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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4월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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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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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자유당(自由黨) 정부를 해체시킨 혁명. 일명 4·19 혁명(革命) 또는 4월 학생의거. 정부수립 후의 우리나라 정치는 1952년 5월 정치파동(政治波動)을 계기로 차츰 독재와 부패의 경향으로 기울었다. 그 후 자유당을 조직하여 정권의 독점을 기도하여 오던 이승만은 1954년 사사오입개헌(四四五入改憲)으로 종신집권(終身執權)의 길을 마련하고 1958년 12월 2·4파동(波動)으로 국가보안법을 개정, 야당과 언론의 탄압책을 강화하였다. 동시에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각급 지방자치단체의 장(長)을 임명제로 하여 관권(官權)에 의한 선거운동의 조직망(組織網)을 더욱 굳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승리할 목적으로 무자비하게 야당을 탄압하는 동시에 전국의 공무원들을 공무원 친목회라는 이름 아래 묶어 선거운동의 전위부대를 만들고, 특히 대도시를 제외한 전국의 유권자들은 3인조·9인조로 조직하여 상호 감시하여 공개투표를 시행하고, 이것을 다시 경찰 및 그들이 주로 폭력배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둔 반공청년단(反共靑年團)원들이 감시하도록 완벽한 조직망을 짜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다수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박탈하여 4할 사전투표라는 악독한 방법까지 감행하기로 하였다. 이 같은 준비 공작을 완료한 그들은 마침 야당인 민주당(民主黨)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이 신병 치료차 미국에 건너간 틈을 타서 투표일을 앞당겨 3월 15일로 공고(公告)하고, 그들이 계획한 대로의 부정선거 공작을 진행하였다. 한편 미국에 가 있던 조병옥이 별안간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자유당의 후보 이승만은 싸우지 않고 대통령에 당선될 가망이 높았고, 부통령 후보 이기붕(李起鵬)의 당선이 문제였다. 이승만의 후계자로 자처한 그는 그의 처 박마리아를 배후 조종자로 내무장관 최인규(崔仁圭)를 하수인으로, 부정을 더욱 집중적으로 감행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야당 후보의 강연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등교(登校)를 명령하여 이들에 의한 반항적인 첫 데모가 대구에서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민심은 가일층 뒤숭숭하였다.투표일인 3월 15일에는 예정대로 부정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이 날 마산에서는 의분을 참지 못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궐기하여 민주당의 선거무효 선동에 호응하여 일대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찰은 이에 대해서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고 다수의 시민·학생을 체포·구금하였다. 이에 대해서 자유당 정부는 공산당의 개입설(介入說)을 주장하여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던 중, 4월 11일 1차 데모 때 행방불명이 되었던 고등학교 학생 김주열(金朱烈)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학살된 것이 바다에 떠오르자 마산 시민의 분노는 다시 폭발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경찰과 충돌하여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데모는 13일까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마산사건은 전국 학생들의 분노를 사서 각처에서 항의 데모가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데모가 있었는데, 이들이 귀교 도중 폭력배들에게 습격을 받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튿날인 4월 19일 서울의 대학·중·고등학교의 수많은 학생들은 일제히 궐기하여 경찰의 제지를 무릅쓰고 시위운동을 전개하니 이에 동조(同調)하는 시민들도 함께 호응하여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황한 자유당 정부는 이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는 동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량학살, 대량검거를 자행하여 참혹한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날 부산·대구를 위시한 지방에서도 서울에서 일어난 궐기의 뉴스가 전해지자 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났다. 계엄령으로 한때 잠잠하던 서울 시민들은 4월 25일의 대학 교수단 데모를 계기로 그날 밤부터 다시 궐기하여 26일에는 또다시 대대적인 데모가 일어났다. 그 동안 이승만은 허정(許政)을 외무부장관에 임명하여 사태의 수습을 의뢰하는 한편 이기붕 부통령 당선 사퇴, 3월 15일 선거의 무효를 선포하였으나 사태는 급속도로 진전하여 이로써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한편 계엄령 선포로 시내에 들어온 군인들은 시위군중에 대해서 하등위해를 가하지 않고 엄정 중립을 지켰다. 이에 대통령 이승만은 방송으로 사위를 표명하고 27일 드디어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여 수리되니 이로써 자유당 정부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어 허정을 수반으로하는 과도정부(過渡政府)가 수립되었고 이기붕은 처와 두 아들과 더불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 별관에서 일가족이 큰 아들 이강석의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이승만은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고, 국회는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내각책임제 헌법으로 개정한 다음 총사퇴하고 선거에 임하여 민주당의 장면(長勉)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4월혁명은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부패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혁명이다. 그 주동적 역할은 학생이 했다. 이들 젊은 세대의 기성권위에 대한 불신, 부정과 부패에 대한 반항, 정의와 의분(義奮)에 찬 용감한 정신이 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한편 전국민의 절대적 지지, 야당의 꾸준한 투쟁, 언론계의 성원, 그리고 국군의 적절한 행동 및 미국의 우호적인 태도에 힘입은 바 컸다.

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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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黨

한국정당의 하나로서 결당된 이후 10년 간 이승만 정권의 여당으로 있었다.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민회·대한청년단 등의 단체를 통합하여 창당했다. 창당 초에는 원내·원외파의 분열, 부산정치파동, 이범석 계열인 조청년계의 축출 등으로 당이 한때 마비되었으나 1954년 3월의 전당대회에서 기구를 개편, 이승만 총재 밑의 이기붕 총무부장이 당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해 5·20 총선거에서 민주당과의 경쟁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다시 무소속 의원들을 포섭하여 재적 2/3선을 넘는 등 이때부터 자유당 전횡으로 의사진행이 이루어졌다. 이후 1954년 11월 29일에는 소위 사사오입 개헌, 1956년에는 7·27데모사건, 1958년에는 2·4파동 등을 일으켰고, 5·20 총선거 후부터는 본격적인 일당 독재를 지향했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를 맞이하자 집권연장을 위해 온갖 불법을 자행하여 이승만·이기붕이 각각 정·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결국 4월혁명을 유발하여 이승만은 하야·망명하고, 이기붕은 자살, 간부당원 다수가 체포·처형되었다.

정치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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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波動

6·25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에 피난해 있던 1952년 여름,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키려는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폭력행위로 인해 일어난 일연의 정계파동. 제2대 정·부통령 선거와 제1회 지방선거를 몇 달 앞둔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 재석 163의원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어 정부와 국회 사이의 심각한 알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헌법에도 없는 국회해산·반민의(反民意) 국회의원 소환 등을 할 수 있다는 협박적인 견해표명을 하는 한편 관제 데모를 일으켜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국회는 이러한 사태를 해소시키기 위하여 정치활동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켰으나 정부는 이를 공포치 않아 사태는 한층 더 악화되고, 국회는 다시 개헌에 필요한 재적의원 3분의 2선인 122명의 호응 서명을 얻어 내각책임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곽상훈(郭尙勳)의원으로 하여금 제안케 했다. 이에 대하여 정부측도 다시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정면으로 대결했다.5월 10일에 종료된 지방선거에서는 여당인 자유당(自由黨)을 위시해 여당계 단체인 국민회(國民會)·한청(韓靑)·노총(勞總) 등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 국회에 대한 반대세력 형성에 급급하고, 5월 19일부터는 ‘국회해산’ ‘국회의원 소환’ 등을 부르짖는 땃벌떼·백골단(白骨團)·민족자결단(民族自決團) 등 폭력단체들의 데모가 매일같이 일어났다. 5월 24일에는 전(前)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이 내무부장관으로 취임하여 25일에는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및 전라남북도 일대에 공비가 준동(蠢動)한다는 이유로 비상계엄령을 선포, 원용덕(元容德) 소장을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마침내 5월 26일 국회의원 50여 명이 탄 버스를 헌병대로 납치해 가는 불법사건이 발생했다. 다음 날 전원 석방은 되었으나 12명에 달하는 의원이 다시 체포되어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고, 언론은 철저히 사전검열을 필해야 했으며, 5월 28일 국회가 결의한 계엄령의 즉시 해제 및 구금의원 전원 석방 요청에 대해서도 헌법 및 관계법규에 반드시 정부가 수락하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살하는 등 갖은 불법이 자행되었다. 이에 외국으로부터의 여론이 쇄도하는 중 특히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각서를 통하여 ‘유엔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군사 및 경제의 원조을 하고 있다’는 함축성 있는 비난을 하니 이 대통령은 마음을 돌려 ‘국회해산을 일단 보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태는 수습된 것이 아니라 이 혼란을 장기전으로 끌고 들어가 국회는 연일 휴회가 되고, 6월 20일 이시영(李始榮)·김성수(金性洙)·장면(張勉)·조병옥(趙炳玉)·김창숙(金昌淑)·신흥우(申興雨)·백남훈(白南薰)·서상일(徐相日) 등 60여 인사는 부산 국제구락부(國際俱樂部)에 모여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꾀하다가 회장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유혈 속에 중지되고 말았다. 이때 신라회(新羅會)라는 정치 조직을 쥐고 있던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張澤相)이 중재역할에 나서 각파 대표와 회담한 끝에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양원제를 내거는 정부안을 뼈대로 하고 국회에 국무원 불신임권을 부여한다는 국회측 안을 합쳐서 소위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만들어냈다. 마침내 이해 7월 4일, 지칠대로 지친 국회의원들은 경관들에 의해 포위된 의사당 내에서 밤 9시 반에 기립표결(起立表決)방법에 의해 발췌개헌을 163대 0(기권 3)으로 가결통과시키고 혼란한 정치적 난동기에 종말을 고했다. 이로써 이 대통령의 의도는 관철된 셈이고 뒤이어 7월 7일 개정된 헌법은 공포되었으며, 28일 비상계엄령은 해제되었다.

사사오입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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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捨五入改憲

1954년 11월 29일 국회에서 발생한 헌법개정안 불법 통과 사건.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헌법 개정안을 1954년 9월 6일 정식으로 제안하였다. 최순주(崔淳周) 부의장이 표결하였는데 재적 203명 중 2/3선은 사사오입하여 135명으로 족하다는 결론을 내려 전날의 부결 선포를 번복하고,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하였다. 이는 한국 헌정사상(憲政史上) 지울 수 없는 오점을 찍어놓았다.

2·4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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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四波動

자유당이 야당탄압의 수단으로 취한 불법적 사건. 1958년 8월 11일 자유당은 대공사찰(對共査察) 강화와 언론 통제를 내용으로 하는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이것은 1960년 3월의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한 야당탄압의 수단으로 취해진 사태라 하여 민주당을 위시한 야당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야당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자유당은 12월 24일 무술 경관을 국회에 투입하여 그들을 감금하고, 자기네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이를 통과시켰다.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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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黨

1955년 9월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당.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이 강행된 후 야당 국회의원들은 1954년 11월에 호헌동지회(護憲同志會)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민국당의 신익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한 민주당이 발족되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가 서거(逝去)하고, 부통령에 장면(張勉)이 선출되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 민주당은 대통령에 조병옥(趙炳玉), 부통령에 장면을 공천하였으나, 조병옥이 미국에서 병사하고 자유당은 3·15부정선거로 패배하였다. 1960년 4월혁명으로 7·27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당은 드디어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주당 신(新)·구(舊)파의 오랜 내분이 총리 인준을 계기로 폭발하여 민주국민당 계통이 이탈, 신민당을 조직하고 야당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민주당은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을 계기로 모든 정당과 함께 해체되었다.

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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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步黨

1956년 11월 조봉암(曹奉岩)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주의자들이 조직한 혁신당(革新政黨). 1954년의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파동을 계기로 여당인 자유당이 국민의 신망을 잃게 되자 조봉암·신숙(申肅)·서상일(徐相日)·고정훈(高貞勳) 등이 모여 재야(在野) 혁신세력을 규합하여 정당을 조직하려 했으나, 의견의 불일치로 서상일·신숙·고정훈 등은 별개의 혁신정당 형성을 선언하고 탈퇴했다. 그 뒤 조봉암은 독자적인 진보당(進步黨)의 결당식을 1956년 11월 10일 서울 시공관(市公館)에서 열어 전국 대의원 853명이 참석한 가운데 ① 책임있는 혁신정치 ② 수탈(收奪) 없는 계획정치 ③ 민주적 평화통일 등 3대 정강을 채택하고 의원선출에 들어가 의원장에 조봉암, 간사장(幹事長)에 윤길중(尹吉重)이 선출되었다. 이 해 5·15 정·부통령 선거에는 대통령 입후보로 조봉암, 부통령 입후보로 박기출(朴己出)이 당 공천에 의해 출마했다가 민주당(民主黨)과의 야당 연합전선형성을 기도할 때 박기출은 입후보를 철회했다. 선거결과 자유당의 이승만이 5,046,437표를 얻은 데 비해 진보당의 조봉암은 2,163,808표를 얻어 낙선했다. 그 뒤 1958년 5·2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선거대책을 수립하던 중 이 해 1월 11일 밤 돌연 경찰에 의해 당간부 10여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고 2월 25일 공보실(公報室)로부터 정당등록 취소 조취를 받아 당이 해체되었다. 1959년 2월 27일 간부 박기출·김달호(金達鎬)·윤길중 등은 대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되고, 조봉암은 양명산(梁明山)과 함께 간첩행위를 했다 하여 사형을 언도받자 ‘이것은 고문(拷問)에 의하여 꾸민 허위조서에 의한 판결’이라고 재심을 청구했으나 이유 없다고 기각당한 후 7월 30일 서울 형무소 형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민주당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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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黨政府

1960년 8월 23일 출범한 장면정부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정치운영을 수행하여 언론이 활성화되고, 자유가 넘쳐흘렀다. 그런데, 정부의 모든 규제가 풀리면서 각계각층의 누적된 요구가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그리하여 여러 노동단체와 학생들의 요구와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위축되었던 통일논의와 진보적 정치활동이 재개되었다.4·19혁명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은 서울대학을 중심으로 ‘새생활운동’의 일환으로 거리에 나와 양담배를 불태우기도 하는 등 계몽운동을 벌였으나 별 실효가 없자, 1960년 말부터 통일운동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혁신계 인사들의 학교방문이 잦아지고, 인도, 쿠바, 인도네시아 등 제3세계에 대한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오면서 민족주의의 바람이 학원가에 거세게 불어닥쳤다. 이러한 민족주의 열풍이 통일운동에 불을 당기게 한 것이다. 학생들의 통일운동을 선도하는 것은 서울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1960년 11월에 결성한 ‘민족통일연맹’(약칭 민통련)이었다. 한편, 혁신계 정치인들도 ‘민족자주통일협의회’(약칭 민자통)를 구성하여 학생들과 연계하여 통일운동을 추진하였다. 학생들이나 혁신계 정치인들의 통일론은 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중립화통일론, 남북협상론, 남북교류론이 있는가 하면, 구체적으로 남북학생회담을 판문점에서 가지려는 계획도 시도되었다. 또한, 자유당 정부의 부정축재자와 부정선거 원흉에 대한 처벌요구도 장면 정부를 괴롭혔다. 설상가상으로 50년대 말 이후의 경기침체로 실업자는 240만에 이르고, 1960년 말 현재 경인지역 공장의 80%가 조업중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2백만의 농민이 ‘보릿고개’라 하여 봄철의 식량난에 허덕였다. 그야말로 쌀만 가지고 있어도 부자로 불렸다. 그런데, 국민들의 높은 기대에 비해 민주당정부는 강력한 개혁의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정파싸움에 휘말려 대통령 윤보선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구파가 독자적으로 정당(신민당)을 결성하고 나섰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내걸고, 1961년 봄부터 댐 건설을 비롯한 ‘국토개발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장기 경제개발계획’을 성안하여 다음해 시행하기 위해 재원확보에 나섰다. 1960년의 혼란기를 거쳐 1961년 이후에는 정부와 민주당의 지도력이 차츰 강화되면서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3·15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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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正選擧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되었던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 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기붕이 당선되었으나 전국적인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 대통령·부통령은 이를 사퇴하였다.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였던 조병옥(趙炳玉)이 서거하자 3·15선거는 사실상 부통령만의 경쟁이 되었다. 자유당에 대한 민심의 이탈,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張勉)의 높은 인기 등에 자신을 잃은 자유당은 청중의 강제적 동원, 야당 유세의 방해, 모의투표(模擬投票) 실시, 야당 운동원의 살해, 유령유권자의 조작 등을 감행하였고, 투표일에는 조속(早速) 선거, 야당 참관인의 입장 거부, 3인조 투표, 4할 공개투표, 내통식(內通式) 기표소의 설치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교활한 부정선거를 감행하였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이 압도적인 표차로 정·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월혁명으로 정·부통령직의 사임은 물론 이승만 정권 자체도 몰락하게 되었다.

마산시민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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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山市民義擧

1960년 3월 15일과 4월 11일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마산 시민들의 반독재·부정선거에 대한 항의투쟁. 4월혁명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경찰의 발포로 15명의 사망자와 39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3·15부정선거에 대하여 마산 시민들이 반기를 들어 일대 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이에 대해서 무차별 발포를 감행하고 다수의 시민·학생들을 체포·구금하였다. 이에 대해서 자유당 정부는 공산당의 개입설을 주장하여 국민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그러던 중 4월 11일 1차 데모 때 행방불명이 되었던 고등학교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학살된 모습으로 바다에 떠오르자 마산시민의 분노는 다시 폭발하여 제2차 마산시민항쟁이 일어났다. 흥분한 군중은 경찰과 충돌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경찰서를 비롯하여 국회의원집·시청·파출소 등이 파괴·소각되었다. 독재·부정선거에 대한 비조직적인 마산시민들의 자발적 봉기는 4월혁명의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으며, 한국 민주주의 역사상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학교수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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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敎授-

1960년 4월 25일 4월혁명에 대한 지지와 자유당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 재경(在京) 대학교수단의 데모사건. 1960년 4월 19일의 역사적인 학생의거가 일어난 후 경찰력의 붕괴로 완전히 마비되었던 치안은 계엄군이 진주함으로써 다소의 회복을 보았으며, 이에 생기를 얻은 자유당 정권은 계속적인 집권을 획책하고 있었다.이같이 많은 희생자를 낸 4·19혁명이 무위로 돌아갈 낌새를 보이자 재경 대학교수 2백58명은 동년 4월 25일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4·19혁명에 대한 지지와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14개항의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하오 5시 45분 계엄령하에 가두 데모를 감행하였다. 이 교수단의 데모는 학생·시민들의 거족적인 호응을 받아 계엄하에 재차 대규모 시위를 발생시켜, 동년 4월 26일 상오 대통령 이승만을 하야케 하였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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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共和國

4·19 혁명 후 5·16 이전까지 민주당(民主黨)이 집정(執政)한 내각책임제 정체(政體). 4월혁명 후 과도정부하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마치고 국회가 해산되자 이 해 7월 29일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민·참의원 동시 선거가 실시되어 민의원 233명, 참의원 58명이 선출되었다. 이 국회에서는 과거 자유당치하에서 야당으로 투쟁해 온 민주당이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여 8월 12일 민·참의원 합동 회의에서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尹潽善) 의원을 대통령에 선출했다. 윤 대통령은 제1차로 같은 구파의 김도연(金度演) 의원을 총리에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인준을 얻지 못하고, 제2차로 민주당 신파의 장면(張勉) 의원을 지명하여 8월 19일 국회에서 인준을 얻어 마침내 23일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집권당이 된 민주당은 전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기왕부터 있어 온 당내 신·구파 파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장면 내각은 발족 후 20일 만에 대폭 개각(改閣)을 해야 했고, 10월 8일에는 구정권의 부정선거 원흉 및 부정축재자 등 반민주자 재판을 맡은 서울지검의 검찰측이 애매하게도 공소 사실에 대한 전면파기(全面破棄)를 선언하여 4월혁명 정신을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11월 4일 4·19 부상 학생들이 민의원 의사당에 난입하여 정쟁을 일삼는 국회의원들을 규탄했고, 전국에 걸쳐 데모가 빈번하여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고 장면 내각은 구태의연한 약체 내각으로 낙인이 찍혔다. 이리하여 11월 24일에는 대법원에서 비구승(比丘僧)들이 난동(亂動)을 했고, 12월 15일 경주호(慶州號)의 집단 월북기도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듬해 2월 20일에는 드디어 민주당이 분열되어 구파 중심의 신민당(新民黨)이 탄생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정세를 타고 일어선 또 하나의 중대사태가 발생했으니 그것은 극렬적 혁신세력이 맹위를 떨쳐, 이 해 2월에 있었던 한미경제협정 체결과 반공법 제정을 반대하는 소위 ‘악법반대대회(惡法反對大會)’를 3월 22일 서울에서, 24일에는 대구에서 개최하여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같은 혁신계 학생단체인 서울대학교 민통련(民統聯)은 전국 각 대학에 조직을 펴면서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열고 무조건 민족통일을 추진하자는 결의를 외치면서 38선으로의 강행군을 기도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윤 대통령은 3월 23일 밤 장면 총리·곽상훈 민의원의장·백낙준 참의원의장·김도연 신민당 위원장 등을 청와대로 불러 보수 세력의 대동단결로 비상시국을 타개해 나가자는 논의를 재개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민주당은 다시 오위영(吳緯泳) 중심의 노장파와 이철승(李哲承) 중심의 소장파로 갈려 대한중석(大韓重石) 사건 등을 둘러싸고 온갖 추태와 정쟁만을 일삼았다. 이에 사태는 대한민국의 국체(國體) 자체가 도괴(倒壞)될 위기에 처하게 되니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제2공화국은 1년이 못 가서 종막을 내렸다.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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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潽善(1897

1990)

정치가. 제4대 대통령. 충남 아산(牙山) 출생.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마치고, 대한 임시 의정원 의원(충청도) 및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한영 협회장·민중일보 사장 등을 거처 1948년 초대 서울시장에 취임했다. 1949년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고 3·4·5대 민의원에 당선, 4·19혁명 이후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2년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民政黨)을 창당, 동년 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6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7년 신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다시 출마했으나, 낙선, 당고문이 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 국민당 총재가 되었다.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 고문, 1985년 사회복지협 명예

회장을 역임, 동년 인촌 문화상(仁村文化賞)을 수상했다.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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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勉 (1899 1966)

정치가. 호는 운석(雲石). 본관은 인동(仁同). 인천(仁川) 출생. 1917년 수원 고등 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YMCA 영어 학교를 나와, 도미(渡美), 1925년에는 맨해튼(Manhattan) 가톨릭 대학 문과(文科)를 졸업했다.

귀국 후 천주교 평양 교구(平壤敎區)에서 교회 일을 보다가 1931년 서울 동성 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교장이 되어 광복 때까지 재직, 1946년 정계(政界)에 투신하여 민주주의 의원(民主主義議員)·과도정부 입법의원(過渡政府立法議員) 등을 역임하였고,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이해 겨울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가,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었고,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敎皇廳)을 방문한 후 미국을 방문 맨해튼 대학에서 법학 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駐美大使)로 부임, 이듬해 영국포덤(Fordham) 대학에서 다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6·25전쟁 때는 주미 대사로서 유엔의 지원을 얻는 데 크게 공헌했다.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퇴,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自由黨) 독재 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1955년 식익희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조직, 최고위원이 되고 1956년 부통령에 당선, 이해 9월 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했으나 경상(輕傷)에 그쳤다. 1957년 민주당 전 미국 시턴 홀(Seton Hall) 대학에서 다시 법학 박사의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에 피선, 이듬해 조병옥과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다가 낙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제5대 민의원(民議員)을 거쳐 내각 책임제(內閣責任制)하의 제2공화국(第二共和國)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잡았다.집권 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정책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5·16군사정변으로 9개월 만에 실각했다. 그 후 정치 정화법(政治淨化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한때 2주당(二主黨)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후 종교생활에 전심하다가 간염으로 사망했다. 국민장으로 포천(捕川) 천주교 묘지에 안장(安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