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발전/쇄국과 개화 정책/왕권의 재확립과 쇄국책
왕권의 재확립과 쇄국책〔槪說〕
[편집]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겨우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그의 생부(生父)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만기(萬機)를 장악하여 오랫동안 발호하던 외척세도를 타파하고 절대왕권을 재확립하려 한 것은 실로 민족국가의 흥망을 결정짓는 중대 단계였다.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먼저 안동 김씨 일족을 정권에서 축출했다. 그리고는 파벌이나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역량있는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의 기능을 부활시켰다. 이와 동시에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하였으니 이는 조선왕조 개창기에 정비되었던 통치체제의 복구를 말하여 주는 것이다. 대원군은 『대전회통』 등 법전의 재정비와 왕실의 전칙(典則) 및 국가적 전례의 정비·준행을 기하였다. 그는 서원(書院)의 철폐를 통해 지방에 있는 양반세력의 근거지를 뿌리뽑았으니 만동묘의 철폐는 대표적인 예였다. 그 외에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도(社倉制度)로 농민에 대한 구휼책(救恤策)을 실시하였으며 군포를 호포로 바꾸었다. 대원군은 또한 경복궁 중건의 대사업을 계획하고 이를 강행하였으니 이 공사는 공전의 내우외환을 거치면서 진행된 것이었다.
대원군이 집권하기 이전부터 싹텄던 위기의식은 러시아 세력의 남하 기세에 자극되어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으로 나타났으니 그것은 한편으로는 위기의식과 봉건왕조의 재확립이라는 대원군의 지향과 완명(頑冥)한 쇄국책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19세기에 들어서 서양 여러 나라의 선박이 조선 연안에 빈번히 출몰하는 중에 중국에서의 영(英)·불(佛) 연합군에 의한 북경 침공의 소식이 전해지자 조야(朝野)의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와 같은 동요 속에서 천주교의 유포와 다수 서양인의 잠입활동 및 개항 이전부터 국내에 유입된 양화(洋貨)의 범람은 커다란 의구심을 던져주었다. 이리하여 병인·신미의 양차에 걸친 양요(洋憂)가 발생하게 되었고, 대원군의 전승 의지는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게 했다.한편 일본은 1854년에 개항하고 재빨리 근대 문화를 섭취한 뒤 수차에 걸쳐 조선 정부와의 수교(修交)를 꾀했으나 이것이 거부되자 조선 침공을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했다.양이침범(洋夷侵犯)에 대한 대원군의 강경 태도는 청국의 경우와는 달라서 전통적인 종래의 사대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던 것이다. 이리하여 대원군의 왕권 재확립을 위한 전제정치는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한 세계정세와 국제관계에 어떠한 영향도 받음이 없이 쇄국책을 강행, 조만간 도래할 새로운 국면, 즉 개항(開港)이라는 새로운 사태와는 많은 모순을 내포한 채 그 자신의 몰락을 촉진하는 중요 원인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편집]興宣大院君 (1820
1898)
조선 고종 때 섭정(攝政) 대원군. 이름은 하응(昰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영조(英祖)의 현손, 고종의 아버지. 20세에 흥선군(興宣君)에 피봉되었으나 순조·철종 비가 다 안동 김씨로 척족(戚族)의 횡포에 불우한 처지에서 부랑(浮浪) 생활로 빈민굴의 생활 실태까지 잘 알고 있던 차 철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후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조대비(趙大妃:翼宗妃)와 밀계(密計)가 있어 자기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을 세자로 삼고 자기는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섭정하며 정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이로부터 10년 간 대원군 집정시대는 국내외사가 복잡 다난하던 때로 과감한 신정(新政)에 착수하여 많은 장단점을 남겨 놓았다.그의 집정 중의 득책(得策)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김씨 일파의 세도를 거세하고 당쟁의 악습을 없애기 위하여 사색(四色:南·北·老·少)을 신분 ·계급·출신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등용. 둘째, 외척세도를 일소하고 탐관오리를 없애며 지방토호들의 무단적인 백성학대를 엄금. 셋째, 당쟁의 소굴이요, 국가 재정을 좀먹고 국정을 어지럽히는 유생(儒生)들의 소굴인 서원(書院)을 철폐. 넷째,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등과 『삼반예식(三班禮式)』 『오례편고(五禮便攷)』 및 『종부조례(宗府條例)』 등 법전을 편수 완비케 하여 정치 기강(政治紀綱)을 확립하고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완비. 다섯째, 의정부(議政府)를 부활시키고,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여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맡게 하여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는 등 군제를 개혁. 여섯째, 의복제도를 개량하는 등 사치를 엄금. 일곱째, 경북궁 증축으로 소모된 재정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군포(軍布)를 호포(戶布)로 고쳐 반상(班常)을 불문하고 부과하여 서리의 특전을 없앴으며, 종래의 창고를 사창(祀倉)으로 고쳐 간리(奸吏)의 전횡(專橫)을 방지하였다.반면 실책으로는 첫째, 경복궁 중건(重建)으로 인한 무리한 정책으로 경제가 혼란하게 되어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둘째 천주교를 탄압하여 외인 선교사를 죽임으로써 대외적인 감정을 악화시켰으며, 셋째 세계에 어두워 쇄국정책(鎖國政策)을 씀으로써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를 일으키고 서양 문명 전래에 큰 지장을 초래했으며 또 대일(對日) 관계에 있어서도 철저히 적의를 품어 1875년(고종 13)에는 팔도비전회문장(八道秘傳廻文章)이라는 배일 격문을 하달하면서, 인천(仁川)에 와 있던 일본 전함 운양호를 포격하여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다.이러한 실정은 조대비와 민비의 알력(軋轢)·국민의 원성·유림(儒林)의 불만이 고조됨에 따라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탄핵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민비가 집권하면서 일본과의 국교로 강경한 쇄국 정책이 무너지고 유림의 불만이 높아지자 대원군은 이를 이용 왕을 폐위시켜 민비를 몰아내려다 실패하였다.
임오군란 때는 민씨 세력 섬멸을 기도하여 궁중에 영접까지 되었으나 일본 공사관이 소각(燒却)됨에 따라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에게 유치(誘致), 텐진(天津)에 연행되어 보정부(保定府)에 연금되었다. 1885년(고종 22)에 귀국하여 음모를 계속, 1887년 청의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큰 아들 재면(裁冕)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가 실패하였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과 결탁하여 동학란에 관련되었다고도 하는 바, 이로 인해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은 대원군을 영립,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었으나 이 때는 대원군 자신이 집정이 어렵게 되자 청국과 통모(通謀)하다가 쫓겨나고 친정(親政)으로 다시 돌아갔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정국은 일본 세력이 강성해지고 3국(三國:獨·佛·露) 간섭으로 친러파(親露派)가 등장,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10월 8일 일본 책략에 의하여 다시 영립되고 화근(禍根)은 없었으나 대원군도 점차 정치에서 멀어져 갔다.
운현궁
[편집]雲峴宮
조선시대 흥선대원(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고종의 생부)의 저택으로 쓰이던 궁. 사적 제257호.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여기서 청나라 텐진으로 납치되었다. 원래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하며, 현재는 궁의 일부에 덕성여대와 전 TBC방송국이 들어서고, 헐려나가서, 대원군이 즐겨 쓰던 아재당이 없어지고, 사랑채 농안당, 안채 이로당과 노락당만이 남아 있다. 정원 등은 잘 보존되어 내정에는 고종이 소년시절에 자주 오른 노송(老松)이 남아 있다.
서원철폐
[편집]書院撤廢
대원군이 지방에 있어서 양반의 근거지로 남설(濫設)된 서원의 오랜 적폐(積弊)를 제거하기 위해 서원에 대해 일대 정리를 단행한 일. 조선은 건국초부터 유교 중심 정책을 취하여 전국 각지에 많은 서원이 생겼다. 이러한 서원은 지방에 있어서 남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특권적인 것이 되어 전지(田地)와 노비를 점유, 면세·면역의 특전을 향유하면서 당론의 소굴이 되었다. 유생은 향교보다도 서원에 들어가 붕당에 골몰하였고, 심지어는 서원을 근거로 양민을 토색하는 폐단이 심하였다. 이리하여 역대 제왕들은 여러 차례 서원의 정비를 꾀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원군은 집정 초기부터 서원의 비행과 불법을 낱낱이 적발케 하는 동시에 사설(私設)과 남설을 엄금하라고 지시했으며, 고종 2년(1865) 서원의 괴수격인 만동묘(萬東廟)를 철폐케 했다. 계속하여 전국에서 47개소의 서원만 잔존시키고 나머지는 전부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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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
[편집]萬東廟
숙종 43년(1717)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을 위해 건립한 사당. 송시열의 뜻으로 권상하(權尙夏)가 유생들과 함께 화양동(華陽洞)에 묘를 짓고 의종과 신종을 제사지냈다. 조정에서는 여기에 전토(田土)와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는 만동묘를 증수했으며, 헌종 때는 관찰사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 후 유생들의 소굴이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하였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만동묘를 철폐할 구실로 대보단(大報壇)을 세우고 지방(紙榜)과 편액(扁額) 기타 물건은 모두 대보단 경봉각(大報壇敬奉閣)에 갖다 두었다. 그 후 유생들이 만동묘를 재건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했으나 실패했는데,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민비 일파가 정권을 잡자 다시 부활하였다.
경복궁
[편집]景福宮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政闕). 조선 태조는 한양에 도읍하자 먼저 종묘(宗廟)의 건설에 착수 한 다음,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에게 명하여 중국 황성(皇城)의 제도를 모방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태조 3년 겨울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준공을 보고 10월에는 새 대궐에 들어 정도전에게 이름을 짓게 하였다. 도전은 『시경(詩經)』의 <君子萬年介爾景福>이란 글귀를 따서 ‘경복궁’이라 이름하고 또 여러 전당(殿堂)도 이때 이름을 지었으며, 문과 다리의 이름은 1426년(세종 8) 집현전(集賢殿)에서 명을 받아 지은 것이다.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북에는 신무문(神武門), 동에는 건춘문(建春文), 서에는 영추문(迎秋門)을 두었다. 수조하정전(受朝賀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의 주위에는 근정문(勤政門:南門)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思政殿)은 편전(便殿)이며, 강녕전(康寧殿)·교태전(交泰殿) 등의 침전(寢殿) 기타 무수한 전당·누각이 있었다. 1412년(태종 12)에 경회루(慶會樓)를 창건, 세종 때에 이르러 보루각(報漏閣)·간의대(簡儀臺) 등의 관측시설이 완비되었으나 1553년(명종 8) 강녕전에서 불이 나서, 사정전, 흥경각과 근정전 이북이 타버렸던 것을 이듬해 증수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왜군이 침입할 때 난민(亂民)의 방화로 모두 탔다. 환도 후는 월산대군의 구택(月山大君 舊宅:慶運宮, 지금 德壽宮 일부)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이후 270년 이상 폐허로 남아 있다가 대원군이 집권하여, 1865년(고종 2) 중건공사에 착수했다. 당백전(當百殿)을 발행하는 등 7년 이상을 소요하여 공사를 마쳤는데, 그 안에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정원(承政院)·홍문관(弘文館) 기타 여러 관아가 정비되어 있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준공되어 경복궁은 그 뒤에 가려지게 되었다.
경복궁 중건
[편집]景福宮重建
1865년(고종 2)
1872(고종 9)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경복궁을 중건한 일. 세도정치로 인하여 왕실의 위신이 떨어진 조선 말기에 고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게 된 대원군은 왕실의 존엄성을 천하에 과시하여 중흥(中興)의 기세를 높이고자 임진왜란 때 타버린 경복궁의 중건을 착수했다.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본궁으로 태조가 창건한 것인데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타버린 후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여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있었다. 순조(純祖) 말엽에 세자가 중건을 계획하다가 일찍 죽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헌종 때도 계획은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대원군은 1865년 경복궁 중건의 계획을 발표하고 영건도감(營建都監)을 두어 공사에 착수하니 찬·반의 의견이 분분했으나 대원군이 그 총책임을 맡고 일을 그대로 추진했다. 처음에는 백성들의 부역에 신중을 기하고 관리와 일반 백성 및 종친(宗親)들에게 고루 원납전(願納錢)을 바치게 하였으므로 자진하여 부역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대원군도 이들을 위해 위로금도 지급하고 무동대(舞童隊)·농악대(農樂隊) 혹은 남사당패를 동원하여 격려·고무하여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큰 재목(材木)이 필요하여 능(陵)의 산림에서도 나무를 베어다 썼는데, 다음 해 3월에 재목장에 큰 불이 나서 건축작업 전체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초지일관하여 공사를 추진시켜서 강원도·함경도의 재목은 뗏목으로 운반해 오고, 각처에서 석재(石材)를 모아들이는 한편 서낭당의 큰 돌이나 재목도 공출게 하고, 양반 집안의 묘지(墓地)에서도 목재를 마구 베어 왔다. 경비가 차차 옹색해지자 원납전을 받고 벼슬을
파는가 하면 세금을 올리고, 심지어는 서울의 성문(城門)을 출입하는 데도 세금을 부과하고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는 등 무리한 일을 강행하였다. 이리하여 1872년(고종 9) 조선 말기의 건축·공예·미술의 결정(結晶)이라고 할 만한 경복궁의 중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일은 양반 귀족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원망의 대상이 됐으며, 경제적인 파탄을 초래하여 대원군 몰락의 한 원인이 되었다.
당오전
[편집]當五錢
조선시대 사용되던 화폐의 하나. 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엽전 100푼이 당오전 5푼에 해당된다. 1883년(고종 20)에 국가재정의 궁핍을 구하고자 주조하며, 1894년 군국기무처에서 새로 화폐를 제정할 때까지 사용하였다. 약하여 당오라고도 한다.
군포를 호포로
[편집]軍布-戶布-
대원군의 세제개혁(稅制改革)의 일환. 군포는 국민계병제도 아래 일종의 병역세로 징수한 것인데, 양반계급에게는 면제해 주는 반면, 황구(黃口)·백골(白骨)에까지 강징(强徵)·주구(誅求)하는 폐단이 많았다. 이 점에 착안한 대원군은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고 균등과세의 원칙에서 면세특전을 폐지한 다음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매호당 2냥씩을 균일세로 부담케 하여 그 실시를 강행했다.
『대전회통』
[편집]大典會通
고종 2년(1865)에 조두순(趙斗淳) 등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법전. 이 책은 『대전통편』을 저본(底本)으로 이후 왕의 교명·규칙·격식을 보록(補錄)한 책이다. 『경국대전』의 본문을 원(原), 「속대전」의 본문을 속(續), 「대전통편」의 본문을 증(增), 새로 보록한 것은 보(補)라 하여 구별, 조선왕조 5백 년을 통한 마지막 법령집으로 조선시대 법령의 종합판이다.
천주교 탄압
[편집]天主敎彈壓
대원군은 처음 천주교에 대하여 반감이나 원한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러시아가 남하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오히려 천주교도를 통해 비밀리에 프랑스의 힘을 빌려 방어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자 남종삼(南鍾三)과 수차 회동, 조선 주재 프랑스인 신부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불행히도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겨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때마침 청국에서의 천주교 탄압 소식과 이전부터 싹텄던 위기의식이 가미되어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령을 내리게 되었다. 박해는 1872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수개월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 및 남종삼 외 8천여 명의 신도가 처형되었다.
남종삼
[편집]南鍾三 (1817
1866)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 세례명은 요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까지 지냈으며 주로 왕조 자제 교육에 종사하였다. 대원군과 친교를 맺으면서 러시아의 남하 세력을 영(英)·불(佛)의 힘으로 견제, 천주교의 공인을 받으려고 계획했으나 차질이 생기고, 북경으로부터 유럽인 선교사의 학살 오보(誤報)가 전해지자 대원군은 갑자기 천주교 탄압을 강행했다. 이 탄압 때에 그는 외국인 선교사를 집에 은닉해 준 혐의로 사형당했다.
쇄국정책
[편집]鎖國政策
이윤의 확보나 자기 방위 및 국제적 고립상태의 유지가 불가피할 때 외국인의 입국이나 무역을 통제하는 정책. 조선 왕조는 병자호란 이래로 수세기 동안 대체로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왔다. 대원군이 집정하자 그는 국정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외교면에서는 청국을 제하고는 척양(斥洋)·척왜(斥倭)를 주장하여 문호를 폐쇄시켰다. 특히 천주교의 유입을 단호히 배격하여 양차에 걸친 양요(洋擾)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러한 양요 및 열강의 문호개방에 대한 요구가 맞물리자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적극적인 쇄국정책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원군의 강한 자세로 구미열강은 통상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에서는 정한론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를 위요한 국제정세는 문호개방의 필요성과 열강으로부터의 국권수호라는 상호 모순되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모순은 고종 12년(1875)의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으로 폭발되었으며, 그 결과 타의에 의한 문호개방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편집]The General Sherman號事件1866년(고종 3) 7월 미국 배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당시 텐진(天津)에 체류 중인 미국인 프레스톤(Preston)의 소유 상선(商船) 셔먼호는 영국 메도우스(Meadows) 상사와 결탁하여 비단·유리그릇·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 등의 상품을 싣고, 프레스톤을 비롯하여 윌슨(Willson), 덴마크인 선장 페이지(Page), 영국인 호가드(Hogarth) 및 기독교 선교사 토마스(Tomas)를 통역으로 하고 19명의 말라야인 및 청나라 사람들을 시켜서 7월 11일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경내로 들어왔다.때마침 프랑스 군함이 내침(來侵)하리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들은 긴장하고 있었으므로 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한 것을 보고,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圭壽)는 사람을 보내어 온 목적을 물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백인(白人)들의 국적을 소개하고 내항(來航) 목적에 대해서는 상거래(商去來)뿐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이 가져온 상품과 쌀·사금(沙金)·홍삼(紅蔘)·호표피(虎豹皮) 등과의 교역을 제의하였으나, 조선의 관원들은 빨리 떠나기를 재촉하였다.다음 날 조선측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본선(本船)이 만경대(萬景臺)·한사정(閑似亭)까지 올라와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잡아 감금(監禁)하였다. 이에 평양성 내 관민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측은 조총(鳥銃)과 대완구(大碗口)를 마구 쏘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무모한 행동에 대해서 강변의 군민(軍民)은 돌팔매·활·소총으로 대항하고, 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은 배를 타고 가서 이현익을 구출하였다. 며칠 계속된 비로 두 배나 불었던 수위(水位)가 이렇게 8, 9일이 경과하는 동안 평상시로 돌아가니 셔먼호는 양각도(羊角島) 서쪽 모래톱에 선체가 걸려 행동의 자유를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안과 초조 속에 빠진 그들은 더욱 광폭(狂暴)한 행동을 감행, 강도·약탈·총포격(銃砲擊)을 가하여 사망 7명, 부상자 5명을 내게 하였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 등과 상의하고, 21일부터는 화공(火攻)·포격(砲擊)을 가하여, 셔먼호를 불태워버렸고, 따라서 토마스를 비롯한 인원은 타살 혹은 소사(燒死) 당하였다. 후일 이 사건이 밝혀져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원인이 되었다.
병인양요
[편집]丙寅洋擾
1866년(고종 3) 프랑스 함대가 인천과 서울 근처까지 쳐들어온 사건. 철종(哲宗) 때에 와서 종래 천주교에 대한 탄압·취체의 방침이 완화되자, 이 틈을 타서 베르누(Berneux:張敬一)·리델(Ridel) 등을 위시한 프랑스인 신부가 많이 들어와 선교사업에 힘썼으므로 1861년(철종 12)에는 교도의 수가 18,000명, 1865년(고종 2)에는 23,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를 탄압하지 않았으나 1866년 정월에 천주교 탄압령을 내려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 신부와 남종삼(南鍾三)·정의배(丁義培) 등을 비롯한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죽였다. 이때 탈출한 리델(Ridel) 신부는 당시 중국 텐진(天津)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極東艦隊) 사령관 로즈(Rose) 제독에게 보고하였다. 북경에 있던 프랑스 대리공사(代理公使) 벨로네(Bellonet)는 보고를 받자 조선 정벌의 결의를 언명(言明)하였는데, 청나라를 통하여 이것을 전해들은 대원군은 탄압을 더 심하게 하는 한편 변경의 방비를 더 굳게 하였다.로오즈 제독은 1866년 9월에 전함 3척을 이끌고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까지 이르렀고, 이로 인해 서울 도성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로 하여금 한강을 지키게 하였다. 프랑스 함대에서는 3척의 소(小)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조선 정부는 더욱 군비를 갖추고 한강 일대의 경비를 엄하게 하였다. 로오즈 제독은 동년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다시 물치도(勿淄島) 근처에 나타나 14일에는 갑곶(甲串)에 상륙, 16일에는 강화부(江華府)를 점령하여 군기와 양식·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정은 이경하(李景夏)·이기조(李基祖)·이용희·이원희(李元熙)
등의 용장을 뽑아 서울을 비롯하여 양화진·통진(通津)·광성
진(廣城津)·부평(富平)·제물포 등의 여러 요소와 문수산(文殊山)과 정족산(鼎足山)의 두 산성에 배치시켰다.문수산성(文殊山城)을 지키고 있던 한성근(韓聖根)은 26일에 약 120여 명의 프랑스군과 싸워서 이를 쳐부수어 약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프랑스군은 다시 교동부(喬桐府)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폭격하고,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일대는 11월 9일 정족산성을 공략코자 하였으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 및 사격에 능한 500여 명의 매복한 포수(砲手)에 의해 3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도망하였다.이에 놀란 프랑스군은 장녕전(長寧殿)을 위시한 여러 관아(官衙)를 불사르고 갑곶진(甲串鎭)으로 퇴각했다. 로오즈 제독은 이 이상의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11월 18일 드디어 전함대를 거두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병인년에 일어났으므로 병인양요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동양에 있어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국의 위신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한편 유럽 열강은 조선의 국제적 위치와 한 청(淸) 관계에 대하여 재검토하게 되었고, 그들이 탈취해 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후일 유럽 인사들의 우리나라와 동양 연구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남연군 분묘도굴 사건
[편집]南延君墳墓盜掘事件
고종 5년(1868)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 남연군(南延君ː李昰應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 고종 3년(1866) 두 번에 걸친 통상 요구가 거절당하자 오페르트는 동왕 5년(1869) 차이나호(號)를 빌려 충청도 아산만(牙山灣)에 내항, 덕산군에 상륙하여 전제섭정 대원군의 부친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급보를 받고 충청감사가 군병을 급히 파견했을 때는 오페르트 일행이 돌아가고 난 뒤였다. 그들 일행은 다시 북항(北航)하여 인천 영종도(永宗島) 앞바다에 들어와 개국통상 교섭을 위해 관리 파견을 요청했으나, 조선 수병(守兵)과 충돌하여 아무 성과도 없이 상하이로 돌아갔다. 이 파렴치한 행위는 서양인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고 조선 국민들에게 서양인과 천주교도에 대한 경멸과 분노를 다시 한번 자아냈다.
신미양요
[편집]辛未洋擾
고종 8년(1871) 미국 군함 3척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나자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는 군함 5척을 이끌고 남양(南陽) 앞바다에 도착,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들 일대는 강화 수병의 포격을 무릅쓰고 초지진(草芝鎭)과 덕진(德津)을 점령하고 다시 광성진(廣城鎭)을 공격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어재연(魚在淵) 등과 미군측 수명이 전사했다. 미군측은 이상의 공격이 무모함을 깨닫고 물러갔으며, 이 사건의 결과 대원군은 양이(洋夷)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키기 위해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더욱 굳혔다.
척화비
[편집]斥和碑
조선 고종 때 양인(洋人)을 배척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碑石). 1871년(고종 8) 건립, 길이 4자 5치, 너비 1자 5치, 두께 8치 5푼, 재료는 화강석. 비문(碑文)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적혀 있다. 이 비는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에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다. 비석 표면에는 큰 글자로 주문(主文) 12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를, 측면에는 작은 글자로 주문 이외의 글을 남겼다. 그 후 1882년(고종 19:임오군란 때) 대원군(大院君)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우리나라가 각국과 교통하게 되매 모두 철수되었다. 그 중 서울에 세웠던 것은 1882년 8월 15일에 종로 보신각(普信閣) 부근에 파묻었다. 이것이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겨 세울 때 발견되어 경복궁 근정전 서쪽 화랑에 진열되었다. 이 밖에 경기도 강화(江華), 경상도 동래군(東萊郡)·함양군(咸陽郡)·부산진(釜山鎭)·경주(慶州) 등지에서 서울의 것과 똑같은 크기의 것들이 1925년경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정한론
[편집]征韓論
고종 7년(1870) 일본 정부 내에 대두한 조선에 대한 출병론. 이보다 앞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척사(斥邪)·척양(斥洋)뿐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강력한 척왜정책(斥倭政策)으로 기울어졌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에 왕정복고를 통고하고 국교를 트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종전의 것과 달라 조선은 수리할 것을 거절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태도는 사이고(西鄕隆盛)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불평무사 무리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정한론의 즉시 실천은 오쿠보(大久保利通) 등에 의해 적당한 시기를 엿보게 하는 정도로 연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