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제도변화와 경제생활/18세기경의 한국
18세기경의 한국〔槪說〕
[편집]18세기의 한국은 당쟁의 폐해가 극도에 달했던 숙종(肅宗)을 비롯하여 그 폐해를 제거함으로써 국정을 바로잡고 새 문화를 이룩하게 된 경종(景宗)·영조(英祖)·정조(正祖)가 통치하던 시대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특징은 탕평책(蕩平策)의 시행, 숨어 살던 남인(南人) 학자들의 등용, 실학(實學) 운동, 천주교 신앙운동 등으로 나타나 특히 영·정조 시대를 조선 왕조에 있어서의 문예부흥기라고도 부르게 되었다.조선 왕조의 당파는 1575년에 동인(東人)·서인(西人)이 생김으로써 시작하여 1591년에는 동인이 남인(南人)·북인(北人)으로, 1683년에는 서인이 노론(老論)·소론(小論)으로 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숙종은 노·소·남·북의 이른바 4색(色) 당파에게 시달림을 받으면서 남인 정책을 쫓아내고 정권을 노론·소론의 손에 넘겼다. 이러한 와중에서 숙종이 죽고 장희빈(張禧嬪)이 낳은 경종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경종은 후사가 없었으므로 배다른 아우(뒤의 영조)를 왕세제(王世弟)로 삼아 대신 정치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때 노론·소론의 정객들이 왕세제를 죽이려 꾀하자 왕세제는 그 정객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4년 뒤에는 죽은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영조는 그의 재위 53년 동안 국정을 다스리면서 당쟁을 일삼던 선비들을 모두 축출하는 한편 인물 본위로 관리를 뽑아쓰는 탕평책을 쓰며 학술의 진흥, 농업의 개량, 군포세(軍布稅)의 균등화 등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러한 탕평책은 그 뒤를 이은 손자 정조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그를 대신하여 13년 동안이나 정치를 맡아보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계비(繼妃) 김씨(貞純王后) 일파의 책동에 따라 굶어죽게 함으로써 10년 뒤에는 사도세자와 그 아들 정조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이들을 미워하는 벽파(僻派)라는 새 당파가 생기게 하였다. 그러므로 정조도 남인시파의 두목이던 채제공(蔡濟恭)을 영의정으로 삼아 선정을 베풀다가 계조모 정순왕후의 농간으로 갑자기 죽게 되었다. 이와같이 영·정조시대 76년 동안에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발탁하였으며, 왕들이 글을 좋아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책들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학술이 크게 발달하여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영조 때에는 『속대전(續大典)』 『속오례의(續五禮儀)』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국조악장(國朝樂章)』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등의 책이 편찬되었다. 더욱이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왕실 도서관을 설치하여 국내외로부터 많은 책을 모아들이고 『일성록(日省錄)』 『대전통편(大典通編)』 『규장전운(奎章全韻)』 『규장총목(奎章總目)』 『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정조의 탕평책과 학술 진흥정책에 호응하여 역사·지리·정치·경제·언어 등을 연구하는 실학 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특히 숨어살던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인학자 이익(李瀷)은 영조가 하사(下賜)한 벼슬조차 사양하고 광주(廣州)에 은거하면서 역사·지리·천문·종교 등을 연구하여 『성호사설(星湖僿說)』이라는 책을 만들고, 그의 문중(門中)에서 이중환(李重煥)·이가환(李家煥)·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이리하여 실학은 남인 학자들을 우대한 정조시대에 있어서 더욱 발달하게 되어 실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하여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 등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또한 실학의 발달에 따라 『춘향전(春香傳)』 『심청전(沈淸傳)』 등의 국문소설도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실학자들은 북경(北京)에서 가져온 서양의 학술서적을 읽거나 또는 북경에 다녀옴으로써 천주교를 연구하고 교세 확장에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정복의 문인이던 이벽(李蘗)·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 등은 정조 때부터 천주교연구회를 열고 이를 신앙했다. 이때 이승훈(李承薰)은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이듬해 봄에 귀국, 서울 명례동(明禮洞, 明洞)에 있던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교회 행사를 지냄으로써 교회설립 운동을 전개했다. 이와같이 밖으로부터 선교사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만이 가진 특징이었다. 이리하여 이듬해에 발각되어 한때 해산되었던 조선 천주교회는 곧 부활되고 10년 뒤에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를 이해하던 정조가 죽고 벽파의 정순왕후 일파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이듬해에는 첫 번째 대(大)박해인 신유교난(辛酉敎難)을 당하게 되었다.조선에서의 천주교는 양반계급에서 먼저 신앙하여 위로는 왕족, 아래로는 중인·상민(常民)·천인(賤人)의 각 계급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앙자들은 처음부터 서로 교우(敎友)라고 부르면서 계급타파 운동·미신타파 운동·국문적용 운동·문호개방 운동·서양문화도입 운동·국민해외진출 운동·근대화 운동을 일으켰으나 반대파의 박해로 말미암아 순조로운 발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붕당과 왕권강화
[편집]朋黨-王權强化
14년 간 집권한 현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숙종(肅宗, 1674
1720)은 45년 간 장기집권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환국(換局)’이라 하였다. 환국정치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외형상으로 보면 숙종시대는 붕당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정책대결 속에서 국가발전이 가속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숙종 초에는 왕권강화를 주장해 온 남인이 집권하였는데, 효종비의 사망을 계기로 다시 일어난 복상논쟁(禮訟)에서 왕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은 효종의 어머니(조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大功)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남인의 승리는 현종 중반 이후 기반을 다져 온 허적(許積) 일파의 정치적 성장이 바탕이 되었다.숙종 즉위 초에 집권한 남인은 허적·윤휴 등 이른바 온건한 탁남(濁南)이 주동이 되어 북벌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서 ‘도체찰사’라는 새로운 군정기관을 부활시키고, 그 본진으로서 개성 부근의 대흥산성(大興山城, 1676)을 축조했으며, 한꺼번에 18,000여 명의 무과 합격자를 뽑아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평안도 용강의 황룡산성(黃龍山城)과 강화도의 48개 돈대(망루)도 이 무렵에 축조되었다. 이 같은 북벌 계획의 재등장은 마침 숙종 원년(1674)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란이 일어나 청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빠진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인 정권의 권력기반을 안정시키려는 뜻도 있었다.그러나 수세에 몰렸던 서인은 숙종 6년(1680) 남인 영수 허적이 대흥산성의 군인을 동원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허적·윤휴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남인들도 축출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한다. 이 무렵 서인은 자체분열을 일으켜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少論)으로 갈라졌다(1683). 노론은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내수외양(內修外攘), 즉 민생안정과 자치자강(自治自强)을 강조하였으며, 소론은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개척을 주장한 점에서 정책적 차이가 있었다. 왕은 양파를 연립시켰으나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것은 노론으로서, 송시열과 삼척(三戚)으로 불리던 왕실의 외척, 즉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閔鼎重)이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했다.서인정권은 남인이 장악했던 훈련별대를 정초군(精抄軍)과 통합하여 금위영(禁衛營)으로 발족시켜(1682) 5군영제를 완성시켰다. 병권은 대체로 왕이 신임하는 종척(宗戚)들이 장악하여 실제로는 왕이 군대 통수권을 장악한 셈이었다. 정부는 민생향상과 산업 진흥을 위해 양인의 군포를 감해 주고(1703), 화폐주조(상평통보)와 화폐유통을 장려하여 상업을 진흥시켰다. 각 부대도 화폐를 주조하고 상업 행위를 하여 점차 영리기관으로 변질되었다. 이 시기에 농촌에서는 미륵신앙을 가진 하층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시에서는 노비들이 주축이 된 검계(劍契)·살주계(殺主契) 등 비밀결사의 저항운동이 일어났으며, 자연재해까지 겹쳐 사회가 매우 불안했다.9년 간 집권한 노론은 숙종 15년(1689)에 남인계의 후궁(장희빈)이 낳은 왕자(나중의 경종)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했다. 그동안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던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이 보복을 받아 처형당하였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한다.남인집권기에는 청나라의 내란과 관련하여 강화도에 성(城)을 쌓고, 맞은편의 통진에도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쌓는 등(1694) 수도방위를 강화하였다.‘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도 숙종 20년(1694)에 왕이 마음을 바꾸어 폐위된 민비(閔妃,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남인과 연결된 장희빈을 사사하게 되자 5년 만에 다시 밀려나게 되고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했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 하는데, 이때부터 남인은 거의 재기불능의 상태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노론과 소론은 서얼·역관·무인·상인 그리고 노비층과도 연결하여 남인측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거사자금과 힘을 빌렸다.숙종 20년부터 46년에 이르는 기간은 전세계적으로도 소빙기(小氷期)로 불리는 냉해가 계속되었는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잇단 흉년과 홍수·질병으로 인구는 오히려 감소되어 1693년에서 1699년 사이에 약 142만명의 인구감소현상을 가져왔다. 더욱이 숙종 23년(1697)에는 10여 년 전부터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약해 오던 장길산(張吉山) 농민군의 세력이 더욱 커져서 서북지방이 매우 어수선했고, 서울에서는 중인 및 서얼들이 장길산 부대와 연결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다 발각되는 일까지 일어났다.그러나 숙종대에 대동법을 황해도 지방까지 확대하였으며(1708, 숙종 34년), 서북인을 무인(武人)으로 대거 등용하고(1709), 중인과 서얼을 수령에 등용하도록 조처했다(1697, 숙종 23년). 특히 1712년(숙종 38년)에는 청과 북방경계선을 확정지어 백두산 아래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삼았다. 여기서 토문강은 다소 애매한 상태에서 정해졌지만, 우리측은 그 후 이 강을 두만강 북쪽에 있다고 인식하였다. 백두산정계는 조선측의 영토확장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였다.한편, 수군(水軍) 출신의 안용복(安龍福)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출몰하는 왜인을 쫓아내고 일본당국과 담판하여 우리의 영토임을 승인받았다(1696, 숙종 22년).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와 울릉도 귀속문제를 확정하고, 적극적으로 해방(海防)정책을 강화하면서 울릉도 경영에 나섰다. 울릉도 지도가 활발하게 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한편, 숙종 31년(1705)에는 노론의 주장에 따라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또 우리가 명의 유교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문명국가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명의 태조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신종(神宗)을 제사하는 대보단(大報壇)을 창덕궁 안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순신 사당에 ‘현충(顯忠)이라는 호를 내리고(1707, 숙종 33년), 의주에 강감찬 사당을 건립하여(1709)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숙종 말년에는 남구만(南九萬)의 노력에 의해 세종 때 설치했다가 폐지한 ‘폐사군(廢四郡)’의 일부를 복설하여 압록강 연안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강화도의 농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고, 강화도 내성(內城, 1704
1709), 북한산성(1711
1712), 평양성, 안주성 등이 잇따라 축조되어 방위체제가 훨씬 강화되었다.숙종 말년에는 삼남지방에서 양전사업이 완료되어 총 66만 7,800결을 얻고, 전국의 인구는 680만명으로 늘어났다(1720). 숙종 때에는 문화사업면에서도 중요한 성과가 나타났다. 『대전속록』, 『열조수교(列朝受敎)』 등을 비롯하여 각종 국가 통치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편찬사업이 활기를 띠었다.숙종시대는 조선왕조가 전란의 피해복구와 국가재정비사업이 일단 마무리되어 중흥의 기틀이 다져진 시기로 볼 수 있다.
백두산 정계비
[편집]白頭山定界碑
1712년(숙종 38)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국 사이의 경계비. 조선의 이의복·조태상과 청나라 목극등 등이 5월 15일 백두산에 올라 회담하고 압록·토문 두 강의 분수령인 산정 동남방 약 4km, 해발 2200m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다. 그 비문에 ‘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爲記……’라고 새겼다. 그 후 1880년(고종 17)부터 청국은 돌연 토문(土門)이 두만(豆萬)을 뜻한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1909년(융희 3) 만주 침략의 야욕을 가진 일본이 북경에서 청국과 회담하고 토문강에서 훨씬 남하하여 두만강이 한·청 국경이라고 임의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우리의 영토이던 간도 전역을 만주에 넘겨주었다. 이 비는 만주사변 때 일본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북한산성
[편집]北漢山城
북한산에 쌓은 산성. 옛날 고구려와 백제의 쟁탈 중심지가 되었다. 백제는 대방군(帶方軍)의 옛땅을 합쳐버리고 차차 북방에 쳐들어갈 때 개루왕이 132년(개루왕 5)에 이 성을 쌓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였고,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은 이 성을 포위하여 함락시키자 서울지방은 고구려의 북한산주로 예속되었다. 뒤에 신라가 점차로 국력이 강해져서 이 지역에 진출하였는데, 진흥왕이 북경 관내(管內)를 순시하였을 때 북한산의 순수비(巡狩碑)를 건립했다. 비는 현존하며 비가 있는 일대의 산은 비봉(碑峰)이라 부르고 있다. 고려는 도읍을 개성에 두었으므로 북한산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도 처음은 그다지 주의를 끌지 않았으나 선조 때의 임진·정유의 왜란과 1636년(인조 14) 청(淸) 태종이 쳐들어온 뒤부터 피난의 적소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성은 쌓지 못하였다.이 축성이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1711년(숙종 37)이다. 이보다 앞서 1659년(효종 10)에 왕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명령하여 북한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임란이어처(臨亂移御處)로 하여 도성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 성의 축성이 누차 논의되긴 하였으나 1702년(숙종 28) 우의정 신완(申玩)이 강도(江都:江華島)·남한산성은 비상시(非常時)에 의지할 지대가 아님을 극론하였고 이후로 여러 신하들과 수차 상론하는 바, 먼저 기지(基址)를 시찰시키고, 여러 신하들에게 방안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704년(숙종 30) 10월 훈련대장 이기하(李基夏)와 어영대장 김석연(金錫衍)으로 하여금 북한 축성의 가부를 가서 살피고 오라 하자 이기하는 돌아와 보고하기를 험하기가 남한산성은 비할 바 아니며 도성에 가까운 곳에 있는 이런 형세의 지대를 버릴 것이 아님을 역설하였고, 여러 신하도 이에 동의하는 수가 많아졌는가 하면, 특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는 강력히 이를 지지했다. 그리고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사직(司直) 이우항(李宇恒)도 성의 터를 시찰하고 돌아와 찬성의 뜻으로 보고하자 1711년(숙종 37) 2월에 비로서 축성하기로 작정하고, 3월에 축성의 착수를 명하니 4월에 시작하여 9월에 완료하고, 이듬해에 임금이 행차하였다. 이 산성은 난시에 임금이 거처하고, 만일의 경우 도성 백성도 수용함을 목적으로 하여 축조하였던 것이다. 성의 둘레 7,620보(步), 문(門) 14, 장대(將臺) 3, 곽성(郭城) 26, 우물 99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