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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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의 상징물[편집]

忠淸南道-象徵物

충청남도를 상징하는 꽃은 국화, 나무는 능수버들, 새는 원앙이다.

충청남도의 자연[편집]

-自然

위치[편집]

한반도 중부의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충청남도는 북쪽은 경기도의 평택과 안성군에 접해 있고, 동쪽은 대전광역시와 충청북도의 청주시·진천시 및 옥천·영동군과 남쪽은 전라북도의 군산·익산시 및 무주·진안·완주군과 각각 접경하고 서쪽은 황해에 면해 있다. 이러한 충청남도의 위치는 예로부터 이 지방을 기호지방과 호남·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내륙 교통의 요지가 되게 하였다. 수리적 위치를 보면 북위 35

58

(금산군 남일면)∼37

7

(당진군 석문면)에, 동경 125

31

(태안군 근흥면)∼127

38

(금산군 부리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총면적 8,584.82 ㎢로 남한 총면적의 8.6%를 차지하며 국토 총면적의 3.9%에 해당된다. 도서지역의 면적은 152.88㎢로 충남 총면적의 1.7%를 점유하고 있다.

지질과 지형[편집]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는 차령산맥의 낮은 산지를 제외하고는(최고봉 조루산, 790m) 대부분이 평야로 되어 있어 평균 높이가 100m 내외로, 전국에서 가장 저평한 지역이다(100m 이하의 저지대가 본도 총면적의 약 60%를 차지한다). 차령산맥은 광덕산(廣德山 697m), 금계산(金溪山 575m), 무성산(武盛山 613m), 조루산(鳥樓山 790m), 성주산(聖柱山 680m), 월명산(月明山 544m) 등의 600m 내외의 봉우리가 솟아 있으나 대부분이 오래된 지층인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오랫동안의 침식으로 대체로 연속성이 적은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논산시와 서천·부여·공주에 걸쳐 있는 금강 유역의 내포평야는 충적지와 화강암의 침식 준평원으로 되어 있고, 석영반암계의 잔구성인 계룡산(鷄龍山 828m)이 중앙에 우뚝 솟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충남의 북서쪽에는 남북 방향의 구릉성 산지인 가야산맥이 있고 높이 678m의 가야산이 그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가야산맥과 차령산맥 사이에는 삽교천이 북류하여 아산만으로 흘러들어가며 그 유역에는 예당평야가 펼쳐져 있어 내포평야와 더불어 충남의 주요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해안선의 드나듦은 매우 복잡하다. 직선 거리는 150㎞ 내외에 불과하나 해안선의 길이는 1,347㎞에 달하여 직선 거리의 약 10배에 가깝다. 연안에는 안면도, 외연열도 등 크고 작은 섬이 267개나 흩어져 있다(그 중 유인도는 57개). 특히 아산만·천수만 등의 만입과 태안반도의 복잡한 해안 지형은 이 지역의 심한 조석간만의 차와 더불어 천일제염과 간척지 개발에 유리한 조건이 되고 있다.

기후[편집]

기후는 연평균기온이 12

내외로 온화하나 7·8월에는 평균기온이 26

내외이고 1월에는 월평균기온이 -3

내외로 그 차가 약 30

에 달하는 대륙성 기후의 특성을 갖고 있다. 물론 지형·지역·해안으로부터의 거리 등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연강수량은 대부분의 지역이 1,300㎜ 내외이고, 태안반도 북서쪽은 1,100㎜ 이하로 본도에서는 강수량이 가장 적다. 6·7·8월의 여름 3개월 간에 연강수량의 60% 내외가 내리며, 12

2월까지의 겨울 기간에는 연강수량의 7% 내외가 내리고 있어 우기와 건기의 차가 심하다.

충청남도의 연혁[편집]

忠淸南道-沿革

옛날 상고시대에는 마한(馬韓)의 북방 경계지대였으며 기원전 18년에 온조왕(溫祚王)이 남하하여 본도의 북동부에 거점을 두고 점차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구마한을 통일하고 백제를 형성하여 678년간에 걸친 찬란한 백제문화를 이루었던 곳이다. 그 후 백제는 660년에 신라에 병합되어 웅주(熊州)라 하였고, 931년에는 고려시대에 통합되어 하남도(河南道) 또는 충청도라 하였다. 8·15광복 후 대전부가 대전시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에는 전북의 금산읍·황화면이 편입, 천안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1977년에는 대통령령에 따라대전시가 동구·중구로 나뉘었고 1979년에는 서천면·청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에는 서산군 안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시 2구 15군 24읍 15면으로 확장됐다. 1983년에는 대덕군 유성읍, 구직면 2개 리, 용산리 일부, 탄동면 8개 리, 기성면 3개 리, 진잠면 5개 리가 대전시 중구로 대덕군 회덕면은 대전시 동구에, 천원군 풍세면 구룡리는 천안시에 편입되었다. 1986년 공주·대천·온양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1989년 대전시와 대덕군이 대전직할시로 승격 분리되고, 서산읍이 시로 승격하고 서산군에서 분리·독립했으며 서산군이 나뉘어서 태안군이 신설되었다. 1995년 시군 통합정책에 따라 아산군과 온양시가 아산시로, 서산군이 서산시로, 보령군과 대천시가 보령시로, 공주군이 공주시로 각각 통합됐다. 충남의 행정구역은 2004년 1월 현재 7개 시, 9개 군, 24개 읍 145개 면으로 되어 있다.

충청남도의 인구[편집]

忠淸南道-人口

2002년 12월 충청남도 총인구는 191만 8,561명으로 전국(남한) 총인구의 약 4%를 차지한다. 1㎢당 평균 인구밀도는 223명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조밀한 지역을 이루고 있다. 평야지대의 아산·서천·논산·당진 등은 인구밀도가 극히 높고 차령 산지가 넓게 차지하고 있는 공주시와 청양군은 낮은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다.1955년에서 1975년까지 20년간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1.5%로 대체로 완만한 증가를 보였다. 특히 1966

1970년의 4년간에는 인구가 1.6%나 감소한 현상을 감안한다면 충남의 많은 인구가 타도로 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도내 공업단지의 유치 등 개발에 힘쓴 결과 최근에는 전입인구와 전출인구가 비슷해져 인구이동에 의한 인구의 증감은 크지 않다.

충청남도의 산업[편집]

忠淸南道-産業

농업[편집]

쌀·맥류·잡곡·두류·서류 등의 곡물 생산량 중 쌀이 96.6%를 차지하고 있어 충남의 농업은 쌀 중심의 주곡농업 형태를 이루고 있다.사과를 비롯하여 복숭아·포도·배·감 등의 생산량도 많은데, 특히 사과는 예산·당진·아산·홍성군 등 차령산맥 북서부를 중심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그 생산량은 경북·충북 다음으로 많다. 복숭아는 논산·아산·연기·천안 등지에서 주로 생산되며, 포도는 천안에서 그 태반을 생산하고 있다.특용 작물로는 당진·서천·부여군 등지에서 주로 생산하고 있는 모시가 있고, 참깨·들깨의 생산도 많다. 연초 경작은 차령산맥을 경계로 그 남동부에서는 주로 황색종을, 그 북서부에서는 페레종을 재배하고 있다. 인삼은 논산·서산시와 금산·부여군 등지에서 주로 생산하고 있다.2002년 12월 31일 현재 농업인구는 16만 8,521가구 48만 5,598명이고, 이들이 경작하는 농지는 논 18만 6,249㏊, 밭 6만 7,267㏊로 가구당 평균 경지면적은 150.4㏊다. 생산 농산물은 맥류 1,984, 잡곡 1,034, 두류 1만 642, 서류 1만 33M/T 등 식량작물이 18만 5,566M/T, 과채류 37만 2,857, 엽채류 30만 6,561, 근채류 15만 301, 조미채소 14만 4,647 등 채소류 97만 4,366M/T, 참깨·들깨·땅콩 등 특용작물 8,538M/T, 사과·배·복숭아·포도·감 등 과실류 18만 773M/T이다.가축으로는 소·돼지·닭이 사육되고 있고 특히 젖소는 경기도 다음으로 그 수가 많으며 천안 근교와 아산시에서 주로 사육되고 있다.

임업[편집]

임야면적은 44만 2,354ha로 국유림 2만 5,150, 공유림 2만 1,349, 사유림 39만 5,855ha다. 임상별로 보면 침엽수 20만 4972, 활엽수 11만 4,453, 혼효림 11만 1,999ha 등이다.임산물 생산량은 밤·호두·잣·대추·도토리 낙엽송실·은행 등 야생종실이 2,458만 1,020, 버섯 788만 8,766㎏이며 연료 8730M/T, 약용 2만 1,408㎏ 등이다. 또한 조림 현황은 2,590ha에 374만 3,000그루다.

수산업[편집]

어업인구는 전업 겸업을 포함해 9,178가구 2만 5,869명이다. 이들이 연간 어획하거나 양식해서 생산한 수산물은 어류 2만 3,469, 갑각류 6,900, 연체동물 3만 5,630, 기타 수산물 290, 해조류 6,042 t 등 모두 7만 2,321t, 2,045억 3,863만 5,000원어치다. 어선 수는 동력 6,498척 2만 1,782t, 무동력 124척 52 t 이다.어획 어종은 뱅어·멸치·갈치·새우·게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고, 굴·바지락·김·미역 등도 생산하고 있다. 또한 당진·서산·태안 등의 해안에는 일찍이 천일제염이 발달하여 큰 염전지대가 이루어져 있다.

광공업[편집]

농업 중심의 산업 구조이므로 공업의 발달은 미약하나 대전·천안 등 도시를 중심으로 공업이 발달하였고 과거에는 석유·식료품 등 경공업이 주가 되었으나 점차 화학·기계 공업 등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섬유 공업으로는 면사·생사·견직 등의 생산이 많고 특히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되던 한산·서천·부여의 모시는 유명하였으나, 화학 섬유의 등장과 자본·노동력 등의 부족으로 점차 쇠퇴하여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이다.제조업체(5인 이상)는 모두 2,415개 업체로 종업원은 10만 7,708명이다. 내용별로 보면 음식료 제조업 416개 소 1만 2,549명, 섬유제품 제조업 187개 소 6,708명, 의복 및 모피 제조업 55개 소 1,533명, 가죽·가방·마구류 및 신발제조업 13개 소 654명, 목재 및 나무제품 제조업 41개 소 557명, 펄프 및 종이제품 제조업 96개 소 3,853명, 출판인쇄 및 기록매체 복사업 35개 소 1,466명, 광업 106개 소 1,322명 등이다.산업단지는 국가 6, 지방 18, 농공 58, 기타 3단지 등 85단지 8,091만 6,000㎡, 입주업체는 816개 소에 종업원은 2만 8,338명이다. 99년 한해 동안 수출액은 모두 66억 425만 달러로 품목별로는 철강금속 1억 3,349, 전기 전자 23억 3,787, 비철금속 6억 7,592, 석유화학 1억 726, 기계 1,356만 달러 등이다.

충청남도의 교통[편집]

忠淸南道-交通

평지가 많고, 옛날부터 경기지방과 호남·영남지방을 연결해 주는 육로교통의 중심지적 위치는 충남의 교통을 크게 발달시켜 주었다. 철도는 대전에 지방 철도청을 두어 충남북 일대와 경기도, 경북 일부 지역까지 관장하고 있다. 본도 동쪽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경부선을 비롯하여 대전에서 갈라져 나가는 호남선, 천안에서 도의 중앙을 꿰뚫는 장항선, 천안에서 경기도의 안성으로 통하는 안성선, 조치원에서 갈라져 들어가는 충북선 등이 있어 대전·천안·조치원 등은 철도 교통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경부·호남의 두 고속도로와 국도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도내 전 지역에 시외 버스가 운행되고 있어 내륙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2002년 12월 31일 현재 등록된 차량은 관용 2,874, 자가용 54만 9,031, 영업용 2만 3,333대 등 모두 56만 9,322대다. 이 가운데 승용차는 35만 9,031, 승합차 5만 109, 화물 15만 8,237, 특수차 1,945대다. 한편 대중교통수단인 시외 및 시내버스, 전세버스, 택시 등이 수송한 승객은 연 3억 3,402만 4,447명이며, 철도를 이용한 승객은 936만 3,774명이다.도내 도로 총연장은 6,008km이며, 이 가운데 고속도로 79, 일반국도 1,191, 지방도 1,710, 시군도 3,118km이고 포장률은 71.1%다.

충청남도의 관광[편집]

忠淸南道-觀光

백제의 옛 도읍지로 널리 알려진 공주와 부여를 비롯하여 국립 공원인 계룡산·태안해안과 도립공원인 칠갑산·덕숭산 등이 있으며, 온양·덕산·도고 등 3개의 온천이 있고, 황해 연안에는 대천을 비롯하여 만리포·연포·대천 등 여러 개의 해수욕장이 있어 문화재와 자연 등 좋은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문화재도 풍성하다.

공주·부여권[편집]

백제의 옛 도읍지로 고적·문화재·자연경관 등 많은 관광 자원이 있다. 공주권에는 1971년 무녕왕릉의 발굴로 점차 활기를 띠고 있고 그 외에 공산성·공주 박물관·마곡사 등이 유명하다. 부여권에는 부소산성을 비롯하여 사비루·낙화암과 백화정·고란사·부여박물관·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 등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아산·예산·서산권[편집]

충남 북서부 지역의 주요 관광지로서는 현충사를 비롯하여 온양·도고·덕산 온천과 수덕사를 들 수 있겠다. 최근 천안 부근의 망향의 동산과, 통일을 기원하여 만든 동양 최대의 청동 좌불상도 새로운 명소로 등장하고 있다.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태어나 자라던 곳을 1966년 성역화하여 본전 건물을 중심으로 유물전시관 등을 새로 짓고 주위 환경을 아름답게 조경공사를 해 놓아 연간 100만 명 이상의 많은 관광객과 참배객이 모인다.온양 온천은 교통이 편리하고 알칼리성의 수질이 피부질환에 좋고 각종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이 모이며, 교통과 시설면에서는 온양보다 떨어지나 수질과 주위가 조용한 덕산과 도고 온천도 관광객이 많이 늘고 있다. 덕산 온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야산이 있고 이 곳에 유명한 수덕사가 있다.

계룡산 국립공원[편집]

1968년에 국립공원으로 확정된 계룡산은 61㎢로서 공주·논산·대전시에 걸쳐 있으며 그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동학사·갑사·신원사 등이 산 중턱에 흩어져 있어 사철을 두고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모인다. 또한 유성온천과 유성 골프장도 가까이 있어 충남 제1의 관광 명소를 이루고 있다.

금산의 칠백의총[편집]

임진왜란 때 중봉(重峰) 조헌(趙憲)선생이 이끄는 7백 의병이 왜적 4만여 명과 싸우다 최후의 일인까지 장렬히 산화한 이 곳에 종용사를 건립하고 이들 영령들을 봉안하였고 주위를 크게 보수하여 호국 정신을 기리는 새 명소로 되었다.

서해안의 해수욕장[편집]

대천 해수욕장은 대천읍에서 서해안 쪽으로 약 12㎞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수심이 얕고 평탄하며 수온이 알맞아 많은 피서객이 찾는다. 만리포 해수욕장은 교통이 다소 불편하나 수심이 낮고 모래가 고우며 비교적 주위가 조용해 여름이면 많은 해수욕객이 찾는다. 이 외에도 연포·대천·안면·무창포 해수욕장 등이 있다.

안면도[편집]

태안군 태안반도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안면도는 충남 최대의 섬으로, 교통이 나빠 개발이 뒤떨어졌으나 1970년 육지와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 그 개발이 기대되고 있다.

외연 열도[편집]

보령시 오천면에 속해 있는 외연도·대청도·수도·초망도·횡견도·오도·관장도 등이 모여서 열도를 이루고 있으며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며, 근해에는 새우·조기 등의 어획이 많고 김 양식업이 발달하였다.

천안시[편집]

천안의 상징물[편집]

天安-象徵物

천안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능수버들, 새는 비둘기 동물은 용이다.

천안의 자연[편집]

-自然

충청남도의 북부에 위치하며 차령산맥의 북쪽 기슭 화강암 구릉지대에 발달해 있다. 동북에 만뢰산(萬?山, 612m), 중앙에는 태조봉(太祖峰, 424m)·성거산(聖居山, 579m)이 솟아 있으며, 남서에는 태화산(456m), 망경산·광덕산 등의 산이 있다. 또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의 여러 지류가 남동부를 흐르고, 입장천과 성환천이 북서부를 흐른다. 남부의 풍세천은 북동류하여 곡교천에 유입되는데, 이들 하천 연변의 저지는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기후[편집]

바다가 비교적 가까우나 연평균 기온 12.5

, 1월 평균 -4.8

, 8월 평균 26

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강수량은 1,200㎜ 내외이다.

천안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 때에는 환성(歡城)이라 부르다가 고려 태조가 이 지방이 삼국의 요충지라 하여 천안부로 승격시키고 군병 3,000을 상주시켰다. 고려 목종(998

1009)은 부를 폐하였으나 현종(1010

1031)은 다시 부로 하고 지부사를 두어 다스리다가 충선왕(1309

1313) 때에는 영주(寧州)로 불렀고 공민왕(1351∼1374)은

다시 천안부로 환원시켰다. 조선 태종 때에 영산(寧山)으로 고쳤다가 1616년 천안으로 개칭한 후 1896년 천안군에 속했으며 1910년 다시 천안면을 신설, 1914년 목천(木川)·직산(稷山)을 합한 군청 소재지로 되었다가 1936년 읍으로 되었다. 1963년 환성면을 합하여 시로 승격함과 동시에 천안군에서 분리되었고 천안군은 천원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991년 다시 천안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시군 통합정책에 따라 천안시와 천안군이 합쳐 천안시가 되었다. 4개 읍을 비롯하여 8개 면, 13개 동(2004.1)을 관할한다.

천안의 산업[편집]

-産業

평택평야, 풍세평야, 성거평야에서 주로 농사가 이루어져 농산물의 대집산지이며, 채소·낙농업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쌀과 호두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부근의 구릉과 평야에서는 금의 산출이 많고 상업이 발달되어 있다. 또 농기구 공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전국 소요의 70

80%를 공급하고 있다.또 병천·봉황지구에는 협동축산단지가 있어 젖소를 사육하여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또 고등원예 주산지를 조성하는 등 수익성이 높은 영농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또 소위 ‘한국식 금광맥’이라 불리는 심성 및 반심성암의 함금은(含金銀) 석영맥이 삭마(削磨) 운반되어 하상(河床)에 침전한 표사광상이 시 곳곳에 산재한다. 현재는 수개 광산만이 운영될 정도로 부진상태이다.

농업[편집]

총면적의 약 40%가 경지 면적이며 3,245㏊ 중, 논 1,786㏊, 밭 1,457㏊로 논이 조금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채소·보리·호두·누에고치·과일·잎담배 등이고 낙농업은 도내에서 제1위이다. 광덕면의 호두를 주원료로 하는 호두과자가 특히 유명하며, 거봉포도는 천안시의 특산물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성환읍의 성환참외도 이 지방의 명산물이다.

광공업[편집]

부근에는 금의 산출이 많은데 천안에는 흥국·천진·구곡·삼천 등의 금광이 있다. 근래에는 교통이 편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화학 공업으로는 성냥·세탁비누·세숫비누이고, 제지·요업(타일·도자기, 그리고 기계 제작에 있어서는 탈곡기·농기구·발동기·양수기 등이다.섬유공업에 있어서는 면사를 생산하며, 기타 제빙공장 등이 있는데, 섬유, 기계, 화학 등의 제조 공장이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제품 중 레인코트·홀치기 제품·전화기 부품·면사·수편물 등은 주요 수출품으로 되어 외화를 획득하고 있다.

특산물[편집]

호도·거봉포도·신고배·개구리참외·포도식초·흑성산·아우내 오이·수신메론·호도과자 등이 유명하다.

천안의 교통[편집]

-交通

교통은 도시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천안은 좋은 지리적 조건을 얻고 있어 철도와 도로를 막론하고 사통팔달한 곳이다. 경부선이 시내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했고 또 장항선과 안성선이 모두 천안역에서 시발하여 X형으로 뻗어 철도 교통의 로터리 구실을 하고 있다. 도로망은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국도가 철도와 병주하여 통하는 외에 기타 도로가 인근 주요 도시에 통하는데 모두 잘 정비되어 있다. 열차와 버스 승하차 인원을 비교하면, 열차 승객은 매년 감소되는 데 비해 고속버스의 운행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다.

성환읍[편집]

成歡邑

시 북부의 교통의 요지. 즉 경부선의 한 역이며, 아산으로 통하는 분기점에 있는 취락이다. 국영 축산시험장이 있으며 부근의 잔잔한 구릉에는 과수, 특히 배 재배가 유명하며, 또 목장이 있어 낙농의 시범을 보여 주고 있다. 과거에는 성환참외로 이름을 떨쳤으나 지금은 ‘성환배’로 이름을 떨친다. 사금 산지로 유명하며, 원자핵자원인 모나자이트, 지르콘 등이 매장되어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천안의 관광[편집]

-觀光

천안은 천안 삼거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명산 고찰과 문화유적들이 많이 있다. 천안 삼거리는 정룡동에 있으며 현재는 삼거리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태조봉에는 각원사와 청동대불·성역 관광지로 목천면에 독립기념관이, 산업관광지로 국립종축원과 성환목장이 있다. 지정문화재로 천흥사지가 있어, 여기에는 보물 제99호인 당간지주와 동 354호인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평경을 이룬 광덕산이 있는 광덕사, 보물 제407호인 해선암 마애불입상 등이 있다.

천안의 시황[편집]

-市況

천안시는 아산시에 연하여 있는 도 북부의 중심 도시이다. 면적 636.4㎢, 인구 44만 5,485명(2002.12)이다. 민요 「천안 삼거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시는 충청남도·충청북도·경기도를 연락하는 교통의 요충을 차지하여 발달하였다.삼거리는 삼룡동·공주·진천행 가도의 분기점을 말하는데 옛날의 경상감영에 통하는 천안·진천선과 전라감영에 통하는 서울·목포선 및 천안·군산선의 분기점을 말한다. 이와 같이 천안시는 삼남지방으로 진출하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신라·고려 시대에는 군사상의 요지로서 군대를 상주시킨 일도 있다. 경부선·장항선·안성선의 분기점이 될 뿐만 아니라 자동차 도로망이 열려 고금을 통하여 충남 북부의 교통중심지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하여 도 북부지방 생활권의 중심지로서 상업이 발달되었다.공업은 지리적으로 땅이 높아 공업용수의 부족 때문에 용수를 그리 필요로 하지 않는 농기구 공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전국 농기구의 70

80%를 공급하고 광산 개발에 따라 광산용 기계도 생산한다.주요 생산품은 원동기·양수기·탈곡기·전기 압축기, 기타 기계의 부속품 등이다. 공업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기계와 금속 공업단지인 천안공업단지가 지난 1980년에 조성되었다.또 천안시는 시의 발전 요인이 되는 온양온천·현충사의 길목이기 때문에 ‘새 천안 삼거리’를 개발하고 최대의 관광유원지를 설치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천흥사 동종[편집]

天興寺銅鐘

국보 제280호. 종로구 세종로 1-1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종구직경 955m/m, 종고 1676m/m. 구성 요소로 볼 때 신라종의 특징인 단용·음관·상대·하대·유두·당좌 및 비천상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대표적인 고려 전기종으로서 외형상으로는 신라종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유사점이 많으나 구성이 간소화되었고, 위패형의 명문곽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명문에 의하면 1010년에 주성된 종임을 알 수 있고 규모는 종고 1,676mm, 구경 955mm, 두께 88mm로 현존하는 고려 전기종 중에서 최대의 종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에 전시되고 있는 이 종은 천흥사가 폐사된 후 어떤 이유인지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사용되다가 광주군청으로 옮겨졌고 다시 덕수궁 미술관에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게 되었다.

유관순 열사 유적[편집]

柳寬順烈士遺蹟

사적 제230호.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외. 생가 20평, 봉화지 1식, 사적 2.449㎡, 봉화지 1,600식.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학생들과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하였고 일본인들이 휴교령을 내리자 같은 해 3월 13일 고향 병천으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의 3·1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궐기할 것을 설득했다.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의 횃불을 올렸던 곳으로 1972년 국가에서 사적지로 지정하였다.

천안의 인물[편집]

-人物

박문수[편집]

(1691~1756)

조선시대의 문신. 숙종 17년(1691)에 외가 진위현(현 평택~입장지점) 기로리에서 출생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본관은 고령. 1723년 문과에 급제 후 군정과 세정에도 밝아 병조판서를 지냈고 이인좌의 난에 종사관으로 도순무사를 도와서 이를 평정한 공으로 영성대군에 대군되었다. 저서로 '도지정례가' 가 있다.

이동녕[편집]

(1869~1935)

독립운동가. 고종 6년(1869)에 목천면 동리에서 출생. 호는 석오(石吾), 본관은 정안(廷安). 1904년 상종청년회에서 청년운동을 하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용정으로 망명했다. 서순의숙을 설립, 신민회, 신흥무관학교, 권업회를 조직하였고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의장, 내무총장, 국무의원 주석을 겸무했다. 1928년 한국독립당 이사장, 1935년 한국 국민당 간부로 일하다가 중국 사천성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1962년 3월 1일 정부에서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홍대용[편집]

(1731~1783)

관향은 남양(南陽)으로 자는 덕보(德甫)이고, 호는 담헌(湛軒). 대대로 천안군 수신면에서 살아온 혁혁한 가문으로 영조 7년(1731)에 천안군 수신면 장산리에서 출생했다. 실사구시와 북학을 제창하였으며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세계에서 벗어나 실학에 뜻을 두어 사회개혁과 학문의 다변화를 주장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도는 유성에 불과하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543)와 지구는 지금도 돌고 있다고 주장한 갈릴레오(1633) 이후 200년이 지난 우리나라에서 담헌이 지구는 자전과 공전으로 사계절 주야의 구분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공주시[편집]

공주의 상징물[편집]

公州-象徵物

공주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 동물은 곰이다.

공주의 자연[편집]

-自然

동·서·남쪽은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이고 금강에 연해 있어서 수운이 편리하다. 공주분지는 천연적인 요새지이지만, 그 반면 산지와 금강으로 시가지 발전이 큰 제약을 받고 있다.

기후[편집]

내륙지역에 위치하여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며 연교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12.5

, 1월 평균 기온 -4

, 8월 평균 기온 26.5

, 연강수량은 1,300㎜이다.

공주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시대에 위례성에서 이 곳으로 천도한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약 60여 년 간 수도가 되었다.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가 되었으나 지형적 제약으로 1931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됨과 동시에,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이인면 봉정·태봉·주미·오곡리, 계룡면 소학·신기·상왕리, 장기면·우성면 등이 공주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에는 공주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공주군이 공주시에 통합되었다. 2004년 1월 6개 동, 1읍, 10면이 있다.

공주의 산업[편집]

-産業

지역이 협소하여 농축산업·제조업의 발달은 극히 부진하나, 일찍부터 알려진 교육도시이며 관광자원이 풍부한 곳이기 때문에 상업이 상당히 활발하다. 농업이 주산업임은 도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이나 다만 서류 생산에 있어서는 논산시와 더불어 도내 으뜸가는 산지이다.

농업[편집]

총면적의 50% 이상은 산지이다. 경지면적 중 논밭의 비율이 41:59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담배·고구마·누에고치 등이다.

축산업[편집]

낙농·양계·양돈 등이 활발하며, 한우는 계룡면·우성면·정안면에서 젖소는 유구면·의당면·우성면에서, 돼지는 우성면·정안면·계룡면에서, 닭은 탄천면·계룡면에서 많이 사육된다.

광공업[편집]

토상흑연·금 등이 산출되나 그 생산이 미미하며, 공업에 있어서는 섬유·토기·식료품 등이 가내공업 형태로 생산되고 있다. 공주는 옛날부터 가내공업이 성하여 명주와 공주무명이 유명한데, 오늘날도 유구면 일대에는 인견과 면포의 직포가 성하다.

특산물[편집]

쌀·오이·토마토·은행란·생표고버섯·공주사과·통천포 배·느타리버섯·영지버섯·화훼조직배양묘·채소 프러그묘·공주 밤·딸기·포도·계룡백일주·도자기(분청사기)·생활자기·건조 누에가루 등이 유명하다.

공주의 관광[편집]

-觀光

국보 13점을 비롯한 유물을 소장하는 국립박물관이 있으며, 금성동에는 무녕왕릉이 있다. 이 밖에 지방유형 문화재인 공북루와 쌍수정사적비가 있으며 송산리 고분군, 사곡면 운암리의 마곡사(麻谷寺), 계룡면 중장리의 갑사(甲寺), 반포면 학봉리의 동학사(東鶴寺) 등 고찰과 장기면 대교리의 김종서묘(金宗瑞墓), 계룡면 유평리의 영규대사묘(靈圭大師墓) 등 기타 여러 가지의 문화재가 있다. 앞으로 공주는 백제권과 계룡산 국립공원 및 금강 연안의 관광자원 개발을 병행한 관광도시로서 새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

공주의 시황[편집]

-市況

공주군의 중앙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940.9㎢이고 인구는 13만 3,012명(2002.12)이다. 일찍부터 문화·행정·교육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에는 공주대학교·공주교육대학·공주전문대학 등 5개 대학이 있다. 교육문화시설로는 국립공주박물관과 공주문화원이 있다. 공주문화원은 각종 예술문화행사를 주관하고 있는데, 매년 10월 백제문화제를 거행, 전통문화 계승에 힘쓰고 있다.

왕·왕비 지석[편집]

王·王妃誌石

국보 제163호. 왕릉에 들어가는 연도 중앙에 왕비의 지석과 함께 나란히 놓여 있었으며 삼국시대 지석이 왕릉에서 발견된 초유의 금석문 유례로서 그 학술적 의미가 클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의 문헌적 가치에 대한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보이다.지석의 기록에 의하면 왕은 서기 523년(무령왕 23) 5월 7일(음) 사망하였고, 왕릉에 모셔진 것은 햇수로 3년 후인 525년 8월 12일이었다. 한편 왕비는 성왕 3년(526) 11월 사망하여 햇수로 4년이 되는 529년 2월 12일 왕릉에 합장되었다. 그리고 왕비는 28개월 만에 왕릉에 모셔졌다.

왕 금제관식[편집]

王金製冠飾

국보 제154호. 이 관식은 한쌍으로서 순금판 위에 문양륜랑을 선각하여 예리한 조각도로 도려낸 것이다. 관식의 각 부위에 127개의 영락들을 금사로 꼬아 매달았다.

왕 금제귀걸이[편집]

王金製- 국보 제156호. 세탁식이탁에 두 줄기의 수식을 달았는데,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장식에 심엽형 수식을 단 것으로 이것의 앞쪽과 뒤쪽에 조그만 측엽이 붙어 있다. 또 하나는 여러 개의 세탁으로 이루어진 구슬 모양의 장식에 5개의 영락을 금사로 매단 것을 5개로 연결하고 맨 끝에 2개의 영락이 달린 금모를 씌운 푸른색의 곡옥을 단 형태의 것이다. 심엽형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원통형은 누금세공의 금선과 소금주로 장식되어 있다.

왕비 금제귀걸이[편집]

王妃金製- 국보 제157호. 이 귀걸이는 이환에 조그만 세환을 연결하고 거기에 두 줄기의 수식을 매달았는데 하나의 반투작구체가 맨 위에 달리고 그 밑에 금쇄로 연결된 4개의 엽락형, 그 밑에는 투작금모가 씌워진 담록색 유리 구옥이 달렸으며 그 아래 다시 4개의 엽형영락이 2절로 되어 있고 맨 아래는 초실형이 수하되어 있다. 엽형영락과 초실형의 주록에는 모두 루금으로 윤곽이 돌려져 있다. 다른 한 줄기는 각 4개씩의 원형영락이 금사슬에 7절로 연결되었고 그 아래 8개의 원형영락이 있으며 맨 아래는 상부에 루금을 장식하여 모자의 효과를 낸 추형수하절이 달린 형태이다.

왕비 금제관식[편집]

王妃金製冠飾

국보 제155호. 왕관식처럼 한 쌍이 발견되었는데 금판을 오려내었다. 좌우대칭을 이룬 인동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영락이 달려 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왕비 은제팔찌[편집]

王妃銀製- 국보 제160호. 왕비의 왼쪽 팔목에 끼었던 것으로 내면측록에 치각점렬을 돌리고 외면에는 두 마리의 용을 양각하였는데 용은 머리를 뒤로 돌리고 혀를 길게 내민 형태로서 힘찬 모습을 보여준다. 내면에 ‘庚子年二月多利大夫人分二百 州主耳’라는 음각명이 있어 이 팔찌를 제작한 연대(520)와 작가의 이름과 사용자(왕비)가 새겨진 팔찌로서는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금동보살입상[편집]

金銅菩薩立像

국보 제247호. 1974년 공주군 의당면 송정리 절터에서 출토,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삼면 보관을 쓴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가까우며, 보관의 중앙에 화불이 있어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는 이 상은 둥글고 아담한 단판연화좌의 양식과 함께 백제 후기 약 7세기경의 작품이다.

신원사 괘불[편집]

新元寺掛佛

국보 제299호. 제작연대는 미상이며 조선시대 말기로 추정되는 비로자나불화로서 길이 9.76m 폭 6.17m로 마포에 채색하여 그렸으며 대법회시 밖에 내걸었던 행사용 불화이다.

송산리 고분군[편집]

宋山里古墳群

사적 제13호. 공주시 금성동지내 소재. 백제 웅진 도읍지의 왕과 왕족 무덤이 군집된 곳으로 무령왕릉을 비롯해서 7기의 고분이 있다.

공산성[편집]

公山城

사적 제12호. 공주시 산성동, 금성동지내 소재.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으로 백제의 문중왕 원년(475) 한강유역의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옮길 때까지 웅진시대의 도성이었으며 그 후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도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산성의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성곽의 길이는 2,660m이며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으로 원래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대부분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내 유적은 임류각·추정왕궁지·연지·쌍수정·쌍수정사적비·명국삼장비·공북루·진남루·동문루·금서루·영은사·광북루 등 각 시대별로 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편집]

石壯里舊石器遺蹟地

사적 제334호. 장기면 장암리 소재. 이곳은 1964~1992년까지 13차에 걸쳐 발굴조사된 지역으로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최대의 선사문화 유적이다. 이곳 석장리 구석기 유적은 선사시대 전기·중기·후기의 다양한 문화층이 형성되었으며 집터, 불땐자리, 사람의 털과 짐승의 털, 불에 탄 곡식낟알 등 주거지가 발견되었고, 긁개·찌르개·자르개·주먹도끼·주먹대패 등 타제석기 3,000여 점이 발굴 출토되어 선사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배밑바닥 모양의 석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약 3만년 전~1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아시아·베링해·알래스카·북미대륙으로 사람들이 이주한 과정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갑사[편집]

甲寺

계룡면 중장리 소재. 계룡산 서쪽에 위치한 절. 백제 이래 풍한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왔던 계룡산의 여러 사찰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천년고찰로서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거찰로 발전한 것은 백제 멸망 후의 통일신라기의 일이었다. 위덕왕 3년(556)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신라의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 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종의 도량이 됨으로써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항거하는 승병궐기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갑사는 조선 선조 30년(1579) 정유재란 시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소실되어 선조 37년(1604)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재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철당간 및 지주(보물 제 256호), 부도(보물 제257호), 동종(보물 제478호) 등이 있다.

동학사[편집]

東鶴寺

반포면 봉학리 소재. 계룡산 동쪽에 위치한 절. 성덕왕 23년(724) 상원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가 절을 지어 상원사라 하고, 고려 태조 4년(921) 도선이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이 되었는데,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으로 있던 유차달이 이곳에서 신라 시조와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동학사로 이름을 바꾸어 확장했다는 전설이 있다. 1860년 강원을 개원한 승가대학은 전국의 많은 비구니(여승)들이 이곳을 거쳐간 여승교육의 전당이다.

마곡사[편집]

麻谷寺

사곡면 운암리 소재. 마곡사라는 절의 이름은 신라 보철화상이 설법 전도할 때 모인 신도가 삼밭의 삼(麻)대 같다고 하여 마곡사(麻谷寺)라 하였다.마곡사는 충남에서 훌륭한 절집들을 한꺼번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사찰의 28본산 가운데 하나이며 충남의 모든 사찰을 관할하는 큰 절이다. 예로부터 춘마곡이라 하여 주위의 봄 경관이 빼어나며 계곡이 깊어서 '택리지', '정감록' 등의 지리지나 비기에서도 병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이 일대를 꼽고 있다. 오늘날 마곡사에서 오층석탑(보물 제799호)·영산정(보물 제800호)·대웅보전(보물 제799호)·대광보전(보물 제802호)·해탈문·천왕문·명부전·응진전·심검당·국사당·매화당·흥성루·수선사·대향각·영각·고방 등 건물과 탱화·전적·판본들이 있다.

논산시[편집]

논산의 상징물[편집]

論山-象徵物

논산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원앙이다.

논산의 자연[편집]

-自然

충청남도의 동남에 위치하며, 주로 화강암이 발달해 있는 지대이다. 전반적으로 지형은 평탄하고 북동단에 남북으로 뻗은 계룡산 구릉이 차별침식에 의해 발달된 노년기 지형을 나타낸다. 남동단에는 노령산맥의 한 줄기가 북동-남서방향으로 뻗어내려 대둔산(大屯山, 878m) 등을 일으켜 가장 높은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은 저평할 뿐만 아니라 중앙을 서류하는 논산천을 비롯해 노성천·연산천·공주천·강경천·장선천 등이 수계망을 이루어 금강에 합류하며, 유역에 비옥한 논산평야를 이루어 놓았는데 이는 호남평야에 계속되는 곡창지대이다.

기후[편집]

대체로 온난하지만, 그래도 한서의 차가 큰 편이다. 연평균 기온 12.8

, 최고 기온 39.6

(1942.7), 최저 기온 -23.5

(1917. 1), 1월 평균 -2.8

, 8월 평균 26.9

, 강수량은 연평균 1,161.3㎜이다.

논산의 연혁[편집]

-沿革

은진군과 연산군을 합한 곳으로 은진은 백제의 덕근군(德近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덕은(德殷)으로 고쳤다가 고려 초에 다시 덕은군(德恩郡)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시진현(市津縣)과 같이 공주(公州)에 속했다가 조선 태조 6년(1397) 덕은·시진을 합쳐 덕진으로 하고 감무를 두었고, 세종 1년(1419)에 은진으로 개명하고 현감을 두었다. 연산은 황등야산군(黃登也山郡)으로 신라 때에 황산군으로 고쳤다.현종 9년(1018) 공주에 속하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었다. 1914년 부군 폐합 때에 합쳐서 논산군이 되었으며, 1963년 연무읍을 신설하고, 구자곡면을 폐지하였다. 1996년 3월 시로 승격하였으며 2읍(연무·강경), 11면, 2동을 관할한다.

논산의 산업[편집]

-産業

비옥한 논산평야에 있기 때문에 서산시와 더불어 도내 최대 가는 곡창지대이다. 특히 아마를 제배하며, 내륙에 있지만 어로·수산양식·수산 제조업이 행해지고 있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공업으로는 가내공업인 직조업과 정미·양조업이 성하다.

농림업[편집]

경지 면적 23,000㏊ 중 논 16,100㏊, 밭 6,900㏊로서 논이 대단히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쌀보리·밀·고구마·아마·양송이 등이다. 그 외에도 채문면·부적면을 중심으로 채소류 재배가 활발하며 특화작물로 양촌면·가야곡면·논산읍·성동면·연산면·두마면 일대에서 딸기가 재배되고 있는데, 충남의 64%를 생산하고 있다. 또 약 27,400㏊의 임야 면적에서는 밤, 호두 등 각종 임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광공업[편집]

금속광 7개, 비금속광 1개, 석탄광 1개, 기타광 1개 등이다. 주요 광물인 석탄이 연간 1만 1,710t이 생산되며 169개의 제조업체에 5,486명의 종업원이 종사하고 있다. 섬유업종이 40개 업체에 1,098명, 화학업종이 14개 업체에 267명, 기계업종이 18개 업체에 305명, 기타 업종이 97개 업체에 3,816명이 종사하고 있다.

특산물[편집]

딸기·고향참기름·젓갈·찹쌀보리·사과·맛가마된장·왕주·호대감자·배·장군돈육·물엿·사과식초·포도·계룡산더덕·오골계·황산벌특미·메론·계릉건채·감식초·명품고구마·대추·생생포도즙·건조누에·대추약과 등이 유명하다.

논산의 교통[편집]

-交通

호남선이 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채운역에서 연무읍까지는 연무지선이 있다. 면적 17.97㎞. 지형이 낮고 산업이 발달하여 있으므로 논산·강경 일대는 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도내에서 가장 교통이 조밀한 곳이다. 더욱이 호남고속도로의 개통과 금강의 주운은 이 지방의 교통을 더한층 편리하게 하였다.

논산읍[편집]

論山邑

호남선 연변에 있는 읍으로 강경과 함께 연안에 발달하여 옛날에는 군산까지 하운(河運) 편이 있었고, 호남선이 개통되어 자동차 교통이 발달되자 교통 요지가 되었다. 도시계획에 의한 구획정리를 하지 않고 건물을 세웠으므로 대소 건물이 무질서하게 섰으며 고무·양조·장유공장 등이 있다. 그리고 부근의 연무읍이 발달됨에 따라 그 영향으로 다소 활기를 띠고 있다.읍의 남동쪽 4㎞ 지점에는 속칭 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가 있으며 반야산은 수목이 우거져 읍민의 좋은 휴식처가 된다. 여기서 좀더 가면 주위 약 12㎞, 평균 수심 20m나 되는 논산저수지가 있는데 이는 논산·강경의 넓은 평야를 관개해 준다.

논산의 시황[편집]

-市況

충남의 남부에 위치하며 면적은 554.8㎢, 인구 13만 8,013명(2002.12)이다. 동쪽은 규산군과 대전 대덕구, 서쪽은 부여군, 북쪽은 공주시, 남쪽은 전북 익산시, 완주군과 접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대학교 1, 고등학교 12, 중학교 15, 초등학교 50개 교가 있다. 관광지로는 계룡산국립공원을 비롯, 은진면 반야산, 관촉사의 석조미륵 보살입상과 석등, 가야곡면의 쌍계사 대웅전, 연산면의 개태사지 석불, 두마면의 용화사 등의 유적과 명승지, 보물이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편집]

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보물 제218호. 논산시 관촉동 254번지 소재. 높이 18.12m, 둘레 9.9m. 국내 최대 석불. 고려 광종 19년(968)에 공사를 시작하여 목종 9년(1006)에 완성되었다.자연의 화강석 암반 위에 허리 아랫부분, 상체와 머리부분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연결하였다. 머리에는 구름무늬 같은 머리카락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윗부분의 관까지는 정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고, 관은 8각형으로 깎았다. 그 위에 2중의 보관을 올리고 관의 네 귀에는 청동제 방울을 달았다.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역제형(사다리꼴)으로 눈이 옆으로 길게 돌아갔고 코, 입, 귀는 모두 크다. 굵은 목에는 3도가 있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며, 좁은 어깨에는 법의가 걸쳐져 있고, 양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한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있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데 아미타여래의 중품하생인을 표현한 듯하다.

개태사[편집]

開泰寺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08번지 소재. 고려 태조 19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하고 이곳에 국찰로 창건케한 국립 개국사찰이다. 태조는 전쟁을 하면서도 백성이 생업을 유지하게 되고, 나라를 세웠음은 부처님과 산신령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절을 창건하여 개태사라 불렀다. 이 일대는 백제의 계백장군과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전투를 벌렸던 곳에 가까우며 고금을 통하여 군사, 교통상의 요지로서 사찰 주변에는 6km에 달하는 토성이 있었고, 승병이 주둔하여 사찰을 수비하였다.이곳 지역에는 동시대의 철확(가마솥,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과 삼존석불상(보물 제219호)이 새로 세운 개태사에 봉안되어 있다.

보령시[편집]

보령의 상징물[편집]

保寧-象徵物

보령시를 상징하는 꽃은 동백꽃, 나무는 소나무, 새는 갈매기이다.

보령의 자연[편집]

-自然

충청남도의 서부 해안에 면한시로서, 호남·호서지방에서는 유독 이 지방에만 특이하게 대동계 지질이 발달되어 있다. 차령산맥의 말단이 침강으로부터 남아 동북경에는 오서산(烏棲山, 791m), 동쪽엔 성주산(聖住山, 680m)·성태산(星台山, 631m)·아미산(峨嵋山, 645m)·월명산(月明山, 544m) 등 500m 이상의 고봉이 늘어서 있어 대체로 해안 가까이를 남북으로 달리는 장항선을 경계로 동쪽은 산지로 돼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 발원하는 대천·미산천·화산천 등은 유역에 평야를 발달시키고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해안에는 평지가 열려 있고 광활한 간석지를 가지고 있으며 근해에는 77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유·무인도가 점재해 있다.면적은 568.2㎢이며 인구는 11만 3,671명(2002.12)이다.

기후[편집]

해양에 면하여 있으므로 온화한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 기온 12.1

, 1월 평균 -2.2

, 8월 평균 26.2

, 연평균 강수량 1,250㎜이다.

보령의 연혁[편집]

-沿革

옛 보령군과 남포군(藍浦郡)을 합친 곳이다. 보령은 백제의 신촌현(新村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신읍현(新邑縣)으로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보령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는 운주(運州)에 속하였다가 예종 1년(1106)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었으며 고종 33년(1896)에 군이 되고, 1914년 남포군을 합하여 보령군이 되었다. 남포는 백제의 사포현(寺浦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남포현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엔 가림현(嘉林縣)에 속하였다. 그 후 감무를 두었는데 우왕 6년(1380) 왜적의 침입으로 백성이 흩어지자 얼마 동안 현을 폐하였다가 공양왕 1년(1390)에 진(鎭)을 두었다. 조선 태조 6년(1397) 병마사 겸 판현사(判縣事)를 두었고, 세조 13년(1467) 진을 폐하고 현감을 두었다가 1896년 군이 되었으며, 1914년 보령에 합하였다. 1963년 대천면 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86년 대천읍이 시로 승격하였다. 1995년 1월 대천시와 보령군이 통합, 보령시로 승격하였다. 1읍, 10면, 5동을 관할한다.

보령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이 주업으로서 서해안의 넓은 간척지에 논이 개답되어 미곡농업이 성하다. 주곡 외에는 저마·대마·면화 등 섬유류 농작물과 과실의 재배가 활발하다. 동부 고지대는 도내 제1의 탄광지대를 이루고 웅천·남포 부근에서는 연석(硯石) 채석광이 있다. 간만의 차가 심하고 간석지가 방대하여 양항이 없어 어업이 부진 상태에 있다. 조기·새우·조개류의 원시적 어획을 하고 있다.

농수산업[편집]

경지 면적은 전체 면적의 27%인 14,453㏊이며 논밭의 비율은 66:34 정도이다. 산지와 구릉의 사면에서 약간의 과수재배가 이루어진다. 바다에 면해 있으나 어로·수산 양식은 부진한 편이고 천일제염도 전혀 없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저마·대마·면화·과일 등이며, 쌀은 주포면·남포면·웅천면 등 서부 평야 지역에서, 그 밖의 다른 작물들은 동부 산지에서 주로 생산된다.115㎞의 해안선과 23개의 도서 및 근해의 광활한 천혜 간석지를 가진 보령군은 죽도(竹島)·녹도(鹿島)를 중심 어장으로 하여 조기·갈치·새우·조개류 등 어패류의 어획이 많고, 또 양식으로 질 좋은 돌김이 생산되며, 축산업도 성우 한우·젖소 등이 약 4만 5천여 마리가 있다.

광업[편집]

지하자원으로서는 무연탄·금·석면·규석·석재 등이 유명하고 성주·덕수 등의 탄광이 대표적이다. 총 탄광구 100개 소 중 가행 광구는 8개에 불과하다. 석면은 홍성군과 더불어 전국적이며 대천과 오천 등지에서 산출된다. 웅천과 남포, 그리고 미산 일대에서는 남포석이 난다. 남포석은 오석(烏石)·청석(靑石)으로 대별하는데, 옛날 남포현에서 생산됐으므로 남포석이라 한다. 이것은 상석(床石)·비석·석상·건축자재 등으로 애용되며, 문패·벼루·꽃병·완구 등의 공예품으로도 많이 이용된다. 또 웅천읍·미산면·청라면 등지에서는 연간 석탄이 약 3만 8천여 톤이 생산되고 삽시도, 원산도 일대에서는 규석이 약 7,200톤 생산된다.

특산물[편집]

특미·구기자·꽈리고추·딸기·배·사과·오이·참외·토마토 등이 유명하다.

보령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1931년 개통된 천안·장항간의 장항선과 남포·옥마간의 석탄수송을 위한 남포선 등이 있다. 또 홍성군∼서천군, 청양군∼보령시, 부여군∼보령시에 이르는 국도 3개가 보령시에서 수렴되거나 관통하고 있고, 3개의 지방로가 지난다. 대천과 오천에 인근 도서를 연결하는 선박이 출입하는 작은 항구가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간석지가 광활하여 양항은 없다.

보령의 관광[편집]

-觀光

명승 고적으로는 미산면 성주리에 890년에 건립한 성주사지(聖住寺址)가 있는데, 낭자화상 백월보광탑비와 5층 석탑·3층 석탑이 남아 있다. 남포면 읍내리에 남포성곽과 진서루, 주포면 보령리에 보령성곽과 해산루, 오천면 소성리에 오천성곽과 선림사, 청라면 옥계리에 화암서원이 있으며, 그 밖에 오천면 외연도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동백후박거목)이 있다. 한편 웅천면 관당리의 무창포 해수욕장, 대천해수욕장, 오천면 원산도리의 원산도 해수욕장 등이 있어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해수욕장 외에 계곡·폭포·수림 등 경관이 뛰어난 성주산 일대와 남포면의 남포저수지 및 낚시터 등을 개발하여 전국적인 종합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대천해수욕장[편집]

大川海水浴場

보령시 신흑동 일원. 전국해수욕장 중 규모 면에서 제일, 시설면에서 최고의 여름휴양지. 한해 1천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서해안 최고의 휴양지이자 국제적 관광명소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규모면에서 백사장의 길이가 3.5km, 폭 100m에 달하는 대형이다. 백사장 남쪽에 기암괴석이 잘 발달되어 있어 비경을 연출하고 있으며, 수온 역시 적당하여 기분좋은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대천 해수욕장의 모래질은 동양에서 유일한 패각분으로 조개껍질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잘게 부서져 모래로 변모한 것이다. 규사로 된 백사장이 몸에 달라붙는 점에 비해 패각분은 부드러우면서 물에 잘 씻기는 장점을 갖고 있다.

성주사지[편집]

聖住寺址

사적 제307호.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번지 일원. 11,800평(39,008㎡). 통일신라 말 선종사찰의 하나로 성주산파의 중심지였으며, 전쟁에 죽은 원혼을 달래기 위해 백제시대(법왕:599년) 오합사로 초창. 통일신라시대 당에서 유학 후 돌아온 낭혜화상을 맞아 왕자 흔의 요청으로 중창(문성왕 9년:847) 하면서 성주사를 개창했다.1991년부터 6차에 걸쳐 발굴조사, 고려시대 2회, 조선시대에도 중창한 흔적과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찰규모를 크게 축소 변화했다. 900m에 달하는 사지담장 경내의 수많은 건물터는 성주사 창건 당시 주위 산세와 함께 웅장했던 사찰 면모를 볼 수 있다. 경내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를 비롯, 5층탑(보물 제19호), 중앙삼층석탑(보물 제20호), 서삼층석탑(보물 제47호), 동삼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26호), 석등(지방유형문화재 제33호)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중문지·금당지·회랑지·강당지·삼천불전지·건물유구(기단석, 초석)가 발굴·정비되었고, 발굴 출토유물(백제기와당, 소조불, 비편조각)은 국립부여박물관, 충남대박물관에 전시 보관되고 있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편집]

朗慧和尙白月?光塔碑

국보 제8호.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4 소재. 높이 4.55m. 성주선문을 일으킨 낭혜화상을 위해 세운 탑비이다. 통일신라시대 비석 중 가장 크며,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행적이 잘 나타나 있고, 신라 최고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지었다. 자수가 무려 5,120자의 장문으로 고운이 지은 비문 중(사산비명) 하나로 유명하다. 글씨는 해서체로 알려진 초인연이 썼고, 신라의 골품제와 당시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문자자료이다. 비의 상륜부 이수와 받침석 귀부는 생동감과 조각솜씨가 출중하여, 통일신라기의 조각기법을 잘 보여준다.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대손으로 왕자 흔과 같이 당에 가서 선종을 유학하고 돌아와 성주사에 머물면서 불교 선문 구산의 하나인 성주산파를 일으켰다.

보령의 인물[편집]

-人物

최해[편집]

(1287~1340)

자는 언명부(彦明父) 또는 수옹(壽翁)이라 하였고 호는 졸옹·예산·농은(拙翁·猊山·農隱)이라 했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했고 장흥고사(長興庫使)를 거쳐 1320년 충숙왕 7년에 원나라에서 제과에 급제하고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盖州判官)의 벼슬까지 했었다.큰나라에 가서 벼슬살이를 해보아야겠다고 원나라에 건너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으나 내 나라가 좋다며 병을 핑계삼아 벼슬을 버리고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벼슬살이에 애착은 없었다. 그래서 시문을 지으며 벼슬살이를 하다가 유배되었다. 유배지로 지적된 곳은 원산도였는데, 이때는 원산도를 고만도(高巒島)라고 불렀다.그는 유배지에 아들까지 앞세우고 들어와서는 시를 지으며 풍습을 노래했다. 오히려 소요하면서 잘된 일이라고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 원래 성품이 강직하여 세속에 아부하지 않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며 사람의 선악을 가리는 데 날카로워 더러 미움도 받았으나 그는 강직했다.우리나라 명현(名賢)의 시문을 정리하여 책을 만들어서 후에 24권을 편수한 '동인지문'이란 책이 있다. 1340년 최해가 죽은 후 고려 당대의 문호(文豪)로 그와 이제현(李濟賢)을 지적하기도 한다.

강순[편집]

(1390~1468)

조선 세조 때의 명장·정치가. 신천에서 태어났다. 1467년 이시애의 난 때 어유소와 함께 난을 진압하러 나가 홍원·북청 등지에서 공을 세우고, 같은 해 여진족의 소굴인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서정 장군이 되어 우장군 남 이, 좌장군 어유소와 함께 출전하여 이만주를 죽이는 등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이후로 벼슬이 차차 올라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는데,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이 즉위한 해에 반란을 꽤했다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남 이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서산시[편집]

서산의 상징물[편집]

瑞山-象徵物

서산시를 상징하는 꽃은 국화, 나무는 소나무, 새는 까치이다.

서산의 자연[편집]

-自然

태안반도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당진군, 예산군과 서쪽은 태안군, 남쪽은 홍성군, 북쪽은 아산만과 접한다. 지질은 대개 결정편암계 지질로 되어 있다. 광주산맥이 일단 침강하였다가 다시 융기하여 생긴 가야(伽倻)·팔봉(八峰) 등 낮은 구릉성 산지가 남북으로 배열된 수지상(樹枝狀)의 반도로서, 동쪽 가야산맥(주봉 678m)이 예산, 홍성과 경계를 이룸으로써 반도는 거의 완전히 내륙부와 차단되어 있다. 해안은 모식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다. 면적 739.5 ㎢, 인구 14만 8,697명(2002.12) 이다.

기후[편집]

해안에 위치하여 바다의 영향을 받아 동위도상에 있는 동해안 지방보다 오히려 추운 현상을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 11.8

, 1월 평균 -2.7

, 8월 평균 25.6

, 최고 기온 37.5

(1939. 7), 최저 기온 -18

(1944. 12), 연평균 강수량 1,200㎜이다.

서산의 연혁[편집]

-沿革

서산은 백제 때는 기군(基郡)이었고 신라 때에는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치고 고려 인종 21년(1143)에는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충렬왕 10년(1284) 서산군으로 승격, 지군사(知郡事)를 두었고 이어 충렬왕 34년(1308) 서주목(瑞州牧)로 승격하였다. 충선왕 2년(1310) 서녕부(瑞寧部)로, 후에 또 지서주사(知瑞州事)로 격하했고, 조선 태종 13년(1413) 서산군으로 되었으며 1914년 태안군과 해미군을 합쳤다. 태안은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 소태(蘇泰)라 고치고 부성군(富城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현종 9년(1018) 운주(運州-洪城)에 속하였으며 충렬왕 때에 태안으로 고치고 지사군(知事郡)으로 승격, 조선 초기에는 순성(蓴城)이라 불렀으며 태종 13년(1413) 비로소 태안군이 되고 1914년 서산군에 합쳤다. 해미는 고구현(高丘縣)의 일부를 갈라서 정해현(貞海縣)을 설치하였는데, 고려 현종 9년(1018) 운주에 속하였고 후에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7년(1407) 여미현(餘美縣)을 합하여 해미현이 되었고 고종 32년(1895) 군으로 승격, 1914년 서산군에 합쳤다. 1989년 1월에 서산읍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고, 태안군이 서산군에서 분리되었으며, 서산은 서산시와 서산군으로 나뉘어졌다. 1995년 1월 서산군과 서산시가 다시 통합,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다.

서산의 산업[편집]

-産業

해양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기후가 온난하며 쌀·보리 등 주곡과 인삼·담배·양잠·고구마 등의 재배가 성하다. 광공업에 있어서는 금·규사·석탄 등이 생산되고 수산가공업이 약간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농수산업[편집]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두류·고구마·담배·인삼 등이다. 화훼시범단지를 비롯 대규모 농장이 많아 오이·버섯·마늘·생강 등도 많이 난다. 특히 이 고장 특산물인 ‘서산 육쪽마늘’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수산업에 있어서는 겸업 농가가 많으며, 주요 수산물은 갈치·조기·숭어·뱅어 등의 어류와 새우·굴·백합 등의 양식도 성하다.

특산물[편집]

육쪽마늘·생강·어리굴젓·감천배·간척지쌀 등이 유명하다.

서산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없으나 국도가 반도 중앙으로 예산에서 뻗어 태안까지 이르고, 이를 중심으로 기타 도로망이 비교적 잘 정비되어 안면도의 최남단까지도 통할 수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수도권과 충남 내륙권과의 연계가 더욱 편리해졌다.

서산의 관광[편집]

-觀光

서산시 북산(北山)에는 북산성을 비롯하여 서산읍성·활성(活城) 등 옛날 서해안 방수성곽이 있고, 해미면 읍내리에는 우리나라 굴지의 유명한 읍성(邑城, 사적 제116호)이 있다. 이 성은 주위 1,500m, 높이 4m, 성 밖에는 호(壕)를 파고 성 둘레는 탱자나무를 심어 적병을 막는 데 이용하였다고 한다.운산면 용현리에는 부락 전역에 걸쳐 많은 사지가 있는데 이것이 보원사지(普願寺址)이다. 이 절은 고려 초에 창건한 것이며, 이 사지에는 당간지주(보물 제103호)·석조(石槽, 보물 제102호)·오층석탑(보물 제104호) 법인국사보승탑 및 비(보물 제105호·제106호) 등 많은 지정 문화재가 있다.이 외에 용현리에는 국보 제84호인 서산 마애삼존불상이 ‘쉰길바위’라 하는 거암(巨岩)에 조각되어 있고, 신창리에는 개심사(開心寺, 창건 연대 미상)가 있는데 특히 대웅전(보물 제143호)은 훌륭하며 일대는 기암 계류가 승지를 이루고 있다. 이 밖에도 일락사·성산성·견성산성·문수사·정충신(鄭忠信) 유적 등이 있다.

해미읍성[편집]

海美邑城

사적 제116호. 서산시 해미면에 위치. 조선시대 축성된 읍성 중 원형 보존이 전국의 성 가운데 가장 잘 된 곳이다. 태종 18년(1418)에 축성을 시작하여 성종 22년에 완공했다. 5만 9천 평의 넓은

벌판에 이 고장에서 나는 화강암으로 성 외곽을 쌓고 안쪽을 흙으로 쌓아 올려 높이 5m, 둘레 1,800m의 성곽을 만든 뒤 성벽 밖에 깊이 2m의 연못을 파놓은 외침을 막던 전형적인 성이다. 성벽 외곽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울타리처럼 둘려쳐 ‘탱자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마애삼존불상[편집]

磨崖三尊佛像

국보 제84호.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보원사지 입구 좌측 가야산록의 고란사 왼쪽에 있는 큰 바위 동남면에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미소짓는 모습이 각기 달라서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애삼존불은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빛을 받을 때만 가슴에 와 닿는 미소를 대할 수 있어 자연조명과의 조화에 의한 진가를 보이도록 한 백제인의 슬기가 돋보인다.

개심사 대웅전[편집]

開心寺大雄殿

보물 제143호. 운산면 신창리의 상왕산록에 있다. 백제 의자왕 14년(651) 때 혜감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하여 모두 타버린 것을 다시 재건하였다. 대웅전은 다포식 건축양식으로 작법이 아름다워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지붕 처마 가까이에는 죽 늘어선 도자기 연봉들이 있는데 기왓장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불단 위에 연꽃조각 대좌를 두고 아미타불이 앉아 있으며, 양 옆의 보살들은 지장과 관음보살입상이다. 군더더기 없는 얼굴 모양, 정연한 조각 등이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다.

부석사[편집]

浮石寺

문화재 자료 제195호.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 기슭에 위치.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그 뒤 무학대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설에 의하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충신이었던 유방택이 망국의 한을 품고 낙향하여 이곳에 별당을 짓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아끼고 따르던 사람들이 그가 쓰던 별당을 개조, 부석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의상대사와 당나라 여인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극락전과 봉향각에 8개의 불상이 봉안돼 있다.

간월암[편집]

看月庵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만공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다른 암자와 달리 간조시에는 물과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 위에 떠 있는 암자처럼 느껴진다.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바뀌며 주위 자연경관과 옛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고찰이 어우러져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또한 간월도에서 생산되는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 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시에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있는데 이 행사는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은 청결한 아낙네들이 소복을 입고 마을 입구에서 춤을 추며 출발하여 굴탑 앞에 도착하면 제물을 차려 놓고 굴풍년 기원제를 지낸다.

가야산[편집]

伽倻山

서산시 해미면 소재. 해발 678m로 서산에서는 물론 충남의 서부 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이미 신라 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일찍부터 이곳을 서진으로 삼았었다. 남쪽의 산수리에서 석문봉이 되었는데, 석문봉이라 불린 것은 마치 커다란 문을 열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보이는 데서 유래되었다. 가야산에는 일락사가 있으며 주변에 많은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고 자연 경관이 빼어나다. 특히 기암과 능선을 따라 피어있는 진달래와 억새풀이 유명하다.

서산의 인물[편집]

-人物

정충신[편집]

(1576~1636)

자는 가해, 호는 만운, 본관은 금성. 체구는 비록 작으나 담력이 크고 슬기로운 지혜와 안광이 샛별 같아서 무리들을 위압하는 조선시대 명장이었다. 선조 26년(1592) 임진왜란 때 광주 목사인 권율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17세의 어린 몸으로 권율의 좌우에서 항상 헌책을 제공하는 한편 자원해서 적군의 동정을 정찰하고 또한 적장을 사살하기도 했다. 천문·지리·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 정통하였고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을 눈앞에 두고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61세의 일생을 마쳤다. 전남 광주의 경렬사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를 충무라 했다. 현재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사당인 진충사와 분묘가 현존해 있다.

안견[편집]

(? ~?)

호는 현동자. 조선 초기 산수화풍을 창출한 한국화의 대가로 신라의 솔거, 고려시대 이녕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화가로 손꼽힌다. 도화서에서 호군을 지냈으며, 1447년 안평 대군을 위해 「몽유도원도」를 그렸고, 이듬해 「의장도」를 그렸다. 총명하고 박식하여 옛 그림을 두루 보면서 그 깊은 경지를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화가의 장점을 살려 명작을 많이 남겼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 성현은 그의 「청산백운도」가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작품으로 「적벽도」, 「다경산수도」 등이 있다.

정순왕후[편집]

(1745~1804)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출생. 임금을 도와 어진 정치를 하게 함은 물론 '임진일기'를 국문(한글)으로 번역, 책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읽음으로써 일본의 나쁜 만행과 유비무환의 정신을 갖도록 하였다. 30세 때에는 효도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도리라는 내용의 '효제' 편을 저술하여 인류의 대도를 밝혔으며, 1776년 32세가 되던 3월에 영조 임금이 죽고 뒤를 이어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로 하여금 탕평책을 쓸 것과 공평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권고, 당파싸움을 막고 조정을 안정시키며 정치를 잘 하도록 했다. 56세 때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써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백성 위주로 왕실 기구를 대폭 줄이고, 혜민서와 활인서의 비용은 오히려 증액시키는 등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으며, 이재민에게는 패물까지 하사하며 구제토록 하고 부정관리를 엄벌토록 했다. 60세 되던 순조 4년(1804)에 대정을 환정하고 섭정에서 물러났다.

아산시[편집]

아산의 상징물[편집]

牙山-象徵物

아산시를 상징하는 꽃은 목련,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아산의 자연[편집]

-自然

충남의 북부에 있고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나 북서부 해안에는 화강편마암이 약간 분포되어 있다. 차령산맥의 한 지맥인 광덕산·망경산·봉수산 연봉이 남동으로 길게 물결치고 있으나 대체로 저평하고 봉강천·곡교천·무한천 등 하천은 유역에 옥야를 이루고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바다에 면한 아산만은 육지 내부로 깊게 만입하여 우리 나라에서 제일 간만의 차가 심한 곳(8.65m, 인천 8.3m)이다. 전체 면적은 542.13㎢이며, 인구는 19만 3,188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바다에 면해 있기 때문에 온난하나 겨울에 북서계절풍을 직접 받기 때문에 기온이 많이 내려간다. 연 평균 기온 11.5

, 1월 평균 -2.5

, 8월 평균 25.3

, 최고 기온 39.5

(1932. 7), 최저 기온 -25

(1931. 1), 연평균 강수량 1,200㎜이다.

아산만 연안평야[편집]

牙山灣沿岸平野

안성천과 삽교천 유역에 발달한 평야이다. 이 평야는 아산만에 퇴적된 광대한 충적평야와 그 주변에 준평원이 상당히 넓게 전개되어 있는 대평야이다. 이것은 다시 안성평야와 예당평야로 나뉜다.

아산의 연혁[편집]

-沿革

아산·온양·신창의 3군을 합한 곳이다. 아산은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이었는데 신라 때에는 음봉현(陰峰縣)이라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 인주(仁州)로 고치고 성종14년(995) 자사(刺史)를 두었으며 목종 8년(1005) 이를 폐지, 현종 9년(1018)에 천안부에 소속시켰으나 후에 아주(牙州)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아산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으며, 세조 4년(1458)에 현을 폐하고 온양·평택·신창의 3읍에 분리, 소속하였다가 세조 11년(1465) 다시 현으로 되었다. 1895년 군이 되고 1914년 온양·신창을 합쳤다. 온양은 본래 백제의 탕정군으로 신라 문무왕 때에 주(州)로 승격, 총관을 두었고, 후에 군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온수군으로 고쳤고 현종 9년(1018) 천안부에 속했다가 명종 2년(1172) 현이 되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에 신창을 합해 온창(溫昌)이라 고치고, 세종 24년(1442) 온양군으로 고치고 1914년 아산군에 합하였다.1986년 온양읍이 시로 승격하여 분리되었다가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이 통합, 도농복합형의 통합시로 승격했다. 2004년 현재 1읍(염치)과 6개 동과 10개 면을 관할한다.

아산의 산업[편집]

-産業

기후가 온화하고 농경지가 넓으며 수리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어 주업은 농업이다. 전체면적의 약 41%가 중지이며, 경지면적은 약 2만 2,143㏊, 논 1만 5,402㏊, 밭 6,741㏊이다. 주곡인 미곡은 전농산물 생산량의 80%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하여 채소·과일 등인데, 채소는 배방면과 탕정면에서 많이 생산되며, 아산 구릉지대에서 생산되는 사과 등은 예산군과 수확량의 수위를 다툰다. 목축도 성하여 주로 젖소를 사육하는데 음봉·둔포·영인면에 분포한다. 공업은 최근 서해안 개발에 따라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인주면·배방면을 중심으로 섬유공업과 펄프, 제지공업 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국내 제2의 자동차 생산단지로도 유망하다.

특산물[편집]

산수박·방울토마토·인주대파·튤립·포도·허브·쌀 등이 유명하다.

아산의 교통·관광[편집]

-交通·觀光

장항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로 횡단하고 천안

장항간의 국도가 철도와 거의 평행하게 횡단하고 공주

유구

아산간 국도도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온천관광지로 이름난 아산군은 국내 최고 유황천인 도고온천, 온양온천을 갖고 있고, 이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와 이 충무공묘가 있으며, 아산향교·초정 이지함 공적비·아산방조제·신정호·봉곡사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매년 360만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이 충무공 난중일기 서간첩 임진장초(李忠武公日記書簡帖壬辰帳抄)를 비롯하여 보물 4·사적 3·지정문화재 3·비지정문화재 20개가 있는데, 아산시의 고읍(古邑)인 온양·영인·신창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현충사[편집]

顯忠祠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인데, 숙종 32년(1706)에 창건하고 이순신·이완·이봉상 3위를 모셨다. 그런데 대원군 섭정시에 조령(朝令)에 의하여 이를 철거하였다가 그 후 1932년 동아일보사의 주관으로 모은 경향 각지의 성금으로 재건, 이순신 장군만을 모셨다. 다시 5·16군사정변 후 박대통령의 지시로 식목을 하고 새로 단장하여 그 면모를 일신하였다. 충무공의 애국 충렬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사당에는 장검 2자루와 옥로(玉鷺) 1구(具), '난중일기(亂中日記)' 등 유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 일대를 성역(聖域)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온양민속박물관[편집]

溫陽民俗博物館

충남 아산시 권곡동. 온양민속박물관은 우리민족이 살아온 발자취와 민속자료들을 입체적으로 전시하여 관광객으로 하여금 우리 고유 전통문화의 정취를 느껴보게 하고 세계 속에 한국문화의 독창성을 선양할 수 있는 산교육장으로 2만 2,000평의 대지에 건립되었다. 전통한식으로 지어진 정문을 지나면 시원스레 조성된 뜰에 전시된 연자방아, 디딜방아, 너와집 등이 조화를 이루며, 1,900여 평의 전시실에는 민속자료 2만여 점이 4개의 전시실과 1개의 소전시실에 나뉘어 13개 분야로 상설 전시되고 있다. 제1전시실은 한국인의 일생, 의식주, 생활모습이 제2전시실은 직업, 제3전시실은 민속공예, 민속신앙 등을 생동감 있게 전시하고 있으며 전통혼례를 올릴 수 있는 생활문화관도 갖추고 있다.

맹씨행단[편집]

孟氏杏亶

사적 제109호.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설화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배방산을 동북으로 바라보는 맹사성 고택은 수백여 년 간 무사히 보존되어 온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유물이다. 고려 말 충신이던 최영 장군이 지은 건물로 그의 손자사위인 고불의 부친 맹희도가 인수하여 대대로 살아왔다. ㄷ자형의 맞배집으로 목재는 광솔이 되다시피 그을렸으며 또 기둥과 도리 사이에는 단구로 봉설(봉황의 혀)이 장식되었고, 내실 천장은 소라반자로 흔히 볼수 없는 나무반자이다.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씨행단이라 한다.

온양온천[편집]

溫陽溫泉

충남 아산시 온천동 일원. 온양온천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1,300여년 전 백제 때에는 탕정군, 통일신라 때에는 탕정주, 고려시대 때에는 온수군으로 지칭되었다. 1442년 세종대왕이 온양온천 행차시 온양군으로 개칭된 후 온양으로 불리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 15년(1443) 정월에 안질 치료차 행행한 후 현종·숙종·영조·정조 등 여러 임금께서 온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차 머물고 돌아간 사례가 많아 다수의 관련 유적들이 남아 있으며 흥선대원군도 이곳에 욕실을 설비하였던 일이 있다.이 온천은 지질이 단상흑운모, 각섬석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용출되는 온천수의 수온이 57

내외로 고열온천이다. 온천수의 주요성분은 마니타온을 함유한 라듐온천으로 약알칼리성이다. 수질이 좋고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숙박시설, 상가, 음식점, 유흥업소, 온천수영장 등 주변시설이 잘 발달된 곳이어서 연간 5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이충무공 유물[편집]

李忠武公遺物

보물 제326호.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사 소재. 장검 2자루, 옥로 1구, 요대 1구, 도배 구대 1쌍 등으로 아산 현충사 내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산의 인물[편집]

-人物

맹사성[편집]

(1360~1438)

고려말 조선 초의 문관. 본관은 신창,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고려 수문전제학 맹희도의 아들이며 고려 명장인 최영의 손녀사위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10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7일간 단식을 하였고 3년간 죽만 먹으면서 묘상에서 상을 치루어 고향에서 효자문을 세워 지금도 배방면 중리에는 그 자취가 남아 있다.우왕 1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태조 때 예조의랑을 시작으로 세종 때까지 활동하였다. 1408년 사헌부대사헌이었을 때 박안신과 함께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고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했으나 여의정 성석린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으며 태종 7년에 다시 기용되었고 태종 12년에는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21년 우의정 재임시에 태종실록이 완성되자 세종이 이를 보고자 하였으나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대하였다.특히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퉁소를 즐겼고 밖을 출입할 때에는 소를 타고 나가는 것을 즐겼다. 그는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였고 부모에게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일생을 청렴하게 살아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종에 이르기까지 두 왕조에 걸쳐 활동하였으며, 청백리로서 어진 선비로서 훌륭한 정치가로서 지금도 존경을 받고 있다.

장영실[편집]

(? ~ ?)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본관은 아산. 벼슬은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으며 세종이 역상(歷象)에 관한 모든 기구를 제작하고자 할 때 정인지·정초 등은 고전 등을 연구하게 하고 장영실은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특히 세종 20년(1438) 경복궁 뜰에 혼천의를 간직한 흠경각(欽敬閣)을 세웠는데 장영실이 모든 공역을 감독하게 했다. 또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 측우기를 만들었으며 대소간의대, 앙부일기(물시계), 자격루(해시계) 등을 제작하는 등 기계·건축·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지함[편집]

(1517~1578)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白) 또는 형중. '토정비결'의 저자로 유명하다. 고려말의 학자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의 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아 수리·의학·복서·천문·지리·음양·술서 등에 달통하였다. 선조 6년(1573)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현감이 되었고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갔으나 1578년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어 걸인청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걸인을 구호하였다.일생의 대부분을 마포의 흙담 움막집에서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으며 일년의 신수를 보는 토정비결을 저술하였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단과 길지를 점지하고 농아집을 저술하였으며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이 마포에 찾아와 그를 도윤명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에 제향되었고 숙종 39년(1713)에는 이조판서에 제향되었다.

윤보선[편집]

(1897~1990)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본적은 충청남도 아산. 호는 해외. 그리스도교 집안의 윤치소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게이오 대학에 유학 중이던 20세 되던 해 학업을 중지하고 여운형을 따라 상해임시정부에 들어가 약관의 나이에 의정원 의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다.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농산국 고문을 역임하고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서울 시장, 상공부장관에 기용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비민주적인 정치를 행하자 정치적으로 결별하고 1954년 야당인 민주당 소속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된 후 4~6대 민의원을 지냈다.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 내각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 혁명으로 신군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물러났으며 그 후 야당 정치인으로 제5대와 6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낙선했다. 74년 정계를 은퇴,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재야 지도자가 되었다.같은 해 민청학련의 배후 지원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11월에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발족시켰으며 76년 3·1 민주 구국선언사건, 79년 명동 YMCA 위장결혼 사건 등으로 기소되어 입건되었으며 10·26 이후 1980년 2월 사면 복권되어 정계에 복귀 야권단일화를 위해 노력하는 등 한국정치사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회고록 '구국을 위한 가시밭길' 등이 있다.

금산군[편집]

금산의 상징물[편집]

錦山-象徵物

금산군을 상징하는 꽃은 모란, 나무는 소나무, 새는 파랑새, 물고기는 감돌고기이다.

금산의 자연[편집]

-自然

충남의 동남단에 있으며 서부에 본도와 전라북도의 옛 도계를 달리는 노령산맥과 동남쪽의 소백산맥 사이에 끼여 있는 고원분지이다. 동쪽 경계에는 대성산·서대산·국사봉·월영봉 남쪽에 베틀봉·수로봉 서쪽에 대둔산·오대산 북쪽에 문하산·상봉산·망월산 등이 솟아 높은 산지를 이루어 금산군의 평균고도는 250m나 된다. 금산읍을 중심으로 동쪽에 곡류하는 금강(錦江)과 이에 합류하는 봉황천 및 그 지류 기사천 연안에 약간의 평지가 있을 뿐이다.특히 이 지방 지질은 옥천계(沃川系) 지층의 변성퇴적암이기 때문에 인삼 재배에 적당한 사질양토(砂質壤土)가 풍부하다. 면적 575.9 ㎢, 인구 6만 1,704명(2002.12)이다.

기후[편집]

금산읍이 지형적으로 요부(凹部)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대구에 견줄 만큼 한서의 차가 심하나 주위 산지 사면은 한서의 차가 완화되어 여름에도 서늘하다. 연평균 기온 11.6

, 1월 평균 -3.8

, 8월 평균 26.2

, 최고 기온 39.5

(1935. 8), 최저 기온 -24

(1938. 1), 연평균 강수량 1,250㎜이다.

금산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진내군(進乃郡)이고 신라 경덕왕이 진례군(進禮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 강등시켜 현령을 두었고 충렬왕 31년(1305)에 지금주사(知錦州事)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에 금산군으로 고쳤고, 1914년 진산군(珍山郡)과 합하였다. 진산은 백제의 진동현(珍同縣)으로, 신라 때는 황산군(黃山郡)의 영현(領縣)이었는데 고려 때는 진례현에 예속하였다. 공양왕 2년(1390)에 고산감무(高山監務)의 관할에 들어갔는데 조선 태조 2년(1393)에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올렸으며 태종 13년(1413)에 진산군으로 승격하고 1914년 금산군에 병합되었다. 1940년 10월 금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63년 1월 1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에 편입했다.1읍(금산), 9면(금성·제원·부리·군북·남일·남이·진산·복수·추부) 1출장소를 관할한다.

금산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이 주산업인데, 그 중 인삼은 지질이 적합하여 재배면적이나 생산량에 있어서 충청남도의 90% 내외이며 재배면적이나 생산량에서 전국 2위이다. 또 이를 원료로 하는 가공업이 성하여 실로 인삼은 이 고장의 경제를 좌우하고 있고, 이런 점으로 보아 ‘인삼의 금산’이라고 불릴 만하다. 진악산·부리면·진산면 등지에서는 철·형석·금 등이 산출되며 우라늄 광맥도 발견되었다.주 농산물은 쌀·맥류·콩·인삼·누에고치 등이다. 한편, 성림지가 임야 면적의 약 93%를 나타내어 임상이 좋기 때문에 원목의 생산이 많다.

특산물[편집]

고려인삼정과·복숭아·오이·절화·포도·고려인삼·들깻잎·땅두릅·배·인삼주·추부깻잎·봉래구관·인삼맥·나리·사과·인삼·참옻나무 등이 유명하다.

금산의 교통[편집]

-交通

지방도는 금산을 중심으로 인근에 통하는데 대전으로는 옛날의 마달령과 오늘날의 태봉재(320m)가 가장 중요한 노선이며, 서쪽 전주로는 배티재, 남의 무주로는 지삼재와 진안으로 통하는 송치(松峙) 등의 4고개가 주요 통로이며, 국도는 군 서부로 통하여 전체적으로 교통이 불편하다.

금산읍[편집]

錦山邑

군청 소재지이며 대전·전주·무주·영동·옥천·진안 등지와 연락되는 군 교통의 중심지이다. 읍 동쪽으로 8㎞ 나가면 금강이 흐르는데, 그 지류 봉황천이 다시 기사천·금산천 등 여러 계류로 갈라지는 부근이 그 일대에서는 그래도 제일의 평지라고 할 수 있다.즉 읍을 중심으로 3

8㎞ 정도의 구릉성 평지가 열려 있다. 풍기(豊基)·부여(扶餘)와 더불어 금산 인삼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전국 인삼생산량의 80%가 거래되는 인삼국제시장과 수삼센터가 있으며, 이 곳의 약초시장은 대구의 약령시장, 서울의 경동한약시장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약초시장이다. 부근에는 노령산맥 북부에 솟아 있는 해발 878m의 대둔산이 있는데 산림과 수석(水石)이 아름답고, 특히 낙조대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 광경은 장관이다.금성면 의총리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칠백의총(七百義塚)이 민족의 얼을 과시한 격전지를 알려주고 있으며 십이폭포·적벽강·보석사 등의 명승 고적이 있다.

칠백의총[편집]

七百義塚

사적 제105호. 임진왜란(1592) 때 중봉 조헌(趙憲) 선생과 승장 영규대사(靈圭大師)가 이끄는 칠백의사가 1592년 8월 18일 금산을 점거하고 있던 왜적을 무찌르다 전원이 순절한 무덤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일제치하 때 항일 유적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 경찰서장에 의해서 의총(義塚)이 헐리고, 비석마저 파괴되었으며 이곳에 소속된 토지와 재산을 강제처분하여 폐허가 되었다. 1952년 이 지역 주민들이 기념사업회를 조직, 성금을 모아 의총을 보수하고 종용사와 일군순의비를 재건하였고, 1963년 1월 정부에서 사적 제105호로 지정 보호하였으며 1963년 10월 새로이 단장하고 종용사를 개축하였다.현재 이곳에는 칠백의총, 종용사, 순의비각, 기념관, 순의탑 등이 정화되어 있고 배향인물은 중봉 조헌, 영규대사, 고경명 외 칠백의사 등이며, 주요소장 문화재는 보물 제1007호 조천일기, 조헌문과급제교지, 치제문, 조헌의병장제수교서, 조헌종축문묘교서 등이다.

태조대왕 태실[편집]

太祖大王胎室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131호. 태조대왕 태실은 조선조 제1대 왕인 태조 이성계의 태(胎)를 봉안한 석실이다. 태조 5년에 건축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태를 처음에는 함경도 본궁(本宮)의 용연에 안치하였다가 무학대사의 지시로 금산군 추부면 만인사에 이주 안치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1928년 조선 총독부에서 태 항아리를 창경원으로 옮겨간 후 석비와 석조물만이 남아 원형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손, 산재되었으나 1993년 현 위치인 추부면 마전리 산 1-66번지에 복원하였다.태실은 팔각형으로 돌난간을 두른 쟁역을 만들고 그 안에 8각원당형의 태실구조로 되어 있다. 그 앞에는 귀부 위에 태실비가 있으며 전면에는 ‘태조대왕태실’이라는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태를 봉안한 후 만인산을 태봉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금산향교[편집]

錦山鄕校

지금의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숙종 10년인 1684년 현위치인 금산읍 상리 4번지 비호산 밑에 새로 지었다.문묘에 배향한 성현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5성과 우리나라 신라 이후 성현 18위를 모셨었는데 8·15 해방 이후 중국의 유현을 모심은 사대주의 사상을 이어받음이라는 이 고장 유림의 공론으로 중국유현의 위패는 철거하고 5성과 우리나라 18현만 모시고 있다. 문묘의 석전제는 매년 8월 초정일에 제전을 드리고 있다.

금산의 인물[편집]

-人物

김만화[편집]

구한말 의병. 광무 10년(1906) 2월 1일 우리나라에 통감부가 개설되고 통감정치의 굴욕적인 식민생활이 시작되자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김만화는 최익현의 의병군에 가담, 의병 한 소대를 이끌고 금산읍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왜인토벌에 나섰다.그 후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의병활동에 실패를 하자 김만화와 그 아우는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박기서[편집]

본관은 반남. 박승영의 아들이다. 동학란이 일어났을 때 제원에 집결한 동학들이 금산에 침입, 관아를 불태우며 약탈과 민심을 소란하게 하는데 격분하여 동학을 무찌르는 창의병에 가담하여 금산읍내에서 동학을 몰아내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진산으로 가다가 금성면과 진산면의 경계인 솔티재에서 동학의 습격을 받았다. 남일면 신동리 입구에 박기서의 순절비가 있다.

연기군[편집]

연기의 상징물[편집]

燕岐-象徵物

연기군을 상징하는 꽃은

복숭아꽃, 나무는 향나무, 새는 제비이다.

연기군의 자연[편집]

-自然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된 이 군은 조치원 북쪽으로 차령산맥의 지맥이 지나가므로 이 일대는 구릉이 기복하나 그리 높지 않다. 군 남쪽에서는 북류하던 금강이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흐르면서 조치원 근방을 지나 남류하는 미호천을 받아 유역 일대에 비옥한 평야를 이루고 충청북도의 청원·진천을 거쳐 음성까지 연결된다. 면적 361.5㎢, 인구 8만 3,063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내륙에 위치한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비교적 큰 내륙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연평균 기온 11.7

, 1월 평균 -4.2

, 8월 평균 26

, 연평균 강수량 1,200㎜이다.

연기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연기현으로 고쳐서 연산군(燕山郡)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청주에 속하고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후에 목천(木川) 감무가 겸임하게 하였다.조선 태종 6년(1406)에 갈라서 감무를 각각 두었다가 태종 14년(1414)에 는 전의(全義)와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라 하였다. 태종 16년(1416)에 다시 갈라서 현감을 두었고 숙종 6년(1680) 문의(文義)로 들어갔다가 1685년에는 다시 현이 되었다. 고종 32년(1895) 군이 되고, 1914년 전의군 일원과 공주군의 일부를 합하여 연기군이 되고 1931년 조치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연기의 산업[편집]

-産業

미호평야의 일부를 차지하여 농경지가 발달되어 있어 농업이 주산업을 이루고 있다. 조치원은 수원과 아울러 종묘(種苗)·육종(育種)의 중심지이고 면화·사과와 아울러 복숭아는 질과 양에 있어서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조치원을 중심으로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 연변이 성하다.공업부문에 있어서는 정미·제분·양말·제사·조면 등을 주로 하는데 모두 소규모적이다. 가발과 생사를 필두로 홀치기·인견직 등은 수출품으로 성장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팥·담배·목화·채소·사과·복숭아·누에고치 등이며 과수재배에 적합한 지리적 조건으로 대규모 과수원도 있고 채소도 많이 재배된다. 임야 면적은 1만 9,918㏊로 각종 임산물도 생산되고 있다.

특산물[편집]

감자·과수묘목·딸기·상추·오이·조치원한방배·청정상추·포도·한들방울토마토·고추·금남토마토·복숭아·신고배·조치원신흥배·참외(연동참외)·청풍명월, 포도(씨없는 포도) 등이 유명하다.

연기의 교통[편집]

-交通

경부선이 군의 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충북선이 조치원에서 충주·제천을 거쳐 중앙선에 연락된다. 국도도 철도에 병행하여 동부에 치우쳐 있으므로 서부는 비교적 불편하다. 이렇게 동부는 미호천 유역의 저평지에 철도와 자동차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조치원은 충청북도의 관문 구실을 한다.

조치원읍[편집]

鳥致院邑

군청 소재지로 경부선과 충북선의 분기점에 충북의 문호로서 발달한 신흥 도시이다. 행정상으로는 충청남도에 속해 있지만 충청북도와 관계가 더 깊다. 북·서·남 3면이 비교적 높고 동쪽으로 미호천 유역의 저평지를 향하여 열려 있으므로 이 지방 농산물의 집산이 성하며, 이곳 정기시장은 예로부터 유명하다.제사·조면을 주로 하는 섬유공업, 기타 농산물 가공업이 약간 일어나고 있으나 미미하다. 부근에서는 사과·복숭아·채소 등 원예농업이 경부고속도로의 개통 후 더욱 성하여졌으며 복숭아는 그 맛과 양에 있어서 유명하다.약 30년 전에 몇 그루의 묘목을 시험 재배한 것이 생육 조건이 맞아 그 재배가 확대됐으며, 조치원은 전군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한다.조치원에는 농촌진흥청 지청이 있어서 수원과 아울러 종묘와 육종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부근에는 비암사·충신문·운주산성 등 외에는 이렇다 할 명승 고적이 없다.

비암사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석상[편집]

碑巖寺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국보 제106호.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비암사에서 출토되었으나 현재는 국립 청주박물관에 있다. 본래 연기군 전의면 산 속의 비암사에는 3위의 비상이 전해왔는데, 1960년 9월에 발견·조사하여 모두 국보보물로 지정하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 보존하고 있다.비상이란 석비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비상이 3위나 있었음으로 비암사라는 사명이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이 삼존석상은 옥개와 대좌를 잃고 신부만이 남아 있다. 전면에는 대형의 주형광배를 지닌 군상이 조각되었으며 중앙에는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이 결가부좌로 연화좌 위에 앉아 있다. 의단은 밑으로 내려 대좌의 반을 덮고 의습은 좌우대칭으로 표현했으며 통견한 법의를 비롯해 습벽 사이에 연주가 장식되어 있다. 수인은 설법인이고 삼도는 없는 듯하며 머리에는 연화와 연주로 장식된 원형두광이 있다.본존상 좌우에는 각각 1위의 보살입상과 인왕입상이 모두 유경연화좌 위에 적립하였으며 본존과 보살 사이에 각 1위의 나한상반신이 표현되었다. 모두 칠존상이 조각되었는 데 이들 칠존상은 모두 다시 하부에는 대판중엽의 연화좌에 이중으로 실려 있으며 연화좌와 각 상 사이에는 상대하는 장신의 사자 2두가 새겨졌다.광배에는 화부와 비천상이 조각되어 화사하다. 양 측면에는 좌우 양쪽

끝에 원주형을 표현하고 사작의 연화좌에는 모두 같은 양식의 천부주악상을 꿇어 앉혔다. 뒷면은 4단으로 등분하되 삼조의 행선대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단마다 5위의 좌상을 병열하여 합계 20위를 배치하였다.각 상 모두 같은 형태로서 연화와 보주형 두광을 갖고 있으며 양손으로 수중공수하였고 흉부마다 전면의 본존상과 같이 만자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상간지마다 오른쪽 상측에 1행으로 관명과 인명을 기각하였는데 이것은 석상조성을 발원한 향도 중 주요인물 20명의 승속들이다.이 비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전면 하단에 14행 1행 4자의 주문을 비롯하여 양 측면에 세자각명이 있는데 전씨 일가의 발원이다. 양측면의 주악상은 연대가 가장 오랜 석상일 것이며 명문의 계유년은 신라문무왕대(661~680)로 추정된다.

서광암 계유명 삼존천불비상[편집]

-庵癸酉銘三尊千佛碑像국보 제108호. 총 높이 91cm. 발견 당시 비신에 손상과 마멸이 있었고 개석은 3분의 1 정도 파손된 상태였다. 상·하 2석으로 연화대석과 신부가 1석이며 정상부에 얽힌 2단형 천개가 별석으로 조성되어 있다.이 석상은 단판의 앙화원형 대좌 위에 세워졌는데 연판의 조각은 측면에서 그쳤다. 신부는 장방형 비신형을 이루고 그 하부중앙에 삼존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양측에는 각 4행의 명문을 음각하였다. 그리고 삼존과 명문 이상의 전면을 10단으로 나누었는데 상9단에는 각 20위의 작은 여래좌상을 조각하였다.이 같은 소형불상의 배치는 측면 각 14단에 각 8위씩 후면 16단에 각 12위씩으로 4면 전체에 720위의 소불이 조각되어 공간을 남기지 않았다.전면 삼존상에서의 본존은 방형 대좌에 결가부좌하였으며 무릎 밑과 하단에 연화좌가 있고 그 사이에는 상현좌의 양식을 조각하였다. 두부는 부서져 없어졌으며 통견의 가슴에는 만자가 보인다. 수인은 오른손을 올려서 현장하고 왼손은 가슴 앞에서 선장하였다.좌·우 양 협시보살은 둥근 양연좌에 섰으며 상부는 나체인데 하반신은 상의가 X자로 교차된 천의가 있으며 연화와 주문으로 원형두광을 갖추고 있다. 옥개석은 장방형 2단을 이루고 1석 조성으로서 상·하단 4면과 뒷면에도 신부와 동일한 소형여래상대가 있어 전체 약 200위에 달한다.이와 같이 전면에 새겨진 소불상대는 천불신앙에 따르는 천불의 표현으로 해석되는 바, 석상에 조성된 천불의 유례로서는 최고의 작품일 것이다. 명문에서의 계유년 비상의 조각양식과 비문내용으로 보아 역시 통일 직후로 추정되어 비암사석상, 즉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석상과 같은 연대로 추정된다.

연화사 칠존석불상[편집]

蓮華寺七尊石佛像

보물 제650호. 높이 51cm, 밑너비 33cm, 측면너비 10cm, 서면 월하리 연화사 소재. 반타원형의 일석으로 만들었고 명문이 없는 불상이다. 바닥면은 마름모꼴이며 위로 거슬러 갈수록 얇아지면서 나선형으로 오므라지고 있다. 옆면은 밑바닥이 넓고 상부는 좁아지고 있으며 측후 양면은 조각이 되어 있다.본존은 방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는데 보안은 마멸이 심하다. 육계 나발을 볼 수 있고 통견의와 수인으로 보아 아미타불로 상현좌의 양식을 보이는 방좌 앞의 끝에는 정면한 사자 한 쌍을 새겼는데 그 몸체와 꼬리가 옆면에 표현되어 있다.본존 좌우에는 1위씩의 보살입상이 있는데 몸체에 따라서 연주대가 조식되었으며 원형두광을 보이고 있다. 나한상은 본존과 보살 사이에 끼어 있으며 양쪽의 인왕입상 또한 사자머리 위에 서서 무기를 들고 서 있다.본존은 반타원형 신광과 대원두광을 지니고 있고 연화보주화염문을 새겼으며 다시 외연에는 화불과 화염문을 새겼다. 정상부가 파손되었으며 조각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옆면에는 아랫부분에 사자의 몸통 부분이 있고 그 위에 결가부좌한 통견선정인의 여래좌상 1위가 각각 보주형 광배를 지니고 조각되어 있다. 뒷면 중앙이 융기되어 각형을 이루었는데 그 아래 연좌 위에 여래좌상을 새겼다. 좌우에는 한 송이의 연봉오리와 연잎을 장식하고 있다. 뒷면의 독존도 파손되었으나 오른손은 강마인이며 왼손은 들어서 복부에 대고 있다.연화사에 소재하고 있으며 비암사석상 정안면과 함께 연기지방 고대미술의 판도를 새롭게 정리한 작품이다.

연기의 인물[편집]

-人物

성담수[편집]

(?~1456)

조선 세조 때의 생육신의 한 사람. 호는 문두(文斗). 1450년 진사가 되었고, 승문원 교리 등을 지냈다. 단종 복위 사건으로 6촌간인 성삼문 등이 사형당했으며, 그도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어 김해로 귀양 갔다가 3년 만에 겨우 풀려 나왔다. 그 후 벼슬을 단념하고 경기도 파주의 외진 곳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부여군[편집]

부여의 상징물[편집]

扶餘-象徵物

부여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부여의 자연[편집]

-自然

충남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군의 서북쪽을 차령산맥의 지맥이 지나가면서 월명산(月明山, 544m)·아미산(峨嵋山,645m)·성주산(聖住山, 680m) 등을 일으켜 구릉지대를 이루고 동남부는 금강이 흐르며 내포평야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주로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면적 624.6㎢, 인구 8만 8,275명(2002.12)이다.

기후[편집]

서해안이 멀지 않으므로 해풍의 영향을 받아 현저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 14

, 1월 평균 -3

, 8월 평균 26.3

, 연평균 강수량 1,200㎜이다.

부여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인데 성왕(聖王) 16년(538) 웅천(熊川-공주)에서 이 곳으로 도읍을 옮겨 서울로 정하였다. 의자왕 때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일시 당의 웅진 도독부(熊津津督府) 밑에 있다가 신라 문무왕 때 이를 병합하여 총관(摠管)을 이 곳에 두었는데, 경덕왕이 부여라 개칭하여 군으로 하였다.고려 현종 때 공주에 속하였는데 명종 때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때 현감을 두었으며 고종 32년(1895) 군이 되었다. 1914년 홍산·임천의 2군 및 석성군(石城郡)의 반과 공주·청양, 그리고 노성(魯城)의 일부를 합쳤고 1960년 1월에는 부여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부여의 산업[편집]

-産業

주곡 생산은 물론이려니와 금산(錦山) 다음가는 충청남도 제2의 인삼 산출을 과시한다. 인삼 재배는 한국전쟁 후 개성 사람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기후나 토양이 그 재배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환금작물(換金作物)로 제일 좋기 때문에 농가 부업으로 점점 왕성하여 풍기·금산·김포·강화 등과 함께 남한의 4대 인삼 산지의 하나가 되었다. 수산업자도 약간 있으나, 그나마 근년에 이르러서는 매년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남서쪽 서천군에 가까울수록 모시 생산이 많고, 금강 연안의 범람원에서는 수박과 ‘펄참외’라는 참외가 많이 나서 인접 군에 반출된다.

농업[편집]

경지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32%인 210.5㏊며 논밭 비율은 73:23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인삼(백삼·홍삼)·누에고치·양송이 외에도 채소류와 과일이 많이 생산되며 홍삼은 고려홍삼으로 유명하다.

특산물[편집]

난·무·미니장미·배추·사과(세장방추형)·오이·토마토·채소·화훼묘·단무지·느타리버섯·딸기·미나리·밤·복수박·세도방울토마토·신령버섯·양송이·취나물·콩나물·표고버섯·들깻잎·무(단무지용 무)·배·사과·수박·장미·포도 등이 유명하다.

광공업[편집]

금(林川面)이 많이 생산되고, 무연탄은 충남탄전의 일부로서 보령시에 버금가며, 외산면의 삼부·무량·동명·영풍과 홍산면의 삼산(三山), 내산면의 광희 등의 탄광에서, 규석은 복수광산에서 각각 산출된다. 석탄은 연간 23만 7690t의 생산되고 있다. 또한 75개의 제조업체가 있는데, 업종별로는 식품(31)·섬유(1)·광업(6)·전자(5)·화학(2)·기계(1) 등이며, 부여읍에 홍삼제조소가 있다.

부여의 교통[편집]

-交通

부여읍·규암면·구룡면 등을 거쳐 보령시 미산면으로 연결되는 국도와 청양군 남양면에서 은산면·규암면·장암면·임천면·양화면을 지나 서천군 한산면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있다. 또 논산시 성동면에서 석성면·부여읍·장암면·구룡면·홍산면·옥산면 등을 지나 서천군 판교면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있으며 이 밖에도 지방도와 10개 노선의 군도도 개설되어 있다.

부여의 관광[편집]

-觀光

123년간 백제의 왕도였기 때문에 수많은 역사의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부여읍에 있는 정림사지(定林寺址)의 오층석탑은 국보 제9호로서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형(始源型)이다. 특히 백마강안(岸)의 부소산거암 절벽인 낙화암은 나당(羅唐) 연합군을 피하여 삼천궁녀가 절개를 지켜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는 애화가 얽혀 있으며 부여팔경의 하나이다. 부소산 북쪽 기슭, 낙화암 동쪽 백마강안 단애상에 위치하는 고란사·왕궁성·관아·사원·귀족의 저택, 시민 부락을 둘러싸고 있던 도성인 나성(羅城), 고분 등 삼국시대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적과 문화재가 있어 찾는 이가 많다.

부여읍[편집]

扶餘邑

백마강(白馬江, 금강의 별칭)의 회류부 좌안에 발달한 군청 소재지이다. 부소산(106m)을 중심으로 강의 남북안에 넓은 평야가 펼쳐 있어 농산물의 산출이 풍부한 곳이다.성왕 16년(538) 웅진(公州)에서 도읍을 옮겨온 백제의 정치·군사·문화·경제의 중심지로, 의자왕 20년(660)에 이르러 망할 때까지 왕도로서 번영하였던 곳이다. 관광지로서는 범위가 좁고 호남선이 이 곳을 피하여 개통되고 금강의 수운이 쇠퇴됨에 따라 발전을 보지 못하고 지방 시장으로서의 명맥을 이을 뿐이었으나 자동차 교통이 발달되고 홍삼제조공장이 생겨 다소 활기를 찾게 되었다. 관광객을 위한 관광기념품으로 목제품·석제품·죽제품 등의 다종다양한 장식품을 많이 제조하여 판매하는 상점이 많아 특산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백마강[편집]

白馬江

부소산 동측을 침식하여 백제말의 애화를 남긴, 이른바 낙화암이란 하식애(河蝕崖)를 발달시켜 경승지를 이루고 있다. 부소산 정상에는 반월성지와 최고점인 월영대에 군창지가 있는데 탄화된 쌀·보리·콩 등이 흙 속에 있어 좋은 관광 기념품이 되고 있다. 낙화암은 고도 평양의 모란봉 동쪽의 대동강 하식애인 청류벽을 방불케 하는 천연의 요험이다. 전에는 남서쪽으로의 왕래는 규암나루를 통하였으나 지금은 백제교를 이용하게 되어 편리해졌다.

금동관세음보살입상[편집]

金銅觀世音菩薩立像

국보 제293호. 국립부여박물관. 1970년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서 발견되었다. 삼면화관(三面花冠)을 쓴 머리와 부드럽고 아름답게 표현된 몸통 부분과 소박하게 표현된 연화대좌(蓮花臺座)는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주며 내려뜬 눈과 입가의 미소는 보살상이 지니는 자비로움을 전신에 넘쳐흐르게 하는 백제 말기의 우수한 불상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편집]

金銅彌勒菩薩半跏像

국보 제83호. 국립부여박물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고개 숙인 얼굴의 뺨에 오른손가락을 살짝 대어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은 부처가 출가 전에 인생무상을 사유하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한다. 안정된 형태와 부드럽고 우아한 자세, 나신의 상체에서 보이는 인체미, 의습의 입체적인 표현과 미소를 머금은 얼굴표정 등은 법열(法悅)의 극치를 자아내는 사유형(思惟形)의 반가상(半跏像)으로 백제인의 종교적 예술성을 잘 표현한 우리나라 불상조각을 대표하는 명품이다.

궁남지[편집]

宮南地

사적 제135호.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마래방죽이라고 부르는 늪지였으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궁남지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연못은 1965~1967년에 복원한 것으로, 원래 자연늪지의 1/3 정도의 규모이다. 이 유적에 대해서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1990~1993, 1997년에 시굴 및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주변에서 수전(水田)유적이 나오고 수로와 관계된 유적이 연못 안에서 확인되었다. 또 이곳에서 백제시대 목간과 새머리 모양의 조각을 비롯하여 토기·수막새 등이 나왔다.

무량사 극락전[편집]

無量寺極樂殿

보물 제356호.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 부여 무량사 경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극락전은 조선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규모가 매우 큰 중층(重層) 불전건축(佛典建築)으로서 전통 목조건물의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극락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대형 할석의 덤벙주초석을 놓고 배흘림이 있는 굵은 원형기둥을 세워 정면 5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평면으로 건립되었는데 2층의 평면은 1층의 내고주가 2층의 변주가 되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었다.건물의 입면 구성에 있어서도 1층은 높고 2층은 낮으며 또 평면 넓이도 1층에 비해 2층이 매우 작아 건물전체에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창호(窓戶)는 정면 5칸 중 중앙 어간에는 4분할 꽃살문을, 양 협간에는 쌍여닫이 정자살문을, 그리고 양단간에는 외여닫이 정자살문을 달아서 크기를 점점 작게 만드는 등 창호의 크기와 문양에 변화를 주었으며, 특히 불전 안으로 들어오는 빛에 부드러움을 주기 위하여 창살의 깊이를 깊게 하는 등 입면 구성과 건물구조에 많은 정성을 들였다.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주위 4면에 1간통의 외진 공간을 두고 그 안쪽에 3칸

2칸의 평면을 구획하여 고주를 돌려 세웠다.불단은 중앙 부분의 뒤쪽 절반을 차지하도록 마련되었으며 그 위에는 아미타불을 비롯한 삼존불을 안치하였다.건축양식은 기둥 상부를 결구하고 있는 창방 위에 다시 평방을 얹고 그 위에 주간포를 중앙 어간에 3구, 양 협간에는 1구씩을 각각 배치한 조선시대 성행하였던 다포양식으로 되어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편집]

百濟金銅大香爐

국보 제287호. 국립부여박물관. 이 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백제시대 건물지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64cm, 몸통 지름 19cm로서 문양과 구조면에서 유례없는 역사적 걸작으로 평가된다. 구조는 대좌부, 향로몸, 뚜껑부로 나누어지는데 대좌부는 한 마리의 용이 용틀임을 하는 모습으로 향로의 몸통을 머리로 받들고 있다. 향로 몸체에는 24엽의 연꽃잎이 3단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7류와 금수 가릉빈가, 신선 등이 표현되어 있다. 뚜껑부에는 74개의 산봉우리와 상상 또는 현실의 동물 39마리, 그리고 5인의 악사를 비롯한 16인의 인물이 표현되어 있다. 최상부에는 한 마리의 봉황이 여의주를 목에 끼고 비상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6세기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을 보여주는 백제공예품의 진수이다.

정림사지[편집]

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남에서부터 중문·석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세워지고 주위는 회랑으로 구획된 백제의 사찰이다. 해방 전에 실시된 1차 발굴조사 결과 1탑 1금당식의 전형적인 백제절터로 밝혀진 바 있으며, 고려시대 명칭이 정림사였음이 알려졌다.중문지는 석탑 중심에서 남쪽으로 19.98m의 거리에 중심을 두고 자리잡고 있으며,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금당지는 석탑 중심에서 북으로 26.27m의 거리에 위치하였으며 하층기단의 경우 정면 7칸, 측면 5칸이고 파괴된 상층 기단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추정된다. 금당은 백제식의 이층기단으로 상층기단 상면은 물론 하층기단에도 초석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강당지는 중심이 금당의 중심에서 31.70m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고려시대에 재건되었다. 석불이 안치된 연화대좌는 이 때 재건된 기단 위에 구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회랑지에서 남북을 통과하는 남북중심선을 상정하였을 때 가람 남북기준선에서 동쪽으로 22.50m 지점에서 동회랑이 통과하며 서쪽으로 22.57m의 지점에서 서회랑이 통과하였다. 북회랑은 강당 측면의 중앙칸 후반부에, 그리고 남회랑은 중문 측면에서 약간 후방으로 기울어진 위치에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석탑에 관한 조사에서는 기초부가 상·중·하 3부분으로 된 판축토에 의하여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외에 사찰 동북부에서 문지, 건물지, 배수구 와적층이 발견되었고, 중문 밖에서는 방형의 연지와 남문지가 확인되었다. 조사를 통하여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활석재 삼존불편을 비롯하여, 석불좌상(보물 제108호), 각종 소조상, 기와 및 도제 벼루를 포함한 각종 토기가 발견되었다. 지정 면적은 5만 9,245㎡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편집]

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석탑의 구조는 지대석을 놓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다섯층의 탑신부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를 두었다. 지대석은 여러 개의 장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2단의 기단받침으로 기단을 형성하여 그 위에 면석을 놓았다. 면석의 높이는 낮고 각 면 양쪽에 우주가 마련되었으며, 8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갑석은 두껍다. 탑신부 각 층의 조립형식은 같다. 초층탑신은 규격이 크기 때문에 12매로 구성되었으며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있는 우주석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면은 2매씩의 긴 판석을 끼웠다. 2층 이상의 탑신에는 2·3층은 4매석, 4층은 2매석, 5층은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양쪽 우주에는 역시 배흘림이 표현되었으나 초층에 비하여 2층 이상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체감되어 아주 낮아졌기 때문에 우주도 짧아서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된 탑신석 전체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넓다. 각 층 옥개석은 낙수면부와 받침부가 별개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여러 개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각 세부에서 목조가구의 변형수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와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기공이 해서로 새겨져 있으므로 평제탑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서천군[편집]

서천의 상징물[편집]

舒川-象徵物

서천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서천의 자연[편집]

-自然

충남의 서남단에 위치하며 차령산맥의 말단부가 군 중앙부에까지 미치고 남쪽은 준평원화하여 평탄한 논산(論山)·호남평야에 연결되고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편마암 지대이다. 해안은 침강에 의하여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으로서 간만의 차가 6.9m에 달하며 간석지가 발달하여 있다. 면적 357.8㎢, 인구 7만 254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쪽 해안에 위치한 까닭에 온난하다. 연평균 기온 12.5

, 1월 평균 -2

, 8월 평균 26.5

, 연평균 강수량 1,150㎜이다.

서천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설림군(舌林郡) 또는 남양(南陽)인데 신라 경덕왕 때 서림군(西林郡)으로 고치고, 고려 현종 9년(1018)에 가림현(嘉林縣)에 예속시켰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다. 충숙왕 1년(1314)에 서주(西州)로 개칭, 승격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 서천으로 고쳐 군이 되었고 1914년 비인군(庇仁郡)·한산군(韓山郡)을 이곳에 병합하였다. 1938년 10월 서남면과 마동면의 일부가 장항읍으로 승격하였고, 1979년 서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2읍(장항·서천), 11면(마서·화양·기산·한산·마산·서초·문산·판교·종천·비인·서)을 관할한다.

서천의 산업[편집]

-産業

자연적 조건이 농업에 적합한 데다가 관개시설이 발달하여 농산물이 풍부하다. 모시(苧市)는 고대로부터 ‘한산(韓山)모시’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모시는 저마(苧麻)를 햇볕에 표백한 후에 수방제사(手紡製絲)하여 가내 수공업으로 부녀자들이 짜는데, 그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에 현 한산면·기산면 일대에 야생하던 저마를 이용, 방직한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은 그 이름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다. 독일·프랑스·일본 등지로 수출되며 외화 획득의 총아로 등장하고 있다. 수산업에 있어서는 그 어획량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주로 어류의 생산이 많지만 서천군은 육지로부터 유입하는 담수가 적당하고 조류 소통이 좋아 사료 생물이 풍부하므로 백합조개의 성장이 빠르고, 풍파가 적은 내만으로 되어 있어 최적지이다. 또 지반의 변동이 적고 평탄해서 매년 백합의 양식 면적이 늘어가고 있는데 이것은 주요 수출품으로 되어 있다. 광업에 있어서는 석탄·금·은·구리·철 등이 생산된다. 공업에 있어서는 장항에 제련소·비료공장·조선공장 등이 있으며 비인 공업단지 조성되고 있어 이 지방의 공업 전망이 밝다.

농수산업[편집]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저마·생강·누에고치 등인데 쌀은 주로 한산·화양면·마서면 등의 비옥한 땅에서 생산된다.한편 수산업은 장항 어협을 중심으로 행해여지는데, 보유 어선은 900여 척이고, 주요 수산물은 어류·해조류·패류 등이며 해안선 총길이가 72.5㎢가 되며 김이 많이 생산된다.

광공업[편집]

1967년 말경부터 생산을 개시한 풍농 비료공장은 국내 유일의 용성인비를 연산 10만 8천 톤이나 생산하여 많은 외화를 절약한다. 비인에는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60여 개의 공장이 입지해 있으며 정유·석유화학·화학비료·화학섬유·펄프 및 제지 등 공업이 적합하여 밝은 전망을 던져주고 있다.

특산물[편집]

계피녹두·단감·딸기·메주콩·생지황·쌀·참깨·토마토·풋고추·부채·자하젓·청풍명월·해인액젓·손살미(깻잎김치)·한산 모시·한산소곡주·관상수·들깨·마늘·부추·서리태·오이·천마·팥·현미 등이 유명하다.

서천의 교통[편집]

-交通

천안·예산·대천·장항을 잇는 장항선이 남북으로 통하고 있으며, 대안의 군산과는 10분 대에 정기 연락선에 의하여 금강을 넘나든다. 도로망도 잘 정비되어 있는데 특히 장항선 간선도로는 고속화되어 있다. 또 장항항은 국제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국내외 해상교통도 잘 열려 있다.

장항읍[편집]

長項邑

금강 하류의 북안에 위치하며 군산과 쌍자도시(雙子都市)를 이루고 있다. 본래 한촌이었는데 1931년 장항선이 개통되자 경기·강원도의 일부, 충청남도 서북부 지방의 탄토항(呑吐港)으로 되었다. 1931∼1941년의 항만 수축과 시가지 정리에 의하여 근대적인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지금은 1만t급 이상의 선박 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부교시설을 비롯하여 임항창고(臨港倉庫) 13동(3,330평)으로 2만t의 화물 보관이 가능하며 1964년 7월에 국제항으로 승격되었다.좋은 항만 교통수단 조건으로 1936년에 남한 유일의 건식(乾式) 제련소인 장항제련소가 건설되어 동·금·은·납·아연 등을 생산하게 되었다. 8·15 후 비철금속의 자급률을 높이기 위하여 3개 공장을 더 증설했다. 그러나 아직도 제련시설이 불충분하여 원광대로 해외에 수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해안이 깊어(평균 8m) 군산과 같이 4천 톤급 선박이 무난히 정박할 수 있으나 조차가 6.9m나 되어 착부 능력 3천 톤의 부선부두(浮船埠頭)가 설치되어 있다. 또 연간 10만 8천 톤의 용성인비를 생산하는 풍농비료공장과 흥국조선공장 등이 들어서 발전을 보고 있다. 그리고 장항선과 군산선을 연결하는 1.8㎞의 철교가 가설되고 또 양시(兩市)를 연락하는 다리가 준공되어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군청은 서천면 군사리에 있다. 군내에는 비인해수욕장을 비롯하여 보물 제224호인 비인 오층석탑이 있고, 또 서면 마량리의 낮은 언덕에는 7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있어 3

6월까지 만발하여 가경을 이루는데 이곳이 육지의 북한계선이며 산상에 동백정이 있다. 그 밖에 건지산성(乾至山城)·서부저수지 등이 있다.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편집]

月南李商在先生生家

기념물 제84호.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목조초가로 안채와 사랑채가 있으며, 유품 270여 점이 전시된 전시유물관이 있다. 1981년 안채와 담을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다. 생가 옆 유물전시관은 선생이 생전에 남기신 유품들을 전시하기 위하여 1991년 7월에 개관하였다. 중부지방의 전통적 농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교육적 가치가 높으며, 전면 지붕의 길이가 후면보다 길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문헌서원[편집]

文獻書院

고려 말 대학자인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두분을 배향하기 위하여 선조 27년(1594)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에 소실되어 광해군 3년에 한산 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이듬해(1611) 문헌서원으로 사액되고 앞의 두 분과 이종학·이자·이개 등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았으나 그 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을 만들고, 분향을 해오다가 1968년 현재 위치에 재건하고 문양공 이종덕 한 분을 더하여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보존자료는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의 문집 55권, 목판각 975매가 보관되어 있고, 영당에는 그림으로 된 이색의 초상화가 있다.

서천의 인물[편집]

-人物

이색[편집]

(1328~1396)

고려 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사람이다. 찬성사 곡의 아들로 이제현의 문인이다. 충혜왕 복위 2년에 진사가 되어 충목왕 4년(1348)에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 부친상으로 귀국하여 공민왕 원년인 1352년에 전제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그 후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공민왕 16년(1367)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이 제정하고 김구용·정몽주·이승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고,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했다. 1389년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주민수와 함께 창을 옹립, 즉위케 하고 판문 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위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을 주청했다.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장단에 유배, 이듬해에 함창으로 유배되었다가, 태조 4년 1395년에 한산백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여강으로 가던 도중 세상을 떠났다.고려 말기의 석학으로 정몽주·길재와 함께 고려의 삼은으로 불리우며 문하에 권근·김종직·변계량을 두었고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상재[편집]

(1850~1929)

정치가·민권운동가·청년운동가. 본관은 한산. 자는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 아버지는 희택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어려서 전통교육을 받고, 고종 1년(1864) 강릉 유씨와 결혼하였다. 32세 때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인 1887년에 주미공사관 1등서기관으로 부임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우부승지, 협판위정부 참찬을 역임하였다. 광무 2년인 1898년에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을 지내면서 민중계몽에 전력했으며, 그 뒤에 기독교 청년회 회장, 조선일보사장을 거쳐 신간회 회장을 지냈다. 1929년에 별세하였으며 1962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청양군[편집]

청양의 상징물[편집]

靑陽-象徵物

청양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

청양의 자연[편집]

-自然

충남의 중부에 위치한 군이다. 차령산맥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지나고 있어 산지가 많다. 이 산맥은 우리나라 최고기층 선캄브리아기의 지층인 화강편마암계가 폭 30㎞ 내외로 전체를 덮고 있으며 결정편암계를 곳곳에 관입(貫入)하고 있다. 또 후기 분출의 화강암에 의하여 관입 당하고 있으며 여러 곳에 대동계(大同系)·경상계(慶尙系) 등의 중생대층을 부정합(不整合)으로 올려놓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지하자원을 배태하여 도내 굴지의 광산군이 되었다. 차령산맥이 동서 두 줄기로 갈라지는 중앙부분, 청양면의 분지와 동쪽 부여군과 경계가 되고 있는 금강 서안에 약간의 저평지가 있는 외에는 그리 높지 않으나 전체가 산지로 되어 농경지가 적다. 면적 479.6㎢, 인구 3만 8,697명(2002.12)이다.

기후[편집]

해안에 비교적 접근하고 있지만 기온의 교차가 큰 내륙성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 기온 12.5

, 1월 평균 -3

, 8월 평균 26.2

, 연평균 강수량 1,195.9㎜이다.

청양의 연혁[편집]

-沿革

구 청양군과 정산군(定山郡)을 합한 것인데, 청양은 백제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으로 신라 때에 청무(靑武)로 고쳐 임성군(任城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청양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고, 후에 홍주(洪州)에 이속되었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었다. 그 후 많은 변천을 거쳐 1895년 군이 되고, 1914년 정산군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정산은 백제의 열기현(悅己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 열성(悅城)으로 고쳐서 부여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정산으로 고치고 현종 9년(1018)에 공주에 속하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1895년 군이 되고 1914년 청양군에 병합되었다. 1979년에는 청양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1읍(청양), 9면(운곡·대치·정산·목·청남·적곡·사양·화성·비봉)을 관할한다.

청양의 산업[편집]

-産業

경지 면적은 협소하나 주산업은 농업으로서 쌀이 전곡류의 60%를 차지한다. 이 지방은 지하자원이 많기로 유명하며 특히 금·은·중석이 많다.

농림업[편집]

경지 면적 11,362㏊ 중 논 8,132㏊, 밭 3,230㏊로서 논이 많다. 농가 가구 12,416, 농가 인구 7만 1,100명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콩·고구마·담배·저마·누에고치 등이다. 한편, 임야 면적이 총면적의 약 66%이고, 성림지가 약 90%에 가까워 용재와 임산 연료의 생산이 많다.

광업[편집]

전술한 지질 구조에 의해 배태되는 광산물이 많고, 특히 유명한 금·은 광산이 있는데 삼광·구봉 등 광산은 그 대표적이다. 지금부터 약 50년 전에 고품위 광석의 노두(露頭)를 발견한 데에서 시작한 구봉광산은 사양면 구봉리의 서편 산록에 있는데, 200t을 처리할 수 있는 전니청화 제련장(全泥靑化製鍊場)과 60t 처리 능력을 가진 도광(搗鑛)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월 최고 순금 40여 ㎏까지 생산실적을 올렸으나 최근 휴광되었다. 중석은 한미 중석협정과 전후의 경기 상승으로 한때는 우리나라 총 수출액의 70% 이상을 점한 때도 있었으나 협정만료와 국제 시장가격의 계속적인 하락으로 중석광업이 일시 중단된 일도 있었으며 이후에는 점차 회복되고 있다. 이러한 내외의 추세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제3위의 생산실적을 올리던 청양중석광산도 한때 휴광했다가 다시 채굴을 시작하였다. 석면은 한미광산, 무연탄은 청양광산에서 난다.

특산물[편집]

청양고추·고추장·칠갑산 참게·건표고버섯·구기자캔·농축액·과립차·구기자 한과·칠갑산 메론·청양사슴 녹용·느타리버섯·알구기자·오자정·다림차·구기자 다림차·액상차 등이 유명하다.

청양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없고 대천·공주간의 국도에 의해 중앙을 동서로 통과하고 서산·부여간의 국도는 서부, 부여·장항 간 국도는 부여군 옥산면에서 진입하여 판교면·종천면·서천읍·마서면을 거쳐서 장항읍으로 연결되고 있다.

청양읍[편집]

靑陽邑

군청 소재지, 금강의 지류 금강천의 상류인 지천 북안에 위치한다. 동쪽은 칠갑산(561m) 줄기가 남북으로 가로막아 여기서 여러 계류를 발원시키면서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이 산지에 있는 한치고개를 통하여 연락될 뿐 도로가 없다. 서쪽은 구릉이 발달하였는데 특히 지천 유역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발달한 평야의 중앙에 위치하며 남북과 서쪽으로 도로망이 여러 갈래 뻗어 있어 군 교통의 중심지이다. 농·축산물의 집산이 성하며 정기시장이 서기도 한다. 부근 일대에는 많은 광산이 있으며 청양읍 읍내리에는 보물 제197호인 석조삼존불입상이 있고 국보 제58호인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보물 제162호·제191호인 상·하 대웅전이 있는 장곡사(長谷寺), 보물 제174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 보물 제337호인 금동약사여래좌상, 보물 제18호인 정산면 서정리의 구층석탑, 적곡면 적곡리의 도림사지석탑 등 명승고적이 있다.

서정리 구층석탑[편집]

-里九層石塔

보물 제18호.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소재. 구조와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전성하던 사찰의 탑임을 알 수 있다. 이곳 사원의 규모는 9층에 이르는 대탑이 서있는 전당이어서 규모가 웅장하고 모습이 화려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탑은 지대석 위에 아래층 기단이 놓였는데 중간석 각면에는 2개씩의 유려한 안상이 배치되었다. 특히 제1층은 거대하나 제2층 이상은 감축되어 9층에 이르는 다층탑의 균형은 잘 잡은 모습과 창곡에 준발한 장관이 훌륭하다.

장곡사[편집]

長谷寺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소재. 칠갑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가람으로 신라 문성왕 12년(AD 850) 보조선사 체징이 창건한 것으로 전하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국보 제58호), 장곡사 미륵불괘불탱화(국보 제300호), 상하대웅전(보물 제162호·제181호), 장곡사 철조비로자나좌상부석조대좌(보물 제174호), 금동약사여래불좌상(보물 제337호), 설선당(유형문화재 제273호) 등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또한 장곡사는 다른 가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상·하 대웅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약사여래 기도도량으로도 유명하다.

모덕사[편집]

慕德祠

문화재자료 제152호.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소재. 조선말 대학자이며 의병대장인 면암 최익현의 항일투쟁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1914년에 창건한 사당이다. 최익현은 항일투쟁을 하다 일군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끌려가 일본음식 먹기를 거절하다가 아사순국한 애국자이다. 최익현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유품도 전시되어 있다. 고택, 중화당과 장서각, 영당, 춘추각, 유물전시관 외에 관리사무소가 있다. 앞쪽에 있는 우목저수지와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답다. 매년 4월 13일 항일의거기념 면암선생추모제가 열린다.

홍성군[편집]

홍성의 상징물[편집]

洪城-象徵物

홍성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

홍성의 자연[편집]

-自然

충청남도의 서해안 중앙에 위치하며 북쪽에는 가야산·팔봉산 등이 솟고 동쪽과 남쪽은 차령산맥의 말단에 해당되며 동부에 봉수산, 남부에 오서산 등이 솟아 이들 산의 여파로 인해 군내는 구릉이 일기일복(一起一伏) 하나, 용봉·봉수 등의 산에서 발원하여 장항선을 따라 홍성·홍동·금마·홍북의 4개 읍면을 거쳐 북류하면서 많은 지류를 합하여 삽교천과 무한천을 이루어 아산만에 주입하는 금마천 유역이 군내 최대의 평야이자 미곡 산지이다.또 장항선을 따라 남류하는 상정천과 오서산에서 발원한 광천천이 합류하는 광천 일대와 예산군 덕숭산(德崇山)에서 발원한 와룡천이 서남방으로 흐르면서 구항 갈산천의 지류와 합쳐 우여곡류 끝에 황천(荒川)을 이루어 천수만에 유입하는 유역 일대가 비교적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면적 443.6㎢, 인구 9만 1,652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바다에 면해 있기 때문에 대체로 온난하나 겨울에 북서 계절풍이 강하게 불어와 기온이 많이 저하한다. 연평균 기온 12

, 1월 평균 -3.6

, 8월 평균 26.1

, 최고 기온 38

(1939.7),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홍성의 연혁[편집]

-沿革

홍주군(洪州郡)과 결성군(結城郡)을 합한 것으로, 홍주는 본래 고려의 운주(運州)이며 성종 14년(995)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고 1012년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다시 홍주로 고치고, 공민왕 7년(1358) 목(牧)으로 승격하여 동 17년(1368) 지주사를 두고, 1371년 다시 목(牧)으로 되었다.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차의 변혁을 거쳐 1896년에 군이 되었고, 1914년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이 되었다. 결성은 본래 백제의 결사현(結巳縣)인데 신라 때 결성(潔城)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현종 9년(1018) 운주(運州)에 이속되었다가 명종 2년(1172) 감무(監務)를 두고 우왕(禑王) 때 왜적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공양왕 2년(1390) 진성(鎭城)을 두고 유민(流民)을 불러 정착케 했다. 조선 태종 13년(1413)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1895년에 군으로 승격, 1914년 홍주와 합하여 홍성군이 되었다. 1941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1942년 광천면이 광천읍으로 각각 승격하였다.2읍(홍성·광천). 9면(홍북·금마·홍동·장곡·은하·결성·서부·갈산·구항)을 관할한다.

홍성의 산업[편집]

-産業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농경지 개간이 잘 되어 산골 깊숙이까지도 개답(開畓)되어 쌀이 많이 나는데 홍성미(洪城米)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농가 수입을 올리기 위해 최근 저마 주산단지를 조성하고 있으며, 가야산의 풍부한 초지(草地)를 이용하여 한우 사육단지도 조성하고 있다. 해산물에 있어서는 꽃게·새우·조개류 외에는 보잘 것이 없고, 얕은 바다의 간석지를 이용한 천일제염이 성하다. 광산물은 금·은·중석 등이 산출되는데 결성면의 결성금광이 대표적이다.

농업[편집]

전체 면적의 약 38%가 경지 면적이며 경지 면적 16,615.1㏊ 중에서 논 9,137.7㏊, 밭 7,477.4㏊이다.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무·배추·호박·누에고치·담배·대마·저마·생강·소·돼지·닭 등이다. 쌀은 금마천 유역의 충적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수산업[편집]

간만의 차가 심하고 바다가 얕아 양항이 없으므로 수산업은 발달이 미미하지만, 광천읍의 옹암항과 서부면의 판교항이 소규모나마 열려 선착장으로 쓰이고 갈치·멸치·새우·조개류 등의 어획이 있으며 해안에서는 천일제염이 활발하다. 또 해태 양식에도 주력하여, 해방 전에 이미 23만 속(束)의 해태를 생산했으며 최근에도 계속 생산하여 수출하고 있다.

광공업[편집]

금·은·석면·무연탄 등이 나는데 석면은 광천·홍천 광산에서 생산되고 기계·화학·섬유 등의 공단들이 서해안 지역에 입지해 있다.

특산물[편집]

갈미칡그린쌀·갈산오이·녹두·무·배·복수박·수수·조·참외·청둥오리쌀·콩·팥·광천 새우젓·누에가루·광천 독배 멸치액젓·광천독배 까나리액젓·갈산 일반미·꽈리고추·딸기·방울토마토·배추·사과·은하방울토마토·쪽파·천수만쌀·청풍명월쌀·토마토 등이 유명하다.

홍성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 장항선과 국도가 남북으로 종단하고 서해안 고속도로가 갈산면·은하면을 지나며 기타 도로망도 정비되어 육상교통은 비교적 편하다. 그러나 간만의 차가 크고 연안이 얕으며, 간석지가 넓고 항구가 없어 해상 교통은 불편하다.

홍성읍[편집]

洪城邑

군청 소재지이며 군의 중앙에 위치하여 행정·교통·산업의 중심지로, 은행 등 금융 기관과 군청·지방법원 지원·도립병원 등 중요 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북류하는 삽교천의 지류 금마천과 많은 지류가 집중하는 홍성분지의 중심으로 지방 물산의 집산지이고, 장항선의 요역이며, 도로가 사방으로 뻗쳐 있다.옛날 지주사(知州事)를 두었던 중요한 곳으로 광경사지·노은서원·의사총·조문각내 석조좌불·조양문·당간지주·성삼문선생유허·용봉사와 마애불입상(보물 355호)·고산사 대웅전(보물 399호) 등등의 고적이 많이 있다.

마애석불[편집]

磨崖石佛

보물 제355호.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산 81 소재.

백제 말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높이 4m의 암석에 양각으로 된 이 석불은 그 수법이 경탄할 정도로 정교하다. 앞면에 불상윤곽을 따라 감형을 이루면서 조각한 입상과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큼직하고 상호는 비대하다. 눈은 가늘고 코와 입은 작은 편이며, 귀는 길고, 짧은 목에 삼도가 뚜렷하다. 어깨는 직선인데 통견의 법의를 입었고 배앞의 반원형 주름, 두 다리의 타원형 주름, 그 밑의 V자형 주름, 군의(치마)자리의 간단한 주름 등 모두 평면적이어서 박력이 없다. 오른손을 늘어 뜨려서 옆에 붙이고 왼손은 가슴 앞에 들어서 시무외인같이 되었으나 손가락을 구부린 듯하다. 광배는 음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그렸고, 머리 위에는 방형의 별석을 얹어 놓았다. 석불의 규모는 몸높이 210cm, 머리 높이 56cm, 얼굴 높이 40cm, 어깨 높이 67cm이다.

당간지주[편집]

幢竿支柱

보물 제538호.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97-2 소재. 높이 4.44m의 화강석재 2개의 기둥으로 된 사찰당간 지주로서 고려양식의 수법으로 12~13세기경 제작되었다. 수법이 수려하여 현재 남아 있는 석당간으로서는 나주동문 밖 석당간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주변의 지면이 깎여나가서 기단이 없어졌고 주각만이 노출되어 있으며 주간에 간대가 있고 간대 중앙에는 간주를 받는 직경 약 82cm의 둥근 구멍이 있으며 지주는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본당간이 소재했던 광경사는 큰절이었다고 하나 규모 및 창건과 폐사연대는 알 수 없으며 광경사지 삼층석탑, 석불입상, 석불좌상과 함께 현존하고 있다.

고산사 대광보전[편집]

高山寺大廣寶殿

보물 제399호. 홍성군 결성면 무량리 491 소재. 신라의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현존하는 대광보전은 목조와즙으로 사방 세 칸의 네모진 건물로 중간에 기둥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좌측에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건물이 있으며 대광보전 중앙과 우측에 있는 불상은 토불이고, 우측의 석불은 입상이며, 좌대석은 팔각과 사각으로 되어 있다.

홍성의 인물[편집]

-人物

권빙[편집]

(1542~1619)

권빙의 자는 중시. 호는 율재. 안동인 양촌 권근의 후예로 중종 임인년에 평리면에서 출생하였다. 이몽학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정난공신록에 기록되었고 동중추에 있었다. 말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낮에는 몸소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으며 여생을 보내다가 광해 11년 을미에 세상을 떠났다. 이조판서의 증직이 있고 묘소는 금마면 덕정리 독현에 있으며, 도암 이재가 쓴 신도비가 있다.

김좌진[편집]

(1889~1930)

독립운동가. 호는 백야. 갈산면 향산리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노예해방의 첫 기록을 남겼다. 20세 때에는 이봉창과 같이 서울에 고아원을 설립하여 무의탁 고아들을 양육하는 한편, 황성신보의 이사로 취임하였고, 관철동 대관원자리에 이창양행과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설립하였다. 1920년 10월 21일 31세가 되던 해에 시베리아에서 출전 중이던 일본의 가납연대 3,000명을 화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연대장 가납 이하 1,200명을 함몰시키고 천수백 명을 전상자로 만든 청산리 전투를 총지휘했다. 38세에는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하고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40세가 되던 해 군무서독변 겸 북만군정서총사령, 한족총연합회 주석에 취임하여 재만동포의 교육문제와 민생문제에 주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세력과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대일항전을 위하여 준비를 하던 중, 1930년 1월 26일 하오 2시 중동 선산지점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단원 김일성의 흉탄으로 생을 마쳤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성삼문[편집]

(1418~1456)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 태종 18년(1418) 홍북면 노은리 적동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해산할 때에 공중으로부터 “낳았느냐”라고 묻는 소리가 세 번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삼문’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세종 무오년에 문과에 합격하고, 정묘년에는 중시에 장원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가 되어 신숙주 등과 함께 어학과 음운을 연구하였고 사성을 연구함으로써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하였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는 당시 랴오둥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친을 13차례 찾아가 자문을 구하였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고문 끝에 사형당했다.

예산군[편집]

예산의 상징물[편집]

禮山-象徵物

예산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예산의 자연[편집]

-自然

충남의 중앙으로부터 다소 북서쪽에 위치하는데 동쪽은 차령산맥, 서쪽은 가야산맥 사이에 펼쳐져 있는 예당평야의 남쪽 대부분을 차지한다. 동부산지에는 봉수산·국정봉(420m)·도고산·덕봉산(473m)·안락산(424m) 등 400m 이상의 산지가 연긍하여 있으나 서쪽은 저산성 구릉지대이다. 그리하여 무한천과 삽교천은 지형을 따라 중앙을 북류하고 많은 지류를 합치면서 옥야를 이루고 있다. 면적 543.0㎢, 인구 9만 8,045명(2002.12)이다.

기후[편집]

해안에 비교적 접근해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는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연평균 기온 11.8

, 1월 평균 -4

, 8월 평균 26.3

, 연평균 강수량 1,100㎜이다.

예산의 연혁[편집]

-沿革

예산·덕산(德山)·대흥(大興)의 3군을 합친 곳이다. 예산은 백제의 오산현(烏山縣)으로, 신라 때에 고산(孤山)이라 칭하고 임성군(任城郡)의 영현이었는데 고려 태조 2년(919) 예산이라 고쳤고 현종 9년(1018)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고 후에 감무를 두었다.조선 태종 13년(1413) 현감을 두었다가 1895년 군으로 되었으며 1914년 대흥과 덕산의 2군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흥은 백제의 임존성(任存城-今州)인데 신라 경덕왕 때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대흥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 운주(運州-洪州)에 속하고 명조 2년(1172)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 7년(1407)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태종 13년(1413)에 다시 현감이 되었다. 고종 32년(1895)에 승격하여 군이 되었고 1914년 예산군에 병합하였다. 덕산은 덕풍(德豊)·이산(伊山)의 합명(合名)으로 덕풍현은 백제의 금물현(今勿縣)이다. 경덕왕 때 금무(今武)로 개명하여 이산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 덕풍으로 고쳤다.고려 현종 9년(1018)에 운주-洪州)에 속했다가 명종 때 감무를 두었다. 이산현은 백제의 마시산군(馬尸山郡)인데 경덕왕 때 이산으로 고쳐 군이 되었다. 현종 9년(1018) 운주에 속했다가 후에 감무를 두고 조선 태종 5년(1405) 덕풍·이산의 2현을 합해 덕산으로 했다. 태종 13년(1413) 현감을 두었고 현종 13년(1847)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가 1914년 예산군에 병합되었다.현재 2읍(예산·삽교), 10면(대술·신양·광시·대흥·응봉·덕산·봉산·고덕·신암·오가)을 관할한다.

예산의 산업[편집]

-産業

무한천·삽교천·금마천이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흐를 뿐만 아니라 예당 토지개량조합의 대흥저수지가 있어 거의 완벽에 가까운 관개시설이 되어 농산물이 풍성하다. 동서의 양 산지 사면은 뽕나무밭으로 이용되어 농가 부업으로서 잠업이 성하며 도내 수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담배 재배는 원래 예산엽(禮山葉)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특히 사과는 기후·토양이 재배에 적합하여 대구 다음가는 산지를 이루고 있다.이와 같이 과실·누에고치·담배 등 환금(換金)이 비교적 쉬운 농작물 생산에 주력하고 있는 것은 주곡 생산에 얽매어 경제적으로 빈곤을 면치 못하는 다른 곳보다는 생활이 윤택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산·삽교읍을 중심으로 대규모 섬유공장을 비롯하여 많은 공장이 입지해 있다.

농업·축산업[편집]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담배·누에고치·사과 등이다. 한편 오가·신암면과 삽교읍 등을 중심으로 사과재배가 매우 성하며, 사과는 대도시와 유통이 편리하여 매년 그 생산이 늘어 나고 있다. 오가·광시·신양·덕산·봉산면, 삽교읍 등지에서는 한우·젖소·돼지 등의 축산업이 활발하다.

특산물[편집]

고구마잎줄기·과수묘목·국화·꽈리고추·방울토마토·복숭아·상추·아이리스·예왕배·쪽파·포도·황금쌀·건강옹기물통·냉장고용 김칫독·사과·고추·관상수·글라디올러스·딸기·배·복숭아(창방·사자조생)·수박·애호박·오이·천마·토마토·포도(대봉)·예산오리쌀 등이 유명하다.

예산의 교통[편집]

-交通

장항선이 군 중앙을 종주(縱走)하고 국도도 동서남북으로 통하며 기타 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육상 교통은 편리하다. 예산읍을 중심으로 아산시 온양과 홍성읍 간의 21번, 당진읍과 공주시간의 32번, 서산시 해미면(海美面)에 닿는 45번 국도가 있다

예산읍[편집]

禮山邑

군청 소재지인데, 무한천의 지류, 안락산 지괴의 서남록에 위치하며, 서쪽 일면은 광막한 논밭 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 지방 농산물의 집산이 성하고 일찍부터 제사업이 일어나 있으나 가내 수공업에 불과하다. 장항선에 연한 교통의 요지이다.

삽교읍[편집]

揷橋邑

1973년 7월 1일에 삽교면이 읍으로 승격된 곳으로, 장항선의 삽교역이 있다. 부근의 수덕사·덕산온천 및 윤봉길 의사의 생가 등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군내에는 온도가 낮은 흠이 있기는 하지만 덕산온천이 있는데 이는 수질이 지구유(地球乳)라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우수하다고 한다.금오산 속의 고색이 창연한 향천사와 국제도총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게 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소가 있고 윤봉길 의사 기념탑이 그의 옛 집 정원에 우뚝 서 있다.또 예산 서쪽 22㎞ 지점에 수덕사(修德寺)가 있는데, 이 절이 있는 덕숭산(德崇山, 750m)은 산용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상봉으로부터 남으로 흐르는 계수는 기암괴석 사이를 흐르며 혹은 폭포를 이루고, 혹은 심담(深潭)을 만들며 노수고목이 우거진 심곡을 이루었고 여기저기 대소 암자가 있다.특히 이 수덕사는 599년 지명법사(智命法師)가 창건한 절로서, 불교승의 수선도량으로 알려져 있고, 국보 49호인 대웅전과 지금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벽화가 유명하다. 이 밖에도 많은 명승 고적과 천연기념물 등이 있다.

덕산도립공원[편집]

德山道立公園

충남 예산군 덕산면 일원. 덕산도립공원은 덕산면의 사량리·사천리·둔리·삼가리·광천리 등을 포함한다. 공원 내에는 원효봉·석운봉·호서의 소금강이라 일컬어지는 덕숭산과 해태바위 등 폭포와 아름다운 계곡들이 있다. 또한 비구니 사찰로 이름 높은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1990년 11월 1일부터 취사행위가 전면 금지되었다. 주요문화재로는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 미륵돌입상, 윤봉길의사 유품 등이 있다.

수덕사[편집]

修德寺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소재. 599년 백제 지명법사가 세운 뒤 원효대사가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국보 제49호)이며, 경내에는 유형문화재 제103호인 삼층석탑과 육괴정, 문화재자료 제181호인 칠층석탑, 만공선사 사리탑이 있고, 1990년 중창한 황하루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며 황하루 지하에는 성보박물관이 있다.

예당저수지[편집]

禮唐貯水池

수면적 3,290,000평. 1962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예산군과 당진군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한다 하여 예산군과 당진군의 앞머리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지난 20여년 동안 중부권 최고의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겨울철 얼음낚시 외에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계속 낚시할 수 있다. 주로 붕어·잉어를 비롯한 민물고기가 대부분이다. 1969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개발되어 다양한 휴양지로서 각광을 받고있다.

김정희 선생 종가유품[편집]

金正喜先生宗家遺品

보물 제547호.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89번지 소재. 추사공이 중국에 24대 이조판서 김노경께서 사신으로 가실 때 함께 가서 1년 5개월 있다가 귀국하실 때와 동생 김명희 및 친구 권돈희 판사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올 때 가지고 와서 선물한 것이다. 그 가운데 현재는 6점만 전하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윤봉길 의사 사적지[편집]

尹奉吉義士史蹟地

사적 제229호.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7번지 소재.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될 무렵 윤봉길은 “아는 것이 힘이요 배워야 한다”는 뜻으로 야학을 시작했고, 농촌 부흥원(후에 월진회로 이름이 바뀜)을 조직하였다. 야학은 처음에는 남녀가 같이 배우는 것이 전통 윤리에 어긋난다고 하여 참여하는 사람이 적었으나 윤 의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많은 호응을 받게 되었다. 야학의 교재로 윤봉길이 직접 저술한 '농민독본'(제1권:편지쓰는 법, 인사법, 우리나라 지리 등, 제2권:6·25 때 분실, 제3권:농민의 앞길, 농민 갱생의 길, 민족부흥의 길)을 사용하였다. '농민독본'은 농민과 농촌에 대한 그의 포부를 기술한 것인데 그 속에서 “우리는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 높지도 낮지도 아니하다” 라고 했는데 이는 반봉건적, 반제국주의적 사상과 탄압을 거부하는 진보적인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예산의 인물[편집]

-人物

윤봉길[편집]

(1908~1932)

애국지사. 예산 덕산 출신.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한학을 독학하였다. 1926년 중국 청마로 망명. 1931년 상해에서 세탁소 외교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있으며 김구의 한인 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접하여 상해 사변의 전승을 기념하는 홍구공원 식당에 들어가 폭파,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따와 일본의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리까와 대장 등을 살해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에우다 주중공사 시게미스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오사카로 이송,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을 수여 받았다.

김정희[편집]

(1786~185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서예가. 호는 완당(完堂)·추사(秋史). 박제가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실사구시’를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청의 학자들과 사귀어 조선과 청의 문화교류에 많은 공을 세웠다. 추사체를 낳은 명필로, 금석학 분야에도 조에가 깊어, 무학 대사비로 알려져 있던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저서로 '실사구시설' '금석과안록', 그림으로 「묵죽도」 「세한도」 등이 있다.

태안군[편집]

태안의 상징물[편집]

泰安-象徵物

태안군을 상징하는 꽃은 동백, 나무는 소나무, 새는 갈매기이다.

태안의 자연[편집]

-自然

충청남도의 북서단에 위치하고 있다. 태안군은 가로림만∼천수만 이서의 반도부와 섬들로 구성된다. 반도부는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암석과 흰 모래밭, 솔밭이 531㎞에 걸쳐 이어지고, 170여 개의 섬들이 앞바다에 흩어져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기후 또한 온화하여 많은 동식물이 자라고 있다. 반도 중심부의 화강암을 제외하고는 거의 결정 편암계 지질로 구성되어 있다. 내륙 쪽은 차령산맥의 지맥이 뻗어 구릉의 기복이 심하고 태안읍 부근을 제외하고는 평지가 거의 없다. 면적 504.8㎢, 인구 6만 6,143명(2002.12)이다.

기후[편집]

연평균 기온 11.2

, 1월 평균 기온 -3.5

, 8월 평균기온 25.3

, 연강수량은 1,200㎜이다.

태안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소태(蘇泰)라 고치고 부성군(富城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 운주(運州)에 속하였고, 충렬왕 때에 태안으로 고치고 지사군(知事郡)으로 승격했다. 조선 초기에는 순성(蓴城)이라 불렀으며 태종 13년(1413) 비로소 태안군이 되고 1914년 해미군(海美郡)과 함께 서산군에 통합되었다. 1989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태안군이 서산군에서 분리·독립했다.

현재 2읍(태안·안면), 6면(이원·원북·소원·근흥·남·고남)을 관할한다.

태안의 산업[편집]

-産業

주민은 반농 반어의 생활을 하며 농산물로는 쌀·고구마·마늘·생강·양파 등의 생산이 많다. 수산업으로는 갈치·숭어·멸치·새우·게 등의 어획과 김·굴·바지락·맛살 등의 양식업이 성하여 연간 어획량은 도 전체의 80%를 차지한다. 군내에서는 밤, 버섯, 호두, 잣 등의 임산물도 생산된다.지하자원으로는 각지에서 질 좋은 규사가 생산되는데, 특히 안면도의 규사는 인천·군산으로 보내져 유리 원료로 쓰인다. 또한, 난도 갈매기 번식지에 수천년간 쌓인 구마노(갈매기 똥)를 이용한 유기질 비료가 개발되어 잎담배·인삼 및 화분의 비료로 이용되고 있다.

특산물[편집]

거베라·달래·동백나무·마늘·방울토마토·사과·서양난·오이·인삼·절화류·정산포돌김·난·동·서양난·마·마른고추·백합·생강·양다래·육쪽마늘·장미 등이 유명하다.

태안 해안국립공원[편집]

泰安海岸國立公園

태안 반도를 중심으로 가로림만에서 안면도(安眠島)에 이르는 국립공원이다. 1978년 10월 서산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90년 3월 태안해안국립원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해식지형으로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학암포·백리포·만리포·연포·몽산포·삼봉·꽃지 등의 해수욕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안면도 승언리의 모감주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138호)을 비롯, 각처에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그 외에도 성곽과 전적지 그리고 각지에 절터와 망수대·능허대 등의 사적지가 있다. 또한 17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앞바다에 흩어져 있어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난도는 괭이갈매기 번식지로서 알려져 있다.

만리포 해수욕장[편집]

萬里浦海水浴場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에 있는 해수욕장. 서산에서 서쪽으로 30㎞ 지점에 위치한다. 대천해수욕장·변산해수욕장과 더불어 서해안의 3대해수욕장의 하나로 손꼽히며,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 천리포해수욕장과 함께 태안해안국립공원의 명소를 이룬다. 1955년 7월 1일 개설된 이래로 매년 7월 5일경부터 8월 20일까지 개장한다. 해수욕장까지의 교통은 편리하며 호텔·여관 등 숙박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태안읍[편집]

泰安邑

백제 때부터의 고읍(古邑)으로, 1973년 7월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읍의 중앙부에 백화산이 있고 동쪽은 서산시 부석면·팔봉면, 서쪽은 원북면·근흥면, 남쪽은 남면에 접하고 있다. 구릉지대와 낮은 산지가 뻗어 평야는 적으나 토양이 비옥하여 농업에 적당하다.군청 소재지이자 농산물·축산물·수산물의 집산지이고, 특히 마늘과 양파·생강 등의 생산으로 유명하다. 북쪽 가로림 만과 남쪽 적돌강으로 좁아든 지협부 근처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이며,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조운을 위하여 가적 운하의 굴착 공사를 했던 일이 있다.서산 남문리 오층석탑, 태안마애삼존불, 백화산성, 태안향교, 동문리 석탑, 태안읍성지, 정산리 등의 유적과 보물이 있다.

안면읍[편집]

安眠邑

1980년에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군의 남부 안면도에 위치한다. 백사수도를 사이에 두고 육지와 마주보고 있으며, 반도부의 남면 신온리와 이 읍의 창기리 간에 안면 대교가 놓여져 육지화되었다. 지하자원으로는 대리석과 규사가 풍부하다. 서쪽 해안 일대와 도서부는 해안국립공원에 포함된 경승지로, 이 곳은 수십㎞에 걸친 바닷가 모래땅에 방포·삼봉 등의 해수욕장이 있고 모감주나무 군락·조개더미·지석묘 등의 유적이 있다.

태안 마애삼불[편집]

泰安磨崖三佛

보물 제432호. 백화산 중턱에 자리한 태을암의 동쪽 약 50m 지점에 있는 자연 거석의 암벽에 조각된 3불상. 보살입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만들어진 솜씨로 미루어보아 6세기 초엽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앙의 보살 입상이 1.2m, 좌우의 여래입상이 각각 2m이다.

몽산리 석가여래좌상[편집]

夢山里釋迦如來坐像

태안군 남면 몽산리 산 182번지에 있는 불상. 높이 103cm, 어깨폭 53cm, 좌폭 83cm인 화강석으로 되어 있는데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생김새로 보아 대략 7세기 이후인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불상은 결과부좌에 항마인 자세를 취하고 있고 광매는 보주형에다 화염문, 그리고 상부의 좌우에는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태안의 인물[편집]

-人物

이종일[편집]

(1858~1925)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듬해 '제국신문'을 한글로 간행하였으며, 그 뒤 '황성신문', '대한민보' 등 언론에 종사하면서 민중을 깨우치고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그 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보성사라는 인쇄소를 운영하였는데 기미독립선언 때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국내외에 배포하였으며, 태화관에서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을 거행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받았다.

당진군[편집]

당진의 상징물[편집]

唐津-象徵物

당진군을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 나무는 소나무, 새는 학이다.

=당진의 자연[편집]

-自然

충남의 최북단에 위치하는데 서산·예산 양 군계를 달리는 가야산맥이 당진읍 부근까지 뻗쳐서 군내의 고지대를 이루고 최고봉인 아미산에서 그 서쪽은 잔구상의 낮은 구릉들이 발달한 노년기 지형으로 준평원화되어 있다. 그리하여 북부와 동부는 저평하고 특히 삽교천에 접하는 합덕면과 우강면에는 도 제2의 우강평야를 이루고 있다. 당진읍 북쪽 해안에는 고래로 학의 도래지로 전설이 있는 채운평야가 있다.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지만 간석지가 넓고 조차가 커서 양항이 없다. 면적 664.1㎢, 인구 12만 8,701명(2002.12)이다.

기후[편집]

해안지방이어서 대체로 온난하나 겨울에 북서계절풍이 심하여 기온이 몹시 낮아진다. 연평균 기온 11.4

, 1월 평균 기온 -3.8

, 8월 평균 기온 25.6

, 최고 기온 38.5

(1934. 8), 최저 기온 -22.6

(1943. 1), 연평균 강수량 1,200㎜이다.

당진의 연혁[편집]

-沿革

면천(沔川)·당진을 합한 지방이다. 당진은 백제의 벌수지현(伐首只縣) 또는 부지군(夫只郡)으로, 신라 때에 당진으로 고치고 혜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 운주(運州)에 속했고, 예종 1년(1106)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하였다가 고종 32년(1895) 군으로 되었다.1914년 면천을 합하고, 1957년 서산군의 정미면을 합쳤다. 면천은 백제의 혜군을 신라 경덕왕 때 혜성으로 고쳤는데 고려 현종 9년(1018) 운주(運州-洪城)의 속현(屬縣), 뒤에 감무를 두었고, 충렬왕 19년(1293) 승격하여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선 태조 13년(1413) 면천으로 고쳐 군으로 되어 1914년 당진군에 편입되었다.현재 2읍(당진·합덕), 10면(고대·석문·대호지·정미·면천·순성·우강·신평·송악·송산)을 관할한다.

당진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이 주산업인데 특히 군 동부는 관개시설이 잘 된(수리안전답 90%) 예당평야에서 주곡 생산이 많고 중서부 구릉지대에서는 생강·밤·감 등도 산출된다. 특히 송악·신평을 중심으로 5개 면에 잠업 주산단지를 조성하는 한편, 잠업센터를 설치하여 교육을 하는 등 이 방면에 주력하여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아산만·삽교천 방조제 구축으로 대규모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한국 최초의 대단위 상업농이 이루어지고 있고 서해안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공업도시·항만시설이 조성되고 있다.

농수산업[편집]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두류·마늘·양파·사과 등이다. 신평면에서는 인삼재배가 성하고, 정미면과 송악면에서는 양잠이 성하다. 임야지에서는 밤·호두·은행·대추·도토리·버섯 등의 임산물이 생산되고 있다.수산업에 있어서는 겸업 농가도 많은데, 남양만과 아산만 등에서 많은 해산물이 수확된다. 주요 수산물은 갈치·멸치·뱅어 등의 어류와 패류·해조류 및 천일제염 등이다.

특산물[편집]

감자·고구마(무농약)·꽈리고추(무농약)·달래·무화과·방울토마토(PC온실)·배·사과·신평쌀·양상추·월곡청정콩나물·토마토·한성사과·꽈리고추·연천꽈리풋고추·쌀·합덕청결미·고구마·국화·무·방울토마토·배추·송악쌀·쌀(무논줄 뿌림재배)·오이·장미·포도·합덕쪽파 등이 유명하다.

당진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없으나 국도가 군 중앙을 활 모양으로 통하고 기타 도로망도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서해안고속국도는 평택군 포승면에서 아산만을 거쳐 송악면·순성면·면천면·당진읍 등지를 지나서 서산시 운산면으로 연결되고 있다. 한진·통정 등은 소선박의 기항이 가능하며, 특히 연안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배로 전국 각지에 반출한다.

당진읍[편집]

唐津邑

군청 소재지이며, 역천의 지류 우안에 위치한다. 당진평야의 농산물을 집산하며 무명·명주 등도 거래된다. 부근에는 보물 제409호인 영랑사와 안국사지에 있는 보물 제100호인 석불입상, 보물 제101호인 석탑 등 고적이 있다. 이 밖에 난지도 해수욕장이 있는데 간만의 차가 극히 작고 물이 맑다. 반달 모양의 해안선에는 해당화가 있어 아름답다.

삽교천[편집]

揷橋川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오서산(烏棲山, 791m)에서 발원하여 북류해서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강. 길이 61㎞, 유역면적 1,619㎢. 넓은 평야와 간석지를 포용하고 있으면서도 농업용수를 확보하지 못하여 한수해(旱水害)를 자주 겪어온 이 지역의 유일한 수원인 삽교천이 방조제로 인하여 거대한 인공호수로 조성되었다.삽교천유역에는 덕산도립공원·덕산온천·도고온천·예당저수지와 삽교천방조제 등의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중요한 국민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서해대교[편집]

西海大橋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이자 세계에서 9번째로 긴 다리이다. 길이 7.31km, 폭 31.4m(왕복 6차선), 교각수 105개 규모로 1993년 착공, 만 7년째인 2000년 11월 개통했다.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와 충남 당진군 송악면 복운리간 아산만 바닷길 20리를 이어주는 왕복 6차선의 서해대교는 공사비 6,700억원, 연인원 220만 명이 투입돼 장비 45만 대, 철근 12만t, 시멘트 32만t 등이 소요되었다.서해대교의 특징은 990m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사장교 구간. 182m 높이의 초대형 주탑 2개가 상판을 떠받치고 있다. 이 구간은 상판 높이가 62m, 교각간 너비는 470m에 이르러 5만t급 대형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다.서해대교 개통으로 평택∼당진구간이 직통으로 연결돼 그 동안 상습 정체현상을 빚은 아산 및 삽교 방조제 구간의 교통체증이 대폭 개선되었다. 서울에서 당진까지도 자동차로 30분 이상 단축된 1시간 10분으로 줄어 연간 1000억원 이상의 물류비 절감효과를 볼 수 있다. 또 경부고속도로 수원∼천안구간 교통량을 상당부분 흡수해 경부축의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도 한다.2001년 1월 전 구간이 완공된 후 그 동안 경부·중부·호남고속도로에 집중된 교통량이 분산되고, 서울∼부산 중심으로 진행된 교통축이 서울∼목포 축으로 다원화돼 국토 균형발전이 촉진되었다.서해대교 중간에 있는 행담도(충남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에는 현재 국제적인 해양관광단지가 조성중이다. 행담도 개발은 휴게소 등에 이어 오는 2004년까지 행담도와 일대 매립지를 포함한 17만여 평 부지에 가족호텔, 해양생태공원, 범선카페, 모험놀이시설 등 각종 오락·휴양시설을 건립할 예정이다.

신암사 금동좌불상[편집]

申庵寺金銅坐佛像

보물 제987호. 송악면 가교리. 높이 88cm, 머리 높이 23cm, 무릎 폭 60cm. 머리는 나발이고 육계가 뚜렷하지 않으나 장업구가 있다. 얼굴은 둥글고 살이 쪄 있고 눈은 반만 뜨고 앞을 내려다보고, 입은 작으나 엷은 웃음을 띠고 있다. 귓불은 짧고 삼도가 하나밖에 없다. 어깨선은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적당한 살집의 몸을 이루는 우아한 모양이다. 앉은 모양은 길상좌를 하였으나 다리가 부자연스레 포개져 있고 발부분은 사실적으로 조성되었다. 수인은 왼손, 오른손의 엄지와 장지를 맞대어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는 형태의 14세기 고려 말엽의 금동불좌상이다.

당진의 인물[편집]

-人物

김기종[편집]

(1585~16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이며, 호는 청하. 효자였던 철명(哲命)의 아들로 한성에서 출생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당시 공을 세운 정충신·남이흥 장군과 함께 충청도에서는 삼충신(三忠臣)으로 칭하는 인물이다. 광해군 10년(1618)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고 다음 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전날 이이첨이 사당(私黨)을 심기 위한 거사에 참여하여 장원했다는 지적을 받고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요직에 오르지 못하였다.인조 2년(1624) 도원수 장만(張晩)이 이괄의 난을 평정할 때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는 과오를 용서하고 등용하여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거쳐 진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해군에 봉해지고 당상관에 올랐다. 과거에 급제한 지 12년 만에 호조판서에 승진하였고, 인조 13년(1635)에 세상을 떠났다.저서로는 '서정록(西征錄)'이 있으며, 시호는 충정이고, 묘소는 신시리 어시산(於是山)에 있는데 묘비문은 충청도 관찰사 이번뢰가 지었다.

김대건[편집]

(1821~1846)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 교명(敎名)은 앙드레(Andre). 천주교 성인으로 충청도 면천군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에서 출생하였다.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에게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최방제·최양업 등과 함께 마카오 소재 파리외방전교회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 등 신학문과 프랑스어·중국어·라틴어를 배웠다. 그 뒤 매스트로 신부에게서 신학·신척학을 연구했다.서울에 돌아와 각처를 순방하고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면서 활발한 전교(傳敎) 활동을 하였다. 1846년 5월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잠입 항로 개척을 위해 황해도 등산지방을 답사하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프랑스 선교부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긴 후, 그해 9월 26일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