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양반사회와 경제생활/양반관료의 대립과 분열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양반관료의 대립과 분열〔槪說〕[편집]

농장의 확대나 공부(貢賦)의 가렴은 주로 훈구대신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이들을 백안시하는 이색분자들이 있었으니, 김시습 등의 생육신과 남효온(南孝溫) 등 죽림칠현을 모방하는 자들이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대체로 관학파(官學派)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 양반사회의 질서는 굳어지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성종 때 영남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등장함으로써 조선 사회는 또 한번 진통을 겪어야 했다. 이들 독서인군(讀書人群)은 김종직에 이르러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세력을 크게 떨쳐 훈구파와 대립하는 형세를 취했다. 이들의 진출은 조선 양반사회에 새로운 파란과 활력을 가져왔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화와 당쟁이 발생하였다. 첫 사화는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였으며, 동왕 10년 또다시 폐출사사사건(廢黜賜死事件)으로 인한 갑자사화가 발생하였다. 결국 이러한 사건은 연산군을 물러나게 했으며, 소위 중종반정을 일어나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림파의 소장학자 조광조가 등용되어 향약의 실시를 주장하고 현량과를 설치케 하는 등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혁신 정책을 내세웠다. 여기에 반발한 훈구파 세력은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였으며, 명종 즉위년에는 또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위의 네 사화는 재야 사림을 포함한 다수인의 파당(派黨)이 공공연한 정치적 투쟁을 벌인 점에 있어서 고려나 그 이전의 정쟁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거듭되는 사화 속에서도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발전하여 갔으며, 드디어 선조 때에는 재차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또다시 당쟁이 일어나게 되어 정쟁은 파노라마처럼 되풀이되었다.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양파의 전랑직(詮郞職)을 에워싼 암투에서 비롯되었다. 이 양파의 대립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이 생겼으니 일찍이 이준경(李浚慶)이 붕당의 징후가 보인다고 한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사화의 발생[편집]

士禍-發生

성종대에는 훈구대신과 사림이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서로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오히려 두 세력은 서로 협력하여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기념비적인 편찬사업을 마무리지었다. 여기에는 훈신 중에도 서거정·노사신·최항·양성지 같은 이들은 원성을 듣던 인물이 아니었고, 또 양파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성종의 뛰어난 정치적 역량과도 관계가 깊었다.그러나 연산군(1494

1506)이 즉위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원래 시재(詩才)와 감성이 뛰어난 그의 어머니(성종의 비)가 신하들의 충돌로 죽게 된 것을 알고 훈구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학덕 있는 훈구대신들은 대부분 사망하고, 사림세력은 더욱 커져서 그들의 분방한 언론(言論)활동이 왕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평소 사림의 공격을 받아 수세에 몰려 있던 훈구대신의 잔류세력인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 등은 1498년(연산군 4년) 김일손(金馹孫)이 지은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왕을 충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관련이 있는 김일손·표연말(表沿末)·정여창(鄭汝昌)·최부(崔溥) 등 수십 명의 사림을 사형·유배 혹은 파직케 했다. 이 사건을 무오사화(戊午士禍) 혹은 무오사화(戊午史禍)라 하는데,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사림이 대부분 몰락하고 말았다.사림을 정계에서 몰아낸 후 연산군은 훈구대신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던 중 연산군을 싸고 도는 척신(戚臣)들이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尹氏)의 폐비사사(廢妃賜死)사건에 윤필상(尹弼商) 등 훈신이 관여했음을 폭로하여 이 사건에 관련된 훈신과 아직 남아 있던 사림까지 몰아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일어난 사건을 갑자사화(甲子士禍)라 한다.두 차례의 사화로 쓸 만한 인재들을 처단하고 난 뒤 연산군의 음탕과 사치는 심해지고,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눌렀으며,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쓰였다 하여 국문학습을 탄압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도 했다.연산군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 훈구대신들은 군대를 동원해 연산군을 추방하고 그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것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이다.백성과 사림의 여망 속에 왕이 된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고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무너진 유교정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특히 중종 10년(1515)에 젊고 깨끗한 조광조(趙光祖)가 중용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젊고 기개 있는 사림이 현량과(賢良科)라는 추천제도에 의해서 대거 등용되었다. 이때 등용된 사림은 기호출신이 많아 기호사림으로도 불린다. 이들의 가문은 조선초기에 큰 벼슬을 지낸 훈신의 후예들이 적지 않았으나, 체질적으로는 전형적인 성리학자로 변신해 있었다.조광조 일파는 삼사(三司)의 언관직에 포진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公論)이라고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즉 연산군의 학정에 대한 경험에서 무엇보다도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 경연을 강화하고 언론활동을 활성화했으며, 내수사 장리의 폐지, 소격서(昭格署)의 폐지, 그리고 향촌사회에서 향약(鄕約)의 실시와 『삼강행실』 『이륜행실(二倫行實)』 『주자가례』 『소학』의 보급, 균전제 실시를 통한 토지집중의 완화, 방납 폐단의 시정 등을 주요정책으로 내세웠다.사림의 정책들은 지방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크게 반영하고, 농민의 부담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것이었으나,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특히 조광조 일파는 공신에 책봉된 100명 가운데 4분의 3은 부당하게 공신이 되었으므로 그들의 공신 칭호와 토지 및 노비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신들의 원한을 샀다. 또 공신들은 의정부와 6조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삼사(三司)에 포진한 사림의 견제가 공신들에게는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언관(言官)의 권한이 너무 큰 것은 나라를 어지럽게 할 뿐 아니라, 『경국대전』의 권력체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행동으로 비판하였다.중종은 처음에 사림을 신임했으나, 나중에는 지나치게 군주를 압박하는 데 싫증을 느꼈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1519년(중종 14년) 남곤(南袞)·심정(沈貞) 등 훈구대신들은 조광조 일파에게 반역죄의 누명을 씌워 무참하게 죽이거나 유배보냈다.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개혁정치는 4년 만에 끝나고, 그들이 추진했던 정책도 대부분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때 화를 입은 조광조·김정(金淨)·김식(金湜)·김구(金銶)·기준(奇遵) 등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높은 추앙을 받아 16세기 후반에 사림시대를 여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기묘사화가 있은 지 10년 뒤에 중종은 훈구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했으나, 1545년에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일어난 소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또다시 밀려나는 네 번째 화를 입었다. 이 사건은 외척(外戚)간의 권력싸움에서 빚어진 것이 다른 사화와 다르다. 즉 중종이 돌아가자, 첫째 계비(莊敬王后)의 소생인 인종(仁宗)이 즉위하고 왕비의 동생인 윤임(尹任, 大尹)이 세력을 떨쳤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타계하자 둘째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소생인 명종(明宗)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 역시 어린 관계로 왕후가 수렴청정하고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小尹) 일파가 실권을 장악했는데, 집권하자마자 전 왕의 외척인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낸 것이다.명종 때에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숭신하여 보우(普雨)를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삼고 선교 양종을 다시 부활하여 오랜 만에 불교가 중흥하였으나 사림의 비난을 샀다. 또 북방이 어수선하고, 임꺽정 일당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훈구파[편집]

勳舊派

조선 세조 때 실권을 잡은 귀족적 관료학자들. 이들은 대개 세조의 찬위(纂位)를 도운 공신·총신(寵臣)·어용 학자들로서 높은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수차에 걸쳐서 공신전을 받아 막대한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정인지·신숙주·서거정·강희맹·이극돈(李克墩) 등이 이 파에 속한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능란한 문필로 여러 가지 관찬사업(官撰事業)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이 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김시습[편집]

金時習 (1435

1493)

조선의 생육신의 한 사람.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 본관은 강릉. 5세 때 이미 『중용(中庸)』 『대학(大學)』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1455년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世祖)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후,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불사르고 승려가 되어 설잠(雪岑)이라 호하고 또는 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동봉(東峰)·췌세옹(贅世翁)이라고도 하였다.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세조 때에 변절(變節)하여 6신(六臣)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南孝溫)·안응세(安應世)·홍유손(洪裕孫)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상처한 후 재취하지 않았고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선조는 이이(李珥)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뒤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생육신[편집]

生六臣

세조의 찬위 사건을 불의의 행위로 단정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에 따라 두문(杜門) 혹은 방랑으로 일생을 보낸 여섯 사람.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여(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혹은 권절(權節)의 여섯 명을 말하며, 이들은 벼슬을 버리고 단종을 추모하면서 절개를 지켰다.

김종직[편집]

金宗直 (1431

1492)

조선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자는 계온(季溫)·효관(孝?), 호는 점필재(?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밀양(密陽) 출생.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 성종 초에 경연관(經?官)·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한성부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 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嶺南學派)에 종조(宗祖)가 되었고,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 문인(門人)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며 기성 세력인 훈구파(勳舊派)와 심한 반목과 대립을 일으켰다.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바 있었는데,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문인들이 모두 참화(慘禍)를 입었다.길재(吉再) 및 아버지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문 경향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안으로 하는 실제적 방면에 치중한 것이었다. 총재관(總裁官)으로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55권을 증수(增修)했으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박수량[편집]

朴守良 (1491

1554)

조선의 정치가. 자는 군수(君遂), 시호는 정혜(貞惠), 본관은 태인(泰仁). 장성(長城) 출생으로 1513년 문과에 급제(중종 9),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지평(持平)·헌납(獻納)·장령(掌令)을 역임. 1534년 함경도 경차관(咸鏡道敬差官)이 되어 지방관아를 순시 중 안원보 권관(安原堡權官) 전주남(全周男)이 야인(野人)들에게 임의로 우마(牛馬)를 준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가 투옥되었다가 1536년 나주 목사(羅州牧師)로 기용되어 찰리사(察里使)를 겸했고,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진, 전위사(餞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전송했으며, 호조 참판, 한성 부우윤(漢城府右尹:1538) 공조와 호조의 참판을 지냈다. 1546년(명종 1)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형조판서·우참찬(右參贊:1550)으로 지의금 부사(知義禁府事)·도총관(都摠管) 등을 겸직, 이듬 해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 이해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해 사임을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전라도 관찰사에 전직되어 고향의 노모를 봉양하다가 우참찬에 재임(1552),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주세붕(周世鵬)과 깊이 교유하여 유림(儒林)간에 학자로 존경을 받았으며 신중·치밀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청렴하여 관리 생활 30여 년 동안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이 되었다.

김굉필[편집]

金宏弼 (1454

1504)

조선초의 학자.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본관은 서흥(瑞興). 어려서 김종직에게 사사했고, 무오사화 때 김종직 일파로 몰려 희천(熙川)·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처형당하였다. 평소 육경(六經) 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 등이 배출되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해군 때 정여창·조광조·이언적 등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정여창[편집]

鄭汝昌 (1450

1504)

조선 성종 때의 학자. 자는 백욱(伯?), 호는 일두(一?),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 육을(六乙)의 아들. 일찍이 부친을 잃고 학업에 전념하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3년 간 5경(五經)을 밝히고 성리(性理)의 깊은 이치를 연구하며 체용(體用)의 학을 궁명(窮命)하여 경명수행(經明修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1490년(성종 21)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보직되었고, 뒤에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에 옮겨 동궁을 보도(輔導)했으나 질시(疾視)되어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외임되자 향리 자제를 훈도하여 사사(師事)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좌되어 종성(鐘城)에 귀양가서 죽었다. 중종 때에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과 같이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종사하였다. 저서로 『용학주소(庸學註疏)』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불타고 정술(鄭述)이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하고 있다.

김일손[편집]

金馹孫 (1464

1498)

조선 연산군 때의 학자·문신.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 성종 17년(1486) 문과에 급제한 이래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의 사초(史草)를 썼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훈구파의 모해(謀害)를 입어 여러 사림파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일찍이 스승인 김종직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불의와 부패를 규탄하였다.

최항[편집]

崔恒 (1409

1474)

조선의 대신·학자. 자는 정부(貞父), 호는 동량(▩梁), 또 태허정(太虛亭),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삭녕(朔寧)·증영의정(贈領議政) 사유(士柔)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시(謁聖試)에 장원급제, 1443년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 정인지(鄭燐址) 등과 더불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언해(諺解)하였으며 다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주해(註解)하였다. 1453년(단종 1) 승지(承旨)로 있을 당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이듬해에 이조 참판이 되어 『공신연곡(功臣宴曲)』 4장을 지어 바쳤다.1455년(세조 1) 좌익(左翼) 공신 2등에 책록되고 공조 판서에 승진하였으며, 1459년(세조 5) 『육전(六典)』의 수찬(修撰)을 비롯하여 『관음현상기(觀音賢相記)』 『십이준도(十二駿圖)』 등을 찬하였고, 중추원사(中樞院事)로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歌詞)를 한글로 번역하는 한편,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하였으며, 신숙주(申淑舟) 등과 같이 『어제유장설(御製儒將說)』 3편을 주해하였다. 1464년(세조 10) 좌찬성(左贊成)으로 어제구현재시(御裁求賢才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가자(加資)를 받았으며, 『병장설주(兵將說注)』를 산정(刪定)하였다. 1466년에 우의정·좌의정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이르러 영성군(寧城君)이 되었으며, 『소학(小學)』 『주역구결(周易口訣)』 『예기구결(禮記口訣)』 등을 정하고 세조의 행장(行狀)을 초집하였다. 1469년(예종 1) 상정소제조(詳定所提調)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였으며, 1471년(성종 2) 좌리(佐理) 공신의 호를 받고 좌위정이 되어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찬수하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겸손하고 근실·과묵했으며 문장에 능하여 당시의 표전(表箋)은 거의 그 손을 거쳤다.

연산군[편집]

燕山君 (1476

1506)

조선의 제10대 왕(재위 1494

1506). 이름은 융. 성종의 장남, 어머니는 폐비(廢妃) 윤씨(尹氏).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 1483년(성종 14) 세자에 책봉, 서거정(徐居正)에게 학문을 배우고 즉위 후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建州野人)들을 회유 또는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한편으로 사창(社倉)·상평창(常平倉)·진제창(賑濟倉)의 설치, 빈민의 구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부활, 또한 『경상우도지도(慶尙右道地圖)』 『국조보감(國朝寶鑑)』 『여지승람(與地勝覽)』의 완성 등, 즉위 초에는 다소의 업적이 이룩되었으나 폐비 윤씨(廢妃 尹氏:燕山君의 生母)가 성종의 후궁 정씨(鄭氏)·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서 사사(賜死)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정씨 소생인 안양군(安陽君)·봉안군(鳳安君)을 살해하는 등 갖은 포악한 짓을 다했다.뿐만 아니라 각 도(道)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를 파견하여 미녀(美女)와 양마(良馬)를 징발, 성균관의 학생들을 쫓고 그곳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경연(經筵)을 폐지한 후 사간원(司諫院)도 없애 버렸다.연산군은 본래가 학문을 싫어하는지라 조신(朝臣)들은 이를 이용하여 반대파를 사초(史草) 문제로 모함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士林)을 살해하였고 윤씨 사사문제(賜死問題)에 관련된 선비들을 대량 학살하였다.원각사(圓覺寺)를 기생 양성소로 만들고 민간 여자들을 함부로 잡아들이고, 시정을 공박하는 투서가 국문(國文)으로 되었다 하여 국문을 아는 자를 모조리 잡아들이고 한글 서적을 모두 태워 버려 국문 쇠퇴를 초래하는 등 악정이 심해가므로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이 주동이 되어 진성대군(晋城大君:성종의 次子 즉 중종)을 추대하고 그를 내쫓으니 드디어 중종반정이 이루어졌다. 연산군은 교동(喬桐)에 추방되었다가 그 해에 병으로 사망했다.

무오사화[편집]

戊午士禍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 사림파(士林派)가 중앙에 등용되어 관계에 나오기는 성종 때부터인데 그 중심인물은 김종직(金宗直)이었다.그는 임금의 신임을 얻어 자기 제자들을 많이 등용하고 주로 3사(三司:司諫院·司憲府·弘文館)에서 은연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날이 감에 따라 이들은 종래의 벌족(閥族)인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小人輩)라 하여 무시하기에 이르렀고, 또 훈구파는 새로 등장한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이라 하여 업신여기게 되니, 이 두파는 주의·사상 및 자부(自負)하는 바가 서로 달라 배격과 반목이 그치지 않았다.이러한 상태에서 특히 신진의 김종직과 훈구의 유자광은 일찍이 사감이 있었고, 또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서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의 비행(非行)을 낱낱이 사초(史草)에 기록한 일로 해서, 김일손과 이극돈은 서로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는 마음이 일치되어, 마침내는 그 보복에 착수하였다.때마침 1498년(연산군 4) 전례에 따라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그 당상관(堂上官)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史草)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여, 이것을 문제삼아 유자광과 더불어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해바쳤다.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우선 이 일파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姜謙)·표연말(表沿沫)·홍한(洪澣)·정여창(鄭汝昌)·강경서(姜景?)·이수공(李守恭)·정희량(鄭希良)·정승조(鄭承祖) 등은 난(亂)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으며, 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이원(李?)·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姜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한편 어세겸(魚世謙)·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되었다.이리하여 사화의 단서가 된 이극돈도 파면되고 유자광만이 그 위세를 더하여 감히 그 뜻을 어기는 자가 없게 되고, 사람은 모두 사기를 잃었다. 이 사건은 4대 사화(四大士禍)의 제일 첫 사화로, 사초(史草) 문제로 발달되었다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쓴다.

갑자사화[편집]

甲子士禍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 윤씨(尹氏) 복위(復位) 문제로 연산군이 일으킨 사화.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하였다가 다음 해에 약(藥)을 내려 죽었다. 연산군은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그의 어머니가 내쫓기고 죽게 된 경위를 알고 후궁(後宮)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죽이고 안양군(安陽君:행)도 죽였다.연산군의 포악한 행위를 꾸짖었던 인수대비(仁粹大妃:연산군의 조모)는 병상에서 연산군에게 맞아 죽었다. 연산군이 윤씨를 왕비로 추숭(追崇)하여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祀)코자 할 때 이에 반하여 응교(應敎) 권달수(權達手)는 처형되었고, 이행(李荇)은 귀양을 갔다.또 윤씨 폐사(廢死)에 찬성하였던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逡)·이세좌(李世佐)·권주(權住)·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 10여 명이 사형되었고,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하였으며, 이들의 가족들에게도 벌을 주었다.이 참화는 갑자년에 일어났으며, 뒤이어 언문학대(言文虐待)까지 하게 되어 국문학 발달도 침체상태에 빠졌다.

중종[편집]

中宗 (1488

1544)

조선 제11대 왕. 재위 1506

1544년. 휘는 역(?), 자는 낙천(樂天).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晋城大君)에 수봉되었다가 연산군이 폭정(暴政)으로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에 의해 쫓겨난 후 추대되었다.(中宗反正). 중종은 즉위한 후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잡고 문벌세가(門閥世家)를 누르고자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조광조(趙光組) 등의 신진사료(新進士類)를 등용하여 정치에 최선을 다하려 하였으나 종래부터 집권해 오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 수구파(守舊派)의 참사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 일파가 희생되는 참극이 있었다.그 후 분쟁은 끊이지 않아 1532년에는 기묘사화 후 집권했던 심정(沈貞)·이항(李沆)·김극복(金克福) 등이 화를 당했고, 1537년에는 심정 일파를 모함한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주찬(誅竄)되는 등 재위 동안에 화옥(禍獄)이 그치지 않았다.

중종반정[편집]

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晋城大君:中宗)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연산군은 재위 12년 간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경연(經?)과 대제학(大提學)을 폐하였으며, 성균관을 폐하여 오락장소로 만들었다. 특히 원각사(圓覺寺)를 폐하여 연방원(聯芳院)으로 고치고, 흥청(興淸)들과 기거를 함께하며 채청사(採靑使)를 각 지방에 보내 미녀를 끌어들이고, 유희와 안락으로 세월을 보내며 국정을 도외시하였다.이러한 폭정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연산군의 비위을 상하여 파직되었던 전 이조참판(吏曺參判) 성희안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원종(朴元宗)과 밀약하고 이조판서(吏曺判書) 유순정(柳順汀)의 조력을 얻어 1506년 9월 왕이 장단(長端)으로 유람(遊覽)하는 틈을 타서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그러나 왕이 행차를 중지하므로 계획이 좌절되었으나 때마침 호남지방의 유빈(柳賓)·이고(李顆) 등이 진성대군 옹립의 격문을 전함에 이를 기회로 훈련원(訓練院)에 장사(壯士)를 모아 광화문 밖에 있던 왕비 신씨(愼氏)의 형 신수권(愼守勸)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영(任士英) 등을 살해하여 궁중의 측근자를 없앤 다음 성희안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윤대비(尹大妃:成宗繼妃)의 하명을 받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喬桐)에 안치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곧 중종이다.

사림파[편집]

士林派

전원의 산림(山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학자. 고려 말기의 유학자 길재(吉再)가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영남 일대는 그의 제자가 많이 배출되어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다.길재의 제자 김숙자(金叔滋)와 그의 아들 김종직은 영남 유학의 사종(師宗)으로, 그의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이 배출되어 성종 때에는

중앙의 정치무대에 대거 등장했다. 이들을 사림파라 하는데, 관학자들과는 학문의 경향을 달리하고 있었으며, 주로 삼사(三司) 계통에서 언론문필을 담당하였다.이들은 대개 유교의 이상 정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종래부터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와 불화가 생겨, 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기와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의 진출로 사화가 되풀이되어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한 사림파는 꾸준히 그 학통을 계속하면서 발전하여 갔다.

조광조[편집]

趙光祖 (1482

1519)

조선의 성리학자·정치가,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한양(漢陽). 원강(元綱)의 아들. 일찍부터 학문의 뜻이 컸으며, 18세 때 아버지가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자 따라가 마침 희천(熙川)에 귀양가 있는 성리학자 김굉필(金宏弼)을 만나 깊은 자극을 받았다.학문은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을 받들어 이를 토대로 하여 경전(經傳) 연구에 응용했으며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옛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1510년(중종 5) 진사에 장원, 1515년 추천으로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으나 과거를 보아 떳떳이 벼슬에 오를 것을 다짐하던 차 마침 알성시(謁聖試)가 있어 1515년(중종 10) 이에 급제했다. 전적(典籍)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교리(敎理)·응교(應敎)·승지(承旨)를 지내고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단행하고 유학자 정치를 구현하려 함으로써 유학(儒學)과 문치(文治)에 뜻을 둔 중종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특히 대사헌이 되고 세자 부빈객(副賓客)을 겸임했는데 당시 어진 선비들이 모두 뽑혀 요직에 앉은 때라 모두 협력하여 숙폐(宿幣)를 개혁하니 과거 성종 때의 법이 차츰 실행되기 시작했다.정부는 조광조 등의 계청으로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추천에 의해 재행(材行)을 겸비한 선비 120명 중에서 1519년(중종 14) 4월 중종이 친히 장령(掌令) 김식(金湜) 등 28명을 뽑으니 조광조 등은 그들을 홍문관·사간원·시종 등 요직에 등용하였으며 조정에는 간신들이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철인 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를 내세우고 기성 귀족들을 소인(小人)이라 지목했으며 양풍미속(良風美俗)을 기르기 위해 미신의 타파와 향약(鄕約)을 실시케 하고 민중의 정신 생활과 물질 생활에 유익한 여러 가지 서적을 번역·인쇄하여 널리 퍼뜨리는 등 이상주의에 치우친 정치를 실시하려 했다.그러나 신진의 청년들이라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고 특히 경연(慶筵) 때마다 발언이 그치지 않아 중종도 차츰 그 응대에 지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조광조 등에 의하여 벽지로 좌천되어 있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이를 알게 되었다. 조광조는 왕도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임을 알고 항상 자리를 내 놓으려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과격파 선비들로부터 우유부단하다는 빈난을 받기에까지 이르렀다.그 해 10월 조광조는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등과 함께 중중 반정(1506)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문란하게 책록됐으니 부당한 자들은 훈록에서 깎아버리라고 소를 올렸으며 대신 6경(六卿)들도 이를 지지하는 계청을 올렸다. 중종은 하는 수 없이 심정·홍경주(洪景舟) 등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을 공신 훈적에서 깎아버렸으며 이로 인해 조광조는 훈록을 깎인 자들로부터 깊은 원망을 받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홍경주가 찬성이 되었다가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남곤·심정 등과 기맥을 통해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온통 조광조에게 기울었다고 말하게 하고 심정도 경빈 박씨(敬嬪朴氏)의 궁비(宮碑)를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 또 궁안의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글을 써 벌레가 파먹음으로써 글자를 새기게 하여 이 일이 궁인의 손을 거쳐 왕에게 전해지게 하는 등 왕의 뜻을 움직이려고 갖은 수단 방법을 쓰자 왕도 또한 뜻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심정은 홍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실의(失意)한 여려 제상들에게 찾아가 조광조를 죽일 것을 모의케 하자 홍경주는 영중추 부사(領中樞府事) 김전(金銓) 등과 함께 몰래 왕에게 글을 보내어 상변(上變)하려고 해도 왕을 모신 근시(近侍)가 모두 조광조의 심복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으니 신무문(神武門)을 열어 밤중에 들어가 상변하겠다고 청했다. 드디어 10월 15일 밤 홍경주·김전·남곤·이장곤(李長坤)·고형산(高荊山)·심정·홍숙(洪淑)·손주(孫澍)·방유령(方有寧)·윤희인(尹希仁)·김근사(金謹思)·성운(成雲) 등은 신무문으로 궐내에 들어가 왕께 입대하고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구신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집어 놓았으니 그 죄를 밝혀 달라고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조광조를 위시하여 참찬 이자(李?)·형조 판서 김정(金淨)·대사성 김식(金湜)·부제학 김구(金絿)·도승지 유인숙(柳仁淑)·승지 박세희(朴世熹)·응교 기준(奇遵)·수천 심연원(沈蓮原)·공서린(功瑞麟)·윤자임(尹自任)·안정(安挺)·이구(李構)·홍언필(洪彦弼)·박훈(朴薰) 등이 체포되었다. 처음에 홍경주 등은 그날 밤으로 모두 죽일 계획이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우의정 안당(安塘)·신임 대사헌 유운(柳雲)·신임 대사간 유희인(尹希仁)·전한(典翰) 정응(鄭應)·봉교(奉敎) 채세영(蔡世英) 등의 역간(力諫)으로 일단 취조를 받게 되었다. 결국 조광조·김정·김구·김식·윤자임·박세희·기준·박훈 등 8명 중 조광조는 능주(綾州)에 귀양가, 12월 20일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공자묘(孔子廟)에 함께 모셔졌으며 이율곡(李栗谷)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 등을 가리켜 동방 4현(東方四賢)으로 숭배했다.

현량과[편집]

賢良科

중종 때 조광조에 의하여 실시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이상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중종 13년(1518) 내외 요직자로 하여금 재능이 있는 인물을 천거케 하여 그들을 왕이 친시(親試)로써 채용하는 현량과를 설치케 하였다. 그 결과 조광조 일파의 신진 사류(士類)들이 많이 등용되었다. 여기에 반발한 훈구파들이 기묘사화를 일으켰고, 그 결과 현량과는 폐지되었다가 중종 말년에 복설(復設)되었다.

기묘사화[편집]

己卯士禍

조선시대 사화(士禍)의 하나. 1519년(중종 14) 11월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재 상(勳舊宰相)이 조광조(趙光組)·김정(金淨)·김식(金湜) 등의 젊은 선비들을 몰아내어 죽이고 혹은 귀양보낸 사건이다.연산군 때의 무오·갑자사화로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 학자들은 거의 몰살당하여 유학(儒學)은 쇠퇴하고, 기강(紀綱)도 문란해졌는데,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惡政)을 개혁함과 동시에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대의명분과 오륜(五倫)의 도를 가장 존중하는 성리학(性理學:朱子學)을 크게 장려하였다.이때 뛰어난 것이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중 성리학에 가장 연구가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 우리나라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1515년(중종 10)에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이 연명(連名)하여 그를 천거하였고, 이조판서 안당(安塘)도 그를 추천하였으므로 곧장 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전후 5년 간에 걸쳐 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삼대(三代:夏·殷·周)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려고 하였다.1518년(중종 13) 그의 건의에 따라 현량과(賢良科)가 설치된 후 이 과(科)를 통하여 김식·안처근(安處謹)·박훈(朴薰)·김정·박상·이자(李?)·김구(金銶)·기준(奇遵)·한충(韓忠) 등 조광조의 일파인 젊은 선비들이 차례로 요직에 임명되어 조광조를 보좌하였으며, 조광조 자신은 1519년(중종 14)에 38세로 대사헌(大司憲)의 요직에 올랐다.이들은 성리학을 너무 지나치게 중요시한 나머지 고려 이래 몇백년 간 장려하여 온 사장(詞章:詩文)의 학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남곤·이행(李荇) 등의 사장파(詞章派와 서로 대립되었으며, 또한 현실을 돌보지 않고 주자학(朱子學)에 따라 종전의 제도를 급진적으로 고치려 하였고, 풍속·습관까지 바꾸려 했기 때문에 정광필(鄭光弼) 등 보수파의 훈구재상과 서로 대립되었다. 당시의 훈구재상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모두 세력을 잃고 불평을 품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靖國功臣:中宗反正功臣) 가운데는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하자고 건의하여, 마침내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沈貞도 포함)의 공신호를 박탈하자 이에 놀란 훈신(勳臣)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략·중상에 나섰으니, 이것이 조광조 일파의 젊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된 직접적 원인의 하나였다.그 위에 처음에는 중종도 조광조 등의 혁신적인 정치에 호의를 가졌으나 그들의 지나친 도학적(道學的) 언행에 구속도 느끼고 염증도 없지 않았다. 불평이 많은 훈구파의 심정·남곤은 홍경주(洪景舟)의 딸이 희빈(熙嬪)으로 중종을 모시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조광조 타도에 발벗고 나섰다. 희빈은 천하의 인심이 조광조를 지지하니 조광조는 공신들을 제거한 후에 스스로 임금될 꿈을 꾸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동시에 대궐 안의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이라는 4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하고, 이것이 묘하게 글자로 남은 것을 임금에게 보여 큰 충격을 주었다.한편 남양군 홍경주·예조판서 남곤·공조판서 김전·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도총관 심정 등은 비밀리에 모의한 끝에 홍경주가 일당을 대표하여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과격한 일을 자행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니 처벌해야 한다고 임금 중종에게 밀고하였다. 마침내 중종은 대사헌 조광조·우참찬 이자(李?)·도승지 유인숙(柳仁淑)·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朴世熹)·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洪彦弼)을 비롯하여 조광조파로 지목되는 많은 사람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홍경주·남곤·심정 등은 당장

이들을 때려 죽이려 하였으나 병조판서 이장곤(李長坤)·좌의정 안당(安?)이 임금께 간절히 말렸고, 영의정 정광필은 '젊은 선비들이 현실을 모르고 옛날 제도를 그대로 인용하여 실시하고자 한 것’이라 하여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말렸는데 그는 이로 인하여 옥에 갇혔다. 이날 성균관의 유생 천여 명이 달려와서 광화문 밖에 모여 조광조 등의 억울함을 울며 호소하니 주모자 이약수(李若水) 등 몇 명을 체포하자 모두 자진 포승을 지고 들어가 감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한다. 조광조는 능주(綾州)에 귀양갔다가 곧 사약(死藥)을 받고 죽었으며,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金湜)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살, 김구·박세희·박훈 등은 귀양을 갔는데 모두 30대의 청년이었다. 또 그들을 옹호하던 안당(安?:2년 후에 사형)·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형제는 파면되었다. 뒤이어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이 되고, 이유청(李惟淸)은 우의정이 되었고 현량과도 곧 폐지되었다. 이 옥사가 기묘년(己卯年)에 일어났으므로 기묘사화라 하며, 이때 죽은 사람들을 후에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하였다.

을사사화[편집]

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 중종은 제1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仁宗)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明宗)을 낳았는데,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윤씨(坡平尹氏)이며. 장경왕후의 아우에 윤임(尹任)이 있었고 문정왕후의 아우에 윤원형(尹元衡)이 있었다. 윤임과 윤원형은 같은 종씨(宗氏)이면서 서로 국구(國舅)가 되어 세력을 잡으려고 일찍부터 반목·대립하여 세간(世間)으로부터 대윤(大尹:尹任)·소윤(小尹:尹元衡)의 지목을 받았다.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자 윤임이 득세하여 사림(士林)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여 이언적(李彦迪)·유관(柳灌)·성세창(成世昌) 등을 정부의 대관으로 임명하는 등 일시 사람은 그 기세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당시 뜻을 얻지 못한 사림들은 윤원형의 밑에 모여서 사림과 반목하고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인종이 겨우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나이 불과 12세의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니 형세는 역전하여 이번에는 소윤 윤원형이 득세하여 전일(前日)의 윤임 일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즉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있던 윤원형은 자파(自派)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평소 대윤파와 사감(私感)이 있던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순명(鄭順明), 병조판서 이기(李?),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 심복들과 더불어 계책을 꾸미고 또 한편으로 그의 첩(妾) 난정(蘭貞)으로 하여금 문정대비와 명종을 선동케 하여 형조판서 윤임 및 그 일파인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 등을 반역음모죄로 몰아 귀양보냈다가, 죽이고 이어서 계림군(桂林君)도 이 음모에 관련하였다는 무고로 죽이고 전주서(前注書) 이덕응(李德應:尹氏의 女?)을 협박, 그 무고로서 수찬(修撰) 이휘(李輝), 부제학 나숙(羅淑), 참봉 나식(羅湜)·정희등(鄭希登)·박광우(朴光佑), 사간(司諫) 곽순(郭珣), 정랑(正郞) 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楗) 등 10여 명을 죽였으며, 그 뒤 이덕응도 화를 입었다. 이상이 을사년에 일어난 화옥이지만 이 여파는 그 후 5

6년에 걸쳐 윤임 등을 찬양하였다는 등의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고 또 죽은 자의 수가 거의 100명에 달하였다.연산군 이래의 큰 옥사는 이 사화로써 마지막이 되었으나, 이것으로 모후(母后) 및 외척(外戚)이 정권을 전횡하는 길을 열여 놓았으며, 사화에서 일어난 당파의 분파는 후기 당쟁(黨爭)의 한 소인(素因)이 되었다.

을묘왜변[편집]

乙卯倭變

1555년(조선 명종 10) 왜구가 침입한 사건. 삼포왜란 이래 일본에 대한 세견선(歲遣船)의 감소에 고난을 받아 온 왜구들은 이해 5월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 먼저 영암·달량을 점령하고 어란포(於蘭浦)·장흥(長興)·강진(康珍)·진도(珍島) 등을 짓밟으며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은 전사하고 영암 군수 이덕견은 사로잡히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로 하여 이를 토벌, 영암에서 적을 크게 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 그해 10월 쓰시마주(對馬島主) 소오(宋義調)는 이들 왜구의 목을 잘라 보내어 죄를 사과하고 세견선의 증가를 호소해 왔으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승낙, 세견선 5척을 증가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備邊司)를 상설기관으로 하였다.

사량진의 왜변[편집]

蛇梁鎭-倭變

1544년(중종 39) 사량진에서 일어난 왜인(倭人)들의 약탈사건. 3포의 왜란 이후 임신조약을 맺고 왜인의 행동을 제약했으나 왜인들과의 충돌은 그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544년(중종 39)에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에 쳐들어와 인마를 약탈해갔다. 조정에서는 이에 임신조약을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금하였다. 그 후 일본측의 간청으로 다시 정미약조를 맺게 되었다.

붕당의 발생[편집]

朋黨-發生

선조는 덕망있는 사림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문신들로 하여금 한강가의 독서당(讀書堂, 湖堂)에서 공부하면서 매달 글을 지어바치게 하였다. 이이(李珥)의 유명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이 독서당에서 제출된 것이다. 사림정치가 확산되면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리는 문치주의의 절정을 꽃피웠다. 그러나 사림이 많아지면서 기성사림과 신진사림의 분화가 촉진되고 여러 붕당(朋黨)을 형성하여 서로 경쟁하는 양태로 변하였다. 성리학에서는 군자(君子)들의 붕당 형성을 긍정하였기 때문에 사림정치가 붕당 성립을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 추세였다. 붕당이 형성된 것은 1575년(선조 8년)으로 심의겸(沈義謙)을 추종하는 기성사림을 서인(西人), 김효원(金孝元)을 영수로 하는 신진사림을 동인(東人)이라 불렀다. 서인과 동인의 분당은 문반관료의 인사권을 쥔 이조전랑(正郞·佐郞) 자리를 둘러싸고 심의겸의 아우(심충겸)와 김효원이 서로 다툰 데서 비롯되었다. 이조전랑은 5품·6품의 낮은 자리이지만, 삼사(三司)의 하나인 홍문관 출신의 엘리트 관료가 임명되는 것이 관료로서, 삼사(三司)의 공론(公論)을 수렴하여 대신들을 견제하고, 또 물러날 때에는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할 뿐 아니라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으로 쉽게 오를 수 있는 요직이었다. 따라서 전랑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권력경쟁의 핵심과제였다. 그러나, 서인과 동인의 분당 배경에는 기성관료와 신진관료의 이해와 충돌, 학파와 지연의 차이, 그리고 척신정치에 대한 강·온의 태도 차이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서인은 대체로 서울 근방에 생활근거를 둔 고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학문적으로는 이이(李珥)·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왕비는 대체로 서울 근방의 고관집에서 채택되는 것이 관례여서 자연히 서인 중에는 척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심의겸도 명종비(妃)의 동생으로서 외척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체질적으로 사림에 속하고 또 사림도 그를 존경하여 옛날의 척신과는 달랐다.한편, 동인은 영남명유인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 밖에도 개성의 처사학자인 서경덕(徐敬德)의 문인들도 가담하였다. 동인은 대체로 지방의 청류를 자처하는 한사(寒士)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일원적인 학맥과 정책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자체내에 이질적 요소를 많이 지닌 청류의 연합세력과 비슷했다. 서인의 정책이 주로 치인(治人)에 역점을 두어 제도개혁을 통한 부국안민(富國安民)에 치중했다면, 동인의 정책은 수기(修己)에 역점을 두어 치자(治者)의 도덕적 자기절제를 통해 부패를 막으려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선조 초에는 서인과 동인의 경쟁체제가 유지되면서 큰 실정은 없었으나, 1589년(선조 22)에 이른바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기축옥사)이 일어나 다수의 동인인사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동인 중 일부 급진세력이 관련된 것이지만,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을 자극하여, 2년 뒤인 1591년(선조 24)에 동인은 서인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왕에게 건의한 사실을 문제삼아 정철 일파를 내몰았다. 그런데 서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동인 내부에는 급진파와 온건파가 갈려, 전자를 ‘북인’, 후자를 ‘남인’이라 하였다. 북인은 대체로 조식·서경덕계가 주류를 이루고, 남인은 이황계가 핵심을 형성하였는데, 정여립사건 때 피해를 입은 급진세력이 바로 조식·서경덕계였던 까닭에 서인에 대한 반감이 컸다. 정철 일파의 실각으로 동인 특히 북인이 우세한 가운데 임진왜란을 만나고 후궁(恭賓金氏) 소생인 광해군(光海君)이 세자로 책봉되자 그를 추종하는 세력과, 뒤에 태어난 정비(正妃, 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는 세력 사이의 갈등이 야기되었다. 광해군 추종세력을 ‘대북’, 영창대군 추종세력을 ‘소북’이라 하였다. 선조가 돌아가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임진왜란 중 항일전쟁을 주도했던 대북파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쟁[편집]

黨爭

조선 연산군 때부터 말기에 이르는 약 360년 간 쉴새 없이 일어난 정권 쟁탈을 위한 당파싸움. 이 당쟁의 대표적 주체는 노·소·남·북의 사색(四色)이다.흔히 조선 당쟁의 기원을 선조 때의 사류(士類)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대립에 의해서 파생된 동·서 분당(東西分黨)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나, 이는 당쟁의 가까운 원인이 되는 것이고, 이에 이르게 한 전초적인 원인을 더듬어 올라가면 훨씬 오래 전부터의 일이어서 이를 대별(大別)하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로 유학파(儒學派)의 대립, 둘째 왕실내척(王室內戚)의 내분(內紛), 셋째 제도상의 결함이다. 고려 후반기에 우리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이 도입된 이래, 고려 말기에는 정몽주(鄭夢周)가 이를 계승하고, 조선에 들어와서 김종직(金宗直) 등이 이 전통을 이어받고, 이들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 등 석학이 배출되어, 성종 때 이르러서는 모든 제도가 정비되어 나라의 기틀이 잡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이때 벌써 안으로는 사화(士禍)와 당쟁의 씨가 움트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요컨대 집권적(集權的)인 양반국가(兩班國家)였다. 이들 양반 즉 귀족관인(貴族官人)들은 모두 중앙의 수도에 집중하고 있었다. 비록 지방에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중앙에 진출하여 관리가 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던 사회였다.이러한 사회에서는 지방분권적(地方分權的)인 사회에서와 같이 지방 대(對) 지방의 항쟁이 아니라 중앙의 정계(政界)를 무대로 한 권력대립(勸力對立)이 나타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시대가 내려갈수록 양반의 수는 증가하였으나 관직의 수는 대략 일정하여 양반들 사이에는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전랑(銓郞)과 같은 인선(人選)을 맡은 이조(吏曹)의 요직을 둘러싸고 당쟁이 유발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건국 초기에 양반 귀족들은 국가로부터 과전(科田)과 그 이외에 세습(世襲)이 허용된 허다한 공신전(功臣田)을 받았는데 차츰 구득(購得)·겸병(兼倂)·개간(開墾) 등의 각종 방법으로 지방의 넓은 공전(公田)을 침식하여 갔다.이러한 양반귀족들의 소유지는 농장(農莊)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고, 이들 농장 소유자들은 대개 수도에만 사는 부재지주(不在地主)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는 농장에다가 주택을 짓고 거기서 생활하며, 또 서원(書院)을 세워 동족(同族)의 제자들을 교육하는 자도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의 관직에 있더라도 그의 동족들은 농장에 살고 있었으며,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농장에 되돌아와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농장을 중심으로 한 동족부락(同族部落)이 발달하게 되었다. 단지 이들은 농장 경영자로서보다는 관인으로서의 생활에 더 많은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 곤란한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과전으로 지급할 토지의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세조 때 현직자(現職者)와 퇴직자(退職者)에게 아울러 주던 과전법(科田法)을 폐지하고 현직자에게만 주는 직전법(職田法)으로 개편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실시할 수 없어서 직전법(職田法)도 폐지되고, 이제는 새로이 관리가 되더라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땅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뿐이었다. 신진관료(新進官僚)들은 여기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불건전한 토지제도를 개혁하자는 주장이 그들 사이에 점차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 토지문제를 에워싼 신·구의 대립이 귀족간의 분열과 파쟁을 일으킨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토지문제를 에워싼 신·구파의 대립은 다른 면에서 볼 때에는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대립이었다.비록 음성적(陰性的)인 대립이었다고 하더라도 명군(名君) 성종이 있는 동안은 그것이 노골화하지는 않았으나 폭군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드디어 폭발하게 되었다.

향약[편집]

鄕約

서원과 함께 향촌사회에서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 것이 향약(鄕約)이었다. 중종 때 조광조 일파가 처음 시행한 향약은 훈구대신의 비리를 시정하기 위해 그들과 연결된 지방 토호들의 향권을 빼앗아 정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그래서 조광조 일파는 신분보다 나이를 존중하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소학(小學)』과 함께 국문으로 번역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하고, 관권보다 더 강력한 처벌권을 발동하여 토호들의 횡포를 막으려 했다.그러나 그러한 급진성 때문에 도리어 보수세력의 반발을 받아 조광조 일파의 몰락과 함께 폐지되고 말았다. 다양한 형태의 향약이 만들어져 군현이나 작은 마을을 단위로 하여 시행되었다. 향약의 시행과 병행하여 지방 양반의 명부인 향안(鄕案)을 만들고, 양반의 자치기구인 향회(鄕會)를 조직하여 공론(公論)을 모으고, 유향소(留鄕所)의 향권을 장악하였다.이제는 훈척이나 토호의 횡포를 막는 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수령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미 세력이 커진 사족의 친족과 결속을 강화하며, 평민과 노비를 사족이 통제하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미풍양속인 상부상조의 ‘계’(契)조직을 향약 속에 흡수하여 소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특히 이러한 성격의 향약은 이이(李珥)가 창안한 여러 향약을 토대로 하여 기호지방에 널리 퍼졌고, 영남 지방에서는 경제적 상부상조보다는 도덕질서와 계급질서의 안정에 주안점을 둔 이황(李滉)의 향약(禮安鄕約)이 큰 영향을 주었다.김안국(金安國)이 붕우유신(朋友有信)과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강조하는 『이륜행실』을 널리 보급한 것도 향촌질서의 안정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16세기 후반에 향약이 정착됨에 따라 관(官)과 민(民)으로 구분되던 지금까지의 계급관계는 사족(士族)과 하인(下人, 평민과 노비)이 대응하는 새로운 계급질서를 고착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이는 경제적으로 보면 지주(地主)와 작인(作人)의 대응관계가 정착되어가는 추세와 서로 맞물려 있다. 원래 예로부터 죽은 사람의 장례를 서로 도와 주고, 종교적 축제를 같이 하며 농사

일을 도와 주는 공동체 조직이 있어 이를 ‘두레’, ‘향도(香徒)’, ‘사(社)’, 혹은 ‘계(契)’라고 했는데, 향약은 그 공동체의 규모를 줄이고, 삼강오륜의 도덕규범을 따르지 않는 자를 재판해서 벌을 주거나 마을에서 쫒아내기도 해 축제적 성격보다는 교화와 통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16세기 초에 개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시작되었던 향약은 지방사림이 보수화되는 추세에 따라 폐쇄성이 점차 강화되고 농민에 대한 통제의 기능이 커지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는 농민수탈의 도구로 전락해 갔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실학자 정약용이 향약의 폐단이 도덕보다 심하다고 한 것은 그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서원[편집]

書院

조선 중기부터 보급된 민간 사학기관(私學機關). 서원의 명칭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 등의 설치에서 유래된 것으로 원래 내외의 명현(名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기르는 사설기관이었는데, 선현을 제사하는 사(祠)와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를 합하여 설립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중심정책을 써서 고려의 사원(寺院)을 대신하여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 등을 장려하였다. 세종은 특히 이를 장려하여 상을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서원은 재와 사의 두 기능을 겸한 것이 못 되었으니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순흥(順興)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安珦:安裕)을 모시는 사당(祠堂)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서원이 생겼으며, 1550년(명종 5)에는 이퇴계(李退溪)의 건의로 임금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額:간판)을 하사하고 책·노비·전결(田結) 등을 주어 장려하였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마침 황폐해 가는 향교(鄕校)에 대신하여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백 24개, 숙종 때에는 1도에 80·90을 헤아리게 되었다.한편 서원은 양적인 증가뿐만 아니라 일종의 특권적인 것이 되어 여기에 부속된 토지에는 조세를 과하지 않았고, 또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곳이 되었다. 유생(儒生)은 향교보다도 서원에 들어가 학문을 공부하는 대신 붕당(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에 골몰하고 심지어는 서원을 근거로 하여 양민을 토색하는 폐단도 생기게 되었다.이와 같은 서원의 남설(濫設)·누설(累設)은 조정의 중대한 두통거리가 되어 1644년(인조 22)에는 서원 설치를 허가제로 하였고, 1657년(효종 8)에는 서원을 누설한 자는 처벌하는 규정을 발표하였다.그 후 계속하여 영조·정조·철종 등도 서원 정비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여 정조 때는 6백50개의 서원이 남아 있었다. 그 중 유명한 것은 도산서원(陶山書院)·송악서원(松嶽書院)·화양서원(華陽書院)·만동묘(萬東廟) 등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섭정하자 1864년(고종 1)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철폐, 서원의 누설을 엄금하고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안동묘를 폐쇄하였다. 이와 같은 대원군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대부분의 서원은 정비되고 세상에 사표(師表)가 될 47개의 서원만을 남겨놓았다.

백운동서원[편집]

白雲洞書院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 서원.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하여 서원을 세우고, 주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의 편의를 주고, 이름을 백운동서원이라고 하였다. 뒤에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조정에 건의해서 왕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額)을 하사받았으니, 소위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였다.

주세붕[편집]

周世鵬 (1495

1554)

조선 중종 때 서원(書院)을 창시한 학자. 자는 경유(景遊), 호는 신재(愼齋)이며 시호는 문민(文敏). 본관은 상주(尙州). 1522년(중종 17)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검열(檢閱)·부수찬 등을 역임하다가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아 좌천되었다.그 후 곤양 군수·교리를 거쳐, 풍기군수로 재직/ 중 1542년(중종 37)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말의 학자 안향(安珦)의 사당을 세우고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紹修書院)을 창설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그 후 직제학·도승지·대사성·호조 참판을 역임하고, 1551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해주(海州)에 수양서원(首陽書院:文憲書院)을 창설하였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조야에 신망이 높았다.

전랑[편집]

銓郞

조선 때 이조(吏曹)의 정랑(正郞)·좌랑(佐郞)을 일컫던 말. 조선의 관제 중 관원의 등용은 모두 이조에 속하였다.

이조의 권력 비대를 참작하여 3사(三司)의 관원 임명은 이조판서 아래에 있는 정랑·좌랑이 좌우하였다. 이리하여 내외 관원을 천거·전형하는 데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전랑의 직책이 생겨 큰 실권을 잡았다.따라서 이 전랑에는 3사 가운데 특별히 명망높은 사람이 선발되었고, 그 후임은 전랑이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전랑을 거치면 대개 재상까지 될 수 있었다. 동서분당을 초래한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싸움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동인[편집]

東人

조선시대의 당파. 선조 초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에서 비롯된 당파로, 그 명칭은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에 있던 것에서 유래된다.동인은 주로 신진학자들로 구성되었고, 이황의 영남학파와도 관계가 있다. 그 중심인물은 유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 등이며, 선조 17년(1584) 동인 득세 이후 격렬한 당쟁이 시작되었다. 동인은 또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어 사색당파(四色黨派)를 형성하게 된다.

서인[편집]

西人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생긴 당파의 하나. 초기의 중심인물은 박순(朴淳)·정철(鄭澈)·김계휘(金繼輝)·윤두수(尹斗壽) 등으로, 이이(李珥) 생존시에는 대체로 동인보다 우세한 위치에 있었으나, 그가 죽은 후 한때 동인에게 눌렸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세력을 만회(挽回)하였으나 세자 책봉문제로 정철이 파직(罷職)되면서 동인에게 권세를 빼앗겼다. 이후 30여 년 간 동인에게 눌려 오던 중16

23년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세력을 회복하고, 반정(反正)에 가담한 서인을 공서(功西), 가담하지 않은 서인을 청서(淸西)라 하였다.공서는 노서(老西)와 소서(少西), 청서는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으로 다시 나누어졌으나 효종 즉위 직전에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나서서 서인을 다시 통일하고 동인의 일파인 남인(南人)을 억압하였다. 현종 때부터 남인이 점점 서인에 박두하여 서인을 위협하더니(제1차 복상문제), 숙종 때는 양파가 치열한 정쟁(政爭)을 전개하여(제2차 복상문제) 마침내 남인에게 세력을 빼앗기게 되었다.1680년(숙종 6)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세력을 만회한 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들과 조지겸(趙持謙)·한태동(韓太東) 등 소장파 사이의 불화로 마침내 서인은 노·소(老少) 양파로 분열, 상쟁(相爭)하였다.1694년(숙종 20) 이후에는 남인은 완전히 정치의 권외(圈外)로 제거되고, 이후 조선 말기까지 노·소 양파의 정권쟁탈을 위한 당쟁이 계속되었다.

정여립의 모반[편집]

鄭汝立-謀叛 (?

1589)

정여립은 조선 선조 때 기축옥사(己丑獄死)를 일으킨 사람으로 자는 인백(仁伯), 본관은 동래(東萊), 첨정(僉正) 희증(希曾)의 아들. 대대로 전주 남문 밖에 살았고, 7

8세 되었을 때 자기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하여 책망을 듣게 한 동리의 아이를 죽였으며, 아버지가 현감으로 있을 때 여립이 15

16세로서 그 현의 일을 자기 뜻대로 하여 관리들이 그 아버지는 어려워하지 않아도 여립의 명은 거역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명종 때 진사가 되고 1571년(선조 4) 문과에 급제, 이율곡(李栗谷) 문하에 출입하여 명망이 높았다. 1584년(선조 17) 율곡이 죽고 동인(東人)이 우세하여지자, 이에 아부하며 동인편에 가담하여 동인이 증오하던 율곡을 극구 비난하고 마침내 동인의 힘으로 수찬(修撰) 벼슬에까지 올랐으나 이러한 심술(心術)이 선조의 눈에 거슬리게 되자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전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많은 선비와 접촉하는 동안 그의 이름이 날로 높아감에 그는 은연 중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자 야심을 품게 되었다.1587년(선조 20) 변경(邊境)에 왜변(倭變)이 있어 전주부윤(全州府尹) 남언경(南彦經)의 청으로 정여립이 장정(壯丁)을 징발하여 그 방어책을 강구한 일이 있는데, 이때에 그는 그 군부(軍簿)를 자기 손에 넣었다. 한편 대동계(大同契)라는 조직을 만들어 반역을 위한 동지회(同志會)를 구성, 비기(秘記)·참설(讒說) 등으로 인심을 현혹하게 하며 장차 거사를 일으킬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이리하여 나주(羅州)의 길삼봉(吉三峯)을 비롯하여, 고부(古阜)·태인(泰人)·남원(南原) 등 각지에서 동지를 얻었고 스스로 해주(海州) 사람 지함두(池涵斗)와 중 의연(義衍)·도잠(道潛)·설청(雪淸) 등과 더불어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충청도 계룡산 등지를 답사하여 황해도에서 박연령(朴延齡) 등의 동지를 얻었다.그러나 이러한 기밀이 차츰 누설되어감을 알게 되자 계획을 앞당겨 1589년(선조 22) 겨울을 기하여 전라·황해 양도에서 일시에 거병하여 서울을 단숨에 칠 계획을 세웠다. 이때 안악군수(安岳郡守) 이축(李軸)이 이 계획을 탐지하여 동년 10월 재령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신천군수(信川郡守) 한응인(韓應寅) 등과 더불어 황해감사(黃海監司) 한준(韓準)을 통하여 이 반란의 음모를 상고하니 곧 관련자들이 체포, 처형되고 토벌이 시작되었다.이것을 기축옥사(己丑獄死)라 하며, 정여립은 그의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도망하여 관군(官軍)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東人)에 대한 박해가 커졌으며, 동인은 한때 크게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또한 이후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서북인(西北人)과 함께 호남인의 등용을 제한하게 되었다.

정감록[편집]

鄭鑑綠

조선 중엽 이후 민간에 성행하게 된 국가운명·생민존망(生民存亡)에 대한 예언서. 조선의 선조(先祖)인 이담(李湛)이란 사람이 이씨의 대흥자(大興者)가 될 정씨(鄭氏)의 조상인 정감(鄭鑑)이란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고 하며, 이후의 조선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추수(推數)하여, 이씨의 한양(漢陽) 몇 백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몇 백년이 있고, 그 다음에는 조씨(趙氏)의 가야산 몇 백년, 또 그 다음에는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 백년과 왕씨의 어디 몇 백년 등등으로 계승될 것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어떠한 화변이 있어 세태민심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오늘날 세간에 통행되고 있는 『정감록』은 이 양인(兩人)의 문답 외에 도선(道銑)·무학(無學)·토정(土亭)·격암(格庵) 등의 예언서에서 발췌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그러나 정감·이담·양인이 실존인물이라 할 증거는 없으며, 1785년(정조 9)의 홍복영(洪福榮)의 옥사(獄事)에서 『정감록』이란 책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문헌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것뿐이다.그렇지만 조선이 정씨의 혁명을 만나게 된다는 운명설은 선조(宣祖) 이전부터 있었으며, 1589년(선조 22)의 정여립의 역모도 이러한 것이 배경이 되어 작용한 것이었다. 그 뒤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씨와 계룡산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으며, 미래국토(未來國土)의 희망적 표상이 되었다. 연산군 이래의 국정의 문란과 임진·병자의 양란(兩亂), 그리고 이에 따르는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에 대한 민중의 신뢰심이 극도로 박약해지고, 장래에 대한 암담한 심정을 이기지 못할 즈음에 당시의 애국자가 민중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기 위하여 이씨가 결단나도 다음에 정씨도 있고, 조씨·범씨·왕씨도 있어서 우리 민족의 생명은 영원토록 불멸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이 이 책에 일관하여 흐르는 근본정신이 아닌가 한다.

건저의 문제[편집]

建儲議問題

선조 24년(1591)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 정여립 사건에 치죄(治罪)가 가혹하여 동인의 원한을 사고 있던 서인의 영수 정철이 소위 건저의 문제로 실각함에 따라 서인의 세력은 다시 꺾였다.

즉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仁嬪) 김씨가 신성군(信城君)을 낳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인빈의 오빠 김공량(金公諒)과 연결하고 있었다. 이에 좌의정 정철이 세자를 정할 것을 주장하여 왕의 미움을 사고 강계(江界)로 유배되었으며, 이에 관련되어 윤두수 등 서인이 파직 혹은 원류(遠流)됨에 따라 동인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동인은 이 사건을 전후하여 서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려 남인과 북인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