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발전/쇄국과 개화 정책/개화정책과 그 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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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정책과 그 반향〔槪說〕[편집]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정부는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파견하여 신문명을 상세히 탐지하도록 하였다.조선 정부는 일본의 현저한 발전상과 세계 정세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종 17년(1880) 다시 김홍집(金弘集) 일행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들은 귀국할 때에 청국의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왔다. 김홍집은 이 책을 고종에게 바쳤고, 고종은 이를 여러 대신에게 검토케 하였던바, 완고한 유생들의 전국적인 반대여론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들은 원래 일본을 양이(洋夷)와 같이 보았고, 다른 한편 장차 집요하게 전개될 일본 세력의 침투와 약탈행위가 근본적으로 조선 경제를 파탄시키리라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통찰에 기인한 강력한 쇄국책의 주장자였다. 그러나 세계 정세를 개화의 방향으로 대처해 가려던 정부는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 행정기관·군사·교육·공업 등의 상황을 상세히 시찰하도록 했다.한편으로 정부는 개화시책에 대응하여 내정 개혁에 착수, 군제를 개편하고 호리모도(掘本禮造)를 초빙해다가 신식 훈련을 가하여 별기군(別技軍)을 조직하였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을 단행하여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두었으며, 그 밑에는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장(分掌)케 했다. 정부의 이러한 일련의 개화운동에 대해 유생들은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리는 등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특히 구군졸(舊軍卒)들의 불만과 반감은 격렬했다. 이리하여 개화와 수구(守舊)의 두 세력은 대원군과 민비의 대립과 뒤섞여 정계의 갈등을 초래했으며, 그 결과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폭발했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되었고, 청·일 양국은 각각 하나부사(花房義質)와 마건충(馬建忠) 및 오장경(吳長慶)을 조선에 출동시켰다. 그 결과 대원군은 군란 책임자로 톈진에 압송되었고, 청은 신속한 군사 행동으로 조선에 종주권을 확대시켜 나갔다. 또한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 체결되었으며, 이후부터 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어 나갔다.

고종의 개화정책[편집]

高宗-開化政策

강경한 통상거부정책을 취해 오던 대원군은 집권 10년 만인 1873년(고종 10년)에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과 왕비인 명성황후(閔妃, 閔致祿의 딸)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민태호(閔台鎬), 민규호(閔奎鎬), 민영목(閔泳穆) 등 황후 일족은 노론 북학을 계승한 인사들로서 개화사상에 입각하여 외국과의 통상을 지지하고 있었다. 고종이 이미 20대의 성인이 되었고, 서원철폐에 대한 최익현(崔益鉉) 등 지방유림의 반발과 황후 및 개화파의 통상론(通商論)에 밀려 대원군이 밀려난 것이다. 이제 국정의 방향은 대원군이 이룩한 내정개혁과 방어정책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왕조의 기틀을 유지하면서 외국의 과학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으로 선회하게 되었다.대외통상론은 이미 18세기 북학론에서 제기되었던 것으로 그 후 19세기 들어와 유신환(兪莘煥), 이규경(李圭景) 등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다시 오경석(吳慶錫)·유대치(劉大致)·이유원(李裕元) 등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박규수는 북학파의 거두인 박지원의 손자로서 조부의 사상을 이어 문호개방을 주장하였고, 김정희 문하의 오경석은 중인신분의 역관으로 청에 왕래하며 외국문물을 소개한 『해국도지(海國圖誌)』 『영환지략(瀛環志略)』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이를 널리 권장하였다. 의업(醫業)에 종사하던 중인 유대치는 오경석과 가까워 그에게 서양문물에 관한 책을 얻어 읽고 통상과 개화를 주장하였다. 고종과 그 측근의 개화정책은 당시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양무운동(洋務運動)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빌려 왕조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자강정책이었고 전면 서양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880년에 중국의 ‘총리아문’과 비슷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혁의 중심기관으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격의 개화논리는 차츰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으로 구체화되고, 대한제국기에는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옛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서양문명)을 참고한다는 논리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북학을 계승한 대외통상론은 그 후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안경수(安?洙), 김홍집(金弘集), 서광범(徐光範), 윤치호(尹致昊) 등 서울 북촌 양반 청년들에 의해 일본의 메이지유신(1868)을 모델로 하는 입헌군주제 혹은 서양식 공화정으로 나아가려는 급진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모든 제도와 문화를 서양식으로 바꾸자는 ‘변법개화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변법개화론은 양육강식을 긍정하는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과 연결되면서 극단적으로 힘을 숭상하는 공리주의로 나아가고, 마침내는 힘이 강한 일본에 의지하려는 매국적 근대지상주의를 낳게 하였다. 따라서 변법개화파는 주관적으로는 애국심에서 출발했지만 결과는 친일매국으로 전락한 인사가 적지 않았다. 이 점은 힘보다 의리를 숭상한 위정척사파가 반일항쟁에 목숨을 던진 것과 대조적이다. 힘을 숭상한 인사는 힘 앞에 굴복하였지만, 도덕을 숭상한 인사는 힘 앞에 저항하였다. 고종과 황후 측근세력은 동도개화파인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좌의정 박규수(朴珪壽)의 의견에 따라 대외통상의 첫걸음으로써 먼저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하려고 시도하였다. 임진왜란 후 조·일국교가 재개되면서 12차례의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어 19세기 초까지 한·일관계는 평온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저자세를 비판하고 일본혼을 강조하는 ‘국학’운동이 나타나다가 19세기 중엽에는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자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나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특히 외교문서(書契)에 황실(皇室)·봉칙(奉勅) 등의 용어를 써서 마치 상국(上國)인 것처럼 자처한 일본의 태도는 지금까지 일본을 대등한 교린국으로 인정해 온 조선정부의 입장을 자극한 것으로서 이것이 외교단절의 큰 이유였다. 정한론의 배경에는 고대일본이 조선을 지배하였다는 잘못된 역사인식이 깔려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차피 서양에 의해 점령당할 조선을 일본이 먼저 점령하는 것이 동양평화를 위해 좋다는 터무니없는 발상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내면적으로는 조선침략정책을 추진하면서도 표면상으로는 이러한 고압적 자세와 정한론을 누그러뜨리고 종전의 관행대로 통상을 요구해 왔다.일본은 1876년에 중무장한 군함 윤요호(雲揚號)를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시켜 조선측의 발포를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내의 반한감정을 고취시키고, 대규모의 군대파견을 준비하면서 수교회담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8척의 군함과 600명의 군대를 부산에 따로 상륙시켜 놓기도 하였다.

일본의 통상요구에 대해 조선정부는 박규수·신헌(申櫶) 등의 의견을 들어 12개조에 달하는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를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혹은 ‘강화도조약’이라고 부른다. 이 조약은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원래 왜관이 있던 부산 이외에 5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처를 지정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880년에 원산, 1883년에 인천을 차례로 개항하여 일본은 종전의 3포보다 한층 서울에 가까운 곳에 통상창구를 얻게 되었다. 일본의 선박에 대해서는 항세(港稅)를 받지 않고, 일본화물에 대해서는 수년 간 면세하기로 하여 당분간 자유무역을 보장하였다. 이에 따라 1878년부터 관세를 부과하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이 조약에서는 일본인 범죄자에 대한 영사재판(치외법권)을 허용하였다.강화도조약은 일본에 다소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조선으로서는 종전의 교린정책을 약간 수정하는 선상에서 타결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무난하게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이 조약은 조선이 일본을 상국으로 대우하는 형식이 아니었다. 정부는 일본군과의 조약을 타결한 후, 자주국의 입장에서 청과 일본, 그리고 서양세력에 대해 세력균형정책을 썼다. 어차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만국공법하의 근대적 국제관계에서는 여러 열강이 서로 견제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세력균형정책에 때로는 고종 정부가 줏대없이 보이기도 하였지만, 사실 그 이상의 대안은 당시에 없었다. 정부는 특히 영국·프랑스보다는 덜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고자 하였다. 이러한 조선측의 의도는 일본의 조선 침투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걱정하던 청과 이해가 일치되어 이홍장(李鴻章)의 주선하에 1882년(고종 19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중체서용’에 입각한 양무운동을 일으켜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고 점차 산업국가로 돌입해 가고 있던 청은 조선에서의 종전의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역시 서울에 파견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1882년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이 청의 속방(屬邦)이라는 것을 명시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차단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었다. 또한 치외법권의 인정과 청상인의 내지통상권(內地通商權)과 연안어업권 등 다른 나라보다도 더 많은 특권을 담고 있었다. 청과의 조약이 계기가 되어 그 뒤 1883년 영국·독일, 1884년 이탈리아·러시아, 1886년에 프랑스·오스트리아 등과 잇따라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특히 조·불 조약에서는 프랑스의 언어와 문자를 배우고 가르칠 수 있도록 허용하였는데, 프랑스는 이를 천주교 포교에 활용하였다. 조선이 열강과 맺은 통상조약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서양과 맺은 조약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덜 불평등한 것이었다. 적어도 조선은 서양에 대하여 최혜국 대우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종의 외교정책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수신사[편집]

修信使

조선 고종 때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 강화도조약 체결 후 처음 김기수(金綺秀)가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 이들 일행은 일본에서 서양의 각종 신문명을 접하여 근대화된 일본의 모습을 보고 돌아왔다. 고종 17년(1880)에는 김홍집(金弘集) 일행이 수신사로 파견되어 일본의 현저한 발전상을 보고 돌아와 세계 정세에 대한 관심을 보다 드높였다. 이들 수신사들은 일본의 제도를 본떠 조선의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여, 청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영선사(領選使) 일파와의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수신사로 갔다 온 사람은 대개 급진적이었으며 영선사로 갔다 온 사람은 대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김기수[편집]

金綺秀 (1832

? )

조선 고종 때의 문신. 자는 계지(季芝), 호는 창산(蒼山), 본관은 연안(延安). 고종 12년(187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이듬해 강화도조약 체결 후 예조참의(禮曹參議)로서 수신사(修信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그의 『일동기유(日東紀遊)』 『수신사 일기(修信使日記)』 등 수기는 일본에 대한 재인식의 자료가 되어 뒤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홍집[편집]

金弘集 (1842

1896)

대한제국의 정치가. 초명은 굉집(宏集), 자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는 충헌(忠獻). 본관은 경주(慶州). 1868년(고종 5). 문과에 급제, 광양 현감(光陽縣監)을 거쳐, 1880년 예조 참의서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이어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 책략(朝鮮策略)』을 소개하여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케 한 공으로 예조 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1882년 구미 열강의 통상 요구와 임오군란의 뒷처리 등 복잡한 문제에 부딪친 정부에 다시 기용되어 한미(韓美)·한영(韓英)·한독(韓獨) 등 수호조약 체결의 부사(副使)·제물포 조약 체결의 부관(副官)으로서 외교 수완을 발휘,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1884년 예조 판서·한성부 판윤을 역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 대신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한 뒤에 사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한때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 세력의 침투가 표면화하자 그 힘을 빌려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의 우위(優位)가 인정되어 일본의 강요로 강력한 친일파가 입각함으로써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조직되고 이때 총리대신으로 홍범(洪範) 14조(條)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국가의 체계를 세우고 갑오경장(甲午更張)의 과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극단적 친일파와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탄생하였다. 박정양 내각이 새로 세력을 뻗기 시작, 구미 열강에 친근하려는 정책으로 기울어지자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죽인 후 김홍집 내각을 개편하였다. 일본의 압력으로 단발령의 강행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했으나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에게 규탄받았고, 1896년(건양 1)에는 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여 드디어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파 내각이 조직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무너지고 많은 대신들이 피살되고 자신도 광화문에서 살해되었다.

『조선책략』[편집]

朝鮮策略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비하기 위하여 한(韓)·일(日)·청(淸) 간에 취해야 할 외교 정책을 논한 책. 원명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1888년경에 청나라 주일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黃遵憲)이 지었다. 러시아를 방비하기 위하여 조선은 친중국(親中國)하고 결일본(結日本)하며 연미국(聯美國)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로서, 이 책은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가져와서 고종에게 바쳤던 것이다. 이 책은 조선의 보수적인 유생들에게 심각한 반발을 유발했으나 개화를 주장하는 새로운 세력들에게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었다.

신사유람단[편집]

紳士遊覽團

고종 18년(1881)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제도를 시찰케 한 유람단.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수신사 김기수와 김홍집은 일본에 다녀와서 서양의 근대문명과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박정양(朴定陽)·조준영(趙準永)·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 등과 이들을 보조하는 수원(隨員)·통사(通事)·종인(從人)으로 신사유람단을 편성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도쿄(東京)·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하여 때로는 인접 지방에까지 나가서 문교·내무·농상·외무·군부 등 각 성(省)의 시설과 세관·조폐 등의 중요 부분 및 제사(製絲)·잠업(蠶業) 등에 이르기까지 고루 시찰하고 돌아왔다.

박정양[편집]

朴定陽 (1841

1904)

대한제국의 정치가.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문익(文翼). 본관은 반남(潘南). 1866년(고종 3) 문과(文科)에 급제, 참판(參判) 등을 지냈고 1681년에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도일(渡日),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이용사 당상경리사(理容師堂上經理事)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성·이조 참판(吏曹參判)·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883년에 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내무 협판(內務協辦)·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대사헌·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등을 역임, 도승지(道承旨)·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지냈다. 1887년(고종 24)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압력으로 출발을 연기, 연말에 청나라의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미국 대통령 클리블런드(Cleveland)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청나라의 압력으로 사직, 1889년 귀국하여 1894년 호조 판서·교정청 당상(校正廳堂上)·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신설되자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 이해 김홍집(金弘集)의 1차 내각에 학부대신(學部大臣)이 되고 이듬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이 되어 과도 내각(過度內閣)을 조직했다가 왕궁 호위병 교체 문제로 사표를 제출했으나 일본의 협조로 유임되었다. 이해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파면되었다가 김홍집 3차 내각의 내부 대신이 되고 1896년(건양 1)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김홍집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총리대신 서리와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했다. 이 해 9월 내각을 의정부로 개혁하자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고 1898년(광무 2)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석, 시정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수구파(守舊派)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1월 황국협회(皇國協會)가 폭력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나 내각이 경질(更迭)되자 다시 내부대신이 되었다. 대한제국 당시 불편부당한 온건 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갖고 이상재(李商在) 등 개화파 인사들의 뒤를 돌보았다.

홍영식[편집]

洪英植 (1855

1884)

조선 고종 때 개화파의 중요 인물.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본관은 남양(南陽), 서울 출신.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 후 여러 가지 관직을 역임하고 미국에 다녀왔다. 동왕 21년(1884) 개화당의 중요 간부로 이 해에 우정국(郵政局)이 설치되자 총판(總辦)이 되어 그 개국연(開局宴)을 계기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사대당(事大黨)을 제거, 신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청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신정부가 무너지고 그는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사형되었다.

영선사[편집]

領選使

조선 고종 때 청에 파견된 사절. 고종 18년(1881) 청나라 신식병기의 제조 및 사용법을 배우기 위하여 유학생을 파견키로 하고 그들을 인솔하는 사신을 영선사라 하여 김윤식(金允植)을 정했다. 톈진에 파견된 유학생들은 각 병기공장에서 제조법을 배우고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이들이 섭취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삼청동(三淸洞)에 우리나라 최초의 기계창(機械廠)을 설치하였다.

김윤식[편집]

金允植 (1841

1920)

조선 고종 때의 문신·학자.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본관은 청풍. 고종 18년(1881) 영선사(領選使)로 청국에 파견됐다. 동왕 19년(1882) 대원군의 집정을 배척하는 민씨 일파와 결탁하여 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시키게 하였으며, 동왕 21년(1884) 전권대사 자격으로 러시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갑오개혁 후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이 되어 개혁 정치에 힘썼으며, 한일합방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子爵)을 받았고, 그 후 3·1운동에 동조하여 작위를 반환하였다.

내정개혁[편집]

內政改革

강화도조약이 성립하고 난 뒤부터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내정개혁이 실시되었다. 내정개혁에 있어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別技軍)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 했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국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통리기무아문[편집]

統理機務衙門

고종 17년(1880)에 설치된 관청. 문호개방 후 조선 정부는 내정 개혁의 일환으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군국기밀(軍國機密)과 일반 정치를 총관하는 기관으로 통리기무아문을 두고, 그 밑에 12사를 두어 사무를 분담케 했는데, 그 장관을 총리대신이라 하고, 각사에는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郎廳)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2사는 ① 사대사(事大司) ② 교린사(交隣司) ③ 군무사(軍務司) ④ 변정사(邊政司) ⑤ 통상사(通商司) ⑥ 기계사(機械司) ⑦ 선함사(船艦司) ⑧ 군물사(軍物司) ⑨ 기연사(譏沿司) ⑩ 어학사(語學司) ⑪ 전선사(典選司) ⑫ 이용사(理用司) 등으로 나누어졌다. 통리기무아문의 총리대신으로는 이최응(李最應), 당상관(堂上官)에는 민치상(閔致痒)·민겸호(閔謙鎬)·조영하(趙寧夏)·민영익(閔泳翊)·김홍집(金弘集) 등이 임명되었는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임오군란[편집]

壬午軍亂

고종 19년(1882) 구식 군대의 봉기로 인한 병란(兵亂).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守舊派)가 정부의 개화 정책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이재선 역모사건(李載先逆謀事件)을 기도, 정권 탈취를 노렸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럴 즈음 군제개혁으로 대우가 나빠진 구군졸(舊軍卒)들 사이에 불안한 동요가 일었고, 이 불만은 13개월이나 밀린 군료(軍料)가 그나마 선혜청(宣惠廳) 관리들의 사리(私利)로 부당하게 지급되자 마침내 폭발해 버렸다. 노한 군졸들이 고리(庫吏)와 싸웠는데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는 주동자에게 사형을 선언했다. 이에 분노가 치민 군졸들은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고 대원군에게 진정하여 진퇴를 결정하고자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대원군은 표면상으로는 위무하고 뒤로는 난병(亂兵)의 주모자에 밀계(密計)를 주었으며, 이들 난병들은 죄수를 석방하고, 호리모토를 죽였다. 다음날 궁성으로 쳐들어가 민겸호를 죽이고 민비를 찾았으나 민비는 간신히 탈출했다.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대원군을 입궐시켜 금후의 모든 정사를 대원군이 품결하도록 했다. 대원군의 집권은 보수주의와 배외정책의 승리였으나 이 승리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제물포조약[편집]

濟物浦條約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의 사후처리에 관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조약. 일본은 임오군란 때의 피해보상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를 파견, 유력한 육해군의 시위 아래 제물포에 상륙했다. 일본의 출병 소식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청국이었다. 청국은 영선사 김윤식의 의견을 청취하고 속방(屬邦) 보호를 내세워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재빨리 출동케 했다. 이 때 청국에서는 사태가 험악해질 것을 우려하여 일본 공사를 자중시키는 한편 조선 정부의 태도를 완화시켜 양국 사이에 제물포에서 회담을 열어 제물포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고 일본 공사관에 일본 경비병을 주둔시켰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세력은 일시 조선에서 후퇴하게 되고 그 대신 청국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사대당[편집]

事大黨

조선말 청국 세력에 의존하려고 한 수구파(守舊派). 강화도조약 이래 척양·척왜를 주장하는 보수세력의 반발이 거세어가는 중에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하루빨리 개화하자는 세력 또한 점점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들 개화파는 독립당(獨立黨)을 형성하여 국정개혁을 도모하려 했으며, 이에 대항하여 민비 일족을 중심으로 한 사대당(事大黨)이 출현해 서로 정권 장악을 위한 갈등을 일으켰다. 이 양파의 대립 투쟁 양상은 고종 19년(1882)의 임오군란 이후 현저하게 격화되었으며, 동왕 21년(1884)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최고조에 도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