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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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의 상징물[편집]

全羅北道-象徵物

전라북도를 상징하는 꽃은 백일홍,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전라북도의 자연[편집]

-自然

위치[편집]

전라북도 수리적 위치는 지리산군(群)의 반야봉 동남 산록인 35

10

N을 최남단으로, 익산시 용안면의 북쪽인 36

8

N을 북단으로 남북 위도 약 1

사이에 걸쳐 있다. 동단은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의 동쪽 127

54

4

E이고, 서단은 군산시 어청도의 서쪽 125

58

10

E이다.지리적 위치는 동쪽은 경상남도의 산청군·함양군·거창군, 경상북도의 김천시와 경계를 접하고, 서쪽은 황해에 면해 있으며, 남쪽은 전라남도의 영광군·장성군·담양군·곡성군·구례군과 접하였고, 북쪽은 충청남도의 금산군·논산시·부여군·서천군 및 충청북도의 영동군과 접해 있다. 행정구역은 6시 8군으로 나뉘어지며 면적은 약 8,050.77㎢ 로서 한국에서 제주도·충청북도 다음으로 작은 도이다.

지질[편집]

본도의 동부에 분포하는 결정편암이 최고(最古)의 지층으로 화강편마암 중에 띠 모양으로 개재하고 있으며, 선캄브리아기에 속한다. 평안계에 속하는 변성퇴적암은 익산시·논산시·고창군·순창군의 일부에 분포되었고, 중생대에 분출한 것으로 보이는 박상 화강암은 서부에 넓게 분포되었으며, 신라통에 속하는 퇴적암은 무주군·진안군·임실군의 일부에 분포되었다. 백악기 말에 분출한 화강암과 반암은 익산시·김제시·부안군·정읍시·고창군·남원시·순창군의 일부에 가장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지형[편집]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동쪽의 산지는 경상북도와 경계를 이루는 중국 방향의 소백산맥과 본도의 중앙부를 동북단에서 서남 방향으로 달리는 노령산맥과의 사이에 넓게 펼쳐져 있는 해발고도 약 300m 정도의 진안고원으로 되었다.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도 진안고원상에서 찾을 수 있다.서쪽의 저지는 노령산맥 서쪽의 익산시·김제시·완주군 일부, 정읍시에 이르는 해발 100m 이하의 파랑상 구릉이 많은 준평원 지대와 더욱 삭마(削磨)되어 형성된 전북평야 지대이다. 이 지역을 호남평야라 부르기도 하며 호남평야의 북부를 흐르는 만경강과 남부를 흐르는 동진강은 중요한 관개수로의 구실을 하고 있다. 해안선은 3개의 돌출부, 즉 군산반도와 진봉반도, 변산반도가 있고, 72개의 도서 중에 32개의 유인도와 46개의 무인도가 있으며, 대표적 도서는 위도·고군산 열도·어청도를 들 수 있다.

기후[편집]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위도상으로 북위 35

36

사이에 있으므로 전국적인 비교에서는 다른 지방보다 한서의 차가 적고 강수량도 비교적 많은 온화한 기후지대에 속해 있다. 그러나 본도를 세밀하게 기후적으로 구분하면, 지형(동고서저)의 영향으로 동부지방보다 서부지방이 기온의 연교차가 적고, 우량은 해안지방보다 내륙지방에 많다.기후의 특징은 남북의 차이보다 동서의 차이가 크다. 전주의 최한월 기온은 영하 3.3

이고, 최난월 기온은 27.5

이며, 연평균 기온은 12.6

이다. 강수량은 1,300㎜로서 해안지방보다는 많으나 산간지대보다는 적다.

만경강[편집]

萬頃江

완주군 원등산에서 발원하여 전주천 등 여러 지류를 합하면서 호남평야의 북부를 곡류하여 군산 남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길이 98㎞, 유역 면적 1,602㎢인데 옛날부터 관개와 주운에 많이 이용되었다. 과거에 신환포·목천포·사천리·대장촌은 주요 선착장이었는데 특히 출곡기에 많이 이용되었던 곳이다.

동진강[편집]

東進江

정읍시 풍방산에서 발원하여 호남평야 남부를 서북 방향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길이 45㎞, 유역면적 1,067㎢의 강이다. 주운에는 별로 이용되지 못하나 호남평야의관개에 큰 역할을 한다.

호남평야[편집]

湖南平野

호남지방은 대체로 전주와 광주를 연결하는 선을 기준으로 볼 때 서쪽은 저평하여 광대한 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은 노령산맥에 의하여 호남·나주의 두 대평야로 갈라진다. 그 중 호남평야는 노령산맥의 서쪽 금강·만경강·동진강 유역을 차지하며, 동서 약 50㎞, 남북 약 80㎞에 달하는 광대한 평야인데, 우리나라 유수의 쌀 생산지대이다.북부의 금강 하류에 속하는 부분은 극히 좁으며 대부분이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에 속한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화강편마암 등으로 되어 있으며 몹시 침식되고 평탄화되어 거의 기준면에 가까운 준평원을 이루고, 만경강·동진강 연안의 좁은 지역에 충적지가 약간 발달하고 있다. 또 서해안에는 약 6m의 조차가 있어 조석평야(潮汐平野)가 상당히 널리 발달되어 있다. 그런데 수전(水田) 개발에 따라 간척사업과 인공적 평탄화에 의하여 정지(整地)된 일망천리의 수전지대는 운적토로 얇게 덮이어 전체가 충적평야 같이 보인다. 군데군데 나타나 있는 구릉은 기반암의 잔구(殘丘)이며 이것은 과거에 준평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안의 변산반도(邊山半島)에서 고창에 걸친 일대의 화강편마암지는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고 또 동부 산지에 가까운 지방에도 구릉지가 많다. 만경강과 동진강과의 분수령은 극히 낮아서 분명치 않다.

지리산[편집]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에서 일어난 거대한 산괴이다. 서쪽으로는 전남 구례군 황전면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시에 접하며, 동북쪽으로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 동남쪽으로는 경남 하동군에 접하는 우리 나라 최대의 단일 산악지대이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과 엄천강, 횡천강을 이루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 개, 재가 15곳에 이른다. 또 지리산에서 솟는 샘과 이름을 갖고 있는 전망대, 바위의 숫자만도 각각 50여 개다. 또한 마야고와 반야도사, 호야와 연진 등의 설화에 이상향과 신선의 전설을 안고 있으며, 천왕봉 일출, 반야봉 낙조, 세석의 철쭉, 벽소령 달밤, 피아골 단풍, 노고단 운해, 연하봉 설경, 불일폭포, 칠선계곡, 섬진강의 맑은 물로 대표되는 지리산 10경은 장관이다.지리산 국립공원의 야생동물의 종류는 89종으로 이중 텃새가 37종, 여름새가 33종, 겨울새가 12종, 통과새가 7종이다. 지금까지 지리산에서 채집 또는 관찰된 포유류 종류는 24종이며 주변지역의 관찰자료와 청문에 의한 자료를 종합할 때 총39종이 서식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양서류는 5과 9종, 파충류는 3과 11종, 어류는 21종으로 일차담수어는 18종, 이차담수어는 3종, 곤충은 19목 202과 1,813종이 있다.

전라북도의 연혁[편집]

全羅北道-沿革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전주를 중심으로 본도를 통치하였다.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甄萱)이 백제의 옛 땅에 후백제를 세우고 완산(현 전주)에 정도하였다. 고려 태조는 후백제를 멸하고 본도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었고, 성종 14년에는 강남도(江南道)라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에 강남(江南)·해양(海陽)의 양도를 합하여 전라도라 칭하였다. 조선 영조 때 일시적으로 광남도라 하였다가 다시 전라도로 불리었다. 고종 33년(1896) 행정개편에 따라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분리되었다. 1910년 옥구군 일원이 군산부로 되고 1931년 전주·이리·정주가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5년 남원·김제가 읍으로 전주가 부로 승격되었다. 1949년 지방자치제의 실시에 따라 전주·군산·이리부가 시로 승격됐고, 1963년 전북 금산군과 익산군 황화면이 충남으로 이관되고 전남 영광군 위도면이 전북 부안군에 편입됐다. 1973년에는 완주군 봉도면이, 1979년에는 무주·진안·장수·순창·함열 등이 1980년에는 옥구면·미면(미성읍)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에는 정주읍과 남원읍이 시로, 1985년에는 조촌면이 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89년에는 김제가 시로 승격하였으며 전주의 2개 출장소가 구청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1월 1일 옥구군과 군산시가 군산시로, 정읍군과 정주시가 정읍시로, 남원군과 남원시가 남원시로, 김제군과 김제시가 김제시로, 5월 10일 익산군과 이리시가 익산시로 통합 발족됐다. 2004년 1월 현재 전라북도의 행정구역은 6시 8군 2구 14읍 145면이다.

전라북도의 인구[편집]

全羅北道-人口

전라북도 인구는 1925년에 136만 9,010명, 1935년에 251만 6,528명으로 최고를 기록하였으나, 이후부터는 계속 감소를 보이고 있다. 1975년에는 245만 6,455명, 2001년 12월 현재 201만 3,923명으로 감소되었다. 인구가 조밀한 지역은 익산시·군산시·정읍시·부안군·고창군으로 평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며, 희박한 지역은 김제시를 비롯, 소백산맥의 서쪽에 위치한 무주군·진안군·장수군이다.

전라북도의 산업[편집]

全羅北道-産業

농업[편집]

전북의 농업인구는 12만 2,919가구 33만 3,577명이고, 경지면적은 논 16만 2,926㏊, 밭 5만 2,253㏊이며, 가구당 경기면적은 1.75㏊다.

수산업[편집]

어획량이 많은 어류는 갈치·참조기·병어·삼치·장어·가자미·붕어·잉어 등이다. 패류는 백합 양식이 성하고, 해조류는 해안 지형 관계로 매우 적다. 그러나 서해안은 간만의 차가 크고 해안의 지형이 낮고 평탄하며 일조시수와 청천일수가 많기 때문에 고창군·부안군·군산시·김제시의 해안지방에서 천일제염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2002년 12월 현재 어업인구는 3,943가구에 1만 1,152명이며 어선수는 동력선 4,680척에 총 2만 57t이다.

임업[편집]

임야의 총면적은 45만 298㏊로 이 중에 사유림이 34만 3,973㏊, 국유림이 7만 7,446㏊, 공유림 2만 8,879㏊이다.

축산업[편집]

2002년 12월 현재 주요 가축 사육두수는 한육우가 1만 8,078호에 12만 9,413두, 젖소가 793호에 4만 2,959두, 돼지가 2,854호에 101만 7,336두, 산양이 4,243호에 4만 6,074두, 사슴이 3호에 9두, 닭이 1만 7,831호에 1,238만 1,943두이며 도축장 13개 소에서 한우 8만 9,700두, 돼지 119만 950두를 도축했으며 도계장 7개 소에서 1억 3,173만 4,300수의 닭을 도계했다.

광공업[편집]

현재 생산되는 금속으로는 약간의 철광·금·은·구리이며·비금속으로는 고령토가 익산시에서, 활석이 완주·무주·임실군에서, 규사가 부안군에서, 장석이 장수군에서 산출된다. 수력발전소는 출력용량 3만 4,800kW의 칠보발전소가 있고, 화력발전소로는 출력용량 7만 5,000kW의 군산화력이 있다.전주·군산·익산 3시에 공업이 집중되어 있으나 전국적인 비교에서는 매우 빈약한 편이다. 본도는 농업지대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유리한 입지조건을 구비하고 있으나 공업지대로서의 입지조건은 유리하지 못하다. 공업단지는 국가공단 3개에 입주업체 180개 종업원 9,591명, 지방공단 8개에 입주업체 366개 종업원 2만 6,380명, 농공단지 28개에 입주업체 380개 종업원 8,127명이 있다.또한 군산항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하여 외항이 건설되었고, 전주공업단지와 익산공업단지, 그리고 군산의 임해공업단지를 각각 연결하는 3각 공업벨트가 형성되어 있다.

섬진강댐[편집]

蟾津江dam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에 위치하는데 운암(雲岩)댐 하류 약 2㎞ 지점에서 섬진강에 높이 64m, 제언(堤堰) 길이 335m의 댐을 구축하여, 만수위 표고 196.5m, 저수지 만수 면적 26.5㎢, 저수량 4억 6,000만㎥의 물을 저수한다. 정읍시 산내면에 있는 취수구에서 취수하여 약 5.2㎞의 수압터널을 지나 동진강으로 유로를 바꿈으로써 칠보발전소에서 최대출력 2만 8,800kW의 발전을 하며, 그 방류수는 운암측 방류수와 합하여 동진강 하류 계화도의 간척지(약 40㎢)와 수리불안전답(약 60㎡)의 관개용수로 사용됨으로써, 일석삼조의 이익을 얻는다. 이 밖에 총 유하량의 80%를 저수할 수 있어 홍수의 피해를 완전히 없애 주고 있어서 한국의 TVA라고 할 수 있다.

전라북도의 교통[편집]

全羅北道-交通

3시를 중심으로 도로망이 발달되었고 평야부인 서부에 도로망이 조밀하다. 전북의 중앙부를 북에서 남으로 호남고속도로가 달리고 있어서 서울을 중심으로 1일 생활권에 속하게 되었다.자동차 총수는 2000년 1월 현재 44만 3,822대로서 이 중에 화물차가 12만 4,470대, 승용차 28만 901대, 특수차 1,164대다. 철도는 이리를 중심으로 호남선·전라선·군산선이 분기하고 있다. 도로 총연장 6,087㎞ 중 고속도로 155, 일반국도 1,204, 지방도 1,819, 시·군도 2,909㎞이고 포장률은 69.7%이다. 또 전주

군산간 고속화도로가 기공되었다. 총연장 25.9㎞에 2,372억원이 투입되는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로 도로폭이 23.4m이다. 이 도로 아래쪽에는 폭 6

8m의 곁도로가 건설돼 농어촌도로와 같은 구실을 하게 되며 소도로는 모두 굴다리로 처리되고 800m의 만경대교를 포함, 모두 33개 소에 3,070m의 교량이 가설된다. 해운은 군산에서 연안 도서를 연락하는 여객선이 입출항하고 있다. 또 중국 옌타이(煙台)간을 정기운항하는 자옥란호가 1996년 6월에 첫 출항했다. 자옥란호는 1만 6,000 t급 호화유람선으로 승선정원 392명에 컨테이너 293개를 적재할 수 있는 선박으로 군산

옌타이간을 주 1회씩 월 4회 왕복 운항한다. 항공로는 전주·군산에 국내항공선의 연락이 있다.

전라북도의 문화·관광[편집]

全羅北道-文化·觀光

지리산·내장산·덕유산·변산반도 국립공원과 모악산·선운산·마이산 도립공원이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이들 공원 안에는 변산 해수욕장, 격포의 채석강, 김제의 금산사, 고창의 선운사, 정읍의 내장사, 진안의 마이산과 탑사, 무주 구천동이 있다. 그밖에 남원의 광한루, 익산의 미륵사지도 잘 알려진 관광지이다.전주의 풍남제, 남원의 춘향제, 익산의 마한민속예술제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린다. 전주풍남제는 1968년에 중건된 풍남제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국악의 등용문인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와 민속풍물을 재현하는 ‘단오난장’이 열린다. 그 밖에 민속놀이로는 익산 기세배놀이, 위도 띠뱃놀이, 고창 읍성밟기, 김제 입석줄다리기 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주시[편집]

전주의 상징물[편집]

全州-象徵物

전주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전주의 자연[편집]

-自然

전주는 호남평야와 동부 산간지방과의 접촉선상 전주천에 연해 교통상의 요충지에 발달한 도시이다. 주위에 노령산맥의 지맥에 속하는 기린봉·승암산·발산·남전산·투구봉·완산주봉·곤지산 등의 낮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서북쪽이 호남평야에 열린 분지로서 옛날에는 외적을 방어하기 좋은 경승 요새지였다. 그리하여 이 지형을 이용하여 일찍이 축성을 한 위곽도시로서 발전하였다. 토양은 구릉지에서는 견운모편암이나 편마장화강암이 심층풍화된 적황색토로 덮여 있으며 전주천·삼천천 등의 주변 저지는 대부분 충적토이다.

기후[편집]

대체로 온난하나 바다에서 30㎞ 이상이나 떨어진 내륙에 위치하는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비교적 심하고, 여름 강수량은 대륙 저기압의 통로에 있고 또 계절풍에 의하여 비교적 많다. 연평균 기온 12.6

, 1월 평균 -1.3

, 8월 평균 27.5

, 최고기온 38.2

(1939. 8), 최저 기온 -17.8

(1933. 1), 연평균 강수량 1,296㎜이다.

전주의 연혁[편집]

-沿革

원래 백제 때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불(比自火)이라 칭하였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전주로 개칭하고, 그 후 효공왕 때 견훤(甄萱)이 이곳을 왕도로 정하고 후백제라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이를 토벌,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하고, 태조 23년(940) 다시 전주로 하였다. 성종 12년(993) 승화(承化)라 하여 절도안무사(節度按撫使)를 두었다. 그 후 전주목(全州牧)으로 개칭하고 한때 부곡(部曲)으로 격하되었다가 곧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키고 조선 태종 3년(1403) 전주로 환원하였다.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고, 고종 32년(1895) 군이 되면서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35년 부로 승격하고 1949년에는 시로 개칭되었다. 1987년에는 완주군 조촌읍(助村邑)이 전주시에 편입, 덕진출장소와 완산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9년에 완주군 용진면 일부가 편입되고 완산·덕진출장소가 구로 승격되었다. 2004년 1월 현재 2개 구, 40개 동으로 되어 있다.

전주의 산업[편집]

-産業

3차산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소비도시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한편 농업인구가 비교적 많은 것은, 정치·교통의 중심지이고 호남평야의 중심도시이기 때문이다.

농업[편집]

쌀 생산이 많으나 도시이기 때문에 원예·낙농업이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고급 채소의 생산이 비교적 많고 특히 과실 생산은 도내 제1로서 배·복숭아는 도내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돼지·닭·젖소 등은 기업적으로 전업화해 가고 있는 경향이 있다. 경지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37%이고 이 중 논이 약 70%, 밭이 약 30%이다. 주요 농축산물은 쌀·나맥·고구마·야채·배·복숭아·담배·소·돼지·닭 등이다.

공업[편집]

원래 정치·행정적 도시로 발달한 도시이나 근래 교통의 발달과 아울러 도내에 풍부한 쌀·면화·누에고치 등의 농산원료와 노동력·용수 등의 유리한 조건을 살려 각종 공업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국토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전주 경공업 단지가 지정·개발되면서부터 더욱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업종별로는 섬유·제지·화학·기계·식품 및 전통적인 공예품 등이 있고 한지(韓紙)·부채·우산·태지·왕골 등이 유명하다.

특산물[편집]

토속주로 이강주·이미주가 있고, 배·복숭아·미나리·호박·장미 등이 유명하다.

전주의 교통[편집]

-交通

1929년 이리(현, 익산)·전주·남원·여수를 잇는 전라선이 개통되었고, 호남선이 약간 떨어져 있어 불편하지만 도로망의 초점에 있어 편리하다. 특히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서울과는 2시간 거리 내에 있게 되었다. 비행장이 있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주요 도시와 연락된다.

전주의 시황[편집]

-市況

호남평야에서 동부 산간지방, 점이지대(漸移地帶)에 이르는 교통요지에 발달한 전주는 한일합병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북의 행정·경제·교통·문화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여 오늘날과 같은 대도시를 이루었다. 면적은 206.24㎢, 인구 62만 3,897명(2001.12)이다. 시가지는 계획적으로 건설했기 때문에 도로는 정연하다.도청을 중심으로 한 중앙동·경원동·고사동 일대와 팔달로·동서 관통로 교차지역에 중심업무지구가 형성되어 있다. 또 최근에는 그 주변에 아파트를 비롯한 다세대주택이 건설되어 주거지역이 확장되면서 중심업무지구에 인구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효자·송천·팔복·인후·우아·우전 지구로 시가지가 확장되고 있는데, 특히 효자지구에는 새로운 부심이 형성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계속 공단을 조성해, 오랜 전통의 문화도시에서 내륙 공업도시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인구의 대부분이 구시가 중심에 집중되어 있으며 도 심부에 29%, 주변부에 41%, 농촌부에 30%의 비율로 분포되어 있다. 역전 오거리에서 남문에 이르는 가로를 중심으로 부근 일대에 도심 상가가 발달되어 있다.시내에는 전라북도청을 비롯하여 시청·완주군청·지방법원·지방검찰청·지방국세청·지방전매청·교도소·방송국·신문사·국립전북대학교·전주대학교·전주교육대학교·금융기관·병원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58, 중학교 29, 고등학교 29, 대학 5개교가 있다.

전주의 문화·관광[편집]

-文化·觀光

시내 명승고적으로서는 시가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는 다가공원, 조선 태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경기전을 비롯하여 오목대, 전주 팔경에 속하는 한벽루·남고산성, 무성한 창포와 연꽃의 덕진못, 기타 풍남문, 시립박물관, 조경단 등이 있다.문화 행사로는 단오날에 열리는 풍남제, 전주대사습놀이, 전라북도예술제, 전라북도 농악경연대회, 전주고수대회, 전국시조경연대회 등이 있다. 또 한옥·서예·그림·소리 같은 유형·무형 문화재가 풍부한 전통 문화의 고장이다.조선시대의 유물·유적이 많고 전통 음식, 전통 공예품 전통 민속 예술 같은 관광자원이 많아 내장산·덕유산·변산반도 국립공원, 무주리조트를 잇는 연계 관광단지가 개발되고 있다.

풍남문[편집]

豊南門

보물 제308호. 전주시 완산구 전동 83-4 소재. 옛 전주읍성(읍성)의 남문(남문). 조선 영조 44년(1768)에 세웠다고 전하며, 성벽의 일부인 석축 기대(기대)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세운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이다.아래층은 전면, 측면이 각각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아래층 내부에 앞뒤로 4개씩 세운 고주가 위층까지 올라가 위층의 변주가 되었다. 우리나라 문루건축에서는 흔치 않은 기둥배치이다. 공포는 주심포 집처럼 기둥 위에만 있으나 그 짜임은 다포집 계통을 따랐다. 쇠서도 다포집 건축과 같은 형태이다.아래층 앞과 뒤의 중앙칸 기둥 위의 공포 밑에 용머리를 조각한 것은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특징인 장식조각의 한 예이다.

전주 객사[편집]

全州客舍

보물 제583호.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1가 1 소재. 조선 초 전주부성을 창건할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성종 3년(1473)에 전주부윤 조근이 전주사고를 창설할 때 남은 재력으로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다.전패를 모시고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던 곳이며 조정의 칙사가 오면 이곳에 유숙하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에 경영된 객사라 해서 고사에서 따 풍패지관이라고 편액했다.주사와 동서익사로 객관 본전이 구성되었던 것인데 지금은 동사는 헐리고 없다.

조경단[편집]

肇慶壇

지방기념물 제3호. 전주시 덕진동 1가 산 28 소재. 덕진에서 약 1km 들어간 건지산에 있으며, 광무 3년(1899) 5월에 이곳에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전주 이씨 시조의 묘소를 정하고 ‘대한조경단’이라 하였다.단은 장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둘레를 쌓아 만들고 단의 주변에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 담을 쌓았다. 서향의 문과 일직선상에 있는 남향의 문에서 20m 떨어진 곳에 비석이 있다. 비석은 대리석이며 너비 180cm, 두께 30cm, 높이 202cm이다. 앞면에는 고종의 어필로 된 대한조경단이라고 쓰여진 전제가 새겨져 있다. 비각은 한 변이 7.2m, 정방형의 3칸 팔작지붕이다.

전주의 인물[편집]

-人物

이병기[편집]

(1892~1968)

시조시인·국문학자. 호는 가람(嘉藍). 한성사범을 거쳐 조선어강습원을 수료했으며 주로 시조에 국한된 작품활동을 했다.전통적인 시조에 현대적인 서정을 담아 서정시조의 길을 개척했으며 시조부흥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현대시조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질 만큼 한말에 쇠퇴해 가는 우리 고유의 시조부흥운동에 앞장서 시조문학의 맥을 잇게 한 거목이다. 시조집에는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이 있다.

이삼만[편집]

(1770~1821)

서예가. 자는 윤원(允遠). 호는 창암(倉巖). 조선조 철종 때의 서예가로 초서(草書)에 능했다.필적으로는 「하동칠불암편액」이 있으며 전주판의 「칠서(七書)」는 모두 그의 글씨를 새겨 간행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도 그의 글을 보고 진정한 조선의 명필이라 극찬하였다고 한다.

신석정[편집]

(1907~1974)

시인. 본명은 석정(錫正). 전북 부안 출생이며 보통학교 졸업 후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석정은 주로 농촌에 살면서 자연에 귀의하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는데 이러한 면 때문에 목가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집으로는 '촛불', '슬픈목가', '빙하',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 '대바람소리' 등이 있다.

최명희[편집]

(1947~1998)

소설가. 서울 보성여고 교사로 재직하던 중 중앙일보 신춘문예 부문에 당선되었다. 잠재된 한국인의 정서를 일깨우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보여준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작품 '혼불'은 다년간에 걸친 대작으로 전라도의 한 문중을 지켜내는 며느리 3대와 잡초 같은 삶을 이어가는 천민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표현하고 있다. 1998년 여성동아 대상 및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작고 이후 ‘혼불을 사랑하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군산시[편집]

군산은전라북도서부에있다 군산은 소룡동.산북동.미룡동.조촌동.경암동.경장동.사정동.개복동.구암동.개정동.수송동.개정동.나운동.등있다

군산의 자연[편집]

-自然

금강(錦江) 하구와 만경강 하구로 둘러싸인 옥구반도와 황해의 도서들로 이루어져 있다. 군산 부근은 차령산맥의 침강으로 고군산제도와 기타 많은 도서군이 흩어져 매우 복잡한 해안을 이루었으나, 그 후 군산 부근의 도서들은 금강의 유수와 조수작용으로 토사가 퇴적되어 육계도(陸繫島)인 옥구반도가 형성되었다. 이곳은 금강·만경강 양하천의 충적토(沖積土)에 덮여 있어 약간 구릉의 기복은 있으나 대평야로 한국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시내의 낮은 도상(島狀) 구릉지는 그 당시의 섬이었던 부분이다. 그러나 시가 정리로 인하여 대부분이 평탄화되고 시의 서남단과 시·군계 부근에 다소의 기복을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이다. 지질은 대부분 결정편암계의 지질로 되어 있다.

기후[편집]

비교적 온난한 편이나 겨울에 북서계절풍을 직접 받기 때문에 기온이 몹시 내려간다. 연평균 기온 12.3

, 1월 평균 -1.5

, 8월 평균 25.7

, 최고기온 32.6

(1968), 최저 기온 -19.1

, 연평균 강수량 1,100㎜이다.

군산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시대의 마서량현(馬西良縣)이며, 신라 때에는 옥구(沃溝)라 개칭, 임피군에 예속시켰다. 조선 태조 6년(1397) 진을 두고 세종 5년(1423) 첨절제사, 후에 현감으로 하고 다시 군으로 고쳤다. 광무 3년(1899) 군산 개항 후 한때 감리서(監理署)를 두었다가 1906년에 옥구부(沃溝府)라 하였다. 융희 3년(1909) 부청을 군산항에 정함과 동시에 군산부로 개칭하였고 1914년 군산부와 옥구군으로 분리되었으며, 1949년 군산부가 시로 승격하였다. 1983년 2월 15일 옥구군 미성읍 북산리, 내초리의 일부가 편입되었으며, 1989년 옥구군 미성읍 일원과 옥도면 일부가 군산시로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옥구군과 통합, 통합시로 승격했으며, 1읍, 10면, 19개 동을 관할한다(2004.1).

군산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편집]

호남평야의 중심을 이루는 곳으로 전형적인 쌀농사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나맥 등이다. 서해의 호어장에 임하여 어업이 성하며, 특히 성어기에는 멀리 목포 등 남해안 지방에서 조기떼를 따라 올라온 고깃배들이 어청도 근방에서 고기를 잡아 대부분 군산으로 집결하여 어시장은 성황을 이룬다. 고군산군도·동중국해 등 연근해에서 조기·새우·삼치·홍어·갈치 등이 잡히고, 해안 간척지와 도서지방에서는 조개류·미역·김 등의 양식업도 성하며, 옥구읍·회현면·옥서면 등 서해를 낀 곳의 해안지대에서는 대규모 염전이 개발되었다.

공업[편집]

군산항은 편리한 해상 교통, 넓은 배후 지역, 간석지 매립에 의한 염가의 넓은 공업부지, 풍부한 공업용수 등 공업 입지 조건이 좋은 위에 군산 화력발전소가 건설되어 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 전라북도 제1의 상공업 도시가 되었다.주요 공업은 식품(제분·청주)·제지·제재·합판·PVC·고무·섬유·금속·기계 등의 공업이다. 군산외항 건설과 군산임해공업단지 조성으로 합판·제지·제재·양조·수산물가공·병유리 제조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1994년 군산 국가공단 209만 평이 조성되었고 2021년까지 총 4,060만 평의 국가공단이 조설될 예정이며, 2004년까지 총 1억 2,000만 평의 새만금간척사업이 완공될 예정이어서 앞으로 발전이 기대되고 있다.

특산물[편집]

가물치세트·마른꽃새우·냉동대하·멸채액젓·물외장아찌·흰찹쌀·보리쌀 등이 유명하다.

군산의 교통[편집]

-交通

군산은 대외 수출항으로써 발달하였기 때문에 배후지와의 육로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으며 특히 호남고속도로가 전주와 익산 사이를 달리고 전주∼군산간 도로 확장으로 더욱 편리해졌다. 철도는 군산선이 익산에서 전라선과 호남선에 각각 연락되고 금강을 건너 장항에서는 장항선으로 천안·서울과 연결된다. 군산항은 또한 국내 각 항구와 연락됨은 물론 외국과도 연결되며, 금강을 통하여 강경·부여·공주·부강(芙江) 등과는 수로가 열려 주운이 편리하다. 또 군산공항에서는 서울·제주 노선이 운행된다.

군산의 항세[편집]

-港勢

서해안에서 인천과 목포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남·논산 양대 평야의 넓은 지역을 배후지로 하고 있어 그 가치가 자못 크다. 면적 377.87㎢, 인구 27만 7,680명(2001.12)이다. 군산항은 토사의 퇴적이 심하여 1926년부터 호안축조(護岸築造)와 도수제(導水堤) 축조공사를 행하였다. 그래도 토사의 퇴적으로 대형선박의 출입이 불편하여 서남방 8㎞ 지점에 1

2만t급의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외항계획을 수립하여 공사하였다.군산항은 조선시대 이래 군사상의 요충지로 되어 진영과 공미를 수납하는 군산창을 두었다. 초기 군산은 선유도가 그 중심지었다고 하는데 현 군산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중엽 호남청을 설치함과 동시에 조창을 둔 때부터이다.1899년 개항 후 일본인이 진출함에 호남평야의 쌀이 모이게 되어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군산부로 되고, 시로 개칭하였다. 군산은 조선시대에 조창이 있어 쌀의 반출항으로 되었고, 일제하에는 대일 반출미의 수출 전용항 구실을 했다. 따라서 1929년 군산항의 수출 총액의 99%는 쌀이었으며 당시 군산을 ‘쌀의 군산’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쌀의 반출뿐만 아니라 도정업, 매매 등 상업으로 번영하였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그 기능은 정지되고 겨우 원목이나 기타 약간의 공업원료의 수입항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그러나 공업 입지적 조건이 좋고 군산화력발전소가 건설되어 공업이 약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1979년 외항의 완공으로 ‘공업의 군산'으로 발전하고 있다. 현재 군산항은 도내 총수출액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수출항이며 한·중 교역증대로 인한 서해안시대의 개막으로 광역산업기지 조성, 군산신항 건설, 서해안고속도로 건설 등 앞으로 전개될 대륙진출의 전초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주요 수출품목은 목재류·고무제품류·수산물품류이고, 수입품은 목재·무연탄·쌀 등이다. 또 군산항은 연안에 죽도를 비롯하여 칠산탄(七山灘)·어청도·연도·개야도·고군산제도·위도 등의 어장을 끼고 있어 어항으로서도 중요하다.

불지사 대웅전[편집]

-寺大雄殿

유형문화재 제117호. 나포면 장상리 836 소재. 백제 의자왕 때 창건된 절이라고 하나 뚜렷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웅전은 약 150cm의 높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건물이다.

상주사 대웅전[편집]

-寺大雄殿

유형문화재 제37호. 서수면 축동리 544 소재. 상주사는 축성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무왕 7년(606)에 혜공대사가 창건하였고, 공민왕 11년(1362)에 나옹대사, 인조 19년(1641)에 취계대사, 그리고 영조 38년(1762)에 학봉선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나한전·범종각 등이 있으며, 그중 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죽산리 탑동 삼층석탑[편집]

竹山里塔洞三層石塔

유형문화재 제66호. 대야면 죽산리 66-1 소재. 죽산리 탑동마을 청룡사지(靑龍寺地) 내 밭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석탑은 단 기단 위에 3층 탑신이 세워져 있는데 상륜부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소실된 부분은 1975년에 중수되었으며, 그때 원형이 변형된 부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유도패총[편집]

仙遊島貝塚

옥도면 선유도리 진말. 선유도의 통계마을과 진말 사이에 있는 산구릉에 형성되어 있는 패총이다. 패각과 토양이 뒤섞인 혼토패총으로 퇴적층의 두께가 1.5m~2m에 달하는 곳도 있다. 패총 내에서는 빗살무늬 토기편과 석기, 그리고 김해식 토기편이 채집되었다.

발산리 석등[편집]

-里石燈

보물 제234호. 개정면 발산리(발산 초등 내). 이 석등은 원래 완주군 고산면 삼거리 봉림사지에서 일제시대 이곳 도곡농장 정원으로 옮겼던 것으로 현재 발산초등학교 후정에 있다.석등의 복연대석 아랫부분은 방형으로 위에는 원형으로 복연팔변이 조각되어 있는데 연화잎은 세장한 편이다. 간주는 원통으로 전면에 용이 감싸고 있는 것을 조각한 특이한 예이다. 양연대좌인 상대석은 8각으로 8변의 양연이 조각되어 있는데 화심과 화문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화강암은 불등변 8각으로 넓은 면에는 장방형에서 네모를 죽인 듯한 화창(석등의 화사석에 나 있는 창)을 만들고 화창 주위에는 주선을 따라 선대를 각출하였으며 좁은 비면에는 창을 들고 서있는 신장상을 양각하였다. 옥개석(탑신석 위에 놓은 지붕같이 생긴 돌)은 팔각으로 옥개받침 1단이 각출되었고 추녀에 낙수홈이 음각되었다. 귀퉁이는 반윤으로 인하여 간결한 느낌을 준다.

남원시[편집]

남원의 상징물[편집]

南原-象徵物

남원시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배롱나무, 새는 제비이다.

남원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북도 남동부에 위치하며 기반암은 남동부의 지리산지구가 호상편마암이고 남서부는 편암·편마상화강암, 중앙은 대보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토양은 북서부가 화강암이 심층 풍화된 적황색토이다. 동쪽으로 소백산맥이 남북으로 뻗고 남동부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산괴(山塊)를 이루어 동반부는 높고 중앙부는 동서 6㎞, 남북 15㎞나 되는 고원지대로 되어 있다. 서반부는 섬진강이 서남쪽으로 관류하여 연안은 토지가 저평하며, 남원분지·금지분지·덕과분지와 같은 비교적 넓은 평지가 열려 있다.

기후[편집]

대체로 온화한 내륙부에 위치한 관계로 한서의 차가 약간 심하다. 연평균 기온 12.2

, 1월 평균 -1.7

, 8월 평균 26.6

, 최고 기온 39.5

(1938. 8), 최저 기온 -20.5

(1917.1), 연평균 강수량 1,340㎜이다.

남원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 건국 때에는 이 곳을 고룡군이라고 명명하였다. 685년에는 전라도 일대를 다스리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곳이 남원소경(南原小京)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남원부라고 칭하였다. 1931년에 남원읍으로 승격하여 1읍 16면이 되었으며, 1981년에 남원읍이 남원시로 승격하여 남원군과 분리되었다. 1995년 남원시와 남원군이 합쳐 도농 통합시가 되었다. 1998년 동면을 인월면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1읍 7동, 15면을 관할한다(2000.1).

남원의 산업[편집]

-産業

임야가 전체면적의 64%를 차지하고 있어 경지는 24%에 불과하지만 주산업은 농업이다. 경지 중 논의 비율이 74%로 논농사 중심의 주곡농업이 행해지고 있다. 주곡 농업 외에 양잠업 등이 성하며, 제조업으로는 생사가공·연초제조업·도정업 등이 성하다. 가내공업으로 목기·부채·창호지가 많이 생산되어 유명하다.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널리 알려져 있어 관광객이 많다.

농업[편집]

전체 면적 중 경지 면적은 약 24%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면화·담배·건시(乾枾) 등이다. 부업으로 양계·양돈·양잠이 성하다. 특히 비육우단지·잠업단지를 조성한 후부터 큰 소득을 올리고 있다. 또 가내공업으로는 목기·부채·삼베·목탄·창호지 등의 제조가 성하다. 특산물로는 미나리와 단선(團扇)이 있다.

남원의 교통[편집]

-交通

호남내륙 교통의 중심지로서 전라선 철도가 통과하며, 전주·광주·대구·장수·순천·구례와의 6개 노선의 도로가 집중하여 대규모 버스 터미널이 있으며, 88올림픽 고속도로 역시 남원을 통과하고 있으며, 호남고속도로가 광주로 우회하여 남해고속도로로 연결되고 있다. 특히 화물자동차의 통과량이 많고, 남원

순창

광주, 남원

장수

무주, 남원

곡성

순천, 남원

구례

하동 사이에도 도로가 있어 6개 노선이 집중한다.

남원의 관광[편집]

-觀光

삼국시대 이래 남부내륙지방의 행정·교통·경제·군사상의 중심지여서 고적이 많다.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는 조선 초기에 황희(黃喜)가 세우고 광통루라고 하다가, 1434년 중건되면서 정인지(鄭麟趾)에 의해서 광한루라 개칭되었다.누각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지금의 것은 1635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경내에 춘향전의 무대가 된 춘향각이 있고 오작교가 연못 안에 있다. 교룡산 남쪽 기슭에 있는 만복사는 고려시대에 세운 절로, 큰 사찰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불타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곳에는 오층석탑·석좌대·당간지주·석불입상 등의 보물이 있다.교룡산에는 교룡산성이 있는데, 백제 때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 이듬해에 크게 수축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함락되어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현재는 성터만 남아 있다. 만인의총은 정유재란 때 끝까지 남원성을 지키다가 죽은 조상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무덤으로 성역화되어 있다.남원시는 이와 같은 많은 유형·무형의 문화재 및 고적이 풍부하고, 또 지리산 국립공원의 서쪽 입구가 되기 때문에 관광객이 많다. 매년 5월 5일 전후 5일간 춘향제가 열리며, 바래봉과 봉화산에서는 매년 봄 철쭉제가 열린다.

남원의 시황[편집]

-市況

지리산 서북쪽의 분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752.82㎢이고 인구는 10만 4,198명(2001.12)이다. 구 남원 시가지에 여러 행정관서가 집중되어 있으며 고등학교 9개 교, 중학교 14개 교, 초등학교 37개 교가 있다.해마다 4월에는 광한루와 관광단지 등 시내 전지역에서 춘향제가 열리고, 만복사지 탑돌이, 토성밟기, 지리산 고로쇠약수제 등이 펼쳐진다. 유적지로는 교룡산에 있는 교룡산성을 비롯해 광한루·춘향각·만인의총·실상사가 있다. 산 속이 아닌 평지에 세워진 실상사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서 있는 철제여래좌불 등 문화재가 많다.

실상사[편집]

實相寺

사적 제309호. 산내면 입석리 50소재.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 증각대사가 개창한 사찰이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숙종 때에 재건하고, 고종 때에 화재로 인해 다시 건립한 것들이다. 경내에는 보광전을 비롯하여 그 앞 양쪽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2기가 있으며, 약사전·명부전·요사 등이 있다. 특히 이 절에는 국가지정 및 도지정 문화재가 지정·보존되고 있어 실상사의 사격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국가지정의 경우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6호), 증각대사응요탑(보물 제38호), 석등(보물 제35호), 부도(보물 제36호), 동탑비(보물 제39호),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석장승(중요민속자료 제15호) 등이 있으며, 백장암에는 석탑(국보 제10호), 석등(보물 제40호), 약수암에는 목조탱화(보물 제421호) 등이 있다. 도지정 문화재로는 극락전(유형문화재 제45호), 위토개량성책(유형문화재 제88호), 동종(유형문화재 제137호) 등이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편집]

百丈庵三層石塔

국보 제10호. 산내면 대정리 975. 이 석탑은 기단구조와 각부 장식조각이 서로 다른 양식을 보여주는 이형석탑으로서, 방형대석을 놓아서 기단을 삼고 그 위에 방형별석의 탑신 받침을 얹어 사각형 3층의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1층 탑신은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높으며, 2층과 3층의 옥신은 일반형 석탑에 비하여 감축률이 적고 화려한 조각을 장식한 점이 특징이다.제1탑신에는 각면에 보살상과 신장입상을 2구씩 병립시켰고, 2층 3층은 아랫부분에 난간을 모각하고, 2층 각면에는 주악천인상을, 3층에는 각면에 1구씩 천인상을 부조하였다. 각 옥개석 추녀에도 연목과 두공을 모각하여 목조건축의 분위기를 재현하고 있다. 상륜부는 일부 없어진 부분도 있으나, 노반·복발·보개·수연이 완전한 찰주에 포개어져 있는 희귀한 예이다.

백장암 석등[편집]

百丈庵石燈

보물 제40호. 산내면 대정리 975.

높이 2.5m. 통일신라시대. 백장암 삼층석탑과 함께 보존되고 있다.하대석은 방형지대석 위에 큼직한 단엽 8판의 복연을 조각하였고, 그 꽃잎 중심에는 4엽문을 새겨 장식하였으며, 정면에는 1단의 높은 8각 받침을 각출하여 간주를 받치고 있다. 이 받침 둘레에는 입화형 연화문을 장식하여 화사한 하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복연하대의 아래는 8각형으로 다듬고, 각면에는 특이한 안상을 새겼다. 상대석은 하반을 둥글게 다듬어, 단엽8판의 앙련문을 새겼는데, 상대석 윗부분은 8각으로 다듬고, 각면을 3구로 나누고, 난간형을 표현하였다. 옥개석은 8각형으로 밑부분이 넓고 높이가 얕은 편이고, 추녀도 직선적이며, 전각에만 반전이 있으므로 낙수면과 잘 어울린다.각부가 8각으로 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기본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상·하대석의 연판복판을 조식한 화문수법이나 상대석 앙련조각 상부의 난간표출 등의 의장은 바로 옆에 있는 석탑의 각부 장식의장과 동일하여 조성연대는 석탑과 같은 시기인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용담사지 석불입상[편집]

-寺址石佛立像

보물 제42호. 주천면 용담리 292. 고려시대. 높이 6m에 이르는 거상으로 마모가 심하다.대좌는 타원형의 자연석으로, 그 위에 입상을 발밑에 촉을 끼워 세운 것이다. 두부의 육계는 높으며, 얼굴이나 귀도 긴 편이나 안면마멸이 심하여 상호는 분명치 않다. 목에는 형식적인 삼도가 새겨져 있어 시대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측면은 편평하나 귀의 처리는 뚜렷하다. 전면은 의문이 마멸되어 측면에서만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의습문은 굵고 듬성듬성한 음각문이다. 광배는 불상과 일상으로 된 거신광으로서 상부 결실이 심하고, 외연을 따라 화염문이 있는 것 같지만 마멸되었다. 일부분만 남은 두부 후면의 원형 후광도 굵은 수법이나 세부 문양이 분명치 않다.이 불상은 하나의 돌에 불신과 광배를 조각한 거구장신이며 광배, 대좌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길 초상[편집]

李尙吉肖像

보물 제792호. 덕과면 사곡리 30(국립 전주박물관보관). 이상길은 벽진이씨로 조선 명종 11년에 출생하여 18세인 선조 16년(1585)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사헌부 정언을 거쳐 선조 32년(1599) 광주 목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때 선정의 실적이 높게 평가되어 통정대부로 특진되었다. 그는 벼슬을 하는 동안 많은 공을 세워 평난공신을 비롯 호종 정사 진무, 원종 등 여러 공신에 책봉되었다.인조 23년(1636)에는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의정을 증직하고 강화도 충렬사에 위패를 봉안하게 하였다. 효종은 충숙공의 시호를 내렸으며, 헌종 7년(1666)에는 부조묘를 하사하여 묘당 안에 영정을 봉안하게 하였다.묘당은 처음에 공이 거주하던 서울 가회동에 세웠는데 종손이 남원으로 이주함에 따라 순조 24년(1824) 5월 2일 부조묘를 덕과면 사곡리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편집]

-庵址磨崖佛像群

보물 제1123호. 신내면 덕동리 산 215. 수성암에 조각된 9구의 마애불상으로 2구는 크고 나머지는 작다.주불은 2구로서 북측에 있는 불상은 통견이며, 옷자락이 발등까지 덮고 있고 손은 법의에 덮여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정장군사라고 하기도 한다. 남쪽 배불은 북쪽 불사과 마찬가지로 코가 크며 타원형의 얼굴이다. 명문이 있어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두 주불 아래쪽과 앞면에는 7개의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모두 좌불로 선으로 그린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광한루원[편집]

廣寒樓園

사적 제303호. 전거동 78. 우리나라 누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은하수에서 오작교를 건너 견우와 직녀가 칠월칠석날에 사랑을 해후하는 상징을 나타낸 사랑의 조원이기도 하다.누원 조성은 조선 태종 14년(1414) 황희가 세운 민가의 광통루만 있었던 것인데, 세종 26년(1444, 정인지가 월궁을 상징하는 광통루를 광한루라고 이름을 고쳤다. 선조 15년(1582) 전라도 관찰사 정철은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파고 홍예 4틀로 된 길이 58m, 폭 2.6m의 오작교를 설치하고 못 속에는 삼신도를 조성하였다. 봉래도에는 목백일홍, 방장도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도에는 영주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인조 4년(1626)에 재건하였다. 그 후 고종 6년(1869)에는 누 동쪽에 온돌방의 부속건물을 증축하였다.누에는 네짝 문을 달아서 올리면 모두 개방되고 내리면 방이 되게 되어 있다. 팔작지붕에 이익공의 간결한 구조인데, 뒷면 중앙 한칸에는 누에 오르는 층계를 달아 내었다.

만복사지[편집]

萬福寺址

사적 제349호. 왕정동 489. 사찰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용성지'에는 도선의 창건설을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문종 때로 보고 있다.발굴 결과 신라 말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중에 동유오충전, 서유오충전 전내유동불장삼십오척이라는 것이 사지의 발굴조사 결과에서도 입증되었기 때문에 고려 문종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만복사지에 대해서는 1979~1985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짐으로써 사찰의 배치양식과 건물지의 내용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가람의 배치는 1탑 3금당식으로 목탑을 중심으로 북, 동, 서에 각각 금당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강당과 중문이 있다.경내에는 현재 오층석탑(보물 제30호), 석좌(보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불입상(보물 제43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보존되고 있으며, 발굴조사 이후 건물지들이 정비되어 있어 사찰의 전체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만인의총[편집]

萬人義塚

사적 제272호. 향교동 628. 만민의총은 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순절한 민·관·군의 합장유적이다.동년 8월에 왜군 10만이 남원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는데, 이때 명의 양군이 거느린 3,000군사는 용성관을 중심으로 주둔하면서 수성을 준비하고, 관군은 접반사 정기원을 비롯하여 병사 이복남·방엇·오응정·조방장·김경노·부사 임현, 판관 이덕회, 구례현감 이원춘, 산성별감 신호 등이 군민과 함께 이를 막아 싸우게 되었다. 성안의 주민들은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왜군과 싸웠는데, 남문이 무너지면서 성안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게 되자 명나라 장수 양원은 재빨리 변장하고 심복부하 50여 명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이 싸움으로 관군 4천과 성민 6천이 장렬히 전사하여 후일 한 곳에 묻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만인의총 유래가 되고 있다.광해군 4년(1612) 이들의 영혼을 안치하는 사당이 지어졌고, 효종 4년(1653)에는 충렬사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숙종 원년(1675)에 이르러 용성과 동면에 사당이 북문 밖의 정결한 곳으로 옮겨 지어졌다. 1964년에는 민가에 둘러 쌓이게 되자 현 위치에 의총과 사당을 옮겼으며 1975년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원의 인물[편집]

-人物

양성지[편집]

(1415~1482)

자는 순부, 호는 눌재 또는 송파. 본관은 남원. 세종 23년(1441)에 생진문과에 합격한 뒤 경창 부승 성균전적 등을 역임했다. 훈구파의 중진으로써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 교리 등을 거치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뒤 춘추관 기주관 고려사수사관을 겸직하여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고 집현전 직제학에 승진되었다.단종 14년(1453)에는 왕의 명을 받아 「조선도도」, 「팔각도도」를 작성하였다. 다음해 「황극치 평도」를 작성하여 왕에게 올렸다. 예종 1년(1469) 지중추관사를 겸직하면서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다음해 성종 1년(1470)에는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모든 학문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능통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저서로는 '눌재집', '시정기', '삼강사략', '동국도경', '농잠서', '충목서', '고려사지리지' 등이 있다.

홍척[편집]

(?∼?)

통일신라 때의 승려로 출생년대·출생지 등은 자세히 알 수 없다. 현덕왕 때 중국의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서당 지장의 불법을 배워 홍덕왕 1년(826)에 귀국하였다.남악(지금의 지리산)에 머물러 수도를 하면서 남악의 실상사를 중수하여 우리나라 9산 선종 가운데 처음으로 선문을 개창하였다. 문하에 편운·수철 등 뛰어난 제자들이 배출되어 계속하여 지장의 선풍을 선양하였다. 그의 제자들이 각 지역으로 퍼지면서 실상산 선문을 진흥시켰다.그가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전해 온 것은 도의보다 나중이지만, 사찰을 짓고 문파를 형성한 것은 9산 선문 가운데 맨처음의 일이다.

정읍시[편집]

정읍시의 상징물[편집]

井邑-象徵物

정읍시를 상징하는 꽃은 목련, 나무는 단풍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정읍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북도의 남서부에 위치하며 동남부에 노령산맥이 동서로 뻗으면서 내장산과 기타 높은 산을 일으켜 지세가 험하다.서북부에는 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고, 이를 관개하는 동진강은 노령산맥의 출상두산(出象頭山)에서 발원하여 내장산에서 발원한 북천·모천 등 많은 지류를 합하여 부안·김제의 군계를 이루며 서류하여 황해에 유입한다. 기반암은 동남부의 내장동·칠보면 등이 편마암, 중생대 백악기 말의 신기화산 분출암 및 신라층군에 속하는 퇴적암류의 노령산맥이고 서부는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이다.

기후[편집]

대체로 온난하나 겨울에 북서계절풍을 받아 기온이 몹시 저하한다. 연평균 기온 12.7

, 1월 평균 -1.8

, 8월 평균 26

, 최고 기온 39.5

(1939. 6). 최저 기온 -20.5

(1943.1), 연평균 강수량 1,280㎜이다.

정읍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 때의 정촌현(井村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정읍현으로 고쳐 태산군(太山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때에는 고부군(古阜郡)에 속했고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 때에는 현감을 두었고 고종 34년(1897) 군이 되었다. 1914년에는 태인·고부 2군의 일부를 병합하여 정읍군이 되었다. 1931년 정주면이, 1939년에는 신태인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정주읍이 시로 승격되어 정주시와 정읍군으로 분리되었다. 1995년 1월 정주시와 정읍군이 합쳐져 정읍시로 되었다. 2004년 1월 현재 8개 동 1읍 14면이다.

정읍의 산업[편집]

-産業

논농사를 주로 하고 있으나 동부 노령산맥 서사면에서는 밭농사가 많다. 주곡 농업 외에 채소 등의 원예작물의 재배가 활발하며, 특용작물로 사과·감 등이 많이 생산된다. 축산업으로 양계·양돈업도 영위된다. 제조업은 견직·면직 등의 섬유공업, 배합사료가공·양송이통조림·식용유·전분제조 등의 식료품 공업, 백열전구제조업 등이 성하다. 1981년 정읍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서해안 개발 추진에 따라 1988년 이후 농소동·북면에 공업단지 및 농공단지가 건설되어 공업화가 진전되고 있다.중소 시범공단 조성은 농소동 공단부지 201.654㎢을 조성하여 완전 분양으로 식용유, 세탁비누, 박스원료, 미원사료, 장판지 및 제지, 안경테, 레미콘 등이 입주해 있고 입안면에는 면직물 제조업체가 집중되어 있다.

특산물[편집]

알로에·사과·배·참외·느타리버섯·천단포도·삼베·분재·고추 등이 유명하다.

정읍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도로·고속도로가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나 남동부의 산간지대는 교통이 불편하다. 호남선 철도가 통과하며, 주요역은 감곡·신태인·초강·정읍·천원 등이고 전남 장성군과의 경계인 노령과 갈재에 2개의 터널이 있다.호남고속도로가 27㎞의 거리를 통과하고 정읍휴게소가 있으며, 노령에 사남 터널이 있다. 서울

목포 사이의 국도, 정읍

고창, 정읍

부안, 정읍

순창, 신태인

부안, 신태인

김제, 신태인

임실의 지방도로가 있어 정읍시와 신태인이 교통의 중심이 된다.

정읍의 관광[편집]

-觀光

내장동과 입암면의 일부는 내장산국립공원에 편입되어 있으며, 천연기념물로 굴거리나무 군락이 있고, 사찰로는 내장사, 사적으로는 입암산성이 있다. 고적으로는 태인면 태성리에 파향정(坡香亭), 영원면 은선리에 삼층석탑, 덕천면 망제리에 천곡사지(泉谷寺址) 칠층석탑이 있고, 이평면(배들면) 장내리는 동학혁명의 선봉장인 전봉준의 출생지이며, 당시의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에 대한 항거지였던 덕천면의 황톳재, 이평면의 말목장터, 산외면의 평사리 등지에 동학혁명의 여러 사적이 남아 있으며, 덕천면의 황톳재에는 동학혁명 기념탑이 있다.

정읍의 시황[편집]

-市況

노령산맥의 서쪽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692.93㎢이고 인구는 15만 2,452명(2001.12)이다. 장기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2001년 15만 인구를 위한 도시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농산물 집산, 가공 유통의 상공 도시, 서해안 관광 루트 중심에 위치한 관광도시, 주변 농촌을 지원하는 지역 생활권에 위치한 중심 도시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다.

의안백이화개국공신녹권[편집]

-開國功臣錄券

국보 제232호. 정읍시 연지동 28-3 소재.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이모제로 개국에 공이 많아 태조 원년(1392) 개국 일등 공신에 서하고 의안백에 피봉되었다. 그리고 태조 7년(1398) 정사일등공신, 정종 2년(1400)에 재명 3등공신에 오르고 태종 7년(1407)에는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대군으로 진봉되었다.개국공신으로 43명이 있었는데 일등공신 16명, 이등공신 11명, 3등공신 16명이 있었으니 이 가운데 본 녹권은 최초로 발견된 유일한 것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길이가 604.9cm, 세로 35.3cm의 저지 두루마리로 이두문으로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은선리 삼층석탑[편집]

隱仙里三層石塔

보물 제167호.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43소재. 백제시대 고사부리군(고부의 옛 명)의 고을터였던 은선리에 있는 백제의 삼층석탑이다. 탑의 구조를 보면 높이 7.2m, 기단은 2.7m 두께 27cm, 정방형에 제1층의 높이는 2.28m, 넓이 1.38m의 판석 두 장을 양측에 세우고 앞뒤에 또 면석 2장 등 모두 4매의 판석으로 세워졌다. 제2층탑신은 높이가 아주 낮아져서 85cm에 넓이 90cm이며, 또 제3층 탑신은 높이 55cm에 넓이 60cm 가량이다. 각 층의 옥개는 두 장의 판석을 방형으로 맞추었다.이 탑의 특징은 제1층의 탑신이 장신인 동시에 제2층에 감실을 만들고 두 개의 석비를 달아 붙인 점이다. 익산의 왕궁 오층석탑과 비슷하나 감실에 석비를 달아 붙인 점이 다르다.

천곡사지 칠층석탑[편집]

-寺址七層石塔

보물 제309호. 정읍시 망제동 10소재. 망제봉의 서쪽 기슭 천곡리 골짜기에 있어 통칭 천곡사지 석탑이라고 한다. 원래는 오층석탑이 또 하나 있었는데 1925년경 일본인들이 어디론지 옮겼다. 이때 해체한 탑속에서 고려 태조 21년(938)이라는 명문이 나와 이를 탑의 축조연대로 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현존하는 칠층석탑은 남승의 탑이고 옮겨간 탑은 여승의 탑이라 한다.탑의 형태는 신라의 형태를 벗어난 고려탑의 형태로써 그 구조는 탑의 규모에 비하여 기단의 규모가 작은 편이며, 1층의 탑신은 네 개의 판석을 서로 엇물려 세웠다. 제2층의 탑신은 높이가 제1층보다 훨씬 낮은 동시에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3층 이상의 탑신은 모두 장방형태로 다듬어진 한 덩이의 돌로 세워져 있는데 좁은 편이나 두꺼워서 둔중한 감을 주기도 한다.

무성서원[편집]

武城書院

사적 제166호.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소재. 신라 말의 유현인 고운 최치원과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이던 신잠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사액됨으로써 무성서원이라 하였다. 사우는 최치원을 비롯하여 신잠·정극인·송세림·정언충·김약묵·김관 등의 향현을 배향하였다. 현존 건물로는 현가루를 비롯하여 강당·동서재·사우·비각 등이 있다.사우는 성종 15년(1484)에 중수되었고, 강당은 순조 25년(1825)에 불타 없어진 것을 순조 28년(1828)에 중건하였다. 이 서원에는 성종 17년 이후의 봉심안·강안·심원록·원규 등의 귀중한 서원 연구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전봉준 고택[편집]

全琫準古宅 사적 제293호.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소재. 녹두장군 전봉준이 동학운동을 일으킬 당시 거주하였던 집. 전봉준은 조선왕조 철종 6년(1855)에 이 지방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 고종 27년(1890)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서당 훈장으로 있었다. 당시 전국의 농촌은 일부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있었으며 이곳 고부군 역시 군수 조병갑의 만석보 수세 강제징수 등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의 생활은 피폐하고 원성이 높았다. 이때 선생은 고부군의 동학 접주로 분노에 찬 농민들과 동학교도의 조직을 이용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구호를 내세우고 동학운동을 주도하였다.

내장산[편집]

內藏山

호남지방의 5대 명산(지리산·월출산·천원산·방장산) 중 하나이며 한국 팔경의 하나로 50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 유일한 단풍 명소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명찰 내장사가 있다.1969년 1월 21일 관광지로 널리 지정되었으며 1971년 11월 17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1975년 봉룡지구에 집단시설을 조성하고 공원주변과 경내 조경을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공원탑을 세웠다.공원면적은 76.03㎢로 정읍시·순창군·전남 장성군과 인접해 있고 단풍 성수기에는 1일 10만의 인파가 단풍을 보기 위해 내장산을 찾는 외에 연중 100만 이상의 관광객이 내장산을 찾고 있다. 봄에는 푸른 산록 사이로 피어나는 벚꽃의 아름다움과 여름에는 푸른 녹음, 가을은 불타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의 아름다움으로 4계절 관광명소이다.

정읍의 인물[편집]

-人物

전봉준[편집]

(1854~1895)

초명 명숙(明淑), 별호 녹두장군, 호 해몽(海夢).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출생.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 축조를 이유로 농민들의 금전과 곡식을 강탈하자, 농민대표와 함께 바른 정치를 해주도록 호소하였으나 거부당하여 1894년 1월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부패한 관리를 잡아 가두었다. 그 후 전주에 입성하여 외침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부패한 관리처벌, 노비해방 등 폐정개혁안 12개 조목을 실천하기로 약속받고 진정하였으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12만 명의 군사를 지휘,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동학군은 중남부 전지역과 함경남도·평안남도까지 세력을 폈으나 공주·금구 싸움에서 패한 후 순창으로 잠적 재기를 꾀하다가 붙잡혀 1895년 3월 30일 교수형으로 최후를 마쳤다.

정극인[편집]

(1401~1481)

본관 영광(靈光), 자 가택(可宅), 호 불우헌(不憂軒)·다헌·다각. 어려서 선대의 고향인 영광으로 내려와 학문에 전념, 태학관 학생이 되었으나 척불(斥佛)의 선봉으로 세종 때 홍천사 사리전을 창건할 때 태학관생들과 글을 만들어 홍천사 수지 행호를 처형하라고 상소를 올린 일로 귀양을 갔다. 귀양에서 풀려난 뒤 처가가 있는 태인(현 정읍시 칠보면)에 내려와 초가삼간을 짓고 가호를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근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우헌이라 하였다.문종·단종·예종 때 여러 관직을 거친 후 1470년(70세) 정월 6일 벼슬을 하직하였다. 이때 성종이 좌리원종공신의 호와 유서를 내려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생활비를 지급하고 보살피라고 하명하였다. 정극인은 이러한 성은의 감격을 노래로 읇었는데, 이것이 바로 「불우헌가」이다.성종 6년(1475) 향리에 동중향음주라는 친목계 같은 단체를 만들어 온 동네가 모두 참여하게 하였다. 이는 태인향약의 시초이다.성종 12년(1481) 8월 6일 태인에서 생을 마쳤고, 묘는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동에 있다.

강일순[편집]

(1871~1909)

본관 진주(晉州), 자는 사옥(士玉), 호 증산(甑山). 증산교의 시조로 정읍시 이평면 서산리 외가에서 출생하여 본가인 덕천면 신월리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30세까지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돌며 고행 끝에 1901년 7월 5일 모악산 대원사에서 도(흠치교)를 이루고 스스로 만능의 권능을 지닌 옥황상제(玉皇上帝)의 화신(化身)으로 중생(衆生)을 건지려 동방에 태어났다 하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였다,증산은 1909년 6월 24일 동곡리 김형열 집에서 별세했다. 별세한 후 고씨 부인이 태을교를 창설하는 등 증산을 따르던 종도들이 이름을 달리하여 각처에 세운 교단이 18개에 이른다.

백정기[편집]

(1896~1934)

독립운동가. 본관 수원(水原), 호 구파(鷗波). 11세 되던 1906년 8월 외가를 따라 정읍시 영원면 혼랑리로 이사해서 살았다. 사서(四書)에 달통하고 3·1운동에 자극되어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운동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열린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 결성에 조선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고 1930년에는 북만주로 들어가 재북만무정부주의자연맹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子聯盟)을 조직했다.1932년 2월 B.T.P라는 흑색공포단을 조직 천진에서 활동하고, 다음해 3월 17일에는 유길명(有吉明) 일본대사 등을 습격하려다가 역습을 당해 붙잡혀 일본 장기법원에서 15년 형을 받고 복역중 폐의 고질로 1934년 6월 5일 별세했다. 정읍시는 백정기 의사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총 사업비 40억을 들여서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 1996년부터 5개년 계획사업으로 백정기 의사 유적지 정비사업을 추진했다.

김제시[편집]

김제의 상징물[편집]

金堤-象徵物

김제시를 상징하는 꽃은 백일홍,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김제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북도의 서단 호남평야의 심장부에 위치하는데 동부는 모악산(母岳山, 794m) 등의 산지가 분포하며, 이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화강암 지대가 오랜 시일의 침식으로 준평원화된 곳이며 동진강·만경강 등의 하류에 의하여 운반된 충적토(沖積土)로 덮여 있다. 북에는 만경강이, 남에는 동진강이 각각 이곳의 젖줄 역할을 하고 만경저수지를 비롯하여 유명한 벽골제(壁骨堤) 기타 많은 저수지와 언제(堰堤)·보(洑)가 있다. 기반암은 중생대 쥐라기의 편마상화강암과 대보화강암이 대부분이고, 북서해안지역에 선캄브리아대의 편암이 분포한다.

기후[편집]

남쪽에 위치한 까닭에 온난하나 한서의 차는 비교적 심하다. 연평균 기온 12.7

, 1월 평균 -2.5

, 8월 평균 26.7

, 최고 기온 39.6

(1939. 7), 최저 기온 -20.5

(1943. 1), 연평균 강수량 1,270㎜이다.

김제의 연혁[편집]

-沿革

김제군·금구군·만경군을 합한 것인데, 김제는 본래 백제의 벽골군(壁骨郡)으로 신라 때 김제로 개명하고, 고려 초에는 전주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인종 때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선 태종 3년(1403) 군이 되고 1914년 금구군과 만경군을 병합했다. 금구는 본래 백제의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으로 신라 때 금구로 개명하고 전주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의종 24년(1170) 현령으로 올렸고 그 후 1914년 김제에 합하였다. 또 만경은 본래 백제의 두내산현(頭乃山縣)으로 신라 때 만경으로 개명하고 김제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는 임피현(臨陂縣)에 속하였다. 예종 때 감무(監務)를 두고 후에 현령으로 되었으며, 1914년 김제군에 합하였다. 면적은 545.31㎢이고 인구는 11만 8,563명이다.1989년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되어 김제군에서 분리되었으며, 1995년 1월 김제시와 김제군이 합쳐 통합시로 되었다. 4개 동, 1읍, 14면을 관할한다(2004.1).

김제의 산업[편집]

-産業

주민의 약 67%가 농사에 종사한다. 호남평야의 중심부이고 더욱이 만경·동진 두 강의 복합 삼각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토지가 매우 비옥하다. 또 만경 저수지·동진강 도수로, 기타 정비된 관개 시설과 수리조합의 발달로 전국 제1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또 사금도 산출된다.

농수산업[편집]

주요 농산물은 쌀·나맥·콩·고구마·인삼 등이다. 주곡 생산 외에 백산면 등지에서 양잠업, 금산면·용지면·백산면 등지에서 축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산업은 진봉면·죽산면·광활면 등에서 어로·양식업이 이루어지는데, 주로 조기·도미·새우·갈치 등이 잡히며, 백합·굴 등을 양식한다.

특산물[편집]

송순주·심포백합·파프리카·백구포도·용지양계단지·금산목우촌·금산감식초·화훼·배·광할딸기 등이 유명하다.

김제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호남선이 군의 중앙을 종관하며 도로망이 잘 정비되고 개수되어 편리하다. 호남고속도로가 통하고 있는데 인터체인지를 통하여 각 시로 연결된다. 또한 전주와 익산·군산을 잇는 국도가 시의 북동부를 지나며, 정읍∼논산, 부안∼익산을 잇는 국도가 김제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벽골제[편집]

碧骨堤

우리나라 저수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벽골제는 부량면에 있는데,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쌓은 것이라 하나 그보다는 좀 후대인 것으로 추측된다.고려 인종 때 수축하였다가 인종 24년(1146) 왕의 병이 벽골지 수축 때문이라는 무당의 말로 일부를 파괴한 일이 있다. 태종 15년(1415) 국가적 대규모의 수축공사를 일으켜, 군정(軍丁) 1만 명이 2개월 동안 주위 7만 7,406보(步), 높이 17척의 제방을 수축하여 몽리 수전은 충청도·전라도에 걸친 방대한 지역으로서 9,800결(結)에 달했다 한다. 임진왜란 때 관리·유지가 전폐된 이래 농민의 모경(冒耕)으로 지금은 거의가 경지화되고 말았다.이때의 석조수문(石造水門)·기념비 등 유물이 남아 있어 1958년 기념비(1433)를 사적 제11호로 지정하였다. 벽골제의 남쪽을 호남지방, 서쪽을 호서지방이라고 부른다.

망해사[편집]

望海寺

진봉면 심포리(深浦里) 해발 72m의 진봉산 기슭에 자리한 망해사는 사찰로서뿐 아니라, 이 지역의 명승경관으로 천해의 경승을 이룬 곳이다. 망해사를 정점으로 심포 어항 등 서해연안에서는 가장 바다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곳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서해의 낙조(落照)가 아름답다.망해사를 중심으로 한 주변은 명승지요, 유적지이며, 지리적 전략요새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망해사 뒷산 전망대에 오르면 확 트인 시야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서쪽과 서남쪽은 망망대해이고, 동쪽으로는 우리 나라 제일의 곡창 김제 만경평야가 펼쳐진다.

금산사[편집]

金山寺

모악산 도립공원 입구에 우뚝 서있는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고, 776년 진표율사가 고쳐 지어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경내에는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지정문화재 10여 점이 있으며, 그 외에도 부속건물이 많아 호남제일의 고찰로 꼽힌다. 목조로 된 미륵전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삼층법당으로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미륵전의 미륵보살상은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이며, 삼존불 중 가운데 불상은 11.82m, 좌우불상은 8.8m나 된다. 이 외에도 노주(보물 제22호), 석련대(보물 제23호), 혜덕왕사 진응탑비(보물 제24호), 오층석탑(보물 제25호), 석종(보물 제26호),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익산시[편집]

익산의 상징물[편집]

益山-象徵物

익산시를 상징하는 꽃은 국화, 나무는 소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익산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북도 서북부에 위치하는데 주로 화강암과 결정편암으로 되어 있다. 군 북동부에는 저산성의 구릉이 기복(起伏)하였고, 최고봉 미륵산(彌勒山)도 420m에 불과하다. 전역은 남서에 향하여 경사하고 있으나, 금강과 만경강 유역의 비옥하고 광활한 익옥(益沃)평야가 호남평야의 일부를 차지한다.

기후[편집]

남쪽에 위치하여 대체로 온화하나 내륙에 위치한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비교적 심하다. 연평균 기온 12.5

, 1월 평균 -2.5

, 8월 평균 26.3

, 최고 기온 38.9

(1939. 7), 최저기온 -19.8

(1936. 1), 연강수량 1,280㎜이다.

익산의 연혁[편집]

益山-沿革

본래 마한(馬韓)의 땅인데 백제의 시조 온조왕 때에 이르러 이를 합하고, 금마저(金馬渚)라 불렀으며 신라 신문왕 때 금마군으로 고쳤다. 고려에 이르러서 전주에 속하고 충혜왕 5년(1344) 익주(益州)로 고쳤다. 조선 태종 13년(1413) 익산군으로 고치고, 1914년 함열(咸悅)·여산(礪山)·용안(龍安)의 3군을 합하고, 1947년 이리읍이 시로 승격하였고, 1979년 함열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95년 5월 이리시와 통합, 시로 승격했다.

익산의 산업[편집]

-産業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업군으로서 일찍부터 수리시설이 발달되었는데 특히 근래에 와서는 익동·동진수리조합과 그 관계수로망이 크게 발달하여 수리안전답이 논 전체의 73% 이상에 달한다. 김제·정읍과 더불어 전국적인 산미지대이며 익산미의 성가가 높다. 축산업이 성하며 돼지·닭을 많이 친다. 지하자원도 많이 매장되어 있으며 고령토·석탄 등이 난다.철도 교통의 요지이고, 군산항이 가까워 공업 입지 조건이 적합하나 공업용수가 부족하여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교통의 이점을 바탕으로 제2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었고 귀금속공단, 일반 공단으로 지역이 구분된다.

특산물[편집]

쌀·배·이띠기 토마토·참외·황토우·밤고구마 등이 유명하다.

익산의 교통[편집]

-交通

호남선이 세로로 관통하며 남단에 있는 이리(裡里)를 중심으로 하여 군산선과 전라선이 분기된다. 주요 도로망이 잘 정비되고 또 호남고속도로가 시 동부를 지나가고 있어 편리하다.

익산의 시황[편집]

-市況

호남평야의 북부 만경강반 화강암의 소구릉지와 저습한 평야지에 자리잡고 발달한 교통도시이다. 면적은 507.03㎢ 이며, 인구는 33만 7,240명(2001.12)으로 대도시를 이루고 있다.시가는 역을 중심으로 한 창인동과 기성상업지인 중앙동·평화동은 업무지구, 상업가로 발전하여 도심지를 이루고 있다. 공장은 창인·인화·주현·평화 등 4개 동에 분포되어 있으며 화학·기계·섬유공업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서부의 송모리에 공업단지 조성과 3만㎥ 용수시설이 조성되었다.또 예로부터 이곳에서 많이 나는 질 좋은 화강암을 원료로 석재가공업이 발달하였는데, 황등면과 함열읍에 이들 업체가 집중되어 있으며 황등농공단지는 석재가공단지이다. 철도교통의 요지이고 군산항을 가까이 끼고 있어 공업입지조건이 양호하나 공업용수가 부족하여 많은 제약을 받아왔다.마한과 백제 문화권의 중심지역으로 금마면을 중심으로 많은 유물·유적들이 분포한다. 금마면에는 미륵사지(彌勒寺址)·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미륵산 기준성(箕準城)·동고도리 석불(보물 제46호)·금마도토성(金馬都土城)·익산토성이 있고, 왕궁면에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 심기면 연동리에 석불좌상(보물 제145호), 익산 쌍릉(사적 제87호), 낭산면에 낭산산성, 앙성면 화산리에 화산천주교회(사적 제318호), 웅포면 송천리 송림사 보광전(보물 제825호), 여산면 원수리에 이병기 생가(지방기념물 제6호), 웅포면에 숭림사 등의 유물·유적이 있다. 또 팔봉동에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가 묻혔다는 쌍릉이 있다.

익산의 인물[편집]

-人物

이병기[편집]

(1891~1968)

시인·수필가·국문학자. 호는 가람(嘉藍). 익산 태생으로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했다. 전주·여산 등지의 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국문학·국사학 등에 관한 문헌을 모으는 동시에 시조도 많이 창작하였다. 한글 연구를 계속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기도 했다.그는 재래 시조의 정형성을 버리고 생생한 자연묘사로써 시조의 부흥과 현대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 '가람시조집', '한중록 주해', '역대 시조선', '국문학 전사', '가람 문선' 등이 있다.

완주군[편집]

완주의 상징물[편집]

完州-象徵物

완주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

완주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북도의 중앙부에서 전주시를 둘러싸고 호남평야의 동단에 위치하고 있다. 군의 동반부는 노령산맥이 뻗어 내리면서 청량산·서방산·건지산·기린봉·고덕산 ·모악산·서고산·태실산 등 높은 산을 일으켜 지세가 험하나 서남반부는 삼례의 준평원으로 호남평야의 동단을 이루고 있다.안천(雁川)은 북쪽 웅현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면서, 북류하는 추천(秋川:南川·全州川)을 삼례 부근에서 합하여 본류 만경강을 이룬다. 대부분이 편상화강암, 반암, 그리고 결정편암계 지질로 되어 있다. 면적 820.93㎢, 인구 8만 7,081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대체적으로 온난하나 내륙에 위치한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비교적 크다. 연평균 기온 12

, 1월 평균 -2.1

, 8월 평균 25.5

, 연강수량 1,233㎜이다.

완주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완산으로 신라 진흥왕 16년(555) 완산주(州)를 두었다가 경덕왕 15년(756) 전주로 고쳤으나 후에 견훤이 여기에 도읍하여 후백제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955)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다시 전주로 고쳤다. 조선 태조 1년(1392)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 태종 3년(1403)에 전주로 환원되었으며, 부윤(府尹)을 두었다. 1914년 부군(府郡) 폐합에 따라 고산군을 병합하여 전주군이 되고, 1935년 전주읍이 부(府)로 승격하여 분리됨에 따라 전주의 옛 이름을 따서 완주군이 되었다.1966년 운주면에 경천출장소가 설치되고, 1973년 봉동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83년 상관·용진면 일부가 전주시에, 김제군 백구면 일부와 이서면 원동리가 조촌면에 편입되었다. 1985년 조촌면이 읍으로 승격했다가 1987년 전주시에 편입되고, 비봉면 수선리 일부가 화산면에 편입되었다. 2004년 현재 2읍 11면이다.

완주의 산업[편집]

-産業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업지역이다. 남동부에서 밭농사, 만경강 연안의 충적지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진다.주요 농산물은 쌀·나맥·콩·고구마·삼·생강·왕골·면화·닥나무·누에고치·감·창호지·부채·죽세공품 등이다. 용진에서 배·복숭아·포도, 삼례·봉동읍에서 양파·배추 등 과수원예농업이 이루어지며, 봉동읍·구이면에서 생강, 고산·운주·화산면에서 감·곶감 등이 생산되고, 운주면에서는 인삼재배가 성하다. 또 부업으로 창호지·부채·죽세공품 등을 많이 만든다. 동산면의 대아저수지는 몽리면적 228㎢ 에 달하여 익산·군산시 근교까지 관개하는 전국 유수의 대저수지이다.

완주의 교통[편집]

-交通

전주시를 중심으로 도로망이 사통팔달하고 철도 전라선이 남북으로 통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더욱이 1973년 말 호남고속도로가 순천까지 개통되었다.

삼례읍[편집]

參禮邑

전라선의 요역이며 농업의 중심지로서 쌀·목화·콩 등이 많이 난다. 부근에 있는 신라 때 창건하여 고려 공민왕 8년에 내흥혜륵 선사가 증수한 위봉사는 호남 굴지의 영찰(靈刹)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타버려 이제는 그 옛터가 남아 있다. 이 밖에 위봉폭포·대아저수지·화암사(花巖寺) 등이 있다. 군행정기관은 전주시에 있다.

모악산도립공원[편집]

母岳山道立公園

천년의 고도인 전주를 감싸고 있는 모악산은 구이면 원기리 일원에 위치하여 김제시 금산면과 경계를 이루는 명산이요, 영산이다.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 금만경 평야의 동쪽에 솟은 793m의 모악산은 노령산맥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다.1972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1점의 국보급 문화재와 많은 지방문화재를 간직한 금산사를 안고 있으며 철따라 다양한 변화가 아름답다. 산사의 벚꽃은 변산반도의 녹음, 내장산의 단풍, 백양사의 설경과 더불어 호남의 사경으로 꼽히며 금산사를 비롯한 대원·수왕사 등의 사찰이 있다.신라말에 견훤이 이곳을 근거로 후백제를 일으켰으며 조선조 말에 강증산이 대원사에서 도를 깨우쳐 증산교를 일으켰고, 수십종의 신흥종교가 발원된 산이다.

송광사[편집]

松廣寺

소양면 대흥리에 자리한 종남산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867) 도의선사가 처음 세웠고, 그뒤 보조국사가 건물을 보수했다고 전한다. 신라 선덕왕 5년(784)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불교 교리를 구하다가 신라 헌덕왕 13년(821) 귀국하여 절터를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다 종남산에서 영천수를 발견하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건물구성이 ‘+’자 모양이어서 십자각으로 불리우는 범종각은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었고, 종남산 송광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지방유형문화재 제4호로, 그리고 최근에 사천왕상이 보물 제1255호로 지정되었고, 소조삼불좌상은 보물 제1274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대둔산도립공원[편집]

大屯山道立公園

호남의 금강 또는 남한의 소금강으로 이름난 대둔산도립공원은 운주면 산북리 일원에 위치하며 충남 금산군 및 논산시와도 접경을 이루고 있다. 해발 878m의 마천대를 중심으로 뻗어내린 웅장한 산세와 기암단애가 나무들이랑 어우러져 절경을 자랑한다.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잇는 금강구름다리는 높이 81m, 폭 1m로서 등산객의 가슴을 조이게 한다. 금강 구릉다리를 건너면 약수정이 나오고 여기서 삼선줄다리를 타면 왕관바위로 간다. 봉우리마다 한폭의 산수화로 그 장관을 뽐내는 대둔산은 낙조대와 태고사, 그리고 금강폭포, 동심바위, 금강계곡, 삼선약수터, 옥계동 등 신의 조화로 이룬 만물상을 보는 듯 황홀하기만 하다.

진안군[편집]

진안의 상징물[편집]

鎭安-象徵物

진안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진안의 자연[편집]

-自然

도의 동북부 진안고원, 즉 노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금산·무주·진안·임실에 걸쳐 폭 10∼20㎞의 서남방향의 지구상(地溝狀)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금강이 북류하고 섬진강은 남류하는데 진안 부근이 이 두 하천의 분수령으로서 가장 높다. 지질은 백악기의 석영반암·혈암·사암 등의 경암(硬岩)으로 되어 있다.

기후[편집]

고원지대이므로 기후가 서늘하여 고랭지대를 이루고 강수량은 대륙에 발생하는 저기압의 통로가 되고 남동계절풍이 몰려드는 곳이 되어 전국적인 다우지를 이룬다.연평균 기온 10.5

, 1월 평균 -3

, 8월 평균 26.3

, 연평균 강수량 1,319.7㎜이다.

진안의 연혁[편집]

-沿革

구 진안군과 용담군이 합한 것으로 진안은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縣)이며 신라에 와서 진안으로 고쳐 장계군(長溪郡)의 영현(領縣)이 되고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 현감, 1896년에 군이 되고, 1914년에 용담군의 일부를 합쳐 현재에 이르렀다.용담은 본래 백제의 물거현(勿居縣)인데 신라 때 청거(淸渠)로, 고려 충선왕 5년(1313) 용담으로 고쳤고, 1896년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진안군에 병합되었다. 1979년 진안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2001년 12월 현재 면적 789.92㎢이며, 인구는 3만 2,750명이다. 1읍 10면을 관할하고 있다.

진안의 산업[편집]

-産業

산간지이므로 경지면적이 총면적의 약 13%에 지나지 않는다. 밭보다는 논이 많으며 주민의 73%가 농업에 종사한다. 곡물생산 외에 담배·인삼 재배와 양잠·축산도 성하다. 특히 담배는 질이 좋고 산록지에는 많은 상전과 초지가 분포되어 있다.주요 농산물은 쌀·나맥·콩·담배·인삼·닥나무·누에고치·삼·소·꿀 등이다. 부업으로 한지·삼베·명주 등과 목기(木器) 등의 공예품의 산출도 볼 만한데 삼베는 성가가 높다.마령·백운·용담면에서 고냉지 채소와 버섯 재배, 동향·성수·백운면에서 잎담배 재배, 진안읍·백운면에서 양잠업, 진안읍·부귀·마령·성수면에서 축산업이 이루어진다. 주천·용담·안천·정천면 등지에서는 인삼재배가 성하다. 산지에서는 용재와 신탄을 산출하여 전주 지방에 공급하고 그 밖에 섬유·종실 등이 난다.

특산물[편집]

마늘·고추·더덕·토종 흑염소·돼지 등이 유명하다.

진안의 교통[편집]

-交通

진안읍에서 전주

진안, 진안

장계, 진안

관촌, 진안

금산, 진안

적상 등 5개 방면의 국도와 지방도가 있으며 철도는 없다.

진안읍[편집]

鎭安邑

군청 소재지이며 금강과 섬진강의 양 사면의 분수계에 위치하고 북으로 용담·장수, 서로 전주, 동으로는 경남의 안의 등지에 달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지만 전주가도를 제외하고는 도로가 좁고 험하다. 콩·조·보리·담배·닭·누에고치 등 농산물을 집산한다. 군내에는 마이산·우화정·반일암·만인동 모정(萬人洞慕亭)·천황사·고림사·용담야마계 등이 있으며 여름 한철의 피서지로 알맞은 곳이다.

은수사[편집]

銀水寺

은수사는 현재 조계종단 소속인데 조선 초기에는 상원사(上院寺)라 했고, 숙종 무렵에는 상원사는 없어지고 사지만 남아 있었는데 그 뒤 누군가 암자를 지어 정명암(正明奄)이라 했다. 은수사 황혜수(黃惠修) 주지 스님에 의하면 ‘正’은 5획으로 오행, ‘明’은 일월이므로 정명암이란 이름은 음양오행의 순환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정명암도 퇴락하여 없어졌다가 1920년에 이주부(李主簿)가 중창하였고, 이때 은수사(銀水寺)로 개칭되었다.은수사란 이름은, 태조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하였으므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은수사는 본시 불당 겸 요사채로 쓰인 건물과 그 위 산신도각(山紳度閣)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근래 극락전, 태극전, 대웅전과 요사채를 건립하여 바야흐로 대가람으로 도약을 기약하고 있다.국내 최대 크기였던 법고(1982년 제작)가 소장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 삼신할머니상이 상원사지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은수사 경내에 천연기념물인 마이산 줄사철군락(천연기념물 제380호)과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가 있다.

금당사[편집]

金塘寺

조계종단 소속 고구려 보장왕 때의 열반종의 종조 보덕화상의 제자인 무상화상과 김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중기의 지리서에는 금당사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지 않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마이산에는 상원사, 혈암사, 쇄암사만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이중 어느 것이 금당사의 전신인지 또 언제 현재의 자리에 건립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금당사는 매우 퇴락하여 1978년에 지장전을 중건하였고 뒤이어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였다.대웅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이고 팔작 기와지붕이며, 지장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맞배기와지붕이며, 삼성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금당사에는 괘불탱화, 목불좌상, 삼층석탑 등 문화재 3점이 소장되어 있다.

운장산[편집]

雲長山

운장산은 금강과 만경강의 분수령이다. 진안 고원의 서북방에 자리하고 있는 산으로써 정천·부귀·주천, 그리고 완주군의 동상면에 걸쳐 있는 1,126m의 높이와 분지를 가지고 있는 호남의 노령 제1봉이다. 동쪽으로 연(連)하여 구봉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구봉산과 더불어 기봉명산(奇峰名山)으로서의 이름을 높이고 있는 산이다.북두칠성의 전설이 담겨있는 ‘칠성대’를 지나면 ‘오성대’가 있는데, 조선 중종때의 서출(庶出)인 성리학자 송익필이 은거하던 곳으로 전해진다. 문하에 김장생·김집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한 송익필의 자(字)가 운장(雲長)이었기에 이 산의 명칭을 그때부터 운장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진안의 인물[편집]

-人物

정재영[편집]

(1798~1877)

호는 근재(根齎), 자는 춘경(春卿). 정조 22년(1798) 동향면 능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이 깊었으며 동네 박씨 재각에서 글공부를 할 때는 밤에 호랑이가 길을 밝혀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순조 16년(1816) 문과에 급제한 사간원 사간문 겸 선전에 책봉되었고, 철종 9년(1858)에는 통정대부 사간원, 행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그 후 고종 2년(1865)에 좌우부승지, 가선대부, 도총부, 부총관에 이어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많은 벼슬을 하며 충신으로 효자로서 선정을 베풀다 일흔아홉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인권[편집]

(1890~1968)

호는 송파(松波),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수양대군이 어린 임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마령에 은거했던 호조판서 극례의 16대손.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학식이 두터웠고 친모와 계모가 위중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하는 등 효성이 지극했다. 이 효행이 세상에 알려져 유림들의 효천(孝薦)이 여러 번 있었으나 한일합방 경술년의 국치로 세상이 시끄러웠던 시기라 포상을 받지는 못했다.이 지방 명문인 이병연·정종엽과는 막역한 사이로 도의의 교분을 맺고 높은 학문을 갈고 닦아 제자가 수없이 따랐다. 평소 전남의 독립투사 전기홍과 전북의 독립투사 이석용과도 뜻을 같이하며 가산을 털어 앞장섰고, 향교의 임원이 되어 여씨향약을 시행하고 공민학교를 세워 영재를 양성하는 등 지역개발에 기여하였다. 또한 이곳에 이산묘를 세워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데 이바지한 공로가 커 김구·이시영 등이 글을 보내어 그를 칭송하기도 하였다.1968년 9월 12일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전국 유림에서 기금을 모아 백운평장리 가전부락 덕태산 밑에 양택을 잡아 정려를 세웠다.

무주군[편집]

무주의 상징물[편집]

茂朱-象徵物

무주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주목, 새는 원앙이다.

무주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북도의 동북단에 위치하며 군의 동에 소백산맥이 달리면서 민주지산·주시령·덕유산(德裕山, 1,508m) 등을 일으켜 동부 일대는 높고, 서북으로 향하여 점차 낮아진다. 금강 상류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무주분지가 있으나 장수·진안의 여러 군과 같이 진안 고원에 위치하여 도내에 있어서 가장 험한 산간벽지이다. 면적 631.84㎢, 인구 3만 385명(2001.12)이다.

기후[편집]

고랭지대인 진안고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한서의 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은 11.7

, 연평균 강수량은 1,200㎜이다.

무주의 연혁[편집]

-沿革

무풍(茂豊)·주계(朱溪)의 2현을 합하였는데 무풍현은 신라시대의 무산현(茂山縣)으로 후에 무풍으로 고쳤다가 고려 명종(明宗) 6년(1176) 감무(監務)를 두었다. 주계현은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이었는데 고려 때에 주계로 고쳤다. 공양왕 3년(1389) 무풍에 합하고, 조선 태종 14년(1414)에 무주라 고쳐서 현감을 두었다가 1895년 군이 되었다. 1979년 무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2004년 1월 현재 1읍(무주), 5면(무풍·설천·적상·안성·부남)을 관할한다.

무주의 산업[편집]

-産業

산간에 위치하나 농업이 주업이고 임산물로 목재의 산출이 많다. 또한 각종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전체 면적 중 경지비율은 약 12%에 지나지 않는다. 논·밭의 구성비율에 있어서도 밭이 51%로 전북에서 유일하게 밭의 비율이 논보다 높은 밭농사 지역이다. 경지는 안성면 등 산간분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남대천·구량천 주변에 좁게 분포해 있을 뿐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나맥·옥수수·콩·고구마·담배·닥나무·삼·인삼 등이다.임산물에는 목재의 산이 많고 부산물로 해송자(海松子)·오미자(五味子) 등 약재가 나는데 이는 본군의 특산물이기도 하다.

특산물[편집]

머주·포도·호도·오미자·찰옥수수·사과·고추·느타리버섯·곶감·마늘 산채·표고버섯·한과 등이 유명하다.

무주의 교통[편집]

-交通

형이 험준하여 교통은 지극히 낙후되어 있었으나 무주읍을 잇는 도로가 개설되고 경부고속도로와 근접하여 다른 시·도와의 교통도 편리하다. 무주

진안, 무주

김천, 무주

무주구천동, 무주

영동, 무주

금산 등의 도로들이 무주읍에서 교차한다. 현재 건설 예정인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와 군산

대구간 고속도로가 무주에서 교차한다.

무주읍[편집]

茂朱邑

군청 소재지이며 소백산맥의 고원에 위치한다. 여름에 비가 많고 매우 더우며, 담배의 산출이 많다. 그 밖에 목공품·신탄·감의 산지로 알려져 있다. 농가의 부업으로 양잠·제지 등이 성하다. 군의 북부에 치우쳐 있고 국도상에 면해 있으며 여기서 경상남북도로 넘어가는 유일의 도로가 분기된다.관광자원으로 무주 구천동(九千洞)을 중심한 덕유산 국립공원을 비롯하여 적상산성지·수성대(水城臺)·안렴암(按廉岩) 등이 있다. 구천동은 덕유산 북쪽 계곡에 있으며 연화폭·구천폭 등의 비폭이 곳곳에 있어 선경을 이루고 있다. 적상산은 해발 1,020m이고 사면에 깎아 세운 듯한 석벽과 울창한 노수, 가을의 단풍은 산 이름대로이다. 또 산 위에는 5㎞에 달하는 성터가 있으며 곳곳에 고찰이 있다.

백련사[편집]

白蓮寺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덕유마을) 구천계곡 덕유산 중턱. 매월당 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3호), 백련사 금강계단, 전라북도 기념물 제42호, 정관당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102호).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숨어 살던 곳에 햐얀 연꽃이 솟아나왔다 하여 절을 짓고, 백련암이라 했다 한다.불교 전성기 때는 14개의 사암이 있어 구천인의 승려들이 도를 닦던 곳이어서 구천동이라 했다는 이곳은 조선중기 부용·부휴·정관·벽암대사 등 수많은 고승들이 선풍을 일으켰던 불교 성지로써 한때는 구천동사라 이름 붙여 사용해 왔다.

백산서원[편집]

柏山書院

향토문화재. 무주군 무풍면 헌내리 소재. 세종 때 삼정승의 벼슬을 두루 거친 문효공 하연과 정경부인 성산 이씨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순조 때 타진사를 세워 영정을 모셨다가 고종 때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헐려 했던 것을 순종 때 다시 세우고 백산서원이라 했다.타진사에 모신 영정은 세종 10년(1428) 하연의 셋째 아들 하우명의 작품이라 전해 오는데 영정의 부본은 일본 천리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풍루[편집]

寒風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소재. 본래 무주읍내 앞 냇가에 위치했던 누각인데 전주 한벽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호남의 삼한 중 하나로 유명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누각으로 손꼽아 왔다.예로부터 이름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 풍류를 즐겼던 이 누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일제시대 때는 일본 군인들에 의해 영동군 양산 강변으로 옮겨져 금호루라는 현판이 걸렸다가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대덕산[편집]

大德山

무주군의 최동단에 위치한 1,290m의 대덕산은 가야산을 향해 뻗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을 갈라 놓은 상도분기점, 즉 해발 1,250m의 초첨산을 옆에 둔 명산으로 옛날에는 다락산, 다악산으로 불리었고 정상에는 기우단이 있었다고 전하는 명산이다.부드럽게 생겼으면서도 우직한 남성다운 덕기가 어린 산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인걸들을 배출했고, 이 산이 있는 무풍동은 남사고의 십승지지 중 하나로 알려진 고장이기에 더욱 유명하다.

민주지산[편집]

珉周之山

해발 1,242m의 민주지산은 전라북도 최동북단에 위치하여 충청·전라·경상, 삼도를 가르는 삼도봉을 거느린 명산으로 옛 삼국시대는 신라와 백제가 접경을 이루었던 산이기도 하다.이 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충북 영동군의 절경 문한리 계곡과 경북 김천시 황악산 기슭의 직지사가 유명하고, 동남쪽으로는 마애삼두불의 미소를 머금은 해발 1,200m의 석기봉과 태종 14년(1414) 전국을 8도로 나눌 때 삼도의 분기점이 된 해발 1,181m의 삼도봉이 웅거하여 삼남을 굽어본다.

장수군[편집]

장수의 상징물[편집]

長水-象徵物

장수군을 상징하는 꽃은 산철쭉, 나무는 소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장수의 자연[편집]

-自然

도의 동단에 위치하며 동쪽에 덕유산(德裕山)·백운산(白蕓山)·대덕산 등이 솟고 장수읍 남쪽에 섬진강과 금강 사면을 가르는 분수령인 수분현산맥은 백운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으면서 상산·영취산·고달산 등 고준한 산을 일으키고 진안고원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주로 화강편마암계에 속하는 지질로 되어 있다.면적 533.64㎢, 인구 3만 521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내륙 산간에 위치하여 있는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심하며 특히 서리가 빨리 와서 농작물에 상해(霜害)를 입히는 예가 많다. 강수량은 여름에 저기압의 통과지가 되고 남동계절풍의 통로가 되어 다우지대를 이룬다. 연평균기온 10.5

, 1월 평균 -2

, 8월 평균 25.5

, 연 강수량 1,400㎜이다.

장수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우평현(雨坪縣)인데 경덕왕 때 고택(高澤)으로 칭하였다. 고려조에 이르러 장수로 고쳐 남원부(南原府)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 현감으로 승격되고, 광무 원년(1897) 군으로 되어 장계현을 병합, 장수군이 되었다. 1979년 장수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장수), 6면(산서·번암·계내·천천·계남·계북)을 관할한다.

장수의 산업[편집]

-産業

교통이 불편하여 도내에서 개발이 가장 뒤떨어진 군부에 속하며 농업이 주업이다. 미맥 외에 담배·감 등이 나며 금과 수연광이 산출된다. 근래 지리산지구에 한우단지를 조성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임야가 전체 면적의 78.1%를 차지하여 경지 면적은 약 16%에 지나지 않아 협소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나맥·콩·고구마·담배·누에고치·꿀·감 등이며 고랭지 채소도 재배된다. 수연광·금·납·운모·구리 등 지하자원의 매장이 있으며 금은 반암(蟠岩)을 비롯한 영호(靈壺)·영대(靈臺) 등지에서, 수연광은 장수·돈산 양 광산에서 산출되었는데 장수 광산은 휴광중이다.

특산물[편집]

사과·오미자·석기·오이·고추·화훼·표고버섯·느타리버섯·취나물·한우·토종돼지·토종꿀·고로쇠 약수·잡곡·토마토·붕어중탕·목공예품 등이 유명하다.

장수의 교통[편집]

-交通

산간지대인 까닭에 교통은 지극히 불편하다. 전주에서 육십령을 넘어 거창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와 남원·영동간을 종관하는 국도가 있다.

장수읍[편집]

長水邑

군청 소재지이며 군의 중서부, 금강 상류의 중심지이다. 부근 일대에서 나는 잡곡과 담배·고치 등 농산물의 집산이 성하다. 군내 명승고적으로는 용추·논개비·백화산·육십령(六十嶺)·수분현(水分峴)·연사루·운점사·석천사 등이 있다.

신광사 대웅전[편집]

-寺大雄殿

지방유형문화재 제113호. 천천면 와룡리 38 소재. 천천면 와룡리 신광마을 서쪽에 있는 것으로 신라 흥덕왕 5년(831) 무량국사가 창건하였고, 조선조 헌종 15년(1849) 당시 장수현감 조능하가 중창했다고 한다. 이 신광사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맞배 너와지붕의 대웅전과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으로 된 명부전이 있다. 이 외에도 대웅전 남쪽에는 정면, 측면 모두 1칸으로 된 칠성각과 대웅전 정면에는 2동의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다.

어서각[편집]

御書閣

지방문화재자료 제32호. 번암면 노단리 1118-1 소재. 이 어서각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것으로 번암면 소재지에 있다. 입구에 최근 세운 철제 홍살문이 있으며, 이 홍살문을 지나면 삼문이 있고 이 삼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어서각이 있다. 정면의 중앙칸에는 어서각이라는 현판과 중수와 관련된 4개의 현판이 벽면에 걸려 있다. 어서각 안에는 조선 영조가 직접 쓴 글씨가 보존되어 있다.

의암사(논개사당)[편집]

義巖祠

지방기념물 제46호. 장수읍 두산리 산3번지. 호남절의록, 호남삼강록, 의암주논개사적비 등 사실에 근거하여 논개의 생장 고향인 장수 남산에 군민이 하나가 되어 사당을 건립하고, 1956년 함태영 부통령이 친히 쓴 의암사 액자를 걸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을 모시고 의암사라 했다. 1974년 현 위치로 정화이건하고 1998년 확대 정화했다.

창계서원[편집]

滄溪書院

지방문화재자료 제36호. 장수읍 선창리 566-1 소재. 장수군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으로 조선 숙종 21년(1695) 창건되었다가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그 뒤 1958년 이 지방 유림들에 의해 복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창계사가 있으며, 창계사 바로 앞과 창계사의 왼쪽에는 창계서원의 유지비가 세워져 있다.한편 창계사 안에는 익성공 방촌 황희를 주벽으로 하여 열성공 췌부 황수신, 뇌계 유호인, 송탄 장응두, 무명재 강백진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합미성[편집]

合米城

지방기념물 제75호. 장수읍 식천리 177-1 소재. 후백제 때 축성된 것으로 팔공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해발 800m 정도 되는 능선의 정상에 자리하며 장수읍에서 산서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작고개에 있다.

장안산군립공원[편집]

長安山群立公園

장수군 계남면 장안리 위치. 높이 1,237m. 무룡궁이란 곳이 있어 금강과 섬진강의 가장 먼 분수지이다. 무룡이란 용이 춤을 춘다는 말로 이재에서 장안산으로 향하는 기세가 마치 용이 하늘로 오르는 기상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마루 입수처에서는 천지수라는 샘이 있고, 산의 좌우편에는 옥지수라는 샘이 있다.장안산 산봉을 일명 금봉이라고 하는데 장계면 무룡고개, 계남면 괴목, 번암면 지지, 덕산계곡에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팔공산[편집]

八公山

장수군 장수읍 용계리 위치. 장수읍 서남향 20리에 위치한 곳으로 높이 1,151m의 고산이며 소백산맥에서 노령산맥이 시작되는 산이다.장수는 거의 전지역이 소백과 노령의 분지적 협곡지대다. 금강의 최상류이자 섬진강의 최상류가 되며 수분치에서 분수하여 남쪽으로 가는데, 한편 물은 금강이 되고, 다른 한편 물은 섬진강이 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의 수분치의 북류수는 발원하여 장수·천천·진안·용담·영동·옥천·대덕·연기군까지 오던 산을 따라서 올라간다. 그러므로 물이 거슬러간다고 하여 역류삼백리라 하고 산이 오던대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하여 역산삼백리라 한다. 추풍령을 지나 덕유산·장안산·팔공산으로 해서 다시 추풍령 밑으로 간다는 뜻이다.따라서 팔공산을 호남의 진산이라고 하는 뜻은 팔공산에 성수산·마이산·주졸산·남노·북노를 연결하여 충청도 일부를 이 산의 영향권 아래에 두고 경남을 경계로 하고 호남의 전역이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이 산에는 기원 6세기경에 팔성사라는 고찰이 창건되었고 팔성사에 예속된 암자 8개소가 있었는데 암자마다 성인이 한 분씩 거처하고 있었으므로 팔성사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장수의 인물[편집]

-人物

논개[편집]

(1574~1593)

선조 7년(1574)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훈장 주달문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의 특이한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 술은 개를 뜻하기 때문에 논개라는 이름을 지었다.논개의 아버지는 서당에서 나이 10여 세가 되기까지 한문을 배웠다. 선조 21년(1588) 8월 숙부인 주달무가 신내마을 김풍헌의 민며느리로 논개를 팔아 넘기자 모녀는 피신하였다. 이에 김풍헌은 모녀를 관아에 제소하였으나, 최경회 장수현감은 숙부 주달무의 잘못을 인정하고 모녀를 무죄 방면하였다.선조 25년(1592) 임진년 왜적 30만 대군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자 의병장이던 최경회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진주로 부임하였다.당시 왜군은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을 치기 위하여 십만대군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우리측도 필사적으로 반격하였으며 논개도 싸움에 앞장서 치마폭으로 돌맹이를 나르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병에게 끓는 물을 퍼부으면서 최후까지 싸웠다.선조 26년(1593)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고 평생을 의지하려던 남편 최경회마저 순국하자 논개는 슬픔의 나날을 보냈다.왜병들이 7월 7일을 기해 촉석루에서 승전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논개는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가장, 잔치에 참석하여 주흥에 도취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으로 유인, 그의 허리를 껴안은 채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백용성[편집]

(1864~1940)

번암면 죽림리에서 출생. 자는 백상규. 14세 때 남원의 덕밀암으로 출가하여 19세에 해인사에서 화월 스님을 은사로, 혜조율사를 계사로 정식 출가하였다.1911년 서울 선당교당을 세워 3천여 명을 포교하였고, 1919년 3·1 독립선언서에 불교계 대표로 서명(만해 한용운 스님의 스승) 10만여 권의 불교서적을 발간했으며 선농일치의 이상적 수도를 주창(경남 함양 백운산에 30여 정보의 화과원 조성)했다.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됐고, 1988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국가보훈처)된 뒤 같은 해 4월 유허비가 건립됐다.

임실군[편집]

임실의 상징물[편집]

任實-象徵物

임실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왜가리이다.

임실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북도의 동남에 위치하며 군내에는 소백산맥의 여맥이 뻗쳐 산악이 중첩하여 평지가 귀하다. 특히 동북부는 전반적으로 고준(高峻)하다. 지질은 주로 편상화강암과 반암으로 되어 있다. 하천은 섬진강의 상류인 오원천(烏院川)과 작천(鵲川)이 있고 전자는 감입곡류를 하여 흐른다. 면적 597.09㎢, 인구 3만 7,548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내륙에 위치하고 지형이 험하고 높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크다. 연평균 기온 11

, 1월 평균 -1.8

, 8월 평균 26.5

, 연평균 강수량 1,440㎜이다.

임실의 연혁[편집]

-沿革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여 청웅현(靑雄縣)이라고 칭했으며, 백제시대에 와서는 임실현이라 개칭하였다. 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남원부에 속하고 군이 되었으며, 고려 명종 2년에는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었으며, 1897년 군으로 되었다. 1979년 임실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관촌면 금성리가 임실읍으로 편입했으며, 1992년 둔남면을 오수면으로 개칭했다. 199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삼계면 신정, 망전리가 임실읍으로 편입되었다.

임실의 산업[편집]

-産業

주산업은 농업으로서 미맥 외에 삼·닥·담배를 재배하며 양잠이 성하다. 각종 지하자원의 매장이 있으나 부진하고 다만 수력자원이 풍부하다.

농업[편집]

산간지대라 임야가 많다. 임야가 전체 면적의 약 71%를 차지하여 경지가 18%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 논이 65% 밭이 35%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나맥·콩·깨(특산물)·고구마·면화·담배·닥나무·누에고치·산삼 등이다. 농가의 부업으로 견직물과 창호지 등을 제조한다. 그 밖에 누에치기·축산업이 발달하였고 신평면 대리(大里)에 대규모 우유가공 공장이 있다.

광업[편집]

금·은·구리·철·석탄·흑연·활석·석회석·운모·희유원소광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금·은과 석회석, 고령토 등이 약간 생산되고 있는 정도이다. 섬진강의 상류를 막아 동진강으로 유로를 변경시켜 그 물을 정읍시 칠보면과 산내면의 방수구에서 166m를 낙하시켜 칠보(3만 4,800kW)·운암(2,560kW) 발전소에서 발전을 한다. 이 물은 다시 동진강을 통하여 270여㎢의 수리 불안전답을 관개 또는 개답(開畓)하여 식량증산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특산물[편집]

모반·목기·상·한지·석기·땅두릅·느타리버섯·장미·벌꿀·생약·고춧가루·양란·표고버섯 등이 유명하다.

임실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전라선이 본군을 종관하고 순천가도가 이와 병행하였으며 동부 계곡을 따라 전주(全州)·남원간의 국도와 진안·정읍·순창을 잇는 국도 등 기타 도로가 군내 각지와 인군(隣郡)에 통한다.

임실읍[편집]

任實邑

군청 소재지. 오원천의 지류 임실천 좌안에 발달한 가촌식 취락(街村式聚落)이다. 철도 전라선의 역이며, 순천가도와 순창(淳昌)에 이르는 도로의 분기점이 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부근에서 생산되는 쌀·콩·보리·면화·꿀·담배·고치 등 농산물을 집산하고 최근 섬진강 상류의 운암·칠보의 두 유로변경식 발전소의 완성으로 일약 유명해졌다. 명승고적으로 운암저수지·성수산·사선대·의견비(義犬碑)·광명등(光明燈)·신흥사·몽득사·상이암·백련사(白蓮寺) 등이 있다.

신흥사 대웅전[편집]

新興寺大雄殿

지방유형문화재 제112호.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 360 소재. 백제 성왕 7년(529)에 건축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했지만 대웅전 등 주요건물은 창건 당시 백제 때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소중한 가치가 있다. 또한 창건 당시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정문, 요사가 김제의 금산사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대웅전의 기단은 자연석이며 초석도 역시 자연석 주초이다.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하고 우주는 다른 기둥에 비해 매우 강하다. 전체적으로 보아 기둥의 높이가 평면 규모에 낮음으로 해서 지붕이 상대적으로 크게 보인다.정면의 문은 어칸이 4분합의 빗살문이며 협칸은 각각 3분합의 빗살문으로 되어 있다. 처마는 겹처마다 둘렀으며 그 아래 공포는 다포식으로 내외 2출목이며 어칸에는 공간포가 2개, 협칸에는 1개씩 있고 저공의 끝은 앙설로 조각적 수법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을 단청으로 보완하여 단순하게 보이지는 않는다.창방머리는 보아지형식의 곡선장식을 했고, 단청 역시 초화문으로 하였다. 전체적으로 측면의 폭은 넓은 편이며, 그 중 어칸이 특히 넓어 내진의 공간이 깊음을 알 수 있다.또 측면풍판의 마무리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 있는 점이나 측변의 너새를 정면과 같이 새들로 단정히 정리한 것으로 보아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이도리 미륵불상[편집]

二道里彌勒佛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210-4 소재. 임실읍 이도리 미륵불상은 높이 2.54m. 어깨폭 81cm로 수정마을 운수사(雲水寺)에 남아 있다. 운수사는 창건 연대와 설립 경위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백제시대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이 석불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산세의 액막이를 위해 세운 절에 남아 있은 것으로 지금은 숲과 합도는 없어지고 석불만 남아 있다. 삼은은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으나, 목 이하는 조각이 희미하니 불신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고 머리와 눈썹, 그리고 수염은 검은색, 입술은 붉은 칠을 하고 있어 토속적인 색채가 강하다.백제시대의 유물이라고 하지만 조각연대는 분명치 않다. 이 지역은 성수면 고덕산 산세가 험하여 화재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이 재난을 막기 위하여 고덕산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를 심어 수정(樹亭)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이 곳에 절이 생기게 된 것은 한 도승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워낙 숲이 좋고 뒷산의 혈맥과 앞의 냇물이 흐르는 중간에 마을이 위치한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어 인간의 도를 깨우치려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임실의 인물[편집]

-人物

이능간[편집]

(1286~1359)

거령현(居寧縣:지사면 영천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충숙왕 7년(1320) 원나라는 상왕(上王)인 충선왕을 그들의 나라로 데려가 고려의 충성을 강요하였다. 그해 12월 원나라는 충선왕이 그들을 배반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워 멀리 토번(吐藩:지금의 티베트 지역)으로 유배를 보내게 되었다. 이때 15세이던 이능간은 반전별감이 되어 상왕을 수행하여 3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유배가 풀려 연경에 돌아왔으나 상왕이 병으로 죽자 상왕의 유해를 모시고 귀국하였다. 연경에 있을 때 원나라는 고려를 그들의 일개 성(省)으로 삼고, 고려 사람들은 옷고름을 왼쪽에 달고 다니게 하여 차별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고 이를 원나라 황제에게 주청하여 굴욕을 모면하도록 하였다.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부모를 성심껏 봉양하였다. 그러다 부모의 상을 다 치른 후 다시 조정에 들어가 벼슬길에 올라 공민왕 때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다.공민왕 8년(1359) 그가 죽자 왕은 그를 영천부원군에 봉하였다. 그의 후손은 지사면 영천리에 대대로 살면서 영천 부원군 이능간을 시조로 받들고 영천 이씨(寧川李氏)라고 하였다.

이인로[편집]

(1152~1220)

고려말의 대학자 이재현의 아들로 호는 쌍명재(雙明齎). 옥천군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퇴위시키고 스스로 임금이 되자 성삼문,박팽년 등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던 충신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많은 충신,열사들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 몸을 숨겨 여생을 보냈는데 이인로도 벼슬을 버리고 임실 용요산(龍腰山) 기슭에 괴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몸을 숨겨 여생을 마쳤다.세 아들도 뜻을 같이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는데 임실의 경주 이씨 익제공 파들은 모두 이인로의 후손이다. 작품으로 '파한집', '쌍벽재집' 등이 있다.

순창군[편집]

순창의 상징물[편집]

淳昌-象徵物

순창군을 상징하는 꽃은 백일홍,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

순창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북도의 최남단 노령산맥의 동쪽 산간지대에 위치하는데 군의 동·서·북은 소백·노령 두 산맥의 지맥이 역내에 뻗어 산지의 기복이 많고 평지가 전반적으로 적다. 그러나 중앙부는 섬진강이 흘러 유역 남부에는 비옥한 순창분지가 발달하였다. 대부분이 반암지대이다.면적 495.76㎢, 인구 3만 4,003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내륙부에 위치한 까닭에 남쪽에 있으면서도 기온의 교차가 비교적 크다. 연평균 기온 12.8

, 1월 평균 -1.7

, 8월 평균 26.6

, 연 강수량 1,300㎜이다.

순창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도실군(道實郡)으로 한때 오산(烏山)·옥천(玉川)이라 칭하였다. 신 시대에는 순화군(淳化郡)으로 개칭하였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순창군으로 되어 남원부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5년 감무를 두었으며 충숙왕 3년(1316) 군으로 승격하였다. 1979년 순창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1읍(순창), 10면(안계·동계·적성·유등·풍산·금과·팔덕·복흥·쌍치·구림)을 관할한다.

순창의 산업[편집]

-産業

경지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24%이고 임야가 67%를 차지한다. 주산업은 농업으로서 특히 순창 분지는 비옥하여 답작이 성하며, 미맥 외에 면화·담배 등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이곳의 고추는 유명하다. 또한 죽세공품과 모시·면포·삼베·종이 등의 가내 공업이 비교적 성하다. 그리고 별미인 고추장과 아름다운 자수도 특산물로 유명하다. 광산물로는 구리·금 등이 있을 뿐이다.

특산물[편집]

고추장·한과·자수·오이·매실·팽이버섯·느타리버섯·감식초·배·동외정과·한봉·자미·김치·밥호박·고추 등이 유명하다.

순창의 교통[편집]

-交通

전라선과 17번 국도가 남북으로 통하고 30번 국도가 동서로 통하며 88올림픽 고속도로가 순창읍을 지나므로 교통이 편리해 농산물의 집산이 편하다.

순창읍[편집]

淳昌邑

군의 남서쪽 노령산맥 산간지대에 위치하는 군청 소재지로서, 1979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88올림픽 고속도로와 24번·27번 국도 및 여러 지방도로가 모이는 호남 내륙 지방의 상업·교통의 중심지이다. 산간지대이면서도 비교적 농지가 넓고, 고추의 명산지이다. 명승고적으로서는 삼인대·귀래정·대모산성·건천·답포치·강천사 등이 있다.

순화리 삼층석탑[편집]

淳化里三層石塔

유형문화재 제26호.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514-2 소재. 순화리 삼층석탑(石塔)은 현재의 순창여자중학교 본관건물과 숙직실 사이에 위치해 있다. 고려시대의 전 옥천사(玉川寺) 경내에 건립되었던 것이라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석탑 가까이에서 지금도 기와 파편과 그릇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어 이 부근에 큰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탑은 화강암으로 조성한 3층인데 탑의 기단부 지대석은 서북쪽의 일부가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고 다른 부분은 땅에 묻혀 있다.

객사[편집]

客舍

유형문화재 제48호.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313 소재. 순창초등학교 교문에서 약 50m 쯤 떨어진 운동장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본 객사의 창건(創建) 연대는 1759년 7월 (조선영조 35년)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이곳에는 정당(正堂) 동대청(東大廳), 서대청(西大廳)이 있었으며, 전면에 중문(中門)과 외문(外門), 그리고 옆에 무곽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 남아 있을 뿐이다.건물은 원래 정면 13칸, 측면 2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붕은 팔자솟을지붕이었으나, 서대청이 없어진 뒤 동대청만이 팔작지붕으로 남아 있고, 정당 3칸 서쪽은 맞배지붕 형태로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초석(柱礎石)은 장대석 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포작(包作)의 형태로 보아 익공(翼工)집이면서도 외목도리를 하여 처마를 길게 밖으로 빼낸 것이 특징이다.

강천사[편집]

剛泉寺

신라 51대 진성여왕 원년(887)에 풍수지리설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도선국사가 보광전, 첨성각 등 사찰을 창건하였으며 그 후 고려 27대 충숙왕 3년(1316)에 덕현선사가 오층석탑을 세우고 중창하여 사찰이 크게 번성하였으나 임진왜란(1596) 때 사찰건물과 연대암 등 12암자가 소실되었다. 선조 37년(1604)에 소요대사가 다시 사찰을 재건하였으나 그 뒤 6·25 전쟁으로 1950년 12월 완전 소실되었으며 현 건물은 1959년 김장엽 스님이 대웅전, 관음전을 복원하였고 1978년 이경모 스님이 선방과 보광전을 건축하였으며 현재 김재덕 스님이 요사채와 객사를 복원하였다.강천사의 원명은 복천사(福川寺, 福泉寺)라 하였으며 또한 산세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할 형상이라 하여 용천사(龍泉寺)라고도 하였다. 강천사라는 이름은 선조때 학자 귀봉 송익필이 이곳에 유숙하며 「숙 강천사(宿 剛泉寺)」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으며 이때부터 강천사로 불리었다고 한다.영조 36년(1760) 경진판 '옥천군지'에 의하면 불전이 3개소, 승방이 12개소이며, 명적암, 용대암, 왕주암, 지적암 등 강천사에 속한 암자가 12개소, 500여 수도승이 기거한 대거찰이었다.

강천사 오층석탑[편집]

剛泉寺五層石塔

유형문화재 제92호. 순창군 팔덕면 청계 996 소재. 강천사(剛泉寺) 다보탑(多寶塔)은 현재 강천사 대웅전 바로 앞 뜰에 위치해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오층탑은 고려 충숙왕 3년(1316)에 덕현선사가 강천사를 중창할 때 세운 것이라 한다. 그런데 6·25전쟁 때 강천사의 전체 건물이 소실되어 이 탑도 화를 입어 도괴되었는데 그 후 1959년 당시의 주지(住指) 김장엽(金奬燁) 스님이 강천사를 다시 세울 때 탑도 다시 세웠다.높이는 2.5m이고 오층탑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2, 3, 4층의 옥개석이 6·25 당시의 총탄에 의해 일부가 파손되었다. 주변에는 파손된 석등의 중대석과 보주가 일부 남아 있으며 당간지주 4기와 가공된 석재들이 몇 개 흩어져 있다.

순창의 인물[편집]

-人物

김인후[편집]

(1510~1560)

조선 시대의 문신,유학자.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어릴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연구심이 강하였다.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후부터는 인종의 두터운 사랑을 받았는데, 왕은 그의 서재에 들러 책과 필묵을 내려 그의 학문을 격려하였다. 그 뒤 박사·부수찬을 거쳤으며,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옥과의 현령으로 나갔다. 명종이 즉위하고,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장성으로 내려가 성리학을 연구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그 사이에도 여러 차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그는 이와 기는 서로 섞여 있는 것이라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도 정통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 관상편」, '서명사천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기정진[편집]

(1798~1876)

조선 말기의 학자. 호는 노사(蘆沙). 전라 북도 순창에서 태어나 8, 9세 때 이미 경사에 통하였다.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조선 유학계의 대표자 중의 한사람으로 기호학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저서로 '노사집', '납량사의' 등이 있다.

권집[편집]

(1665~1716)

본관은 안동. 본래 이름은 권도라 하였는데 후에 권집이라 개명하였으며 자는 수옥, 호는 화산.그는 세상에 나아가 명리를 취하려 하거나 경륜을 펼쳐 보이려 하기보다는 조용히 산간에 묻혀 학문을 탐구하고 후진교육에 온 정열을 쏟으며 살았다. 그가 살고 있던 숙종조에도 당파싸움은 계속되어 이에 연류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는데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일찍이 오늘 같은 세상을 살면서는 당론에 가담하여 소장을 올린다거나 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숙종 27(1701)에 사약을 받고 죽은 희빈 장씨의 아들(후의 경종)이 후일 왕위에 오르면 또 한번 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화산 권집은 숙종 42년(1716) 3월 3일 그가 살던 적성면 괴정리 서림마을에서 일생을 마쳤다.

고창군[편집]

고창의 상징물[편집]

高敞-象徵物

고창군을 상징하는 꽃은 동백,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고창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북도의 남서단에 위치하는데 주로 화강암 지대이나 기타 반암·결정편암계도 널리 발달하여 있다. 서해쪽으로 빠지는 노령산맥이 우뚝 솟아 도솔산·방장산(方丈山, 734m)·문수산(文殊山, 620m)·고산 등 높이 400m가 넘는 산들이 많아 삼림이 무성하며 평야는 적다. 면적 606.87㎢, 인구 7만 4,413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바다에 면해 있는 까닭에 온난하다.

평균 기온 15.3

, 1월 평균 -1.6

, 8월 평균 26.5

, 연평균 강수량 약 1,150㎜이다.

고창의 연혁[편집]

-沿革

벽제의 모을부리현(毛乙夫里縣)이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무령군(武靈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때 고부군(古阜郡)에 속하고 조선 태종 원년(1401) 감무(監務)를 두고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가 1853년 군으로 되었다. 1955년 고창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읍(고창), 13면(고수·아산·무장·공음·상하·해리·성송·대산·심원·흥덕·성내·신림·부안)을 관할한다.

고창의 산업·교통[편집]

-産業·交通

농업이 주산업으로서 미맥 외에 차·감·누에고치·저마 등이 산출되고 가내공업으로 창호지·모시·도자기 등이 생산된다. 어업은 양식업을 주로 하며, 해조류를 많이 생산한다. 긴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갯벌에서는 5개 사업장을 중심으로 천일제염을 생산하고 있다. 쌀 이외에도 잎담배가 무장면·공음면 등에서 재배되고 있고, 양잠업은 상하면·성송면·대산면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 콩·고구마·보리는 야산의 구릉지에서 재배되고 있다.고창을 통하여 남북 간선도로가 있을 뿐이고, 기타 교통망이 군내 각지와 연락되며, 철도는 없다.

특산물[편집]

복분자주·수박·풍천장어·작설차·땅콩·배·쌀·참기름·염전·고수자기·나침반 등이 유명하다.

고창읍[편집]

高敞邑

군청 소재지이며 교통의 요지로서 농산물의 집산이 성하다. 부근에는 선운산 도립공원이 있으며, 선운사를 비롯하여 고창성·문수사·방장산·농추폭포·소요사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 고등학교 9개 교, 중학교 14개 교, 초등학교 48개 교가 있다. 고창문화원에서는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모양제(牟陽祭)라는 향토문화제를 열고 있으며, 원불교가 영광에서 시작되었던 관계로 원불교 신자가 많다.

선운사[편집]

禪雲寺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 위치. 한국의 명승고찰로 유명하다. 백제 위덕왕 24년(577) 검단선사와 신라의 국사인 의운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정조 18년(1794) 임우상이 기술한 선운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이곳에 와서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법명을 법운자로 한 진흥왕은 중애공주와 도솔왕비의 영생을 위해 진흥굴 윗산에 중애암을, 만월대 아래에 도솔암을 각각 세웠다고 한다. 충숙왕 5년(1318)에 효정선사가 중수하였고 공민왕 3년(1354)에 재중수하였으며 조선 성종 5년(1474)에 행조선사가 중창하였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무장태수 송석조가 원준대사를 통해 1619년까지 5년간에 걸쳐 재건하였다.선운사는 한때 89암자 24굴 189요를 갖춘 대찰로 억불숭유정책을 내세운 조선시대에도 성종의 어실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으며, 태종 때의 사찰폐쇄령에도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보존된 대찰이었다.금동보살좌상·지장보살좌상·선운사 대웅전·참당암 대웅전·도솔암 마애불 등의 보물, 동백나무숲·장사송·송악 등의 천연기념물이 있으며, 석씨원류 경판·영산전목조삼존불상·6층석탑·범종·약사여래불상·만세루 백파율사비·참당암 동종·선운사 사적기 등 보물 5점, 천연기념물 3점, 기타 지방문화재 등 총 19점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소요사[편집]

逍遙寺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위치. 부안면 용산리 서쪽 해안 연변에 우뚝 솟은 소요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고찰이다. 백제 성덕왕대(554~597)에 소요대사가 개장했다. 신라말의 대승이었던 도선 선사가 도를 깨친 다음 수도행각을 할 때 일시 수도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름난 승려들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정유재란 때 요해만 남았고 광해군 때 중축한 대웅전이 6·25전쟁으로 또 소실되어 명찰의 면모를 찾을 길이 없다. 1975년 5월 25일 태고종에 등록되었다.

상원사[편집]

고창군 고창읍 월곡리 1 위치. 고창의 진산인 방장산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고찰이다. 상원사 사적기에 의하면 진흥왕 5년(544)에 불사 창건령에 의해 밀명을 띤 고봉·반룡 두 법사가 당시 백제 땅인 고창현의 영산 방장산하에 546(성왕 24년)에 창건하였다. 이 사찰 이외에도 내원·외원·임공·벽호·수월·오봉·풍천·상월·하월 등 모든 팔방구암자가 연이어 세워졌다.착공하여 준공되기까지 2년 6개월에 걸쳐 전 오천량, 미곡 천석, 정철 3천근이 소요되었고 절의 경역도 넓어 동쪽으로 솔치, 서쪽으로 사자치, 남쪽으로 취암, 북쪽으로 용초에 이르며 상원사 소유 논이 20결에 이르렀다. 그 뒤 지금까지 6차례에 걸쳐 중창되었으며 대웅전·칠성각·요사 종각 등이 있다.

소요산[편집]

逍遙山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위치. 부안면 용산리에 있는 해발 444m의 산으로 인천강의 하류인 장연강을 사이에 두고 선운산 동쪽에 있다. 정상에 오르면 줄포만을 건너 변산이 한눈에 보이고 해변의 풍경이 발아래 펼쳐진다.흥성지에 의하면 산의 정상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 있고, 북쪽에 취은처사 황세기, 귀암 황재중 부자가 독서하던 구인암명옥대, 유선대 등이 있다. 남쪽 계곡에는 바위 위에 효자 김하익이 눈물로 쓴 허백당 3글자가 있는데 200년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았는데, 이는 김효자의 효행에 감동한 때문이라고 한다.소요산 서쪽에 있는 소요사는 신라 진흥왕 때 소요 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한다.

고창 읍성[편집]

高敞邑城

사적 제145호.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불려지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극복을 위한 국방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50,172평으로 동서북문과 옹성 3개소, 치성 6개소, 성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손괴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해오고 있다.지금까지 22동 중 14동(동헌·객사·풍화루·공북루·진서루·등양루·성황사·관청·작청·내아·향청·서청·장청·옥)이 복원되었고 앞으로 8동의 관아 건물도 복원할 계획이다.

무장 읍성[편집]

茂長邑城

사적 제346호. 무장면 성내리 소재.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400m, 넓이는 43.847평이다. 성내에는 객사·동헌·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그 동안 흙으로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 때에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고창의 인물[편집]

-人物

김소희[편집]

(1917~1995)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중 「춘향가」, 서편제 예능보유자. 맑고 고운 애원성의 독특한 음색을 지녀 천부적 예술가로 태어났다. 13세 때 남원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흥덕초등학교를 마친 15세 때부터 송만갑·정정열·박동실 등 명창에게 판소리를 사사하였다. 송만갑에게 「심청가」, 「흥보가」, 정정열에게 「춘향가」, 「수궁가」를 또한 강태홍에게 가야금산조를 비롯한 거문고, 양금을 배웠고, 정성린에게 고전무용, 김호열에게 서예까지 익혔다.1937년 상경하여 창극좌에 입단, 선배인 박록주·이화중선 등과 함께 명성을 겨루었고, 빅타 레코드의 전속으로 정정열·임방위·이화중선과 「춘향가」 전편을 내놓는 등 명창의 지위를 굳혔다. 광복 후 여성국악 중흥에 기여하면서 박초월·박귀희 등과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여 원장에 취임하고 1960년대 이후에는 구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국제공연을 통해 우리 예술의 우수성과 국위선양에 기여하였다.특히 미국의 카네기홀에서의 판소리 공연과 28개 주 각 대학의 초청공연, 뮌헨 올림픽의 민속예술공연으로 판소리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세계무대에 올려놓았으며, 춘향가의 완창음반과 국악 50년 기념공연은 국악계의 신기원으로 평가받는다. 장기는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이다. 1995년 4월 17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화산계곡에 안치되어 있다.

신재효[편집]

申在孝 (1812~1884)

조선 시대의 판소리 작가. 호는 동리(桐里). 고창현 천남면 서문리(지금의 고창읍 읍내리)에서 태어나, 1876년 굶주리는 사람을 도와 준 공으로 통정대부가 되고, 가선대부·호조참판 등을 지냈다.그는 이전부터 되는 대로 불려 오던 판소리 열두 마당을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변강쇠타령」, 「수궁가」, 「적벽가」 등의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여 체계를 잡고, 대화와 어구도 창의성을 살려 실감나게 고치는 등 여생을 판소리연구에 바쳐 판소리 사설문학을 이루었다. 그의 작품에는 서민적인 해학과 사실성이 넘쳐흐른다.

김성수[편집]

金性洙 (1891~1955)

정치가·교육자·언론인. 호는 인촌(仁村). 고창에서 김인후의 12대 손인 김경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 사설 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송진우·백관수 등과 사귀었고, 18세 때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세계를 두루 돌아보고 귀국하였다.그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인재의 양성’ ‘산업진흥에 의한 민족자본의 육성’, ‘언론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 1915년 경성방직회사를 설립했으며,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하였다. 또한 1932년에는 현재의 고려대학교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는 한편, 우리 문화재가 외국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다.광복 후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고 1950년 제2대 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부안군[편집]

부안의 상징물[편집]

扶安-象徵物

부안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부안의 자연[편집]

-自然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은 형태로 황해에 불쑥 나와 있는 변산반도에 위치하는데 군의 남서부는 변산·응봉·보안·갑남 등의 여러 산봉우리가 솟아 승지를 이룬다. 이 곳은 한국 8승의 하나로 유명하다.변산은 저항력이 강한 반암이 남아서 된 산괴이다. 해안은 백사장이며 동북부는 차츰 낮아져 평야로 되고, 그 끝에 동진강이 흘러 김제 평야와 경계한다. 면적 493.53㎢, 인구 7만 6,072명(2001.12)이다.

기후[편집]

남쪽 해안에 위치한 까닭에 온난하다. 연평균 기온 12.2

, 1월 평균 -1.7

, 8월 평균 25.6

, 연평균 강수량 1,250㎜이다.

부안의 연혁[편집]

-沿革

부령현(扶寧縣)과 보안현(保安縣)을 합쳤는데 부령현은 백제의 개화현(皆火縣:일명 戒發縣)으로서 신라 경덕왕 때 부령으로 고쳐서 고부군(古阜郡)에 속하였다. 고려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보안현은 백제의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희안(喜安)으로 고쳐서 고부군에 예속시켰다가 고려 때 보안으로 개명하였다. 1416년 두 현을 합쳐 부안으로 개명하고 다음 해 흥덕진(興德鎭)을 이곳에 옮겨 부안진이라 하였다. 고종 33년(1896) 군으로 되고, 부령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부안읍으로 되고, 1983년 진서·계화 출장소가 면으로 승격하였다. 1읍(부안), 12면(주산·동진·행안·계화·보안·산내·진서·백산·상서·하서·줄포·위도)을 관할하고 있다.

부안의 산업·교통[편집]

-産業·交通

군의 절반을 변산산지가 차지하고 있지만 농경지가 넓다. 특히 논이 많아 미맥이 많이 생산되며 콩·누에고치·담배·채소·고구마 등도 재배되고 있다. 바다에 면하여 조기·도미·새우·갈치·조개 등이 잡힌다. 곰소만 연안에는 갯벌이 넓게 발달해 간척지 조성과 천일제염과 양식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부근에는 관광자원이 풍부하다.도로는 부안·줄포 등지에서 각지에 연락되며 김제∼고창간의 국도와 변산반도 해안을 따라 국도가 통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와의 교통은 아직 불편하다.

특산물[편집]

쌀·동충하초·누에와 홍화·송이버섯·동진감자·백합·바지락·쭈꾸미·전어·개암죽염·변산팔선주·부안타조 등이 유명하다.

동진강 유역 종합개발[편집]

東津江流域綜合開發

전주를 비롯하여 완주·정읍·고창·부안·김제 일대 100여 ㎢ 의 면적을 개발하거나 조림 또는 사방(砂防)사업을 하여 식량을 증산하고, 영세농가를 입주시키려는 사업이다. 동진강 도수로(導水路)는 정읍·부안 일대의 한해 상습지와 계화도 간척지에 풍부한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부안읍[편집]

扶安邑

군청 소재지, 호남평야 서남부를 차지하여 농산물의 집산지이고 김제·신태인·정읍·고창간에 자동차도로가 통한다. 부근에는 동진수리조합이 있다. 부근에는 내변산과 외변산이 있는데 외변산인 바다에는 해안선을 따라 변산 해수욕장·채석강·적벽강이 있으며, 내변산에는 월명암·내소사·직소폭포·개암사 등 관광자원이 많다.

내소사 대웅보전[편집]

來蘇寺大雄寶殿

보물 제291호.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소재.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가 이곳에 절을 세우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 하였는데 그 후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아 오던 중 조선 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가 중건했고, 고종 2년 관해스님이 중창했다.특히 대웅전은 보물 제291호로 다포계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된 불전으로 전면 3칸은 개방되어 꽃살무늬를 조각한 문짝을 달았는데 이들은 모두 정교한 공예품들이다.공포는 내 5출목, 외 3출목으로 화려하게 결구되었으며 외부로 빠져 나온 각 제공(諸工)의 쇠서는 겹쳐져 매우 장식적이다. 내부는 제공의 뒤 뿌리를 일일이 연봉형(蓮峯形)으로 새겨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단청도 매우 장엄한 금단청으로 채색하였다. 추녀 아래의 귀한대와 내부 충량머리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함을 더해 주고 있다.

내소사 영산회괘불탱화[편집]

來蘇寺靈山會掛佛幀畵

보물 제1268호.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소재. 내소사 영사회괘불탱화는 숙종 26년(1700)에 장 10.5m

폭 8.17m 크기로 제작되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각 존상의 명문이 있는 입불형태로 날씬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체구와 화려한 옷의 문양, 채색 등이 수준 높은 영상회괘불탱화이다.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괘불탱화는 거의가 조선 후기(1622~1892)에 제작되었으며 크게 영산회상도와 보살상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되는데 대부분 영산회상도이며, 내소사의 괘불탱화도 영산회상도이다.

내소사 고려동종[편집]

來蘇寺高麗銅鐘

보물 제277호.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소재. 이 동종은 고려 고종 9년(1222)에 내변산에 소재한 청림사에서 제작되었으나 청림사가 폐사된 후 오랫동안 매몰되었다가 조선 철종 4년(1853) 내소사에 옮겨진 것으로 전형적인 고려 후기의 동종이다.종의 높이는 1.03m, 구경 0.67m의 범종으로 종신에는 이중여의 두문의 입상화문대와 화려한 문란당초문의 상·하대가 있고, 당초문의 유곽 아래에는 4개의 중판연화문이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매우 균형있는 모습이다. 또한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양각된 삼존상이 있는데 두 뺨에 볼록한 선정인의 본존은 연화좌 위에 앉아 있고 좌·우협시상은 입상이다.이들 위에는 운미가 길게 솟아 있고 그 위에는 장식을 흩날리는 보개가 있어 고려시대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는 장엄하고 미려한 동종이다.

법화경절본사본[편집]

法華經絶本寫本

보물 제278호.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소재.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 조선 태종 15년(1415) 이씨 부인이 그의 양인 「유근」의 명복을 추원하기 위하여 1자 1배(一字一拜)의 지극한 정성으로 묘법연화경을 필사하여 7권 7책으로 엮은 습본이다.각 권의 길이 36.2cm, 폭 14cm 권당 52면으로서 상·하 변획선이나 절면누선이 없이 양면에 6행씩 필사해 간 것인데 행당 문자수는 17~19자로 일정치 않다. 표지는 감지에 금니를 사용하여 당초문대의 구획내에 종으로 4개의 연화문을 그리고 중앙에 태선의 방구간에 「妙法蓮花經券弟一」 등으로 책명을 금서하고 간지에는 금니로 연화문을 그리는 등 일본 경본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필사한 연대(태종 15년, 1415년, 永樂之未)가 명확하므로 사경류의 연대식별에 중요자료가 되고 있고, 고려를 벗어나 조선 초로 내려 왔다 하더라도 이렇게 완전하게 보존된 것으로는 국내 일품이다.서체는 고려 말기의 유려화사한 맛이 적고 후중건실한 서풍으로 시종일관 하였는데 자체는 멀리 당대 이래의 사경의 맛을 은은히 간직하고 있어 신심어린 정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개암사[편집]

開巖寺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변산(邊山) 기슭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634년에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676년에는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이르러 우금암(禹金巖) 밑의 굴 속에 머물면서 중수하였다. 1314년 원감국사(圓鑑國師)는 조계산 송광사에서 이곳 원효방(元曉房:우금굴)으로 와서 지금의 자리에서 절을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특히 뒤의 바위상을 배경으로 한 팔작지붕의 대웅전은 규모에 비해 민흘림으로 된 굵은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그 중 우주는 더욱 굵어 안정감을 주며 공포의 일부 조각이 힘있게 처리되어 장중한 외관을 구성한다. 건물 내·외부의 용두 및 봉황 등의 조각과 불단 위의 화려한 닫집수법은 세련미를 표출하고 있다.전체적으로 개암사 대웅전은 외관이 장중하고 비례적으로 안정되어 있지만 수법과 내부공간은 화려한 장식에 치우쳐 있어 백제의 안정감, 조선 중기의 다포의 장중함, 조선 후기의 장식적인 경향을 모두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암사 영산회괘불탱화[편집]

開巖寺靈山會掛佛幀畵

보물 제1269호.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714 소재. 이 불화는 야외에서 큰 법회나 제를 지낼 때 걸어놓던 괘불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와 제자들을 그린 불화이다. 18세기 전라도지역의 대표적인 화승이었던 의겸스님이 1749년에 제작하였던 것으로 화면의 중앙에 큼직하게 석가모니불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및 두 여래를 배치하였다.인물들은 모두 둥근 얼굴에 다소 살찐 모습으로 밝은 표정을 취하고 있으며, 몸에 걸친 법의와 천의의 화려한 문양장식은 의경화사의 뛰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백산성[편집]

白山城

사적 제407호.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 8의 1외. 동진강 하류의 서안에 위치한 47.4m의 산성.토성의 모습은 지형에 따라 동남에서 서북으로 장축 120m이며, 폭 50~60m의 타원형의 둘레를 두른 테머리식 성책지로서 외곽에 폭 9m~13.5m 회랑을 설치하고, 이 토단위성에 목책을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변 중앙에 복문의 흔적과 그 반대편인 중앙에 남문 흔적이 있다.

부안의 인물[편집]

-人物

고희[편집]

(1560~1615)

부안에서 출생,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탁월한 충절의 공로로 충동정량(忠動貞亮) 호성공신 3등으로 책정되었고 영성군으로 봉작되었으며 18공신맹록에 들었다. 광해군 7년(1615)에 서거하니 나라에서 정2품 자헌대부호조판서를 증직하고 부안 석불산에 예장하였으며 산주위 사방 10리 내의 땅과 바다를 사패지로 정하였고, 특히 부조지전(不眺之典)의 은전을 하사하였다.영성군의 부친 사렴은 아들의 책훈으로 순충보조공신병조판서와 재원군을 증봉하였으며, 아들 홍건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호종한 공로로 호성원종공신과 영원군의 봉작을 받았고, 손자 두황은 영해군을 습작한 4대에 걸쳐 봉군되었다. 그리고 그의 문중 12대 372년간의 유품, 유물 중 고희 영정 3점, 교지 53점, 공신책봉록(한석봉 친필)의 상장식 호패 등 총215점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비둘기, 물고기는 참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