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조선의 성립과 발전/조선 양반사회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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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반사회의 성립〔槪說〕[편집]

근세에 세워진 통일왕조, 위화도(威化島)의 회군(回軍)에서 단번에 중앙정계의 실권자가 된 이성계(李成桂:太祖))는 정치적 지도권(指導權)을 장악하여 차츰 고려 왕조의 구세력을 몰아내고, 드디어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1392년 7월 17일 개경(開京:開城)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급격한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국호도 그대로 ‘고려(高麗)’라 하였으나, 뒤에 곧 ‘조선(朝鮮)’이라 고쳤으며, 민심을 새롭게 하기 위해 서울을 한양(漢陽:지금의 서울)로 옮겼다. 태조는 고려 때에 큰 폐단이 되었던 불교 대신에 유교를 존중하여 이를 정치·교육의 근본이념으로 삼으니, 불교는 점점 쇠퇴하여 천대를 받고, 유교는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한편 명(明)에 대해서는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써서 국호를 고칠 때에도 명나라의 승인을 받았던 일이 있다. 따라서 서로 사신(使臣)의 내왕이 잦았으며, 이를 통하여 조공(朝貢)·회사(回賜)형식의 국가간의 무역이 행하여졌는데, 이 두 정책은 조선의 근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건국 직후에는 나라의 기반도 굳건하지 못하고, 민심도 안정되지 못함에 따라, 왕위계승권(王位繼承權)을 둘러싸고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이 일어났으나, 궁극적 승리를 거둔 방원(芳遠:太宗)이 왕위에 오르자 과단성 있게 정무(政務)를 처리하여 왕권을 확립하는 데 힘썼다. 이어 세종에 의한 찬란한 민족문화의 형성과 세조·성종의 눈부신 치적(治績)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제도와 문물이 대개 완성되어 나라의 기틀은 잡히고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나게 되고, 특히 지배계급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제도의 문란에 따른 훈구재상(勳舊宰相)의 대토지소유(大土地所有)는 토지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의 불만을 사게 되어, 여러 번에 걸쳐 사화(士禍)라는 참극(慘劇)을 빚어냈다. 처음에는 신진사류들이 빈번히 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류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되니, 이를 당쟁(黨爭)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서원(書院)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이와 같이 조선사회 자체의 모순과 분열대립에 곁들여, 7년에 걸친 왜란(倭亂:壬辰·丁酉)과 2번의 호란(胡亂:丁卯·丙子)에 의한 대대적인 침략·파괴 행위로 그 피해는 막심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렇게 파탄에 직면한 사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병제(兵制)와 세제(稅制)의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백성들에 대한 부당한 과세(課稅)가 성행하였는데 이는 가난에 쪼들리는 백성들을 더욱 못 살게 굴어 농촌사회는 극도로 황폐하게 되었으며 정부에 대한 반항의식을 조장시켰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두드러지게 드러난 참담한 사회의 현실과 청나라를 통하여 들어온 고증학(考證學) 및 서양 문물에서 영향을 받아 실제 사회에 이로울 수 있는 학문, 즉 실학(實學)이 대두되어 많은 학자와 수많은 저서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실제 정치에는 전혀 적용되지 못하였다.이와 전후하여 천주교(天主敎)가 전래하였으나 극심한 박해를 당하였으며, 홍국영(洪國榮) 및 안동 김씨(安東金氏) 등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는 삼정(三政)의 문란을 초래하고 농촌사회의 불안과 반발심을 한층 더 격화시켰다. 그리하여 전국 각처에서 농민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순조 때의 홍경래(洪景來)의 난, 철종 때의 진주민란(晋州民亂)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고종의 생부로서 정권을 잡은 대원군(大院君)은 과감하게 내정개혁에 착수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세계 정세에 어두워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고집함으로써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민양요(辛未洋擾) 등을 야기시켜 서양 군함의 공격을 받았다. 대원군이 물러가고 민씨(閔氏) 일족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부득이 일본과 강호도조약(江華島條約:丙子修護條約)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곧 세계를 향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영선사(營繕司)를 청나라 등에 보내어 신문화(新文化)를 수입하고 내정과 제도의 쇄신을 꾀하였다. 일단 문호가 개방되자 외국세력이 거침없이 국내로 침투하여 나라의 운명은 위기에 직면하게 된 데다가 양반관료들의 무작정한 압박은 농민들의 반발심을 부채질하여 동학혁명(東學革命)을 발생시켰다. 이 난을 계기로 청(淸)·일(日) 두 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 그 결과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 청의 세력은 물러나고 일본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나 그 뒤 러시아 세력이 침투하여 차츰 친일파(親日派)를 몰아내고 친로정부(親露政府)를 세우게 하였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 왕을 황제(皇帝)라 일컬어 표면으로는 독립국가로서 새 출발을 하는 듯 하였으나 외세(外勢)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각종의 정당·사회·교육단체 및 언론기관 등이 생겨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기울어지기 시작한 나라의 정세는 어쩔 수가 없었다.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조선에서의 이권(利權)을 차례로 독점하고, 1910년에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편집]

太祖 李成桂 (1335

1408)

조선 제1대 임금.

성은 이씨(李氏), 초휘는 성계(成桂), 휘는 단(旦), 초자는 중걸(仲潔), 자는 군진(君晋), 호는 성헌(松軒), 시호는 강헌(康獻). 본관은 전주(全州), 자춘(子春:桓祖)의 둘째 아들, 영흥(永興) 출신. 사술(射術)이 뛰어나 1356년(공민왕 5) 등용되어 1361년 홍건적을 방어, 1362년 홍건적에게 유린된 도성(都城)을 탈환하고 적을 대파시켰으며, 1363년 원나라가 침입하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어 덕산동(德山洞)에서 대파시키고, 1370년 원나라 동녕부(東寧府)를 원정하여 공을 세웠으며 남해 일대에 출몰하는 왜적을 여러 차례 토벌하여 위명(威名)을 떨쳤다.안으로는 최영과 협력하여 이인임 일당의 전횡을 제거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우왕(禑王) 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요동을 정벌하러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아 창왕(昌王)을 영립하였다가 다시 공양왕(恭讓王)을 내세웠다.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조준(趙浚) 등과 결탁하여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특권층의 세력을 좌절시키는 한편 신흥세력의 기반을 굳게 하였다. 고려에 충성을 바치는 주동 인물 정몽주(鄭夢周) 등이 제거되자 정도전(鄭道傳)·조준 등의 영립으로 1392년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위(禪位)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으며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을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태조는 즉위 후 삼대정책(三大政策)을 내세워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니 정치적으로는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국호 및 왕위의 승인을 받아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는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썼고, 문화적으로는 숭유배불(崇儒排佛)주의로 고려 말기의 부패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세웠으며, 경제적으로는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로 농업을 장려하고 전지(田地)를 개혁하여 농본주의에 의한 신분 사회제도를 확립하였다.아울러 구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왕씨 일족과 구신(舊臣)들을 없앴으며,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했으며 논공행상(論功行賞)으로 창업에 공을 세운 이에게 개국공신의 호를 주고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내리어 왕권을 튼튼히 하였으며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의 시설을 정비하고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여덟 왕자가 왕위 쟁탈문제로 두 차례나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세자 방석(芳碩)이 죽으니 정치에 뜻이 없어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咸興)으로 갔다. 태종이 즉위하자 성석린(成石璘)을 보내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속담처럼 함흥차사란 말을 남기게 하였다. 뒤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그의 진영(眞影)이 영흥(永興)의 준원전(濬源殿) 및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능은 건원릉(建元陵)이다.

정도전[편집]

鄭道傳 (?

1398)

조선 초기의 학자. 개국공신. 자는 종자(宗之), 호는 삼봉(三峰),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봉화(奉化), 형부상서(刑部尙書) 운경(云敬)의 아들, 이색(李穡:收隱)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존오(李存吾) 등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공민왕 때(1362)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내외요직을 역임하고 1375년(우왕 1)에 반원(反元)하다가 이인임(李仁任)·경부흥(慶復興) 등에게 노염을 사서 회진현(會津縣)에 귀양갔다. 1377년 석방되어 학자들과 경학을 강의하고 1383년에 이성계의 막하에 들어갔다. 이듬해에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에 갔다와서 성균관 제주(祭酒)와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역임하였다. 1388년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올랐다가 6월에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회군 후 정권을 잡게 되자 조준(趙逡)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토지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우왕·창왕을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하여 폐시(廢弑)케 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1392년(공양왕 4)에는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개국 1등공신이 되었다. 개국 후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 군국의 요직을 역임,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나라의 문물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 및 성안 48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고 또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을 지어 치국(治國)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을 제정하였으며,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백년 간 중국에서 연주되었다. 또한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陳法)·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년(태조 6)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지금의 경원(慶源:咸北) 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치(修治)하고 주·군과 역참(驛站)을 획정(劃定)하였다.그런데 이때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정조표전(正朝表箋) 가운데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고 하여 표전을 지은 정도전을 잡아 보내라고 하므로 이에 분개한 정도전은 명의 요동정벌 계획을 세우고 그가 지은 진도(陳圖)에 의하여 군사를 조련하던 중 1398년(태조 7) 8월 26일 밤에 방원(芳遠:太宗)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태종은 정도전이 세자 방석(芳碩)에게 당부하여 먼저 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나 실은 태종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변란으로 희생된 것이다. 정도전은 여말(麗末)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철두철미 불교의 말살을 기도하고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으로 불교와 노자교(老子敎)를 압도코자 유감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는 친소(親疏)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性情)에 위배(違背)하여 사회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釋迦)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식(自立自食)코자 아니하였음은 타력에 의하여 기생(寄生)코자 한 것이고 특히 선종(禪宗)과 같은 것은 인심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의 대가였다.태조의 명으로 『고려사(高麗史)』 37권을 편찬하였으나 전하지 않고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고 유집으로 『삼봉집(三峰集)』이 있다.

하윤[편집]

河崙 (1347

1416)

조선 초기의 대신.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진주(晋州), 부사 윤린(允麟)의 아들.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니 시험관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사람됨이 큰 것을 알아채고 아우 인미(仁美)의 딸과 결혼시켰다.1371년(공민왕 20) 영주목(榮州牧)을 잘 다스려 안렴사(按廉使) 김주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보고했다. 고공좌랑(考功佐郞)을 거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러 최영의 공료(攻遼) 정책을 적극 반대하다가 양주(養州)에 귀양갔다.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좌우도관찰사(京畿左右道觀察使)로 기용되었을 때 계룡산 건도역사(鷄龍山建都役事)의 부당함을 홀로 역설, 마침내 중지케 했다. 점서중추원서(簽書中樞院事)로 있을 때 당시 명나라 태조가 표사(表辭)의 불근(不謹)문제로 그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자 하윤은 정도전을 대신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명 태조의 오해를 풀었다.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충정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서 군을 이끌고 서울에 이르러 난을 평정하고 공을 세웠다. 정종이 즉위하자 정당문학이 되어 정사(定社) 1등공신에 오르고 진백군(晋伯郡)에 피봉되었으며 이듬해 우위정이 되었다.태종이 즉위하자 좌명(佐命) 1등공신에 책록되고, 1400년(정종 2)에 좌정승이 되어 명나라 영락제(榮樂帝)가 되어 70세에 치사(致仕)하고 진산 부원군(府院君)에 피봉, 왕명을 받아 선왕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하기 위하여 함길도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죽었다. 음양(陰陽)·의술·성경(星經)·지리(地理) 등에도 정통하였고 일찍 『태조실록』 15권을 찬수하였다.

『조선경국전』[편집]

朝鮮經國典

조선 왕조의 건국 이념과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기본 방향을 설정한 헌장 법전. 태조 3년(1394)에 정도전이 지은 국헌(國憲)과 같은 책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비롯한 조선왕조 법전 편찬의 기초가 된 것이다. 내용은 임금의 할 일로서 정보위(正寶位)·국호·정국본(定國本)·세계(世系)·교서(敎書)로 나누고, 신하의 할 일로서 치(治)·부(賦)·예(禮)·정(政)·헌(憲)·공(工)의 6전을 설치하여 각 전(典)의 관할 사무를 규정하고 있다. 상·하 2권으로 『삼봉집(三峯集)』에 들어 있다.

서울성곽[편집]

-城郭

서울 주위를 둘러싼 도성(都城). 1395년(태조 4)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의 조사 측정을 실시하였다. 다음해 1월 9일(음력) 기공식을 올리고 춘추 2회에 걸쳐 전국에서 징발한 장정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 전후 98일 만에 성의 축조를 완료하였다. 성의 길이는 9천 9백 70보(步:1보는 6자)이며 높이는 40자 2치로서 성을 97구(區)로 나누어 구마다 천자문에 의한 번호를 붙였다. 성이 낙성된 후에는 배수지(排水地)로 5칸수문(五間水門)·2칸수문 등을 만드는 한편 성곽의 관문(關門)으로 숙청문(肅淸門:북대문)·흥인문(興仁門:동대문)·돈의문(敦義門:서대문)·숭례문(崇禮文:남대문)·홍화문(弘化門:동소문)·광희문(光熙門:水口門)·창의문(彰義門)·소덕문(昭德門:서소문) 등의 8문을 완성하였다.그 후 1422년(세종 4)에 종래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이 겸했던 것을 석성으로 개축,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완료하였다. 그러나 이 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파괴되어 1704년(숙종 30)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에 수축을 끝냈다. 그 외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세조·숙종 때의 것이다.

조준[편집]

趙浚 (?

1405)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 호는 우재(?齋)·송당(松堂), 본관은 평양. 공민왕 23년(1374)에 급제,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의 신임을 받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대사헌 등을 거쳐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되었다. 공양왕 4년(1392)에 정도전과 같이 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는 특히 경제에 밝아 전제 개혁안을 통해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개편하였다. 조선초를 통해 그는 도통사(都統使)·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좌정승(左政丞)·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시문에 능하였고 태조 6년(1397) 하윤(河崙) 등과 함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였다.

박은[편집]

朴? (1370

1422)

조선의 문신. 자는 앙지(仰止), 호는 조은(釣隱), 시호는 평탁(平度). 본관은 반남(潘南). 상충(尙衷)의 아들. 이색(李穡)의 사위.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 1386년 개성부 소윤(開城府少尹)이 되었다. 1392년에 조선 개국 후 지금주사(知錦州事)·좌보궐(左補闕)·지영주사(知永州事)·사헌시사(司憲侍史)·지춘주부사(知春州府事)·사헌중승(司憲中丞)·판사수감사(判事水監事)를 지냈다. 태종의 잠저(潛邸) 시절에 서로 의기가 상통하여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 태종을 도와 공을 세우고, 이 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강원도 도관찰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士)를 비롯하여 한성부윤(漢城府尹)·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계림윤(鷄林尹)·전라도관찰사·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겸 대사헌을 거쳐 서북면도순문찰리사(都巡文察里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병조판서·대사헌·호조판서를 역임한 후 1412년 금천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 판의금부서(判義禁府事)를 겸했을 때 신장(訊杖)의 정수(定數)를 1차에 30으로 정하여 실시케 했고, 이조판서·판우군도총제부사(判友軍都摠制府事)를 거쳐 1416년년(태종 16) 우의정 겸 판이조사(判吏曹事)를 지낸 뒤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왕자의 난[편집]

王子-亂

태조(李太祖)의 창업 도상에서 일어난 왕자들의 왕위 계승권을 에워싼 골육상쟁. 태조는 왕비 한씨 소생으로

방간(芳幹)·방우(芳雨)·방과(芳果)·방의(芳毅)·방원(芳遠)·방연(芳衍)의 6남을 두었고, 계비(繼妃) 강씨(康氏) 소생으로 방번(芳藩)·방석(芳碩)의 2남을 두었다.방원의 난은 이 중 방원과 방석의 싸움이며, 방간의 난은 방간과 방원의 싸움이다. 당시는 아직 건국 초창기여서 병권이 국가에 집중되지 못하였고, 왕자들도 각기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두 차례 난의 큰 원인 중 하나였다. 이 난으로 왕위 계승 문제가 낙착되었으며, 사병을 혁파하여 모든 군대를 국가의 군대로 통합하게 되었다.

방원의 난[편집]

芳遠-亂

왕위계승권을 에워싸고 일어난 왕자간의 싸움. 방석(芳碩)의 난, 혹은 정도전(鄭道傳)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때로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도 한다.이 난을 정치적으로 보면 당시 권세를 한손에 쥐고 있던 정도전 일파를 고려조의 신하들을 중심으로 한 방원 일파가 타도하고 권력을 차지한 사건이지만, 좀더 협의(狹義)로 볼 때에는 이복(移腹) 형제간의 왕위쟁탈을 위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현상이었다.태조의 8남 중에는 전(前) 왕비 한씨(韓氏) 소생으로 제6남이 있었고, 계비(繼妃) 강씨(康氏) 소생의 제7·제8남이 있었다. 태조 즉위 후 세자책봉 문제가 일어나자 태조는 계비 강씨의 의향에 따라 제7남 방번(芳蕃)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방번은 그 위인(爲人)이 왕위에 적당치 않다는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逡) 등의 주청(奏請)으로 제8남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았다. 이 처사는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평을 사게 되고, 특히 방원은 부왕(父王)의 창업(創業)을 도와 공로가 크고 또한 자질(資質)이 영매(英邁)한 인물이라 이에 대한 불평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서 세자 방석의 보도(輔導)를 책임지고 있는 정도전 이하 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대단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한양신도(漢陽新都)의 공역(工役)이 완료된 지 2년 후인 1398년(태조 7) 8월 방원은,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밀모(密謀)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함에 제왕자(諸王子)를 궁중으로 불러들여옴을 기회로 일거(一擧)에 방원을 위시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트집을 잡아, 이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名分)을 세워 마침내 정도전 등을 습격하고 변란의 책임을 세자와 정도전 일파에게 돌림으로써 숙원(宿怨)을 풀었다. 즉 그는 이숙번(李淑藩) 등의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친히 무사(武士)들을 이끌고 정도전과 남은의 거처(居處)를 습격하여 이들을 죽였다. 그리고 세자 방석은 폐위(廢位)하여 귀양보내는 도중에 살해하고, 방석의 동복형(同腹兄) 방번도 함께 죽여버렸다. 이 변란(變亂)으로 세자 방석이 폐위되니 다음 세자로 방원을 만들게 된 것은 정세의 당연한 귀추(歸趨)였다.그러나 방원은 이를 굳이 사양하여 세자의 위(位)는 제2자 방과(芳果)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은 야심이 없는 방과에게 양보함으로써 방원은 당장의 혐의를 받을 입장을 벗고 또 후일을 기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태조는 자기가 총애하던 방석의 죽음에 심뇌(心惱)하여 결국 정사에 뜻을 잃고 다음 달 9월에는 세자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정종이요, 이로부터 태조은 상왕(上王)으로 칭하게 되었다.

방간의 난[편집]

芳幹-亂

왕위계승권을 에워싸고 일어난 왕자 사이의 싸움. 일명 제2왕자의 난. 또는 박포(朴苞)의 난. 방원(芳遠)의 난이 이복(移腹) 형제간의 싸움인 데 대하여 이는 동복(同腹) 형제간의 싸움이며, 방간의 방원에 대한 시의심(猜疑心) 때문에 일어난 싸움이다.태조의 4남 방간은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功勳)·위세(威勢)가 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항상 시의불안(猜疑不安) 속에 있었다. 한편 지중추(知中樞) 박포(朴苞)는 방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하는 데 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작(賞爵)이 높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있었던 차에 방간을 충동하여 군대를 동원하였다. 방원도 따라 동원하여 양군은 개경(開京)에서 교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전국(戰局)은 방간군(軍)에 불리하여 패주(敗走)하게 되니 방간은 방원군에게 붙들리고, 거병작란(擧兵作亂)하여 동기(同氣)를 모해(謀害)했다는 죄명으로 유배되었으며, 박포(朴苞)는 사형되었다.방간의 난은 결국 방원의 왕위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와서 정종은 하륜(河崙) 등의 주청(奏請)으로 상왕(上王) 태조의 허락을 얻어 그 해(1400) 2월 방원을 세자로 삼고, 같은 해 11월에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방원이 새로 즉위하니 이가 곧 제3대 태종이다.

태종[편집]

太宗 (1367

1422)

조선 왕조의 제3대 왕(재위 1400

1418). 이름은 방원(芳遠), 태조의 다섯째 아들,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비는 원경왕후(元敬王后). 아버지 이성계의 휘하에서 신진 사대부를 포섭하여 구세력 제거에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이 개국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지고, 방석(芳碩)이 세자로 책봉되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동복형 방과(芳果)를 왕위에 즉위케 했다. 정조 2년(1400) 방간(芳幹)에 의한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이 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병권(兵權)의 일원화를 기했고, 의흥부(義興府)를 폐지하여 병조의 지휘권을 확정시켰다. 척불숭유(斥佛崇儒)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사찰을 정리하고 사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다. 태종은 또 호패법·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을 실시했으며, 국방에도 힘써 야인을 초유(招諭)하는 등 국기(國基)를 안정시켰다. 또한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를 제작했고, 호포(戶布)를 폐지하고 저화(楮貨)를 발행했다. 태종 2년(1402)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 능은 헌릉(獻陵)이다(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

세종[편집]

世宗 (1397

1450)

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년

1450년. 휘는 도(?), 자는 원정(元正), 시호는 장헌(莊憲). 태종의 셋째 아들.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 소생,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3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된 후 1418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자 세자로 책봉되어 태종의 왕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은 즉위한 뒤 정음청(正音廳)을 두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집현전(集賢殿)을 설치, 국내의 우수한 학자들을 총망라하여 학문을 강론케 하였고, 활자를 개량하여 학자들을 지도해서 학문을 장려하고 서적 편찬에 힘썼다.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權?)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정초(鄭招)·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農事直設)』,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高麗史)』,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윤회(尹淮)·신색(申穡)의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治平要覽)』, 수양대군의 『석보상절(釋譜詳節)』, 김순의(金循義)·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케 하였다.이 밖에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간의(大簡儀)·소간의(小簡儀)·혼의(渾儀)·혼상(渾象)·일구·앙부일구·자격루(自擊漏)·누호(漏壺)·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 천문기계를 제작하게 했으며,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다.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등 역서를 짓게 했고, 세계 최초로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게 하여 우량을 측정케 했다. 농잠(農蠶)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還穀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朝鮮通寶)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田稅制度)의 확립 등으로 경제생활 향상에 전력했다.사대사고(四大史庫)를 정비하고, 『효행록(孝行錄)』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는 한편,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정책을 썼으나 만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독신(篤信)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불교를 장려했다. 일본에 대해서 세견선(歲遣船)을 허락하는 등으로 회유책을 썼고, 1419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종무(李從茂)를 시켜 그 소굴 쓰시마(對馬島)를 정벌케 했으나 다시 본래의 평화주의로 돌아가 쓰시마 사람들을 위해 삼포(三浦)를 개항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명(明)에 대해 금·은 세공을 말(馬)과 포(布)로 대신토록 외교에 성공하고 여진과의 관계는 김종서와 이천으로 6진(鎭)과 4군(郡)을 설치하게 하였으며, 능은 여주의 영릉이다.

세조[편집]

世祖 (1417

1468)

조선의 제7대 왕. 재위 1455

1468년.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 문종(文宗)의 동생. 휘는 유, 자는 수지(粹之), 시호는 혜장(惠莊).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다. 문종이 죽고 조카 단종(端宗)이 12세에 등극하자 왕위찬탈의 야심을 품고 정인지·한명회 등과 공모하여 문종의 고명(誥命)으로 단종의 보호책임을 맡은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아우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에 유배시킨 다음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병마의 대권을 잡아 1455년 마침내 왕위를 강탈하였다(癸酉靖亂). 1456년(세조 1) 성삼문(成三問) 등의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자 무자비하게 사형에 처하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1457년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찬술케 하고, 각 읍(邑)의 군사를 5위(衛)에 분속토록 하여 군제(軍制)를 확정, 각 역로(驛路)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시설, 예문관의 장서(藏書)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을 설치했으며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여 영월(寧越)에 유배하였다. 1459년 신숙주(申淑舟)를 파견하여 야인(野人)을 초유(招諭)케 했고, 이듬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간행, 반포하였으며,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신설, 불경을 간행했다. 불교를 숭상하여 『원각경(圓覺經)』을 편찬하게 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했으며, 과전(科田)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토록 하였다.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를 친히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귀성군(龜城君)을 파견하여 평정케 하고, 강순(康純)을 파견하여 건주위(建州衛) 야인(野人)들을 토벌하였다. 비록 의롭지 못한 행위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 후 스스로 뉘우치고 정사에 몰두하여 재위 14년 간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조선 초기의 왕권 확립에 공헌이 많았다. 만년에는 왕위의 찬탈로 인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불문(佛門)에 귀화(歸化), 문둥병으로 불우하게 죽었다고 한다. 글씨에 뛰어났다. 능은 양주(楊州)의 광릉(光陵)이다.

세조찬위[편집]

世祖簒位

1455년(단종 3) 수양대군(水陽大君:世祖)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일.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는 나이 겨우 12세에 불과하여, 선왕(先王) 문종의 유명(遺命)에 따라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좌의정 남지(南智)·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그를 보필하고,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이 또한 협찬(協贊)하여 왔다. 그런데 세종에게는 왕자 18명이 있어 모두 위세가 당당하였고,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은 야망과 수완이 비범한 인물이었다. 이때 모든 대군은 다투어 빈객(賓客)을 맞아들여 세력의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에게는 무인(武人)들이 모였다. 그는 모신(謨臣) 권남(權擥)을 통하여 한명회를 얻고, 다시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의 유능한 무인(武人) 30여 명을 포섭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먼저 단종을 협찬(協贊)해 오던 3공(公) 가운데서 가장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를 제거하고자, 1453년(단종 1) 10월 무사를 이끌고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인 뒤, 김종서가 모반하므로 죽였는데 일이 절박하여 사전에 임금께 아뢸 여가가 없었다고 상주(上奏)하였다. 곧 왕명을 빌어 신하들을 소집, 미리 계획했던 대로 영의정 황보인·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찬성(贊成) 이양(李穰) 등 반대파 중신(重臣)을 궐문에서 죽이고, 좌이정 정분(鄭?)·조수량(趙邃良:趙克寬의 弟) 등을 귀양보냈다가 이어 죽였다. 한편 김종서 등의 목을 베어 매달고 그 자손을 주살(誅殺)하였으며 이어서 안평대군이 김종서 등과 통했다고 하여 그를 강화(江華)에 귀양보내서 뒤에 사사(賜死)하였다. 이 정변(政變)으로 실권을 얻게 된 수양대군은, 바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조·형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함으로써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에 임명하는 한편,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여 이것을 왕의 이름으로 받았다. 수양대군의 위세와 권위로 인하여 사태가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달했음을 깨닫고 단종은 1455년(단종 3) 윤 6월 수양대군에게 양위할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전수(傳授)하니, 단종의 뒤를 이은 그가 곧 세조이다. 이 선위(禪位)의 계획은 권남·정인지 등이 극비리(極秘裡)에 추진한 것이라 비록 선양(禪讓)의 형식을 택하였다고는 하지만, 계략에 의한 왕위의 강탈이었다. 이러한 처사에, 특히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형조참판 박팽년(朴彭年)·직제학(直提學) 이개(李塏)·예조참판 하위지(河緯地)·사예(司藝) 유성원(柳誠源) 등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무인(武人) 유응부(兪應孚) 등은 상왕(上王)으로서 수강궁(壽康宮)에 있는 단종의 복위(復位)와 반역파의 숙청을 꾀하고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사(明使)를 향응(饗應)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어긋나자 김질(金?)·정창손(鄭昌孫) 등은 사태의 불리함을 보고 이를 밀고하였다. 세조는 곧 성삼문 등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으므로 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形)으로 형살(刑殺)되었으며, 하위지도 참살되고,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자살하였다. 이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르며, 이에 연루된 자로 권자신(權自愼)·김문기(金文起) 등 70여 명도 모두 처벌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세조는 성삼문 등의 이 밀로에 상왕(上王) 단종도 관계하였다 하여 강봉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삼아 군사 50명의 호송하에 영월로 귀양보내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를 추폐(追廢)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도 순흥(順興)으로 귀양보냈다. 그 후 9월에 금성대군은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여 영남(嶺南) 인사에게 격문(檄文)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밀고되어 금성대군은 안동에 하옥되고, 이보흠과 기타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주살(誅殺)되는 한편, 세종의 아들 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 등도 멀리 귀양가고 노산군에 대하여는 군(君)을 폐하여 서인으로 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인지·좌의정 정창손·이조판서 한명회·좌찬성 신숙주 등응 계속 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치죄(治罪)할 것을 주장하여, 세조는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하고 불과 이때 나이 17세였던 노산군도 죽였다. 이 단종폐위사건은 뒤에도 사화(士禍)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또 문인·학자간에도 많은 충격을 주어 대립 반목을 이루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단종[편집]

端宗 (1441

1457)

조선 왕조 제6대 왕(재위 1452

1455). 문종의 아들. 8세에 왕세손에 봉해지고 문종이 즉위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문종이 병약하여 일찍 죽자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그를 보필하던 김종서·황보인 등이 참살당하고, 숙부인 수양대군이 국권을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유명무실한 왕이 되었다. 세조 1년(1455)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韓明檜)·권남(權擥) 등이 선위(禪位)를 강요하자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사육신들이 그의 복위를 꾀하다 주륙(誅戮)된 후 노산군(魯山君)에 강봉(降封)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가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賜死)되자 서인(庶人)으로 내려지고 영월에서 사약을 마셨다. 그 후 숙종 24년(1698)에 복위되고 묘호(廟號)가 추증(追贈)되었다. 능은 장릉(莊陵)이다(강원도 영월 소재).

계유정난[편집]

癸酉靖難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 세종(世宗)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1453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문종의 위탁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주륙(誅戮)하였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계啓)할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上奏)하였으며, 곧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계획에 따라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였다. 또 안평대군을 ‘황보인·김종서 등과 한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의정부 영사와 이조·병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유정난이라 한다.

양반[편집]

兩班

조선사회를 움직여 나간 지배적인 사회층. 조선시대 최상급의 사회계급으로 사(士)·농(農)·공(工)·상(商) 중 사족(士族)에 해당한다. 양반은 보통 유학을 업(業)으로 하고, 아무 제한 없이 관료로 승진할 수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명교(名敎)와 예법을 근수(謹守)하는 정신적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권력에 참여하는 지배층인 동시에 지식층이었다. 양반이라는 명칭은 원래 동(東)·서반(西班)에서 나온 것으로서, 고려초에 벌써 문반·무반·잡업(雜業)으로 백관(百官)을 나누고, 이어 문·무 양반의 호칭이 생겼으나, 이때는 관인이란 뜻에 지나지 않았던 듯하고, 조선 이후로는 관인이라기보다 관인에 임용될 자격이 있는 신분을 통칭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미사(未仕)의 문·무인 등도 포함되나, 문무관이 되지 못하고 평민의 경우와 다름없이 군역에 편입되는 경우도 있고, 지방에 영주함에 따라 사류(士類)에서 탈락되는 경우도 있었다. 같은 양반이라도 무반은 문반보다 못하였으며,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 있어 서얼의 자손에게는 차별이 있었고, 지방과 혼인 관계에 있어서도 이러한 차별은 있었다.

서얼[편집]

庶孼

양반의 서출(庶出). 즉 첩의 자식 및 그 자손을 말한다. 이들은 양반의 신분에 속했으나 가정에서 천한 대우를 받았으며 상속권(相續權)도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이 혈통이나 결혼으로 인한 인척관계로 출세가 규정되었는데 서얼에 한해서 문과의 응시자격을 주지 않았고 무과에 한해서 허용하였으며 이도 또한 대부분이 실직(實職)이 아닌 벼슬을 주었다. 이것은 귀천의식(貴賤意識), 유교의 적서(嫡庶)에 대한 명분론(名分論)에서 나온 것으로 고려나 당나라·명나라에서도 없던 제도이다. 서얼은 수가 많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어 선조 때에는 서얼의 차별을 잠시 완화하여 음관(蔭官)으로 지방의 수령(守令) 등에 승진시키기도 했으나 영조 때에 다시 서얼에 대한 차별과 관직의 제한을 엄격히 하였다. 이같은 제한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금고(禁錮) 및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 『속대전(續大典)』의 허통금지조(許通禁止條)에 규정되어 있는 바, 1882년(고종 9)까지 계속되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중종 때 승문원(承文院)의 이문학관(吏文學官)이나 정조 때 규장각(奎章閣)의 검서관(檢書官) 등 비교적 낮은 지위는 서얼이 독점하였고, 이들은 사대문서(事大文書)의 제술(製述)이나 「일성록(日省錄)」의 기록 등 중요한 역할을 맡아보았다. 이와같이 서얼은 신분적 제약으로 정치계의 진출은 변변치 못했으나 학문·문필(文筆)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어숙권(魚淑權)의 『고사촬요(故事撮要)』,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歷史)』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한편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은 서얼은 각처에서 반란이나 도둑의 주동자가 되었으며 당쟁에 가담하는 자도 많았다.

중인[편집]

中人

조선시대 신분계층의 하나. 이들의 신분은 양반과 평민 사이에 놓여 있어 사회적인 중간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서울 중앙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인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중인들은 주로 의관(醫官)·역관(譯官)·관상감원(觀象監員)·계사(計士)·검률(檢律)·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 등의 기술관을 세습하면서 하나의 특수한 신분 계층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경외(京外) 문무관청에서 실무를 보는 하급관리 및 서얼도 광범한 의미에서 중인 신분으로 간주할 수 있는바, 이들의 지위는 대개 고정되어 일반적으로 그 향상을 도모할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이들 특수 기술관이나 문무의 하급 관리들은 소속 관아나 문무 고관에 예종(隸從)되어 기술과 실무를 담당했으므로 실제적인 이득을 취하고 그 나름의 사회적 조직을 통해 행세를 할 수도 있었다. 역관이나 관상감원 등이 명에 파견되는 사신을 수행하여 무역의 이(利)를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예이며, 또한 지방의 향리가 토착적인 세력을 이용하여 수령을 조종·농간하거나 전권(專權)·작폐(作弊)하는 일도 많았던 것이다.

서리[편집]

胥吏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딸려 있던 하급관리. 일명 이서(吏胥)·이속(吏屬)·아전(衙前). 서리의 기원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짐작되나 아직 구체적으로 그 시기를 밝힐 수는 없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 말기에 대두한 각지의 호족(豪族)들을 각각 그 지방의 지배자로 삼았는데, 국가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그 일부는 흡수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향리(鄕吏)에 임명되었다. 향리는 지방의 권력자로서 국가에서 호장(戶長)·부(副)호장·창정(倉正)·병정(兵正)·호정(戶正) 기타의 직책과 대상(大相)·원윤(元尹)·좌윤(左尹) 등의 작(爵)을 받았으며, 지방관의 관할밑에서 각 지방의 행정실무를 맡았다. 또 향리의 자제들이 교대로 상경하여 지방사정의 자문(諮問)에 응하도록 한 기인제도(其人制度)도 있었다. 지방제도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지 못한 고려 사회에서 향리는 지방의 실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들을 통제하는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의 제도가 일단 정비되고 관료제도가 발전됨에 따라 향리는 관료에 사역(使役)되는 낮은 지위로 떨어졌다.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 때부터 차츰 압력을 가하여 그 사회적인 지위는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나중에는 복장도 특수한 것을 입도록 강요당했으며 양민보다 낮은 천민의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관료의 밑에서 일체의 실무를 담당하여 일반 백성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민폐를 끼쳤다. 이렇게 서리들이 날뛰게 된 것은 상피제도(相避制度:자기 고장의 守令으로 임명되는 것을 피하는 제도)에 원인이 있다. 즉 관원을 본적지의 수령에 임명하는 것을 막았으므로 지방관은 임지(任地)의 사정에 어두워서, 자연히 그 지방의 사정에 밝은 서리에게 행정사무를 맡기게 되니, 이들은 지방관을 속이고 사복을 채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식(曹植):조헌(趙憲):정약용(丁若鏞)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학자들은 이들 서리의 폐를 열거하고 그 시정책을 촉구하였다. 특히 조식이 우리나라는 이서(吏胥) 때문에 망한다고 분개한 것은 그 폐단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관료들은 봉록(俸祿)을 적게 받아 생활이 어려워지고, 서리들은 그나마도 정부에서 주는 급료가 없어지자 관료층과 서로 결탁하여 갖은 수단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서리의 횡포는 삼정(三政:田政·軍政·還政)의 문란으로 촉진시켰으며 따라서 조선 말기의 각종 민란의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도첩제[편집]

度牒制

국가가 일정한 승려에 한하여 도첩인 신분증을 주어 승려가 되는 것을 막은 제도. 조선 태조가 억불숭유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하여 왕권을 신장하려고 하였다. 원래 승려들이 각종 의무를 저버리고 입산(入山)하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으로 중국 당(唐)이나 고려에서도 있었다. 이를 도태라고도 하며 도첩의 발행은 예조에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