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임진왜란과 병자호란/양반문화의 융성
양반문화의 융성〔槪說〕
[편집]되풀이되는 사화로 많은 학자들이 지방으로 내려가서 사색적이고 이론적인 학문의 연구와 후진 교육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의 비위에는 우주와 인간의 근본을 탐구하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자학과 같은 학문이 적합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일시에 주자학의 대가를 배출하여 그 융성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같은 주자학이라도 여기에는 두 가지 계통이 있었다. 그 하나는 주리파(主理派)요, 다른 하나는 주기파(主氣派)였다. 주리파의 선구자는 이언적(李彦迪)이며, 이를 대성한 이는 이황이었다.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서 주자학을 마음의 학문으로 심화하였다. 이황 이후 주리파는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 제자에 의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로서 계통을 이어 내려왔다. 주기파의 선구자는 서경덕이었으며, 그 뒤 기대승이 나서 이황과 논쟁을 폄에 이르러 주기파가 세를 떨쳤는데, 이를 대성한 이가 이이였다.본래 주기설은 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신비적인 이(理)보다는 물질적인 기(氣)에서 구하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이 주기파에서는 사물의 법칙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이 주기파는 이이의 학우인 송익필(宋翼弼), 그의 제자인 김장생 등 소위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의하여 계승되었다.한문학적인 경향이 짙은 경기체가(景幾體歌)나 악장(樂章)을 대신하여 조선 중기에는 가사(歌辭)가 크게 발달하였다. 가사를 대성한 이는 정철(鄭澈)이며, 그는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비롯하여 많은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또한 고려 말기 이래로 시조(時調)가 발생하더니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는 더욱 발전하여 조선 왕조 국문학의 대표적인 한 분야가 되었다. 조선 왕조의 시조문학은 박인량·신흠 등을 거쳐 윤선도에 이르러 대성되었다. 물론 이 밖에도 무수한 시조 작가들이 있었고, 그들이 읊은 제재(題材)도 갖가지였다. 그런 중에서 최대의 시조 작가 윤선도의 작품에는 자연에 대한 동경이 짙게 나타나 있다.
성리학의 발달
[편집]性理學-發達
새 왕조의 제도개혁과 관련하여 치인(治人)에 초점을 맞추어 수용되었던 성리학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걸쳐 훈척과 왕의 비리를 경험하면서 도덕적 자기완성을 목표로 하는 수기(修己)의 방향으로 이해가 바뀌어 갔다. 삼강오륜의 수신교과서인 『소학(小學)』이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 등 초기 사림에 의해서 크게 주목되고, 기묘사림이 이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것은 바로 그러한 추세를 말해준다. 『소학』과 더불어, 왕의 수신 교과서로 편찬된 것이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1568)와 이이(李珥)의 『성학집요(聖學輯要)』(1575)이며,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박세무(朴世茂)의 『동몽선습(童蒙先習)』과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이다. 특히 『성학집요』는 수신(修身)·제가(齊家)·위정(爲政)에 걸쳐 왕이 지켜야 할 왕도정치의 규범을 체계화한 것으로 성리학적 정치사상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명저다.성리학의 발달은 사림의 사회적 지위와 생활이 안정되어 가는 추세와 직접 관련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1543년(중종 38년)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이 국내에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된 것이 큰 자극제가 되었다. 성리학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희의 사상은 그 전에는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이해되었으나, 주희의 모든 저술이 소개된 것은 『주자대전』이 간행된 중종 말년 이후부터다.중종 말년에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도 주희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참고한 것이며, 기묘사림의 한 사람인 권벌(權?)은 1543년에 이미 『주자대전』을 교정하여 『주자대전고의』를 편찬했다. 그 다음 명종 때에는 『주자대전』의 주요 부분을 발췌·편집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는데, 이황이 1556년(명종 11)에 주희의 중요한 서찰을 뽑아 정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다음해에 호남의 기대승(奇大升)이 편찬한 『주자문록(朱子文錄)』은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주자서절요』는 일본에 전해져 일본 주자학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학자들이 큰 관심을 가진 문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였다. 도덕정치의 출발이 수기(修己)에 있는만큼 수기의 전제조건으로 인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제기된 까닭이다. 중국 성리학들은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우주자연과 인간본성을 설명했지만, 인간본성과 직접 관련된 사단(四端, 인·의·예·지)이나 칠정(七情, 희·노·애·락·애·오·욕)과 같은 심학(心學)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황·기대승·김인후·이항·노수신·이이·성혼 같은 학자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하는 가운데 인간본성에 대한 인식을 깊이 가질 수 있었다. 이는 동양철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다.16세기 중엽부터 활발한 철학논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성격이 다른 두 개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학파와 이이의 학설을 추종하는 기호학파가 그것이다.이황은 선배학자인 이언적(李彦迪)의 철학사상을 발전시켜 주리철학(主理哲學)을 성립시켰다. ‘이(理)’는 우주만물의 보편적 원리인 형이상(形而上)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사물현상인 형이하(形而下)의 ‘기(氣)’는 ‘이’의 발현이며, ‘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를 절대시하는 주리론은 현실보다 원칙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이런 입장에서 인간세계를 볼 때에는 인간의 내면적 수양, 즉 철저한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고, 도덕규범인 삼강오륜이나 그에 바탕을 둔 계급질서가 절대적인 명분으로 긍정된다. 이황의 학설은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오운(吳澐)·홍여하(洪汝河)·장현광(張顯光) 등 영남학인들과 일부 근경사림 사이에 추종을 얻었는데, 그의 학설은 주의 견해를 심학의 차원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이황을 ‘동방의 주자’라고도 불렀다.이황보다 35세 후배인 율곡(栗谷) 이이는 ‘이(理)’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물질적이고 경험적인 ‘기(氣)’의 작용에 따라 착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형이하(形而下)의 현실이 형이상(形而上)의 관념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형이하의 세계를 개혁해야 형이상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제도개혁사상으로 연결되었다. 이이가 『동호문답』을 비롯한 여러 저술과 상소문에 변법경장(變法更張)을 통한 개선책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그의 철학사상과도 관련이 있다.또한 이이는 주자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우리나라 왕도정치의 시발을 기자(箕子)로부터 설정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성리학을 토착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이(李珥)의 철학사상은 기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성혼(成渾)·정엽(鄭曄) 등이 유명하다.이황의 학설을 추종한 학자들이 초기의 남인(南人)을 형성했으나,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의 문인들로 구성된 북인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남인(南人)에 합류하여, 17세기 이후의 남인학풍은 지방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한편, 이이의 학풍을 따르는 학인들이 16세기 말에 서인을 구성했으나, 17세기 말에 서인이 노론(老論)·소론(小論)으로 갈라지면서 학풍도 달라지게 되고, 또 18세기에는 노론 안에서도 충청도의 ‘호파’와 서울의 ‘낙파’가 갈려 이른바 ‘호락시비(湖洛是非)’로 불리는 철학논쟁이 일어났다.16세기 철학사상에서 독창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사상가로 개성의 화담(花潭) 서경덕과 경상남도 덕천의 남명(南冥) 조식을 들 수 있다. 바닷가의 상업문화의 영향을 받은 두 사람의 사상은 내륙의 농업문화와 연결된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학풍을 보였다.가난한 농부집에서 태어난 중종 때의 학자 서경덕은 일평생 처사로 지내면서 독창적인 유기철학(唯氣哲學)을 수립했다. 그에 의하면, 우주자연은 미세한 입자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는 영원불멸하면서 사물현상을 낳는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그는 윤리적으로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유기론은 15세기 말의 김시습(金時習)을 거쳐 내려온 우리나라 도가(道家)의 학풍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임진강 부근의 학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하에서 박지화(朴枝華)·이지함(李之?)·허엽(許曄) 등이 배출되고, 이이의 주기철학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학인들이 도맥(道脈)을 형성하여 성리학을 비판하고 나섰다.지리산 부근의 덕천과 김해 바닷가에서 처사로 지낸 조식은 경(敬)과 의(義)를 근본으로 하는 실천적 학풍을 창도하고 도교에도 기울어져 서경덕과 상통하는 학풍을 이루었다. 이 두 사람의 문인이 이황 문인과 합세하여 동인을 형성했으나, 이황의 학풍보다 더 급진적인 성향을 가져 뒤에는 북인(北人)으로 갈라지게 된다.전라도지방에서는 나주의 기대승(奇大升, 高峰), 장흥의 김인후(金麟厚, 河西), 태인의 이항(李恒)이 성리학자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기대승은 이황과 8차례의 편지 왕래를 통해 4단과 7정에 관한 논변을 벌여 후세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한편, 16세기 후반에는 서경덕을 비롯한 개성문화가 서울로 남하하며 서울 부근에서 유교·불교·도교의 삼교일치(三敎一致)를 추구하면서 실용적인 잡술(雜術)에 관심을 갖고 현실을 급진적으로 개조하려는 이단적인 사상가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이지함·임제(林悌)·정렴(鄭▩)·정작(鄭?)·정여립 등은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이다.특히 선조 때의 토정(土亭) 이지함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유학과 더불어 수학·의약·점복·천문·지리 등 잡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이가 ‘기화이초(奇花異草)’라고 불렀다. 그는 탁행으로 천거되어 포천과 아산 현감도 지냈으나 서울 마포에 움막(土亭)을 짓고 살면서 직접 장사에도 종사하여 재리(財利)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유교
[편집]儒敎
공자(孔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 고대의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을 받드는 교. 일명 공교(孔敎)·공자교(孔子敎). 유교는 유학(儒學)·유학사상(儒學思想)이라 함과 대차 없는 것으로 종교는 아니다. 곧 인(仁)으로써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을 삼아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이룩함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정치학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수천년 동안 민족의 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연대는 문헌상 확실히 고증할 길이 없으나,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고 우리나라에 국자학(國子學)을 세운 것으로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유교가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고, 백제는 285년(고이왕 52)에 왕인(王仁)이 벌써 일본에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하였으며 신라는 비교적 늦어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건립하였다. 당시 유학의 목표는 첫째로 경전과 사기(史記)에 통달하여 정치나 법률의 제도를 잘 알며, 또 그것을 운용할 만한 관리가 되는 것이며, 둘째는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때의 유교는 내구적(內求的)이 아니고 외구적(外求的)이며,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수단을 위한 것이었다.삼국시대의 대표적 유가로는 신라의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인데, 설총은 방언(方言)으로서 구경(九經)을 해석하여 뒷사람을 훈도하였으며, 최치원은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고, 황소(黃巢)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高騎)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토황소격(討黃巢檄)」을 지어 천하에 문명을 떨쳤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건국 후 불교를 숭상하자 유학은 점점 쇠미하더니 제6대 성종에 이르러 국자감(國子監)을 설치,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두고 유학을 장려하였으나 사류(士類)는 모두 시부공령(詩賦功令)의 업에 힘쓸 뿐, 경학에 종사하는 자는 심히 적었다.제11대 문종 때에 이르러 최충(崔沖)이 구재(九齋)를 설치하고 후진을 가르쳐 유교가 크게 떨쳤다. 그러나 그 후 무인의 발호와 전란의 계속으로 유학이 다시 떨치지 못하더니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충렬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하고 돌아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게 하고 문묘(文廟)를 중수하게 하는 등 유학 부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우리나라 정주학(程朱學:性理學)의 수입은 안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문하(門下)에 백이정(白履正)·우탁(禹倬)·권부(權簿)가 나왔는데 백이정은 이 정주학을 연구하고, 우탁은 이때 들어온 정주(程朱)의 역전(易傳)을 연구, 고려에서 처음으로 역리(易理)의 학을 전포(傳布)하였으며, 권부는 『주자전서』의 간행을 건의하는 등 모두 정주학 진흥에 공로가 컸다.안향의 학문은 이제현(李劑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등에게 전승되었는데, 그 중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도덕과 경륜(經綸)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어 여조(麗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충신으로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리어진다. 그러나 현재 『포은집(圃隱集)』에는 약간의 시문(詩文)뿐 유학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한편 이색의 후배인 이숭인(李崇仁)도 정몽주와 함께 태학 교수로서 유학의 흥륭에 힘을 기울였으나 그는 유학자라기보다는 도리어 문학자 특히 시인으로 유명했다.이때 조선 초기로 넘어서면서 특히 경세(經世)의 견식(見識)과 정치의 수완을 겸비한 정도전(鄭道傳)은 조선 유교의 기초를 확립한 유학자로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이편(心氣理篇)』 등의 대논문을 발표하여 주자학의 입장에서 불교가 종교 및 도덕상으로 배척되지 않으면 안 될 까닭을 규명하는 동시에 유교의 진흥이야말로 국가백년대계(國家百年大計)의 지상이념(至上理念)임을 역설했다.정도전과 함께 조선 문교의 터를 개척한 권근(權近)도 또한 유학에 연구가 깊었으니 그의 유학상의 저술로서는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의 구결(口訣) 및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이 있고, 외에 정도전의 저술인 『심기이편』에 주(註)를 단 것이 있다.정몽주의 제자 길재(吉再)는 여말에 등제(登第)하였다가 왕조가 바뀌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절개를 지키며 후진 양성에 전력하니 그 문인에 김숙자(金淑滋)와 그 아들 김종직(金宗直)이 나와 조선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이었다.김종직의 문하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 유명하였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을 비롯, 그 문하인 전부가 화를 입었다. 김굉필의 문인에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이장곤(李長坤)·조광조(趙光祖) 등이 있어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갔다. 조광조는 중종(中宗)의 괴임을 뒷받침으로 지치(至治)주의와 왕도정치를 지나치게 서두르다가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간계(奸計)에 몰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몰락하였다.기묘사화 이후로 사류(士類)는 정계 진출을 단념하고 산림에 돌아와 학문에 전심하는 풍조가 일어나서 학문의 경향도 사색과 이론의 방면으로 일변, 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 등을 배출하였다. 서경덕은 일생을 학구와 사색으로만 보내어 그가 제창 관찰한 기일원론(氣一元論)은 가장 창의적인 철학의 하나라고 하며 그 주기(主氣)의 학설은 뒤에 이이(李珥)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언적은 다년 간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그 주리(主理)의 학설은 뒤에 이황(李滉)의 사상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이같이 그 경향은 다르나 하나 둘이 다 독특하게 정진(精進)하여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인도하게 되었다. 서경덕·이언적의 뒤를 이어 명종·선조시대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고, 이기심성(理氣心性)의 송학(宋學)이 크게 일어나 우리나라 유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도 이황과 이이가 가장 뛰어나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영남사람은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라 하고 기호(畿湖) 사람은 이이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하여 그 학풍이 후세 학자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쳐, 동서 분쟁은 이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이 있었다.이황은 성리학을 연구한 학자 가운데 그 깊은 뜻을 가장 완전히 이해하고 진전을 보인 첫 번째 유학자로 꾸준히 연구를 쌓아 정주학의 충실한 후계자가 되었다. 저서에는 『퇴계집(退溪集)』과 『주서절요(朱書節要)』 등이 있는데 모두 성학(性學)을 밝힌 대저이며 그 중에서도 성리의 본원을 규명한 학설로는 기대승(寄大升)과 더불어 논란을 벌인 사칠이기(四七理氣)의 설명이 그의 학문 경향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이황은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發)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發)이라 하였는데, 기대승은 이에 반하여 이발(理發) 기발(氣發)의 호발(互發)에 찬성하지 않고, 칠정 중에 사단이 이항(李恒)·조식(曹植)·김인후(金麟厚) 등이 있어 서로 사칠이기에 대하여 논란이 잦았다. 이황의 고제(高弟)로 허목(許穆)·이덕홍(李德弘)·정구(鄭逑)·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이 있었는데 대개가 이황의 설에 동조했다. 뒤에 두 번째로 이학(理學)에 정통한 유학자로 이이가 나타났는데 그는 총명하며 기상이 탕연(蕩然)하고 흉도(胸度)가 동활(洞豁)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포부를 가져 도학(道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經世家)로서도 혁혁한 공로를 남겼다. 이이도 이황과 같이 우주의 본체는 역시 이(理)·기(氣) 2원(二元)의 개념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하였다.그러나 이 이기는 공간적으로 서로 이합(離合)함이 없고, 시간적으로 선후가 없으며, 또 이(理)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氣)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 또는 형질(形質)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理)·기(氣)는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도 둘이라 하였다. 그리고 인심(人心)의 발에 2원(源)이 없고, 또 이기가 호발(互發)할 수 없음을 지적하여 이황의 설에 찬성하지 않고 이통기국(理通氣局)·기발이승(氣發理乘)의 설 곧 이기일원적 이원론(理氣一元的二元論)을 역설하여 선대 학자들이 발견치 못한 바를 언급함이 많았다. 이에 대하여 이황의 설을 지지하는 성혼(成渾)과의 논변은 마치 이황과 기대승과의 논란을 방불케 했다.그의 문인(門人)에 김장생(金長生)·정엽(鄭曄)·이귀(李貴)·조헌(趙憲)·황신(黃愼)·안방준(安邦俊) 등이 유명하였다. 이이·
성혼의 교우(敎友)로서 명성이 높은 송익필(宋翼弼)은 성리학에 밝고 예학(禮學)에 정박(精博)하여, 우리나라 예학의 태두(泰斗)라는 김장생은 이이의 학통을 이으면서도 그 예학은 송익필에 연원했다 한다. 이황·이이의 교우문인이 점차로 학파를 형성하여 가고 있을 무렵, 선조 8년에는 동인과 서인의 붕당(朋黨)이 마침내 대립을 나타내게 되어 이른바 당쟁이 항구화(恒久化)하게 되었다. 이황·조식의 계류는 대개 동인으로 이이·성혼의 계류는 대개 서인으로 가담하여 선비로서 이 두파의 어느 편에 들지 않는 이가 거의 없게 되었고, 학설상의 시비와 정치상의 서로 다른 견해, 지방별의 대립 등이 어울려 마침내 하나의 암이 되었으며, 당파는 정권을 잡으면 또 그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켜 수백 년 동안의 고질이 되고 말았다.이리하여 뒤에 김장생·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 등은 이이의 적전(嫡傳)으로 모두 기호(畿湖)의 서인이었고, 정경세(鄭經世)·이현일(李玄逸)·이상정(李象靖) 등은 이황에게서 본받아 논술하였으나 모두 영남의 남인이었으며, 이황의 학파에서 장현광(張顯光), 이이의 학파에서 송준길(宋逡吉)·김창협(金昌協) 등이 각각 양파를 절충하거나 타파의 학설에 가담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오히려 이례(異例)라고 할 것이다. 하여간 이황·이이 등 여러 선비가 성리학을 연찬한 후로 유교철학은 고도로 발달하고 많은 업적을 나타내어 국내적으로 유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영향을 미친바 크다.특히 이황의 학설은 일본의 야마자키를 위시한 일본 주자학파(朱子學派)에 많은 영향을 주어 우리나라 성리학이 동양사상에 차지한 위치는 실로 중요한 것이었다.그 후 유학은 진로를 바꾸어 예학 중심으로 변하여 예송(禮訟)문제를 자아냈고, 모화(募華)사상의 고취로 병자호란 때에 화(和)·전(戰) 양파로 갈려 삼학사(三學士)의 순절(殉節)을 야기한 반면, 유자의 거의 모두가 모화사상에 도취한 결과를 나타내었다. 더욱이 숙종·경종 연간의 당쟁 격심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노(老)·소(少) 분쟁의 요인이 되는 회니문제(懷尼問題) 등 자못 폐단이 많았다. 그래서 공맹(孔孟)의 왕도정신에 입각하여 우리의 실정을 연구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를 강구하며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술(術)에 힘쓰자는 실학파(實學派:또는 經濟學派)가 대두했다.
사서의 간행
[편집]史書-刊行
16세기에는 사림의 새로운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사서(史書)들이 개인적으로 편찬되어 주로 향촌 자제들을 위한 교재로 이용되었다. 박상(朴祥)의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유희령의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기묘사림의 한 사람인 박상은 원나라의 증선지가 지은 『십구사략(十九史略)』의 체제를 참고하여 『동국통감』을 압축하고, 이규보·이색·이승인 등 『동국통감』에서 비판되었던 인물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여 초기 영남사림들의 인물평가 기준을 바꿔놓았다. 이 책은 뒤에 서인들 사이에 많이 읽혀지고 중국에까지 소개되어 『조선사략』으로 간행되었다.유희령(柳希玲)은 을사사화 때 윤임파 사림의 한 사람으로 단군조선을 상세히 다루고, 삼한(三韓)의 위치를 최치원설에 따라 새로 비교하여 정하는 한편 고구려를 삼국의 첫머리에 서술하는 등 북방계 고대국가의 문화전통을 재평가하는 특이한 역사체계를 구성했다.한편, 16세기 사림은 왕도정치에 대한 숭상과 관련하여 기자(箕子)의 행적을 재평가하고, 우리나라 왕도정치의 뿌리를 기자로부터 찾았다. 1580년(선조 13년)에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써서 기자를 우리나라 최초의 성인으로 정립시켜 놓았는데, 이는 성리학이 16세기 말에 토착화되는 사상계의 추세와 관련된 역사의식의 변화이다.
어문학
[편집]語文學
16세기에는 문학창작 활동이 향촌 지식인에까지 확대되고, 향촌 아동들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는 추세에 따라 어학에 있어서도 새로운 진전이 있었다.중종 때 역관(譯官) 출신 학자인 최세진(崔世珍, 괴산인)은 중국어와 이문(吏文, 외교문서용 한문)에 능통하여 어린이들의 한자 학습 교재로 『훈몽자회(訓蒙字會)』(1527년)를 써서 당시 통용되던 한자의 음(音)과 뜻을 우리말로 기록했다. 그 전에는 『천자문』과 『유합(類合)』을 통해 한자를 배웠는데, 내용이 너무 어렵고 추상적인 것이 많아 일상생활 주변의 글자 3,360자를 새로 뽑아 싣고, 범례에서 국문자에 대한 설명을 실어 훈민정음을 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또 외교문서 작성 참고서로서 『이문집람(吏文輯覽)』을 썼고, 몽골어 학습 교재로서 『노걸대(老乞大)』, 중국어 학습 교재로서 『박통사(朴通事)』 등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이 밖에도 한자의 중국음을 고(古)·금(今)·정(正)·속(俗)으로 나누어 우리말로 기록한 『사성통해(四聲通解)』는 신숙주의 『사성통고』를 증보한 것으로 음운학과 국문학 발전에 기여하였다.선조초의 예천학자 권문해(權文海)는 단군 이래의 사실(史實)·인물·지리·문학·예술 등을 총망라, 운자순(韻字順)으로 배열한 고사사전을 편찬하여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20권)이라 했다. 이 책은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랜 사전이며, 조선후기에 유행한 백과사전의 효시를 이룬다. 16세기의 문학은 사림이 처한 처지와 지방적 전통의 차이에서 여러 갈래 조류가 나타났다. 대체로 기호지방 출신의 사림이나 훈신들 가운데 한시·가사·시조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이가 많았다. 중종 때의 박상과 남곤·박은(朴誾)·이행, 명종·선조 때의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 등은 예리한 비판정신은 없었으나 고답적이고 격조 있는 시를 잘 써서 문명을 날렸으며, 선조 때의 담양인 송순(宋純)과 김인후·기대승의 문인인 정철(鄭澈)은 국문으로 가사를 지어 국문학의 새 경지를 열었다. 특히 정철은 강원도에서 관찰사를 지내면서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8경의 아름다움을 풍부한 우리말의 어휘를 구사하여 자랑스럽게 노래한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썼으며, 왕에 대한 충성심을 담은 「사미인곡(思美人曲)」 같은 것이 그것이다.16세기 문학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관료와 사림을 다 함께 비판하고 나선 이른바 ‘방외인(方外人)’의 문학이다. 이들은 체제 밖에서 방랑하면서 기이한 행적을 남기고, 대체로 도가의 선술(仙術)이나 민간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체제비판적인 시나 소설을 즐겨 썼다. 이미 15세기 말 김시습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한 방외인 문학은 16세기에 들어서자 홍유손(洪裕孫)·전우치(田禹治)·정희량(鄭希良)·정렴·정작·양사언(楊士彦)·어무적(魚無迹)·서기(徐起)·임제(林悌)·어숙권(魚叔權) 등이 나오면서 더 한층 이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아전 출신의 홍유손은 무오사화 때 화를 입고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나서 종적을 감추었는데, 단군·기자·영랑으로 이어지는 고유전통을 노래하는 시를 짓고 단군을 ‘단제(檀帝)’로 높여 부르기도 하였다.개성 출신의 기인 전우치(田禹治)는 「전우치전」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유명하거니와, 신라의 네 신선이 놀았다고 전해지는 강원도 고성의 삼일포(三日浦)의 선경을 시로 읋었다.정희량도 무오사화 때 귀양갔다가 풀려난 후 행적이 묘연한 기인인데 「혼돈주가(混沌酒家)」 등 무위자연의 도가 세계를 희망하는 시를 많이 썼다. 그는 임꺽정의 스승이라는 설도 당시에 퍼졌다. 정렴과 정작 형제는 아버지 정순붕이 명종 때 권신으로 악명을 얻은 것에 반발하여 도가(道家)에 귀의했는데, 두 사람의 시문집인 『북창고옥문집(北窓古玉文集)』은 조선후기 도가들 사이에 삼교일치의 사상으로서 추앙을 받았다. 금강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양사언의 시는 ‘선가(仙家)의 신품(神品)’이라고 알려져 있다.어무적은 종을 어머니로 하여 양반의 서얼로 태어나, 연산군 시대 가난한 농민의 고통을 시로 읊은 「유민탄(流民嘆)」, 매화나무에까지 세금을 매긴 수령의 횡포를 풍자한 「작매부」 등을 남겼다. 서기는 종으로서 학문에 힘써 이지함 등 명사들과 교류했는데, 선비들의 마음을 짐승에 비유한 「탄시(歎時)」 등의 시를 남겼다.임제는 속리산에 은거하던 성운(成運)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문과에도 급제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방랑하면서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서옥설」 등의 소설과 천여 편의 시를 남겼다. 「원생몽유록」은 요·순·우·탕·무왕 등 중국의 성인을 만고의 죄인으로 몰아 성리학자들의 명분을 공박한 소설이며, 「수성지」는 천군(天君)을 주인공으로 하여 왕도정치의 허무함을 그려낸 소설이다. 「서옥설」은 탐욕스런 관리 등을 늙은 쥐에 비유하여 풍자한 우화소설이다. 임제는 죽을 때 “사해제국이 황제를 칭해 보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우리나라만이 못해 보았다. 이런 나라에 태어났다가 죽어 가는 데 슬퍼할 것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자손들에게 곡(哭)을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해학 속에는 성리학자들의 사대명분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져 있다.한편, 서얼 출신의 어숙권은 「패관잡기(稗官雜記)」를 지어 문벌제도와 적서차별의 폐단을 그려냈다. 이달은 관기(官妓)의 몸에서 태어나 천덕꾸러기로 일생을 마친 삼당시인의 대표자로서 대표작 「만랑무가(漫浪舞歌)」는 신선의 세계를 향해서 칼춤을 추는 한 노인의 거동을 비상한 상상력과 벅찬 감격으로 묘사하여 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의지를 예술적으로 잘 표현했다.서얼이나 노비와 같은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이 문학창작에 나서는 풍조에 따라 규방 안에 갇혀 있는 부녀자들 사이에서도 훌륭한 작가들이 배출되었다.서울과 인근지역의 이옥봉(李玉峰)·황진이(黃眞伊)·이계랑(李桂娘)·허난설헌(許蘭雪軒) 그리고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은 대표적 여류작가이다. 특히 개성의 기녀(妓女)인 황진이는 개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박연(朴淵)」, 그리고 소세양(蘇世讓)과의 이별을 노래한 「청산리 벽계수」 등 정감어린 시조를 많이 지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옥봉은 양반의 첩으로서, 이계랑은 부안 기생으로서, 허난설헌은 허엽의 딸이자 허균의 누나로서, 신사임당은 이이의 어머니로서 각각 특이한 가정배경을 가지고 여성 특유의 모성애나 애정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경우에는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는 도가적인 사회성을 띤 작품도 적지 않다. 16세기 문학에서 나타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새로운 문학경향은 이미 서울지방의 성리학이 차츰 변용되면서 조선후기 실학이 발생하게 되는 사상적 토대가 잡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과 공예
[편집]-工藝
16세기의 그림은 15세기 그림의 주류를 이루었던 안견류의 화풍을 계승한 이흥효·이징·이정, 명나라 절파(저장 지방) 화풍의 영향을 받아 강한 필치의 그림을 즐겨 그린 김제·이경윤 등 선비화가, 그리고 포도·대나무·매화에 능한 황집중·이계우·이정·어몽룡 등 다양한 흐름이 있었다. 이흥효(李興孝)는 이상좌(李上佐)의 아들로서 명종 때 화원으로 산수를 잘 그렸으며, 이징(李澄)은 종실 출신인 이경윤(李慶胤)의 서자로 인조 때까지 활약했는데 역시 산수화에 능했다. 이정(李禎)은 이상좌의 손자이며, 이흥효의 조카로서 30세에 요절했으나 화원집안의 가풍을 이어받아 산수에 능했다.김안로의 아들 김제(金?)는 명종·선조 때 도화서 책임을 맡은 관료화가로서 그 집안에서 김식(증손)·김집(증손) 등 뛰어난 화가가 배출되었다. 그의 대표적 그림으로는 「당나귀를 끄는 어린이」(동자견로도, 호암미술관)·「한림제설도」(미국) 등이 있는데 힘있는 필치가 인상적이다. 이경윤은 산수와 인물에 뛰어나 「산수인물도」와 「탁족도」(국립중앙박물관) 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그림은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는 도가적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황집중(黃執中)과 이계호(李繼祜)는 선비화가로서 포도 그림에 능했고, 이정(李霆)은 대나무 그림에 탁월했으며, 어몽룡(魚夢龍)은 매화를 잘 그려, 세상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삼절(三絶)’이라고 칭송했다, 이들의 그림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림처럼 화려한 묘사에 힘쓰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힘있는 필치로 대나무나 포도, 매화에서 고상한 정서를 구한 것이 특색이다. 16세기에 들어가서 이와 같이 그림이 다양해진 것은 이 시기의 사상경향이 복잡하게 분화되는 추세와 관련이 있다.건축에 있어서는 서원의 설립추세와 관련하여 특색 있는 서원건축양식이 수립되었다. 대체로 서원은 향교와 마찬가지로 강당을 중앙에 두고, 남쪽 좌우에 기숙사인 재(齋)를 배치하며, 강당 북쪽에 선배유학자의 신위(神位)를 모시는 사당(祠堂)을 두고 사방을 담으로 두른다. 서원은 절간처럼 규모가 크지 않으며, 화려함을 피해 단청을 쓰지 않았다. 마을 부근의 한적한 곳에 야산과 하천을 끼고 세워져 학생들의 교통에도 편하고 정서함양에 도움을 주도록 배려한 것이 특색이다.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이언적),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등은 서원건축의 대표로 꼽힌다. 한편, 지방 선비들의 정취를 담고 있는 대표적 정원으로는 조광조의 문인 양산보(梁山甫)가 전라도 담양에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켜 조성한 소쇄원(瀟灑園)이 유명하다.
이언적
[편집]李彦迪 (1491
1553)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현신(賢臣). 호는 회재(晦齋), 본관은 여주(驪州). 중종 9년(1514) 문과에 급제한 이래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당시 김안로(金安老)의 거용(擧用) 문제에 극력 반대하다가 모략으로 물러났으며, 그 후 직제학을 역임하고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어 경내(境內)를 평안케 했다. 명종 2년(1547) 양재역(良才驛)의 병서 사건에 연좌되어 강계(江界)로 귀양가서 죽었다. 그는 조선 왕조 전기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주리(主理)의 학설은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황
[편집]李滉 (1501
1570)
조선의 대학자.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도수·퇴도(退陶), 시호는 문순(文純). 본관은 진보(眞寶). 진사(進士) 식(埴)의 아들. 경북 예안(禮安)에서 출생하여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숙부 우(?)에게 양육되었다. 1528년(중종 23)에 진사에 합격하고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문과에 급제, 정자(正字)·박사(博士)·전적(典籍)·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1539년(중종 34)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다시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내고 1545년(인종 1) 전한(典翰)이 되었다.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연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비록 정부의 부름이 있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外職)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丹陽)·풍기(豊基)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며 1552년(명종 7) 다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校理)·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공조 참판(工曹參判)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1555년(명종 10)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1555년에는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지어 학문과 사색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이(李珥)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畵工)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玩賞)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그의 사상은 50
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編著)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된 것으로 『계몽전의(啓蒙傳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인심경석의(人心經釋疑)』 및 기대승(奇大升)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四端七情分理氣書)』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1568년(선조 1) 대제학(大提學)·판중추 겸 지경연(判中樞兼知經筵)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으니 이는 국은(國恩)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그가 죽자 선조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文廟)에 모셨다. 이황은 이이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사상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적 사상을 계승하여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演繹的)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理)와 기(氣)의 이원적(二元的)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可善可惡)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心性)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으로 이후 우리나라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知)와 행(行)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誠)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敬)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考證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구
[편집]鄭逑 (1543
1620)
조선의 문신·학자.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淸州).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조식(曺植)·이황(李滉)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선조 6년(1573)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통천군수(通川郡守)·우승지(右承旨)·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 1년(1608)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계축옥사(癸丑獄事)가일어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고, 향리에서 유생들을 가르쳤다. 경학·산수·의약·병진(兵陣)에 정통했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서경덕
[편집]徐敬德 (1489
1546)
조선 중종 때 주기파(主氣派)의 거유(巨儒).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 개성 출신. 18세 때 『대학(大學)』을 배우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그 원리에 의거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 중종 14년(1519)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도학(道學)에만 전념하였다. 그 후에도 생원시험에 장원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일생을 처사(處士)로서 지냈다. 화담의 학문적 계통은 조선 왕조를 풍미하였던 정주학(程朱學)이 아니요, 노장(老莊)의 색채가 짙었던 송대의 주염계(周濂溪)·소강절(邵康節) 등의 철학사상을 지양·화합하여 전인미발(前人未發)의 새로운 기(氣) 일원론의 학설을 창조한 것이었다. 화담의 제자로서 허엽(許曄)·박민헌(朴民獻)·이지함(李之?) 등이 있다. 그의 주기론은 이이의 대에 이르러 대성되었다.
기대승
[편집]奇大升 (1527
1572)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 호는 고봉(高峰), 본관은 행주(幸州). 명종 13년(1558) 문과에 급제한 후 선조 때에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그러나 뜻이 맞지 않아 사임하고 병을 얻어 귀향하다가 객사(客死)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학으로 능히 고금에 통하였고, 특히 이퇴계와 성리학을 문답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편지 왕복만도 8년을 계속했다. 이러한 이황과의 논쟁 이후 주기파가 세력을 떨치는 계기가 형성되었다.
이이
[편집]李珥 (1536
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 자는 숙헌(淑獻), 호는 율곡(栗谷), 아명(兒名)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덕수(德水). 강릉 출신. 강평공(康平公) 명신(明晨)의 5대 손.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 16세에 어머니를 잃고 세상의 허무를 통탄하여 3년상(喪)이 지난 1554년(명종 9)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1년 만에 집에 돌아와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몰두, 1558년(명종 13)에 당시 이름을 떨치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니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그해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고 이를 전후하여 과거 때마다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란 칭송을 받았다.1564년(명종 19) 호조좌랑(戶曹佐郞)에 된 것을
시초로 관계에 나서서 1568년(선조 1)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1570년(선조 3)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이듬해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淸州牧師)가 되었으나 학문 연구를 위하여 다시 사직하고 파주(坡州)에 은퇴, 1574년(선조 7)에는 또 조정의 요구로 황해감사(黃海監司)로 약 반년 간 재직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을 왕복하면서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右贊成)·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583년(선조 16)에는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당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그는 보기 드문 천재로서 성격과 태도가 이황과는 달리 기상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학문에 있어서도 분석적인 해석보다는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 있어서도 인간심리의 근본이 이와 기의 두 가지 근원이 있지 않고 일원적(一元的)이라 하여 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서경덕(徐敬德)과 이황의 설을 절충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朱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輕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작인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 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時務)를 논한 명저로 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堯舜)시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율곡은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대동법(大同法)의 실시와 사창(社倉)의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사회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藥)』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동거계사(同居戒辭)』 『학교모범(學敎模範)』 『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약속(約束)』 『문헌서원학규(文獻書院學規)』 등의 규례를 많이 만들었다.
그는 제자들에 의하여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죽은 후 1682년(숙종 8)에는 문묘에 모셨고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다.
김장생
[편집]金長生 (1548
1631)
조선 중기의 학자. 선조 11년(1578)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른 때부터 연산(連山)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에 전심할 때까지 정산현감(定山縣監)·호조정랑(戶曹正郞)·남양부사(南陽府使)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5년(1627) 정묘호란 때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군량미 조달에 힘쓰며 청과의 화의에 반대했다. 그 후부터는 향리에서 교육에 전심했다. 그는 송익필의 문하에서 예학을 전수받고, 이를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정철
[편집]鄭澈 (1536
1593)
조선의 정치가·시인. 자는 계함(季涵), 시호는 문청(文淸). 본관은 연일(延日)·판관(判官) 유침(惟?)의 아들.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隣厚)·양응정(梁應鼎)의 문인, 어려서 인종의 귀인(貴人)인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때문에 궁중에 출입, 어린 경원대군(慶原大君:明宗)과 친숙해졌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一族)으로서 아버지가 유배(流配) 당할 때 배소(配所)에 따라다녔다.1551년(명종 6) 특사되어 온 가족이 고향인 전라도 창평(昌平)으로 이주, 여기서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어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하는 동안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碩學)들에게 사사(師事),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우했다. 1561년(명종 16) 진사시(進士試)에, 다음해 문과에 각각 장원, 지평(持平)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68년(선조 1) 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고 1575년(선조 8)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8년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기용되고, 사간(史諫)·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승지(承旨)에 올랐다.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 그 후 3년 동안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지방 장관으로서보다는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그의 천재적 재질을 나타낸 작품을 썼다. 그의 최초의 가사(歌辭) 「관동별곡(關東別曲)」은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두루 유람하면서 산수(山水)를 노래하고 또한 고사(故事)·풍속까지 삽입한 것이며, 「훈민가(訓民歌)」 16수는 백성을 교화(敎化)함에 있어 포고문이나 유시문을 대신하여 시조(時調)의 형식을 빌어 지은 것이다.1583년(선조 16) 예조 참판이 되고, 이어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 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논척(論斥)으로 다음해 사직,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가사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謀反事件)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들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1591년 건저 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때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 진주(晉州)로 유배,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되었다.1592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 일본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충청·전라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당대 가사 문학(歌辭文學)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더불어 한국 시가사상(詩歌史上)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사망 뒤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609년(광해군 1) 신원(伸寃)이 되고 1623년(인조 1)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관동별곡
[편집]關東別曲
조선의 선조 때 정철(鄭澈)이 지은 가사. 1585년(선조 18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동팔경과 해·내·외금강 등 절승지를 유람하며 읊은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그 구상·문장이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을 이루는 명작으로, 『송강가사』에 실려 있다.
박인로
[편집]朴仁老 (1561
1642)
조선의 문인.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盧溪)·무하옹(無何翁). 본관은 안동(安東). 영천(永川) 출생. 어려서부터 시명(詩名)이 있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종군, 1598년 왜군이 퇴각할 당시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태평사(太平司)』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 수문장(守門將)·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이어 조라포 수군만호(助羅浦水軍萬戶)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뒤에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심하여 많은 걸작을 남겼다. 1630년(인조 8) 노인직(老人職)으로 용양위 부호군(龍?衛副護軍)이 되었다. 도학(道學)과 조국애(祖國愛)·자연애(自然愛)를 사상적 바탕으로 천재적인 창작력을 발휘하여 전쟁 중에서도 시정(詩情)과 우애가 넘치는 작품을 썼으며, 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서 화려 웅장한 시풍을 이룩했다. 송강(松江) 정철(鄭撤)을 계승하여 가사문학(歌辭文學)을 발전시킨 데 공로가 있으며 시조 60여 수를 남기고 있다.
윤선도
[편집]尹善道 (1587
1671)
조선 왕조 최대의 시조 작가. 호는 고산(孤山), 본관은 해남(海南). 광해군 4년(1612) 진사가 된 이래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공조좌랑(工曹佐郞)·예조정랑(禮曹正郞)·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하는 동안 남인의 거두로서 치열한 당쟁 속에 휘말려 일생을 거의 벽지 유배소에서 보냈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함께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는 것이었다. 작품으로는 「산중신곡(山中新曲)」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등이 있으며, 작품집에는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허균
[편집]許均 (1569
1618)
조선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소설가.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 본관은 양천(陽川). 선조 27년(1594) 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전적·삼척 부사 등을 역임했으나 숭불(崇佛)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광해군 1년(1609) 형조 참의가 되고, 다음해 명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동왕 5년(1613)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피화(避禍)하였다가 이듬해 천추사(千秋使)로 명에 다녀왔다.동왕 9년(1617)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大北派)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나 능지처참되었다. 시문에 뛰어난 그는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동생이며 그가 지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대표적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