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신라의 삼국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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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槪說〕[편집]

고구려가 수·당과 혈투를 전개하는 동안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다. 특히 의자왕(義慈王)은 신라의 대백제전선(對百濟戰線)의 요지 대야성(大耶城, 陝川)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신라는 방어의 일선을 낙동강까지 후퇴시켰으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는 모험 외교를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출병의 대가로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자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어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를 협공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리하여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백제를 치게 하였다.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등으로 하여금 백제를 진공케 하니, 당군은 백강(白江) 좌안(左岸)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 大田의 동쪽)을 넘어서게 되었다.당시 의자왕은 거듭되는 승전에 교만해져 향락에 젖어 있었고, 조정은 간신들이 사리(私利)를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성충(成忠)·흥수(興水) 등 충신은 축출되었다. 백성은 거듭되는 전쟁에 지쳐 정부로부터 이반(離叛)되어 있었으며, 국가의 존망은 위기에 처했다. 황산벌 싸움에서 계백(階伯)이 5천의 결사대로 국운을 지탱하려 하였으나 결국 의자왕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여 항복하고 백제는 멸망하였다.백제 멸망 후 각지에서 백제 유신(遺臣)의 부흥운동(復興運動)이 크게 일어났다. 왕족 복신(福信)과 중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韓山)에 웅거하고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은 임존성(任存城:大興)에 웅거하여 군사를 일으켜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왕자 풍(豊)을 맞아다가 왕을 삼고 사비성·웅진성 등을 포위·공격하여 당병(唐兵)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나·당 연합군의 재침과 부흥군 내부 분열로 주류성이 함락되고, 부흥군은 계속 패하여 4년에 걸친 부흥운동도 종말을 고하였다.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당과 연합하여 공격의 화살을 고구려로 돌렸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항전으로 일시 지탱할 수 있었으나 거듭되는 전쟁에 의한 전력 소모와 연개소문의 독재 정치에 의해 민심이 이반되어 있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동생 및 아들들 간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세가 쇠약해졌다. 이를 기화로 당은 고구려를 정벌하고 신라군도 이에 호응하여 출동하니 고구려는 1년 간 항쟁을 계속하다가 보장왕 27년(668)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그 후 검모잠(劒牟岑) 등이 왕족 안승(安勝)을 받들어 보덕국(普德國)을 세우고, 약 4년 동안 부흥운동을 계속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백제의 옛땅에 5도독부(五都督部)를 두고, 한편 신라에는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를 두어 문무왕(文武王)을 계림주대도독에 임명하였다. 그 뒤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그 옛땅에 9도독부(九都督府)를 둠과 동시에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반도 전체를 총괄케 했다.이러한 당의 야욕을 신라로서는 감수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고구려 검모잠의 부흥군을 원조하여 당의 축출을 꾀하고, 또 백제 옛땅에 군대를 출동시켜 당군을 각처에서 격파하였다. 문무왕 11년(671) 신라는 결국 사비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 옛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에 당은 김인문(金仁問)을 신라 왕에 임명하고 신라 정벌을 하였으나 신라는 이를 축출하는 데 성공,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비록 불완전한 통일이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닌 의의는 자못 크다.

임신서기석[편집]

壬申誓記石

1934년 경북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의 언덕에서 발견된 자연석.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길이 34cm, 두께 약 2cm, 폭 12.5cm로 5행 74자를 새겼다. 신라의 두 화랑도(花郞徒)가 3년 안에 시·상서·예 등의 전(傳)을 습득할 것을 맹세한 문구를 새긴 것이다. 일종의 금석문서(金石文書)라 할 수 있는데, 대개 임신년은 522년(진흥왕 13)이나 612년(진평왕 34)으로 추정하며, 신미년은 이보다 1년 전에 해당한다. 글의 내용은 간단하나 고대문화사 특히 학술사상사, 서식(書式)·민속연구 등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의자왕[편집]

義慈王

백제 31대 왕. 재위 641

660. 의자(義慈)는 휘, 무왕(武王)의 맏아들. 태자 때부터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 642년 친히 신라의 미후 등 40여 성을 빼앗고 다시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어 대야성(大耶城)을 함락,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643년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棠項城)을 얻었고,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고자 신라에서 원군을 징발하자 이 기회를 노려 649년 신라의 7성을 습격하다가 김유신(金庾信)에게 역습을 당하였다. 즉위 후에 국위를 만회하려던 그의 노력은 만년에 이르러 사치와 방종에 흘러 좌평(佐平) 성충(成忠)의 간(諫)을 듣지 않고 투옥시키자 국정이 문란해 갔다. 이때 신라는 당나라와 밀계하여 반도 통일의 결심을 굳히고 660년 나당(羅唐) 연합군으로 협공을 하였다. 왕은 중신(重臣)을 모아 대책을 세우려 하였으나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당군은 백강(白江)을 건너오고 계백(階伯)의 황산벌 방어도 실패로 돌아가 사비성(泗泌城)은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왕은 웅진성(雄津城)으로 태자와 도망갔다가 항복, 둘째 아들 태(泰)가 사비성에 자리하여 고수하다가 그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왕과 태자 등 1만 이천여 명이 소정방에게 끌려 당나라로 압송되어 왕은 당나라에서 병사했으며 그 후 3년 간이나 백제의 산발적인 저항이 계속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망했다.

보덕국[편집]

報德國

고구려 멸망 뒤, 674년(문무왕 14)에 안승(安勝)이 세운 나라. 안승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외손(外孫)이라고도 한다. 안승이 황해도 재령 지방에서 고구려를 다시 세우기 위해 당나라와 싸우면서 신라의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신라는 그를 금마저(金馬渚:전라북도 익산)에 머무르게 하고 보덕국 왕에 봉하였다. 이는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구슬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 내기 위해 편 정책의 하나이다. 보덕국은 683년(신문왕 3)에 폐지되었다.

태종 무열왕[편집]

太宗武烈王

신라 제29대 왕(재위 654

661). 휘는 춘추(春秋), 용춘(龍春)의 아들. 선덕여왕 11년(642)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城主) 품석(品釋)이 죽자, 고구려와 연합하여 백제에 보복하고자 고구려에 갔으나 오히려 유폐되었다가 돌아왔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비상하여 수차 당(唐)에 내왕하면서 외교적 성공을 거두고 군사 원조의 약속을 받아 삼국통일의 기초 작업을 진행시켰다. 654년 진덕여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군신(君臣)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그는 신라 최초의 진골(眞骨) 출신의 왕으로, 즉위 후 율령(律令)을 상정(詳定)케 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동왕 7년(660) 나당(羅唐) 연합군의 결성에 성공하여 왕자 법민(法敏, 文武王)과 김유신(金庾信)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백제를 멸*망시켰고, 이듬해 백제 부흥군을 격파했으며, 계속 고구려 정벌을 진행하던 중에 죽었다.

김유신[편집]

金庾信 (595

673)

삼국 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명장(名將)·정치가. 가야국(伽倻國) 임금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 손, 신라의 명장 서현(舒玄)의 아들. 어머니는 만명(萬明:신라 갈문왕 입종의 손녀), 그의 증조부는 금관국(金官國) 마지막 왕인 구형(仇衡)이며 할아버지 무력(武力) 때부터 신라에서 군인으로 벼슬하였다. 15세 때 화랑이 되어 낭도들과 더불어 몸과 마음을 닦은 후, 낭벽성 싸움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군사를 격파했다. 그 후 백제 및 고구려와 여러 차례 싸워 공을 세운 후, 김춘추(金春秋)를 임금으로 내세우고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할 준비를 하였다. 660년(태종 무열왕 7)에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당나라 13만군과 연합하여, 김유신은 정병 5만을 이끌고 백제와 싸워 이를 멸망시켰다.그러나 백제의 국권을 회복하려는 독립군들의 유격전이 도처에서 벌어졌고, 고구려는 이들과 연합하여서 북한산주(北漢山州)에서 기세를 올렸다. 661년(문무왕 1) 김유신의 총지휘 아래 고구려 공격 작전이 개시되어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668년(문무왕 8)에 나당(羅唐) 연합군을 편성하여 김유신은 총사령으로 서울에 남고, 김인문(金仁問)·김흠순(金欽純) 등을 주장(主將)으로 하여 고구려를 공격, 멸망시켰다. 그러나 백제·고구려의 고토(故土)는 전부 당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신라까지도 당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자, 김유신은 신라의 총력을 발휘하여 당에 대항하였다. 당나라 군사와 여러 차례 싸워서 승리를 거듭하여 백제의 옛터를 전부 탈환하고 대동강(大洞江) 이남의 땅을 도로 찾았으나, 고구려 고토의 대부분은 영영 잃고 말았다. 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작위를 주었고, 죽은 후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 추봉하였다.

성충[편집]

成忠

백제의 충신. 일명 정충(淨忠). 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이를 간(諫)하다가 투옥되었다. 동왕 16년(656) 옥중에서 임종을 당하여 왕에게 상소를 올려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언, 육로는 탄현(炭峴, 沈峴)을 막고 수로(水路)는 기벌포(伎伐浦, 白江口)를 방비하라 하고 죽었다. 왕은 그의 유언을 듣지 않다가 백제의 멸망을 가져왔다.

흥수[편집]

興首

백제의 대신. 성충과 함께 사치와 유흥에 빠져 있는 의자왕을 간(諫)하다가 유배되었다. 동왕 20년(660) 나·당 연합군의 침입을 받자 왕이 유배지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방어책을 문의, 당군이 백강(白江)을 못 건너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충언(忠言)하였으나 왕이 이를 실행하지 못해 백제는 멸망하였다.

황산벌 싸움[편집]

黃山-

의자왕 20년(660) 백제의 계백 장군이 신라군을 맞아 싸워서 패한 전쟁.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 황산(黃山, 忠南 連山)으로 진격할 때 백제에서는 장군 계백이 5천의 결사대로 황산의 몹시 험준한 곳을 택하여 진영을 가다듬고 신라군을 맞았다. 이 싸움에 있어 당시 신라에서는 화랑 반굴(盤屈)·관창(官昌) 등이 있어 용감하게 싸워 전사하자 이에 사기가 충천한 신라군은 일제히 백제군을 공격하니, 계백의 결사적 방어는 중과부적으로 실패하고, 이 싸움에서 계백은 장렬히 전사했다.

계백[편집]

階伯

백제의 장군. 달솔(達率)로 있다가 의자왕 20년(660) 나·당 연합군이 침입하자 5천 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출전했다. 싸움에 나가기 전에 처자가 적의 노비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죽여서 비장한 각오를 보였다.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5만여 군사와 대결, 신라군의 공격을 4번이나 막았으나 화랑 관창 등의 죽음으로 사기가 충천한 신라군의 총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과 충곡서원(忠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관창[편집]

官昌

645(선덕여왕 14)

660(무열왕 7) 신라 무열왕 때의 화랑. 관장(官狀)이라고도 한다. 신라 좌장군 품일(品日)의 아들. 어려서 화랑이 되었고, 16세에 기사에 능하여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하여 백제를 칠 때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그러나 백제군과 결전하면서 번번이 패하여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지자 관창은 용약 선봉에 나서서 돌격해 백제군에게 생포되었다. 이때 적장 계백은 어린 관창의 용맹함에 감탄하여 돌려 보냈으나 관창이 다시 적진에 돌입, 다시 생포되자 결국 그의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신라군은 소년 관창의 죽음에 크게 자극되어 백제군을 대파하였으며 계백도 이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왕은 관창에게 급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백제 유신의 부흥 운동[편집]

百濟遺臣-復興運動

백제 멸망 후 백제인들이 전개한 국가 부흥 운동.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 韓山)에 웅거하여 군사를 일으키니, 그 기세가 자못 커서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왕자 풍(豊)을 맞아다가 왕을 삼았으며, 사비성·웅진성 등을 포위하여 주둔하는 당군의 식량이 궁핍한 위기에 이르는 일이 몇 차례에 걸쳤다. 이 부흥군과의 전투에서 당군이나 신라군은 패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이 부흥 운동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또 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생겨 와해되었다. 당의 원병을 얻은 연합군이 이 기회를 포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하였으므로, 4년에 걸친 부흥 운동도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복신[편집]

福信

백제 의자왕의 종제(從弟). 좌평으로 있을 때 나·당 연합군의 침입으로 사비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黑齒常之) 등과 임존성에서 항전했으나 의자왕이 당에 항복하자 도침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왕자 풍(豊)을 맞아 옹립하고 부흥군을 조직, 일본에 원병을 청하여 백제 부흥을 꾀했다.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임존성으로 퇴진,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들을 다 죽이고 땅을 신라에 주기로 약속했으니 어차피 죽을 몸, 싸우기나 하자”는 격문을 내걸고 일반의 호응 아래 수차 나·당 연합군을 격파했으나 도침과 뜻이 맞지 않자 그를 죽이고 왕자 풍을 죽이려다 풍에게 먼저 죽임을 당했다.

흑치상지[편집]

黑齒常之

백제 의자왕 때의 장군.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의자왕 때 달솔(達率)이 되고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는데, 의자왕 20년(660) 백제가 멸망하자 부하를 거느리고 소정방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소정방이 의자왕을 포로로 하고 갖은 약탈을 하자 그는 도망하여 패잔병을 수습, 임존성에 들어가 백제의 부흥을 꾀했다. 소정방의 공격을 받았으나 물리치고 200여 성을 수복. 그러나 당 고종(高宗)의 초유(招諭)를 받고 항복하여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유인궤의 주선으로 임존성을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검모잠[편집]

劒牟岑

고구려의 부흥 운동가. 벼슬은 대형(大兄)이었다. 보장왕 27년(668) 고구려가 망하자 유민을 규합, 당의 관리와 중 법안(法安)을 죽인 뒤 사야도(史冶島:德積群島 중의 蘇爺島)에서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삼고 한성(漢城:載寧)을 근거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그 후 신라와 협조하여 당의 세력을 몰아내기에 힘썼다.

안승[편집]

安勝

고구려의 부흥 운동 때 추대된 왕. 문무왕 10년(670) 고구려의 유민을 규합하여 부흥 운동을 일으키던 검모잠에 의해 보덕국(普德國)의 왕으로 추대되어 당에 항쟁, 고구려의 부흥을 꾀했다. 당 세력을 배척하던 신라에 의해 고구려 왕에 봉해지고 동왕 20년(680) 문무왕의 누이를 비로 맞았다. 동왕 23년(683) 신라의 소판(蘇判)이 되어 김씨의 성과 집·토지를 하사받고 신라 귀족이 되었다.

계림대도독부[편집]

鷄林大都督府

당이 신라를 영토화하기 위하여 설치한 통치기관.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은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유민과 힘을 합해 당의 세력을 물리치고 반도를 통일하였다. 도독부 제도는 당이 이웃 나라를 정벌한 후 그 곳에 설치한 통치 제도이다.

웅진도독부[편집]

熊津都督府

의자왕 20년(660) 백제가 멸망한 뒤 당이 그 고지(故地)에 설치한 행정 관청. 5도독부의 하나.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은 지금의 공주 지방에 웅진도독부를 설치, 도독으로 왕문도(王文度)를 임명하여 백제의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후에는 5도독을 없애고 통할케 하다가 665년 백제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당과의 화친 맹약을 하였다. 그러다가 문무왕 17년(677) 이를 물리치고 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문무왕[편집]

文武王

신라 제30대 왕(재위 661

681). 휘는 법민(法敏). 태종무열왕의 장남으로 무열왕 1년(654) 태자에 책봉되었다. 동왕 7년(660)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오자 김유신과 함께 당군과 엽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 무열왕이 죽자 즉위했다. 백제의 잔적을 소탕하고 제복을 당식(唐式)으로 하였으며, 당악(唐樂)을 배우게 했다. 동왕 6년(666)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며, 동왕 8년(668) 당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이 백제·고구려의 옛 땅에 도호부를 두어 통치하려 하자, 당군을 축출하고 반도 통일의 성업을 이룩했다. 동왕 14년(674) 신력(新曆)을 쓰고, 이듬해 동인(銅印)을 제작하여 백관(百官)과 주군(州郡)이 사용하게 하였다. 죽은 후 시체는 화장,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장사하였다.

안동도호부[편집]

安東都護府

당 6도호부의 하나. 문무왕 8년(668), 당은 고구려를 멸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당장(唐將) 설인귀(薛仁貴)로 총독의 임무를 맡게 하고 전영토를 9도독부(都督部) 42주(州) 100현(縣)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렇게 되자 당과 협력하여 백제·고구려를 멸했던 신라는 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두 나라의 옛 땅을 에워싸고 당과 여러 해를 두고 대전하였다. 당은 신라의 세력에 밀려 문무왕 16년(676) 도호부를 요동 고군성(故郡城)에 옮겼고, 이듬해에는 요동 신성(新城)으로 옮겼다가 한때 폐지하기도 했다. 효소왕 8년(699) 안동도독부로 개칭, 뒤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하는 등 변동이 있었으나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계기로 경덕왕 15년(756) 폐지되었다.

김인문[편집]

金仁問 (629

694)

신라 문무왕 때의 장군.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였고, 사어(射御)·음률(音律)·예서(隸書)에 능하였으며, 식견이 넓어서 남의 존경을 받았다. 진덕여왕 5년(651), 당에 가 숙위(宿衛)하고, 무열왕이 즉위하자 압독주총관(押督州摠官)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고 공신이 되었다. 백제가 자주 침공해 오자 당에 파견되어 원군을 청하니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官)으로, 인문을 부총관으로 임명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후 당에서 전과 같이 숙위하며 당의 고구려 정복에 양곡을 보급했고, 문무왕 8년(668) 당과 합세,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가 당의 세력을 축출하려 하자 당 고종은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대치하려 하기도 했다. 그 후 인문은 당으로부터 보국대장군 상주국(輔國大將軍上柱國)에 임명된 후 당에서 죽었다. 효소왕은 그를 태대각간에 추증하였다.

삼국 통일의 의의[편집]

三國統一-意義

신라의 삼국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비록 만주의 넓은 지역을 그 영역에 포함시키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신라의 삼국 통일은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국 민족의 형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라의 통일은 오늘날의 한국 민족을 이룩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므로 신라의 삼국 통일은 민족사적으로 보아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한편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정치적인 독립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은 통일신라의 사회와 문화가 발전하는 기초를 굳게 하였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