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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임진왜란과 병자호란/양반관료의 재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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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관료의 재분열〔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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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나고 평화가 회복되자 다소 소강상태에 있던 당쟁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동서 분당(分黨)이 생긴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이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다가 동인은 또다시 남인(南人)과 북인의 대립으로 분열되었으며, 이 분열도 학파로 보면 이황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과의 대립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세력이 강해진 북인은 또다시 대북(大北)과 소북으로 갈라지더니 광해군 일대(一代)는 그를 추대한 대북이 정권을 전담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야(野)에 있던 서인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권을 담당하게 되는데, 서인에서 다시 훈서(勳西)·청서(淸西)로 나누어지는 등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효종 때 송시열이 등용되면서 서인의 각 분파는 그 밑에 통일되었다. 그 동안 남인은 오랫동안 야에서 집권할 기회를 노리다가 효종의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와 그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싸웠다. 그 결과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고, 남인은 또다시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되었다. 그 후에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기사환국(己巳換局) 등을 에워싸고 서인과 남인의 세력은 일진일퇴의 맹렬한 각축전을 전개하였다.갑술환국 이후로는 줄곧 서인의 세상이었으나, 서인은 다시 경신대출척의 결과로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그 싸움의 양상이 치열하였다. 서인 안에서의 노·소론 간의 싸움은 신임사화·이인좌의 난을 거치면서 대체로 노론 쪽으로 승세가 잡혀갔다. 당쟁이 성하면서 일어난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족보를 존중하게 된 것이다. 양반들은 종(縱)으로는 혈통 관계를 밝히고, 횡으로는 동족 관계를 기록한 족보를 다투어 만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족보를 외는 소위 보학(譜學)은 양반이 지녀야 할 필수 지식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상장제례(喪葬祭禮)에 관한 예학(禮學) 또한 양반의 이론적 학문으로 성립되었다. 조선 예학의 태두(泰斗)라고 할 수 있는 김장생이 의식적인 실천과 궁행(躬行)에 예학의 본지(本旨)가 있다 하여 그의 학문을 김집(金集)에게 계승시켜 이후 예학은 당파와 연결된 정쟁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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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福 (1556

1618)

조선의 정치가.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백사(白沙),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경주(慶州). 고려의 명상(名相) 제현(齊賢)의 후손, 참찬 몽량(夢亮)의 아들. 어려서 악동으로 골목대장 노릇을 하다가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이어 학문에 힘썼으며 16세에 어머니가 죽은 뒤 제복하고 학궁(學宮)에 들어가 학문이 더욱 이루어져 당대에 명성을 떨치자 대신 권철(權轍)의 손녀사위가 되었다.1580년(선조 13) 문과에 급제, 재학(才學)으로 추천을 받고 호당(湖堂)을 거쳐 옥당에 들어가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호조참의가 되어 전곡(錢穀)의 출납에 밝았으므로 판서 윤두수(尹斗壽)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의 호를 받았다. 당시 사화(士禍)가 일어나 대신 정철(鄭澈)이 수괴(首魁)에 몰리게 되었는데 친구들이 찾아가는 자가 없었으나 항복이 꺼림없이 방문했으며 승지(承旨) 때 정철의 죄안을 처리하는 데 태만하였다고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승지가 되어 왕을 모시고 천신만고 끝에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개성에 이르러 이조 참판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피봉되었으며 두 왕자를 호위하여 먼저 평양에 이르러 형조 판서에 특진하였다.조정에서는 왕에게 함흥(咸興)으로 피난하기를 청했을 때 함흥은 명나라에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寧邊)에 피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이덕형(李德馨)과 더불어 명나라에 속히 구원을 청하기를 주청하였다. 적세가 평양에 미치자 왕을 모시고 의주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들어온 황응양(黃應暘)에게 조선과 일본이 협력하여 중국을 치려 한다는 유언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고 구원의 대병이 이르게 하였다. 다섯 번 병조 판서를 지내어 군을 정비하였으며 1593년(선조 31) 우의정이 되어 부원군의 승작을 받고, 정응태(丁應泰)가 명나라에 무고한 사건에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더불어 명나라에 건너가 해명하여 명나라로 하여금 정응태를 파면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다. 영의정에 승진하여 호종(扈從)의 공 1등에 책록되었으며,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무고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자진하여 영의정 벼슬을 내놓았는데 예우(禮遇)는 그대로 받아 큰 일에는 왕이 자문을 받았다. 광해군 때 임해군(臨海君)을 변호하다가 정인홍 등의 탄핵을 받았으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원하려고 힘썼고, 폐모의 논이 일어나자 적극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에 귀양가 적소에서 사망했다. 후에 관작이 환급되고 포천(抱川)에 예장케 했고 북청과

포천의 선비들이 각각 사당을 세워 모셨으며 효종 때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였다. 천성이 효우돈목(孝友敦睦)하며, 젊어서 기생을 좋아했으나 끊은 후 다시는 성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가 있는 40년 동안 항상 당쟁(黨爭)에서 초연하려고 노력하였다.

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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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人

조선 때 사색(四色) 당파의 하나. 선조 24년(1591) 서인 정철이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으로 파직(罷職)되자 서인 배척에 온건했던 동인 중의 일파로서 학파로 보면 이황의 문인이 많았다. 초기에는 우성전(禹性傳)·유성룡(柳成龍)·이덕형(李德馨)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후에 허목(許穆)·허적(許積) 등이 영도하였다. 숙종 때 복상(服喪) 문제로 서인을 실각시켰으나 서인 배척 문제로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되었다.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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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人

조선 때 사색 당파의 하나. 서인 정철의 건저의사건을 전후하여 서인에 대하여 강경했던 동인 중의 일파로서, 학파로 보면 조식의 문인이 많았다. 이발(李潑)·정인홍(鄭仁弘)·정여립(鄭汝立)·이산해(李山海) 등이 일파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세력이 강해진 북인은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지며 광해군 때는 그를 추대한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대북은 다시 육북(肉北)·골북(骨北)·중북(中北)으로 나누어지며, 소북은 청소북(淸小北)·탁소북(濁小北)으로 분열된다.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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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時烈 (1607

1689)

조선의 학자·정치가. 자는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은진(恩津). 갑조(甲祚)의 셋째 아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로,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여 경릉 참봉(敬陵參奉)이 되었다. 이어서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스승이 되어 크게 출세할 인연이 맺어졌다. 병자호란 때는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고향에 돌아가서 나오지 않았다.1649년(효종 1) 장령(掌令)에 등용, 비로소 조정에 나갔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한때 고향에 돌아갔다가 다시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김자점(金自點)의 무리가 청(淸)나라에 무고, 효종이 새 사람을 등용하여 장차 청나라에 항거하려 한다고 하자, 청나라는 국경 지대에 병력을 집결하고 사신을 보내 추궁하였다. 이에 송시열은 또 사임하고 돌아갔다.1658년 다시 조정에 들어가 찬선(贊善)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청나라에 대해서 복수심이 불타던 효종은 그에게만은 복수의 계획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였다. 이듬해(1659) 봄 효종의 병이 위독하여 당시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더불어 그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려는 눈치였으나 두 사람이 병상에 들어갔을 땐 이미 왕은 붕어한 뒤였다. 효종의 장례 때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송시열의 주장대로 남인(南人) 윤휴(尹?)의 3년설을 물리치고 1년으로 낙착되었으나 그 후 두고두고 말썽이 되었다. 효종 다음의 현종(顯宗)도 그를 신임하여 숭록대부(崇祿大夫)에 특진시키고, 이조 판서에 판의금 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시켰다. 이어서 좌참찬(左參贊)으로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지었다. 이때 효종의 장례와 장지(葬地)를 에워싸고 말썽이 일어나 그는 사임하고 회덕(懷德)으로 돌아갔다.윤선도(尹善道) 등의 공격을 받은 것도 그 직후였다. 이 후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668년 우의정으로 취임, 좌의정 허적(許積)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 이어서 허적이 물러가자 좌의정에 승진하고, 그의 후임으로 김수항(金壽恒)이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돌아갈 때의 대왕대비 복상 문제와 장지 문제는 항상 말썽의 대상이 되어 벼슬길도 평탄치 못하였다. 마침내 현종이 돌아가고 숙종(肅宗) 때 이르러 덕원(德源)·웅천(熊川)·장기(長?)·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 나왔다. 이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 후 금강산 지방을 여행하고 사표를 낸 후로는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89년 왕세자 책봉 문제로 임금께 글을 올렸는데, 그 글 중에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어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모든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에 의론이 분분하여 마침내 제주(濟州)로 귀양보냈다. 다시 불러다가 심문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세하니 숙종은 또 이를 허락하였다. 붙들려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읍에 이르자 이미 사약(賜藥)이 내렸으므로 제자 권상하(權尙夏)·김만준(金萬埈)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5년 만에 조정에서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다. 그는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 귀양살이의 어려운 가운데서도 저술에 힘쓰고 학문에 열중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홍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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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命元 (1573

1623)

조선의 문신.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峰). 본관은 남양(南陽). 1579년(선조 30) 문과에 급제, 괴원(槐院)·옥당(玉堂)을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가 설서·사서에 옮겼으며, 헌납(獻納)으로 권행(權幸)을 비방하다가 몰려나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 3년 동안을 지내고 돌아와 춘관랑(春官郞)이 되었다. 이어 죽산(竹山) 부사, 정주(定主)·의주(義州)의 목사를 역임, 승지로 돌아왔다가 부모를 모시기 위해 광주(光州) 목사가 되어 치적이 나타났으므로 표창을 받았다. 또, 광해군의 금나라와의 수호 관계가 명나라에 발각되자 사신으로 건너가 이를 무마시키고 돌아왔으며, 금나라에서 누차 조선을 위협하는 데 대하여 조의가 분분하였으나 명원이 단연 배금(拜金)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 후 역도들이 서울 근방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자 명원이 기보(畿輔) 관찰사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그는 조정에 들어가 27년 동안 마음을 다하여 직책에 충실하였으며 위형(威形)을 쓰지 않고 공정하게 다스렸으므로 사람들이 다 경복하였다. 광해조에 권문세가들이 인척 관계를 맺기를 청하였으나 다 거절, 뭇사람의 격노를 받아도 추호도 움직이지 않아 세상에서 장덕군자(長的君子)라 일컬었다. 글은 양한(兩漢)을 주로 하고 시는 성당(盛唐)을 전공하였으며 당시 문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학행에 탄복하였다.

복상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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服喪問題

현종 때 조대비(趙大妃 仁祖의 繼后)의 상례(喪禮)에 대하여 2차에 걸쳐 일어난 남인(南人) 간의 싸움. 인조 이래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있던 남인은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659년(효종 10) 효종이 돌아가자 효종의 모후(母后) 조대비의 복상은 서인의 뜻을 따라 기년(朞年만 1년)으로 정하고, 곧 이어서 현종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이듬해인 1660년(현종 1) 3월 남인 허목(許穆) 등이 상소(上疏)하여 조대비의 복상에 대해 3년설을 주장하면서 들고 일어나 맹렬히 서인을 공격하여 잠잠하던 정계에 풍파를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은, 효종은 인조의 제2왕자(次嫡:鳳林大君)이므로 계모후(繼母后)인 조대비의 복상에 대해서는 기년설(朞年說:만 1년)이 옳다고 대항하였고, 남인 윤후 등은 또다시 이를 반박하여 효종은 당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장자(長子)나 다름 없으니 3년설이 옳은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끝내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아, 결국 기년설이 그대로 채택되고 서인은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제1차 예송(禮訟)이다. 그 후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妃) 인선대비(仁宣大妃:張氏)가 돌아가자,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에워싸고 또다시 서인·남인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서인은 대공설(大功說:趙大妃)의 복상을 서인의 주장대로 기년(朞年)으로 정해놓았는데, 이제 와서 서인의 대공(大功)으로 고친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부당한 일이라고 들고 일어나며, 전번에 정한대로 기년(朞年)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번에는 남인이 주장하는 기년설이 채용되어 남인이 다시 득세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제2차 예송이다.

김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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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時讓 (1581

1643)

조선의 공신.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경주. 1605년(선조 38) 문과에 급제, 1611년(광해군 3) 전라도 도사로 향시(鄕試)를 주관할 때 시제(詩題)에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문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種城)에 유배, 1616년 영해(寧海)에 이배(移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예조 좌랑(禮曹佐郞)·병조 정랑·수찬(修撰)·교리(敎理)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括)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을 겸임,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졍묘호란(丁卯胡亂) 후, 서북 지방의 경비가 중요시되자 평안도 관찰사로 발탁, 1631년(인조 9) 병조 판서, 4도의 관찰사 등을 역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선조실록(先祖實錄)』을 개수(改修)할 때 이에 참여했으나, 안질(眼疾)로 맹인이 되었으므로 중도에서 사직, 충주(忠州)에 내려가 있다가 사망했다. 전적(田籍)과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경신대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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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大黜陟

숙종 6년(1680)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일. 현종 15년(1674)의 복상 문제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전횡이 심하였고, 숙종으로부터도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유악사건(?幄事件) 남용은 왕으로 하여금 더욱 남인들을 꺼리게 하였다. 이때 서인 중 김석주(金錫胄) 등은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 등이 역모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이리하여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3형제와 허견은 물론, 허적과 윤휴도 살해되었고, 나머지 일파는 옥사·사사·유배되었다. 이로써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하였다.

기사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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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換局

소의(昭儀) 장씨(張氏:禧嬪) 소생의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西人)이 이를 지지한 남인(南人)에 의하여 패배당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 일명 기사사화라고도 한다.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가 왕자 균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이 반대하므로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왕자를 원자로 세우려 하니 서인들은 노·소론(老少論)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閔氏)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숙종은 1689년(숙종 15)에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은 두 번이나 상소를 하여 송나라의 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宗)을 낳았으나 후궁(後宮)의 아들이라 하여 번왕(藩王)에 책봉하였다가 적자(嫡子)가 없이 죽음에 태자로 책봉되어 신종의 뒤를 계승하였던 예를 들어 원자 책봉의 시기가 아님을 주장하였다. 숙종은 이미 원자의 명호가 결정되었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 하여 분하게 여기던 차,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이익수(李益壽)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반박하여 왕의 의견을 좇으니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제주도에 유배시킨 후 사사(賜死)하였다. 이 밖에 송시열의 의견을 따랐던 서인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 수명이 파직 유배되었다. 이 사건 후 남인 권대운(權大運) 등이 등용되었다. 이후 갑술옥사(甲戌獄事) 때까지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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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宗 (1688

1724)

조선의 제20대 왕(1720

1724). 숙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희빈 장씨이다. 3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송시열은 책봉을 반대하다 죽임을 당했다. 아들이 없기 때문에 후계자 책봉을 둘러싸고 노론·소론의 당쟁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갑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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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換局

숙종 20년(1694) 소론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의 폐비(廢妃)인 민씨의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의 민암(閔?)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화를 당한 사건. 숙종이 폐비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차 동왕 20년(1694) 김춘택 등이 폐비 복위운동을 꾀하였다. 민암 등 남인 일파는 이를 계기로 소론의 대두를 막으려고 했으나, 숙종은 오히려 민암을 사사하고 남인을 축출했다. 그 후 노·소론의 대립이 심해졌고, 이후는 줄곧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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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論

서인에서 갈라진 당파의 하나.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후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도 적소(謫所)에서 돌아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로 입조(入朝)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인 중 소장측에서는 송시열의 논의에 불만을 품는 자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동왕 8년(1682) 남인 제거를 꾀한 김익훈(金益勳)을 놓고 소장파가 그의 엄중 처벌을 주장한 데 대해 송시열 등은 그를 신구(伸救)하려 하였다. 동왕 9년(1683) 송시열이 효종의 묘(廟)를 세실(世室)로 하고 태조에게 시호를 추상(追上)하자는 제의를 하자, 그의 문인 윤증(尹拯)과의 불화까지 겹쳐 소장파는 소론을, 또한 노장파는 노론을 형성하였다.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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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論

서인에서 갈라진 당파의 하나, 서인 중에서 윤증(尹拯)을 옳게 여기는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론에는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박태보(朴泰輔)·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 등 대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소장이 많다.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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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譜

한 종족의 계보(系譜). 본래 족보는 중국에서 비롯한 것으로, 6조(六朝) 시대에 이르러 족보의 작성 및 보학(譜學)이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문화유보(文化柳譜)』라고 하나 현존하지 않으며, 문헌적으로 믿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성종 7년(1467)에 간행된 안동 권씨의 족보가 있다. 이와 같은 족보는 조선 왕조 계급사회의 산물로, 권·유씨 양 족보의 영향을 받아 권문(權門)·거족(巨族)이 다투어 족보의 간행에 종사하여 대가족제 사회의 문화적 유산이 되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이 성하면서 양반들의 혈통 및 동족 관계를 기록한 족보가 다투어 만들어져 양반의 신분 및 족당 관계를 밝혀 주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족보에는 가첩(家牒)·가승(家乘)·파보(派譜)·양세계보(養世系譜) 등이 있다.

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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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集 (1574

1656)

조선의 문신·학자. 호는 신독재(愼獨齋). 본관은 광산(光山). 18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 때 일시 은퇴했다. 인조반정 후 지평(持平)·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했고, 공서(功西)가 집권하자 퇴직했다. 효종이 즉위하자 청서(淸西)의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등용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대사헌·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을 계획했다. 그는 아버지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예학의 체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