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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제도변화와 경제생활/제도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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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변화〔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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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행된 대동법은 숙종·영조 대에 이르러 전국적인 규모로 실시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관할하기 위해 선혜청을 두었다. 이 대동법의 실시로 공납제도는 원칙적으로 폐지되었는데, 이것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우선 농민들의 경제적인 부담을 경감해 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인(貢人)이란 어용상인을 중심으로 한 상업자본을 발전시켰고, 아울러 공인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독립적인 수공업을 일으켰다.16세기말에서부터 17세기 후반기에 걸쳐 군제가 개편되어 5군영이 모두 갖추어졌다. 이 5위에서 5군영으로의 군제 개편은 종합적인 계획에 의했다기보다 그때 그때의 편의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성격도 반드시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편대(編隊)에 있어서 일부는 반농반군(半農半軍)의 향군(鄕軍)이 교대로 상경 숙위하게 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훈련도감군에서 발달된 모병제는 점차로 보편화되어갔다. 이제 일반 장정들이 지니고 있는 군역의 의무는 수포대역(收布代役)에서 발달된 군포(軍布)의 의무만이 남게 되었다.그러나 이 의무가 결코 가벼운 부담인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는 관리와 결탁하여 군포의 납부를 면제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게다가 황구첨정(黃口簽丁)·백골징포(白骨徵布)·인징(隣徵)·족징(族徵)에 따르는 폐해가 자심하였다. 이러한 폐단에 대한 시정책으로 균역청을 두어 균역법의 시행을 맡아보게 하였다.그러나 이 균역법은 반드시 그 명칭과 상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양반층은 여전히 징포(徵布)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농민들은 포(布)의 감소 대신에 미(米)를 내었다. 영조의 영단에도 불구하고 균역법은 기만적인 수법에 그치고 말았다.한편 영조는 당쟁으로 인한 폐해를 시정하고 전제적인 왕권의 유지를 위해 탕평책을 취하였는데, 이 정책은 정조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영·정조 시대를 통해서 탕평책이 정치적 안정을 기하는 데 다소 기여하였으나 그것은 한계성을 가진 것에 불과했고, 이후 당쟁의 양상은 시·벽파의 분립과 함께 또하나의 복잡한 양상을 드러냈다.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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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禧嬪 (?

1701)

조선 숙종의 빈(嬪) 장씨(張氏), 소의(昭儀)라는 품계.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궁녀 장소의를 가까이 하여 1688년(숙종 4) 왕자 균(?:景宗)을 낳았다. 왕은 기뻐하여 세자로 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松時烈) 등 당시 집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소론(老少論)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숙종 15) 정월에 세자를 봉하고 장소의를 희빈(禧嬪)으로 봉했다. 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하니 왕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분노하자,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에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賜死)케 하였으나 중로 정읍(井邑)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 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流配)를 면치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 정권의 교체를 기사환국(己巳換局) 또는 기사사화(己巳士禍)라고 한다. 이해 5월에 다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폐비(廢妃)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84년(숙종 20)에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운동(復位運動)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상(右相)으로 있던 민암(閔?)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히어 일대 옥사(獄事)를 일으켰다.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리었는데 이것을 갑술옥사(甲戌獄事)라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김수항 등은 다시 복작(復爵)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씨에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그런데 후에 왕비 민씨가 죽은 다음에 장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다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에 관련된 희빈과 장희재는 살해되고, 궁인(宮人)·무녀(巫女)와 그 족당(族黨)도 화를 입게 되었다.이것을 무고의 옥(巫蠱-獄)이라 하는데 이때에 장희빈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취한 남구만·최석정(崔錫鼎)·유상헌(柳尙憲)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어(嬪御)에서 후비(后妃)로 승격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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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同法

조선 중기 이후 공물(貢物)을 미곡(米穀)으로 통일하여 바치게 하던 납세제도.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공(貢)이라 하는데, 대동법은 이것을 일률적으로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는 제도. 공물은 중앙 및 지방의 각 관청, 각 궁방(宮房)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부과하던 것으로, 소요되는 시기와 납부하는 시기가 일치되지 않아 방납(防納:代納)제도가 성행하였다. 수요자로 보면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에 얻으니 편리하였으나 방납자는 관청 및 궁방과 민간의 중간에서 엄청난 모리행위를 하여 10배 이상의 부담을 백성에게 주어 폐단이 막심하였다. 이율곡(李慄谷)은 여기에 착안하여 1569년(선조 2) 임금에게 동호문답(東湖問答)을 바쳤는데 그 가운데서 공부를 미곡으로 통일하여 받아들일 것(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되지 못하였다.대동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의 토지가 황폐되고, 국가의 수입이 매우 감소된 시기에 비로소 시행되었다. 즉 1608년(선조 41)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에 따라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비로소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니, 중앙에 선혜청(宣惠廳), 경기도에 경기청을 두고 방납의 폐가 가장 심한 경기도부터 시작하였다. 이때의 세율은 춘추(春秋) 2기로 나누어 땅 1결(結)에 대해서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그 중 10말은 중앙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해서 선혜청에 옮겨가고 나머지 6말은 경기청에 두어 경기도의 수요에 충당하였다. 그 후 이 제도는 차츰 각 지방에 확대 적용시켰다. 1624년(인조 2)에 강원도에도 실시하였는데 연해지방은 경기도의 예에 따랐고 산군(山郡)에서는 미곡 5말을 베 1필로 환산하여 바치게 했다.충청도에는 1651년(효종 2)에 실시되었는데 춘추 2기로 나누어 땅 1결(結)에 대해서 5말씩, 도합 10말을 징수하다가 뒤에 2말을 증가하여 12말을 바치게 하였다. 산군(山郡) 지대에는 미곡 5말을 무명(木棉) 1필로 환산하여 바치게 했다. 전라도에는 1658년(효종 9) 정태화(鄭太和)의 건의로 절목(節目)을 만들어 도(道)의 의견을 물은 뒤 1결(結)에 13말을 결정하여 연해(沿海)지방부터 실시했으며, 산군 26읍에는 1662년(현종 3)부터 실시했는데 부호들의 농간으로 1665년(현종 6)에 일시 폐지하였다가 다음 해에 다시 복구하였다. 뒤에 1말을 감하여 1결에 대하여 13말을 징수하였다. 경상도에는 1677년 숙종부터 실시하여 땅 1결에 13말을 징수하였는데 다른 지방이 12말이므로 부당하다 하여 1말을 감하였다. 변두리 22읍은 미곡, 산군 45읍은 돈(錢)과 무명(棉布) 반반, 그외 4읍은 돈과 베 반반으로 바치게 하였다. 황해도에는 1708년(숙종 34) 대동법을 모방한 상정법(詳定法)을 실시하였는데 1결에 대하여 미곡 12말을 징수하는 외에 별수미(別收米)라 하여 3말을 더 받았다. 대동미는 수요에 따라 일부는 중앙의 선혜청에 옮기고 일부는 지방관청에 두어 쓰게 하였다. 중앙의 수요은 국가에서 공인(貢人)을 선정, 그로 하여금 물품을 구입, 납부케 하고 그 대금은 선혜청에 간직한 대동미로 지불하였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미곡 대신 포목(布木:大同木)·돈(錢:大同錢)으로 대납(代納)할 수도 있었다. 대동법은 세법상 진보된 제도이기는 하였으나 이로써 없어져야 할 공물은 필요에 따라 여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국민에게 혜택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 후 화폐의 보급에 따라 대동미는 점차 대동전으로 대치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경기도 장단(長湍)의 쌀은 1섬(石)에 8냥(八兩), 충청도 제천은 1섬에 6냥, 황해도는 1섬에 3냥 5전, 강원도는 1섬에 6냥으로 대신 하기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1884년(고종 31) 모든 세납(稅納)을 병합, 결가(結價)를 결정하였을 때 대동미도 지세(地稅)에 병합되었다.

영조의 탕평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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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祖-蕩平策

숙종의 뒤를 이어 소론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 경종(景宗, 1720

1722)이 2년 만에 죽고, 수공의 넷째 아들 영조(英祖, 1724

1776)가 52년 간 집권하면서 조선왕조는 중흥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는 청나라가 강희(康熙), 건륭(乾隆)의 융성기를 맞이하여 조·청 관계가 안정되면서 내치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영조는 집권초기인 1728년(영조 4년)에 소론계 이인좌(李麟佐)의 도전을 받았다. 이인좌는 소론·남인세력과 중소상인, 노비를 규합하여 청주 등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영조 38년(1762)에는 소론과 연결된 세자(思悼世子)를 노론의 주장에 따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는 비극도 있었다. 그리하여 찬성하는 벽파(僻派)와 이를 동정하는 시파(時派)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숙종시대에 비하면 정치적 참극은 적은 편이었다.영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종전과는 다른 방식을 채용하였다. 왕은 요·순과 같은 고대 성왕(聖王)을 자처하면서 초월적인 군주상을 수립하고, 이에 근거하여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썼다. 원래 탕평책은 붕당을 없애는 데 뜻이 있었지만 당장 실현이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래서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왕권에 순종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이를 ‘완론탕평(緩論蕩平)’이라고도 한다. 탕평정책은 숙종 때의 ‘환국’ 형식의 왕권강화방식이 많은 부작용을 낳은 데 대한 반성으로, 초당적 정치운용으로 왕권을 세우자는 발상이었다.영조는 다른 한편으로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배후세력인 재야 산림의 이른바 ‘공론(公論)’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書院)을 대폭 정리하였다. 또한 조정 안에서 ‘공론’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던 이조낭관과 한림(翰林)들이 자신의 후임을 자천(自薦)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대신에 일반민의 여론을 직접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신문고(申聞鼓)제도를 부활하고, 궁밖에 자주 나가서 직접 민의를 청취하였다. 백성들이 행차 도중의 왕을 직접 만나서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을 당시 상언(上言), 격쟁(擊錚)이라 하였다.영조는 사상정책에 있어서도 탕평을 지향하였다. 주희 성리학을 일단 중심에 두면서도 왕권강화를 지지하는 남인학자의 고학(古學)을 받아들이고, 『주례』나 『정관정요』와 같은 법가적 저서들도 경연에서 공부하여 개방적 자세를 보였다. 말하자면 당시 여러 붕당의 진보적 사상을 모두 포용하여 왕권강화와 국가중흥에 이용하였다. 한편,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안정과 산업진흥을 위한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백성들의 군역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1750년(영조 26년)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고, 당인들이 장악한 병권을 병조에 귀속시켰으며, 탁지정제(度支定制)에 의해 국가재정을 개혁하고, 『무원록(無?錄)』을 편찬하여 형벌제도를 완화하였으며,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三覆法)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영조대에는 두만강, 압록강 일대의 농지개간과 방어시설 확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강화도, 덕적도 등 도서지방의 방어를 위한 해방정책(海防政策)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강화도에 외성을 쌓고(1744), 평양에 중성(1733)을 쌓는 등 축성사업과 아울러 각종 국방지도를 제작하였다.한편, 수도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서울의 부유한 시민(貢人, 市民)을 주축으로 수도방어체제를 개편하고, 이를 『수성윤음(守城綸音)』(1751)으로 반포하였다. 이는 서울의 상공업발달에 따라 국방 개념의 변화를 의미한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 서울의 청계천을 준설하여 도시를 재정비하고, 왕도(王都)와 상업도시로 번영하여 서울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서울 지도를 많이 제작하였다.국토의 심층적 파악과 국가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국적인 지리지와 지도의 편찬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16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이 이미 변화된 지리지식을 반영하지 못하여 이를 개편하려는 시도는 숙종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영조는 이 작업을 적극 추진하여 방대한 『여지도서(輿地圖書)』(1765)를 완성하였으며, 이어 지리전문가인 신경준(申景濬)으로 하여금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여지고』(輿地考)』(1770)를 편찬케 하였다.지도는 지리지와 국토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영조는 1770년(영조 46년) 신경준을 시켜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라는 8권의 채색지도집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 전도(全圖)와 도지도(道地圖), 그리고 전국의 읍(邑)을 모두 그린 것으로, 모눈으로 선을 구획하여 지도의 정밀성을 높인 것이다. 이 밖에 당시 뛰어난 지도학자인 정상기(鄭尙驥), 정항령(鄭恒齡) 부자의 지도를 입수하여 홍문관에 모사해 놓기도 하는 등 우리나라 지도발달사에 큰 업적을 쌓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는 아름다운 채색지도집인 『해동지도(海東地圖)』(8권)도 175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지도집은 전국의 모든 읍과 진(鎭), 그리고 만리장성과 중국전도·유구지도 등 370여 종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학문을 숭상하고 국가의 문물제도를 시의에 맞게 재정비하려는 의욕에 넘쳤던 영조는 이 밖에도 많은 편찬사업을 이룩하여 문예부흥의 터를 닦았다. 『속대전(續大典)』 『속오례의(續五禮儀)』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동국문헌비고』 등은 대표적 업적이다.또한 노비가 양인이 되는 길을 넓혀주고, 서얼들의 벼슬길을 열어 준 것도 이때로서, 조선왕조의 국력과 문화수준이 크게 높아지고, 사회경제의 발전과 안정이 증진되었다.

탕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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蕩平碑

조선 영조 때 유학생들로 하여금 불편부당(不偏不黨)하는 군자의 도를 닦게 하기 위하여 세운 비.영조는 정사(政事)의 시비를 논하는 상소를 금하고 노·소론을 고루 등용하여 불편부당의 탕평책을 수립하고 1742년(명조 18) 성균관 입구에 이 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周而弗比, 乃君子之公, 心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 하였다.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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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祖 (1694

1776)

조선의 21대 왕(재위:1724

1776).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淑)이며,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의 넷째 아들, 경종의 이모제(異母弟). 어머니는 숙빈(淑嬪) 최씨(崔氏).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君)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경종에게 후사(後嗣)가 없어 노론(老論)인 김창집(金昌集) 등이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상소, 소론(少論)인 유봉휘(柳鳳輝) 등의 반대가 있었으나 8월에 책봉되었다. 이어 노론의 대리청정(代理廳政) 건의로 일시 정무를 담당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청정을 취소당했고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지지 세력을 잃었으며 1722년 김일경(金一鏡) 등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즉위하자 김일경·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을 숙청,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붕당(朋黨)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1727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丁未換局), 이후 양파를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탕평책(蕩平策)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당쟁의 격화를 눌렀다. 한편 가혹한 형벌을 폐지 또는 개정하여 인권 존중을 기하고 신문고(申聞鼓) 제도를 부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게 했으며, 금주령(禁酒令)을 내려 사치·낭비의 페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기민(飢民)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을 구제하고 균역법(均役法)을 제정, 세제(稅制)의 합리화를 기했다. 한편 북관군병(北關軍兵)에 조총(鳥銃)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火車)를 제작, 이듬해 수어청(守御廳)에 총의 제작을 명했고 진(鎭)을 설치하여 각 보진(堡鎭)의 토성(土城)을 개수하는 등 국방 대책에 힘썼다. 오가작통법(吾家作統法)을 부활하여 조세수입을 늘리고, 1756년에는 기로과(耆老科)를 신설하였으며, 학문을 즐겨 특히 인쇄술을 개량,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여사서(女社西)』 『육전(六典)』 『소학훈의(小學訓義)』 『속대전(續大典)』 『무원록(無寃錄)』 『해동악장(海東樂章)』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숙묘보감(肅廟寶鑑)』 『속오례의(續五禮儀)』 등 많은 서적을 발간케 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서문과 『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 『위장필람(僞將必覽)』 등을 친제(親製)하였으며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實學)의 학통을 수립하게 하고, 풍속·도의의 교정에도 힘써 사회·산업·문화·예술 등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했다. 앞서 1728년 이인좌(李麟佐) 등이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여 반란을 기도했으나 곧 진압되고 또한 1726년 세자(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등 비극이 있었으나 조선 왕조의 역대 왕 중 재위 기간이 길고 각 방면에 재흥의 기틀을 마련한 영주(英主)였다. 만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능은 원릉(元陵:楊州)에 있다.

유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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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謙明 (1685

1735)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자는 익휘(益輝), 호는 만수(晩修). 본관은 전주(全州). 참봉 완(完(의 아들, 1713년(숙종 39) 진사에 합격, 음사(蔭仕)로 현릉(顯陵)참봉이 되고,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괴원(槐院:承文院)에 들어가 공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문학사서로 옥당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었다. 그러나 수찬으로 죄를 입어 파직되었다가 수년 후에 다시 복직되어 지제교(知製敎)에 선임되었고, 북조평리로 보좌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용인현령으로 취임하여 죽었다. 충직하고 견문이 넓으며, 일에 있어 이해를 초월하여 자기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평소에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주자학(朱子學)을 애독하여 정통하였다. 처음 정언이 되었을 때 두 번 사화를 치르고 조정의 기강이 바로 잡힌 지 1년이 지나 대신 백료가 조태구(趙泰耉) 등의 여러 역적과 김일경(金一鏡)을 비롯한 5적을 성토할 것을 청하였으나, 영조께서 이를 주저하였다. 겸명은 어전에 들어가 그들의 죄를 일일이 말하여 사건 처리를 강력히 주장하고 물러가 누차 소를 올렸으며, 후에 수찬으로 동료를 인솔하고 논술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흉당에 대하여는 상하 계급을 막론하고 이를 규탄하였다. 이광좌(李光佐)에 대한 공격이 심하였으므로 왕이 친히 제지하였으나 절대로 굴하지 않으니 왕이 ‘너와 말하는 것은 목석우상(木石偶像)과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까지 질책하였다. 궁호(宮號) 증가에 따르는 공인(貢人)의 증가를 논란하고 또 공인들의 비위사실을 들어 그의 감원과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당시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목호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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睦虎龍 (1684

1724)

조선 경종 때의 사람. 1722년(경종 2) 3월 임금을 죽이려는 역적이 있다고 고해 바쳤다. 임금은 즉시 정국(庭鞠)을 열고 목호룡이 역적이라고 지적한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백망(白望)·심상길(沈尙吉)·이희지(李喜之)·김성행(金省行) 등 60여 명을 잡아들였다. 백망은 심문을 당하면서 이것은 세력을 잃은 소론(少論)·남인(南人)이 왕세제(王世弟:후일의 英祖)를 모함하려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 심문을 담당하고 있던 남인들은 이를 묵살했다. 이리하여 이천기·이희지·심상길·정인중·김용택·백망·장세상(張世相)·홍의인(洪義人) 등과 앞서 왕세제를 세운 소위 건저(建儲) 4대신인 이이명(李?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建命)·조태채(趙泰采) 등이 차례로 사형을 당했다. 목호룡은 부사공신(扶社功臣)에 오르고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의 벼슬을 받고 동성군(東城君)에 피봉되었다. 이 사건은 주로 김일경(金一鏡)·조태구(趙泰耉) 등 소론이 당시 집권당인 노론을 없애기 위한 모략이었으며, 이 사건 후 전에 손론의 거두이던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 부자는 관측이 추복(追復)되었다. 1724년(영조 즉위) 영조가 즉위하자 드디어 이 모략이 탄로되어 김일경·목호룡 등은 체포되었다. 원래 영조는 동궁 시절에 소론들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았으며, 목호룡 밀고사건 때에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으므로 즉위하자 곧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기용하였다. 김일경은 고문을 당하면서 영조를 나으리(進賜:임금 아닌 왕자에 대한 존칭)라 부르며 임금으로 대하지 않고 끝내 공모자가 없다고 우겨서 목호룡·김일경 두 사람만이 당고개(唐古介)에서 목을 잘리고 목호룡의 머리는 3일 간 거리에 달아매었고, 그가 밀고한 글은 불태워 버렸다.

선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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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惠廳

선조 41년(1608) 대동미와 포·전의 출납을 맡아보게 하기 위해 설립한 관청. 지방에는 경기·강원·호서·호남·영남·해서에 8개 지청(支廳)을 두었다. 이 선혜청은 대동법이 경기도에 실시될 때 경기청과 상평청을 병합하여 발족한 관청으로, 제도(諸道)에 대동법이 확장 실시됨에 따라 시책 및 사무 일원화를 위해 해도(該道)의 대동청을 흡수하여 확대되어 갔으며, 균역청까지 산하에 둠으로써 조선 후기에서 가장 비대한 재정기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그러나 선혜청 산하의 각 청은 전반적인 시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청(該廳)의 낭청(郎廳)에 의해 독립적으로 사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관원으로는 도제조(都提調)·호조판서를 비롯하여 제조·낭청이 있었다.

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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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布

군역 대신에 납부한 포(布). 임진왜란을 계기로 병농(兵農)을 분리한 모병제로서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일반 장정들은 군역 대신에 군포라 하여 연(年) 2필(匹)의 포를 바쳤다. 정부는 이 군포로써 군비에 충당하였다. 그러므로 이 군포의 납부는 일종의 세와 같이 되었다. 1년에 2필의 포라는 것은 결코 가벼운 부담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관리와 결탁하여 군포의 납부를 면제당한 사람들이 있었고, 황구첨정·백골징포 등의 부정 수단이 횡행했다. 따라서 농촌은 피폐하여 갔다. 여기서 군포의 징수를 개혁할 필요가 생겨 균역법이 대두하게 되었다.

삼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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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手米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의 경비를 위해 신설된 특별 지세(地稅). 임진왜란 때 군사력의 부족을 느낀 정부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여기에 사수(射手)·포수(砲手)·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을 두어 훈련하였다. 이 삼수병의 급료를 위해 처음에 둔전을 두었으나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35년(1602) 경상·전라·충청·강원·황해·경기의 6도에서 1결에 대하여 1말(斗)의 특별세를 부과하고, 다시 세액을 1말 2되(升)로 증액했는데 이를 삼수미라고 하였다. 인조 12년(1634)부터 경상·전라·충청 3도에 매결 1말씩 세액을 감했고, 병자호란 이후 경기도는 면세하였다. 이 제도는 전시(戰時) 특별세의 성격을 띠었으나 차차 고정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계속되었다.

균역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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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役法

조선 후기 군포 징수의 시정책으로 시행된 군역세법. 17세기 중엽 이후 군포 징수에 따른 시정책이 거듭 논의되어 왔으나 확고한 대책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조 26년(1750)에 와서 그의 엄명(嚴命)을 받고 비로소 종래 1년에 2필씩 내던 포를 1필로 감하여 받도록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수(匹數)의 반감으로 인하여 생기는 부족액은 어세(漁稅)·염세(鹽稅)·선박세 등의 제세(諸稅)와 결작(結作)의 징수로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균역법이 명실상부한 것은 아니었다. 양반층은 여전히 징포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농민들은 포의 감소 대신에 미(米)를 내었으므로 포가 미로 대체된 것이었다. 영조의 영단에도 불구하고 균역법은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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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文秀 (1691

1756)

조선의 정치가.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忠憲). 본관은 고령(高靈). 항한(恒漢)의 아들로 1723년(경종 3) 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이듬 해 설서(設書)·병조절량(兵曹正郞)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削職)되었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에 등용,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이듬 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 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成君)에 봉해졌다. 1730년 참찬관(參贊官)에 이어 호서 어사(湖西御使)로 나가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에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앞서 안동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豊德府使)로 좌천당했다가 1741년(영조 17) 어영대장(御營大將)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섬을 실어와서 기민(飢民)을 구제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 판서,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 충주 목사(忠州牧師)로 다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 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세손사부(世孫思傅)를 지내고 1752년 왕세손(王世孫)이 죽자 약방제조(藥房提調)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특히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았고, 암행어사 때에 활약한 많은 일화로 유명하다.

균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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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役廳

영조 26년(1751) 균역법의 시행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 이 균역청은 전의감(典醫監)에 설치되었으며, 당시 예조판서 신만(申晩), 이조판서 김상노(金尙魯), 사직(司直) 조영국(趙榮國)·홍계희(洪啓禧)가 당상(堂上)이 되었다.

균역청 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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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役廳事目

균역법의 시행 내용을 정돈 인령(印領)한 것. 균역청 사목은 영조 26년(1750)에 비변사에서 강정(講定)된 감포급대절목(減布給代節目)을 준용한 것으로, 선혜청 사목의 예에 따라 인쇄한 것이다. 그 대요는 설청(設廳)·결과(結科)·여결(餘結)·해세(海稅)·군관(軍官)·이획(移劃)·감혁 (減革)·결대(結代) 수용(需用)·회록(會錄)의 10조이며, 각 조에는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상세히 열거되어 있다.

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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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作

전결(田結)에 대한 일종의 부가세. 영조 26년(1750)에 균역법의 실시로 재정상 부족액이 생기게 되었다. 이를 보충시키는 방법의 일환으로 결미(結米) 또는 결전 등의 명목을 붙여서 전세(田稅)를 증수(增收)케 하였다. 그리하여 평안·함경 양도를 제외한 다른 6도의 전답에 대하여 1결당 쌀 2말(斗)을 징수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군포 부담의 일부가 전세화됨으로써 사실상의 전세율이 더욱 가중되었다.

신임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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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壬士禍

조선 영조 때 세제(世弟) 책봉 문제를 에워싸고 일어난 노론과 소론의 싸움.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아들이 없고 몸이 허약하였다. 이에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은 하루 속히 왕세자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관철되어 경종 1년(1721) 왕제(王弟) 연잉군(延?君ː후의 英祖)이 세제로 책봉되자 소론파의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煇) 등은 부당성을 상소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왕세자가 정무를 대리하자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 4대신을 역모로 무고했다. 이로써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이인좌의 난으로 소론 일파는 다시 쫓겨났다.

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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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麟佐-亂

1728년(영조 4) 소론(少論) 일파가 일으킨 반란. 신임사화(辛壬士禍) 이후 실각당하였던 노론(老論)이 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고, 앞서 노론 4대신을 무고(誣告)한 바 있는 소론파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 죽음을 당하자, 그 여당(餘黨)들은 불평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 영조 3년 7월 1일(1727)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3월에 이인좌·김영해(金寧海:金人鏡의 아들)·정희량(鄭希良)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먼저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하고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李舜臣의 손자)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가 되어, 경종이 억울하게 죽었다. 영조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격문(檄文)을 사방으로 돌리고 모든 군사가

흰 색의 옷을 입고 경종을 애도하는 것처럼 꾸미는 한편,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총융사(總戎使) 김중기(金重器)·금군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 등과 통모(通謀)하여 내외상응(內外相應)하려 하였으나, 용인(龍仁)에 퇴거하고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崔奎瑞)가 이를 알고 크게 놀라 조정에 고변(告變)하니 반군의 계획은 무너지고, 새로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의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비록 단시일의 내란이긴 하였으나, 청주성을 중심으로 진천(鎭川)·죽산(竹山)·안성(安城) 등지는 그 형세가 몹시 위태로웠으며,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의 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押送)되어 처형되었다. 이 난으로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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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政院日記

조선 왕조 승정원의 일기. 인조 1년(1623)부터 고종 31년(1894)까지의 기록이 현존한다. 승정원의 주서(注書)·가주서(假注書)는 매일 승정원의 일기를 썼는데 매월의 일기는 다음달 안으로 완성하여 보존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 이래의 일기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와 영조 20년(1744), 고종 25년(1888)에 각각 화재를 당하였다. 그 뒤 영조 23년(1747)과 고종 26년(1889)에 개수를 했는데, 이 개수가 원본의 내용을 어느 정도 고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책은 당시의 공적 기록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과 더불어 귀중한 사료로서, 그 가치는 실록을 능가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장헌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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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獻世子

조선 영조의 둘째 아들. 휘는 선(?), 이복형 효령세자(孝寧世子)가 요절한 뒤 세자로 책봉. 영조 25년(1749) 승명대리(承命代理)로 청정(廳政)시킬 만큼 영조는 세자를 총애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장성함에 따라 학문에 태만하고 병증(病症)이 발작하면 좋지 못한 소행을 많이 했다. 또 세자는 왕의 젊은 계비(繼妃) 김씨 및 총희(寵姬) 문숙의(文淑儀)와 사이가 좋지 못해 이들의 참소가 심했다. 동왕 38년(1762)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열거하였다. 이를 본 영조는 대로(大怒)하여 세자의 위를 폐하려 하였다. 이어 윤(閏) 5월 또 다른 비어(飛語)가 나돌게 되었다. 이리하여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했다. 그 후 영조는 이를 뉘우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여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하였으며, 정조가 즉위한 뒤 장헌세자로 추존(追尊)하였다.

시파·벽파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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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派·僻派-

장헌세자의 사사사건(賜死事件)을 에워싸고 일어난 싸움. 장헌세자의 사사사건 이후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벽파가 생겨났다. 홍봉한(洪鳳漢) 일파는 시파에 속하고 김구주(金龜柱) 일파는 벽파에 속하는데, 이로써 노론의 분열은 물론 소론·남인도 주로 시파에 속하는 등 당쟁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 후 정조가 즉위하자 자연히 시파를 가까이했으며, 순조가 즉위했을 때는 영조의 계비인 김씨가 섭정을 함에 따라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 순조 1년(1801)에 일어난 신유사옥(辛酉邪獄)도 이 시파·벽파의 대립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홍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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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國榮 (1748

1780)

조선 정조 때의 세도가. 본관은 풍산(豊山). 영조 48년(1772)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가 춘방설서(春坊說書)를 겸하였다. 이때에 권신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등이 동궁(東宮)으로 있던 정조를 위협하매 이를 막아 무사히 즉위케 했다. 이에 정조의 총애를 입어 도승지(都承旨) 겸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어 모든 정사는 그를 거쳐 상주(上奏)하고 결재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또한 누이로 하여금 정조의 원빈(元嬪)을 삼아 궁중의 숙위소에서 소위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후에 정조는 그의 벼슬을 삭탈하고 강릉으로 추방했다.

홍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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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鳳漢 (1713

1778)

조선의 대신.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시호는 익정(翼靖). 본관은 풍산(豊山).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의 5세손, 수재(守齋) 현보(鉉輔)의 아들, 좌의정 인한(麟漢)의 형, 정조의 외조부. 1744년(영조 20) 문과에 급제, 광주(廣州) 부윤을 비롯하여 어영대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였으며, 1754년(영조 30) 비국당상(備局堂上)이 되어 청인(淸人)들이 애양책문(?陽柵門)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開墾)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761년(영조 37) 영의정에 이르러 세자에 대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어 경외민(京外民)의 이동법(移動法)을 만들어 함부로 행동함을 금하였으며, 여러 가지 폐습과 관리의 협잡 등을 시정하는 한편 당습(黨習)의 제거·군사의 보충·독봉(督捧)의 폐해를 개혁하였다. 1768년(영조 44) 다시 영의정이 되어 울릉도(鬱陵島)의 사적을 널리 조사하여 책(冊)을 만들어 왜인(倭人)들의 점유(占有)를 미리 막게 하였으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어 청주의 한유(韓鍮)의 탄핵을 받고 사직, 다시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러 은신군(恩信君) 진(縝)·은언군(恩彦君) 인(絪)의 사건으로 삭직되었다. 1772년(영조 48) 또다시 봉조하의 직을 받고 정조

초에 죽으니 왕이 부원군(府院君)의 장례에 준하여 장사케 하고,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게 하였으며, 1784년(정조 8) 시호를 내리고 제사하였으며, 1843년(헌종 9) 체천(遞遷) 않는 은전을 베풀었다.

신해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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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邪獄

1791년(정조 15)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 일명 진산사건(珍山事件). 천주교가 우리나라의 해서(海西)·관동(關東) 지방의 일반 민중 사이에 신봉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의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상장(喪葬)의 예를 쓰지 않고 조문을 받지 않았으며, 또 그의 외제(外弟) 권상연은 자기집의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제례를 지냈다는 소문이 중앙에 전해짐으로써 조정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정조는 진산군수 신사원을 시켜 두 사람이 사회 도덕을 문란케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으로 사형에 처하는 정책을 써서 천주교의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 같은 인물은 귀양보내는 데 그치고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신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 등의 소위 공서파가 대립, 다음의 신유사옥으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 10여 년 간 암투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