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발전/쇄국과 개화 정책/19세기 후반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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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의 한국〔槪說〕[편집]

서세동점이라는 구미세력의 동양진출로 국내에서도 근대사조가 대두하였다. 개화와 척사 등 근대문물의 수용 문제를 둘러싸고 신구 사상의 대립은 날카로웠다. 개항과 개화, 개의 여러 현상이 분화 변천하고혁과 근대화의 시도, 외세침략과 저항운동, 민권운동과 계몽운동, 민족경제 발전의 저해, 주권상실과 회복운동 등 너무나 벅찬 일들이 근대문물에 대하여 경험이 없고 또 알지 못하는 가운데 조야를 격동시켰다. 더욱이 우리의 독자적인 발전 계획이나 내재적인 발전은 외세침략에 밀려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주권수호를 위한 저항운동이 근간을 이루었다.19세기 후반은 고종 즉위 원년인 1864년 전후로부터 우연하게도 10년 간격으로 큰 사건이 외세와 겹쳐서 우리의 독자적인 발전이 저해당하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는 일제의 침략으로 점철되어 일본관계가 주류를 이루면서 민족적으로 큰 시련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사의 가장 주요한 한 시기가 일본에 짓밟혀 근대사의 진로가 강제적으로 일제 테두리 속으로 함입되는 치욕을 겪어야 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정상적인 발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기의 제1단계는 철종 때였다. 철종은 척신과 권신들의 포위 속에서 국정을 바로잡지 못하여 민란 발발 등 혼란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는 제2단계로 들어서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의 집정으로 국정혼란은 수습되었으나 접근해 오는 서양 세력의 격퇴 등 쇄국으로 일관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와 세계정세 등 국제관계를 무시한 나머지 자강진취의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양반귀족들의 횡포·억압, 문벌 귀족세력의 타파, 탐관오리의 숙청 등 내정에 있어서 일대 혁신을 단행하여 삼정문란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등 과단성 있는 개혁의 단행으로 왕권의 기틀을 강화하였다.강경하게 쇄국으로 일관했던 대원군은 1873년에 드디어 적대 세력인 유학자들과 민씨 세력에 의하여 하야하고 고종의 집정은 민비의 등장을 초래하여 척족세도를 재현시켰다. 밖으로는 자주성이 결여된 채 일본이 일으킨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신흥 일본 세력이 침투할 기회를 주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구미 제국과도 수호 통상조약이 차례로 체결되어 폭넓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근대적인 문물제도를 도입·개선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산업·기술 등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외교사절이 교환되면서 국제조류에 발을 맞추었다. 그러나 근대문물의 수입과 제도개선은 개화와 수구의 대립되는 세력을 형성케 하였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은 문호개방에 따르는 고민과 반항이 청·일 양국의 이해관계와 얽혀서 국정을 어지럽게 한 것이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본 세력을 누른 청국이 대원군의 납치 등 내정을 갑섭하게 되자 진실한 개화와 개혁, 자강 독립의 목표로서 애국애족을 부르짖던 소장 정치인들은 급진적인 정치 개혁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갑신정변은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 독립당이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한 것이었으나 민중에 기반을 두지 못한 채 일본 세력을 배경으로 한 정변은 친청 수구당에 의해서 외세작용까지 덧붙여져 삼일천하로 끝났다. 이 때문에 외세 배격과 자각운동 등 근대화로의 추진이 지연되었다.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일 양국의 대립은 날카로워졌다. 정치적으로 계속 우세를 노린 청국과 경제적으로 침투하는 일본의 갈등 속에서 1890년대로 접어든 우리나라는 흉년 기근으로 민심불안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불안은 1894년 혁명적인 사태로 발전하였다. 교조 최제우가 사형된 후 표면적인 활동이 불가능했던 동학 교도들은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면서 외세 침투와 국내의 모순을 타개하고자 ‘인내천(人乃天)’이란 깃발 아래 동학혁명을 전개하였다. 이는 점차 커져가는 국가 위기에 대해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해 척왜양(斥倭洋)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며 부패한 정치와 사회제도의 개혁을 시도한 구국의 발돋움이었다. 원병강침(援兵强侵)의 청·일 양군은 전쟁으로 맞서 한국은 국제사회의 변동과 전승한 일제에 의하여 타율적인 개혁이 강요되었다. 급변하는 국내 정세와 삼국간섭으로 일제 세력이 후퇴되자 좌표를 찾지 못한 채 열강 세력에 휘말리며 때로는 추수하다가 민비 시해사건, 아관파천 등 치욕이 겹쳤다. 이리하여 국제 정세와 난국에 대한 분석·판단·대응 조치가 제대로 취해지지 못한 채 열강의 각축에 휩싸였던 것이다.광무연간으로 들면서 주체적인 입장에서 개혁이 시도되었으며, 근대의식을 자각한 청년층이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권사상의 고취, 언론활동, 독립자강을 외치면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나 러시아와 일본 세력이 파고들어 한국 영토 분할론까지 대두되는 가운데 실패, 한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의 희생물로 등장하였다. 만주와 한국을 사이에 두고 1904년에 유발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 일제 침략의 전방사령부인 통감부가 이 땅에 설치되었다. 요식 행위만을 갖춘 조약과 규정이 일제의 강압하에 이루어져 사실상 1910년부터 시작되는 식민통치의 과도기가 되었다. 침략에 항거하는 민중의 격분은 항일구국으로 거세게 일어났으나 잔악한 무력탄압으로 실패하였다. 항일독립운동도 의병들의 무력 투쟁은 물론 국제여론에도 호소해보았으나 약육강식의 국제 열강 시대로 접어들어 우리의 독립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유사 이래 국권상실이라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정상적인 우리의 경제질서가 파괴되고 사회의 변동 등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고유 문물이 파괴되어 문화면에서도 우리의 것을 보존하기마저 어려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