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1~3세기경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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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경의 한국〔槪說〕[편집]

한의 군현(郡縣)이 쇠퇴함에 따라 토착사회의 여러 부족국가는 통합의 추세를 보였다. 이런 형세 속에서 고대 국가로 등장하게 된 것이 이른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었다. 그 당시 삼국은 각기 대륙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문화를 수용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체제를 갖추는 한편,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철기문화를 재편성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삼국은 고대국가적 체제를 갖춤에 있어서 동일한 세기계층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약 2세기, 고구려와 신라와는 약 3세기, 신라와 백제와의 사이에는 약 1세기 정도의 연차(年差)가 있었다. 이러한 연차는 곧 삼국이 부족국가로 남아 있던 세년(歲年)의 길고 짧음을 비교케 하는 동시에 삼국사회 발전의 지속상(持續相)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부여 계열의 일파로 고(故) 현도에서 일어난 고구려는 원래 주위에 많은 강적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과의 싸움 속에서 초기 부족연맹을 형성하여 갔다. 6대 태조왕 때에는 부족연맹 세력의 영도권이 확립되어 고대국가 성립을 위한 일련의 노력을 기울였다.고구려의 대외관계는 중국과 새외(塞外)의 관계가 병행하고 있어서 문화상으로나 정치·경제상으로 중국 일변도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이리하여 삼국 중 고구려는 대(對)한족 투쟁 세력으로서 먼저 대두하여 북방에서 충분히 자립성을 가지면서 고대국가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전반적인 면에서 볼 때 고구려사의 전개가 적극적이었던 원인은 그 사회기반의 급속한 발전이라든가, 그 지리적 위치에서 오는 이점(利點)이라든가 또는 전사(戰士)조직체적인 기동성이 강한 사회제도라든지 기타를 들 수 있다. 이와 비등할 만한 하나의 요인으로서 고구려는 다른 토착사회가 오랫동안 중국의 식민지인 군현과 교통함에 그치는 데 반하여 고구려는 그렇지 않아서 동천왕 때는 오(吳)와 통교하기도 했으며, 또 새외민족과도 외교관계가 있어서 국제 관계상의 자기 위치를 일찍부터 자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고구려는 그 성장 과정에 있어서 공손씨(公孫氏)의 침입, 관구검(母丘儉)의 침입, 전연(前燕) 모용씨(慕容氏)의 침입 등 많은 압력을 받았지만, 그러한 침입에 대한 항쟁 과정이 곧 고구려 고대국가의 설립 과정이었다.백제가 어떠한 경로를 거쳐 부족연맹국가로 발전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본래 한강 이남 지역에는 목지국(目支國)이 있어 이 지역의 영도권을 장악, 북의 고구려 지역에 있었던 예군(濊君)·남여(南閭)에 비등할 만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한4군의 성립, 고조선 사회의 해체 등으로 잡다한 유이민(流移民) 집단들이 남하하고 있어, 이 유이민과 토착족 및 새로 생긴 부족국가들이 각처에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한강 이남 지역은 지배력이 집중되지 못하였다. 여기서 낙랑·대방의 토착 사회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조종책이 있어 이 지역에 있어서의 통일세력의 형성은 다음 단계에까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백제는 이러한 유이민 집단의 하나로서 한강 북쪽 지역인 지금의 서울 부근의 위례(慰禮) 부락에 도읍을 정하고 부족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백제가 새로운 부족국가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것은 고이왕(古爾王) 때였던 것 같다.백제왕실은 고구려의 한 지파(支派)로서 그 시조 전설의 한 갈래를 전승(傳承)하였으나, 한강 유역에 족제(族制) 조직의 기반이 없던 백제는 세력이 고구려만큼 강력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사회가 지배 기구를 성립시킬 때, 족제관념보다는 낙랑·대방이 그 주위의 토착사회에 준 영향력이 보다 앞선 것이었고, 또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는 그 영역을 편제(編制)함에 있어서 고구려를 본받은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즉 5방(五方)의 이름에 있어서 부족명이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8대성(八大姓)이 백제왕실과 관련이 적은 세력이라든가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그 관제에 있어서도 고구려적인 성격보다 정비된 중국의 관제를 모방하여 6전(六典) 조직의 모습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후진이었던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각축장(角逐場)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가 이미 그 절정을 맞이하려던 때였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지견(知見)에 의하면, 한국에서 청동기류(類)가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은 대동강 유역과 경주 지역이다.그 적확(的確)한 원인은 어떻든간에 경주 지역의 청동기 소유자가 반드시 대동강 유역의 것과 같은 시대에 같은 정도로 발달한 사회 기반 위에서 사용한 것은 아닐 것이고, 더욱이 그것이 경주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는 증거가 되지 않음은 신라사의 이후 전개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신라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박(朴)·석(昔)·김(金) 제(諸) 시조설화와 그 계보로 보아, 대략 3세기의 전반기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신라의 시조설화들은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복잡하게 3성 시조로 나타나 있고, 그것이 후세까지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아 신라사회는 다원적이었으며, 또 그러한 것 자체가 신라사회의 후진성을 말하는 것이다.이들 3성 부족이 경주 일대에 자리잡고 조직한 초기 부족 연맹에 있어서는 박·석 양(兩) 부족이 토착적인 김부족(金部族)보다 우세하였으므로 부족연맹장은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을 제외하고는 주로 박·석 양 부족에서 교대로 선출되다가 내물마립간을 전후하여 김씨 세습권이 확립된 것 같다.신라의 6촌(六村)과 박·석·김 3부족과의 관계는 초기의 신라 부족연맹이 박·석·김 3부족이 주체로 되어 있다가 다른 6부족과의 연맹관계로 성장하고, 그 뒤 3부족이 신라의 주체세력으로서 대연맹으로 확대되고, 고대국가가 형성됨에 이르러서 주체부족들이 경주에서 귀족조직을 편성한 것이 6촌 설화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