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발전과 제도 정비/11~12세기경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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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세기경의 한국〔槪說〕[편집]

936년에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 왕조는 새로운 지배 체제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10세기말에 제6대 왕 성종(成宗)은 광범위한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닦아 놓았던 것이다.그리하여 11세기에 들어와서는 선대(先代)에 이룩해 놓은 성과를 바탕으로 선대 이래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숙제들이 당면한 현실 문제로 부각되어 시련과 진통을 적지 않게 겪어야만 하였다. 우리는 이를 내정과 대외정책으로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우선 내정에 있어서 고려 왕조가 건국한 이래의 오랜 숙제이던 왕권의 강화는 역대 왕의 일관된 노력에 의해 상당히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그 기반이 확고하게 자리잡히지는 않았다. 가령 성종의 다음 왕인 목종(穆宗)이 서북면 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康兆)에게 폐위(廢位)당하고 그에 대신하여 현종(縣宗)이 즉위하게 된 것이 예가 될 것이다.다음으로 대외문제에 있어서도 고려 왕조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당시 고려의 대외관계는 매우 미묘하고도 복잡하였다. 중국 대륙에는 한민족(漢民族)인 송(宋)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고려는 송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송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북방 민족인 거란(契丹)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동아정세에 파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즉 거란은 고려의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켜 고려를 거란의 영향권 아래에 두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10세기말에는 거란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내침하여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희(徐熙)의 재치있는 외교 수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강동 6성(江東六城)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이때 고려에서는 형식적으로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고 송과의 관계를 단교한다고 했다. 그러나 고려는 문화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던 거란에 대하여 성의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 송과는 여전히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이러한 국제 관계의 모순이 11세기초에 거란의 대대적인 무력 침략을 초래하게 하였다. 즉 1010년에 거란의 성종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내침하여 이듬해까지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을 비롯하여 광대한 지역에서 분탕질을 하였으며, 현종은 멀리 전라도 나주(羅州)에까지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에도 거란은 여러 차례 침략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에서는 거국적인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내침한 거란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019년의 강감찬(姜邯贊)에 의한 귀주대첩이 있다. 그 뒤 고려와 거란은 화평을 되찾아 비교적 평온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고려에서는 이러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극복하면서 점차 그 사회와 문화를 향상시켜 나갔다. 10세기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정비는 주로 당제(唐制)를 모방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도를 시행하는 데 있어서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1세기의 고려에서는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려 일대의 제도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즉 문종(文宗)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이와 함께 이 세기의 고려에서는 빛나는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 문화를 집대성한 사실을 주목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 세기는 고려 일대를 통하여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어 놓았다.말하자면 이 세기는 전(前)세기가 남겨 놓은 난제(難題)를 풀어 나가면서 고려 일대의 사회체제를 보다 확고하게 마련하였다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북방민족인 여진족(女眞族)과의 관계도 묘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때로는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별로 강대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이 세기까지 여진족은 고려에 복속(服屬)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여진족은 점차 세력을 규합하여 강성해지면서 12세기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한편 12세기의 인종(仁宗)초로부터 고종(高宗) 즉위 전후에 이르는 약 90년 간은 정치적·사회적인 면에서 확실히 한 획을 그을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때는 고려 전기 이래의 정치조직 자체에 내포된 문신 귀족 전성기의 타성과 부패 속에서 여러 모순과 상극적 요소가 자라 차례로 폭발되었다. 그 분규는 먼저 개경의 부패한 귀족사회 자체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즉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그것이다. 그 뒤를 이어 서경 중심의 소위 개혁정치를 꿈꾸던 묘청(妙淸) 일파의 반란이 일어났다.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毅宗) 때에는 역대를 통한 문존무비(文尊武卑) 풍조가 마침내 폭발해 정중부(鄭仲夫) 등의 쿠데타와 무신정권의 지배체제를 드러냈다. 또 이러한 지배체제에 대한 반발적 운동이 무신 상호간의 상극, 각 지방의 농민 및 노비의 반란이란 형태를 띠고 일어났다. 이리하여 20여 년의 짧은 기간에 주마등같이 무인들의 군상(群像)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등 고려사회는 암흑과 혼란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