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임진왜란과 병자호란/병자호란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인조반정과 호란

[편집]

仁祖反正-胡亂

1623년 김류(金?)·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파 인사들은 광해군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 사건을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한다. 광해군과 대북파는 명나라를 배신하고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모두 처형되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파는 이내 내분이 일어나 자기의 공로평가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평안북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까지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가(1624), 뒤쫓아온 평안남도 군사에게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나라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이괄의 난을 평정한 후 서인정권은 패도에서 왕도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사림을 숭용(崇用)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이원익 등 일부 남인파를 등용하여 붕당연합을 정착시키면서, 대외적으로는 친명반금정책을 밀고 나가 멸망해 가는 명(明)에 친선을 표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었다. 후금의 신경을 더욱 자극한 것은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가서 인조가 부당하게 즉위했다고 호소한 사건이었다.그러자 침략기회를 노리고 있던 후금의 태종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1627년(인조 5) 3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평안도 의주·정주·신천·곽산 등지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에 각지에서는 관군과 백성, 그리고 의병들이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으며, 이때문에 배후의 보급로가 끊어진 적들은 평산에 머물면서 강화를 제의했다. 이 해의 침략을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부른다. 조선측은 아직 군비가 미비한 상태에서 적극적인 항전이 곤란하여 ‘형제의 맹약’이 담긴 강화제의를 받아들이고, 따라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화약을 맺고 돌아가던 후금의 군대는 평안북도 철산의 용골산성(龍骨山城)을 근거로 활약하던 정봉수(鄭鳳壽)가 이끄는 의병부대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고, 의주 부근에서는 이립(李立)의 부대에게, 가산 부근에서는 김여기(金礪器)가 이끄는 의병부대에 의하여 많은 손실을 입고 압록강 밖으로 쫓겨갔다. 그 후 후금은 요서지방과 내몽골을 정복하여 세력이 점점 더 커지더니, 1636년(인조 14년)에는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수도를 선양(瀋陽)에 정하고, 태종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조선에 대하여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다. 청의 요구는 조정을 격분시켰는데, 그 대책을 둘러싸고 조정신하들의 논의는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론으로서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이귀·최명길(崔鳴吉)·홍서봉(洪瑞鳳) 등 공신들이 주장을 폈다. 한편

조경(趙絅)·정온(鄭蘊)·김상헌(金尙憲)·유계(兪棨) 등 소장파 관인들은 “돌보지 말고 옳은 길을 가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강력한 무력응징을 요구했다. 이러한 주전론의 밑바탕에는 우리의 강함을 보여 주는 것이 협상에 유리하다는 판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대세는 주전론으로 기울고, 선전(宣戰)의 교서가 내려졌다. 이에 청 태종은 1636년(인조 14년) 12월 10만명(청인·몽골인·중국인)의 군대를 이끌고 질풍같이 쳐내려와 압록강을 넘은 지 5일 만에 서울을 유린하고, 7일 만에 왕과 대신들이 피난해 있던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왕자와 비빈은 미리 강화로 피난시켰으나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것이다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 4천 명의 군인과 50일 간의 식량만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어서 도저히 싸움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인조는 45일 간의 농성을 풀고 1637년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 송파)의 청태종 진영에 나와 항복했다. 이로써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청은 소현(昭顯)·봉림(鳳林)의 두 왕자와 강경한 척화론자들을 인질로 데려갔다. 그 중 평양서윤 홍익한(洪翼漢)·교리 윤집(尹集)·교리 오달제(吳達濟)는 선양에 끌려가서도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이들은 삼학사(三學士)라 하여 후세인의 높은 추앙을 받았다. 조정의 어이없는 항복에 분노한 국민들은 화의가 성립된 뒤에도 곳곳에서 의병을 조직해서 싸웠는데, 특히 박철산이 이끈 의병부대는 용강 부근의 적산에서 ‘의병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1642년(인조 20년) 명(明)과 연결하여 청(淸)을 치려고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청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1636년의 청의 침략을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고 부른다.인조가 재위 27년에 타계하고, 청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효종(孝宗)이다.

인조

[편집]

仁祖 (1595

1649)

조선시대 제16대 왕. 재위 1623

1649년, 휘는 종(宗). 자는 화백(和佰), 호는 송창(松窓). 원종의 아들, 선조의 손자.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수봉(受封)되었다가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봉군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으로 반정을 일으켜 인조반정이 성공되었다. 즉위하자 광해군 때 희생된 영창대군(永昌大君) 의·임해군(臨海君) 진(?)·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등의 관직을 복관시켰으며, 반정공신(反正功臣)에게는 논공해상(論功行賞)을 하였으나 이에 불만을 느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공주(公州)까지 남천(南遷)하였다가 1624년(인조 2) 환경(還京)했다. 1627년 청병(淸兵)의 침입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당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형제국(兄弟國)의

의를 맺고 화의하였고, 1636년에는 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다가 척화파(斥和派)·주화파(主和派)와의 치열한 싸움 끝에 인조 자신이 성을 나서서 삼전도(三田渡:松坡)에서 청의(淸衣)를 입고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군신(君臣)의

의를 맺어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의 두 왕자를 심양(瀋陽)에 인질(人質)로 보냈다. 1639년에는 청나라의 요구대로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까지 세웠다.

인조반정

[편집]

仁祖反正

1623년(인조 1)에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仁祖)을 옹으로 옹립한 무력 정변(武力政變). 1618년(광해군 10)에 발생한 인목대비 유폐사건(仁穆大妃幽閉事件)은 지금껏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에게 반동투쟁(反動鬪爭)에 좋은 구실을 주었다. 서인의 최명길·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유(金?)·이괄(李适) 등은 마침내 이를 이유로 무력정변을 기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로 거사일(擧事日)을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으나,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에 의해서 누설되었다. 그러나 예정대로 거사는 실행에 옮겨져서, 장단(長端)으로부터는 이서(李曙)의 군사, 이천(伊川)에서는 이중로(李重老)의 군사가 모여들어, 홍제 능양군의 친솔(親率) 아래 이날 밤 창의문(彰義門)을 향해 진군(進軍)하였다. 대궐은 미리 포섭되어 있는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內應)을 얻어 점령되었고, 그 길로 왕대비(王大妃)의 윤허(允許)를 얻어 무난히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곧 인조이다.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로 귀양보내고, 한편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이위경(李偉卿) 등 수십 명을 참형(斬刑)에 처하고 200여 명을 귀양보냈다. 반면 이 반정에 공을 세워 집권한 서인 이귀·김유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等位)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이 논공(論功)이 공평하지 못하여 후일 서인 사이에 반목을 일으켜 1년 후 이괄의 난을 일으키는 요인(要因)을 만들었다. 여하튼 이 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남인의 이원익(李元翼)이 다시 소환되어 입상(入相)함을 계기로 남인 제2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편집]

光海君-中立外交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도 9년이나 더 집권한 다음 타계했으며, 1608년에 세자 광해군(光海君, 1608

1623)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유능한 왕자로서 왜란 때에는 항일의 공로도 매우 컸으나, 혈통상으로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광해군 시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광해군을 추종한 북인은 원래 동인 중에서 이황 문인을 제외한 여러 파벌이 연합한 붕당이어서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이 중심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쉽게 분열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둘러싸고 영창대군의 혈통을 존중하면서 훈척의 정치간여에 비판적 입장을 지닌 명분주의자가 소북(小北)을 형성하고, 광해군의 혈통상 약점보다는 항일의 공적과 능력을 존중하여 부국강병을 추구하려는 현실주의자가 대북(大北)을 형성했다. 대북파는 왜란 중에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고, 그 여세를 몰아 소북파를 압도해 광해군을 추대한 후 권력을 잡았다. 대북파는 먼저 전쟁 중에 피폐된 산업을 복구하고, 부강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과 호적조사사업을 실시하고, 공납제를 대동법(大同法)으로 바꾸어 처음으로 경기도에 시행하였으며, 성지(城地)와 무기를 수리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했다.이 밖에 전란을 전후하여 기근이 계속되고 질병이 만연하여 인명의 손실이 많았던 경험을 살려 허준(許浚)과 정작(鄭?)으로 하여금 『동의보감』(1596

1610)을 편찬하게 하였다. 이 책은 도교의술을 도입하여 조선초기에 정리된 의학서를 한 수준 높였으며, 동아시아 의학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 『국조보감』 『경국대전』 『악학궤범』 『고려사』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등 건국초에 간행되었던 문헌들을 재간하고, 전라도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에 사고(史庫)를 새로 설치하는 등 문화중흥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인왕산 기슭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풍수가의 주장에 따라 1617년(광해군 9년)에 서대문 부근에 경덕궁(慶德宮, 西闕)을 건설한 것도 이때였다. 또한 교하(交河)로 서울을 옮기려는 계획도 세웠으나 실현되지 않았다.광해군 때의 정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대외정책이었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면서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는 왜란 후 국력이 한층 쇠약해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 사회에서는 급속한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만포진 건너편 건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흥경노성을 근거로 하여 주변의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더니, 1616년(광해군 8년) 마침내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하고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1618년에는 푸순(撫順)을 점령하고 명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했다.명나라는 큰 병력을 풀어서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천 명의 원병을 보냈으나, 도원수 강홍립(姜紅立)은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후금과 휴전을 맺고 돌아왔다. 그 후 명(明)은 모문룡(毛文龍) 부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假島)에 주둔케 하였으나, 조선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다시 말해서 명과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정책을 펴나갔다. 한편, 광해군은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에는 이원익(李元翼)을 비롯한 남인과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 대북인을 골고루 등용했으나,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과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1613년(광해군 5년)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반대파 정적들을 과격한 수단으로 제거했다. 이를 계축옥사(癸丑獄死)라 한다.특히 1611년(광해군 3년)에 정인홍의 주장으로 남인의 추앙을 받던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제사에서 삭제하고, 이를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축출한 사건은 유생들의 반발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광해군의 급진적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우는 데 큰 효과를 보았으나, 법가의 패도를 빌린 까닭으로 성리학의 명분론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사림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기유약조

[편집]

己酉約條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의 송사조약(送使條約).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일본은 끈질기게 통교 요청을 해왔고,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찬·반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일본측이 대조선 통교

재개를 위해 적극적인 태도로 나오자 우리측은 국서(國書) 요구문제, 범능적(犯陵賊:宣陵·靖陵을 陵侵한 범죄인)의 압송문제, 피로인(被虜人)의 송환문제 등 대일강화조약의 성립조건을 제시하였는데, 일본이 이를 이행했으므로 조약을 위한 안이 논의되었다.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쓰시마 도주에게 내리는 쌀은 모두 100석으로 한다. ② 쓰시마 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한다. ③ 관직을 제수받은 자는 1년에 한 차례씩 조선에 와야 한다. ④ 조선에 들어오는 모든 왜선은 쓰시마 도주의 허가장을 지녀야 한다. ⑤ 쓰시마 도주에서 도서(圖書)를 만들어 준다. ⑥ 허가장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정박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⑦ 왜관에 머무르는 기간을 쓰시마 도주의 특송선 110일, 세견선 85일, 그 밖에는 55일로 한다. 이 약조는 이전의 조약보다 일본측에 더욱 제약을 가한 것이었다.

광해군

[편집]

光海君 (1575

1641)

조선 제15대 왕(재위:1609

1623). 선조의 후궁 공빈(恭嬪) 김씨 소생. 선조에게 적자가 없어 1592년(선조 25:임진란 당년)에 세자로 봉함을 입었으나, 뒤에(선조 39) 왕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영창대군을 낳게 되어, 한때 왕위를 이을 가망이 없었으나 선조의 붕어로 즉위했다. 본디 천성이 명민하여 왜란 때 없어진 사고(史庫)의 정비, 선조실록(先祖實錄)의 간행 등 외에 국방에 주력했으나 대소북(大小北)의 싸움에 있어서 정치를 당쟁의 도구로 삼는 대북파의 말만 들어 많은 실정을 했다. 형제인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후, 다시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흥(延興) 부원군을 살해, 또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여 서인 일파의 반동 투쟁의 구실을 주고, 왕 15년 3월에는 김유·이귀 등의 난을 만나 폐위되었다. 당쟁의 희생이 된 후는, 강화(江華)·교동(喬洞)·제주도 등지로 쫓겨 다니다가 제주도에서 사망했다. 신세를 비관하여 읊은 시 한 수가 전해지고 있다.

영창대군

[편집]

永昌大君 (1601

1614)

조선 선조(宣祖)의 아들. 이름은 의. 인목왕후(仁穆王后) 소생. 선조의 아들 13명은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는데, 마지막으로 그는 정궁(正宮)의 소생이었다.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영의정(領議政) 유영경(柳永慶) 이하 몇몇 신하들과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몰래 의논하였다. 이 눈치를 안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세자를 바꿔서는 안 된다고 떠들다가 선조의 비위를 거슬려 무근한 소리를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길 떠나는 것을 차일피일 하던 차에 갑자기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은 당일로 왕위에 올라 이들도 다시 불러 등용하였다. 광해군은 이이첨·정인홍 등의 농간으로 형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서궁(西宮)에 잡아 가두고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반역죄로 몰아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사형에 처했을 때 그도 같은 죄목으로 관작(官爵)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강화(江華)에 끌려가 투옥된 뒤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의 손에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때 나이 겨우 14세였다.

강홍립

[편집]

姜弘立 (1560

1627)

조선의 무신. 호는 내촌(耐村), 본관은 진주(晋州). 선조 30년(1597) 문과에 급제한 이래 동왕 38년(1605)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같은 해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에 갔다. 광해군 1년(1608)에 보덕(輔德), 동왕 7년(1614)에 순검사(巡檢使)를 역임했다. 동왕 11년(1618) 명이 후금을 칠 때 명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원병을 보내게 되자 5도 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다. 그러나 전세가 후금에 유리해지자 후금에 항복했고, 정묘호란 때 후금을 선도하여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박탈당했다. 죽은 후 복관(復官)되었다.

김시헌

[편집]

金時獻 (?

1613)

조선의 무신.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1588년(선조 21) 문과에 급제, 1597년 동부승지(同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그 후 대사간·병조 참의·우승지·좌승지 등 역임, 1602년 소모관(召募官)으로 경상도에 갔다가 유생들로부터 호색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오위부사직(五緯副司直)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를 돌아보고 임진왜란 후의 민심을 순무(巡撫)하고 성책(城柵)의 수축을 명했으며, 이듬해 동지부사(同知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가 죽은 후 동치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선조실록(先祖實錄)』의 편찬에 참여, 1611년(광해군 3) 예조 참판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역학(易學)에 밝았다.

이이첨

[편집]

李爾瞻 (1560

1623)

조선의 문신. 자는 득여(得與),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 본관은 광주(廣州), 극돈(克墩)의 후손. 1582년(선조 15) 생원·진사에 합격, 광릉(光陵) 참봉을 지냈으며, 어머니에게 효도하여 고향에 효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1594년에 문과에 급제, 1608년 중시(重試)에 장원 합격했다. 선조가 만년에 영창(永昌)대군을 새로 세자로 세우려 할 때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이에 찬성하자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첨은 이 기회를 타서 정인홍(鄭仁弘)을 사주하여 영경을 무고하는 한편 광해군(光海君:東宮)이 세자로 적합함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이이첨·정인홍 등을 귀양보내라는 어명까지 내렸는데 선조가 별안간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는 바람에 죄가 풀렸다. 그리하여 되려 유영경이 귀양가서 사형되고 그 일당(小北人)이 크게 참화를 입었으며, 이첨은 예조 판서와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廣昌) 부원군에 피봉되어 과거(科擧)를 맡게 된 것을 기화로 그의 당파를 조정에 끌어들여 대대적으로 화를 꾸미게 되었다. 먼저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이어 선조의 총희(寵姬)를 죽이고 또 선조의 아들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폐비(廢妃)의 논을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도 죽이는 등 큰 옥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멸한다고 사칭하면서 개인 감정을 구사하여 생살폐치(生殺廢置)를 마음대로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광주(廣州) 이보현(利甫峴)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참형(斬刑)을 받았으며 아들 원엽(元燁)·홍엽(弘燁)·대엽(大燁) 등도 모두 사형되었다.

정엽

[편집]

鄭曄 (1563

1625)

조선의 정치가.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설촌(雪村), 시호는 문숙(文肅). 본관은 초계(草溪), 이산보(李山甫)의 사위.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의 문인. 1583년(선조 16) 문과(文科)에 급제, 승무원(承文院)에 등용되고, 1587년에 감찰(監察)·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내고, 1593년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왜군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 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수찬(修撰)·장령(掌令)·서천 군수(舒川郡守)를 역임, 1597년 정유재란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급고사(急告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사성(司成)이 되고,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거쳐 이듬해 응교(應敎)로 필선(弼善)을 겸임, 이어 승지·형조 참의(刑曹參議)·나주 목사(羅州牧使)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1602년(선조 35)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되었다. 1606년 성주(星州)·홍주(洪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 즉위 초 예조 참의(禮曹參議)·대사성(大司成)·승지(承旨)·판결사(判決使)·대사간·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도승지로 왕을 경연(經筵)에 자주 나가도록 했고, 1614년 공조 참판이 되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1년 만에 사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大司成) 겸 동지경연·원자사부(同知經筵元子師傅)가 되어 학제(學制)를 상정(詳定)했고, 여러 번 타직에 전임되었으나 언제나 대사성을 겸함으로써 이때부터 대사헌을 거쳐 좌참찬·좌부빈객(左副賓客) 등을 지냈다.

이괄의 난

[편집]

李适-亂

인조 2년(1624) 인조반정 때의 공신이었던 이괄이 일으킨 반란. 이괄은 반정공신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밖에 참여하지 못해 불만이 컸다. 그리하여 기익헌(奇益獻)·한명련(韓明璉)과 함께 인조 2년(1624) 반란을 일으켜 정부의 토벌군과 여러 곳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고 이괄은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장만(張晩) 휘하의 군과 관군의 반격으로 반란군은 격파당하고 이괄·한명련 등은 부하의 손에 살해당하였다. 이 난은 국내적인 동요 이외에도 정묘호란을 앞둔 후금과의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충신

[편집]

鄭忠信 (1576

1636)

조선의 무신.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광주(光州). 고려의 명장 지(地)의 후손. 1579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 그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의 주선으로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 이 해 겨울 무과(武科) 급제, 1621년(광해군 13) 만포 첨사로 국경을 경비했다. 1623년(인조 1) 안주 목사로 방어사(防禦使)를 겸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황주(黃州)와 서울 안현(鞍峴)에서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이 되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평안도 병마 절도사에 올라 영변대도호 부사(寧邊大都護府使)를 겸임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부원수(副元師)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淸)에 대한 세폐(歲幣)의 증가에 반대하여 후금과의 단교(斷交)를 위해 사신을 파견하게 되자 이를 반대하고 당진(唐津)에 유배, 이어 장연9長淵)에 이배(移配)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이듬해 포도대장(捕盜大將)·경상도 병마 절도사를 역임했다.

정묘호란

[편집]

丁卯胡亂

1627년(인조 5) 후금(後金:뒤의 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우리나라와 후금 사이의 싸움.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 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 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이며, 이로 말미암아 후금은 명(明)과는 불가능하였던 교역의 타개책을 우리나라에서 얻게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內政)과 외교에 그의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왜란(倭亂) 뒤의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호패(號牌)의 실시 등으로 눈부신 치적(治績)을 올리는 한편 밖으로는 여진(女眞)의 후금(後金)이 만주(滿洲)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처하여 현명한 외교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전란(戰亂)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피하였다. 명(明)이 후금을 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出兵)하였을 때는 그 요청에 못 이겨 강홍립(姜弘立)으로 하여금 1만여의 군대를 거느리고 원조케 하였으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는 밀지(密旨)를 주었다. 이에 명군(明君)이 불리하게 되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고, 이때문에 후금의 조선에 대한 보복적 행동은 없어서 양국간에 별 사단(事端)이 일어나지 않았다.한편 광해군은 국경의 경비에 유의하여 군비를 게을리하지 않아 성지(城池)와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이러한 광해군이 당쟁에 희생되어 폭군의 이름 아래 서인에 의하여 물러나게 되고 인조가 즉위하게 되자, 인조를 옹립한 서인은 국제문제에 있어서 광해군의 관망적(觀望的) 태도를 버리고 향명배금(向明排金)의 정책을 뚜렷이 내세웠으니 조선의 이러한 정책의 변화에 대하여 후금에서 신경을 날카롭게 한 것은 당연하다.본래 후금 태종(太宗:皇太極)은 즉위 전부터 우리나라에 대한 화평(和平)방침에 반대하여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여 왔는데 이는 자기 나라의 남진(南進)정책에 대한 배후의 우려를 제거하기 위함에서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재위하고 있는 동안은 조선에는 전의(戰意)가 없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인조가 즉위하여 향명배금의 정책을 표방하고, 게다가 명장 모문룡(毛文龍)이 철산(鐵山)의 가도(假島)에 주둔하고 요동(遼東)의 회복을 획책(劃策)하니 이것이 또 후금을 불안케 한 것이다. 이에 후금은 명을 치기 위해서는 우선 모문룡을 원조해 주며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는 조선을 쳐서 모문룡을 고립시킬 필요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이괄(李括)의 난이 일어났다.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殘黨)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과의 교전(交戰)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이에 후금 태종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1627년(인조 5) 정월 14일 장군 패륵(貝勒:왕자) 암니(阿敏)에게 군사 3만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假島)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 3만은 의주(義州)를 돌파하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하하여 안주(安州)·평양(平壤)을 거쳐 동월 25일에는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 이하 조신(朝臣)들은 강화로 피난하였으나,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하던 중, 후금에서도 강화(講和)의 의사를 표시했다. 후금은 조선보다는 명을 칠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강화에서도 주화론(主和論)이 채택되어, 적과의 교섭을 진행시키니 형제(兄弟)의 맹약(盟約)을 맺을 것. 화약(和約)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퇴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금(金)과 강화(講和)하여도 명에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화약이 성립되어 후금의 군대는 철퇴하였다. 이 화약은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패전국으로서는 최소의 부담이었으나, 후금은 전승국(戰勝國)으로서의 우월한 입장에서 강북철병(江北撤兵)의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서 금병(金兵) 1,000, 몽골병 2,000을, 진강(鎭江)에 금병 300, 몽골병 1,000을 주둔시켜 모문룡을 막게 하고, 중강개시(中江開市)의 교섭을 하여 이곳을 개시(開市), 많은 물자를 얻을 수 있게 되니, 그들의 소기(所期)의 목적은 거의 달성되었다.

병자호란

[편집]

丙子胡亂

1636년

1637년 청태종(淸太宗)의 침입으로 일어난 우리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싸움. 병자년(丙子年)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丁丑年)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우리나라와 후금(後金:後에 淸國)은 형제지국(兄弟之國)의 맹약(盟約)을 맺었으나, 그 후 후금은 명(明)을 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군량(軍糧)을 강요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의 압력을 가하고 또 1632년(인조 10)에는 형제관계를 고쳐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고 세폐(歲幣)를 증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후금의 강압적 정책은 우리나라에서의 배청열(排淸熱)을 한층 높게 하였다. 한편 후금의 태종(太宗)은 내몽골을 평정한 뒤 한(汗:왕호)의 칭호를 버리고 황제의 존호(尊號)를 사용하기 위하여 1636년(인조 14) 2월에 용골대(龍骨大)·마태부(馬太夫) 등을 보내어 여러 패륵(貝勒:滿洲·蒙古의 部族長)이 청태종이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정부도 이같이 할 것을 요구하였다.그러나 척화론(斥和論)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인견(引見)하지도 않고 국서(國書)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최명길(崔鳴吉) 같은 주화론자(主和論者)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의 기운으로 기울어졌으며, 드디어 8도에 선전교서(宣戰敎書)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敵意)를 보였다.동년 4월 황제의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淸)이라 고친 태종은 조선의 이러한 도전적 태도에 대하여 조선 원정군을 조직하여 침략준비를 서둘렀다.만주·몽골·한인(漢人)으로 조직된 10만 대군을 친히 거느리고 청태종은 드디어 동년 12월 2일 심양(瀋陽)을 출발, 9일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였다. 이때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적은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직행하여 진격하니 출발한 지 10여 일에 서울 근교에 육박하였다.조정에서는 바로 그 전일에야 비로소 청군내습(靑軍來襲)의 보에 접하고, 급히 회의를 한 후 자화론자(主和論者)인 이조판서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얻는 한편, 두 왕자(王子:鳳林大君·麟坪大君)를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과 남녀 귀족들을 우선 강화로 피난가게 하고 세자·백관(百官)을 친히 거느리고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길이 막혔기 때문에 길을 변경하여 소현세자와 정신(廷臣)을 동반하고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남한산성에서 인조는 급사(急使)를 명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하고 또 격문(檄文)을 8도에 발하였다. 그러나 16일에는 이미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이듬해 정월에는 청태종이 도착하여 북한강안(北漢江岸)에 진을 치고 전군(全軍)을 지휘하였다.산성은 완전히 고립상태에 빠지고, 성내의 군세(軍勢) 1만 2천여, 식량 1만 4천여 섬(石)으로 50여 일 간의 보급이 가능할 뿐이었다.포위된 지 45일에 식량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將兵)은 거의 기력을 잃고, 원군은 도중에서 모두 청군에게 격파당하였다. 이에 성안에서는 화전(和戰) 양론의 대결이 거듭되더니 척화파(斥和派) 김상헌(金尙憲) 등의 주장이 꺾이고,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이 채택되어 마침내 성문(城門)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정월 10일 이후 최명길 등이 누차 청군과 화평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청태종의 요구는 조선왕이 친히 성문 밖에 나와 항복하고,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3명을 인도(引渡)하면 화의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왕은 처음 이를 주저하였으나 강화 함락의 소식에 접하자 부득이 정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松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에게 항례(降禮)를 드리니, 근세사상 처음 보는 치욕이었다.이 결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화약(和約)이 체결되었다. ①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臣)의 예(禮)을 행할 것. ② 조선은 명(明)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冊印)을 헌납할 것. ③ 조선은 왕의 장자(長者)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④ 청나라가 명(明)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⑤ 내외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고 사호(私好)를 굳게 할 것. ⑥ 성곽의 증축·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⑦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20여 종의 물품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⑧ 성절(聖節)·정삭(正朔)·동지(冬至)·경조(慶弔)의 사신은 명나라 구례(舊例)를 따를 것. ⑨ 가도(假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⑩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⑪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할 것 등이었다.이리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 왕자가 인질로 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의 3학사(三學士)는 잡혀가 참형을 당하고, 김상헌(金尙憲)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생활을 하였다. 그 후 이 원한을 씻고자 북벌(北伐)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으니, 임경업(林慶業) 등이 명(明)과 연락하여 청을 치려다 실패한 일 등이 그것이다.그 후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孝宗:鳳林大君)은 심양에서 겪은 인질로서의 고초와 굴욕을 분히 여겨 즉위 후, 성지(城池)를 개수하고 군비를 갖추어 북벌계획을 비밀리에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양차(兩次:654:효종 5,1658:효종 9)에 걸쳐 청군의 나선(羅禪:Russia)정벌에 원병을 보냈으며, 매년 사절을 파견하고 공물을 바쳤다.

삼전도비

[편집]

三田渡碑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는 청(淸) 태종의 송덕비(頌德碑). 원명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고 하는 이 비는 인조가 청태종의 군문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자기의 공덕을 새기게 한 것이니, 이는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치욕의 비석이다. 일명 삼전도(三田渡)의욕비(辱碑)라고도 한다.

최명길

[편집]

崔鳴吉 (1586

1647)

조선의 문신.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全州). 영흥 부사(永興府使) 기남(起南)의 아들.1605년(선조 38)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 전적(田籍)으로 있다가 1614년 사건에 관련되어 파면되었다. 당시 광해군이 모후(母后)를 유폐(幽閉)하고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자 김유(金?)·이귀(李貴) 등과 대계(大計)를 세우고 드디어 1623년 인조를 영립(迎立)했으며, 그 공으로 참의(參議)에다 1등 공신이 되고 완성군(完城君)에 피봉되었다.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 화의가 끝나 호병(胡兵)들이 돌아간 후 많은 지탄을 받았으나 왕의 만류로 경기 관찰사에 나감으로써 일단락을 지었다. 다시 여러 내직에서 예조 판서를 거쳐 이조 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했다.1635년(인조 13) 호조 판서, 이듬해 병조 판서로 되었으나 병 때문에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나갔다.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청병(淸兵)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조정은 주전론 일색이었으나 명길 혼자만은 주화론(主和論)으로써 일관하더니 정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화의론을 좇는 자가 많아져 드디어 이듬해 청태종(淸太宗)에게 항복했다.

이때 우의정이 되어 위로는 왕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흩어진 정사(政事)를 잘 정리하여 내외가 점점 더 안정되고 좌의정에서 1638년 영의정에 이르렀다가 사망했다. 성리학(性理學)과 문장(文章)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는 동기창체(董基昌體)로 유명하였다.

소현세자

[편집]

昭顯世子 (1612

1645)

조선 인조의 맏아들, 휘는 조,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 소생, 빈은 민회빈(愍懷嬪). 인조 3년(1625)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묘·병자의 양(兩) 호란 때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청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서 몽골어를 배우고, 서역원정(西域遠征)에 출전하기도 했다. 아담 샬(Adam Schall)과 친하여 귀국할 때 과학서적·천주교서적 등을 가지고 왔으나 2개월 만에 병사했다.

삼학사

[편집]

三學士

병자호란 때 청에 항복을 반대하던 척화파의 강경론자 3인.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말하며 병자호란 때 청을 오랑캐라 하여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한 후 척화신(斥和臣)으로 심양(瀋陽)에 잡혀가 피살되었다.

임경업

[편집]

林慶業 (1594

1646)

조선의 장군.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는 충민(忠愍). 본관은 평택(平澤). 판서(判書) 정(整)의 후손. 충주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에 응모 출전하여 안현(鞍峴) 싸움에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훈(勳) 1등을 받고 공신이 되었다.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어 청나라 군사를 국경에서 막으려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金自點)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남한산성이 포위당하기 이르렀다. 1642년(인조 20) 청나라 군사가 금주(錦州)를 포위하자 경업은 명나라와 내통하여 청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탄로나자 명나라로 도피하였다. 청나라가 명나라의 난징(南京)을 함락하자 청나라에 잡혔다.청나라에서는 부귀를 약속하면서 달래었으나 굴하지 않으므로, 그 충(忠)을 가상히 여겨 죽이진 않고 옥에 가두었다. 때마침 대신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경업이 관련되어서 인조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본국으로 송환하였으며, 인조는 그가 모반에 관련이 없음을 알고 석방하려 했으나 반대파인 김자점의 모함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명나라를 받드는 사상이 강한 무장이었다.

김상헌

[편집]

金尙憲 (1570

1652)

조선 인조 때의 문신. 호는 청음(淸陰), 본관은 안동(安東). 선조 29년(1596)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纂)·교리(校理)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과 알력이 있어 좌천된 바 있고, 인조·효종대를 통해 대사간·대사헌·대제학·좌의정을 지냈다. 앞서 병자호란 때 화의를 극력 반대하였으며, 끝내 화의가 성립되자 심양에 잡혀가 3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다. 청에서도 그의 충절(忠節)에 감동되었다 하며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효종의 북벌계획

[편집]

孝宗-北伐計劃

조선 왕조 효종 때 청을 정벌하기 위한 계획. 병자호란이 치욕적인 성하(城下)의 맹(盟)으로 끝나고,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러한 민족적 굴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효종은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여 비밀리에 군대를 훈련시키고 성지(城池)를 개수했다. 또한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등에게 신무기를 만들게 하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하여 군비를 확충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청이 중국을 통일하고,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죽음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나선정벌

[편집]

羅禪征伐

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군을 친 싸움. 1654년(효종 5년) 변급(邊?), 호통(好通)에서 러시아군을 무찔렀다. 제2차로 신유(申瀏)가 이끄는 군사 200여 명을 보내 청군과 함께 헤이룽강(黑龍江)에서 러시아 함대 10여 척을 불태웠다. 당시 효종은 청을 무찌르기 위한 북벌계획을 추진 중이었는데 이 정벌이 조선의 군사력을 시험해 보고 북벌의 가능성을 알아본 원정이란 점에 의의가 있다.

남한산성

[편집]

南漢山城

선조 28년(1595)에 축조된 성(城).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廣州郡中部面)에 소재하고 있다. 병자호란 때 왕이 피난했지만 군량의 부족으로 결국 45일 만에 굴욕의 항복을 한 옛 전장이며, 백제의 왕도(王都)였다. 호란 후 봉암외성(峰巖外城)·포루(砲壘)·돈대(墩臺)·옹성(甕城) 등을 증축하였고, 문루(門樓)와 장대(將臺)를 축조하였다. 성내에는 숭렬전(崇烈殿)·연무관(演武館)·침과정(枕戈亭)이 있으며, 백제의 토기·와편(瓦片)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