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고려 후기의 문화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고려 후기의 문화〔槪說〕[편집]

천태종(天台宗)의 개창에 자극받아 형성된 조계종은 무인정권을 전후하여 진흥되기 시작하여 14세기에 들어와 태고(太古)와 나옹(懶翁)에 의해 그 선풍(禪風)이 크게 발전했다. 나옹의 제자인 무학(無學)은 이성계의 왕사(王師)가 되어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선종의 융성은 불교사상(思想)에 있어서 일단의 발전을 의미하지만,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불교는 차츰 정신계에 있어서의 지도력을 상실하고, 그 자리를 주자학에 양보하게 되었다.선종 승려들 사이에서는 원나라로부터 당시 선종의 주도적 종파였던 임제종(臨濟宗)을 새로이 수입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당시의 대표적 승려로서 공민왕 5년(1356)에 왕사(王師)에 임명된 보우(普遇, 호 太古) 같은 승려는 간화선(看話禪)과 함께 원나라 임제종의 법통을 전수받았음을 특별히 내세웠지만 발전된 새로운 불교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또 간하선을 내세우면서도 수선사의 불교 전통과는 단절되어 있었다. 지눌처럼 간화선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나, 혜심처럼 관련 서책을 편찬하는 것과 같은 작업을 찾아볼 수 없었다.기존 불교 결사체들 역시 변질되었고, 각 종파의 교단들도 타락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최씨정권과 밀착되었던 수선사는 원의 내정간섭을 받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으며, 백련사는 왕실의 원찰(願刹)인 묘련사(妙蓮社)로 변하였다. 수선사는 공민왕대에 다시 대두하여 두 명의 왕사를 배출하고 ‘동방제일도량(東方第一道場)’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선종의 중요한 한 갈래로는 유지되고 있었지만, 고려 불교계를 주도할 정신적 힘을 갖지는 못하였으며, 결사정신의 퇴색과 함께 명칭도 송광사(松廣寺)로 바뀌었다.사상적인 빈곤 속에서 명리(名利)에 따라 승려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고, 그들간에 파벌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공민왕 5년에 원융부(圓融府)를 세워 보우로 하여금 요속(僚屬)을 두고 승직(僧職)의 임명 등 승정(僧政)을 관장하게 하자, 사찰의 주지 자리를 청탁하는 자들이 그에게 몰려드는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다투어 보우의 문도가 된 승도들은 수를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문도들이 소속되었던 교단은 거의 모든 종파와 선문들이 망라되어 있었다.본래 승정은 승록사(僧錄司)에서 관장하여, 불교 교단 내의 질서가 법과 제도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부(府)를 세워 특정 승려로 하여금 승정을 관장하게 한 것으로, 이는 고려후기의 정치가 법과 제도에 의해 운영되기보다는 국왕이 신임하는 측근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영된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불교 교단의 기본적 질서가 와해되자 분열과 분쟁도 극심해졌다. 교리의 차이나 수행상의 기풍 차이와 무관한 파벌싸움이 조계종의 9산선문(九山禪門)들 사이에서 그리고 조계종·화엄종·법상종·천태종·시흥종(始興宗) 등 모든 종파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또한 각 종파 사이에 사찰을 차지하려는 쟁탈전도 치열하였다. 사원들은 왕실 및 권문세족들과 밀착해 막대한 농장을 보유하고, 고리대나 양주(釀酒)로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사원의 비리와 승려들의 비행이 만연하였지만, 불교 교단에서는 이를 수습할 정신적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그 결과 불교는 새로이 등장하는 사대부층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으면서, 지배층의 이념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사회를 이념적으로 이끌던 위치에서 밀려나게 되었다.충렬왕·충선왕 양대를 통한 유교진흥책에 자극되어 여말의 학문·사상면에는 새로운 전환기가 찾아왔다. 충렬왕은 경사교수도감(經史敎授都監)을 설치하여 종래의 사장(詞章) 훈고(訓?) 중심의 학풍과는 달리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다. 그 자신이 학자이기도 한 충선왕은 왕위를 물러난 뒤에도 원경(元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이제현(李齊賢) 등을 불러들여 그곳의 학자들과 교류하게 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유학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불교가 지배적인 이념에서 밀려나는 한편 기존 유교이념을 대체하며 성리학이 대두하였다. 13세기 말부터 원나라에 왕래한 안향(安珦)·백이정(白?正) 등에 의해 성리학 서적이 집중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고, 원나라 성리학자들과 활발히 교유한 이제현 이후 성리학 연구는 더욱 심화되어갔다. 그러나 성리학을 쉽게 이해하고 그것에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사상적 기초가 형성된 것은 오래 전이었다.최충의 단계에 이미 심성론과 관련성이 엿보이고, 12세기부터는 송나라 유학자들의 서적이 고려에서 널리 읽혀져 인종이 송나라 사신에게 중요 성리학자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성리학적 사조에 대한 관심도 확대되고 있었다. 사서(四書)와 삼경(三經) 가운데 성리학에서 중요시하는 『중용』과 『주역』이 주목을 받아 경연에서만도 여러 차례 강론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미 무신집권기에는 임춘 등의 유자(儒者)들이 부분적이나마 성리학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불교계의 시성론이나, 근본적인 것과 파생적인 것 또는 본체와 현상에 해당하는 체(體)와 용(用)에 대한 철학적 논의도 불교철학의 영향을 받은 성리학이 이해되고 확산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당시 고려사회의 정치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이 심화되면서 개혁을 원하는 지식층들이 성리학에 매력을 느꼈다. 불교나 훈고학적(訓?學的)인 기존 유교와 달리,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은 이러한 현실 사회문제에 대해 나름의 대응책을 제시해주는 사상이었다.특히 고려에 들어온 원나라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경향을 지닌 남송(南宋)의 성리학과는 달리 실천적이고 경세론적(經世論的)인 성격이 강하였다. 인간의 심성에 대한 이론체계에서 출발하여 일관된 원칙의 도의(道義)와 그 실천형식인 예(禮)로써 개인의 삶에서부터 가족생활, 국가정치 및 천하의 안정에 이르는 질서와 가치체계를 제시한 성리학은 개혁을 원하는 새로운 사회주도층인 사대부들로부터 실천적 경세론으로서 공감을 얻었다.성리학적 개혁은 고려후기에 지속적으로 사회전반에 대해 추구되면서 그 대상이 확대되고 수준이 심화되어갔다. 성리학자들은 먼저 무신집권기 이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유명무실해진 국학(國學)의 진흥을 꾀했는데, 안향은 기구를 설치하고(1304) 국학의 중흥에 힘썼다. 그 후 공민왕대에 성균관(成均館)이 이색·정몽주 등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성리학을 진흥시키는 기구로 자리잡게 되었다.토지겸병 등으로 나타난 토지제도의 혼란과 부패상에 대해서는 이른바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는 것이 인정(仁政)의 시작’이라는 기치 아래 개혁이 강도를 높이며 거듭 추구되었는데, 그 결과 토지제도를 개혁한 과전법의 제정에 이르게 되었다. 국왕의 측근들인 권세가들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행되는 정치에 대해서는 법과 제도에 의한 정치가 강조되었다. 성리학적 수양과 학식을 갖춘 새로운 관인상(官人像)이 표방되었으며, 일각에서는 제도적으로 재상(宰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혁의 시도들은 진퇴를 거듭하면서도 점차 확대되어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에까지 이르게 되었다.성리학자들은 수신(修身)과 가족생활 문제에까지 새로운 운동을 추진하여, 주자(朱子)의 실천덕목에 대한 저술인 『소학(小學)』과 가족생활의 예의규범인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급하였다. 개인의 성리학적 수양과 학식을 추구하는 수신은 비교적 쉽게 확산되어 사대부(士大夫, 선비와 官人)의 기초적인 조건으로 자리잡았다. ‘효’의 이념은 가족생활의 기초이념으로 다시 확립되게 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적 가족생활 예법의 수용이 크게 진전되는 것은 이 뒤에도 1 2세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어야 했고, 그 후에도 그것이 전통적 친족제도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다. 고려의 전통적인 가족생활 예법은, 부계의 종법제(宗法制)에 입각하고 있는 성리학의 가족생활 예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남녀의 성별로 계보관계에 거의 차등을 두지 않는 가운데 촌수의 원리가 작용하면서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므로, 강고한 성리학적 이념으로도 그러한 것을 개편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려의 전통적인 관습인 자녀간의 균분상속과, 혼인 초에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 살다가 분가하고 종종 처가 지역에 그대로 거주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경우 그 변화는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러한 제도들을 성리학적인 아들 중심, 장자 중심의 상속제와 여자가 남편집으로 시집와서 사는 친영제(親迎制)로 바꾸는 문제는 성리학자들간에 거듭 논의되는 가운데 17세기 이후에 변형된 형태로 사회 속에 점차 자리잡을 수 있었다.불교의 타락현상과 기복행위에 치중하는 미신적인 요소도 성리학자들의 중요한 개혁 대상이었다. 초기의 성리학자들은 불교의 타락현상만을 비판하였을 뿐 불교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색같은 유학자는 불교철학의 일부 개념으로 성리학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비판론이 점차로 고조되어, 고려 말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철학 자체를 비판·부정하는 이기철학(理氣哲學)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불교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사상적 정당성 자체가 부정되면서 타파대상으로 지목되기에 이르러 이후 급격히 위축되었으며, 그 사상적 발전도 어려워지게 되었다.성리학적 이념의 개혁이 확산되는 동안 성리학은 사회의 지배적인 사조로 그 위치를 확고히 굳혀나갔다. 그 과정에서 불교의 도통론(道統論)보다도 엄격한 성리학의 도통론 이념이 점차 강화되어갔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개혁이 좀더 철저히 추진되어간다는 발전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성리학이 그 이념과 다른 이질적 사상이나 문화에 대해서 경직성을 갖게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미 전통문화에 깊이 뿌리 내린 불교나 토속적인 제전 등이 극단적으로 부정되기에 이르렀고, 유학 자체에서도 정주성리학만을 유일하게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사상적 경향이 형성되어 나갔다.13세기 말의 역사서들에서는 일찍부터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나란히 또 하나의 문명국가를 이루어온 우리나라의 역사전통을 부각하는 역사인식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장시간에 걸쳐 세력을 침투시키며 입성책동 등으로 고려왕조의 존립을 위협한 원나라에 맞서 고려의 관인들이 왕조의 독자성을 지켜나가는 정신적 힘이 되었다.13세기 말 이승휴(李承休)는 역사를 운문체로 서술한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요동(遼東) 동쪽이 중국과는 다른 별도의 세계였다고 밝히고, 중국사와 우리나라 역사를 전설시대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병렬적으로 대비해 서술하였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서술을 단군조선(檀君朝鮮)에서부터 시작하였고, 『삼국사기』와는 달리 신라 중심의 역사인식에서 탈피하여 발해사를 우리나라 역사에 포괄하였다.이보다 조금 앞서 승려 일연(一然)도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중국의 전설적 성군(聖君)인 요·순(堯舜) 시대에 해당하는 단군의 시대를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으로 서술하였다. 특히 일연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유교적 합리성과 덕목을 강조하면서 변개하거나 누락한 고대 신화나 습속 및 기록 들을 풍부하게 수집하여 고대의 전통문화를 좀더 원자료에 충실하게 서술하였다. 『삼국유사』가 불교사에 큰 비중을 두고 서술된 것은 일연이 승려였던 까닭도 있으나, 불교문화 및 그와 습합된 토속문화가 고려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그가 긍정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14세기 이후 사회문제의 개혁이 중요한 과제가 되면서, 고려 당대의 문물을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역사서들이 편찬되었다. 충렬왕 때에 정가신(鄭可臣)은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편찬하였고, 충선왕 때에 민지(閔漬)는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의 찬술에 착수하여 충숙왕(忠肅王) 4년(1317)에 완성하였다.특히 당시 성리학의 정통론(正統論)과 명분론(名分論)에 입각한 새로운 사관(史觀)이 점차 정립되어,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기존 편찬사서들을 고치고 보충하여 펴내는 개찬작업이 많았던 것도 새로운 사관의 성립과 무관하지 않았다. 어느 시대나 역사의 이해는 곧 현재를 이해하는 기초적 틀이 되기 때문에,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개혁을 모색한 당시로서는 새로운 관점에서 좀더 보완된 역사이해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권보(權溥)는 민지와 함께 정가신의 『척추금경록』을 증보하여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공민왕 20년(1371)에 이인복(李仁復)·이색 등에 의해 『본조금경록(本朝金鏡錄)』이란 이름으로 다시 한번 증수되었다. 민지의 『본조편년강목』도 30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이제현·안축(安軸)·이곡(李穀) 등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증보되었다.증보·개찬만이 아니라 새로이 역사를 편찬하는 작업도 추구되었으니, 이제현은 당대의 역사를 서술한 『충헌왕세가(忠憲王世家)』를 편찬하였고, 공민왕 6년(1357)에 왕명을 받고 이인복은 『고금록(古今錄)』을 편수하였다. 이제현 등은 고려 역사의 대대적인 정리를 시도하여 기전체의 『국사(國史)』를 편찬하는 데 착수하였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현의 일부 저술과 각 왕대에 대한 논평인 사찬(史贊)은 조선 초의 『고려사(高麗史)』 등에서 대부분 비중있게 인용될 만큼 새로운 사조의 사관을 담고 있었다.그의 사론은 명분론과 정통론의 관점에 서서 각 왕대의 역사를 평가하였으며, 현실에 대한 개혁과 국가질서의 회복을 지향하는 의식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는 대내적인 문제만을 지적하는 데 국한되고, 대원(對元)관계에서 비롯된 모순에 대해서는 거의 지적하고 있지 않은데, 이는 원나라의 압력으로 자유로운 서술이 제약을 받은 시대적 한계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고려전기의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대외관계 활동에 대해서까지 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은 사대적인 사조의 영향이었다.개혁과 새로운 사회체제가 추구되는 가운데 새로운 역사인식을 적립하기 위한 노력 역시 고려후기 이후 장기간 추구되었으나, 당시에는 완결적인 의미를 갖는 역사서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고려시대 역사에 대한 정리작업이 일단락되는 것은 조선 초 새로운 체제가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고려 시대 후기에 나타난 새로운 문학상의 변화로서는 경기체가(景幾體歌)의 발생을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문학의 으뜸은 역시 민중 속에서 자라난 장가(長歌), 즉 가요이다.『청산별곡(靑山別曲)』 『서경별곡(西京別曲)』 『가시리』 『정읍사(井邑詞)』 『동동(動動)』 『쌍화점(雙花店)』 『정과정곡(鄭瓜亭曲)』 등의 장가는 신라 향가와 함께 우리 문학사를 빛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려 시대의 예술은 대체로 불교 문화재로서 남겨진 것이 많아 불교 사상과 감정이 그 바탕이 되어 있다. 목조건물로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것은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 수덕사(修德寺)의 본당(本堂)이고, 심원사(心源寺)의 보광전(普光殿), 석왕사(釋王寺)의 응진전(應眞殿) 등은 모두 고려 말기의 것들이다. 석탑으로는 대리석을 재료로 한 개풍(開豊)의 경천사 십층탑(敬天寺十層塔)이 유명하며, 석부도(石浮屠)는 여주 신륵사(神勒寺)의 보제사리석종(普濟舍利石鍾)이 대표적인 것이다. 한편, 고려 그림의 특색은 점점 문학화하고 낭만적으로 되어 갔다는 데에 있다. 「은일도(隱逸圖)」 「유연계회도(遊宴契會圖)」 「사군자도(四君子圖)」, 특히 묵죽(墨竹)이 유행하였고, 시화 일치론(詩畵一致論)이 등장하였다. 「천산수렵도(天山狩獵圖)」,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천왕상(天王像)」, 수덕사 벽화 「수화도(水花圖)」 등이 고려 회화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글씨는 초기의 간결한 구양순체(歐陽詢體)로부터 원(元) 조맹부(趙孟?)의 우아한 송설체(松雪體)로 경향이 달라졌다. 이암(李?)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음악은 신라 이래 전해 내려온 속악(俗樂), 즉 고유 음악 외 당악(唐樂)과 아악(雅樂)이 수입되어 고려 음악을 풍부하게 하였다. 또 처용무(處容舞)·산대극(山臺劇) 등의 가무극이 행하여졌다. 고려말의 것 중 특기할 것은 인쇄술의 발달, 목면(木棉)의 재배재(栽培), 화약의 제조 등 몇 가지 기술상의 발달이다.

보우[편집]

普愚 (1301

1382)

고려 말의 중(僧), 호는 태고(太古). 13세에 중이 되어 가지산(迦智山)에서 도를 닦음. 충숙왕 12년(1325) 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명리(名利)를 버리고 감로사(甘露寺)에서 고행(苦行)을 하였다. 삼각산에 태고사(太古寺)를 지었고, 충목왕 2년(1346) 중국에 가서 하무산(霞霧山) 청공(淸珙)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臨濟宗)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었으나 신돈의 횡포를 미워하여 소설사(小雪師)로 돌아갔다가 신돈이 죽은 후 국사(國師)가 되었다.

나옹[편집]

懶翁 (1320

1376)

고려 공민왕 때의 중. 본명은 혜근(惠勤·慧勤). 충혜왕 1년(1340) 중이 되어 전국 명산 대찰을 편력, 충혜왕 복위 5년(1344) 회암사(會巖寺)에서 4년 간 좌선(坐禪)하여 개오(開悟)했다. 충목왕 3년(1347) 원에 가서 지공(指空)에게 법을 이어받았다. 중국에서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로 있다가 공민왕 7년(1358) 귀국. 내전(內殿)에서 설법하고 각지를 순력한 후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우왕 2년(1376) 회암사에서 문수회(文殊會)를 열자 많은 인파가 모였다. 태고와 함께 고려말 선종(禪宗)의 고승으로서 조선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무학[편집]

無學 (1327

1405)

고려말 조선초의 중. 이름은 자초(自超). 18세에 출가하여 용문산(龍門山) 혜명(慧明)국사에게 불법을 배우고 중국에 가서 지공(指空)에게 사사를 받고 돌아와서 오대산(五臺山) 등지를 순례하였다. 나옹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공민왕 5년(1356) 돌아왔다. 조선 태조 1년(1392) 왕사가 되고 회암사(會巖寺)에서 살았다.

만권당[편집]

萬卷堂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의 서울 연경(燕京)에 지은 독서당(讀書堂). 충숙왕 1년(1314)에 건립한 것으로 고금의 많은 진서(珍書)를 수집하여 학문을 연구하게 하던 학술 연구기관이다. 충선왕은 본국으로부터 이제현을 부르고, 원의 유명한 학자 조맹부·염복(閻復)·우집(虞集)·요봉(姚烽) 등을 초청, 함께 경사(經史)를 연구 토론하게 하였다. 이에 양국의 문예가 많이 교류되었다.

이제현[편집]

李齊賢 (1287

1367)

고려말의 시인·성리학자.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경주(慶州). 검교정승(檢校政丞) 진(?)의 아들. 1308년(충렬왕 27) 나이 15세로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으로 들어갔다.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이르러 충선왕에게 불리어 원나라 연경(燕京)에 건너가 원나라의 명사 요수(姚邃)·염복(閻復)·조맹부(趙孟?) 등과 교우하여 학문이 더욱 심오해졌으며 그때 진감여(陳鑑如)가 이제현의 초상화를 그리고 원나라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경복궁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1323년(충숙왕 10) 유청신(柳淸臣)·오잠(吳潛) 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省)을 설립하여 원나라의 제성(諸省)과 동등하게 하려고 청하자 제현은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고려 400년의 토대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진다고 간곡히 호소하여 이 문제를 철회케 하였다. 충선왕이 서번(西蕃)에 귀양가자 그곳에 따라갔으며, 밀직사사(密直司使) 첨의평리(僉義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삼사사(三司事)을 역임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정승 조적(曺?) 등이 심왕(瀋王) 고(暠)와 꾀하여 모역(謀逆)하다가 사형된 뒤 그의 무리가 연경에 많이 남아 있어 인심이 매우 동요하자 제현은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건너가 잘 절충하였고, 충목왕이 즉위하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피봉되었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즉위할 때 우정승에 임명되고 정동성사(征東省使)를 맡자, 원종공신(元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시기함을 알고 그 벼슬을 내놓았으므로 후에 조일신의 난 때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 우정승을 두 번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다가 1357년(공민왕 6) 벼슬을 떠났으며, 왕명으로 집에서 실록을 수찬하고,종묘(宗廟) 위패(位牌)의 서차(序次)를 정하였으며,

공민왕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주자학의 수용[편집]

朱子學-受容

고려가 원과 교섭을 갖는 동안에 받아들인 주자학은 고려 말의 학문·사상면에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주자학은 송나라 주자(朱子, 朱熹)가 완성한 것으로, 주자의 학설은 주돈이(周敦?)·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나종언(羅從彦) 등의 학설을 계승하여 대성된 것이다. 주자는 만물의 근원을 이(理)·기(氣)로 나누어, 이(理)는 만물에 성(成)을 주며, 기(氣)는 만물에 형(形)을 준다고 하였다. 주자학은 고려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최초로 받아들였고, 충렬왕의 유학 장려로 점차 발전하였다.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형이상학(形而上學)적으로 해명하는 주자학은 신진 사대부들에게 뿌리를 박게 되었다. 안향의 뒤를 이어 백이정이 역시 원에 유학하여 이를 배워 왔으며, 그의 제자 이제현이 그 뒤를 이었다. 고려 말기에는 이숭인(李崇仁)·이색·정몽주·길재 등과 정도전·권근 등이 배출되었다. 이 주자학의 전파는 불교 배척의 기운을 조성하였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유교 의식이 점차 실시되었다.

안향[편집]

安珦 (1243

1306)

고려의 명신·학자.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 흥주(興州:지금의 順興) 출생으로 아버지는 원래 흥주의 관리였으나 의술(醫術)로 출세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에 문종(文宗)의 이름이 향(珦)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안유(安裕)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1286년(충렬왕 12)에 정동행성 (征東行省)의 좌우사 낭중(左右司郎中)과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으며, 같은 해 왕을 따라 원(元)나라에 건너갔다. 연경(燕京)에서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기뻐하여 유학(儒學)의 정통(正統)이라 하여 손수 그 책을 베껴 쓰고, 또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또 학교가 날로 쇠퇴하여 감을 우려하여 유학의 진흥(振興)을 위하여, 장학기금(奬學基金)으로서 6품 이상은 각각 은(銀) 1근(斤)씩,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자(利子)로써 학교를 운영케 하는 한편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 등을 중국에 보내어 공자와 그 제자들의 초상을 그리고, 제기(祭器)·악기와 경서(經書) 등을 구해 오게 하는 등 고려 말기의 유학 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주자(朱子)를 숭배하여 그의 초상을 항상 벽에 걸어 두고, 주자의 호(號)인 회암(晦庵)의 회(晦)자를 따서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이것은 주자의 저서를 보고 거기에 심취(心醉)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통 그를 우리나라에 맨처음 주자학을 받아들인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라 보고 있다. 죽은 지 12년째 되는 1318년(충숙왕 5)에는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에서 일하던 원(元)나라 화가에 명하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이 초상화는 현재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보관되어 있는데 고려 때 그린 것으로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그림의 하나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조선 중종 때 풍기 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순흥 백운동(順興白雲洞)에 안향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書院)을 만드니,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황희[편집]

黃喜 (1363~1452)

고려말·조선초의 명상(名相).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村),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長水). 송경(松京:開城) 가조리(可助里) 출생. 14세 때 음관(蔭官)으로서 안복궁녹사(安福宮錄使)가 되었고, 21세에 사마시(司馬試), 23세에 진사시(進士試)를 마쳤다. 27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 이듬해 성균학관(成均學官)이 되었다.조선에 들어와서 정자(正字)·사간(司諫)·대언(代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그가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한 것은 47세에 지신사(知申使)가 되던 때부터였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禮遇)를 받고, 그 뒤에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는 동안 대사헌(大司憲)·지의정(知議政)·견명사(遣明使)·참찬(參贊)·평안도도순문사(平安道都巡問使)·한성판사(漢城判使) 등 내외의 요직(要職)에 있으면서 문물(文物)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하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1413년(태종 13) 세자 제(?:讓寧大君)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어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左遷)되었다가, 뒤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남원(南原)으로 축출되었다. 1422년(세종 4) 태종은 그를 소환하여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세종은 그를 처음에 참찬(參贊), 1431년(세종 13)에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삼아 국정(國政)을 위임한 이래 꾸준히 정치에 힘쓰다가 1449년(세종 31) 86세로서 은퇴하였다. 평소에 관후인자(寬厚仁慈)하고 청백(淸白)한 관원 생활을 한 것으로 이름이 나서 청백리(淸白吏)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세종묘(世宗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숭인[편집]

李崇仁 (1349

1392)

고려말의 문신·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 호는 도은(陶隱).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예의산랑(禮儀散郞)·예문응교(藝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改創)한 뒤 정몽주 등과 함께 학관(學館)을 겸했다. 그 후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우왕 12년(1386)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간신 이인임(李仁任)의 인족(姻族)이라 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혼란기를 맞아 유배·감금되었고, 공양왕 4년(1392)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詩文)에 이름이 높았다. 명과의 외교문제를 맡아 썼으며, 그의 명문장은 명 태조를 탄복시켰다. 저서로는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이 있다.

이색[편집]

李穡 (1328

1396)

고려 말의 성리학자. 여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한산(韓山).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로 인해 원나라의 국자감(國子監) 생원이 되었고, 3년 간을 유학, 아버지의 상(喪)을 입자 귀국하였다. 1352년(공민왕 1) 그의 학문의 경향과 정견(政見)의 윤곽을 피력한 의견서를 왕에게 제출하였고, 1353년(공민왕 2) 괴과(魁科)에 들었으며, 다시 정동성(征東省)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후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內書舍人)에 올랐으며,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使)가 되자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 1367년(공민왕 16) 성균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程朱)의 성리학(性理學)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1371년(공민왕 20)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다시 1373년(공민왕 22) 한산군(韓山君)에 피봉, 다시 1377년(우왕 3)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공양왕 때 판문하 부사(判門下府使)가 되었고, 그 후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함안(咸安) 등에 귀양갔으나 돌아와 다시 한산부원군에 피봉,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使)로 임명되었다.정몽주가 피살되자 관련되어 다시 금천(衿川)·여흥(驪興)·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1395년(태조 4)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여 예를 다하여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국의 사대부(士大夫)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 다음 해 피서차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갑자기 사망했으므로 그 사인(死因)에 대하여는 후세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후에 서애(西厓)는 삼국의 위(魏)에 벼슬을 받지 않았던 후한(後漢) 조의 양표(楊彪)에 비겨서 그 절개를 특필하고 있다. 문하에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으며 한편 불교에 대한 조예도 깊었으며 고려 말에 학문과 정치에 거족을 남긴 존재였다.

길재[편집]

吉再 (1353

1419)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 호는 야은(冶隱). 공민왕 19년(1370) 개경에서 이색·정몽주·권근 등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우고, 우왕 12년(1386) 문과에 급제했다. 동왕 14년(1388)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었으나 그 후 노모(老母)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 건국 후 친교가 있던 세자 방원(芳遠)에 의해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 고향 선산(善山)에서 후진 교육에 전력하였다.그의 학통은 그 후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계승되었다. 저서로는 『야은집(冶隱集)』 『야은언행습유(冶隱言行拾遺)』 『야은속집(冶隱續集)』이 있다.

권근[편집]

權近 (1352

1409)

조선의 학자·명신. 초명은 진(晋), 자는 가원(可遠)·사숙(思淑),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안동. 고려의 정승(政丞) 부(溥)의 증손, 희(僖)의 아들. 1367년(공민왕 16) 나이 18세로 문과에 급제하고 1374년(공민왕 23) 직강(直講)·응교(應敎)에 임명, 좌사의 대부(左司大夫)를 거쳐 첨서 밀직사사(簽書密直司使)에 이르러 문하 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丞順)과 같이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때 공양왕이 즉위하자, 이임(昌王의 외조부)의 일파로 몰려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구원으로 모면하고, 이색(李穡)의 일파와 같이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마침 수해로 용서를 받고 익주(益州)에 있으면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의 명으로 1393년(태조 2) 정총(鄭摠)과 같이 정릉(定陵)의 비문을 짓고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찬표(撰表)를 잘못 쓴 정도전(鄭道傳)을 대신해서 자진하여 명나라에 건너가 해명을 잘하여 명 황제로부터 지극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의 호를 받고서 길창군(吉昌君)에 피봉되었다. 그 후 찬성사(贊成使)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검열(檢閱)로부터 재상에 이를 때까지 언제나 문한(文翰)에 서임되었으며, 한번도 딴 벼슬을 받은 일이 없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또 문장에 능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의 양면을 잘 조화시켰다.

『해동고승전』[편집]

海東高僧傳

한국 최고(最古)의 승전이다. 고려 고종 2년(1215)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의 주지이던 각훈(覺訓-覺月)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이 책은 삼국 시대 불교에 많은 영향을 미친 고승(高僧)의 행적기(行蹟記)로 전질 중 2권만이 발견, 소개되었다.여기에는 순도(順道)·망명(亡名)·의연(義淵)·담시(曇始)·마라난타(摩羅難陀)·아도(阿道)·법공(法空)·법운(法雲)·각덕(覺德)·지명(智明)·원광(圓光)·안함(安含)·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혜업(惠業)·혜륜(惠輪)·현각(玄恪)·현유(玄遊)·현대범(玄大梵) 등 18인의 전기가 들어 있다. 책머리에는 석보(釋譜)와 불교 동래(東來)를 기록하였다.

일연[편집]

一然 (1206

1289)

고려의 고승(高僧). 『삼국유사』의 저자. 속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見明). 처음의 자는 회연(晦然), 후에는 일연(一然).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 탑호는 정조(靜照). 장산군(章山郡:慶山) 출생. 언필(彦弼)의 아들. 9세에 해양 무량사(海陽無量寺)에서 승려가 되어 선학을 배우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불전을 연구하여 22세에 선(禪)의 상상과(上庠科)에 뽑히고, 그 후부터 포산(包山)의 보당암(寶幢庵)·무주암(無住庵)·정림사(定林寺)·묘문암(妙門庵)에서 주지로 있으면서 선관(禪館)을 탐구. 삼중(三重)대사가 되고 41세에 선사(禪師), 54세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56세에 원종(元宗)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선월사(禪月寺) 주지로 있으면서 멀리 목우(牧牛)화상의 법을 이었다.59세에 오어사(吾魚寺)에 옮겨 불경을 강론했으며, 63세에 왕명으로 고승(高僧) 1백 명을 모아 운해사(雲海寺)에서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를 열었고, 홍인사(弘仁寺)의 주지로 있기를 11년, 중수(重修)하여 이름을 인흥(仁興)이라 고치고 포산(包山) 기슭에 용천사(湧泉寺)를 중건하고 불일사(佛日寺)라 하였다. 72세에 충렬왕의 부름을 받아 운문사(雲門寺)의 주지가 되었고, 78세에 국사(國師)에 이르니, 원경충조(圓徑沖照)란 호를 받았다.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인각사(麟角寺)에 옮겨 있으면서 두 번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으며, 1289년 병이 나자 왕에게 글을 남기고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과 문답을 나눈 후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죽었다.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수동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 있으며, 그 행적비가 운분사 동쪽 기슭에 있다.

『삼국유사』[편집]

三國遺事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유사(遺事)를 모아 고려 충렬왕 때의 명승 일연(一然)이 지은 책. 5권 2책으로 된 이 책은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내용은 삼국과 가락국(駕洛國)의 왕대와 연대, 고조선 이하 여러 고대 국가의 흥폐·신화·전설·신앙 및 역사, 불교에 관한 기록, 고승들에 대한 설화, 밀교(密敎) 승려들에 대한 행적, 고승들의 행정, 효행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수록하였다. 신라 중심, 불교 중심으로 편찬되어 있으나 고대사 연구에 있어 삼국사기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이두(吏讀)로 쓰인 향가(鄕歌) 14수(首)가 기록되어 있어 국어 국문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제왕운기』[편집]

帝王韻記

고려 충렬왕 때의 학자 이승휴(李承休)가 저술한 역사책.

충렬왕 때 처음 간행, 공민왕 때 경주에서 중간 , 조선시대에 들어서 1471년(태종 17)에 3간, 현재 유포된 것은 이 3간본을 영인한 것이다. 이승휴는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서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 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에 가서 위려(偉麗)한 문장으로 문명을 떨쳤고, 돌아오자 벼슬을 떠나 용안당(容安堂)에서 『제왕운기(帝王韻記)』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했다.『제왕운기』는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중국의 반고(盤古)로부터 금(金)까지의 역대 사적을 7언시로 읊었고, 하권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시로 읊고 주기(註記)를 붙였다. 하권은 다시 1·2부로 나누어, 제1부에는 지리기(地理記)와 전조선(前朝鮮)·후조선·한사군·삼한·신라·고구려·백제·발해와 후삼국을 1,460의 칠언시(七言詩)로 기술하고 있다. 제2부는 고려초부터 충렬왕 때까지를 700귀의 오언시(五言詩)로 기록했다. 제1부에 있는 단군 조선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민지[편집]

閔漬 (1248

1326)

고려의 문신. 자는 용연(龍延). 호는 묵헌(默軒), 시호는 문인(文仁). 본관은 여흥(驪興). 원종 때 문과(文科)에 장원, 충렬왕 때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예빈윤(禮賓尹)이 되고, 충선왕이 세자 때 그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로부터 한림 직학사(翰林直學士)·조열대부(朝列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1285년(충렬왕 11) 원나라가 앞서 두 번이나 실패한 일본 정벌을 다시 결행하려고 고려에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자 좌부승선(左副承宣)으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동정(東征)의 불필요을 건의하여 전함 건조를 중지케 했다. 집현전 대학사·첨광정원사(僉光政院使)가 되고 충선왕 초에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이르러 벼슬에서 물러났다.1321년(충숙왕 8)에 다시 수정승(守政丞)이 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정가신(鄭可臣)이 지은 『천추금경록(千秋今鏡錄)』을 권부(權傅)와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를 만들고 또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편찬하였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경기체가[편집]

景幾體歌

고려 중엽 이후 사대부(士大夫)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시가(詩歌).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라고도 한다. 경기체가는 한문을 사용하되 고유의 전통을 살려서 이루어진 새로운 형식의 시가로, 무인정권 시대의 『한림별곡(翰林別曲)』이 시초이다. 여기에는 최씨 무인정권 밑에서 새로이 정치적으로 등장하는 사대부들의 의기에 찬 생활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그 뒤 안축(安軸)의 『관동별곡(關東別曲)』 등 사대부 출신들의 득의연한 풍모가 잘 풍겨나는 작품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한림별곡(翰林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등이 있다. 조선 왕조 초기에도 한학자 간에 다소 유행하였으나 점차 고유한 형태는 없어졌다.

부석사 무량수전[편집]

浮石寺無量壽殿

경북 영주군 부석면 소재 부석사의 본전(本殿). 정면 5간, 측면 3간의 팔작(八作) 집으로, 내부에는 서쪽 가로 불단(佛壇)을 두고, 그 위에 장륙(丈六)의 석가여래상을 동쪽으로 향하여 안치했다.정확한 건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 후반경의 건축물로 추측된다. 엔타시스(entasis)의 기둥, 삼중으로 맵시있게 겹쳐진 포작(包作), 이중연(二重椽)으로 인한 지붕의 가벼운 곡선, 철상명조(徹上明造)의 내부 천장 등이 무량수전의 특색이며, 전체적으로 장중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목조 건물로서는 경북 안동군 소재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과 함께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우수한 건축이다.

고려의 인쇄술[편집]

高麗-印刷術

고려 후기에는 유교와 불교의 흥륭에 따라 각종 서적이 보급되었고, 이에 따라 인쇄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목판(木版) 인쇄가 행하여졌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대장경판(大藏經版) 같은 것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귀중한 불교 문화재이다. 목판 인쇄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 시대에는 금속활자가 발명되었다. 활판(活版) 인쇄는 11세기에 북송(北宋)의 필승(畢昇)이 처음 발명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토활자(土活字)로 세상에서 널리 사용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고려에서 활자를 사용한 기록으로는 고종 21년(1234)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주자(鑄字)로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자, 즉 금속활자는 이보다 앞선 시대부터 사용된 것 같으며, 이것은 서양에서 처음으로 활자가 나타난 1450년보다 226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한 고려는 이 시험기(試驗期)를 거쳐, 공양왕 4년(1392)에는 국가에서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고 주자와 인쇄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 후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활자 인쇄는 성황을 이루었다.

『상정고금예문』[편집]

詳定古今禮文

고금의 예문을 모아 편찬한 책. 일명 『고금상정예문』이라고도 하며, 50권으로 되어 있다.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가 지은 것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동국이상국집』에 이 책을 고종 21년(1234) 활자로 찍었다고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한국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된다.

목면의 재배[편집]

木棉-栽培

공민왕 때 원(元)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文益漸)이 면화(棉花)씨를 가져온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로써 한국인의 의생활(衣生活)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던 것이다. 그가 가지고 온 면화씨는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 의하여 재배가 연구되고, 씨아와 물레가 제작되어 무명(綿布)의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후 목면재배의 가치가 널리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전국 각지에 널리 보급되었다.

문익점[편집]

文益漸 (1329

1398)

고려의 학자·문신.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시호는 충선(忠宣). 본관은 남평(南平). 1360년(공민왕 9) 문과(文科)에 급제, 김해부 사록(司錄)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내고 1363년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그 해 계품사(計稟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고,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오는 최유(崔濡) 일파에 가담했기 때문에 귀국 후 파면당했다. 귀국할 때 목화씨를 얻어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 성공함으로써 뒤에 한국 의료 경제상(衣料經濟上) 막대한 공헌이 되었다. 뒤에 다시 전의주부(典儀主簿;1375:우왕 1)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1389:창왕 1)을 역임,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에 의해 추진된 전제(田制) 개혁에 반대,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고 파면된 뒤 정계에 뜻이 없어 고향(晋州 江城縣)에 하향했다. 1440년(세종 22) 영의정에 추증, 강성군에 추봉되었다.

최무선[편집]

崔戊宣 (?

1395)

고려말의 화약 발명가. 본관은 영주(永州:永川). 광흥창상(廣興倉使) 동순(東洵)의 아들. 일찍부터 병법을 좋아하여 왜구(倭寇)를 무찌르는 데는 화약(火藥)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 그 제조법의 연구에 항상 골몰하였다. 그리하여 강남(江南)에서 오는 중국 상인을 만날 때마다 화약 만드는 법을 묻던 중, 원(元)나라 사람으로서 염초(焰硝)의 기술을 아는 이원(李元)을 만나 집에 두고 우대하면서 그 제조법을 배웠다. 그런 뒤에 누차 정부에 건의하여 1377년(우왕 3)에 처음으로 화통도감(火?都監)을 설치, 그 주임이 되어 화약을 만드는 동시에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육화(六花)·석포(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 등 각종의 화기(火器)를 제조하였다. 한편으로는 이런 화기 등을 실을 수 있는 전함(戰艦)의 감독·건조(建造)에도 힘을 썼다. 1380년(우왕 6)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하자,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같이 전함을 이끌고 진포(鎭浦:錦江入口)에서 왜구의 선박 500여 척을 화통·화포로써 격파시켜 큰 공을 세웠다. 고려에서는 벼슬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使)를 제수, 사망 후에는 의정부 우정승(議政府右政丞)·영성 부원군(永城府院君)을 추증하였다.

화약의 제조[편집]

火藥-製造

화약은 송(宋)과 원(元)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었으나 고려는 그 제조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 제조술을 최초로 습득하여 제조에 성공한 사람은 최무선이었다. 그는 당시 고려의 해안 일대를 어지럽게 하던 왜구를 섬멸함에 있어서 화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국에서 제조법을 배워 왔다. 이리하여 최무선은 우왕 3년(1377) 왕에게 건의하여 화통도감(火▩都監)을 설치하고 각종 화기(火器)를 만들어 화약을 무기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화약 및 화기의 제조는 병기(兵器)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왜구 소탕에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