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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양반사회와 경제생활/양반관료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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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관료의 문화〔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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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초기의 위대한 문화적 업적으로서는 무엇보다 한글 창제를 들 수 있다. 훈민정음이라 이름 붙인 것이 그것이다. 세종은 1446년에 최만리(崔萬里) 등 고루한 학자들의 반대를 일축하고, 집현의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등 학자들을 동원해서 이 민족 최대의 문화적 창조물인 한글을 창제, 반포하였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언해』 『동국정운』 등이 저술, 출판되어 문화적으로 큰 공헌을 하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조선 왕조 초기에는 각 방면의 학문 또한 크게 발달하여 그 업적이 많이 공간(公刊)되었는데, 이들 서적은 유교 입장의 실용적 성격을 띠었다. 우선 사서(史書)의 편찬으로는 『조선왕조실록』이 차례로 편찬되어 서울의 춘추관 및 지방의 사고에 보관되었다. 또한 『국조보감(國朝寶鑑)』 『고려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이 편찬되었다. 지리서로는 『8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이 있고, 정치에 관한 것으로는 『치평요람(治平要覽)』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이 편찬되었다.조선 왕조초에는 또 각 방면의 과학과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여러 가지 발명과 저술이 출현하였다. 농업에 관해서는 『농사직설(農事直說)』,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蠶書)』 등이 편찬되었다. 한편 천문학 또한 크게 발달하여 측우기와 천문관측기인 대·소 간의(簡儀), 천구의(天球儀)인 혼천의(渾天儀), 해시계인 앙부일영(仰釜日影),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이 만들어졌는데 장영실(蔣英實) 등의 공이 컸다. 군사에 있어서는 『동국병감(東國兵鑑)』 『병장도설(兵將圖說)』 등의 병서와 화포·병선이 제작되었으며, 의학서로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이 편찬되었다. 이러한 국가의 편찬사업은 인쇄술의 발달을 가져와서 계미자(癸未字)·갑인자(甲寅字) 등의 금속활자가 대량으로 주조되었고, 그 후 인쇄술은 더욱 발달하여 각종 활자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조선 왕조의 양반들은 미술을 장인(匠人)들이 하는 일이라 하여 천시하였다. 양반으로서 미술을 즐긴다는 것은 여기(餘技)에 불과했으며, 이러한 경향이 회화에서 문인화(文人畵)라고 불리는 수묵화(水墨畵)를 유행시켰던 것이다. 조선 초의 화가로는 양반 출신의 강희안(姜希顔), 화원(畵員)이었던 안견(安堅)·이상좌(李上佐)·최경(崔涇) 등이 있었는데, 전자의 경우보다 후자의 경우에 작품의 필세(筆勢)가 웅혼하였다. 서도에 있어서는 안평대군(安平大君)·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이 명필로 이름이 높았으나 대체로 전래의 것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공예에 있어서는 조선자기의 대표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되는 백자가 있었다. 조선 초기 이후 자기는 차츰 가냘프고 곡선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순수한 직선적 형태로 변했다.

성리학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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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理學-發達

조선왕조의 건국은 사회혁명을 가져왔고 이에 수반하여 문명개혁이 나타났다. 우선 불교를 대신하여 유교, 특히 성리학(性理學)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불교에 대한 비판운동은 고려말기부터 일어났지만 개국 후에 이르러서야 불교교리의 핵심이 되는 인과설(因果說), 윤회설(輪廻說), 화복설(禍福說) 등을 조목조목 비판하여 불교가 허학(虛學)이고 성리학이 실학(實學)이라는 것을 논술한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 1398)』이 씌어졌다.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유가의 입장에서 전개된 것이어서, 이로써 불교의 철학체계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교의 사회 경제적 폐단이 너무 커서 불교도들은 이에 대항할 힘을 잃고, 정치 일선에 서 있던 승려들이 순수한 종교생활로 되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정치는 유학자들이 떠맡게 된 문화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도전의 뒤를 이어 권근(權近)이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입학도설(入學圖說)』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등을 저술하면서 더욱 확고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세종조 전후시기에는 김말(金末)·김반(金泮)·김구(金鉤) 등 이른바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는 저명한 성리학자들이 나와 성균관 중심의 국가성리학을 꽃피게 하였다. 또한 각급 교육기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치고, 과거시험 과목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여 성리학은 더욱 급속도로 퍼져 갔다. 조선초기 성리학의 기본경전은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와 오경(五經,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이었으며, 이밖에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적 윤리규범을 서술한 『소학(小學)』이 널리 읽혔다. 성리학은 우주자연과 인간사회의 문제를 형이상(理)과 형이하(氣)로 나누어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사상체계이다. 그것은 형이하 세계의 다양성과 개개사물의 주체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협조관계를 강조한다. 성리학은 또한 극단적인 관념론이나 유물론을 배격하고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객관적 관념론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런데 조선초기 국가 학문으로 발전한 성리학은 위에 열거한 여러 측면이 골고루 피어났다기보다는 주로 정치질서의 변혁과 관련되는 경세적(經世的)인 측면이 특징적으로 강조되었다. 백성을 존중하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의 발전은 그 핵심이다. 조선왕조의 개창 과정에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무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어도 이것이 성리학의 가치관에서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은 백성을 위한 혁명이 가능하다는 이론 때문이었다.한편 성리학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해서, 전부터 있던 한당유학의 가치관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태종의 정치를 기술한 『정관정요(貞觀政要)』가 여전히 왕에게 읽혀졌다는 것은 그러한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조선초기에 여러 기술학이 존중된 것도 공리(功利)와 실용을 중시하는 정치문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성리학 하나만으로는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다 해결할 수 없었다는 데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을 한층 순수한 형태로 받아들이려는 인사도 없지는 않았다. 정몽주(鄭夢周)의 학풍과 그의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이른바 사림(士林)학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공리나 실용보다는 의리(義理)를 숭상하고, 자율성이 존중되는 향촌질서와 가족질서의 수립에 관심을 크게 두었다. 이들은 고려말부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도입하여 집에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학풍은 특히 정몽주나 길재(吉再)와 같은 절신(節臣)의 연고지인 영남지방에 현저했는데, 선산(善山)의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 부자가 많은 문인들을 길러내면서 15세기 말에는 뚜렷한 붕당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5세기의 관학파 성리학이 초창기의 국가건설에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였다면, 재야의 사림파 성리학은 개인의 도덕수양, 향촌사회 안정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한글의 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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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制

조선 세종이 여러 학자들의 도움으로 1443년(세종 25)에 창제·반포한 우리나라 글자.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이두(吏讀)와 구결(口訣)을 써 왔는데,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적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우리말을 표시함에 틀림이 없었지만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었으며, 그 표기법의 일원성(一元性)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써 족하다 해도 한자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러한 문자생활의 불편은 한자를 쓰지 않고도,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러한 사조가 세종 때에 특히 두드러져 드디어 1443년 12월에 문자혁명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에 관하여는 세종이 손수 저술한 『훈민정음』 예의편(例義篇)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으니 첫째 국어는 중국말과 다르므로 한자를 가지고는 잘 표기할 수 없으며, 둘째 우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고, 셋째 이런 뜻에서 새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일상생활에 편하게 쓰라는 것이다.

글자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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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의 기원에 관하여서는 고대 한자인 고전(古篆)·범자(梵字)·몽고자(蒙古字)·서장(西藏)글자·오행(五行)이론

등 종래 학설이 구구하였다. 1940년 경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가 발간되어,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을 확증하게 되었다.

글자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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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의 구성을 보면 자음(字音)이 17자(ㄱ ㄴ ㄷ ㄹ ㅁ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 ??? ???), 모음(母音)이 11자(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l ·)로 모두 28자이다. 각 자모에 대한 음가(音價)를 살펴보면, 초성(初聲:子音)은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와 반설·반치(反舌半齒)의 7음으로 구별하였고, 모음은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7음과 각 자모의 독특한 배열 순서는 중국 운서(韻書)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실제로 쓸 적에는 각 낱자(單子)를 독립시켜 소리나는 차례대로 적지 않고, 반드시 자음(子音)과 모음(母音)을 어울려 쓰기로 하였으니, 곧 <· ㅡ

ㅜ ㅛ

ㅠ >는 자음 아래에 쓰고, <ㅏ ㅓ ㅑ ㅕ>는 자음 오른쪽에 붙여쓰기로 하였다. 즉 음절문자(音節文字)로 하되, 그 모양이 네모꼴이 되도록 하였으니, 이는 한자의 꼴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현행 한글자모에 쓰이지 않는 없어진 글자를 소실자(消失字)라 하는데 <??? ??? ???·> 4자가 그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그 글자 자체의 칭호법(稱號法)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고, 중종 때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이르러 각 글자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

훈민정음 해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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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에 ‘是月上訓民正音成…’이라 하여 『훈민정음』이란 책이 제작 완료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책이 많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고 전형필 소장본 이외에는 전부 ‘예의(例義)>’부분만을 내용으로 한 것이어서 이런 것들을 예의본(例義本), ‘해례(解例)’가 들어 있는 것을 해례본(解例本)이라 일컫는다. 이 예의본은 단행본(單行本)은 아니나, 『세종실록』과 희방사판(喜方寺版) 『월인석보(月印釋譜)』에 실린 것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 『예의본(例義本)』은 아주 간단하지만, 당시 국자(國字) 창제의 취지, 낱자(單子)의 발음, 합자(合字)운용의 설명 등이 규정되어 있어서, 우리 글자를 논의하는 데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해례본(解例本)』에 있는 예의(例義)는 특히 창제 당시의 자체(字體)를 그대로 보이고 있어서 그 중 가장 높이 평가되고 있고, 해례는 오랫동안 문제로 삼던 글자의 기원 등 여러 가지의 의문점을 밝혀 주고 있다. 이 훈민정음의 글자로서의 가치를 따진다면, ① 어느 글자도 모방하지 않고 독창적이다 ② 국어의 음운조직(音韻組織)에 가장 합치되어, 우리말은 무엇이나 표기할 수 있다. ③ 글자수가 28개(현재 24자)에 불과하며, 또 자획(字劃)이 간단하다. ④ 글자 발달사상 최고 수준에 오른 소리글자(音標文字:音素文字)이다. 즉 각 음절(音節)을 자음과 모음으로 분해(分解)할 수 있는 글자이다. ⑤ 내려쓰기(縱書)와 가로쓰기(橫書)의 성능을 갖추었고, 또 풀어서 가로쓰기를 할 수 있다.

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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集賢殿

고려 이후 조선 초기에 걸쳐 설치되었던 왕실연구기관(王室硏究機關)의 하나. 중국에서는 한(漢)·위(魏) 이래 설치, 명나라 현종(玄宗) 때 완비(完備)된 기관으로서 이곳에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警籍)의 간행과 서적의 수집 등을 맡아 보게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이 제도가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集賢殿’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세종이 즉위한 뒤에 문신을 집현전에

모아 문풍(文風)을 진흥시키자는 신하들의 건의가 있어서, 그 동안 고려 이래로 유명무실하였던 수문전(修文殿)·집현전·보문각(寶文閣) 중에서 집현전 하나만을 남기는 대신 그 기구(機構)를 대폭적으로 확장시켰다. 즉 1420년(세종 2) 3월에 궁중에 집현전을 두고, 영전사(嶺殿事:정1품)·대제학(大提學:정2품)·제학(提學:종2품) 각 2명(이상은 모두 兼官)과 그 아래 전임학사(前任學士)의 관직으로서 부제학(副提學):정3품)·직제학(直提學:종3품)·직전(直殿:정4품)·응교(應敎:종4품)·교리(敎理:정5품)·부교리(副敎理:종5품)·수찬(修撰:정6품)·부수찬(副修撰:종6품)·박사(博士:정7품)·저작랑(著作郞:정8품)·정자(正字:정9품) 등을 두었다. 이와 동시에 전임학사로서 10명을 임명, 그 뒤 정원의 증감이 있다가 1436년(세종 18)에는 20명으로 확정되었다. 세종은 학사의 설치와 아울러 서리(書吏)·노비(奴婢) 등도 배속시켜 집현전의 운영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또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해 많은 도서(圖書)를 구입 혹은 인쇄시켜 집현전에 보관토록 하는 한편, 휴가를 주어 산사(山寺)에서 뜻대로 학문 전반에 걸쳐 연구하게 하였으며 그 경비와 기구는 모두 나라에서 부담하였다. 이 결과 우수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많이

나오게 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첫째, 학사 20명 중 10명은 경연(慶筵)을,

나머지 10명은 서연(書筵)을 담당하였으며, 둘째, 집현전이 궁중에 있고 또 학사들이 문필에 능하다는 이유로서 그 일부가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고, 셋째는 사령(辭令)의 제찬(制撰)을 담당하였다. 전대(前代)에는 수문전(修門殿)·집현전·보문각(寶門閣)이 같이 맡아보았으나 수문전·보문각이 폐지되자 집현전이 전적으로 이 일을 맡게 되었다. 넷째는 중국의 고제(古制)에 대한 연구였다. 유교를 조선사회의 근본이념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유교적인 제도나 의식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집현전 학사들은 정치인으로도 많이 등장하여 실제 정치면을 통하여 그들의 이상(理想)을 실현시켜 보려 하였다. 특히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이런 경향은 더욱 농후하였다. 집현전의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한글 제정이었지만, 이 밖에도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設)』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동국정운(東國正韻)』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우리나라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였다. 그러나 1456년(세조 2)에 단종의 복위운동을 한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한 반대파 인물이 집현전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세조에 의해 폐지되고, 집현전에 소장(所藏)한 사적은 예문관(藝文館)에 이관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문신들이 벼슬에만 욕심을 내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폐단이 생겨서 1459년(세조 5) 이후 3품 이하의 문신으로서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 예문관의 관직을 겸임시켜 연구하게 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성종이 즉위하자 집현전에 의거해서 홍문관(弘文館)을 세워 학사의 대우를 극진히 하였으나 세종 때의 집현전에는 따르지 못하였다.

독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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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堂

조선시대 젊은 문신들이 글을 읽던 곳. 1426년(세종 8) 문신 중에서 덕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뽑아 사가를 하여 장의사에서 공부하게 한 것이 그 시초로, 집현전의 대제학 변계량이 임금의 명령을 받고 이를 행사하였다. 세조 때 이를 없앴으나 1491년(성종 22) 다시 복구하였다. 중종 때는 두모포(豆毛浦)에도 독서당을 두었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없어진 것을 광해군이 다시 설치, 병자호란 때 완전히 없어졌다.

정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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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麟趾 (1396

1478)

조선초의 문신·학자. 호는 학역재(學易齋). 태종 14년(1414)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즉위 후 왕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이조 참판 등 요직을 두로 역임했다. 단종 1년(1453)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와 우의정에 승진했고, 정난공신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을 지내기도 했으며, 성종 1년(1470)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천문·역법·아악 등에 관해 많은 책을 편찬했고, 김종서 등과 『고려사(高麗史)』를 찬수했다.한편 세종을 도와서 성삼문·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제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신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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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叔舟 (1417

1475)

조선의 학자·정치가.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閒齋)·희현당(希賢堂). 본관은 고령(高靈). 장(檣)의 아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자리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1439년(세종 21)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의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열심히 읽고 동료들의 대신으로 숙직하면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공부하기가 일쑤였다. 세종은 그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발견하고 어의(御衣)를 하사하여 칭찬했다.1442년(세종 24) 훈련주부(訓練主簿)가 되었다. 이때 일본에 통신사(通信士)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선비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기로 하였는데 신숙주가 이에 뽑혔다.일본에 이르니 그의 재주를 듣고 시(詩)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감탄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에 들러서 무역협정을 체결하니 이것이 곧 계해조약(癸亥條約)이다. 이어 세종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할 때 가장 공이 컸는데 마침 죄를 짓고 랴오둥(遼東)에 귀양가 있던 명(明)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을 찾아 13번이나 랴오둥으로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1447년(세종 29)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집현전 응교(應敎)에 특진하였다. 세조(世祖)가 즉위하기 전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간 일이 있는데 이때 신숙주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따라 갔었다. 세조가 즉위한 후로는 언제나 침실에까지 불러 들여 의논하였으며, 공신(功臣)의 호를 내리고 고령군(高靈君)에 봉하였다.1457년(세조 3)에 우의정, 1459년(세조 5)에 좌의정이 되었고, 1460년(세조 6)에는 강원도·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야인(野人)들을 소탕하고 돌아왔다.1462년(세조 8) 마침내 영의정이 되었다. 일단 사임하였다가 세조가 돌아가고 예종(睿宗)이 어려서 즉위하니 원상(院相)으로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남이(南怡) 장군을 숙청하여 보사공신(保社功臣)의 호를 받았다.예종이 재위 1년 만에 돌아가고 성종(成宗)이 즉위하니, 또 공신의 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 또 일본과 여진(女眞)의 지도(地圖)를 만들었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 『오례의(五禮儀)』도 왕명으로 그가 편찬해 낸 것이다.

『용비어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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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飛御天歌

조선 왕조 6대 조종(祖宗)의 사적을 훈민정음으로 찬송·제진(製進)한 책. 세종 27년(1445) 권제·안지(安止)·정인지(鄭麟趾) 등이 왕명으로 왕실의 선조인 목조(穆祖)·익조(翼祖)·탁조(度祖)·환조(桓祖)·태조·태종 등의 사적을 훈민정음으로 찬송·제진하였다. 이 책은 한글로 씌어진 최초의 가사(歌辭) 문헌으로 중세 국어 연구의 보전(寶典)일 뿐 아니라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친 역사적 자료로도 귀중한 것이다. 특히 여진국과의 관계, 왜구 침공에 관한 자료로서 대단히 귀중하다.

『월인석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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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印釋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의 합본이다. 『석보상절』은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완성한 석가의 일대 전기이며, 『월인천강지곡』은 『석보상절』을 읽고 세종이 지은 찬불(讚佛) 서사시이다. 세조 3년(1457) 왕세자가 죽자 왕이 부왕과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증보·수정하여 간행한 것이 『월인석보』이다. 이 책은 조선 왕조의 석가 일대기로서는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역사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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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歷史編纂

조선초기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건국정신에 따라 역사를 중요시하여 역사편찬사업에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유학자나 관리의 교양에 있어서도 경학(철학 윤리)과 역사는 날줄과 씨줄로서 중요시되었다. 고려시대 이래의 관례를 따라, 역대 왕들의 실록(實錄)을 차례로 편찬했다. 실록편찬사업은 조선말기까지 계속되어 오늘날 조선시대 연구의 기본자료로 이용되고 있다.실록은 왕과 신하가 정사를 논의하는 과정에 진행된 말과 사건들을 예문관의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 등의 사관(史官)이 국왕 옆에서 기록한 사초(史草)와 각 관청의 문서들을 종합하여 춘추관에서 만든 시정기(時政記)를 토대로 하여 실록청(實錄廳)에서 편찬하였다.실록편찬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왕의 실록을 편찬하지 않았으며, 보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역대 국왕의 훌륭한 언행을 뽑아 기록한 것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인데, 이것은 1458년(세조 4년)에 처음 편찬되어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현재의 정치방향을 설정하는 데는 전왕조(前王朝)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태조 때부터 고려사 편찬이 활발히 진행되어 기전체로 된 『고려사(高麗史)』(139권)가 정인지(鄭麟趾) 등에 의해 문종 원년(1451)에 먼저 간행되고, 편년체로 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35권)가 다음해에 출간되었다.특히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절요』는 태조 때 정도전 등이 이미 편찬한 바 있던 『고려국사(高麗國史)』(37권)를 토대로 약간의 수정을 가해 이루어진 것이다.『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다같이 성리학적 도덕사관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북진정책을 찬양하는 공리적 입장이 절충되어 고려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한 것이다.그러나 전자는 왕의 역할을 중심점에 놓고 고려역사를 서술한 반면, 후자는 재상을 비롯한 관료의 역할을 돋보이게 썼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실제로 후자의 입장에서 고려사를 정리했던 정도전과 김종서는 똑같이 재상의 실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다가 강력한 왕권을 세우려던 태종과 세조에 의해서 각각 목숨을 잃는 비운을 맞이했다.이러한 연유로 역대 왕들은 『고려사절요』보다는 『고려사』를 보급하는 데 힘썼으며, 조선조 말기까지 실제로 『고려사』가 더 많이 보급되고 읽혔다.한편, 전왕조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전체 역사, 즉 통사(通史)를 편찬하는 작업이 태종 때부터 활발히 진행되었다. 태종 때 권근 등은 단군조선에서 시작하여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동국사략(東國史略)』(6권, 일명 三國史略)을 편찬하였으며, 세종 때(18년)에는 권제(權?) 등에게 명하여 단군조선에서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노래 형식으로 편찬케 했다. 이것이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로서, 조선왕조의 창업과정을 노래로 엮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자매관계를 갖게 했다.권근의 『동국사략』은 태종 때의 대명유화정책과 대내적인 강상윤리의 강화정책이 반영되어 고대문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다소 융통성을 잃고 있으나,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서 산만하게 늘어놓았던 고대의 여러 나라들을 하나의 체계 속에 계열화시켜 놓음으로써 고대사 정리의 새로운 기준을 설정했다.권제의 『동국세년가』는 대체로 아버지 권근이 쓴 『동국사략』의 기준을 따르면서도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나타난 민족지향적인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고대문화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 다르다. 이는 세종시대의 주체성 강화와 관련되어 있다.세조는 전제왕권의 강화와 부국강병정책의 필요에서 고조선과 고구려를 웅장하게 다시 쓰고, 이를 『고려사』와 연결지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이라는 통사를 편찬하려 했다.그러나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고기류(古記類)를 이용하여 과장된 고대사를 쓰고자 하는 세조의 시각에 불만을 품은 유신들의 비협조로 완성을 보지 못했다. 그 후 신숙주·노사신(盧思愼) 등은 작업을 계속하여 1476년(성종 7년)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14권)를 완성했는데, 이는 세조가 목표로 했던 고대사보다는 훨씬 합리적으로 씌어졌다.그 후 1484년(성종 15년)에 서거정(徐居正) 등 훈신계열의 관료들이 『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를 기초로 하여 『동국통감』을 편찬하였다.그러나 왕은 이를 반포하지 않고 사림계열의 젊은 관료들의 참여하에 개편하여 『신편동국통감』(56권)을 다음 해에 완성했다. 이것이 오늘날 전하는 『동국통감』이다. 이 책에는 세조 때의 굴절된 유교정치를 회복시키려는 도덕적 이상주의가 지나치게 투영된 흠이 있으나, 삼국을 동등한 국가로 취급하고, 기자(箕子) 이래의 유교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깔려 있다.더욱이 조선왕조 건국 이래로 서로 간에 긴장과 마찰을 빚어 오던 왕과 훈신, 그리고 사림의 정치적 입장이 어느 정도 절충된 통사(通史) 체계라는 점에서 조선초기 역사책의 대표적 자리를 차지한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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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1145년(인종 23)에 완성한 삼국시대사. 고려왕조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귀족사회의 동요를 수습하고 난 뒤, 앞 시대의 역사를 공식으로 정리한 정사(正史)로서 기전체로 편찬했다. 고기(古記)·유적(遺蹟) 혹은 중국의 제사에서 뽑아 편찬, 간행하였다.고려시대의 간행본은 없어지고, 조선시대 와서 1393년

1394년(태조 2

3)에 진의귀·김거두가 개간, 1512년(중종 7)에 이계복이 다시 개간, 이후 목탄 또는 활자로 수차 간행되었으며, 본기(本紀)·연표(年表)·지류(紙類)·열전(列傳)의 순서로 편찬되어 있다. 즉 1

12권은 신라본기, 13

22권은 고구려본기, 23

28권은 백제본기, 29

31권은 연표, 32

40권은 지류, 41

50권은 열전이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며, 이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편찬 등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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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年月日順)에 의하여 편년체(編年體)로 기술한 기록. 별칭 『조선실록(朝鮮實錄)』.조선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 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 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정종·태종의 3대 실록을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春秋館), 1부는 고려시대로부터 실록을 보관하던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보관하였다.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 27)에 다시 2부씩 더 등사하여 전주(全州)·성주(星州)에 사고(史庫)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으며, 이후 역대의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출판하여 춘추관·충주·전주·성주의 4사고에 각 1부씩 보관하였다. 다만 태조·정종·태종의 3대 실록은 활자화하지 못하고 최초에 등사한 그대로 보관하였다.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춘추관·충주·성주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 병화(兵火)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당시 정부는 난중인데도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內藏山) 혹은 해주(海州)·강화도·묘향산 등지로 소개(疏開)하였다가, 평란 후 국가 재정이 곤란하고 물자가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실록 재출판 사업을 일으켜,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선조 39) 3월까지 2년 9개월에 『태조실록』부터 『명조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을 출판하였다.이때 출판한 부수는 3부였으나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과 교정본(校正本)을 합하여 5부의 실록이 되었으므로 1부는 국가의 참고를 위하여 옛날과 같이 서울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병화를 면할 수 있는 심산유곡(深山幽谷)과 도서(島嶼)를 택하여 강화도 마니산(摩尼山)·경상북도 봉화군 태백산·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사고를 설치하고 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신간본(新刊本), 마니산에는 전주실록,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 『선조실록』을 편찬 출판한 후 또한 다섯 사고에 각 1부씩 보관했다.그 후 춘추관에 보관했던 실록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또 다시 소실되어 완전히 없어지고, 묘향산 실록은 1633년(인조 11)에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後金:淸)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산(赤裳山)으로 이전하고, 마니산 실록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크게 파손되어 낙질(落帙) 낙장(落張)된 것이 많이 생겼다.그 후 현종 때에 마니산 실록은 보수(補修)되었으나 춘추관 실록은 영원히 복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니산 실록은 1660년에 같은 강화도 내의 정족산성 안에 사고를 신설하고 1678년에 정족산 사고로 이전하였다.인조 이후 실록은 정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의 실록만 남게 되었으며, 이후로 역대의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출판하여 4사고에 추가 보존케 하였는데 전례에 따라서 정족산·태백산·적상산 사고에는 정인본, 오대산 사고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다.이렇게 하여 이 4사고의 실록은 일제 침략 당시까지 완전히

보전되어 있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탈한 후 정족산 및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전의 종친부(宗親府) 자리에 설치한 소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分室)로 옮기고,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이왕직(李王職:지금 구왕궁) 장서각(藏書閣)에 옮겼으며,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도쿄 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지금 도쿄대학)에 가져다 두었는데 오대산본은 1923년 관동 대지진(關東大地震) 당시에 다 타버리고,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1930년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지금 서울대학교)으로 옮겨졌다.이리하여 광복 당시까지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남아 있고, 구왕궁 장서각에 있는 적상산본은 광복 후 도난사건이 발생하여 낙권(落卷)이 많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소개하였는데 부산화재 후 행방이 묘연하다. 그러므로 현재 완전히 남아 있는 실록은 오직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뿐이라 하겠다. 그 후 1929년부터 1932년까지 4년 동안에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실록 전체를 사진판으로 영인한 일이 있다.그러나 이때 겨우 30부밖에 출판하지 않았으며 그것도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가고 우리나라에는 총 8부밖에 두지 아니하였다. 광복 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함에 있어 이 실록의 절대적인 보급의 필요를 느껴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에 착수하다가 중단되었고, 1955년부터 1958년까지 4년 동안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태백산본을 8분의 1로 축쇄 영인하여 국배판(菊倍版) 양장본(洋裝本) 48책으로 간행하여 국내 각 도서관은 물론 구미(歐美) 각국의 중요한 대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한편 1953년 이래 일본 학습원(學習院) 동방문화연구소(東方文化硏究所)에서 영인본으로 축쇄 간행하고 있다. 이 실록은 조선시대사 연구의 근본자료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치·경제·법률·문학·외교·군사·산업·교통·통신·미술·공예·종교 기타 무엇이든지 우리나라 문화를 연구하려면 절대로 필요한 사적이나, 오로지 궁정(宮廷)을 중심으로 한 사건의 기록이어서 지방의 실정을 단적으로 나태내지 못하는 흠도 있다.또한 선조 때부터의 실록은 기사가 점차 간략되었고, 또 당쟁 때문에 내정(內政)에 관한 기사는 꾸민 데가 많다. 그 반면 외교에 관한 기사는 꾸밈이 적고, 중국·만주·일본·유구(琉球) 등과의 교섭 기록도 매우 많다. 그런데 조선 끝 왕인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편찬되지 못하고 있다가 일제 때 일본인들의 지시 아래 만들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철종(哲宗) 때까지의 실록을 의미하게 된다.

세종실록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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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實錄地理志

『세종실록』에 실린 지리지. 1454년(단종 2)에 편찬. 각 도(道)의 연혁·고적·물산(物産)·지세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었으며 『세종실록』 163권 중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후에 나온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연원이 되었다.1938년 중추원(中樞院)에서 『교정세종실록지리지(校正世宗實錄地理志)』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삼국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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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節要

삼국사의 요점을 연대별로 편찬한 책. 조선 세조 때 착수한 것을 성종이 계승하여 노사신·서거정·이파·김계창·최숙정 등이 완성하였다. 이 책은 총 15권인데, 삼국 이전의 상고사는 외기(外紀)로서 권수에 포함하지 않고 14권으로 목차를 작성하였다.『삼국사기』를 기본으로 하고 『삼국유사』 『수이전』 『동국이상국집』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

등을 통해 보완하였다. 설화·신화·전설·민담 등은 물론이고, 천재지변·종교행사·풍속·사냥·교범·방언·축성·전란 등 국가의 흥망과 백성의 안녕에 관계되는 사건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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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庫

실록의 산실(散失)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를 수장(收藏)하던 곳. 임진왜란 이전에는 서울의 춘추관, 충주(忠州)·성주(星州)·전주(全州)의 3사고(三史庫)에 실록을 봉안하였는데,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만이 묘향산으로 이장(移藏)되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동왕 39년(1606) 3부의 활자본 실록과 전주사고의 원본 및 교정본을 합한 5부의 실록이 성립되었다. 서울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봉화(奉化) 태백산, 영변(寧邊) 묘향산, 평창(平昌) 오대산에 각각 사고를 설치하고,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신인본(新印本)을, 마니산에는 전주사고 원본을,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봉안하였다. 인조 이후 실록은 4부를 작성하여, 정족산(鼎足山)·태백산·적상산(赤裳山)·오대산의 4사고에 분장하였으며, 이들은 조선 말기까지 완전히 보존되었다.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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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

기전체(紀傳體)로 된 고려 왕조의 정사. 태조가 즉위 초에 정도전·정총(鄭摠) 등에게 명하여 동왕 4년(1396) 편년체로 된 『고려사(高麗史)』 37권이 완성되었는데, 통칭 『고려국사』로 현전(現傳)하지는 않는다.이 고려국사는 그 뒤 태종 때에 유신에게 명하여 교정케 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였고, 세종 때 왕명으로 사국(史局)을 열어 정인지·김종서 등이 개찬(改撰)에 착수하였다.이 일은 문종 1년(1451)에 완성되어, 단종 2년(1454) 간행에 착수하였는데 체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본떠 세가(世家)·지(志)·표(表)·열전(列傳)의 4항목으로 나누어 기전체로 서술하였다.『고려사』는 그 역사 서술의 이론이나 방법보다 고려시대 역사의 근본 사료로서의 가치면에서 의의가 크다.

지리지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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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理志-編纂

조선초기에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과 동시에 중앙집권의 실효를 높이기 위해 국토의 자연 및 인문지리적 조건을 깊이 있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국토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그 조사자료에 근거하여 지리지와 지도가 활발하게 편찬되었다.지도는 태종 1402년(태종 2년)에 이회(李?), 이무(李茂), 김사형(金士衡), 권근 등이 왕명으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라는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이것은 아라비아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만든 원(元)나라의 세계지도를 한층 정확하게 개정하고, 여기에 한반도 지도를 덧붙여 만든 것으로서, 유럽·아프리카·중국·일본 그리고 한반도 등이 그려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은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아 빠져 있다.이 지도는 지금 남아 있는 세계지도 중 동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위 세계지도에 들어 있는 우리나라 지도는 이회가 제작한 것인데, 한반도의 모습이 현대지도를 보는 것처럼 비교적 정확하다.이회는 이 지도를 토대로 더욱 세밀하고 정확한 「팔도도(八道 圖)」를 작성했으나 지금 남아 있지 않다.세종 때에는 정척(鄭陟)이 새로 영토로 편입된 북방지방을 실측하여 한층 정밀한 「팔도도」를 제작했으며, 그 후 문종

세조 때에 걸쳐 정척·양성지(梁誠之) 등이 도·주·부·군현별로 실측지도를 제작하고, 이를 모아서 1463년(세조 9년)에 『동국지도(東國地圖)』라는 지도집을 완성하였다.이것은 조선초기 지도제작사업의 백미로서 성종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반영된 듯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조선초기의 전국지도에는 만주가 반드시 그려져 있고, 랴오허와 헤이룽강이 강조되어 있다.이것은 『고려사』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서문에서 우리나라를 ‘만리(萬里)의 나라’로 자랑하면서 만주를 미수복지구로 간주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또 지도에는 산맥·하천·섬·교량·나루터·거리표시·행영(行營)·수영(水營)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 행정과 국방의 필요성에서 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지리지 편찬은 세종 때부터 본격화되어 1432년(세종 14년)에 『신찬팔도지리지』가 완성되었으며, 이를 축소하여 1454년(단종 2년)에 세종실록의 한 부분으로 넣었다. 이를 『세종실록지리지』(8권)라 한다. 이 책은 군 단위로 60여 항목의 사항을 기록하고 있는데, 각 군의 연혁·인물·고적·토지·호구·성씨·군정수(軍丁數)·물산 등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어 지방행정과 재정 그리고 국방의 필요에서 편찬된 것을 보여 준다.지리지 편찬사업은 문종

세조 때에도 계속되었는데, 이때는 양성지(梁誠之)의 주도하에 군사적 사항이 더 상세하게 조사·기록되었다.이것은 당시 중국과의 긴박한 긴장관계 속에서 국방력이 강화되던 추세와 관련이 있다. 양성지가 주도한 지리지 편찬사업은 1478년(성종 9년) 완성되어 『팔도지리지』(8권)라 하였다.그러나 이 책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그보다 앞선 1469년(예종 원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만이 전한다.『팔도지리지』는 그 후 『동문선』 중에서 뽑은 시문(詩文)을 합하여 1481년(성종 12)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50권)으로 간행되었다.그러나 노사신·서거정·양성지·강희맹 등 훈신들이 편찬한 이 책은 반포되지 않고, 1486년(성종 17년)에 김종직·최부(崔溥) 등 사림관료들에게 다시 개찬하게 했다. 이것이 『신찬동국여지승람』(55권)이다.그러나 이 책도 연산조 때 임사홍(任士洪) 등이 다시 수정하고, 1530년(중종 25년) 이행(李荇) 등이 누락된 것을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55권)이라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처음에 훈신들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은 우리나라를 ‘만리대국’으로 보는 입장에서 경제·국방에 관한 사항을 많이 수록한 것이었으니, 사림(士林)이 개찬한 것은 국토를 압록강 이남으로 한정한 기초 위에서 행정적 편람에 적합하도록 한 것이다. 말하자면 전자가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지리지라면, 후자는 국토의 현상유지와 대내적인 정치안정에 초점을 맞춘 지리지 이다.한편, 조선 초기에는 국가의 여러 행사에 대한 규범을 새로이 제정할 필요에서 1474년(성종 5)에 신숙주와 정척 등에 명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8권)를 편찬케 했다.이 책은 역대의 제도를 참고하여 길례(吉禮, 제사의식), 가례(嘉禮, 외교·조하·혼례 등), 빈례(賓禮, 사신접대), 군례(軍禮, 군사의식), 그리고 흉례(凶禮, 장례의식) 등 다섯 가지 의식을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끝에 대부(大夫)와 사서인(士庶人)들의 장례의식을 첨가했다.또한 일반백성들의 윤리규범의 핵심이 되는 군신·부자·부부의 윤리를 강화하기 위해 1434년(세종 16년) 직제학 설순(?循) 등이 왕명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3권)를 편찬했다.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효자·충신·열녀 중에서 모범이 될 만한 인물 300여 명을 뽑아 그들의 행적을 그림을 붙여서 설명한 것이다.조선 초기에는 농업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 성과를 종합·정리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농서들이 간행되었다.관찬농서로서 가장 먼저 출간된 것은 1430년(세종 12년)에 정초(鄭招) 등이 편찬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다.이 책은 중국의 대표적 농서인 『제민요술』과 『농상집요』 및 『사시찬요(四時纂要)』를 참고하여 중국의 선진적인 화북농법을 받아들이면서 촌로(村老)들의 실제 경험을 존중하여 우리나라의 기후풍토에 가장 알맞은 독자적인 농법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리한 것이다.이 책은 조선후기에 중국 강남농법을 많이 받아들인 신속의 『농가집성(農歌集成)』(1655년)이 나올 때까지 영농의 기본지침서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한편, 성종 때 강희맹(姜希孟)은 금양(시흥)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방의 농사경험을 토대로 하여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저술하여 81종의 곡식재배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책은 뒤에 『농사직설』과 함께 한 책으로 간행되었다.조선 초기에는 양잠, 목축 그리고 원예작물 재배법에 관한 이론서들도 편찬되었다. 세조 때 양성지는 『농잠서(農蠶書)』와 『축목서(畜牧書)』를 간행했고, 『잠서주해(蠶書註解)』와 국문번역판 『잠서』도 이때 편찬되었다. 16세기초에는 김안국(金安國)이 다시 잠서를 번역해 『잠서언해』(1518년)라 하여 농가에 보급했다. 원예에 관한 책으로는 강희맹의 형 강희안이 세종 때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유명한데, 이 책에는 주로 화초 재배법이 기록되어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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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學技術-發展

천문학은 농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만, 정치질서를 하늘의 이치와 관련시켜 보기도 하여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재상이 천문학을 관장하는 관상감(觀象監)의 최고책임자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해와 달, 그리고 별에 대한 관측을 위해 세종 때 경복궁 안에 간의대(簡儀臺)라는 천문대를 설치하고 여러 가지 관측기구를 비치·운영했으며, 삼각산·금강산·마니산·백두산·지리산·한라산 등지에도 천문학자를 파견하여 때때로 북극의 높이와 일식·월식 등 천체운행을 관측했다.이 밖에 세종 때에는 앙부일귀 (해시계)·일성정시의(해시계와 달시계를 겸한 것)·자격루(물시계) 등 여러 시계를 만들어 서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렸으며, 보루각(報漏閣)을 궁안에 설치하고 자격루를 비치하여 궁중에 시간을 알렸다(세종 16년).또 1438년(세종 20년)에는 천민기술자들을 시켜 옥루기륜(물시계)을 만들어 궁안의 흠경각(欽敬閣)에 설치했는데, 기술 수준이 매우 높았다.조선 초기 천문학의 성과 중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칠정산(七政算)』이라는 우리나라 독자적인 달력을 만든 것이다.이 달력은 1442년(세종 24년)에 집현전과 서운관 학자들이 왕명으로 우리나라 역대의 역법(曆法)을 종합 정리한 기초 위에 원·명의 역법을 참작하여 만든 것으로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었다.내편은 북경(北京)을 기준으로 한 중국과 달리 서울을 표준으로 작성한 달력으로서 해와 달 그리고 행성(行星)들이 운행하는 원리와 위치, 시각 등이 오늘날의 달력과 거의 비슷하게 설명되어 있고, 서울지방의 밤과 낮의 길이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외편은 우리가 쓰기 위한 달력이 아니라, 이슬람력(회회력)을 이해하기 위해 개정·증보하여 번역해 놓은 것이다.이 밖에도 농사진흥과 관련하여 여러 천문서가 더 편찬되었고, 매일매일 기상변화를 기록하여 놓기도 했다.조선왕조 실록에는 날짜별로 그 날의 일기·달무리·해무리·혜성·지진 등 자연변화에 관한 사항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천문·기상학에 관한 위정자의 관심과 이해 수준을 엿볼 수 있다.의학은 역학(譯學)과 더불어 국가에서 장려한 잡학의 하나였으며, 실제로 총명한 학도 중에서 의학을 하는 이가 많았다. 왕실과 국민보건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컸었다.먼저 약재에 대한 이론서로는 1428년(세종 10년)에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을 편찬하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수백 종의 약재를 소개했으며, 1433년(세종 15년)에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노중례(盧仲禮) 등에 의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85권)이 편찬되었다.이 책은 7백여 종의 국산약재를 소개하고, 1천 종에 가까운 병증에 대한 치료·예방법을 제시하고 있다.한편, 1445년(세종 27년)에는 동양의학에 관한 서적과 이론을 집대성한 의학백과사전인 『의방유취(醫方類聚)』(365권)가 전순의(全循義) 등에 의해서 편찬되었다.이 책에는 153종 내외의 의학책들이 부문별로 망라되어 있는데, 이렇게 방대한 의학백과사전이 편찬된 것은 세계에서 처음이다.17세기 초 광해군에 편찬된 『동의보감』은 이러한 축적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의학의 발달은 특히 박물학 및 도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어 조선초기 이 방면의 이해 수준이 높았음을 아울러 보여준다.교육진흥에 따른 활발한 편찬사업은 활자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을 촉진시켰다.이미 13세기경에 세계 최초로 발명되어 쓰이기 시작한 금속활자는 조선초기 이후 더욱 개량되어, 계미자(태종 3년)·경자자(세종 3년)·갑인자(세종 16년) 등이 차례로 주자소에서 주조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갑인자(甲寅字)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하기에 편하게 주조되었을 뿐 아니라, 활자가 20여만개나 되어 가장 우수한 활자로 꼽힌다.활자 만드는 데 쓰는 금속은 처음에는 구리였으나 세종 18년부터는 그보다 강한 납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만드는 활자주조 수량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수량의 약 10배에 달하는 3,500자 정도나 되었다.또 종전에는 밀(蜜)을 써서 활자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썼으나, 세종 때부터는 식자판(植字版)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능률을 올리게 되고 인쇄효과도 훨씬 선명하게 되었다.조선 초기에 가장 큰 인쇄소는 교서관이었는데, 이곳에서는 140여 명의 인쇄공이 소속되어 당시로는 세계 최대규모를 자랑했다.지방에서도 감영이나 사찰·향교 등에서 목판인쇄에 의한 출판활동이 활발했고, 개인도 목판으로 문집을 찍어내는 예가 허다하였다. 조선초기의 교육수준이 높고 향촌에까지 서적이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은 출판·인쇄기술의 발달이 큰 요인이 되었다.세종 때 학자 변계량(卞季良)이 쓴 『갑인자발(甲寅字跋)』에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조선초기 출판문화의 높은 수준을 말해 준다. 우리나라의 인쇄기술은 일본·중국 등 이웃나라의 인쇄기술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조선 초기에는 우리나라의 지세에 맞는 전술을 개발하고 역대의 전쟁사를 정리하여 각종 병서(兵書)가 편찬되었다. 태조 때 정도전은 앞선 시기의 병서를 참고해 독자적인 『진법서(陣法書)』를 편찬하였다.그 뒤, 문종 때에는 김종서(金宗瑞)의 주도하에 고조선에서 고려말에 이르는 전쟁사를 정리하여 『동국병감(東國兵鑑)』(2권)이 편찬되고, 이어 고대에서 조선초기에 이르는 기간의 주요 전투를 전략적인 측면에서 정리한 『역대병요(歷代兵要)』도 간행되었다. 또 같은 시기에 『진법(陣法)』이 편찬되어 오위제에 기초한 군사훈련방법과 진(陣)을 치는 방법이 정리되었다.이 책은 정도전의 진법서를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뒤에 『병장도설(兵將圖說)』이라고 이름을 고쳐 이용되었다. 한편, 화기 제작과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銃筒謄錄)』이 세종 때 편찬되기도 하였다. 무기는 군기감에서 주로 제작하였으나, 지방 군현에서도 제작하는 일이 많았다. 고려말 최무선에 의해서 창안된 화약무기는 조선초기에 더욱 개량되어 그 성능이 두 배 이상 높아졌고, 대포의 사정거리도 최대 1천 보에 이르러 종전보다 4

5배나 커졌다.문종 때에는 화차(火車)라고 불리는 일종의 바퀴 달린 로켓포가 제조되어 사정거리가 약 1킬로미터에 달하였다. 이것은 수레 위에 신기전(神機箭)이라는 화살 100개를 설치하고, 심지어 불을 질러 쏘게 한 것이다.군선(軍船)으로서 태종 때 돌격용 배로서 거북선(龜船)이 만들어진 일이 있으며, 비거도선(鼻居刀船)이라고 불리는 작고 날쌘 전투선이 제조되어 해전에서 위력을 보였다. 그러나 무기제조 기술은 대외관계가 안정된 성종 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임진왜란 때 고전을 하는 원인이 되었다.

『농사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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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事直說

농사의 개설을 해설하여 놓은 농서(農書) 중 현존하는 최고서(最古書). 세종이 정초(鄭招) 등에게 명하여 동왕 11년(1429)에 편찬했다. 종래에는 중국의 농서에만 의존해 왔으나 세종은 풍토에 따른 농법의 차이를 고려하여 각 도 농부들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의 실정에 알맞은 농법을 저술하게 되었다. 내용을 보면, 먼저 일반론으로서 종자와 토양을 다루는 법을 설명하고, 각론(各論)으로 각종 작물의 재배법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내용이 중요 곡식류에 국한되고 또 자세하지 못한 흠은 있으나 농서의 효시로서, 또 우리 식의 농법을 편 자주적 저서로서 농업 기술의 변천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이다.

장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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掌樂署

조선 시대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 고려의 관제를 계승하여 아악서와 전악서를 합해 1422년(세종 4) 장악서로 개편하고 1458년(세조 4) 장악서에 악학도감을 병합하여 장악원(掌樂院)이라고도 한다. 관리로는 정3품 벼슬인 정(正)을 비롯하여 첨정·주부 등 23명과 악사·악생 등이 있었다. 연산군 때에는 기생과 악수(樂手)를 두어 왕의 향락을 위한 관청으로 변하였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부터 다시 음악의 편찬·교육·행정 등의 일을 맡게 되었다.

측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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測雨器

세종 때 우량 분포를 측정하던 기구. 세종 24년(1442) 측우에 관한 제도를 설정하여 서운관(書雲觀)에서 이 기구로 우량의 심천(深淺)을 측량·기록하게 했으며, 지방에서는 각 관가의 뜰에 설치하여 수령 자신이 측량·기록하게 했다. 처음에는 쇠로 만들었으나 뒤에 구리로 만들기도 하였고, 이외에 자기·도기로 대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탈리아의 가스텔리보다 약 2백 년 앞선 것이다.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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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英實

세종 때의 과학자. 본관은 아산(牙山). 벼슬은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으며, 세종이 역상(曆象)에 관한 기구를 제작하려고 할 때 이천(李?)과 함께 공역(工役)을 감독하여 7년 만에 완성했다.특히 동왕 20년(1438) 경복궁 뜰에 혼천의(渾天儀)를 간수하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울 때 이 모든 공역을 감독했다. 그는 서양보다 근 2세기나 앞서서 측우기를 만들었으며, 그 밖에 간의(簡儀)·자격루(自擊漏) 등을 제작 감독하는 등 기계·건축·과학 발전에 공이 컸다.

『향약집성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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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藥集成方

세종 15년(1413)에 편찬된 의학서. 세종 13년(1431) 권채(權採)·유호통(兪好通)·노중례(盧重禮) 등이 재래의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토대로 하고 기타 의서를 참고, 동왕 15년(1433) 이 책을 완성했다. 여기에는 각종 약방문과 침구법(鍼灸法) 및 향약본초(鄕藥本草)·포제법(?製法) 등이 들어 있다.

『의방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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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方類聚

세종 27년(1445)에 완성된 의학서. 『의방유취』는 책이름 그대로 임상적 처방을 병증에 따라서 분류 집성한 것으로 세종이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金禮蒙), 유성원(柳誠源) 등 여러 문관과 의관들에게 명하여 모든 의방(醫方)을 수집·분류하여 1서(一書)로 합편하였다. 뒤에 다시 집현전 직제학 김문(金汶)·신석조(辛碩祖), 부교리 이예(李芮), 승무원 교리 김수온(金守溫)에게 명하여 의관을 모아 편찬케 하고 안평대군 등으로 하여금 감수케 하였다. 3년 만인 동왕 27년(1445)에 3백 65권을 편성하게 되었으나 그것이 너무 방대하여 용이하게 간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성종 8년(1477) 겨우 30부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그 후 대부분 망실되었다가 고종 13년(1876) 복간본이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헌납되었다.

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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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逡 (1546

1615)

조선 중기의 의학자. 본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 선조 때 내의(內醫)가 되어 왕실의 진료에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어의로 왕을 끝까지 호종(扈從)하고 돌아와 1604년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고, 1606년 양평군에 봉해졌다. 후기 대간의 반대로 직위가 취소되고, 1608년 선조가 죽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한때 파직당했다.1610년(광해군 2) 16년의 연구 끝에 완성한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저서에는 『벽역신방』, 『신찬벽온방』,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요』, 『맥결집성』, 『찬도방론맥결집성』 등이 있다.

혜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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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民署

조선시대 의약과 일반 서민의 치료를 맡아본 관청. 1392년(태조 1)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혜민고국(惠民庫局)을 설치, 1414년(태종 14) 혜민국이라 고쳤다. 1466년(세조 12) 혜민서로 바꾸었다가, 1882년(고종 19) 폐지하였다. 관원은 타관이 겸임하는 제조(提調) 1명, 주부(主簿)·의학교수·직장(直長)·봉사(奉事)·의학훈도 각 1명과 참봉 4명이 있었다. 그 중 채용시험의 최고 득점자와 직장 이상의 관원 중 1명은 구임원(久任員)이고, 그 외는 체아직(遞兒職)이었다.

『동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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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醫寶鑑 광해군 2년(1610)에 완성된 동양의학의 보감(寶鑑). 허준(許浚)이 선조의 명을 받아 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 등과 편집에 착수했는데, 정유(丁酉)의 난으로 중단되었다가 허준 단독으로 그 일을 계속하였다. 전후 10여 년에 걸친 작업 끝에 광해군 3년(1611) 드디어 완성하였고, 동왕 5년(1613) 간행되었다. 내용은 내과학인 내경편(內景篇), 외과학인 외형편(外形篇), 잡병편, 약방 관계의 탕액편(湯液篇), 침구편 등으로 되어 있으며,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한 체제 정연한 책이다.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소개되었다.

언해구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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諺解救急方

위급한 환자를 구하는 약방문(藥方文)을 한글로 번역한 책. 활자본(活字本). 2권 2책으로 선조 때의 의서이며 허준이 지은 것을 1466년(세조 12) 간행하였다. 현재 원본은 전하지 않고 후대 복간본의 완질은 일본에 상권은 서울대학 가람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에 있는 완질본은 한글학회에서 1975년 영인·간행하였다.

계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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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字

조선시대 최초의 동활자. 태종 3년(1403) 왕명으로 주자소를 설치하고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 총재 민무질(閔無疾) 등이 구리로 이 계미자를 만들었다. 이때 주조된 활자 수는 약 10만 자나 된다.자본(字本)은 송판본(宋板本)의 『고주(古註)』 『시경』 등을 이용하였으며, 인쇄본으로 『송조표전총류』 1책, 『17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 1책이 현존한다.

갑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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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字

1434년(세종 16)에 만든 구리활자. 위부인자(衛夫人字)라고도 한다. 왕명을 받들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천·직제학(直提學) 김돈(金墩)·직전(直殿) 김호(金鎬)·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사인(舍人) 정척(鄭陟)·주부(主簿) 이순지(李純之) 등의 경연(經筵) 소장(所藏)의 『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 『논어(論語)』 등의 명나라 초기 판본(板本)을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것으로 경자자(庚自字)보다 모양이 좀 크고 자체(子體)가 바르고 깨끗한 것이 20여 만자나 되었다. 현존하지 않으며 그의 인쇄본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2책·『증간왕장원집주분류소동파선생시(增刊王狀元集注分類蘇東坡先生詩)』 1책·『신간대자부음석문삼주(新刊大字附音釋文三注) 1책이 있다.

강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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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希顔 (1419

1464)

세종 때의 문신. 호는 인재(仁齋). 세종 23년(1441) 문과에 급제하여 사육신 피화(被禍)에 연좌되었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참화를 모면했다. 시(詩)·서(書)·화(畵)의 3절(三絶)로 칭송되었다.만년에는 시·서·화로 소일하였으나 천기(賤技)라 하여 타인의 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한다. 신숙주·정인지·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해석을 수찬(修纂)하였다.

안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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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堅

조선초의 화가. 호는 현동자(玄洞子), 본관은 지곡(池谷). 화원(畵員)으로서 호군(護軍)을 지냈다. 세종 29년(1447) 안평대군을 위하여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그리고, 이듬해 「의장도(儀丈圖)」를 그렸다. 총명·정박(精博)하여 고화(古畵)를 보고 깊은 경지를 체득했으며, 여러 화가의 장점을 절충하여 웅혼한 필치로 많은 명작을 남겼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다.

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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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涇

조선초의 화가. 호는 근재(謹齋), 본관은 탐진(耽津). 안산(安山) 출신. 세종 때 도화서(圖畵署) 화원을 거쳐 별제(別提)에 이르렀다. 안견의 산수화와 맞설 만큼 인물화를 잘 그렸다. 성종 3년(1472) 소헌왕후(昭憲王后)·세조·예종·덕종의 어진(御眞)을 그린 공으로 성종이 당상관(堂上官)에 임명하려 했으나, 언관(言官)의 반대로 취소되고 동왕 15년(1484) 당상관에 올랐다.

이상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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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上佐

조선초의 화가. 호는 학포(學圃), 본관은 전주(全州). 본래 어느 선비의 노복이었으나 그림에 뛰어나 중종의 특명으로 도화서에 보직되었다. 특히 산수화·인물화에 뛰어났고 북종화풍(北宗畵風)의 그림을 그렸다. 중종이 죽었을 때 초상을 그렸고, 명종 때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안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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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平大君 (1418

1453)

세종의 셋째 아들. 이름은 용(瑢), 호는 비해당(匪懈堂)·매죽헌(梅竹軒). 세종 10년(1428)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그 후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았다. 동왕 20년(1438) 함경도에 진(鎭)을 신설하자 여러 차례 야인을 토벌했고, 황보인·김종서 및 문신들과 제휴하여 수양대군측과 대립하는 기세를 취했다.단종 1년(1453)의 계유정난 때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교동에 옮겨져 사사(賜死)되었다. 시문에 뛰어났고, 당대의 명필로서 신망이 높았다.

양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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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士彦 (1517

1584)

조선의 문신·서예가.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용(海容). 본관은 청주(淸州). 돈령주부(敦寧主簿) 희수(希洙)의 아들. 형 사준(士俊), 동생 사기(士奇)와 더불어 형제가 모두 재주가 뛰어났다.14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 대동승(大同升)을 거쳐 삼등(三登)·함흥(咸興)·평창(平昌)·강릉(江陵)의 지방관을 역임한

후 회양(淮陽) 군수, 이어서 철원(鐵原) 군수를 지냈다. 회양 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들어가 대자연을 즐겼고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는 지금도 그의 글 8자(蓬萊楓嶽元化洞天)를 새긴 것이 남아 있다. 이어서 안변(安邊) 군수로 나가 일을 잘하여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關係)를 받았다.안변 군수로 있으면서 큰 못을 파고 마초(馬草)를 저장하였다. 이듬해에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서 많은 군대들이 북송될 때 다른 고을에서는 마초와 물이 없어서 관리나 백성들이 책임을 추궁당하여 사형을 받는 자까지 있었으나 안변만은 아무 걱정 없었다. 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에 누구나 탄복하였다. 얼마 안 되어 지릉(智陵)에 화재가 일어나니 그 책임 때문에 해서(海西)에 귀양갔다. 2년 후 풀려 돌아오는 길에 병사했다.양사언은 비상한 천재인 데다가 노력을 거듭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40년, 다스린 고을은 8군데나 되었으며 단 한 가지의 부정이 없었고, 처자를 위해서 재산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남사고(南師古)한테 배워 점도 잘 쳐 임진왜란을 예견하였고, 시(詩)는 작위(作爲)없이 천의무봉(天衣無縫)하고 기발하였다.시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는 유명하다. 글씨는 해서(楷書)와 초서(草書) 다 같이 명필이어서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렸다.

문학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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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作品

조선초기 시조작품 중에는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처럼 안정기의 정서를 담은 것도 있고, 성삼문의 시조처럼 충절을 노래한 것도 있으나, 어느 것이든 퇴영적인 작품은 보기 어렵다.조선 초기 문학에서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잡기 혹은 패설(稗說) 작품이 많이 창작된 것이다. 일정한 격식이 없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대표적 패설작품으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와 『동인시화(東人詩話)』,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溶劑叢話)』, 남효온(南孝溫)의 『추강냉화(秋江冷話)』, 강희맹의 『촌담해이(村談解?)』, 이륙(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조신(曺伸)의 『소문쇄록(?聞鎖錄)』 등이 있다.이 책들에 실린 내용은 위로 조정관리들의 기행(奇行)으로부터 일반 평민이나 노비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 사람들의 생활풍속과 생활감정 그리고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많으며, 불의를 폭로하고 풍자하는 내용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이것들은 모두 벼슬아치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지만 당시의 서민사회와 서민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패설문학은 구전(口傳)자료를 많이 참고하여 쓰여진 것으로 소설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조선초기에는 패설문학이 발전함에 따라, 구전자료에다 허구적 요소를 더욱 가미한 소설도 창작되었다. 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금오신화(金鰲神話)』에 실린 작품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평양·개성·경주 등 유서깊은 고도(古都)를 배경으로 하여 남녀간의 애정을 주제로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불의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 속에 전승되어 내려온 고유의 생활감정과 낭만적인 역사의식이 묘사되고 있다.

변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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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季良 (1369

1430)

고려 말·조선 초의 정치가.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시호는 문숙(文肅). 본관은 밀양(密陽). 옥란(玉蘭)의 아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385년 문과(文科)에 급제, 전교(典校)·주부(主簿)·진덕박사(進德博士) 등을 역임했다. 조선 건국 초 천우위우령 중랑장(天牛位右領中郞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의학교수관(醫學敎授

官)이 되고, 사헌부 시사(司憲府侍史)·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

·직예문관(直藝文館)·사재소감(司宰少監)·예문관(藝文館) 응교(應敎)·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예조 우참의(禮曹右參議), 1409년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1417년 예문관 대제학·예조 판서, 이듬해 참찬(參贊), 1426년(세종 8)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었다. 대제학을 20여 년 간 지내는 동안 대부분의 외교 문서를 도맡아 지어 명문장가로 유명했으며, 『태조실록(太祖實錄)』의 편찬과 『고려사(高麗史)』 개수(改修)에 참여했고, 시(詩)에도 뛰어나 문묘(文廟)·기자묘(箕子墓)의 비문(碑文)과 낙천정기(樂天亭記)·헌릉지문(獻陵誌文) 등을 찬(撰)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시조 2수가 전한다.

건축과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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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工藝

조선 초기의 건축은 국가의 건축정책에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의 건축과 비교하여 몇 가지 새로운 특징이 나타났다. 첫째,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집의 크기에 일정한 차등을 두게 하였다.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궁전은 전보다 더 크게 짓는 대신 관리의 집은 최고 40칸을 넘지 못하게 하고, 품계가 내려갈수록 그 크기를 줄여 평민은 10칸으로 제한했다. 건물에 위계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둘째, 건물의 장식을 검소하게 꾸며 사치를 배격했다. 그리하여 조선초기 건축은 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경쾌하면서도 실용성을 띠고 있다. 서울의 경우, 조선초기 건물로서 지금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과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이며, 지방 건축으로는 개성 남대문(1393년)과 평양 보통문(1473년)이 우수하다. 그 밖에 나중에 재건된 것이긴 하지만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은 본래 장중하면서도 소박했다고 한다. 궁궐이나 개인주택에는 휴식처로서 정원이 부설되는데, 정원은 대체로 연못·다락, 그리고 수풀이 조성된다. 조선초기 정원은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색으로서, 인공미를 추구하는 서양이나 일본의 정원과는 매우 다르다. 창덕궁의 후원(비원)은 조선정원의 특색을 잘 보여 준다.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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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壽宮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사적 제124호. 면적 6만 1500m2. 덕수궁이란 궁명(宮名)은 조선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讓位)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定宗)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태종(太宗)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昌慶宮)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도 역시 덕수궁이라 하였다.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世祖)의 큰 아들인 도원군(桃源君:暲)의 큰 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개인 저택이었다. 도원군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에 죽었기 때문에 세자빈(世子嬪) 한(韓)씨가 출궁(出宮)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 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둘째 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왕(成宗)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키고 궁궐 내에 있어야 할 각 관청을 처음에는 궐문 밖에 인접하여 두었다가 점차 목책(木柵)을 넓혀 세우고 문을 달아 임시 궁성을 형성하여 여러 관청과 위사(衛士) 등을 모두 궁궐 내에 들게 하였다.또 그 옆에 있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心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하였다. 97년에는 담을 둘러 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웠다.선조는 1593년 10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후 1608년 2월 정침(正寢)에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內外政務)를 보았으며, 뒤를 이어 광해군(光海君) 역시 이곳 행궁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 초 이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였다. 또한 창덕궁(昌德宮)을 대대적으로 복구하여 그의 재위(在位) 2, 3년에는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기 전의 건축보다 더 훌륭한 법궁(法宮)을 이룩하였다.광해군은 11년(광해군 3)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고, 창덕궁에 약 2개월 간 거처하다가 그해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하게 된 것은 15년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8년에는 그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경운궁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년에는 건축되었던 궐내아문(闕內衙門) 등을 허물고 그 재목과 기와를 내사(內司)로 옮기니 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23년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추대하고 반정(反正)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仁祖)이 등극하게 되자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배알하고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그로부터 8일 후 인목대비와 더불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그해 7월에는 30년 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정도로 축소되었다.그 후 영조(英祖)는 1773년(영조 49), 즉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60년이 3번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2월 1일 세손(후의 正祖)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高宗)도 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또한 공역(工役)을 일으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96년(건양 1)에는 공역의 준공이 있었고, 그 해부터 약 1년 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때 태후(太后)·태자비(太子妃)는 경운궁에 이어(移御)하였으며 열성어진(列聖御眞)과 민비의 빈전(殯殿)도 경북궁에서 옮겼다.

전각의 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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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건양 2) 2월 20일 고종이 아관(俄館)에서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자 이 궁은 다시 궁궐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 해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되었다. 고종이 이곳을 궁궐로 정한 이면에는 주위에 러시아·영국·미국 등 강대국의 공사관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호를 요청하기 쉬운 곳이라는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9월 17일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있어 우선 소공동(小公洞)의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이 날부터 이 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1900년(광무 4)에는 담장 공사가 완성되었고 선원전이 화재를 당하였으며, 봄에는 발전소의 설비가 끝나 궁내에 전기의 공급이 시작되었다. 또 이즈음에는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함녕전·선원전·경효전(景孝殿)·흥덕전(興德殿)·사성당·준명당(浚明堂)·경운당(景雲堂)·덕경당(德慶堂)·함유재(咸有齋)·청목재 (淸穆齋)·보문각(普文閣)·문화각(文華閣)·수옥헌(漱玉軒)·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인화문 (仁化門:正門)·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 (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1901년에는 경희궁(慶熙宮)으로 통하는 구름다리가 가설·개통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법전(法殿)의 공역을 시작하였다. 이 법전을 중화전이라 이름하였다가 즉조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공사는 10월에 완공되고 중화문도 완공되었으며 관명전도 영건되었다. 이 당시의 중화전은 2층 건물로 규모가 장대하였으며 주위에 행각(行閣)이 있었다.그러나 1904년 2월에 영선사(營繕司)에서 함녕전의 온돌을 수리하던 중 실수로 불이 나자 거센 바람을 타고 중화전·즉조당·석어당(昔御堂)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신주(神主)를 모셨던 경효전과 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도 화재를 당하였으며, 화재를 면한 전각으로는 준명당·수옥헌·가정당(嘉靖堂)·돈덕전(惇德殿)·구성헌 등이 있었다. 고종은 그 날로 피하고 전각에 대한 중건을 명하여 우선 즉조당·석어당·경효전·흠경각(欽敬閣)을 응급 복구하였으나 이 무렵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1905년 10월 21일 밤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이곳에서 체결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어 공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화전의 재건이 진행되었으므로 원래대로 2층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단층으로 짓게 되었다.중화전은 그해 1월부터 시작하여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는데 이는 비서승(秘書丞)이며 풍수(風水)의 대가인 유시만(柳時滿)이 “국조연창(國祚延昌)하려면 ‘대안’을 ‘대한’으로 고쳐야 좋겠다”라고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한문은 원래 높은 장대석의 기단이 있고 장엄한 돌계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스팔트 바닥에 묻혀 있다. 1907년 7월 일제의 횡포로 고종이 퇴위하고 태자(太子)인 순종(純宗)이 즉조당에서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개원(改元)하고 개원과 더불어 태황제궁(太皇帝宮)을 덕수궁이라 함으로써 경운궁은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순종은 9월 17일 즉조당에 이어(移御)하였다가 11월 13일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태황제는 양위 후 일시 수옥헌으로 옮겼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다시 함녕전에 환어하여 19년 1월 서거할 때까지 이곳에서 주로 거처하였다. 1910년(융희 4)에는 석조전(石造殿) 등 서양식 건물이 준공되었으나 태황제(太皇帝)인 고종이 승하하게 되자 덕수궁도 궁궐로서의 수명이 끝나고 일제 강점기에는 빈 궁궐로 남아 있다가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되었다.6·25전쟁 전에는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석조전에서 개최된 바 있으며, 당시 석조전이 불타서 그 후 복구하여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왕궁유물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덕수궁은 그 동안 담장들이 뒤로 밀려지고 또한 목책에서 사괴석(四塊石)담으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정문인 대한문도 여러 차례 뒤쪽으로 밀려 들어가게 되어 성기(盛期)에 즐비하던 전각들은 상당수 철거된 반면, 세종대왕의 동상 등 새로운 시설물이 들어서게 되었다.현재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서·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 궁은 특히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근대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진취적 궁궐로서 이채롭다.

조선 초기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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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初期-美術

조선 초기에는 왕실이나 선비들의 초상과 여러 가지 의식(儀式)을 그려서 시정을 돕는 기록화와 일상생활에서의 감상화의 두 측면에서 그림이 발달했다. 국가에서는 전문화가를 관원(화원)으로 채용으로 도화서(圖畵署)에 소속시켜 종6품까지의 벼슬을 주고 그림에 종사하게 했다.감상을 위한 그림의 소재는 대나무·산수·인물·새짐승·화초가 중심을 이루었다. 화초(花草) 중에서는 모란·난초·매화·소나무·국화와 같은 기절(氣節)과 향기를 발하는 초목이 주요 소재가 되었다.조선 초기 화원(畵員)화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인 이는 세종 때 안견(安堅)이었다. 그는 특히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셋째 아들)의 후원을 받아 수백점의 그림을 창작했는데, 안평대군의 꿈을 그렸다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년)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신숙주가 쓴 화기(畵記)에 의하면, 그의 화풍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화법(畵法)을 깊이 연구하고 장점을 절충하여 자기 독자의 경지를 개척했는데 산수(山水)를 특히 잘했다고 한다. 「몽유도원도」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평화로운 꽃동산을 웅장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묘사한 것으로, 이상사회를 동경하는 작가와 후원자의 꿈이 서린 작품이다. 산을 그린 기법에 있어서 북송(北宋)의 화가 곽희(郭熙)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그 안에 펼쳐진 농촌풍경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안견은 학식도 높아 벼슬이 호군(정4품)에까지 올라, 같은 시기에 인물화를 잘 그려 벼슬이 당상관(정3품)에까지 오른 최경(崔涇)과 더불어 화원으로는 가장 우대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활동한 노비 출신의 이상좌(李上佐)도 명성을 떨친 화원이었다. 중종과 명종의 사랑을 받아 공신의 지위에까지 오른 그는 달밤에 소나무 밑을 거니는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를 비롯해 「어가한면도」 「노엽달마도」 등을 남겼는데, 힘있는 필체가 인상적이다.전문화가가 아닌 일반 선비 중에서도 뛰어난 그림 솜씨를 가진 문인화가가 적지 않았다. 세종 때의 강희안(姜希顔)·강희맹 형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특히 강희안은 맑은 물을 응시하면서 사색에 잠긴 선비의 모습을 그린 「산수인물도」(혹은 「고사관수도」)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한편, 신숙주는 화기(畵記)를 써서 안평대군이 소장한 송·원시대 그림을 소개하면서 회화사를 정리하여 그림에 대한 이해가 높았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그림은 문인화든 화원의 그림이든, 선비들의 고상한 생활철학을 그림에 반영시키고 있으며, 필치가 힘차고 구성이 간결한 특징을 보인다. 이 같은 특성은 중국 그림과 일정한 차이를 보여 이미 한국화의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음악과 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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音樂-舞踊

예(禮)와 악(樂)은 유교정치에서 백성을 교화시키는 수단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각종 국가의식에는 반드시 음악이 뒤따랐다.조선초기에는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掌樂院)이 있어, 양인 출신의 악생(樂生, 297명)이 아악(雅樂)을 담당하고, 공노비 출신의 악공(樂工, 518명)이 속악(俗樂)을 맡았다. 음악이 크게 정비된 것은 세종 때로서, 박연(朴堧) 등의 노력으로 60여 종의 악기가 개량되거나 제작되었고, 천민 출신의 악공 중에서 이름난 연주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비파의 송태평, 거문고의 김자려, 가야금의 이승련, 아쟁의 김소재 등이 대표적 명장(名匠)이다.장악원에서 연주하는 악곡들은 국가와 백성의 평안을 기리는 것이 대부분인데, 「여민락」 「정대업」 「보태평」 「보허자」「낙양춘」 「오관산」 등 수십 곡이 연주되었다.악보정리에 있어서도 큰 발전이 나타났다. 세종은 스스로 「여민락」 등 여러 악곡을 짓고, 또 정간보(井間譜)라고 불리는 새로운 악보를 창안하여 처음으로 소리의 장·단을 표시하는 악보가 생겼다. 한편, 성현(成俔)은 연주법과 악곡을 합친 합자보(合字譜)를 만들어 기악 연주 수준을 높였다.음악이론에 관한 책으로는 1493년(성종 24년)에 유자광·성현 등이 편찬한 『악학궤범』(9권)이 대표적이다. 이 책에는 음악을 아악(雅樂)·당악(唐樂, 중국음악)·향악(鄕樂) 등 세 부문으로 나누어, 음악의 원리와 역사, 악기편성법, 음악 쓰는 절차, 악기 만드는 법과 그 조현법(調絃法), 춤의 진행방법, 의상, 소도구까지 소개하고 있다.당시 궁전과 관청의 음악연주에는 반드시 춤이 따랐다. 그래서 음악이 발전함에 따라 춤도 발전했다. 춤은 무동(舞童)이라 불리는 소년이 추기도 하고, 때로는 기생들이 추기도 했는데, 춤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여 「보태평」 「정대업」 「절화삼대」 「학춤」 「처용춤」 등이 있었다. 궁중무용과 관청무용은 고대부터 내려오던 민속춤을 변용시킨 것으로서, 점잖고 우아한 것이 특징이다.

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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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濩 (1543

1605)

조선 중기의 명필.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 청사(淸沙). 본관은 삼화(三和). 정랑(正郞) 관(寬)의 손자. 송도(松都:開城)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스스로 붓글씨를 익혔으며, 타고난 천재에다 피나는 수련을 쌓았으므로 해·행·진·초(楷行眞草)의 각체가 모두 묘경에 이르렀다. 1567년(명종 22) 진사에 합격, 1583년(선조 16) 와서별제(瓦署別提),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사보로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문서관계의 일을 맡았으며,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당시 이미 세상에 널리 떨친 명필 한석봉의 이름은 명나라에서까지 유명해져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왔던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마귀(麻貴) 등도 그의 필적을 구해 가지고 돌아갔다. 엄주(?州) 왕세정(王世貞)은 「필담(筆談)」에서 석봉의 글씨를 가리켜 "성난 사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 했으며, 명나라 한림(翰林)·주지번(朱之番)은 “석봉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안진경(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고 하였다. 선조도 그의 대자(大字)를 보고 “기(奇)하고 장(壯))하기 한량 없는 글씨”라고 찬탄하면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집에 연회를 베풀었다. 이어 선조는 한벽(閑僻)한 고을 군수에 임명하면서 “필법을 후세에 전하게 하고자 하니 권태로울 때는 구태여 쓰지 마라. 게을리도 말고 서둘지도 마라”고 타일렀으며, 선조친필로 <醉裡乾坤 筆奪造化>의 8자를 써 주었다. 석봉 서체의 특징은 그가 조송설(趙松雪)체를 쓰면서도 자기 독특한 체풍(體風)을 세운 데 있으며 그는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조선 초기의 4대서가(四大書家)로 꼽힌다.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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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磁

우리나라 백자는 고려 말기에 송나라 정요(定窯)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었다. 고려 때에는 백자는 청자(靑磁)에 압도되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는데, 대개 소문(素文:무늬가 없는 것)·음각(陰刻)·양각(陽刻)·상감(象嵌)의 4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현재 고려백자 몇 개가 박물관이나 개인의 소장으로 전하고 있는데 빛깔은 백색·유백색(乳白色)·대황유백색(帶黃乳白色)·담청색(淡靑色)·담감람색(淡橄欖色) 등이 있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명(明)나라 백자의 영향과 흰 것을 사랑하고 숭상하던 일반적 풍조에 따라 초기부터 후기 전반까지 꾸준히 발전되었다. 물론 초기에는 고려에서 시작된 화문자기(花文磁器:三島手)에 눌려서 주류를 이룩하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용재총화(?齋叢話)』에도 나오듯이 당시 백자는 진귀품으로 궁중에서만 사용되고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에 자기소(磁器所)가 136군데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백자가 기술적으로 완성되기는 이때가 아닌가 추측된다. 같은 기록에 도기소(陶器所)는 185군데라고 하였다. 세조 때에는 청료(靑料:자료의 일종)의 수입(輸入)이 어려우므로 백자는 주기(酒器) 이외에는 사용을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예종(睿宗) 때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청료를 채취하도록 하였다 한다.이후 전국적으로 그 제조가 성행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위축되어 버리고, 백자는 화문자기풍으로 변하여 근대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의 백자는 완벽을 자랑하는 중국 백자와는 달리 대청색(帶靑色)·대회백색(帶灰白色)·유백색(乳白色)의 것으로 그 색체에 있어서도 특색을 지님은 물론, 기교면에서도 번잡에서 초탈(超脫)한 소박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정적(靜寂)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고려 백자에 비해 정련(精鍊)된 기묘한 멋은 없다고 하나 조대호방(粗大豪放)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백자의 모태가 되었다.기물(器物)의 종류에는 병·호(壺)·발(鉢:盆)·주발·주전자·베개(枕)·향로(香爐)·화분대(花盆臺)·필통(筆筒)·연적(硯滴)·기타 문방구 등이 있으며,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전하는 것으로 백자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240호)·청화백자철사진사양각국문병(靑花白磁鐵砂辰砂陽刻菊文甁:241호)·백자상감모란문매병(白磁象嵌牡丹文梅甁:345호 고려) 등이 있다.

『악학궤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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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學軌範

조선시대 장악원(掌樂院)에 있던 의궤(儀軌)·악보를 정리 편찬한 악서. 성종 24년(1493) 성현(成俔)·유자광(柳子光) 등이 왕명을 받들어 완성했고, 광해군 때 중교(重敎)를 간행하였다. 음악을 아악·당악(唐樂)·향악(鄕樂)의 3부로 나누어서 악률(樂律)로부터 실제 응용에 이르기까지를 그림과 함께 설명하였다.

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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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堧 (1378

1458)

조선초의 음악가. 초명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밀양. 1405년(태종 5) 문과(文科)에 급제, 집현전 교리(集賢殿敎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을 역임.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찬집(樂譜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編磬) 12매를 제작, 자작(自作)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音律)로 연주케 했고 3년 후 다시 미비한 율관을 수정했다. 또한 조정의 조회(朝會)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 했고, 1431년 남급(南汲)·정양(鄭穰)과 회례(會禮)에도 아악을 채택케 하고, 조회와 회례에서 종전까지 기생이 추던 춤을 무동(舞童)으로 대치하여 문무이무(文武二舞)의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남악지기(俗部男樂之伎)를 추게 하여 궁정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1433년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되어 아악에 종사, 공조 참의(工曹參議)·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145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 부윤(仁壽府尹)·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아들 계우(季愚)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3조에(朝)에 걸친 원로로서 죽음을 면하고 파면되어 고향에 내려갔다. 특히 적(笛)의 명연주가였으며 조선 초 미비한 궁정 음악을 정비하여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린다.

서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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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居正 (1420

1488)

조선의 학자. 자는 강중(剛中). 초자(初字)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달성(達城).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을 지내고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부수찬(副修撰)·응교(應敎)를 역임. 1456년(세조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이듬해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했다. 후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어 1460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서 그 곳 학자들과 문장과 시(詩)를 논하여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고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으며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또 장원, 이후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올라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달성군(達城郡)에 봉해졌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으며 시화(詩話)의 백미인 『동인시화(東人詩話)』와 『동문선(同文選)』 등을 남겨 신라 이래 조선 초에 이르는 시문을 선집, 한문학을 대성했다. 세조 때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한 왕명으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고,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국조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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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寶鑑

조선의 역대 임금들의 정치 활동 가운데서 모범이 될 만한 사실을 뽑아 적은 편년체의 역사책. 세종 때 편찬계획을 세우고 세조 3년(1457)에 수찬청(修撰廳)을 두어, 권남·신숙주 등이 태조·태종·세종·문종에 걸친 4대 보감 7권 3책을 처음으로 완성하였다. 그 뒤 숙종·영조·정조·현종 때 편찬을 계속했고, 고종 때에는 전의 것과 합하여 모두 90권 28책으로 완성되었다. 규장각 및 성균관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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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覺寺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동공원(塔洞公園) 안에 있던 절. 1464년(조선 세조 10) 건립. 원래 흥복사(興福寺)로서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고찰(古刹)이다. 조선 초기에는 조계종 본사(曹溪宗本寺)로 지정되었던 것인데, 폐사(廢寺)되고 공해전(公?田)으로 된 일도 있다. 이 흥복사의 옛 터를 넓혀서 본당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앙에 두고 왼쪽에는 많은 선당(禪堂)이 있었다. 문으로는 적광지문(寂光之門)·반야문(般若門)·해탈문(解脫門) 등이 있었다. 대종(大鐘)을 걸어둔 법뢰각(法雷閣) 동쪽에는 못, 서쪽에는 꽃밭이 있었고, 본당 뒷뜰에는 해장전(海藏殿)을 지어 대장경(大藏經)을 두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원각사를 폐하고 1505년(연산군 11)에는 장악원(掌樂院)을 이곳으로 옮겼다. 세조의 특별한 관심으로 창설된 원각사가 얼마 가지 못하고 폐사된 것은 당시 유사(儒士)들의 계속적인 불교 배척운동과 연산군의 적극적인 철훼(撤毁)운동의 결과였다. 그 후 1507년(중종 2)에 대비(大妃)의 전교로 복립(復立) 될 기회가 있었으나 조신(朝臣)들의 맹렬한 반대운동으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사우(寺宇)의 건물은 1514년(중종 9)까지도 상당히 잔존했었는데 1519년(중종 14)에는 건물의 태반이 없어졌다. 대체로 원각사의 창건에 대하여는 이설(異說)이 없으나, 그 폐지에 관한 설은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여러 설을 종합하면 원각사는 일시에 철훼된 것이 아니고 1504년(연산군 10)부터 1519년(중종 14) 혹은 1554년(명종 9) 대화재(大火災) 때까지의 약 50년 동안에 걸쳐 공가(空家)로 폐기되어 자연적으로 소멸되었다고 추측한다. 이 원각사를 창건할 때 만든 종도 그대로 폐기되어 있다가 1536년(중종 31)에 숭례문(崇禮門)으로 옮겨 달아서 그것을 보루(報漏)의 종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 『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攷)』에는 1594년(선조 27)에 숭례문의 종을 종각(鐘閣)으로 옮겨 달았다고 했다. 현재 원각사의 터에는 탑과 비만 남아 있는데 탑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간경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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刊經都監

조선초에 불경을 한글로 번역·출간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 간경도감은 세조 7년(1461)에 세워졌으며, 신미(信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 등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그 결과 불교는 다시 활기를 띠어 사찰의 재흥과 승려도 상당히 증가했다. 간행된 책으로는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10권, 『묘법연화경언해(妙法蓮華經諺解)』 2권 등이 있다.

조선의 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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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普雨 (?

1565)

조선 명종 때의 중. 호는 허응당(虛應堂)·나암(懶庵). 명종의 모후(母后)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할 때에 봉은사(奉恩寺)를 선종(禪宗),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본산(本山)으로 삼았으며, 중에게 도첩(度牒)을 주고 승과(僧科)를 부활하는 등 불교 부흥에 힘썼다. 그러나 이 막간극은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종막을 고하고 그는 유신들의 모함으로 귀양갔다가 피살되었다.

『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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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輿地勝覽

조선 제9대 성종의 명으로 1481년에 노사신 등이 편찬한 우리 나라의 지리서. 『대명일통지』를 본떠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각도의 지리·풍속·사적·전설과 역대 이름난 작가들의 시와 기문(記文), 그리고 단군신화가 실려 있다. 제11대 중종대에 이행(李荇)이 보충한 『신동국여지승람』이 있다.

『동국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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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正韻

세종 때 엮은 음운서(音韻書) 6권 6책. 세종 29년(1447)에 신숙주·성삼문·최항 등이 편찬한 한자 발음에 관한 책. 훈민정음을 만든 뒤,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서 중국 명나라의 『홍무정운』을 참고로 하여 엮은 책이다. 국토 제7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한글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