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문화의 새 기운/서민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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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예술〔槪說〕[편집]

양반 중심의 유교적 사회에 대한 항의는 사상면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나타났다. 문학에 있어서는 한글로 된 서민문학이 특히 성하였다.김만중 같은 평론가는 한글로 적은 문학이라야 진정한 문학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당시의 문학은 독창적 기교와 풍자적 수법을 발휘하여 박지원 등의 한문소설을 제외하고라도 유식한 광대들이 가장 민족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는 설화 가운데서 취재, 민족문학의 특질이 잘 표현되어 있는 춘향전·흥부전·심청전과 같은 판소리 문학을 형성시켰던 것이다. 그와 같은 문학은 당대의 위정자나 상류사회의 이면생활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독창적인 많은 작품을 낳게 하였으니, 『이춘풍전』 『쥐전』 『두껍전』 등이 모두 그런 유의 작품들이다.또한 이 시기의 작가들은 남녀간의 애정문화를 다루는 데에도 종전의 중국적인 소재와 일부다처주의적인 봉건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한 남성 대 한 여성 간의 진실한 애정문제를 다룬 소설이 많이 나왔으니, 『옥단춘전(玉丹春傳)』 『이진사전(李進士傳)』 등이 그것이다.시조에 있어서도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서민 감정을 나타내는 사설시조로 변하였으니, 사상적으로는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회적으로는 평민계급들이 자기 각성을 한 시기였다.이때에 배출된 평민작가들 중에서 특히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 등의 시조집은 서민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조선후기에는 문화의 모든 분야가 새롭게 변화해 가는 추세에 맞추어 그림·건축·글씨 등 예술분야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먼저 그림에 있어서는 17세기 인조대에 궁정화원의 중심적 위치에 있던 이징(李澄)의 그림이 정교하면서도 격식을 탈피하여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필치로 인물과 산수를 그려내어 충격을 주었다.그는 특히 달마(達磨)와 같은 선승과 신선을 주로 그렸는데, 이는 17세기 초의 이단사상의 유행과 짝을 이루는 화단의 이단이었으며, 명나라 저장지방 화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 말 이후로 청초 남종화(南宗畵)가 전래되면서 그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반청감정을 가진 중국 남방인들의 남종화가 역시 반청북벌사상에 젖어 있던 서울문인들에게 호소력을 준 까닭이었다. 그러나 18세기의 영·정시대에 들어가면 남종문인화를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추어 토착화하는 또 다른 화풍이 일어났다. 이른바 ‘진경산수(眞景山水)’가 그것이다.진경산수의 등장은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던 의궤(儀軌)와 국방지도제작에 화원들이 참가하여 우리의 산수를 그려 넣는 과정에서 개성있는 화풍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서울의 문단에서 우리의 고유한 정서를 표현하려는 천기(天機)·진기(眞機)주의가 풍미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18세기 중엽에 천기·진기주의 문학을 강조하던 김창업, 김창협, 김창흡의 후원은 받은 영조대의 정선(鄭敾, 謙齋)이 진경산수의 대가로 등장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양반출신으로서 화원이 된 그는 금강산을 비롯하여 서울주변의 수려한 경관을 독특한 필치로 그려냈는데, 날카로운 바위산은 선묘(線描)로, 부드러운 흙산은 묵묘(墨描)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정선의 뒤를 이어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 경지를 열어놓은 화원은 정조 때의 김홍도(金弘道, 檀園)와 신윤복(申潤福, 蕙園)이다. 김홍도는 현감을 지낸 양반이었으나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궁정화가의 중심인물이 되었다.그는 정조의 화성행차와 관련된 병풍, 행렬도, 의궤 등 궁중 풍속을 많이 그렸는데, 이는 기록화의 의미를 지닌 까닭에 활발하고 간결한 필치보다는 섬세하고 정교한 필치를 더 필요로 하였다.김홍도는 일반사대부들의 감상을 위한 그림도 많이 그렸다. 신선(神仙)이나 산수도 즐겨 그렸지만, 밭갈이·추수·집짓기·대장간·씨름·풍악놀이·혼인풍속 등 농촌서민들의 생활상을 낙천적이고 익살스런 필치로 묘사하였다. 이는 정조시대의 밝고 활기찬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홍도와 비슷한 화풍을 지닌 풍속화가로서 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 형제도 정조 때 궁정화가로 활약하고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홍도와 같은 시기에 활약한 신윤복은 김홍도와 대조적으로 주로 도시인의 풍류생활과 부녀자의 풍속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인 필치로 묘사하여 풍속화의 또 다른 정형을 세웠다.심사정(沈師正, 玄齋)도 18세기 화가로서 높은 명성을 떨쳤다. 그는 정교하고 세련된 필치의 산수를 잘 그려 정선의 그림과는 대조를 보였다.그 밖에 조영척(趙榮?)·변상벽(卞相璧)·윤덕희(尹德熙)·김두량(金斗樑)·최북(崔北) 등 개성있는 화가들이 배출되어 18세기 화단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한편, 일반사대부 중에도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문인화가가 적지 않았다. 정조 때의 이인상(李麟祥)·강세황(姜世晃)은 뛰어난 문인화가였다.특히 강세황은 시·서·화의 삼절로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그는 서양 수채화의 기법을 동양화와 접목시켜 새로운 산수화풍을 성립시켰다. 조선후기에는 산업부흥에 따라 공예예술도 다채롭게 발전하였다.그릇공예에 있어서는 종전의 분청사기(粉靑沙器)가 자취를 감추고, 다종다양한 형태의 청화백자(靑華白磁)가 널리 유행하였다. 흰 바탕에 푸른 유약을 발라 꽃·새·산수·인물 등 다양한 그릇을 넣어 예술성이 높아졌는데, 중국에서 수입하던 푸른 유약을 자체 개발·생산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나무공예가 뛰어나게 발전한 것도 특기할 사실이다.장롱, 책상, 소반, 의자 등 실생활과 문방도구로서 실제 기능을 가진 나무공예의 발전은 조선후기 산업발달에 따라 주민생활의 문화수준이 높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쇠뿔을 쪼개어 아름다운 무늬를 표현하는 화각(華角)공예의 발달은 조선 특유의 멋이기도 하였다.

신재효[편집]

申在孝 (1812

1884)

조선의 판소리 작가.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호장(戶長), 본관은 평산(平山), 광흡(光洽)의 아들, 고창(高敞) 출생. 1850년(철종 1)까지 가사에 종사, 가난이 넉넉하여 지자 판소리 연구에 전심하여 여생을 작품생활에 바쳤다. 1876년(고종 13) 기민(飢民)을 구제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陞品)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겸직했다. 종래 계통 없이 불러 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赤壁歌)』 등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그 대문(對問)과 어구(語句)도 실감에 맞도록 고쳐 독특한 창의(創意)로 판소리 사설문학(社說文學)을 대성했다. 특히 『춘향전』 『박타령』 『토끼타령』 『심청전』 등을 창극화(唱劇化)했으며, 그의 전 작품은 서민적인 해학성(諧謔性)과 사실성(事實性)에 넘치고 있다.문하에는 김세종(金世宗)·정춘풍(鄭春風)·채선·허금 등의 명창을 길렀다. 시문집(詩文集)이 전한다.

춘향전[편집]

春香傳

조선 영조에서 순조 때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연애소설. 작자·연대 미상. 그 제작 동기에 대해서는 전설과 학설이 구구한데, 문헌상에 나타난 고증과 전설은 모두가 유동(流動)하는 설화에 불과하고 학설들은 대개가 추측일 따름이다.이는 <설화→판소리→소설>의 변이(變異) 진화과정에서 잡다한 설화가 이도령(李道令)과 춘향의 염정적 플롯에 곁들여 하나의 판소리로 응집(凝集)되어가는 도중, 차츰 암행어사설화(暗行御史說話)적인 열녀설화(烈女說話)의 요소가 삽입된 것으로 생각된다.『춘향전』은 판본 이본(異本)이 4종, 사본이 약 20여 종, 활자본이 50여 종, 번역본이 6, 7종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경판 『춘향전』과 완판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이다. 남원 부사(南源府使)의 아들 이도령이 퇴기(退妓) 월매(月梅)의 딸 춘향과 연애를 하였는데, 부사가 서울로 벼슬이 갈리어 두 남녀는 잠시 이별을 한다.그런데 새로 온 부사 변학도(卞學道)는 호색가여서 춘향이 절세 미인이란 말을 듣고 수청(守廳)을 강요하자 춘향은 죽기를 맹세코 이를 거절하니 하옥(下獄)되고 말았다. 한편 도령은 서울로 올라가자 열심히 학업을 닦아 문과에 급제하여 마침 호남지방의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 온다.춘향이 옥중에서 신고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부사의 생일 잔칫날에 각읍 수령(守令)이 모인 틈을 타서 어사출도를 단행하여 부사를 봉고파직(封庫罷職)시키고 춘향을 구해 재회(再會)한다는 이야기이다. 『춘향전』은 순수한 연애와 평등 사상을 고취한 문학으로서, 조선 소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1957년 이가원(李家源)과 조윤제(趙潤W濟)의 완판 교주본(校註本)이 각각 나왔고, 1958년 구자균(具滋均)이 『문리논집(文理論集)』 제3집에 경판본을 주석(註釋)한 것이 있다.

판소리[편집]

조선 후기 중부 이남 지방에서 서민들이 창극에 붙여 부르던 노래.일정한 극적 내용을 광대 혼자 육성과 몸짓의 창극조로 두서너 시간씩 부르던 민속악으로서, 우리 향토의 선율을 토대로 여러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키고 여기에 극적인 효과를 넣어서 특색을 갖도록 한 국악의 하나이다.판소리의 발생은 숙종 무렵이었는데 춘향가·심청가 등 무당의 열두 굿과 같이 열두 마당으로 꾸며졌다. 판소리는 그 후 신재효(申在孝)가 크게 발전시켰다.

김천택[편집]

金天澤

조선 영조 때의 가인(歌人). 호는 남파(南派). 숙종 때 포교(捕校)를 지냈다.창곡도(唱曲道)에 뛰어난 천재이며, 시조도 잘 지어서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했다. 그는 김수장과 함께 평민 출신으로, 경정산(敬亭山) 가단(歌壇)에서 후진을 양성했고, 시조의 정리와 발달에 크게 공헌했다.

김수장[편집]

金壽長 (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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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가인(歌人). 호는 노가재(老歌齋). 숙종 때 병조 서리(書吏)를 지냈다. 영조 22년(1746) 『해동가요(海東歌謠)』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동왕 31년(1755)과 동왕 39년(1763) 1·2차 편찬사업을 완료했다. 김천택과 교유했고, 말년에는 서울 화개동(花開洞)의 집을 노가재라 하여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다.

김홍도[편집]

金弘道 (1760

? )

조선 영·정조 때 풍속화의 대가. 호는 단원(檀園), 본관은 김해(金海). 영조 때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있으면서 왕세손의 얼굴을 그렸고, 정조 5년(1781)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그는 김응환(金應煥)에게 사사했으나 강렬한 개성으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한국적인 풍토 감각을 잘 표현했다. 풍속화에 있어서는 해학과 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도 그렸고, 채색의 농담(濃淡)으로 형체의 원근·고저를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화단에 고착된 중국 북화(北畵) 양식을 탈피하여 대담하게 남화 양식을 시도해서 신선한 조형미를 완성했다. 작품으로 「신선도병풍」 「풍속화첩」 「투견도」 「소림명월도」 등이 있다.

신윤복[편집]

申潤福 (1758

? )

조선 후기의 풍속화의 대가. 호는 혜원(蕙園), 본관은 고령(高靈). 화원으로서 벼슬은 첨정(僉正)에 올랐다. 시정 촌락의 풍속도 중에서도 기녀(妓女)·무속(巫俗)·주점의 색정적인 면을 많이 그린 풍속화가로서 현실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이는 유교주의 사회에 대한 예술면에 있어서의 항의였고, 인간주의의 표방이었다. 작품으로 「주유도」 「단오수변희희도」 「주막도」 등이 있다.

김정희[편집]

金正喜 (1786

1856)

조선의 고증학자(考證學者)·금석학자(金石學者)·서예가.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을 비롯 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 (老果) 등. 본관은 경주, 이조 판서 노경(魯敬)의 아들. 그의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박제가(朴劑家)에게서 수업하고 1819년 문과에 급제,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세의 거유(巨儒)로 명성을 떨치던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 등과도 막역하게 지냈으며,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완당에게 기증까지 하였다.1840년(헌종 6)에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고, 1851년(철종 2) 헌종묘천(憲宗廟薦) 문제로 북청(北靑)에 귀양갈 때 66세의 노구로 귀양생활이 도합 13년이나 되었다. 그는 특히 금석(金石)·도서(圖書)·시문(詩文)·전예지학·묵화(墨畵)에 뛰어났고 서법도 독창적인 추사체(秋史體)를이룩한 명필가로 유명하다.학문에 있어서는 고증학(考證學)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발견,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청화백자[편집]

靑華白磁

조선 후기에 발달한 자기의 일종. 조선초에는 회회청(回回靑)이란 청색의 안료(顔料)를 중국에서 수입해온 관계로 청화백자는 극히 귀하였고, 민간에서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정조 때 국내산(國內産) 안료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하게 되어 청화백자가 크게 발달한 것이다. 푸른색만을 써서 산수·화조(花鳥) ·초목 등을 붓으로 슬쩍 그려서 구운 이 백자는 청·홍·녹(綠) ·자(紫) 등 여러 색깔을 사용한 당시의 중국이나 일본의 색채도자기와는 판이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이 속에는 한국적인 야취(野趣)에 넘치는 소박한 시감(詩感)이 깃들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