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최씨 무인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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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무인정권〔槪說〕[편집]

최씨의 무인정권을 뒷받침하여 준 것은 그의 사병(私兵)이었다. 처음 무신난 이후에 무인들은 저마다 문객(門客)과 가동(家?)을 무장시켜 사병화하였는데, 이는 경대승의 도방(都房)에 이르러 조직화되었다. 최충헌은 이를 모방하여 도방의 사병을 6번(六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그의 집을 지키게 하고 뒤에 이를 36번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용맹스런 자는 모두 최씨의 사병이 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최우는 이 도방 외에도 삼별초를 조직했다.무신난 직후 무인들이 권력을 행사한 중방(重房)은 최씨의 독재정치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점차 실력을 잃고 그 대신 새로운 권력기구가 등장했다. 최충헌은 왕으로부터 진강후(晋康侯)로 봉해지고, 부(府)를 세워 흥녕(興寧)이라 함으로써 무인 정치를 형식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러나 최씨 정권의 최고 막부(幕府)와도 같은 구실을 한 것은 교정도감(敎定都監)이었던 듯하다. 이리하여 최충헌 자신이 그 장(長)인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올라 실권을 행사했다.교정별감 직책은 최우·항(沆)·의(?) 등 최씨 4대는 물론 그 후에도 정치적 실권자에게 계승되었다. 인사 처리를 위해 사제(私第)에 설치한 정방(政房)은 최우 때 비롯된 것으로, 이는 문신 세력이 대두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또 최우는 그의 문객(門客) 중 문인(文人)으로 서방(書房)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많은 문인이 정방으로 진출했다. 최씨는 도방이나 삼별초 같은 군대뿐만 아니라 서방의 문인들도 함께 옹위하게 함으로써 문무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제 최씨는 사실상 문무 양반의 지배자로서 정치를 좌우할 수 있게 되었다.

최우[편집]

崔瑀 (?

1249)

고려의 권신(權臣). 뒤에 이(怡)로 개명, 시호는 광렬(匡烈). 본관은 우봉(牛峰). 충헌(忠의獻 아들. 1219년(고종 6) 충헌이 죽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뒤를 이어 집권, 처음에는 인심을 얻기에 힘써 아버지가 저축한 금은보화 등을 왕에게 바치고, 일찍이 아버지가 탈취한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각각 주인에게 돌려주고 한사(寒士)를 등용했으며, 동생 향(珦) 및 아버지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괴롭히던 관리를 유배 혹은 파면하였다.1222년(고종 9) 참지정사·이병부 상서·판어사대사(參知政事吏兵部尙書判御史臺使)가 되어 명실공히 집정자(執政者)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이 무렵 몽골의 사신이 자주 와서 많은 금품을 요구하자 이를 냉정히 대접하고는 북변의 여러 성과 개경의 황라성(隍羅城)을 수축하여 몽골의 침입에 대비했다. 1225년(고종 12) 정방(政房)을 자택에 설치하여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했고, 1227년 자택에 서방(書房)을 두어 문객(門客) 중의 명유(名儒)를 포섭, 정치에 이용하는 한편 삼번제(三番制)로 도방(都房)과 함께 숙위(宿衛)를 담당케 하고, 아버지 때의 도방을 외(外)도방, 자기의 가병(家兵)을 내(內)도방으로 하여 저택 내외의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1228년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의 호를 받고, 이듬해에는 이웃집 수백 호를 강제로 철거하여 격구장(擊毬場)을 만들어 격구를 장려했으며, 1231년 처가 죽자 왕은 채단(綵緞) 70필을 하사하여 왕후의 예로 장사케 했다.북변에 침범했던 몽골병의 대군이 곧 침범하리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2년 왕에게 강화천도(江華遷都)를 청하고 녹전차(祿轉車) 1백여 대로써 자기 가재(家財)를 강화에 옮긴 뒤 드디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케 했다.이듬해 필현보(畢賢甫)·홍복원(洪福源)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가병(家兵)으로 이를 토벌하고, 1234년(고종 21) 강화천도의 공으로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지고, 강화 연변에 성을 쌓아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1243년(고종 30)에 국자감(國子監)을 수축(修築)하고, 양현고(養賢庫)에 쌀 3백곡(斛)을 시납(施納)하는 등으로 장학(奬學)에 힘쓰는 한편 강화에서의 대장경판(大藏經板) 재조(再雕)에 사재를 희사하여 뒤에 완성케 했다. 이로부터 차츰 전횡(專橫)이 심해져 백성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천도공신(遷都功臣)으로서 1262년 공신당(功臣堂)의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 등에 모두 능했다.

교정도감[편집]

敎定都監

희종 5년(1209) 최충헌이 세운 최씨 정권의 최고 막부와도 같은 관청. 비위(非違)의 규찰(糾察), 인사행정, 기타 서정(庶政)을 맡아보았다. 희종 5년(1209) 청교(靑郊)의 역리(驛吏) 3명이 최충헌 부자를 죽이려고 거짓 공첩(公牒)을 여러 절에 돌려 중들을 소집하였는데, 귀법사(歸法寺)의 중이 이를 최충헌에게 고발하였다.최충헌은 이에 교정도감을 두고 공첩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조사하여 처벌하였다. 그 뒤 교정도감은 독재정치의 최고 막부(幕府)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 장(長)인 교정별감(敎定別監)직은 무인정권이 타도될 때까지 실권자에게 계승되었다. 즉 최충헌이 이 직에 취임한 이래로 최우·최항(崔沆)·최의(崔?) 등 최씨 4대는 물론, 무인정권의 몰락기에 나타난 김준(金俊)·임연(林衍)·임유무(林惟茂) 등도 모두 교정별감 직으로써 실권을 행사했다.

교정별감[편집]

敎定別監

고려시대 교정도감의 우두머리로 최충헌 시대로부터 김준 시대를 통하여 권신(權臣)이 차지하던 특정관직이었다. 대개 무신 집권자가 스스로 겸직하였는데 독재 정치를 강화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최항[편집]

崔沆 (?

1257)

고려의 권신. 초명은 만전(萬全), 진양공(晋陽公) 이(怡)의 아들. 처음 송광사(松廣寺)에서 승려가 되어 쌍봉사(雙峰寺) 주지로 있다가 속세에 돌아와 항으로 개명하였다. 임익(任翊)에게 글을 배우고 권위(權?)에게 예를 익혔으며,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使)가 되어 아버지 이로부터 가병(家兵) 5백 명의 분양을 받았고 이가 죽은 뒤에 정권을 인수하였고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겸하였다. 이어서 민희(閔曦)·김경손(金慶孫) 김안(金安) 등을 해도에 귀양보냈으며, 각 주현의 공세(貢稅)를 감하는 한편 제도(諸道)의 이원(吏員)들을 감원하여 인건비를 절약하여 인망(人望)을 얻었다. 아버지의 식읍(食邑),

진양후(晋陽候)의 봉작, 대장경(大藏經)의 판각과 강도(江都)의 축성과 대묘(大廟) 창건 등의 공을 표창하는 모든 것을 다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처음 아내 최온(崔?)의 딸을 버리고 조계전(趙季甸)의 딸을 취하였으며, 조부 충헌(忠獻)의 초상화를 창복사(昌福寺)에, 아버지 이의 초상화를 선원사(禪源寺)에 옮기는 데 성대한 의식을 베풀었다.사람의 참언(讒言)을 잘 믿어 사감으로 무고하는 자에게도 상을 주고 피무자(被誣者)는 가차없이 추국하여 엄벌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주숙(周肅)·장군 김효정(金孝靖) 등을 귀양보내는 도중에 죽였으며, 장군 최종필(崔宗弼), 나주 부사(羅州府使) 이균(李??) 등을 귀양보냈다.몽골의 사신 다가(多可) 등이 들어오는데 왕의 출륙(出陸) 친영(親迎)을 요구하자 백관들이 다 그대로 시행하기를 결의하였으나 항이 홀로 이를 거부하고 대리로 신안공(新安公) 전(佺)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으므로 몽골의 침입을 받았으며, 몽골이 강화에서 환도하기를 독촉하여 침입하자 영녕공(永寧公) 준(?) 등이 태자(太子)를 보내어 몽골군을 무마시키자고 건의하였으나 끝까지 거절하였다.사후에 진양공(晋陽公)에 추증하였으며, 적자가 없었으므로 송서(宋?)의 종이 낡은 의(?)로 후사를 삼았고, 원종 때에 그의 고택(古宅)을 철거하였으며 그 땅을 집이 없는 사서민(士庶民)에게 나누어 주었다.

최의[편집]

崔?

(?

1258)

고려의 권신. 진양후(晋陽候) 항(沆)의 아들, 항이 중으로 있을 때 송서(宋▩)의 종(婢)과 정을 통해 의를 낳았다. 적자가 없어 의를 후사로 삼고 경림사(景淋師) 예기(芮記)가 시필(詩筆)을, 권위(權?)·임익(任翊) 등이 정치(政治)를 , 정세신(鄭世臣)이 예(禮)를 가르치게 하였다.처음 전중내급사(殿中內給使)가 되었다가 아버지 항이 죽자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어 정방(政房) 정치를 인수했다. 추밀원부사 판이병부 어사대사(樞密院副使判吏兵部御使臺使)로 임명했으나 사양했다.연안(延安)의 주택과 정평국(靖平宮)을 왕부(王府)에 바쳤으며, 가미(家米) 2천 5백 70여 섬을 내장원(內莊院)에, 포백유밀(布帛油密)을 대부사(大府寺)에 바치고 또 흉년에 창고를 풀어 권무(權務)·대정(隊正)·체장좌우위(遞仗左右衛) 및 신호위(神號衛) 등의 교위(校尉) 이하와 방리(坊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추밀원부사를 또 사양하고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어 장군 변식(邊軾) 등으로 강화수획사(江華收獲使)를 삼아 약탈을 자행케 하였고, 노비에게 벼슬을 주는 특례를 만들어 놓은아버지 항의 본을 따서 노비에게 낭장(郎將)의 벼슬을 주었다.현량한 선비를 잘 대우하지 않고 경박한 유능(柳能)·최양백(崔良伯) 등과 사귀고 그들의 참소를 듣고 살육을 함부로 하여 나날이 비난이 높아가더니 마침내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낭장(郎將) 김인준(金仁俊) 등이 모의하여 의를 죽이고 국정을 왕에게 돌리니 최씨의 60년 정권이 이에서 끝났다.

정방[편집]

政房

고려 최씨 집권 때 정무를 행하던 곳. 최우(崔瑀)가 자기 집에 설치하여 문무(文武) 백관의 인사행정(人事行政)을 취급하던 기관으로, 고종 12년(1225)에 설치되었다. 백관의 승강(昇降)·임면(任免)·이동(移動)에 관한 이른바 전정(銓政)의 권한을 장악하여 모든 인사 행정을 행하였다. 정방에는 왕께 입주(入奏)하는 직책을 맡은 정색승선(政色承宣)을 두었고, 그 밑에 이를 보좌하는 정색서제(政色書題) 등이 있었다. 정방은 최씨 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오래 존속되었다. 권신의 사설 기관으로 발족한 정방은 후기에는 일반 정무를 관장하는 국가 기관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