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사대부 세력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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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세력의 성장〔槪說〕[편집]

일찍부터 존재해 온 귀족들의 사전(私田)은 지배질서의 문란을 틈타 점차 확대되어 전시과(田柴科)의 붕괴를 가져왔다. 사전(私田)은 무인정권이 타도된 뒤에 더욱 진전되어 갔던 것으로 이를 보통 농장(農莊)이라고 한다. 농장의 경작은 전호(佃戶)나 노비(奴婢)가 담당하였다. 유민(流民)도 포함된 이들 경작자는 농노(農奴)와 성격이 비슷하였다. 농장의 증대는 국가 재정을 고갈케 했고, 그 결과 관리의 녹봉(祿俸)이 폐지되었다. 이에 농장을 가지지 못한 신진 사대부 관리들은 권문세가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무인정권에 의하여 귀족정치가 붕괴된 이후에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었으며, 또한 정치 실무에도 능한 사대부(士大夫)들이었다. 이들의 사회적 진출은 드디어 고려의 정치적 대세를 일변시켰다.권문세족들의 세력은 원의 강대한 세력을 뒷받침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明)이 흥기하고 원이 점차 쇠퇴하여 북방으로 쫓겨가는 원·명 교체기에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으로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치(反元政治),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이라는 두 가지 정책이 채택되었다. 공민왕은 후일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국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신돈은 이공수(李公遂) 등 권문 출신을 축출하고, 문벌이 변변하지 못한 자를 등용하였다. 또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족의 반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신진 사대부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다.

개혁의 진행[편집]

改革-進行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이 10세의 우왕(禑王)을 옹립함으로써(1374), 권력은 다시 권문세족의 손에 들어갔다. 이인임 일파는 신흥사대부들을 억압하고 노골적으로 토지겸\병을 자행하였다. 반원정책도 수정되어, 원나라와 명나라에 대한 등거리 외교가 추구되었다.우왕대 초의 최대 현안은 14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창궐하게 된 왜구(倭寇)를 격퇴하는 것이었다. 왜구는 도처에서 잔혹하게 노략질을 하여 세곡(稅穀) 수송망인 조운(漕運)까지 마비시킬 정도였다. 고려 조정은 일본 바쿠후(幕府)에 왜구의 노략질을 근절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내란에 처한 바쿠후가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별 성과가 없었다. 우왕 3년(1377)에 최무선(崔茂宣)의 노력으로 화통도감(火統都監)이 설치되어 화포(火砲)가 제작되었다. 우왕 6년에는 금강 입구에 침구해 온 왜구 5백여 척의 대선단에 화포 공격을 하여, 배를 모두 불태워 퇴로를 차단하였고 내륙으로 침투한 외구들도 이성계(李成桂) 등의 토벌군이 완전 소탕하였다. 이로써 왜구들은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는데, 창왕(昌王) 원년(1389)에는 박위(朴?)가 이끄는 고려군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왜구 문제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인 우왕 14년(1388) 1월에는 토지겸병으로 악명 높은 권문세족인 이인임 일당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 이 숙청은 권문세족 출신이지만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난 최영(崔瑩) 장군이 우왕과 상의하여 집행하였고, 신흥세력인 이성계 장군이 힘을 더하였다. 이로써 권문세족의 기세가 꺾이고 신흥 사대부들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온적인 정책을 추진하던 최영과 적극적인 개혁을 원하는 신흥사대부 간에는 틈이 있었다.같은 해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며, 쌍성총관부지역을 내놓으라고 강압적인 통보를 해오자, 최영은 북으로 밀려난 원나라에 명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의하고 명나라의 동북 방면 전진기지인 요동에 대한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이성계는 군사적 난점을 들어 반대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원정군을 이끌고 출병한 이성계는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면서 지휘권을 장악한 다음 군사를 개경으로 돌려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1388). 요동 정벌은 중도에 그쳤으나, 이후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기도도 중지되었다.이성계 일파의 집권 후 신흥사대부들은 권문세족이나 사원이 보유한 농장 등을 몰수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사전(私田)개혁을 추진하였다. 권문세족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나, 반발도 작지는 않았다. 폐위된 우왕의 아들 창왕이 이성계 일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나마 왕위를 이을 수 있을 만큼 구세력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성계 일파가 창왕마저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자(1389), 정치는 완전히 신흥사대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한 사전개혁도 본격화되었다. 전국의 토지에 대한 측량이 시작되어 공양왕 2년(1390)에 완료되자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이 모두 불태워졌다. 사전개혁에 의해 국가의 세수(稅收) 대상 토지가 확보됨으로써 국가재정이 확충되고, 관료들에게도 경제적 급부로서 과전(科田)이 지급될 수 있었다. 공양왕 3년 전시과제도와 마찬가지로 수조지인 과전을 분급하는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전시과제도 그대로 복구된 것은 아니었으니, 과전법의 수조지 분급 대상지역은 경기지역에 한정되도록 축소되었고, 분급대상도 대체로 현직관리들을 중심으로 한 범위에 제한되었다. 이러한 수조지제도의 대폭적인 축소는 소유권에 의한 토지지배가 확대되고 수조권에 의한 토지지배가 축소·쇠퇴되어가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신흥사대부들은 정치와 사상 등의 면에서도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며 개혁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가 온건한 개량을 주장하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의 반대파를 꺾고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는 국가사회로서는 연속성을 가졌던 것이었으니, 왕조만이 아닌 기존 국가사회 자체가 멸망하여 영토와 국민이 크게 변동하였던 앞 시대의 삼국에서 통일신라·발해로의 변화나, 통일신라에서 후삼국을 거쳐 고려에 이르는 왕조의 변화와는 다른 성격을 가졌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화는 왕실과 왕조로서는 종말과 새로운 개창이었으나, 영토와 국민으로서는 연속이었으며, 고려 말 당시 국가체제 안에 포괄된 지배층 내에서의 정권교체라는 성격을 강하게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권교체의 이면에서는 고려후기 이후 광범한 사회변동 속에서 암중모색되던 개혁이 확고한 방향을 잡고 새로운 체제를 구체화시키는 결실을 보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농장[편집]

高麗時代-農莊

대토지 겸병(兼倂)의 진전 과정에서 국왕과 국가 기관 및 정부의 권력자들의 수중에 집적(集積)된 광대한 토지. ‘전장(田莊)’·‘전원(田園)’이라고도 하며, 특수한 경우에 ‘장(莊)’·‘처(處)’라는 이름을 붙였다.농장은 세계사적으로 나타나는 대토지의 소유 형태인 장원(莊園)의 한 유형(類型)으로서, 한국에서는 신라 통일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려 초기에는 토지국유(土地國有)의 원칙에 입각하여 전시과(田柴科) 체제가 정비되었으나, 그 속에는 공음전시(功蔭田柴)·사전(賜田) 등 토지사유(土地私有) 모순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유화의 모순은 이자겸(李資謙)의 권세가 절정에 달하고 지배질서가 문란해지면서 드러나기 시작, 무인정권 때는 점차 확대되어 전시과 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토지 겸병은 보편화하여 토지 지배 관계에 있어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농장의 확대는 식읍(食邑)·사전(賜田)·사패(賜牌:국가가 정식으로 토지의 개간을 허가한 일종의 공인장)·기진(寄進)·투탁(投託)과 점탈(占奪) 또는 장리(長利, 高利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무인 집권 때 확대된 농장은 몽골와의 항쟁기를 거쳐 보다 진전·격화되었다. 농장을 소유한 자는 왕실 및 그 주변의 내료배(內療輩), 각 국가 기관, 몽골의 제실(帝室)을 배경으로 한 간당배(奸黨輩), 지방의 토호(土豪)·향리(鄕吏)에 이르기까지 그 계층이 광범위하였다.농장의 소유는 대개 국가 권력에 의존하여 가능했기 때문에 경영방식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다소 진보적인 형태도 나타났다. 왕실·왕족에 소속된 장 (莊)·처(處)는 국가의 공민(公民)에 의해서 경작되었으며, 그 밖의 권세가들에게 소속된 농장은 전호(佃戶)와 노예에 의하여 경작되었고, 가신(家臣) 및 가노(家奴)를 파견하여 이를 거두어들였다. 이러한 고려의 농장은 서양의 장원이 가지는 불수권(不輸權)이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대부[편집]

士大夫

고려말, 조선 때의 학자적 관료. 사(士)란 독서인을 말하며, 대부(大夫)란 관리를 말한다. 사대부는 본래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왕·제후(諸侯) 아래서 벼슬을 하여 정치 실무(實務)를 장악, 세습적으로 영토를 가진 치자계급(治者階級)을 말하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현직·퇴직 관리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儒敎的) 지식계급을 말한다. 고려의 귀족정치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관료층인 사대부는 무인 정권이 타도된 이후 더욱 활발히 정치적인 진출을 하였다. 사대부들은 중앙관부(中央官府)의 이직자(吏職者)들 중에서도 나왔지만 그보다도 지방의 향리들 중에서 나왔다. 향리 출신의 이들 사대부는 곧 재향지주(在鄕地主)이기도 하였다. 지방의 중소지주(中小地主)인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를 거쳐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나서 향리(鄕里)에서의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들의 사회적 진출은 드디어 고려의 정치적 대세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한량[편집]

閑良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의 특정한 성격의 사회계층을 가리키는 명칭. 그렇지만 전 시기에 걸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서 한량이라 불리는 사회 계층은, 직첩(職牒), 직합(職銜)은 있으나, 직사(職事)가 없는 무직사관(無職事官)과 직·역(職役)이 없는 사족(士族)의 자제, 즉 무역사족자제(無役士族子弟)를 가리킨다. 고려 말·조선 초기의 한량에 속하는 무직사관(無職士官)으로는 2품(品) 이상의 한량 기로(耆老)를 포함한 전함관(前銜官, 여말 선초의 검교관(檢校官), 고려 말기에 계속되는 병란 속에서 상직(賞職)으로 수여된 첨설관(添設官) 등이 있다. 고려 말·조선 초기의 무직사관으로서의 한량에 대하여, 조선왕조 건국을 계획 실현한 신흥 세력은 신왕조 건국에 즈음하여 이들을 중앙권력의 통제 밑에 두고 회유할 것을 목적으로 1391년(공양왕 3)에 과전법(科田法) 체제하에서 그들을 그 해 설치한 삼군도총제부(三軍都總制府)에 귀속시켜 서울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는 한량관에게 그가 소유한 직함에 따라 과전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신왕조에의 귀부(歸附)를 끝내 거부하고 대부분 지방에 근거를 두고 거경시위(居京侍衛)의 소임을 갖지 않은 한량관 수보다 현저하게 적은 10

5결의 군전을 지급하고, 무임소 한량관에 대하여는 그나마 군전마저 지급하지 않음으로써 토지소유 현상으로 본 무직자 한량관은 과전소유자, 군전소유자, 무수전자(無受田者)로 분화된다.그러나 이러한 구분도 1466년(세조 12) 직전법(職田法)의 실시로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또한

고려 말·조선 초기의 사족(士族) 자제 가운데 피역의 수단으로 호적과 군적에 등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역(職役)이 없는 미사한량자제(未仕閑良子弟)에 대하여, 고려 말부터 국가는 그들을 호적에 등재하고 강제로 추쇄(推刷)하여 군역에 충정(充定)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조선왕조 건국 후에는 한량 자제의 추쇄충군(推刷充軍)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태종·세종조에는 그들을 중앙과 지방의 여러 병종(兵種)에 속하게 하고, 세조 때부터는 단일 병종에 귀속시키려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또한 사족 자제로서 궁술 등 무재(武才)를 닦은 무역한량자제(無役閑良子弟)에 대하여 국가는 계속하여 그들의 무재를 국방력에 흡수하려 하였다.그리하여 세종 무렵부터는 그들에게 일정한 시험을 거쳐 갑사(甲士)직을 제수하였고, 중종부터는 그들에게 무과 응시를 허용하여 한량 자제가 무인으로서의 성격을 굳혀가게 된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한량의 의미가 무과 및 잡과 응시자를 가리키거나, 호반(虎班) 출신으로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 또는

궁술의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정되어 갔다.

공민왕[편집]

恭愍王 (1330~1374)

고려 31대 왕.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 초휘는 기(祺), 휘는 전. 몽골명 파이엔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익당(益堂)·이재,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군되었고, 1341년(충혜왕 2) 원나라에 갔다가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았다. 원의 지시로 충정왕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원나라에 반항할 뜻을 지니고 있었다. 원나라에 다녀온 최영(崔瑩)·유탁(柳濯) 등의 보고로 원의 쇠약해 가는 진상을 파악하고 1352년(공민왕 1) 변발·호복(胡服) 등 몽골풍을 폐지, 1356년(공민왕 5) 몽골의 연호,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날 제도로 복귀, 내정을 간섭하던 원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 원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은 세도가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 백년 동안 존속되어 오던 원의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복구하였다.1368년(공민왕 17) 명나라가 서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서 명과 협력하여 랴오둥(遼東)에 남아 있는 원나라 세력을 공략, 1370년(공민왕 19)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를 치게 하고 오로산성을 점령, 국위를 떨쳤다. 문무관의 전형권을 쥐고 있던 귀족 회의 기관(政房)을 폐지, 신돈을 채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하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켰다.그러나 1360년(공민왕 9)과 1361년(공민왕 10)에 연이어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고 왜구도 쳐들어와서 나라의 우환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1365년(공민왕 14)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불사(佛事)에 전렴, 왕비만을 추모하며 국정을 신돈에 맡겼다. 신돈은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미소년(美少年)을 수용,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특히 소년 중 홍윤(洪倫)은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까지 하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나 왕은 이 사실을 은폐시킬 의도로 밀고자 최만생(崔萬生)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이것은 고려조의 정신적 종언으로 알려지고 있다. 왕은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으나 현존하는 것은 경복궁 박물관 소장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한 점뿐이다.

공민왕의 개혁[편집]

恭愍王-改革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이 단행한 국정의 개혁. 공민왕은 충혜왕 복위 2년(1341) 원의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비로 맞고 충정왕 3년(1351) 원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후에는 주권 회복 정책을 강력히 기도하였다. 공민왕은 대륙의 정세가 동요하자 이를 이용하여 몽골의 기반을 끊고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과감한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공민왕은 몽골의 풍습·연호·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날 제도로 복구시켰으며, 정동행성·쌍성총관부를 철폐했다. 또 기철(奇轍)을 위시한 친원파를 일소하고, 명(明)과 협력하여 요동(遼東)의 원을 공략했다.동왕 19년(1370)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를 정벌케 하는 한편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권문세족(權門世族)의 세력을 억압했다.

그는 또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 후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의 침입을 받아 국력이 소모되었다.고려의 대표적 화가이며 글씨에도 능했던 공민왕의 개혁은 권문세가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죽임을 당하고 그마저 드디어 죽임을 당하여 만족할 만한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동녕부 정벌[편집]

東寧府征伐

공민왕 18년(1369)부터 19년(1370)까지의 원·명 교체기(元明交替期)의 공백 상태를 이용,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책을 실현하려고 일으킨 원정. 공민왕은 대륙의 정치적 변동을 이용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북진주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차에 당시 원의 평장사(平章使)가 동녕부에 웅거하면서 기철(奇轍)의 원수를 갚는다고 북변을 침입하려 했다. 동왕 18년(1369) 12월, 고려는 이성계를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로 하여 동녕부를 정벌케 했다. 이에 이성계는 동왕 19년(1370) 압록강을 건너 우라산성(?羅山城)을 포위 공격하고, 이해 11월 지용수(池龍壽)와 더불어 랴오양(遼陽)도 공격, 탈취했다.

신돈[편집]

辛旽 (?

1371)

고려말의 승려. 속성은 신(辛), 이름은 편조(遍照), 자는 요공(耀空). 돈(旽)은 개명, 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사비(寺妃)의 아들. 어려서 승려가 되어 각지를 방랑하다가 김원명(金元命)의 추천으로 공민왕에게 신임을 받고 사부(師傅)로 국정을 맡아 1365년(공민왕 14) 진평후(眞平後)에 오르고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 판감찰사사 취성 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 領都僉議使司判監察司事鷲城府院君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使)에 임명되어 개혁 정치를 실시하였다.그의 개혁정치는 고려 내부의 혼탁한 사회적 적폐를 타개하여 질서를 잡으려던 것으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토지 개혁 관청)을 두고 부호들이 권세로 빼앗은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려는 자들을 해방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정리하고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급진적 개혁은 상층 개급의 반감을 샀고 왕의 신임을 기화로 점차 오만해지고 방탕 음란한 행동을 하므로 상층 계급에서 배척 운동이 일어나더니 1367년 영록대부 집현전 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에 올라 귀족 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려고, 1369년(공민왕 18) 풍수설로 왕을 유혹하여 서울을 충주로 옮기기 위해 오도 도사심관(吾道都事審官)이 되려다가 왕의 불신을 받자 왕을 살해하려는 역모를 꾸몄으나 발각되어 수원(水原)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 처형되었다.

황산대첩[편집]

荒山大捷

1380년(우왕 6) 9월 이성계(李成桂)가 전라도 지리산 근방 황산(荒山:黃山)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크게 승리한 싸움. 1376년(우왕 2) 홍산(鴻山) 싸움에서 최영의 군사에 크게 패한 왜구은 한동안 잠잠하더니, 1378년(우왕 4) 5월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대거 침입하여 그 대부분이 지리산(智異山)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이때부터 왜구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성계는 지리산·해주(海州, 그 밖에 가는 곳마다 적을 격퇴시켜 그 용명(勇名)이 피아간(彼我間)에 날로 높아져 가고 있던 중, 1380년(우왕 6) 9월에 황산에서 또한 크게 충돌하게 되었다. 이해 8월에 왜구는 진포(鎭浦·錦江入口)에 500여 척의 함선(艦船)을 이끌고 와 충청·전라·경상의 3도 연해 주군을 마구 약탈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원수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을 시켜 화통(火筒)·화포(火砲)로써 왜선을 격파하여 전부 불태웠다. 왜적은 이 진포의 싸움 이후로 더욱 야만적인 성격을 발휘하여 전라·경상 양도에 걸쳐 함부로 분탕질하므로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를 토벌할 계획으로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하고 이 방면의 방수(防戍)의 중대한 책임을 맡게 하였다. 적은 함양(咸陽)·운봉(雲峰) 등의 험지(險地)를 택해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제장을 거느리고 남원(南原)에서 배극렴(裵克廉) 등과 합류하고 부서를 재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에 이르러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적은 산에 의하여 지키고 잘 싸우므로 이성계는 여러 번의 고난을 겪었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부하 장병(將兵)들을 격려하여 마침내 적을 대파하였다. 이 싸움을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는 당시에 있어서 최영(崔瑩)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더불어 왜구격파에 있어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후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전민변정도감[편집]

田民辨整都監

고려 때 토지와 노비를 정리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관청. 중기 이후 권신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많은 토지를 사유화했다. 이로써 농민은 땅을 잃고 과중한 과세에 견디지 못하여 유민(流民)이 되거나 노예로 전락하였다. 이에 원종 10년(1269) 처음으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두어 이러한 모순을 타개하려 하였고, 이어 충렬왕 14년(1288)과 17년(1291), 공민왕 1년(1352), 우왕 7년(1381)에도 설치하였다. 공민왕 15년(1366)에는 왕의 신임을 받던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으며, 신돈은 또한 스스로 판사가 되어 강력한 정책을 취하여 토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를 양민으로 해방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족의 반대에 부딪혀 실각의 한 원인이 되었다.

왕삼석[편집]

王三錫

고려 충숙왕 때의 간신. 원래 남만(南蠻) 사람. 일찍이 장삿배(商船)을 따라 원(元)나라 서울 연경(燕京)에 가 남의 집에서 얻어 먹고 있었다. 충숙왕이 연경에 있을 때 왕이 총애하는 측근자를 통해서 보고 매우 기뻐하여 고려로 돌아올 때 데리고 왔다. 의술(醫術)로 임금에게 아첨하니 임금은 그를 대단히 신임하여 사부(師傅:스승)으로 삼았었다. 임금의 신임을 믿고, 현명·유능한 사람들을 시기하며, 벼슬을 팔고, 죄없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대관(臺官)들을 대궐 안에서 공공연히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충숙왕은 깨닫지 못하였다. 또 양재(梁載)라는 외국인을 우문군(佑文君)에 봉하는 등 조정을 쥐고 흔들었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을 때는 성균관의 대성전에 모신 공자의 상(像)을 흙으로 본뜨려 하였다. 성균관에서 이 무엄한 짓을 못하도록 대성전의 문을 닫고 들여놓지 않으니 그는 임금에게 모함하여 성균관의 직원들을 체포케 하고 그들을 파면시킨 일도 있었다.

한방신[편집]

韓方信

고려 공민왕 때 무신. 무과에 급제하고 용략(勇略)이 있어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로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고 1362년 안우(安祐) 등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함락된 서울을 수복한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서해도도순찰사(西海道都巡察使)로 나갔다. 이듬해 경성수복(京城收復)의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으며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 혜(?)를 고려 왕으로 세우고 최유(崔濡) 등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침입하게 했을 때에 김귀(金貴)와 함께 화주(和州:永興)에 주둔하여 이에 대비했다. 1364년 여진(女眞)의 삼선(三善)·삼개(三介)가 침입하여 화주·함주(咸州) 등을 함락하자 한때 철관(鐵關)에 후퇴했다가,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반격을 가하여 화주 이북의 실지(失地)를 회복했으며, 앞서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봉훈대부비서감(奉訓大夫秘書監)의 벼슬을 받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 후에 찬성사(贊成使)에 올랐으나, 1374년 아들 안(安)이 공민왕을 시해(弑害)한 사건에 연좌되어 원배(遠配)되었다가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