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발전과 제도 정비/고려 귀족정치의 성립
고려 귀족정치의 성립〔槪說〕
[편집]광종(光宗)이 죽자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승로(崔承老)였던 것이다.최승로의 정치 이념은 집권적인 귀족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라가 항복할 때 고려의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 호족과는 달리 지방에 자기의 근거지를 갖고 있지 않은 학자였다. 이것은 자연히 그의 정치적 견해를 집권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또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고 유교의 정치 이념을 내세웠으니 그가 성종에게 건의한 시무(時務) 28조는 이러한 그의 입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성종은 광종의 개혁이 실패한 뒤의 정치적 수습을 이 유학자들의 견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직(鄕職) 개혁을 실시하여 지방 호족들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한편 호족들은 되도록 중앙귀족으로 흡수하려고 하였으며, 고전과 유교에 밝은 귀족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정치에 반영시키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고려 귀족 정치의 터전이 잡혀가고 있었다.고려는 신라가 왕실인 진골 중심의 정치를 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이성(異姓) 귀족들에 의해 정치를 해 나갔고, 이 이성 귀족들은 자기의 출신지를 중요시하였다. 즉, 본관(本貫)은 호족의 세력을 가늠질하는 하나의 표준이 되었고, 그러므로 문벌(門閥) 또는 가문(家門)이 중요시되었으며, 호적(戶籍)이 평민과 별도로 작성되었다. 호족은 자기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혼인정책(婚姻政策)을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통혼은 가문으로서의 최고 영예일 뿐만 아니라, 정권 장악의 첩경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추구하는 명문세족(名門世族)들이 나타났다.안산 김씨(案山金氏)와 인주 이씨(仁州李氏)는 대표적인 존재였다. 안산 김씨는 김은부(金殷傅)가 세 딸을 현종(顯宗)의 비(妃)로 들인 이후 문종(文宗)에 이르는 4대 50여 년 간 외척으로서 정권을 차지하였으며, 인주 이씨는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이 문종의 비로 들어간 후부터 안산 김씨를 대신하여 인종 때까지 7대 80여 년 간 정권을 잡았다. 그 외에도 최충(崔?)을 대표적 인물로 하는 경주 김씨도 당대의 명문(名門)이었다. 이리하여 고려는 정치 사회면에서 귀족 중심의 체제가 이루어졌다. 수도 개경은 귀족의 중심지로서 또는 전국의 심장부로서 발전하였다.
성종
[편집]成宗
(960
997)
고려 제6대 왕(재위 982
997). 태조의 손자로 경종(景宗) 6년(981) 경종이 위독하자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경관(京官) 5품 이상으로 하여금 봉사(封事)를 올리도록 하여 정치의 득실을 논하게 했다. 이에 참여한 최승로(崔承老) 등 유학자의 건의로 신정(新政)을 단행, 고려 초창기의 제반 문물 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성종 1년(982)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백관(百官)의 칭호를 개정, 이듬해 3성(省)·6조(曹)·7시(寺) 등의 중앙 관제를 제정하고 지방에는 12목(牧)을 설치하여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했다. 동왕 14년(995) 6관(官)을 상서 6부(尙書六部)로 하는 등 관제를 개편, 지방 행정 구역을 10도(道)로 고쳤다.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하여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서울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학문과 농업을 장려하였다. 밖으로는 동왕 14년(995)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송과의 관계를 단절, 거란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동북·서북 지방에 특히 유의했다.
최승로
[편집]崔承老 (927 989) 고려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12세 때 원봉성(元鳳省) 학사(學士)가 되어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성종 1년(982) 왕명으로 시무책(時務策) 28조를 올려 국가의 전반적인 면에 걸쳐서 폐단의 시정과 새로운 제도의 제정을 건의하여 고려왕조의 기초 작업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불교 세력의 지나친 횡포와 그로 인한 국가 재정의 손실을 지적, 이를 시정케 했다. 성종 2년(983)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서 지제고(知制誥)를 겸임, 동왕 7년(988)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승진하고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시무 28조
[편집]時務二十八條
고려초 문신 최승로(崔承老)가 성종에게 건의한 28조의 시무책(時務策). 성종(成宗)이 경관(京官) 5품(品) 이상으로 하여금 각기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해 봉사(封事)를 올리도록 하자, 최승로는 이에 정치 이상을 펴 시무책을 올렸다. 그 취지는 태조(太祖)의 정치를 이상(理想)으로 하고, 광종의 왕권 강화책을 반성하여 새로운 고려 사회를 만드는 데 있었다. 28조 중 22조가 전하는 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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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호적
[편집]高麗-戶籍
집 혹은 가족을 단위로 하여 호주 및 가적(家籍)에 속하는 가족과 신분 관계 등을 기록한 고려시대의 공문서. 호적은 행정사의 목적으로 상당히 일찍부터 시행되었을 것이나 대체로 우리나라에서는 율령(律令)이 반포된 삼국시대에 시행된 것 같다. 일본 정창원(正創院)에서 발견된 신라 민정문서(民政文書)는 그 좋은 예이다. 고려 시대에는 백성의 신분에 따라 제도의 내용도 달랐던 듯하다. 즉 서민은 주군현(州郡縣)의 지방관이 해마다 호구를 조사하여 호부(戶部)에 보고하였으며, 양반은 3년마다 호적 2건을 작성하여 하나는 관처에 두고, 하나는 자기 집에 두었다. 내용은 호주(戶主)·세계(世系), 동거하는 자식, 형제, 조카사위 등 족파와 노비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호구 조사는 국가의 수취 체제상 필요한 것이었다.
김은부
[편집]金殷傅
(?
1017)
고려 현종의 장인·정치가. 영주 안산현(永州安山縣) 출생. 공주 절도사(公州節度使)로 있을 때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왕이 공주(公州)에 왔을 때 예를 갖추어 극진한 영접을 하였고, 거란병이 물러가고 왕이 파산역(巴山驛)에서 돌아올 때에 딸을 바쳐 현종의 원성(元成) 왕후가 되었다. 원혜(元惠)·원평(元平), 두 왕후도 모두 그의 딸이다. 그 후 형부시랑(形部侍郞)이 되었고 거란에 사신으로도 다녀왔으며, 지중추사·호부상서에 승진하고 중추사상호군이 되었다. 죽은 뒤 왕후의 인연으로 창국공신(昌國功臣)의 호와 안산군 개국후(安山郡開國候) 등의 여러 벼슬을 받았으며 그의 처도 안산군 대부인에 피봉되었다.
이자연
[편집]李子淵
(?
1086)
고려 문종의 외척(外戚). 시호는 장화(章和). 본관은 인주(仁州:仁川).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한(瀚)의 아들. 괴과(魁科)에 급제하고 정종(靖宗) 초에 급사중(給事中)에 보직. 문종 때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이르러 딸 셋이 모두 문종의 비가 되었는데 인예태후(仁睿太后)·인경현비(仁敬賢妃)·인절현비(仁節賢妃)가 그들이며, 후에 수태위를 겸임, 문하시중에 이르러 공신의 호를 받고 개부의동삼사태수 겸 중서령감수국사상주국경원개국공(開府儀同三司太守兼重書令監修國史上住國慶源郡開國公)에 이르렀으며, 사망 후 문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김심언
[편집]金審言
(?
1018)
고려 성종 때의 명신. 시호는 문안(文安), 본관은 영광(靈光). 최섬(崔暹)의 사위이며 제자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 990년(성종 9) 성종에게 봉사 2조(封事二條)를 올려 성종의 정치를 바르게 도와주었다. 현종 즉위 후 예부상서(禮部尙書)·내사사랑(內史侍郞)을 거쳐 서경유수(西京留守)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