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대한민국의 성립/8·15광복
8·15광복〔槪說〕
[편집]제1차 세계대전은 194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연합군측에 유리하게 되어, 그해 11월말에 미(美)·영(英)·중(中) 3국은 소위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이어 1945년 5월에 독일이 항복하였고, 8월 8일에는 미(美)·영(英)·중(中)·소(蘇)의 4거두(四巨頭)가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드디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한국 민족은 카이로 선언과 그것이 다시 확인된 포츠담 선언에 의해서, 그리고 한민족의 오랜 투쟁을 통한 민족의 극복에 의해서 일제의 학정(虐政)으로부터 독립을 맞이하였던 것이다.그러나 가혹한 압제로부터의 돌연한 광복은 과격한 흥분상태를 가져왔고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통일적 핵심체 없이 난립하게 되었다.임시정부가 곧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것을 기대하는 송진우 계통과,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대표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운형 계통과의 행동이 분열된 것이다. 이리하여 여운형 계통에서는 일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 때 잔류한 좌익세력은 소위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조직을 급조하여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충칭의 임시정부와 대립할 기세를 취했다.국내에 있어서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한반도를 점령했다.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군은 점령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소련은 처음 조만식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케 하고 군정하의 행정을 담당케 하였으나, 이어 김일성(金日成)을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한편 남한에 진주한 미군도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미군정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허용하여 모든 한국인 정당에 대한 절대 중립 태도를 언명했다.그리하여 송진우 등의 ‘한국민주당’, 안재홍 등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朴憲永) 등의 ‘조선공산당’을 위시한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하였다. 미국에서 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하고,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인들이 귀국하였으나 혼란은 여전하였다.
카이로 선언
[편집]Cairo 宣言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의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5일간에 걸친 회담에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 등이 대표로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또한 회담에서 연합국은 승전하더라도 자국(自國)의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후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을 받았다.
포츠담 선언
[편집]Potsdam 宣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7일부터 베를린 서남방 교외에 있는 포츠담에서 연합국 대표회의가 열린 결과 발표된 공동선언.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도중에 애틀리 수상이 대신함),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회의에 참가했는데, 그 후 얄타 회담의 약속대로 소련의 스탈린 수상도 8월 이 회의에 참가하여 선언문에 서명했다. 전문 13개조로 된 이 선언에서는 일본에게 속죄와 항복의 기회를 줄 것과 항복 후 민주정부 수립을 보장한다는 것 등이 들어 있다.특히 카이로 선언의 여러 조항이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과 일본의 주권은 연합국이 결정하는 지역에 국한한다고 하였다. 이 선언으로 한국의 독립은 재확인되었다.
김구
[편집]金九 (1876
1949)
독립운동가·정치가. 유명(幼名)은 창수(昌洙). 호는 백범(白凡), 초호는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출생. 김순영(金淳永)의 아들. 가정이 극빈하여 자습하고, 12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 14세 때 해주에서 시행된 임진 경과(慶科)에 응시했으나 실패, 17세 때에 소년 훈장(訓長)이 되고, 1893년(18세) 동학당에 가입, 동학란에 참가했다. 실패 후 신천(信川) 청계동(淸溪洞) 안진사(安進士:안중근 의사의 아버지)를 알게 되어 그곳에 이주, 여기서 고능선(高能善)으로부터 많은 교도를 받고 전라도 남원에서 안진사가 대영웅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김형진(金亨鎭)과 함께 중국 유람을 위해 출발, 만주에서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대에 입대한 후, 강계(江界)의 왜인(倭人) 토벌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청계동에 귀환했다. 1896년 2월 안악(安岳) 치하포(?河浦) 나루터 이화보집에서 일본군 육군 중위 쓰지다(土田讓亮)를 미우라 고로로 오인하여 살해, 체포되어 인천 감리영(監理營)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8월 26일 사형 직전에 왕의 특명으로 죽음을 면했다.1898년 3월 탈옥, 삼남 각지를 방랑 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들어가 한때 승려가 되고 법명(法名)을 원종(圓宗)이라 했다. 이듬해 고향에 귀환,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종사했으나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 저격 혐의로 검거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1910년 국권침탈 직후, 남만주 무관 학교 설립 기금을 모금하다가 안명근 사건으로 체포, 17년 징역 언도를 받았다. 1915년 출옥, 3·1운동 후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1919) 임시정부 경무국장·내무총장(1923), 국무령(1927)을 역임했다. 1932년에 이봉창·윤봉길 두 의사 사건을 지휘하고, 국민 정부 주석 장개석의 요청에 의해 난징에서 면회, 뤄양(洛陽)에서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 시안(西安)에 한국 광복군을 설치하고 미국 교관을 청하여 광복군 장병들을 훈련하는 동시에, 입국 항전(入國抗戰)을 계획했다.광복 후 귀국, 한국 독립당 창설과 함께 당수가 되고 민주의원 총리, 민족 통일 총본부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1947년 과도 정부에 반대하고 남북 협상에 참가, 뒤에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피살되었다.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김구 암살사건
[편집]金九 暗殺事件
대한민국 건국 초인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거처하던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된 사건. 안두희는 육군장교로서 평소 김구와 안면이 있는 것을 이용해 정복을 입고 이날 오전 11시 30분 면회를 청하여, 가지고 있던 45구경 권총으로 안면·복부 등에 4발을 쏘아 숨지게 하였다.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암살동기를 ‘김구는 평소에 존경해 왔지만 중국에서 귀국한 후 남북협상을 제안하고 이에 참가하는 등 정치와 사회의 혼란을 조장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지만 6·25전쟁으로 형의 집행이 중지되어 자유당 정권하에서 군 중령까지 진급하였다.그 후 계속 피습을 받아오다가 1996년 10월 23일 버스 운전기사인 박기서에게 살해되었으며, 지금까지 사건의 배후에 대한 의혹은 밝혀지지 않았다.
조소앙
[편집]趙素昻 (1887
1958)
독립운동가·정치가. 경기도에서 출생한 후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 후 조선법학전수학교(朝鮮法學專修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3·1운동 후 상하이에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국무위원 겸 외무장관·국무원 비서장·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대표로 참가,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었고 귀로에 영국·소련을 순회하였다. 1928년 김구·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간부가 되었으며, 사회 각층의 지력(智力)·권력(權力)·부력(富力)을 고르게 갖게 하자는 3균주의(三均主義)를 제창, 한국독립당·임시정부의 정치이념으로 채택시켰다. 광복 후 귀국하여 김구·이승만 등과 국민의회를 설치, 상무위원회(常務委員會) 의장이 되었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찬동하여 평양에 갔으나 실패하였다.그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불참하였으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서울 성북구에 입후보,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다. 광복 후 남북의 대립에서 철저히 중도·중립노선을 취하였던 그의 정치이념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송진우
[편집]宋鎭禹 (1890
1945)
정치가·독립운동가. 호는 고하(古下), 전남 담양(潭陽) 출신. 융희 2년(1908) 김성수와 함께 도일하여 1910년에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가 귀국, 이듬해 다시 도일하여 1915년 메이지 대학을 졸업했다. 1917년 중앙학교 교장이 되었고, 3·1운동 때는 48인의 한 사람으로 투옥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사임하고 고문으로 재직했다. 광복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와 맞서다가 한국민주당을 조직하고 수석 총무가 되었다. 이어 이승만 및 임정 요원들과 함께 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암살자 한현우(韓賢宇)의 흉탄에 쓰러졌다.
장덕수
[편집]張德秀 (1894
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설산(雪山), 황해도 재령 출신.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자 상하이에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가했으며, 1918년에 신익희와 함께 임시정부 수립의 국내 연락을 취하려다가 검거되었다. 1920년 『동아일보』의 초대 주간이 되어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으며, 노동공제회 간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28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1936년 『동아일보』 부사장을 역임했다. 광복 후 송진우·김병로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외교부장, 정치부장을 역임하며 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에게 암살당했다.
여운형
[편집]呂運亨 (1885
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楊平) 출생. 배재학당(培材學堂)·흥화학교(興化學校)를 중퇴 후 우무학당(郵務學堂)을 졸업, 1907년 광동학교(廣東學校)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하였고,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한 뒤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 1914년 중국에 건너가 난징 진링(金陵)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중단했다. 협화서국(協和書局)에 근무하면서 교민단 단장(僑民團團長)에 선임되고, 1918년에 파리에서 만국 평화회의(萬國平和會義)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신한 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총무간사(總務幹事)에 선임되어 김규식을 파견했고, 이듬해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議政院) 의원이 되었다. 이 해 겨울 일본이 조선의 자치 문제에 대해 의견을 타진해 오자 장덕수 등과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야의 각계 인사들에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적극 역설하고 돌아왔다. 1920년 고려 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 피압박 민족대회(遠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하고 돌아와 중국의 쑨원과 협력하여 중국 혁명을 적극 추진했고,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판했다가 영국 경찰에 체포, 일본 경찰에 인도되어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본국에 압송, 제령 위반죄(制令違反罪)로 3년 간 복역했다. 1933년 출옥하여 『중앙일보(中央日報)』 사장으로 있다가 사직, 1944년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비밀단체 조선건국연맹(朝鮮建國聯盟)을 조직하여 위원장에 취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건국연맹의 기반을 확대하여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이 해 9월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을 선포, 스스로 부주석(副主席)이 되었으나 우익(右翼) 진영의 반대를 받은 위에 미 점령군 당국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12월 인민당(人民黨)을 조직, 이듬해 29개의 좌익(左翼) 단체를 규합하여 민전(民戰: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좌경(左傾)에 반대하고 이를 탈퇴, 근로 인민당(勤勞人民黨)을 조직하여 당수로서 좌파 온건 세력을 규합, 정치활동을 하다가 한지근(韓智根)에 의해 암살당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편집]朝鮮建國準備委員會
8·15 광복 후 최초로 조직된 정치단체. 세계 제2차대전이 종전(終戰) 단계에 들어갈 때 연합국측이 카이로 선언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자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한국내 인사들은 미리 종전과 동시에 닥쳐 올 사태에 대비하여 1945년 8월 10일 비밀리에
건국동맹(建國同盟)을 조직하고 8월 15일 광복되던 당일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회의 중요 간부로는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安在鴻)·허헌(許憲), 총무부장에 최근우(崔謹愚) 등으로써, 민족 총역량을 일원화하여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치안대를 동원하여 한때 국내 유일의 정치세력을 형성, 미군이 한국에 진주하기 2일 전인 9월 6일에는 전국 인민대표자대회를 경기여고에서 열고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이라 결정하여 형식상 민족 자주정권의 수립을 기도했다. 아울러 이날 정부 각료의 명단까지 발표했으나 처음부터 건준을 반대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귀국을 기다리던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 우익진영에 의해 소위 벽상조각(壁上組閣)이라고 비난을 당하였으며, 그 뒤 해외로부터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귀국하고 미군정이 실시되자 건준의 조직은 자연 해체되었다.
38선
[편집]三八線
포츠담 선언에 의하여 한국의 분할을 규정한 북위 38도선. 1945년 2월 얄타 협정에 의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의 군사적 견지에서 한국의 분할이 책정되었다. 그 후 다시 포츠담에서 미·영·중·소의 4거두가 회담, 한국의 분할을 구체적으로 협의하여 38도선 이북은 소련군, 이남은 미군이 각각 점령하기로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 단순히 군사적인 편의에 의하여 책정된 38도선은 정치적 형세의 변천으로 인하여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은 국경 아닌 국경으로 모든 방면에서 한국의 발전을 저해하여 동·서 긴장의 초점이 되었으며, 국내적으로는 남북 통일의 민족적 비원을 상징하게 되었다. 6·25전쟁의 휴전 후 새로운 경계선은 휴전선으로 이동되었다.
김성수
[편집]金性洙 (1891
1955)
정치가·교육자, 호는 인촌(仁村). 본관은 울산. 전북 고창에서 출생했으며, 1908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귀국하여 운영난에 빠진 중앙중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경성 방직회사를 창설하여 경제 자립과 민족 자본 육성에 노력하는 한편, 이듬해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제2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35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손진태와 함께 골동품을 수집하여 외국 유출을 막았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수석 고문관을 지냈으며, 1950년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했다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반대하여 이듬해 사임했다. 1952년, 민주국민당 고문으로 활약하다가 병사하여 국민장으로 장례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조만식
[편집]曹晩植 (1882
1950)
민족 운동가·정치가. 호는 고당(古黨). 본관은 창녕(昌寧). 경학(景學)의 아들. 평남 강서(江西) 출생. 15세까지 서당(書堂)에서 학문을 배우고 1905년(광무 9)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 재학 중 기독교에 입교(入敎), 1908년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그 동안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Gandhi)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크게 감동받아 자기 사상과 민족 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0년 메이지(明治) 대학 법학부(法學部)에 입학, 1913년 졸업 후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취임했고, 1919년 동교 교장이 되었다. 이 해 교장을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참가,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잡혀 평양 감옥에서 1년 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 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1921년 평양 기독교 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 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로 시무, 이듬해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 장려운동을 했다. 1923년 김성수·송진우와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 다음 해 이들과 함께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뒤에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이 되었다가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교장직을 사직했다. 이듬해 신간회의 결성에 참여했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된 후 1930년에는 관서체육회장을 지내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했다. 그 뒤 많은 후진들과 기독교인들의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1943년에 지원병(志願兵) 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板垣征四郞)와의 면담을 거절, 이를 반대하다 구금당했다. 곧 석방되었으나 산정현 교회가 신사참배(紳士參拜) 거부로 폐쇄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평남 건국준비위원회와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질서 유지와 국민의 지도에 앞장섰다. 한편 소련 군정청(軍政廳)에서, 북조선 인민 정치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고했으나 소련의 한국 공산화 정책을 간파하여 취임을 거부하고, 이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 노선을 뚜렷이 하고 반탁 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이에 조선 민주당은 소련 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접수(接受)되고 그는 소련군에 의해 고려 호텔에 연금, 그들의 협박과 회유에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월남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에도 동포를 남겨 두고 홀로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거부했다. 6·25전쟁 때 공산당에게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정
[편집]美軍政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종전(終戰)의 조서(詔書)를 발송함으로써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소련군 제25군단은 치스챠코프 대장(大將) 지휘하에 8월 22일 평양에 진주하여 북위 38도선 이북에 군정을 실시하였고, 미군 제24군단은 육군중장 존 알 하지(John R. hodge) 지위하에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당일로 서울에 입성하였다. 다음 날인 9월 9일 중앙청에서 우리나라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항복식이 거행되어 조선총독 아베노부유키 이하 일본측 대표들은 하지 중장 이하 미군 대표들 앞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일본국기를 내림으로써 우리나라에서의 일본 통치는 완전히 끝났다. 9월 11일 하지 중장은 미 육군 제 7사단장 아취볼드 비 아놀드(Archbold B. Arnold) 소장(少將)을 군정장관(軍政長官)에 임명함으로써 정식으로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이 미군정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선포까지 약 3년 간 계속된 바, 좌·우익의 사상적 대립, 경제의 혼란 등 매우 어려운 기간이었다. 일본 경제에 종속되었던 우리나라의 경제는 그들의 퇴각과 더불어 자본·기술·운영 등 모든 면에 공백상태를 가져왔고, 일제치하에서 억눌렸던 민심은 광복과 더불어 자제를 잃고 자칫하면 무정부적 방종에 흘러 데모, 파업 등이 연발하였으며 산업이 마비되어 중국, 일본, 38도선 이북으로부터 귀국한 동포, 월남 피난민 등이 밀려들어 실업자 홍수상태였다.이런 판국에 지하로 들어갔던 공산주의자들은 재빨리 활동을 개시하여 9월에는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고, 인민공화국을 내세워 조각(組閣) 명단까지 발표하였다(9월 14일). 민족전선(民族戰線)의 노선을 내세운 여운형(呂運亨)의 인민당(人民黨), 백남운(白南雲)의 신민당(新民黨)을 비롯한 군소정당과 외곽단체들을 망라하여 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구성하고, 대중에 파고 들어가는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주도하에 제주도, 대구 등지에서 반란·폭동이 일어나고, 각처의 파업도 대개 그들이 조종하였으며 신탁통치에 적극 찬동하고 나섰다. 공산당·인민당·신민당은 1946년 11월 23일에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약칭 남로당)이라 하였다. 3당 합당 후 여운형은 따로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조직하였으나, 1947년 7월 19일 그가 암살된 후로는 별로 활동이 없었다.남로당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더불어 불법 정당으로 추방되어 지하로 들어갔고, 이보다 앞서 간부들은 전후하여 38도선 이북으로 피신하였다. 1949년 6월에, 남로당은 김일성(金日成)의 북조선노동당과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으로 발전적 해소를 하였다. 한편 민족진영에서는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을 중심으로 1945년 9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결성하였고, 9월 24일 안재홍(安在鴻)은 국민당(國民黨)을 조직하였고, 한편 이와는 달리 같은 해 11월에 중국에서 돌아온 김구(金九)가 영도하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도 국내 기반의 확장에 나섰으며, 이 밖에 군소정당이 일어났다. 민족진영의 정당·단체들은 10월 16일(1945년)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이승만(李承晩)과 김구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여 좌익세력에 대항하였고, 건국청년회, 서북청년회 등 우익청년단체의 활동도 활발하였다.그 동안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이 주동이 되어 좌·우익의 합작을 시도한 바도 있으나 아무 성과도 없었다. 한편 미군정 당국은 저명한 한국인 지도자 28명으로 민주위원(民主議院)을 구성하고(1946년 2월 15일) 자문에 응하게 하였으며, 종전의 행정기구를 그대로 두고 중요한 관직에 미군과 한국인의 책임자를 각각 1명씩 두어 사무를 처리해 오다가 1946년 12월 12일 관선·민선의원 90명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度立法議院)을 발족시켜 긴급·당면한 법률을 제정하게 하였다. 중요한 부서의 미군 책임자는 고문으로 물러나고 군정 책임자만 두었다. 1947년 2월 5일에는 미국인 군정장관 밑에 민정장관(民政長官)의 직을 두어 안재홍(安在鴻)을 이에 임명하였고, 같은 해 6월 3일에는 군정부의 명칭을 남조선과도정부(南朝鮮過渡政府)라고 바꾸었다. 이 해 7월 1일 미국으로부터 서재필(徐載弼)이 귀국하여 군정 최고의정기관(最高議政官)에 취임하였다. 이 군정치하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유엔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를 준비하였고 이를 실시하여(1948. 5. 10) 대한민국의 수립을 보게 되었으며(1948년 8월 15일), 이로써 미군정은 끝났다.
한미접촉사
[편집]韓美接觸史
우리나라와 미국이 접촉을 시작한 것은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부터이다. 그 러나 그 이전인 1855년(철종 6) 6월에는 4명의 미국인이 강원도 통천(通川) 해안에 표착했고, 1865년(고종 2) 8월에는 3명의 미국인이 경상도 연일(延日) 해안에 표착했으며, 1866년 5월에는 미국함선 서프라이즈호(The surprise)가 철산(鐵山) 선사포(宣沙浦)에서 난파하였는데 조선관원에 의하여 구조된 바 있다. 동년 7월에는 셔먼호(The General Sherman)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하다가 일어난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으로 빈번한 접촉을 가졌다. 그 후 대원군이 은퇴하고 개국정책으로 바뀜을 계기로 1876년에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이 체결되자 구미 각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도 커져서 미국에서는 1878년 대통령에게 우리나라와의 통상조약을 위한 사절을 임명하게 하고 일본의 우의·조력을 얻어 성취케 하자는 상원해군위원장 서전트안(A. Sergent案)이 나왔으나 묵살된 바 있다. 1879년 티컨데로가호(The Ticonderoga)로 세계일주 항해중이던 미 해군 제독 슈펠트(R. W. Shufeldt)가 일본의 알선으로 조선에 대한 개국 예비교섭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측이 거부하였다.그 후 청(淸)의 이홍장(李鴻章)의 알선으로 1882년 5월 전문14관(款)으로 된 한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1883년 4월 7일 미국 전권공사(全權公使) 푸트(Foote)가 내한하여 13일에는 한미조약을 비준하였다. 이에 대한 답례로 한국 국왕은 민영익(閔泳翊)을 전권대관(全權大官)에, 부대관(副大官)으로 홍영식(洪英植)을 임명하고, 종사관(從事官) 서광범(徐光範), 수언(隨員) 유길준(兪吉濬)·고영철(高永喆)·변수(邊燧) 등 11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1883년 7월 26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1883년 9월 15일에 워싱턴에 도착하여 미대통령 아서(Arthur, Chester A.)를 만나고 미국 내의 문물제도를 시찰한 후 유럽을 거쳐 1884년 5월에 귀국하였다.이에 앞서 미국의 선교사로 의사 알렌(Allen)이 내한하여 신의술(新醫術)을 펴자, 서교도(西敎徒)를 엄금하던 당시에도 미국에서 보내온 선교사는 왕실의 호의로써 특별히 묵인해 주었다. 따라서 미국으로부터 전래된 기독교는 단시일 내 발전하게 되고 그들의 부대사업으로 시작된 교육·의료·학술면의 모든 시설은 우리나라에 근대 문화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19세기 말기의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복잡한 시대여서 국왕은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 제 3국인 미국의 힘을 빌었고,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여러 이권을 양도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초기에는 어느 정도 호의적 알선을 하였으나 갑신정변 이후로는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인 불간섭주의(不干涉主義)로 나오다가 러일전쟁을 계기로 루즈벨트(Roose- velt, F. D) 대통령은 불간섭 정책을 포기하고 국제정세상 일본의 대한주도권을 인정하였다.즉 미국은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기 위하여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원조하고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알선하고 1905년 7월에는 육군장관 태프트(Taft, W. H.)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와 회담시켜 우리나라 문제를 중심으로 가쓰라 태프트 비밀협정을 체결, 이 협정에서 일본은 러일전쟁 후 우리나라를 병합하는 것이 승인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편집]1905년 을사조약 이후 주한 외국공관이 폐쇄되어 외교 통로를 통한 한미관계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8·15광복 때까지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한 한미관계는 망명독립지사·미국 이주민·재한 미선교사들에 의해 이어져갔다.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미국에 유학갔거나 망명한 사람들과 1902년경에 미국인 데슐러(Deshler)가 창설한 하와이 이민을 목적으로 한 개발회사에 의하여 이주한 다수의 노동자들이 조직한 친목단체가 신문을 발행하였고, 190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공립협회(共立協會) 기관지인 주간 공립신보(共立新報), 그 후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에서 발행하던 대동보(大同報) 등이 있었고, 국내에서는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우리나라에 미국적인 민권사상(民權思想)을 수입하였다. 제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윌슨(Wilson) 대통령이 제의한 민족자결주의가 간접적으로 3·1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미국인으로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거류하던 선교사들의 교육·의료사업 등이 비공식적인 한미간의 접촉이었다.
광복 이후
[편집]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 우리나라는 미·소의 군사상의 필요에 의해서 그어진 38선에 의하여 미·소의 점령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이로써 남한은 미 점령군에 의한 약 3년 동안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 3년 동안 미국은 독립될 우리나라의 민주화 정책·국제공약에 의한 통일 모색에 진력하였으나 전후 미·소의 세계적 대립으로 38선이 한국의 영구적인 정치적 분할선이 되었고, 우리나라 문제는 미·소 양대국의 극단적인 냉전 격화와 함께 오늘날까지 국제적인 중요 문제가 되고 있다. 1947년 9월 미국은 우리나라 독립문제를 유엔총회에 제소하여 유엔은 ‘유엔 한국임시위원회’를 설치하고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결의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안은 소련의 방해공작으로 좌절되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그해 12월 유엔총회에서 우리나라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되어, 1949년 1월 미국정부는 정식으로 대한민국을 승인함으로써 1905년 이후 반세기 동안 중단되었던 한미관계는 다시 시작되어 1월 6일자로 장면(張勉)이 주미대사로 임명되었고, 미국에서는 1949년 3월 20일 초대 주한 미군대사로 무초(Muccio, John J.)를 임명하였다. 미국은 군정시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계속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원조를 실시하여 왔다. 이 원조는 처음에는 미국의 점령지구구제법(占領地區驅除法:GARIOA)에 의거하여 주둔군 당국에 의하여 소규모적으로 시행하여 왔다.미국은 또한 남북분단과 일본식민지 정책에서 초래된 경제적 파탄에 직면한 우리나라에 대하여 계속적인 재정 및 부흥원조가 필요함을 인정하고, 1949년 1월 이후로는 경제협조처(經濟協助處:ECA) 관할하에 대한경제원조를 실시하였다.이러한 미국의 대한 경제부흥원조는 다시 1950년 2월 14일에 극동지역 경제원조법(經濟援助法)의 발효에 따라 시행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의 대한경제원조(大韓經濟援助)는 1948년 12월 10일 미국측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체결된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와 미합중국(美合衆國) 정부 간의 원조협정’에 의거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 원조는 산업발전에 필요한 석탄 생산과 전원 개발(電源開發)에 이용되었으며, 또한 부족한 국내 재정에 도움이 되었고, 광복 이후 식량난에 허덕이던 우리나라의 식량 사정을 어느 정도 해결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한편 우리나라는 건국 후 1948년 12월의 유엔 결의에 의한 미군 철수시까지 대한민국의 안전을 유지하고 내란이나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할 한국 병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미군병력의 계속 주둔과 군사 원조를 미국에 요청하고 1949년 4월에는 한미군사협정체결(韓美軍事協定締結)을 제의한 바 있다.미국은 이에 응하여 미국의 대외방위원조법으로써 우리나라에 계속 군사원조를 하였고, 동시에 양국간에는 ‘잠정적 군사안정에 관한 행정협정’과 ‘미군사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의 체결을 보았고, 1950년 1월 26일에는 ‘상호방위원조 협정’까지 체결되어, 한국군은 미군이 1949년 6월 완전 철수함과 동시에 한국내 미국 군사 시설과 장비를 이양받았다. 이와 같이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과의 유대를 견고히 하면서 한국의 안전보장을 도모해 나갔으며, 이에 대하여 미국은 자기 나라의 국가이익이 되는 한도 내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다.건국 이래 6·25전쟁까지의 미국의 정책은 우리나라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고 적당한 수의 방위병력 양성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아울러 이러한 원조를 우리나라에 제공하는 것이 공산주의 팽창을 방지하는 데 유효하다고 간주하였으나 반면에 우리나라에 대한 무력공격이 발생하는 경우에 미국군대를 사용할 것을 약속하는 문제에 관하여는 회피적이었고, 이러한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에 대치되는 방법으로서 유엔을 통한 집단행동을 암시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즉 1950년 1월 12일부의 당시 미국무장관 애치슨(Acheson, D. G)의 성명에는 미국이 우리나라의 국기(國基)가 견고하게 될 때까지 원조를 계속할 것이나 우리나라에 대한 무력공격이 발생하였을 경우 미국이 그 군사적 방위에 참가할 용의가 있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명백한 언명을 회피하고, 알류션(Aleutian)으로부터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미극동방위선(美極東防衛線)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6·25전쟁 이후
[편집]한미관계가 이상 언급한 바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을 때 공산측은 6·25전쟁을 일으켜 무력 남침을 감행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미국은 즉시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을 요청하고 이 침략사태에 대한 안전보장이사회의 행동에 관한 토의를 제의하였으며, 6월 26일 트루먼(Truman H. S.) 대통령이 성명서를 발표하여 공산군의 한국침략에 대한 미국정부의 결의를 표명하였다. 6월 30일 맥아더(MacArthur, D.) 원수의 건의에 따라 미육군을 한국에 파병할 것을 허가하는 동시에, 우리나라 해안을 봉쇄하고 군사상 필요할 때에는 북한 내의 목표물을 폭격할 것을 명령하였다.이와 같이 미국은 6·25전쟁을 계기로 종전까지 미온적인 대한정책을 지양하고 적극적인 정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中共軍)의 참전으로 제3차 대전으로의 확대를 우려하여 ‘세계적인 미국의 책임’이라는 명분으로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키고, 소련의 휴전제안에 동의하여 ‘승리없는 현상유지’로 끝맺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승리없는 휴전에 반대하면서 만일 휴전이 성립되고 유엔군이 철수한 후 공산군에 대항할 수 있는 방위력 증강을 위해 미국과 교섭하여 1952년 5월 30일에는 이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어 휴전의 선행조건으로서 한미간에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제의하여 동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에 의하여 이 조약이 서명되었는데 비준서는 1954년 11월 18일에 교환되어 동일부로 발효하게 되었다.1957년 11월 17일에는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한미간의 합의 의사록’이 문서화되어 서명됨으로써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 및 경제원조의 기본 방침의 결정을 보았으며, 1958년 1월 29일에는 ‘미국 해군 선박 대여에 관한 한미협정’이 체결되고, 1959년 7월 2일에는 ‘조병창 실시에 관한 한미협정’이 체결되어 국군의 군사력 증강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휴전 직후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은 FOA를 통한 2억불의 대한원조를 발표하고, 또한 1953년 12월 14일에는 한미간에 합동경제위원회(合同經濟委員會)협약이 체결되었고,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訪美)를 계기로 워싱턴에서 개최된 1954년 7월 28일의 한미군사경제회담에 의해 한미관계는 강화되었다. 또한 민간무역의 기반이 되는 ‘한미 우호 통상항해 조약’도 1950년 11월 28일에 체결됨으로써 한미통상은 호혜적(互惠的) 원칙하에서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호 협정 외에 1960년 4·19혁명이 발발하자 4월 21일 주한 맥카나기(Macnaghy, R. P.) 미대사는 이 대통령을 방문하여 4·19수습을 위한 미국의 의견을 전달하고, 1961년 5·16군사정변 때에도 초기에는 사태추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나 7월 26일에는 러스크(Rusk, P.) 미국무장관이 군사정부 지지성명을 발표하였으며, 1961년 11월 11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미국을 방문하여 한미 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우리나라와 극동의 현황 및 한미 양국 정부와 국민의 여러 가지 관심사에 관하여 우호적인 의견을 교환하였다. 1964년 1월 19일에는 러스크 미국무장관이 일본의 도쿄에서 열린 미·일 각료급회담을 참석한 후 내한(來韓)하여 박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프랑스의 중공 승인이 태평양 지역의 안전보장에 위협을 준다고 논의한 끝에 한·일 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희망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고, 동년 10월 1일에는 미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 번디가 내한하여 한국정부 수뇌와의 일련의 회담을 갖고 한·일 국교 정상화에 미국이 측면에서 지원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1965년 2월에는 베트남 파병을 단행함으로써 한·미양국간의 우의를 다시금 강하게 하였으며, 동년 5월 16일에 박대통령은 미국의 존슨대통령의 정식 초청을 받아 방미하여 전례없는 우호관계를 독독히 하였다. 이는 한·미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 등으로 세계에 있서 가장 신뢰성 있는 미국의 벗으로서의 우리나라의 지위를 입증하는 것이며,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인 것이 된다. 또 종전에는 미국에 의존하는 느낌마저 주던 대미외교가 대등한 선에 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차례에 걸친 박·존슨 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공동성명은 1억 5,000만불의 장기차관의 약속,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미국과 한국군의 충분한 수준 유지, 한·일 국교 정상화 후의 대한 원조의 계속, 한·미 행정협정의 조속한 체결 등 14개 항목의 합의사항을 발표했다.1966년 7월 9일 러스크 미국무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러스크 미국무장관과의 사이에 한미행정협정이 체결되고 10월 14일에는 국회에서 비준·동의하였다. 따라서 치외법권적(治外法權的)인 대전협정(大田協定:1950년 7월)과 마이어협정(1952년 5월)은 자동적으로 폐기되었다. 1966년 10월 24일 베트남 참전 7개국 정상회담을 마친 존슨 미국 대통령은 10월 31일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는데 이는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 후 미국 대통령의 두 번째 방한이었다. 박·존슨 공동성명의 골자는 양국의 기본정책, 아시아 태평양지역 협조체제, 베트남문제, 우리나라의 국제활동, 우리나라의 방위, 우리나라의 경제 개발, 통상 및 기타 분야에 있어서의 교류, 과학기술 발전, 우리나라 통일 등 양국의 광범한 공동관심사에 관해서 합의했다. 1967년 3월 14일에는 미국 정부의 초청을 받은 정일권 국무총리가 박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방미하여 험프리 부통령·러스크 국무장관 등과 일련의 회담을 갖고 15일에는 정·존슨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성명 내용은 베트남전 수행문제, 휴전선에서의 공산군의 도발행위와 국군 현대 화문제, 2차 5개년 계획에 따르는 미국의 계속적인 지원 문제, 태평양 공동사회의 개발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주도권 행사문제, 기타 미국 실업인과의 국제차관단의 협력 등이었다.또 1967년 3월 조지볼 단장이 인솔하는 미국 민간투자 및 통상진흥사절단 일행의 방한이었다. 이들은 은행 4명, 전자 및 정밀기계 5명, 산업기계 5명, 제철·제강 1명, 기호화학 2명, 제약 3명, 식품 3명, 제재(題材) 2명, 피아노·호텔·서적·건설 등 각 1명으로 구성된 거물급 44명의 사절단이었다. 이들은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자본과 자원투자 가능성을 탐색하여 직접 및 합작투자의 길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1968년 4월 호놀롤루에서의 박·존슨 회담에서는 우리나라 안보에 대한 공동성명이 있었고, 1969년 3월 30일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차 방미한 정 국무총리는 닉슨과의 회담이 있었고 그 후 계속하여 수뇌회담이 있었는데 격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하여 주로 안보문제에 대한 회담이 지속되었다. 이리하여 한·미관계는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긴밀한 접촉을 계속해 왔다.
남조선과도정부
[편집]南朝鮮過渡政府
8·15광복 후 북위 38도선 이남에 진주하여 군정을 베풀었던 미군정부가 1947년 6월 행정권을 거의 우리에게 이양하고 잠정적인 정부라는 뜻으로 일컫는 이름. 민정장관에 안재홍이 임명되었으나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 이에 흡수되었다.
안재홍
[편집]安在鴻 (1891
1965)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平澤) 출신. 1914년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망명, 이회영(李會榮) 및 신채호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다. 1923년 이래로 『시대일보』 『조선일보』에서 언론활동을 하다가 물산장려회 이사로 있으면서 국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신간회 사건으로 8개월간 복역했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국민당을 조직했으며, 한독당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그 후 『한성일보』 사장·비상국민회의 의원·민주의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1950년 평택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어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조선인민당
[편집]朝鮮人民黨
1945년 11월 여운형(呂雲亨)이 고려국민동행·인민동지회·일오회(一五會) 등 군소점파들을 흡수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모체로 창설한 중도좌파(中道左派)의 정당.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여 전민족의 완전광복을 기한다’는 강령를 내걸었으나 공산당과 보조를 같이 하는 일이 많았다. 후일 조선공산당남·남조선신민당(南朝蘚新民黨)과 함께 통합하여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였다.
남조선노동당
[편집]南朝蘚勞動黨
1946년 12월 23일 서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남로당이라고도 한다. 조선 공산당과 신민당 및 인민당 등이 합당하여 조직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공산당을 결성하지 못하였던 공산주의자들은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20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북한에 북조선분국을 두었다. 당시 남한에서의 기습적인 인민공화국 수립선포, 신탁통치 지지표명, 소련에 대한 조국시, 한반도의 소련의 편입을 희망하는 박헌영의 발언 등으로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었고, 더구나 정판사위조폐사건 이후 공산당의 활동은 거의 정지 상태에 있었으므로 남한에서의 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좌익계이면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닌 일부 지식층이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자, 좌익계 단체들은 남조선노동당과 근로인민당으로 양분되었다. 남조선노동당은 합법적으로 남한의 공산화 공작을 계속하였고, 1947년 9월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민족분열을 꾀하였다. 1946년 8월 28일 북한에 북조선노동당으로 결성됨으로써, 남조선노동당은 김일성 지배하에 들어갔다. 북한으로 간 남조선노동당 계열은 그 지도자와 함께 55년 말까지 온갖 명목으로 처형되었다.
한국민주당
[편집]韓國民主黨
8·15광복 후에 결성되었던 보수 정당. 광복을 맞아 건국준비위원회를 반대하고, 상하이에서 귀국한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이 그해 9월 천도교 강당에서 결당했다. 송진우·김성수 등이 주동이 되어 김병로·조병옥·장덕수 등을 포섭함으로써 민족진영을 대동단결시켰으며, 이승만·김구 등을 민족의 영수로 추대하는 한편, 미군정 실시에 적극 협력했다. 10월에 귀국한 이승만을 맞아 ‘독립촉성 중앙협의회’의 중심 세력이 되고, 반탁운동을 전개했다.1946년 2월 ‘민주의원’에서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했으며,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부터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뒷받침하면서 민정 수립을 추진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했으나, 그동안 이념을 달리하는 간부의 탈당 및 이승만과의 갈등으로 1948년 5·10총선 결과 제헌국회의 소수당이 되고 말았다. 이후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민주국민당으로 개편되었으며, 1955년 9월에 민주당으로 개편되었다.
신익희
[편집]申翼熙 (1894
1956)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해공(海公), 본관은 평산, 광주(廣州) 출생. 한성 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에서 영어를 배우고, 1911년 일본 와세다대학교(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재학 중 학우회 조직, 총무·평의회장·회장 등이 되어 학생운동을 벌이고,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했다. 1917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취임, 1919년 3·1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상하이로 망명하고 임시정부 외무부장·내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8·15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독립 촉성 국민회 부위원장으로 민주정권 수립에 진력, 자유신문사 사장·국민대학 학장에 취임하고, 1948년 제헌국회 2대 의장이 되었다.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최고 위원이 되어 2대·3대 의원에 계속 당선, 1955년 민주당(民主黨) 대표 위원이 되어 야당을 지도했으며,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다수 국민의 열렬한 지지 속에 호남지방을 돌며 유세(遊說)중 열차 안에서 갑자기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조봉암
[편집]曺奉岩 (1898
1959)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죽산(竹山), 본관은 창녕(昌寧), 강화(江華) 출생. 강화에서 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農業補習學校)를 졸업하고, 군청(郡廳)에 근무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YMCA 중학부에 1년 간 수학(修學)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1년 간 복역,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 도쿄 주오(中央)대학에서 1년 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가담,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했고, 그 산하 단체인 고려 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이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상하이를 경유,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 총회(Commintern總會)에 참석하고, 이어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 공산대학(東方努力者共産大學)에서 2년 간 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에 노동총연맹조선총동맹(勞動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 문하부책으로 활약하다 상하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 대표에 임명되고, 이어 ML당(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 간 복역했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 다시 검거되었으나 광복을 맞아 석방되고, 인천에서 치안 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했고, 조선 공산당 중앙 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民戰議長)에 취임했다. 이듬해 박헌영을 충고하는 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 우익 진영에 가담했다.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 이어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52년 제2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제3대 대통령 후보로 다시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 해 11월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승만
[편집]李承晩 (1875
1965)
독립운동가. 정치가.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全州). 황해도 평산(平山) 출생. 어려서 서울에 이사하여 도동(桃洞)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1894년(고종 31)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 신학문을 공부하고 1895년 8월 배재학당 영어교사가 되었다. 1897년(광무 1)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가담하여 신문에 논설을 집필하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사상 고취와 민중계몽에 투신했다.
항상 부패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적 자문기관(諮問機關)인 중추원의 설치를 주장하면서 정부측 폭력단 황국협회(皇國協會)와 싸우다가 체포되어 7년 간의 옥고(獄苦)를 겪고 1904년 출옥했다.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에서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일제(日帝)에게 매수된 주미공사관 서기 김윤정(金潤晶)의 방해로 뜻을 못 이루었다. 1905년 미국에 머물러 학문을 더 닦기로 결심하고,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 1908년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에 국권침탈이 되자 이해 9월에 귀국,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기독교 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들을 지도하기에 진력하다가 1912년 다시 도미했다. 이때부터 30여 년 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미대륙과 하와이·상하이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7년 하와이에서 『한국태평양(韓國太平洋)』지를 발간했고, 동년 세계약소민족대표자회의(世界弱小民族代表者會議)에 한국대표로 박용만(朴容萬)을 파견, 3·1독립운동 때 국내 인사들과 연락하여 거사에 동조하고 이해 4월 10일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서자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뒤에 다시 미국에 돌아가 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45년까지 워싱턴·하와이 등지에서 항일투쟁과 외교활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맞아 이해 10월에 귀국, 독립중앙협회의회를 조직하여 반공·반탁을 주장하면서 민주주의 자주독립 노선을 전개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의장이 되고, 이해 8월 정부수립과 동시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후 강력한 반공·배일(排日)주의자로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 외교를 견지했으며, 6·25전쟁 때는 유엔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을 격퇴하고, 계속 대통령직에 재직,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 5월에 하와이로 망명, 1965년 하와이에서 병사했다. 유해는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평화선
[편집]平和線
한국의 해안 수역(水域)에 있어서 한국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규정한 선. 1952년 1월에 인접해양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이 발표됨으로써 정해졌으며 본래는 해양주권선· 이승만라인 등으로 불리었으나, 이 선이 인접 국가 사이의 평화 유지를 위해 설정한 선이라 하여 평화선이라 개칭했다. 이 선의 설정 목적은 한국 수역 내의 해산물에 대한 보호와 관리 및 이용에 있으며, 공해상의 외국선박의 자유 항해권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 평화선은 그 후 1966년 8월 22일 한일회담의 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폐기되었다.
신의주학생사건
[편집]新義州學生事件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에서 일어난 반공학생의거. 반공계인 기독교사회민주당이 11월 16일 용암포에서 지방대회를 열자 공산당은 공장 직공들을 동원하여 간부를 폭행했다. 이에 격분한 용암포의 학생들은 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전개, 23일에는 신의주의 6개 중학교와 부근의 학생 5천여 명이 이에 가담하여 공산당 본부·인민위원회 본부·보안서 등을 습격하자 공산당들은 기관총을 난사하여 많은 학생을 살상하고 소련군 비행기로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8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 날이 현재의 학생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