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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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의 상징물[편집]

忠淸北道-象徵物

충청북도를 상징하는 꽃은 백목련,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

충청북도의 자연[편집]

-自然

위치[편집]

우리나라 유일의 바다가 없는 내륙도인 충청북도는 한반도 전체에서 보면 남부를, 남한에서는 중부를 차지하며, 이 곳을 수도 서울과 영남 또는 호남을 연결하는 국도, 철도(경부선·중앙선), 경부고속도로까지 통과하므로 지리적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총면적 7,432.56 ㎢(전국의 7.5%)이며 남북의 길이가 157.865㎞이고 동서가 142.08㎞인 충북은 인구와 면적에서 남한에서는 제주도 다음 가는 작은 도이며, 본도 북쪽은 경기도 안성·이천·여주, 그리고 강원도의 원주·영월의 제군과 접하고, 동쪽은 경상북도의 영주·예천·문경, 상주와 서쪽은 대전광역시·충청남도의 천안·연기·금산과, 남쪽은 전라북도 무주 등과 접경하고 있다.충북의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대략 북위 36

00

42

(극남, 영동군 용화면 남단)에서 38

14

53

(극북, 제천시 송학면 북단) 사이에, 동경 127

15 31 (극서, 청원군 강외면 서단)에서 128 33 29

(극동, 단양군 영춘면 동단)에 걸쳐 있다. 한반도의 중앙자오선(子午線)인 127

30

은 본도의 도청 소재지인 청주시 동쪽을 통과하고 있다.

지질 및 지형[편집]

지질구조는 소백산맥과 옥천 지향사의 주향을 따라 남동쪽으로부터 시원대(始原代)의 편마암·천매암과 규암, 화강암대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고, 북동부에는 고생대의 평안계와 조선계의 석회암 지층이 넓게 분포되어 있어서 지형이나 지하자원의 매장, 삼림의 임상과 토양은 물론, 수력자원 개발과 입지의 한 조건이 되고 있다.한편 지형을 살펴보면, 차령산맥이 강원도 및 경기도와의 도계를 따라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달리고, 소백산맥이 경상북도와의 도계를 따라 대체로 북동에서 남서로 뻗고 있다. 따라서 충북은 서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2개의 산맥으로 둘러싸인 한 개의 큰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북쪽과 남동쪽이 높고 서쪽 내지는 남서쪽이 낮아지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차령산맥은 태백산맥 중의 오대산(1,563m) 부근에서 분기(分岐)되어 본도의 북부를 지나 충청남도의 중앙부를 남서 방향으로 달리면서 황해로 몰입해 있다. 주로 화강암, 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고도는 남서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며 북동쪽은 약 1,000m 내외의 산봉들이 솟아 고도가 있으나 남서부에 이르러서는 500

600m로 저하하여 노년기 산지의 구릉성·잔구성 지세를 나타내고 남한강 또는 그 지류 하천들에 의하여 침식 절단되는 부근에서는 고도가 현저히 저하되고 산맥의 윤곽이 뚜렷하지 못한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이름난 산봉들로는 북동부의 백운산(1,087m), 사자산(1,167m), 남대산(1,131m) 등과 남서부의 고도가 극히 낮아진 잔구성 외 서운산(579m), 금계산(575m), 대화산(455m), 송학산(810m), 성주산(680m) 등이 있다. 북동쪽의 소백산맥은 역시 태백산맥의 태백산(1,549m) 부근에서 분기하여 영남지방 및 호서지방과의 일대 장벽을 이루고서 남서 방향으로 뻗고 있다. 주로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고, 산맥 중에는 소백산(1,440m), 속리산 (1,057m), 도솔산(1,421m), 민주지산(1,242m), 황학산(1,111m), 조령산(1,017m) 등 1,000m 이상의 준봉이 솟아 있어서 남한 최고의 산맥을 이루며, 단양의 죽령(689m), 문경의 조령(642m)·이화령(548m), 황간의 추풍령(548m) 등의 안부(鞍部)는 영남·호서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가 되고 있다.충북은 남한강과 금강의 2대 하천유역에 속한다. 그 중 남한강은 오대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도의 북동부에서 단양군과 제천군을 흐르면서 단양·황강 등의 지류를 합치면서 중원군의 목행부근에서 달천과 합류하여 유로를 북서로 향하여 경기도의 여주군으로 유출된다. 남한강은 단양을 중심으로, 상류측 산간유로에서는 크게 감입사행하며 영춘 부근의 하천연안에서는 활주사면(滑走斜面)을 중심으로 하안단구(河岸段丘)가 발달되어 취락·경지·교통로 등으로 이용되고 침식분지·곡저평야·충적평야 등이 소규모로 분포되고 있다. 한편 단양 하류측의 유로는 비교적 자유사행(自由蛇行)의 형태를 취하면서 충주 분지 유로 연안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충적평야를 전개시키고 있다.한편,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발원하여 심천·초강·보성천·감천·미호천 등의 지류를 합쳐서 충청남도 쪽으로 유출한다. 이 유역도 남한강 유역과 같이 침식분지, 곡저평야, 충적평야 등이 발달되어 있고, 심천 부근은 감입사행이 발달되고 미호천 유역에는 마호평야가 전개되었다. 본도는 100m 이하의 저지대가 총면적의 약 9.9%에 불과하고, 100

500m의 저구릉 지대는 약 75%, 500

1,000m의 저산지대는 약 14%, 1,000m 이상의 산악지대는 1.6%에 불과하다.

기후[편집]

한반도의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나 바다가 없는 내륙도라 위도에 비하여 한서의 차가 큰 편이다. 1월 평균온도선 -3

선이 적도 쪽으로 만곡형을 이루면서 본도의 북쪽 차령산맥을 따라 지나가며, 연평균 기온은 전도를 통하여 10.1

에서 11.6

이며 1월 평균 기온은 -3

4

이고, 8월 평균 기온은 28

내외로서 기온의 연교차(年較差)는 약 30

에 달해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것은 동부의 산악지대로 갈수록 기온의 교차는 점점 더 심하여, 충주가 -5.3

, 제천이 -6.4

가 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륙형 대륙성 기후의 기후 조건은 본도의 과수재배나 특용작물 재배에도 중요한 인자(因子) 역할을 한다.연강수량은 약 1,000㎜

1,200㎜로 내륙으로 갈수록 감소하는 경향이며 여름 집중강수현상이 뚜렷한데, 청주의 경우, 12월에서 2월까지의 동계강수량이 85㎜로서 1년 강수량의 8%에 불과하고, 3월에서 8월까지의 강수량은 약 720㎜로서 72%에 달하며 9월에서 11월 사이는 약 200㎜로서 20%에 해당하여 이를 뒷받침해 준다. 여름의 집중호우현상은 내륙지방의 하나의 공통적인 기상현상이기도 하나, 홍수와 한발이 주기적으로 오고 있다.또 본도의 북동지방에는 초여름에 높새바람 현상이 나타나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도 한다. 일조시수는 약 56%로 인천 지방보다는 약 4%가 적으나, 광주 지방보다는 약 2%가 높으며, 증발량은 약 1,200㎜ 내외로 서해안보다는 100㎜ 내외가 낮다.

식생[편집]

도내의 자연식생을 살펴보면, 특히 영남지방과 강원도와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천연식생의 좋은 표본장이 되고 있다. 수종(樹種)으로는 대체로 온대혼합림대로서 그 중에는 침엽수, 특히 소나무류가 우세하여 적송·낙엽송·리기다 등의 이차림(二次林)이 널리 도내 일원에 분포되고, 또한 떡갈나무·상수리나무 등 활엽수도 많이 자라고 있다. 그리고 소백산맥 중에는 냉온대와 난대성 식물의 특산종들이 많다.

청주분지[편집]

淸州盆地

미호천 유역의 조치원을 중심으로 부강·청주·증평·진천 일대에 걸쳐 발달한 분지이며, 이 지방의 곡창지대로 경제 중심지이다. 중심지 청주는 부근 일대에서 생산되는 담배·면화·쌀 등을 집산하며, 도청소재지로서 정치·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충주분지[편집]

忠州盆地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천의 합류지점에 발달된 충주분지는 높이 100m 내외의 침식 구릉군과 하천퇴적물로 형성되어 비옥한 평야를 이루어 미호 평야와 함께 도내의 2대 곡창을 이루며 주요 기간산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쌀·담배·인삼·사과 등을 생산하며 한때는 남한강 주운(舟運)의 종점으로서 번영했다.

추풍령[편집]

秋風嶺

본도의 남쪽 도계를 이루는 소백산 중에서 제일 낮은 안부(鞍部)를 이루는 재(548m)이며, 같은 이름의 역도 있다. 고대 진한(辰韓)·마한(馬韓)과 신라·백제의 국경으로 된 적도 있었는데 현재는 경부선·국도·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경부철도의 최고지점이기도 하다. 한편, 이 곳에는 기상측후소가 있고 계절에 따른 기상변화가 심하며 상공에서는 난기류가 수시로 발생하여 항공교통에 장애가 된다. 이 고개를 경계로 기상, 특히 언어·풍속이 완연히 다르다.

조령[편집]

鳥嶺

문경과 수안보간의 소백산맥의 안부(鞍部)에 위치한 재(642m)이며, 과거에는 영남과 서울을 연결하는 주요 국도였으나 지금은 쇠퇴하여 한낱 지방도로로 전락하여 과거의 성시를 말해 주는 관문(關門)과 소수의 가촌(街村)만이 있을 뿐이다. 특히 현재 이 곳을 통과하는 국도는 조령 남쪽에 위치한 이화령(梨花嶺, 548m)이 이용되고 있디.

충청북도의 연혁[편집]

忠淸北道-沿革

충청북도는 2003년 말 현재, 행정상으로 3시 9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행정구역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살펴 보면, 삼한(三韓)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했으나 그 후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백제·신라·고구려가 각각 점령하여 삼국간의 각축의 터가 되었다. 통일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통일하면서 예종 1년(1106)에는 현 충청남도, 즉 하남도(河南道)를 병합하여 양광(楊廣) 충청도라 칭하였다. 당시는 2(홍주·청주) 2주(州)로 다스렸다.1176년에는 양도를 합하여 양광도(楊廣道)라 하였고, 고려말인 1356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충청도라 불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었는데 조선 고종 33년(1896)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충청도를 남도와 북도로 구분하고, 충주에 본도의 도청을 두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충청북도로 불리게 되었다. 1908년에 도청을 청주로 옮기고 18군, 99면을 두었다가 그 뒤 몇 차례의 개편을 거쳐, 1940년에는 10군 4읍 102면으로 되었고, 1946년에는 청주읍이 부로 승격하였다. 1949년에는 옥천·증평·음성면이 읍으로 청주부가 시로 승격되었다. 1956년에는 충주읍이 시로, 1973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보은·진천·금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9년에는 괴산면·단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9년에는 괴산면·단양면이 읍으로 승격, 1981년에는 제천군이 제천시와 제원군으로 분리, 매포면이 읍으로 승격, 1983년에는 강서면이 청주시로 편입되었다. 1991년 제원군이 제천군으로 환원되고 영동군 황간면이 추풍령면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정부의 시군통합에 따라 제천군이 제천시로, 중원군이 충주시로 각각 편입되었다. 2003년 증평출장소가 증평군으로 승격되어 현재 3시 9군 2구 13읍 90면을 관할한다.

충청북도의 인구[편집]

忠淸北道-人口

분포[편집]

총인구는 150만 4,518명(2001.12)이다. 산술적인 인구밀도는 143명으로 전국의 446명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다. 충북의 인구분포는 산악지대는 대부분 200명 이하인데 대하여, 평야지대나 도시는 비교적 높다. 연도별 인구추이를 보면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증가율이 둔화되다가 1966년을 고비로 현저한 감소를 보였는데, 특히 군부(郡部) 인구가 심하고, 시부(市部) 인구는 계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였으며 현재는 전반적으로 점진적인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동[편집]

도내 인구동태를 알기 위하여 1984년의 전입과 전출상황을 살펴보면, 총이동 중, 전입 15.5, 전출 18.7로서 시·도내간 이동이 10.1이고 시도간 이동이 전입 5.4, 전출 8.6으로서 전반적으로 전입보다 전출이 많아 급격한 인구 증가를 둔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고 있고, 1984년 총전입 인구수는 22만 2,296명으로 그 중 남자가 11만 3,385명, 여자가 10만 8,911명인데, 남자 전입 인구수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전입 사유를 보면 직업 관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여 충북의 산업발전과의 관련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60년대 초반에는 완만한 인구증가율을 보이다가 1966년을 정점으로 크게 둔화되었고 그 뒤에는 가족계획사업과 농촌 부동인구의 도시 흡수라는 사회적인 이동에 따라 인구는 완만한 증가를 보이고 있으며 2001년의 경우는 전입이 23만 828명, 전출은 23만 9,356명이다.

충청북도의 산업[편집]

忠淸北道-産業

농업[편집]

총 농경지 면적은 13만 3,515㏊(논 6만 4,484㏊, 밭 6만 9031㏊)로 2001년 한해 쌀 35만 1,890t, 두류 등 밭작물 16만 3,671t을 생산했다. 사육 가축 수는 2001년 말 현재 한우 10만 7,690마리, 젖소 3만 3,036마리, 돼지 50만 9,419마리, 닭 1,065만 3,276마리이다. 특히 특용작물로서 담배는 황색연초를 재배하여 괴산군·음성군·중원군·청원군 등이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매년 생산량이 늘고 있다.

임업[편집]

임야면적은 50만 2,446㏊로 전국임야의 7.8%를 차지하고 있는데 국유림 7만 693㏊, 공유림 8만 2,406㏊, 사유림 34만 9,347㏊이다. 88년부터 산지자원화 10개년계획을 수립, 자원조성과 이용개발을 조화있게 추진했다. 임상은 침엽수 1,066만 6,288㎡, 활엽수 885만 1,718㎡, 혼효림 862만 6,601㎡이다(2001).

광업[편집]

시원대, 고생대 평안계, 조선계 등의 지질구조로 금·은·철·중석·수은·석회석·무연탄·활석·형석·흑연

등의 매장량이 많고, 그 중 금은광은 괴산군과 영동군·청원군 등에 집중되어 있다. 철광은 단양군·옥천군에 집중되어 있으며 특히 충주 철산과 연수동 광산이 유명하다. 중석은 제천시와 단양군에 석회석은 단양과 매포를 중심한 지역이 주산지가 된다.특히 풍부한 석회석을 원료로 한 시멘트 생산이 활발해 한일, 성신, 아세아, 현대 등 4개 시멘트공장에서 96년에 1,884만 2,000t 시멘트를 생산했다.

동력[편집]

충청북도는 남한강·금강 상류에 위치하여, 남한에서는 가장 발전 가능량이 큰 포장 수력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개발하지 못한 채로 있다. 1970년대 말까지 이용되고 있던 수력은 괴산 수력발전소의 2,600kW뿐이었으나, 1980년 금강 수계의 대청 수력발전소(9만 kW)가 완성되었고, 1985년 6월과 9월에 남한 최대의 충주 수력 제1발전소(40만kW)와 제2발전소(1만 2천kW)가 준공되어 경기도·강원도와 어깨를 나란히 동력을 갖추게 되었다.

공업[편집]

풍부한 지하자원과 공업 용수, 값싼 노동력 등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공업은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단양·제천 등지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석회석을 원료로 하여 연간 800여 만t을 생산하는 시멘트 공업과 카바이트 공업은 이 지방의 공업을 대표하고 있다.2001년 말 현재 제조업체 2,687개소에 10만 3,227명이 종사하고 있다. 이 가운데 계획입지는 16.6%인 575업체 5만 198명, 개별입지는 83.%인 2,888업체 6만 4,032명이 종사하고 있다. 산업기반 확충을 위한 단지는 총59개 단지 1,419만 2,000평 조성계획에 43개 단지 404만 5,000평이 조성 완료되었다.공업 지구로는 동부에 충주·제천·음성 등의 요업(시멘트·석회)·화학(플라스틱·유지)·제사·식품을 주로 하는 공업지역과 서부에 청주·청원·옥천·영동·진천 등의 전자 기기·기계 부품·화학·섬유·식품 등을 많이 생산하는 공업 지역으로 나뉜다.

충청북도의 교통[편집]

忠淸北道-交通

철도는 경부선이 도의 남서부를 관통하고 충북선이 경부선의 조치원에서 분기하여 도 중앙을 통과하면서 중앙선의 봉양(鳳陽)에 연결되어 있고, 한편 중앙선이 동부를 횡단하여 제천에서 태백선이 분기되어 강원도로 연결되어 철도교통은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도로 총연장은 6,045㎞, 330개 노선으로 이 가운데 국가지원 지방도로 256km, 고속도로 3개 노선 156, 일반국도 923, 지방도로 42개 1,214, 시·군도 3,466㎞ 이며 포장률은 65.7%이다.철도는 경부선, 중앙선의 일부가 통과하고 조치원

제천간 126.9㎞의 충북선이 1980년에 복선화되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84년 착공된 청주

충주간 4차선 확·포장공사가 1993년 말 완공됐으며 충주

제천간 4차선 확·포장공사가 진행중이다.청주국제공항이 91년 말 착공돼 97년에 개항되는 등 충북지역이 항공 및 고속도로, 철도 등 입체 교통망을 갖춘 최고의 교통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충청북도의 관광[편집]

忠淸北道-觀光

충북의 관광지는 크게 보아 동부의 단양 지구(단양팔경), 서부의 속리산 국립공원을 들 수 있으며, 전자는 중앙선, 후자는 경부선과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다. 주요 관광자원으로 충주호·대청호 등 2대 호반, 속리산·월악산·소백산 등 3대 국립공원, 고수동굴·천연동굴·노동동굴·온달동굴 등 4개 천연동굴, 이 밖에 수안보온천, 흥덕사지 고인쇄박물관, 속리산 법주사, 월악산 덕주사, 천태산 영국사, 단양의 구인사 등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속리산[편집]

俗離山

속리산은 보은군·괴산군과 경상북도 상주군 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 8경 중의 하나로 남서방향으로 뻗어나온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위치하며 다수의 명승고적이 몰려 있으며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여 변성퇴적암이 군데군데 섞여있어 변성 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이고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올라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이룬다.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종·관음봉·묘봉·수정봉 등 8개의 봉우리와 문장대·입석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신선대·봉황대·산호대 등 8개의 대가 있으며 속리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광명산·지명산·미지산·구봉산·형제산·소금강산·자하산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총면적이 283.4㎢로써 산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산림과 더불어 그 풍취와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금강·한강·낙동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속리산은 우리나라 교구대사찰 가운데 하나인 법주사를 중심으로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들이 조화롭게 위치하여 풍취와 경관이 절경일뿐 아니라 고적과 천연기념물들이 도처에 깔려 있어 산행과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백산[편집]

小白山

소백산족의 정기를 한껏 보아 한반도의 중심에 우뚝솟은 소백산맥은 장백, 태백과 함께 민족의 성산으로 추앙받고 있다. 반도의 등뼈격인 태백산맥의 줄기가 서남 쪽으로 뻗어내려 강원도·충청도·전라도와 경상도를 갈라 큰 산계를 이루고 아름다운 관광도시 단양의 지붕으로 자리하고 있다.형제봉을 시작으로 남쪽 산맥을 따라 신선봉·국망봉·비로봉·연화봉·형제봉 등 명봉들이 구비치면서 봄에는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천자만홍을 이루고 녹수청산과 만산홍엽으로 철철이 단장하다가 겨울이면 백색초지의 설경과 눈꽃, 그리고 망망운해가 장관을 이루어 한국의 알프스를 연상케 한다.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1439m)은 희귀식물인 에델바이스가 철쭉과 앙상블을 이루고 예로부터 왕실의 가구제로 쓰여졌던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주목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고 할 만큼 질이 단단하고 굽지 않는데 최근에는 60년생 주목 한 그루면 한 사람의 암을 치료할 수 있는 항암물질을 추출할 수 있다고 한다. 국망봉(1420m)은 북으로 신선봉과 형제봉 동으로는 문수산, 선달산의 능선이 아련히 밀려오고 남으로는 연화봉·도솔봉이 바다의 파도처럼 시야를 파고드는 한편 가까이 비로봉으로부터 산능들이 해일을 동반하고 밀려오는 듯 하는 파노라마는 일대 장관이다. 연화봉(1394m)은 매년 연분홍 철쭉이 온 산야를 뒤덮을 즈음인 5월말부터 ‘소백산 철쭉제’가 성대히 열리고 있어 산신제, 철쭉여왕 선발, 마늘아가씨 선발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즐길 수 있으며 정상에는 우리나라 천문공학의 요람인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의 국립천문대가 우뚝 자리잡고 있다.

청주시[편집]

청주의 상징물[편집]

淸州-象徵物

청주시를 상징하는 꽃은 백목련,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

청주의 자연[편집]

-自然

청주 분지의 대략 중앙, 경부선의 조치원에서 31㎞ 떨어진 충북선의 중심역으로, 미호천의 지류인 무심천의 동안에 남북으로 길게 발달한 도시이다. 시의 동쪽을 낙가산 연맥(連脈)이 우암산·당선산을 일으키며 남주하고, 서부는 100m 이내의 잔잔한 구릉이 물결쳐 미호평야에 연달아 있는, 즉 평야지대에서 산지에 이르는 점이지대이다.면적 153.31㎢, 인구 59만 4,716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 11.4

, 1월 평균 -3.3

, 8월 평균 25

, 최고 기온 38.9

(1939. 7), 최저 기온 -28

(1937. 1), 연평균 강수량 1,200㎜이다.

청주의 연혁[편집]

-沿革

원래 백제에서 상당현(上黨縣) 또는 낭비성(娘臂城)이라 불렸던 곳으로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 때에 서원경으로 승격, 고려태조 23년(959)에 청주로 하고 성종 2년(983)에 목(牧)을 두었다. 성종 14년(995)에 절도사를 두고 전절군(全節郡)으로 개명,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다가 현종 3년(1012)에 이를 폐하고 안무사로서 판목사를 겸하게 하였다. 그 후 곧 이를 폐하고 많은 변천을 거쳐 1895년 군(郡)이 되고, 1896년 13도제(道制) 실시로 충청북도에 편입되었다. 1908년에 도청이 충주로부터 이 곳으로 이전되었다. 1946년 청주읍이 부(府)로 승격됨으로써 잔여의 군부(郡部)는 청원군(淸原郡)으로 개칭되고 1949년 시로 승격되었다. 1963년에는 청원군의 사주면을 편입시켜 시역의 확장을 보았다. 2004년 현재 2개 구와 29개 동을 관할한다.

청주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편집]

경지 면적 4,449㏊ 중 논 2,744㏊, 밭 1,705㏊로서 논이 약간 많으나 공업의 발달과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논경지는 감소 추세에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밀·콩·배추·무우·수박·사과·복숭아·담배·누에고치 등이며 낙농업과 육우 사육도 성하다.

공업[편집]

정치와 교육도시로서 발달하여 왔으나 근래에 와서 풍부한 노동력과 부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공업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했다. 총면적 398만 9,000㎡ 규모의 청주공업단지가 4개 공단으로 조성, 기계·금속·전기 등 100여 개의 업체가 입주해 있다.

특산물[편집]

청주대추술·한국도자기·초정탄산수 등이 유명하다.

청주의 교통[편집]

-交通

경부선이 조치원을 통과하여 불편하였으나 조치원∼제천간의 충북선이 개통된 후부터는 다소 완화되었다. 또 도로가 청주를 중심으로 사통팔달되어 있어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가 서쪽 교외를 통과하고 1987년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청주의 시황[편집]

-市況

도청 소재지인 청주는 도내의 행정적 중심지라기보다는 교육도시로서 유명하다. 1908년 도청이 충주에서 이전해 오고 1902년 충북선이 개통된 후부터 급속히 발전하여 1949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북문로·남문로 등 일대에 중심 상가가 발달되어 있다. 미호천 유역 지방이 생활권의 중심지로서 특히 상업이 성하다. 최근 제사·연초·고무·미강유 제조업이 일어나고 또한 공업단지가 조성됨으로써 소비도시의 성격을 탈피하고 있다. 59만 인구의 청주시에 학생이 40% 선을 육박하고 대학 4, 중고등학교 54, 초등학교 47개 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교육도시임을 입증하고 있다. 시가지는 동부 산지와 무심천에 제약되어 남북으로 길게 발달되었다. 최근에는 무심천을 건너 조치원에 통하는 공로를 중심으로 점점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주요 기관으로서는 충청북도 도청·청주시청·청원군청·지방법원·지방검찰청·도립병원·방송국·전매국·국립 충북대학교를 비롯하여 청주대학·청주여자대학·청주교육대학·충북일보사 등이 있다.

청주국제공항[편집]

-國際空港

1997년 4월 28일 개항. 중부권 거점 공항으로서의 기능수행과 유사시 수도권 대체공항의 역할 담당 및 국제 화물공항으로서의 기능 분담. 22,006㎡으 여객청사에 연 2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국제·국내 가변 사용이 가능하다.

용두사지 철당간[편집]

龍頭寺址鐵幢竿

국보 제41호. 두 개의 화강암 지주와 20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간의 밑에서 3번째 단에 당기(幢記)가 양각되어 있어 조성연도(고려 광종 13년, 962)를 명확히 알 수 있으며 당시 ‘준풍(峻豊)’이라는 고려 독자의 연호를 널리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그러나 이 당간이 소재했던 용두사의 규모 및 창건·폐사년대는 정확하지 않다.현재 전국에는 청주의 용두사지 철당간, 공주 갑사의 철당간, 나주 동문밖 석당간, 담양 읍내리 석당간 등이 남아 있는데, 이 철당간만이 조성연대가 명확하다.당간의 높이는 13.1m, 철통 20개(당초 30개), 지주는 화강암으로 높이 4.2m, 폭 40cm이다. 철통의 지름 43cm, 높이 65.5cm이며, 철당기의 해서체 글자 크기는 2.8cm이다.

상당산성[편집]

上黨山城

사적 제212호.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이름인 듯하며 둘레가 4.2km, 높이 2~4m, 면적 54,700평의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지금의 상당산성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에서 45년까지 충청병사 유성추의 감독으로 대대적인 성벽개축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성내에 구룡사와 남악사의 2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음이 성문 무사석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 후 여러 번의 수축이 이루어져 성내의 여러 시설인 관아사, 군기고, 창고, 수구, 장대, 포루 등이 완성되었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동문(鎭東門), 서문(弓耳虎門), 남문(控南門)의 3개 문과 동암문 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는데, 77년부터 78년까지 정비공사로 동·남문루와 동문이 재건되었고 1992년 말에는 동장대(棟和亭)도 재건되었다.또한 1995년도의 발굴조사로 서장대(制勝堂)의 규모(15평)와 위치가 확인되었다. 현재의 저수지는 본래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1943년에 만든 것이다.

충주시[편집]

충주의 상징물[편집]

忠州-象徵物

충주시를 상징하는 꽃은 국화, 나무는 사과나무, 새는 원앙이다.

충주의 자연[편집]

-自然

중원군의 중앙에 위치하며 동부와 남부는 산지로, 북부는 한강, 서부는 그 지류 달천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지로 되어 있다. 부근 일대를 충주분지라고 하고, 동남의 산지는 소백산맥의 여파이며 문수봉(1,162m·포암산(962m)·월악산(1,093m) 등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으나 서북부는 200m 이내의 저평한 구릉성 평야로 되어 있으며 전 지역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기후[편집]

내륙에 위치한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충주분지 일대에 걸쳐서 냉량성(冷凉性) 과실인 사과가 대량 생산되는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고, 또 온대성인 황색연초를 집중 재배하게 된 것도 이 지방의 하기 고온상태와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연평균 기온 11.5

, 1월 평균 -6.4

, 8월 평균 26.5

, 연평균 강수량 1,150㎜이다.

충주의 연혁[편집]

-沿革

고구려는 국원성(國原城), 일명 미을성(未乙省)·난장성(亂長城)이라고도 했다. 신라 진흥왕 때(540∼575)에는 성을 공략하여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경덕왕 때(742∼764)에 중원경(中原京)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태조 때(918∼943) 충주라 칭하고 목사(牧使)를 두었다가 절도사를 주재시키고 창화군(昌化軍)이라 하고 중원도(中原道)에 예속시켰다. 현종 때는 이를 폐하고 안무사(安撫使)를 두었고 후에 8목(牧)의 하나가 되었다. 고종 41년(1254)에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하고 그 후 다시 목으로 되었다가 조선 세종 31년(1449)에 관찰사를 두어 판목사를 겸임하였다. 세조 때 진을 설치하고 본도 도청 소재지가 되었으나 1908년 도청이 청주로 이전되고 1956년 7월에 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1월 중원군이 충주시로 편입되었으며 12개 동, 1개읍 12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주의 산업[편집]

-産業

전 지역이 구릉성 산지가 많아 논보다 밭이 많으며 농업이 성하다. 달천강 유역을 중심으로 곳곳에서는 무·배추 등 채소를 많이 생산하는데 특히 무는 호평을 받아 원주·청주 등지로 반출된다. 음성·괴산과 더불어 황색연초는 농촌경제를 좌우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특산물이다. 또 인삼과 알이 굵은 것으로 이름난 사과가 많이 생산되고 양잠·축산도 성하다. 광산물은 그 종류와 매장량에 있어서 도내 유수에 속하나 자금난으로 채굴이 활발하지 못하다. 근년에 충주 비료공장을 비롯해 섬유·식품·활석제분 등 공업이 크게 일어나고 있어 공업의 비중이 점점 커 가고 있다.

농업[편집]

주요 농산물은 쌀·감자·고구마·담배·참외·무·배추·사과·배·포도·복숭아·누에고치·인삼 등이다. 특히 충주미는 옛날부터 성가가 높았으며 원예농업 비율은 전국적이어서 과수원예·고등원예의 비율이 다른 시·군에서는 그 예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고 있다. 과실 중에서도 사과는 도내 생산량의 50%를 초과하고 있다.

광공업[편집]

각종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금·은·구리·납·아연·철광·텅스텐·몰리브덴·규석·형석·활석 등이 활발히 생산된다. 특히 활석은 매년 약 14만t이 생산되어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한다. 이 밖에 동량면에는 시내에서 제일 큰 규석광산이 있으며 앙성면의 중석광과 살미·상모면의 동광이 주목을 끌고 있다. 또 충주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목행동에는 새한미디어 공장이 입지해 있고 충주비료 공장을 비롯, 많은 기업체가 있다.

특산물[편집]

거베라·상추·고추·쌀·느타리버섯·오이·밤·토마토·복숭아·팽이버섯 등이 유명하다.

충주 수력발전소[편집]

忠州水力發電所

남한강 상류에 있는 발전소로 제1 발전소는 충주댐의 본댐이 있는 종민동과 동량면 조동리에 있다. 시설용량은 40만kW이며, 연간 7억 6,460만kWh 의 전력 생산이 가능하다. 제2발전소는 본댐 하류 16km 지점인 가금면 장천리와 금가면 월상리 사이의 조정지 댐에 있다. 시설용량은 1만 2,000kW이며, 연간 7,950만kWh의 전력 생산이 가능하다.

충주의 교통[편집]

-交通

옛날부터 서울까지 한강 수운이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새재(鳥嶺)를 넘어 부산에 달하는 경부 공로와 충남과 강원도 방면에 통하는 도로가 교차하고, 경부선과 조치원에서 제천에 이르는 충북선이 시의 중앙을 동서로 통과하고 있어 편리하다.

충주의 관광[편집]

-觀光

부근에는 탄금대·수안보 온천을 비롯해 억정사대지국사비(보물 제16호)·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보물 제17호)·칠층석탑(七層石塔, 中央塔, 국보 제6호)·오층석탑(보물 제95호)·석불 입상(보물 제96호)·마애불좌상(보물 제97호) 등과 천룡산(天龍山)·보련사·용두사·대림산성·남산성지·단월대·충주성지·정토사·호암지 등 명승고적이 있다.

충주의 시황[편집]

-市況

면적 983.90㎢, 인구 21만 6,036명(2001.12)이다. 내륙 교통의 요충지를 차지하고, 도(道) 행정 중심지로서 발전한 도시인데 1908년 도청이 청주로 이전되고 경부선이 조치원을 통하여 개통되었으므로 한때 침체하였다. 그러나 충북선과 각지에 도로가 개통되고 여러 공장이 속속 건설됨으로써 신흥 공업도시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대도시와 연락하는 일반 여객은 충북선보다는 직통하는 버스편을 주로 이용하므로 상업·교통의 중심지는 자연 성내·성남·성서·교현동 일대의 극히 좁은 지역이 되며 시청을 비롯한 많은 관청이나 기관은 용산동에 몰려 있어서 명확한 지역 분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소위 주택·관청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동에는 상설 시장이 있는데, 주로 생활필수품과 농산물이 집산되며 특히 사과·연초·채소 등이 많이 산출되어 거래가 활발하다.시청과 중원군청 외에 주요 문화기관으로서 충주 공업전문학교를 비롯해서 초등학교 38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1개교, 대학 3개교, 기타학교 6개교 등이 있다.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편집]

中原塔坪里七層石塔

국보 제6호.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 소재. 현재 남아 있는 신라석탑으로는 가장 높은 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이지만 탑신에 비해 기단부의 너비가 넓어졌다. 기단은 각부를 몇 장의 돌로 조립하였는데 아래위층 기단이 모두 면석에 탱주 네 개씩을 세워 놓았다. 탑신부 역시 각 부를 몇장의 돌로 구성하였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들면서 중적되었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이 모두 5단으로 되었으며, 옥개석 각측마다 낙수홈이 파여있다. 상륜부는 노반을 이중으로 포개어 쌓았고 그 위에 복발 앙화만이 남아 있다.세부수법에 있어서 양식과 섬약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며 전체의 형태도 높이에 비하여 너비의 비례가 적어서 지나치게 높은 느낌을 준다. 1917년 보수 때 제6층 옥신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제6층 옥신에서는 경감 2매, 칠합 1개, 은제사리병과 그 안에 들어있던 유리제사리병 하나씩이 발견되었다.

중원 고구려비[편집]

中原高句麗碑

국보 제205호.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11 소재. 석비의 형태는 석주형으로서 자연석 형태를 이용하여 각 자면을 다듬고 비문을 새겼는데, 비두부터 광개토대왕비와 흡사하여 두툼하고 무게가 있어 보이며 글체는 고졸한 예서풍이다. 비문은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이 판독 가능한 상태이나 석비 서두의 ‘고려대왕’이란 명문의 고려는 고구려를 가리킨다.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이 비의 성격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의 여러 성을 빼앗고 개척한 척경비로 보이지만 앞면과 왼쪽 측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앞면 상단의 비명을 비롯하여 판독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이다. 오른쪽 측면에서의 글자는 ‘임자(壬子) 벌(伐), 공(公) 중잔(衆殘), 불(不), 사(使), 소(小)’ 자 등이 뚜렷하게 보이고 뒷면은 각자(刻字)의 흔적만 확인되었다.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편집]

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국보 제197호.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 32 소재. 탑비에 의하면 보각국사가 태조 원년(1392)에 73세로 입적하자 태조가 내신으로 하여금 칙명으로 조성토록하여 권근이 비문을 짓고 석천택이 써서 태조 3년(1394)에 세우고 탑명을 정혜원융이라 하였다.탑을 중심으로 하여 뒤에는 보각국사비를 세우고 앞에는 배례석과 석등을 장엄하게 갖추었다. 탑은 9각 원당형으로서 지대석 위에 하대·중대·상대를 얹고 그 위에 8각의 탑신과 옥개석을 갖추었다. 소문의 8각 지대석 위에 놓인 8각의 하대는 어형 2단의 받침 위에 얹혀 복연 16판인데 판 안에 삼산형의 화판이 조식되어 있으며 1단의 굄이 조각되어 있다.중대는 엔터시스형이며 8면에 장방형의 안상이 마련되었고 그 안상에 운룡과 사자상이 교차로 4면씩이 배치되어 있다. 상대는 1단의 각형 받침 위에 16엽의 앙연이 하대의 복연과 아래위 대칭으로 조각되었으며 그 상단에 탑신굄이 없어 8각의 홈을 파서 탑신을 안정시켰다.8각 탑신의 합각마다 두리기둥으로 표현된 우주에 기둥을 오르는 반룡이 조각되었고 면마다 장방형의 안상이 마련되었는데 안상 안에 신장인 듯한 조상이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두리기둥 위에 창방과 같이 목조가구의 각 부가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급경사이나 기왓골은 없으며 합각마루에 용두를 조각하였고 추녀와 사례도 양각하였으며 16엽의 단엽 연화문과 정면에 8엽의 단엽 화문을 돌려 보주굄을 두었다.

월악산[편집]

月岳山

높이 1,097m로 충북 충주시 상모면과 제천시 한수면 일대에 위치한 국립공원으로 총면적 284.5㎢로서 2개도, 4개 시군 9개 읍면 34개 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해발 1,097m의 월악영봉을 비롯하여 150여 미터의 기암단애가 치솟아 맹호처럼 우뚝 선 준험한 산세와 웅장함으로 예부터 영산이라 불리어 왔다. 인근에는 송계계곡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계곡들이 있으며 인근 수안보에서 온천욕을 겸할 수 있고 충주호 유람도 가능하다.

충주의 인물[편집]

-人物

김생[편집]

(711~791)

신라의 명필. 일명 구(玖)라고 한다. 성덕왕 때의 인물로, 안동의 문필산, 경주의 격일봉 석굴 같은 곳에서 글씨 공부를 하였으며 충주 북진애에 있는 절에서 승려가 되어 두타행을 닦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열심히 배웠고, 나이 80이 되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예서·해서·행서를 모두 잘 써서 해동의 서성(書聖)이라 일컬어졌으며, 송나라에도 왕희지에 비할 만한 명필로 알려졌다. 작품으로 「고사경」, 「창림비」, 「백월서운탑비」, 「대로원 백련사 편액」, 「백률사 석당기」 등이 있다.

제천시[편집]

제천의 상징물[편집]

堤川-象徵物

제천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제천의 자연[편집]

-自然

해발 240m의 고원분지로 작은 구릉이 기복을 이루고 있으며 제천 시가지도 이러한 침식면에 발달하여 제천천의 상류 지류인 장평천의 지류가 제천분지 위를 흐르고 있으며 제천시는 제천분지상의 여러 하천의 합류 지점에 발달해 있다. 제천분지의 북쪽에는 유명한 의림지가 있으며 동쪽의 용학천 상류에도 큰 저수지가 있다.

기후[편집]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0.8

, 8월 평균 기온 24.8

, 1월 평균 기온 -4

이며, 최고 기온 35.9

를 기록한 바 있다.연평균 강수량은 1,280㎜이지만, 종종 가뭄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내륙분지인데다 영서지방의 높새바람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제천의 연혁[편집]

-沿革

상고시대에는 진한의 발상지였으며 신라 경덕왕 때에는 내제군(奈堤郡)으로 개칭하였다. 940년에는 내제군을 제주군(堤州郡)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에는 전국을 13도제로 개편함에 따라 충청북도 제천군이 되었다. 1914년에는 제천면이라고 칭하였다가 1940년에는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0년 제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제천군은 제원읍으로 복원되었으며, 1995년 정부의 시군 통합정책에 따라 제천군이 제천시에 통합되었다. 2004년 현재 15개 동, 1개 읍, 7면이 있다.

제천의 산업[편집]

-産業

소비성향이 두드러진 소비도시로 서비스산업이 발달하였다. 태백권의 관문인 제천시는 태백권에서 산출되는 다량의 광물자원을 공급하는 도시기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제천 주변에는 석회석·규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시멘트공장이 5개소나 있다. 교통·노동력·용수가 풍부하여 내륙공업단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콩·채소·사과·한약재·누에고치·담배 등이다. 한편 임야 면적이 65,365㏊로 성림지가 약 80%에 가까워 우수한 임상을 나타내고 있다.산지가 많아서 각종 광물이 부존되어 있는데 주요한 것은 주석·금·은·구리·납·수연·창연·석회석·형석(전국 제1위)·규석 등이다. 석회석은 연간 약 90만t, 연간 약 340만t의 시멘트가 송학면에서 생산된다.식품공업·화학공업·금속공업·주물공업·섬유 공업 및 기타 공업 등 140여 개의 생산업체가 있다. 그 중 시멘트·카바이트·생사 등의 공업이 규모가 크다.

특산물[편집]

제천사과·생강·박달재건고추·제천약초·홍화·고본주·아담꽃빗자루·칠보선물세트·생칡수 등이 유명하다.

제천의 교통[편집]

-交通

제천시는 서울에서 171㎞ 지점에 있으며 원래 산간벽지로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1941년 중앙선 철도가 이 곳을 통과하게 되어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1957년에 개통된 함백선(咸白線)의 분기점이 되고 이듬해 충북선이 충주에서 이 곳까지 연장됨으로써 3개 철도의 교차점이 되었다. 산업 철도인 중앙선·충북선·태백선이 교차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마산

춘천간 및 평택

정선간의 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 밖에도 제천

청풍간을 잇는 도로 등 여러 갈래의 지방 도로가 나 있다.

제천의 시황[편집]

-市況

충청북도 북동쪽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882.37㎢이고 인구는 14만 5,317명(2001.12)이다. 시청은 천남동에 있으며 고등학교 7개교, 중학교 12개교, 초등학교 23개교가 있다.

사자빈신사지석탑[편집]

獅子頻迅寺址石塔

보물 제94호.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002-1 소재. 사찰인 사자빈신사터에 건조되어 남아 있는 석탑이다. 1935년 보물 제49호로 지정된 이 탑은 일반형의 석탑양식에서 벗어난 기단부에 네 마리의 사자를 배치한 특수양식의 탑이다. 원래는 9층탑이었으나 4층만 남아 있고 기단석에는 ‘왕의 장수, 국가의 안녕, 불법의 융성을 기원하며 아울러 불법의 힘으로 적(거란군)을 물리쳐줄 것을 염원하는 뜻에서 절을 세우고 9층탑을 조성한다’라는 조성경위를 조각한 비문이 남아 있다.

장락리 칠층석탑[편집]

長樂里七層石塔

보물 제459호. 제천시 장락동 65번지 소재. 통일신라시대의 말기(9세기 말)에 조성된 탑으로 높이는 9.1m이고 석재는 회흑색의 점판암으로 절단하여 쌓아 올렸는데 석재는 제천의 명산인 용두산에서 채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단은 단층으로 수개의 자연석으로 하여 탑신부를 올렸는데 초층 네 모퉁이에는 화강석주를 세워 다른 전탑이나 모전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이 있다. 6·25전쟁 때 심한 피해로 파괴 직전에 있었는데 1967년 해체 복원하였다.

청풍문화재단지[편집]

淸風文化財團地

청풍면 물태리 소재.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1978년 6월 3일부터 시작하여 1985년 10월 17일 준공되기까지 수몰지역 내의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16천 평의 부지 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1985년 개장하였다.청소년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이 관람하고 있으며, 지금은 85천 평의 규모로 확대 개발되어 제천시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보물 2점, 지방유형문화재 9점 및 생활유물 2천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제천의 인물[편집]

-人物

조위[편집]

(1454~1503)

조선시대 문신이며 학자로 자는 태허. 성종 5년(147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종 22년(1491) 검상·장령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도승지를 역임했고 성종 24년(1493) 호조참판이 되었으며, 이어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을 비롯한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글씨를 잘 썼고, 황간의 송계서원, 금산의 경렴서원에 배향. 시호는 문장이다.

이지함[편집]

(1517~1578)

조선 중기의 학자로 기인(奇人)이며, 자는 형중, 호는 토정. 제천 수산면 성리에 토실을 구축하고 학업을 성취하여 호를 토정이라 하였으며 토정구지가 남아 있다고 전한다. 물욕이 없어 평생토록 가난한 생활을 했고, 의약·복서·천문·지리·음향·술서에 모두 능통했으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아산의 인산서원, 보령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강이다.

청원군[편집]

청원의 상징물[편집]

淸原-象徵物

청원군을 상징하는 꽃은 목련,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

청원의 자연[편집]

-自然

충북 서부에 위치한 군으로 화강암과 결정편암계의 지질로 되어 있다. 군의 동부는 소백산맥이 남주하여 500∼600m의 산지로서 보은군과 경계를 이루고 그 안에 부모산·상당산·팔봉산 등의 산이 솟아 있으나, 서부는 100m 이하의 넓고 비옥한 청주분지가 무심천과 미호천에 의하여 관개되고 있다. 전체면적은 814.37㎢ 이며, 인구는 12만 5,221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내륙 깊숙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비교적 심한 내륙성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 11.4

, 1월 평균 -4.5

, 8월 평균 26

, 최고 기온 34.2

, 최저 기온 -26.4

, 연평균 강수량 1,250㎜이다.

청원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 또는 낭비성(娘臂城)이라 불렸던 곳으로 신라가 점령한 후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 때 서원경으로 승격, 고려 태조 23년(959)에 청주로 하고, 성종 2년(983)에 목(牧)을 두었다가 성종 14년(995)에 절도사를 두고 전절군(全節郡)으로 개명,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으나, 현종 3년(1012)에 이를 폐하고 안무사(安撫使)를 두고, 현종 9년(1018)에 8목(牧)을 둘 때에 그 중 하나의 목이 되었다.조선 세종 31년(1449)에 관찰사로서 판목사를 겸하게 하였다. 그 후 곧 이를 폐하고 많은 변천을 거쳐 1895년에 군이 되고, 1946년 청주읍이 부로 승격되고 1949년 시로 개칭됨에 따라 청주군이 청원군으로 개칭, 16면을 관할하였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주면이 청주시에 편입 되고, 1983년 강서면이 청주시로 편입되었다. 1읍, 13면을 관할한다.

청원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이 주산업으로서 충북 제1위이며 근래에는 화학·섬유 등 공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박하는 이 지방의 특산물이다. 13면을 관할한다.

농업[편집]

쌀은 도내 생산량의 약 25%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콩·쌀보리·감자·팥·채소·참외·면화·깨·누에고치·인삼·담배·소·돼지 등이다. 비옥한 평야에 관가 좋아 농업이 발달하여 이상과 같은 농산물이 풍부하며 충청북도 최대의 농업 생산지이다. 식량작물은 오창·북일·강외 등에서 채소류는 강외·옥산면 등에서 많이 생산된다. 강내면 일대는 전국 3대 박하 생산지의 하나이다.

광공업[편집]

남이면과 부용면에서는 금, 부용면에서는 중석, 북이면과 북일면에선 형석, 오창면에서는 지르콘·모나즈가 나고 미원면 문의·가덕 일대에서도 중석·석탄·석회석 등이 산출된다. 부강 PVC 공장을 비롯하여 식료·섬유·등의 공장 30여 개가 있다. 북일면과 부용면에는 천연 탄산수가 용출하여 예로부터 잘 알려져 있으며 천연 사이다를 만든다.

특산물[편집]

된장·대추술·누룽지·누룽지과자·쌀·느타리버섯·표고버섯·영지버섯 등이 유명하다.

청원의 교통[편집]

-交通

청주시를 중심으로 도로망이 사방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경부선은 군 남서부 접경을 통과하고, 조치원에서 충북선이 분기되어 충주·제천 방면으로 연락된다. 경부고속도로가 군 서부를 종단하고 청주와 조치원 사이에 진입로가 있어 서울과의 시간 거리는 2시간 이내로 단축되어 주민의 경제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군청을 비롯한 모든 군 행정기관은 청주시에 있다.

청원의 문화·관광[편집]

-文化·觀光

1615년(광해군 7) 현도면에 세워진 노봉서원(魯峰書院)과 83년(숙종 9)에 문의면에 건립된 문의향교가 있다. 초등학교 28개 교, 중학교 9개 교, 고등학교 7개 교와 대학교 2개 교가 있다. 문화재로는 청원계산리 오층석탑(보물 제511호)·보한재영정(보물 제613호)·안심사대웅전(보물 제664호), 청원강외리(淸原江外里) 음나무(천연기념물 제305호) 등이 있고, 관광지로는 북이면의 초정약수, 부용면의 운암동굴이 있다.

문의문화재단지[편집]

文義文化財團地

문의문화재단지는 인류문명의 발달과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의 고유 전통문화를 재현하여 조상들의 삶과 얼을 되살리고 배우기 위한 역사의 교육장으로 1997년에 개장하였다.약 3만 3천 평 규모의 부지 위에 지방유형문화재 제94호인 문산관을 비롯하여 전통가옥, 민속자료전시관 등 10동의 고건물과 장승, 연자방아, 성황당 등 옛 생활터전을 재현하였다. 한편 4천여 평의 주차장을 비롯하여 약수터, 놀이광장 등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손병희선생 유허지[편집]

孫秉熙先生遺墟地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 북이면 금암리 385-2번지 소재, 규모는 38.648㎡. 조선 철종 12년(1861) 4월 8일에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 ~1922) 선생이 출생하여 자란 집이다.손병희 선생은 일찍이 동학에 입문하여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 때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10만의 민중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다. 그 후 일본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여 1897년에는 동학의 3세(三世) 교주가 되고, 1904년 진보회를 조직하였다. 1907년에 귀국하여 천도교라 개칭하고 교세확장에 힘쓰다가 국치 후 보성전문학교와 보성중학교를 천도교 명의로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고,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필두로 조선독립을 선언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상춘원에서 요양중 병사하였다.생가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초가집으로 1971년에 해체 보수하였고 1961년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세운 유허비가 있다.

보은군[편집]

보은의 상징물[편집]

報恩-象徵物

보은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대추나무, 새는 까치이다.

보은의 자연[편집]

-自然

충청북도의 남부에 위치하며 소백과 노령의 산세를 받아 비교적 산지가 많은 지역이다. 우리나라 8경 중의 하나인 속리산(俗離山, 1,057m)이 동쪽에서 경상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금강과 한강이 이 곳에서 발원한다. 금강 상류 지류인 보청천(報靑川) 유역에는 비교적 저평한 평지가 발달하여 논이 분포되어 있으며 군 전체가 보은을 중심으로 산간 분지를 이루고 있다. 보은을 중심한 일원은 화강암이고 그 주위는 결정편암계로 되어 있다. 면적 584.50㎢, 인구 4만 2,215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내륙 산간지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 기온 10.6

, 1월 평균 -4.1

, 8월 평균 25.5

, 최고 기온 40.6

(1940.9). 최저 기온 -25

(1920.1 및 1944.1), 연 평균 강수량 1,240㎜이다.

보은의 연혁[편집]

-沿革

본래 보은군과 회인군(懷仁郡)을 합한 곳이다. 보은은 신라 때 삼년산군(三年山郡)이라고 하다가 경덕왕이 삼년이라 고쳤으며, 고려에 와서는 보령(保齡)이라 고쳤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상주에 속하였는데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그 후 조선 태종 6년(1406)에 보은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으며 태종 13년(1413)에 경상도로부터 충청도에 이관하였다. 고종 32년(1895) 군이 되었는데 1914년 회인군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회인은 본래 미곡현(未谷縣)으로 신라 때 미곡(味谷)으로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이 되었으며 고려 초에는 회인으로 고쳤다. 현종 때에 청주에 속하였다가 후에 회덕 현감이 겸임했고, 우왕 때 따로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에는 현감을 두었고, 고종 32년(1895) 군이 되었다가 1914년 보은군에 합하였고, 1973년에 보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4년 현재 1읍(보은), 10면(내곡리·외곡리·마로·탄부·삼승·수한·회남·회북·내북·산외)을 관할한다.

보은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이 주산업으로, 금강 유역의 보은분지와 회인분지는 좋은 경지이다. 경지 면적 1만 3,069㏊ 중 논이 6,977㏊, 밭이 6,092㏊로 논이 밭보다 조금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콩·마늘·고추·담배·누에고치 등인데 미곡이 식량작물 생산량의 약 86%를 차지한다.지하자원으로는 토상흑연·텅스텐·금·형석 등이 있는데, 마로면에서는 흑연과 석탄이 산출된다. 섬유공업, 화학, 기계 등 약 40여 개의 업체가 입지하고 있다.

특산물[편집]

대추·사과·배·쌀·느타리버섯·방울토마토·오이·한과·땅콩·참기름·들기름·감골란 등이 유명하다.

보은의 교통·관광[편집]

-交通·觀光

철도는 군내를 통하지 않아 자동차 교통이 주교통 수단이다. 속리산 개발과 더불어 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대전·청주·상주·옥천·영동 등지와 연결되어 있고, 보은에서 속리산 법주사까지는 관광도로가 나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보은이라는 이름보다도 오히려 속리산 법주사로 잘 알려진 이 곳은 속리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제2의 금강산 또는 소금강이라 불릴 만한 자연 경관과 고찰, 그리고 많은 문화재가 조화되어 있는 산자수명한 명승지이다. 그리하여 내외 인사들의 탐승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최근에는 관광시설을 갖추고 도로망을 정비하여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

보은읍[편집]

報恩邑

군청 소재지가 있는 읍. 보청천 상류 서쪽 연안에 위치한다. 22개 리로 되어 있다. 즉 남동쪽이 비교적 낮고 높은 보은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몇 줄기의 지류가 시내를 흘러 보청천에 합류하는 지점으로서 분지의 북서부에 위치한다. 도로는 각 지류를 따라 사방으로 통하고 있어 군내 교통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또한 보리·쌀·콩·마늘·고추·깨 등의 농산물과 축산물의 집산지이며, 속리산 국립공원이 가까이에 있어 관광객이 많아 관광 진흥에 더욱 힘쓰고 있다.

법주사[편집]

法住寺

속리산에 있는 절.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창건하였다.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 印度)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에 있었기 때문에 법주사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 이 절에 있는 쌍사자석등(보물 제15호)·목조 5층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을 비롯하여 동쪽 암벽에 새긴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및 절 어귀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은 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들이다. 또 경내에는 고려 충숙왕 1년(1341)에 세운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를 비롯한 수십 개의 비와 부도(浮屠)가 있고 높이 27m의 동양 최대의 거불이 1964년 6월에 점안식을 했다.법주사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은의 인물[편집]

-人物

어윤중[편집]

(1848~1896)

자는 성집(聖執), 호는 일재(一齋), 본관은 함종(咸從). 고종 6년(1869)에 정시문과(庭詩文科)에 급제하여 주서(住書)에서 시작해서 전라도 암행어사를 거쳐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과 청나라를 두루 시찰하였고, 이듬해 문의관으로 김홍집과 함께 한미수호조약의 조문을 검토하고 청나라와의 통상조약에 대하여 협의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나 귀국하였다. 난(亂)이 평정되자 다시 천진에 가서 조약의 초안을 작성 무역장정을 체결하고 다시 회령에서 통상장정을 체결하였다. 고종 31년(1894)에 김홍집 내각의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었다.갑오경장 뒤 탁지부대신으로 제정, 경제개혁을 단행하기도 하여 농민들의 절대적인 신망을 얻었으나 아관파천(1896년 고종 33년)으로 실각하여 고향으로 낙향하던 중 송사문제로 사감을 품고 있던 향반배에 의하여 용인에서 살해당했다.

이천[편집]

(1376~1451)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자는 자견(子見), 호는 불곡(佛谷), 본관은 예안. 태종 2년(1402)과 1410년 두 차례의 무과에 급제하고 동지총제로 있을 때 왜구를 격퇴시켰고 경상·충청, 양도 병마도절제사를 거쳐 공조참판으로 있을 때 동활자를 만들어 세계 활자출현의 시초로 유명했고, 그 후 호조판서로 올라 왕명으로 여러 가지 의표를 창제했다.세종 18년(1436)에 평안도 도절제사로 파저강(婆渚江, 야인)을 평정하고 함경도 도절제사로 김종서와 같이 육진을 설치한 공신으로 문종 원년(1451) 판중추원사로서 일품직에 올랐고 사기장의 영예를 얻었다.시호(諡號)를 익양(翼襄)이라 했고 보은군 외속리면 구인리에 묘소가 있으며 세종대왕의 유서판과 선생의 실기비를 모신 추원각이 건립되어 있다.

옥천군[편집]

옥천의 상징물[편집]

沃川-象徵物

옥천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옥천의 자연[편집]

-自然

영동군과 더불어 옥천은 도내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동서로 경상북도와 충청남도에 끼여 있다. 우리나라 최고기 지층이라고 생각되는 옥천계가 깔려 있는데 이것은 태고시대의 향사부(向斜部)의 심해부(深海部)로 오랜 시일에 걸쳐 융기되어 육지화된 목포·옥천·삼척에 향하여 발달된 지질구조인데 이를 옥천지향사라고 칭한다.지형적으로 옥천은 소백산맥에서 노령산맥이 갈라지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구릉이 많고 월이산(月二山, 551m) 대성산(大城山, 705m)·장룡산 웅봉(雄峯, 437m)·마성산(馬城山, 410m) 등 여러 산이 주위에 솟아 있어 옥천읍을 중심으로 원형 분지를 이루고 있다. 금강은 군의 대략 중앙을 전형적인 곡류곡을 이루면서 북류하고 있으며 보청천은 군 동남부에서 금강에 합류한다. 또 소지류 옥천천(沃川川, 서화천)도 북류하여 금강에 합류한다. 면적은 537.17㎢이며, 인구 5만 9,836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륙부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 기온 11.8

, 1월 평균 -3.8

, 8월 평균 26

, 연평균 강수량 1,250㎜이다.

옥천의 연혁[편집]

-沿革

본래의 옥천과 청산(靑山)을 합한 군이다. 옥천은 신라의 고시산군(古尸山郡)으로 경덕왕 때에 관성군(管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에 경산부(京山府)에 속하였다가 인종 때에 현이 되었는데 충선왕 5년(1313)에는 주(州)가 되어 경산부의 소속인 이산(利山)·안읍(安邑)·양산(陽山)의 3현을 분리하여 여기에 이관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옥천으로 개칭하고 경상도로부터 충청도로 이관되어 내려오다가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으며 1914년 청산군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청산은 신라의 굴산현(屈山縣)으로, 경덕왕 때에 기산현(耆山縣)으로 고치고 삼년군(三年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청산으로 고쳐 상주에 속하였다.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현이 되었다가 다시 상주에 속하고 조선 태종 3년(1403)에 다시 현으로 되었고 태종 13년(1413)에는 경상도로부터 충청도에 이관되었으며, 1414년에는 황간(黃澗)에 합하였다. 1416년 다시 현이 되어 내려오던 중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옥천에 합쳐졌다. 1949년 옥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1읍(옥천), 8면(동이·안남·안내·청성·청산·이원·군서·군북)을 관할한다.

옥천의 산업[편집]

-産業

우리나라 최고기인 옥천계가 깔려 있는 영향도 있겠지만 옥천읍을 중심한 금강 서안 옥천분지와 바로 그 동남쪽에 있는 연안 지역은 다소의 기복은 있으나 풍부한 관개수를 이용하여 높은 농업생산을 올리고 있다. 특히 이 지방에서는 누에고치를 비롯하여 고공품·엽연초 생산이 유명하며, 또한 축산이 매우 성하다. 서울·오산 등지에 소·돼지·닭 등을 반출한다.

농업[편집]

경지 면적은 전면적의 20.9%인 11,945.7㏊ 중 논이 50.2%를 차지하고 있어 논과 밭의 비율이 비슷하다. 주요 농축산물은 쌀·맥류·감자·고구마·콩·담배·누에고치·한우·돼지 등이다.

광공업[편집]

사금 외에 흑연·장석·무연탄·규석 등이 있다. 갈포벽지·제사·홀치기·가발·엽연초 재건조 등을 하여 외화를 획득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동이면에 동이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옥천군의 공업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특산물[편집]

포도·묘목·딸기·복숭아·영지·부추·감식초·마·인삼·포도원액 등이 유명하다.

옥천의 교통[편집]

-交通

대체적으로 산지인 이 곳이 한국의 중앙부라는 점도 있으나 소백과 노령산맥의 안부(鞍部)가 발달되어 우리나라 최대 간선인 경부선이 서부를 관주하고 있으며 4번 국도와 37번 국도가 있어 산지에 비하면 도로망도 잘 정비되어 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는 이 지방에도 많은 경제성 작물을 재배하게 하는 등 경제 생활을 개선시켰다.

옥천읍[편집]

沃川邑

영동분지와 함께 금강 상류에 의하여 개석(開析)된 옥천분지의 북서쪽에 위치하는 행정 교통의 중심지이다. 옥천분지는 본군 제일의 평야로서 반경 약 4㎞의 원형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주위의 산지에서 발원하는 수많은 계류에 의하여 관개되고 있어 논이 발달하여 있다. 지리적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와 인접하고 있어 주민의 언어·풍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대전이 가까우므로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기차로 통학을 한다. 또한 옥천의 가로수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 있기도 하다.

중봉 조헌 신도비[편집]

重峯趙憲神道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926-1번지 소재. 중봉 조헌의 묘소로부터 동남방 100m 거리에 위치한 신도비로 인조 27년(1649)에 건립되었다.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을 썼으며, 우의정 김상용이 썼다.비석 높이 175cm, 폭 100cm, 두께 32cm이며 비문에는 조헌의 일생과 금산 싸움이 소상히 적혀 있다.

옥천의 인물[편집]

-人物

송시열[편집]

(1607~1689)

조선시대의 정치가·학자. 호는 우암(尤菴). 효종·현종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당파로 볼 때 서인의 우두머리로, 남인과 예론(禮論:예절에 관한 이론으로, 이 때는 상복을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입어야 하는가의 문제)을 놓고 서로 자기 주장이 옳다고 다투었다. 한때 남인에게 밀려나기도 했으나 다시 정계에 나와 활약하였다. 그 후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자, 노론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1689년 세자 책봉 문제로 왕(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 갔다가 청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94년 서인이 집권하자 벼슬을 되돌려 받았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주자학의 대가이며, 이이의 학풍을 이어받은 기호 학파의 중심 인물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저서로 '주자대전차의', '논맹문의통고', '우암집' 등 다수가 전해지고 있다.

조헌[편집]

(1544~1592)

본관은 백천(白川)이며 중종 39년(1544) 6월 28일 김포군 서감정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후율이라 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시호를 문열이라 했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이 되어 금산 벌판에서 49세를 일기로 장렬한 죽음을 하였다. 조헌의 시신은 옥천으로 옮겨져서 장례를 지냈고, 이해 12월에 무계 성혼의 상소에 의하여 조정에서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의금부사의 벼슬을 추종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봉하였으며 그 부친과 함께 이조판서에 중직되었다. 그의 묘소는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있다. 금산에는 비를 세웠으며 7백의총이 있다.저서로는 '중봉집', '중봉동환봉사'가 있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사충신의 한사람이다.

정지용[편집]

(1903~1950)

시인. 옥천읍 하계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영일.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일본 경도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 직후부터 귀국하여 모교의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1945년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1950년 6·25 때 서울에 있다가 북한군에게 끌려가 문화선무대에 참여했다고 하며 그 뒤 소식이 끊겼다. 1953년 전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휘문 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박팔양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간행하였다. 대학에 재학할 때에는 「카페프란스」, 「DAHLIA」, 「이른봄 아츰」, 「바다」, 「향수」 등을 발표하였다. 1930년대에는 박용철이 주재하는 신문학 동인으로 참가, 창간호에 「이른봄 아츰」, 「경도압천」, 「선취」, 2호에는 「바다」, 「피리」, 「갑판위」,

「저녁햇살」, 「홍춘 호수1, 2」 등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가톨릭청년지 창간에 참여하여 시 「해협의 오전 2시」, 「비로봉」, 「임종」, 「시계를 죽임」, 「다른 한울」, 「또하나 다른 태양」, 「불사조」, 「나무」 등을 발표하였다.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 '백록담'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지용 문학독본', '산문'이 있다.

육영수[편집]

陸英修 (1925~1974)

제3, 4공화국 박정희 대통령 부인으로 종관(鍾寬)과 이경령(李慶齡) 사이의 차녀이다. 옥천읍내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전란으로 피난중일 때 육군 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지만, 근혜, 근영 등 1남 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 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각종 사회, 육영사업에 힘써 양지회(陽地會)를 결성하고 고아와 노인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또한 남산에 어린이회관, 능동(陵洞)·구의동(九宜洞) 일대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였고 어린이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였다. 또한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복지사업에 앞장섰고, 적십자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자연보존협회 총재 등을 지냈다.74년 8월 15일 광복절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하여 죽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영동군[편집]

영동의 상징물[편집]

永同-象徵物

영동군을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 나무는 감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영동의 자연[편집]

-自然

충청북도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경상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의 사이에 끼여 있으며 옥천계 지층이 영동의 약간 남쪽까지 발달하고 그 이남은 화강편암 지대에 연결되며 화강암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분기되는 중간에 들어 있는 이 군은 동반부 경계지대에 북으로부터 주행봉·백화산·포성봉(933m)·지장산(772m)·봉대산(654m)·추풍령·천덕산·막기향산(998m)·삼봉산(930m)·민주지산(1242m) 등 1,000m 가까이의 높은 산지가 솟아 서반부보다 대체적으로 동반부가 높은 산지대로 되어 있다. 군의 북부를 서류하는 송천강은 서쪽에서 북류하는 금강에 신촌역 부근에서 합류한다. 평야는 협소한 영동분지와 신촌 근방에 약간 열려 있을 정도이다. 면적 844.99㎢, 인구 5만 7,319명(2001.12)이다.

기후[편집]

육지의 가장 중심부에 있으며, 또 지형 관계상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 11.8

, 1월 평균 -3.5

, 8월 평균 25.9

, 최고기온 39.9

(1939. 7), 최저기온 -23.3

(1936. 2), 연평균 강수량 1,150㎜이다.

영동의 연혁[편집]

-沿革

영동군과 황간현(黃澗縣)을 합군하여 된 것이다. 본래의 영동은 신라 때 길동군(吉同郡)으로 일컫다가 경덕왕 때에 영동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 14년(995)에 계주(稽州)로 고쳐 자사(刺使)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에 이를 폐지했다. 현종 9년(1018) 상주(尙州)에 속하였다가 명종 6년(1176)에 현이 되었다. 그 후 조선 태종 13년(1413)에 경상도로부터 충청도에 이관되었으며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고, 1914년에 황간을 합하여 현재에 이르렀다.한편 황간은 신라의 소라현(召羅縣)으로 경덕왕 때에 황간으로 고치고 영동군에 속하였으며, 고려 현종 때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속하였다가 후에 다시 현으로 되었다. 공민왕 때에는 경산부에 다시 속하였고 공양왕 2년(1390)에는 또다시 현이 되었으며, 조선 태종 때에 경상도로부터 충청도에 이관되어 황청현(黃靑縣)이 되었다. 그 후 다시 분리하여 황간현이 되어 오다가 고종 32년(1895) 군이 되었고, 1914년 영동군에 합쳐졌다.1읍(영동), 10면(용산·황간·황금·매곡·상촌·양강·용북·학산·양산·심천)을 관할한다.

영동의 산업[편집]

-産業

주민들의 대부분은 송천·석천·초강·양강 등 금강의 지류인 냇가 양안에 있는 좁고 긴 평지에서 영농을 주로 하고 있다. 20리나 되는 골짜기에 띠모양의 전답이 늘어서 있는 것은 진풍경이다. 특산물로 감이 유명하며 서류가 많이 난다. 근년에 와서는 엽연초·축산(소·돼지)·양봉이 성해지고 있다.

농업[편집]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콩·저류·고추·감·배·사과·담배·누에고치·양봉 등과 한약재·코르크·타닌 등이다. 특히 상촌과 영동에서 나는 감은 예부터 명산물로 유명하다. 학산을 중심으로 인삼재배가 성하며 산간의 초지를 이용한 목축업도 활발하다.

광업[편집]

한때는 광산붐을 일으켰으나 최근에는 수그러졌다. 그래도 등록 광구수는 200여 개이고, 가행 광구는 60을 헤아려 도내 제2위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형광석광을 비롯해 삼황학의 금, 득수의 흑연 기타 무연탄·석회석 등을 산출한다.

특산물[편집]

감·곶감·표고버섯·호도·밤·마늘·포도·배·사과·메론·수박·벌꿀·인삼·감식초·오징어·채소·화훼 등이 유명하다.

영동의 교통[편집]

-交通

산세가 험한 탓으로 직선거리 10리 길인데도 60리를 돌아가야 하는 곳이 있듯이 군내 교통은 매우 불편하다. 그러나 영동을 중심으로 대전·보은·김천·무주 등지로 국도가 통하고 경부선이 또한 군 중앙을 횡단하고 있어 읍에서 군외 지방과의 연락은 편리하다. 또한 고속도로는 북부를 지나 추풍령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영동의 관광[편집]

-觀光

양강 연안 일대의 백사 청송, 기암 절벽으로 되어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신라·백제의 유서 깊은 사연이 잠겨 있는 양산팔경(영국사·봉황대·용암·함벽정·강선대·여의정·구선대·비봉산)과 황간면 원촌리를 중심한 곳의 금강 상류 산악이 중첩하고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한천팔경(월유봉·용연대·산양벽·화헌악·냉천정·법존암·청학굴·사군봉), 심천 수영장 기타 비(非) 지정문화재도 많이 있어 피서 관광에 적합한 곳이다.

영동읍[편집]

永同邑

고도 200m 내외의 영동분지 중심의 계곡에 발달한 소읍으로서 군청 소재지이다. 시가의 중심을 금강의 한 지류가 북서류하고 있다. 철도역은 읍의 동남쪽에 있으며 경부선은 북서방향으로 빠져나간다. 교통의 중심이며 엽연초 건조장이 많고 감·호두가 많이 난다.

신항리 삼존불입상[편집]

新項里三尊佛立像

보물 제984호. 영동군 용산면 신항리 135-1 소재. 옛 석은사 터에 부조된 통일신라시대의 삼존석불입상이다. 네모난 판석에 부조된 이 불상은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이 배치된 삼존형식을 이루고 있다.본존불상은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작은 편으로 둥근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다. 두터운 통견의 법의가 가슴에서 U자형으로 벌어져 역삼각형 모양의 띠매듭이 보인다. 옷주름선은 오른손 아래에서 3가닥의 음각선을 이루어 흘러내리고 있다. 왼손은 여원인, 오른손은 사무외인을 한 이 불상은 이중의 원형 두광을 지니고 있는데 안에는 연화문, 밖에는 확대된 연주문이 이어져 있다.보주형 두광을 지니고 삼면보관을 쓴 보살상은 각각 손으로 지물을 감싸 잡거나 합장한 자세이다. 반듯한 어깨와 중후한 체구 등 각부에서 고식이 나타난 이 삼존불상은 태안마애삼존불상과 서산마애삼존불상 등 7세기 석불사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7세기 후반 내지 8세기 초기의 작품으로 크게 주목되는 삼존불상이다.

영동의 인물[편집]

-人物

박연[편집]

(1378~1458)

조선 세종 때의 음악가, 호는 난계(蘭溪). 영동 태생으로 1405년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때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으며,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그는 그 때까지의 조선 초기 궁정 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정비하였으며, 특히 피리를 잘 연주하여,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더불어 3대 악성이라 불린다. 저서로 '난계 유고', '가훈' 등이 있다.

진천군[편집]

진천의 상징물[편집]

鎭川-象徵物

진천군을 상징하는 꽃은 장미,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진천의 자연[편집]

-自然

충청북도의 서북단에 위치하며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군의 서반부 경계는 차령산맥으로 장벽을 이루어 서운산(瑞雲山, 579m)·만뢰산(萬?山, 612m). 그리고 무제산(574m) 등을 일으키고 동부는 소백산맥의 여파로 구릉성 산지를 이루어 서부보다 낮은 지형이다. 양 산지 사이는 미호천 유역으로서 청주분지의 일단을 형성하고 있다. 면적 406.08㎢, 인구 4만 3,220명(2001.12) 이다.

기후[편집]

내륙부에 위치하여 한서의 차가 비교적 큰 편이다. 연평균 기온 11.3

, 1월 평균 -5

, 8월 평균 25.8

, 최고 기온 41

(1936. 7), 최저 기온 -26.8

(1941. 1), 연평균 강수량 1,350㎜이다.

진천의 연혁[편집]

-沿革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흑양군(黑壤郡)이라 고쳤다. 고려 초에 강주(降州)라 하고 후에 진주(鎭州)라 고쳤다. 성종 14년(995)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 8년 이를 폐하였다. 현종 9년(1018) 청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종 45년(1259)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 영(令)을 두고 원종 10년(1269) 지의령군사(知義寧郡事)로 승격하였다가 얼마 후에 진주감무(鎭州監務)로 강등되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 진천현으로 개명, 현감을 두었고, 연산군 11년(1505)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그 후 다시 충청도로 복구, 고종 32년(1895)에는 군이 되었고 1914년 경기도 죽산군의 일부를 편입하고 14면을 7면으로 통합하였으며, 1973년에 진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읍(진천), 6면(덕산·초평·문백·백곡·이월·만승)을 관할한다.

진천의 산업[편집]

-産業

주산업은 농업이다. 군의 동반부는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과 백곡천, 칠장천, 기타 여러 지류들이 흐르고, 또 유명한 진천 저수지가 있어 수리가 편리하여 논농사뿐만 아니라 밭농사가 활발하다. 특히 진천면·이월면·덕산면 등은 군 미곡 총생산량의 2/3를 생산하고 있다. 이 곳 쌀은 질이 좋아서 널리 알려져 있다.이 외에 엽연초·축산·잠업 등을 부업으로 하고 밤·감은 양보다 질이 좋아 이름이 높고 한때 특산물로 이름이 높았던 상산 자석연(벼루용재)은 현재는 미미하다.

농업[편집]

경지 면적은 총면적의 약 27%이며 논이 밭보다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저류·낙화생·누에고치·담배 등이다. 쌀은 주로 진천읍·이월면·덕산면이 주산지이며, 수리시설로 백곡·이월·초평 저수지 등이 있다.그 외 보리·콩 등은 산지의 완사면과 구릉지에서 산출되며, 괴산군·음성군과 함께 잎담배가 활발하다. 가축은 한우·젖소·돼지·사슴 등을 사육하고 양봉도 한다. 임야는 혼합림과 침엽수가 대부분이다.

특산물[편집]

사슴 녹용·거봉포도·고추·느타리버섯·사과·오이·호박조청·호박엿·수박·작두콩·천마·두릅·호박·숯·황토우렁이 등이 유명하다.

진천의 교통[편집]

-交通

중부고속국도가 중앙을 남북으로 지난다. 철도교통은 인접한 증평읍을 통하는 충북선이 있다. 진천읍을 중심으로 남북으로는 청주와 서울을 잇는 17번 국도가 뻗어 있으며, 동쪽으로는 괴산군 증평읍으로 뻗은 21번 국도가 청주에서 충주를 잇는 36번 국도와 연결된다.

진천읍[편집]

鎭川邑

군청 소재지로 군 교통의 중심지이다. 군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미호천 유역의 분지 내에 발달한 소도읍이다. 많은 농산물이 산출되는데 그 중에서도 쌀·담배가 많고 부근 생산물의 집산지이다. 부근에는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길상사(吉祥祠), 송강 정철의 위패를 모신 송강사우(松江祠宇), 영수암, 진천저수지 등의 명승 고적이 있으며 이 밖에 이월면 성주산 마루턱에는 근 1천 마리의 백로가 날아와서 반 년을 여기서 지내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군내에는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

영수사 괘불[편집]

靈水寺掛佛

지방유형문화재 제44호.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 산 542(영수사) 소재. 길이 8.8m, 폭 5.8m의 저포. 원래는 진천읍 상계리 미역수골에 있던 백련암에 있던 것을 이 암자가 폐허되어 괘불만 현 영수암으로 옮겼다.저포에 채색을 넣어 그린 이 탱화는 석가모니가 인도의 영산에서 설법장면을 묘사한 초대형 영산회상도로 묵기에는 순치 10년(1653) 7월에 화주 심인 법사의 발원에 의해 화원·비구·명옥·소즙·현욱·법능이 그렸다 한다.3백여 년이 지난 요즘도 닦고보면 새로 그린 것 같으며 충식이나 부후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가뭄이 들어 한해가 심할 때 이 괘불을 밖에 높이 달고 승도들이 기우 기도를 드리면 비가 내린다고 한다.

용화사 석불입상[편집]

龍華寺石佛立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38호. 진천읍 신정리 584-4 소재. 높이 7.5m, 아랫부분의 폭 1.7m. 불상의 목부분에는 영락줄(목, 팔 등에 두르는 구슬을 꿴 장식품)이 있고 손에는 연꽃을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김유신 장군의 위엄을 기리기 위한 송덕불상이라 불리워지고 있는데 신라시대에 길상사의 제향을 국제로 하였고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예를 따라 국제로 건립하였다고 추정된다.이 불상이 있는 사찰은 신라 성덕왕 19년(702)에 창건되어 고려말에 폐사되었다가 지금의 용화사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노원리 마애여래입상[편집]

-里磨崖如來立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89호.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서원. 상호(相好)에서 대좌까지 얕은 부조로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도식화 되었으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등이 뚜렷하며 상호에서 보이는 원만상은 타불상과 비교되는 특징이 있다.높이 6.1m, 너비 4.2m이며 부드러운 미소, 감은 듯한 두 눈, 통견의 법의, 수평으로 조각된 대좌 등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대불상의 특징과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불상이다.

진천의 인물[편집]

-人物

이상설[편집]

(1871~1917)

독립 운동가. 호는 부재(溥齋). 진천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학문에 뜻을 두어 영어·러시아어·법률 등을 배우고, 1894년 급제한 후 법부 협판·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살아났다. 1907년 이준·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가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자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참석도 하지 못하였다.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하게 되자 유인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이듬해 풀려나 '권업보'를 발행, 교포 계몽과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였다.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김유신[편집]

(595~673)

신라의 명장, 609년 화랑이 되었다. 여러 차례 고구려·백제와 싸워 용맹을 떨쳤으며, 654년 진덕 여왕이 왕위 계승자 없이 죽자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상대등이 되어 당의 군사와 연합, 백제를 멸망시키고 김인문 등을 보내어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 통일의 기반을 튼튼히 닦았다. 그 후 당의 군사와 싸워 이겨 이북의 고구려 땅을 되찾았다. 삼국 통일의 영웅으로서 나라로부터 태대각간의 높은 지위를 받았다.

괴산군[편집]

괴산의 상징물[편집]

槐山-象徵物

괴산군을 상징하는 꽃은 복숭아,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

괴산의 자연[편집]

-自然

충청북도의 중앙 만곡부에 위치하며 소백산맥의 산세가 남동 경계에 미쳐서 북서를 향하여 낮아지고 있으나 군내는 대부분이 산지와 구릉이다. 다만 달천·음성천·보강천 등의 계곡류를 따라서 증평·청안·괴산·목도 등지를 중심으로 아주 좁은 곡저평지가 드문드문 있을 정도이다. 면적 841.99㎢, 인구 8만 8,783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내륙부에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11.2

, 1월 평균 -5

, 8월 평균 26.1

, 연평균 강수량 1,154,6㎞이다.

괴산의 연혁[편집]

-沿革

괴산·연풍·청안의 3군을 합군한 고장인 괴산은 고구려의 잉근내군(仍斤內郡)으로, 신라 때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치고, 고려 때는 괴주(槐州)로 고쳤다. 그 후 현종 9년(1018) 충주에 속하고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3년(1403) 지괴주사(知槐州事)로 고쳤으며 1413년 괴산군으로 고쳤다. 고종 32년(1895) 충주부에 속하였다가 1914년 연풍군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연풍은 고구려의 상모현(上芼縣)으로 고려 현종 9년(1018)에 장연(長延)으로 고치고 장풍현(長豊縣)과 같이 충주에 속하였다. 조선 태조 3년(1394) 2현을 합하여 감무를 두고 장풍현이라 칭하였으며 태종 3년(1403) 연풍으로 고쳤고 1413년 현감을 두었다. 1895년 군이 되었다가 1914년 괴산군에 합하였다. 청안은 청당(淸塘)·도안(道安) 2현을 합친 것으로 고려 초에 청주에 속하고 후에 감무를 두었다. 1895년 군이 되었다. 1963년 상모면이 중원군으로 편입되었으며 경북 문경군 삼송리가 청천면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 괴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1읍(괴산), 10면(감물·장연·연풍·칠성·문광·청천·청안·사리·소수·불정)을 관할한다.

괴산의 산업[편집]

-産業

농경지가 협소한데다가 밭의 비율이 커서 과거 주민들은 식량난을 면치 못했으나 주민들의 노력 결과 자급하고 남을 정도가 되었다. 부업으로 목재·장작·숯 등의 임산물에 많이 의존했으나 이 후에는 기후·토질에 적합한 인삼을 재배하게 되어 양은 많지 않으나 질이 개성인삼을 능가한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축산이 성하며, 괴산 수력발전소가 있고 충주댐의 완공 이후 공업지대로 발전하고 있다.특용작물로 담배가 생산되고 청안면·칠성면 등지에서 질이 좋은 인삼이 생산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콩·담배·인삼·누에고치 등이다.산지이기 때문에 각종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많다. 금·은·동·중석·아연·흑연·무연탄 등이 채굴되었으나 현재는 폐광된 곳이 많다. 칠성면 사은리에는 괴산수력발전소가 있다. 1957년 2월에 우리 기술진에 의해 준공된 이 발전소는 달천에 건설했으며 댐 길이 171m, 높이 28m, 폭 45m, 수심 16m, 유역 면적 671㎡, 총저수량, 1,532만 9천㎥, 발전기 1,300kW 2대로서 2,600kW의 발전을 하고 있다.

특산물[편집]

느타리버섯·배·오이·방울토마토·송이버섯·사과·한우·멧돼지·인삼·잡곡·목공예·한지·팽이버섯·송어양식 등이 유명하다.

괴산의 교통[편집]

-交通

옛날에는 영남가도(서울-충주-대구-경주)가 군의 동쪽 이화령(梨花嶺, 548m)을 통하였다. 현재는 괴산읍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국도가 통과한다. 그리고 군 서쪽으로 수안보∼단양간 국도가 이어져 청주·충주·문경·장호원·보은 등으로 통할 수 있다. 또 군 서부지역의 증평역과 도안역을 통과하는 충북선은 조치원과 제천을 연결한다.

증평읍[편집]

曾坪邑

군 서부를 흐르는 미호천의 지류 보강천 좌안에 위치한 충북선의 요역이다. 청주평야의 연장지로서 부근 일대는 군에서 가장 큰 평야지대이며 부근 음성 지방에서 나는 담배와 기타 농산물을 집산하는 시장으로 발전되었으며 대략 청주와 충주의 양대 도시 상권 접촉점에 위치하여 이들 도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증평인삼이 정평을 받고 있다. 1949년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청주·음성·진천·괴산에 달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여기에는 청주방송국의 중계소가 있다. 특히 괴산군의 자랑거리인 수로가교(水路架橋)가 있는데 이는 금강 상류 유역에 펼쳐진 평야의 젖줄기가 되고 있으며 몽리면적이 500만 평에 달한다.

괴산읍[편집]

槐山邑

군청 소재지이며 소백산맥의 산간분지로서 달천의 지류가 다시 두 줄기로 갈라지는 분기점 사이의 곡저평지에 발달한 소도읍이다. 농산물의 집산지이고 특히 황색연초가 유명하다. 부근에는 높이 50m, 폭 10m의 수옥정 폭포가 있다.군내에는 초등학교 15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원풍리 마애불좌상[편집]

院?里磨崖佛坐像

보물 제97호.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원풍리 마애불좌상은 12m 높이의 암벽에 3.6

3.6m 크기의 방형 감실을 파고 그 안에 3.1m 높이의 불상 2구를 반육각으로 조각하였는데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병좌상으로서는 희귀한 예로 주목되고 있다.넓적하면서도 힘있는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의 조각수법은 평면적으로 양감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신체 또한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으로 형식화되었으며, 통견의 법의 주름은 무딘 선각으로 표현되었다. 광배에는 화불이 조각되었으나 세부수법은 마멸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것은 법화경의 사상을 반영한 석가·다보 이불병좌상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이불병좌상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각연사[편집]

覺淵寺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소재.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각연사 창건 유례기에는 “법흥왕 때 어느 대사가 쌍곡리에 절을 지으려고 목수를 시켜 나무를 다듬고 있는데 까마귀떼가 날아와서 나무 조각을 물고 날아가길 자주하므로 이상하게 생각한 대사가 그 까마귀떼를 따라가 보니 깊은 산골에 있는 연못 속에 나무조각을 떨어뜨려 연못을 살펴보니 그 속에 석불이 앉아 있어 그곳에 절을 세우고 ‘覺有佛於淵中’ 하였기 때문에 절이름을 覺淵寺라 하였다”한다.각연사에는 보물 제433호인 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비로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대웅전, 통일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호), 부도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괴산의 인물[편집]

-人物

홍명희[편집]

(1888~1968)

독립운동가. 소설가.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 때 괴산에서 충북지역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른 후에 동아일보 주필과 시대일보 사장으로서 언론 창달에 기여하였으며, 당시 민족교육기관으로 이름 높던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최대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집필했다. 이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로 민족문학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음성군[편집]

음성의 상징물[편집]

陰城-象徵物

음성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음성의 자연[편집]

-自然

충청북도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대부분이 화강암이고 기타 화강편마암과 신라통(新羅統)의 지질도 있다. 군의 중앙을 비스듬히 달리는 차령산맥이 분수계를 이루고 북으로부터 원통산(645m)·수례의산(679m)·가엽산(710m)·부용산(644m)·큰산(510m) 등 산을 군데군데 일으키고 있으며, 남동부는 달천의 지류 음성천이 여러 계류를 모아 동류하면서 음성 분지를 이루어 놓았다. 초평천 역시 많은 세류를 모아서 남류하여 미호천에 합류한다. 또 산맥 서부에서는 청미천의 지류 수루내가 북류하는데 이 지류 유역인 삼성면·금왕면·생극면 일대는 구릉성 평야를 이루고 있다. 면적 520.97㎢, 인구 3만 8,797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내륙 깊숙이 위치하고 있어서 한서의 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11.7

, 1월 평균 -5

, 8월 평균 기온 26

, 연평균 강수량 1,250㎜이다.

음성의 연혁[편집]

-沿革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이었는데 신라 경순왕이 음성으로 고쳐서 흑양군(黑壤郡)의 영현(嶺縣)이 되었다가 고려 때 충주군에 예속, 후에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다. 선조 25년(1592)에는 청안(淸安)에 예속되었다가 광해군 10년(1618)에 복구하여 현이 되고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되었다. 1906년 충주군에 속했던 금왕·생극·감곡·맹동·대소·삼송 등 6면이 편입되고 1914년 다시 충주군의 일부가 편입되었으며, 1956년 7월에 음성면이, 1973년 7월에 금왕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 2읍 7면으로 되었다.2읍(음성·금왕), 7면(소이·원남·맹동·대소·삼성·생극·감곡)을 관할한다.

음성의 산업[편집]

-産業

지형상 밭농사가 약간 많은 이 지방은 도내 유수의 곡창지대를 이룰 만큼 상당히 넓은 경지면적을 가지고 있지만 수리시설의 미비로 단당 수확고가 높지 못한 편이다. 특산물인 황색연초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국내 최대의 연초 재건조장이 있다. 여기서는 250t 내외의 황색연초를 건조하여 우수품은 수출하여 많은 외화를 획득하고 있다. 엽연초는 청주·신탄진 연초공장에 공급되는데 그 중 금왕면의 생산품은 세계적 수준에 달하고 있다. 또 음성 연초시험장이 있어 군내뿐만 아니라 도내에서 재배되는 모든 연초의 품종과 재배 개량에 힘쓰고 있다. 최근에는 인삼 재배가 한층 활발해지고 있다. 맹동, 대소, 삼성 등 3면 14리에는 잠업주산단지를 조성하여 양잠에 힘쓰고 있다.지하자원으로는 금·은이 중요하며 유용광물 광구 수는 약 37개이다. 이 중 무극 금광은 남한에서 굴지의 대광산이었으나 지금은 폐광되었다. 금왕읍에서 석회석·규석·은·금이 산출되며 기계·석유 등 약 270여 개 업체가 입지하고 있다.

특산물[편집]

고추·인삼·꽃·담배 등이 유명하다.

음성의 교통[편집]

-交通

충북선이 동남쪽으로 치우쳐 동북·남서방향으로 통하고 중부고속도로가 군의 서부를 지나며 국도가 이에 병주하고 또 장호원에서 충주에 통하는 국도는 북부를 지난다. 기타 도로는 산맥 서부 금왕면에 집중한다.

음성읍[편집]

陰城邑

군청 소재지 충북 음성군 중동부에 있다. 충북선의 요역이며 도로망의 초점을 이루고 있다. 차령산맥의 여러 계곡에서 계류가 모여들면서 이룬 곡저분지의 중앙에 발달하여 충주·진천·청주·괴산·무극에 연락된다. 여기서 장호원에 이르는 일대는 구릉지대이며 황색연초의 산지로 유명하다. 쌀·담배·누에고치·인삼·면화·콩 등 농산물의 집산이 성하고 전국 제일의 연초 재건조장과 음성 연초시험장이 있다. 읍내 연초 재건조장 뒤에 경호정이 있는데, 1,500평의 연못 가운데 200평의 섬에 있는 정자로서 군민의 위안처로 능수버들이 아름답고 근방에는 지천서원·수정산 등이 있다.

유물전시관[편집]

遺物展示館

음성설성공원 주변에 연건평 214평(1층 향토전시관, 2층 유물관) 규모로 건립, 900여 점의 유물을 전시 보관하고 유료로 관람토록 하고 있다.

신후재 영정[편집]

申厚載影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4호.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 소재. 신후재(1636~1699)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 호는 규정이다. 현종 원년(1660)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라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나 경신 대출척으로 사직되었다가 기사환국(1689)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우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사은사 겸 진주 주청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영정은 좌안 8분면의 정장 관복을 입고 의장에 앉은 전신상이다. 복식은 숙종연간의 제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초상화는 후손가에 전해오는 바대로 청나라에 다녀왔을 때의 것으로 추정되어 초상화사 연구에 주목할 만한 자료이다.

음성의 인물[편집]

-人物

권근[편집]

(1352~1409)

공신, 학자. 초명은 진, 자는 가원 또는 사숙. 호는 양촌. 본관은 안동으로 검교정승 희의 아들이다. 1367년 성균관시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고 우왕 때 대사성 예의판서를 역임하였다.우왕 1년(1375)에 박상충·정도전·정몽주와 같이 친명정책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창왕 1년(1389)에 윤승순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의 자문이 화인이 되어 우봉 황해도로 유배되었다가 영해 영덕군 홍해, 김해 등지로 이배되었다.공민왕 2년(1390)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또다시 청주에 옮겨졌다가 풀려나와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2년(1393)에 대사성 표전문제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다. 태조 7년(1398)에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 대사헌을 지내고 사병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시호는 문충이다. 묘는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다. 하륜이 찬하고 이개가 개찬한 신도비 비문이 있다. 저서로는 '양촌집', '오경천견록', '사성오경구결', '입학도설(보물 제1136호)', '동현사략'이 있으며, 편저 '동국사략', '상대별곡'이 있다. 이 밖에 '시경천견록(보물 제550호)', '서경천견록(보물 제551호)', '천상분야열차지도(국보 제228호)'와 용문산 용문사 정지국사비문(보물 제531호), 중원 소태면 청룡사 보각국사비문이 있다.

김육[편집]

(1580~165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백후이며 호는 잠곡, 본관은 청풍. 선조 13년(1580)에 태어나 9세 때 아버지 홍우의 임지인 강동으로 따라갔으며, 조지산 호익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그러나 잇달아 상을 당하여 상제로 7~8년을 지내자 곤궁하여 떠돌아다니다가 선조 37년(1604) 그의 나이 25세 때 비로소 장가를 들었고, 선조 38년(1605)에 지사시에 합격하였다.1651년 상평통보의 주주를 건의하여 서울과 서북지방에 유통하게 했다.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활자를 새로이 제작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에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어,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고, 실학의 원조인 유형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병략·복서·율력에 정통했다.저서에는 '황명기락', '송도지', '잠곡유고', '해동명신록'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 가평의 잠곡서원, 강동의 청계서원, 개성의 숭양서원, 양군의 미원서원에 제향되었다.

단양군[편집]

단양의 상징물[편집]

丹陽-象徵物

단양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주목, 새는 까치이다.

단양의 자연[편집]

-自然

단양은 충청북도의 최북동단에 위치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에 접경하여 쐐기 모양으로 파고들어 있다. 군의 동쪽에 남북으로 뻗은 태백산맥과 여기서 분기된 소백산맥 사이에 있어 군 전체가 험준한 산악지대이다. 남한강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군 중앙을 흘러가면서 유명한 단양팔경을 이루어 절묘한 계곡미를 나타낸다. 석회암지대이기 때문에 도처에 카르스트(karst)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면적 780.09㎢, 인구 3만 1,575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내륙의 산간지대이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 11.6

, 1월 평균 -4.7

, 8월 평균 26.1

, 최고 기온 41

, 최저 기온 -26.3

, 연평균 강수량 1,050㎜이다.

단양의 연혁[편집]

-沿革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인데 신라 때에는 내제군(奈?郡)의 영현이었다. 고려 초에 단산(丹山)으로 고치고, 현종 9년(1018)에는 원주(原州)에 속하였다가 후에 충주에 속하였다. 충렬왕 때 거란 침입시에 현인(縣人)들이 적에 항거한 공에 의해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 5년(1318)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가 되었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 군이 되고 1914년 영춘군(永春郡)을 편입하였다. 영춘은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자춘(子春)으로 고쳐 내성군(奈城郡-堤川部) 영현이 되었다. 고려 때 영춘으로 고쳐서 원주에 속했고 정종 1년(1399) 충청도로 이관하여 감무를 두었으며, 태종 13년(1414)에 현감을 두었다. 고종 32년(1895) 군이 되었다가 1914년 단양에 합하였다. 1979년 단양면이, 1980년 매포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2읍(단양·매포), 6면(대강·가곡·영춘·어상천·적성·단성)을 관할한다.

단양의 산업[편집]

-産業

주로 농업을 영위하지만 경작지가 총면적의 약 13%밖에 되지 않아 외부로부터 식량 반입(연간 2천석 부족) 없이는 생계가 어렵다. 농경지는 주로 한강 양안의 띠모양의 좁고 긴 평지와 동북쪽의 영춘 부근, 그리고 중앙선 매포 부근의 좁은 평야뿐이다. 따라서 주민은 기타 산업을 부업 또는 전업으로 가져야 했기 때문에 지하자원 개발에 힘쓰게 되었다.자원 중 석회석은 단양의 경제를 좌우할 만하여 이를 원료로 하는 시멘트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한편 대강면 올산리에는 도립목장(1,647정보)이 있다.

농림업[편집]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잡곡·두류·서류 등이고, 특용작물로는 마늘·고추·인삼·송이버섯 등이 있다. 한편, 임야 면적이 넓고 성림지가 이의 약 75%를 이루어 우수한 임상을 나타내며, 목재의 산출이 많다.

광업[편집]

태백산 지구에 인접한 관계로 도내 제1의 광산군으로서 각종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주요 자원은 석탄·석회석·흑연·형석·수연·금·은·규석 등이고, 특히 무진장으로 매장된 석회석은 이를 원료로 하는 시멘트를 비롯한 석회·카바이드·석회비료 등의 공업을 발달케 하였다.

공업[편집]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지하자원을 원료로 하는 공업이 발달하였다. 그 중 석회석을 주원료로 하는 시멘트 공업이 으뜸으로서 한일·현대·성신화학의 3대 공장을 비롯하여 석회·석회비료·카바이트·제지 공장 등이 있다.

특산물[편집]

고추·사과·수박·약대추·약초·느타리버섯·영지버섯·산채·취나물·토종꿀·감자·신선주 등이 유명하다.

단양의 교통[편집]

-交通

1941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광산 자원이 급격히 개발되기 시작하고 현대식 대공장이 몇 개 건설되면서 도로망이 확장되었다. 중앙선 철도를 비롯 5번 국도, 36번 국도 등이 있으나 교통은 아직 불편하다.

단양읍[편집]

丹陽邑

군청 소재지이며 중앙선의 요역으로 죽령 밑의 협소한 곡저(谷底)에 길게 자리잡고 있다. 쌀·잡곡·담배·인삼·한지·삼베 등을 집산하며, 석회석·무연탄·흑연 등 광물이 풍부하다.죽령(689m)의 ‘똬리고개’라는 루프(loop)식 선로를 통하여 비탈진 고개를 넘어 영남지방과 통하는데 단양에서 이 죽령까지의 산지에는 경사가 느려 높은 곳까지 개간되어 계단식 산지 송전이 개발되고 산림이 우거진 동사면(경북)과는 대조적이다. 부근에는 단양팔경을 비롯하여 단양 제2팔경, 향산 석탄(보물 제405호)·측백수림(8천 본, 천연기념물 제62호) 및 석회암 동굴로 고수리동굴(종유굴), 온달동굴·노동동굴 등이 있다.

도담삼봉[편집]

-三峰

남한강의 맑고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강 한가운데 높이 6m의 늠름한 장군봉(남편봉)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첩봉(딸봉)과 오른쪽의 얌전하게 돌아앉은 처봉(아들봉) 등 세 봉우리가 물 위에 솟아있다.이곳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젊은 시절을 이곳에서 청유하였다 한다. 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으며, 그 이후 매년 단양에서는 정선군에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어린 소년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 내려오라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단양팔경[편집]

丹陽八景

단양군 주위에 있는 명승지이다. 아름다운 경치는 금강산에 비길 만하며 이 팔경은 남한강과 그 지류 계곡에 승경을 이루고 단양읍에서 8∼12㎞ 안팎에 있다. 단양 서쪽 9㎞ 지점, 한강 본류 남안에 자리잡은 옥순봉은 행정상으로는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에 있다. 절벽에는 청송이 곁들여 있고 산봉우리는 죽순처럼 깎아세운 듯하며 고목과 등덩굴이 얽혀 있어 그림과 같고, 귀담봉은 단양읍 장회리에 있으며 절벽 위의 돌이 거북모양이라 해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봄의 꽃도 좋지만 가을의 단풍은 그 절경이 형용키 어렵다. 단양 북쪽 13㎞ 지점 한강 본류 매포읍 도담리에는 도담삼봉(三峰)이 있다. 팔경 중에서 제일가는데 이는 한강 수중에 있다. 둘레의 수심은 약 7m, 강폭은 150m가량인데 강 가운데 괴암으로 된 봉우리 셋이 깎아세운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으며 이 절벽을 따라 200m쯤 되는 곳에 석문(石門)이 있다.부근에는 천연기념물인 측백나무들이 절벽 위에 자생한다. 한강 지류 우화천을 따라 단양 남쪽 12㎞ 지점 단양읍 벌천리에 하선암·중선암·상선암 등이 차례로 있다.특히 상선암이 있는 일대에는 조그만 폭포가 많고 또 노송이 우거졌으며 좌우에는 1,000m를 바라보는 용두산·도락산에 이어진다. 중선암은 가산리에서 벌천리로 가는 숲 왼쪽 송림과 계곡 사이에 있는 바위인데 여름철 휴양지로 최적지이고, 하선암은 선유동 상류에 있으며 물 속에 비친 바위가 무지개 같다 하여 홍암이라고도 하는데, 봄철의 진달래와 가을철의 단풍은 필설로 형용키 어렵다.대강면 사인암리에 있는 사인암은 소백산맥에서 발원하는 운계천을 따라 굽이굽이 열리는 운선구곡의 일곱 번째 계곡에 있으며 단양에서 8㎞쯤 남으로 떨어져 있다. 기암괴석이 꽃병풍을 두른 듯 하늘에 치솟고 계벽수의 유유한 자태는 해금강을 연상케 한다.

온달산성[편집]

溫達山城

사적 제264호.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 67 소재. 길이 682m, 면적 7,972평.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의 무용담이 이 지방에 전해 오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와 고구려의 영토확장의 전초기지로서 온달장군이 신라군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고 하며, 조선 초기 이미 고적화된 기록이 있다.성의 길이는 682m로 남한강이 굽어 보이는 요새지에 내외협축의 석축을 한 소규모 산성이지만,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한다.온달산성 주변의 자연부락 명칭이 모두 전쟁 용어인 온달성·장군목·대진목·방터·성재고개·말등·군관 등이 성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특히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지의 옹성적 돌출부 등은 우리나라 고대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성비[편집]

赤城碑

국보 제198호.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 3-1 소재. 높이 93cm, 상폭 100cm, 하폭 53cm. 삼국시대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단양일대에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여 국경을 넓히고 이곳의 백성들을 선무한 내용이 담긴 기념비이다.당시 진흥왕이 명하여 신라척경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장과 동시에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시책과 민심을 안정시키고 적성주민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국왕의 교시를 받은 고관 10명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이사부·비치부·무력 등 진흥왕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 주목되며, 새로운 관직 명으로 大象等下干支 등은 학계의 관심거리이다.이 석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진흥왕 6~11년(545~550)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