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고려 왕실과 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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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과 원나라 〔槪說〕[편집]

고려가 원과 강화를 맺은 후에 당한 첫 시련은 일본 정벌(日本征伐)이었다. 일찍부터 원은 고려를 통하여 일본의 조공(朝貢)을 받기를 원하였다. 한편 남송(南宋) 공략에 대한 전략으로서 해상을 통하여 송과 교통이 빈번한 고려와 일본을 이용하려 한 것 같다.제1차 원정은 충렬왕 즉위년(1274)에 행해졌다.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은 중군장(中軍將)이 되어서 원군과 함께 출전하였으나 이 원정은 실패하였고, 충렬왕 7년(1281)의 제2차 원정마저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두 차례에 걸친 원정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으며, 농민들이 이 새로운 동원으로 입은 참상은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에 의하여 초래된 고려 왕실의 변질이었다. 당시 원종은 병력을 빌려 임연(林衍) 부자를 타도하고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원의 제실(帝室)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삼았고, 그 비의 몸에서 난 아들을 원칙으로 왕을 삼았다. 말하자면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된 셈이다. 이후 역대 제왕은 세자로 있을 때에는 독로화(禿魯花, 質子)로서 북경에 머물다 즉위하게 되었다. 또한 왕은 몽골식 이름을 갖게 되고 몽골식 변발(?髮)과 의복을 입었으며, 또 몽골어를 사용하다시피 하였다.이제 고려의 왕은 독립된 왕국의 통치자가 아니라 원의 제실(帝室)의 부마로 되었으며, 고려 왕실도 따라서 그 격이 낮아졌다. 왕은 조(祖)나 종(宗)을 붙여서 묘호(廟號)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 대신 ‘왕(王)’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원에 대한 충성심의 뜻으로 ‘충(忠)’자를 덧붙였다.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격하되었다. 왕위의 폐립(廢立)은 원에 의해서 좌우되는 일이 많았다. 관제도 많이 축소·개편·폐합되어, 충렬왕(忠烈王) 때는 3성(三省)이 통합되어서 첨의부(僉議府)로,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칭되었다. 또 이부(吏部)·예부(禮部)를 합쳐서 전리사(典理司)로, 호부(戶部)는 판도사(版圖司), 병부(兵部)는 군부사(軍簿司), 형부(刑部)는 전법사(典法司)로 하였으며, 공부(工部)는 없앴다. 한때 충선왕(忠宣王)은 이 관호(官號)를 복구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했다.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실은 독립 왕국의 군주로서의 지위를 끝내 유지하였다. 원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통하여 고려에 간섭하려고 하기도 했으나 고려 군신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원은 또 고려의 영토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동녕부(東寧府)를 두었고, 제주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했는 바 고려는 쌍성총관부를 제외하고는 이를 되돌려받았다.원은 여러 명목을 붙여서 고려에 금·은·포백(布帛)·곡물·인삼·해동청(海東靑, 매) 등 경제적인 징구(徵求)를 하였고, 심지어는 처녀·환관(宦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해동청의 징구에 응하여 널리 설치된 응방(鷹坊)은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이리하여 농민은 고려와 원에 이중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농민은 유민이 되어 소극적인 반항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 고려의 귀족은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게 되고, 유민을 모아다가 이를 경작시켰다.원과의 사이에 야기된 새로운 정치 문제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심양왕(瀋陽王)과의 관계였다. 이러한 고려 왕족의 심양왕 임명은 그 지방에 거주하는 고려민의 통제에 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고려를 견제하게 하려던 것이다. 그 결과 고려 왕과 심양왕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것은 원의 바라던 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 그 목적을 달성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원의 대(對)고려 정책에 있어서 주목되어야 할 점의 하나이다.

원의 침입[편집]

元-侵入

고려 고종 때 7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원나라의 침략. 일명 몽골의 입구(入寇). 고려가 최씨의` 무단정치(武斷政治) 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티무진(鐵木眞:Timudjin)이라는 영웅이 나와 몽골족을 통일, 1206년(희종 2)에는 칭기즈칸(成古思?):Chinghis Khan)이라 칭하고 원(元)나라를 세워 강대한 제국(帝國)으로 군림하였다.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금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원에 쫓기어 1271년(고종 4)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원은 동진(東眞)과 동맹, 이를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을 무찔렀다. 원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세공을 요구하는 한편 원의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1225년(고종 12) 1월 원의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원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 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양국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단절에까지 이르러 원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제1차 침입[편집]

칭기즈칸의 대를 이은 오고타이(Ogotai 窩闊台:太宗)는 1231년(고종 18) 장군 살례탑(撒禮塔)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침입에 착수,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義州)·철주(鐵州) 등을 함락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고려군은 이를 맞아 구주(龜州)·저주(慈州)·서경(西京) 등에서 크게 무찔렀으나 대체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드디어 원나라 군사가 개경(開京)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례탑이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그 결과 싸움은 일단 중지되고 원은 이듬해 1월 군대를 철수하였는데 원나라 사료에는 이때 전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72명을 두었다고 전하나 『고려사』에는 전혀 이런 기록이 없다.

제2차 침입[편집]

고려는 비록 원과 강화를 하였으나 이는 고려의 본의가 아니었고 또 앞으로 원의 태도 여하를 몰라 당시의 집권자인 최이(崔怡)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고 강화천도(江華遷都)를 결정, 1232년(고종 19)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江華島)로 옮기고 장기항전(長期抗戰)의 각오를 굳게 하였다. 이는 원에 대하여 적의를 보인 것이므로 살례탑은 7개월 만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 서경의 반적(叛賊) 홍복원(洪福源)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南京:서울)을 공격한 다음 한강을 넘어 남쪽을 공략(攻略)하였다. 그러나 해전(海戰)에 약한 원은 강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다시 남하하여 처인성(處仁城:龍仁)을 공격하다가 살례탑은 고려의 김윤후(金允候)에게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대장을 잃은 원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였는데 이때 부인사(符仁寺) 소장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불타 없어졌다. 한편 원의 철수에 기세를 올린 최이는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에게 가병(家兵) 3천을 주어 앞서 반역한 홍복원을 토벌, 가족을 사로잡고 북부 제주현(諸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제3차 침입[편집]

1235년(고종 22) 원은 남송(南宋)을 공격하는 길에 따로 당을태(唐兀台)에게 대군을 주어 다시 고려를 치게 하였다. 원은 개주(介州:介川)·온수(溫水:溫陽)·죽주(竹州:竹山)·대흥(大興:禮山)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 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다. 유명한 황룡사9층탑(皇龍寺九層塔)도 이때에 파괴된 것이다. 이같이 원은 육지에 화를 입혔으나 강도만은 침공치 못하니 조정은 강도에 웅거하여 방위에 힘쓰는 한편 부처의 힘을 빌어 난을 피하고자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도에서는 백성에게 미치는 피해를 우려하여 1238년(고종 25) 겨울 김보정(金寶鼎) 등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제의, 원은 왕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를 시작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다가 원의 독촉으로 입조의 불가능함을 말하고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왕제(王弟)라 칭하여 대신 원에 보내고 1241년(고종 28)에는 신안공의 종형(從兄) 영녕공 준(永寧公 ?)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

제4차 침입[편집]

태종의 대를 이어 귀유(貴由:定宗)가 즉위하자 원은 고려의 입조와 출륙(出陸)을 조건으로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원은 정종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한때 철군하였으나 헌종(憲宗)이 즉위하게 되자 1251년(고종 38) 야굴(也窟·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도를 굳게 지키니 원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동주(東州:鐵原)·춘주(春州:春川)·양근(楊根:楊州)·양주(襄州:襄陽)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忠州城)에 이르렀다. 이때 돌연 야굴은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야굴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 한편 충주성 싸움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원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그러나 북부지방에 있던 원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을 원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

제5차 침입[편집]

그러나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고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고종 41) 7월 차라대(車羅大: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그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과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때 차라대는 돌연 헌종의 명으로 군을 돌이켰는데 이때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도 포로가 20만 6천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제6차 침입[편집]

이듬해 원은 또다시 차라대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거 침입,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원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헌종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원은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제7차 침입[편집]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대책에 불과하였으며, 더욱이 1257년(고종 44)에는 해마다 원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원은 또 차라대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 헌종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원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고려의 굴복[편집]

이처럼 7차에 걸친 원의 침입은 육지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막대한 인명·재산·문화재의 피해을 입힌 채 원은 고려왕의 입조·출륙을 요구했다. 고려는 원의 철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등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다가, 1258년(고종 45)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崔?)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돌변하여 원에 대한 강화의 기운이 생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1259년(고종 46) 3월 박희실(朴希實)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차라대와 회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 등 40여 명을 원에 보내고 강도의 성을 헐게 하여 고려의 강화 태도에 확증을 보이니 28년 간의 싸움 끝에 드디어 고려는 굴복하였다. 동년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는데, 그는 원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강화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 후 강도에서는 무신간의 알력이 생겨 한때 왕이 폐위되었으나 다시 복위, 원의 초청을 받고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1270년(원종 11)에 귀국하여 개경에 환도하니 이로부터 고려는 완전히 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는 강화에 천도한 지 39년 만의 일이다.고려는 강화도의 작은 섬을 안전지대로 삼아 근 40년 간 질풍 같은 원의 대군을 맞아 항전하는 동안 상하 모든 사람은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극히 왕성하였는데,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일으킨 무사들의 항거정신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부처의 힘을 빌고자 15년 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사실은 우리 역사상 가장 특출한 업적의 하나가 되었다.그러나 그동안 국내 각지는 적의 침략을 당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족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화재는 소실되고 정치적으로는 원의 간섭을 받아 충렬왕 이후 공민왕까지는 부마국(?馬國:사위나라)으로 되어 자주성을 잃고 변태적인 왕조가 되었으며 모든 정치기구는 개편되고 서북면에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동녕부(東寧府) 등이 설치되어 국토의 변질을 가져왔다. 한편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왕실의 내부·심왕당(瀋王黨)의 대두 등은 고려 쇠퇴의 중요한 원인을 만들었다. 문화적으로도 몽골 지배하의 80여 년 간은 문물교환·인물교환이 잦아 이른바 몽골풍의 유행을 보게 하여 고려인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그러나 동서문화의 교류에 힘쓴 원의 영향을 받아 천문·의학·수학·역법(曆法)·예술·목화·화약·정주학(程朱學) 등이 전래되어 고려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원세력의 축출과 개혁추진[편집]

元勢力-逐出-改革推進고려사회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정치는 원세력을 축출하기 전에도 시도되었으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1298년에 충렬왕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은 충선왕(忠宣王)은 즉위교서를 통해 인사행정 및 토지겸병의 문제 등 국정 전반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는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여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한편 전반적인 관제도 개정하였다. 그러나 부원세력이 중심이 된 기득권세력의 책동과 원나라의 내정간섭에 의해 그가 퇴위하고 충렬왕이 다시 즉위함으로써 개혁정치는 실패하고 관제 개혁도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충목왕(忠穆王) 즉위(1344) 후에는 개혁 전담부서인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어 개혁이 추진되었으나(1347), 역시 부원세력의 방해와 원나라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중앙정부의 정치는 표류하고 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사회주도층인 신흥사대부층(신흥양반)이 성장하고 있었다. 가중되는 수탈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농민들의 자구 노력이 기울여지는 가운데 신흥사대부들의 새로운 농서(農書)의 편찬 등에 힘입어 농업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짐으로써 농업생산이 증가하였다. 지방에 생활기반을 둔 중소지주층이었던 신흥사대부들은 농업생산력의 증가로 새로운 경제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신흥사대부들은 선대가 지방의 향리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군공(軍功)을 쌓아 문무품관리직을 획득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의 소양을 갖춘 지식층이었다. 이들은 점차 중앙에 진출하여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사회문제의 개혁을 열망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원세력을 축출하면서 개혁은 본격화되었다. 공민왕은 정방을 혁파함으로써 인사행정을 정상화하고 신흥사대부들을 기용하였다. 또한 그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토지겸병과 양민의 불법적인 노비화를 바로잡는 개혁에도 착수하였다. 공민왕 5년(1356)에는 기철(奇轍) 등의 부원세력들이 처단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理問所)가 혁파되었으며, 쌍성총관부 지역이 무력으로 수복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압력으로 변경된 관제의 대부분이 3성·6부 등 본래의 관제로 일단 복구되었다. 공민왕은 이처럼 원나라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새로이 일어난 명(明)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친명정책을 취하였다.원세력의 축출은 이루어졌지만, 토지겸병과 양민의 불법적인 노비화 등에 대한 개혁은 권문세족의 반발로 인해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고려는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퇴한 홍건적(紅巾賊)의 두 차례에 걸친 침구(1359·1361)를 격퇴하고 원나라의 침공도 물리치긴(1363) 했지만, 공민왕이 개혁을 추진하는 데는 역시 부담이 되었다.공민왕은 재위 14년(1365)부터 기득권층과 연결되지 않은 한미한 출신의 승려 신돈(辛旽)을 기용하여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권신들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신흥사대부 출신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또한 다시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이 활성화되어 권문세족이 탈취한 토지들이 원래의 주인에게 반환되고, 노비로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양민으로 해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혁을 이끌던 신돈이 권문세족들의 반발과 자신의 실책으로 제거되고, 공민왕마저 의문의 시해를 당함으로써(1374) 이 개혁도 실패로 끝났다. 이처럼 공민왕의 내정개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과정에서 신흥사대부들이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세력을 키움으로써 다음 단계 개혁의 밑바탕이 되었다.

여·원의 일본 정벌[편집]

麗·元-日本征伐

충렬왕 즉위 1년(1274)과 동왕 7년(1281) 2차에 걸친 원(元)과 고려 양국 연합군의 일본 정벌. 고려가 몽골에 굴복하게 되자 몽골은 고려를 통하여 수차 일본에게 조공을 재촉했다. 그러나 고려의 중간 조정이 결렬되자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몽골군은 충렬왕 즉위 1년(1274) 제1차로 일본을 침략하였다.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은 원의 홀돈(忽敦)과 함께 9백 척의 함선에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合浦, 馬山)를 출발하여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안을 공격하였으나 폭풍우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제2차 원정은 동왕 7년(1281)에 행해졌다. 고려를 거쳐가는 동로군(東路軍)은 함선 900, 병원(兵員) 4만, 강동군(江東軍)은 함선 3,500, 병원 10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태풍으로 인하여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물론 해상의 기후에 대한 인식의 결핍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동시에 당시 일본의 정권을 쥐고 있던 가마쿠라(鎌倉) 막부의 완강한 저항과 일본 정벌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던 원의 국내 사정에도 원인이 있었다.

김방경[편집]

金方慶 (1212

1300)

고려의 명장.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안동. 신라 경순왕의 후예, 한림학사(翰林學士) 효인(孝人)의 아들. 고종 때 음보(蔭補)로 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록사(式目錄士)를 겸하였고 감찰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골병의 침입을 위도(葦島)에서 막아 싸웠다. 원종 때 지어사대사(知御史大使)에 승진, 1263년(원종 4) 진도(珍島)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상장군(上將軍)으로 있다가 잠시 남경 유수(南京留守)로 좌천, 곧 돌아와서 서북면 병마사로 그곳을 다스렸다. 조정에 들어와 형부상서·추밀원부사를 지냈다. 1269년(원종 10) 원나라에 있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였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웠기 때문에 몽골 황제의 명으로 맹격도(孟格圖)와 함께 군사 2천을 거느리고 동경(東京)에 이르러 이미 원종이 복위되었음을 알고 되돌아갔다. 그 이듬해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이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 왕으로 승화 후 온(溫)을 추대하자 추토사(追討使)의 명을 받고,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과 함께 물리쳤다. 1271년에는 몽골군과 합세, 또 토벌하여 승화후를 죽이고 그 여당이 탐라(耽羅:濟州道)로 도망치자, 1273년 행영중군병마 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몽골의 장군 흔도(炘都)·다구(茶丘)와 함께 또 다시 삼별초를 쳐 이를 완전히 평정하고 시중(侍中)에 올랐다. 1274년 원종이 죽자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이때 원나라에는 합포(合浦:馬山)에다 정동행성(征東行城)을 두고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방경은 고려군을 거느리고 중군장(中軍將)으로서 출정, 2만 5천 명의 몽한군(蒙漢軍)과 함께 쓰시마 섬(對馬島)을 친 다음 본토로 향하는 도중 풍랑으로 실패하고, 1281년(충렬왕 7) 또다시 고려군 도원수로 흔도·다구와 함께 10만 연합군을 거느리고 제2차 정벌에 올라 일본 히카타(傳多)에 이르러 상륙하려던 차 대폭풍이 일어나 싸우지도 못하고 큰 손해을 입고 돌아왔다. 앞서 한때 다구의 무고로 대청도(大靑島)에 정배갔으나 뒤에 원 황제가 그 억울함을 알게 되어 곧 돌아왔고, 도리어 다구의 무리가 쫓겨났다. 충선왕 때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증(追贈)되었다.

홍빈[편집]

洪彬

고려의 문신. 자는 문야(文野), 시호는 강경(康敬). 본관은 남양(南陽). 선조(先祖)가 원나라 연경(燕京)에 살며 대대로 내정(內庭)에 숙위(宿衛)한 공으로 대도로 패주 동지(大都路覇州同知)가 된 뒤에 송강부 판관(松江府判官)·도수감경력(都水監經歷)·대상예의원 경력(大常禮儀院經歷)을 지냈다. 충숙왕이 무고를 입고 폐위(廢位)되어 원나라에 억류되자 이를 변호했으며, 충숙왕이 복위하자 그의 공을 인정한 왕이 원나라에 정동성이문소(征東城理問所)의 벼슬을 내릴 것을 주청했고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使)·판군부사(判軍簿使)에 올랐으며, 1339년 충숙왕이 사망하자 유명(遺名)에 의하여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가 되었다. 조적(曹?)의 난 때 성관(省官)과 함께 조적의 강요로 충혜궁(忠惠宮)을 습격했으며, 조적이 패사(敗死)하자 다른 사람은 모두 순군(巡軍)에 잡혔으나 그는 용서되었다. 1341년(충혜왕 복위2) 조적 일당의 호소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압송되자 함께 잡혀가 왕을 위해 변호, 이듬해 왕이 귀국하게 되자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지고 이어 행성 낭중(行省郎中)에 올랐다. 충목왕 때 원나라에 가서 흥국로 총관(興國路摠管)이 되고, 돌아와서 1353년(공민왕 2) 우정승에 승진, 추성익대동덕협의보리공신(推誠翊戴同德協義輔理功臣)의 호를 받고, 당성 부원군(唐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그 뒤 홍언박(洪彦博)·이공수(李公遂)와 함께 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있다가 사직하고 66세에 사망했다.

노국대장 공주[편집]

魯國大長公主 (?

1365)

고려 공민왕의 왕비. 보탑 실리 공주라고도 한다.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로 1349년(고려 충정왕 1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여 왕과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아기를 낳다가 죽자, 슬픔에 빠진 공민왕은 정치를 신돈(辛旽)에게 맡기고 나라 일을 돌보지 않게 되어, 한때 나라가 어지러워지기도 했다.

충렬왕[편집]

忠烈王 (1236

1308)

고려 제25대 왕(재위 1275

1308). 원종의 장자. 원종 1년(1260) 태자에 책봉, 동왕 12년(1271)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하고 변발(?髮)·호복(胡服) 등 몽골 풍속에 따랐다.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동왕 15년(1274) 원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고, 충렬왕 3년(1277) 원의 병마를 사육하기 위해 제주도에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했다. 동왕 6년(1280)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자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동왕 16년(1290) 합단(哈丹)이 내침하여 강화로 천도했으며, 김방경의 활약으로 수차 왜구(倭寇)·야인(野人)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다. 재위 중 자주 원에 내왕하면서 풍습과 제반 문물제도를 받아들였고,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경학과 사학의 진흥에 힘썼다. 또 원의 속방(屬邦)에 맞게 관제를 격하하였고, 몽골의 내정 간섭을 많이 받았다. 몽골 풍속이 많이 들어왔으며, 또한 왕비와 그 일족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고려 농민은 유민(流民)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인복[편집]

李仁福 (1308

1374)

고려의 학자. 자는 극례(克禮), 시호는 문충(文忠). 성산군 조년(兆年)의 손자. 송대유학(宋代儒學)의 태두인 백이정(白?正)에게 배워 문장에 능하였고 특히 주자학(朱子學)에 밝았다. 1326년(충숙왕 3) 19세로 과거에 급제해, 복주(福州)의 사록(司錄)이 되었다가 춘추공봉(春秋供奉)에 보직되었고, 충혜왕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대령로 금주판관(大寧路錦州判官)의 벼슬을 받아가지고 돌아와 기거주(起居注)에 승진하였다. 충목왕 때 제과(制科)에 급제, 우대언(右代言)을 거쳐 밀직제학에 나가 서연(書筵)에서 진강하였는데 외모가 장엄하고 언사가 정중하여 왕이 항상 좌우에게 이 공을 보면 부지중 소연(昭然)한 마음이 일어난다고 말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승진하여 원나라의 정동행성도사(征東行省都事) 벼슬을 받았으며,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자 왕에게 법에 의하여 처치할 것을 주장하여 그대로 실행하여 죽였다. 정당문학으로 감찰대를 겸하고 성산군(星山君)에 피봉되었으며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使)·판개성 부사 첨의평리(判開城府事僉議評理)를 역임하고 찬성사에 나가 공신의 호를 받았다. 신돈(申旽)에게 거슬려 퇴직하고 안흥 부원군에 피봉되고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使)가 되었다가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러 등창으로 사망했다. 강직하고 문장에 뛰어나 충렬·충선·충숙의 실록과 『고금록(古今錄)』 『금경록(金鏡錄)』을 편수하였다.일찍 신돈의 위인이 단정치 못하여 후일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을 공민왕에게 말하였으므로 왕이 그 선견의 밝음을 찬탄하였으며, 또 그의 아우 인민과 인임(仁任)에게

나라를 망치고 집을 패케 하리라 말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 되었다.

도평의사사[편집]

都評議使司

고려말 조선왕조 건국 초기에 있던 관청. 충렬왕 5년(1279) 도병마사(都兵馬使)를 개칭한 것이다. 고려 전기의 도병마사는 순전히 국방·군사면에 대한 일시적 회의 기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무인 집권이 끝난 후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개편되어 그 구성과 기능이 더욱 확대 강화되었다. 재부(宰府, 僉議府)·밀직(密直) 이외에 3사(三司)의 정원(正員)도 재추(宰樞)로서 도당(都堂), 즉 도평의사사에 합좌(合坐)하게 되고, 여기에 상의(商議)까지 합하여 고려 말기에는 구성원이 70, 80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기능도 합의 기관인 동시에 국가 서무를 직접 관장하는 행정기관으로 되었으며, 임시기관에서 상설기관으로 변하였다. 왕지(王旨)나 중앙의 제사(諸司), 지방 여러 도의 안렴사(按廉使)도 도당에 일원화되어 도당은 중앙의 최고 정무기관이 되었다. 도평의사사는 조선 왕조가 성립한 후 그대로 계속되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직후 도평의사사를 최상위(最上位) 기구로 하여 이를 정비 개정했다. 그 후 정종 2년(1400) 의정부(議政府)로 개칭하고, 태종 1년(1401) 문하부(門下府)를 통합하여 백규서무(百揆庶務)를 관장하게 됨으로써 고려의 도평의사사는 조선의 의정부로 개편되었다.

충선왕[편집]

忠宣王 (1275

1325)

고려 제26대 왕 휘는 장(璋), 초휘는 원(願), 몽골의 휘는 이지르부카(益知禮普化), 자는 중앙(仲昻), 시호는 충선(忠宣). 충렬왕(忠烈王)의 장남, 어머니는 제국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 정비(正妃)는 원나라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 공주(?國大長公主:寶塔實燐公主). 1277년(충렬왕 3) 세자(世子)로 책봉되고, 다음 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았다. 1296년(충렬왕 22)에 몽골 황실의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보탑실린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 원도(元都:北京)에서 혼사를 거행하였는데 앞서 서원후 영(西原候瑛)·홍문계(洪文系)·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인 바 있다. 1297년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은 내총(內寵)을 투기(妬忌)하는 자들의 소치(所致)라 하고 당시 부왕(父王: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날뛰던 무비(無比:伯也丹)와 그의 관련자인 여러 사람을 귀양, 혹은 죽이거나 가두었다. 이 지나친 처사와 왕비의 죽음에서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충렬왕은 왕위의 이양의 뜻을 원나라에 정하였다. 그리하여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고, 부왕(父王)은 태상왕(太上王)이라 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려 하자 권문·세가의 비방을 많이 받았다. 정국(政局)의 쇄신을 꾀하고 먼저 관제(官制)를 개혁하던 무렵에 조비(趙妃)를 질투해 오던 왕비 계국공주와 왕의 반대파들에 의하여 음모사건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충선왕 즉위 7개월 만에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왕실의 치정 문제도 관계되지만, 충렬·충선 양 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 중상의 결과로 보겠다. 충선왕이 원나라로 간 후에도 그에게 원한을 품은 송린(宋璘)·송방영(宋邦英) 등이 그를 모함하여 충렬·충선왕 부자지간을 이간시켰으며, 계국공주 재가 문제를 제기시켰으나 오히려 처형당하였다. 충선왕은 다시 즉위할 때까지 10년 간 계국공주와 원나라 서울에 머물면서 후에 무종(武宗)이 된 회령왕(懷寧王) 해이샨(Haishan:海山) 및 인종(仁宗)이 된 태자 아유르발리파드라(愛育黎拔力達:Ayurba lipadra)의 형제와 친하게 지냈다. 1307년 원의 성종(成宗)이 죽자 왕위 계승이 실력 문제로 악화되었을 때 충선왕은 무종(武宗)을 옹립(擁立)하여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원 황실과의 친분이 두텁게 되어 심양왕(瀋陽王)에서 즉위, 다시 정치의 쇄신에 열의를 보였으나 오래 고려에 머무르지 않고 원나라 생활을 즐기며 전지(傳旨)를 통하여 국정을 행하였다. 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으로 가져가고, 계속 원에 머물길 원하자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으나 아들(江陵大君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세자 감(鑑)은 충선왕이 죽였다), 사랑하던 조카를 심양왕의 세자로 삼았으며 나중에 그에게 전위(傳位)하면서 끝내 귀국을 피하였다. 이는 본국에 대한 애착의 결여, 원실의 우대 등에도 이유가 있겠으나 본성이 담박하고, 불(佛)을 좋아하고 글을 즐기며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던 까닭이다. 그 무렵 원나라 서울에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여 내외 서적을 수집, 고려에서 이제현(李齊賢) 등과 원의 조맹부(趙孟?) 등의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고려 문화의 수입에 노력하였다. 원의 인종(仁宗)이 죽자 간신의 참소로 토번(吐藩) 땅에 유배되었다가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하자 해면되어 원나라 서울에 돌아와 2년 후에 죽었다. 덕릉(德陵)에 장사하였다

충숙왕[편집]

忠肅王 (1294

1339)

고려 제27대 왕, 휘는 도(燾), 자는 의효(宜孝), 시호는 의효(懿孝), 원나라 시호는 충숙(忠肅). 충선왕(忠宣王)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몽골녀(蒙古女) 야속진(也速眞). 1313년(충선왕 5) 강릉 대군(江陵大君)으로 있다가 양위받아 즉위하였으며 아버지 충선왕(充宣王)은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조카 연안군(延安君) 고(暠)를 심양왕(瀋陽王)의 세자로 삼아 양위하고 원나라 양왕(梁王)의 딸을 맞게 하였다. 이리하여 원실의 대우를 받게 된 심양왕 고는 왕위 찬탈의 뜻을 품고 충숙왕이 주색과 사냥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구실을 참소하여, 충숙왕이 원나라에 갔을 때 왕인(王印)까지 빼앗긴 일이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으로 충숙왕은 심양왕에게 양위까지 하려 하였으나 한종유(韓宗愈) 등의 간으로 중지하고 왕자 정(禎)을 세자로 삼아 1292년 원에게 양위할 것을 청하고 다음 해에 양위하니 이가 충혜왕(忠惠王)이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왕은 수렵·유희를 일삼고 소행이 옳지 못하자 즉위한 지 2년 만에 다시 충숙왕이 복위하였고 세 번이나 원실의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충목왕[편집]

忠穆王 (1337

1348)

고려 제29대 왕. 휘는 흔(昕), 몽골의 휘는 팔사마내아사, 시호는 현호(顯孝), 원나라 시호는 충목(忠穆), 충혜왕의 태자, 어머니는 덕녕공주(德寧公主). 1344년(충혜왕 5) 고용보(高龍普)가 왕을 옹위하고 원나라 순종을 알현(謁見)하였을 때 순종이 ‘그대는 아버지를 배우겠는가, 아니면 어머니를 배우겠는가’라는 물음에 ‘어머니를 배우고 싶다’고 대답하자 순종은 왕의 천성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찬탄하고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으니, 이때 나이 8세였다. 왕은 즉위하자 전조(前朝)의 폐정을 시정할 것을 선언하고 녹과전(祿科田)이 세력 있는 사람들 손에 독점되어 있던 것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충선왕의 명으로 민지(閔漬)가 찬진(撰進)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시키고 충렬·충선·충숙 3조의 실록을 편수시켰고, 기근이 있자 진제도감(賑濟都監)을 두어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정동행성[편집]

征東行省

원(元)이 일본 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설치하였던 관청. 원명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며 일본행성(日本行省)·정동성(征東省) 등이라고도 한다. 제1차 일본 원정에 실패한 원의 세조(世祖)는 충렬왕 6년(1280)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하고 제2차 일본 정벌을 준비,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하자, 동왕 8년(1282) 드디어 폐지하였다. 그 후 제3차 정벌 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동왕 9년(1283) 다시 설치했으나 곧 폐지되었다. 원래 일본 정벌은 고려·원 연합군으로 시도하였으므로 충렬왕이 정동행중서성의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행중서성사(行中書省使)에 임명되었다. 일본 정벌이 포기된 후에도 그대로 존속되어 공민왕 때까지 남아 있었다. 고려 국왕은 원으로부터 정동행성의 좌승상직을 받았으나 정동행성은 형식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원은 정동행성을 통하여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려 하였으나 고려 군신의 반대에 봉착하여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70여 년 간 존속된 정동행성은 원의 쇠퇴와 고려의 국권 회복 운동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즉 공민왕 5년(1356) 당시 정동행성의 대표기관인 이문소(理問所)를 혁파함으로써 정동행성은 폐지되었다.

쌍성총관부[편집]

雙城摠管府

원이 고려 화주(和州, 永興)에 두었던 관청. 고종 45년(1258) 최씨가 타도되자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신집평(愼執平) 및 등주(登州)·화주의 부사(副使)를 죽이고, 화주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골에 항복하였다. 몽골은 이 지역을 통할하기 위하여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摠官), 탁청을 천호(千戶)에 임명하였다. 이후 약 백년 동안 원은 이를 통해 철령(鐵嶺) 이북을 통치했다. 원의 세력이 약화되자 고려는 공민왕 5년(1366)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하여 이 지역을 공략하였는데, 천호 이자춘(李子春)의 협력으로 탈환,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했다.

동녕부[편집]

東寧府

원이 고려 서경(西京, 平壤)에 설치한 관청. 원종 10년(1269) 서북면에 병마사의 기관(記官)이던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城)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여섯 성을 들어 원에 항복했다. 원은 동왕 11년(1270)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두고, 최탄으로 동녕부 총관(摠管)을 삼아서 자비령 이북을 다스렸다. 이에 원종(元宗)은 세조에게 반환을 요구했으며, 충렬왕 1년(1275) 이를 승격시켜 동녕로총관부(東寧路摠管府)로 개칭하였다. 그 후 고려의 요청에 따라 이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는 요동으로 옮겼다.

응방[편집]

鷹坊

고려·조선 때 매의 사육과 매 사냥을 맡은 관청. 응방의 제도는 몽골에서 들어온 것으로 충렬왕 때 설치되어 백성을 몹시 괴롭혔다. 이 응방의 경영을 위해서는 몽골의 기술자인 응방자가 필요하였다. 응방은 개경을 중심으로 지방의 역(驛)과 외군(外郡)에도 설치하였다. 응방심검별감(鷹坊審檢別監)과 착응별감이 파견되어 응방의 검열과 매를 잡게 하였으며, 몽골에서도 착응사(捉鷹使)가 건너왔다. 동왕 9년(1283) 응방도감이 설치되어 이를 관할하였고, 충목왕 때 폐지되었다가 공민왕 때 다시 설치되었다. 조선 왕조 시대에도 응방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응방은 많은 민폐(民弊)를 끼친다고 폐지하자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하였으나 그대로 존속되었다.

심양왕[편집]

瀋陽王

고려 때 원(元)에서 받은 봉작(封爵)의 하나. 충렬왕 34년(1308) 충선왕이 원에서 무종(武宗)을 옹립한 공으로 심양왕의 봉작을 받은 것이 그 시초였다. 당시의 심양,

즉 지금의 펑톈(奉天)·랴오양(遼陽) 등지는 고려인의 전쟁 포로나 유민(流民)들이 많이 살면서 특수한 지역을 형성하여 두 나라 사이의 교통상·군사상·경제상 극히 중요한 곳이었다. 이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심양왕이 봉해졌다. 충렬왕이 죽은 후 심양왕이던 충선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고, 충선왕 2년(1310) 심왕(瀋王)에 개봉(改封)되었다. 이때부터 심양왕 대신 심왕으로 불리었다. 그 후 연안군 고(延安君暠)가 심양왕이 되면서부터는 이러한 지역에 대한 실권이 없어졌다. 원은 이때부터 심왕을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함으로써 고려의 왕을 견제하는 도구로 삼았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충숙왕을 싫어하는 일부 무리들이 있어 고(暠)와 결탁하여 그를 왕위에 옹립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심양왕과 고려왕 사이에는 고려 국왕의 지위를 둘러싸고 여러 번 분규가 일어났다. 이러한 고려 자체 내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분열을 이용하여, 원은 쇠퇴해진 국력으로도 고려에 대한 외교정책에 있어서 주도권을 쥐고 군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