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성립/고려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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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통일〔槪說〕[편집]

태조 왕건은 일시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낙동강의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는 교전(交戰) 상태를 지속하였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에서는 지방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外交戰) 양상을 전개한 고려와 후백제의 균형은 고창(古昌, 安東)에서의 전투를 계기로 고려측의 승리로 기울게 되었다. 고려는 이에 그 전선을 후퇴한 후백제를 정면에서 위협하였다.한편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 등에게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전열(戰列)이 분열되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935년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무장(武將)이며, 동시에 정치가요 외교가인 태조는 이로써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936년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켰다.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 태조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영토를 넓히고,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를 원용(援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하는 등 신라의 지배층을 흡수·회유하였다. 또한 통일 후 호족들과 통혼(通婚)하여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과 타협 또는 연합하였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들의 존재는 태조 왕건의 적지 않은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그가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고 특히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후세에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도 이러한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조 왕건은 북진책(北進策)을 펴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경계하였으며, 국토 수복과 신세력의 육성을 도모하여 서경(西京, 平壤) 개척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장군 유금필(庾黔弼)로 하여금 동북 지방을 수복케 하여 영토를 확장하도록 했다.그러나 태조가 죽자 호족 세력이 대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 혜종(惠宗)을 거쳐 정종(定宗) 때에 이르러서는 왕규(王規)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정종초에서 서경의 진장(鎭將) 왕식렴(王式廉)에 의해 제거되고 말았지만, 당시 왕권의 불안한 모습을 잘 전하여 주고 있다.고려의 왕권은 광종(光宗)의 개혁에서 비로소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즉 광종은 호족 세력의 증대를 억제하기 위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고, 중국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科擧制)를 시행, 문치주의(文治主義)로 전환했다. 또한 광종은 새로운 관료체제 설정의 기초작업으로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 서경(西京)을 개척하였다.왕권강화를 위한 이러한 제반 건국공신(建國功臣)의 불만은 컸으나 광종은 이들을 모조리 숙청함으로써 중앙 귀족들에 대하여 왕위를 떨칠 수가 있게 되었다.

태조 왕건[편집]

太祖王建 (877∼943)

고려 제1대 왕(재위:918

943). 성은 왕(王), 자는 약천(若天), 휘는 건(建), 시호는 신성(神聖), 송악(宋岳) 출생. 금성 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효공왕 4)에 국원(國原·忠州)·당성(唐城·南陽)·광주(廣州) 등지를 경략(經略)하고, 906년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견훤(甄萱)의 군대를 격파, 909년 진도(珍島) 부근의 도서(島嶼)를 공격하고 금성(錦城)을 정복하여 시중(侍中)이 되어 신임과 인망을 얻었다.태봉(泰封) 건국에 막중한 공을 세우고 궁예가 포악해지자, 918년에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하여 궁예는

축출되고 왕건이 추대되어 6월 15일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 919년 서울을 송악(宋岳)에 정하였다.935년(천수 18)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 견훤과 그의 아들 신검(神劍)과의 싸움이 벌어진 틈을 타서 견훤을 포섭하고 신검을 공격하여 홍산(黃山:연산)에서 대승, 드디어 국토를 통일하였다.그 후 신라와 후백제의 유민들을 포섭, 융화·결혼 정책을 쓰고 귀족들은 예로서 대접하였고, 사심관(事審官)·식읍(食邑)·호장(戶長) 등을 주어 회유(懷柔)하였다. 한편 숭불정책(崇佛政策)을 써서 불교를 국교고 삼아 사원을 지었고 승려(僧侶)를 우대하였으며, 신라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학(敎學)·사상(思想)·민간신앙을 적극 보호하였고, 도참(圖讖)을 믿어 보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요십조(訓要十條)』 『정계(政戒)』 『계백료서(誡百療書)』 등을 내어 왕권을 확립하고 고구려의 고도 서경(西京)을 주요시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고 옛땅을 찾으려는 북진정책(北進政策)을 써서 서북면을 개척하고 발해(渤海)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여진족(女眞族)의 거주지를 공략하였으며, 거란이 발해를 멸한 후 거란과는 국교를 단절하였다. 만년에는 그의 북진정책으로 서북으로는 청천강(淸川江) 하류 안주(安州) 지방, 동북으로는 영흥(永興) 지방까지 확장되었다. 능은 현릉(顯陵)이고, 비(妃) 장화왕후(莊和王后)에게서 난 아들 무(武)가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혜종(惠宗)이다.

신숭겸[편집]

申崇謙 (?

927)

고려의 개국 공신. 초명은 능산(能山), 시호는 장절(壯節), 본관은 평산(平山).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있었다. 궁예 말년의 장수로서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 등과 모의하여 왕건(王建)을 추대해서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927년(태조 10) 신라를 도와 공산(公山)에서 견훤과 싸우다 포위를 당하여 형세가 위태할 때 김낙(金樂) 등과 함께 역전(力戰)하다가 전사하여 태조의 위급을 모면케 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숭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로 원윤(元尹)을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새로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일찍이 숭겸이 태조를 따라 삼탄에 사냥을 나갔을 때에 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보고 태조가 말하는 대로 셋째 놈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췄다. 태조가 크게 칭찬하고 평주(平州:平山)라는 본관을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結)을 주어 자손 대대로 조(?)를 받게 하였으니 이 땅을 궁위(弓位)라 불렀다.

신검[편집]

神劍 (?

936)

후백제 제2대 왕(재위: 935

936). 견훤의 맏아들. 견훤이 10여 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전하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두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의 권유를 받아, 태조 18년(935)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다음 왕이 되었다. 탈출한 그의 아버지 견훤과 함께 왕건이 공격해 오자 일선군(一善郡)에서 항전하였으나 패하고 항복하였다.

경순왕[편집]

敬順王 (?

978)

신라의 마지막 왕(재위:927

935년).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시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을 살피고,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다.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았으며, 왕건의 딸 낙랑 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政丞)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마의태자[편집]

麻衣太子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태자. 935년(경순왕 9)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 항복키로 결정하자, 천년사직(千年社稷)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이를 반대하였다. 신라가 고려에 병합되자 금강산에 들어가서 마의(麻衣)을 입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여생을 마쳤다.

사심관[편집]

事審官

고려 때의 관직. 지방의 자치적인 관리들을 지배하였는데, 그 임무는 신분의 구별, 부역의 공평, 풍속의 교정(矯正) 등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원은 태조 18년(935) 신라의 경순왕이 항복해 오자 그를 경주 사심관으로 삼고, 동시에 여러 공신을 각각 출신 주(州)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副戶長) 이하의 향직(鄕職)을 다스리게 한 데서 비롯한다.민심 수습과 권력층의 회유를 목적으로 한 사심관 제도는 처음에 정원이 없었으나 고려의 지반이 공고해짐에 따라서 차츰 통제를 가하여 성종 때는 5백 정(丁) 이하의 주는 4명, 3백 정 이하의 주는 3명, 그 이하는 2명으로 정하였다. 현종(縣宗) 초년에는 아버 지나 친형제가 호장(戶長)인 사람을, 인종 2년(1124)에는 처(妻)의 친척이라도 향직에 있으면 사심관이 될 수 없게 했다.사심관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을 수행하기 위한 특수 관직이었으나 민폐(民弊)도 많아 문종(文宗) 이후로는 그 임면(任免)을 맡는 사심주장사(事審主掌使)를 두어 통제했다. 이 제도는 충렬왕 9년(1283)에 폐지되었으나 권력 있는 호족들이 스스로 사심관이 되어 더욱 극심한 폐단을 가져왔고, 이들이 점점 토호화(土豪化)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좀먹었다.

훈요십조[편집]

訓要十條

고려 태조가 그의 자손들에게 귀감(龜鑑)으로 남긴 10가지의 유훈(遺訓). 일명 신서십조(信書十條)·십훈(十訓). 943년(태조 26) 4월에 태조가 신임하던 중신(重臣) 박술희(朴述熙:朴述希)를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 친히 주었다 한다. 그 전문(全文)이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실려 전하고 있는데 주요 골자(骨子)를 들면 다음과 같다. 즉, 국가의 대업(大業)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은 것임을 말하고, 사사(寺社)의 쟁탈·남조(濫造)를 금하며, 연등(燃燈)과 팔관(八關)과 주신(主神)을 함부로 가감(加減)치 말고, 왕위(王位)는 적자적손(嫡子嫡孫)의 계승을 원칙으로 하되 원자(元子)가 불초(不肖)할 때엔 그 형제 중에서 인망(人望)이 있는 자를 택하고,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본받지 말며,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대업만대(大業萬代)의 땅이니 중시(重視)하되 차현(車峴:車嶺) 이남 공주강(公州江:錦江) 외의 산형지세(山形地勢)는 배역(背逆)하여 인심도 그와 같으므로 등용치 말라는 등의 내용이었다.훈요십조는 태조의 사상과 정책을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으로서 곧 태조는 사상적으로는 불교를 존중하고 풍수지리설을 혹신(酷信)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상은 그의 호국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당시 성행된 미신적인 풍수·도참사상이 농후하게 반영되어 있는데, 태조는 이를 그의 실제 생활에서 얻은 체험을 통하여 정책면에서 잘 적응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이마니시(今西龍) 같은 학자는 이 훈요십조의 내용은 후인(後人)이 조작(造作)하였으리라는 학설을 낸 바 있었으나, 그 뒤 우리나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태조 자신이 쓴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정설(定說)로 되었다.훈요십조는 태조가 그의 자손에게만 몰래 전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것이 사서(史書)에 실린 뒤로는 식자간(識者間)에 널리 알려져 뒷날에는 흔히 임금을 간(諫)하는 신하들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북진책[편집]

北進策

고려 건국이념(建國理念)의 하나로 고려시대를 일관(一貫)한 정책. 고려는 태조 때부터 북진책을 표방하여 고구려의 옛 도읍 평양성을 중시하여 서경으로 삼고, 임금이 자주 행차하였다. 이후 역대를 통해 고려는 북진책을 계승하여 성종 때는 청천강(淸川江)을 넘어 압록강 연안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성종 10년(991)에는 여진족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냈다. 고려의 북진책은 만몽 지방에 요(遼, 契丹)·금(金, 女眞)·원(元, 蒙古) 등의 강국이 등장하므로 그 이상을 실현하지는 못하였으나 기회를 틈타서 북벌을 행하기도 했다. 윤관(尹瓘)의 여진 정벌, 공민왕 초기의 8참(八站) 정벌, 우왕 때의 요동 정벌(遼東征伐) 출병도 모두 북진책의 계승에서 나온 것이었다.

유금필[편집]

庾黔弼 (?

941)

고려 태조 때의 무장. 평주(平州) 사람으로 태조 6년(923) 마군장군(馬軍將軍)이 되어 골암진(?岩鎭)에 침입한 북번(北蕃)들을 평정하였고, 동왕 8년(925) 정서(征西) 대장군으로서 연산진(燕山鎭)에 침입한 백제의 길환(吉奐)을 죽이고 임존군을 쳐서 많은 전과를 거두는 등 태조를 도와 후삼국 평정에 큰 공을 세웠다.

왕규의 난[편집]

王規-亂

고려 초기 왕실의 외척 왕규(王規)가 일으킨 반란. 왕규는 고려 초기 사람. 태조를 섬겨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태조는 왕규의 두 딸을 맞아들여 하나는 제15비(妃), 하나는 제16비를 삼았다. 제16비가 아들 하나를 낳으니 광주원군(廣州院君)이라 하였다. 945년(혜종 2) 왕규는 야심이 있어서 임금 혜종(惠宗)에게 무고하기를 임금의 동생 요(窯)와 소(昭)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 하였으나 임금은 거짓말임을 알고 더욱 동생들을 사랑하였다.점복(占卜)에 밝은 최지몽(崔知夢)이 하늘의 별을 보고 나라에 역적이 일어나겠다 하니 임금은 왕규가 자기 동생들을 해치려는 징조로 짐작하고 소(昭)와 자기의 맏딸을 결혼시켜 집안을 튼튼히 해 주었다. 왕규는 자기 딸이 낳은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밤중에 임금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심복을 몰래 들여보내 죽이려고 하였다. 임금은 마침 잠이 깨어 한주먹으로 이를 때려 죽인 후 사람을 불러 끌어내게 하였으나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하루는 임금이 몸이 편치 않아 신덕전(神德殿)에 있는데, 최지몽이 아뢰기를 장차 변이 있을 터이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임금은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겼다. 왕규는 밤에 심복들을 거느리고 와서 벽을 뚫고 들어갔으나 임금이 잠자리를 옮긴 것을 알고 너의 수작이 아니냐고 하였으나, 최지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임금 혜종은 이를 불문에 붙였다. 그 해에 혜종이 세상을 떠나고 동생 요(堯)가 왕위에 오르니, 곧 정종(定宗)이다. 왕규는 재빨리 정종의 명령이라 사칭하고 왕실에 충성된 박술희(朴述熙:朴述希라고도 쓴다)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그러나 정종은 전부터 왕규의 동태를 알고 있던 터이라 혜종의 병이 위독하자 서경(西京:평양)의 수비대장 왕식렴(王式廉:태조의 종제, 정종의 당숙)과 미리부터 연락을 해두었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開城)에 들어와 정종을 호위하니 왕규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이에 왕식렴은 왕규를 붙잡아 갑곶(甲串)에 귀양보냈다가 사람을 보내 죽여버리고 그의 일당 3백여 명을 처형하였다.

왕식렴[편집]

王式廉 (?

949)

고려 초의 공신. 태조의 종제(從弟). 군부서사(軍部書史)로부터 출발하여 많은 벼슬을 지냈고, 태조가 서경을 중요시하여 왕식렴을 진장(鎭將)으로 임명하니, 왕식렴은 오랜 세월 동안 평양 개척에 노력하였다. 혜종이 죽은 후 정종이 즉위하면서 왕실의 외척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다. 정종은 그 공을 치하하여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의 호를 내리고 다시 대승(大丞)을 덧붙였다.

광종[편집]

光宗 (925

975)

고려 제4대 왕(재위 949

975년). 이름은 소(昭), 자는 일화(日華). 태조의 셋째 아들. 신명태후(神明太后) 유씨(劉氏)의 소생. 정종의 아우.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 태후(大木太后) 황보씨(皇甫氏). 연호를 광덕(光德)이라 했다가 이듬해 후주(後周)의 연호를 사용했다.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근친 결혼을 장려하고 외척의 폐를 없애려 했다.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으로 과거를 실시했다. 이 밖에도 관리의 복제를 정하고 개경을 황도로 개칭, 서경을 서도라 했다. 또 국토 개척에도 주력하는 등, 왕권 확립과 국력 증강에 많은 치적을 남겼다.

광종의 개혁[편집]

光宗-改革

고려의 제4대 왕 광종이 실시한 개혁. 고려의 건국 초 광종은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 첫 착수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의 실시였다. 그리고 이어 중국인 쌍기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문치주의(文治主義)로 전환한 표시로, 무신 대신에 문신을 관리로 등용하려는 것이다. 문신을 등용하는 기준은 유교에 두었다. 따라서 과거제도의 실시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관료 체제 설정의 기초 작업이었다. 이것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 백관(百官)의 공복(公服) 제정이었다. 이 복색의 제정은 왕권 중심으로 귀족층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광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西都)라 칭했으며, 광덕(光德)·준풍(峻豊) 등의 건원(建元)을 하여 왕권 강화 운동을 벌였다.이러한 제반 개혁에 대하여 건국에 공이 있는 장상(將相)과 그 자손들이 불만을 나타내자 광종은이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이리하여 적어도 개경의 중앙 귀족들에 대해서는 왕위를 떨칠 수 있게 하였다.

노비안검법[편집]

奴婢按檢法

광종 6년(956)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여 원래 양민(良民)이었던 자로서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켜 주고자 한 법(法). 이것은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交替期)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보다 중요한 동기는 당시 귀족들의 세력 기반을 억제하는 반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정책이었다. 이 법은 귀족들의 불평을 많이 사게 되고 또한 지나친 혼란이 야기되자 오히려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이 나오게 되었다.

서경[편집]

西京

고려 삼경(三京)의 하나. 태조 왕건이 신라 통일기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을 옮겨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 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였다. 서경은 그 후 줄곧 중요 시설과 기관이 설치되고 풍수(風水)·도참설(圖讖說)에 의하여 역대 임금이 자주 행차했다. 성종 14년(995)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 등 관원을 설치하고, 이후 문·무반 및 5부(五部)를 별도로 설치하여 개경과 대등한 제도와 지위를 갖추게 되었다. 인종 때는 묘청(妙淸) 등에 의한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이 일어났고, 그 결과 서경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뒤에 서경의 복구 문제가 대두하여 인종 16년(1138) 6조를 설치하고 영(令)·승(丞) 등을 두었다. 원종 10년(1269) 최탄(崔坦),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여러 성을 바치고 원(元)에 항복하였다. 원은 이 곳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았으나 충렬왕 16년(1290) 고려에 다시 반환되어 서경이라 하였다. 그 후 공민왕 때 평양부(平壤府)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