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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농민과 노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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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과 노비의 난〔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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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때의 사치와 유락(遊樂)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왔고, 이는 농민 수탈의 강화를 초래했다. 이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은 지배체제의 문란과 무신들의 하극상 풍조에 자극되어, 신분해방과 지배층의 압박·수탈에 항거하기 위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12세기초부터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난을 전후하여 전국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명종 2년(1172) 평안도의 창주(昌州, 昌城)·성주(成州, 成川)·철주(鐵州, 鐵山) 등지에서 지방관의 횡포에 분격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그 뒤 묘향산을 근거로 조위총(趙位寵)의 남은 무리들이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반란을 계속하였다.남쪽의 반란은 명종 7년(117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가 난을 일으킴에 이르러 크게 번져갔다. 경상도에서는 손청(孫淸)과 이광(李光)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명종 12년(1182) 전주에서 군인과 관노(官奴)들이 관리의 가혹한 조선(造船) 독역(督役)에 반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러한 초기의 반란은 대체로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서, 지방관이나 향리들의 억압에 반항하여 농민이나 군인 혹은 노비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부당한 압박의 제거와 신분 해방 등이었으나 아직은 개별적인 요구에 불과하였다.그러나 명종 23년(1193)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의 난에서부터 반란군은 연합 전선을 펴며, 또 일련의 지속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리하여 명주(溟州, 강릉)의 농민 반란군은 동경(東京, 경주)의 반란군과 합세하였고, 진주(晋州)의 노비 반란군은 합주(陜州, 陜川)의 부곡 반란군과 연합하여 공동 전선을 폈다. 또 신라 부흥을 외치며 일어난 동경의 반란군은 운문(雲門)·울진(蔚珍)·초전(草田) 등 각지의 반란군과 연합하였다. 경상도 일대에는 서로 밀접한 연락을 가진 반란군의 연합 전선이 이루어져서 10여년 간 세력을 떨쳤다. 이러한 반란은 지방뿐만 아니라 개경에서도 일어났다.신종 1년(1198)에 일어난 만적(萬積)의 난은, 신분 해방은 물론 더 나아가서 정권 탈취를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이들 반란은 모두가 최충헌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반란군의 부르짖음은 그 후 정부 시책에도 반영되었다. 고려의 신분 질서의 동요를 말하여 주는 이들 반란은 고대적인 유산을 청산하려는 사회적인 움직임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망이·망소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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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伊·亡所伊-亂

고려 무인 집권 때 사회질서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민란의 하나. 천민 수공업자(賤民手工業者)의 집단 거주지인 공주 명학소의 천민이던 망이·망소이는 명종 6년(1176) 1월 생활에 굶주린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켜 공주를 함락하였다. 정부는 선유(宣諭)에 실패, 정황재(丁黃載)·장박인(張博仁)에게 이를 토벌케 했으나 쉽지 않자,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위무(慰撫)하는 등 반란을 회유하고자 했다.그러나 응하지 않고 예산(禮山)을 공략한 난민은 동왕 7년(1177) 정월 정부군의 토벌에 항복했다가 정부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그 해 2월 다시 난을 일으켰다.가야사(倻倻寺)와 직산의 홍경원(弘慶院)을 휩쓴 난민은 아산(牙山)·청주를 공격했다. 정부는 충순현을 명학소로 다시 강등하는 등 강경책으로 난민을 총공격하였다. 이때는 농번기라 난민 중 농민병이 이탈하고, 식량·무기 등이 부족하여 정세가 불리해졌다. 이리하여 망이·망소이 등은 체포되고 난은 7월에 끝났다.

의주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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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州賊-亂

고려 무신 집권(高麗武臣執權) 때 의주에서 일어난 난. ① 1177년(명종 7) 의주(義州)·정주(靜州) 두 주(州)가 반기를 드니 조정에서는 직문하(直門下) 사정유(史正儒)와 예부낭중(禮部郎中) 임정식(林正植)을 보내어 선유(宣諭)케 했으나 반도(叛徒)들은 응하지 않고 계속하다가 선북면병마사 최우청(崔遇淸)의 꾀로 적괴(賊魁)인 도령(都嶺) 김순부(金純夫)와 낭장(郎將) 김숭(金崇) 등이 잡혀 죽고 난은 평정되었다. ② 1219년(고종 6)에 의주 별장(別將) 한순(韓恂)과 낭장(郎將) 다지(多智) 등이 반란을 일으켜 방수장군(防戍將軍) 조선(朝宣)과 수신(守臣:太守) 이체(李?)를 죽이고 스스로 원수(元帥)라 하니 부근 제성(諸城)이 호응하였다. 조정에서는 장군 조염경(朝廉卿) 등을 보내어 토벌케 했으나 이미 북계 제성이 의주적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다시 이극서·이적유·김취려 등을 계속 보내어 치게 했으나 역시 큰 성과를 얻지 못하다가 다음 해 토벌군 지휘관을 개편하고 계속 토벌케 하였다. 이때 반적 중의 한순과 다지는 청천강(淸川江)을 경계로 삼아 동진(東眞:大眞國)에 의뢰하는 일면 금(金)의 원수(元帥) 오가하(汚哥下)를 의주에 내둔(來屯)케 하였다. 이에 중군지병마사(中軍知兵馬使) 김군수(金君綏)는 사람을 오가하에게 보내어 맹약(盟約)을 어긴 것을 책하고, 한순 다지 등 그 반적의 괴수를 붙들어 오게 함으로써 난은 평정되었다.그러나 김취려가 종주뢰(宗周賚)와 곽원고(郭元固) 등을 의주에 보내어 유민을 모으게 하였더니 종주뢰는 탐욕을 부려 뇌물을 가져오는 자는 극진히 대우하고 뇌물이 없는 자는 이유를 붙여 주살(誅殺)하자, 적당(賊黨) 윤창(尹昌)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곧 진압되었으나 그 후에도 여러 번 작은 반란이 있었다.

김사미·효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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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沙彌·孝心-亂

고려 명종 때(1193) 김사미·효심이 연합하여 일으킨 난. 처음에 별도로 난을 일으켰던 이들은 뒤에 연합하여 공동전선을 폈다. 김사미는 운문산(雲門山, 淸道)을 본거지로 불평 분자를 모아서 난을 일으켰고, 효심은 초전(草田, 蔚山?)에 웅거하여 망명자를 불러모아 부근을 약탈하는 한편 이의민(李義旼)과 내통하며 힘을 길렀다. 이들은 그 후 연합하여 세력을 증대한 후 각 지방에서 약탈을 일삼았다.수만의 난민으로 연합된 반란군의 토벌을 위해 정부는 김존걸(金存傑)·이지순(李至純)·김척후(金陟候) 등을 보냈으나 실패하고, 명종 24년(1194) 최인(崔仁)·고용지(高湧之)를 보내 밀성(密城, 密陽)에서 토벌하였다.

명주의 농민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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溟州-農民叛亂

고려 무신정권 때 명주에서 일어난 농민의 반란. 신종 2년(1199) 명주에 초적(草賊)이 일어나 삼척·울진을 함락시키고 동경의 반란군과 합세하여 주·군을 약탈하였다. 조정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오응부(吳應夫)·송공작(宋公綽)을 명주에, 조통(趙通)과 한지(韓祗)를 동경에 보내 위로하였다. 이에 초적의 괴수 김순(金順)·금초(今草) 등이 항복하니, 조정은 그들을 후히 대접했다.

진주의 노비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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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州-奴婢叛亂

신종 3년(1200) 진주에서 일어난 노비들의 반란. 평소에 주리(州吏)의 부패와 학대에 불평을 품고 있던 진주의 공사노비(公私奴婢)들은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에 자극돼 신종 3년(1200) 난을 일으켜 주리의 주택 50여 동(棟))을 불살랐다. 이에 주리들은 진주목사(牧使)에게 알려 모두 체포하였다. 이때 정방의(鄭方義)가 이 노예의 난에 충격을 받아서 반란으로 전환하게 되어 주리(州里)로 다니며 평소에 원한이 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조정은 그 세가 치열하여 위무(慰撫)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진주에서 방의와 사이가 좋지 못한 20여 명이 합주의 노올부곡(奴兀部曲)의 적당(賊黨)에게 응원을 청하여 방의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파되었다. 그러나 방의도 진주사람들이 일어나 그 무리와 함께 패몰되어 난은 1년 만에 진압되었다.

동경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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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叛亂

명종 20년(1190) 이래 약 15년 간에 걸쳐 일어난 경상도 지방의 민란. 이 난은 전후 6,7차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 중 신종 5년(1202) 신라의 부흥을 외치면서 경주에서 일어난 농민군의 난이 유명하다. 이비(利備)를 두목으로 삼은 일당과 운문의 발좌(?佐)를 두목으로 한 일당은 신라 재흥을 표방, 각지에 격문을 돌려 주·군을 약탈하였다. 최충헌은 대장군 김척후(金陟候)를 총지휘관으로 삼아 철저히 토벌케 하였다. 이에 이비는 운문·울진·초전의 적을 규합하여 삼군(三軍)을 편성하고, 주·군을 회유·위협했다. 정부는 김척후 대신 다시 정언진(丁彦眞)을 파견하니, 정언진은 무당과 공모하여 이비를 체포, 난을 평정했다. 이후 동경을 경주로 개칭하여 격을 낮추었다.

만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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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積-亂

신종 1년(1198)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운동. 무신난은 문무의 지위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신분질서에 많은 변동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하층계급은 집권 세력이 약화된 것을 이용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현저히 진출하였다. 특히 명종(明宗)·신종(神宗) 시대에는 각지에서 농민과 노비가 자주 난을 일으켰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목적이 뚜렷한 것이 만적의 난이었다.만적은 최충헌의 사노(私奴)로서 여섯 명의 노예와 함께 개경의 북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비들을 모아 놓고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그는 정중부의 난 이후 천예(賤隸) 출신으로 공경대부(公卿大夫)가 된 자가 많음을 지적하고,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본래 씨가 있는 것이 아니고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 우리도 언제까지나 상전 밑에서 고생만 할 것이 아니라고 연설하였다.이 선동적인 연설은 노비들의 찬성을 얻었고, 그는 계획적인 반란을 꾀하여 궐기 방법을 정하고, 반란이 성공한 후에는 자기들이 집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한충유(韓忠愈)의 가노(家奴) 순정(順貞)의 밀고로 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만적을 비롯한 백여 명은 붙잡혀서 강물에 던져졌다. 이 난은 실패했으나 우리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노비 해방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