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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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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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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原道-象徵物

강원도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잣나무, 새는 뻐꾹새, 동물은 반달곰이다.

강원도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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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지형

한반도의 중부 동쪽에 위치하여 북쪽은 함경남도, 서쪽은 황해·경기의 2도, 서남쪽은 충청북도, 남쪽은 경상북도, 동쪽은 동해에 면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셋째로 큰 도로서 총면적 16,873.55㎢이다. 수리적으로는 동경 127

05

129

22

, 북위 37

2

39

10

에 이른다.

지형·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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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등줄(脊梁)을 이루는 태백산맥이 동해에 임박하여 해안 산맥·중앙 산맥·내방(內方) 산맥의 세 갈래로 갈라져 남북으로 뻗어 있다. 이 산맥은 신생대 제3기부터 요곡 운동과 단층 운동을 수반하면서 서서히 융기하여 산정이나 산복에 많은 평탄면이 발달되어 있으며, 산맥의 평면 높이는 약 800

900m 정도이다. 금강산(金剛山, 1,638m)·설악산(雪嶽山, 1,708m)·향로봉(香盧峰, 1,293m)·오대산(五臺山, 1,563m) ·황병산(1,407m)·석병산(石屛山, 1,054m)·두타산(頭陀山, 1,351m)·가리왕산(1,561m)·태백산(太白山, 1,549m) 등의 높은 산들이 솟아 있다.동사면의 하천은 짧아 유역에 넓은 평야를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고성에 남강, 양양에 남대천, 연곡에 연곡천, 강릉에 남대천, 북평에 전천, 교하에 마읍천 등이 있어 하구 부근에 평야를 이루어 주요한 생활무대로 이용되고 있다.해안에는 해안단구가 발달하고, 해안선의 굴곡이 적어 양항만의 발달이 드물다. 강릉 이북에는 사빈 해안이 길게 연속되어 경포·향호·매호·청초호·화진포 등의 석호가 많이 발달되어 있다.태백산맥의 서사면 북부의 철원·평강 일대에는 옛 하곡(河谷)이 현무암에 매적된 넓은 용암대지를 이루고 있다. 이는 철원·평강 양군을 중심으로 이천·김화·회양의 5개 군에 걸쳐 있는 해발 200

500m, 평균 300m로서 신생대 홍적세(洪積世)에 현무암의 분출로 이루어진 것이다. 평강의 서남쪽에는 현무암 분출의 중심으로 보이는 넓은 분화구를 가진 오리산이라는 조그만 화산이 있다. 이 용암대지는 서울·원산을 잇는 이른바 추가령구조곡 안에 있는 분지 형태이다.추가령구조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좁고 길이가 약 180㎞나 되는 골짜기로서, 종래 단층에 의하여 형성된 지구대라고 불리던 곳이며, 지체 구조상 남한과 북한의 분계선이 되므로 지질상·지형상 대단히 중요시된다. 이의 성인에 대하여서는 단층에 의한 것보다 골짜기 좌우양측의 편마암 지층에 끼여 있는 화강암 지대가 남대천과 임진강의 침식작용에 의하여 형성된 침식곡이라는 설이 더욱 지배적이다.서사면 북쪽과 추가령곡 부근은 임진강 유역에 속하고, 중 앙은 북한강, 남쪽은 남한강 유역에 속하며, 각 하천의 유역에는 침식분지를 형성하여 주요한 생활무대로 되어 있다. 태백산지의 지질은 주로 화강 편마암과 화강암이며, 남한강 상류지역에는 석회암층이 발달되어 삼척·영월·정선·평창 등지에 특수한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하고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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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고도가 높기 때문에 같은 위도의 경기도에 비하여 약간 한랭하다. 영서·영동에 따라 각각 기후가 다르다.영서지방은 내륙부에 위치하므로 해류의 영향을 받지 못해 한서(寒暑)의 차가 심하며, 연평균 기온 9 11 , 1월 -5

-8

, 8월 24

26

, 강수량은 여름에 일반적으로 많은 편이고, 특히 임진강·한강 상류는 우리나라 3대 다우지(多雨地)의 하나로 연강수량 1,300㎜에 이르며, 그 밖의 지역도 1,000

1,100㎜ 정도이다.영동지방은 동해의 영향과 겨울에 불어오는 한랭한 북서계절풍을 태백산맥이 막아 푄(F

hn) 현상을 일으켜 같은 위도의 서해안에 비하여 3

C, 영서보다 5

C 정도 높다. 연평균 기온은 11

13

C, 1월 -0.1

3.5

C, 8월 24.1

25

C 이다. 강수량은 영서와 큰 차이가 없으나 북부의 온정리는 1,509㎜에 이르는데, 강릉 및 속초 등은 겨울에 눈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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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山

금강산은 예부터 중국·일본 등지에 알려진 명산으로서, 세계적인 명승지로 알려진 것은 19세기 말 이후이다. 이는 회양·통천·고성·인제의 4군에 걸쳐 사방 40㎢, 고도 1,500m 내외로서 그 규모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것이다.금강산은 신금강의 일부에 화강편마암이 노출되어 있는 외에는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절리(節理)가 발달되고 풍화침식이 쉽게 일어날 수가 있다. 남북으로 달리는 대단층선에 따라 지층이 단락(斷落)하여 1,000m 이상이나 되는 웅대한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다.또한 1만 2천여 개나 되는 연봉(連峰)과 수많은 암주·단애·암대 등 천태만상의 기암괴석, 비폭 심담(飛瀑深潭)·침활엽수림의 아름다운 임상(林相) 등의 자연미는 장관이며, 장안사·표훈사·유점사 등 대가람의 건조물의 인공미가 서로 잘 조화되어 승경을 이루고 있다.금강산은 지형적으로 남북방향의 세 줄기의 산맥이 달리고 있는데, 중앙 연봉에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峰, 1,638m)이 솟아 있다. 그리하여 금강산은 예부터 중앙 연봉을 경계로 하여, 서쪽을 내금강, 동해쪽을 외금강이라 하고, 외금강의 남쪽 계곡을 신금강, 동단 해안을 해금강이라 하여 넷으로 구분하였다. 1998년 11월부터 동해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금강산 관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에서는 3박4일과 1박2일 일정의 여행코스를 운영중이다.

설악산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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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嶽山國立公園

인제군·양양군·고성군·속초시에 걸친 면적 181㎢ 의 지역으로 1969년 12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설악산 자체의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동해의 해안 풍경까지 가깝게 있어 더욱 유명한 곳이다. 주봉인 대청봉(大靑峰, 1,780m)은 태백산맥 중에서 손꼽히는 명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지역은 인제군 쪽을 내설악, 속초시·고성군·양양군의 일부를 외설악이라 구분하고 있다.내외 설악에는 기암·심곡·폭포 등이 무수히 분포하는 자연경관 중심의 공원 지역이고, 특히 700여 종의 고산식물과 동물·곤충 등이 많아 학술 연구상 귀중한 곳으로 설악산 전체가 이미 천연보호 구역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풍경의 구성은 금강산과 흡사하며, 공원 안에는 신흥사를 비롯하여 오세암·백담사·계조암·봉정암 등의 사찰과 권금성·비룡폭포 및 단풍도 유명하다.

오대산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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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臺山國立公園

평창군·명주군에 걸친 면적 298.5㎢의 지역으로서 오대산의 울창한 산림을 비롯한 심산유곡과 이에 위치한 유명한 월정사·상원사 등에는 국보·보물 등의 지정문화재가 많이 있으며, 동해사면의 소금강(일명 청학동) 지역은 산자수려하여 이미 명승지 1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원도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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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옛날 예맥(濊貊)의 영토인데 위만(衛滿)시대에 한무제(漢武帝)가 4군(郡)을 설치할 때 대부분은 임둔군에 속하고 북쪽 일부는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던 것을 고구려 제6대 태조 때 고구려에 신속(臣屬)해 오다가, 제19대 광개토왕에게 완전히 정복되어 고구려의 판도에 들었다.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 진흥왕에 의하여 신라의 영토가 되고(551), 901년에 궁예(弓裔)의 후고구려에 속하였고, 918년 고려의 건국으로 고려의 영토로 되었다. 고려 성종 14년(995)에 지방구역을 10도로 구획할 때 함경도와 합하여 삭방도(朔方道)라 하였다가, 명종(明宗) 8년(1178) 삭방도를 폐하고 함경도와 강릉 일대 해안을 명주도(溟州道), 영서인 춘천·철원 등지를 동주도(東州道)라 개칭하였다.조선 태조(太祖) 4년(1395) 강원도로 하고, 효종(孝宗)·숙종 때 원양도(原讓島) 또는 강양도(江讓道)라 하였으나 얼마 뒤에 다시 강원도로 고쳤다. 조선시대 중엽에 강릉에서 역명사변(逆命事變)이 일어나서 10년 동안 원춘도(原春道)로 고친 일이 있다. 고종 24년(1887) 춘천에 유수군(留守郡 )을 두고 강원도와 그 관할을 달리하였으나 동 32년(1895)에 도를 폐하고 춘천 유수군을 춘천부로 개칭하여 강릉 및 춘천에 관찰부를 두어 관영(官營)하였는데, 원주·영월·평창·정선의 4군은 충주(忠州) 관찰부로 이속(移屬)되고, 다음 해(1896) 96부를 폐지. 전국을 13도로 분할할 때, 다시 강원도와 강릉도를 병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관찰도(觀察道)를 춘천에 두었으며, 이 때 원주 이하 4군이 다시 돌아왔다.1914년 평해군은 울진군에, 고성군은 간성군에, 금성군은 금화군에, 안협군은 이천군에 각각 병합했다가 1919년 간성군은 고성군으로 고쳤다. 8·15 후 38도선을 경계로 철원·이천·평강·통천·고성·회양·금화·화천·양구·인제·양양 등 11군이 38도선 이북이었는데, 잠정적 휴전 협정으로 인하여 완충선 이남(以南) 지구인 양양(1읍7면)·고성(4면)·인제(6면)·양구(5면)·화천(5면)·김화(1읍 7면)·철원(1읍 4면) 등 각 군이 1954년 10월 21일에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법의 공포로 동년 1월 17일 수복하였다. 1946년 6월 1일에는 춘천, 1955년에는 강릉·원주, 1963년에는 속초가 각각 시로 승격, 금화군이 철원군에 울진군이 경북에, 철원군 신서면이 경기도에, 경북 봉화군 덕구리 천평리가 영월군에 편입되었다.1973년에는 광산지구로 행정수요가 늘어난 영월군 상동면 고성군 거진면을 읍으로, 장성읍의 일부를 황지읍으로 승격시킴으로써 5개 읍이 신설되었다. 1979년에는 횡성·평창·갈말·화천·양구·인제·양양면이 읍으로 승격됐고, 1980년에는 북평산업기지 건설에 따라 북평읍과 묵호읍이 통합, 동해시로 발족됐다. 1983년에는 평창군 용평면 등 3개 읍이 신설되었다. 1985년에는 정부의 과대읍 정비 계획에 따라 정선군 사북읍을 고한읍과 사북읍으로 분할하였고, 1986년에 삼척군 삼척읍이 삼척시로 승격되었다. 2004년 1월 현재 강원도의 행정구역은 7시 11군 24읍 89면이 있다.

강원도의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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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口

1944년 도내의 인구는 185만 7,000명이었고, 1960년 센서스 결과 163만 6,767명으로 도별(道別) 구성비 6.5%, 인구밀도 97.9인/㎢ 인데, 대하여 1966년 센서스 결과 183만 1,185명으로 도별 구성비 6.3%, 인구밀도 109.6인/㎢, 증가율 12.9%로 나타났으며, 1970년 센서스 결과 186만 5,426명, 도별 구성비 5.9%, 인구밀도 111.1명/㎢, 증가율 1.9%이고, 1985년 센서스 결과는 172만 6,029명, 도별 구성비 4.3%, 인구밀도 102인/㎢, 증가율 0.3%로 나타났다. 1966년도에 인구 증가율이 12.0%로 급증한 것은 태백산지구 종합개발 사업의 적극적인 추진의 결과 사회증가가 많았기 때문이며, 그 후 점차 사회증가가 별로 없고 자연증가가 주로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된다.그러나 황지·장성·묵호 등과 같이 지역적으로 많은 인구가 증가되어 5만을 넘는 도시들도 있다. 2001년 12월 현재 강원도의 인구는 154만 3,665명이며 가구수는 53만 8,613가구로 가구당 가족수는 2.8명이다.

강원도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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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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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호수 7만 4,155호, 농가인구 21만 5,365명(2002)이고, 경지 면적은 11만 6,288㏊로 전체 면적의 10%이다. 연간 식량 생산량은 쌀 20만 4,296t, 맥류 1,034, 두류 1만 3,725, 서류 26만 5,269, 잡곡 3만 6,393t 등이다(2002). 이 외에 특용작물인 담배·약초·인삼 등 다양한 종류의 농작물도 생산된다.또한 대관령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홉(hop) 재배의 중심지이다. 1997년 15개 시군의 농지를 용도별로 농업에만 활용하는 경종농업지구 등 7개 지구를 확정했다.

축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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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총면적의 83%인 137만 5,523㏊가 임야이며, 이 가운데 13%인 18만 3,000㏊가 초지조성 가능지로서 1999년말 현재 1만 5,972㏊가 초지로 개발돼 9.687㏊가 관리되고 있으며, 사료로는 옥수수 재배면적이 7,000㏊로 전국의 78%를 차지하고 있다.도내 한우 농가는 1만 6,573가구이며 사육두 수는 10만 3,316마리이다.

수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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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5,512가구에 1만 9,804명이며 어선은 4,317척에 3만 318t이다.법정 수산단체는 수협 9개와 어촌계 68개가 있으며 64개의 항만·어항이 있다. 어민들이 1999년 어획 및 양식한 수산물은 총 38만 3,750t으로 2,718억 200만 원의 소득을 올렸으며 오징어 2만 9,515t, 꽁치 4,405t, 가자미 2,149t, 해조류 1,161t, 양식 1,178t 등이다.

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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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삼림면적은 137만 4,246㏊로 전국 643만 6,304㏊의 21%를 차지하는 임산자원의 보고이자 전국 제일의 삼림도이다.이중 국유림은 74만 5,046㏊, 공유림 9만 9,987㏊, 사유림 52만 9,213㏊이고 총 임목축적은 전국 3억 6,356만 55㎥의 30%에 이르는 1억 872만 6,307㎥이다.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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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이 불편하여 개발이 부진하였다가 8·15 후 산업철도와 산업도로의 부설로 개발이 본격화되었으며, 특히 국토개발 계획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개발되고 있다.지하자원의 매장량은 무연탄이 전국 매장량의 75%인 11억 1,838만t, 철이 82%인 1억 5,156만t, 석회석이 89%인 296억 175만t, 연·아연이 15%인 898만t, 중석이 88%인 5,621만t이다. 96년 한 해 동안 채굴된 광물은 석탄 431만 7074t, 철 22만 1,728t, 석회석이 5,980만 7,555t이다.전력시설 규모는 전국의 5.8%인 121만 8,050kW 등 7개 수력발전소가 49만 3,050kW 발전시설 용량을 갖추고 있으며 94년 중 생산한 전력은 125만 8,363MWH이고 영동·영월 등 2개 화력발전소가 335만 4,874MWH를 발전했다(1996).중석은 상동이 가장 유명하고, 흑연은 명주(강동·옥계), 삼척(황지) 등지에서 산출되며, 철광은 양양이 남한에서 가장 유명하고, 정선의 동남, 삼척의 삼화, 영월의 녹전, 홍천의 자은 등이 있다. 금은 홍천·정선·횡성·평강 등지에서, 석회석은 영월·삼척 일대에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삼척·북평·쌍룡에 시멘트 공업을 일으키고 있다.태백산지 남부는 태백산 공업지대에 속하여 풍부한 지하자원과 동력자원이 결합하여 삼척지구, 영서지구로 구분된다. 삼척-시멘트·유지, 북평-시멘트·제철·카바이트·석회질소비료, 영월-시멘트·석회, 강릉-제사·방직·제재 등 공업이 일어나고, 춘천·원주에서 제사·방직 공업이 성한데 특히 춘천·원주는 내륙 경공업 단지로 지정되었고, 북평이 중화학 공업기지로 지정되어 활발하게 가동되고 있다.

소양강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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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陽江dam

춘성군 신북면 천전리 협곡을 가로지르는 높이 123m, 길이 530m, 밑폭 550m, 부피 959만 1,200㎥, 홍수위 해발 198m, 상시만수위 193.5m, 이용 수심 48m, 저수지의 유역면적 2,703㎢, 저수용량 29억 톤, 유효저수량 21억 톤이고 발전시설 20만kW인 점토 심벽 사력댐으로서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다목적댐이다. 이로 인하여 홍수조절·농업용수 공급·식량증산·발전 등의 경제효과를 얻고 있다. 1967년 착공 1972년 10월 30일 준공되었으며 총공사비는 269억원이 들었다.

강원도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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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도로는 몇 개의 안부(鞍部)를 통하여 연결되고 있는데, 추가령:복계∼안변, 추지령:회양∼통천, 철령:회양∼안변, 진부령:인제∼간성, 한계령:인제∼양양, 대관령:원주∼강릉 등이다. 서울∼강릉간의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의 일부인 강릉∼속초 간이 개통됨에 따라 영동과 영서는 1일 생활권으로 되어 지역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한편, 국토개발 계획에는 속초∼포항, 원주∼춘천, 원주∼대구 구간이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다.철도는 간선인 경원선과 도의 남서부에 중앙선이 지나며, 서울∼춘천간에는 경춘선이 통한다. 영동과는 중앙선이 영주에서 분기(分岐)하여 영동선이 강릉까지 가며, 북평에서 삼척까지의 삼척선이 분기한다. 제천에서 분기한 태백선은 고한과 황지까지 연장되어 영동선과 백산에서 연결토록 되었고, 증산에서 분기한 정선선이 구절까지 연장되어 이 지역 지하자원 개발에 큰 몫을 하고 있다. 한편, 중앙선·태백선·영동선의 일부가 동해시까지 전철화 공사가 완공되었다.1999년 말 현재 자동차등록대수는 39만 2,331대로 차량 종류별로는 승용차 25만 8,658대, 화물자동차 9만 4,876대, 특수차 1,217대 등이며, 자가용 37만 830대, 영업용 1만 8,339대, 관용차량 3,162대이다.도로는 총 1만 3,399㎞이며 이 가운데 고속도로는 3개 노선 229.2㎞, 일반국도 14개 노선 1,821㎞, 지방도 37개 노선 1,334㎞, 시군도 184개 노선 4,155.2㎞이다. 시도는 7개 시에 1,919㎞이고 이 가운데 포장도로 4,919㎞, 비포장도로 2,592㎞, 미개통도로 134㎞다. 항공편은 강릉

서울간 노선이 개설, 매일 2회씩 운항한다.

강원도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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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

금강산은 한국 제1의 경승지(景勝地)로 유명하고, 설악산과 오대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개발되고 있는 외에 관동 8경을 비롯하여 춘천·철원·원주·강릉·영월·삼척 등지에 절경을 이루는 자연경관 및 국보·보물 등의 주요 지정 문화재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진부령과 대관령 부근에 스키장, 동해의 화진포·낙산·조산·경포·연곡·북평·후진 등에 유명한 해수욕장이 있다.

관동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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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東八景

관동지방은 경승지가 아닌 데가 없는데, 그 중 특히 이름난 곳 여덟 군데를 들어 관동팔경 또는 영동팔경이라고 한다. 즉 통천의 총석정,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고성의 삼일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 또는 흡곡의 시중대의 여덟 곳이 그것이다.

춘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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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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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象徵物

춘천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산까치이다.

춘천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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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중서부에 있으며, 북한강 지류 소양강의 본류와의 합류점에 가까운 남안에 위치한다. 동쪽은 인제군, 양구군, 서쪽은 경기 가평군, 북쪽은 화천군 서쪽은 경기 가평군과 접한다. 시의 동·서·남은 넓은 춘천분지가 전개되어 있다. 춘천은 북한강의 침식분지 중심에 위치하며, 시가지는 호반 가운데 발달하여 수향도시를 이루며, 일명 호반의 도시라 별칭된다. 시의 중앙부에는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鳳儀山)이 솟아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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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에 있는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고 강수량은 비교적 많다. 연평균 기온 10.3

, 1월 평균 -5.2

, 8월 평균 24.4

, 최고 기온 39.5

, 최저 기온 -31

, 연평균 강수량 1,250㎜이다.

춘천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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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맥국(貊國)의 수도로서 선덕왕 6년(637) 우수주(牛首州)로 부르고 군주(君主)를 두었다. 문무왕 13년(673) 수약주(首若州)로 개칭,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후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태조 23년(940) 춘주(春州)라 칭하고 선종 14년(995)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에 예속, 신종 6년(1203) 도호부로 승격,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격하되었다. 태종 13년(1413) 춘천으로 고쳐 군이 되고 1415년 도호부, 고종 24년(1887) 춘천 유수군(留守郡)을 두고, 이궁(離宮)을 신축하여 위급할 때의 피난지로 지정했다. 1895년 관찰부가 되고, 1896년 강원도 관찰사를 두었다. 1910년 도청 소재지로 되고, 1917년 춘천군의 부내면을 춘천면으로 변경, 1931년 읍으로 승격, 1939년 주변 6개 동을 병합, 1947년 부로 승격했으며, 1949년 춘천시로 개칭, 1995년 춘천군과 춘천시가 통합, 현재 1읍, 9면, 15개 동을 관할하고 있다.

춘천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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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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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면적 9,723㏊ 중 논 4,698㏊, 밭 5,025㏊이며, 농가 가구 7,791, 농가 인구 2만 9,716이다. 도시인을 상대로 하는 고등채소 및 과일류 등의 근교 원예농업이 활발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저류·채소 등이고, 양봉·양잠·양계도 성하다.

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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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암·소양강·화천(華川) 등의 수력발전소에서 약 40만kW의 전력을 공급받는데다가 공업용수와 노동력이 풍부하여 좋은 공업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1969년부터 춘천경공업단지가 조성되었으며, 73년 5월 공업장려지구로 지정되었다. 후평공단은 69년 조성된 공업단지로 전자·식품·섬유 등의 약 3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1985년에 창촌(倉村), 1989년에 퇴계·당림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식품·섬유·조립금속기계장비 등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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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형석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사북면에 신포형석광이 가행되고 있을 뿐이며, 연간 8천 톤 내외를 채굴하여 주로 일본에 수출한다. 수력자원으로서는 시설용량 4만 5천kW의 의암발전소와 5만 7,600kW의 춘천발전소, 20만kW의 소양강 발전소가 준공되어 우리나라 주요 전력공급지로서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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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장·서부시장 등 6개 시장이 있는데 연간 거래액은 2조여 원에 달하며 그 중 중앙시장이 역사도 오래거니와 규모나 거래액에 있어서도 제일 크다. 시내에 생산업체가 없기 때문에 생필품은 대부분 서울에서 반입한다. 그 밖에 아케이드·백화점이 여러 곳 있어 각종 의류와 귀금속·일용 잡화가 매매되고 있다. 또 수산물 공판장이 있어 신선한 수산물이 싼 값에 신속히 공급되고 있다. 공설시장 2, 사설시장 2개 소가 있다.

춘천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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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경춘선이 서울과 춘천간을 잇는 철도가 간선 도로의 초점이 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또 89년에는 경춘고속화도로가 개통되었고, 춘천과 대구(大邱)간 중앙고속국도를 완공하는 등 도시기반 시설을 확충시켜 나가고 있다. 시가는 널찍하게 잡은 방사상의 포장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다.

춘천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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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

춘천호·소양호·의암호로 인해 호반 도시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연간 100만에 달하여 관광 수입도 많다. 소양강댐의 주운을 중심으로 내설악의 관광루트가 개발되어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고 있다. 관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항공편을 비롯한 각종 교통이 편하다. 호수 외에 공지천 유원지·고산 소금강·추곡약수·등선폭포·구곡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춘천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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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면적 1,116.00㎢ 이며 인구 25만 3,532명(2001.12)이다. 시가는 봉의산(鳳儀山, 301m)을 등지고 북한강과 소양강의 곡구시장 취락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대도시를 이루었다. 한국전쟁 때 막심한 피해를 입어 오늘날의 춘천은 그 후 복구 재건한 것이다. 신도시 계획에 의하여 노폭이 넓은 방사상 도로가 정연하게 사방에 통하고 근대식 건물이 즐비하여 신흥도시와 같은 경관을 나타내고 있다.경춘선의 종점으로 산록선(山麓線) 공로와 서울

속초공로와의 교차점이 되는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고 부근에 여러 발전소가 건설됨에 따라 발전지대의 중심지로 되고 또한 군사상 요지가 되어 8·15 후 급속히 발전하였다.해마다 5월에는 소양제가 열린다. 호반의 도시라는 특성을 살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데, 봉의산제, 민속놀이, 수상불꽃놀이, 보트 경주대회, 국악경영 등이 진행된다. 봉의산제는 고려 때 몽골군의 침입을 막으려고 봉의산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선현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이다.그 밖에 춘천호반에는 중도선사유적지를 비롯해 남이섬, 청평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춘천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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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dam

신북면 서원리와 서북면 갈월리 사이의 북한강 협곡을 가로질러 흙과 콘크리트로 구축했다. 댐 높이 40m, 길이 456m, 만수위 해발 103m, 만수 면적14.3㎢, 총저수량 1억 5천만㎥, 전력 생산 1억 4,500kWh이다. 이 댐은 또한 하류의 의암·청평수력발전소의 발전량과 용수를 조절한다. 공사기간 1961년 9월∼1965년 2월까지이며, 공사비는 내자 21억 9,400만 원, 외자 367만 달러가 들었다.

춘천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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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七層石塔

보물 제77호. 춘천시 소양로 2가 162-2. 이 탑이 속해있던 사찰이나 탑 건립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 인조임금 때(1623~1649) 충원현감(忠原縣監)을 지냈던 유정립(柳鼎立)이 춘천으로 낙향하여 이 석탑 근처에 집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물건(佛器)를 발견하였다는 기록으로 일명 ‘충원사칠층석탑’이라고도 불리운다.다층탑으로 조립된 석재의 수가 적고, 상대갑석과 일층 옥신석 사이에 위로 향한 연꽃잎(伏蓮)을 새긴 또 하나의 부재(別石)를 넣어 만든 특징적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탑으로 보인다.높이 6.38m의 화강암 석탑으로 탑의 부재중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한 부재는 모두 남아 있으나 화재로 인해 옥개석(지붕돌)이 훼손되어 있다.

조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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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陽樓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 춘천시 우두동 산5(우두산). 조선 인조 24년(1646) 춘천부사 엄황(嚴愰)이 건립했던 문소각(聞韶閣)의 문루(門樓)였다. 그 후 문소각은 1916년 화재로 불타버렸으나 조양루는 순종 2년(1908)에 지금의 장소인 우두산으로 이전했기에 화재를 피할 수 있었다.문루는 성문 또는 지방관청의 외부 울타리에 출입자를 통제하고자 세운 건물이다. 팔작지붕 익공계 양식을 가진 겹처마 중층건물(門樓)로, 아래 칸은 출입용이며 위층은 감시와 통제의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다.

춘천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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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鄕校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8호. 춘천시 교동 27-1. 춘천향교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후면 제사공간에 대성전과 동·서무(東·西撫)가 있고 전면 교육공간에는 강학 장소인 명륜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서재(東·西齋)와 장수루(藏修樓)가 있다.창건연대는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집(於于集)'에 의하면 조선 중종 15년(1520)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본다.

춘천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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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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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1915)

대 유학자·한말 의병장.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동을 시작하여 중부지방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1908년 해외(연해주)로 망명한 이후에도 항일투쟁을 계속하여 13도 의군 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로 추대된 한말 항일의병 운동의 대표자이다.현실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입각한 구국충절로 의병운동을 전개하다 1915년 1월 29일 74세를 일기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중국 땅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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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1565) 조선 명종 때의 승려. 호는 허응당(虛應堂). 1530년 금강산에 들어가 참선을 하고 경학을 연구하였다. 1548년에 문정 왕후의 신임을 받아 봉은사 주지가 되고 1550년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켰다. 윤원형·상 진 등과 힘을 모아 300여 개의 사찰을 짓게 하고 2년 동안 승과를 설치하게 하여 4000여 명의 승려를 뽑았다.1559년 도대선사가 되었으나 1565년 문정 왕후가 죽자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제주 목사 변협에게 참형당했다.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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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937)

소설가. 춘천에서 태어나 휘문 고보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 학교 문과를 중퇴했다. 1933년 이효석·현진건 등과 함께 순수 문예 운동을 내세운 9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나기', '중외 일보' 신춘 문예에 '노다지'가 당선, 문단에 등장했다. 그는 농촌과 도시의 가난한 서민층의 생활을 헤아려 토속적인 인간상을 잘 그려냈다. 작품으로 '금따는 콩밭', '봄봄', '산골 나그네', '동백꽃', '따라지' 등이 있다.

원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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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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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州-象徵物

원주시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꿩이다.

원주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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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도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시의 동남 경계에 차령산맥이 뻗어 있고, 그 중에 치악산(雉岳山, 1,228m)이 높이 솟아 있다. 지형은 이 곳에서 점차 서쪽으로 낮아져 섬강(蟾江:한강의 지류)의 지류 원주천 유역에 이르러서는 평탄지를 이루고 있다. 연안에는 사력층이 약간 발달되어 있으며 전역이 화강암 지대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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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에 위치한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 9.8

, 1월 평균 -6.6

, 8월 평균 25.5

, 최고 기온 38.5

(1939. 7. 21), 최저 기온 29.9

(1923. 1. 17), 연평균 강수량은 1,250㎜이다.

원주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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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이고, 신라 문무왕 때 북원(北原:小京)이라 하다가 고려 태조 23년(940) 원주로 개명하였다. 그 후 주지사(州知事), 현(縣), 정원도호부, 익흥도호부, 원주목, 성안부 등으로 바뀌어 오다가 1894년 군으로 되어서는 영월·평창·정선과 같이 충주부에 이속되었다. 1896년 다시 강원도로 돌아오고 1937년에는 원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55년 구역을 확장하고 시로 승격하였다. 1983년 원주시 관설동 일부가 원성군으로, 원성군 소초면 장양리 일부가 원주시로 각각 편입되었다. 2004년 1읍 8면 16개 동을 관할하고 있다.

원주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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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공업이나 농업보다는 3차 산업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이는 원주가 군사 도시로서 순 소비도시임을 나타내고 있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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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강 유역의 침식분지인 원주평야는 강원도의 주요 산미지대를 이루고 있어 이 평야에 위치한 원주는 논농사가 발달하여 왔다. 그리하여 쌀이 주산물이다. 경지 면적은 논의 비율이 높다. 주요 농산물은 쌀·채소·저류·보리·콩·옥수수·누에고치·한우·담배·꿀·약초 등이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연변에 밤나무·과수·잠업·낙농 등의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농지면적은 공장·주택·공원용지로 전용되어 감소 추세이다.

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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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원주 경공업단지를 조성하여 섬유·화학·식품·기계·펄프·의료기구·농기구를 비롯하여 여러 제조업 공장이 가동하게 됨으로써 소비 편중에서 벗어나 경공업 도시로 변모되고 있다.

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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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장·역전시장·남부시장 등 5개 시장이 있어 생필품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상품을 서울에서 반입하므로 서울보다도 가격이 20∼30%나 비쌌으나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그 가격차는 훨씬 좁혀졌다. 가발·목가공품·갈포·견수방·운동구 등은 주요 수출품이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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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산물로는 치악산 복숭아, 원주배, 원주토마토, 원주버섯, 환경농산물, 원주화훼 등이 유명하고 전통 옻칠기 공예가 발달했다.

원주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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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원주가 발전한 지리적 조건은 교통의 요충에 위치한 까닭이다. 강릉·홍천·춘천·충주·안동·대구·영월·평창·정선 등에 통하는 도로망의 초점이 되어 있으며 1942년 중앙선의 개통이 더욱 발달을 촉진하였다. 이들 도로망은 중앙선을 배양하고 있어 남부 강원도의 문호로 물자의 집산이 성하여 시황은 지극히 좋은 편이다. 도로는 서남부의 중심을 이루는 원주를 중심하여 강릉·안동가도가 분기되고, 여주·충주·평창·횡성 등에 이르는 도로가 잘 개수되어 강원도의 서남쪽 문호를 이루어 매우 편리하다. 특히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강릉까지 개통되어 서울과는 많은 시간단축을 가져오게 되어 주민들의 경제 생활에도 커다란 변모를 가져오게 되었다.

원주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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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면적은 868.00㎢이며, 인구는 27만 7,987(2001.12)이다. 원주천 연안 산록선 공로와 서울·강릉간의 동서 횡단 공로의 교차점에 발달한 도시이다. 이와 같이 원주는 교통상 요충을 차지하고 있어 신라시대에는 소경(小京)을 두었고, 고려시대에는 도호부, 이조시대에는 관찰사·병마절도사의 감영 소재지로서 남한강 중류 유역의 중심지로 발달한 도시이다. 한국전쟁 때 군사도시가 된 이래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1946년에 인구 2만의 소읍이었다가 한국전쟁 때 태반이 파괴되었다. 그 뒤 곧 군사도시로 됨에 따라 급속히 복구되어 1966년 10만 4천, 1975년 12만 1천, 1995년 23만 8,027명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대도시가 되었다.상공업은 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시내에는 시청·원성군청을 비롯하여 군인극장·언론기관·지방법원, 그리고 초등학교 43, 중학교 19, 고등학교 13개 교가 있고 연세대학 원주캠퍼스·가톨릭상지대학·상지영서대학 등이 있다.치악산(雉岳山)은 산수가 아름다워 시민이 많이 찾으며 산중에는 신라 문무왕 6년에 의상조사가 건립한 구룡사가 있다. 이 절의 대웅전은 못을 쓰지 않고 지은 정묘한 건물이다. 일대에는 폭포와 고찰이 있으며 봉명루·빙허루·청허루·쌍수대 등이 있다.

치악산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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雉嶽山國立公園

면적 약 182.09㎢. 태백산맥의 허리에서 남서쪽으로 내리닫는 차령산맥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주봉인 해발 1,288m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쪽은 횡성군, 서쪽은 원주시와 접하고 있다. 남북으로 뻗어 내린 치악산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한 남대봉(1,181m)과 북쪽의 매화산(1,085m) 등 1천여 미터의 고봉들이 연이어 솟구쳐 있으며 사이사이로 가파른 계곡들이 자리잡고 있다.주능선 서쪽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특히 구룡사에서 비로봉을 향해 뻗은 북쪽의 능선과 계곡은 가파르기로 유명하다.치악산 일대의 수림은 대체로 활엽수와 침엽수의 혼효림으로 552종의 수목이 울창하다.

흥법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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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法寺址三層石塔

보물 제464호.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소재.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이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밑 기단에는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이 조각되었다. 기단에 비하여 탑신이 빈약하게 작아졌으며, 옥개석의 낙수면 경사가 급하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으며 탑 높이는 3.69m이다.

구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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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龍寺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위치한 치악산 주봉인 비로봉에서 학곡리 쪽으로 6km 지점에 있다. 신라 문무왕 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며 주위에 구룡폭포를 비롯해서 구암·호암·용연 등의 명승지가 있다.구룡사의 사세가 기울어졌을 무렵 거북바위가 절의 길목을 막아 부득이 주지가 거북 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그 혈을 끊었으나 이후 그 거북 바위를 살린다는 뜻에서 아홉구(九)자를 거북 구(龜)자로 고쳐 구룡사로 불렀다고 한다.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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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院寺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에 위치한 남대산(1181m) 기슭의 상원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절이다.절은 100여 평 남짓한 석반 위에 세워졌고 바위틈에서 솟는 샘물의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법당 앞 암석들에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희귀한 커다란 계수나무 세 그루가 서 있어 이 절의 풍치와 위엄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원주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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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지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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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4~1067)

자는 거룡, 성은 원. 1004년에 승과에 급제, 1056년 왕사, 1058년 봉은사에서 국사에 올랐다.

원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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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

본관은 원주, 호는 운곡.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의의 인물. 조선 태종의 스승으로 충신불사이군을 이유로 석경촌에 은거, '운곡집', '회고가' 등을 지었다.

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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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1646)

호는 고송. 부론면 손곡리에서 태어나 1618년 무과에 급제, 1643년 명군의 총병으로 조선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간신 김자겸의 모함을 받아 순직 후 충민공이란 시호를 얻었다.

조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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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177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자는 명서, 호는 영호. 지정면 간현리에서 태어나 1752년 이조판서를 지냈다. 문장이 뛰어나 '해차록' 등 저서를 남겼으며 경제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고구마 종자를 국내에 보급하였고, 저서로는 '해사일기'가 있다.

강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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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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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象徵物

강릉시를 상징하는 꽃은 백일홍, 나무는 소나무, 새는 까치, 동물은 호랑이이다.

강릉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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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영동해안 명주군의 중앙에 위치하며 배후에 태백산맥의 오대산(五臺山, 1563m)·황병산(黃柄山, 1,407m)·대관령(大關嶺, 832m) 등을 지고 전면에 동해를 바라보는 남대천 좌안에 발달하였다. 부근 일대는 남대천이 퇴적한 동해안 유수의 대평야이며 산자수명한 곳으로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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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류의 영향을 받아 해양성을 띠고 겨울에 북서계절풍이 태백산맥에 가로막혀 푄(F

hn) 현상으로 동위도의 서해안보다 훨씬 온난하다.강수량은 다른 지방에 비하여 여름에 적고 봄·가을·겨울에 많은 것이 특징이며 영서지방의 2·3배에 달한다. 특히 1956년 적설량은 120㎝ 이상을 기록하여 인명피해를 내고 교통 통신이 일시 마비된 일도 있다. 연평균 기온 11

, 1월 평균 -1.0

, 8월 평균 24.1

, 최고 기온 39.4

, 최저 기온 -20.2

, 연평균 강수량 1,350㎜이다.

강릉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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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예국(濊國)의 도성지로서 상고시대에 창해군(滄海郡), 한사군 때에는 임둔(臨屯)의 땅이었다. 고려시대의 성종 14년(995) 삭방도(朔方道)의 행정 중심지로 함남북과 영동 일대와 영서의 춘천 이북 등지를 관할하였다. 1178년 이를 폐하고 함남과 명주군 일대를 임해(臨海) 명주라 개칭하고 원종 4년(1263) 강릉도라 고쳤으며, 그 후 다시 함남 쌍성(雙城)지방과 합하여 강릉삭방도라 하였다. 공양왕 때 함경도를 분리하고 강릉도라 다시 칭하였으나 항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 되어 왔다. 조선 초에는 원양도(原襄道)·원춘도(原春道)라 칭하다가 세종 5년(1423) 강원도라 하고 춘천부와 강릉부로 나누어졌다. 이듬해 1부가 폐지되어 행정 중심을 춘천에 옮기고 강릉군만 관할하게 되었다.1931년 읍으로 승격, 1955년 시로 되었고 강릉군은 명주군(溟州郡)으로 돌아갔다. 1995년 1월 명주군을 편입, 통합시로 승격했다. 2004년 현재 1읍 13개 동 7개 면을 관할하고 있다.

강릉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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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평야지대가 비교적 넓고 온난하며 강수량이 많아 농업이 활발하다. 그러므로 강릉을 차지하여 농업 도시의 색채를 띠고 있으며, 공업은 미약하고 3차산업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농림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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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충적평야가 있고 기후가 온난한 까닭에 쌀농사의 비율이 높으며, 그 외에 각종 농산물이 나며, 소·꿀 등의 집산이 성하다. 배후에 태백산맥의 거악(巨岳)을 지고 있어 남한의 임업 중심이 되어 있다. 임야 면적은 8만 4,165㏊이며, 입목지는 99%이다. 임산물로 밤·대추·버섯·산나물이 나며, 제재업과 축산업도 성하다.

수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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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항은 천연적인 양항으로 속초항과 더불어 동해 북부지방의 어업중심지를 이룬다. 근해에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어족이 풍부하다. 주요 어획물은 오징어·명태·꽁치 등이고, 그 밖에 해조류 미역 채취량이 많다.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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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 일대에 무연탄과 흑연·금의 매장이 풍부하고 공업에 있어서 대규모 공장으로는 제사공장이 있을 뿐 그밖에 중소 공장이 약간 있다. 1973년의 영동 화력 발전소 건설로 점차 공업도시화되고 있다. 대전동·사천면 방동리 일원 51만 4,000평의 부지에 2005년까지 과학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으로 있으며, 이곳에 연구단지,산업단지, 유통 및 건강체험단지, 지원시설단지, 공원단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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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지방의 상업 중심지로서 공산품·생필품 등이 대체로 이 곳을 경유, 각 소비지에 공급되는데 대부분이 서울에서 반입된다. 1975년 서울·강릉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상품 교류가 크게 변모되었으며 공설시장이 3개 있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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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 돌각·돌미역·젓갈류·오징어·황태·한과셋트·과줄·찹쌀흰강정 등이 유명하다.

강릉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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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중앙선의 영주에서 분기된 영동선(199㎞)이 시의 경포에 달하여 남부 영동 지역과 영서, 서해안의 경인 또는 호남지방에 연계된다. 부산·원산간, 강릉·서울간의 간선도로가 통하고 있다. 영동 고속도로가 완공되어 더욱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철도는 영동선이 강릉시까지 연결되어 있어 지방도로가 왕산면을 지나 임계·황지 등지로 연결되며, 간선 교통망 사이에 군도가 통하여 강릉시를 중심으로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주문진읍에 상설시장이 있고, 옥계면 현내리에 정기시장이 열려 지역 산물이 집산된다.

강릉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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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

명승지인 소금강과 대관령, 해수욕장으로 주문진·연곡·사천·안인·등명·옥계 해수욕장 등이 있어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든다. 부근에는 관동 8경의 하나인 경포대를 비롯하여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이 거처하던 오죽헌·객사문(국보 제51호)·당간지주·금란정·경호정·해수욕장 등 많은 관광자원이 있어 전국적인 관광휴양지로 되어 관광객이 끊임 없다.

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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鏡浦臺

강원도 강릉시(江陵市) 저동(苧洞)에 있는 누대(樓臺).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이며, 1982년 경포대와 주변의 누각·정자·해수욕장 등을 포함하여 경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제6호이다.

강릉 객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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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客舍門

국보 제51호. 강릉시 용강동 58 -1 소재. 고려 태조 19년(936) 본부객사로 총 83칸의 건물을 창건하고 임영관(臨瀛館)이라 하였으며 공민왕 15년(1366) 왕이 낙산사로 행차 도중 현액을 친필로 썼다고 전한다. 그 후 수차 중수되어 오다가 1929년 일제 때 강릉공립보통학교(후에 강릉국민학교가 됨) 시설로 이용되었고 동교가 헐린 뒤에는 공지로 남게 되었다. 1967년 12월 여기에 강릉경찰서 청사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 문만이 남게 되었다.문은 간결하고 소박한 주심포계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맞배지붕의 삼문이다. 기둥의 배흘림은 현존해 있는 목조건축 중 가장 크고 주두(柱頭)와 소로(小累)의 굽은 곡을 이루고 굽받침을 두었으며 단장혀(短長舌)로 외목도리(外目道理)를 받게 하였다. 또한 쇠서, 첨차, 화반, 보 등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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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竹軒

보물 제165호. 강릉시 경포동 177-4. 오죽헌(烏竹軒)은 신사임당(申師任堂)과 대선각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난 곳이다.오죽헌은 강릉 유현(儒賢)인 최치운(崔致雲, 1390~1440)이 창건했고, 이를 아들 응현이 사위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申命和:신사임당 부친)에게 신명화는 그의 사위 권화(權和)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文成祠)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추었다.

강릉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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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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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1493)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 호는 매월당(梅月堂).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으로 이름났다. 1455년에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 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책을 태우고, 승려가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1463년에 책을 사러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 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 일을 맡았으며, 그 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독서를 계속하며,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다. 47세에 속세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절개를 지키면서 불교·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시호는 청간(淸簡)이다.저서로 '탕유관서록 후지', '탕유호남록 후지', '산거백영', '산거백영 후지', '독산원기' 등이 있으며 그의 저술을 모은 '매월당집'이 있다.

김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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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68)

시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참의원, 강릉 사천 출신. 호는 초허이다. 일본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1923년 '개벽' 10월호에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 「당신이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조선문단' 등에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조국에 대한 향수와 민족의 애환을 표현하는 특유의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938년에는 「구름」, 「바닷가에서」, 「나의 뜰」, 「동해」, 「석죽화」 등 47편의 시를 모아 시집을 출간하여 자연과 전원을 예찬하고 식민지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였다.해방 후에는 이화여대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정치·사회적 풍자시를 서술하였는데, 1947년 '38선', 1948년 '하늘', 1955년 '진주만', 1964년 '내마음은' 등의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수필집으로는 1955년 '세대의 삽화', 정치평론집으로는 '적과 동지'가 있으며, 1965년에는 '김동명 문집' 3권이 발표되었다. 사천면에 추모시비가 세워져 있다.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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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1618)

조선 시대의 문인. 호는 교산(較山). 일찍이 유교와 불교에 통달했고, 시문·소설 등을 써서 문재를 떨쳤다. 1594년 문과에 급제하고 외교 사절로 명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광해군의 폭정 밑에서 대북당에 가담하여 반란을 계획하고 동지를 모으다가 잡혀서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홍길동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로 문학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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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1584)

조선 시대의 학자, 문신. 호는 율곡(栗谷). 찰방 이원수와 사임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주자학을 대성한 대학자일 뿐만 아니라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 힘을 다한 위대한 정치가로, ‘동방의 성인’이라 일컬어졌다. 13세 때 초시에 합격한 후 9차례나 과거에 장원하여 ‘9도 장원공’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많은 벼슬을 했는데, 특히 왕에게 옳은 말을 하여 왕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대사간직을 아홉 차례나 하였다.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10만 대군의 양성을 주장했으나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또한 향토 자치·지방 교육에 대한 규례를 만들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저서로 '격몽요결', '성학집요', '동호문답' 등이 있다.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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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551)

조선의 여류 문인·서화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뜻이 높았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 또한 바느질·자수는 물론 시·그림·글씨 등에 뛰어난 재주를 나타냈다. 자녀 교육에 힘써, 인자한 어머니·어진 아내의 거울이 되었다. 특히 그림은 안견의 영향을 받은데다 여성다운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가미되어, 우리 나라 최고의 여류 화가라 일컬어진다. 작품으로 '자리도', '산수도', '초충도' 등이 있다.

강릉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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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면적 1,0409.00㎢이다. 강릉은 서울과 대략 동(同)위도 상에 위치한 영동 제1의 대도시이다. 인구는 2001년 현재 23만 714명이다. 시내에는 시청·명주군청을 비롯하여 측후소·영림서·초등학교 41, 중학교 11, 고등학교 11, 전문대학 2, 기술학교 1개교, 강릉대학, 관동대학이 있으며 비행장이 있다.

주문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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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文津邑

강원 강릉시에 있는 읍. 면적 60.55㎢. 인구 2만 5,643(2001). 5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강릉군 연곡면에 속해 있었는데, 1927년에 주문진항(港)의 이름을 따서 주문진면이 되었고, 37년에 주문진읍으로 승격되었다. 95년 1월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릉시에 속하게 되었다.

속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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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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束草-象徵物

속초시를 상징하는 꽃은 국화,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속초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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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동해안에서 남한 최북부의 항구도시이다. 시의 서쪽 설악산 부근의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한 지맥이 동쪽으로 달리다가 다시 갈라져 청초호란 라군(lagoon)을 안고 동해안에 면한다. 그 사이에 있는 속초호(면적 1.1㎢, 수심 3.1

4.7m)는 완전히 폐쇄되지 않고 일부분은 외해로 통하여 주머니 모양을 한 일종의 만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청초호 내에는 500t급의 선박이 자유로 출입할 수 있고 외해의 풍랑이 미치지 않아 좋은 항만의 구실을 하며, 특히 풍랑 때 어선의 대피 정박지로 이용된다. 호구에 접한 해안도 정박이 편리한 천연의 양항을 이루고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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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 임한 까닭에 해양성을 많이 띠고 있으며 겨울에는 태백산맥이 북서 계절풍을 막아 풍하(風下)에 있게 되므로 같은 위도의 서해안에 비하면 5

나 높다. 여름에는 간혹 서풍이 태백산맥을 불어 넘어오면, 푄(F

hn) 현상으로 몹시 기온이 상승하여 39.2

(1944. 1. 14)를 기록한 때도 있다. 강수량은 타지역에 비하여 여름에 적고, 가을·겨울에 많은 것이 특징이다. 연평균 기온 11.2

, 1월 평균 -2.9

, 8월 평균 25.3

,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속초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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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본래 동예(東濊)의 땅으로 고구려 때에는 수성군(隨城郡), 신라 때에는 수성군(守城郡)에 속하였고, 고려 이래 양양군에 속하여 오다가 1895년 간성군(杆城郡)에 속했으나 1921년 다시 양양군에 이관되었다. 1942년에는 읍으로 승격되고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북위 30

이북이어서 북한 치하에 있었다. 한국전쟁 때에 수복되어 1963년 시로 승격되었다. 1973년 고성군 토성면 사진·장천 2개 리가 편입되었으며, 2004년 현재 13개 동을 관할한다.

속초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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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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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면적은 총면적의 10.4%인 10.9㎢로 논과 밭의 비율은 60:40이다. 소아평야를 중심으로 쌀농사가 성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저류·맥류 등이다.

수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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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는 한·난 양 해류가 교류하여, 세계적인 어장으로 명태·꽁치·대구·오징어·고등어·청어 등 특히 오징어의 어획이 많고 동해안에서 주문진과 1, 2위를 다투는 어항이다. 어획고를 어항별로 볼 때 부산 다음가는 상위권에 있다. 대포동 앞바다에서는 미역 양식이 성하다. 어선 수와 수산업 인구는 감소 추세이나 어선은 대형화되고 있다.

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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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에 있어서는 선박·기계·주물 등을 제작하는 기계 제작소와 동양 제일을 자랑하는 유한양행의 수산부 공장이 있다. 여기서는 냉동·건조·유지비료(油脂肥料) 등의 공업이 성하고 동림수산(東林水産)의 통조림 공장을 비롯하여 몇 개의 유지·수산공장 등이 있다.

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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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한 관광·수산·상업 도시로서 중앙시장을 비롯하여 중앙·청호·제일 등 4개 시장이 있다. 모든 생필품은 서울지방에서 반입해 오므로 가격차가 10∼15%나 된다.

속초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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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영동선이 강릉에서 속초까지 연장되고 춘천·속초간 횡단철도가 부설될 예정이다. 도로 교통은 비교적 편리하며 간성·강릉 등지와 연락이 많고, 영서지방과는 진부령과 한계령을 넘어 인제·춘천·서울 방면으로 소통된다.해상교통은 동해안 각 항구와 정기항로가 열려 있으며 대포에는 비행장이 있어 서울과는 정기적인 항공로가 열려 있다.

속초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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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면적 105.00㎢이다. 처음엔 근해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민들이 청초호 안에 정착하여 한 어촌을 이루었는데 1905년 동해 연안 항로가 개설된 당시 선박의 기항지로 이용되었다. 또 양양철산의 철광석 반출항으로 되어 1937년경부터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때 북한 피난민이 대거 남하하여 정착하게 됨으로써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어항·철광석 반출항, 설악산의 등산구, 또 서쪽 진부령을 넘어 춘천·서울 방면과 연락하는 교통요지로 되었다.인구는 1955년 2만 8,000, 1966년 6만 3,000, 1975년 7만 1,500, 2001년 9만 447명으로 증가하였다. 인구는 해변에 조밀하고 상업은 중앙시장을 비롯하여 대로 연변에 상가를 형성하며 공장은 청초호 주변에 모여 있다. 해류를 따라 많은 어군이 회유하여 연안에서 15

25마일 일대는 특히 좋은 어장을 이루어 오징어(7

10월), 명태(10

3월), 꽁치(4

6월) 등 어업이 성하다. 초등학교 10개 교, 중학교 4개 교, 고등학교 3개 교가 있으며 동우 전문대학과 문화원·시립 도서관·한국방송공사 속초 방송국이 있다.

신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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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興寺

문화재자료 제7호. 설악동 170번지. 신흥사는 652년(진덕여왕 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향성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향성사란 ‘중향성불토국’이란 뜻으로 지금의 자리에서 동방 약 1km 지점에 세웠으나 49년 후인 701년(효소왕 1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후 의상조사가 지금의 신흥사 북방 1.5km 지점인 현 내원암 자리에 선정사를 중건하여 불법을 전하다가 인조 20년(1642)에 화재로 소실되었다.인조 22년(1644)에 고승 영서, 연옥, 혜원 세 스님이 현 위치에 중건하고 신흥사라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 신흥사는 1912년부터 건봉사의 말사였으나, 건봉사가 38선 이북지역으로써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자 1971년 신흥사가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되었다.보제루(유형문화재 제104호), 극락보전(유형문화재 제14호), 1799년부터 1827년 사이의 역대 신흥사 고승들의 부도가 모여 있는 부도군(문화재자료 제115호) 등이 있다.

동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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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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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海-象徵物

동해시를 상징하는 꽃은 매화,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갈매기이다.

동해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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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서쪽에는 태백산맥의 분수령인 청옥산(1,430m)·두타산(1,352m)·상월산(964m) 등의 연봉들이 솟아 지세가 험준하고 높으며, 여기서 동해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해안지역의 너비 약 2㎞의 해안저지에는 5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남북으로 전천과 북부의 마상천이 짧은 급류를 이룬다. 평야는 전천 하류의 북평 분지에 비교적 넓게 발달되어 있는 외에는 대부분 산지가 해안까지 미쳐 해식애를 이룬다. 해안선은 전반적으로 단조로우나, 묵호 부근의 만입부는 천연의 양항을 이룬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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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으로 해서 겨울철의 북서계절풍이 푄(F

hn) 현상을 일으키고, 또 동쪽으로 동해에 면하므로 기후는 다분히 해양성을 띠어, 같은 위도의 서해안에 비해 연평균 1.5

, 1월 평균 3.7

정도 기온이 높다. 강수량도 많은 편이며, 특히 강설량이 많아 울릉도 다음의 다설지역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은 12.6

이며, 1월 평균 기온은 -1.5

이고, 8월 평균 기온은 25.1

이며, 연강수량은 1,300㎜이다.

동해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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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기원전에는 위만조선에 속해 있다가 630년에는 신라의 영토에 완전히 속하게 되었다. 1018년에는 삼척부의 삼척현과 강릉부의 우계현으로 분리되었다. 1632년에 부곡 남쪽 지역은 삼척부의 박곡리가 되었고, 1648년에 부곡 북쪽 지방은 강릉부의 망상리가 되었다. 1705년 망상리가 망상면으로 개칭되었고, 1739년에는 박곡을 견하로 개칭하였다. 1891년에는 견하를 도하·도상·견박 등 3개 면으로 분리하였다. 1895년에는 삼척도호부가 삼척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에는 3개 면을 합쳐서 북삼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1941년에는 묵호항이 개항됨으로써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승격되었고, 북삼면이 북평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에는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통합하여 동해시가 탄생되었으며 2004년 현재 10개 동을 관할한다.

동해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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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림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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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보다 밭의 비율이 훨씬 높다. 주요 농산물인 쌀은 망상·이원·북삼동, 콩은 삼흥·삼화동, 감자는 망상·이원·삼흥동, 보리는 이원·북삼·삼흥동, 옥수수는 삼흥동, 채소는 망상·이원·북평동, 사과와 복숭아는 북평동, 포도는 이원동이 각각 중심 재배지를 이루고 있다. 전체 면적의 78%가 임야이며 침엽수와 혼합림이 대부분이다.

수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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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인구 점차 감소 추세이며, 대부분 영세어업 내지 반농반어의 경영형태를 취한다. 항만청 지정항인 묵호항은 일찍부터 이 지역의 어업 중심지로 발달하였으며 그 밖에 천곡·어달·대진리(里)의 3개 군소어항이 있다. 주요 어획물은 노가리·오징어·꽁치·미역 등이다.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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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일대에 양질의 석회석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으며, 그것을 개발한 쌍룡양회 동해공장이 삼흥동에 건설되어 현재 연간 500만t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북평항(동해항)에는 시멘트 전용 부두시설이 갖추어져서,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한 시멘트의 직접 선적이 가능해졌다. 어달동을 중심으로 무연탄이 생산되고 있으며, 삼화동에는 연간 1,200만t 이상의 석회석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으며, 석회석을 주원료로 하는 시멘트공업이 발달하여 삼화·송정·항로동에 있는 동해·북평·묵호 공장에서 연간 1,600만t의 시멘트를 생산하고 있다. 북평에 선박기계·기계장비·합판·펄프·소형선박·도자기 등 중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특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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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사포나리알로에·동해버섯·동해망상콩나물·동해포도 등이 유명하다.

동해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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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자원수송을 위한 영동선 철도가 시내를 통과하며 동해시까지는 전철화되어 있다. 또 삼척선이 영동선에서 분기되는 곳이며 시멘트 수송을 위한 송정

화간 철도가 있다. 도로교통은 대관령을 넘어오는 영동고속도로에 연결되는 강릉

묵호간 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묵호

포항간의 동해고속도로가 1979년에 개통되어 동해 남부지방의 자원개발 및 남해안 방면과의 왕래가 용이해졌다. 그 밖에 백복령을 통하여 영서지방과 연결되는 국도가 있다. 고속국도 9.56㎞, 국도 43.3㎞, 시도 93.5㎞가 강릉까지 동해고속도로와 연계된다. 해상교통은 묵호항과 동해항이 있어 원활하며, 일본 쓰루가항과의 사이에 고속정이 운항될 예정이므로 앞으로 국제관광지로서의 개발도 기대된다.

동해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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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

주요 관광지로는 국민관광지 제77호로 선정, 개발되고 있는 무릉계, 긴 모래사장과 얕은 수심으로 유명한 망상해수욕장, 석회암이 침식하여 기암괴석을 이루는 추암 등이 있고, 그 밖에 계곡·삼림·해안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개발의 여지가 많다. 특히 무릉계는 두타산과 청옥산에 발원하여 흐르는 전천의 상류에 펼쳐진 넓은 반석폭포 및 깊은 계곡과 울창한 삼림·사찰 등이 소금강에 비교되는 곳이다.1998년 가을 ‘금강산 유람선’의 출항지가 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지고 있다.

묵호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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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湖港

강원 동해시에 있는 항구. 항내수(港內水) 면적 402㎢. 항만법상 1종항으로, 한국에서 석탄과 시멘트의 반출항으로서는 북평항(北坪港) 건설 이전까지는 최대의 규모였다. 동해안의 어업기지 및 피난항으로서 이용도가 높다.

삼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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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和寺

무릉계곡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유서깊은 절이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율사가 절을 건립하고 흑연대라 하였고, 그 후 범일국사가 재건하여 삼공암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약사전만 남았었는데 현종 1년(1660)에 중건되었다. 순조 23년(1823)과 고종 43년(1906), 두 차례 재난에 의해 소진됐던 것을 재건축했다. 경내에는 3층석탑(지정문화재 제713호)과 철불(보물 제1292호)이 있다.

해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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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巖亭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호. 단층 8작지붕 초익공 양식, 정면 3칸, 측면 2칸. 고려 공민왕 10년(1361)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가 생활할 때 건립한 것으로 후학 양성과 풍월로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 후 화재로 타버렸다가 조선 중종 25년에 어촌 심언광이 중건하고 정조 18년에 중수하였다.

동해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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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김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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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충신. 호는 송봉. 삼척 실직군왕의 14세 손으로 북삼동 동회에서 난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중종 대 등과해서 의금부사와 한성균관을 지낸 선비로 학문이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안전하게 피신시킨 우국충신으로 선조께서 그에게 충근정 알성효절협책호승공신으로 추대한 바 있고 척주군으로 봉하여 전답, 은자, 노비를 사하였다. 그의 묘는 100년 전 대홍수로 없어졌지만 그를 추모하는 재실과 비가 동해시 북삼동 효가에 있다.

홍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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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

우국충신. 호는 송제. 남양 홍씨의 23세 손으로 1603년 출생하였다. 인조 5년(1627) 건노란 때 관동지방 일대에 격문을 띄워 백성의 사기를 높였고, 민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슬기롭게 이를 평정하는 데 공이 컸다. 이에 숙종께서 보사공신으로 책록하였고 복선군으로 추대하였다.

동해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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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영동지방 중 남부에 위치한 시로

면적 180,00㎢ 이며 인구는 10만 3,039명(2001.12)이다. 시내에는 항만청 등 각종 관공서가 있고 방송 시설 1개소가 있다.해마다 10월에는 동해무릉제가 열린다. 국민관광지로 알려진 무릉계곡을 비롯해 두타산·청옥산 같은 산지와 망상·어달·북평 해수욕장이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한편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3개 교, 중학교 7개 교, 고등학교 6개 교, 대학교 1개 교가 있다.

삼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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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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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陟-象徵物

삼척시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갈매기이다.

삼척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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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해안선까지 산지가 임박해 있으며 평야는 넓은 충적원인 북평평야가 있다. 지질은 평안계와 조선계·화강편마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복잡한 편이다. 태백산맥의 분수령이 되는 청옥산·두타산·중봉산·백병산 등의 연봉이 솟아 있다.

삼척의 연혁과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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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産業

1917년 삼척면으로 고쳤다가 1937년 삼척읍으로 승격되었다. 읍으로 된 지 48년 만인 1986년 시로 승격되었다. 89년에는 도계읍 신기 출장소가 신기면으로 승격하였다. 현재 삼척시는 4개 동과 도계·원덕의 2개 읍 및 근덕·하장·노곡·미노·가곡·신기의 6개 면으로 되어 있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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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과 하천 유역 평야에 주로 농경지가 분포되어 있으며, 산간에서는 아직도 화전경작을 행하고 있다. 쌀·보리·콩·감자가 많이 난다. 경지 면적 10,734.5㏊ 중 논 3,253.8㏊, 밭 8,480.7㏊로서 밭이 압도적으로 많고, 농가 가구 12,081, 농가 인구 7만 39명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누에고치·꿀 등이다.

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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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의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나 그 중 무연탄·철광·석회석이 많이 나서 이 지방을 남한 굴지의 기간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어 놓았다. 무연탄은 평안계에 부존되어 있으며, 삼척탄전은 남부 태백산 지역의 매장량(13억 4,000만t)의 33% 이상(4억t)을 차지하고 있다. 장성·도계·황지를 중심한 대 탄전으로 괴탄(塊炭)으로 산출되며 열량 7,000cal로서 탄질도 극히 우수하다. 여기서 나는 석탄은 종래 묵호항을 거쳐 해상 수송을 했으나 영동선과 태백선이 개통된 후로는 주로 육운에 의존하며 또 삼척 화력발전소에 연료로 공급되고 있다. 장성·도계·황지 등은 탄광취락이다. 석회석은 삼척·영월·단양 일대에 60여 억t이나 매장되어 있다.

임·수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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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야면적 10만 7,431㏊ 중 입목지는 97%인 10만 846㏊에 해당한다. 비교적 육림(育林)이 잘 되어 있으며, 임산물은 목재가 도계읍·원덕읍, 갱목은 도계읍·하장읍, 굴참나무 수피(樹皮)는 하장면·도계읍이 중심이고, 재배 산삼인 장뇌가 노곡면 여삼리에서 재배되며 버섯류의 생산량도 많다. 수산업 가구수는 741, 수산업 인구는 2,276명(2001)이다. 삼척·호산·임원·장호 등의 어항이 수산업 중심지이다. 어선은 634척인데 그 중 602척이 동력선이고 32척이 무동력선이며 5t 이상의 어선은 99척밖에 되지 않아 영세어업 내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경영형태가 대부분이다. 어획물은 명태·꽁치·오징어·미역 등이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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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뇌·왕마늘·토종꿀·고포미역·삼베·삼척불술·가시오갈피 등이 유명하다.

삼척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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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

관동팔경의 제 일루인 죽서루와 삼척해수욕장, 척주동해비가 있으며 동양 최대의 초당동굴과 연어·잉어장, 대이리의 너와집·통방아·굴피집 등이 있다. 그 밖에 후진·맹방·근덕해수욕장이 유명하다.

공양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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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讓王陵

강원도 기념물 제71호. 삼척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제34대, 재위기간 1389~1392)의 능묘이다. 공양왕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폐위되어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서 조선조 태조 3년(1394)에 교살되었다고 전한다.현재 우리나라에는 공양왕릉이 두 군데 있는데 삼척의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남아 있다. 경기도에 있는 공양왕릉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삼척의 공양왕릉은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어 왔다. 현재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공양왕릉은 가장 규모가 크고 그 옆은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무덤이라고 전한다.

준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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濬慶墓

강원도 기념물 제43호. 조선 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의 아버지인 양무장군의 묘이다. 고종 광무 3년(1899)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였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이다. 이 곳의 낙락장송인 황장목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으로 양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서 4㎞ 떨어진 곳에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강원도 기념물 제43호)가 있다.

죽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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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書樓

보물 제213호.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때 학자인 이승휴가 고려 원종 7년(1266) 서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누 동쪽 죽림에 죽장사가 있어 죽서루라 이름하였다 하고, 또한 누 동쪽에 명기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태종 3년(1403)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한 이래 10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이 누의 남쪽에는 별관인 연근당이 있었다 한다. 오십천 층암절벽 위에 세운 이 누는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삼고 암반 높이에 맞춰 길고 짧은 기둥을 세운 5량 구조의 팔작집으로 공포에서는 익공계수법과 다포계수법이 혼용되었다. 천장의 구조로 보아 맞배집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조선 후기까지 여러 번의 수리로 많은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척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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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이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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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장군. 성은 김씨이며, 내물왕의 4대 손자이다. 512년 하슬라주(지금의 강릉)를 다스리면서,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벌할 때 나무로 만든 사자로 적을 위협하여 항복을 받았다.541년 이찬이 되었고, 545년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왕에게 건의하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워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빼앗아 신라의 영토를 넓혔다. '삼국유사'에는 이름이 박이종으로 되어 있다.

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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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고승, 성은 김(金), 이름은 선종(善宗)이다. 이려서 부모를 여윈 뒤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절로 들어갔다. 선덕 여왕이 대보 벼슬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승려가 되었다. 636년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의 우타이 산에 가서 기도하고 가사와 사리를 얻었으며, 643년 장경을 가지고 귀국, 분황사와 황룡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승경률론」, 「보살계본」 등을 널리 폈다. 대국통이 되어 승려들을 통솔하고 통도사 등의 사찰과 불탑을 세워 불교를 중흥시켰다. 계율종의 시조로, 정암사에서 사망했다.

삼척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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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강원도 남동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1,186.00㎢이며 인구는 7만 7,555(2001.12)이다. 대단위 동양 시멘트 공장과 삼척 공업 전문대의 영향으로 최근 5년간 평균 20.8% 수준의 인구 증가를 보였다. 인구 중 1만 7,000여 명이 도시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삼척시는 태백탄전과 동해공업 지역의 연계교역지로 지하자원, 수산자원, 관광자원이 모두 풍부하다. 시는 1986년부터 시가지 도로포장·상수도확장·배수암거설치·분뇨처리장 부지매입·해수욕장 시설보수 등 21개 사업이 추진되었다.

태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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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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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白-象徵物

태백시를 상징하는 꽃은 산목련, 나무는 주목, 새는 산까치이다.

태백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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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해발 1,549m의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태백산 준령산악 협곡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원성 산지로 전지역이 높고 험준한 지세를 이룬다. 하천은 시의 중북부에 있는 매봉산(1,304m)을 중심으로 북류하는 남한강의 상류인 골지천과 남류하는 낙동강의 상류인 황지천·철암천이 있고, 동쪽에 동류하는 오십천과 가곡천이 있어 두부침식에 의한 하천쟁탈 현상이 활발하다. 평야는 거의 없으나 비교적 완만한 고위평탄면이 곳곳에 발달되어 있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지질은 주로 고생대 조선계 석회암과 평안계가 분포하고 있으며, 오랜 지질시대의 지각운동을 받아 지질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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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의 고원성 지역이므로 고도가 높아 기온이 낮으며, 특히 겨울이 길고 봄·가을이 짧다. 연평균 기온은 8.4

, 1월 평균 기온 -31

, 8월 평균 기온은 18

이다. 연강수량은 1,000㎜ 내외로 비교적 비가 적다.

태백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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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삼한시대의 진한에 속한 부족국가로서 삼척군 사직리에 도읍을 둔 실직국(悉直國)에 속하였으나, 고구려 장수왕 때 사직국이 망하고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 지증왕 때에 이곳에 실직주가 설치되었다가 무열왕 때에 북령이라 개칭하여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삼척군으로 개칭하여 도독부로 되었다.1895년에는 강릉부에 속하였다가 삼척군에 속하였다. 1977년 황지읍 화전출장소, 소도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1년에는 삼척군 장성읍과 황지읍을 합하여 태백시로 승격되었으며 2004년 현재 8개 동이 있다.

태백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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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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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면적 796㏊ 중 밭이 786㏊, 논이 10㏊로 밭이 대부분이며 농가는 총가구의 3%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와 옥수수 및 고랭지 채소 생산이 중심인데, 주로 해발 1,000m 지대에서 무·배추·양배추의 생산이 많다. 또, 주변 산지사면에는 초지(草地)가 많아 목축에 적합한데, 최근 젖소·돼지·칠면조 사육 및 양봉도 활발하다.

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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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면적 2만 3,977㏊ 중 침엽수림이 59,9%로 침엽수의 비중이 비교적 높으며, 1㏊당 입목축적량도 31.6㎡로 많은 편이나 광산 주변의 벌목 및 폐석으로 인한 삼림의 파괴가 심각하다. 주요 임산물로 목재생산이 많으며, 목재는 대부분 광산용 갱목으로 사용된다.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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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탄전지대에서는 무연탄 약 5천만 톤, 석회석 약 5억 2천만 톤, 그 밖에 금·은·철 등 풍부한 광물이 매장되어 있다. 60

70년대에 석탄이 국가의 주요 에너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채굴이 활발했다. 그러나 87년 말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에 따른 영세탄광 정비작업이 실시되면서 쇠퇴하기 시작 87년 말 12만 명이었던 인구가 93년 1월 현재 7만 9천 명으로 줄었다.정부는 태백

정선 지역 개발 계획안을 마련하고 폐광지역을 중심으로 카지노장, 골프장, 스키장을 포함한 종합 레저타운을 조성하는 한편 대체산업 육성과 태백산 도립공원 개발 등으로 활로를 찾고 있다. 이를 위하여 2008년까지 총 1,758억 원을 들여 태백산을 집중 개발할 계획이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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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한약재·태백산 김치·태백산 산나물·태백총명우유·세라믹 화장품·청정 참기름·들기름·화훼·버섯 고랭지 채소·고산쌍화차 등이 유명하다.

태백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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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무연탄 수송을 위해 1946년에 철암선, 1954년에 영암선, 1966년에 고한선, 1973년에 고한∼황지, 1975년에 황지∼백산이 각각 개통되었으며, 70년대 이후 무연탄 소비가 급격히 증가되면서 대량수송을 위해 전철화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로교통은 산간고원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영남·영서를 연결하는 국도가 있고, 고한·근덕·강릉·삼척과 연결되는 지방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내륙교통의 중심지를 이룬다.

태백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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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면적은 304.00㎢ 이며, 인구는 5만 5,233명(2001.12)이다. 해마다 10월에는 태백제가 열려 단군제, 산신제, 갈풀썰이 같은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태백산 도립공원, 황지, 용연굴이 주요 관광자원이다. 시청 소재지는 황지동이며, 시내에 고등학교 5개교, 중학교 7개교, 초등학교 15개교가 있다.

태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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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白山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중추이자 국토의 모산이다. 신라 때에는 오악 가운데 북악으로 봉하여 중상제를 모셨으며 서기 137년 일성 이사금 5년 10월에 왕이 친히 북순하여 태백산에서 하늘에 제사하였다.또한 서기 300년 기림 이사금 3년에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니 낙랑, 대방의 두 나라가 항복하여 왔다고 한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물이 낙동강과 한강을 이루고 삼척의 오십천을 이루니 국토의 종산이자 반도 이남의 모든 산의 모태가 되는 뿌리산이다.태백산은 현재 태백시와 영월군, 경상북도 봉화군과 접경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해발 1,567m 높이의 산으로 암벽이 적고 경사가 완만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태백산 천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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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白山天祭壇

중요민속자료 제228호. 태백시 소도동 산8번지. 편마암으로 축조된 장방총 석단으로 높이는 2m, 둘레 20m이다. 단의 남쪽에는 제단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있다. 매년 개천절에 제사를 지내는 천왕단과는 달리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홍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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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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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川-象徵物

홍천군을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 나무는 잣나무, 새는 까치이다.

홍천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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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태백산맥 서사면의 일부를 차지한다. 산악의 기복이 심하고 군의 동경에는 응봉산의 연봉이 솟고 북쪽에 가리산의 연맥, 남경에는 발교산의 제맥이 뻗어 산지가 전군의 87%를 차지하고 있다. 군의 중앙부를 동서로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이 흘러 연안에 홍천분지를 비롯한 약간의 평지가 전개된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계로 되어 있다.면적은 1,818.00㎢이며 인구는 7만 2,805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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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산간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은 10.5

, 1월 평균 -7.3

, 8월 평균 26

, 최고기온 40.5

(1938. 7. 24), 최저 기온 -27

(1941. 1. 25), 연강수량 1,250㎜이다.

홍천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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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시대에 벌력천현(伐力川縣)으로 불리어 오다가, 신라 때 녹효(綠曉)로 고치고 우수주(牛首州:지금의 춘천)에 속하여 화산현(花山縣)이라 했다. 그 후 고려 현종 9년(1018)에 홍천현으로 고쳤다. 인종(仁宗) 21년(1143)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후에 현감이 되고, 1895년 군이 되어 1963년 홍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읍(홍천), 9면(화촌·두촌·내촌·서석·동·남·서·북방·내)을 관할한다.

홍천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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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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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가 많아 밭이 우세하고 지리적 여건이 양잠에 적합하여 매우 성하다. 담배는 영동 제1이며 표고버섯과 각종 약초·아마·닥나무·꿀 등도 명산물이다. 최근에는 육우·표고·홉 등의 단지를 조성하여 더욱 증산에 힘쓰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이고, 담배·표고·잣의 생산도 많으며 축우·양봉도 성하다.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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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물로는 철강·사금·은·석면 등의 매장이 있으나, 국내 굴지의 자은 철광산도 휴광하고 있어 볼 것이 없다. 공업에 있어서는 양조업과 제재·정미·제분·제사·가발 등이 행하여지며, 특히 제사와 가발은 많은 외화를 획득하고 있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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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삼·인삼야채죽·옥선주·산양류·영지버섯·옥수수찐빵 등이 유명하다.

홍천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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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군내 전반적인 교통은 불편하나 최근 간선도로망의 발달로 많이 개선되었다. 춘천∼원주 사이의 국도와 양평∼인제 사이의 국도가 홍천읍에서 교차하면서 군의 서부를 지나고, 춘천∼양양간 국도가 군의 중앙을 통과하며, 인제∼태백간 국도가 동부를 지난다.

홍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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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川邑

군청 소재지로서 교통·산업·문화의 중심지이다. 군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금마천 연안 홍천분지의 중심으로 도로망이 집중되어 있다. 홍천은 춘천·횡성·원주 등과 더불어 산록선 곡구시장 취락에 기원하여 발달한 도시이다.군내에는 초등학교 78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6개교가 있다.

희망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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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三層石塔

보물 제79호. 홍천읍 희망리 151-4. 홍천읍사무소 정원에 위치, 높이 2.45m의 화강암 3층 석탑으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희망리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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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幢竿支柱

보물 제80호. 홍천읍 희망리 509-1 소재. 높이 5m의 화강암으로 70c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

석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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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542호. 내촌면 물걸리 589-1. 내촌면 물걸리 보물 보호각에 보관. 광배는 없지만 건강하고 안정된 모습이며 대좌는 팔각연화대좌로 상·하대에는 연화문을, 중대에는 공양상, 주악상, 향로 등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홍천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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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남궁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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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宮檍 (1863~1939)

독립운동가·교육자·언론인. 우리 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전국적으로 퍼뜨려 독립 정신을 온 국민에게 심어 주었던, 이른바 ‘무궁화 사건’으로 유명한 독립 운동가이다. 1898년에 황성신문사 초대 사장이 되어 우리 나라를 노리는 러시아와 일본을 공격하는 글을 썼고, 1910년부터 9년 동안 배화학당의 교사로 있으면서 '가정교육' 등의 교과서를 지었다. 배재 학당의 교사로 있으면서 영문법 시간에는 국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을 불어넣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노력하였다. 독립협회의 수석 총무와 사법 위원을 지냈고, 1908년에는 '교육월보'를 간행하는 한편, ‘관동학회’ 회장이 되었다. 저서로 '동사략(東史略)', '조선이야기' 가사 「무궁화 동산」, 「기러기」, 「조선의 노래」가 있다.

이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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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勳 (1924~1943)

애국운동가. 홍천군 두촌면 괴석리에서 출생했고 1938년 두촌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39년 한국어를 비밀리에 교육시키고 동지를 규합하고 여운형으로부터 상해임시정부 활동을 돋는 등 애국운동을 전개했다. 1941년 임시정부활동에 대해서 발설하고 춘천고등보통학교의 상록회 독서회 사건의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춘천검찰에 송치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1년~3년의 부정기실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인천소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3년 옥사하기 직전 출옥되어 사망했다. 1977년 건국유공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두촌초등학교에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횡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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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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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城-象徵物

횡성군을 상징하는 꽃은 함박꽃,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백로이다.

횡성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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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동·북·남의 3면은 산맥에 포위되고 겨우 서쪽 1면만이 섬강(蟾江)에 의하여 트여 있다. 즉 동부 및 남부는 태백산맥의 오대산으로부터 분기된 차령산맥의 본맥이 뻗어 1,000m 이상의 매우 고준한 산이 되고 군 중앙부로 향하여 낮아져 있다. 그런데 섬강(蟾江)의 곡지가 중앙에 있어 거기에 침식분지인 횡성분지가 넓게 서남쪽으로 트여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계로 되어 있다. 면적 998.00㎢. 인구 4만 5,424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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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산간에 위치하여 해양의 영향을 전혀 받지 못하는 관계로 대륙성 기후로서 기온의 교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10.7

, 1월 평균 -6.3

, 8월 평균 25.5

, 최고 기온 41.5

(1942년. 7. 14), 최저 기온 -29.8

(1927. 7. 31), 연평균 강수량 1,250㎜이다.

횡성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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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본군은 고구려 시대에는 횡천현(橫川縣) 또는 어사매(於斯買)로 불렸다. 신라 때에 와서 황천(潢川)이라 고치고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에 와서 다시 횡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홍천과 횡천의 발음이 비슷하다 하여 1413년경부터 횡성으로 개칭하여 내려오다가 1895년 군으로 되었다. 1979년에는 횡성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1읍(횡성), 8면(우천·안흥·둔내·갑천·청일·공근·서원·강림)으로 되어 있다.

횡성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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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주요 산업은 농업이며, 인구의 약 68%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서비스업·상업 등이 겨우 10%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농업군이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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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농토가 넓으나 산간지이므로 밭이 많고 유축 농업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육우단지가 있다. 양잠이 성하여 도내 상위이며, 매년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 크고 맛이 좋은 횡성 밤의 명산지로 이름이 높다. 그리고 영동고속도로 연변에는 유실수 단지, 채소·화훼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경지 면적 약 156㎢ 중 논밭비율은 38:62로 밭이 대단히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감자·콩·메밀·담배·누에고치 등이다. 특히 홉은 전국 총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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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자원에 있어서는 금·은·동·철·망간 등의 매장이 있으며, 청일면에 있는 금광과 공근면(公根面)에 있는 철광은 군의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대동 철광에서는 앞으로 40년을 더 채광할 수 있다고 한다. 공업으로서는 양곡 가공업·요업·제재업 등이 있으며, 갈포벽지 공장은 주로 수출품을 생산, 외화를 획득한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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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감자·더덕·건고추·참기름·들기름·누룽지밥·솔잎진송엑기스·옹기독 전통장류·토마토·양송이·하향주 등이 유명하다.

횡성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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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철도 부설이 아직 없고 횡성읍을 중심으로 강릉·원주·춘천으로 연결되는 5·6번 국도가 교차하고 있다. 영동 고속도로가 군의 중앙을 횡단한다.

횡성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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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城邑

서부 평야와 동부 태백산지와의 접촉선인 산록선의 곡구(谷口)에 발달한 곡구시장취락이다. 군청 소재지이며 남한강의 지류 섬강의 좌안에 자리잡고 강릉가도와 춘천·원주가도의 교차점이 되는 교통의 요충으로 농림·축산물의 집산이 성하다. 군내에는 노송림이 울창한 ‘송원’, 섬강 유역의 운암정의 화려한 건물과 남산사 및 봉복사의 거찰도 이름 높고, 이 밖에 덕고산·개원사·회진사 등이 있다.군내에 초등학교 157개교, 중학교 54개교, 고등학교 48개교가 있다.

중금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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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三層石塔

유형문화재 제19호. 횡성 갑천 중금리 484번지. 갑천면 중금리에서 탑둔지로 불리는 곳의 밭 가운데 동서로 약 8m의 거리를 두고 3층석탑 2기가 서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밝힐 수 없으나 기단면석의 팔부중상과 옥개석 등 각 부분의 조각 수법과 와편들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며 횡성댐 수몰로 인해 망향의 동산으로 이전된다.

상동리 석불좌상·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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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洞里石佛坐像·三層石塔유형문화재 제20호, 21호. 횡성 공근 상동 495-1. 석불좌상은 광배만 파손되어 흩어져 있을 뿐, 대좌와 불신이 완전한 불상이다. 뚜렷하게 솟은 육계, 촘촘한 나발의 머리칼,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 등은 신라 전성기의 이상적 사실미가 엿보인다. 대좌는 8각연화좌인데 하대는 묻혀 있고, 상대는 앙련을 새겼으며, 중대의 8각간선에는 안상을 새긴 전형적인 9세기 불상대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석탑은 기단부가 땅속에 묻혀 있는 신라시대의 3층석탑인데, 기단부는 1탱주가 새겨진 면석의 일부와 갑석만 보일 뿐이어서 불확실하지만 당시의 보편적인 예로 보아 이중기단으로 생각된다. 사분원과 각형받침 위에 있는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장중한 편인데 큼직하고 높은 1층탑신에 비해 급격히 줄어든 2층 탑신과 듬직하고 원만한 옥개석 등에서 신라 하대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영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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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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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越-象徵物

영월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대추나무, 새는 두견이다.

영월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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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남부에 위치하며 군의 동부에는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뻗고 남쪽에는 소백산맥이 여기서 갈려서 동서로 뻗는데 그 양 산맥의 여파가 군내 도처에 미쳐 산악이 중첩하고, 백운산·옥석산·백덕산 등이 솟아 있다. 중앙부는 한강과 그 지류 평창강·주천강 등이 영월 부근에서 합류하며, 평지는 영월분지 외엔 별로 없다.지질은 주로 석회암층이며 곳곳에 카르스트지형이 발달하여 있다. 면적은 1,127.00㎢ 인구 4만 5,339(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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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산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큰 내륙성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 10.8

, 1월 평균 -5.7

, 8월 평균 25.5

, 최고 42

(1942.7), 최저 -30

(1920.1), 연평균 강수량은 1,200㎜이다.

영월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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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의 내생군(奈生郡)이었던 것을 신라 때 내성군이라 고쳤고, 고려 때 영월로 고쳐 원주에 속하였다가 공민왕 21년(1372) 군으로 승격되었다. 공양왕 원년(1389)에 충청도로부터 강원도에 속하였고, 1960년(1월 1일)에는 영월면이, 1973년에는 상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2004년 2읍(영월·상동), 7면(하동·북·남·서·주천·수주·중동)으로 되어 있다.

영월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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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산간지이기 때문에 경지 면적이 좁고 밭이 많다. 목초가 많아 소를 많이 치고 임상이 좋아 용재와 신탄 산출이 많다. 지질 구조상 각종 광물의 매장이 풍부하여 무연탄·텅스텐·석회석·철광·아연·수연·창연·니켈·주석 등이 산출되고 삼척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근 40년의 역사를 가진 마차탄전이 1972년 9월말 폐광된 데 이어 텅스텐광도 값싼 중국산이 수입되면서 1992년 채굴을 중단했다. 영월에는 또 화력발전소가 있고, 무연탄과 무진장한 석회암 그리고 풍부한 전력은 시멘트공장을 건설케 했다.

농림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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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보리·밀·감자·누에고치·소·닭·염소·꿀 등이다. 수목의 벌채가 비교적 적어 무성한 임삼이 많이 남아 있어 유용재와 신탄 산출이 적지 않으며, 특히 광산용 갱목을 다른 지방으로 공급하고 있다.

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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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의 중석·창연·수연, 순경의 주석, 옥동(玉洞)의 무연탄은 유명하였으나 석탄합리화정책에 따라 광산은 많이 줄었다. 무연탄 광산은 영월읍과 북면에 각각 1개 소가 있다. 40만 kW의 영월 복합 화력 발전소와 무진장의 석회석은 부근의 시멘트·석회 공업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편, 태백선(함백선)의 개통과 이의 전철화는 이 지역 자원개발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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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진쑥·신령버섯·청결고춧가루·정든고추장·영월참기름·영월더덕·청결미·영월사고·그랜채소·잡곡·토종대추·취나물·꿀·칡국수·버섯·묵·한우고기·메주·생광석·목공예품·영월칡술·칡녹말 등이 유명하다.

영월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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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철도는 태백선이 영월·석항을 통과하며 함백선이 제천으로부터 분기되어 군내를 횡단하여 정선군에 달하고, 증산에서는 정선선이 분기되어 지하자원 개발을 촉진한다. 또한 도로는 제천·평창·정선·삼척·봉화 등에 연락되기는 하나 아직 교통이 불편하다.

영월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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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越邑

태백산맥 서사면의 산간에 있는 소분지에 발달한 군청 소재지이다. 600

700m 높이의 산맥이 몇 줄기 남북방향으로 달리며 남쪽에 봉래산이 솟아 있고 부근에 한강이 흐른다. 무연탄의 개발과 화력발전소 건설 이래로 점차 발전되었다. 한강은 감입곡류하여 계곡미가 아름답다. 서쪽 쌍룡리에는 시멘트공장이 있는데 이는 부근의 풍부한 석회석과 무연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곳은 단종의 유배지여서 그에 얽힌 사적이 많다. 청냉포는 그가 숨을 거둔 곳이고 장릉은 그가 묻힌 곳이다. 그 밖에 창절사·민충사 등이 있고, 근래에 개발된 고씨굴(高氏窟)은 지하의 금강으로 좋은 관광지가 되어 있다.

상동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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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東邑

태백산맥의 중부 산간에 위치한 곳으로, 종래 구래가 행정의 중심지였으나 상동의 중석 광산의 개발과 함께 점차 발전되어 1973년 정선군 신동면 천포리 일부를 포함시켜 읍으로 승격된 대표적인 광산 취락이다. 군내에 초등학교 57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6개교가 있다.

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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寂滅寶宮

신라 진덕왕 647년경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사자산사’라 명칭 되었으나 1939년 중수불사시 사자산적멸보궁이라 개칭하였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5대보궁 중의 하나이다.

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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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陵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의 능이다. 단종은 문종의 아들로 세종 23년(1441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 위에 있던 중 세조 2년(1456) 성삼문 등이 꾀한 상왕 복위 계획이 탄로되어 동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1457년 10월 24일 세조의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단종이 승하하였을 때 시신을 치우는 이가 없자 영월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거두어 모신 곳이 바로 장릉이다. 이곳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에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져 있다.

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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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江

동강은 남한강 수계에 속하며 정선·평창 일대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정선읍내에 이른다. 조양강이라 부르고 이 조양강에 동남천 물줄기가 합해지는 정선읍 남쪽 가수리부터 영월에 이르기까지의 51km 구간을 동강이라 한다.

영월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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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김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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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1920)

호는 우산.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에서 태어나 1905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에 항거하기 위하여 병력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공이 많을 뿐더러 영월·원주·정선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전과를 올렸다.

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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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1911)

구한말 애국 의병장. 호는 백우, 본관은 삼척.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에 이사하여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시 단발령에 울분하여 의병을 모아 일제에 항거, 도처에서 일군을 무찌르고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영주에서 이론수비대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교수형을 당했다.

엄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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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

충의지사. 영월 호장으로 있으면서 단종대왕의 어소를 수시로 찾아가 문안을 드리던 중 금부도사 왕병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단종이 승하하자 장릉자리에 암장을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세조의 권위에 눌려 단종의 시신에 아무도 손대지 못하며 발각되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알고도 결연히 의를 행한 충의지사였다.

평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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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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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象徵物

평창군을 상징하는 꽃은 작약, 나무는 전나무, 새는 까치이다.

평창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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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남부 중앙 태백산맥 중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토지는 일반적으로 높아 평균고도 600m 이상에 달하고, 특히 동·북·서 삼면이 높고 험준하며, 남쪽으로 경사져 있다. 즉 북쪽에는 오대산·계방산·황병산·대관령, 또 서쪽에는 오대산에서 분기한 차령산맥이 있다. 한강의 지류 평창강은 중앙부를 감입사곡하면서 역내 대부분의 물을 모아 남류하여 연안에 소 선상지와 범람원을 형성하고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면적 1,464.00㎢. 인구 4만 6,347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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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고원에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로 동 위도의 어느 군보다도 기온이 낮다. 연평균 기온은 10.3

, 1월 평균 -6.3

, 8월 평균 24.5

, 최고 기온 38.3

, 최저 기온 -27.2

,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평창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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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이었는데 고려 때에 평창으로 고쳐 원주에 속하였다. 충렬왕 25년(1299) 현령(縣令)을 두고 조선 태조 원년(1392)에 군이 되었으며, 1906년, 1932년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쳤다. 1979년에는 평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에는 용평면이 설치되었다.1읍(평창), 7면(미탄· 방림·대화·봉평·용평·진부·도암), 1개 출장소가 있다.

평창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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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산간 지방이므로 경작지가 좁고 화전이 많다. 고랭지이기 때문에 감자와 옥수수가 특히 많이 나서 유명하다. 경제 작물로서 홉·아마·약초 재배와 양잠이 성하다. 초지가 많아 축우가 성하며, 최근에는 대규모의 기업적인 목축도 행해지고 있다.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광산물의 산출도 많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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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면적은 산지이므로 총 면적의 약 10%인 146㎢, 논밭 비율은 17:83으로 밭이 많다. 화전 점리사업이 완료되어 밭이 급증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감자·쌀·홉·아마·누에고치·꿀·잎담배·고랭지 채소 등이다. 도암면은 대표적 씨감자 생산지역으로 감자 원종장과 고랭지 시험장 등이 있다. 도암·대화·진부령 등지에는 낙농목장이 성하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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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술·고랭지김치·느타리버섯·대관령감자·대관령황태·두메산골토종잡곡·맥향·루티나·메주 및 전통장류·부침가루·국수·산더덕·산머루·오대산화훼·옥수수엿·찰옥수수·찰토마토·고랭지양파·태양초고추·한우·허브·흑염소·송이·된장·고추장·산나물·장아찌 등이 유명하다.

평창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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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산지이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다. 철도는 없고, 영동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고속국도의 인터체인지를 통한 국도나 지방로의 연결이 편리하다. 주요 공로로는 강릉가도가 있고, 또 영월·삼척·정선 등에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평창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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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邑

군청소재지이며 한강상류 평창강 좌안에 위치한다. 자동차 도로가 있으나 고개가 많아 불편하며 겨울에는 눈이 많다. 부근에는 담배·명주를 비롯하여 약초·꿀 등의 산출이 많아 이를 집산하고 지하자원도 많다. 군내에는 도암면 횡계리에 용평 스키장이 있고 진부면 동산리에는 우리 나라 4대 사찰 중의 하나인 월정사를 비롯해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상원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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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院寺銅鐘

국보 제36호.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상원사에 있는 통일신라 초기의 동종. 높이 167cm, 지름 91cm. 현존하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범종으로서, 음향이 맑고 깨끗하다. 종신에는 견대와 구연대가 있어, 상하가 긴박한 느낌을 준다. 종신 공간에는 서로 마주대하는 두 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을 세워 하늘을 날면서 공후와 생을 주악하는 비천상이 양주되어 있다. 음관·유곽 등 한국 종의 전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종이다.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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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院寺木造文殊童子坐像

국보 제221호.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번지 소재. 조선 세조 12년(1466)에 조성. 조각수법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불상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가는 불상 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수인은 미타수인 등에서 볼 수 있는 구품인을 나타내고 있으며 결가부좌 대신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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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院寺木造文殊童子坐像伏藏遺物

보물 제793호.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소재. 1괄 51점. 1984년 7월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좌상에서 발견된 유물로 석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듯이 불상에도 사리를 장치하고 복장을 만들어 넣은 매우 보기 드문 예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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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寺八角九層塔

국보 제48호.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소재. 고려시대에 유행한 다각다층의 전형적인 석탑으로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손상된 곳이 많으나 그 형태는 원형을 갖추고 있다.각 옥개석은 추녀 밑이 수평이고 처마면에는 낙수홍이 음각되었고 받침부는 일반 석탑에서처럼 층급을 이루지 않고 있다. 낙수면은 두텁고 합각선이 예리하며 전각의 반전도 경쾌하다. 높이는 15.15m이다.

정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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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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旌善-象徵物

정선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잣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정선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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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동남부, 태백산맥 중에 위치한 까닭에 전역에 걸쳐 산악이 중첩하고, 남한강 유역 계곡에 좁고 길다란 평지가 있을 뿐이다. 즉 북부에는 발왕산(發旺山, 1,391㎢), 서부에는 가리왕산(加里旺山, 1,561m), 동남부에 대덕산(大德山, 1,307m), 백운산(白雲山, 1,426m) 등이 있고, 이들 여러 산에서 발원한 많은 계류를 합하여 남한강은 역내를 감입곡류(嵌入曲流:meander)하면서 서남류하여 영월군에 들어간다. 평안계와 조선계에 속하는 지층이 발달하여 많은 석탄을 매장하고 있다. 면적 1,221.00㎢, 인구 5만 1,299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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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산간에 위치한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몹시 크며, 특히 겨울에 추위가 심하고 여름은 서늘하다. 강수량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 10.3

, 1월 평균 -6.2

, 8월 평균 24.3

, 연강수량은 1,350㎜이다.

정선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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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의 잉패현(仍貝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정선이라 개칭하여 명주(溟州:강릉)의 영현(領縣)이 되고 고려 현종 9년(1018)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 강원부 정선군이 충주부 정선군으로 되고, 1896년 다시 강원도로 귀속되었으며, 그 후 관할구역의 변경이 여러 번 있었다. 1973년 7월 정선면과 동면 사북출장소가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0년에는 신동면이, 1986년에는 고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4읍(정선·사북·신동·고한), 5면을 관할한다.

정선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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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림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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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은 영월·평창·인제 등과 더불어 태백고원 지역에 있어서 기후가 냉량대를 이루고 있다. 경작지의 수직적 분포의 한계는 논은 800m, 밭은 1,400m로 되어 있으나 대체로 경지는 500

600m의 중간 산지대에 많다. 감자와 옥수수가 특히 많이 나며 양잠이 성하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감자·쌀·누에고치·꿀 등이다. 임상이 좋아 용재와 신탄의 산출이 많고, 산삼·당귀·지황 등 한약재도 많이 난다. 임야면적 10만 572㏊ 중에서 국유림이 50% 이상을 차지하며 입목지가 99%이다.

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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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자원으로는 무연탄·금·구리·철·아연·납흑연·비광·텅스텐 등의 매장이 많다. 함백 탄광과 상동 중석광산(현재는 부진)은 유명하고 아연은 수출로 외화를 획득한다. 근래 정선선의 개통과 산업도로의 개설로 눈부시게 개발되고 있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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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석공예품·토종꿀·냉동 찰옥수수·정선산채·정선아라리자연향·아라리 대추원·영지버섯·정선전통식품·목공예품·인진쑥 등이 유명하다.

정선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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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산간벽지이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1957년 함백선이 처음으로 개통되었고 그후 이 지방의 지하자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정선선이 예미역으로부터 고한(古汗)까지 연장되고 태백선(고한∼황지)과 정선선이 연장(정선∼구절)되었다. 도로로는 평창·영월·강릉 간을 통하는 것이 중요하고, 군의 남부에는 산업철도인 함백선이 영월·조동·한백탄광까지 부설되었다.

정선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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旌善邑

1973년 읍으로 승격된 이래 군의 행정·산업의 중심지로 잡곡·삼·목재·담배 등을 집산한다. 함백선의 개통과 함백탄전의 개발에 따라 발전하게 되었다. 특산물로는 꿀·버섯·잣 등이 있다. 군내에는 그림 바위의 소금강(일명 정선 금강)·종유동·정암사·적멸보궁·광대곡의 열두 용추 등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화암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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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岩洞窟

2,800㎡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회석 동공이 있는 화암동굴. 높이 30m, 폭 20m로 동양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황종유벽과 마리아상, 부처상, 장군석, 석화 등 크고 작은 종유보석이 가득하며 지금도 종유석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동굴이다.

정선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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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이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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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군 북면 송석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근(伯謹), 호는 송석와(松石窩). 성품이 인자하고 강직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성현의 학문에 열중하였다.가정이 가난하여 글씨 연습할 종이와 붓, 그리고 먹조차 없었으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가랑잎과 숯검정 물로 글쓰는 연습을 하였다. 일생 동안 학문탐구와 성현을 숭배하고 후세교육에 전념한 유현(儒賢)이며 청빈 중에서도 청송(靑松)의 고결을 고수한 도학자였다.

김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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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1909)

강원도 정선군 동면(지금의 고한읍) 고한리에서 출생, 수년간 한문수학하여 일찍이 향교의 장의까지 지냈다. 1907년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에 가담. 왜군에 항거하여 용감히 싸웠다. 1909년 부하 약 50명을 인솔하고 지금의 사북읍 도사곡에서 일본병대와 치열한 교전중, 용감히 싸우다 적탄을 맞고 순직했다.당시에는 시신마저 제대로 거둘 수 없어 가매장하였다가 후일 동생인 김시백이 부하와 같이 밤중에 영월군 하동면 내리 앞골 뒷산에 산소를 모셨다. 그러나 현재 그 묘소는 찾을 길이 없다.1968년 3월 1일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으며 1986년 8월 15일 사북 도사곡 입구에 김시중 장군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철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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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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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原-象徵物

철원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잣나무, 새는 두루미이다.

철원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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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전반적으로 고원상(高原狀)을 이루나 중앙부를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백역산맥이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서반부(구철원)의 평야지대와 동반부(구김화군)의 고원지대로 양분된다.서부, 즉 철원지구는 200

500m의 대지(臺地)로 추가령구조곡의 구조열선에서 유동성 흑색현무암의 용암이 분출하여, 평탄한 용암대지가 이루어졌다. 이 용암대지의 사면이 화강암 산지로 둘러싸여 분지상으로 되었다. 한편 김화지구는 동쪽에 광주산맥이 남남서로 뻗으면서 용문산(1,068m)·구단발령(1,175m) 등 높은 산을 일으켰다. 수계(水系)에는 임진강의 지류 한탄천과 북한강의 상류 금성천이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 결정편암으로 되어 있다. 면적은 899.00㎢, 인구 5만 682(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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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산간에 위치한 관계로 기온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강수량이 많아 한국 3대다우지 가운데 한곳이다. 연평균 기온 9.5

, 1월 평균 -7.9

, 8월 평균 24.4

, 최고 기온 38

(1939. 8:김화), 최저 기온 -29.5

(1938. 1:철원)와 -33.4

(1942. 1:김화), 연평균 강수량 1,350㎜이다.

철원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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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때 철원 또는 모을동비(毛乙東非)라 부르다가 신라 경덕왕 때 철성(鐵城)으로 개칭. 궁예가 국도를 정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여 25년간 중부지역을 통치했다. 고려·조선을 거쳐 1896년 철원군이 되었다. 1941년 행정구역이 변경되었고 1945년 북한지역으로 들어갔다가 1954년 수복되고 1963년 김화군이 철원에 편입되었다. 1979년에는 갈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0년에는 동송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4년 현재 4읍(철원·김화·갈말·동송), 7면 1개 출장소가 있다.

철원의 산업·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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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交通

철원분지는 현무암이 분해된 비옥한 토양이고 봉래제·감둔제(甘屯堤)·마산제(馬山堤) 등 관개 시설이 완비되어 도내 제일의 쌀 생산지대이다. 또 김화고원은 옥수수·감자·콩·담배가 많이 나며 양잠·양봉·목축이 성하다. 특히 담배는 금성엽으로 알려져 있고, 또 철원주도 유명하였다. 소는 경인지방에 많이 공급되었다.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데 특히 금성 부근의 유화철광·중정석·망간이 유명하고, 형석·하석(霞石)·남정석·홍주석·명반석·금·은·아연 등도 산출된다.경원선이 군의 서부를 지나가고 철원에서는 금강산에 이르는 전기철도가 분기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 후 철거되었다. 도로는 김화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쳐 편리하다. 철원·김화는 평강과 더불어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교통·군사상의 요지이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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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미·동동주·현무암공예품·청정육·삼지구엽초·삼지구엽주 등이 유명하다.

철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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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原邑

군청 소재지이고 경원선의 요역이며, 금강산 전기철도의 분기점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읍은 추가령 지구대의 저지를 차지하여 지형관계로 옛날부터 군사·교통상의 요충이 되고 있다. 면적 99.29㎢, 인구 5,588명(2002.12)이다.최근 부근 일대의 황무지에 수리 개간사업을 하여 비옥한 전답지대로 만들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농산물의 집산이 성하고 우시장 및 백화시장으로 유명하여 강원도 제1의 상업지였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원 시가지에는 건물이 없어 군청은 갈말면 지포리로 옮겼다. 그리하여 이곳이 이 지방의 중심지로서 새로 시가지가 발달되고 있으며 이곳을 일반적으로 신철원이라고 부른다.

김화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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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華邑

한국전쟁 전에는 김화군의 군청 소재지였다. 금강산 전철에 연한 요역이었다. 고원성의 김화분지에 위치하며 배후는 험한 산악 지대로서 한국전쟁 때 소위 ‘철의 삼각지대’로 알려졌다.부근은 담배·콩 등의 농산물과 유화철의 산지로 유명하다. 군내에는 고석정·삼부연·직탄암·칠만암·도피안사와 명성산 ·궁예성지 등의 명승 고적이 있다.

도피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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倒彼岸寺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소재.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도선국사가 높이 91cm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제조 철원읍 율리리에 소재한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가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 불상이 갑자기 없어져 그 부근 일대를 찾다가 현위치에 그 불상이 안좌한 자세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 한다.당시 철조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렀다 하여 절이름이 도피안사로 명명되었으며 절 내에는 도선국사가 제조한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223호로 지정된 높이 4.1m의 화강암 재료로 된 삼층석탑이 보존되어 있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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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造毘盧舍那佛坐像

국보 제63호.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도피동 450 소재. 불상 높이 91cm. 대좌까지 주조된 특이한 양식이다. 얼굴은 긴 편이고, 귀가 짧으며, 목에는 일선을 그었고 위엄이 적다. 통견의 법의에는 주름이 반복되어 형식적이다. 무릎폭은 넓으나 두 손이 인체에 비해 작은 편이다. 대좌는 단판 세 겹의 양련 밑에 8각의 중석이 있고, 그 밑에 귀꽃이 달린 단판 복련이 있다. 중석이 너무 높아 안정감이 없으며, 양련과 복련의 표현도 박력이 없다.불신의 등에 백여 자에 달하는 명문이 돋을새김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함통육년’이라는 기년이 있어 이 불상의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몇년 전 이 불상에 개금을 하여 철불의 느낌이 없어져버렸다.

철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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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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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6~1388)

고려의 장군. 철원(동주) 최씨로 1316년 고려 충숙왕 때 철원군 어운면에서 태어나 16세 때 아버지가 남기신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마음속에 새기고 오직 고려의 건국 이상인 옛 고구려 땅 만주벌판을 되찾는 데 노력하였다. 홍건적을 격파하고 1360년 남쪽 지방을 괴롭히는 왜구를 섬멸하고 1375년 홍산대첩(鴻山大捷) 등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고려 우왕은 장군에세 시중(侍中:지금의 국무총리) 벼슬을 주고 전토와 노비를 상으로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73세(1388) 고령에 문하시중의 벼슬을 맡았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우리의 북쪽 지방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자기의 땅이라고 하자, 장군은 팔도도통사가 되어 옛 고구려 땅인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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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1619)

무관. 철원군 어운면 갈원동 하갈리에서 출생하였다. 25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경성에서 변방을 지켰고 31세 때 선천 군수를 하면서 청렴하게 백성을 다스렸다. 1616년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후삼국을 세우고 명나라를 침범하자 명나라의 원군으로 나가 용감히 싸우던 중 뒤에 숨어 있던 적군의 기습으로 1619년 40세로 전사하였다.명나라에서는 요동백(遼東伯)의 벼슬을 내리고 조선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후손들이 안동김씨에서 갈리어 철원김씨의 시조로 삼았다.

화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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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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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川-象徵物

화천군을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 나무는 층층나무, 새는 꾀꼬리이다.

화천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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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영서지방 중북부, 북쪽에서 태백산맥의 서사면을 차지하며 서북경의 광주산맥에는 백암산·대성산 등이 솟아 있고, 남경 사명산맥에는 간곡산·죽엽산 등이 솟아 있다. 북한강이 감입곡류하며 그 사이를 흐르고 구만리 부근에는 화천 발전소의 파로호가 구축되었다. 지류 서옥천·동림천·원천 등이 모이는 간동면에 분지가 발달하였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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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산간에 위치한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9.4

, 1월 평균 -7.2

, 8월 평균 26.4

, 최고 기온 39.5

, 최저 기온 -25.1

,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화천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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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의 생천군 또는 야시매(也尸買)로서 신라 때 군이 되고 고려 초에는 춘주(春州)에 속했다. 예종 원년(1106) 감무(監務)를, 태종 13년(1413) 현감을 두었다. 1896년에 화천군으로 되어 오다가 1945년 38

선 이북의 북한 치하에 속했으며 1951년에 수복되었다. 1979년 화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읍(화천), 4면(간동·하남·상서·사내)을 두고 있다. 면적 909.00㎢, 인구 2만 4,145명이다(2001.12).

화천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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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콩·감자·누에고치·꿀 등이다. 축산업으로는 한우·젖소·돼지·닭·사슴·산양 사육이 활발하며 농가에서 부업으로 양봉·양잠이 행해지기도 한다. 광업은 규석광산 1개 소가 있으나 생산량이 많지 않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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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타리버섯·동촌달래·두류산방울토마토·무공해유정란·뽕잎미숫가루·사과·생칡즙·아카시아꿀·재래메주·천마·취나물·파로호산양유·평화가시오이·현미숭늉차·화악산찰토마토 등이 유명하다.

화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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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川邑

군청 소재지로 행정·교통·산업의 중심지이며, 수력발전소로 유명하다. 파로호는 담수어의 양어장일 뿐더러 좋은 관광지이며 그 밖에 간동팔경(看東八景)인 성불령·용화산·수불무산·원천곡·부용산·죽엽산·병풍산·구운소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30m 높이의 폭포·승소·광암·백운담 등이 있다.

화천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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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강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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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일제의 탄압정책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선 강명하는 이창선·김광필·박용구와 3·1만세운동 사전 계획을 세운 다음 상서면 봉오리, 다목리지역의 집집마다 태극기를 전달한 후 3·1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 상서면 주재소를 점거하고 화천으로 향하던 중 화천변 신읍리 입구에서 일본 헌병들과 싸우다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방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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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1951)

승려. 법호(法號) 한암(漢巖). 본관은 온양. 9세에 서당에서 공부했으며 22세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처이상(鏡處利尙)의 설법을 들었고, 30세 되던 1905년 양산 통도사 내원선원의 관실(觀室)이 되었다. 1910년 맹산 우두암에서 수도했고, 개오(開梧)의 경지에 들었다. 금강산 지장암, 서울의 봉은사를 돌다가 50세 때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한번도 동구 밖을 나가지 아니했다. 1951년 가벼운 병을 얻은 지 7일 만에 76세로 입적했다.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 가사 장삼을 정제하고 선상(禪床)에 단정히 앉아 참선하는 듯이 숨을 거두었다. 근세 한국 불교계에 있어서 박한영사(朴漢永師)와 경처이상(鏡處利尙)과 함께 방한암선사(方漢巖禪師)는 대표되는 스님으로서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양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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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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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口-象徵物

양구군을 상징하는 꽃은 살구꽃, 나무는 주목, 새는 꾀꼬리이다.

양구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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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태백산계의 여러 산이 중첩 기복한다. 3지맥이 종주하는데 동쪽 대암산맥에는 용문산(龍門山, 1,068m)·마패령(馬佩嶺, 697m)·가칠봉(加七峰, 1,243m) 등이, 중앙 비봉산맥에는 두밀령(杜密嶺, 787m)·항령(項嶺, 676m) 등이, 서쪽 어은산맥에는 어은산(1,277m) 등 여러 산이 솟아 있다. 강은 동편 계곡에 서천, 중앙에 장평천이 남류한다. 서천은 양구 동쪽에서 곡계의 기경을 이루며 낭천이 되어 장평천과 합하여 파로호에 들어간다. 군의 서쪽은 북한강 계곡에 속하며, 동쪽의 소양강 상류에는 전형적인 침식분지인 해안분지가 있다. 지질은 대부분이 화강편마암이고 화강암과 결정편암도 있다. 면적 701.00㎢, 인구 2만 2,621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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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산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심하며, 국내에서는 동위도상의 어느 지방보다도 낮고 강수량도 도내에서 제일 적다. 연평균 기온은 9.8

, 1월 평균 -7.9

, 8월 평균 25.6

, 최고기온 41.5

(1940. 6), 최저기온 -29.0

(1939.1), 평균 강수량 1,100㎜이다.

양구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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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때부터 양구군이었는데, 고려에 와서 양구현(楊溝縣)으로 고쳐 춘주(春州)에 속하였다가, 후에 양구로 개명하고 예종 원년(1106)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조 2년(1393)에 다시 분리되어 태종 12년(1412)에 현감을 두어 내려오다가, 1895년 군이 되었다. 8·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들어갔다가 한국전쟁 때 수복되었다. 1979년 양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에는 해안면이 설치되었다.1읍(양구), 4면(남·동·방산·해안)으로 되어 있다.

양구의 산업·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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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交通

농경지는 하천 계곡에 약간 분포되어 있으며 밭이 많다. 그러므로 잡곡이 많이 난다. 천연림이 무성하여 임상이 아름답고, 용재와 신탄의 산출이 많으며, 밤·잣·도토리 등과 웅담·사향·복령·백화사 등 한약재의 산출이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감자·삼·꿀·양초 등이다. 쌀의 질이 좋기로 유명하며, 채소·과일 등도 양구읍 부근에서 널리 재배한다.초지와 산지가 넓어 목축업이 활발해 목축업 종사자가 많다. 또한 임야면적 5만 6,407㏊에 국·공유림이 64%에 이르며, 입목지가 99%나 된다. 산지에서 잣·대추·도토리가 많이 생산되며 송이·표고버섯의 생산량이 많다.산간 벽지이기 때문에 교통은 불편하였으나 최근 군사도로의 발달로 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있다. 인제·평창 등지로 통하는 31번 국도가 남북을 종단하고 동서를 잇는 46번 국도가 간성과 춘천을 연결한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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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오이·산재배더덕·산채·생감자가루·고랭지감자·석공예·송이버섯·느타리버섯·쌀·쑥엿·도토리묵·떡·유정란·미숫가루·전통메주·백합·전통한과·본야록식품·뽕잎국수·표고버섯·사과 등이 유명하다.

양구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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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口邑

군내 행정·교통·산업의 중심지. 인제·화천과 더불어 목재·벌꿀·버섯·약초 등의 산지이다. 한국전쟁 이후 수복되었고, 군사상 요지로 군인이 많이 있다. 군내에는 사명산·포천현·곡계·비봉산성·남진정 및 성불사·심곡사 등의 명승 고적이 있다. 군내에는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심곡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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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伏藏遺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양구군 양구읍 송청리 산11번지 소재. 심곡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조선 숙종 42년(1716)에 제작된 문화재. 조선시대 후기 불교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정확한 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복장발원문을 동반하고 있고, 본존불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성된 대세지·관세음보살을 협시보살로 함께 구비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선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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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史博物館

부지 면적 32,464㎡, 건축 면적 1,144.7㎡, 전시 면적 438.75㎡(5개 전시실). 양구읍 상무룡리의 구석기 유적과 해안면 일대의 신석기, 청동기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집중 전시한 박물관으로서 선사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선사박물관이다.

양구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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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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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65)

화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제2회 국전에 특선하고 미협전(美協展)에 입상하였으며, 이후로 국내외의 미술전에 여러 번 참가하였다. 회백색을 주로 쓰면서, 단조로우나 한국적인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다루었다.작품으로 「나무」, 「복숭아」 등이 있다.

인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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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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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蹄-象徵物

인제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주목, 새는 비둘기이다.

인제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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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동쪽 태백산맥에는 무산(巫山, 1,320m)·향로봉(香爐峰, 1,298m)·설악산(雪嶽山, 1,708m), 오대산(五臺山, 1,568) 등이 솟아 있고, 서쪽은 대암산 줄기가 남북으로 뻗어 있다.하천은 북한강의 지류 소양강이 주류가 되어 남류하다가 인제 부근에서 내린천 등 지류와 합류한다. 연안에는 약간의 범람원과 작은 선상지가 발달, 그 중 서화분지가 비교적 크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면적 1,646.00㎢, 인구 3만 2,505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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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산간지이기 때문에 여름·겨울의 기온 교차뿐만 아니라 주야의 교차도 심한 내륙 고원 기후를 나타내며, 강수량은 여름에 집중적으로 많고, 겨울의 적설도 많다. 연평균 기온 10.5

, 1월 평균 -6

, 8월 평균 24.2

, 최고 기온 39

(1942. 7), 최저 기온 -30

(1927. 1), 연평균 강수량 1,100㎜이다.

인제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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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때 저족현(猪足縣:烏斯回)이라 하였는데 고려 때 인제로 개칭하고, 춘천에 귀속되었다가 뒤에 회양(淮陽)에 예속하였다. 공양왕 1년(1389)에 독립하여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는 현감을 두었으며 고종 33년(1896)에는 군으로 되었다. 1945년 거의 전군이 북한에 속했으나, 한국전쟁 후 수복되었다. 1979년 인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에는 상남면이 신설되었다.

인제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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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경지는 하천의 범람원·산록부·선상지·분지 등에 분포되어 있으며 밭이 많다. 잡곡·감자가 많이 나며 양봉은 전국 제1로서 밀원지대를 이루고 있다. 임야 면적이 넓고 임상이 좋아 용재와 신탄을 많이 산출하여 남한 제1의 임업지이다. 그 밖에 인삼·당귀·복령·사향·웅담 등 한약재도 많이 난다. 주민의 5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과 잡곡·감자·누에고치·소·꿀 등이다. 총임야면적 15만 9,452 중 대부분이 임목지이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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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진쑥·치커리·황태·석공예·목공예 등이 유명하다.

인제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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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철도는 아직 없고 도로에 의하여 홍천·춘천·양구·간성·속초·양양 방면에 연락된다. 홍천∼인제∼양양 간 국도의 포장 공사가 1980년에 완공됨으로써 수도권과의 시간거리가 단축되었다. 동해안과는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을 넘어 연결된다.

인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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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蹄邑

행정·교통·산업의 중심지. 소양강과 내린천의 합류점 가까이에 있고 부근 일대는 경치가 아름답고 전국제1의 밀원지(蜜源地)로서 꿀의 산출이 많고 또 임산물의 산출도 많다. 금강산에 못지 않는 내설악 일대의 기암 괴석·비폭(飛瀑)·벽담·삼림미 등 경승지가 많아 관광사업이 유망하다.

한계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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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溪寺址

강원도 기념물 제50호. 북면 한계리 90-1~4번지에 위치하였으며 인제군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한계사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으나 수차에 걸쳐 큰 화재를 입어 북면 용대2리 지금의 백담사로 자리를 옮겨가고 남은 터가 한계사지이다.1984년 강원대학교 조사반에 의해 학술조사를 실시한 결과 도자기·토제품·석제품·금속제품이 다수 발견되어 강원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석탑과 돌사자상이 남아있다.

갑둔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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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五層石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인제군 남면 갑둔리 산 69번지 소재. 2층 기단 위에 세운 오층석탑으로 파손상태가 매우 심하다.

백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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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潭寺

인제군 북면 용대리 외가평에서 동남쪽 약 8km 되는 내설악 쪽에 있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에 자장율사가 장경(藏經)을 전하고 율종(律宗)을 창건한 한계리 한계사의 고찰이다. 백담사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 제1182호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있다. 극락보전 안에 주불로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은 영조 24년(1784)에 조성된 것으로서 18세기 전반기의 불상 가운데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3·1운동 때 33인 중 한 분인 만해 한용운 선사(1879~1944)는 이곳에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와 시집 '님의 침묵' 등을 집필, 민족·생명·사랑의 철학을 겨레의 가슴에 심어주었다.전두환 전 대통령은 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2년 1개월 동안 이곳에서 비운의 은둔생활을 했다.

고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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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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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城-象徵物

고성군을 상징하는 꽃은 해당화,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 물고기는 명태이다.

고성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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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북동부에 위치하며 군의 북서부는 금강산괴(金剛山塊)의 준봉 오봉산(五峰山, 1,264m)·비로봉(毘盧峰, 1,638m), 무산(巫山, 1,320m) 등이 솟아 있고 남동부로 향하여 차차 완경사하고 있다. 하천은 남강·적벽강 등이 금강산괴의 여러 물줄기를 모아 동류하며 유역에는 비교적 넓고 비옥한 평야가 있어 도내 주요 산미지대를 이룬다. 지질은 주로 화강편마암계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면적 664.00㎢, 인구 3만 3,818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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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 임하고 또 서쪽은 태백산맥에 가리어 북서계절풍의 풍하(風下:leeward)에 있으므로 푄(F

hn) 현상으로 같은 위도의 영서지방보다는 현저하게 온난하며 가을에 비교적 비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연평균 기온 11.3

, 1월 평균 -1.6

, 8월 평균 기온 24.2

이며, 연 최고 기온 36.5

(1942. 6. 1) 최저 기온 -21.5

, 연평균 강수량은 1,100㎜이다.

고성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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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의 달홀(達忽)인데 신라 진홍왕 29년(568) 주(州)를 만들어 군주(軍主)를 두었고, 경덕왕이 고성으로 고쳐 군으로 하였다. 고려 때 현령(縣令)을 두었고 조선 세조 때 다시 군이 되었다. 고종 32년(1895) 강릉부의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폐하여 고성으로 되었다. 2읍(간성·거진), 4면(현내·죽왕·토성·수동)이 있다.

고성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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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동남부 남강 유역의 평야는 도내 유수한 산미지대이며, 감자 생산이 많고 기타 누에고치·꿀·소·약재 등을 산출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감자·누에고치·꿀·소·약초 등이다. 근해는 한난 양해류가 교류하므로 오징어·명태 등 많은 어족이 회유(回游)하여 호어장을 이루고 있다. 연안에는 거진·대진·아야진, 기타 여러 어항이 발달하여 있으며, 주요 어획물은 오징어·명태·꽁치·미역 등이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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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비·국수류·김류·명태·오징어·젓갈류·진부령치커리·청결미·팽이버섯 등이 유명하다.

고성의 교통·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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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觀光

도로는 해안에 연하여 발달되어 부산 현내면을 통한다. 인천∼간성읍간 46번 국도가 영서지방과 연결되며, 속초시∼북면 용대리간 466번 지방도가 동서로 지난다. 금강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미·계곡·비폭·삼림·사적 등이 조화된 세계적인 관광지이나 휴전선 때문에 개발되지 못하고 있음은 유감스런 일이다.

간성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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杆城邑

군청 소재지이며 교통의 중심지. 농수산물의 집산이 성하다. 또 고성(高城)은 구군청 소재지이며 역시 교통 중심지이다. 특히 해금강의 명승지를 끼고 있어 관광기지이며 동해안의 요지이다.

통일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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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소재. 북의 38도 35분의 지역으로 연간 1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드는 고성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북녘에 두고 온 산하와 가족을 그리는 실향민과 통일을 염원하는 이들을 위한 성모상, 미륵불상, 전진철탑 등 종교적인 부대시설과 장갑차, 탱크, 비행기 등 어린이 안보교육용 전시물이 있다.DMZ와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해발 700m 고지의 통일전망대에 서면, 금강산의 구선봉과 해금강이 지척에 보이고, 맑은 날에는 신서대·옥녀봉·채하봉·일출봉·진선봉 등 천하일경 금강산을 볼 수 있다.

청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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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澗亭

유형문화재 제32호. 사성면 청간리 81번지 소재. 창건연대나 창건자는 미상. 산록에 위치하여 성악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과 만경청파가 넘실거리는 기암절벽 위에 팔각지붕의 중층누정으로 아담하게 세워져 있다. 관동팔경 중 수일경으로 손꼽힌다. 조선조 중종 15년(1502)에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한 기록으로 보아 정자의 건립은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1884년 갑신정변에 소실되었다가 1928년 재건하였고, 1980년 정자를 완전 해체 복원하였다.청간정의 현판은 이조 현종 때 우암 송시열이 좌상으로 재직시 이곳에 들러 친필로 썼고, 그 후 1953년 고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현판이 현재까지 걸려 있다.

고성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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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양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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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1584)

조선시대의 문신·서예가. 호는 봉래(蓬萊). 154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삼등 현감·평양군수·강릉 부사·함흥 부윤 등을 지냈다. 회양 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때 만폭동 바위에 새긴 ‘봉래풍악 원화천’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초서와 글씨를 잘써 안평대군·김구·한호와 더불어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린다. 또한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는 유명하다. 저서로 '금강산 유람기' 등이 있다.

양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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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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襄陽-象徵物

양양군을 상징하는 꽃은 천엽황매화,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양양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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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강원도의 북동 중앙에 위치하며 군의 서경은 태백산맥이 뻗어 산악이 중첩하고 북서부에 설악산(雪嶽山, 1,708m), 남서경에 오대산(五臺山, 1,563m) 등이 솟아 동해안에 급경사하고 있다. 하천은 대개 짧고 급류이며, 수량이 적다. 그리하여 황천·천정천을 이루며 그 중에 큰 것은 남대천이다. 평지는 해안을 따라 2

4㎞의 폭을 가지고 길게 발달하고 있다. 해안선은 53㎞에 달하나 매우 단조롭고 곳곳에 사빈·석호·단구가 발달하여 경승지가 많다. 면적 629.00㎢, 인구 3만 173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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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 면하고 서쪽 태백산맥이 겨울에 북서계절풍을 가로막아 푄(F

hn) 현상으로 기온을 높여 같은 위도의 서해안에 비해 연평균 2.5

, 1월 평균 3

나 높다. 또 가을에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것도 특색이다. 연평균 기온 11.8

, 1월 평균 -2.2

, 8월 평균 24.3

, 최고 기온 39.2

(1939. 7), 최저 기온 -19

(1944. 2), 연평균 강수량 1,400㎜이다.

양양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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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때는 익현현(翼峴縣), 신라 시대에는 수역령(水域領)이었는데, 고려 원종 원년(1260)에 지양주사(知襄州事)로 승격되었다.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고 동 16년(1416) 양양이라 하고 1896년에 군으로 되었다. 1939년 속초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63년 1월에는 속초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독립하였다. 1979년 양양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양양), 5면(서·손양·현북·현남·강현)이 있다.

양양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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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해안과 남대천 연안에서는 주로 쌀이 많이 나고 감자·보리도 많이 난다. 축우와 양잠도 성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감자·콩·누에고치·한우 등이며 사과 등 과수 농업과 채소류도 많이 생산된다. 근해는 호어장으로서 어업이 성하다. 오징어·명태·대구 등이 많이 잡힌다. 천진·공현진(公峴津) 등은 어항이며 미역 양식도 성하다.지하자원으로서는 자철광이 2천만 톤이나 매장되어 있으며, 연간 약 28만t의 자철광이 생산된다. 이 철산은 함철 품위 50

60%의 자철광이며 삼한시대부터 지방민이 채굴하여 사용했다. 현재 남한 총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광석은 속초항을 통해 거의가 포항종합제철소로 공급되고, 약간량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현남면 지경리에서는 연간 1만 7천여 톤의 규사가 생산된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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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배·토종꿀·천연송이버섯·한우고기·인진쑥엿·감식초·연어·은어·영지버섯·느타리버섯·산삼·장뇌·감식초 등이 유명하다.

양양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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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서쪽에 태백산맥이 장벽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도로가 발달하였다.속초와 강릉·동해로 통하는 7번 국도가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통과하며, 한계령을 넘어 영서지방과 통하는 44번 국도와 홍천과 양양간 56번 국도가 지난다. 대관령을 넘어 서울과 강릉을 잇는 영동고속국도를 통해 고속버스가 속초까지 운행된다.

양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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襄陽邑

양양군의 북서부에 위치. 행정·교통·산업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해산물(특히 오징어)의 집산이 성하다.

8·15광복 후 북한에 속해 있다가 54년에 수복되었으며, 79년 5월 양양읍으로 승격되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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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田寺址三層石塔

국보 제122호.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소재. 신라 말엽 경애왕 때 건립한 화강암석탑으로 통일신라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지키고 있다.높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하고, 3층 탑신을 조성한 석탑으로 밑기단에 연화좌 위에 광배를 갖춘 비천상이 각 면에 2구씩 조각되었고, 윗기단에는 팔부중상이 각 면에 2구씩 조각되었다. 탑신과 옥개석은 받침이 5단이고 추녀의 네 귀가 약간 치켜들어 경쾌한 아름다움이 있으며 풍경이 달렸던 자리가 남아 있다. 높이가 5m로 상륜부가 모두 없어졌으나 완숙하고 세련된 불상 조각이 있어 통일 신라시대의 대표적 석탑 중 하나이다.

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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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産寺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 안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굴 속에 들어가 예불하던 중 관음보살이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 주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낙산사라 하였다 한다.헌안왕 2년(858) 범일대사가 중창하였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조선 세조 13년(1467) 왕명으로 크게 중창하였고 예종 원년, 9년(1631)과 21년(1643) 재차 중건이 있었으나 정조 원년(1777)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 다시 중건하였다. 6·25 전쟁 때 또다시 소실되어 1953년 재건하였다.보물 제449호인 동종, 보물 제499호인 7층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홍예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인 낙산사담장 등이 유명하다.

의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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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湘臺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의상대사의 좌선처였던 이곳에 1925년 정자를 짓고 의상대라 명명했다.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육각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