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대한민국의 성립/20세기 후반의 한국
20세기 후반의 한국〔槪說〕
[편집]20세기 후반의 한국사는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의 광복에서 시작된다.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이기도 하였으나 크게 보면 1876년의 개항에서 시작되어 민족 통일이 성취되는 언젠가의 그날에 이르는 한국 근대사 속의 한 단계의 출발이었다.한국 근대사의 기본적 특징은 근대 민족으로서의 자기 확립 과정이다. 바꾸어 말하면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적 민족역량의 결정 과정, 근대 민족으로서의 자기확립운동의 담당 주체인 민중의 성장·발전 과정이 한국 근대사의 기본적인 흐름이었다.위에서와 같은 한국 민족의 주체적인 움직임을 규정한 객관적 조건은, 1910년까지는 반(反)식민지·봉건사회 경제구조였고 이후 1945년까지는 식민지·반봉건사회 경제구조였다. 따라서 근대민족으로서의 자기확립운동의 역사적 성격은 민중에 의한 반(反)식민지·반(反)봉건운동,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민족운동으로 귀결된다.이러한 민중운동은 1919년의 3·1운동을 경계로 하여 앞뒤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앞의 단계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가 민중운동을 지도한 시기였고, 뒤의 단계는 민중 스스로가 독자적인 세계상(世界像)과 조직적 결합을 가지고 운동을 전개한 시기였다.그러나 민중에 의한 반(反)식민지·반(反)봉건운동은 결실되지 못한 채, 기본적으로는 국제적 계기에 의하여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따라서 당시의 객관적인 역사과제는 지난날의 민중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식민지·반봉건적 사회경제 구조를 극복·청산함으로써 자율적 국민경제의 기반을 확립하고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완성하는 것이었다.그리고 광복의 낭만적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과제의 해결에 필요한 객관적 여건이 완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의 완수를 저지하는 새로운 조건이 국제적 계기의 측면에서 마련되었으니 미·소 두 진영에 의한 세계의 양극화 질서와 그 귀결로서의 냉전이 그것이었다. 한국은 이제 양극화 질서, 냉전 질서에 종속당하게 되었다.그 귀결로서의 반공지상주의(反共至上主義)는 민족적 과제의 완수를 위한 운동이나 사상을 억압하였으니 반민특위(反民特委)의 강압적 해산이 그 좋은 예가 된다. 한국 위에서 양극화 질서, 냉전 질서는 식민지적 구조의 온존과 친일세력의 재편성을 자기존립의 기반으로 삼았다.한국은 미국에 의존하면서 미국의 잉여농산물 및 기타 과잉상품의 판매시장화됨으로써 자율적인 국민경제의 자기 기반 형성을 저해당하였으며, 산업의 주체에 있어서는 민족자본이 아닌 전근대적 예속자본이 그 담당자가 되었다.일제하 경작 농민을 지주에게 봉건적으로 예속시키면서 동시에 일본 독점자본에게도 다시 이중으로 예속시켰던 경제제도로서의 반봉건적 지주·소작제도에 대한 1949년의 농지개혁도 미봉적인 것으로 끝나고 말아 자율적 국민경제의 확립에는 기여하지 못하였다.이러한 반봉건적 농업구조 위에서 경제외적 방식에 의한 자본축적, 대내적으로 국민 대중의 수탈, 대외적으로는 외국자본과의 유착 등을 특징으로 하는 관료독점자본이 1960년 무렵까지는 급속하게 성장·확립되었다. 국제적 계기에 의한 이러한 대외의존 과정에 대응하여 국내적으로 대두한 정치세력이 이승만 체제였다.이승만 체제는 양극화 질서에 의한 민족의 분단과 친일세력의 재편성을 존립 기반으로 한 정치지배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체제는 민족분단을 더욱 고정화하면서 식민지적 구조의 타파에는 소극적이었다. 반봉건적·반식민지적 구조의 존속, 독점자본의 성장에 의한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그리고 전근대적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 4·19혁명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민중적인 것이었던 그 지향(志向)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조직하고 영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학생집단을 통하여 분출되었다.4·19혁명은 일제 시대의 민중운동에 역사적으로 연계(連繫)되는 근대 민족으로서의 자기확립운동의 전개 형태 이외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집단이 민중의 지향으로서의 이 혁명을 결실시키기에는 그 주체적 역량에 큰 결함이 있었다. 따라서 4·19는 근대민족으로서의 자기 확립에는 구체적인 소산(所産)을 남기지 못하였다.그러나 4·19의 기반으로서의 민중 에너지는 대자화(對自化)되지 못한 즉자적(卽自的)인 상태로나마 이미 객관적으로는 실재(實在)하고 있었다. 이러한 에너지와 지향을 부분적으로는 수용·반영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새로이 통제하려는 정치적 표현이 5·16 군사정변이었다.4·19가 민중의 참여에 의하여 수행되었음에 반하여 5·16이 민중의 참여를 결여하고 있는 점이 그것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그리고 5·16의 이념이 일단은 민족적 민주주의로 응결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은 주관적인 것이었을 뿐, 그에 바탕을 둔 경제개발 과정에서 허구화되었다는 사실이 또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이러한 허구화 과정에서 한국 경제의 대외 의존성은 더욱 강화되었고 따라서 자율적 국민경제의 기반은 더욱 좁혀졌으며, 그 결과 정치적 자립성도 크게 약화되었다. 정치적 비호(庇護)와 대외 의존에 의한 독점자본의 성장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초래하였고, 이것은 또 광범한 국민·대중을 민중의 지향, 즉 국민경제의 자율성과 그 정치적 표현으로서의 민족통일을 향한 민중의 지향·운동에 존립의 기반으로 제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