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임진왜란과 병자호란/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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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槪說〕[편집]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일본과의 싸움. 임진년(壬辰年)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하며 특히 제2차 침입을 독립하여 말할 때는 정유재란이라 일컫는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이라 부른다.

배경[편집]

조선은 초기부터 외국의 군사적인 합의기관을 설치, 이에 대비시켰으나 선조 때에 접어들면서 지배계급은 당파싸움을 둘러싸고 분열되어 정치를 돌보지 않아 사회의 기강은 해이해지고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방정책이 확립되지 않았다. 이이(李珥) 같은 사람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여 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나 오히려 배척당하는 실정에 있었다.이와 같이 조선에서는 안일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었다. 즉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유럽상인들이 들어와 신흥상업도시(新興商業都市)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기에 노력하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일본은 오랫동안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상업세력의 억제를 위하여 대륙침략을 꿈꾸게 되었다.또한 쓰시마주(對馬島主) 소오(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의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했는데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明)을 침공하자는 데에 있었다. 이에 쓰시마주는 일본과 수호를 하고 통신사(通信士)를 일본에 보낼 것을 요구해 오니 조선은 비로소 일본 국내 정세의 변천을 알게 되었으나 그의 서신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어 이를 거절하였다. 도요토미는 재차 쓰시마주를 통하여 교섭을 청하고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침략할 뜻을 나타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선조 23)에 보빙(報聘)을 겸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허성(許筬)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보냈다.이듬해 3월 통신사편에 보내온 도요토미의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자가 있어 그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김성일은 이에 반대하여 그러한 정상이 없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조신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김성일의 의견을 좇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築城術)·해운술(海運術)을 정비하고 특히 유럽에서 전래된 보고와 빈번한 일본 사신의 왕래로 사태를 짐작하고 대책을 강구, 김수(金?)·이광(李光)·윤선각(尹先覺) 등으로 무기를 정비, 성지(城池)를 수축하게 하고 신립(申砬)·이일(李鎰)로 하여금 변비(邊備)를 순시케 하여 요충지(要衝地)인 영남지방에 많은 힘을 기울였으나 별로 성과가 없었고 다만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戰備)를 갖추고 있었다.

경과[편집]

도요토미는 교섭이 결렬되자 곧 원정군을 편성, 1592년(선조 25)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범케 하였다. 4월 14일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뒤따라 들어온 가토·구로다(黑田長致)·시마즈(島津義弘)·고바야가와 등과 합세, 삼로(三路)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고니시를 대장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가 인솔하여 울산·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 서울로 진군하였으며, 구로다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상하였다.한편 구키·도오도오가 거느린 9천여 명의 수군(水軍)은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케 하였다. 왜병침입의 급보를 들은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都巡邊使),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일본군의 진로를 막게 하였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대패하였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背水)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다.신립의 패보는 서울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서울을 떠나 개성·평양방면으로 향하고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는 이미 민심이 정부에서 이반되어 모병에 응하는 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선조가 피난가는 길을 막고 욕하는 자까지 있었다. 왕이 서울을 나왔을 때 노비들은 그의 문적(文籍)을 알고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를 불질렀고 이 때문에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고니시의 군대는 충주·여주·양근을 거쳐 5월 2일에는 서울을 함락하여 본거(本據)로 하고 다시 2군으로 나누어 가토는 함경도로, 고니시는 평안도로 북상진군하여 평양을 위협하였다.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하고 고니시군은 6월에 평양을 점령하였고 가토는 함경도로 북진하여

해상방면에 있어서는 처음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패전하였다. 이로 인해 적을 상륙시키고 많은 함선을 상실하였으나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의 등장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적은 해상활동이 차단되고 보급로가 끊어졌다. 이순신은 원균이 구원을 청하자 평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전선(戰船)을 이끌고 적을 크게 무찔렀다.특히 거북선의 등장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니 여수 본영(麗水本營)을 출발한 이순신은 경상도 해안에서 일본의 수군을 도처에서 격파, 제1차는 옥포(玉浦)에서, 제2차는 사천(四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에서, 제3차는 한산섬(閑山島) 앞바다에서, 제4차는 부산해전(釜山海戰)에서 적선을 모조리 쳐부수어 각각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한산섬에서 적선 60여 척, 부산해전에서는 100여 척을 격파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한산섬에 통영(統營)을 두고 해군을 지휘하게 되니 이로부터 일본해군은 완전히 그 기세를 잃었으며 전쟁이 끝나기까지 한번도 이순신의 군대를 이기지 못했다.한편 국내 각처에서는 왜병의 침략행위에 대한 민족적 반항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趙憲)은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가 전사, 곽재우(郭再祐)는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거병(擧兵)하여 의령·창령(昌寧) 등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성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전사했으며, 김천일(金千鎰)은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지로 왜군을 추격하고 강화로 진을 옮겼다가 다음해 진주에서 전사하였다.정문부(鄭文孚)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鏡城)·길주(吉州)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도 축출하였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休靜:西山大師)은 격문(檄文)을 팔도의 승려에게 발하여 그의 제자 유정(惟政)의 내원을 얻어 1700 명의 승병(僧兵)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 공을 세워 도총섭(都摠攝)에 임명되었으며, 그 제자 처영(處英)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앞서 선조는 피난 도중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명에서는 파병(派兵) 여부의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에 요양부총병(療養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은 5천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명나라에서는 심유경(沈惟敬)을 평양에 파견하여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송응창(宋應昌)·이여송(李如松) 등으로 하여금 4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을 공격하여 이를 탈환하고 계속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벽제관(碧蹄館) 싸움에서 대패하여 일시 개성으로 후퇴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하여 행주산성(幸州山城)을 공격하였다.행주산성은 권율(權慄)이 배수(背水)의 진을 치고 있던 곳으로 왜군을 맞아 격전 끝에 이를 무찔렀다. 이는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섬 싸움과 함께 임진왜란의 삼대첩(三大捷)의 하나이다. 그 동안 명군은 다시 심유경을 서울의 왜진에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으며, 왜군도 각지의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轉意)를 잃고 화의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西生浦)에서 웅천(雄川-昌原)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왜병은 화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니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경사우병사 최경회(崔慶會)·충청병사 황진(黃進) 등이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한편 심유경이 왜군과 같이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후 2, 3년 간 사신이 왕래하였으나 화의는 결렬되었다. 즉 도요토미는 명에 대하여 ① 명의 황녀(皇女)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② 감합인(戡合印-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 팔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④ 조선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했고 붙들어 갔던 두 왕자를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명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冊封)하고 조공(朝貢)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얻었다. 1596년(선조 29) 명은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을 전하니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 보낸 후 다시 조선침략을 꾀하니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 국가를 기만하였다는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오랫동안 결말을 짓지 못하였던 화의는 결렬되어 1597년(선조 30)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되었다.도요토미는 14만 대군을 조선에 향발하게 하여 그 선봉 고니시는 이미 그 전해 겨울에 거제도에 이르고 가토는 다음 해 정월 서생포에 침입하였다. 이때 왜장은 이순신을 두려워하여 간첩으로 하여금 그를 모함하게 하여 이순신은 원균을 옹호하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옥에 갇혔다가 겨우 사형이 면제되어 백의종군(白衣從軍)의 특사를 받고 권율의 휘하에 들어갔다. 3월 중순부터는 일본의 대군이 계속하여 입국하였으며 한편 명나라도 형개(邢?)를 총독,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 원군을 보내왔다. 조선에서도 이원익(李原翼)을 체찰사(體察使), 권율을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이덕형(李德馨)·김수(金?)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창설케 하는 동시에 전국에 군사를 파견, 방위를 굳게 하였다. 이때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없는 틈을 타서 간계(奸計)를 써 원균의 함대를 다대포(多大浦)와 칠천양(漆川洋)에서 전멸시키니 이순신이 정비했던 대부분의 전선의 파괴되었고 원균을 비롯하여 전라우수사 이덕기(李德棋),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등이 전사하였다.이에 기세를 올린 일본은 7월 28일부터 행동을 개시, 우키다(宇喜多秀家)를 대장, 고니시를 선봉으로 하여 총공격을 가하여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였다.그러나 조선·명나라의 연합군도 총반격을 가하여 9월 6일 소사(素沙) 전투에서 적을 크게 이겨 전세를 만회하고 한편 수군도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어 남은 선박 12척으로 군비를 재편성, 결사적인 항전에 나서 9월 16일 명량(鳴梁)해전에서 적의 함대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크게 승리를 거두니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회복, 일본군은 사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이어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고금도(古今島) 해상에서 왜선을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왜군을 우리의 육·해군에 의하여 봉쇄되게 되었는데 이때 도요토미가 병사하게 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을 철퇴하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철퇴하는 왜군을 노량(露梁)에서 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적의 군함 2백여 척을 격파하였다.

결과[편집]

이로서 7년 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3국에 준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문란하였던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기구(官僚機構)의 부패로 나타났다. 직접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야(田野)의 황폐는 전국에 미쳤다. 또한 납속책(納贖策)을 시행하여 서얼허통(庶孼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 취임(東班職就任),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으로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졌으며 국민의 생활은 처참하여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고 민란이 일어났는데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가장 큰 것이었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을 위시한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었는데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했던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의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얻어서 절강무예(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訓練圖鑑)을 설치, 삼수병(三手兵)을 두어 무예를 조련시켰다. 무기로서는 원래의 무기인 궁시창검(弓矢槍劍)·총통(總統)·완구(碗口)·화전(火箭) 외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火車)가 발명되었고 조총(鳥銃)과 불랑기(佛狼機)를

이용하였다.또 국민들의 사상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일으켜 애국심과 자아반성 등 제방면에 있어서의 개선과 명에 대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왜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敵愾心)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 중 명군에 의하여 관우(關羽) 숭배사상이 전래되어 민간신앙에 영향을 주었다.일본은 도요토미가 국민생활을 피폐하게 하였으므로 일본 국내에 봉건제후의 세력이 약화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로 하여금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게 하였다. 또 조선에서 다수의 백성을 포로로 하여 경작 노동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였으며,그 중에서는 도자기 제조 기술공이 있어 일본 도자기업에 발전을 보게 되었다. 활자(活字)를 가져가서 일본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하였고, 『퇴계집(退溪集)』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의 사적을 가져가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소모시켰으므로 국가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이것은 만주의 여진인에게 세력을 팽창시키는 기회를 주어서 청(淸)·명(明)의 교체의 계기가 된 것이다.

비변사[편집]

備邊司

조선시대 관청. 비국(備局)·주사(籌司)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부터 정치체제는 정무(政務)와 군무(軍務)를 구분하여 문·무의 관직을 분명히 하고 무관은 정무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무는 민정(民政)·군정(軍政) 모두 의정부가 맡아 다스리고 2품 이상의 문관이 회의하여 결정사항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성종 때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계속되자 문관들만으로는 정확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여 변경(邊境)의 사정에 밝은 종 2품 이상의 무관도 참석하게 하여 문관과 군사방략을 협의하도록 하였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이라 하였다.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도체찰사(導體察使)가 설치되고 다시 병조(兵曹) 안에 1사(司)를 두어, 종사관(從事官)에게 그 사무를 맡기면서 비변사라 칭하게 되었다. 당시의 비변사는 자체로는 아무 권한도 가지지 못하였으며 단지 병조의 3사 이외에 1사를 임시로 설치한 데 불과하였고, 설치 및 폐지도 도체찰사의 임명·해임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뒤 변경 등에서 외침이 있을 때마다 편성되었던 임시관청이었으며 일반 관제상의 관청은 아니었다.1554년(명종 9) 정규관청으로 독자적인 합의기관이 되었고, 이듬해 청사(廳舍)가 설치되어 도제조·제조·낭청이 정하여졌다. 비변사의 권한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크게 강화되어 일반 행정도 물론 정치·경제·외교·문화 등 국내의 일반 행정도 모두 협의·결정하게 되어 의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다.따라서 임진왜란 후 그 권한을 축소시키자는 주장이 대두 되었고, 이와 같은 비변사 기능의 확대·강화는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행정체제를 문란하게 만든다는 인식으로 1864년(고종 1) 의정부와 비변사의 업무 한계를 규정하여 외교·국방·치안 관계를 제외한 모든 사무를 의정부에 이관하였고 이듬해 비변사는 폐지되었다.비변사의 관제는 『속대전』에 따르면, 도제조는 정 1품으로서 현직 및 전직의 의정(議政)이 겸임, 제조는 종 2품 이상으로 일정한 정원은 없었으나 이·호·예·병·형조의 판서, 훈련대장·어영대장·개성유수·강화유수·대제학이 보통 겸임하였다. 제조 중 4명은 유사당상(有司堂上), 8명은 팔도구관당상(八道句管堂上)을 겸임하였으며, 부제조는 정3품으로 정원은 1명, 낭청은 종 6품으로 정원은 12명이었다.그 뒤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금위대장(禁衛大將)·수어사(守禦使)·총융사(摠戎使)는 제조를 겸직하도록 새로운 규정을 세웠다. 비변사에서 논의된 중요 사항을 기록한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이 전하고 있다.

훈련도감[편집]

訓練都監

조선시대 오군영(五軍營)의 하나.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전통적 진관체제(鎭管體制)가 무너지자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건의에 따라 명(明)나라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오는 「절강병법(浙江兵法)」에 의거해 임진왜란 당시인 1539년(선조 26)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다. 정병(精兵) 양성과 기민(飢民) 구제 임무를 맡아 오다가 94년부터 수도방위·국왕호위 임무를 겸하여 종래 오위가 담당하던 기능을 대신하였다. 이어서 5군영 체제가 갖추어지자 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과 함께 삼군문(三軍門)으로 불리면서 궁성과 서울을 방위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핵심에 위치하였다.조직은 1539년 11월 군사를 좌영(左營)·우영(右營)으로 나눈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2월 속오법(束伍法)에 의한 군사조직체계를 갖추었다.군사는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의 삼수군(三手軍)으로 조직되었고 그 수가 약 1000명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종래 조선 군인은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를 원칙으로 하는 군역에 의하여 충당되었으나 삼수군은 1개월에 쌀 6말의 급료를 받는 일종의 직업군인으로 모집되어 교대없이 근무한 차이가 있다.『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관원은 도제조(都提調:정 1품) 1명, 제조(提調:정2품) 각 1명, 별장(別將:정3품)·천총(千摠:정3품) 각 2명, 국별장(局別將:정3품) 3명, 파총(把摠:종4품) 6명, 종사관(從事官:종6품) 4명, 초관(哨官:종9품) 34명, 지구관(知?官) 10명, 기패관(旗?官) 20명, 별무사(別武士) 68명, 군관(軍官) 17명, 별군관(別軍官) 10명, 권무군관(勸武軍官) 50명, 국출신(局出身) 150명 등이 있었다. 1881년(고종 18) 군제개혁으로 인하여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조직되자 훈련도감은 이듬해 폐지되었다.

선조[편집]

宣祖 (1552

1608)

조선 제14대 왕. 재위 1567년

1608년. 초휘는 균(鈞), 휘는 공(昧), 시호는 소경(昭敬). 덕흥군(德興君) 초(?)의 아들. 비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 하성군(河城君)에 피봉되었다가 명종이 죽자 즉위하여 이황(李滉)·이이(李珥)·백인걸(白仁傑) 등 많은 인재를 등용, 정치에 힘쓰는 한편 『유선록(儒先錄)』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전적(典籍)을 간행하여 유학을 장려하였다.그러나 계속되는 당쟁으로 신하들 사이에 싸움이 확대되어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겼다. 이이(李珥)의 조정책(調停策)이 실패로 돌아가고 동인·서인이 서로 모해·추방·살육이 그치지 않더니 1591년(선조 24)에는 세자 책봉문제로 서인이 쫓겨나고 동인이 집권했다.그러나 동인도 서인의 논죄(論罪)문제로 남·북으로 분열하는 등 치열한 당쟁 속에 정치기강이 문란한 틈을 타서 북으로는 1583년과 1587년의 2회에 걸쳐 야인(野人)들의 침입이 있었으며, 남으로는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니, 통신사(通信士)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을 파견하여 살피게 하였으나 두 사람은 당파를 달리하는지라 서로 상반되는 보고를 함으로써 국방의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그 후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빌리자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자 1592년 일본은 대군을 몰고 쳐들어와(임진왜란) 선조는 의주(義州)까지 피난하였고, 명나라 군대의 원조까지 받았으나 결국 전후 7년 간이나 왜군에 국토가 유린되어 문화재는 타버리고 국운은 더욱 피폐하게 되었다. 전후에도 당쟁은 그치지 않아 전화(戰禍)와 당쟁 속에서 재위 41년 간을 보냈다.

유성룡[편집]

柳成龍 (1542

1607)

조선의 명상.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풍산(豊山). 군수 작(綽)의 손자, 관찰사 중영의 아들. 일찍이 이황(李滉)에게 배우고 1567년(명종 22) 문과에 급제,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1569년(선조 2)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 대비가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유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직제학·승지·부제학을 거쳐 상주(尙州) 목사로 나가 예절로 다스렸으며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함경 감사·대사성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예조 판서 재직 중 위주 목사 서익(徐益)이 소를 올려 그를 간신이라 탄핵하니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형조 판서로 부름을 받고 대제학을 겸했다가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조 판서에 옮겼으며 이어 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光國)의 훈으로 풍원(豊原) 부원군에 봉했다.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 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으나 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실시하였으므로 뒷날에 명나라에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했다.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성룡은 권율(權慄)·이순신(李舜臣) 등을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의 간성이 되게 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송도(松都)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었으나 신잡(申?)의 말에 의해 그 날로 사퇴하고,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키고 조성에서 북행을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홀로 의주로 행할 것을 주장하여 뒷날에 명나라 구원의 길을 열게 하였다.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安州)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직문하고 군량을 준비하다가 이여송(李如松)을 만나 평양의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왜적의 간첩 수십 명을 잡아 적의 연락을 끊었다. 삼남(三南) 도체찰사가 되어 이여송의 후퇴를 강력히 막아 전진케 했으며, 훈련도감제(訓練都監制)를 두어 군사를 훈련케 하고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후에 정인홍(鄭仁弘) 등의 무고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누차 소명이 있었으나 다 사절

했으며, 1604년(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되었다.사당을 병산(屛山) 서원 뒤에 세우고 여산(廬山)의 퇴계묘(退溪廟)에 함께 모셨다. 예악교화(禮樂敎化)·치병이재(治兵理財)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징비록』[편집]

懲毖錄

임진왜란의 수기(手記). 조선 선조 때 유성룡(柳成龍)이 지음.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7년 간의 기사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저술한 것이다.징비록 상·하 2권, 근포록(芹曝錄) 2권, 진사록(辰巳錄) 10권,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으로 되어 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전항을 기술한 것으로 저자의 손으로 된 관계문서가 붙어 있고, 또 녹후잡기(錄後雜記)라 칭하는 징비록의 추가 기록 1편이 들어 있다.근포록은 저자가 올린 차(箚) 및 계사(啓辭)를 모은 것이고, 진사록은 임진년(1592)으로부터 계사년(1593)까지 종군(從軍)하는 동안의 장계(狀啓)를 수록하고 있다.군문등록은 1595년(선조 28)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저자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재임 중의 문이류(文移類)를 모은 것으로 여기에 자서(自敍)와 자발(自跋)이 들어 있다. '징비’란 『시경(詩境)』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며, 이 책의 처음 간행은 1633년(인조 11) 저자의 아들 유진(柳袗)이 『서애집(西厓集)』을 간행, 이후 원본의 체재를 갖추었다는 그 전본도 간행되었다. 1695년(숙종 21:日本元錄 8) 일본교토(京都) 야마도야에서 중간하였으며, 1712년(숙종 38)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수출을 엄금할 것을 명령한 일이 있다.1936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하회리 종가(宗家)의 소장본인 저자 자필의 필사본(筆寫本)을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11집에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이라 하여 300부를 영인한 일이 있으며, 1958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서애집(西厓集)』 끝에도 영인되어 있다. 『광사(廣史)』 3집에도 『징비록』과 『녹후잡기』가 합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의 중요한 사료이며 저자의 능문(能文)과 서로 어울려서 널리 애독되고 있다.

송상현[편집]

宋象賢 (1551

1592)

조선 선조 때의 절사(節士). 호는 천곡(泉谷), 본관은 여산(礪山).선조 9년(1576) 문과에 급제하여 호·예·공조의 정랑(正郞), 사재감(司宰監)·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선조 24년(1591) 동래부사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부산을 함락하고 동래부에 육박하자 병사를 이끌고 항전했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자 조복(朝服)을 갈아입고 단좌(端坐)하고 있다가 적병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첩인 김섬(金蟾) 등도 그를 따라 순절하자 적장들은 그의 충절에 탄복했다 한다.

속오군[편집]

束伍軍

조선시대의 군대. 1594년(선조 27) 임진왜란 때 역(役)을 지지 않은 양인(良人)과 천민(賤民) 중에서 조련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고 유사시에만 소집되었다.

거북선[편집]

龜船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사용한 전투용 공격함(攻擊艦). 『태종실록(太宗實錄)』 15년에 이미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순신이 이를 개량하여 만들어 쓴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 그의 부장(副長) 나대용(羅大用)의 창의(創意)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1591년(선조 24)에 이순신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임명되어 임지인 순천부(順天府)의 영지(營地)에 부임하자 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창안한 것이라 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이 진수(進水)한 것은 1592년(선조 25) 3월 27일이요, 이에 장치한 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를 시사(試射)하여 거북선이 실전용(實戰用)으로 완성되기는 왜침(倭侵) 이틀 전인 4월 12일이었다 한다.

또, 실전에는 5월 29일 사천양해전(泗川洋海戰)이 처음이었다.구조는 선상(船上)을 대판(大板)으로 덮고 판상(板上)에는 좁은 십자로(十字路)를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하고는 모두 송곳으로써 이를 덮어 사방에 발을 붙일 수 없게 하였다. 용두(龍頭)와 귀미(龜尾)에는 총혈(銃穴)을 만들어 대적 공격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적을 만났을 때에는 곧 지붕을 덮고 송곳으로 에워싸서 선봉(先鋒)을 설 수 있게 하였다.또 적선에 오르고자 할 때에는 송곳을 떼게 되었으며 적선에게 포위당하면 일시에 발사하여 향하는 곳마다 이에 휩쓸리지 않음이 대소전(大小戰)에 왜군을 크게 전율시켰다고 하였다(『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귀선도안설(龜船圖按說)에 의하면 저판(底板:本板)은 널판 10장을 이은 것으로 길이가 64자 8치, 뱃머리의 너비 12자, 배허리의 너비 14자 5치, 배꼬리의 너비 12자 6치이고 좌우 현판(舷板:核板)은 각각 널판 7장을 이은 것으로 높이 7자 5치, 맨 밑 널의 길이는 68자로 그 위의 널은 길이를 차례로 더하여 맨 윗널은 길이가 113자에 두께가 4치였다고 하였다. 또 노판은 널 4장을 연이어 높이가 4자이고 유판(釉板)은 널 7장을 붙여 그 높이 7자 5치, 윗너비 14자 5치, 밑너비 10자 6치였다고 한다.선체의 좌우에는 각각 22개의 포혈(砲穴)과 12개씩의 출입문이 있었다. 선내의 왼편 포판 위에는 함장실(艦長室)이 있고, 오른쪽 포판 위에는 장교실(將校室)이 있으며 좌우 포판 아래에는 24개의 방을 두어 철물고·무기고·사병 휴게실 등으로 썼다. 배의 좌우에는 10개씩의 노가 있어 이것으로 운행하기 때문에 그 속력이 매우 빨랐다 한다. 이는 철갑선(鐵甲船)으로서 세계의 선구(先驅)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당시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하여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적을 능히 대파(大破)시킬 수 있게 하였다.거북선은 임진왜란 뒤에도 군제상(軍制上) 중요시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여 거북선의 배치를 보면, 3도통어사영(三道統禦使營)에 1,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 1, 속진(屬鎭)에 2, 공충(公忠:忠淸) 숭영에 1, 속진에 4, 전라좌수영 속진에 1, 우수영에 2, 속진에 5이었다.거북선은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하여 용두(龍頭)는 귀두(龜頭)로 되고, 척도(尺度)도 일반적으로 장대(長大)해졌으며, 총안(銃眼)이나 노(櫓)의 수를 늘이고 그 복판(覆板)도 귀갑(龜甲)의 무늬를 그리게 되었다.

이순신[편집]

李舜臣 (1545

1598)

조선 선조 때의 명장(名將),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德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변(邊)의 후손.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전쟁놀이에서 항상 대장이 되었으며 동네에 못마땅한 일이 생기면 그가 나서서 해결지었으므로 동네 사람이 다 두려워하였다.장성하면서 그는 뜻을 무예에 두어 기사(騎射)를 연습, 훌륭한 재능을 연마하였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으며 발포만호(鉢浦萬戶)를 거쳐 1586년(선조 19)에 사복시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이때 순신은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병력의 증가를 요구하였으나 절도사 이일(李鎰)에 의하여 거절되었으며, 그해 가을 적은 병력으로 호인(胡人)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순신은 홀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 명을 탈환하였다.이일은 피해의 책임을 순신에게 돌려 그를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그의 무죄가 판명되어 해임으로 그쳤다.그 후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珖)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99년(선조 22)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柳成龍)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초첨사·진도군수(珍島郡守)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이해 그는 전쟁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미리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장비를 갖추어 이에 대비하였으며, 특히 거북선을 창조하여 전쟁에 임하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패장(敗將) 원균(元均)의 요청을 받아 함대를 이끌고 적의 수군과 싸워 이를 도처에서 격파하였다. 즉 제1차는 옥포(玉浦)·적진포(赤珍浦), 제2차에는 사천(泗川)·당포(唐浦)·율포(栗浦)에서, 제3차는 한산도(閑山島)·안골포(安骨浦)에서, 제4차는 부산포(釜山浦)에서 적선을 모조리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와 부산포의 싸움은 유명한 것으로 이로 인하여 일본군은 결정적 타격을 받고 순신은 완전히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다. 이는 그의 위대한 지도력과 탁월한 전술에 의한 것이며 조정에서는 위의 공으로 그에게 정헌대부(定憲大夫)의 벼슬을 주고 최초로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에 임명하였다.그러나 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원균 일파와 일본의 이간책으로 1559년(선조 29) 2월 서울에 압송, 고문 끝에 사형을 받게 된 것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의 반대로 사형이 면제되어 4월 1일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균은 안일과 방탕한 생활로 군비를 소모,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나, 대패하고 전사하니 수군은 전멸상태에 빠졌다. 사태의 긴급함을 느낀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 적을 막게 하였다. 이때 그는 모상(母喪)을 당했으나 이를 돌볼 겨를도 없이 임지에 도달하니 남은 배는 겨우 12척뿐이고 군대의 사기는 완전히 저하되었다.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고 다가오는 전투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8월 15일 적의 대부대를 명량(鳴梁)에서 대파하여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고 명나라의 진린(陳璘)이 거느린 5척의 수군과 함께, 위세를 떨쳤다. 적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자 마지막 결전을 시도하여 11월 18일 노량(露梁)에서 적을 섬멸하였다.그러나 이때 이순신도 적의 유탄을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치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유언에 따라 그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고, 끝까지 잘 싸워 적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순신은 지극한 충성,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임진왜란 중 국가의 운명을 홀로 지탱한 민족의 은인이었으니 명나라 진린도 그를 평하여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그를 칭찬하고 또 그 죽음을 듣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이 소식이 중앙에 알려지자 선조는 특사를 보내어 이를 조문, 시호를 내리고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의 호를 주어 덕풍군에 봉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추증하였다. 고향에는 충신문(忠臣門)을 세우고 정조 때에는 영의정을 추증, 임금이 친히 지은 비문을 하사하였다.

『난중일기』[편집]

亂中日記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겪는 중에 쓴 군중일기(軍中日記). 선조 25년(1592) 5월 1일부터 동왕 31년(1598) 9월 17일까지, 즉 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부터 시작하여 충무공이 전사(戰死)하기 전달까지의 것으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전해진 난중일기의 자필 초본이다. 내용은 시취(時趣)에 넘치는 일상생활, 동료·친척과의 왕래 교섭, 사가(私家)의 일, 수군의 통제에 관한 비책(秘策), 충성과 강개의 기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사료(史料)이다.

옥포해전[편집]

玉浦海戰

1592년(선조 25)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일본 함대를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싸움으로 거제도에서 본진을 치고 있던 경상도 우수사 원균이 왜장 가토오에 의해 패전하자, 전라도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므로 이순신은 휘하 장병과 전선(戰船)을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켰다가 거제도 송미포에서 밤을 새우고 진군하여 옥포 앞바다에 이르러 척후장 김완의 신호를 받고 진격 명령을 내렸다. 옥포항으로부터 나오는 적선 50여 척을 포위하고 화포를 쏘아 맹렬히 공격하자 많은 왜선이 부서지고 몇 척의 적선만이 도망하였다. 이 싸움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으나 대승한 아군은 계속 적을 추격하여 영등포(거제도 앞바다)에서 도망하는 적선을 발견하고 웅천 합포까지 추격하여 이를 전멸시켰다.

명량해전[편집]

鳴梁海戰

1597년(선조 30) 이순신 장군이 왜선을 격파한 싸움. 8월에 왜선이 어란포에 나타난 것을 격퇴한 후, 9월에 왜선이 또다시 어란포로 들어오는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오자, 단 12척의 전선으로 진을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기고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16일 새벽 과연 적 함대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순조(順潮)를 타고 명량으로 공격해왔다. 이에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공격하자 왜선은 이순신의 배를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이순신은 후퇴의 기색을 보이지 않고 싸워 적장 마다시를 넘어뜨려 적의 사기를 꺾었다. 때마침 순조가 역조(逆潮)로 바뀌는 순간을 이용하여 적선 31척을 격파시키자, 왜군은 패주하였다. 이 싸움으로 조선군은 제해권을 회복하고, 일본군으로 하여금 서진의 기력을 잃게 하여 왜란의 대세를 마지막 단계에서 꺾었다.

노량해전[편집]

露梁海戰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노량해상에서 왜병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 이 해에 본국에 있는 도요토미가 병사하여 왜병이 철수하게 되자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더불어 적의 퇴로를 막고 함께 왜군을 치기로 하였다. 이에 고니시는 사천의 시마즈와 남해의 소오에게 구원을 청해서 500여 척의 배를 몰아 노량에 집결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모든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서 노량으로 쳐 들어가 순식간에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다. 이때 진린이 이끄는 명군이 합세하여 적을 크게 무찌르니 왜적은 관음포쪽으로 도망갔다. 이순신은 이들의 퇴로를 막아 적을 격파, 진인이 포위된 것을 구하였다. 적은 400여 척의 병선을 잃고 남해 방면으로 도망갔는데, 이순신은 이를 추격하다가 적의 유탄에 맞았으나 ‘나의 죽음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라’ 유언하고 전사하였으므로 싸움이 끝난 후에야 이순신의 전사가 알려졌다.

한산도 대첩[편집]

閑山島大捷

임진왜란 때 한산도에서 이순신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선조 25년(1592) 5월 이후 수차에 걸쳐 적의 수군을 격파한 이순신은 가덕도(加德島)·거제도 등지에 왜군이 출몰하여 육군과 호응한다는 보고를 듣고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많은 병선을 합세하는 등 병력을 증강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李億祺)와 더불어 좌수영을 출발하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였다. 그는 전략상 우세한 곳으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워 한산도를 물색하였다. 그리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유인한 왜선 60여 척을 격침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칠백의총[편집]

七百義塚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소재. 임진왜란 때 순절한 조중봉을 중심으로 한 700의사의 유골을 묻은 묘소. 유임이 순의비를 건립하고 종용사를 세워서 해마다 8월 18일 전사일을 기념했고, 정충대절의 절주가 되었으나 일제시대 말기에 그 역사적 사실을 없앨 목적으로 파괴하였다. 해방 후 지방의 관공서와 지방민 등이 순의비와 종용사를 재건하여 그 사적이 보존되어 있다.

수군과 의병의 항쟁[편집]

水軍-義兵-抗爭

왜군의 침략작전은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진격하되, 육군은 세 길로 나누어 북상하고,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여 북상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경상도 해안 지역을 약탈하면서 전라도 해안을 향하여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때 전라도 해안 경비의 책임을 맡은 이는 일찍이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운 바 있는 이순신(李舜臣)이었다.그는 1년 전에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래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을 갖추며, 식량을 저장하여 두었다. 특히 그는 돌격선의 필요를 절감하여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던 거북선(龜船)을 개량하여 재건하였는데 왜군과의 해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조선 수군은 배의 성능과 대포의 성능에서 일본을 능가하였으며, 화공술이 뛰어났다.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5월 초부터 적군을 맞아 옥포(거제도)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이어 5월 말부터 6월 초에는 이억기(李億祺) 장군이 이끄는 전라우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함선과 합세하여 사천·당포·당항포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6월 말에서 7월 초에 걸쳐 왜군이 다시 총공격을 가해 오자 이순신 함대는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교묘한 전술로 대파하였다. 해전에서 잇단 승리와 때를 같이하여 육지에서도 사방에서 의병이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방위를 위해 일어섰다. 이 자발적인 무장부대들은 나라에 대한 충의를 걸고 싸웠기 때문에 의병(義兵)이라고 부른다.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관료와 사림 그리고 승려들이었다. 의병의 신분 구성이 다양하듯이 사상적 기반도 다양하였지만, 유교의 충의정신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유교를 발전시킨 것이 국방을 소홀히 한 점도 있지만, 그 대신 국민들의 충성심을 배양하여 그 저력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향촌 공동체가 향토 방위를 떠맡아 온 오랜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의병부대의 조직은 매우 수월하였다.의병들은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향토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기 위해서 정면충돌보다는 매복·기습·위장 등과 같은 유격전술을 많이 써서 적에게 큰 괴로움을 주었다. 의병은 각처에서 일어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그 중에서도 많은 전과를 거두고 명성을 떨친 사람은 평안도의 조호익(曺好益)·양덕록(楊德祿)·휴정(休靜, 西山大師),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경기도의 김천일(金天鎰)·심대(沈岱)·홍계남(洪季男),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고령의 김면(金沔),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충청도의 조헌(趙憲),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 황해도의 이정암(李廷?), 강원도의 유정(惟政, 泗溟堂 松雲大師) 등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유학이 발달한 남부지방에서 의병투쟁이 가장 강하였다.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왜군에 대한 반격작전은 한층 강화되어,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부대 등을 정리하여 관군에 편입시켜 관군의 전투능력이 강화되고 작전이 한층 조직성을 띠게 되었다. 육해의 모든 전선에서 반격을 강화하던 1593년 1월 한국계 중국인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5만 명의 명나라 지원군이 도착하여 조선군과 합세하였다. 일본은 전쟁 초기부터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대륙침략을 공언했으므로 명나라가 자위책으로 지원군을 파견한 것이다.조·명 연합군은 먼저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으로 왜군을 추격하다가 고양의 벽제관(碧蹄館)에서 패하자 명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권율(權栗)은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웅거하여 명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탈환하려다가 명군의 후퇴로 고립상태에 빠졌으나 적은 병력으로 피나는 전투를 벌임으로써 대규모 병력으로 공격해 온 왜군을 물리쳤다(1593년 2월). 이 전투에서는 부녀자들까지 참전하여 치마에 돌을 날라 ‘행주치마’라는 말이 나왔다 한다. 이 전투는 1593년 10월에 김시민(金時敏)이 진주성(晋州城)에서 거둔 방어전의 승리, 그리고 이순신의 한산도(閑山島)의 승리와 아울러 임진왜란의 3대 승리로 기록되었다.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기가 꺾인 왜군은 휴전을 제의하였으며, 명도 이를 받아들여 왜군은 1593년 4월 서울을 버리고 경상도 해안 일대로 물러났다. 그러나 명과 일본간의 화의담판은 피차 승리를 자처하는 가운데 3년 간 끌다가 결렬되고 말았다. 그 사이 일본군은 경상도 연해지방에서 성(城)을 쌓고 방어시설을 갖추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신립[편집]

申砬 (1546

1592)

조선의 장군. 자는 입지(立之),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평산(平山). 22세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도총(都摠)·도사(都事)·경력(經歷)을 거쳐 진주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때 진주 목사 양응정(梁應鼎)이 “자네는 큰 인물이니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자 그는 이에 양응정을 스스으로 모시고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은성부사(穩城府使)가 되었다. 이 무렵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서 여러 고을을 뒤흔들었으나 장군들은 모두 싸움에 지고 말았다. 그가 몸소 나가서 그들을 도와 싸우니 그 위세에 적은 도처에서 패전하고 도망갔다. 그는 즉시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이 전승의 보고가 조정에 들어가

함경 북병사(咸鏡北兵使)에 승진되었다. 얼마 후 니탕개를 죽이고 북병사로 오랫동안 근무하였다. 이어서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변사(都巡邊使)에 임명되었다. 싸움터로 떠날 때, 선조(宣祖)가 검(劍)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특히 요청하여 김여물(金汝?)을 데리고 가고, 도중에서 병정을 모집하여 충주에 도착하였다. 이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하고 쫓겨왔다. 신립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재주을 애석히 여겨 선봉에 나서 싸워 속죄하도록 용서해 주었다.김여물은 조령(鳥嶺)에 진지를 구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적은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서로 부딪치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우리 병정들은 아무 훈련도 받지 못한 장정들이니 사지(死地)에 갖다 놓기 전에는 용기를 내지 않을 것이다” 하며 마침내 달천(達川)을 뒤에 두고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쳤다. 고니시(小西行長)가 지휘하는 적은 조령을 넘어 산과 들에 가득차고, 위풍이 대단하였다. 그는 휘하의 여러 부대를 지휘하여 나가 싸워서 몸소 두 번이나 적진(敵陣)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적이 강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적은 우회작전(迂廻作戰)으로 그들의 우측에 진출하여 동서에서 압도적인 세력으로 협공하였다. 이에 그는 탄금대(彈琴臺)에 돌아가서 김여물더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짓게 하여 이것을 부하에게 주어 조정에 달려가서 바치게 하고는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서 10여 명을 죽이고, 두 사람이 다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헌[편집]

趙憲 (1544

1592)

조선의 학자·의병장.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열(文烈). 본관은 백천(白川).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순(孝順)했으며, 학문에 힘써 1567년(명종 22) 문과에 급제, 교서관(校書館)에 속했다가 정주교수(定州敎授)로 3년 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파주 교수로 옮겨 성혼(成渾)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니 성혼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간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1572년(선조 5)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佛供)이 옳지 않음을 극간(極諫)하다 파면되었는데 이때부터 곧은 말을 잘 한다는 평이 자자했다.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후에 박사(博士)·호 예 2조 좌랑·전적(典籍)·감찰 등을 거쳐 통진(通津) 현감으로 잘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내노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富平)에 귀양갔다. 1581년 공조 좌랑에 임명,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 공안(貢案)으로 민폐가 되는 점을 개혁할 것을 청하고 율곡(栗谷) 등 어진 선비들과 깊이 사귀었다.1582년 보은(報恩)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魯山君: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死六臣)의 정문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했으나 시기하는 자의 무고로 파면되었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들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려

한편 정여립(鄭汝立)의 행패를 통박했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하여 여러 번 각하하므로 드디어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득실을 극론하니 광론(狂論)이라 하여 3사(三司)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吉州)로 귀양갔으나 그 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같은 해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말하자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또 소를 올려 겐소 등을 죽일 것을 청했다. 1591년 또 일본 사신이 왔을 때 그는 상경하여 왜적을 대비할 책을 상소했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가 탄식하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의 통로를 차단하는 등 공이 있었으나 순찰사(巡察使) 윤선각(尹先覺)의 시기를 받고 홍성(洪城)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왜적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고, 승장(僧將) 영규(靈圭)의 군사만이 적을 견제하자 그는 영규와 합세하여 적을 대패시켜 청주성을 탈환했다. 당시 금산(錦山)의 적이 충청도 일대를 석권할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영규와 함께 전주에 내려가 7백여 명의 의사를 얻고 그 길로 금산을 향해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權慄)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적은 이미 이쪽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적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중과부적으로 드디어 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1754년(영조 30) 영의정에 추증. 고경명·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이다.

곽재우[편집]

郭再祐 (1552

1617)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도 의령(宜寧) 출신. 조식(曺植)의 문인. 선조 18년(1585) 문과에 급제했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녕(昌寧)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나아가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병을 공격하였다.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永昌大君)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했다. 수차에 걸쳐 경상도 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의 벼슬이 제수(除授)되었으나 조야의 혼탁과 기강의 문란을 개탄하여 응하지 않았다.

고경명[편집]

高敬命 (1533

1592)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본관은 장흥(長興). 명종 13년(155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동왕 18년(1563)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양(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여 울산(蔚山) 군수로 좌천된 후 파면되었다. 선조 14년(1581) 영암(靈巖)군수로 재기용되고, 이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에 다녀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거병하고 금산(錦山)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김천일[편집]

金千鎰 (1537

1593)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호는 건재(健齋), 본관은 언양(彦陽).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임실 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수원(水原)에서 자주 적병을 괴롭혔다. 뒤에 제2차 진주전(晋州戰)에 참가하여 성이 함락되자 투신자살했다.

정문부[편집]

鄭文孚 (1565

1624)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해주(海州). 선조 21년(1588)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鏡城)·길주(吉州) 등을 회복하고, 또 관동(關東) 지방의 적도 축출하였다. 이후 영흥부사(永興府使)·길주목사(吉州牧使)가 되고,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죽었다. 뒤에 함북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의해 신원(伸寃)되었다.

김덕령[편집]

金德齡 (1567

1596)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광주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호남지방을 지켰다. 이어 의병장 곽재우와 힘을 합쳐 여러 차례 왜군을 무찔러 그 공으로 호익(虎翼)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1596년 이몽학의 난 때, 신경행의 모함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그의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가미상의 전기 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휴정[편집]

休靜 (1520

1604)

조선의 고승. 휴정은 법명, 속성은 최씨,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서산(西山). 본관은 완산(完山). 평안도 안주(安州) 출생. 10세 전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안주 목사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반재(泮齋)에서 공부하였으나 마음에 맞지 않으므로 동급생 몇 사람과 같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 선가(禪家)의 법을 깨닫고 숭인(崇仁) 장로에게서 승려가 되었다. 21세에 운관 대사에게 인가(印可)를 얻고 촌락으로 돌아다니다가 정오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 홀연히 심신(心神)을 깨달았다. 30세에 선과(禪科)에 합격, 대선(大選)에서 양종 판사(兩宗判事)에까지 이르러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서 삼몽사(三夢詞)를 짓고 향로봉에 올라가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집이요, 고금의 호걸들은 바구미 벌레 같네, 창에 비친 밝은 달빛 아래 청허하게 누우니 끝없는 송풍의 운치가 별미로다(萬國都城如?蟻, 千家傑?鷄, 一窓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齋)”라는 시를 지었는데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옥사에 요승 무업(無業)이 이 시로 무고하여 옥에 갇혔으나 선조가 그 억울함을 알고 석방하였을 뿐 아니라 시를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선조께 뵙고 각지의 노약자로 하여금 기도케 하고 나머지 승려들을 데리고 적군을 몰아내겠다고 하여 8도 16종 도총섭(都摠攝)이 되었다. 의승(義僧) 5천을 모집하여 인솔하고 관군을 도와 공을 세우고 왕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 늙음을 이유로 군사를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맡기고 산으로 되돌아가 국일도대선사선교 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도의의 이름이 더욱 높았으며 풍악(楓岳)·두류(頭流)·묘향(妙香) 등의 산으로 왕래하니 따르는 제자가 천여 명이요, 출세한 제자도 70여 인에 이르렀다. 묘향산 원적암(圓寂菴)에 제자들을 모아 설법을 하고 글을 그 영정(影幀) 뒤에 써서 유정·처영에게 주고 사망했다.

유정[편집]

惟政 (1544

1610)

조선의 고승. 속성은 임(任),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사명(泗溟),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수성(守成)의 아들로, 13세에 황여헌(黃汝獻)에게 사사(師事)하다가 황악산(黃嶽山) 직지사(直指寺)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선(禪)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거기에서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 1561년(명종 16)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당시의 학자·대부·시인들이었던 박사암(朴思菴)·허하곡(許荷谷)·임백호(林白湖) 등과 교제하였다. 1575년(선조 8) 선종(禪宗)의 주지(住持)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청허(淸虛·西山:休靜) 대사에게서 성종(成宗)을 강의받고 크게 각성하였다. 금강산 보덕사(金剛山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을 유람했으며,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뜨락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門徒)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으며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역옥(逆獄)에 죄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순안(順安)에 가서 청허의 휘하에 활약하였고 청허가 늙어서 물러난 뒤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따라 명장(名將)과 협력하여 평양(平壤)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같이 영남 의령(宜寧)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594년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하고 왜장 가토를 울산(蔚山)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왜군의 동정을 살피고, 왕의 퇴속(退俗)의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과 전마(戰馬)를 바치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1579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장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島山)에 쳐들어 갔으며, 이듬해 명장 유정을 따라 순천(順天)의 예교(曳橋)에 이르러 공을 세워 동지중추부사(架善同知中樞府事)에 오르고 1504년(선조 37) 국서(國書)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되어 갔던 사람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 그때는 청허가 입적한 이듬해로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影塔)에 애하고 치악산(稚岳山)으로 들어갔다.선조의 부보를 듣고 서울로 달려와 배곡한 후 병을 얻어 광해군의 서변을 지키게 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사망했다.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가 있다.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외교)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 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논개[편집]

論介 (?

1593)

조선의 의기. 성은 주이며 전북 장수에서 출생하였다. 진주의 관기로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았다. 1593년,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고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축하 잔치를 벌였을 때, 술에 취한 왜장 게타니를 끼고 벽류 속에 있는 바위로 유인해서 남강에 함께 뛰어들어 죽었다. 후세에 그녀의 정렬을 찬양하여 그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고, 비를 세우고 강위에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제를 지냈다.

권율[편집]

權慄 (1537

1599)

조선 선조 때의 도원수. 호는 만취당(晩翠堂), 본관은 안동(安東).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좌랑·호조정랑의 벼슬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광주목사로 군병을 모집하여 방어사 곽영(郭嶸)에 예속되었다. 용인(龍仁) 싸움에서 패하고 광주(光州)로 가서 군병을 모집, 남원(南原)에서 적을 대파하였고, 그 후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으며, 수원(水原) 독산(禿山)에 진을 쳐 적의 서진(西進)을 막았다.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첩하여 도원수가 되어 전군(全軍)을 지휘하였다.

행주대첩[편집]

幸州大捷

임진왜란 때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순 싸움.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서울을 탈환하려다 명군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상태에 빠졌다.한편 왜군은 총퇴각을 하던 중 벽제관에서 명군을 대파하고 서울에 머물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왜군은 대병(大兵)으로 계속적인 공격을 감행했는데 역전 분투로 모두 격퇴하였다.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일치로 싸운 이 피눈물 나는 방어전의 승리는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김시민[편집]

金時敏 (1544

1592)

조선의 무장.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안동(安東). 지평(持平) 충갑(忠甲)의 아들. 1578년(선조 11)에 무과에 급제, 훈련판관(訓練判官)으로 병조판서에게 상신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항의하고 벼슬을 떠났으며, 그 후 1591년(선조 24) 진주 통판(晋州通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목사가 죽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를 대리하여 진주성을 사수하고자 제반 준비를 갖추던 차에 목사로 승진, 사천(泗川)·고성(固城)·진해(鎭海)에서 적을 무찌르고 영남우도병마절도사(嶺南右道兵馬節度使)에 특진, 금산(金山)에서 적을 격파하여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 해 겨울 바다로부터 적의 대군이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자 14일 간 격전 끝에 왜적을 물리치고 성을 순시하다가 시체 속에 있던 한 왜병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순직하였다. 선무(宣武)공신의 호가 내리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영의정·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진주 싸움[편집]

晋州-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싸운 두 차례의 큰 전투. 선조 25년(1592) 10월 왜군은 영남 지방의 요지인 진주성을 약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왜군과 결전한 결과 적의 공세를 분쇄하고 자신도 순국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 후 명과 왜군이 화의를 교섭하고 있을 때 영남 일대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왜군은 제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이때 성내는 수천 명의 병사만이 있었고, 사실상의 전투력은 부족했다. 게다가 명·조선군은 방관상태에 있어 성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왜의 대병이 맹렬하게 공격하여 오자 김천일·황진 등이 격전했다. 그러나 성은 함락되고 말았으며, 6만여에 달하는 군·관·민은 모두 학살을 당하는 등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최대의 격전이었다.

정유재란[편집]

丁酉再亂

선조 30년(1597) 임진왜란을 둘러싼 명과의 화의회담이 결렬된 후 왜군이 조선을 재차 침입한 난. 명과 왜 사이의 임진왜란을 둘러싼 화의회담은 양자의 근본적인 태도 차이로 도저히 성립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은 재차 침입하여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왜군의 활동이 여의치 못하였다. 조선군도 전비(戰備)를 갖추었으며, 명의 원군도 즉시 출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왜 육군의 활동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에 미칠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해군의 활동에 있어서는 도리어 활발하였으니 그것은 이순신이 모함에 의하여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을 파면당하고 원균이 대신하여 해군을 전멸시키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재기용되어 불과 12척의 전함으로 서해를 향하는 적선을 명량(鳴梁)에서 대파하였다. 경상과 전라 양도의 해안지대로 몰린 왜군은 육해군에게 봉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도요토미가 죽자 그를 핑계로 왜군은 철퇴하였다. 이를 격파하기 위해 출동한 이순신은 노량(露梁) 해상에서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원균[편집]

元均 (?

1597)

임진왜란 때의 무장. 본관은 원주(原州). 무과에 급제하여 변방의 번호(藩湖)를 토벌한 공으로 부령 부사(富寧府使)가 되었고, 선조 25년(1592)에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를 시기하여 남·북인과 더불어 이순신을 모함했다. 이순신이 하옥(下獄)되자 그를 이어 통제사가 되었으나 주색에 빠져 군무에 태만하다가 정유재란 때 참패하여 해군이 전멸되고 자신도 도망치다가 피살되었다. 조정에서는 이에 당황하여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였다.

이몽학의 난[편집]

李夢鶴-亂

임진왜란 후 불만에 찬 민심을 선동하여 이몽학이 충청도 일대에서 일으킨 난. 본래 서얼(庶孼) 출신인 이몽학은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전라도를 떠돌아다니다가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先鋒將)이 되었다. 한현의 지시로 1596년(선조 29) 충청도 홍산(鴻山:扶餘)에서 반란을 계획하고 도천사(道泉寺)의 중들과 인근 주민 6·7백 명을 규합했다. 수년을 끈 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진 데다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극도로 흉악해진 때이므로 ‘왜적의 침입을 바로 잡겠다’는 반도들의 선동이 크게 호응을 얻어 한때 그 세력이 홍산·임천(林川)·청양(靑陽)·대흥(大興) 등지를 휩쓸고 다시 서울로 향하려 하였다. 도중 홍주(洪州:洪城)를 공격할 때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이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任得義)와 더불어 성을 굳게 지키므로 공격할 수 없었다. 홍가신은 민병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하면서 이몽학의 목을 현상에 붙이니,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부하 김경창(金慶昌)과 임억명(林億明)이 이몽학의 목을 베어 들고 항복했으며, 면천(沔川)에서 형세를 살피고 움직이지 않던 한현도 체포되고 이 난에 가담한 자들 중 죄가 무거운 자 100여 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경중에 따라 처벌되니 이로써 이몽학의 난은 평정되었다. 1604년(선조 37) 논공을 할 때 이몽학을 죽인 김경창·임억명은 가선(嘉善)에 오르고 홍가신은 청난 1등공신(淸難一等功臣), 박명현은 2등공신, 임득의는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통신사 파견[편집]

通信士派遣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나, 도요토미를 대신하여 들어선 도쿠가와(德川)막부는 조선과의 국교재개를 간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 끌려간 포로들을 쇄환하기 위해 일본의 간청을 받아들여 사명당 유정(惟政)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7천여 명을 되돌려 받은 뒤 국교를 재개하였다(선조 40년, 1607).그러나 조·일국교는 조선이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진행되었다. 일본 사신의 서울 입경은 허락하지 않고 동래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예조참판이나 참의에게 일본 국왕의 친서를 보내와 사신파견을 요청해 오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60여 차에 걸쳐 차왜를 보냈으나,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여 약 250년 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되었으나 일본에 가서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통신사는 일본의 막부 장군이 바뀔 때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일본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축하사절의 이름으로 파견되었으며, 대략 4

5백명의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 데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일본측에서 동원되고 접대비는 한 주(州)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하였다. 한양에서 일본의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로 가는 길은 처음에 배로 부산에서 오사카에 이르고, 다음에는 육로로 가는데, 왕복기간은 대략 5개월에서 8개월이 걸렸다. 통신사는 국왕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啓)를 휴대하고,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등을 예물로 가지고 갔다. 일본 전국민적인 축제분위기 속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고, 성대한 향응을 베풀었으며, 통신사의 숙소에서 수행원으로부터 글이나 글씨를 받기 위해 몰려든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에 의해 마상재(馬上才)로 불리는 2명의 광대를 데리고 가서 국왕 앞에서 곡예를 연출했는데, 그 인기가 대단하여 곡마묘기나 통신사의 행진을 자개로 새긴 도장 주머니가 귀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다.일본의 화가들은 다투어 통신사 일행의 활동을 대형 병퐁, 판화, 두루마리 그림 등으로 그렸는데 수많은 작품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을 귀중하게 간직하여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통신사가 한 번 다녀오면 일본내에 조선 붐이 일고, 일본의 유행이 바뀔 정도로 일본문화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일본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같은 지식인은 통신사에 대한 환대가 중국사신보다도 높은 데 불만을 품고 이를 시정할 것을 막부에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18세기 후반 이후 일본의 국수정신을 앙양하기 위해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새로이 연구하는 국학(國學)운동이 일어난 것은 일본 지식인의 조선 붐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한 것이다.일본은 19세기에 들어와 반한적인 국학운동이 한층 발전하여 1811년(순조 11년)의 통신사는 대마도에서 일을 보고 돌아가게 하였으며, 일본 국민들이 통신사와 접촉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하여 이 해를 마지막으로 다정했던 조·일국교와 문화교류는 막을 내렸다. 그 후 일본에서는 국학운동이 해방론(海防論)으로 발전하고, 다시 19세기 중엽부터는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1876년의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한편,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는 일본에서 겪은 견문을 기록하여 많은 견문록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