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발전과 제도 정비/고려의 정치·경제·사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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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정치·경제·사회구조[편집]

〔槪說〕

태조 왕건은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아울러 사용하였으나 이것은 신라시대의 골품제(骨品制)를 청산하고 왕권(王權)이 확립될 때까지의 과도기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나라의 기반이 튼튼해지고 왕권이 확립된 성종(成宗)에서 문종(文宗)에 이르는 기간에 당(唐)·송(宋)의 제도를 수입하여 관제를 정비 완성하였다. 임금의 최고 고문(顧問)으로 삼사(三師:大師·大傳·大保)와 삼공(三公:大衛·司徒·司空)이 있었는데 이것은 국가 최고의 영예직이요, 실무는 보지 않았다. 중앙행정의 최고기관으로는 삼성(三省)·육부가 있었으며, 삼성은 중서(中書:초기에는 內議 또는 內史), 문하(門下), 상서(尙書:성종 때는 尙書都省)의 세 성(省)이며 이것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문하성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사무, 중서성은 조칙(詔勅)에 관한 사무, 상서성은 실지로 국무(國務)를 맡아보는 집행기관으로 그 밑에 6부가 있었다.문하성의 장관을 시중(侍中)이라 하고 수상(首相)격이었으며,. 중서성의 장관은 중서령(中書令:처음에는 內議令 또는 內史令),. 상서성의 장관은 상서령(尙書令)이라 하였다. 이 성의 고관을 재신(宰臣)이라 불렀다. 이 중에서 문하성과 중서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합해서 중서문하성이라 불렀다. 상서성의 지휘를 받는 육부는 이부(吏部)·병부(兵部)·호부(戶部)·형부(形部)·예부(禮部)·공부(工部)였다. ① 이부는 관리의 임면과 상작(賞爵), ② 병부는 무관의 임면, 군무의(軍務)·의장(儀仗), 우역(隅驛), ③ 호부는 호구, 부역, 전량(錢糧), ④ 형부는 법령, 소송, 형옥(形獄), ⑤ 예부는 예의, 제사, 조회(朝會), 교빙(交聘), 학교, 과거, ⑥ 공부는 산택(山澤), 공장(工匠), 영조(營造)를 각각 맡았다.이 밖에 삼성과 거의 같은 자격을 가진 삼사(三司)가 있어 국가재정을 통일하였다. 또 군국(軍國)의 기밀과 숙위(宿衛)를 맡은 기관을 중추원(中樞院:후에 樞密院)이라 하고 그 장관을 판원사(判院事)라 하였다. 중추원은 삼성과 더불어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그 고관을 추신(樞臣)이라 했고, 삼성의 고관인 재신과 아울러 재추(宰樞)라 불렀다. 또 이 두 기관을 양부(兩府)라 한다. 특수 기관으로, 국가의 주요한 격식(格式)을 결정하는 식목도감(式目都監), 감찰을 맡은 사헌대(司憲臺), 조명(詔命)을 맡은 한림원(翰林院), 모든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사관(史觀:후에 春秋館), 대학으로 국자감(國子監)이 있었다.보문각(寶文閣)은 경연(經筵)과 장서(藏書)를 맡았고, 어서원(御書院)은 왕실도서관이었고, 비서성(秘書省:국초에는 內書省)은 경적(經籍)과 축소(祝疏)를 맡았다. 재주있는 문신(文臣)을 뽑아 임금을 모시게 한 홍문관(弘文館:처음에는 崇文館), 또 조회(朝會)와 의식(儀式)을 맡은 합문(閤門), 제사와 증시(贈諡)를 맡은 태상시(太常寺:후에 典議寺), 감옥을 맡은 대리시(大理寺:후에 典獄寺), 빈객에 대한 연회와 접대를 맡은 예빈시(禮賓寺:후에 典客寺), 시장을 단속하는 경시서(京市暑), 왕실과 종친의 족보를 맡은 전중성(殿中省), 천문·역서?기상·시간 등을 맡은 태의감(太醫監:후에 典醫寺), 공로(公路)와 역원(驛院)을 맡은 공역서(供驛暑) 등이 있었다.무관제도로는 2군(二軍)·6위(六衛)를 두었는데, 2군은 응양군(鷹樣軍)·용호군(龍虎軍), 6위는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였다. 각 군과 위(衛) 아래에는 영(領:부대)이 소속되었다. 영은 1천명의 정규군과 6백명의 망군정인(望軍丁人:예비병)으로 구성되었고 도합 45영이 있었다. 또 군과 위에는 각각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 1명씩 있었고, 지휘하는 영의 수에 따라 영마다 장군 1명, 중랑장(中郞將) 2명이 있었고, 그 아래 낭장(郎將)·별장(別將)·산원(散員)·위(尉)·대정(隊正) 등 군관이 배치되었다. 2군 6위의 상장군 8명과 대장군 8명으로 중방(重房)을 구성하였으며 중방은 최고급 장성들의 회의기관이었다. 하급장교들도 회의기관이 있었으니 이를 교위방(校尉房)이라 하였다. 전국의 모든 군대는 2군 6위에 소속케 하였다.이 밖에 예비군단으로 광군(光軍)과 별무반(別武班)이 있었다. 광군은 정종 때에 거란(契丹)에 대비하기 위해서 30만을 뽑은 예비군단으로 이를 통할하는 기관을 광군사(光軍司)라 하였다. 별무반은 숙종 때 윤관(尹瓘)의 건의에 따라 여진(女眞)에 대비하기 위해서 기병을 중심으로 만든 예비군단이다. 전국의 말을 가진 자는 모두 여기 편입시켜 신기(神騎)라 했고, 20세 이상의 남자로 과거를 보지 않은 자는 모두 신보(神步)로 편입하였으며, 승려들로 항마군(降魔軍)을 조직하였다. 즉 별무반은 신기와 신보로 편성되고 방계로 항마군이 여기 속하였다. 별무반은 정규군과 같이 4시를 통해서 훈련을 받았다. 전시에 출정하는 군대는 오군(五軍:경우에 따라 3군이 되는 수도 있었다)으로 편성하였는데, 좌·우·중·전·후군(左·右·中·前·後軍)이 그것이다. 오군이 출정할 때에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또는 行營兵馬使, 국초에 는 大番兵馬使)가 총지휘했는데 이들은 중신(重臣) 가운데서 임명되었다.고려의 관계(官階)는 종1품(從一品)에서 종9품(從九品)까지 29단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정4품상·정4품하·종9품상·종9품하가 있어 29관계로 된 것이다. 이 밖에 왕의 최고 고문격으로 삼사(三師)·삼공(三公)의 직이 있었는데, 문종 때 이들의 관계는 정1품이었다.고려의 지방제도는 건국 초기에는 미처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미칠 수가 없어서 지뱅행정은 호족(豪族)들에게 방임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뒤 983년(성종 2)에 12목(牧)을 두어 여기에 중앙의 관원을 파견한 것이 지방관제의 시초였다. 그러다가 차츰 왕권의 확립을 보게 된 995년(성종 14)에는 경기 이외의 전국을 편의상 10도(道)로 나누는 동시에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비롯하여 아래로 단련사(團練使)·자사(刺使)·방어사(防禦使) 등 외관을 설치하였지만 10도는 이내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단련사·자사·방어사 등의 왼관직도 곧 폐지되어서 현종 이후에는 12주가 개편되어 이루어진 4도호부·8목(牧)과 옛날부터 요지(要地)이면서 풍수설(風水說)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서경(西京:平壤)·동경(東京:慶州)·남경(南京:지금의 서울)과 북방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양계(兩界)가 지방행정의 중심이되어 전국의 군(郡)·현(縣)·진(鎭)을 분담하여 다스렸다. 그 밑으로 특수한 하급 행정구획이던 촌(村)·향(鄕)·소(所)·부곡(部曲)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교통상의 요지에는 진(津)·역(驛)·관(館)이 있었으며, 군사상의 요지에는 진(鎭)이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서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된 곳은 진(鎭)과 일부의 현(縣)까지였다. 그러나 지방에서 직접 백성을 다스리던 사람은 관원이 아니고 그 지방의 향리(鄕吏)였다. 이들은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을 징발하는 직접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에 대해서는 국가의 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마음대로 세력을 떨쳐 그 횡포가 심하였다. 또 이들은 본래부터 그 지방에 토착하여 권세를 잡고 있었던 관계로 임기가 정해져 있던 지방관보다 훨씬 지방의 사정에 밝아 자연히 그 영향이 컸으므로 나라에서는 그들의 지나친 권력팽창을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약을 두었다. 즉 중앙의 고관(高官)을 자기 출신지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여 향리를 감독케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기인(其人)이라 하여 향리의 자제(子弟)를 볼모로 서울에 뽑아 올려 궁중을 숙위(宿衛)케 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향리는 천민집단(賤民集團)이던 향·소·부곡·진·관·역을 직접 맡아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의 지방제도도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와 같이 그 형식이나 명칭에 있어서는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된 것이지만 그 실태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중국에서와 같이 지방 행정구획의 등급이 토지·인구 등의 다과(多寡)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신분관계에 따라 결정되었으니, 예컨대 원래는 군·현이라 할지라도 정부에서 중벌(重罰)을 받으면 향·소·부곡 등으로 떨어질 경우가 많았으며 반대로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면 보다 높은 행정구획으로 승격되었던 것이다.초기에는 구세력을 포섭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식읍(食邑)·사전(賜田)을 주어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게 하는 동시에 문무 관료들에게는 공로와 성품에 따라 역분전(役分田)을 주었다. 새로운 국가가 차츰 확고한 체제를 갖추어 감에 따라 관품제도도 확립되었고, 이에 준해서 토지를 분배하는 규정도 섰으니 이를 전시과(田柴科)라고 한다. 즉 976년(경종 1) 처음으로 전시과가 정해져서 관료들을 관계(官階)에 따라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땔나무와 숯을 얻는 땅)을 받았다. 998년(목종 1) 문무백관과 일반 군인의 전시과를 개정하여 18과(科)를 두었는데 제1과는 삼성의 장관에 주는 것으로 전지 100결(結)·시지 70결,

제 18과는 말단관료·병졸들에게 주는 것으로 전지 20결이었고, 관계에 오르지 못한 자(閑人)에게는 일률로 17결을 주었다.그 후 덕종과 문종 때에 이를 다소 개정하였다.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므로 이것을 받은 자는 수익권(收益權)을 가질 뿐 매매하거나 죽은 후에 자손에게 상속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수익권도 당대에 한하고, 관직에서 물러나면 전지와 시지는 절반으로 삭감되고, 죽으면 국가에 반납했다. 이들 관료는 이 밖에 쌀·조·보리 등을 녹봉으로 받았다. 문무백관과 군인의 미망인, 무의무탁한 여자, 무의무탁한 늙은 군인에게는 구호의 의미로 약간의 구분전(口分田)을 주었는데 본인이 죽거나 결혼하면 역시 국가에 반납했다.이 밖에 1049년(문종 3)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를 제정하여 공로 있는 문무관에게 최고 전지 25결·시지 15결, 최하 전지 15결·시지 5결을 주어 자손이나 조카, 사위 등에게 상속시켰다. 산관(散官:관계만 있고 관직이 없는 자)은 각각 5결씩 덜 주었다. 또 병역의 의무가 있는 남자는 20세가 되면 전지 20결을 주었다. 국가기관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중앙의 각 관서와 지방의 주·군·현·관(館)·역(驛)에 이르기까지 토지를 배당하였으니 이를 공해전시(公?田柴)라 하였다.왕실의 경비를 조달하는 왕실 직할지(直轄地)를 내장전(內庄田)이라 하였는데 전국 각처에 약 360개 있었으며, 이것을 관리하는 기관을 내장댁(內庄宅)이라 하였다. 비빈(妃嬪)과 왕자(王子) 등의 궁원(宮院)에 속하는 땅을 궁원전(宮院田)이라 했고, 내장전과 궁원을 경작하는 농가를 장호(庄戶 또는 莊戶)라 하였다. 불교의 사원에 내린 땅을 사원전(寺院田), 중앙의 국자감(國子監)·지방의 주학(州學) 등 학교에 배정한 땅을 학전(學田)이라 하였는데, 내장전·궁원전·사원전·학전 등은 공해전시에 속하는 것이다. 이 밖에 국경이나 요지(要地)에 주둔하는 군대에게 준 둔전(屯田), 귀화하여 오는 외래민족에게 준 투화전(投化田), 지방관리들에게 준 외역전(外役田), 임금이 친히 시범으로 경작하는 적전(籍田)이 있었다. 특히 정중부(鄭仲夫)의 난(1170) 이후 정권이 무인들의 손에 들어감으로부터 공전(公田)제도는 크게 문란하여 권문(權門)·세가(勢家)·사원에 겸병(兼倂)되었으니, 말기에는 거의 전부가 사전(私田)이었다. 정부는 누차 법령을 말하여 이를 금지하려고 했으나 정부의 고관 자신들이 대지주(大地主)였으니 실천될 까닭이 없었다.일반 농민과 예민(隸民)들은 이 땅을 경작하여 전조(田祖:地代)·세공(歲貢) 기타 잡세를 바치고 부역을 졌다. 위의 여러 가지 땅을 받은 자들은 이를 경작하는 농민들을 직접 지배한 것이 아니라 관(官)에서 받아들인 전조를 조미(租米)로 분배받았다. 이 전조는 일종의 현물세로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었는데 문종 때의 예를 보면 땅을 상중하(上中下)의 3등급으로 나누어 수확고의 4분지 1을 조(組)로 바치게 했다. 그러나 국가기구가 정비되어 비용이 증가됨에 따라 이 세율도 차츰 높아졌다. 공부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인데, 주나 현에서 해마다 바치는 상공(常貢)의 특정한 물건을 현물로 바치는 별공(別貢)이 있었다.1041년(정종 7년) 삼사의 건의에 따라 결정된 주(州)·부(府)의 상공(常貢)의 내용을 보면 쌀 300섬(石), 조 400곡(斛), 황금 10냥, 백은 2근, 포(麻布, 苧布) 50필, 백정동 50근, 쇠 300근, 소금 300섬, 사면(絲綿) 40근, 유밀(油蜜) 1섬이었는데 이 밖에 쇠가죽 등도 들어 있었다. 이 품목을 그대로 바치지 않아도 평포(平布) 등 화폐의 역할을 하는 물건으로 대신 바칠 수도 있었다. 별공은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쳤다. 예를 들면 고려 때에는 특산물의 이름을 붙인 ‘소(所)’라는 것이 있었는데, 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철소(鐵所)·사소(絲所)·주소(紬所)·지소(紙所)·와소(瓦所)·탄소(炭所)·염소(鹽所) 등이 있었다. 이 같은 특정한 물건을 생산하는 고장 즉 ‘소’에서는 그 물건들을 바쳤으니 이것이 별공이다.이 밖에 과일나무(果木)와 칠나무(漆木)·삼밭(麻田) 등에 부과하는 잡공(雜貢)이 있었다. 부역(賦役)은 요역(?役)이라고도 불렀다. 남자 16세가 되면 '정(丁)'이라 하여 나라의 역사에 종사할 의무가 생기고 60세가 되면 '노(老)'라 하여 면제되었다. 주·군에서는 해마다 인구를 조사하여 민적(民籍)을 호부(戶部)에 바치면 이에 따라 병정과 역부(役夫)를 배정하였다. 부역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궁궐·관청·사원을 짓는다든지 성을 쌓을 때에는 무상으로 노동을 하고 식량도 자기 부담이었다.화폐제도는 옛날부터 쌀과 포(布)가 화폐의 구실을 하였던 바 996년(성종 15)에 철전(鐵錢)을 만들어 사용하니 이것이 우리나라 주전의 시초다. 그러나 쌀과 포를 쓰던 오랜 습관을 좀처럼 버리지 않고 도리어 철전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목종 때에는 차(茶)· 술·음식의 매매에만 국한하니 이로부터 철전이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1102년(숙종 7)에 다시 주전(해동통보)과 아울러 은병(銀甁)도 사용하였다. 처음에 은병 한 개는 포(布) 100필에 해당하였으나 때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고려의 주전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 외에 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三韓重寶)·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 등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1331년(충혜왕 1)에는 소은병(小銀甁)을 새로 만들었다. 1391년(공양왕 2)에는 교역의 불편을 덜기 위해 저화(楮貨:지폐)를 인쇄하였으나 발행은 중지되었다.고려시대는 초기부터 교육기관이 있기는 했으나 본격적으로 정비된 것은 성종 때부터였다. 유교의 정신에 따라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기구를 마련했던 만큼 이를 뒷받침할 관료들의 양성기관이 필요했고, 이들을 등용할 과거제도 또한 필요했다. 992년(성종 11) 개성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으니 말하자면 국립 중앙 대학이었다. 국자감에는 국자학(國子學)·대학(大學)·사문학(四文學)·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의 6개 부문이 있었는데 이것을 경사육학(京師六學)이라고 하였다.국자학·대학·사문학의 삼학(三學)은 동일한 내용을 교수하였으나 각각 입학하는 자의 신분이 달랐다. 국자학은 3품 이상의 자제, 대학은 5품 이상의 자제, 시문학은 7품 이상의 자제와 우수한 서인(庶人)을 대상으로 했다. 삼학의 정원은 각 300명이었으나 이를 훨신 초과하는 일도 있었다. 삼학에는 각각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품행이 단정한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어 가르치게 했다. 8품 이하 관료들의 자제와 서인이 들어가는 율학·서학·산학에는 박사만 두었다. 1109년(예종 4) 국자감에 무학(武學)을 두었다가 인종 때에 폐지하고 말았다. 성종은 12목(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와 의학박사(醫學博士) 각 1명씩 보내어 교수케 하였고 인종 때에는 각 주에 명령하여 주학(州學)을 세우게 하였다.958년(광종 9)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진사과의 시험과목은 시(詩)·부(賦)·송(頌)·시무책(時務策)이었고, 명경과는 경서(經書)·의(醫)·복(卜)과는 의학·천문·지리·음양(陰陽)이었다. 후에 명법(明法)·명서(明書)·명산(明算)과 등이 첨가되었으나 중심은 여전히 진사·명경의 두 과였다. 시험은 3년에 한 번 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때로는 2년에 한 번도 있고 수시로 하는 수도 있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1차고시를 보고 여기 합격한 자를 다시 중앙에서 2차로 선발하였다. 인종은 무과에 응시하면 급제하기가 쉬우므로 여기 몰려서 학업을 게을리한다는 이유로 무과를 없애버렸을 정도였으므로 무과가 정식으로 실시되기는 훨신 뒤인 공양왕 때부터였다.

고려의 사회계층[편집]

高麗-社會階層

문벌과 중소지배층고려 초 이래로 중앙정부의 문무품관은 신라 6두품 출신의 문인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호족 출신들이었다. 호족 출신들은 지방에서 고위 향리층으로 있으면서, 과거제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다수의 중앙품관을 배출하였다.11세기 전반 현종대 무렵부터는 품간으로 진출한 사람들의 후손 가운데 누대에 걸쳐 재추를 비롯한 5품 이상의 고관을 배출한 문벌층(門閥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왕실과도 통혼하며 폐쇄적인 통혼층을 이루고 인척관계와 내외족관계로 서로 얽히게 되었다. 문벌은 명문법(明文法)으로 규정된 신분은 아니었으나 사회현실에서 이들의 존재는 기정사실화되었고, 정치적인 제도들은 이들이 누대에 걸쳐 고관신분을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문벌 출신은 유리한 교육상의 여건으로 다수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고관이나 공신이었던 선대의 덕택으로 관직을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음서(蔭敍)의 기회가 있어, 관리로의 진출이 사실상 보장되었다. 과거든 음서든 일단 하위관리로 진출한 문벌 출신은 고려 조정의 최고위 관리들인 내외 친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쉽게 고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하위의 지배층 출신은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관리로서 치적을 쌓아도 낮은 품관직에서 정체되는 경우가 있었고, 어렵게 고관이 되어도 다음 세대에 거듭 고관을 배출하기는 극히 어려웠다. 그렇지만 하위의 지배층에서도 소수나마 재추 등의 고관이 배출되었으며, 극소수는 문벌층과 통혼하며 문벌층으로 상승해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문벌층으로의 상승과 그로부터의 몰락은 문벌층의 구성을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달라지게 하였다.성씨와 관련하여 보면 박(朴), 김(金), 가야계인 신김(新金) 등 소수의 성씨 집단으로 구성된 신라 진골귀족의 경우와는 달리, 고려 문벌은 저명한 성씨만 해도 10여개에 달하였고 각 성씨가 성씨집단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개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하여 문벌층으로 진출하면 그 직계후손들만이 거기에 속하였으니, 동일 성씨를 갖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개 일부 소수만이 문벌층에 포함되었고, 소수인 이들이 몰락하며 어떤 성씨의 인물이 문벌층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골층의 성씨들이 장기간 고정적으로 유지된 것과 달리, 문벌층에서는 소수의 성씨별 인물들의 상승과 몰락에 따라 새로운 성씨가 더 나타나기도 하고 기존 성씨가 빠지기도 하는 변동이 완만하게 계속되었다. 지방에 남은 호족들과 그 후예들은 중앙집권화에 따른 차별화정책에 의해 품관층과 구별되면서도 하위의 품관층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각 지방 호족 출신들은 그 예하 지배조직의 구성원들과 함께 지방의 이(吏)라는 의미에서 향리(鄕吏)로 편제되었으며, 성종대부터는 품관과 구별되어 무산계(武散階)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호족 출신들은 향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호장·부호장을 대대로 배출하는 지방의 지배층으로 자리잡았고, 통혼(通婚)관계나 과거 응시자격에서도 하위의 향리층들과 구별되었다. 이들은 계층 내에서 폐쇄적으로 혼인하는 계급내혼적(階級內婚的) 단위를 이루는 한편 중앙의 하위 품관들과도 통혼하였다. 또한 이들은 예전처럼 중앙의 품관과 마찬가지로 향직을 받는 대상이었으며, 과거 등을 통해 계속 중앙의 품관으로 진출해갔다.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는 지배기구의 말단 종사원들이 존재하였다. 궁궐의 잡무를 맡는 남반(南班), 직업군인인 군반(軍班), 말단 이속(吏屬)인 잡류(雜類), 지방의 하층 향리나 역리(驛吏) 등이 그들이다. 이들도 세습적으로 직역(職役)을 물려받았고, 그에 상응하는 수조지를 받았다. 간혹 남반·군반·잡류의 후손 중에서 품관으로 진출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승급에 제한을 두는 한품제(限品制)가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평민과 종속구역민[편집]

피지배층은 공민(公民)인 양인(良人) 중의 평민층, 공적·사적 권리의 일부가 박탈되어 어느 정도 천민(賤民)같이 대우받은 향·부곡 등의 종속구역민, 공민으로서의 자격이 완전히 박탈된 천민 등 세 가지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자유로운 신분인 양인의 대다수는 농민으로, 이들은 직역이 없는 백정(白丁)이었다. 이들은 자기 소유의 소규모 농지를 경작하거나 타인의 토지를 빌려 차경(借耕)하였다. 차경을 하는 경우 이들은 지주에게 수확물의 2분의 1을 지대로 물었으며,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더라도 조(租)로서 생산물의 10분의 1을 국가기관이나 전시과제도에 의해 지정된 수조권자(收租權者)에게 물어야 했다. 백정층은 이외에도 지방별로 할당된 물품을 징수하는 공부(貢賦)와 노동력을 징발하는 역역(力役)을 부담해야 했다.백정농민층은 법제적으로는 과거시험 중 명경과(明經科)와 잡과(雜科)에 응시할 자격을 가졌고, 수조지를 받는 군인 등으로 선발될 수도 있었다. 한편 양인 수공업자와 상인들은 백정농민보다 천시되어, 문무의 관직에 나가는 것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도 양인으로서 공부와 역역의 의무를 졌다.양인층보다 하층에는 신분적으로 양인에 가까우면서도 천민과 같은 신분적 제약이 일부 가해진 향·소·부곡이나 역·진 등의 종속구역민이 존재하였다(이들 종속구역민들을 천민이나 양인 어느 한쪽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다). 군현민과 달리 천시되고 차별받은 이들은 거주가 소속집단 내로 제한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문무 관직을 갖는 것도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종속구역을 벗어나 일반 군현에 나가 살게 해주는 것이 국가적 포상이 되곤 하였다. 또한 종속구역 주민들의 전공(戰功) 등에 대한 포상으로 종속구역 자체를 군현으로 승격시켜주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반란을 일으킨 군현지역을 집단적으로 처벌하여 부곡 등으로 강등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지역의 주민은 자신의 출생지역에 곡·장·처의 주민은 농업생산에, 소의 주민은 수공품이나 광산품의 생산에, 역과 진의 주민은 각각 육로교통과 도선(渡船)의 임무에 종사하였다.

천민[편집]

천민의 다수는 노비였고, 유기(柳器)를 만들어 팔거나 수렵을 하며 유랑생활을 하는 화척(禾尺, 일명 楊水尺), 광대인 재인(才人) 등도 천민으로 대우되었다. 천민에게는 일반 양인에 부여된 공민으로서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고, 공민으로서의 의무도 부과되지 않았다.노비는 사인(私人)에 예속된 사노비(私奴婢)와 국가기관에 예속된 공노비(公奴婢)가 있었다. 노비의 신분은 세습되어 노비의 자식들도 노비가 되었는데, 부모 중 하나만 노비인 경우도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노비는 매매·증여·상속의 객체가 되어 주인에게 예속되었다. 또한 생계가 어려워진 양인이 재물을 받고 타인의 노비가 되기도 하였고, 반란을 꾀한 지배층의 가족들이 형벌로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간혹 권세가들이 법질서의 혼란을 틈타 불법적인 방법으로 힘없는 양인들을 노비화하기도 하였는데, 10세기 중엽 광종대에 실시된 노비안검법은 그에 대한 개혁조치였다. 노비들의 다수는 독립된 농가를 이루고 농경에 종사하면서, 정해진 액수의 재물을 상전이나 관청에 납부하는 외거노비(外擧奴婢)였다. 이들은 상전이 아닌 타인의 토지를 빌려 차경하기도 하고, 자신의 토지를 갖고서 부를 축적할 수도 있는 독립된 경제생활을 영위하였다. 한편 사노비 중 솔거노비(率居奴婢)는 상전의 집에서 숙식하며 잡일을 돌보았고, 공노비 중 공역노비(供役奴婢)는 관청의 잡역에 종사하면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였다. 공노비는 60세가 되면 종사 의무가 면제되었다.노비는 상전에게 중요한 부의 원천이 되었으나, 단순한 재물로 간주되지 않고 인격체로서 법의 보호를 받았다. 노비들은 상전으로부터 사적 체벌의 위협을 받았지만 그들의 생명은 법으로 보호되었고, 국가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작성하는 호적에 등재되었다. 외거노비는 독립된 호(戶)를 이루며 노비 자신이 호주가 되었고, 솔거노비는 상전의 호적에 등재되었다.이러한 고려시대 노비들의 사회·경제적 상태는 노예나 농노와도 달랐다. 수조권제는 고려 지배층이 농민의 소유권에 부분적 제한을 가해 토지에 대한 수취권을 사적으로 장악하는 수단이었고, 노비제는 민(民)의 인격을 극히 축소시켜 인정한 상태에서 노동력을 사적으로 장악한 방식이었다.

3성[편집]

三省 고려 때 중앙에 설치된 최고의 의정 기관(議政機關). 3성은 당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중서성(中書省:처음에는 內史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尙書省)을 말한다. 중서성은 조령(詔令:임금의 명령)의 초안(草案)을 작성하여 왕에게 상주(上奏)하고, 문하성은 중서성으로부터 내려진 조령을 심의하여 복주(覆奏:다시 잘 살펴보고 아룀)하며, 상서성은 심의한 조령을 집행하는 기관이다.

중서문하성[편집]

中書門下省

고려 때 국가(國家)의 행정(行政)을 총괄(總括)하던 관청. 원래 당(唐)의 삼성육부제(三省六部制)를 채택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고려는 국가의 규모가 작다하여 문하성과 중서성을 합하여 문하부를 둔 것이니, 국초(國初)에는 내의성(內議省)이라고 하다가 982년(성종 1)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고치고, 그 후 1061년(문종 15)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275년(충렬왕 1) 원(元)의 요구에 의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고치고 상서성(尙書省)을 첨의부에 병합하였다. 1293년(충렬왕 19)에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고치고,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자주성(自主性)을 회복코자, 모든 관직제도를 구제(舊制)로 환원할 때 중서문하성으로 고쳤다. 1362년 도첨의부(都僉議府)로 고치고, 1369년(공민왕 18) 비로소 문하부라는 이름으로 정하였다. 문하부의 속관(屬官)은 국초 이래 명칭의 변개와 함께 증감·폐합이 잦았다.

문하시중[편집]

門下侍中

고려 문하성의 최고 관리로 품계는 종1품. 성종 때 삼성·육부(三省·六部)의 관제가 확립되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의 최고 관리로서 내사령과 함께 문하시중을 두었던 것인데 1061년(문종 15)의 관제개혁으로 개칭되어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다.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과 상서성(尙書省)을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고쳤으므로 중서령은 폐지되고 문하시중 대신 좌첨의중찬(左僉議中贊)·우첨의중찬(右僉議中贊) 각 1인을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에는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부른 적이 있으나 곧 중찬으로 복구, 1308년(충렬왕 34) 첨의부가 도첨의부(都僉議府)로 됨에 따라 정승(政丞)이라고 불렀다. 1356년(공민왕 5) 관제의 전면적 복구에 따라 문하시중으로 다시 복구, 1362년(공민왕 11)에 중서문하성이 도첨의부로 바뀌게 되자 다시 첨의좌정승·첨의우정승으로 분리, 1369년(공민왕 18) 도첨의부가 문하부로 고쳐지자 문하좌시중·문하우시중으로 불려왔으며, 창왕(昌王) 때는 시중(侍中)으로 불렀다.

상서성[편집]

尙書省

고려시대 삼성(三省)의 하나. 백관(白官)을 모두 관할하던 관청으로 이(吏)·호(戶)·예(禮)·병(兵)·형(形)·공(工)의 6부(部)가 이에 소속되었다. 국초(國初)에는 태봉국(泰封國)의 제도에 따라 광평성(廣評省)이라 칭했는데, 982년(성종 1)에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개칭, 995년에는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고쳤다. 원(元)의 간섭에 의하여 1275년(충렬왕 1)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병합되어 첨의부(僉議府)가 되었다. 그 후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상서성(尙書省)으로 부활, 1362년에 폐지되었다. 문종 때의 속관을 들면 상서령(尙書令:종1품) 1명, 좌우복야(左右僕射:정2품) 각 1명, 지성사(知省事:종2품) 1명, 좌우승(左右丞:종3품) 각 1명,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종5품) 각 1명,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정6품) 각 1명, 도사(都事:종7품) 2명, 이속(吏屬)으로는 주사(主事) 4명, 영사(令史) 6명, 서령사(書令史) 6명, 기관(記官) 20명, 산사(算士) 1명, 직성(直省) 2명이 있었다.

고려의 6부[편집]

高麗-六部

고려 때 상서성에 소속해서 실무를 분장한 정치기구. 이·호·예·병·형·공 등 6부 상서성의 지도 감독 밑에서 소관의 행정 사무를 관장하는 행정부의 중추(中樞) 기관이다. 이부는 문관(文官)의 인사, 호부는 호구와 조세, 예부는 예의·외교·교육·과거, 병부는 무관의 인사와 군사·우역(郵驛), 형부는 법률과 소송, 공부는 산택(山澤)·공장(工匠)·영조(營造) 등을 각기 맡고 있었다.

중추원[편집]

中樞院

고려 때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군기(軍機) 등을 맡아보던 관청. 당초에는 송(宋)의 추밀원(樞密院)을 모방하여서 991년(성종 10)에 중추원을 설치하여 숙위를 맡아보게 했는데 1009년(목종 12)에 중추원·은대(銀臺)·남북원(南北院)을 폐지하고 중대성(中臺省)을 두어 비로소 왕명의 출납·숙위·군기 등을 맡아보게 하고 사(使)·부사(副使)·직중대(直中臺)·겸직중대(兼直中臺) 등을 두었다.1011년(현종 2) 중대성을 폐지하고 다시 중추원으로 개칭하였다. 문종 때 판원사(判院事:(종2품) 2인, 원사(종2품) 2인, 지원사(知院使:종2품) 1인, 동(同) 지원사(종2품) 1인, 부사 (副使:종3품) 2인, 첨서원사(簽書院事:정3품) 1인, 직학사(直學士:정3품) 1인, 지주사(知奏事:종3품) 1인, 좌부승선(정3품) 1인, 우부승선(정3품) 1인, 당후관(堂後官:정7품) 2인을 두었다. 1095년(헌종 1)에는 중추원을 추밀원(樞密院)으로 고쳤다. 1275년(충렬왕 1)에 밀직사(密直司)로 개칭하고, 1276년에 승선을 승지(承旨)로 개칭하고, 1298년(충렬왕 24)에는 광정원(光正院)이라 고치고 사(使:종1품), 동지원사(정2품), 부사(종2품), 첨(僉)원사(정3품), 동첨원사(종3품), 도승지(都承旨:종5품), 승지(종6품), 부승지(종6품), 계의관(計議官:종7품), 계의참군(計議參軍:정8품) 등의 관리를 두었는데 곧 밀직사로 환원하고 사사(종2품) 1인, 지부사(知府事:종2품) 2인, 동지사(종2품) 3인, 좌승지(정3품) 1인, 우승지(정3품) 1인, 좌부승지(정3품) 1인, 우부승지(정3품) 1인, 당후관(정7품) 등의 관리를 두었다.1308년(충렬왕 34)에 이것을 폐하였다가 1309년(충선왕 1)에 다시 설치하고 여기에 판사사(判司事)를 가설(加設)하였다. 1310년에 밀직사의 관질(官秩)을 높여서 첨의부(僉議府)와 함께 양부(兩府)라 불렀고 승지를 대언(代言)으로 고쳤다. 1311년(충선왕 3)에는 부사를 품계를 정3품으로 낮추고, 1354(공민왕 3) 판사사·지신사(知申事)·대언을 녹관(祿官)으로 하고, 1356년(공민왕 5)에 추밀원이라 고쳐 문조 때의 구제도로 복귀하였는데 1362년(공민왕 11)에는 밀직사로 고치고 종2품의 판사사·사사·지사사·첨서사사·동지사사 및 정3품인 좌우대언·좌우부대언을 두었다.1369년(공민왕 18)에는 첨서(簽書)를 정3품으로 강등시키고 제학(提學)을 학사(學士)로 고치고 대언을 승선으로 고치고 뒤에 다시 학사를 제학으로 고치고 승선을 대언으로 고쳤다. 밀직사의 이속(吏屬)은 문종 때 별가(別駕) 10인, 주사(主事) 10인, 시(試)별가 2인, 영사(令史) 2인, 기관(記官) 8인, 통인(通引) 4인을 두었다.

도병마사[편집]

都兵馬使

고려 때 3성과 중추원의 고관들이 함께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회의로 결정짓던 곳. 성종 8년(989)에 창설된 병마사를 개칭한 것으로 그 활동은 동왕 11년(992) 거란 침입 때 활발하였다. 그 후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칭했다. 국가 중대사를 회의로 결정짓는 이 도병마사는 도당(都堂)이라고도 하였다. 도병마사는 본래 국방에 관한 것을 주로 다루었으나, 뒤에 점차로 국정 일반에 관한 합좌기관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합좌기관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어사대[편집]

御史臺

고려 때 시정(時政)을 논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관리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맡아본 관청. 처음 사헌대(司憲臺)라 칭하던 것을 성종 14년(995) 어사대로 고쳤고, 그 후 충렬왕 24년(1298) 사헌부(司憲部)로 바뀌는 등, 고려말까지 변동이 많았다. 따라서 그 관직명도 복잡하게 바뀌었다.

서경[편집]

署經

고려 시대 관리의 임명 및 법의 개폐(改廢) 등에 있어서의 한 절차. 고려 때 어사대와 문하성 소속의 간관(諫官, 郞舍)은 관리 임명이나 법의 개폐 등에 간여할 권한을 가졌는바 이를 서경이라 한다. 관리 제수(除授)에 있어서 수직자(受職者)의 고신(告身)을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에 회부하여 대성(臺省)의 심사·동의를 받게 하였으며, 또한 법을 제정할 때나 관을 설립할 때에는 반드시 대성(臺省)의 합의를 얻어 시행케 하였다. 이 제도는 왕의 전제력(專制力) 행사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였다.

고려의 3사[편집]

高麗-三司

고려 때의 관청. 전곡(錢穀)의 출납·회계를 맡아보았다. 태조가 태봉의 조위부(調位府)를 삼사로 고쳤다. 현종 5년(1014) 무신들의 청에 의하여 삼사를 폐하고 도정사(都正司)를 두었다. 동왕 14년(1023) 다시 삼사를 두고, 문종 때 판사(判事) 1명을 두어 재신(宰臣)으로 겸하게 하였다. 그 후 수차례 변동이 있었다.

춘추관[편집]

春秋館

고려 때의 관청. 시정(詩政)의 기록을 맡아 보던 곳으로 국초에는 사관(史館)이라 불렀으며 관원으로는 감수국사(監修國史·侍中兼任), 수국사(修國史)와 동수국사(同修國史)는 2품 이상이 겸임하고, 수찬관(修撰官)은 한림원(瀚林院)의 3품 이하가 겸임. 직사관(直史館:후에 直館이라고 고침) 4인 중 2인은 임시직이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문한서(文翰署)에 병합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 고쳤고, 1325년(충숙왕 12)에 예문·춘추관을 갈라서 춘추관으로 독립되고 수찬(修撰)·주부(注簿)를 각 1인, 검열(檢閱) 2인을 두었다가 뒤에 공봉(供奉:정7품)·수찬(修撰:정8품)·검열(검열:정9품)으로 고쳤으며 또 영관사(領館事)· 감관사(監館事)는 수상(首相)이, 지관사(知館事) ·동지관사(同知館事)는 2품 이상이 극수찬관(克修撰官)·극편수관(克編修官)·겸편수관(兼編修官)은 3품 이하로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다시 사관이라고 고쳤고 편수관(編修館:정7품) 1인, 검열(檢閱:정8품) 1인, 직간(直館:정9품) 2인을 두었고, 1362년(공민왕 1)에 또 춘추관으로 하고 공봉·수찬·검열로 1389년(공양왕 1)에 예문관을 합쳐서 예문춘추관으로 고쳤다. 이속(吏屬)으로는 서예(書藝) 4인, 기관(記官) 1인이 있었다.

5도 양계[편집]

五道兩界 고려 때의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 고려 건국 이래 행정 구역은 수차례 변경되었는데, 현종 때에 와서 전국을 5도(道:楊廣·慶尙·全羅·交州·西海)와 양계(兩界:東界·北界)로 나누었다. 특히 양계에는 병마사(兵馬使)를 두어 군권(軍權)과 민정(民政)을 맡겨 당시 소란하였던 북방을 책임 지웠다 한다. 양계는 지금의 평안도 지방인 북계(北界:뒤에 흔히 西界라고도 함)와 함경도 지방인 동계를 총칭하는 것이며, 북계를 서북면, 동계를 동북면이라고도 했다.

안찰사[편집]

按察使 고려 때의 지방 장관. 초기에는 절도사(節度使)가 있었는데, 현종 3년(1012) 이를 없애고 안찰사(按察使)를 두었으며, 문종 18년(1064) 도부서(都部署)로 개칭, 다시 예종 8년(1113)에는 안찰사로 환원했다. 충렬왕 2년(1276) 안찰사를 안렴사(按廉使)로 고쳤다. 동왕 24년(1298)에는 지역이 넓은 경상·전라·충청의 3도에 안렴부사(按廉副使)를 두고 동계(東界)의 안집사(按集使)를 없애어 교주(交州)의 안렴사가 겸하게 했다. 그 후에도 직제(職制) 변화가 있었다.

병마사[편집]

兵馬使

고려 때 동·북 양계(兩界)의 군권을 전담하던 지휘관. 정3품 벼슬로 성종 8년(989)에 설치하였다. 옥대(玉帶)와 자금(紫襟)을 달며 왕이 친히 부월(斧鉞, 도끼)을 주어 진(鎭)에 부임했다. 문하시중(門下侍中)·중서령(中書令)·상서령(尙書令) 등으로써 판병마사(判兵馬使)를 삼아 서울에 남아서 동·북면의 병마사를 영도케 했다.

고려의 현[편집]

高麗-縣

지방행정 단위의 하나. 신라 때부터 현 제도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등급이 없이 모두 현령을 두었던 듯하다. 고려초에는 현령(縣令)을 두었던 현과 중앙에서 전혀 지방관이 배치되지 않던 속현(屬縣)의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현령이 배치된 현은 독자적인 행정이 행해졌으나 속현은 지방관이 배치된 다른 지방 행정 관청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예종 때부터는 속현에도 점차 지방관이 배치되었다.

3경[편집]

三京

고려시대의 삼경, 즉 ① 중경·서경·남경 ② 중경·서경·동경 ③ 서경·남경·동경를 일컬음. 고려 삼경은 도참사상(圖讖思想:吉凶에 대한 신앙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시대에 따라 일정치 않았으나 대개 위의 세 가지를 말한다. ‘고려 땅에 삼경이 있는데 송악(宋岳)이 중경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은 남경이 되며, 평양이 서경이 되어 왕이 11·12·1·2월에는 중경에 거하고, 3·4·5·6월에는 남경에 머무르고, 7·8·9·10월에는 서경에 머무르면 36국(國)이 조공(朝貢)하리라’는 『도선기(道詵記)』 풍수설(風水說)에 의해 삼경이 세워지고 역대 왕이 이를 중요시하였다. 987년(성종 6)에 경주를 고쳐 동경이라 하여 중경·서경과 함께 삼경의 체제를 갖추었고, 현종 때는 동경의 격(格)을 낮추어 경주라 하고 동경유수(東京留守)를 폐하였다가 후에 다시 설치하였다. 1067년(문종 21) 때 양주(楊洲:漢陽)에 남경을 설치하여 실지로는 사경(四京)이었으나, 동경은 그 존폐가 잦았으므로 풍수설에 들지 못하게 되고 그 중요성을 잃게 되어 사경이라 하지 않고 보통 삼경이라 하였다.

5도호부[편집]

五都護府

고려 때 지방 행정 기관의 하나. 현종초에 설치되었다. 뒤에 8목(牧)과 같이 4도호부·8목이 되어 고려 일대에 걸쳐 실질적인 지방의 최고 행정 기관이 되었다. 처음에는 안동(安東, 慶州)과 안서(安西, 海州)·안남(安南, 全州)·안북(安北, 安州)의 네 곳에 설치되었으나, 얼마 뒤 전주·경주는 폐지되고 그 대신 안변(安邊, 登州)·안남(安南, 樹州)·안동(安東) 도호부가 새로 설치되었다.

8목[편집]

八牧

고려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 목에는 정3품의 목사(牧使)를 두어 부속된 여러 고을을 관리케 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양주(楊州)·해주(海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황주(黃州) 등 12목을 두었다가 현종 9년(1018)에 8목으로 개편하였다. 8목은 광주·충주·진주·상주·전주·나주·황주 등을 말하며 오래 계속되어 내려왔다.

호장[편집]

戶長

향직(鄕職)의 우두머리. 고려 태조 때 신라시대 이래로 지방에 세력을 가진 성주(城主)나 호족을 포섭하여 호장과 부호장(副戶長)의 향직을 준 데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지방 자치면에 있어서 많은 실적을 거두었다. 호장은 그 후 각 주(州)에 정원이 정하여졌다. 고려 시대를 통하여 지방의 토호적 존재로서 상당한 세력을 가졌다.

기인제[편집]

其人制

고려 때 지방의 호족 자제를 인질로 상경 숙위(宿衛)케 하는 제도. 고려초에는 향리(鄕吏)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 데려와서 볼모로 삼는 한편, 그 출신 지방 사정에 관한 고문을 삼았다. 이것은 신라 때의 상수리(上守吏)에서 연유된 것으로 향리의 세력을 회유·억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국가의 기반이 잡히면서 기인제는 점차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 후 몽골의 침입 때에는 부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2군·6위[편집]

二軍·六衛 고려 때 중앙군의 조직. 태조의 직속군이 근본이 되어서 편성되었다. 2군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 6위(六衛)는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를 말한다. 6위는 대체로 성종 14년(995)에 정비된 것 같다. 2군은 육위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왕의 친위군 역할을 하였다.한편 6위 중에서 가장 핵심을 이룬 것은 좌우·신호·흥위의 3위로서 수도 개경의 수비는 물론 변방에 대한 경술(更戌)의 임무까지도 띠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금오위는 치안, 천우위는 의장(儀仗), 감문위는 궁궐 안팎 제문(諸門)의 수위를 임무로 하고 있었다. 2군·6위에는 정·부지휘관으로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이 있었다.이 상·대장군들은 그들 자신의 합좌 기관인 중방을 가지고 있었다. 2군·6위는 모두 약 1천 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었다. 각 영의 지휘관은 장군(將軍)이었으며, 이들도 장군방(將軍房)이란 합좌 기관을 갖고 있었다.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합해서 45령이 있었다.

무산계[편집]

武散階

고려의 위계제도(位階制度). 995년(성종 14)의 관제개정과 더불어 제도화된 후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문산계(文散階)와 함께 고려 위계제도의 중심이 되었다. 당나라에서 수입된 제도로, 정(正)·종(從) 9품까지를, 4품 이하는 상·하로 구분하여 29의 산계를 나누었다(정1품은 없음). 품이 같으면 정이 높고 종이 낮은 것으로 하며, 3품 이상을 대장군, 정6품 이상을 장군이라 부르고, 그 하는 위(尉)로 하고 있다. 무산계에는 급전(給田)이 따랐으며, 그 지급대상(支給對象)은 노령(老齡)의 군인·향리(鄕吏)·탐라(耽羅)의 왕족·여진(女眞)의 추장(酋長) 등이었으며, 그 밖에 공장(工匠)·악인(樂人) 중에도 이 무산계를 받은 자가 있었다.노령의 군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무거운 부담에 대한 대가(代價)와 아울러 많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함이었으며 공장·악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탐라의 왕족·여진의 추장에 대해서는 집단 내부에 있어서의 그들의 지위를 보증시키고 동시에 그들을 통해 고려의 지배력을 침투시키려는 의도로 무산계를 주었을 것이다.향리에 대해서는 그들이 관료(官僚)의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라 지방 농민의 통솔자요 지방 군대의 지휘자였으며, 더욱이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까지도 많은 군현(郡縣)에 지방관(地方官)이 없었으므로 그 실질적 지배자인 향리의 힘을 빌려 그 지방을 다스리려는 의도와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무거운 부담을 보상한다는 뜻에서 무산계를 주었다.이와 같이 문무관료(文武官僚)에게는 문산계(文散階)로써 포괄적(包括的)으로 사여(賜與)하고, 그 이외의 광범한 층을 무산계로써 통할(統轄)하였다.



무   산   계



직    품



산          계



정 1 품



 



종 1 품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정 2 품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종 2 품



진국대장군(鎭國大將軍)



정 3 품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종 3 품



운휘대장군(雲麾大將軍)



 







정 4 품



중무장군(中武將軍)



장무장군(將武將軍)



종 4 품



선위장군(宣威將軍)



명위장군(明威將軍)



정 5 품



정원장군(定遠將軍)



영원장군(寧遠將軍)



종 5 품



유기장군(遊騎將軍)



유격장군(遊擊將軍)



정 6 품



요무장군(耀武將軍)



요무부위(耀武副尉)



종 6 품



진위교위(振威校尉)



진무부위(振武副尉)



정 7 품



치과교위(致果校尉)



치과부위(致果副尉)



종 7 품



익위교위(翊尉校尉)



익휘부위(翊麾副尉)



정 8 품



선절교위(宣折校尉)



선절부위(宣折副尉)



종 8 품



어모교위(禦侮校尉)



어모부위(禦侮副尉)



정 9 품



인용교위(仁勇校尉)



인용부위(仁勇副尉)



종 9 품



배융교위(陪戎校尉)



배융부위(陪戎副尉)

문산계[편집]

文散階

고려의 위계제도(位階制度).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 의하면, 문종 때 29계의 문산계를 정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중 일부는 995년(성종 14)의 관제개혁 때에도 그 이름이 나타나 중국식 위계제도가 언제부터 채용되었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문종 때의 제도는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하여 5품 이상의 이름을 바꾸었고, 1308년(충선왕 즉위)에 비로소 정1품을 두어 정(正)·종(從) 각 1품(品)부터 9품까지 갖추게 되었고, 6품부터를 낭(郎)으로 하였으며, 그 후도 여러 차례의 변동이 있었다.



문   산    계 (문종시대)



직    품



산          계



정 1 품



 



종 1 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정 2 품



특 진(特進)



종 2 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 3 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종 3 품



광록대부(光祿大夫)



 







정 4 품



정의대부(正議大夫)



통의대부(通儀大夫)



종 4 품



대중대부(大中大夫)



중대부(中大夫)



정 5 품



중산대부(中散大夫)



조의대부(朝儀大夫)



종 5 품



조청대부(朝請大夫)



조산대부(朝散大夫)



정 6 품



조의랑(朝議郞)



승의랑(承議郞)



종 6 품



봉의랑(奉議郞)



통직랑(通直郞)



정 7 품



조청랑(朝請郞)



선덕랑(宣德郞)



종 7 품



선의랑(宣議郞)



조산랑(朝散郞)



정 8 품



급사랑(給事郞)



징사랑(徵事郞)



종 8 품



승봉랑(承奉郞)



승무랑(承務郞)



정 9 품



유림랑(儒林郞)



등사랑(登仕郞)



종 9 품



문림랑(文林郞)



장사랑(將仕郞)

중방[편집]

重房

고려 때 2군(二軍)·6위(六衛)의 상장군(上將軍)과 대장군(大將軍) 도합 16명이 모여 군사(軍事)에 대한 일을 의논하던 합좌 기관(合坐機關). 현종 때 설치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기록상 의종 21년(1167)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중방은 무신에 의한 일종의 권력 기관으로서, 문신들의 도당(都堂)과 대조가 되는 것이지만 문신들이 정권을 잡고 권세를 부리고 있을 때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 후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뒤부터 기능이 확대되고 또 활발해져 무인 정치의 핵심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때는 최고 행정 기관이 되어 군사는 물론 경찰·형옥(刑獄) 등 백사(白事)를 주관 처리하였으며, 아울러 왕의 동정을 감시하고, 또 왕과의 연락을 긴밀히 하였다. 무인 정치는 곧 중방 정치라고 할 정도로 무신은 중방을 소중히 여겼다. 초기 무인 정치에 있어서는 제장(諸將)들이 서로 어울려 세력을 떨쳤으므로 재래의 중방이 그들의 막부(幕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최충헌(崔忠獻)의 집권 뒤 정치기구에도 큰 변화와 발전을 보게 되면서 중방은 점차 권세를 잃어 군사에 관한 직무만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후 교정도감(敎定都監)이 중방 역할을 담당했다.

군호[편집]

軍戶

고려 시대의 군대 편성 중 하나. 고려 초기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군호는 군인과 양호(養戶)로써 구성되었다. 이들에게는 군인전이 지급되어 2인의 양호로 하여금 이를 경작하여 군인의 장비와 생활비를 제공케 하였다. 군인에 결원이 생기는 경우에는 선군(選軍)을 하여 보충하였는데, 선군을 하는 동시에 군호로 만들어 군인전을 주었다. 이 선군은 백정과 같은 농민 중에서 젊고 용력있는 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천민도 많이 뽑혔고, 이것은 군인의 사회적 신분을 저하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광군[편집]

光軍

고려에서 조직된 최초의 전국적인 군사 조직. 이것은 지방 호족들의 군대를 연합하여 중앙에서 통제해 나가도록 조직되었다. 이는 곧 중앙 정부와 지방 호족에 의한 농민 역역(力役)의 공동 지배 아래 조직된 것이었다. 정종 2년(947) 거란의 침입에 대비코자 조직된 것으로 짐작되는 광군은, 고려의 집권화 정책이 진전되어 지방제도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주현군(州縣軍)으로 개편되어 보다 강력한 중앙 정부의 지배 밑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전국의 광군 조직을 통제해 가는 통수부(統帥部)로는 광군사(光軍司)가 설치되었다.

주현군[편집]

州縣軍

고려 때 2군·6위의 중앙군(中央軍) 외에 각 주·현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군.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지방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초기에 조직된 광군이 주현군으로 개편되었다. 즉 주현군은 지방 호족의 병력을 흡수하고, 한편 중앙에서 지방에 배치한 군대가 지방군화(地方軍化)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 같다. 주현군은 도(道)와 계(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계는 국경 지대의 군사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행정 단위인 진(鎭)마다 초군(抄軍)·좌군(左軍)·우군(右軍)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正規軍)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단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싸울 수 있는 둔전병(屯田兵)적인 상비군이었다. 각 도의 주현군은 보승·정용·1품(一品)으로써 구성되었는데, 보승·정용은 치안·방술(防戌)의 역(役)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품군은 공역(工役)에 동원되는 노동 부대였다.

고려의 과거제[편집]

高麗-科擧制

고려의 과거제도는 광종 때 중국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제술과(製述科, 進士科)·명경과(明經科) 및 의(醫)·복(卜)과를 두었는데, 그 뒤에 더욱 발전하여 인종 때 대략 정비됐다. 제술과는 시(詩)·부(賦)·송(頌)·책(策) 등의 사장(詞章, 文藝)으로써 인재를 뽑는 것이며, 명경과는 유교의 경전으로, 잡과는 법률(法律)·의학·천문·지리 등 기술 과목으로 시험하였다.

제술과와 명경과는 다 같이 문신 등용을 위한 시험이었으나 일반적으로 경학(經學)보다도 문예가 더 숭상되었기 때문에 제술과가 더욱더 중시되었다. 잡과는 기술관 등용을 위한 시험으로 그 격이 가장 낮았다. 성종 때 과거제는 한층 강화되어 복시제(覆試制)가 시행되었으며, 서울에 있는 문신에게는 매월 시부(試賦)를 지어 바치게 하여 문예 숭상의 기풍을 더욱 조장했다. 그러나 무신의 등용을 위한 무과시(武科詩)는 공양왕 때 비로소 실시되었다.

음서[편집]

蔭敍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堂上官)의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등용하던 일. 고려에서는 5품(品) 이상 관리의 아들·사위·동생·조카에게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을 임명하여 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중견 관리만 되면 그 자손은 자동적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5품 이상 관리의 자제라고 해서 누구나 음서의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 한정되었다. 이러한 것은 결국 고려의 관료제도가 강력한 귀족제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국자감[편집]

國子監

고려 때의 교육기관. 고려의 교육기관은 태조 때 경학(京學)이란 것이 있었으나 성종은 모든 제도를 정비하면서 992년(성종 11) 경학을 국자감으로 개편하였다. 국자감에는 국자학(國子學3품 이상의 자제)·대학(大學:5품 이상의 자제)·사문학(四門學:7품 이상의 자제·서인)과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 전문학과가 있었고 국자사업박사(國子司業博士)·대학박사(大學博士)·사문박사(寺門博士)·조교(助敎) 등이 교수하였다. 문종 때에는 국자감에 제거(提擧)·동제거(同提擧) 각 1명, 판사(判事) 1명, 제주(祭酒:종3품) 1명, 사업(司業:종4품) 1명, 승(丞:종6품)·국자박사(國子博士:정7품)·각인 대학박사(종7품) 2명, 주부(主簿:종7품)·사문박사(四門博士:정8품)·학정(學正:정9품) 2명, 학록(學錄:정9품) 2인, 학유(學諭:종9품) 2명, 직학(直學:종9품) 2명, 서학박사(종9품) 2명, 산학박사(종9품) 2명 등의 인원을 두었으며 예종 때 판사를 대사성(大司成:종3품)으로 바꾸었다. 국자감의 학과는 효경(孝經)·논어(論語) 1년, 상서(尙書)·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 각 2년, 주역(周易)·모시(毛詩)·주례(周禮)·의례(儀禮) 각 2년, 예기(禮記)·좌전(左傳) 각 3년을 전부 교수받아야 하며 율학·서학은 국어·설문(說文)·자림(字林)·삼창(三倉)·이아(爾雅) 등을 독서하여야 했다.학생수는 국자학·대학·사문학에 각각 300명으로 하였으나 많을 때는 600명까지 되었으며 덕종(德宗) 때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실시, 학생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1101년(고려 숙종 6)에는 국자감에 서적포(書籍?)라는 국립도서관을 설치, 충선왕(忠宣王) 때 성균관(成均館)으로 개칭, 공민왕 때에 다시 국자감으로 환원하였으나 성균관으로 바뀌어 조선에 계승되었다.

향학[편집]

鄕學 고려 때의 지방 교육 기관. 조선 왕조의 향교와 같다. 중앙의 국자감을 축소한 형태로 지방에 설치하여 지방 문화 향상에 이바지했다. 성종 6년(987)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搏士)를 각 1명씩 보내어 교육을 담당케 했고, 동왕 11년(992) 지방 주·군에 학교(州學)를 세워 생도에게 공부를 권장하였다. 인종 5년(1127)에는 각 주에 향학이 널리 설립되었다.

학당[편집]

學堂

고려 말기부터 설치되었던 학교. 지방의 향교(鄕校)에 대하여 중앙의 각 부에 두었다. 이 제도는 중국에도 없었던 것으로 고려말 유학 진흥의 현실적 요청에서 설치하여 조선시대에 발전을 보았던 기관으로 향교와 달리 문선왕묘(文宣王廟)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학당은 1261년(원종 2)에 동·서의 두 학당(學堂)을 처음으로 설치하여 각각 별감(別監)을 두고 가르친 것이 그 처음이다. 그 뒤에 유교가 불교에 대신하여 사상계를 지배하게 되자 개경(開京)의 각 부에 학당을 설치하여 5부학당(五部學堂)으로 정비 강화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서울을 동·서·중·남·북의 5부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학교를 하나씩 설치하여 5부학당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학사(學舍)가 없어서 대부분은 사원(寺院)을 이용하였으나, 1411년(태종 11)에 처음으로 남부학당이 이룩됨을 계기로 이후 나머지도 모두 건물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북부학당(北部學堂)은 여러 차례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설치를 보지 못하고, 1445·6년(세종 27·8)경에 폐지되어 4부학당(四部學堂)만이 존속을 보았다. 보통 이를 4학(四學)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에 들어와서는 처음부터 5부학당은 설치를 보지 못하고 4부학당만이 있었다고도 한다.학당은 재사(齋舍:寄宿舍)제도를 마련하고, 그 운영은 국가에서 부담하였다. 국가에서는 학생을 교육하기 위하여 학전(學田)·노비(奴婢)·잡물(雜物) 등을 사급(賜給)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연안에 있는 여러 섬들의 어장(漁場)을 주어 그 세(稅)로서 비용을 충당케 하였다. 처음에는 교수 2인, 훈도(訓導) 2인을 두고 성균관(成均館) 직원으로 겸직케 하였으나, 후에는 각 1인씩을 감하여 겸직을 없앴다. 그리고 수업상태를 감독하기 위하여 예조(禮曹)와 사헌부(司憲府)에서 부단히 감독하고 있었다. 학당의 입학자격은 양반과 서인의 자제가 입학했고, 학령(學令)은 소학(小學)으로 정하여, 입학하면 소학부터 암송케 했으며 매 5일마다 시험을 치렀다. 예조에서는 달마다 시험을 치르고, 1년의 성적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성적이 우수한 생도는 성균관에 진학시키는 것이 교육목표였으나, 때로는 학당에서 생원시(生員試)·육월회시(六月會試)·알성시(謁聖試)를 통하여 직접 생원·진사시의 회시(會試)에 갈 수도 있어서 뚜렷한 계통은 없었다. 학생수는 백명이었다.임진왜란 때 학당이 불타서 그 뒤 다시 건물을 세웠으나 학생수가 격감되어 사실상 유명무실케 되어 내려왔다. 대한제국에 있어서 관학이 부진하게 되자 외국인들에 의한 사학(私學)이 세워졌을 때 이 이름을 따다 붙인 일이 있었으니, 배재학당(培材學堂)·이화학당(梨花學堂)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후에 학교로 개칭되었다.

역분전[편집]

役分田

고려 태조 때 공신에게 그 공의 차에 따라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나누어주던 토지 제도. 태조 23년(940) 왕건은 그를 도와 새로운 왕조(王朝)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힘쓴 조신(朝臣)·군사(軍士)에 대하여 관계(官階)를 논하지 않고 다만 성행(性行)의 선악(善惡)과 공로의 다과(多寡)를 헤아려 토지를 분급하였다. 이를 역분전이라 한다. 대개 전시과(田柴科)의 전신이지만 공훈전(功勳田)에 더욱 가깝다.

시정전시과[편집]

始定田柴科

고려 경종 1년(976)에 실시된 최초의 전시과. 급전대상자(給田對象者)의 신분을 사색공복제(四色公服制)에 의해 사계 팔층(四階八層)으로 나누고 관품(官品)과 인품(人品)을 병용(倂用)해서 토지를 지급했다. 문반(文班)은 물론 무반(武班)에도 토지를 지급하였으나 많은 차이가 있었고, 한외과(限外科)라 하여 급전(給田) 규정에서 누락된 자들을 위해 별도의 조처를 취했다. 시정전시과는 직관(職官:실직을 가진 벼슬)과 산관(散官:실직이 없는 벼슬)의 사색공복제에 의하여 토지 분배의 차등을 계정(計定)하였으나 역분전의 정신을 계승하여 인품(人品)도 급전의 기준으로 고려되었다.

개정전시과[편집]

改定田柴科

고려 목종 1년(998)에 시정전시과를 개편한 전시과. 지배 질서가 정비되고, 관인체제(官人體制)가 확립되면서 토지 제도도 이에 따라 제정비할 필요가 생기자 목종 원년 일대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전시과 수급자(受給者)의 과등(科等)을 모두 18과(科)로 나누어 제1과로부터 제18과에 이르기까지 각기 차등(差等)을 두어 각 과등(科等)에 맞는 전시(田柴)의 수령액(受領額)을 규정하고, 또 그 밑에 수급할 자의 해당 관직명을 자세히 기록했다. 시정전시과보다 규정 내용이 퍽 간편하고 체계화되었으며, 문·무 양반(兩班)을 중심으로 하여 오직 관직과 위계(位階)의 높고 낮음만을 표준으로 삼았다. 특기할 것은 군인층(軍人層)이 전토(田土)의 수급 대상자로 나타나 있으며, ‘한오과’에 속했던 여러 잡직(雜職)이 제18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문·무 관직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갱정전시과[편집]

更定田柴科

개정전시과는 덕종 3년(1034)에 다시 개편되고 그 후 문종 30년(1076) 전면적인 재편성을 하였는데 이를 갱정전시과라 한다. 개정전시과의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18과등제(十八科等制)를 채택하였으나 과등에 따르는 전시(田柴)의 결수(結數)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고려 전기의 토지 제도 완성을 의미하는 갱정전시과는 개정전시과에 비하여 전시의 액수가 일반적으로 감소한 대신 무관(武官)에 대한 대우가 현저히 상승되었다. 이에 의하면 전시과의 수급 대상자이던 산관(散官)이 배제되고 또 ‘한외과’도 과내(科內)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부대적 조항으로 무산계(武散階)와 별사과(別賜科)에 대한 전시과가 아울러 설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시과라 하면 이 갱정전시과를 말하는데, 그 내용을 약술(略述)하면 제1과의 중서령·상서령·문하시중에게는 전(田) 100결(結)·시지(柴地) 50결을 주었으며, 그 밑으로는 등급에 따라 줄여서 제18과의 한인(閑人)·잡류(雜類)에게는 전(田)만 17결을 지급하였다.

공음전시[편집]

功蔭田柴

고려 때 전시과의 규정으로 공신들에게 반급(頒給)한 전시. 국가에 공훈이 있는 사람에게 훈전(勳田)을 분급(分給)한 데서 시작되었으나, 공양왕 3년(1391) 토지제도 개혁으로 공음전은 공신전(功臣田)으로 바뀌었다. 공음전은 경종 2년(977) 개국공신(開國功臣) 및 향의(向義)·귀순성주(歸順城主) 등에게 20결 내지 50결의 토지를 주었고, 현종 12년(1021) 상속이 인정되었다. 문종 3년(1049) 양반 공음전시법을 제정하였는데, 수급 대상자는 5품 이상의 문·무 양반이며, 품질에 따라서 최고 1품은 전(田) 25결·시(柴) 15결, 최하 5품 은전 15결·시 5결을 받았다. 모반대역(謀叛大逆) 등으로 공신에서 제명되지 않는 한, 공신의 직자(直子)에게는 죄가 있어도 ⅓을 상속시키게 했다. 문종 27년(1073) 공신에게 자식이 없으면 사위·친조카·양자(養子)·의자(義子)에게 주도록 정하였고, 충렬왕 24년(1298) 자손 아닌 자가 탈취한 것은 자손에게 환급시킬 것을 정했다. 양반 신분 자체에 대한 우대 특전으로 지급된 공음전은 영구적으로 상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영업전(永業田)이라고도 한다.

외역전[편집]

外役田

고려 때 향리에게 주는 토지. 일명 직전(職田). 향리들에게 향역(鄕役)의 대가로 지급한 토지로, 주로 지방 호족 중 중앙 귀족이 되지 못하고 지방에 남아 지방 행정을 담당한 자들에게 지급된 듯하다. 새로운 토지를 사여(賜與)한 것도 있겠지만 토지 개혁 과정에서 주로 이미 소유하고 있던 토지의 수조권(收租權)을 인정해 준 것이며, 향역이 세습된 것과 마찬가지로 토지도 세습되었다. 향리 외역전은 특히 ‘전정(田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직역(職役)을 매개로 하여 지급된 토지를 말한다.

군인전[편집]

軍人田

고려 때 군역의 대가로 주는 토지. 고려의 군사 조직이 부병제(府兵制)냐 아니냐에 따라 군인전(軍人田)의 성격도 달라질 것이다. 여하튼 군인전의 규정은 비록 전시과 속에 포함되어 있으나, 신몰(身沒) 후에 납공(納公)하는 일반 양반전(兩班田)과는 달리, 일대(一代)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정연립제(田丁連立制)에 의하여 세습적으로 상속되었고, 군인마다 양호(養戶)가 딸려서 그들이 이를 경작했다. 군인은 군인전의 경작자가 아니라 그 수조권자(收租權者)였다.

구분전[편집]

口分田

고려 때 군역을 이을 자손이 없거나 전쟁 미망인 등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관리나 군인의 유족에게 준 토지. 문종 1년(1047) 연립(連立)할 자손이 없는 자의 처(妻)와, 부처(夫妻)가 다 죽은 뒤 남자는 없고 아직 시집가지 않은 여자만 있을 경우에 국가는 이들에게 구분전을 지급했다. 구분전은 주로 6품 이하의 사람에게 지급되었다. 고려 시대의 구분전은 관인(官人) 및 군인의 유족(遺族)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이지 당(唐)의 균전제에서 보이는 영업전(永業田)이나 ‘구분전(口分田)’ 따위 인민 일반에 대한 급전(給田)과는 상관이 없다.

한인전[편집]

閑人田

관인(官人)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관리의 길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지급된 토지. 5품 이상의 양반 자제일 경우에는 공음전시(功蔭田柴)가 지급되고, 6품 이하의 양반 자제에게는 한인전이 지급된 것 같다. 그러나 한인전은 공음전시나 구분전과 같이 직역(職役)에 대한 토지의 급부가 아니라, 관인 신분의 우대원칙(優待原則)에 입각한 급전제도(給田制度)였다.

별사전[편집]

別賜田

고려시대의 승직·지리업(地理業)에 종사하는 사람에제 주던 토지. 대덕(大德)에게 전(田) 40결, 시(柴) 10결, 대통(大通)에게 전 35결, 시 8결, 지리박사(地理博士)에게 전 20결, 지리생(地理生)과 지리정(地理正)에게 17결을 주게 하였다.

내장전[편집]

內莊田

고려 때 궁성(宮城)에 소속된 토지. 내장전(內庄田)·장처전(庄處田)이라고도 하며, 왕실 재정의 기본이 되었다. 전국에 산재하여 그 수는 약 360개소에 달하였다 하며, 관할하는 기관을 내장택(內庄宅)이라 한다.

사원전[편집]

寺院田

고려 시대 전시과의 제정(制定)과 더불어 사찰에 분급된 토지. 고려 때의 사원은 전시과의 규정에 따라 분급된 토지 이외에 왕의 기증 또는 신도(信徒)들의 시납(施納)으로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였다. 또한 별사전(別賜田)으로 승직에 있는 대덕(大德)·대통(大通) 등에게도 토지를 주었으므로 사원은 많은 토지를 가질 수 있었다. 사원전은 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으나, 한편 그 영역 내에서 넓은 전장(田莊)을 경영하고 있었다. 경작(耕作)은 승려의 노동 또는 사노(寺奴)의 사역에 의하기도 하였으나 예속 농민의 경작이 지배적이었다. 사원전은 면세(免稅)·면역(免役)의 특권을 가지고 있어서 그 토지가 점차 확대해 갔고, 또 고리대적 활동을 통해서 승려들은 종교적 귀족으로서 세속적 유락(愉樂)과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공해전시[편집]

公?田柴

고려 때 국가의 공적(公的)인 기관에 경비 조달을 위해 분급(分給)된 전지(田地)와 시지(柴地). 중앙에서는 일반 관청을 비롯하여 장택(庄宅)·궁원(宮院)·능침(陵寢)·창고 등에 지급되었고,. 지방에서는 성종 2년(983) 주(州)·부(附)·군(郡)·현(縣) 등 지방 행정 관청과 관(館)·역(驛)·향(鄕)·부곡(部曲) 등 특수 행정 구역에 설정되었다. 공해전시의 수조(收租)는 해당 관청의 사무 경비와 관리들의 잡비, 소속 하인들의 보수에 충당되었다. 따라서 공해전시는 관청의 격(格)의 높고 낮음, 소속 인원의 많고 적음, 직무 성격에 따라서 각각 분급의 양(量)에 차이가 있었다.

공전[편집]

公田

소유권과 수조권을 모두 국가에서 가지고 있는 토지. 정확한 개념은 아직 내려 있지 않으나 대개 개인이나 관청과 같은 기관에 분급되지 않은 국가나 왕실 직속의 토지로서 왕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토지를 말한다. 전국에 산재해 있던 공전은 노예(使役) 또는 농민 역역(力役)을 통해 직접 경영하거나 농민에 전작(佃作)을 위임해 경작한 듯하다. 그 수조율(收租率)은 ¼이며, 그 조는 국고(國庫)에 충당되어 관리의 녹봉을 위시한 국가의 공적인 일에 지출되었다.

사전[편집]

私田

사인(私人)이 소유한 토지를 말한다. 공전에 대(對)하는 개념으로 대개 개인이 수조(收租)하는 토지를 말한다. 고려는 처음에 호족 세력을 중앙 집권 체제에 흡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호족 세력은 그들의 사적(私的) 지배지를 특수한 지목(地目)에 고정시켰고, 대체로 이러한 지목에 속하는 토지는 주로 관료에게 분급, 수조케 했다. 이때 관료들에게 지급된 수조지(收租地)가 사전(私田)이라는 명칭을 가진 듯하다. 공전에 비하여 배액(倍額)의 조세를 부담한 사전은 주로 전호(佃戶)에 의해서 경작되었으며, 조(租)는 소유주에 의해서 직접 수취(收取)되었고, 또한 그 토지는 세습이 되었다. 농민의 개별적 보유 경작지인 전정(田丁)과는 성격이 다른 특수한 지목인 사전은 지배층의 생활 보장을 위하여 설치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과전(科田)조차도 점차 사전화되면서 대토지 겸병(大土地兼倂)이 일어나 국가 재정원이 줄게 되는 원인을 만들었다.

장생고[편집]

長生庫

고려 때 사원(寺院)에 설치한 서민금융기관(庶民金融機關). 장생은 원래 대부(貸付)에 의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것을 말하는데 중국에서 발전된 것이었다. 고려에서는 사원이 사원전(寺院田)에서 수확하는 대부분을 자본으로 하여, 이자 발생의 원칙에 의하여 민간 경제의 융통을 기하는 동시에 사원 자체의 유지·발전을 꾀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사원의 부(富)를 축적하기 위한 것으로 변하였다. 그 후 장생고는 기구를 대규모로 확장하고 그 경영을 여러 방면에 뻗쳤다. 이에 왕실·귀족들도 각각 공사(公私) 장생고를 설치, 부의 집중 현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장생고의 설치는 불교 자체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으며, 귀족들의 부를 증대시켰다.

고려의 보[편집]

高麗-寶

공공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재단을 설정하고 그 이익으로 경비를 지출하던 공적(公的)인 이식기관(利息機關). 보는 신라 때부터 있었다. 즉 진평왕 35년(613)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설립한 점찰보(占察寶)와 혜공왕 15년(779) 김유신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설립된 공덕보(功德寶)가 그것이다. 고려 때는 국가의 보호 아래 학교의 장학(奬學)을 위한 학보(學寶), 승려(僧侶)들의 장학을 위한 광학보(廣學寶), 궁민(窮民) 구제를 위한 제위보(濟危寶), 팔관회(八關會)의 경비 지출을 위한 팔관보 등이 있었다. 그 밖에 불명경보(佛名經寶)·내장택보(內庄宅寶)·제궁원보(諸宮院寶) 등이 있다. 민간의 계(契)와 같이 고리대 기관으로 되어 민간 수탈의 폐를 자아냈다.

고려의 시전[편집]

高麗-市廛

고려 때 시가지에 있던 큰 상점. 고려 때에는 태조 2년(919) 개성에 시전(市廛)이 설치되어 상업이 발전하였다. 시전의 보호와 감독을 위해서는 경시서(京市署)가 설치되어 물가 조절과 상품 종류 등에 대하여 통제를 가하며, 관청에서 허가한 상품 이외에는 마음대로 팔지 못하게 하였는데, 만일 이를 범할 경우에는 엄히 다스렸다. 시전에서는 경시서로부터 상품의 가격을 평가받고 세인(稅印)을 찍은 다음에야 판매할 수 있었다.

벽란도[편집]

碧瀾渡

고려 때 예성강(禮成江) 하류에 있던 국제 무역항. 비교적 수심(水深)이 깊어 배가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좋은 하항(河港)으로서 고려 일대를 통하여 중국과 일본, 멀리 남양(南洋)과 서역(西域) 지방의 상인들이 자주 드나들며 교역하였다.

대송무역[편집]

對宋貿易

고려와 송과의 무역. 고려는 정치적으로 송과 밀접한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북방 민족을 견제했다. 또한 양국은 빈번한 교역을 통해 서로의 문물을 교환하였다. 고려가 송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주로 귀족들의 애호품인 능견(綾絹)·자기(磁器)·약재(藥材)·악기(樂器)·향료(香料)·문방구(文房具:紙·筆·墨) 등이었다. 이 중에서 특히 자기·서적은 각각 고려의 청자(靑磁)와 목판인쇄술(木版印刷術)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나, 그 밖의 다른 물품 수입은 귀족의 사치풍조를 더욱 조장시켰다. 고려의 수출품으로는 금·은·구리·인삼·송자(松子)·모피 등의 원산품(原産品)과 능라(綾羅)·저마포(苧麻布)·백지(白紙)·금은동기(金銀銅器)·부채·금은장도(金銀粧刀), 기타 종이·필(筆)·묵(墨) 등 가공품이 많았다.

은병[편집]

銀甁

고려의 은화(銀貨). 숙종 6년(1101) 처음으로 발행하여 전화(錢貨)와 함께 통용케 했다. 은병은 상업과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주조된 것으로 은(銀) 1근(斤)으로 본국의 지형(地形)을 본떠서 병(甁)을 만들어 이를 화폐로 사용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입이 넓은 데서 활구(闊口)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미(米) 15, 16석(石) 내지 50석에 이르는 높은 가격이었다.

고려의 화폐[편집]

高麗-貨幣

고려시대에 발행한 화폐. 화폐에 대한 기록이 문헌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이다. 그에 의하면 996년(성종 15) 4월에 철전(鐵錢)을 주조했다 하나 널리 통용된 것 같지 않으며, 형태도 알 수 없다. 1097년(숙종 2)에 유문전(有文錢)을 주조해서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공설주점(公設酒店)을 경영하여 주화가 보급되도록 힘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도 백성들의 화폐효용에 대한 인식이 없어 잘 통용되지는 않았다. 『고려사』 및 『송사(宋史)』의 고려전에 의하면 해동통보(海東通寶)·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 등이 고려시대에 발행되었다고 하나 그것이 모두 숙종시대에 주조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1111년(숙종 6)에는 은화(銀貨)도 발행되었는데 그 형태는 한반도를 본뜬 은병(銀甁)이며,. 은 1근으로 만든 것이다. 그 가치는 쌀로는 16 섬내지 30섬이었고,. 마포(麻布)로는 100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위가(單位價)가 높고 위조품이 나와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못하였다.은병화는 그 후 쇄은(碎銀)으로 유통되기도 하였으나 은·동을 합주(合鑄)한 것이 나타났기 때문에 1289년(충렬왕 13)에 이의 사용을 금했다. 그리고 1331년(충혜왕 원년) 소은병(小銀甁)을 발행하였는데 그 가치는 오종포(五綜布) 15필이었다. 몽골침략 후에는 몽골의 화폐인 중통보초(中統寶秒)·지원보초(至元寶抄) 등이 고려에 수입되어 한때 유통되었고, 1390년(공양왕 2)에는 명전(明錢)이 수입되어서 유통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391년(공양왕 3)에 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가 설치되어서 저화를 발행하였다.

건원중보[편집]

乾元重寶

고려시대 996년(성종 15)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로, 본래 중국 당 숙종 때 발행한 화폐를 모방해서 주조한 것으로 보인다. 동그라미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고, 앞면에는 ‘건원중보’, 뒷면에는 ‘동국’이라 새겨져 있다.

해동중보[편집]

海東重寶

고려 때의 화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철전(鐵錢)의 하나로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1103년(숙종 8)에 만들어졌다고 하나 그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대개 해동통보(海東通寶)가 만들어진 숙종 때의 일로 추측된다. 모양은 둥근 바탕에 가운데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고 상하·좌우로 ‘海東通寶’라는 네 글자가 있는데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동국통보[편집]

東國通寶

고려시대 만든 동전의 일종. 모양은 둥글고, 가운데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렸으며 좌우·상하에 ‘東國通寶’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발행 연대는 미상이나, 해동통보와 같이 숙종 때의 것으로 축측된다.

삼한통보[편집]

三韓通寶

고려 때 사용한 화폐. 성종(成宗) 때부터 숙종 때까지 중국의 화폐를 모방하여 철전(鐵錢)을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만든 것인 듯하다. 숙종 2년(1097)에는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또한 4년 후에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여 삼한통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철전을 사용케 했다. 모양은 둥글고 가운데 정4각형의 구멍이 있으며, 상하·좌우로 삼한통보(三韓通寶)라는 글자가 있다.

해동통보[편집]

海東通寶

숙종 7년(1102)에 만든 동전(銅錢)으로 한국에서 처음 사용한 엽전(葉錢). 송과 거란이 전폐(錢幣)를 사용하는 것을 모방하여 1만 5천 관(貫)을 만들어 재상·문무양반·군인에게 나누어주고 그 유통(流通)을 장려하기 위하여 개경의 거리에 술집과 점포를 열어 사용하게 하였다.

주전도감[편집]

鑄錢都監

고려 시대에 돈을 만들기 위해 새로 세운 관청.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주전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1101년(숙종 6년)에 설치하였다. 이미 1097년에 의천의 건의를 받아 주전관을 두고 돈을 만드는 일을 연구하게 하였는데 주전도감이 설치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돈을 만들게 되었다. 1102년(숙종 7년)부터 돈을 만들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해동통보를 만들어내고, 이어 해동중보·삼한통보·삼한중보·동국통보·동국중보 및 은병을 만들었다.

고려의 수취체제[편집]

高麗-收取體制

전시과(田柴科)로 대표되는 토지제도 밑에 고려의 농민은 공전 또는 사전을 경작하고 국가 또는 개인 지주에 대하여 조세(租稅)·공부(貢賦)·역역(力役) 등의 부담을 졌다. 전조(田租)는 토지 수확물의 일부를 바치는 것이며, 그 양은 공전과 사전에 차이가 있었다. 공전은 1결마다 수확물의 ¼에 해당하는 2석 정도를 바쳤으며, 사전인 경우에는 그보다 배가되는 수확물의 ½을 바치게 규정되었다. 또한 토지의 비옥도(肥沃度)에 따라 조세율에 차등이 있었으며, 흉작일 경우에는 조세를 감면하도록 하였다. 고려에서는 개간을 장려하여 진전(陳田)을 개간하는 농민에게는 1

2년 간 전조를 면제해 주었다.전조는 수조자(收租者)가 국가에 바치는 세미(稅米)와 아울러 각 지방의 조창(漕倉)에 수집되어 육로 혹은 해로를 통하여 중앙에 수송되었다. 전조 외에 공물(貢物)이 있어서 상공(常貢, 歲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었다. 상공은 쌀·포(布)·면사(綿絲)·유밀(油蜜) 등을 바치게 했으며, 별공은 그 지방 특산물을 따로 바치게 한 것이다. 농민에게 가장 부담이 큰 역(役)은 군역(軍役)과 요역(?役)으로 구별되어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정남(丁男)이면 누구나 이를 져야 했다. 요역은 각종 토목공사(土木工事)에 동원되는 것으로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군역은 장기간에 걸쳐 복무해야 하는 것이었다.일반 농민은 대개 20세가 되면 군정(軍丁)이 되어 대체로 노동 부대 성격을 띤 지방군(地方軍)에 편입되었고, 여정(餘丁)은 군정을 경제적으로 돕게 되었다. 이러한 수취 체제 중 농민은 특히 군역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유민(流民)이 되거나 호족에 의지하여 전호(佃戶)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의 백정[편집]

高麗-白丁

고려 때에 토지를 직접 경작하던 일반 농민. 백정은 특정한 직역(職役)이 없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토지를 분급(分給)받지 못하는 특수한 농민층이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군호(軍戶)에도 편입시켰고, 또 역정(驛丁)에도 보충하여 이들에 대해서만은 일정한 토지를 주어 정호(丁戶)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공전이건 사전이건 간에 그들에게 맡겨진 토지를 경작하여 조(租)를 바치고 남은 수확으로써 삶을 영위하는 전호(佃戶)였다. 또 신간지(新墾地)를 개척하거나 족친(族親)이라는 혈연을 유대로 하는 의부관계(依附關係)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고려의 노비[편집]

高麗-奴婢

고려 초기에는 호족의 세력 확대와 더불어 노비의 수가 증가되었다. 이에 광종 때 노비안검법이 제정되었으나, 노비의 범법(犯法)이 자주 일어나자 성종 때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이 시행되어서 해방된 노비는 특별한 공을 세운 자를 제외하고는 다시 노비가 되었다. 고려에 있어서의 노비는 신라 시대에 잔존한 노비와 전쟁 포로가 대부분이었으며, 농민 중 몰락한 자도 있었다. 노비는 국가 기관에 소속된 공노비(公奴碑)와 개인에 소속된 사노비(私奴碑), 사원에 속한 사노비(寺奴婢)로 구성되었다. 공노비는 소속 기관에서 잡역에 종사하거나 경작(耕作)에 종사하였으며, 때로는 특수한 양반 관료에게 배당되기도 하였다. 사노비(私奴碑)와 사노비(寺奴婢)는 주인을 위하여 각종 일에 종사하였으나 외거노비(外居奴婢)는 독립된 가계(家計)를 가지고 농경에 종사하였다. 노비는 신분이 세습되고 반역자의 가족, 빈곤한 자의 인신 매매로 그 수가 급증하였으며, 매매 대상이 되었다. 정종 5년(1039)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어머니의 신분 출신에 따라 그 신분이 결정됨)의 제정과 호적제도(戶籍制度)가 완성됨에 따라 노비는 완전히 신분이 통제되었다.

화척[편집]

禾尺

후삼국 시대로부터 고려 시대에 걸쳐 떠돌아다니면서 천업에 종사하던 무리. 무자리(楊水尺)라고도 한다. 왕건의 후백제 정벌 때 끝까지 항거하던 후예라고도 하나, 대개 여진(女眞)의 포로 혹은 귀화인의 후예였다. 관적(貫籍)과 부역(賦役)이 없이 수초(水草)를 따라서 떠돌아다니며 사냥과 고리를 만들어 팔고 도살과 유기 제조를 업으로 했다. 거란 침입에 앞잡이 노릇을 하고 고려말에 왜구로 가장하여 동남해안을 노략질하기도 했다 하며, 광대·백정·기생은 이들의 후예라고 한다.

재인[편집]

才人

천민의 하나로 곡예(曲藝)·가무(歌舞)·음곡(音曲) 등을 일삼던 광대. 재인은 화척의 한 종족으로서 일정한 주택이나 재산이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재주를 부리거나 풍악을 하고 잡가(雜歌)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여가에는 사냥과 고리(柳器) 같은 간단한 수공업품을 만들어 팔며 생활하였다. 이들은 관적과 부역이 없었으며, 무복(巫卜)이나 창우(倡優)를 업으로 삼기도 하였으나, 때로 걸식(乞食)·절도·방화(放火)·살인 등을 감행했다. 또한 고려말에는 왜구로 가장하여 약탈을 일삼기도 했다.

동서대비원[편집]

東西大悲院

고려 때 의료(醫療)를 주로 한 구제 기관. 설치 연대는 미상. 개성의 동·서에 두어서 동쪽의 것을 동대비원(東大悲院), 서쪽의 것을 서대비원(西大悲院)이라 하였고, 이들을 동서대비원이라 합칭했다. 환자의 치료를 주업무로 하고, 기한자(飢寒者) 기타 무의무탁자(無依無托者)를 수용하였다.

혜민국[편집]

惠民局

고려 때 시약(施藥)을 맡은 구제 기관. 예종 7년(1112)에 설치되었다. 충선왕 때 사의서(司醫署) 관할이 되었다가, 공양왕 3년(1391)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개칭하였다. 혜민국에는 판관 4명을 두었는데, 본업(本業:醫官)과 산직(散職)을 교대로 보내어 일을 담당케 하였다.

의창[편집]

義倉

평시에 곡식을 저장하여 두었다가 흉년에 이것으로 빈민을 구제하던 국립 구호기관. 원래 수(隨)나라에서 시작된 것인데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부터 빈민구제의 제도가 있어 춘궁기(春窮期)에 곡식을 나누어 주고 추수 때 거둬 들이는 일이 있었다.고려 때는 태조가 흑창(黑倉)을 두어,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986년(성종 5) 흑창을 의창으로 개칭하여 여러 지방에

설치하였다. 그 후 무신(武臣)의 집권시대까지 의창은 활발히 운영되었으나 무신의 집권과 외국의 침략으로 점차 쇠퇴하였으며, 공민왕 때 다시 설치되어 창왕은 양광도(楊光道)에 이를 설립하고 1391년(공양왕 3)에게 개경(開京)의 5부(五部)에도 이를 두었다.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그 범위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운영도 활발하였다. 그러나 관리의 농간과 백성들의 낭비로 점차 폐단이 생겨 세종은 사창(社倉)을 따로 설치, 문종 때는 이를 의창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구호기관으로 삼았다. 그 후 이들도 별로 성과를 얻지 못하여 중종 때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하여 1525(중종 20)에는 일체의 구호사무를 통일하고 의창은 폐지되었다. 의창은 고려 때 관곡(官穀)을 주로 사용하였으나 이것만으로는 구호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 1023년(현종 14)에는 일반 백성에게서 양곡을 충당하였는데 1417년(태종 17)에는 그 총액이 4백 15만 5천 4백 1섬 2말에 이르렀다. 그러나 백성의 낭비와 관리의 소홀로 점점 재고량이 줄어 국고(國庫)의 고갈을 초래하여 세종 때에는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승려로부터 정전(丁錢)을 징수하거나 절의 토지를 몰수, 또는 향리(鄕吏)의 위전(位田)을 폐지하고 어염세(魚鹽稅)를 양곡으로 징수하는 등의 정책을 세웠으나 세조 때는 의창의 미곡이 아주 없어지게 되었다.원래 의창은 환곡(還穀) 정책에서 나온 것으로 이식을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의창이 재고량이 부족함에 따라 이식을 붙이게 되어 점차 구호기관에서 대여기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의창을 운영하는 관리들이 아전(衙前)이나 지방의 부호(富豪)들과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취하여 실제적으로는 백성들의 부담이 커지게 되어 폐단이 극심하였다.

상평창[편집]

常平倉

성종 12년(993) 개성과 평양 그리고 12목에 설치한 물가 조절을 위한 기관. 고려 때 정부에서는 물가를 조절하기 위하여 포(布) 32만 필로 쌀 6만 4천 섬을 바꾸어 5천 섬은 경시서(京市署)에 저축하여 두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매매케 하였다. 나머지는 서경 및 주군창(州郡倉) 15개소에 나누어 저장하였는데 서경의 것은 분사(分司)의 사헌대에 맡기고, 주군창의 것은 각각 지방장관으로 하여금 관리 매매케 했다. 상평창은 이른바 흉년에는 백성들을 구하고, 풍년에는 농민들이 손해를 입지 않도록 한다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관에서 시가(市價)보다 비싸게 미곡을 사 두었다가 흉년에 곡가가 오르면 싸게 방출함으로써 곡가를 조정, 생활을 돕고자 한 것이었다. 조선 왕조에서도 이 제도는 존속되었고, 선울어지게 된 원인의 하나였다.

종교[편집]

宗敎

태조 이래 불교를 국교로 숭상함으로써 수도 개성을 위시하여 전국에 많은 사찰이 있었다. 신하들뿐 아니라 왕가에서도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일이 허다하였으니 출가한 왕자(王子)를 소군(小君)이라 하였다. 종파로는 오교(五敎)의 교종(敎宗)과 구산(九山)의 선종(禪宗)이 아울러 발전하였다. 교종의 오교 즉 다섯 종파는 화엄(華嚴)·법상(法相)·법성(法性)·열반(涅槃)·계율(戒律)의 다섯 종(宗)이다. 불교가 지극히 숭상됨에 따라 승려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져 광대한 사원전(寺院田)을 차지하고 세속적인 인권도 대단하였다. 광종은 일반 과거제도와 아울러 승과(僧科)도 설치하여 승려들의 등용문을 마련하였는데, 교종의 과거인 교종선(敎宗選)은 교종의 총본산 삼륜사(三輪寺:개성 소재), 선종의 과거인 선종선은 그 총본산 광명사(廣明寺:개성 소재)에서 실시하였다. 여기 합격한 자에게는 교·선종을 막론하고 대선(大選)이라는 첫단계의 법계(法階)를 주었다. 이로부터 대덕(大德:住特의 자격이 있음). 대사(大師), 중대사(中大師), 삼중대사(三中大師)에 차례로 승진하게 되고, 이 이상은 교·선종이 각각 달라서 교종은 수좌(首座)·승통(承統), 선종은 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로 각각 승진하였다. 특히 덕이 높은 중에게 왕사(王師)·국사(國師)의 법계를 주었는데 이것은 승통이나 대선사의 상위에 위치하였다.일국의 사표(師表)인 국사는 임금 한 사람의 스승인 왕사보다 높았다. 이에 따라 위대한 스님도 많이 나타났으니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과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다. 의천은 문종의 아들로, 출가하여 송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돌아와 불경을 간행하고 선·교(禪·敎)가 다 각기 한쪽에 치우치는 폐단을 시정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세우고 천태종(天台宗)을 일으켰다. 지눌은 구산의 선문(禪門)을 통합하여 조계종(曹溪宗)을 창립하고 돈오점수(頓悟漸修)·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하여 선문에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보우(普愚)·혜근(惠勤)·무학(無學) 같은 고승도 나타났으나 불교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파쟁이 심했다.현종·문종 때에 마련했던 장경판(藏經板)은 대구의 부인사(符仁寺)에 두었던 바 몽골군의 침입으로 타버리자, 고종은 약 16년의 기간과 많은 경비를 들여 1251년(고종 38) 대장경판을 완성하니 이것이 지금 해인사에 남아 있는 고려대장경판이다. 한편 불교는 민간신앙과도 결합하여 승려들은 무복(巫卜)·풍수·도참(圖讖)에 통해서 불교와 아울러 이것으로 민심을 좌우했다. 그들은 교화사업과 구호사업에도 나서서 병자에게 약을 주고 치료하였을 뿐 아니라 곤경에 있는 자들을 많이 구호하였다. 승장(僧匠)이라 하여 건축·조각·단청·기와를 만드는 데 솜씨를 보인 자도, 유명한 고려자기에도 그들의 공헌이 있은 듯하다. 불경을 간행함으로써 각자(刻字)로 인쇄문화에 공헌하였고, 삼국시대에 이어 승병(僧兵)의 활약도 컸다.이와 같이 좋은 면이 있는 반면에 좋지 못한 일면도 있었으니, 많은 토지와 종(奴婢)들을 거느리고 대지주의 행세를 하였고, 땅에서 나는 소득 외에 양조(釀造:술)·축산·고리대금으로 축재하는 경향도 있었다. 또 많은 경비를 들여 걸핏하면 절을 짓고, 불교행사를 마련한 것은 고려가 기울어지게 된 원인의 하나였다.

사회·풍속[편집]

社會·風俗

백관의 관복은 광종 때 송나라제도를 따랐다가 몽골이 들어온 후로는 그 제도로 바꾸었고, 말기에 원과 명의 세력이 변동됨에 따라 때로는 몽골복, 때로는 명제(命制)를 따랐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돌아온 후로 명제가 확정되어 근세에 이르렀다. 일반 서민은 대개 흰 옷을 입었고 여자들은 홍(紅)·황(黃)색 등 색옷을 입기도 하였다. 처녀는 붉은 댕기, 총각은 검은 댕기를 달았고, 귀족은 가죽신, 서민은 짚신을 신었으며 귀족의 부인은 너울을 썼다. 죄인은 관이나 두건을 쓰지 못했다. 왕실과 귀족들은 금·은그릇과 정밀한 도자기를 썼고, 서민은 조제(粗製)도자기·토기·구리그릇·놋그릇을 썼다.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사람이 죽으면 화장(火葬)하는 풍습이 퍼졌고, 부모상에는 대개 100일 동안 복상하였다. 삼년 동안 복상하는 습관은 말기의 정몽주 등 유학자들에 비롯된다. 무당은 일반적으로 성행하였고, 산신(山神)을 모신 사당과 서낭당 등이 있었으며 기타 귀신도 많이 모셨다. 설·정월보름·한식·상사(上巳:3월 3일)·단오·추석·중양절(重陽節:9월 9일)·동지·팔관회(八關會)가 일반적인 명절이요, 이 밖에 인일(人日:1월 7일)·입춘·2월 연등·3월 삼짇날·사월초파일·유두(6월 15일)·우란분회(7월 15일)·제석(際夕) 등이 있다. 설에는 차례를 지내고 관청에서도 전후 7일의 휴가를 주었다. 보름에는 다리밟기, 입춘에는 첩자(帖子)를 써 붙였고, 한식에는 성묘(省墓)와 그네, 삼짇날에는 들놀이에 쑥떡을 먹었고, 사월초파일에는 집집

이 연등(燃燈), 단오에는 공치기·석전·그네·성묘, 유두에는 머리를 감아 액을 씻었고, 우란분회에는 절에 가서 공양했고, 추석과 중양절에도 성묘와 놀이, 동지에는 팥죽을 먹었다. 이 가운데서 국가적 경축일은 원정(元正) 즉 설·동지·팔관·성상절일(聖上節日:임금의 생일)이었다. 오락으로는 공치기·씨름·제기·석전(石戰)·바둑·장기·윷·연·투호(投壺)·꼭두각시놀이·광대놀이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