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몽골과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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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과의 항쟁〔槪說〕[편집]

고려가 몽골과 최초의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은 몽골에게 쫓겨오는 거란인을 협공하던 때부터이다. 거란인은 금이 망할 무렵 독립하였다가 다시 몽골군에게 쫓겨 고려의 강동성(江東城)에 내려와 서북지방에서 약탈을 감행했다. 고려는 몽골과 합세, 조충(趙?)·김취려(金就礪) 등을 보내어 이를 함락시켰다. 몽골은 이후 고려에 대해 매년 공물(貢物)을 요구함으로써 양국 사이는 소원해져 갔다.그러다가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살해 사건을 계기로 몽골군은 고종 18년(1231)에 제1차 침입을 행하게 되었다. 몽골은 공물에 대한 기대만이 아니라 만주와 화북(華北)을 점령하고, 나아가서 남송(南宋)과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기지를 고려에서 구하려고 했다. 살례탑(撒禮塔)이 거느린 몽골군은 귀주(龜州)에서 박서(朴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수도 개경에 임박하였다. 이에 고려가 강화(講和)를 요청하자 몽골은 몽골인 감독관(監督官:達魯花赤)을 서북면에 두고 군사를 철수하였다.그러나 최우는 몽골와의 항전을 결의하고, 바다를 두려워하는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고종 19년(1232) 강화천도(江華遷都)를 행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몽골은 제2차로 침입하였다. 고려의 반적(叛賊) 홍복원(洪福源)의 인도로 개경을 거쳐 한강 이남까지 내려온 몽골군은 살례탑이 김윤후(金允侯)에게 사살(射殺)되자 곧 후퇴하였다. 몽골군은 그 후에도 고려왕의 친조(親朝)와 항복을 요구하며 약 30년 간 전후 7차에 걸쳐 침입하여 왔으나 고려는 강화(江華)에서 항전을 계속했다.무인정권의 몽골에 대한 항전은 농민들의 뒷받침을 받아서 수행되었다. 제1차 침입 때는 관악산의 초적(草賊)들이 항복하여 몽골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광수(池光守) 등에게 지휘된 충주 노예군의 항쟁은 특히 유명하였다. 또한 농민들도 몽골군에 완강히 저항하자 이에 몽골군은 곡식을 불태우고 잔인한 살륙을 감행하였다. 이리하여 농촌은 황폐해 갔고 인구는 감소됐으며, 뿐만 아니라 황룡사의 구층탑(九層塔)과 부인사(符仁寺) 소장의 대장경이 불타는 등 문화재가 소실된 것도 한둘이 아니었다.최씨 무인정권은 불력(佛力)에 의존하여 난국을 타개하려고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감행하여 이른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조판했다.한편 농민은 무인정권에 점차 반항심을 갖게 되었고, 점차 대두한 문신들은 왕을 중심으로 몽골과 강화(講和)할 것을 주장했다. 문신들은 외세(外勢)와 결탁하여 주전파(主戰派)인 무인정권을 타도하려고 했다. 고종 45년(1258) 무신 유경(柳璥)과 무신 김준(金俊) 등이 최의(崔?)를 살해하자 정권은 일단 왕에게 돌아가고 대몽강화가 결정되었다. 다음해인 1259년 태자 전(?:뒤의 원종)이 몽골에 입조(入朝)하여 항복의 뜻을 표하고 강도(江都)의 성곽을 파괴하였다.무인들은 여전히 대몽강화를 즐겨 하지 않았다. 김준은 비록 대세에 끌려 적극적으로 강화를 거부하지는 못하였으나 강화정책에 불만이 없지도 않았다. 김준을 죽이고 대신 정권을 쥔 임연(林衍)은 친몽정책을 수행하는 원종을 폐하는 등 노골적으로 강화를 반대했다. 그러나 국내 결속의 해이(解弛)와 강화정책의 진전으로 몽골의 압력은 더해져 원종이 복위되고 또 몽골병이 출동하였다.항몽전이 장기화되자 무신정권은 제정도 악화되고, 통솔력의 유지도 점차 어려워졌다. 최우의 아들 최항은 집권 8년 만에 병사하였고(1257), 그 뒤를 이은 최의는 다음해인 고종 45년(1258)에 그 수하 김준에 의해 제거됨으로써 최씨정권은 막을 내렸다.고종 44년 몽골에 강화교섭의 요구조건을 양보해오고, 고려에서도 다음해에 대몽항쟁을 주도해온 최씨정권이 무너짐으로써 강화교섭은 직전을 보게 되었으니, 고종 46년에 파견된 태자(뒤의 元宗)는 몽골의 헌종(憲宗)이 죽은 직후 아우 쿠빌라이(忽必烈, 世祖)를 만나 강화를 성립시켰다. 제위 계승을 놓고 형제간에 무력충돌을 하게 된 쿠빌라이는 그토록 완강한 항전을 벌여온 고려가 자신에게 화의를 요청해온 것에 큰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였고, 고려에 대해 전과 다른 호의를 보였다. 그는 고려측에서 강화 조건으로 제시한 고려왕국의 존속 보장과 몽골군의 즉각적인 철수 등과 관련된 여섯 개 조항의 요구를 모두 수락하였다.강화는 성립되었으나, 1264년 몽골에서 고려의 국왕이 몽골에 올 것을 요구하자, 무신들을 중심으로 반몽 여론이 다시 일어났다. 더욱이 몽골이 일본원정을 위해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줄 것을 고려에 요구함에 이르러서는 반몽 여론이 크게 고조되어, 원종(元宗)을 중심으로 한 강화론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 새로운 무인집정 김준이 살해되고 임연(林衍)이 들어섰으며, 원종 10년(1269)에는 임연이 독단으로 원종을 폐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몽골에 가 있던 태자(뒤의 忠烈王)가 몽골에 요청하여 지원을 받음으로써 원종은 복위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몽골이 고려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게 만든 사건이 되었다.복위 직후 몽골에 간 원종은 태자와 몽골 공주의 혼인을 제의하고, 무신정권의 제거를 위해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 원종 11년(1270) 2월 궁지에 몰린 임연이 원종의 귀국 직전에 병사하였으나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무인집정이 되어 반몽노선을 고수하였다. 그는 강도로부터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하는 원종과 대립하다가 살해되었다(1270). 이로써 무신정권은 끝이 나고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개경으로 환도가 결정되었다.그러나 강도에서 항몽세력의 주축을 이루었던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는 원종의 아우 온(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진도(珍島)로 거점을 옮겨 남부를 지배하며 항몽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정부군과 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자(1271), 그 일부가 제주도로 옮겨 저항하다가 원종 14년 (1273)에 모두 평정되었다.

조충[편집]

趙? (1171

1220)

고려의 무장·정치가. 자는 감약(堪若),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횡천(橫川). 명종 때 문과에 급제, 내시(內侍)가 되고 희종 때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1216년(고종 3)에 추밀부사(樞密副使)·한림학사·승지·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이때 거란(契丹)족이 서해도(西海道:黃海道)에 침입하자 부원수로 출정하고 다음해 정방보(鄭邦輔)와 함께 염주(鹽州)에 출정, 패하여 한때 파면되었으나 다시 서북면 병마사로 인주(麟州) 부근에서 거란족을 무찔렀다. 1220년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되었으며, 다시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가 되어 남은 거란족을 진압, 이듬해 몽골·동진(東眞)의 연합군과 함께 거란 잔적의 근거인 강동성(江東城)을 깨뜨리고 완전히 평정하였다. 조충은 이 싸움에서 얻은 포로들을 각 도의 주현(州縣)에 분송(分送)하여 소위 거란장(契丹場)을 이루게 하였는데 개선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판례부사(判禮副使)가 되고 이어 수태위동중서 문하시랑 평장사수국사(守太尉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修國史)를 겸직하였다. 개부의 동삼사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門下侍仲)이 추증되었다.

강동성싸움[편집]

江東城- 고려·몽골·동진(東眞)의 연합군이 1219년(고종 6) 강동성(江東城)에서 남은 거란적(契丹賊)을 정벌한 싸움. 몽골군에 쫓겨 1216년(고종 3) 고려에 침입한 이래 한때 그 형세가 대단하여 황해도 지방까지 출몰하던 거란족은 고려 침입 이후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체 내의 내분(內紛)과, 고려 관군의 토벌작전으로 그 형세가 꺽여 드디어 강동성에 입거(入據)하였다. 1215년(고종 2) 칭기즈칸(成吉思汗)은 그의 원수(元帥) 합진(哈眞)이 이끈 1만의 군대와 동진(東眞:東夏)의 장수 완안자연(完顔子淵)이 인솔한 2만의 병력을 연합, 고려에 보내어, 거란적을 토멸하고 고려를 구한다는 명목하에 동북면(東北面)의 성천(成川)·강동(江東)지방에 상륙, 적의 거성(據城)이던 화주(和州:永興)·맹주(孟州:孟山)·덕주(德州:德川)·순주(順州:順川)의 4성(城)을 차례로 쳐부수고 적의 주력이 있는 강동성을 향하여 쳐내려 왔다.그러나 때마침 대설(大雪)로 군량의 보급로가 끊어지고, 강동의 적은 성벽을 굳게 하여 공위자(攻圍者)를 피로케 하려고 하므로 몽골 장수 합진은 고려의 서북면원수부(西北面元帥府)에 통사(通事:통역관)를 보내어 군량의 원조(援助)를 요청, 또 거란을 쳐부순 뒤에 몽·여 양국이 형제의 약속을 맺을 것을 내용으로 하는 통첩을 몽골 황제 칭기즈칸의 이름으로 전해 왔다. 원수부(元帥府:趙?)에서는 그들의 요청을 수락, 중군판관(中軍判官) 김양경(金良鏡:仁鏡)을 보내어 정병(精兵) 1천으로 쌀 1천 섬을 호송케 했다. 그러나 당시 고려에서는 몽골이 거란을 물리치고 고려를 구한다고 하지만 몽골은 일찍이 이적(夷狄) 가운데서도 가장 흉한 종족으로서, 서로 접촉한 일이 없는 생소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의 참뜻을 의심하여 강화가 늦어졌다.다음 해인 1219년(고종 6) 정월, 드디어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祉侯) 윤공취(尹公就)와 중서주서(中書注書) 최일(崔逸)이 결화의 첩문(諜文)을 가지고 몽골 군영(軍營)에 가고, 몽골도 답례의 사자를 보내어 서로 화의(和義)를 굳게 하였다. 그 뒤 몽골 원수 합진이 강동성을 쳐부수고자 자주 서북면원수 조충에게 군사의 증파(增派)를 요구,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김취려(金就礪)는 지병마사(知兵馬使) 한광연(韓光衍)과 같이 십장군병(十將軍兵) 및 신기(神騎)·대각(大角)·내상(內廂)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몽골군 진영으로 나아갔다. 수일 후 조충(趙?)도 합세, 몽장 합진 등과 같이 공동작전을 모의, 적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미리 성 밑에 넓이 깊이 각 10자의 못을 파기 시작, 성의 남문(南門)으로부터 동남문(東南門)에 이르는 사이를 완안자연(完顔子淵)이 맡고, 동문(東門) 이북은 김취려가 맡아 공격하였다. 이에 거란적은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40여 인이 성을 넘어 몽골군에 항복하니 적의 괴수(魁首) 함사(喊舍:王子)는 목을 매어 자살, 그의 관인(官人)·장졸(將卒)·부녀(婦女)는 모두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5만여 인이었다. 합진은 조충 등과 더불어 투항(投降)의 상황을 순시하고 왕자(王子)의 처자(妻子) 및 위승상(僞丞相)·평장(平章) 이하 백여 인을 즉시 참형(斬形)에 처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이지 않고 여러 군(軍)으로 지키게 하니, 3년에 걸쳐 고려를 괴롭혔던 거란적을 연합군은 별다른 큰 전투(戰鬪)와 희생(犧牲) 없이 토벌하였다.이때 몽골 원수 합진은 고려 원수 조충 등과 양국의 결호(結好)와 형제의 맹약(盟約)을 맺고, 합진은 거란의 부녀(婦女)·동남(童男) 7백명과 적에게 붙잡혀 갔던 고려 백성 2백명을 고려에 돌려 주었다. 특히 15세 가량의 거란 여자 각 9인과 준마(駿馬) 각 9필(匹)을 조충·김취려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전부 몽골로 끌고 가게 했다. 조충은 이러한 거란의 부로(?盧)들을 각도(各道)의 주·현에 분송(分送)하고 땅을 주어 살게 하였는데 이들이 살던 곳을 거란장(契丹場)이라 불렀다. 이 강동성 싸움은 고려를 괴롭히던 거란적을 완전 소탕했다는 의의 외에도 이 싸움으로 해서 형성되었던 여·몽간의 최초의 교섭을 기점으로 그

후에 복잡하고도 중대한 여·몽관계가 전개되었음을 들 수 있다.

김취려[편집]

金就礪 (?

1234)

고려의 장군. 시호는 위열(威烈). 본관은 언양(彦陽), 예부시랑(禮部侍郞) 부(富)의 아들. 음관(蔭官)응로 정위(正尉)에 임명된 후 동궁위(東宮衛)를 거쳐 장군(將軍)이 되었다. 1216년(고종 3)에 거란(契丹) 왕자 금산(金山)·금시(金始)가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칭하고 몽골군에게 쫓기어 쳐들어 온 것을 무찌르고 1218년의 재침도 취려가 평정, 한순(韓恂) 등이 의주(義州)에서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는 등, 공로가 많아 판병부사(判兵副使) 시중(侍中)까지 되었다. 성미가 곧고 청백하여 군기를 엄정히 하고 부하를 골고루 아끼었으며 싸움에서는 기발한 계교를 많이 꾸며서 큰 공을 세웠다.

박서[편집]

朴犀

고려 고종 때의 무신. 고종 18년(1231)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을 때, 제1차로 침입한 몽골군을 귀주에서 맞아 물리쳤다. 살례탑(撒禮塔)이 거느린 몽골군이 철주(鐵州)를 거쳐 귀주(龜州)를 공격하자 김중온(金仲溫)·김경손(金慶孫)과 함께 성을 사수(死守)하고, 누차(樓車)·대포차(大砲車)·운제(雲悌) 등으로 공격해 오는 몽골군과 한 달 동안이나 격전하여 마침내 물리쳤다. 이에 몽골군은 서경을 먼저 함락하고, 고려와 강화를 맺고 나서 귀주를 공격해 왔다. 이때 항복을 권유하는 왕명을 어기지 못해 항복했다.

강화천도[편집]

江華遷都

몽골 침입에 장기간 항전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일. 몽골의 제1차 침입에 항복한 고려는 그들의 과중한 물자 요구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몽골이 재침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천도론(遷都論)이 대두하여 권신 최우도 마침내 강화로 천도할 것을 제창하였다. 강화도는 개경에 가까운 천험(天險)의 요새(要塞)이므로 육전(陸戰)에는 강하나 수전(水戰)에 경험이 없는 몽골군을 능히 물리칠 수 있으며, 또 개경에서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강화로 천도하여 항전하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고종 19년(1232) 천도를 단행했다. 이때부터 39년 간 강화에서 몽골에 대한 장기 항전이 계속되었다. 강화 천도는 확실히 몽골에 대한 적의를 표시한 것으로 이후 몽골의 2차 침입을 받게 되었다.

홍복원[편집]

洪福源 (1206

1258)

고려의 역신(逆臣). 처음 이름은 복량(福良), 시호는 충헌(忠憲). 도령(都領) 대순(大純)의 아들. 그 선조는 중국인, 당나라 때 고려로 이주해 왔다. 1218년(고종 5) 원나라가 강동성(江東城)에 침입했을 때 아버지 대순이 자진해 항복하고 적병을 불러 들였고, 1231년(고종 18) 원나라가 살례탑(撒禮塔)을 보내어 다시 침입할 때 아들 복원이 또 항복했다. 원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 복원은 서경낭장(西京郎將)으로 있을 때 반란을 일으키고 잡혔으나 도주하여 원나라로 돌아가 동경총관(東京總管)이 되었으며 그 뒤 원나라가 조선을 칠 때마다 그 앞잡이가 되어 들어오므로 '주인을 무는 개’라고 하였다. 뒤에 영녕공(永寧公) 준(?)이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 황제에게 고하고 데리고 간 장사(壯士) 10여 인에게 매를 맞아 죽었다.

김윤후[편집]

金允侯

고려 고종 때의 승장(僧將).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 있었고, 몽골 침입 때 몽골 장군 살리타이(撒禮塔:Salistai)를 처인성(處仁城:龍仁)에서 죽였는데, 그 공으로 임금이 상장군(上將軍)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뒤에 섭랑장(攝郞將)을 거쳐 충주 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을 때 몽골군이 성을 포위하고 70여 일을 공격하였으나 군민이 일치 단결하여 성을 사수하고 이를 격퇴시겼다. 그 공으로 감문위(監門衛) 상장군이 되고 기타 공 있는 자는 관노·백정에 이르기까지 상을 받았다. 뒤에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않았고 원종 때에는 추밀원 부사를 거쳐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가 되었다.

고려고종제서[편집]

高麗高宗制書

고려 고종이 조계산(曹溪山) 제2세 진각국사 혜감(惠堪)에게 대선사(大禪師)의 호를 내린 사령장.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松廣寺) 소장. 1216년(고종 3)에 발행. 이 제서는 능형화문(菱形花文)을 나타낸 홍(紅)·황(黃)·백(白) 등의 색릉(色菱) 7장을 이어서 두루마리로 만든 것이다. 지금 그 보존 상태는 좋지 못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고문서(古文書)로 귀중하다. 국보 43호.

고종[편집]

高宗 (1192~1259)

고려 제 23대 왕. 강종의 장남. 1214년 즉위, 사실상 정권은 최씨 일족이 장악했다. 1218년 거란의 침공을 받고 이를 격퇴, 몽골의 침입에 대하여는 협약을 맺었다.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귀국 도중 도적에게 피살된 것을 구실로 하여 재침하자 강화조약을 체결, 각지에 몽골의 다루가치(達魯花赤:행정 감독관:장관) 72인을 두게 하고, 또 약간의 수비군을 주둔케 했다. 1232년 강화도에 천도, 몽골에 항거했다. 1235년 제 3차 침입을 받고 1238년 경주 황룡사(皇龍寺) 9층탑을 소각당한 외에도 귀중한 국보를 많이 잃었다. 1252년 6차의 침입을 받았을 때는 남녀 무려 약 2십만 6천 8백 명의 포로를 내고, 태자(太子)의 입조를 약속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사실상 몽골에 굴복했다. 문화 발전에 힘써,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조판케 하고, 유학을 장려했다.

고려대장경[편집]

高麗大藏經

고려 때 2차에 걸쳐 간행한 불경. 고려는 문신을 존중하고 무신을 천대하여 오던 차 여러 차례 외국의 침입을 받게 되어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다. 이것이 방대한 대장경의 간행사업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제1차 대장경 간행. 제2차 대장경간행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제1차 대장경간행[편집]

제1차는 초판고본(初版古本) 대장경과 속대장경으로 나눈다. ① 거란(契丹)의 침입을 받아 곤경에 있을 때 불심(佛心)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간행에 착수하였는데 현종(顯宗)부터 문종(文宗)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대구의 부인사(符仁寺:지금은 없음)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大般若經)』 600권, 『화엄경(華嚴經)』 『금광명경(金光明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을 조조(雕造)하였다. 이 초판고본 대장경은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을 받아 병화로 없어졌고, 약간 남아 있는 것은 일본의 교토(京都) 난레이사(南禮寺)에 1,715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② 속대장경(續大藏經)은 초판고본에 계속하여 간행한 것으로 의천(義天)이 송나라에 갔다오면서 수집해온 불경과 요(遼)·일본에서 수집한 것을 합하여 4,700여 권을 수집. 1073년(문종 27)부터 1090년(선종 7)까지 수집된 불경의 총 목록을 작성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 했는데 이 목록에 의하여 차례대로 조조하였다. 이는 모두 1,010부(部) 4,740여 권으로 몽골의 병화로 초판고본 대장경과 함께 없어졌으나 약간 남은 것으로, 순천(順川) 송광사(松廣寺)에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소)』 중 제9권과 제10권이 있고,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일본 나라 도오다이사(奈良東大寺)에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 40권, 나고야(名古屋) 신후구사(眞福寺)에 『석마하연론통현초(釋摩詞衍論通玄?)』 4권이 있다.

제2차 대장경 간행[편집]

이는 8만대장경의 조조를 말하는 것인데 몽골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江華島)에 피난 중 그 화를 불심으로 막아내고자 한 것이었으며 제1차 간행 조판(組版)이 없어졌기 때문에 대장경의 조조가 시급하였다. 1236년(고종 38)에 완성을 보았은데 총 81,137매(枚)로 지금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조판이 보관되어 있다. 8만대장경은 일본의 다이쇼오(大正)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의 저본(底本)이었으며, 동국대학교에서 영인본(影印本)이 나왔다. 대장경의 조조는 고려사회의 재정 질서를 위기에 몰아놓을 정도로 국가적인 대사업이었으므로 국민들의 부담이 막심하였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기술의 발전에 큰 공을 하였다.

팔만대장경[편집]

八萬大藏經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고종 23년(1236) 강화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동왕 38년(1251) 완성한 고려의 대장경. 문치주의를 표방한 고려는 무신을 천대하다가 수차례 외국 침략을 받았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는 외침(外侵)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고자 방대한 대장경의 간행 사업을 추진했다. 제1차는 거란의 침입으로 곤경에 직면했을 때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大般若經)』 『화엄종(華嚴宗)』 『금광명경(金光明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을 조조(彫造)하였다. 현종 때 시작하여 문종 때 완성된 이 초판 고본(古本) 대장경은 고종 19년(1232)의 몽골 침입 때 불타고, 일부가 일본에 전한다. 그 후 의천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송에서 가져온 불경과 요(遼)·일본에서 수집한 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하고, 이에 따라 차례로 조조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속대장경(續大藏經)으로 1,010부(部) 4,740여 권에 달하였으나, 몽골의 병화로 거의 없어지고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강화도에서 몽골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대대적인 조판 사업이 진행되었다. 동왕 23년(1236) 강화도에 장경도감(藏經都監)을 설치하여 조조에 착수, 동왕 38년(1251) 총 81,137매(枚)의 대장경을 완성하니, 이것이 유명한 팔만대장경으로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대장경의 조판으로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 기술에 큰 공헌을 하였다.

속장경[편집]

續藏經

『대장경(大藏經)』을 결집할 때 빠진 것을 모아 간행한 불경. 『의천의 속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이 널리 송·거란·일본 등지에서 불서와 경전을 구하여 흥왕사(興王寺)에 교정도감을 두고 1096년(숙종 1)에 완성.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두었던 것이 고려말 몽골의 침입으로 타버리고 그 속장경의 인본(印本) 일부와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이 순천의 송광사와 일본의 나라(奈良) 도오다이사(東大寺)에 전한다.

김준[편집]

金俊 (?

1268)

고려 고종 때의 권신. 처음 이름은 인준(仁俊). 최충헌의 가노(家奴)의 아들. 최우(崔瑀)에게 추천된 뒤 신임을 얻었으며, 최항(崔沆)을 섬겼다. 그 뒤 최의(崔?)에게 불만을 품고, 고종 45년(1258) 유경(柳璥)·최온(崔溫) 등과 함께 삼별초를 앞세워 최의를 살해했다. 이로써 최씨 무인정권을 타도하여 왕권을 회복시키고 장군(將軍)에 위사공신(衛社功臣) 등이 되었다. 그 후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어 국가 비위(非違)의 규찰(糾察)과 국사(國事) 감독을 담당, 이어 시중(侍中)이 되고 해양후(海陽侯)에 봉해져 최충헌에 견줄 만한 권세를 누렸다. 몽골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써서 몽골이 요구한 왕의 입조(入朝)를 반대하고, 몽골 사신의 살해와 왕의 제거를 기도하였다. 아우 김충(金?)과의 의견에 틈이 생겨 임연(林衍) 등에게 살해되었다.

임연[편집]

林衍 (? 1270)

고려 고종·원종 때의 권신(權臣). 처음에 몽골병을 격퇴한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고, 고종 45년(1258) 유경(柳璥)·김준 등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권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 뒤에 김준(金俊)을 죽였으며, 원종을 폐하여 안경공(安慶公) 창(?)을 옹립하는 한편 교정별감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원종 폐립(廢立) 사건으로 원(元)의 세조(世祖)와 충돌하여 원종을 복위시켰으나, 원(元)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했다. 원종이 몽골에서 귀국하기 전에 출륙환도(出陸還都)와 권신의 제거를 약속, 몽골병과 함께 귀국하려 하자, 임연은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어 백성의 해도입거(海島入居)를 명하고, 몽골에 항전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죽었다.

삼별초[편집]

三別抄

고려 최씨 집권 시대의 군대. 별초는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選拔軍)이란 뜻으로,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시작되었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의 수가 늘자 이를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라 하였다. 그 후 몽골에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하여 온 자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 셋을 삼별초라 했다. 경찰·군사 등의 공적(公的) 임무를 띤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최씨의 사병이었다. 도방과 더불어 최씨 정권의 군사적 지주였으나 무인정치의 몰락과 함께 해체되었다. 그들은 무인정권이 무너진 몽골 세력에 반대하여 난을 일으켰다.

삼별초의 난[편집]

三別抄-亂 원종 11년(1270)부터 동왕 14년(1273) 사이에 강화도의 삼별초가 몽골 세력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 삼별초는 최씨 무인정권의 사병 노릇을 해 왔다. 이 삼별초는 또 항몽전(抗蒙戰)의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골병을 괴롭혔다. 그들은 무인정권의 조아(爪牙)요 항몽세력의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골과 강화가 성립된 데 대하여 그들이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이리하여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삼별초는 즉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들은 배중손의 지휘하에 우선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고,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한 것이다. 그 후 삼별초는 보다 항구적인 근거지를 찾아 진도(珍島)로 남하했다. 그들은 이 곳에서 궁성을 크게 이룩하여 도성으로서의 시설을 갖추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은 드디어 진도를 함락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삼별초의 남은 사람들은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들어가서 원종 14년(1273) 제주도가 함락될 때까지 전후 4년 간 몽골과 항쟁했다.

탐라총관부[편집]

耽羅摠管府

고려 말기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후 지금의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두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으며, 1277년(충렬왕 3)에는 목마장을 설치하여 일본 원정을 준비하였다. 총관부의 설치기간은 1273

1290년이다.

배중손[편집]

裵仲孫 (?

1273)

고려의 무장. 삼별초(三別抄)의 반란 지휘자. 1270년(원종 11) 개경환도(開京還都)가 단행된 후 조정에서 항몽 세력(抗夢勢力)의 근거를 없애기 위해 삼별초를 폐지하고 그 병적(兵籍)을 압수하게 되자 삼별초 지유(脂諭)로서 야별초(夜別抄) 지유 노영희(盧永禧)와 공모, 몽골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왕족 승화후(昇化候) 온을 추대,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했다.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여 경계가 어렵게 되자 1천여 함선을 징발, 정부의 재화와 백성을 모두 싣고 강화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며 남행, 진도(珍島)에 근거지를 두고 궁궐을 세운 후 남해 연안과 각 도서·나주(羅州)·전주(全州)에까지 출병하여 관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쳤으나 이듬해 상장군 김방경(金方慶)과 몽골의 흔도(炘都)가 거느린 여몽(麗蒙) 연합군의 총 공세로 분쇄당하자 전사했다. 이후 삼별초 잔여군이 제주도(濟州道)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다가 1273년 평정되었다.

김통정[편집]

金通精 (?

1273)

고려 원종 때 장군. 삼별초(三別抄)의 장수로, 원종 11년(1270) 강화에서 배중손과 함께 개경 환도를 반대하고 항몽(抗蒙)의 기치를 들었다. 서해의 연안 일대를 공략하면서 남하하여 진도를 거점으로 몽골과 고려에 완강히 항전하여 세력을 떨쳤다. 동왕 12년(1271) 여·몽 연합군에 패하여 배중손을 비롯하여 많은 지도 인물이 전사하자 군사를 이끌고 탐라(耽羅, 濟州道)에 들어가 재기(再起)를 다짐했다. 남해안 지방을 공략하던 그는 수차의 항복 요청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다가, 동왕 14년(1273) 김방경·혼도·홍다구(洪茶丘) 등이 전함 160여 척을 거느리고 정벌하여 오자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몽골와의 항쟁은 일단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