있어서 고구려(372년), 백제(384), 신라(527)가 각각 불교를 수입, 혹은 공인하는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는 것은 불교가 고대국가체제의 정비에 있어서 관념체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대국가체제의 정비는 종래의 부족연맹체 사회가 갖고 있던 권력구조상의 취약점을 극복한 것으로 일단의 사회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강력한 왕권의 행사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여태껏 갖지 못한 왕권의 전제적 행사는, 고대국가 내부의 여러 모순을 정비하는 데에도 비교적 과감하였던 것 같았고, 무엇보다 강력한 명령체계의 수립이 가능하여 후일 정복국가에로의 등장을 손쉽게 하였다.고구려에서 고대국가체제가 정비된 소수림왕에 이어 정복군주인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과, 신라에서 고대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고 보여지는 법흥왕 직후에 영명(英明)한 정복군주 진흥왕(眞興王)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를 잘 말하여 준다. 이러한 정복군주들의 등장은 대륙에 대한 영토의 확장뿐 아니라 반도 내의 세력 판도를 새로이 형성시켜 주었던 것이다.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북으로 만주 일대를 공략하여 영토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남으로 백제와의 대결에서 크게 이겼으며, 백제와 결탁하고 있던 왜(倭)의 세력을 꺾기도 하였다. 뒤이은 장수왕도 영토 확장에 노력하였는데 그의 평양천도는 협착한 산골짜기의 야영도시에서 넓은 평야에 자리잡은 정치도시·경제도시·문화도시로 그 수도가 발전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평양천도 등 일련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신라·백제간의 동맹 관계가 성립되었고, 120여 년 간의 나제(羅濟) 동맹 유지는 삼국의 역사에서 가장 뒤늦게 발전한 신라로 하여금 자체의 역량을 배양하여 후일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신라가 자체정비를 서둘러 정복체제를 갖춘 것은 법흥왕대를 거쳐서 진흥왕대에 이르러서이며, 이미 이때는 고구려가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양대에 걸친 정복전으로 많은 힘을 소모한 때였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빼앗고 동북쪽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강원도·함남 일대까지 점령하였을 뿐 아니라 백제가 정복한 한강 하류 지역마저 도로 빼앗아버렸다.120여 년 간 유지된 나·제동맹이 파탄된 것은 이때문이었지만, 신라는 정작 한강 하류 지역의 서해안 일대를 차지함으로써 반도 내에서 새로운 강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한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와 서해안을 통한 중국과의 접촉,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을 차단함으로써 양국의 접촉을 막는 등 이 모든 사실들이 신라가 화랑도의 힘과 함께 삼국을 통일한 기연이 되었던 것이다.신라의 법흥왕·진흥왕의 양대에 걸친 가야(加耶) 정복은 신라의 낙동강 서부 진출정책이 성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신라·백제 및 왜(倭)의 세력 각축장이었던 가야가 신라에 정복됨으로써, 백제 및 왜의 세력이 이 곳에서 구축(驅逐)되었을 뿐 아니라 백제 및 왜의 세력과 대결하는 데 있어서 신라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반도에는 새 강자 신라가 나타나 세력권 형성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이제 반도는 과거의 고구려 대 신라·백제가 아니라 신라 대 고구려·백제의 관계로 이루어지고, 이러한 외교 관계에는 대륙과 일본이 가담하여 동아시아의 형세를 수(隋) 혹은 당→신라의 동서세력과 돌궐(突厥)→고구려→백제→일본의 남북세력으로 양분시키게 되었다.이 시기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문화적 사실은 불교와 유교의 도입이다. 불교는 고대국가의 사상통일에 기여하였다는 것과 또 대규모 정복전에 있어서 호국(護國)적 용맹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또 유교는 고대국가의 집권적인 왕권에 효율적인 제도의 운용(運用)과 그 이념적 바탕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있어서 생산력의 증대를 의미하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불교·유교와 함께 고대국가체제의 정비에 큰 몫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