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13~14세기경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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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세기경의 한국〔槪說〕[편집]

경계란(庚癸亂) 이후 무신의 세력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에 있었으나 최충헌(崔忠獻)이 두각을 나타내기까지에는 무인의 군웅시대(群雄時代)로서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이의민(李義旼) 및 경대승(慶大升) 사이에 세력 쟁탈과 알력이 심하였다.1196년에 장군 최충헌과 그의 아우 충수(忠粹)가 이의민을 살해하여 정권을 독점한 것은 무인정치의 진전에 있어서의 한 폭을 그은 것이다. 이리하여 최충헌 일대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최씨 정권의 기초는 그의 아들 최우(崔瑀)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어 무인정권의 기구가 정비되기에 이르렀다.최우에 의해 최씨 정권이 더욱 강화된 결과 정방(政房)·서방(書房)이 설치되고 최충헌이 조직한 도방은 더욱 확대되었다. 최우는 또한 교정도감을 의연(依然)히 존속시켜 권신(權臣)의 막부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 교정별감의 관직도 권위가 서게 되어 역대 권신의 필수직이 되었다.한편 최씨 무인정권은 몽골군의 전후 7차에 걸친 침입으로 시달리다가 강화로 천도하여 약 30년 간의 장기 항전에 들어갔다. 이러한 침략과 항쟁의 계속은 농촌사회의 피폐와 많은 문화재의 손실을 가져왔다.난국의 타개를 위해 최씨 무인정권은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감행하기도 했으나, 점차 그 세력을 만회하기 시작한 문신들은 몽골와의 강화를 주장했다. 즉 문신들은 외세를 이용하여 무인세력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이리하여 문신들은 일부 무신과 결탁해서 최씨를 타도하고 몽골와의 강화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준(金俊)·임연(林衍) 등 무인들의 반대도 노골화하였으나 1270년 개경 환도와 더불어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역대 권신의 조아(爪牙)가 되어 움직여 왔던 삼별초(三別抄)는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하여 전후 4년에 걸쳐 몽골에 저항하였다. 무인정권 시대에는 문인들의 출세가 억압됨으로써 일부 문인들은 산촌에 은거하면서 음주와 시가(詩歌)를 즐겼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설화문학(說話文學)이 자랐다.또 불교계에서는 선종(禪宗)이 융성하여 조계종(曹溪宗)이 대두하였다. 고려는 원(元)과의 강화 이후에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으니, 특히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그 후 고려 왕실은 원 왕실과의 결혼정책을 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으며, 그 결과 고려에는 몽골의 풍속이 많이 들어왔다.한편 원은 일본 공략을 목적으로 설치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통하여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려 했으며, 또 고려의 영토 일부를 직속령(直屬領)으로 하였다. 원의 고려에 대한 경제적 요구도 고려의 농민에게 커다란 부담을 지웠다. 또 원은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기 위해 충선왕(忠宣王)을 심양왕(瀋陽王)에 봉하고 후에 그의 후계자를 이용하여 고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원의 정치·경제적 간섭과 요구에도 끝내 독립왕국의 지위를 유지했고 이에 완강히 대립했다.이러한 각종 변화는 지배 체제의 문란을 초래했고, 이것은 또한 사회·경제면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농장(農莊)이 확대됨에 따라 국가의 공전(公田)이 침식되고 이에 따라서 국가재정의 곤핍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사회적·경제적인 문란은 신흥 사대부의 불만을 축적시켰으며,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이러한 여러 가지 폐단의 개혁운동이 추진되었으나, 그나마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권문세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리하여 개혁정치의 실시를 위해 등용된 신돈(辛旽)의 파격적인 정책은 권문세족(權門世族)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고려는 14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심각한 외교 문제에 부딪혔다. 원(元)·명(明)의 교체기에 고려 정계는 친원(親元)·친명(親明)의 두 의견이 대립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명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다는 통고를 하여 오자, 친원론을 주장하던 최영은 이성계 등의 반대를 일축하고 요동정벌을 단행했다. 그러나 출정의 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최영과 우왕(禑王)을 축출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 일파는 사전개혁(私田改革)을 실시하여 경제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이어 1392년에는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조선 왕조를 건립하였다.고려 후기의 문화는 조계종의 융성과 주자학의 전래로 특징지어진다. 불교에 있어서의 조계종은 백운(白雲)·태고(太古)·나옹(懶翁)·무학(無學) 등의 활약으로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으나 새로 일어나는 주자학의 발전으로 불교의 정신계에 대한 지도력은 상실되어 갔다.주자학은 충렬왕 이후 유교의 진흥으로 중국에서 전래되어 점차 발달, 불교 배척의 기운을 조성했다. 또한 사학(史學)이 발달하여 많은 사서(史書)가 편찬되었으며, 한편 새로운 형식의 시가인 경기체가(景幾體歌)와 장가(長歌)가 나타났다. 미술에 있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존(現存)하는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비롯하여 적지않은 건축물들이 당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외에 석탑(石塔)·석부도(石浮屠) 등도 당시의 예술을 말해준다. 또 회화도 점점 발달하였으며, 서도에는 우아한 송설체(宋雪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문물 중 무엇보다 특기할 것으로는 인쇄술의 발달과 목면(木棉)의 전래 및 화약의 제조를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