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3국(고구려·백제·신라)의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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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기원[편집]

三國-起源

기원전 108년 왕검성(王儉城)을 함락한 후, 한나라는 고조선 지역에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 한군현의 지배하에서, 고조선사회의 기존 상급 통합조직은 해체되었다. 중국계 주민들은 군현 내의 주요 지점에 설치된 토성에 주로 거주하면서 지배족속으로 군림하였고, 고조선인들은 촌락 단위로 군현조직에 예속되었다.또한 8조의 법금이 갑자기 60여 조로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고조선사회의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문화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경제적으로도 군현의 공적인 수취 외에 한인(韓人)들에 의한 수탈적인 상거래가 성행하였다.이러한 결과를 강요한 한군현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곧이어 일어났고, 그 결과 2개 군이 폐지되고 1개 군이 축소되는 변동이 잇따랐다.그러나 고조선사회의 중심부였던 한반도 서북지방에 설치된 낙랑군은 점차 지배영역이 축소되긴 했지만 기원후 4세기초까지 유지되었다. 3세기초에는 낙랑군의 남부지역에 대방군이 설치되었다.낙랑군의 치소(治所)인 조선현(朝鮮縣), 즉 평양지역은 비단 한반도 서북부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지역의 주민과 중국 사이의 무역 중계지로서 번영하였다. 이 지역에는 상당수의 중국계 주민이 이주해 와 정착하였다.이들이 남긴 무덤들에선 중국에서 반입된 고급품과 낙랑 현지에서 생산한 물품들이 출토되어 당시 번성한 낙랑군의 면모를 보여준다.그러나 이런 높은 수준의 문물은 토성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중국계 주민들과 낙랑군의 지배조직의 말단에 편입된 일부 고조선계의 수장층에 한정되어 보급되었으며, 다수의 고조선인들의 생활과는 유리된 것이었다. 나아가 이런 중국 군현과 그 세력의 원천인 중국 왕조는 군현의 외곽지역에 거주하던 예·맥·한족 사회의 정치적인 성장을 압박하는 외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한편 중국 군현을 통해 유입되는 선진문물은 토착사회의 변화를 자극하였다.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중국 군현의 세력에 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선진문물을 수용하면서, 예·맥·한족 사회에서 여러 국가들이 차례로 등장하였다. 이 국가들이 오랜 기간에 걸친 상호통합의 과정을 거쳐, 고구려(高句麗)·백제·신라 등 세 나라로 정립하게 되었다.

3국(고구려·백제·신라)의 정립[편집]

三國-鼎立

한족과의 투쟁 과정 속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한 고구려는, 유리왕(琉璃王) 때는 왕망(王莽) 정권과 충돌할 정도로 그 세력이 성장하였다. 이어 태조왕(太祖王) 때부터는 강력한 대외 발전을 꾀하여 옥저를 복속시키고 요동과 현도 두 군을 자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또한 동방의 왕자로 군림한 공손씨(公孫氏)를 정복하고, 이어 위(魏)와 충돌하는 등 정복 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며 집권 체제를 가다듬었다.고국천왕(故國川王) 때는 요동 태수의 침입을 격파하는 한편, 현상(賢相) 을파소(乙巴素)가 등용되어 선정(善政)을 하여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고국천왕이 죽자 왕위 쟁탈을 둘러싼 발기(發岐)의 난이 일어났다.산상왕(山上王)에 이어 동천왕(東川王)이 즉위하면서부터는 대륙과의 관계를 다양하게 전개, 중국의 여러 세력을 일면 화친, 일면 공격하고 신라를 침범하였다.이러한 정복전쟁 결과 고구려는 막대한 토지와 인간을 점유하였고, 왕실을 고정하고 부자상속을 확립하였으며, 또 5부를 개편하는 등 국가체제의 정비를 꾀하여 4세기에는 고대 정복 국가로서 발전하였다.백제는 마한 50여 부족 중 백제국(百濟國)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갔으리라 생각된다. 원래 고구려에서 망명한 유이민 집단이 처음에 정착한 곳은 미추홀(彌鄒忽:仁川)과 위례(慰禮)였으며, 그 후 위례에서 다시 합쳤다. 고조선 멸망 후부터 파상적으로 남하해 온 잡다한 이들 집단은 목지국 지배권 내의 여러 세력을 점차 해체해 갔다. 그리하여 다루왕(多婁王)·초고왕(肖古王)을 거치는 동안 토착 사회의 세력을 결합하면서 점차 마한의 여러 부족사회를 복속시켰다.낙랑·대방의 침략을 받은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 국가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보다 큰 연맹체가 요구되자 백제(百濟)를 맹주로 공고히 단결함으로써 백제(百濟)라는 고대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고, 이 과업을 수행한 것이 대체로 고이왕(古爾王) 때의 일로 생각된다.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한 사로부족(斯盧部族) 세력은 대륙의 금속문화와 접촉할 기회가 적어서 고구려·백제보다 사회 발전이 늦었다. 그러나 점차로 동부 해안에서 정착해 온 석씨족(昔氏族)과 연합하여 부족 연맹체를 이루어 갔다. 그리하여 탈해왕(脫解王) 때는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6촌(六村)을 개편하여 6부(六部)의 행정 구역으로 하였다. 이 시대에는 부족장의 칭호도 군장(君長)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거서간’에서 무(巫)를 의미하는 ‘차차웅(次次雄)’으로, 그리고 다시 부족장 권한의 ‘계승자’라는 의미의 ‘이사금(尼師今)’으로 변했다. 그 후 미추왕(味鄒王)이 즉위하면서부터는 김씨(金氏)가 왕위를 차지하였다.한편 금속문화의 전파가 늦었던 변한의 여러 부족 중에서도 3세기 이후에는 가야(加耶)라는 부족연맹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국내성[편집]

國內城

고구려 초기의 도읍. 지금의 만주 지안(輯安)과 그 부근의 산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제2대 유리왕 때 이곳으로 옮긴 뒤, 제20대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옮길 때까지, 고구려는 이곳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히고 문화를 발달시켰다.

유리왕[편집]

琉璃王

고구려 제2대 왕. 재위 기원전 19

후 18. 휘는 유리(類利)·유류(儒留). 주몽의 맏아들로, 부여에서 고구려로 와 태자에 책립되고 이어 즉위했다. 『황조가(黃鳥歌)』를 지었다 하며, 기원전 9년에는 선비를 공격하였다. 기원후 3년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12년에 흉노를 정복하려는 왕망(王莽)의 고구려군 동원에 응하지 않고 이와 충돌하였다. 부여의 침공을 크게 격퇴하고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켰으며 한(漢)의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태조왕[편집]

太祖王

고구려 제6대 왕. 재위 53

93년. 일명 국조왕(國祖王). 고추가 재사(再思)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에 이어 일곱 살에 즉위하였다. 재위 중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부전고원(赴戰高原)을 남하하여 동해안의 옥저·동예를 복속시켰다. 남으로는 살수(薩水, 淸川江)에 미쳤고, 북으로는 부여를, 서북으로는 현도군을 축출하였으며, 121년에는 요동지방을 공격하였다. 정복 사업을 추진하여 고대 정복 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는 한편, 종래의 부족국가적 형태에서 중앙집권적 기운을 일으켰다.

고국천왕[편집]

故國川王

고구려 제9대 왕. 재위 179

197년.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하며 신대왕(新大王)에 이어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84년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의 침입을 좌원(坐原)에서 격파하였으며, 191년 을파소(乙巴素)를 국상(國相)으로 등용하여 현정(賢政)을 실시하였다. 194년에는 진대법(賑貸法)을 행하여 백성들의 곤궁을 덜었다.

을파소[편집]

乙巴素

고구려의 재상.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로서, 191년에 안류(晏留)의 천거로 중외대부(中畏大夫)의 직과 우태(于台)의 직위를 받았으나 국사를 다스리기에 부족한 자리라고 하여 사양하였다. 왕이 이에 국상(國相)으로 임명하자 수락하였다. 구신(舊臣)들의 반대를 받았으나 왕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지성을 다하여 왕을 섬기고 정치를 잘해서 태평성대를 가져왔다.

발기의 난[편집]

發岐-亂

197년 고국천왕이 죽자 동생인 발기가 일으킨 왕위 쟁탈전. 고구려 제8대 신대왕의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동생인 발기는 고국천왕이 죽은 후에 동생 연우(延優:山上王이 됨)와 왕위쟁탈(王位爭奪)의 분전(粉戰)을 일으켰으니 이를 발기의 난이라고 한다. 발기는 그 후 이 난에 실패하자 처자를 데리고 요동의 공손탁(公孫度)에게 가서 군사를 얻어 본국을 치다가 패하여 자살했다.

동천왕[편집]

東川王

고구려 제11대 왕. 재위 227

248년. 일명 동양왕(東襄王)이다. 산상왕(山上王)의 아들로 227년에 즉위하였다. 위(魏)와 친선을 도모하고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화친책을 거절, 242년에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고, 신라의 북변을 침범하였다. 246년 위(魏)의 관구검(?丘儉)이 환도성(丸都城)을 공격하매 일시 남옥저(南沃沮)로 피난, 곧 국토를 회복하고 247년 동황성(東黃城)으로 서울을 옮겨 신라와 화친하였다.

관구검[편집]

?丘儉

중국 위(魏)의 무장. 242년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자 244년 유주자사(幽州刺史)이던 관구검은 고구려 정벌군의 장군이 되어 침입, 비류수(沸流水)에서 동천왕의 방어군을 공격하고 국내성을 함락시켰다. 만주 봉천성 즙안현 판석령(奉天省:安縣板石嶺)에 관구검 기공비(紀功碑)가 세워졌다.

다루왕[편집]

多婁王

백제 제2대 왕. 재위 28

77년. 온조왕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38년에 흉년으로 백성의 살림이 곤란하자 전국적으로 양주(釀酒)를 금지시키고 지방을 친히 순시하며 빈민을 구호했다. 수차 말갈(靺鞨)과 싸워 이를 격퇴하고 56년에는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동북지방의 방비를 정비했다. 신라와 자주 충돌하고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 점령하였다. 한편 내치(內治)에도 힘을 기울였다.

초고왕[편집]

肖古王

백제 제5대 왕. 재위 166

214년. 일명 소고왕(素古王)·속고왕(速古王). 167년에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 그 후 모산성(母山城)·요거성(腰車城) 등을 차례로 침공하여 신라와 적대시하게 되었다.

고이왕[편집]

古爾王

백제 제8대 왕. 재위 234

286년. 구이왕(久爾王)·고모왕(古慕王)이라고도 함.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 사회를 보다 큰 연맹체로 결속하는 데 있어 중심 역할을 담당하여 백제를 고대 왕국으로 성장케 하였다. 국가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노력하여 260년에는 6좌평(六佐平)을 두어 각기 직무를 분장케 하고, 또한 16품의 관등을 설정하여 품에 따라 복색(服色)을 정하였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徵出)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려 기강을 바로잡았고,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탈해왕[편집]

脫解王 (?

80)

신라 제4대 왕. 재위 57

80년. 성은 석(昔). 설화에 의하면 여인국(女人國)의 왕녀(王女)가 낳은 알이 궤짝에 실려 표류하던 중 기원전 19년 아진포(阿珍浦, 迎日)에서 한 노인에게 발견되었다. 이 알에서 탈해왕이 나왔다고 한다. 그 후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대보(大輔)에 올라 정사(政事)를 담당했다. 기원후 57년 유리왕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남해왕의 뒤를 이었으며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 계림을 국호로 했다. 67년 주에 주주(州主), 군에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두었고, 가야와 싸워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육부[편집]

六部

신라의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씨족집단인 6촌(六村)을 유리왕 9년(32)에 개칭하여 6부로 하였다고 한다. 즉 ① 알천 양산촌을 양부(梁部, 及梁部), ② 돌산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 ③ 취산 진지촌을 본피부(本彼部), ④ 무산대수촌을 점량부(漸梁部, 牟梁部), ⑤ 금산 가리촌을 한지부(韓祗部=韓岐部), ⑥ 명활산 고야촌을 습비부(習比部)라 하고, 이 6부에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의 6성(六姓)을 주었다고 한다. 6촌이 곧 6부로 변천된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대체로 부족사회의 6촌이 점차적으로 분화되어 단계적으로 행정 구역의 명칭으로 변화된 것 같다.

이사금[편집]

尼師今

신라 초기 임금의 칭호. 이질금(尼叱今)·치질금(齒叱今)·이질금(爾叱今)이라고도 쓴다. 제3대 유리왕(儒理王) 때부터 제18대 실성왕(實聖王)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김대문(金大問)의 설(說)을 빌려, 신라 초기에 박(朴)·석(昔)·김(金)씨들이 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에는 연장자(年長者)로서 한 까닭에 왕이 이사금이라 하였다 한다. 그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아 연장자·사왕(嗣王)·계군(繼君)의 뜻, 또는 임금의 어원 등이라는 주장이 있다.

계림[편집]

鷄林

신라의 옛이름. 원래는 시림(始林)으로서 현 경주의 계림을 일컬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탈해왕 9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 慶州)의 서쪽 시림 가운데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게 한즉, 나뭇가지에 작은 상자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瓠公)이 이상히 여겨 임금께 가져갔고, 임금이 그 상자를 여니 그 속에는 용모가 아름다운 아이가 있었다. 이에 그 아이를 길렀는데,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가 많아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짓고 금 궤짝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金氏)란 성을 주었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했다 한다. 『삼국유사』에는 다른 해석이 있다.

미추왕[편집]

味鄒王

신라 제13대 왕. 재위 262

283. 원명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일명 미조(味照)·미소(未召)라고도 함. 성은 김(金). 김씨왕의 시조로 첨해왕(沾解王)이 죽은 후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여러 차례 백제의 침입을 물리쳤고, 농업을 장려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가야[편집]

加耶, 伽倻

부족 국가 때에 낙동강 하류에 일어난 나라들. 일명 가라(加羅, 伽羅, 迦羅)·가락(駕洛, 加洛)·육가야(六伽耶). 낙동강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부락국가를 이룬 마을이 차츰 확대되어 작은 부족국가가 되어 6가야를 형성하였다. 6가야는 금관가야(金官伽耶:오늘의 金海), 아라가야(阿羅伽耶:오늘의 咸安), 고령가야(高寧伽耶:일명 任那), 대가야(大伽倻:오늘의 高靈), 성산가야(星山伽耶:오늘의 星州), 소가야(小伽倻:오늘의 固城)를 가리킨다. 6가야 중에서 금관가야의 세력이 제일 강대하여 다른 5가야는 이 금관가야를 맹주(盟主)로 삼았다. 금관가야는 수로(首露) 또는 수릉(首陵)이라는 사람이 세운 나라로 491년 동안 존속되었으며,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게 멸망할 때까지 여러 차례의 전란을 겪었다.대가야는 이진아시왕(伊珍阿?王)에서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는 500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562년(신라 진흥황 23)에 신라에 완전히 병합되고 말았다. 이로써 512년(백제 무령왕 12) 하다리(下?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縣)을 백제에 빼앗기면서부터 이웃 나라의 압력을 받기 시작한 가야제국은 금관가야가 멸한망 후, 낙동강 중류 서쪽 고지대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가 멸망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여러 나라들도 신라에 병합되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남부에서 큰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백제와 직접 국경 충돌을 자주 일으켰다.

가야국은 일본과 가까운 관계로 일본인들이 자주 내왕하여 한때는 그들의 세력이 크게 팽창한 적도 있었다. 낙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가야 문화가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에 속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한(漢)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고, 또한 인접 지방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헌에 의하면 임나(任那)가 그 중심이 되었으며, 여기에 임나 일본부(日本府)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의 문헌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의 구야한국(狗耶韓國)도 이곳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고유의 문물(文物)로 가야금도 이 나라에서 비롯되었으며 작곡가 우륵(于勒)도 가락국의 유민이다.한편 가락국의 건국에 대하여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은 건국 신화가 있다. 즉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42년에 9간(干)이 귀지봉(龜旨蜂)에 모였을 때 6개의 알이 든 금합자(金合子)가 붉은 줄에 매달려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것을 아도간(我刀干)의 집에 안치해 두었더니 다음날 6명의 동자(童子)로 변하고, 10여 일 후에는 어른이 되어 처음 나타난 동자를 수로왕(首露王)이라고 불러 금관가야의 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가락국의 왕이 되었다 한다.

가락국기[편집]

駕洛國記

가락국의 역사를 서술한 책. 고려 문종 때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의 저술이라고 하지만 작자는 미상이다. 내용은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전설과 금관가야의 일을 적었으며, 『삼국유사』에도 수록되어 전한다. 사실(史實)의 정확성은 없으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김수로왕[편집]

金首露王

가야(加耶)의 시조. 일명 수릉(首陵). 신라 유리왕 19년(42) 금관국(金官國) 북쪽 귀지봉(龜旨峰)에 하늘로부터 떨어진 6개의 금란(金卵)이 모두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김수로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김해 김씨의 시조라 한다. 수장(首長) 구도간(九刀干)들이 왕으로 추대, 나라를 세워 금관가야(金官加耶)라 하였으며, 뒤에 허황옥(許黃玉)을 맞아 비로 삼았다. 199년까지 무려 158세나 살았다는 전설적 인물이다.

삼국의 정치구조[편집]

三國-政治構造

부체제의 구조

삼국은 이렇듯 고조선사회의 외곽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성립하였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는 상당기간 상호 깊은 교섭이 없이 발전해 나갔다. 그에 따라 삼국의 정치조직에는 각각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이함이 상당히 존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삼국초기의 정치조직에서는 당대의 역사적 조건으로 인한 일정한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부체제(部體制)가 그것이다.고구려의 5부, 신라의 6부, 백제의 부여·고구려계 이주민집단으로 구성된 부 등은 원래 부족이나 소국의 성격을 지닌 단위정치체였다. 이들은 삼국 성립기에 연맹체를 형성하여 삼국 건국의 주체가 되었다. 삼국이 팽창해나감에 따라 여타 피정복지역의 지배층 일부가 이들 부의 주민으로 편입되었다.삼국초기 각부는 중앙정부에 의해 대외적인 외교·군사·무역권 등은 박탈되었으나, 부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3세기 전반까지도 고구려에서는 소노부가 자체의 종묘와 사직, 즉 조상신과 토지신 및 지역 수호신 등에 제사를 지내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은 이 같은 점을 말해준다. 또한 부 내부에도 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일정하게 자치권을 행사하는, ‘부내부(部內部)’라고 부를 수 있는 작은 하위집단이 존재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연나부(椽那部) 내에 그러한 집단이 네 개 존재하였고, 신라의 한지부(韓岐部) 내에서도 그러한 집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각부의 주민은 귀족에서 빈민에 이르기까지 계급적으로 분화되어 있었으나, 삼국의 국가구조 내에서 볼 때 여타 피복속지역의 주민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점하였다. 신라에서는 이러한 점이 상대적으로 늦게까지 남아 있어서, 삼국후기까지도 관등제의 운영에서 원칙적으로 6부의 민(民)에게는 경위(京位)가 주어졌고, 지방민에게는 외위(外位)만 주어졌다. 중앙관직과 지방관의 자리는 경위를 지닌 자만이 임명되었다.한편 삼국초기에 흡수된 피정복지역의 주민들은 병합될 당시의 소국 또는 읍락 단위로 각각 중앙정부에 복속되었다. 이들은 자치를 행하며 중앙정부에 공납을 하고 군사적으로 협력하였다. 각각의 읍과 촌락이 삼국의 통치구조 내에서 차지하던 위치가 그에 예속된 정도는 다양한 양상을 띠었는데, 피복속될 당시의 상황과 세력 정도에 따라 일부는 5부나 6부의 동맹세력으로, 다른 일부는 집단예민으로 편제되었다. 피정복민을 집단별로 예속시킨 것은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촌락 내부에까지 미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까지 촌락의 공동체적인 유제가 잔존하여 사회의 기층에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렇듯 삼국초기 통치구조의 기본적인 틀은 자치적인 여러 집단들을 누층적(累層的)으로 통합하여 지배·예속관계화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6부가 중앙집단이 되고 피복속된 지역의 읍과 촌락들이 그에 예속되어 있으며, 각부는 다시 중앙 왕실에 복속된 형태였다.당시 각부의 귀족들은 자신의 관원을 두었으며 상당한 자치력을 지닌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왕은 초월적인 권력자라기보다는, 그러한 귀족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유력한 존재였다. 그런만큼 왕국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각부에 대한 통합력과 국가의 동원력을 최대화하는 데는, 각부의 귀족들로 구성된 회의체가 중요한 권능을 지녔다. 때로는 이 귀족회의에서 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일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귀족회의는 그 뒤 왕권의 강대화에 따라 그 권능이 약화되었으나, 삼국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중앙집권적 영역국가 체제로의 진전[편집]

삼국초기의 정치구조는 삼국이 성장해감에 따라 변모하였다. 삼국초기의 대내적인 정치정세는

부의 자치력과 왕실의 통제력, 중앙정부의 집권력과 피복속된 각 지역집단의 자치력 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그것은 점차 왕권과 중앙집권력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이는 철제 농기구의 광범위한 보급과 그 효율성의 개선, 수리시설의 확충, 우경의 보급 등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와 정복전쟁에 의한 사회분화의 진전으로, 각 집단의 자치력을 뒷받침하던 공동체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지역간 발전의 불균등성이 완화되는 등의 사회적 변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삼국은 기존의 집단별 상하관계를 일원적인 지배질서로 전환해나가기 위해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직체계를 확충해갔다.삼국초기 각부는 자체의 관원이 있었다. 이들은 같은 위계의 왕실 관원보다 하위에 놓여졌다. 그래서 각부가 분립하는 가운데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통합적인 상하 질서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각부의 자치력이 소멸되어 감에 따라 각부의 관원들은 왕권하의 일원적인 관등체계에 흡수되었다. 각부의 귀족들도 이 관등제에 의해 편제되었다. 그 완성된 체계가 고구려의 14등 관등제, 백제의 16등 관등제, 신라의 17등 관등제였다.나아가 관료조직이 확충되고 관직체계가 분화되어갔다. 그 중 백제는 6좌평제(六佐平制)와 22관부(二十二官部)가 있어 세련된 면모를 보였으며, 신라에서는 6세기 초 이후 병부(兵部)를 위시한 각종 관서가 만들어졌다. 이 관등제와 관직체계의 운영은 신분제에 의해 일정한 규제를 받았다. 출신 신분에 의해 일정한 관등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고, 동일한 관직일지라도 신분에 따라 취임할 수 있는 관등에 차이가 있었다. 신라의 골품제(骨品制)는 그 두드러진 예로서, 진골(眞骨)귀족이 주요 관서의 장을 독점하여 배타적인 우월성을 과시하였다.또한 삼국은 피정복지역의 주요 거점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크고 작은 성(城)을 단위로 지방관을 파견해 중앙집권화를 도모해나갔다. 몇 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된 행정촌이 기본적인 말단 행정단위가 되었으며, 다시 수개의 행정촌의 묶인 상위 행정단위가 설치되었다.이러한 지방행정제도의 정비는 곧 그 지역의 주민과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중앙정부가 장앙해감을 의미한다. 중앙정부는 지배영역 내의 주민들에게 조세를 부과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기존의 각 읍과 촌락의 장들은 이제 국가권력을 집행하는 존재로서 지방 지배조직의 말단에 예속되었다. 이는 중앙의 부(部)에서 더 빨리 진행되었다. 부는 삼국중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에선 수도의 행정구획단위로 변하였고, 동시에 부에 적(籍)을 둔 귀족의 편제단위로서의 기능도 갖게 되었다. 신라의 경우도 6세기가 지나면서 이와같이 바뀌어갔다.한편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 체제가 되에 따라, 강화된 국가권력을 매개로 지역간의 연계성이 깊어졌고,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각국의 영역 내에 포함된 여러 종족집단간의 상호융합이 진전되었다.예컨대 토기의 경우를 보면, 삼국초기에는 영토 내의 여러 지역에서 각기 개성적인 면을 지닌 토기가 생산되었는데, 삼국후기에 접어들면서 각국 영역 내의 토기는 질과 양식에서 일정하게 균질화되어가는 면을 보였다.특히 신라 토기의 경우 이러한 면이 현저하였다. 이는 수공업에 종사하던 장인(匠人) 및 그 생산품의 수급(需給)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무덤 양식에서도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일반화되어갔다.또한 불교의 수용에 따라, 각 집단이 지니고 있던 고유한 신앙과 의식(儀式)이 보편성을 지닌 종교의 호수(湖水)로 귀합되어갔다. 나아가 삼국간의 교류와 주민 이주, 전쟁과 영역 변동 등에 의해 삼국 주민의 존재 양태도 동질화되어갔다. 삼국후기에는 삼국 주민의 풍속·의복·문물이 같았음을 당시 중국인들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