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문화의 새 기운/실학의 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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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융성〔槪說〕[편집]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 실학을 하나의 학파로서 형성한 사람은 숙종 때의 이익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성호사설』로서, 여기에는 그의 다채로운 학풍이 나타나 있다. 이익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가 배출되어 실학은 점차 학계의 주도적인 학문으로 등장하였다.그 후 영조, 정조, 순조 때에 이르러 실학은 극성기에 달하였다. 더구나 정조 때에는 규장각이라는 학문연구소가 설치되어 실학자들이 등용되고, 서얼 출신의 학자들도 채용되었다. 이리하여 많은 유용한 서적들이 편찬되었는데, 영조 때에는 『속대전(續大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속오례의(續五禮儀)』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등이 편찬되었다. 또 정조 때에는 『대전통편(大典通編)』 『문원보불』 『동문휘고(同文彙攷)』 『추관지』 『탁지지』 『무예도보통지』 『해동농서』 『전운옥편(全韻玉篇)』 등 여러가지가 있어, 이러한 편찬사업의 성행은 세종·성종 때에나 비길 성황이었다.이 같은 영·정조 시대의 문운(文運)의 흥기에다가 새로 청조(淸朝)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학은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수많은 실학의 대가들이 나타나 각기 특색있는 학풍을 가지고 찬란한 학문적 성과를 낳았다. 즉 역사에는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치윤의 『해동역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유득공의 『사군지(四郡志)』 『발해고(渤海考)』가 있으며, 지리에는 이중환의 『택리지』, 신경준의 『강계고(彊界考)』 『도로고(道路考)』 『산수고(山水考)』,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정약용의 『강역고(疆域考)』 『대동수경(大東水經)』 등이 있고, 정상기(鄭尙驥)의 『팔도분도(八道分圖)』,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있었다. 또 국어학에는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유회의 『언문지(諺文志)』가 유명하고, 금석학(金石學)에는 김정희의 『금석과안록』, 농학에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동물학에는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 의학에는 정약용의 『마과회통(麻科會通)』이 있었다. 이러한 중에서도 특히 정약용은 여러 방면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실학 최대의 학자로 불리고 있다. 그의 학문적 업적 중에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의 3부작은 가장 빛나는 부분이었다. 실학이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했지만, 위에서 예거한 실학자들은 대개 농촌을 토대로 하여 조선사회의 현실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학문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었다. 그들의 사고는 다분히 복고적(復古的)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이 그리는 이상국가는 유교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박제가·박지원·홍대용·이덕무 등이 대표적 존재인 실학의 다른 일파가 있어 이를 북학이라고 하며, 그들의 저술로는 『북학의』 『열하일기』 『담헌서』 등이 있다.

이익[편집]

李瀷 (1681

1763)

조선 영조 때의 남인(南人)학자.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 본관은 여주(驪州). 대사헌(大司憲) 하진(夏鎭)의 아들. 1705년(숙종 31) 증광과(增廣科)에 합격하였으나, 그의 형 이잠(李潛)이 당쟁으로 희생된 후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몰두, 유형원(柳馨遠)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의 대가(大家)가 되었으며, 특히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율산(律算)·경사(經史)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1727년(영조 3)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으로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저술(著述)에 힘쓰는 한편 서학사상(西學思想)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천문략(天文略)』 『전주실의(天主實義)』 『주제군징(主劑軍徵)』 『칠극(七克)』 『진도자증(眞道自證)』 등을 연구하였다. 그는 평생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광주(廣州) 첨성리(瞻星里)에 머물러 학문을 연마하였으나 항상 국가 부흥을 위한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저술하여 불교와 세유(世儒)의 무실(無實)한 학풍을 배격하고 실증적(實證的)인 사상을 확립시켰다.역사 서술의 태도에 있어서도 종래의 방법을 버리고 비판적·고증적(考證的)인 파악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당쟁의 폐단은, 이해(利害)의 투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양반이 실제적인 실업(實業)에 종사하지 않고 관직을 얻음으로써 재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한정된 직제(職制)에 대해 너무 많은 수의 관리가 배출되므로 자연히 당파싸움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양반계급의 생업(生業) 종사와 과거제도의 잡다를 피하고 관리 승진에 있어서 신중을 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토지경작(土地耕作)을 기본적인 경제정책으로 삼고 중국의 정전제(井田制)를 이상(理想)으로 한 한전법(限田法)의 시행을 제창하였다. 그 후 이익의 사상은 제자 안정복(安鼎福)·이가환(李家煥)·이중환(李重煥)·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권철신(權哲身) 등에 의하여 연구 계승되고 정약용(丁若鏞)이 집대성하였다. 그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죽은 후 조정에서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여 생전의 공로를 추모하였다.

『성호사설』[편집]

星湖僿說

성호 이익의 대표적인 저서. 이 책에는 성호의 천문·지리·역사·제도·군사·풍속·문학 등에 걸친 넓고 깊은 학식이 집성되어 있으니, 가장 정채(精彩) 있는 실학의 대저술이다. 이 사설은 원래 중복이 많고 편질(編帙)이 컸는데, 그의 제자 안정복이 내용에 따라 유편(類編)을 마련하고 정리하여 약 반쯤되는 분량으로 편찬하였으니, 이것이 『성호사설유선(類選)』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성호사설』이라 하면 이 『성호사설유선』을 가리킨다. 『성호사설』은 모두 10권으로, 천지편·만물편·인사편·경사편·시문편으로 나누어진다. 각 편은 또 문(門)으로 나누어지며, 거기에 다시 세목을 붙여 종류에 따라 편집하고 편자 자신의 소주(小註)를 달았다.

정조의 탕평책[편집]

正祖-蕩平策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正祖, 1776

1800)는 비명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영조의 탕평정치를 계승하였다. 이를 위해 할아버지 영조와 마찬가지로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남인의 고학(古學), 서울 노론의 북학(北學)은 물론이요, 불교와 한당유학에 이르기까지 왕권강화에 필요한 여러 학문을 넓게 수용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완론탕평’과 달리 당파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준론탕평(峻論蕩平)’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노론 벽파를 견제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왕권강화가 어렵다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정조는 세손 때부터 닦은 학문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자신의 정책을 따르는 신하를 직접 기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100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학자군주로서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과시하였다.정조는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기구를 원하였다. 그것이 바로 즉위 초(1776)에 창덕궁안에 세운 규장각(奎章閣)이다. 이곳에는 수만권의 한국책과 중국책을 모으고, 젊은 학자들은 학사(學士)로 임용하여 그들에게 문한(文翰)의 기능, 비서실의 기능, 그리고 과거시험 주관기능 등 여러 특권을 부여하였다. 특히 당하관 관료의 재교육을 위해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여 시험성적에 의해 승진시킴으로써 정조의 학문과 정치노선을 강하게 주입시켰다. 규장각은 바로 정조시대 문예부흥과 개혁정치의 산실이 되었다.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서 반대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친위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러한 목적에서 창설된 부대가 장용영(壯勇營)이다. 규장각이라는 친위적 엘리트 집단과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장악한 정조는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을 자처하면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였다.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이 자신의 정통성과 관련된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에 대해 극진히 효도를 하였다. 1796년(정조 20년)에 양주에 있던 아버지 묘소를 수원(水原)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현륭원 북쪽의 팔달산 밑에 새로운 성곽도시로서 화성(華城, 지금의 수원)을 건설하였다(정조 20년, 1796). 서양의 건축기구들을 참고하여 정약용 등 실학자들로 하여금 거중기, 녹로 등을 제작케 하여 당시로서는 최신의 과학적 공법으로 이룩된 화성(華城)에는 행궁(行宮)과 장용영(壯勇營)의 외영(外營)을 두었으며, 대유둔전(大有屯田)이라는 국영농장을 설치하여 화성경비에 충당하고, 만석거(萬石渠)와 만년제(萬年堤) 등 수리시설을 개선하였다. 한편, 상공인(商工人)들을 유치하여 상업도시, 농업도시, 군사도시로 키웠다. 화성은 정조의 혁신정치를 상징하는 시범적인 자급도시였다.정조는 화성을 건설한 후 북방의 개성(松都), 서방의 강화도(沁都), 동방의 남한산성(廣州)을 함께 묶어 서울을 비호하는 네 개의 위성도시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서울을 중국 고대의 수도인 장안(長安)과 동등한 도시로 위상을 높였다.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화성에 행차하였는데, 대략 2,000명의 수행원과 800필의 말이 행차를 따름으로써 그 위엄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행차의 편의를 위해 새로이 신작로(新作路, 지금의 시흥대로)를 만들고, 한강에는 80여 척의 배를 동원하여 배다리(舟橋)를 건설하였으며, 행차기간에 지방유생들 및 일반주민들과 가깝게 어울리면서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특히 정조의 아버지, 어머니(惠慶宮 洪氏)가 동시에 회갑을 맞이하는 1795년(정조 19년)의 행차는 규모가 가장 컸다. 이 행사에 관련된 일정, 비용, 참가자 명단, 그리고 행차그림 등을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1797)로 편찬하여 행사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궁정화가들로 하여금 주요행사를 대형 병풍그림으로 제작하게 하였다. 이 병풍그림이 지금 여러 종류가 전해져 당시의 정치와 문화수준이 어떠했던가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정조는 8도의 지방유생들을 포용하기 위해 각 도별로 유생의 명단인 『빈흥록(賓興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정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안정과 문화부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폈다. 정조는 계지술사(繼志述事)를 내걸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국가경영을 혁신하고자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통공정책(通共政策, 1791)을 써서 시전상인들의 자유상인 통제권(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자유상업을 진작시키고, 전국 각지의 광산개발을 장려하였다. 이로써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고, 서울은 인구가 집중되어 도성 밖에 새마을(신촌)이 곳곳에 형성되고, 한강에는 많은 상선(商船)들이 출입하면서 포구가 늘어났다. 한편, 정조대에는 재야사림이 주관하던 군현단위의 향약을 수령에게 맡겨 지방사족의 발호를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정조[편집]

正祖 (1752

1800)

조선의 제22대 왕(재위:1777

1800). 이름은 성(?),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아들. 어머니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비는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시묵(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 1762년 아버지가 원통하게 죽은 뒤 효장세자(孝章世子: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1755년 늙은 영조를 대신하여 국정(國政)을 다스렸으며, 이듬해 영조가 죽자 즉위했다. 영조 말년 이래 집권하여 오던 벽파(僻派) 일당이 그를 옹호해왔던 시파(時派)를 탄핵하자 이들 벽파를 추방했고, 이어 모역(謀逆)하다 발각된 홍상간(洪相簡)·정후겸(鄭厚謙)·윤양로(尹養老) 등을 주살(誅殺). 유배하는 한편, 즉위 이듬해 그를 시해(弑害)하고 은전군(恩全君) 찬을 추대하려다 발각된 홍상범(洪相範) 일당을 주살하는 등 끈질길 벽파의 음모로 그의 지위까지도 위협당했으나, 홍국영(洪國榮)을 중용(重用)하여 아버지 장헌세자를 죽이게 한 벽파 일당의 음모를 분쇄케 했다. 그러나 홍국영이 그의 총애를 빙자하여 횡포를 자행하고 세력 유지를 위해 왕통(王統)을 바꾸려 획책하자, 1780년 그를 전리(田里)에 방축(放逐)함으로써 홍씨 세도 정권(洪氏勢道政權)을 무너뜨렸다. 이후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蕩平策)으로 일관하였고, 숙종 이후 실각했던 남인(南人)을 등용하고, 서북인(西北人)을 채용, 한편 서인(庶人)도 기용했고, 1791년에는 신해사옥(辛亥邪獄)을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했으나, 천주교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역대 서적을 보관하고 세손 때부터 활자(活字)에 관심이 깊어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는 한편으로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여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문원보불(文苑??)』 『동문휘고(同文彙考)』 『규장전운(奎章全韻)』 『오륜행실(五輪行實)』 등을 간행하게 했고,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도 완성했다. 특히 남인학자를 우대하여 주자학의 공리 공론적인 학풍을 배격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實學)이 크게 발전하는 등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했다. 제도 개편에도 힘써 형정(刑政)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켰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 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 한편 빈민의 구제를 위해 자율전칙(字恤典則)을 반포했다. 능은 건릉(健陵)에 있다.

규장각[편집]

奎章閣

왕실 학문연구기관. 정조 1년(1776) 궐내에 설치한 것으로,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 서화, 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기관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당시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환관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경사를 토론케 하여 정치의 득실과 백성의 질고(疾苦) 등을 살피게 하는 데 있었다. 또한 문교를 진흥시키고 타락된 당시의 풍습을 순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관원으로는 제학·직제학·직각(直閣)·대교(待敎)·검서관(檢書官)이 있었다. 규장각은 조선 후기의 문운을 불러일으킨 중심기관으로 많은 책을 편찬했으며, 여기에는 실학자와 서얼 출신의 학자들도 채용되었다.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으며, 경술국치 후 규장각의 장서는 조선총독부가 접수하여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추관지』[편집]

秋官志

형조의 소관 사무를 모아 정리 편찬한 책으로, 정조 5년(1781)에 형조판서 김노진(金魯鎭)이 형조의 원외(員外) 박일원(朴一源)에게 위탁하여 편성했다. 본문은 5편으로 분류되었는데 제1편은 수편(首編), 제2편은 상복부(詳覆部), 제3편은 고율부(考律部), 제4편은 장금부(掌禁部), 제5편은 장례부(掌隷部)이다. 이 책에는 주로 효종 이후 영·정조 시대의 자료가 대부분으로, 형사법의 연혁과 재판심리의 실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탁지지』[편집]

度支志

조선 호조의 옛 사례를 모은 책. 『탁지지』는 정조 12년(1788) 박일원(朴一源)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하였다. 크게 내편·외편으로 나누어지고, 내편 관제부는 또다시 호조·속사(屬司)·직장(職掌)·이예(吏隸)·늠록·관사(館舍)·잡의(雜儀)·고적 사례의 9목(目)으로 나누었다. 외편은 판적사(版籍司)·회계사·경비사(經費司)의 3부로 나누고 그 밑에 각기 판도(版圖)·전제·조전(漕轉)·재용(財用)·공헌(貢獻)의 5목, 창고·조적·해유(解由)의 3목 및 오례(五禮)·경용(經用)·요록(料錄)·황정(荒政)의 4목으로 나누고 있다.

『무예도보통지』[편집]

武藝圖譜通志

24기(技)의 무예를 설명한 책. 정조 명찬(正祖命撰)으로 동왕 14년(1790)에 편찬되었다. 원래 조선의 무예는 궁시(弓矢)의 기(技)뿐이었는데, 명인(明人)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얻게 되자 한교(韓嶠)가 곤봉 등 6기를, 다시 영조 때 죽장창(竹長槍) 등 12기를 늘려서 18기를 만들게 되었다. 정조 때 기예(騎藝) 등 6기를 다시 추가하여 24기로 만들게 되었고, 이것을 도보로 하여 『무예도보통지』라고 일컫게 되었다.

『대전통편』[편집]

大典通編(6권 5책·인본)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속대전(續大典)』 및 그 이후에 임금이 내린 교명과 현행법을 증보하여 편찬한 책. 1785년(정조 9)에 김치인 등이 왕명에 의해 편찬하였다. 『경국대전』의 예에 따라 서술하고, 대전의 본문에는 원(原), 속대전의 본문에는 속(續), 새로 증보한 것에는 증(增) 자를 음각(陰刻)해 넣어 서로 구별하였다.

안정복[편집]

安鼎福 (1712

1791)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순암(順菴), 본관은 광주(廣州). 그의 가계는 당시 세력을 잃은 남인으로 기호(畿湖) 간에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생활하던 광주 안씨였다. 유년시절에는 하급관리이던 조부를 따라서 여러 곳에서 보냈고, 중년 이후에는 광주 덕곡(德谷)에 정착하여 일생을 마쳤다. 안정복이 광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학문에 한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다시 경세치용학파의 대종(大宗)인 성호 이익이 광주에 살고 있어서 안정복은 성호의 문하에 갈 수 있었고, 따라서 일생 동안 성호에게 사사하면서 그의 학풍을 계승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주자의 학설을 신봉하면서 그것에 의한 실천궁행에 힘쓸 뿐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를 즐기지 않아 학문적 태도에 있어서 사제간에 대비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관 및 사론은 성호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전반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발전 주류의 계통화는 조선역사의 체계적 파악 가능성을 높였다.

역사 편찬[편집]

歷史編纂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애국심이 높아지고, 또 흐트러진 제도와 문물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민족지향적인 국학(國學)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역사의식을 부추기는 사서(史書)들이 잇따라 편찬되었다. 다시 말하면, 법고창신의 개혁의지가 자연스럽게 역사의식의 발달을 부추겼다. 왜란 직후에 편찬된 대표적 역사서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1614

1615),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簒要)』(1601

1514), 그리고 조정(趙挺)의 『동사보유(東史補遺)』(1630년경) 등이다.한백겸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는 고대 지명을 새롭게 고증하여 역사지리 연구의 단서를 열어 놓았다. 특히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 조선, 남쪽에 삼한(한국)이 위치했다는 것과 고구려의 발상지가 평안도 성천(成川)이라는 통설을 뒤집고 만주지방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고증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오운의 『동사찬요』는 임진왜란 때 경상도에서 의병에 참여했던 경험을 살려 역대 애국 명장의 활약을 크게 드러내고, 기자(箕子) 이후 유교문화의 전통을 자랑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하려 하였다.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는 중국을 사실 이상으로 큰 나라로 보는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 역사의 유구성과 문화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것과 한사군이 조선 땅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한반도에 붙여 온 고대의 여러 지명이 사실은 만주에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고증하여, 잃어버린 만주땅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주었다. 또한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한 세계 50여 국의 지리·풍속·물산 등을 소개하여 세계에 대한 시야를 넓혀준 것도 이 책의 중요한 공헌이다.조정의 『동사보유』는 그동안 무시되었던 『삼국유사』의 신화·전설들을 많이 수록하여 단군에서 고려말에 이르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한편, 호란을 경험하고 난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북벌운동을 고취하는 사서와 이를 비판하는 시각에서 쓰여진 사서가 양립되었다. 먼저 북벌운동을 고취하는 대표적 사서는 현종 때 서인 유계(兪棨)가 쓴 『여사제강(麗史提綱)』(1667)이다. 송시열 등 내수외양의 북벌론자들의 칭송을 받은 이 책은 고려가 자치자강(自治自强)에 힘쓰면서 북방족에게 강력히 항전한 것과, 재상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사실을 강조하였는데, 뒷날 노론 사이에 가장 추앙받는 사서가 되었다.이와 반대로 북벌운동과 붕당정치를 비판하는 시각에서 쓰여진 대표적 사서는 근경남인 허목의 『동사(東事)』(1667)이다. 이 책은 현종 때 써서 숙종에게 바쳐졌는데, 그 내용은 신성한 제왕(帝王)으로 인후(仁厚)한 정치를 편 단군·기자·신라를 중국의 삼대(三代)에 비유할 만한 이상시대로 그려내고, 우리나라의 자연환경과 풍속·인성(人性)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그에 맞는 정치를 촉구하였다. 다시 말해 전쟁보다는 도덕과 평화를 사랑하고, 제왕(帝王)이 권위를 가진 정치가 나라를 오래 보전하는 방책이라는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비슷한 시기에 영남남인 홍여하(洪汝河)가 쓴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1672)과 『휘찬여사(彙纂麗史)』(1639년경)도 우리나라가 기자로부터 도덕과 평화를 사랑하는 유교국가였음을 강조하고, 그 전통이 마한을 거쳐 신라로 이어져 왔다고 하여 기자-마한-신라를 정통국가로 내세웠다. 홍여하는 송시열 일파와 예론에서 첨예하게 맞섰던 인물로서 왕권강화를 강조하고 붕당정치의 폐지를 역설하였다. 이 책은 그 후 영남인들 사이에 가장 추앙받는 사서가 되었다. 18세기에는 대체로 서인과 남인의 역사의식을 계승하면서 이를 한 단계 높은 문헌고증방법에 의해 심화시킨 역사서술이 나타났다. 소론파에 속하는 홍만종(洪萬宗)의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1705), 임상덕(林象德)의 『동사회강(東史會綱)』(1711),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1797), 이종휘(李鍾徽)의 『동사(東史)』와 남인계에 속하는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1778),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疆界考)』 그리고 노론계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1784) 등이 그것이다.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은 단군을 정통국가의 시발로 하여 기자-마한-통일신라로 이어진다고 보고, 삼국은 정통이 없는 시대로 간주하였으며, 고려·조선의 역사는 왕실을 중심에 두고 서술하였다. 이러한 단군정통론은 이익과 안정복에 의해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임상덕의 『동사회강』은 유계의 『여사제강』을 계승하면서 여기에 고대의 강역과 단군·기자에 관한 고증을 첨가하였는데, 이는 뒤에 『동사강목』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지금까지의 명분론에 입각한 역사의식과 실증적 역사연구를 집대성하였다는 점에서 조선후기의 대표적 통사(通史)로 꼽힌다. 또한, 이종휘는 고구려 전통을 강조하면서 만주수복을 희구하고, 유득공은 발해를 신라와 대등한 국가로 인정하여 남북국사로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의의를 지닌다. 신경준의 『강계고』는 한백겸의 역사 지리 연구를 계승·발전시킨 역사지리 전문서로서 이름이 높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400여 종의 야사(野史)를 참고하여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객관적 입장에서 서술하고, 우리나라 역대의 문화를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자료적 가치가 크다.

『동사강목』[편집]

東史綱目

고대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의 체제에 따라 편찬한 편년체 사서(史書). 『동사강목』은 무엇보다 먼저 『동국통감』의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첫째 『동국통감』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을 붙인 것은 부당하므로 위만조선 대신에 마한을 정통으로 삼아야 하며, 둘째 『동국통감』에 단군·기자를 모두 외기(外紀)에 넣은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 흐르는 사상은 애국적 사상과 애민적(愛民的)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본편 17개 권 속에 한결같이 흐르고 있다. 이 본편 외에 『동사강목』의 가치를 한결 높여준 것은 마지막의 부권(附卷)이다. 여기에는 고이(考異)·괴변설(怪辯說)·잡설(雜說)·지리고(地理考) 등의 4개 편목(篇目)이 들어 있고, 각 편에는 다시 여러 개의 개별적 문제들이 취급되어 있다. 『동사강목』은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서 근대 계몽기에 이르러 학문적·사상적 영향이 더욱 현저하였다.

한치윤[편집]

韓致奫 (1765

1814)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옥유당, 본관은 청주(淸州). 정조 13년(1789)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임관(任官)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약관(若冠)에 문명(文名)이 출중하였으며, 정조말에 친척 형인 치응(致應)의 입연사행(入燕使行)에 수행하여 연경(燕京)에서 청의 선진 문물을 직접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학문과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귀국 후 불후의 대작인 『해동역사』 71권을 찬술하였다.

『해동역사』[편집]

海東繹史

조선 후기의 실학자 한치윤이 지은 사승(史乘). 이 책은 총 85권으로 이루어져, 원(原)편 70권은 한치윤이 편찬하고, 속편 15권은 그의 종자(從子) 한진서(韓鎭書)가 저술했는데 완성된 것은 순조 23년(1823) 때였다. 내용을 보면, 원편 70권 중 권1

권16은 단군조선

고려까지의 제국(諸國)의 세기(世紀), 권17은 성력(星曆), 권18권

권22는 예악(禮樂), 권23은 병지(兵志), 권24는 형법, 권25는 식화(食貨), 권26

권27은 물산, 권28은 풍속, 권29는 궁궐, 권30

권31은 관제, 권32는 석가(釋家), 권33

권41은 교빙(交聘), 권42

권59는 예문(藝文), 권60은 숙신(肅愼), 권61

권66은 비어(備禦), 권67

권70은 인물을 기술하였으며, 속편 15권은 지리 서술에 충당하고 있다.

이긍익[편집]

李肯翊 (1736

1806)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연려실(燃藜室), 본관은 전주(全州). 어려서 아버지 광사(匡師)에게 수학하여 학문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실학을 제창하고 고증학파 학자로서도 유명하였다. 그의 집안은 소론에 속하였는데, 노론의 집권으로 여러 번 귀양살이를 했다. 저작이 많았으나 겹치는 귀양살이로 대부분 유실되고, 조선 왕조 야사(野史)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연려실기술』이 전해진다.

『연려실기술』[편집]

燃藜室記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편찬한 조선왕조 야사의 총서(總書). 이 책은 원집·속집·별집의 세 편으로 되어 있다. 원집은 조선 태조 때부터 18대 왕 현종 때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왕조별·사건별로 수록하고, 각 왕조 기사의 끝에는 그 왕조의 상신(相臣)·문형(文衡)·명신의 전기를 부기하고 있다. 속집은 제19대 왕인 숙종의 재위 47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원집의 형식대로 수록하고 있다. 별집은 조선시대의 관직을 비롯하여 전례·문예·천문·지리·변위(邊圍)·역대 고전 등으로 편목(篇目)을 나누어 연혁을 수록하였고, 인용서명을 부기하고 있다. 원집·속집은 정치편이라 볼 수 있고, 별집은 문화편이라고 볼 수 있다.

유득공[편집]

柳得恭 (1748

?)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호는 냉재(冷齋), 본관은 문화(文化). 일찍이 진사에 합격하여 정조 3년(1779) 규장각 검서(檢書)가 되었으며, 포천(抱川)·제천(堤川)·양근(楊根) 군수를 지냈다. 외직(外職)에 있으면서도 검시의 직함을 가져 세상에서 이덕무·박제가·서이수(徐理修)와 함께 4검서로 불린다. 그는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의 제자로 이덕무 등과 더불어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산업진흥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제가·이덕무·이서구(李書九)와 함께 한학4가(漢學四家)라고도 불리었다.

이중환[편집]

李重煥 (1690

1760)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청담(淸談)·청화산인(靑華山人), 본관은 여주(驪州). 이익의 문인. 숙종 39년(1713) 문과에 급제하여 동왕 43년(1717) 김천(金泉)의 도찰방(道察訪)이 되었다. 그의 장인은 목호룡(睦虎龍)이라는 사람으로 그가 경종 2년(1722) 신임사화에 관련되었다 하여 영조 때 사형되자 이중환도 화를 입어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왔다. 그는 노후에 『택리지』를 지어 실학사상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택리지』[편집]

澤里志

영조 때의 실학자 이중환이 저술한 지리책. 이 책의 내용은 대체로 전반의 「팔도총론(八道總論)」과 후반의 「복거총론(卜居總論)」의 2편으로 나누어진다. 「팔도총론」에는 조선 전토를 팔도로 나누어 그 지방의 지역성을 출신 인물과 결부시켜 밝혔고, 「복거총론」에는 살 만한 곳을 입지조건을 들어 설명하였다. 전자는 지방지지(地方地誌)에, 후자는 인문지리적 총설에 해당한다. 전반에서는 특히 사람과 자연환경과의 관계를 중시한 지인상관론(地人相關論)을 설파했으며, 후자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다음과 같은 입지조건을 들고 있다. 첫째 지리적 조건을 들었으며, 둘째 생리(生利)를 들었다. 셋째로는 인심을 들었으며, 넷째로 산수의 경치가 좋은 것을 들었다. 끝에 가서 해거(海居)·강거(江居)·계거(溪居)의 세 곳을 비교하여 말하였다.

신경준[편집]

申景濬 (1712

1781)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호는 여암(旅庵), 본관은 고령(高靈).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관직과 성률(聲律)·의복(醫卜)·법률·기서(奇書)에까지 통달했으며, 실학사상에 근거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지리학을 개척했다. 영조 30년(1754) 문과에 급제한 이래 전적(典籍)·정언(正言)·장령(掌令)·사간 등을 역임했다. 동왕 46년(1770)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여지고(輿地考)를 담당하였으며, 이어 『팔도지도(八道地圖)』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그 후 여러 곳의 지방관을 지내다가 정조 3년(1779) 고향 순창(淳昌)에 돌아갔다. 앞서 영조 26년(1750)에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첫 업적을 남겼다.

지리지와 지도 편찬[편집]

地理志-地圖編纂

16세기경부터 향촌사회의 발전에 부응하여 각 군읍단위의 읍지(邑誌)가 편찬되기 시작하더니 왜란이후 황폐된 향촌사회의 재건과 관련하여 각 지방의 수령 혹은 유지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읍지편찬이 활기를 띠었다. 그리고 읍지를 바탕으로 도(道) 단위 혹은 국가단위의 지지(地誌)가 편찬되었는데, 18세기 영정조 시대에는 국가사업으로 문화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고, 그 가운데 우리나라 지리를 정리한 『여지고(輿地考)』가 신경준에 의해 편찬되었다. 한편, 16세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이후 이를 보완하는 작업이 숙종때부터 시작되어 영조 때에는 『여지도서(輿地圖書)』라는 방대한 전국지리지가 완성되었다. 한편, 16세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이후 이를 보완하는 작업이 숙종 때부터 시작되어 영조 때에는 『여지도서』라는 방대한 전국지리지가 완성되었다. 이 책은 처음으로 군현별로 채색 읍지도(邑地圖)가 첨부되었다는 점에서도 『동국여지승람』보다 발전된 형태를 보였다.

관찬지리지가 주로 국방이나 재정 등 행정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각 지방의 자연과 풍속, 인심, 그리고 물산 등 인문지리적 지식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민간지리지도 많이 편찬되었다. 17세기 중엽 허목은 『지승(地乘)』을 써서 우리나라를 몇 개의 풍토권과 문화권으로 나누어 각 지방문화의 특성을 찾아내고, 중국과 다른 인문지리적 특성을 설명하였다. 특히 그는 풍토(風土)가 인성(人性)에 영향을 준다는 주목할 만한 시각을 제시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유형원은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를 썼고, 18세기 중엽 이중환(李重煥)은 30년 간의 국토답사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선배 남인학자들의 인문지리서를 계승, 발전시켜 『택리지(擇里志)』(일명 八域志)를 편찬했다. 이 책은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우리 국토를 작은 구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의 인심·산천·인물·풍속·산물을 소개하면서 어느 곳이 선비들이 살기좋은 곳인가를 논하고 있는데, 자연과 인간생활의 관계를 인과적으로 이해하려 한 것이 주목된다. 이 책은 또한 노론집권층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담겨져 있다. 이 밖에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와 『산수경(山水經)』, 작자 불명의 『산경표(山徑表)』 등은 우리나라의 산과 강, 그리고 도로 등을 정리한 것으로 국방과 경제, 그리고 행정상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산경표』는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의 산과 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오늘날의 지질학적 특성을 바탕으로 한 산맥체계와는 매우 다르다. 조선후기의 지리학은 우리 국토의 고유한 특성을 풍수지리의 시각에서 이해하면서도 이를 과학적으로 발전시켜 민족지리학의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19세기에 들어와 김정호(金正浩)와 같은 큰 지리학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에 그 토대가 마련된 까닭이다. 한편 왜란과 호란이후로 국방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국가사업으로 수많은 관방지도(關防地圖)가 제작되었으며, 비변사가 이를 관리하였다. 그 밖에 행정용 지도들도 대량으로 제작되어 동아시아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도문화를 건설하였다. 17

18세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지도들은 세계지도와 동아시아지도, 우리나라 전도, 도와 군현, 그리고 군사요새지인 진(鎭)지도 등 종류가 다양하고, 화원들이 채색을 넣어서 보기에도 매우 아름다웠다. 그 중에는 숙종대에 내수외양의 북벌정신을 담은 10폭병풍의 방대한 「요계관방도(遼?關防圖)」가 있는데, 우리나라 북방지역과 만주, 그리고 만리장성을 포함하여 중국 동북지방의 군사요새지(關防)가 상세히 그려진 걸작이다. 조선후기 지도제작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사람은 영조대의 정상기(鄭尙驥)·정항령(鄭恒齡) 부자다. 정상기가 만든 「동국지도」는 최초로 백리척(100리를 1척으로 함)을 사용하여 지도 제작의 과학화에 기여하였다. 백리척 지도는 그 후 널리 유행되었으며, 뒷날 동양 최고의 지리학자로 평가되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 및 「청구도(靑丘圖)」는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모눈종이를 사용한 지도도 유행하여 지도제작이 한층 정밀해졌으며, 음양오행의 풍수사항에 입각하여 국토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이해하려 한 것이 특색이다. 즉 백두산을 사람의 머리로 보고, 백두산에 뻗어내린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척추로, 제주도와 대마도를 두 다리에 비유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후기 채색지도는 수천 종에 달한다.우리나라 지도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이 제작한 세계지도도 조선후기에 수입되어 세계에 대한 지식을 한층 정확하게 가질 수 있었다. 이미 1603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권희(權僖)·이광정(李光庭)이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가져온 일이 있는데, 그 밖에 마테오 리치의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 페르비스트(南懷仁)의 「곤여전도(坤輿全圖)」, 「천형도(天形圖)」 「구라파국여지도」 등이 들어왔다. 이수광은 『지봉유설』(1614)에서 이러한 지도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가 중국에 대한 지리인식이 과장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세계 50여 개국을 소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서양지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조선정부는 세계지리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해 갔다.

김정호[편집]

金正浩 (?

1864)

조선의 지리학자.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 호는 고산자(古山子), 본관은 청도(淸道), 황해도 출생. 어릴 때 서울로 이주,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의 작성에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순조 말년 「청구도(靑丘圖)」 2첩을 완성했다. 그 후 「청구도」에 불만을 느끼고 다시 전국을 답사하여 1861년(철종 12) 「대동여지도(大東輿地 圖)」 2첩을 완성, 또한 『여지승람(餘地勝覽)』의 착오를 정정하고 보궐(補闕)하기 위해 32권 15책의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집필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손수 그려서 판각했으며, 이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정부에 의해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다는 죄목으로 각판(刻板)은 불태워지고 투옥되어 옥사했다.

「대동여지도」[편집]

大東輿地圖

김정호가 작성한 조선의 지도.

「청구도」의 자매편으로서, 그 내용을 보충했다. 사용에 편리하도록 분첩절첩(分帖折帖)식으로 만든 것이다. 지도 내용은 전국의 산천·해도(海島)·영아(營衙)·읍치(邑治)·성지(城池)·진보(鎭堡)·역참(驛站)·창고·목소(牧所)·봉수·능침(陵寢)·방리(坊里)·고현(古縣)·고진보(古鎭堡)·고산성(古山城)·도로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의 제작에 있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참고하였으며, 위도 측정에 다소 오차는 있으나 서양 지도학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지도학을 대성한 것이다.

『금석과안록』[편집]

金石過眼錄

추사(秋史) 김정희가 연구한 금석문(金石文)에 관한 책. 이 책의 제목으로 보면, 저자가 본 금석에 대한 논고라는 뜻이지만, 내용은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와 북한산 비봉(碑峰)에 있는 순수비의 2종에 대한 판독(判讀)·해설·고증을 시도한 것이다. 저자 김정희는 1백년 전에 벌써 고증학적인 형안(炯眼)으로 이 비에 대한 과학적인 논증을 가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편집]

科學技術-發展

조선후기에는 그동안 축적된 전통과학기술을 계승하면서, 중국에서 들여 온 서양과학·기술을 수용하여 한 단계 높은 과학이론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조선후기의 산업발전과 국력신장은 여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먼저 농업경영 및 농사기술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이 방면의 저서가 다수 출간되었다. 1655년(효종 6년)에 나온 신속의 『농가집성』은 쌀농사 중심의 수전농법을 소개한 것이다. 그 후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원예작물을 비롯하여 농업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농서의 출간이 요청되었다. 숙종 때 박세당의 『색경(穡經)』(1676)과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 영조 때 박지원의 『과농소초』, 그리고 정조 때 왕명으로 편찬한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海東農書)』 등은 새로운 농업경영에 바탕을 두고 편찬된 것이다.『색경』은 과수·축산·원예·수리·기후 등에 중점을 둔 것이고, 『산림경제』는 농업·임업·축산·양자·식품가공·저장 등 의·식·주 전반의 중요사항을 소개한 것이다. 『해동농서』는 우리 고유의 농학을 중심에 두고 중국 농학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한국농학의 새로운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다.축산·어업과 관련하여 동식물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색경』과 『산림경제』 등에도 이에 관한 설명이 있다. 한편, 정약용의 형 정약전(丁若銓)은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지어 어류학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흑산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 근해의 해산물 등을 직접 채집·조사하여 155종의 해산물에 대한 명칭·분포·형태·습성 등을 기록한 것이다.의학분야에서는 광해군 때 허준과 정작 등이 『동의보감』(1613)을 펴내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및 일본의 의학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수련도교의 영향을 받아 예방의학에 중점을 두고 값싼 시골 약재를 사용한 치료방법을 개발한 것이 특색이다. 허준은 이 밖에도 『벽온신방(?瘟新方)』(1612)·『신찬벽온방』(1613) 등을 저술하여 전염병 치료의 경험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도 하였다.허준과 같은 시기의 허임(許任)은 『침구경험방(針灸經驗方)』을 지어 침구술을 집대성하였으며, 그 뒤 박진희(朴震禧)·이헌길(李獻吉) 등은 마진(홍역)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키고, 정약용은 여러 마진에 관한 서적을 정리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1798)을 저술하였다. 특히 그는 박제가 등과 더불어 종두법을 처음으로 연구·실험하였다. 이러한 의학전통은 고종년 간에 와서 더욱 발전되어 황필수(黃泌秀)의 『방약합편(邦藥合編)』,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과 같은 명저를 낳게 하였다. 특히 후자는 인체를 태양·태음·소양·소음으로 나누어 치료하는 독특한 사상의학(四象醫學)으로 유명하다.천문학 분야에서도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다. 천리경(만원경)을 비롯한 천문기구가 들어오고, 서양역법이 전래되면서 우리나라 천문학 발달에 큰 자극을 주었다. 효종 때 김상범(金尙範)은 김육의 도움으로 서양역법을 배워 『시헌력(時憲曆)』을 만들었으며, 그 후 우리나라 사정에 맞는 역법이 계속 연구되어 마침내 『천세력(千歲歷)』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헌종 때 남병길(南秉吉)은 역산서(曆算書)를 정리하여 『시헌기요(時憲紀要)』를 편찬했다.이미 17세기 초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일식·월식·벼락·조수의 간만 등에 관하여 소개한 일이 있고, 17세기 말(숙종대) 김석문(金錫文)은 처음으로 지구가 1년에 366회씩 자전한다고 주장하여 천동설을 부정하였다. 그 후 18세기에는 이익·홍대용 등이 나와 서양과학에 대한 이해를 깊이 가졌다. 이익은 “만약 공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서양 천문학을 기준으로 할 것”이라고 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면 중국이 한가운데 있을 수는 없고 어느 나라든 세계의 중앙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홍대용은 지구자전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을 중심으로 우주를 해석하려는 입장에서 벗어나, 동물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면서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지구에서만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천체에도 인간과 비슷한 생명체가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였다.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정약용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오기 위해 이용감(利用監)이라는 관청을 두자고까지 제안하였다. 그는 기술의 진보가 인간사회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어 스스로 많은 기계를 제작하거나 설계하였다. 특히 정조가 청으로부터 5천여 권의 『고금도서집성』을 사들여 오자 그 속에 실린 테렝 장(Terreng Jean, 鄧玉?)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하여 거중기 등 건축기계를 제작하고, 한강에 가설한 배다리(舟橋)도 설계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정조가 화성(지금의 수원)을 축조하고 한강에 배다리를 건설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서양에서 들어온 과학기술로는 이 밖에도 인조 때 정두원(鄭斗源)이 명에서 가저온 화포(총)와 자명종(시계) 등이 있으며, 인조때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벨테브레(Weltevree, 朴淵)와 효종 때 표착한 하멜(Hamel) 일행은 우리나라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서양식 대포를 만드는 기술을 전해 주었다.조선후기에 수학도 일정하게 발전하였다. 서양의 수학책을 중국어로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기하학과 대수학 등 서양수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나타났다. 17세기 말 최석정(崔錫鼎)은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수학책을 써서 무한대와 무한소의 수학적 개념을 해명하였으며, 대수·기하 및 삼각과 관련된 실학적 문제들을 풀어냈다. 홍대용도 서양 과학의 본질은 실험기구와 수학에 있다고 생각하여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책을 썼다.조선 후기의 기술 발전은 주로 농업 및 의학과 관련된 분야에 집중되고, 교통·통신 그리고 제조업이나 군사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하였다. 이것이 서양에 비해 산업 혁명이 뒤지게 된 근본 이유다. 서양 과학 기술의 수용과 발전이 18세기까지만 해도 순탄하게 이루어졌으나, 19세기 정체되기 시작한 것은 서양 과학이 천주교와 더불어 전래되어 천주교 억압이 과학에 대한 관심을 냉각시켰기 때문이었다.

『자산어보』[편집]

慈山魚譜

정약전(丁若銓)이 순조 1년(1801) 신유사옥 때 전남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어 16년 동안에 저술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귀중한 어류학(魚類學) 서적. 이 책에는 수산동식물(水産動植物) 155종에 대한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 등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곧 권1에 인류(鱗類) 73종, 권2에 무린어(無鱗魚) 43종, 권3에 잡종류로서 해충(海?) 4종, 해금수(海禽獸) 1종, 해초 35종 등이 비교적 세밀히 분류, 기재되어 있다.

정약용[편집]

丁若鏞 (1762

1836)

조선 말기의 대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 본관은 나주(羅州), 경기도 양근(楊根) 출신, 진주목사(晋州牧使) 재원(載遠)의 아들. 1789년(정조 13) 문과에 급제, 벼슬이 부승지(副承旨)까지 이르렀다. 그는 문장과 경학(經學)에 뛰어났으며 수원성(水原城)을 쌓을 때는 기중가설(起重架說)에 의한 활차녹로(滑車??)를 만들어 과학적인 기술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정조 말 서교(西敎)를 가까이한 탓으로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左部承旨)·병조참지(兵曹參知)·동부승지(同副承旨)·부호군(副護軍)·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1801년(순조 1) 천주교 박해를 위한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나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鐵身)·이승훈(李承薰)·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정약종(丁若種)·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체포되어 형 약종은 장사(杖死)되고, 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약용은 강진(康津)으로 귀양갔다. 약용은 강진에서 19년 간 독서와 저술에 힘썼으니 그의 대부분의 저서는 이 적소(謫所)에서 완성되었다. 1818년(순조 18) 5월에 귀양에서 풀려나와서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기해사옥 때 배교(背敎)한 것을 뉘우치고 고향에 돌아가 저서와 신앙생활로 보내다가 죽었다.다산은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한몸으로 집대성했다. 우리 근세에 있어서 남인학파(南人學派)의 불평의 비판과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다산은 남인학파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고, 자기의 학문·사상의 체계화를 정리한 귀양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보내기까지의 중앙 관리의 경력·지방행정의 경험·연천방면(連川方面)의 암행어사(暗行御史) 행각·청년시절의 왕환(往還)과 부친의 임소(任所)에 수행한 견문, 그리고 귀양살이 등은 그대로 생생한 교훈이며, 평생을 통하는 힘이었다. 이와 같은 문견(聞見)과 경력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어 다른 실학자의 예와 같이 성리(性理)·천문(天文)·지리(地理)·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은 물론, 관제(官制)·군현제(郡縣制)와 전제(田制)·부역(賦役)·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軍制)·과거제(科擧制)·해세(海稅)·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경세유표(經世遺表)』와 지방의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감계(鑑戒)가 될 만한 것을 밝힌 『목민심서(牧民心書)』, 그리고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을 말한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은 모두 다산학(茶山學)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이 아님이 없다. 이러한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사회에 적절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다산이야말로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풍을 한몸으로 총괄·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인 것이다. 일찍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선생(茶山) 1인에 대한 요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라고까지 평하여 그의 학문·저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최근에 와서 다산 연구의 열이 높아가고 있음도 우연의 일이 아닐 것이다.

정전론[편집]

井田論

정약용이 제기한 토지제도 개혁안의 하나. 원래 정전제(丁田制)는 중국의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에 실시되었다고 하는 토지제도로서 일리(一理) 사방의 토지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하여 중앙의 한 구역은 공전(公田)으로 하고, 주위의 여덟 구역은 사전(私田)으로 하였다. 그 사전은 여덟 농가에 나누어 사유로 맡겨 경식(耕食)하게 하고 공전은 여덟 집에서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을 국가에 바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정전제 그대로의 실시는 불가능하나 그 정신을 살려서 실시할 수 있다고 정전론을 제기하였다.토지분배의 대상의 기본단위는 구성원이 5인 이상이고 그 절반 이상이 노동력을 가진 농가 1호(戶)를 원칙으로 한다. 그러한 농가 1호는 100묘의 토지를 받는다. 가족 구성원이 2인인 경우에는 25묘를 분배받을 수 있고, 그 중간에 위치하는 농가는 각기 그 경작 능력에 따라 100

25묘 사이의 적당한 묘수를 배당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토지의 재분배가 가능하려면 토지의 국유화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는 점진적인 토지국유화의 추진을 구상하였다. 우선은 궁사전(宮司田)·아문둔전(衙門屯田) 등의 국유지적인 토지를 정전으로 편입시키며 민전지에서는 우선 공전으로 할 구역만이라도 국가재정으로 사들이며, 다음에는 국고금·헌금·광산수익금 등으로 점차 민전지를 사들여서 토지를 국유화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약용의 정전론의 목적은 나라 안의 전토지를 국유화함으로써 지주전호제를 철혜하며 경작능력에 응하여 토지를 재분배함으로써 독립자영농체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었서는 현실의 지주전호제을 인정한 속에서 경작지의 재분배에서 출발하여 점진적으로 목적에 도달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지주가 있는 경작지의 경우에는 그 지대를 국가가 통제한다는 정치도 마련하고 있었다.

『경세유표』[편집]

經世遺表

국정(國政)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해 논한 책. 순조 8년(1808) 유배지 강진에서 집필하여 동 17년(1817) 미완(未完)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궁극의 목표를 부국강병에 두고, 중앙행정기구의 개편에 있어서 한관(限官)·정관(定官)·교관(敎官)·취인(取人)에 대해서 논했다. 그리고 행정감독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초점은 국가재정에 두고, 핵심 문제로 토지·조세제도의 역사적 비판을 통해 개혁안을

이끌어냈다. 여기서 말하는 토지제도 개혁론은 결수와 인구비례에 따른 분배, 소유한계의 규정, 분지(分地), 분배방법, 경영 소유관계, 분배와 직분관계, 조세 공납, 토지와 병농관계, 호포론(戶布論) 등에서 규정되지만, 이외에도 수많은 개혁론이 수록되어 있다.

『목민심서』[편집]

牧民心書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관에 대한 윤리를 논한 책. 본서는 지방 관리의 윤리적 각성과 농민 경제의 발전을 다룬 것으로,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귀양가 있는 동안 저술한 책이다. 내용은 모두 12강(綱)으로 나누고, 각 강을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되어 있다. 12강은 부임·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병전·형전·공전·진황(賑荒)·해관(解官) 등이다. 이 책 역시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는 농민의 생산과 경제에 초점을 두었다. 수령 직무 54개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전정(田政)으로 보고 양전에 있어서의 각종 폐해를 지적하면서 그 개혁방안을 전론(田論)에서 결론지었다. 다산은 조세관리에 있어서 농민과 국가의 중간에서 이루어지는 협잡을 제거하자는 방향에서 개혁을 논한다. 겸하여 그 시정책의 하나로 공물(貢物) 제한을 들고 대동법의 모순 확대를 지적하였다. 그는 여러가지 모순을 제거하는 데 제도적 개혁과 법으로의 구속을 기본으로 하지만, 국가 재정의 정비, 관료들의 절약과 청백(淸白)사상에 따른 윤리적 제약과 함께 관리의 합리화에서도 그것을 찾고자 하였다.

박제가[편집]

朴齊家 (1750

1805)

조선의 실학자.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 본관은 밀양(密陽),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實學)을 연구,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 실학자들과 교유하며 1776년에 합작(合作)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 2)에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박정균(朴庭筠) 등 청나라 학자들에게 새 학문을 배웠다. 귀국 후 『북학의(北學議)』 내외편을 저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내편(內篇)에서는 실생활에 있어서의 기구와 시설의 개선을 다루고, 외편(外篇)에서는 정치·사회제도의 전반적인 모순점을 지적하여 서정(庶政)의 개혁 방안을 서술했다. 이듬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奎章閣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고 1790년 진하사(進賀使) 황인점(黃仁點)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군기시정(軍器寺正)이 되고, 다시 동지사(冬至使)를 수행하여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4년 춘당대 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 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1798년 왕에게 바치기 위해 『북학의(北學議)』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했고 1801년(순조 1)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兇書事件) 주모자로 지목된 사돈 윤가기(尹可基) 사건에 연조, 조성(鍾城)에 유배 1805년 풀려나왔다.

박지원[편집]

朴趾源 (1737

1805)

조선의 실학자·소설가.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본관은 반남(潘南), 필균(弼均)의 손자.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에 조부가 사망했다. 처숙(妻淑)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 지구의 자전설(自轉說)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다. 1777년(정조 1) 권신(權臣)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심하다가 1780년(정조 4) 진하사(進賀使) 박명원(朴明源:三從兄)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중국인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실생활을 보고 실학(實學)에 뜻을 두었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 후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으로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치사(致仕)했다.당시 홍대용·박제가(朴劑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당시 보수파에게서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그곳의 실학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써 독특한 해학(諧謔)으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정경대부(正卿大夫)에 추증(追增)되었다.

홍대용[편집]

洪大容 (1731

1783)

조선의 학자.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 본관은 남양(南陽). 북학파(北學派)에 드는 실학자(實學者)로서 일찍이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워 당대의 국학(國學)으로 인정되던 주자학(朱子學)이 담헌의 학문적 기초를 이루기는 하였으나 오직 의리지학(義理之學)으로 그것을 소화할 뿐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 뜻을 두었다. 1765년(영조 41) 35세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베이징에 가는 숙부를 따라 가서 3개월여를 베이징에 묵으면서 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육비(陸飛) 등 중국 선비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또 흠천감정(欽天鑑正)이란 직책을 맡아 베이징에 주재하던 독일인 유송령(劉松齡:Hallestain) 및 포우관(鮑友管:Gogeisl) 등으로부터 각종 서양의 문물과 천주당(天主堂)을 구경했다. 대용의 이와 같은 베이징 방문은 당시의 여러 북학파 학자들 중에서도 제일 처음의 일로서 실학의 도입에 있어서 그 선구적 업적이 크다. 대용은 그의 저서 『의산문답(?山問答)』에서 보여 주듯이 인류의 기원, 계급과 국가의 형성, 법률·제도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놀고 먹는 귀족 계급이 나라와 백성을 좀먹는다(所謂遊民倖位耗國病民:桂坊日記)'는 극론까지 했는가 하면, 천문·율력(律歷)·산수 등 과학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이론을 전개했다. 특히 그가 주장한 1일 1주의 지구 회전설은 놀라운 독창적 이론으로서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서양인들도 이에 언급한 적이 없는 일이라 한다. 1774년(영조 50) 44세 때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그 뒤 사헌부 감찰·영주군수(榮州郡守) 등을 지내면서 자기의 학설을 사회에 구현(具現)해 보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시대 환경에 억눌려 별 성과없이 사망했다.

이덕무[편집]

李德懋 (1741

1793)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 본관은 전주. 경사(經史)에서 기문이서(奇文異書)에까지 통달하였고 문명을 일세에 떨쳤으나 서출(庶出)이었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정조 2년(1778) 심염조(沈念祖)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그곳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귀국 후 북학을 제창하였고, 동왕 3년(1779)에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박제가·유득공 등과 4검서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북학[편집]

北學

조선 후기 실학의 한 유파. 당시 실학자들 중 서울의 도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실학의 일파가 있었다. 이들은 점차로 활발해진 서울의 상공업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로 상품의 유통이나 생산기구의 발전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학문은 이같이 산업의 발전을 꾀하는 학문이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이었다. 호란을 경험하고 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의 서울 분위기는 반청숭명(反淸崇明)의 북벌운동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운동은 조선이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소위 조선-중화주의와 주자성리학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었다. 이는 명나라를 높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침략자인 청을 끝까지 도덕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우리의 문화적 우위성을 확인하려는 자존심의 발로였다. 1705년(숙종 31년) 창덕궁 안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한 것이나, 노론의 영수이던 송시열의 유지(遺志)에 따라 충청북도 괴산(槐山)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워(1703)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낸 것, 그리고 정조

순조 때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하여 왜란·호란 이후의 숭명반청운동을 총정리한 것도 그러한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로 서울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노론의 일각에서는 주자성리학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려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다. 이 학풍은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흔히 ‘북학(北學)’이라고 한다. 이때는 청이 강희(康熙, 1662

1772)

건륭(乾隆, 1736

1795)의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시기로서, 중국 역대문화의 정수가 총정리되고, 산업발전과 서양 과학기술문명 도입도 앞서 있었다.따라서 청(淸)의 주인인 여진족은 여전히 멸시하되, 그 안에 담긴 중국문화와 산업, 기술문화는 수용한다는 유연한 자세가 바로 북학(北學)이다. 이러한 북학의 대표자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등이다. 그러나 북학은 청문화만을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상업도시로 변모한 18세기 후반의 서울환경과, 탕평책을 추진하던 영조와 정조의 사상 포용정책도 노론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리하여 17세기초 침류대학사(초기 실학자)들이 추구한 절충적 학풍과 17세기 후반 근경남인들(야당)이 제기한 고학(古學) 및 농촌경제에 대한 관심도 적극 수용하였다. 이제 서울의 일부 노론은 상공업발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농촌문제 해결도 아울러 고려하면서,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높이자는 ‘북학’으로 선회한 것이다. 북학의 철학적 기초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있었다. 사람과 만물의 본성이 같다고 보는 이 주장은 만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만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후생에 끌어들이는 발상을 유도하였다. 이것이 보통 북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라는 저술에서 말미암은 것이지만, 박제가·박지원·홍대용·이덕무 등이 대표적 존재였다. 이들은 대체로 연경(燕京), 북경에 다녀온 일이 있어 기행문들을 남기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보고 들은 청문화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청조의 문화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저서에는 당시의 양반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비판이 있었으며, 반면에 상공업이나 농업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경세치용학파가 복고적인 것과는 달리,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을 꾀하는 전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북학의』[편집]

北學議

정조 때 북학론자인 박제가가 쓴 책. 정조 2년(1778) 박제가가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북경에 간 뒤 청나라의 발달된 물질문화를 배우고, 거기에서 흡수한 지식을 엮은 책인데, 내·외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편은 차선(車船)·성벽(城壁)·궁실·도로·교량·목축·시가(市賈) 등 39항목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 설명했다. 외편에는 전분(田糞)·상(桑)·농잠총론(農蠶總論)·과거론·관론(官論)·녹제(祿制)·재부론(財賦論)·북학변(北學辨) 등 17항목의 논설을 수록하여 농업기술의 개량과 국내상업, 외국무역의 이점을 설파하고 있다. 『북학의』에 논술된 국내상업 및 외국무역의 장려, 수입금지, 수출장려, 은의 해외유출금지, 물가의 평준화, 대량생산, 제품 규격의 규제, 전국적 시장 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후원의 강화 등에 대한 견해는 근대 서구 중상주의 경제사상과 경향이 비슷하다.

북학파[편집]

北學派

조선 영·정조(英·正祖) 때의 실학(實學)의 일파. 당시 학자들 중에는 청(淸)나라에 내왕(來往)하면서 청조(淸朝) 문화의 우수함을 보고 본국에 돌아와서 그 발달한 문화를 수입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들의 견문(見聞)을 토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들을 북학파라고 한다. 그들의 저서로는 박제가(朴劑家:楚亭)의 『북학의(北學議)』, 홍대용(洪大容:湛軒)의 『담헌집(湛軒集)』을 비롯하여 박지원(朴趾源:燕岩)의 『열하일기(熱河日記)』, 홍양호(洪良浩:耳溪)의 『이계집(耳溪集)』, 유득공(柳得恭:?齋」)의 영재집(?齋集)』, 이덕무(李德懋: 雅亭) 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등이 유명하다.

『열하일기』[편집]

熱河日記

정조 때의 북학론자인 연암 박지원의 열하(熱河) 견문기. 이 책은 조선왕조 일대를 통하여 수많은 연행문학 중에서 백미적(白眉的)인 위치를 점하는 책이다. 내용을 보면, 권1은 도강록(渡江錄), 권2는 성경잡지(盛京雜識), 권3은 일신수필(馹迅隨筆), 권4는 관내정사(關內程史), 권5는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권6은 태학유관록(太學遊館錄), 권7은 구외이문(口外異聞), 권8은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권9는 금료소초(金蓼小?), 권10은 옥갑야화(玉匣夜話), 권11은 황도기략(黃圖紀略), 권12는 알성퇴술(謁聖退述), 권13은 앙엽기(?葉記), 권14는 경개록(傾蓋錄), 권15는 황교문답(黃敎問答), 권16은 행재잡록(行在雜錄), 권17은 반선시말(班禪始末), 권18은 희본명목(戱本名目), 권19는 찰십륜포(札什倫布), 권20은 망양록(忘羊錄), 권21은 심세편(審勢編), 권22는 혹점필담(鵠汀筆譚), 권23은 동란섭필(銅蘭涉筆), 권24는 산장잡기(山莊雜記), 권25는 환희기(幻戱記), 권26은 피서록(避署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담헌서』[편집]

湛軒書

담헌 홍대용의 시문집. 그의 사후(死後) 약 150년이 지난 1939년에 신조선사에서 발간되었다. 중요한 내용을 추려보면, 우선 내집 또는 담헌내서에 사서문의(四書問疑)·삼경문변(三經問辨)·심성문(心性問) 등 경학에 관한 부분, 정책론에 관한 임하경륜(林下經綸)·학문관·자연관·사회관·국가관·역사관 등에 관한 종합적 저술인 의산문답, 세손 정조를 보필하는 지위에 있었을 때의 일기인 계방일기(桂坊日記), 시·서간문·묘문 기타 작품이 있다.외집 또는 담헌외서에는 북경 기행문인 연기(燕記), 건정필담(乾淨筆譚), 북경 방문중에 사귄 중국인들에게 보낸 서간인 항전척독(杭傳尺牘), 수학·천문학에 관한 주해수용(籌解需用) 등이 있다.

양명학[편집]

陽明學

조선초기에 국가적 종교행사의 하나였던 소격서(昭格署)가 중종대에 폐지되고, 성리학의 발달에 따라 이단으로 취급되면서 도교(道敎)는 크게 위축되었다.그러나, 잇단 사화와 당쟁을 겪으면서 향촌에 은거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심신의 연마를 위한 수련도교(內丹)가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왜란 직후의 시기에는 전세계적인 기온강하로 기근과 질병이 계속되면서 질병치료의 수단으로서도 수련도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수련도교 혹은 신선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선조

광해군 때 정렴(鄭?)의 『용호비결(龍虎秘訣)』, 한무외(韓武畏)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곽재우의 『양심요결(養心要訣)』, 광해군

인조 때 권극중(權克中)의 『참동계주해(參同契註解)』 등이 그런 것들이다. 특히 권극중은 도교를 유교나 불교보다도 철학적으로 윗자리에 놓으려는 이론을 구성하여 주목을 끌었고, 한무외는 우리나라 도교의 기원이 신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체계화하였다.수련도교가 유행함에 따라 성리학자들 중에서도 도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이 나타났는데, 17세기 전반의 한백겸·이수광·허균·이식·장유·유몽인·정두경(鄭斗卿)·허목·유형원, 그리고 17세기 말의 홍만종(洪萬宗)이 대표적 인물이다.특히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선도(仙道)와 방술(方術)의 유래를 소개하였고,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허균은 『사부고(四部稿)』에서 선도(仙道)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소개하였다.이를 계승하여 허목은 『청사열전(淸士列傳)』을 쓰고, 홍만종은 『해동이적(海東異蹟)』(1666)을 저술하여 단군에서 곽재우에 이르는 40여 명의 단학인(丹學人)들을 소개하였다. 특히 홍만종은 우리나라 산수의 아름다움 때문에 수련도교가 자연발생하였다고 보고 그 시초를 단군에서 찾음으로써 수련도교의 민족적 특성을 강조하였다.18세기에는 황윤석(黃胤錫)이 『해동이적』을 증보하여 『증보 해동이적』을 편찬하였다. 한편, 수련도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교의 사상적 뿌리인 노·장(老莊)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17세기 말 박세당(朴世堂)의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8세기 서명응(徐命膺)의 『도덕지귀론(道德指歸論)』, 그리고 홍석주(洪奭周)의 『정로(訂老)』 등이 그것이다.도교와 더불어 또 하나의 흐름이 양명학(陽明學)이다. 양명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6세기 전반기였으나 이황 등 성리학자의 비판으로 이단으로 몰리다가 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이요(李瑤)·남언경(南彦經)·최명길(崔鳴吉)·이수광·장유 등에 의해 다시 주목을 받았고, 선조 같은 왕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이 시기 지식인들은 양명학을 학문으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마음을 수양하는 종교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사람은 누구나 양지(良知)를 가지고 있고, 이 양지에 의해 사물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행일지(知行一致)의 이론이 개혁지향적인 인사들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 초 정몽주의 후손인 정제두(鄭齊斗)가 나타나 뚜렷한 학문적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존언(存言)』 『만물일체설(萬物一體說)』 등을 써서 이론체계를 세웠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 이광려(李匡呂)·이광사(李匡師)·이충익(李忠翊) 등이 배출되었다.대체로 야영학은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파와 이왕가의 종친, 그리고 서얼출신 인사들 사이에서 가학(家學)으로 이어지면서 퍼졌고, 강화도를 중심으로 개성·서울·충청도 등 서해안 지방에서 호응을 얻었다.이 지역은 상업의 중심지로서 상업과 양명학의 연결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양명학자들은 학문적으로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고 양명학을 겸행하는 경우가 많아서 크게 떨치지는 못하였다. 한말·일제시대의 이건창(李建昌)·이건방(李建芳)·김택영(金澤榮)·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 등은 양명학을 계승하여 국학운동을 벌인 저명한 인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