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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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槪說〕[편집]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에 의해 도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休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자유 양대 진영으로 다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내포한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으며,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

전쟁발발 직전의 정황[편집]

戰爭勃發直前-情況

1945년 8·15광복으로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우고, 우리나라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 1950년 6월은 바로 대한민국 제헌국회의 임기가 만료되어 제2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30총선거를 치른 직후였다. 선거의 결과 무소속 의원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몇몇 중간파 의원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부측 여당의 진출이 미미했던 것이다. 이것은 1949년 6월에 제정되어 선거직전인 1950년 4월에 시행규칙을 공포한 남한의 토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유상분배(有償分配)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토지개혁의 의의가 희박하여, 국민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속단하고 이때에 남침을 감행하면 틀림없이 남한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이와 같은 국내적 요인의 성숙과 아울러 국외적으로도 당시의 정황을 보면 ① 중공(中共)이 국부(國府)를 물리치고 대륙에 공산정권을 세웠으며, ② 1949년 6월에 이미 주한 미국군이 철수를 완료했으며, ③ 당시 미국이 설정한 태평양 방위권에서 대만(臺灣)과 한국은 제외되어 있었다는 것 등이 그들의 침략 결행(決行)에 용기를 주게 되었다. 12일부터 북한 공산군의 38선 배치를 위한 부대 이동은 시작되었으나 38선에서 떨어져 있던 부대들이 일제히 남하했다. 23일에 완료된 적의 38선 배치 병력을 보면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사단 및 3개 경비여단 등으로서 북한 공산군의 총병력에 해당하는 것이었다.한편 국군은 보병 8개 사단 중 옹진(甕津)에 17연대, 개성(開城)지구에 1사단, 동두천(東豆川) 지구에 7사단, 춘천(春川)과 원주(原州) 지구에 6사단, 주문진(注文津)과 강릉(江陵)지구에 8사단 등 도합 4개 사단 및 1개 연대가 배치되어 있었을 뿐 나머지는 서울의 수도사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전(大田)·대구(大邱)·광주(光州)와 같은 먼 후방에 있었다. 장비에 있어서도 공산군은 2,500여 문의 포를 가진 데 비해 국군은 겨우 800여 문의 포밖에 없었으며, 또 공산군은 야크(YAK)·아이아르(IR) 등 전투기를 포함한 200여 대의 항공기를 가진 데 비해 국군은 에이티(AT) 연습기 10여 대를 가졌을 뿐이었다.이러한 상황하에서 북한의 김일성은 ‘대한민국이 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면서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침략을 개시하였다.

전쟁발발과 유엔군 출동[편집]

戰爭勃發-UN軍出動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0분, 북한공산군은 일제히 38선을 넘어 옹진·개성·동두천·춘천·인악(仁岳)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三陟)·임원진(臨院津) 등지에 상륙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와 국군 17연대는 할수없이 철수했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끝에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고지를 방어하는 국군 제5사단 및 7사단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정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국군은 총퇴각을 감해, 적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渡河作戰)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적에게 완전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수원에 후퇴하고 도강한 국군 부대들은 통합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한편 정부는 25일 새벽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즉시로 주한미군대사 장면(張勉)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무성에 사태의 절박성을 알렸고, 미국은 이날 오후 2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우리나라 문제에 대한 대책을 건의, 북한군의 즉각 철퇴 촉구를 결의케 했다.27일 재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다시 ‘공산군의 무력 침략을 배제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우리나라에 보낼 것을 모든 유엔가입국에 권고하자’는 미국 대표의 제안을 7대 1로 가결했다. 이에 미국은 28일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으로 맥아더 전투사령부를 우리나라에 설치하고 해군과 공군을 우선 우리나라 전선에 파견했다. 뒤이어 29일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군이 출동하고 30일까지 총 32개국이 우리나라를 원조하기로 결의했다.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제안에 의해 ‘우리나라 출전 유엔군의 총사령부 설치 및 유엔기(旗) 사용’을 7대 0, 보류3(인도·이집트·유고)으로 가결, 그 관할권(管轄權)을 미국에 위임하는 동시에 미국으로 하여금 유엔군 총사령부 보고를 유엔에 제출케 하였다. 이때까지 소련은 그해 1월 13일 이래 중국에 있어서의 대표권 문제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을 거부하면서 다만 국외자의 입장에 서서 유엔군의 우리나라 파견 문제를 비난해 왔으나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다수 국가의 ‘고귀한 집단적 양심의 표현(프랑스 대표 발언)’ 앞에 여지없이 패배당하고 할수없이 27일자로 유엔에 재참석할 것을 통고해 오기에 이르렀다. 유엔의 이와 같은 결의는 세계 역사상 국제정의(國際正義)에 입각한 최초의 국제연합군을 탄생시킨 것으로서 국제평화의 수호를 위한 획기적인 거사였다. 7월 7일의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은 마침내 일본 도쿄(東京)에 유엔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 7월 14일 유엔기가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되고, 이 날 우리나라의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을 유엔군 총사령관 지휘하에 편입시키겠다는 공식서한을 발송하자 맥아더 장군은 이를 즉히 응낙하여, 공산 침략군에 대항하여 전투태세는 완전 통일, 정비되었다.한편 국군은 6월 30일자로 삼군 총참모장 채병덕(蔡秉德)소장을 예비군 사령관으로 전입시키고, 새로 정일권(丁一權) 준장이 총참모장이 되어 한강 이남 방어선을 재정비했으나 경부선 가도를 따라 전차사단을 앞세우고 돌진하는 적 주력부대에게 수원을 빼앗기고 육군본부가 다시 남하했다. 7월 5일에는 유엔 결의에 따라 우선적으로 급파된 미 제24사단 21연대의 제1대대가 1개 포병대와 함께 오산(烏山) 남방에서 최초로 공산군을 맞아 싸웠으나 3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들어오는 적의 대부대에 완전 포위되어 많은 전사자를 내고 포위망을 탈출, 후퇴했다. 유엔군이 치른 최초의 전투가 이렇게 무참한 패배로 돌아가자 미 제24사단 전병력은 다시 금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7월 15일 밤 적은 금강을 건너 진격해 왔으며 20일 아침에는 대전 시내에 돌입, 3개 사단의 병력으로 집중공격을 가해 왔다. 여기서 미 제24사단장 딘(DEAN) 소장은 몸소 적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며 용전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대전을 점령한 적은 다시 진로를 3분하여 일부는 서쪽으로 호남(湖南) 일대를 휩쓸고 마산으로 닿고, 일부는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향했으며, 또 일부는 동으로 포항에 육박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아군이 유엔군 총사령부하에 국군까지 포함시켜 작전 계통을 통일하고 부대를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 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아 반격을 개시할 태세를 이미 완료한 때였다. 8월 7일 아군은 마산지국에 미 제 25사단·34사단 기타 제5전투단·제3해병여단 등을 투입하여 부산을 목표로 육박하는 적에게 강력한 반격을 가하여 3일 동안에 60리를 진격, 국군의 채병덕 소장이 전사한 하동지구를 탈환했다. 이것은 6월 25일 이후 아군이 가한 최초의 본격적 반격이었다. 8월 13일에는 동부전선 포항에 돌입한 적군을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대항하여 적의 주공격 지점으로서 낙동강 도하작전을 위해 10여 일을 두고 4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몰려들었다. 이에 유엔군은 8월 16일 하루 사이에 B29 99대를 출동시켜 적의 집결지인 왜관(倭館)에다 도합 850톤에 달하는 수천개의 폭탄을 투하했으니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폭격기록이다. 그러나 적은 굽히지 않고 18일에는 대구 북방 13마일 지점까지 육박했다.이 날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후퇴하고 대구 시민에게는 소개령(疏開令)을 내렸다. 최후의 결전을 각오한 국군 제1사단은 영국군 보병 제27여단의 지원을 받아가며 북방으로 4Km를 반격, 뒤이어 이 날 미 제 24사단과 해병사단의 응원 출동이 있어 23일까지는 대구 북방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낙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했다. 이 후 적은 대구를 피하여 동·서로 부대를 이동하더니, 최후의 결전인 제2차 협공(挾攻)작전을 기도했다. 서남지역 진주(晋州) 방면에 적의 4개 보병사단(4·6·7·9)과 1개 전차연대(105사단 16연대)가 집결하고, 동부전선 포항 북방에 역시 4개 보병사단(5·8·12·15)과 1개 전차연대(105)가 집결하여 9월 3일 12시를 기하여 동시에 아군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적은 이미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전투력이 기진하였으며, 훈련도 되지 않은 신병들을 보충 병력으로 편성하였다.서남지역에서는 마산의 미 제2사단·25사단이 적의 계속되는 야습공격을 막아서 격퇴시켰으며, 동부전선에는 국군 제2군단이 9월 10일 최강을 자랑하던 적 제15사단과 1개 포병연대를 영천(永天)지국에 몰아 포위하고 4,800여 명의 적을 사살, 수많은 차량과 전차 무기 등을 빼앗아 완전 섬멸한 후 단번에 15km를 북진하여 적의 기세를 최종적으로 꺾어놓고 말았다. 이에 당시 미8군 사령관이던 워커(Walker) 중장은 12일 담화를 발표하여 ‘한국 전선 최대의 위기는 지나갔다’고 말하였다. 이로써 적의 남침 공세는 결정적으로 꺾이고 아군의 북진이 있을 뿐이었다.

9·28수복에서 압록강까지[편집]

九·二八收復-鴨綠江-

아군이 육전(陸戰)에서 이 같은 전과(戰果)를 올리기까지는 공군의 지원폭격(支援爆擊)이 크게 주효하였으니 유엔 공군은 이미 개전(開戰) 20일 만에 제공권(制空權)을 장악, B29, B26 등 증폭격기는 적 후방의 교통로를 파괴하는 한편 평양·진남포·함흥·성진·청진·나남 등지의 군수품 공장을 완전히 파괴했다. 쎄이버 제트기·F51 전투기·영국기·호주기(濠洲機) 등이 전선을 주 공격목표로 삼고 각 방면으로 공습작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해군도 개전 직후부터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나 지상작전이 후퇴를 거듭하므로 큰 활약을 못 하고 있던 중, 낙동강 전선에서 육군의 반격이 개시되자 전격적 북상을 기도하는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9월 13일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이 작전의 해군 사령관은 미 해군 소장 도일(Doyle)로서, 동원된 군함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이었다. 13일부터 2일 간에 걸쳐 맹렬한 함포 사격을 가한 후 15일 새벽 마침내 유엔군과 국군 해병대가 맥아더 장군 지휘로 인천에 상륙,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김일성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이 있자 소위 민족보위상(民族保衛相)인 최용건(崔鏞健)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의 병력으로 최후 저항을 시도했으나 20일에 아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했고, 23일에는 국군해병대와 미 제1해병사단이 서울 서북방의 안산(鞍山)을 점령하고 다음 날 마포로 도하(渡河)하여 시내로 돌입했으며, 25일에는 관악산 방면으로부터 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이 한강을 도하하여 남방으로부터 시내로 돌입, 협공으로 맹격을 가했다. 적은 결사적 항거로 시가전을 기도하였으나 병력의 대부분이 섬멸되어 서울에서 퇴각하니, 9월 28일 역사적인 서울 탈환이 이루어져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올랐다.이 서울 탈환작전은 남한지역 전투의 최종적 결판이 되었으니, 서울을 완전 탈환한 유엔군은 다시 수원 방면으로 남하하여 적의 배후를 찔렀으며, 중부와 동부전선에서도 무제한 북진공세를 취하니 30일에 벌써 국군 제30사단은 동해안을 전격적으로 북상하여 38선 접경 인악리(仁岳里)에 이르렀다. 이에 38선 이남의 공산군은 사실상 퇴로(退路) 마저 끊긴 채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졌다. 9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 공산군 총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다만 남한지역에 있는 공산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했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 사령부는 휘하 전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했고, 적 부대들은 태백산맥(太白山脈)을 유일의 퇴로로 이용하여 후퇴했으며 나머지 일부는 지리산·대덕산·회문산 일대에 포위된 채 유격전을 기도하게 되었다. 1월 1일 오전 11시 45분 국군 제3사단은 이종찬(李鍾贊) 대령 지휘하에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으며 뒤이어 수도사단이 인제(麟蹄)를 거쳐 북상하여 10월 10일 3사단과 함께 원산(元山)시내와 명사십리(明沙十里) 비행장을 완전 점령했다. 중부전선에서는 국군 제7사단과 8사단이 화천(華川)·김화(金化)를 거쳐 북상, 18일에는 서부전선으로 북상한 미 제1군단과 만나 평양 남방 근교에 육박하고 19일 군군 제1사단을 선두로 하여 평양을 완전 점령했다. 당시 평양을 지키고 있던 적군의 최인(崔仁) 중장은 신병으로 보충된 약 2만의 병력으로 방어태세를 취했으나 대패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북으로 도주했다. 한편 서부전선에서는 10월 20일에 청천강 이남 숙천(肅川) 일대에 미 제11공정사단(空挺師團)의 약 4천명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 적의 후방를 공격하였으며, 국군 제6사단이 미 제24사단과 영국 여단의 서해안 진격과 보조를 같이하여 덕천(德川)·희천(熙川) 등지를 거쳐 서북 국경의 중앙지점인 초산(楚山)으로 진격, 26일 오후 5시 50분 6사단 제7연대 수색대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11월 21일에는 중부로 진격한 국군 제7사단의 일부가 중부국경 혜산진(惠山鎭)에 도달했고, 동부전선의 수도사단과 3사단은 원산에서 다시 북진하여 10월 17일에 함흥, 22일에 북청(北靑), 28일에 성진(城津)을 점령했으며, 여기서 제3사단은 길주(吉州)를 거쳐 백두산(白頭山)을 향해 합수(合水)로 진격하고 11월 25일 수도사단은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 청진(淸津)에 돌입했다. 이로써 국토의 전역이 거의 수복되고 조국 통일이 목전에 다달았다.

1·4후퇴와 재북진[편집]

一·四後退 再北進

그러나 북한 공산군이 거의 섬멸 상태에 이르자 중공은 아무런 통고도 없이 한국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4개군 약 50만의 병력으로 고원지대를 타고 몰려 내려왔다. 11월 24일 맥아더 장군이 직접 지휘에 나서 총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29일까지 서부전선의 아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12월 1일부터는 동부전선에서도 철퇴를 개시했다. 12월 4일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 백만이 북한에 투입되었으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날 유엔군은 평양에서 완전 철수했고, 12월 23일 워커 중장이 일선 시찰 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 후임으로 릿지웨이 중장이 미 제8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는 동부전선의 아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에 모여 해상으로 철수했다. 이 흥남부두 철수작전을 방해하려고 몰려들다가 유엔군의 공습과 포격에 섬멸된 중공군 병력은 3개 사단에 달했다. 적의 유일한 전략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이었다. 중공군이 일선을 담당하는 동안 북한 공산군도 5개 군단의 병력을 정비하여 다시 일선에 나타나 12월 말일까지 38선에 집결한 적의 병력은 중공군 약 17만, 북한 공산군 약 6만 총 23만으로, 이날 밤 자정을 기해 일제히 38선을 넘어섰다.1월 3일 영국군이 의정부에서 격전 끝에 철수했고, 1월 4일 서울이 두 번째로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고, 적은 계속 남진했으나 아군도 이때는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반면에 적은 식량부족과 동상(凍傷)에 시달려 제10사단의 일부만이 태백산맥을 타고 경북 보현산(普賢山)까지 내려가고 다른 부대들은 진격이 부진했다.1월 9일 아군은 비로소 재반격을 개시했으니 당시의 전선을 그려 보면 서쪽으로부터 오산(烏山)-장호원(長湖院)-제천(堤川)-영월(寧越)-삼척(三陟)을 연결하는 선이 된다. 이날 미 제2사단은 프랑스군과 네덜란드군을 포함한 병력으로 중공군에 대항하여 원주에서 열전 끝에 적을 격퇴시켰으며, 1월 15일 미 육군 참모총장 코린즈 장군이 내한, ‘중공군을 과대평가할 게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자 당일로 유엔군은 오산을 탈환했고, 1월 28일 중부전선의 횡성(橫城)이 탈환되었다. 아군의 반격이 개시된 이후 2월 2일에 전사한 북한공산군 전선사령관 김책(金策)을 비롯해 10여 만의 전사자를 낸 적군은 할 수 없이 2월 7일부터 전면 퇴각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번의 반격 북진은 9·28 수복 때처럼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적은 전 전선에 견고한 참호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일일이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겨우 진격이 가능했다. 이리하여 아군은 3월 2일에 비로소 한강을 넘어섰고, 14일에 국군 제1사단이 다시 서울에 진주할 수 있었다. 3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38선 월경을 개시했고 동부전선은 4월 5일에 소양강을 건너 38선 이북의 수개 고지를 점령했다. 만주를 폭격하여 중공군의 기동을 분쇄하고 우리나라의 완전 통일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이 4월 11일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퇴임하고 릿지웨이 장군이 신임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때 적은 소위 춘계대공세를 취하여 4월 23일 김화 남방의 아군 방위선을 집중적으로 돌파하여 28일에 춘천, 30일에 서울 북방 우이동까지 육박하였으나 결국 격퇴되고, 5월 16일 제2차 공세로 인제 지구에 남침하였으나 동원병력 11만 중 5만여 명의 살상자를 내고 6일 만에 격퇴되었다. 아군은 서부전선에서 6월 3일 연천(連川)지구로 진격하고, 중부전선에서는 6월 6일에 처음으로 평강(平康)에 대치하여 철(鐵)의 삼각지대(三角紙地帶)를 이루는 철원과 김화를 점령했고, 동부는 5월 30일에 고성(高城)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에 공산측은 결국 전세가 불리함을 알아차리고 6월 23일 소련의 유엔 대사 마리크(Marik)로 하여금 한국전쟁의 정전을 제의해 오고 미국은 이에 호응함으로써 7월 8일 개성에서 정전회담 예비회담이 개최되고 10월 25일 회담장소를 판문점(板門店)으로 옮겨 회담을 진행했다. 11월 28일에는 당시 전선을 임시 휴전선으로 채택하게 되어 한때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치열한 선전전을 수반하면서 여전히 전투는 계속되었다.한편 국군은 후방에서 9·28수복 때 지리산 일대의 산악으로 집결한 패잔(敗殘) 공비(共匪)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국군 수도관과 제7사단 및 전투경찰대 5개 연대는 이해 12월 2일부터 이듬해 3월 13일까지 4차에 걸친 공격을 가해 사살 7,147명, 포로 6,883명, 귀순 172명의 전과를 올려 일단 전면적 소탕을 끝냈다. 이외에도 1952년 여름에는 거제도(巨濟島) 포로수용소에서 수차에 걸쳐 폭동이 일어난 5월 7일에는 포로대표와 담판을 하려던 수용소 소장 돗드 준중(准將)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등 소란이 일어났으나 6월 말경에는 완전히 질서를 회복했다.

최후의 혈전과 휴전 성립[편집]

最後 血戰 休戰 成立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시된 후부터 한국전쟁은 세계 전사상 처음보는 소위 제한공격(制限攻擊)이라는 전법을 채택하게 되었으니, 당사국인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산군과 유엔군은 함께 휴전의 성립을 희망하여 서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다만 진격을 감행하지 않을 뿐이지 거의 고정된 전선에서의 근거리 고지 쟁탈전은 치열하였으니, 한 능선(稜線)·한 고지에서 퇴각과 탈환을 20여 회 이상 거듭하는 게 보통이었다. 1952년 8월부터 공산군은 후방의 병력과 장비를 보강하여 8월 5일 국군 수도사단이 지키는 김화 등 북방의 수도고지에 공격하여 왔다. 전례없이 포격을 강화한 적은 1일 평균 2만 발을 발사하여 인해전술로 육박해 8월 10일까지 6일 만에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갈리었다. 이러한 싸움을 9월 28일까지 계속하여 아군은 고지를 확보하니 29일에는 개전 이래 최대의 포격으로 4만 8천 발을 수도사단 지구에 퍼붓고 다시 방향을 돌려 백마고지(白馬高地)에 공격해 왔다. 백마고지는 북한강 동쪽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철의 삼각지대 안의 교통로를 제압하는 전략상의 주요 고지다. 이 지대는 국군 제3사단·9사단 및 미 제2사단 등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10월 29일까지 1개월 사이에 25회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뀐 끝에 아군은 한걸음 진격하여 철마(鐵馬)고지까지 점령했으며, 이 동안의 접전은 주로 백병전이었다. 한편 수도고지와 백마고지 사이에 있는 저격능선(狙擊稜線)에서도 10월 초부터 맹렬한 적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동측 요충으로 적의 주요 진지인 오성산(伍聖山)에 대치하는 지점이다. 이 지대는 국군 제2사단이 당하고 있었는데 4일 간 전투에 17회나 능선의 주인이 바뀌었으나 12월 21일 저격능선의 암석봉(岩石峰)에 공격해 오는 적을 네 번이나 격퇴시키자 평온상태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1953년 1월로 들어가 적은 산발적으로 소극적인 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이 해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후 4월 6일, 5개월 만에 휴전회담이 재개되고 11일에는 상이포로 교환협정이 조인되니 벌써 휴전 경계선의 결정을 토의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이 결정적으로 성립될 단계에 이르자 적군은 5월 초순부터 전전선(全戰線)에 걸쳐 공세를 취해 왔다. 그리하여 5월 12일 중동부 전선에 약 4만 5천의 병력을 투입하고 12시간 동안에 11만 8천 발의 포격을 가해 약 3km 후퇴했으며, 동부전선 단장(斷腸)능선, 서부전선 연천(蓮川)지방도 심한 공격을 받았다. 7월 16일부터 아군은 총공격을 개시, 휴전을 앞두고 전략상의 요지들을 확보하려던 적의 공격을 격퇴시키고, 20일까지는 앞서 잃었던 지역의 대부분을 탈환했다.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정식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쳐 참담했던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막을 내리고, 한국 국민은 제2의 38선인 휴전선으로 하여 민족분단의 비운을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족 상잔의 비극이었으며, 양대 세력의 세계적 전쟁이었다. 유엔측은 제1차대전 전비(戰費)에 해당하는 150억불을 지출하였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유엔측의 총사상자수는 33만 여에 달하고 공산측은 그 5배에 해당하는 180만에 이르렀다.만 3년 간의 혈전에서 우리나라 국토는 초토화했으니 60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20만 명의 전쟁미망인, 10만 명의 전쟁고아가 생겼으며, 공업시설은 45%가 가동불능이 되어 경제적·사회적으로 암흑리를 초래했다. 거기에 대하여 우리나라 역사 이래 최대한으로 도입된 온갖 외국적 풍조는 전쟁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잘못 소화되어 극심한 윤리적 타락을 낳았으니, 이 극악의 사태를 극복하는 일은 평화를 애호하는 자유진영의 공동과제로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을 위시한 유엔의 다수 국가는 계속하여 공산군과 용감히 항전한 한국의 재건사업을 도왔으며, 이 전쟁이 남겨준 역사적 교훈은 우리나라를 위시한 모든 자유애호 국가들로 하여금 정의에 도전하는 침략자에 대하여 과감한 반격과 철저한 응징(膺懲)을 가할 결의를 갖게 하였다.

인천상륙작전[편집]

仁川上陸作戰

6·25전쟁 중인 1950년 9월 한국군과 국제연합군이 인천에서 합동으로 개시한 작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D.S. 맥아더가 구상·지휘하였는데, 그는 인천이 자연조건상 작전을 수행하는 데 매우 불리하지만 불리한 여건을 역이용, 상대방의 허점을 찔러 기습공격을 감행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9월 15일 E.M. 아먼드 장군의 지휘 아래 한국의 백인엽(白仁燁) 대령이 가세하여 합동으로 작전을 수행,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쳤다. 상륙부대의 병력은 약 7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 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북한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울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이 작전은 6·25 당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난 국제연합군과 한국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대반격을 취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맥아더[편집]

MacArthur, Douglas (1880

1964)

미국 육군 원수. 1903년 웨스트

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제1차 대전 때는 군단장으로 복무했다. 1919년에 육군사관학교 교장, 이어 마닐라 방면 군사령관을 지내고, 1930년 육군대장으로 승진되어 1939년까지 참모총장을 지낸 후, 1937년 군에서 퇴역했다. 1941년 현역에 복귀되어 제2차 대전 중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태평양 작전을 지휘했다. 1944년 원수로 승진, 한때는 필리핀을 버리고 태평양 남단까지 작전상의 후퇴를 감행하면서 드디어 전국(戰局)을 승리로 이끌어, 1945년 전함 미조리호 선상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인식을 거행했다. 뒤이어 일본주재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민주정권 수립에 협조했으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총사령관이 되어 작전을 지휘, 인천상륙을 감행하고 우리 국군을 도와 공산침략군을 격퇴시키면서 북진을 계속했다. 이 해 겨울에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자, 만주 폭격과 중국연안 봉쇄 등 과감한 멸공작전을 주장하다가 트루먼 대통령과 의견이 충돌되어, 1951년 총사령관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1956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과 인천에 동상이 세워졌다.

6·25전쟁의 영향[편집]

六·二五戰爭-影響

6·25는 대한민국의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으로는 우선 반공적 국가질서를 강화시켰다. 처참한 전쟁의 경험은 국민들로 하여금 반공정신으로 무장토록 하였고, 공산주의는 살인주의 또는 비인간주의와 같은 것으로 매도되었다. 반면 미국은 대한민국의 구원자이며 은인이라는 믿음을 국민들 사이에 심어주었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국가 안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한 유엔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남북대화 방식보다 유엔을 통한 해결 방식을 채택하게 하였다. 경제면에서도 6·25는 한국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산업생산 시설과 주택 등이 파괴되었고, 철도를 비롯한 도로와 교량 등 사회 간접자본의 훼손도 매우 컸다.여러 분야에서의 엄청난 피해는 미국의 경제원조와 미국 주도하에서의 유엔의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전후 경제를 복구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미국의 원조는 50년대 한국의 산업생산 활동뿐만 아니라, 국민경제생활을 전반적으로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한국의 경제적 요구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진 미국의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소비재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가 추진됨에 따라 공업의 대외의존적 성장과 농업의 정체현상(停滯現象)을 빚어냈다. 한편 6·25는 한국의 군부를 급격히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어 6·25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향력이 커졌으며, 그 성장 또한 다른 부문보다 월등하였다. 이것은 국내정치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 증대를 의미한다. 또한 6·25는 민족의 대이동을 초래하여 6·25의 발발로부터 휴전 성립 이전에 약 29만 명이 월북(越北)하였거나 납북되었고, 약 45

65만 명이 월남(越南)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인구의 대이동은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도시인구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6·25는 많은 전쟁고아(戰爭孤兒)와 전쟁미망인을 파생시켰고, 상이용사들의 생활문제도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아울러 미국군의 주둔에 따라 ‘양키 문화’로 불리는 낮은 수준의 미국 문화가 유입되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피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민족의 염원인 민족통일의 길이 더욱 멀어졌다는 사실이다.

50년대 남한의 사회와 문화[편집]

五十年代南韓-社會-文化

승만 정부는 전쟁 중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국민들의 반공정서를 이용하여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동원하였다. 1951년 12월 국민회, 대한청년단, 노동총연맹, 농민총연맹, 대한부인회 등 관제단체를 토대로 여당인 자유당(自由黨)을 조직하고, 이 해 7월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이승만의 재선을 위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속칭 발췌개헌)을 통과시켰다. 내각제를 원하는 야당의원들을 헌병대에 연행하고, 백골단(白骨團)을 비롯한 압력단체들을 동원하여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통과된 새 헌법에 기초하여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咸台永)이 당선되었다.대통령에 재선된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위한 정비작업에 들어가, 야심이 있는 이범석 계열을 자유당에서 제거하고, 충성심이 강한 이기붕(李起鵬)으로 하여금 자유당을 이끌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1954년 11월 27일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국회에서는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으나, 이승만 추종자들은 사사오입(四捨五入)의 궤변을 들어 통과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빈축을 샀다.새 헌법에 기초하여 1956년 5·15선거가 치러지고, 이승만은 세 번째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야당인 민주당의 신익희(申翼熙) 후보가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내걸고 인기가 높아져 있던 차에 갑자기 타계하고, 평화통일과 혁신노선을 내세운 진보당(進步黨)의 조봉암(曺奉岩) 후보가 전체 유효표의 30%를 차지하였으며,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張勉) 후보가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큰 파란이 일어났다. 이승만의 인기는 농촌을 제외한 도시지역에서 급속히 떨어졌다.위기에 몰린 이승만 정부는 민주당을 제외한 혁신계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크게 억제하고 나섰다. ‘신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1958. 12), ‘반공청년단’이 조직되었으며(1959. 1), 진보당의 조봉암이 간첩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1959. 7). 또한 장면을 지지하였던 『경향신문』도 폐간되었으며(1959. 4), 이승만과 자유당은 1960년 3월에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선거를 부정선거로 몰고 감으로써 마침내 4·19혁명을 유발하고야 말았다.한편, 한국전쟁은 원래부터 취약하던 경제기반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실업과 인플레가 극심한 가운데, 미국의 원조가 전후복구사업을 크게 도왔다. 미군정기에도 4억여 달러의 원조가 있었지만, 자유당 집권기에는 31억 달러의 원조가 제공되었다. 원조물품의 대부분은 소비재였고, 4분의 1은 농산물이어서 어려운 식량사정을 다소간 해결해주었다. 그러나 미국 원조액의 절반은 군사원조에 충당되어 산업재건에는 적극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미국원조에 의해 성장된 산업은 주로 소비재공업이었다. 이른바 삼백(三白)산업이라 하여 밀가루, 설탕, 면화산업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몇몇 기업이 정부의 특혜 속에 삼백산업을 일으켜 재벌로 성장하고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 소비재산업으로 극도의 궁핍은 벗어났으며, 5

8%의 경제성장이 50년대 말까지 이루어졌으나, 산업의 대외의존도가 90%에 이르고, 공업생산은 일제말기의 절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단지 쌀농사만이 일제시대 생산수준을 넘어섰다. 특히 규모가 큰 수력발전소가 모두 북한에 있었던 관계로 남한은 전기사정이 어려웠으며, 1960년 현재 농촌의 82%, 서울의 39%가 전기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그러나 50년대 말을 고비로 하여 인플레 문제가 해결되고, 장기 경제발전계획이 수립되었음은 기억해 둘 만하다. 1958년 부흥부 안에 ‘산업개발위원회’가 설치되고, 1960년 4월 15일 ‘3개년경제발전계획시안’이 국무회의에서 승인되었다. 이 계획은 며칠 후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면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으나, 민주당 정권과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은 이를 계승한 것이다.자유당시절의 50년대는 남한사회의 전통적 사회질서가 밑바닥에서 해체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시대에도 유교전통이 강한 남한사회는 양반중심의 권위질서가 지방과 농촌에 남아 있었고, 북한은 남한과는 다른 서민적·기독교적 기풍이 강했다. 그런데 수백만의 북한 주민이 월남하여 남한사회의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양반문화의 해체, 권위질서의 붕괴, 양반 지주계급의 소멸로 급속한 수평사회가 형성되었다.이러한 변동은 사회발전의 활력소로 작용하였으나 전통과 권위가 무너진 무질서와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는 요인도 되었다. 미국의 경제원조와 함께 홍수처럼 밀려 들어온 미국문화도 남한사회의 가치관과 생활풍속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사상이 전통적 가치관을 해체시키면서 근대시민정신을 고양시킨 것도 사실이지만, 서양문화에 대한 숭배가 지나쳐서 전통을 총체적으로 비하하는 민족허무주의적 사고가 팽배함으로써 주체성의 상실을 가져왔다. 이는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남한 사회의 문화풍토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당시 뜻있는 지식인들 사이에는 문화식민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거창사건[편집]

居昌事件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일어난 양민 대량학살사건. 6·25전쟁 후 지리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공비소탕을 위하여 주둔하였던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연대장 오익경(吳益慶) 대령, 제3대대 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의 작전에 의하여 감행된 것으로, 동년 3월 29일 동군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보고로 공개되었다. 동년 2월 11일 동대대장 직접 지휘로 부락민을 신원초등학교에 집합하게 한 후 군·경·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187명을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방위군에게 지급될 물자를 불법처분하여 천 수백 명의 아사자(餓死者)와 수천 명의 병자를 내게 하였던 ‘국민방위군사건’과 함께 전시 혼란기를 틈타 일어났던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4월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유족 70여 명이 보복책으로 당시의 면장 박영보(朴榮輔)를 끌어다 생화장(生火葬)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반공포로석방[편집]

反共捕虜釋放

1953년 6월 18일 휴전회담이 계속되는 중에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북한 출신의 포로를 이승만 대통령이 석방한 사건. 포로를 중립국에 넘겨주어 다음에 남·북한 중 자유로 선택하게 한다는 휴전회담의 협정에 불만을 품은 한국정부는 3만 7천여 명의 포로 중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세계적 물의를 일으켜 연합군 긴급회의가 열리는 등 한국정부와 참전국들 사이의 관계가 일시 악화되어 포로 재수용을 요구하였으나 한국측은 이를 거부,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휴전회담[편집]

休戰會談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을 일단 중지하기 위하여 개최한 회담. 중공군이 우리나라 전선에 투입된 지도 4개월이 지난 1951년 3월 힘찬 반격으로 북진을 계속하는 국군과 유엔군 부대가 다시 38선을 넘어서자 중공군은 소위 4·5월 춘계대공세(春季大攻勢)를 감행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나고 전선은 38선 북방 깊숙이 옮겨졌다. 이에 당황한 소련은 이해 6월 23일 그들의 유엔 대표 말리크(Mailk)를 통하여 38선상의 정전을 제의했다. 격렬한 우리나라 국민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관 릿지웨이(Ridgeway) 장군은 6월 30일 말리크의 제의에 응하여 정전회담을 요구했다. 7월 8일 개성(開城)에서 예비회담이 개막되고, 이어서 10일에 유엔군 수석 대표 해군준장 조이와 괴뢰군 수석 대표 남일(南日)이 참석한 가운데 정전회담 본회의가 개최되었다.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는 공산측 제안을 위시하여 숱한 난제에 부딪힌 이 회담은 9월 6일에 이르러 말썽 많은 개성지구를 버리고 판문점(板門店)으로 회담장소를 옮겨 11월에 비로소 38선이 아닌 전선(戰線)을 정전선으로 할 것에 합의했다. 제2의 난제인 포로교환문제는 1952년 7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도트준장 납치 사건, 1953년 6월 18일에 있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사건 등 곡절을 겪어 회담 자체를 정돈상태에 빠지게 했다. 이해 6월 22일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국무장관보 로버트슨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2주일 간에 걸쳐 이 대통령과 회담케 함으로써 ① 한·미 양국은 정전 후에도 긴밀한 협력을 계속하고 ② 송환을 원치 않는 공산포로는 한국에서 석방하며 ③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우리나라로 하여금 정전반대운동을 일단 중지케 하였다.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전문(全文) 5조 36항으로 된 정전협정은 불과 9분 만에 걸쳐 조인을 완료함으로써 개전 후 3년, 회담 개시 후 2년 1개월 만에 완전한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로 한국전을 끝맺었다.

국민방위군사건[편집]

國民防衛軍事件

6·25전쟁 중의 1·4후퇴 때 국민방위군의 일부 고급장교 사이에 일어난 부정사건. 1951년 1월 후퇴작전 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의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아사자(餓死者)·동사자(凍死者)가 속출하였는데, 사망자수만도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참상은 국회에서 폭로되어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고, 이시영 부통령은 사임서에서 국민의 의혹을 풀기 위한 국회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였다.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하였고, 관련된 국민방위군 간부들 중 5명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