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성립/호족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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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의 문화〔槪說〕[편집]

9세기 이후에 있어서의 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은 선종(禪宗)의 유행이었다. 선종은 소의경전(所依經典)에 의하여 그 종파를 구별하는 교종(敎宗)과 대조되는 입장에 선다. 이러한 선종은 선덕여왕 때에 처음 전래된 이후 9세기초 도의(道義)에 의해 크게 성행되어 9산(九山)이 성립되었다. 이 선종은 주로 신라의 변방에서 발달하였으며,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자랐다.신라 말기에는 도당(渡唐) 유학생 가운데 걸출한 학자가 많이 나왔는데, 김운경(金雲卿)·김가기(金可紀)·최치원 등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최치원은 당에까지 문명(文名)을 크게 날렸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약간의 시문(詩文)만이 현존한다. 7 8세기에 크게 발달한 향가는 9세기에도 널리 보급되었던 것 같다. 9세기말에는 진성여왕의 명에 의해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이 대구화상(大矩和尙)과 각간(角干) 위홍(魏弘)에 의해 편찬되었다.신라 말에는 호족의 대두와 함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널리 유포되었다. 중 도선(道詵)에 의해 선양된 풍수지리설은 호족 세력에게 수용되었는데, 이에 각지의 호족들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해서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하였다. 고려의 통일 후 풍수지리설은 크게 발전하여 지배자나 지방 호족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지방세력이 성장한 이면에는 지방문화가 발달하고 있었다. 신라의 난숙한 귀족문화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지방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 호족들이 주도하고 지방민들이 참여하는 지방 단위의 문화활동이 전개되어, 지방사회 단위의 불사(佛事)들이 추진되고 지방학교들이 세워졌다. 9 10세기경 지방에서 만들어진 불상이나 석탑 등은 왕경(王京)에서 파견된 일류 장인들이 만들어낸 이전 시기의 작품만큼 균형잡히고 세련되지 못하였으나, 지방별로 소박하고 꾸밈없는 개성미를 보여준다.지방 출신들의 지적 수준도 향상되었다. 소경(小京)과 같은 지방의 중심지들에서는 일찍부터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신라 말에는 학식을 갖춘 문인의 저변이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초에 이르면 태조 왕건을 비롯한 지방 출신 지배층들은 이전 시대의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책을 제시할 정도로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나 정치이념에 있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고려 관인층의 다른 한 부류인 신라 6두품 출신의 문인들보다는 수준이 낮았지만, 호족 출신들도 대개는 기초적인 문인적 소양을 갖추었고, 그것은 계속 향상되어갔다. 고려 초 이래로 호족 출신들은 문인적 소양을 갖춘 관인집단의 주된 구성원이었다.새로운 시대적 상황은 인간관과 신분관의 변화와 함께 지배자로서의 관인(官人)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가져왔다. 불교가 하층민에까지 확산되고, 보편적 개체로서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종(禪宗) 교단이 번창함에 따라 새로운 인간관이 확산되었다. 왕족을 신성족(神聖族)으로 표방한 건국신화나 왕족이 전생에 부처의 혈통이었다는 진종설화(眞宗說話)와는 대조적으로, 8세기 중엽의 설화에서는 노비와 같은 하층민도 깨달음을 얻어 해탈할 수 있는 존재로 이야기되었다. 새로운 사조에 따른 인간관이 확산되면서 혈통별 신분 차이를 극도로 강조하는 골품제에 입각한 인간관이 붕괴함에 따라, 새로운 사회질서의 출현이 요구되었다.골품제의 폐쇄성에 대한 비판은 일찍부터 제기되어, 고려 초에는 학식이 높은 현인을 관인으로 등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태조 왕건이 즉위 직후 발표한 정치적 급선무의 하나도 현인의 등용이었다. 그러한 이상이 실현되지 못한 경우도 많았지만, 그것은 사회적 공론으로서 그리고 관리인사의 이상적 원칙으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혈통에 따른 신분의식은 남아 있었지만, 그에 따른 제약과 폐쇄성은 크게 약화되어 이전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였다.고려의 법제에서는 골품제와 달리 지배층조차 신분별로 세분하여 관등의 상한을 두거나 관직을 제한하는 신분적 편협성이 제거되었고, 학식의 정도를 기준으로 하는 과거제도가 새로이 중요한 관리등용 제도가 되었다. 고려시대 문화의 근간을 이룬 것은 유교, 불교, 음양설과 결합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그리고 팔관회(八關會) 등의 국가적 제전(祭典)과도 결합된 전통적 토속신앙이었다.유교는 지배층의 정치이념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 반면, 불교·토속신앙·풍수설은 하층에서 상층까지 사회 전반의 생활문화로 자리잡고 있었다.지배층의 문인적 소양은 호족 출신들이 관직체계 속에 편입됨에 따라 좀더 깊어져갔으며, 그와 함께 유교 정치이념도 지배층 내에서 더욱 확산되었다. 광종대에 시작된 과거제는 이를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초 유교 정치이념은 새로운 체제가 모색되는 상황에서 중요한 개혁이념으로 작용하여, 새로운 군신관계의 정립, 정치제도의 제정, 십일세의 제정 등 중요한 정책들의 밑바탕이 되었다.또한 고려 초에 불교나 음양설에 의지하지 말고 유교 정치이념으로 통치할 것을 건의하는 유신(儒臣)이 있었으나, 태조나 지배층 일반에서는 유교 정치이념과 불교 등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하층민부터 상층까지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불교나 토속신앙은 정치적으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유교 정치이념에 따른 정책이 추구되는 가운데 많은 불교의식들이 국가적으로 거행되었다. 도읍지나 건축지의 산천의 형세가 국가나 개인의 화복(禍福)과 성쇠를 좌우한다는 풍수설에 따라 건국을 합리화하는 설화가 나타나고 또 그에 따라 건축물이 만들어졌다. 또한 태조는 불교의식과 습합되어 전래되어온 토속신앙의 제전인 팔관회와 연등회(燃燈會)를 국가적 제전으로 확립하였다.태조대에도 유교 정치이념이나 중국의 제도 등 발달된 외래문화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태조가 후대의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주장하였듯이, 고려 나름의 독자성을 지켜나가는 가운데 중국문화의 수용이 시도되었고, 전통적인 제전 등과 더불어 전통문화도 존중되었다.불교는 철학적인 면에서 사조(思潮)를 이끌었으며, 현세에서의 기복과 호국신앙으로도 지배층과 피지배층 대다수에게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불교는 토속신앙이나 풍수지리설과 융합되었으며 그에 따라 다른 계통의 신앙이나 사상을 지닌 부류들도 신도로서 폭넓게 흡수하였다. 지방공동체 단위의 종교적 결사체인 향도(香徒)에는 토속신앙에 뿌리를 둔 선랑(仙郞)과 불교 승려가 함께 참여하였으며, 승려가 당대 풍수설의 대가로 등장하기도 하였다.종교로서의 불교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국가권력은 초기부터 불교 교단조직에 깊이 관여하였다. 9 10세기경에는 선종과 교종(敎宗)이 대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종의 다섯 종파와 선종의 아홉 선문(禪門) 등 교·선 양종 내부의 여러 종파들도 대립하였다. 이러한 경쟁·대립과 함께 화엄종의 남·북악파(南北岳派)와 같이 종파 내부의 계파간에도 대립이 있었다. 이러한 경쟁과 대립은 불교철학에 대한 다양한 논쟁과 모색의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속세와 연결된 교단간의 세력대결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불교 교단의 안정은 사회의 안정에도 필요하였다. 태조는 즉위 초부터 여러 종파들에 대해 고른 관심을 기울였으며, 훈요십조에서도 선종과 교종을 균등하게 언급하고, 종파별 사원쟁탈을 금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해인사[편집]

海印寺 경남 합천군 가야산(陜川郡伽倻山)에 있는 절. 통도사·송광사(松廣寺)와 함께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건립되었다. 애장왕의 왕비의 병이 치유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한다. 이 절은 신라 말 승통 희랑(僧統希朗)에 의해 크게 일어나고, 고려 때는 의천(義天)이 『속장경(續藏經)』의 간행을 시도한 곳이다. 창건 당시의 건축은 알 수 없고, 3층 석탑·석등 등이 현존한다. 조선 성종 12년(1481) 이후 8년 간 중건하였으나 여러 차례 불탔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된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에는 유명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 보관되어 있다. 50여 동(棟)의 건물을 가진 이 절은 말사(末寺) 46사(寺)를 관리하고 있다.

선종[편집]

禪宗 불교의 한 종파. 정려(靜慮)·좌선(坐禪)으로 내관(內觀)·내성(內省)하여 불성(佛性)을 찾고, 설교·문자를 떠나 즉시 불심(佛心)을 중생에게 전하는 종파이다. 기원은 석가가 영산회(靈山會)에서 말없이 꽃을 꺾은 데서 제자 대가섭(大迦葉)만이 그 뜻을 안 데 있다. 520년 달마(達磨)가 중국에 전하여 혜능(惠能)·신수(神秀)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784년(선덕왕 5) 당의 서당 지장(西堂 知藏)에게서 법을 받아온 도의(道義)를 시조(始祖)로 하는 가지산문(迦智山門)을 비롯하여, 9산문이 성립되어 한창 번성했으나, 고려 때에는 점차 쇠퇴하였다. 고려 명종 때 불일보조(佛日普照)가 조계산(曺溪山)에 수선사(修禪寺)를 세우고,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설립, 일으켰으나, 그 뒤부터 승행(僧行)이 타락되면서 차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태고 보우(太古普愚)는 중국 호주 하무산(霞霧山)의 석옥 청공(石屋淸珙)의 법을 받아왔고, 나옹 혜근(懶翁惠勤)은 강서의 평산 처림(平山處林)의 법을 받아옴으로써 2파로 갈리었다. 그러나 나옹의 법계(法系)는 얼마 안 되어 없어지고, 태고의 법계만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선종의 유행[편집]

禪宗-流行 선종은 9세기 이후 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으로, 교종과는 대조되는 입장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는 것이다. 선종에서는 견성오도(見性悟道)를 주장하며, 방법으로는 좌선(坐禪)을 택한다. 이러한 선종은 선덕여왕 때에 처음 전래된 이후 9세기초 헌덕왕 때의 도의(道義)에 이르기까지 이렇다할 이해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후 점차 성행하여 9산(山), 즉 9개의 파가 성립하게 되었다.

도의[편집]

道義 신라의 중. 속성은 왕(王), 법호는 원적(元寂). 선덕왕 1년(780) 당에 가서 지장(智藏)의 제자가 되어 불법(佛法)을 물려받고 도의라 개명했으며, 헌덕왕 13년(821) 귀국하여 남선(南禪)을 전하였다. 도의의 남선에 의하면 북선(北禪)과 함께 2계통의 선(禪)이 있게 되고,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개조가 되었다. 헌덕왕(憲德王) 때에는 해은사(海恩寺)를 지었다.

9산[편집]

九山 통일 신라 이후 불교가 성할 때 유명한 중들이 중국에 가서 달마(達磨)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아 종풍(宗風)을 일으킨 아홉 개의 산문(山門). 일명 9산문(九山門)이라 한다. ① 실상산문(實相山門)은 홍척(洪陟)국사가 남원 실상사(實相寺)에서, ② 가지산문(迦智山門)은 도의국사가 장흥 보림사(寶林寺)에서, ③ 사굴산문(??山門)은 범일(梵日)국사가 강릉 굴산사(?山寺)에서, ④ 동리산문(桐裡山門)은 혜철(惠哲)국사가 곡성 태안사(泰安寺)에서, ⑤ 성주산문(聖住山門)은 무염(無染)국사가 보령 성주사에서, ⑥ 사자산문(獅子山門)은 도윤(道允)국사가 영월 흥령사(興寧寺)에서, ⑦ 희양산문(目義陽山門)은 지선(智詵)국사가 문경 봉암사(鳳岩寺)에서, ⑧ 봉림산문(鳳林山門)은 현욱(玄昱)국사가 창원 봉림사에서, ⑨ 수미산문(須彌山門)은 이엄(利嚴)국사가 해주 광조사(廣照寺)에서 펴게 하였다. 9산을 개창한 조사(祖師)를 9산조사(九山祖師)라 한다.

『계원필경집』[편집]

桂苑筆耕集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의 문집(文集). 표(表)·장(狀)·격(檄)·서(書)·위곡(委曲)·거첩(擧牒)·재사(齋詞)·제문(祭文)·소계장(疏啓狀)·잡서(雜書)·시(詩) 등을 수록했다. 최치원은 중국에도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져 거기서도 그의 문집이 간행됐다.

『삼대목』[편집]

三代目 향가집(鄕歌集). 신라 제51대 진서여왕의 명려으로 각간 위홍(魏弘)과 대구(大矩)가 888년(진성여왕 2)에 편찬한 것이라 하나, 전하지 않는다. 삼대(三代)란 신라의 상·주중·하 3대(代)를 말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本記)에 이 책에 관한 기록만 실려있다.

대구화상[편집]

大矩和尙 신라 때의 중. 진성여왕 2년(888) 왕명에 의하여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함께 향가를 모은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였다.

위홍[편집]

魏弘 (? 888) 신라 진성여왕 때의 총신(寵臣). 헌강왕 1년(875)에 상대등이 되었으며, 후에 진성여왕의 총신이 되어 전횡, 정치를 어지럽혔다. 죽은 후 대왕(大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여왕과 항상 통하여 내전에 드나들며 권력을 장악했다. 중 대구화상과 함께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였다.

풍수지리설[편집]

風水地理說 산천(山川)·수로(水流)의 모양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시켜 설명하는 설. 약칭 풍수설·지리설. 풍우(風雨) 등의 자연 현상의 변화가 인간 생활의 화복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시작됐으나 그것이 음양오행의 사상이나 참위설(讖緯說)과 혼합되어 전한(前漢)말부터 후한(後漢)에 걸쳐서 인간의 운명이나 화복에 관한 각종의 예언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초기 도교(道敎)의 성립에 의하여 다시 체계화되었다. 이 설은 그러한 사상의 하나로 나타나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양인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이 설의 중심은 분묘(墳墓)·사찰(寺刹)·도관(道觀)·주거(住居)·촌락(村落)·도성(都城)을 축조하는 데 있어서 재화(災禍)를 물리치고 행복을 가져오기 위하여 지상(地相)을 생각하는 데 있다. 그것은 감여·지리를 연구하는 사람을 풍수가(風水家) 또는 감여가(堪輿家)·지리가(地理家)·음양가(陰陽家)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방위(方位)를 청룡(靑龍:東)·주작(朱雀:南)·백호(白虎:西)·현무(玄武:北)의 4가지로 나누어 바람‘風’이나 물‘水’의 양상(樣相)을 보고 구축물(構築物)의 위치를 정한다. 산천·구릉(丘陵)·당탑(堂塔)·가옥 등은 이들 4개의 동물을 상징하나 어느 것을 주로 하는가는 그 장소나 풍수에 따라 다르다. 큰 건축물을 예를 들면 대개 청룡을 중요시하여 남으로 향해서 백호를 우(右)로, 청룡을 좌로, 현무를 뒤로, 주작을 앞으로 하고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그러나 같은 것일지라도 지점이나 산천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다른 상황이 나타나므로 그 배당은 다만 풍수가만이 아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설에는 옛날부터 비판이 있는데 특히 송(宋)나라 장재(張載)·사마광(司馬光)·주희(朱熹) 등에 그것이 엿보인다.우리나라에도 이 설이 전래되어 신라 말에는 도선(道詵)과 같은 대가가 나왔다. 그는 대개 중국에서 기원하여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지리소왕설·산천순역설 및 비보설(裨補說)을 주창하였다. 곧 지리(地理)는 곳에 따라 쇠왕이 있고 순역이 있으므로, 왕처(旺處)·순처(順處)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처(衰處)·역처(逆處)를 인위적으로 비보(裨補:도와서 더하는 것)할 것을 말하여, 일종의 비기도참서(秘記圖讖書)를 남겼다.뒷날 고려시대에 성행한 『도선비기(道詵秘記)』 등은 내용 전체가 도선의 문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사상에 연원(淵源)을 받은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여튼 그의 비기라고 칭하는 예언서가 그의 사후로부터 세상에 유전(流轉)되어 인심을 현혹시킨 일이 많았다. 고려 태조와 같은 이도 도선의 설(說)을 고려하여 자손을 경계하는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서 절을 세우는 데 있어 산수의 순역을 점쳐서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지 말 것을 유훈(遺訓)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후세의 절을 함부로 짓는 것을 방지하려는 정책적인 면도 있었던 것이다.하여튼 이 설은 정치적인 면과 합하여 문제되곤 하였다. 묘청(妙淸)의 천도운동(遷都運動)도 고려 태조 이래 서경(西京:평양)의 중시와 그 시설에 한 원인이 있겠지만 서경은 서북의 가장 중추요, 부강임수(負江臨水)해서 ‘兩水來處是眞龍’의 빼어난 땅이며, 또 행주형(行舟形)이라 우물을 못 파고, 산이 낮아서 연료가 부족한 결점이 있다는 것이다. 개경(開京:개성)도 풍수상에 명당(明堂)이라 하여, 『삼국사기』 궁예전(弓裔傳), 『고려사』 태조세가(太祖世家),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 이중환(李重煥)의 『팔역지(八域志)』,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등에도 개경의 풍수를 찬양하고 있다. 즉 개경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이 많고 내기불예(內氣不洩)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이 첩첩이 둘러 있어서 국면(局面)이 넓지 못하고 또 물이 전부 중앙으로 모여 들어서 수덕(水德)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보하기 위해 많은 사탑(寺塔)을 세웠다.이상에서 대강 보아 온 바와 같이 풍수지리설은 왕가(王家)에서는 물론 민간에게도 신앙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날도 『정감록(鄭鑑綠)』을 믿고, 한때 계룡산(鷄龍山)이 서울이 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아직도 민간에서는 풍수설을 좇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니 하여 산소(山所)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다.

도선[편집]

道詵 (827 898) 신라 말기의 승려. 속성(俗姓)은 김(金)·영암 출신. 15세에 중이 되어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 대경(大經)을 공부하여 바로 대의(大義)에 통하니 수많은 불학도들이 신(神)으로 추앙하였다. 그 후 수도행각(修道行脚)에 나서서 동리산(棟裏山)에 혜철(惠撤)대사를 찾아 소위 무설설(無說說)·무법법(無法法)을 배워 크게 깨닫고,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계(具戒:불교의식)를 받았다. 도선은 운봉산에다 굴을 파고 불도를 닦고, 태백산 앞에 움막을 치고 여름을 보내면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鷄山)의 욕룡사(玉龍寺)에 자리잡고 거기서 생을 마칠 뜻으로 말없이 수양하였다.헌강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궁중으로 모셔가니 도선은 왕에게 여러 가지 정신적 영향을 주었으나 얼마 후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그의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은 고려·조선을 통하여 크게 영향을 준 학설이다. 죽은 후 효공왕은 용공선사(了公禪寺)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스승을 기념하여 욕룡사에 세운 탑은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명명(命名)되었다. 고려 숙종은 대선사(大禪寺)로 추증하고 왕사(王師)의 호를 추가하였다.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의종은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