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발전/쇄국과 개화 정책/국제무대에의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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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무대에의 진출〔槪說〕[편집]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새로운 지식을 갖고 세계 여러나라와 통상조약을 맺을 것을 주장한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이들 중 오경석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역관(譯官)으로서 중국 북경을 자주 왕래해서 견문을 넓혔고, 이러한 그의 지식은 유대치(劉大致) 같은 인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중인계급(中人階級)이었지만 양반 관료층에서도 박규수(朴珪壽) 같은 이는 이러한 의견에 찬동하여 대외통상을 위한 국내적 여건이 성숙하여 갔던 것이다. 한편 김씨 세도의 폐해를 잘 알고 있던 대원군은 고종의 비(妃)로 고독하게 자란 민비(閔妃)를 간택했으며, 이 민비는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탄핵상소를 기화로 대원군을 축출, 대외통상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마련한 셈이다.이러한 조선의 국내 사정을 간파한 일본은 그들의 침략적 각본에 의하여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연출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신헌(申櫶)이 접견하여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1876년의 강화도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조약의 명문에 조선이 자주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어쨌든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및 경제적 침략의 신호탄이 된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국제무대에 등장한 역사적 첫 출발로서 의의가 큰 것이었다. 이리하여 세계를 향한 조선의 문호는 활짝 열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근대 서양의 신문명이 수입되었다. 동시에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략은 본격화되어 한민족에게 커다란 역사적 시련을 안겨주었다.

오경석[편집]

吳慶錫 (1831

1879)

조선 고종 때의 역관·화가. 자는 원거(元?), 호는 역매(亦梅)·진재(眞齋), 본관은 해주(海州), 오세창(吳世昌)의 아버지. 벼슬은 역관(譯官)을 지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글씨와 그림을 즐겼으며 북경에 왕래하면서 세계정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많이 흡수하여 조선의 국제무대 등장을 주장했다. 그가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해국도지(海國圖誌)』와 같은 책은 세계정세를 국내에 소개하는 자료가 되기도 했다.

유대치[편집]

劉大致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 중인계급 출신의 한의(漢醫)로 역관(譯官).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선진문물에 눈을 떠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을 지도했다. 당시 정계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리었으며 문호 개방과 정치 혁신을 주장했다. 일본의 침략을 보자 시국을 개탄하고 행방을 묘연히 했다.

박규수[편집]

朴珪壽 (1807

1876)

조선 고종 때의 문신. 자는 환경, 호는 환재, 본관은 반남(潘南),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헌종 14년(1848) 증광문과에 급제, 철종 13년(1862) 진주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按?使)로 파견되어 사태수습에 힘썼다. 고종 3년(1866)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셔먼호를 퇴치했으며, 운양호 사건 때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수교를 주장, 강화도조약을 맺게 했다.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명성황후[편집]

明成皇后

(1851

1895)

조선 왕조 고종의 황후. 성은 민(閔), 본관은 여흥(餘興), 치록(致祿)의 딸. 여주(驪州) 출신. 고종 3년(1866) 단촐한 집안에서 태어나 16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당시 고종이 궁인 이씨만을 총애한데다 이씨에게서 완화궁(完和宮)이 출생하자 이를 기뻐하는 대원군의 반대 세력을 규합, 확고한 세력 기반을 이루었다. 원자(元子)가 출생 5일 만에 요절하자 이를 대원군의 탓으로 돌려 더욱 증오했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하고 경복궁 중건으로 안팎이 분분해지자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시키고 민씨의 외척 정권을 수립했다. 이리하여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나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청국에 지원을 요청하여 다시 민씨 정권을 수립, 온갖 실정과 부패상을 낳았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해서 개화당을 붕괴시켰으며 갑오경장 후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였다. 그 후부터 더욱 친러책을 강화하다가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일본의 낭인들에게 건청궁(乾淸宮)에서 난자당한 후 소각되었다. 그 후 명성(明成)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운양호사건[편집]

雲揚號事件

고종 12년(1875) 일본 군함 운양호와 조선의 강화도 수비진 사이에 일어난 포격 사건. 대원군이 정권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조선에서도 문호개방의 요구가 차츰 무르익자, 일본은 안으로 개화사상에 입각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하여 밖으로의 침략 정책을 강행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고종 12년(1875) 일본 정부는 군함 운양호와 다른 한 척을 부산항에 정박시켜 함포 시위를 하고, 운양호는 다시 영흥만에까지 북항하여 해로의 측량과 시위를 겸하고 돌아갔다. 그 해 9월 운양호는 영종도 근해에 이르러, 강화도 남단인 초지진(草芝鎭) 앞을 거슬러 왔을 때 초지진의 수병(守兵)과 일함(日艦)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졌다. 일본은 한편으로 부산에 전함을 파견, 병사를 상륙시켜 함포외교(艦砲外交)를 계획했다. 고종 13년(1876) 일본은 전권대사를 조선에 파견, 운양호 포격에 대한 힐문(詰問)과 개항 요구를 강요했다. 동년 2월에 일본 사신 일행이 군함 6척으로 강화도에 이르러 조선 정부에 담판을 요구하여 왔다. 조선 정부에서는 중신회담을 거듭한 끝에, 국제 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조약 체결 교섭에 응하기로 하고 전권 대신을 강화도에 파견, 조선·일본 양국 사이에 강화도조약의 조인을 보게 되었다.

강화도조약[편집]

江華島條約

1876년(고종 13) 우리나라와 일본 양국간에 체결된 수호조약. 일명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근대 국제법적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에 의하여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다. 운양호(雲揚號) 사건의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에서는 다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어 강경책을 쓰기로 하였다. 즉 운양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해, 강화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 운양호 사건의 평화적 해결, 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이란 구실로 1876년(고종 13)에 구로다(黑田淸陸)를 전권대사(全權大使), 이노우에(井上聲)를 부사로 보냈다. 이들은 일진(日進)·맹춘(孟春) 등 8척의 군함으로 1876년(고종 13) 1월 부산에 입항, 교섭이 진전되지 않으면 전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육군을 증가해서 보낼 것을 본국에 요청한 뒤에 강화로 향하고, 모리야마(森山?)로 하여금 예비교섭을 시켰다.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매우 긴장하여 시원임대신회의(時原任大臣會議)를 개최하고 대책을 토의한 결과 신헌(申櫶)을 접견대관, 윤자승(尹滋承)을 부관으로 임명, 접응 대처케 하여, 강화를 회담장소로 결정하고 정식 회담을 열었다. 그리하여 전후 3차의 회의를 열었는데 여러 번 결렬될 뻔했다. 이때 조선 정부에서는 대원군 일파와 유생들의 반대로 의견이 구구하였으나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 등의 주장과 이홍장의 권고에 의하여 개국을 결정했다. 조선이 개국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① 세계 대세로 볼 때에 개국을 해야만 될 객관적 조건이 성숙했으며, ② 일본 정부의 무력시위가 국내의 척화론(斥和論)보다 강력히 작용했으며, ③ 민씨 일파가 개국을 버리고 쇄국을 하게 된다는 것은 민씨파의 실각 즉 대원군의 득세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고, ④ 청나라가 개국을 찬성한 때문이었다.사태가 이와 같이 되자 일시 중단 상태에 있던 강화도 회담도 급속히 진전되어 1876년(고종 13) 2월 26일에 조인을 끝마쳤다. 강화도조약은 12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① 조선은 자주국가로서 일본과 동등권을 보유한다(제1조) ② 20개월 이내에 부산 이외의 3항을 열고 일본 상인의 거주·무역의 편리를 제공할 것(제4·5조) ③ 일본은 조선 연해(沿海)·도서(島嶼)·암초(岩礁) 등을 자유로이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할 것(제7조) ④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領事)를 파견하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의 범죄는 일본 관원이 심판할 것(제8·10조)으로 되어 있다. 이 조약의 1조에 조선을 자주국가라로 한 것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정치적 우월성을 부정함으로써 자기들의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이 3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거류지를 제공한 데 비하여 일본은 하등의 의무를 부담하지 않았다. 또 일본이 조선의 연해를 자유로이 측량한다는 것은 조선의 해항 및 요새의 침략이다. 또 일방적인 영사 파견의 권리와 영사 재판권의 설정은 일본의 침략자가 조선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라도 간섭, 처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구미 자본주의제국으로부터 받은 불평등조약을 조선에서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다.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조선에 진출하게 되어 침략의 첫 단계를 실현하게 되었다. 조약의 결과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가 일본으로 파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