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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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의 상징물[편집]

全羅南道-象徵物

전라남도를 상징하는 꽃은 동백,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 물고기는 참돔이다.

전라남도의 자연[편집]

全羅南道-自然

위치·면적[편집]

전남은 각 변 200㎞로 된 등변삼각형의 구역으로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한다. 북과 동은 육속되어 북은 노령산맥을 경계로 전라북도와 접하고, 동으로는 소백산맥과 섬진강을 경계로 경상남도에 인접해 있다.서와 남은 바다에 면하여 서쪽으로는 황해를 건너 멀리 중국의 산둥성과 대치하고, 남쪽으로는 다도해를 사이에 두고 제주도를 바라보는 해상교통의 요충적 위치로서 일찍부터 해상활동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여 왔다.한편 수리적(數理的) 위치를 보면 동서로는 동경(東經) 127

54

30

(극동, 여천군 돌산읍 백리 동단)에서 125

54

39

(극서 신안군 흑산면 소흑산리 서단) 사이에 있고, 남북으로는 북위(北緯) 33

29

58

(극북,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북단)에 걸쳐 있어 동서 길이는 약 331㎞, 남북 길이는 약 189㎞이다.2002년 12월 현재 총면적은 12,037㎢로 전국 면적의 약 5.5%(남한 면적의 11.9%)에 해당하며, 이 가운데 육지부가 약 73%이고 나머지는 도서부로 되어 있다. 도서부는 전국 도서의 약 61.4%에 해당하는 1,967개(유인도 273, 무인도 1,694)에 달한다.

지질[편집]

지질은 시생대의 화강편마암으로부터 신생대 제4기의 충적층(沖積層)에 이르는 각 암층이 조밀하게 노출되어 매우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는 화성암에 속한 고기(古期) 심성암층이 많다. 대표적인 암석으로는 화강편마암·석영반암(石英斑岩)·분암(岩) 등이 많고 이들 암석층에는 금·은·동 및 무연탄 등의 유용광물이 함유되어 있다. 또 이들 암석층의 대체적인 분포를 보면 본도 동남부 소백 산지는 주로 화강편마암계가 분포되고, 서남부 영산강 유역에는 침식에 약한 화강암이 널리 분포하고 있다. 또한 노령산맥 서사면으로부터 해남 반도에 걸친 지역에는 점판암·사암·혈암 등의 수성암층이 분포되어 있고, 영산강과 섬진강 지역에는 국부적으로 제4기의 충적층이 점재한다.

지형[편집]

전남의 지세를 지배하는 산맥은 중국방향(中國方向)에 속한 북서부의 노령산맥과 북동부의 소백산맥의 두 산맥이다. 이들의 지맥(支脈)은 도내 여러 산의 주봉을 형성하면서 황해와 남해로 각각 가라앉아 수많은 반도·만·섬을 이루어 이른바 다도해의 절경을 이루어 놓았다.노령산맥에서 발원하는 영산강(115.8㎞) 유역에는 나주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유수의 곡창 전남평야를 펼쳤고, 소백산맥에서 발원하는 섬진강(212㎞) 유역에는 곡성·구례를 중심으로 산간평야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본도의 지형은 남서쪽으로 낮고 북동쪽으로 다소 높으나 산지는 거의 오랜 침식에 견디어 남은 잔구(殘丘)와 같은 것으로서, 해남의 두륜산, 영암의 월출산, 목포의 유달산 및 광주의 무등산 등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며 또한 본도의 명산들이다.

기후[편집]

전남은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근해에는 연중 난류가 흐르기 때문에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온화한 기후를 나타낸다. 가장 추운 달인 1월 평균 기온은 남해안에서 0

이고, 북동부 내륙에서도 -2

내외에 불과하다. 연평균 기온도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 9 10 인데 대해 본도에서는 거의 전역에서 13

내외를 기록한다.연강수량은 1,200㎜

1,400㎜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많은 강수량의 지역에 속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체로 본도 서부인 영산강 유역은 1,200㎜ 이하를 보이는데 대해 동부인 섬진강 유역은 1,400㎜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섬진강 하구 부근은 우리나라 3대 다우지역에 속한다. 이러한 강수 현상은 6월 하순부터 8·9월경으로 이 기간에 연 강수량의 50

65%가 내리며 우기에는 집중호우 형식으로 쏟아지는 반면 때때로 한발이 나타나기도 한다.또 노령 이서의 서해안에는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리는 것도 이 지방 기후의 특색의 하나이다. 목포를 중심으로 한 남서해안 지방에서는 한난류 교차 시기인 봄철에 짙은 안개가 자주 끼어 연안항로와 어로작업에 지장을 주는 경우도 많다.

섬진강[편집]

蟾津江

우리나라에서 9번째로 긴 강으로서 길이 212㎞, 유역면적 4,897㎢, 가항로(可航路) 39㎞에 이른다. 원류는 전북 진안의 마이산(馬耳山)에서 발원, 남류하면서 소백·노령산맥의 여러 산간곡지로부터 흘러내리는 지류를 모아 광양만에 주입한다. 이 강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흐르기 때문에 강이 좁고 급류가 되고 물속에 바위가 많아 주행(舟行)에는 불편하다. 그러나 근년에는 이러한 지형적 특색을 이용하여 운암·칠보·보성 등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유역변경식 댐을 축조하여 전원개발·관계·간척·관광 등 다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강을 따라 대략 동남 방향으로 임실·남원·순창·곡성·구례 등 저평한 지역이 분지상으로 발달되어 있다.

영산강[편집]

榮山江

한국 4대강의 하나로서의 영산강은 그 유역면적이 2,798㎢에다 길이 115.8㎞, 가항로 48㎞에 이른다. 이 강의 원류는 담양군 용면 추월산(秋月山)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흘러 광주의 극락강(極樂江)에 이르러서는 장성의 백암산(白岩山)에서 흘러오는 황룡강(黃龍江)을 합하고 나주에서는 다시 지석강과 합류하여 목포 앞바다로 흘러간다. 유역에는 한국 유수의 곡창 전남평야가 전개되고, 주운(舟運)은 영산포까지 편하다. 나주까지 조수가 미치며 영산포 이하의 하류에는 홍수 때 범람·침수하는 일이 많았다.강유역 일대는 농경지의 개발로 식생이 적어 수원의 함량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농업용수가 부족되고 조금만 가물어도 한해를 입어 왔다. 정부는 4대강 유역개발의 일환으로 이 지역의 개발에 착수하여 이미 그 제1단계 사업인 장성·담양·광주·나주 등 4개 댐을 완성하였다. 이로써 이 지역은 한해와 홍수를 모르는 전천후 농토로 바뀌어 명실공히 전국 곡창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전남평야[편집]

全南平野

전남의 거의 서북반부를 차지한 영산강 유역으로서 광주·목포 두 시를 비롯하여 무안·영암·함평·담양·장성·화순·영광·나주를 포함하는데, 그 넓이가 5,210㎢에 달하여 본도 총면적의 44%를 차지한다.서북쪽 장성·영광·함평 일대에는 노령산맥의 여파가 미치고, 또 동북부의 화순지방은 소백산맥 북쪽 산록으로 모두 구릉성 산지가 많다. 이 두 산맥 사이를 영산강이 서남방향으로 흐르며 펼쳐 놓은 광대한 평야가 이른바 전남평야이다. 그 중 나주를 중심으로 한 송정·학교 일대가 가장 저평하여 이 지역을 특히 나주평야라고 부른다. 이 전남평야는 호남평야와 같이 화강암지대가 오랜 침식으로 준평원(準平原)화한 위에 충적지가 쌓여 이루어진 피복평야(被覆平野)라 할 수 있다.

전라남도의 연혁[편집]

-沿革

전남은 마한의 옛 땅으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여 무진주(武珍州)라 불리었다. 삼국통일 후 신라 때는 무주(武州, 686)라 하여 통치되다가 신라 말기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甄萱)이 무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라 하였다. 고려 성종 14년(885)에 이르러 전국을 10도로 구획할 때 본도를 해양도(海陽道)라 하다 현종 9년(1018)에는 다시 강남도(江南道, 현 전북)와 병합하여 전라도(全羅道)라 개칭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오늘의 전라도 명칭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같은 판도를 전라도·광남도(光南道)·전광도(全光道)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다가 고종 23년(1886)에 남북으로 분리하여 비로소 전라남도로 되었고 도청을 광주에 두었다. 그 후 별다른 변동이 없다가 광복 후 1946년에는 제주도가 도로 승격, 분리되었고 1949년에는 여수와 순천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여수군을 여천군·순천군을 승주군으로 개칭했다.1969년 무안군의 도서부가 분리되어 신안군이 신설되었으며, 1976년에는 여천군 삼일면 평창리에 도직할 여천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2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합쳐 금성시가 되었다. 1985년에는 쌍암면이 승천읍으로 홍승면이 홍농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에는 도직할 여천 출장소가 시로 승격되었으며, 금성시의 명칭을 주민들의 여망에 따라 나주시로 변경하고, 광양지구 출장소를 설치했다. 같은 해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전라남도에서 분리되었다. 1988년 송정시와 광산군이 광주에 편입되었다. 1989년 광양출장소가 광양시가 되고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승주군이 순천시로, 나주군이 나주시로, 1998년 4월 여수시에 여천시와 여천군이 통합되었다. 2004년 1월 현재 행정구역은 5시 17군 31읍 19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라남도의 인구[편집]

-人口

분포[편집]

2002년 12월 현재 205만9,621명이다. 이것은 남한 총인구의 4.9%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시·도별로는 서울·경기·경남·경북에 이어 5위를 차지한다. 한편 인구밀도는 1㎢당 182명으로서 전국의 471명보다 월등히 낮아 이 지역의 개발이 다른 지역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군별 분포를 보면 전국 평균을 상회한 지역은 목포·여수·여천 3개 시이며, 순천과 광양시가 200명 이상의 인구밀도를 보일 뿐 그 이외는 모두 200명 이하의 낮은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다.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지역은 곡성군으로 75명이고 그 다음이 81명인 구례군으로 동부 산간지역이 대체로 낮은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다.

추이·이동[편집]

전남 인구는 1949년 304.2만이던 것이 1975년에는 398.3만 명으로 그 동안 26년간에 94.1만이 증가하여 연평균 1.2%로 증가한 셈이 된다. 그 간의 추세를 보면 광복 후 한국전쟁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증가를 거듭하여 오다가 1966년을 고비로 그 이후는 인구의 자연 증가분도 충당하지 못하고 그 절대수마저 감소하여 전국 시·도 중 가장 격심한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다.1960

1966년까지는 증가실수 약 49.7만에 연평균 2.2%로 증가를 하였다. 그러나 1970년에 와서는 감소수가 -4.5만에 연평균 -0.3%로 급격한 감소를 보이고 다시 1975년에 와서도 감소수 -1.2만에 연 감소율 -0.1%를 나타냈다. 이 같은 현상은 1960년 이래 급속한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농촌인구의 대거 이농(離農) 현상에서 온 것이다.

인구 구성[편집]

성별 인구 구성은 2002년 12월 총인구 205만 명 중 남자가 102만 4,613명이고 여자가 103만 5,008명이다. 한편 2000년 현재 경제활동 인구는 15세 이상 106만 명이며 취업인구는 102만 명이다.

전라남도의 산업[편집]

全羅南道-産業

농목업[편집]

전남 지역은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로 쌀과 쌀보리의 생산량이 전국에서 가장 많다.2002년 12월 현재 농가는 20만 8,190호이며 농업인구는 52만 2,290명이다. 경지면적은 논 32만 8,599㏊로 이중 논은 22만 771㏊, 밭은 10만 7,828㏊이며 호당 경지면적은 1.6㏊이다. 2002년 쌀 생산량은 91만 9,076M/T으로 전국의 18.8%에 해당되며, 보리생산량은 12만 2,540M/T을 생산했다.축산업은 아직 농가의 부업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차츰 기업화되어 가고 있어 곳곳에 낙농 목장과 비육우 단지가 조성되었다. 한우는 고흥·해남·담양·나주 등지에서, 젖소는 동광양·나주 등 도시 주변에서, 돼지는 무안·나주 등에서, 꿀벌은 구례·담양·해남 일원 등 많은 곳에서 사육된다.

수산업[편집]

전국에서 가장 긴 해안선(2,212㎞, 섬을 포함하면 6,469㎞)과 많은 섬(유인도 273, 무인도 1,694개)을 가지고 있고, 가장 넓은 대륙붕 해역 및 난류와 연안수 냉수대와의 조경·조목도 잘 이루어져 있어 황금어장을 이룬다. 또 간석지가 발달하여 어로와 양식업·천일제염업이 모두 발달하였다.도내 어업 가구수는 2만 3,281호, 어업 종사자수는 6만 6,111명으로 총인구의 6%를 차지하며, 전국 어업 종사자수의 34.4%로 1위이다.주요 어획어류는 쥐치·갈치·멸치·붕장어·정어리·조기·밴댕이 등이며 주요 어항은 여수·목포·도양·농화·강진·흑산도·거문도 등이다. 어선은 동력선 3만 5,484척, 무동력선 1,144척 등 총 3만 6,628척으로 전국 어선의 39%를 차지하고 있다.

임업[편집]

임야면적은 69만 6,916㏊(2002.12)로서 전국대비 10.9%이다. 이 중 사유림이 60만 51㏊로서 대부분을 점하고 있으며 국유림은 6만 5,718㏊이다. 전면적 중성림지는 90%를 차지하고 나머지 9.7%는 무입목지로 되고 있다. 전면적 중 성림지는 90%를 차지하고 나머지 9.7%는 무입목지로 되고 있다. 성림지 임상은 침엽수림 68%, 활엽수림 21%, 혼유림 10%, 죽림이 1%로 되어 있다. 산림 축적량은 1㏊당 2.7㎡로서 전국 최하위에 속한다. 이렇듯 축적량이 적은 것은 해방 후의 여순(麗順)사건과 한국전쟁 등에 따른 남벌의 결과였다.

광업·동력[편집]

전남의 지하자원은 빈약한 편이나 금을 비롯 은·구리·규사 및 무연탄에 이르기까지 30여 종에 달한다. 광물생산액으로 본 생산순위는 납석(완도), 석회석(장성), 고령토(해남), 규석(강진), 은(나주·곡성), 규사(해남·신안), 금(나주·곡성)으로 되어 있다.전남의 동력은 보성강 상류의 소규모의 유역변경식 발전소가 유일의 수력이고, 여타는 모두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이다. 그 중에서도 국내 총발전량의 26%를 점하는 호남화력·여수화력이 있다.

공업[편집]

풍부한 농수산 자원, 저렴한 노동력, 편리한 교통, 온난 다습한 기후, 풍부한 공업용수 등의 좋은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공업이 발흥했으며, 최근에는 서해안 시대를 맞이하여 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국가산업단지 3개 소 1,168만 4,000평, 지방공단 11개 소 552만 평 등 총 1,720만 4,000평에 352개 업체가 입주했고, 고용인원 3만 4,440명, 생산실적 11조 1,097억 원이다.제조업체는 대기업 43, 중소기업 3,559개 업체 등 총 3,602개 업체가 있다.여천 공업단지는 총규모 57만 2천평의 공업용지로 여기에 이미 건설된 LG정유·여수화력·호남화력 등 3개의 기존공장과 새로 완공된 대성 메탄올, 제7비료·LG단지를 비롯 수십여 개의 대규모 공장이 들어섰고 공업용수 시설, 주택 단지, 진입도로, 철도시설 등 각종 시설이 완공되었다. 하루 25만t의 공업용수와 인근 도시에 일부 생활용수도 공급하고 있다.

전라남도의 교통[편집]

全羅南道-交通

전남은 개발의 역사가 길고 험준한 산지가 비교적 적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철도는 총연장 432㎞에 이르고 서부에 호남선(1941년 개통), 동부에 전라선(1938년 개통), 그리고 남부에 경남을 잇는 경전선(1967년 개통)의 3선이 근간을 이룬다. 철도의 수송 분담률은 근래 고속도로의 개통과 자동차의 증차, 항만 시설의 확장으로 차차 그 비중이 낮아지고 있다. 도로는 고속도로 3개 노선 178.3㎞에 포장률 100%, 시군도 4,255km, 지방도 2,084.3km 등 총 8,005.3km로 포장률은 73.4%다. 차량 보유대수는 승용차 30만 9,444대, 승합차 5만 39대, 화물차 16만 9,103대, 특수자동차 3,736대 등 총 53만 2,322대이다(2002.12).해운업은 목포·여수를 기지로 하여 다도해에 산재하여 있는 수많은 도서와 육지를 연결하고 있으며, 특히 목포는 제주와, 여수는 부산을 잇는 항로의 주요 기지이다. 근년에는 완도와 크게 활기를 띠고 있다. 또 항공교통으로서는 광주공항을 기점으로 서울·부산·대구 및 제주와 연락하고, 목포와 여수에도 공항이 개설되었다.

전라남도의 관광[편집]

全羅南道-觀光

한국 최초로 지정받은 지리산 국립공원(1967년 지정)과 한국 유일의 해상공원인 한려 해상공원(1968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본도 440만 도민의 상징적인 산형인 무등산 도립공원(1964년 지정)이 있으며 이 밖에도 노적봉(露積峰)으로 유명한 목포의 유달산, 한국 팔경(八景)의 하나인 화순 적벽, 서해안의 해금강이라 불리우는 홍도 등 수많은 절경을 들 수 있다. 또 지정문화재를 대표하는 사찰로 전국 사찰 31개 본산 중 장성 백양사, 순천 송광사, 순천 선암사, 구례 화엄사, 해남 대흥사 등 5개 본산을 비롯한 이름 높은 사찰도 많다.

목포시[편집]

목포의 상징물[편집]

木浦-象徵物

목포시를 상징하는 꽃은 백목련, 나무는 비파, 새는 학이다.

목포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남서쪽 무안반도(務安半島)의 첨단인 영산강 하류에 자리잡은 항구도시로서 앞은 다도해를 넘어 남서해를 바라보고 있으며 뒤로는 전남평야를 지고 있는 호남지방의 문호이다. 유달산(儒達山)을 등지고 시가지가 있으므로 북풍을 막아주며,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영암반도·화원반도 및 고하도 등이 시를 둘러싸서 외해의 풍파를 막아주어 태풍 때일지라도 만내는 물결이 일지 않는 천연적 양항이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곡창 남서부를 배후지로 하고 앞에 1,747개나 되는 다도해(多島海)의 좋은 어장을 끼고 있어 항구 발달에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대외 무역항으로서도 좋은 위치에 있다.

기후[편집]

기후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온난하나, 많은 섬에 옹위되어 해양의 영향이 적으며, 겨울에는 북서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내륙적인 경향이 짙다. 연평균 기온 13.3

, 1월 평균 -0.5

, 8월 평균 27.2

, 최고 기온 37

(1924. 8. 18), 최저 기온 -14.3

(1915. 1. 3), 연평균 강수량 1,142㎜이다.

목포의 연혁[편집]

-沿革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勿阿兮)군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안군으로, 고려시대에는 물량군(勿良郡), 또는 무안군으로 불렸다.목포라는 이름은 '고려사'에서 처음 나오는데, 땅이름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목포(木浦)라고 불렀다고 하고, 목화가 많이 난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으며, 서해로부터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 하여 목포라고 불렀다고 하는 등의 주장이 있으나 이는 모두 근거가 없는 내용이다.조선 세종 21년(1439)에는 목포만호가 설치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목포 고하도에 이순신 장군이 친히 수군진을 설치하여 108일 동안 머물렀고,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은 개항하였다. 그 후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던 해의 10월 1일 목포부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1932년에는 무안군 일부지역을 더하여 8.6km의 도시면적에 인구 6만의 전국 6대 도시의 하나로 성장하여 一墨(김), 三白(면화, 쌀, 누에고치)의 집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1949년 8월 15일 목포부를 비로소 목포시로 고쳐 부르게 된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신외항무안 망운국제공항건설 등 SOC 투자촉진과 대불·삼호공단조성으로 산업기반시설이 확충되었다.

유달산[편집]

儒達山

높이 228m의 이 산은 시가의 북서쪽에 솟아 있으며 옛날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는데 지금은 공원으로 되어 있다. 산은 거의 전체가 바위로 되어 있어 그 형상이 노적(露積)과 같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우리의 군량이 풍부함을 적에게 과시하기 위하여 산봉우리에다 짚과 섶으로 둘러싸서 노적을 꾸며 놓았다. 멀리서 이 큰 노적을 보고 왜군은 겁에 질리어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 하여 일명 노적봉(露積峰)이라고도 한다. 이 산에 오르면 다도해의 섬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고하도[편집]

高下島

목포 앞, 영산강 하구에 길게 가로놓인 해발 34.4m, 면적 1.66㎢의 작은 섬이다. 기후조건이 면화재배에 적합하여 우리나라 육지면의 시작지로서 그 재배가 성할 뿐더러 다도해에 위치하여 수산업이 또한 활발하다. 이 섬은 화원반도와 더불어 목포항의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없어서는 안 될 섬이다. 섬에는 이순신 장군 대첩비가 있다.

삼학도[편집]

三鶴島

이 섬은 3개의 작은 섬인데 1955년부터 육계도(陸繫島)화하여, 이 섬 안벽에 1.3만t급의 대형선박이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어 무역과 공업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다. 이 섬은 옛날에 만호청(万戶廳) 전관(專管)의 채신지(採薪地)로서, 일반인에게는 출입금지구역이었다.

목포의 산업[편집]

-産業

주요 산업은 상업과 서비스업으로 전체산업의 약 70%를 차지한다. 일제강점기에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곡물과 어물 시장이 활발했으나, 8·15광복 이후 일본·중국과의 무역이 중단되면서 상업활동이 침체되었다. 목포 어시장을 중심으로 갈치·가자미·고등어·명치 따위의 수산물이 거래된다. 농산물은 주로 쌀·무·배추·고추·마늘을 재배한다. 황해 연안에서는 넓은 갯벌을 이용해 굴·대합 따위를 양식하며, 천일 제염업도 이루어진다. 예로부터 세발낙지와 홍어로 잘 알려져 있으나, 세발낙지는 영산강 하구둑과 영암방조제의 건설로 생산량이 많이 줄어들었다.석현공단과 산정농공단지에 다수의 중소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해륙교통이 편리하고 농수산물이 풍부하여 이를 원료로 하는 공업이 성하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음식료품·섬유·고무·화학·기계·금속·도자기·제빙·내화연와 제조 및 조선·제망 등 업체이다. 특히 삼학도가 육계도화됨으로써 이 지역에 공업단지의 조성이 진행되었다.

특산물[편집]

도자기·젓갈류·건해산물·김·홍어·세발낙지 등이 유명하다.

목포의 교통·관광[편집]

-交通·觀光

철도는 호남선이 일찍부터 통하고 1897년 개항과 더불어 한반도 남서의 문호 구실을 하여 왔으며 현재도 하고 있다. 4차선 고속도로로 확장된 광주∼목포간의 도로와 목포와 서울을 연결하는 국도가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종착지로서 건설되어 있어 교통은 더욱 편리해질 전망이다. 목포

제주간을 포함한 18개 항로에 정기여객선이 다니며, 연안 항로의 기항지로서 낙도 보조 항로가 있다.시내에는 임진왜란 때 노적봉(露積峰)이라고도 부른 유달산을 비롯하여 소나무 숲이 우거져 시민들에게 좋은 유원지가 되고 있는 고하도(高下島), 삼학도, 목포대학교, 그리고 유달 해수욕장·다도해 해수욕장 등이 있다.

노적봉[편집]

露積峰

목포시 대의동 2가 1-120번지. 유달산 등구 표지석에서 5분여를 걸어 오르면 유달산의 정문격인 등구의 좌편에 큰바위 봉우리인 노적봉이 보인다. 해발 60미터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적 설화가 깃든 호국사적지이다.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소수의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로 가장하여 우리의 군사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이 봉우리를 가리켜 노적봉이라 부른다고 전하며, 영산강에 횟가루를 뿌려 쌀양식이 많은 듯이 보이게 한 것과 진도의 강강술래, 울돌목의 쇠줄 등도 모두 이런 전술의 일환으로 이곳은 장군의 뛰어난 전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오포대[편집]

午砲臺

유달산 입구의 이충무공동상 남쪽, 대학루 옆에 있다. 처음의 포는 조선식 선입포로 조선 현종 10년(1671) 때 제작되었으며 높이 5자, 구경 3치 5푼, 중량 733근으로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모되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와 천기산에서 시험발포를 했는데, 발포 때마다 뒤로 밀려가는 구식이었다.1913년 가격 160원에 일본식 야포로 대치되었고, 이전의 조선식대포는 일제의 송도신사에 보관하던 중 일제 말에 태평양 전쟁을 위해 일본정부가 가져가 버렸다. 예전에 이 오포는 포탄없이 화약만 넣어 쏘아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리는 신호로서 기능하였는데 전쟁도구를 생활 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이 특이하다.현재 오포는 모형으로 전시되고 있으며 당시의 오포대는 유달산공원의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어 유달산을 찾는 관광객들과 지방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이충무공기념비[편집]

李忠武公記念碑

지방유형문화재 제39호. 고하도는 목포시내에서 약 2km 떨어진 남서쪽에 위치한 반달모양의 섬으로 목포시의 남쪽 해안을 감싸안은 듯 서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북쪽비탈은 바다 건너 유달산과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영산강 하구둑과 목포공항을 마주하고 있다.고하도는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에 의해 전략지로 활용되어 침투를 막아낸 곳으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충무공기념비가 서 있다. 1722년 충무공의 5대손인 이봉산이 건립하고 남구만이 비문을 짓고 조태구가 글을 쓴 것이며, 비신에는 일제 때 일본 군인이 쏜 총탄 자국이 있으나 거의 완전한 상태이다. 또한 이 지역을 지방기념물 제10호 이충무공 유적지로 지정하여 충무공의 뜻을 기리고 있다.충무공은 명량승첩 후 1597년 10월 29일 이곳으로 와 진을 치고 그 이듬해 2월 17일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108일간을 주둔하며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였다.목포의 유달산과 함께 충무공의 전설적 일화와 호국 얼이 서린 섬이며 울돌목과 제주도로 빠진 해로이기도 한 이곳은 고화도·보화도·비노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목포 사람들은 이충무공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매해 4월 28일이면 이곳에서 탄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목포의 인물[편집]

-人物

이매방[편집]

(1927~

)

살풀이춤 예능보유자. 목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누님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매만지며 거울 앞에서 춤추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7세 되던 해에 목포 권번(券番)의 권번장 함국향 씨가 춤 학습을 권유하였다. 당시 이매방의 할아버지 이대조(李大組) 명인은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쳤던 권번 선생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매방의 춤과 북놀이 사교습은 8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 후 이매방은 한번도 한눈 팔지 않고 오직 외길 춤인생을 살아오면서 이 시대에 전무후무한 명무(名舞)로 평가받고 있다.현재 이매방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이다. 또 그의 제자들이 1990년에 결성한 ‘우봉전통춤보존회’의 대표직을 맡고 있으며,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1984년 10월 20일에 전통예술의 보급과 선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결과로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과 1995년 성옥문화상 문예부분 대상을 받은 바 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공로장과 감사장 등을 국내외에서 받음으로써 하늘이 내린 춤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우리 전통춤의 발전을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다.

이난영[편집]

(1917~1969)

본명 옥례. 10살 무렵, 아버지의 술주정과 가난에 시달리다 못한 어머니가 제주도로 가정부 살이를 떠나버린 후 오빠가 다니는 솜공장(조선 면화공장)의 일을 거들었다. 그 후 북교초등학교 4학년 때에 어머니가 계신 제주도로 가게 되어 학교를 중퇴했다.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에서 살던 중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의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은 집주인이 그녀를 소위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되기 전 나와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단원으로 채용되었다. 극단 단원으로 일본공연을 갔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우연히 OK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되어 목포출신 문일석 작사인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의 한이 서린 가사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4남 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허건[편집]

(1907~1987)

남종화의 대가. 호는 남농.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서 조선 헌종 때 궁중화가였으며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나 ‘시·서·화’ 삼정이라 불리던 소치 허유(또는 허련) 선생의 손자요, 화가인 미산 허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927년 목포 상업전수학원을 졸업하고 부친으로부터 익힌 그림이 제9회 선전(오늘날의 국전에 해당)에서부터 23회까지 연속 입선하고 1944년에는 선전특선 및 총독상을 수상하였으며, 해방 후 1955년에는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이 되었다.그의 이러한 예술적 활동이 인정을 받아 전남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예술원활동이 인정을 받았다.9년 동안을 예총 목포지부장을 지냈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할아버지 소치, 아버지 미산을 중심으로 귀한 고미술품과 수석들을 아낌없이 목포시에 기증하고 남농기념관을 지어 후배들로 하여금 그의 예술세계를 살펴보고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허형[편집]

(1861~1938)

목포 최초의 화가. 호는 미산(米山). 미산이란 호는 소치의 장남인 은의 호를 이어받은 것이다. 따라서 형인 은(殷)을 대미산, 아우인 형(瀅)을 소미산이라 부른다. 출생지는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이지만 1925년 목포로 이주했다. 당시 바로 최초의 화가였기 때문에 그를 목포 최초의 화가라 한다.소미산보다 장남 대미산을 지극히 사랑했던 소치는 소미산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소치와 외출을 하였다가 화실로 돌아와 보니 묵도란이 제법 그려져 있고 그것이 형(瀅)이 그린 것임을 알고 크게 놀라 이후부터 형에게도 그림을 가르치게 되었고 호도 미산을 물려받게 했다고 한다.소치는 늘 미산더러 ‘작대기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아버지가 바라는 ‘작대기 산수’를 그리지 못하고 세필산수(細筆山水)에 그쳐버렸다고 한다. 작대기 산수란 ‘선을 대담하게 쭉쭉 그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살림이 궁했기 때문에 잘 팔리는 세필 산수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산수보다 사군자를 더 잘 그렸지만 소치의 높은 화격(畵格)을 이어받지 못했고 다만 60세 무렵부터 77세에 별세하기 전까지 20년 사이에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차남수[편집]

(1903~1990)

우리나라 외과 전문의 면허 제1호로 1941년부터 199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간을 오직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바친 의사.1903년 무안군 삼향면 용포리에서 차성술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건너가 규슈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 귀국하여 대구의학전문학교 교수, 제주 도립병원, 안동 도립병원, 국립 소록도 병원, 국립 부산 재활원 등에서 원장으로 일하다 1941년 현 차남수 병원이 자리한 목포시 대안동 12번지에서 병원을 차리고 ‘의술은 인술이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 아래 환자들을 정성으로 치료해 준 사랑의 실천가였다.

박화성[편집]

(1904~1988)

여류작가. 한국 현대문학의 제1세대로서 여성 최초의 장편작가. 목포 정명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숙명여고보를 마친 뒤, 천안공립보통학교, 아산공립보통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문학공부를 하여 21세 때 1925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 문단지에 「추석전야」로 등단하였다. 그 후 다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신학년제 4년을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여대 영문학부 3년을 수료한 뒤 귀국하여 문학활동을 계속하던 중 1932년 동화 「엿단지」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을 기회로 37년 일본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항거하여 글쓰는 일을 잠시 중단할 때까지 「하수도 공사」, 「홍수 전후」 등 사회성 짙은 소설을 연달아 발표해 당시로서는 이채로운 여류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특히 1934년 대홍수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나주 영산포일대 농민들의 참상을 그린 「조귀」라는 작품을 1935년에 발표하였는데 이 책은 곧 일본어로 옮겨져 후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된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극찬을 받았다.박화성은 1930년,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에 장편 「백화」를 연재하면서부터 장편작가로서의 역량을 보이기 시작해 「고개를 넘으면」, 「사랑」, 「타오르는 별」 등 20여 편의 장편을 남겼다. 1969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위제거 수술 후 5년이라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뒤에도 집필을 계속하여 「달리는 아침에」를 문학지에 싣는 등 작가로서의 무서운 집념과 사명감을 잃지 않았다.이러한 뛰어난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문화훈장 및 한국문학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 회장으로서 국제펜클럽 세계 연차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제1회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목포의 시황[편집]

-市況

면적 47㎢, 인구 24만 5,315명(2002.12)이다. 호남의 문호인 목포는 1897년 전까지 만호청(萬戶廳)이 있었다고 한다. 1914년 호남선의 개통 후 급속히 발달하였다. 지형상 만내는 풍파가 일지 않는 천연적 양항이고 넓은 배후지와 다도해의 호어장을 끼고 있어 항구 발달에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1915년 만내의 준설과 축항공사를 하여 간조 때에도 거선이 계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영산강의 유사(流砂)로 말미암아 거선의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어 1955년부터 삼학도를 육계도화하여 1만 3,000t급 대형 선박이 자유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대일 무역상 좋은 위치에 있지만, 8·15 후 무역과 공업의 부진으로 한동안 정체되었으나 삼학도의 육계도화는 무역과 공업 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다.또 어항으로서도 중요하며 수산가공업이 성하다. 시가지는 유달산의 남쪽과 북동쪽 경사면에서 해안에 걸쳐 발달하였다. 역 부근의 남부 및 서남부의 만호동·영해동·동명동·무안동·남교동 일대에 도심을 이루고 있다. 매립공사로 지형이 크게 변했으며 삼학도 매립지에는 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시내에는 시청·법원지청·세관·해무청·수산시험장·방송국·무선전신국·도립병원 외 목포해양대와 목포대(예술대, 사회교육원) 등이 있다.

순천시[편집]

순천의 상징물[편집]

順天-象徵物

순천시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감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순천의 자연[편집]

-自然

시의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소백산맥의 지맥인 백운산맥이 뻗어 있다. 조계산(884m)을 중심으로 모후산(919m), 봉두산(753m), 금전산(682m), 국사봉(526m), 태방산(312m) 등이 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섬진강이 구례군과 경계를 이루며 시의 북부를 흐르고, 보성강이 송광면을 관류하여 흐르다가 시의 경계를 벗어나 섬진강과 합류한다. 이 밖에 동천·옥산천·이사천·석현천 등이 남쪽으로 흐르며, 하류 부근에는 비옥한 충적평야인 순천평야가 펼쳐져 있다. 순천만의 하구에는 간석지가 분포되어 있어 그 곳을 방조제로 막아 많은 간척지를 조성했고, 남쪽은 다도해와 닿아 있다. 한편 보성강에 승주호, 이사천에 승평호와 같은 다목적댐에 의한 호수가 있다.

기후[편집]

남해안 기후구에 속하는 곳으로 온화하고 강수량이 많으며, 해양성 기후의 특징이 강하다. 순천의 연평균기온은 북부산악지대 123

, 남부평야지대 13.9

이며, 1월 평균기온은 1

2

, 8월 평균기온은 26

27

, 연강수량은 1,400

1,500㎜이다.

순천의 연혁[편집]

-沿革

전남 동남부에 있는 시로 면적 907㎢에 인구는 27만 1,636명(2002.12)이다. 동쪽은 광양시·구례군, 서쪽은 화순군·보성군, 북쪽은 곡성군과 접하며, 남쪽은 순천만·광양만과 접해 있다. 본래 마한(馬韓)의 땅으로 백제시대에는 감평군(?平郡),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는 승평군(昇平郡)이라 했다. 고려 성종(成宗) 14년(905)에 승주군(昇州郡)으로 개칭되고, 충선왕(忠宣王) 2년(1010)에 순천부(順天府)가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를 두었다가 고종 32년(1895)에 순천군이 되었다. 1911년 소안면과 장평면이 합쳐져 순천군 순천면이 되었다. 1931년 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다시 1949년 8월에 도사면과 해룡리 일부가 통합되어 순천시로 승격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승주군이 되었다. 1995년 도농 복합시 시책에 따라 승주군과 통합시가 되었으며, 승주읍과 주암, 송광, 낙안, 해룡, 매곡, 풍덕, 대평 등 1읍, 10면, 12개 동을 관할한다.

순천의 산업[편집]

-産業

경지면적은 시 총면적의 20%인 181.1㎢로 논농사의 비율이 높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참깨·마늘 등이며 특히 근교 일대에서는 비닐하우스에 의한 오이·상추·양파·토마토 등을 촉성 재배하여 순천을 비롯한 인근 도시는 물론 서울·부산까지 출하하고 있다. 순천만 연안에서는 소규모의 어패류가 양식되며 이사천과 동천 하류에서는 실뱀장어의 내수면 양식업이 활발하다. 공업은 식품·기계·화학공업 등이 약간 발달되었을 뿐이나 광양종합제철소의 준공과 더불어 여천, 광양을 잇는 배후·연계산업지로서의 기반을 갖추고, 순천공단·제2공단·농공단지 등 총면적 400만 평에 이르는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특산물[편집]

쌀과 오이가 유명하다.

교통과 관광[편집]

交通-觀光

순천시는 일찍부터 영호남의 각종 산물 및 물자의 교역중심지로 교통이 발달하였다. 전라선·경전선 철도가 교차하는 철도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육상교통의 요충지로서 순천과 서울간, 순천과 부산간의 고속국도를 비롯하여 순천을 기점으로 부산·여수·광주·전주·목포로 연결되는 국도가 뻗어 있다. 관광자원으로는 향림사·임청대·팔마비·죽도봉공원 등이 있고, 순천시 인근에는 유명한 송광사, 선암사 등의 고찰이 있다.

승주읍[편집]

昇州邑

전남 순천시 중앙부에 있는 읍. 면적 93.00㎢. 14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1985년 쌍암면이 승주읍으로 승격하였고, 1995년 도농 복합시 시책에 따라 순천시로 통합되었다.

송광사[편집]

松廣寺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 조계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송광사는 합천 해인사(법보사찰), 양산 통도사(불보사찰)와 더불어 한국 삼보사찰로 불리고 있다. 신라 말엽에 혜린대사가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라 부르던 것을 시작으로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사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도, 참선 도량으로 삼은 뒤부터 승보사찰이 되었다.지눌, 진각을 비롯한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에는 외국 승려가 수도하는 국제선원이 있다. 목조문화재가 많은 사찰로 경내에는 약 80여 동의 건물이 있고,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하는 국사전 등의 국보 3점을 비롯하여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 등 보물 13점, 천연기념물인 쌍향수 등 국가문화재 17점과 정혜국사사리합 등 지방문화재 10점을 포함, 모두 27점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승보전과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어 장엄한 기상을 나타낸다.

송광사 목조삼존불감[편집]

松廣寺木造三尊佛龕

국보 제42호. 송광면 신평리 12(송광사) 소재. 높이 13.9cm, 지금 6.9cm. 통일신라시대 때의 작품이다. 불감은 송광사의 16국사 중 제1세이며 수선사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일으켰던 보조국사가 당(唐)으로부터 귀국할 때 지니고 왔다고 한다.목조로 된 전개식 삼면으로 닫으면 원통형이 되고 열면 중앙 반원부에 본존과 좌우 협시보살을 배치하게 되어 있으며, 정교한 기법과 양식은 인도풍 분위기를 풍겨주고 국내 불감류로서는 희귀한 작품이다.

송광사 국사전[편집]

松廣寺國師殿

국보 제56호. 송광면 신평리 12(송광사) 소재. 정면 4칸, 측면 2칸, 단층 맞배지붕으로 주심포집이다. 조선 초기(1400년대) 주심포 건물로 내부 전체에 걸쳐 우물천장이 가설되었으며 주두(柱頭)에 벽면으로 뻗는 행공첨차 형태의 집이다.건물의 단청은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며 천장의 연화문, 대들보의 용문 등은 보기 힘든 당시의 단청문양으로서 현재 16국사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선암사[편집]

仙岩寺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 화상이 비로암을 짓고, 신라 경문왕 1년 도선국사가 선종 9산 중 동리 산문 선풍으로 지금의 선암사를 창건하였다. 반대편 북쪽 산 중턱에는 유명한 승보사찰 송광사가 자리하고 있다.선암사 주위로는 수령 수백년 되는 상수리·동백·단풍·밤나무 등이 울창하고 특히 가을단풍이 유명하다. 또한 절 앞에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아치형 모양의 승선교가 있는데(보물 제400호), 기저부가 자연 암반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며, 중앙부의 용머리가 매우 신비롭다.대웅전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395호)이 있다. 사찰 전통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절의 하나로 보물 7점 외에도 장엄하고 화려한 대웅전, 팔상전, 원통전, 금동향료, 일주문 등 지방 문화재 12점이 있고, 선암사 본찰 왼편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높이 17m, 넓이 2m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을 볼 수 있다.800년 전통을 지닌 자생 다원, 송광사에서 선암사를 잇는 조계산 등산로, 수정 같은 계곡물, 울창한 수목과 가을단풍이 이곳의 멋을 더해준다.또한 선암사 인근에는 지리산과 광양 백운산과 마찬가지로 고로쇠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매년 경칩을 전후하여 약수를 채취할 수 있다.

선암사 승선교[편집]

仙岩寺昇仙橋

보물 제400호. 승주읍 죽학리 산 48-1(선암사) 소재. 길이 14m, 높이 4,7m, 폭 4m 삽입. 조선시대 때 축조했다. 숙종 39년(1713) 호암화상이 6년 만에 완공한 다리이다. 기저부(基底部)에 별다른 가설이 없고 홍예(虹預)는 하단부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문양은 반원형을 이루고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다. 다리 중심석 아래의 조그맣게 돌출시킨 석재는 용의 머리 같기도 하다.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선암사 대각암부도[편집]

仙岩寺大覺庵浮屠

보물 제1117호. 승주읍 죽학리 산 48-1(선암사) 소재. 높이 24m, 고려시대 때의 탑. 전체모습은 팔각원당형 전형양식으로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면은 안상이 새겨진 8각의 괴임대가 조출되고 그 위에 구름문이 장식된 하대석을 얹었다. 옥개석의 장중함 등 통일신라시대의 잔재기법을 볼 수 있다.이 부도는 대각암이라는 이름을 암시하듯 고려시대 천태종을 개창했던 의천대각국사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혜사 대웅전[편집]

定慧寺大雄殿

보물 제804호. 서면 청소리 711(정혜사) 소재.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조선시대 때 축조했다. 742년 경덕왕 때 보조국사가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으로 각 주간마다 1구씩의 공포를 짜얹은 다포계이다.내부의 3, 4출목의 살미 첨차는 운공형으로 길게 대들보를 받치고 있고 첨차의 모서리 부분이 교두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립연대가 오래됨을 증명한다.

금둔사지 석불비상[편집]

今芚寺址石佛碑像

보물 제946호. 낙안면 상송리 산 2-1(금둔사) 소재. 높이 3m, 불상높이 2.1m.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석물 후면에는 코끼리상을 새겨 불타의 잉태 및 탄생과 관계되는 동물을 새겨 다른 석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작품이다. 양식을 보면 머리 위에 육계가 있고 머리는 소발이며 백호의 소공이 있고 눈은 정면으로 약간 밑을 보고 코와 입술이 곱게 흘러 매우 사실적 수법을 보인 작품이다.

검단산성[편집]

劍丹山城

사적 제418호. 해룡면 성산리 산 84 소재. 검단산성은 안산 혹은 검단산으로 부르며 도상에는 피봉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해발 138.4m의 낮은 산으로 여수반도와 순천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고 왜성과는 직선 2.5km에 위치하고 있다.이 성은 6~7세기에 걸쳐 축성된 백제시대 성으로 그 당시의 유물(토기, 기와)연지·저장공·건물지·문지·수문 등이 발견되었고 정유재란시는 조선군과 명군의 연합군이 순천 왜성에 주둔한 왜군과 대치하면서 임시로 사용했으리라 추정된다.산성형식은 산봉우리에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퇴뫼식이다. 성벽축조방법은 협축식으로 성의 총길이는 430m, 내벽 높이는 1~3m, 외벽 높이 4~6m, 두께는 5m 정도 되는 산성이다.

순천의 인물[편집]

-人物

김빈길[편집]

조선 태조 때의 무신. 호는 죽강, 시호는 양혜. 낙안태생으로 군공을 세워 말단으로부터 출세하여 달관에 이르렀다. 태조 6년(1397) 왜구가 침입하였으나 관민이 아무 대책이 없자 의병을 일으켜 멸악산 아래서 수천 명의 목을 자르고 남해와 사천까지 추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신윤보[편집]

자는 비경, 호는 오림정. 성종 1년(1470)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도사에 오림정을 짓고 포구에 술·매화·복숭아·유자·대 등 다섯 종류의 나무를 심고 5림이라고 정자의 현판을 내걸었는데 지금도 이 마을을 오림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박상[편집]

(1474∼1530)

자는 창세, 호는 눌재. 1501년(연산 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 교서관 박사 등을 역임했다. 1515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상소하다 왕의 노염으로 조림역에 유배되었다. 1517년 순천부사로 재직. 청백리의 문장가로 서거정 이후 4대가로 알려졌다.

정사익[편집]

자는 포당. 학문에 조예가 깊고 덕행이 뛰어나 이 고장의 승평 4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한훤당 김굉필을 추모하여 경현당을 중수하는 데 공로가 많았다. 그 후 스승 구암 이정이 세상을 타계하자 서러움을 달래지 못해 몸소 글을 지어 제사를 모시기도 하였다.

여수시[편집]

여수의 상징물[편집]

麗水-象徵物

여수시를 상징하는 꽃은 동백, 나무는 동백나무, 새는 갈매기이다.

여수의 자연[편집]

-自然

여수는 남해안 중앙부, 전라남도의 남동부에 있는 여수반도의 남동단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는 종고산·구봉산(388m), 동편에는 경상남도의 남해도, 앞바다에는 돌산도와 금오도, 기타 여러 섬이 외해(外海)의 풍랑을 막아 주고 수심이 깊어 천연적 양항이다. 그래서 조선 태종 때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수군통제영(水軍統制營)이 설치되어 군사상의 요지였다.본래 여수는 북쪽에 산지가 많으므로 내륙지방과는 교통이 불편하여 작은 어촌으로, 또 연안항로의 기항지로서 이용한 데 불과하던 것이 1936년 일본 나가사키(長崎)와의 항로가 트이고 전라선이 개통됨으로써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기후[편집]

해안에 면해 있고 북쪽에 산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매우 온난한 해양성 기후이며, 우리나라 유수의 정양지이다. 연평균 기온 13.6

, 1월 -1.5

, 8월 -5.8

, 최고 기온 35.7

(1946. 8), 최저 기온 -11.9

(1943. 1), 연평균 강수량 1,500㎜이다.

여수의 연혁[편집]

-沿革

고려조 때에는 여수 도호부(都護府)를 두었으나 충정왕 때 여수현으로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가 얼마 후 백제성왕 16년(538) 구지하성(久知下城) 관하 감평군(감平郡) 원촌현(여수, 순천) 및 식산현(식山縣)에 속하였고, 신라 경덕왕 16년(757) 무주(武州) 관하 승평군 해읍현(海邑縣-여수·순천), 여산현(廬山縣-돌산)에 속하였다. 다시 여수도호부로 고치고 부사를 두었다. 조선 선조 24년(1591)에는 전라 좌수도 수군절도영을 두고 좌수영이라 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충청·경상·전라 3도 통제사로 임명되자 본영을 여수에 두었다. 그 후 통제영을 통영(統營)으로 옮겼으며, 영조 1년(1725)에는 도호부로 고치고 부사(府使)로 하여금 수군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이듬해 도호부를 폐하였으며, 고종 32년(1895)에 절도사마저 폐하고 여수군의 일부를 합했다.1914년 여수면이 되고, 1931년에는 읍으로, 1949년에는 시로 승격하여 여수군에서 분리, 여수시로 개칭하였다. 나머지 9면은 여천군이 되어 여수시와 분리되었다. 1967년 여천군 삼일면에 석유화학공단이 조성되었고 1976년에 여천지구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6년에 여천지구 출장소가 여천시로 승격되어 여천군에서 분리되었다. 1997년에는 여수반도에 있는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을 통합하기 위한 주민 찬반투표를 실시해 찬성을 얻었다. 그 결과 1998년 4월 1일부터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이 통합되어 여수 도농통합시로 바뀌었다.

여수의 산업[편집]

-産業

냉동업·수산물가공업·어망제조업이 발달했다. 연중 난류가 흘러 어류어획량이 많은데, 특히 갈치·쥐치·정어리·멸치가 많이 잡힌다. 여수만에서는 굴·꼬막 따위를 주로 양식한다. 농업은 예전의 여천군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진다. 주로 쌀·보리·콩을 생산하며, 도서지역에서는 고구마를 많이 재배한다.광양만 연안의 해안을 매립해 새운 여천공업단지를 중심으로 종합석유화학공업이 발달했다. 1966년에 공업지역으로 지정되어 정유공장이 들어섰고 1974년에는 산업기지 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여천석유화학공단이 건설되었다.그 밖에 전기·산업 폐기물처리·납사보관·액체화물 등 생산공장을 위한 자원시설이 있다.

상업·무역[편집]

농산·수산물의 집산이 성하다. 특히 무역은 한때 정체상태에 있었으나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전국 굴지의 수출입항이 되었다. 주요 수출품은 생사·김·멸치·통조림·인삼·돈모·각종 광물 등이고 수입품은 기계 기구·생고무 등으로서 수출을 주로 한다.인근 삼일면 일대를 대단위 석유화학공업 콤비나트지대로 형성하고, 또 항구의 하역능력을 배가하기 위한 계획 등이 세워져 있어 불원간 국제 개항장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특산물[편집]

돌산갓김치·건어물·화훼·단감·유자·수산물인 쥐치포·깨맛포·명태포·노가리·바다진미·멸치 등이 유명하다.

여수의 교통·관광[편집]

-交通·觀光

철도는 전라선·광주선·경전선이 여수에서 멀지 않은 순천에 집중되어 있으며, 간선도로가 이에 병주하고 있어 편리하다. 여수·순천간에 전라선 철도가 통하고 17번 국도가 철도와 나란히 달리고 있으며 부산·제주·목포를 비롯한 연안 도서 지방간의 항로가 집중하여 교통이 편리하다.한려해상국립공원을 비롯하여 바다에는 섬, 육지에는 여러 산과 석인(石人)·장군성·충무공 대첩비각·충민각·석천사·한산사·흥국사 등 많은 고적들이 있고 기후가 온난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여수의 시황[편집]

-市況

면적 497.10㎢, 풍랑의 영향이 없으면서도 수심이 깊은 천연적 양항인 여수는 조선 때 수군통제영이 설치되어 군사상 요지로 되었다. 소어촌으로 또 연안항로의 기항지에 불과하던 여수가 1936년을 전후하여 축항되고, 전라선이 부설되면서부터 배후지가 호남·호서지방과 호남동부 산간지방으로 확대되어, 그 문호가 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1949년 개항장이 됨과 동시에 시로 승격하였다.항만은 돌산도에 의해 동·서 2항구로 갈라져 있다. 서쪽 구항은 2,000t급의 선박이 접안할 수 있고 남해안 어업 중심지가 되어 수산센터가 있어 각종 어획물의 집산이 성하다. 동쪽 신항은 6,000t급의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근대적 항만이다. 따라서 연안항로의 기항지로, 또 무역항·어항으로서 중요하다.여수의 인구는 2002년 12월 현재 31만 6,143명이다. 공업이 발달치 못하여 인구의 증가율이 높지 않으며 식품·조선·기계공업이 약간 일어나 있는 정도이다.시가지는 종고산 기슭의 신항에서 구항에 이르는 해안에 발달되어 있으며 중심상가는 구항 부두 부근을 중심으로 서동·충무동·중앙동·교동에 걸친 일대이다. 교통은 매립지에 시가지가 정연하고 공화동도 잘 정비되어 있다. 신구 양항 중간의 중앙동에는 기계공장, 남산동과 돌산도에는 조선공장이 있다.

오동도[편집]

梧桐島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여수 앞바다 1㎞ 남동지점에 있는 0.3㎢ 정도의 작은 섬이지만, 동백꽃과 대나무가 우거져 있어 여수시민의 유일한 휴식처이다. 최근 육지와의 사이에 폭 5m 정도의 방파제를 쌓아서 육계도화하였으므로 사람은 물론 자동차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광양만과 여천산업단지가 인접되어 있다. 처음에는 토끼모양의 작은 섬이었으나 현재는 긴 방파제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지형의 생김새가 오동잎처럼 보인다. 옛날에는 오동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오동도라 불린다.

진남관[편집]

鎭南館

조선시대 사백여 년 간 수군의 본거지로 혹은 구국의 성지로 이용되었고 전승의 사명을 다한 역사적 현장으로 여수를 상징하는 곳이다.진남관 정면에 있는 망해루는 일제시대에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에 재 복원한 2층 누각이다. 또한 1599년 선조 32년 기해년 12월에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75칸의 거대한 객사이다. 그 후 절도사 이도빈이 1664년 갑진년에 개축하고 숙종 42년(1716) 94대 이여옥 수사 때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고 숙종 44년(1718) 95대 수사 이재면이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이 객사는 조선 역대 왕들의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정례참배를 행했으며 또한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는 하례를 드리고 나라에 슬픔이 있을 때는 봉도식을 관민일동이 수행해 왔다. 1910년 고종 4년 경술년 때에는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초로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학교로 사용한 바 있다. 준국보 제480호로 1959년에는 보물 제324호로 지정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보수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1973년 단청을 하고 1978년에 4억 2천만원을 투입하여 진입도로를 개설한 바 있다.건평 240평,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길이 75cm, 높이 14m, 둘레 2.4m의 기둥 68개가 거대하고 웅장한 모양을 자랑하며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이다.조선 초기 객사양식으로서 보기 드문 건물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고 그 사이의 공간에는 화반을 받쳤는데 이러한 구성의 건축은 주심포 내지는 익공집계통의 수법에 의하여 2출목으로 짜올려서 외목도리를 받쳤다. 건물의 전후면에는 안쪽으로 제2주례에 고주들을 배치하여 그 위에 대량을 가구하였다.

충민사[편집]

忠愍祠

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전에 지은 충무공 사액사당 제1호. 조선 선조 34년(1601) 영의정 오성 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계청을 받아 왕명으로 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한 충무공의 사당으로 국내 최초이며, 최고의 것이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 때 훼철되어 단만을 쌓았다가 고종 10년(1873) 일향 주민들이 합심하여 중수하였으나 1919년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철폐되었다.광복 후 1947년 복설, 현재는 여수 여천 충무공 유적 영구보존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성역화 사업에는 조금 미흡한 점이 있다. 중건된 사우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주벽으로 하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을 배향하고 있다.우부승지 김사용이 계청하여 사액(충민사공)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목조 와즙의 맛배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집이었다. 1971년부터 여수 여천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정화사업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1975년부터 공사하고 착공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거문도[편집]

巨文島

거문도는 고도·동도·서도와 삼부도·배도군도를 포함한 섬을 말한다. 거문도의 본섬인 동도·서도·고도 등 세계의 섬은 바다 가운데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가운데에는 1백여 만 평 정도의 천연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돼 있어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천혜의 항구 구실을 한다. 때문에 거문도항은 빈번히 열강의 침입을 받아왔고 현재는 남해의 어업기지로서 전국의 어선들이 몰려들고 있다.1905년 국내 최초의 거문도 등대가 건립된 것도 이 때문이다. 백도는 거문도에서 동쪽 27km 지점에 우뚝 솟은 무인군도, 삼백도와 하백도로 나뉘어 있는 데 바람과 파도가 빚어낸 바위와 벼랑의 갖가지 기묘한 형상에 절로 탄성이 튀어나오는 남해의 소금강이다.

나주시[편집]

나주의 상징물[편집]

羅州-象徵物

나주시를 상징하는 꽃은 배꽃,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나주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중서부 나주평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질은 전역이 화강암 지대이다. 시의 중앙을 영산강이 관통하고 있는데, 서쪽이 구나주읍 동쪽이 구영산포읍이다. 시의 북서쪽에 금성산(452m)이 있고, 주변에는 영산강의 범람원이 넓어서 홍수의 피해가 많았다. 화순군 여첩산에서 발원한 신탄천은 시의 동부를 흐르다가 구나주읍에서 영산강에 합류하는데 도중에서 군 남부 산지로부터 발원하여 북류하는 여러 계류(溪流)를 합한다. 이 강들은 관개에 크게 이용된다.

기후[편집]

남쪽에 위치하나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 13.7

, 1월 평균 -0.5

, 8월 평균 26.9

, 최고 기온 39.6

(1944. 7), 최저 기온 -19.7

(1940. 2), 연평균 강수량 1,500㎜이다.

나주의 연혁[편집]

-沿革

나주는 본래 백제의 발라군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금성군(일명 금산)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태조 때 나주로 고쳤다. 고려 헌종 2년(1011), 거란의 2차 침입 때 왕이 나주에 천도하여, 10일간 왕도가 된 일이 있었으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 진을 두고 2군과 8현을 관할하게 하였으며, 갑오경장 때에는 전국을 23부로 구획하고, 나주를 부로 하여 관찰사를 주재시켰다. 그러나 다음해 전국 행정구역을 13개도로 개편함에 따라 나주부는 폐지되고, 전라남도의 한 군이 되었다. 192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31년 나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유치원 37, 초등학교 25, 중학교 14, 고등학교 12개, 전문대 1, 대학 2,

대학원 4개교로 모두 95개교가 있다.1981년 영산포읍과 나주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되었다가 1986년 시역의 변동없이 명칭만 나주시로 변경되었다. 1995년 1월 나주군과 통합, 통합시로 승격. 6동 1읍 12면을 관할한다.

나주의 산업[편집]

-産業

넓고 비옥한 평야와 온화한 기후 등 좋은 영농조건으로 해서 농업생산이 많으며, 이른바 삼백지방(三白地方)이라 하여, 예로부터 쌀·누에고치·면화의 산지로 유명했다. 총가구의 약 56%가 농가로서, 쌀·보리·고구마 외에 채소류·과일류의 원예농업이 활발하고, 그 밖에 인초(고사리)·양송이 등의 산출이 많다. 영산강 범람원은 과수원으로 이용되어 배를 비롯한 복숭아·포도·사과·감 등의 과일 생산이 대단히 많다. 특히 나주는 일찍부터 품질이 우수한 나주배의 산지로 유명하여, 연 생산량 7,995t을 올림으로써 전국 제1의 배 산지가 되었다. 또 왕곡면·산포면·남평면에서는 시설원예 농업에 의한 오이·고추·무·배추 등의 산출이 많고, 그 밖에 마늘·양파·생강 등도 많이 난다. 한편, 금천면에는 약 3만 마리의 오리를 사육하는 오리사육장이 있고 한우·젖소·돼지 등을 사육한다.시의 대표적인 근대적 공장은 1962년 준공된 호남비료 나주공장이다. 호남 곡창지대의 비료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영산강의 공업용수, 화순탄광의 무연탄 및 호남선의 수송력 등 유리한 입지조건을 고려하여 건설되었는데, 당초에는 충주비료공장과 더불어 한국의 2대 비료공장의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그 생산시설이 구식이어서, 공업용수의 과다 사용과 생산단가의 상대적 고가 등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었고, 아울러 국내 비료생산의 증대에 눌리게 됨으로써, 1981년에 조업을 중단하고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개편되었다.광산물로는 공산면의 덕음광산에서 연간 금과 은의 생산이 있고, 산포면과 봉황면에서 고령토가 산출된다. 금천면에 과실 통조림공장이 있고, 그 밖에 명주·죽세공품·목공예품(소반) 등을 제조하는 전통적인 가내수공업이 영위되고 있다.

특산물[편집]

나주배·도자기·모필 등이 유명하다.

나주의 교통[편집]

-交通

호남선을 비롯 도로교통의 발달로 영산포의 항구기능은 잃었으나, 광주

목포간의 고속화 국도를 비롯한 간선도로에 의해 광주·목포·영암 등지로 연결되는 육로의 요지를 이루고, 따라서 전라남도 지방 서부 평야지대의 교통요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나주의 관광[편집]

-觀光

구나주읍을 대표하는 석조물로서 북문외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원래 금성산 기슭의 심향사에 있었는데, 그 위치가 북문 밖이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으며, 보물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나주읍의 북동쪽 노변에 세워진 나주동문외석당간은 당간 전체가 잘 보존되어 귀중한 유물이 되고 있다. 팔각의 화강석재 5장을 연결시켜 세운 간주 위에 옥간석과 보주가 얹혀 있으며, 높이는 11m이다. 구나주의 지형이 배의 모양이기 때문에 그 안정을 빌기 위해서 돛대 형태를 본떠서 세웠다는 풍수설이 전해지고 있다. 구영산포는 과거 영산강의 가항종점으로 조기·멸치·소금·젓갈류 등 해산물과 제주말 및 일대의 농산물 집산지를 이루어, 상업도시로 크게 번영하였던 곳이다. 그 밖에 문화재로는 나주의 금성관과 김천일 정렬사지, 미천사원 등이 있다.

나주의 시황[편집]

-市況

전남평야의 중앙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604㎢이고 인구는 10만 3,452명(2002.12)이다. 시내에 문화원 1개 소, 사찰 4개 소 등이 있으며, 교육기관으로는 대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2개 교, 중학교 5개 교, 초등학교 35개 교가 있다.

나주 향교 대성전[편집]

羅州鄕校大成殿

보물 제394호. 나주시 향교동 32-3. 나주향교의 중심건물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27위의 위패가 모셔진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 겹처마가 팔작지붕이다. 건축적으로 살펴보면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나 쇠서의 형태는 익공이 비슷하게 변하고 창방(昌枋) 위에는 익공집에서 나타나는 화반들이 배치되어 있다.전면 1칸을 개방하여 툇간(退間)으로 하고 안쪽에 고주(高柱)를 세워 중앙과 좌우 양단문에 각각 문호를 달았으며 주문에는 큼직한 살(窓)을 만들었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고, 후면에 고주 4개를 한 줄로 세워 앞뒤 고주에는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동자주형의 태공을 세워 종량(宗樑)을 받쳤다. 건물 내부에 세운 고주와 주위의 평주와는 퇴량(退樑)으로 연결하였으며 이것을 받는 공포의 살미첨자는 한몸으로 합쳐서 양봉(樑奉)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초석 상면에 연화문을 새긴 장식이 특이하다. 대성전 건물은 공포와 개가구재의 세부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철천리 칠불석상[편집]

鐵川里石佛石像

보물 제461호. 나주시 봉황면 칠전리 산 124-2. 불상이 있는 이곳은 백제 성왕 22년(544) 연기조사가 구례 화엄사와 함께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절이 소실된 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고 전해온다.이 불은 칠천리 석불입상이 있는 바로 앞 약 10m 떨어진 전면(前面)에 있다. 같은 경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불상을 조각한 기법이나 형식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불상은 1m 높이의 원추형바위 마애불로 좌상과 입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높이는 모두 1m 내외이다.이들 불상 순서를 보면, 북쪽과 동북방향에 좌상 2구를 새겼으며, 남쪽으로는 입상 4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서쪽에 2구의 불상을 양각으로 새긴 것이 엿보이나 깎아낸 듯한 흔적이 역력하며 현재로서는 좌상인지 입상이었는지를 가려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마애불이 8구였다고 보여지나 현재로서는 6구뿐이다. 또 구전으로는 원추형의 바위 정상에 별석으로 조각한 동자상이 얹혀져 있었다 하나 현재는 유실되고 없다. 7불이란 이름은 아마 여기서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한다.칠불석상은 원추형 비슷한 사면석에 다수의 불상이 비스듬하게 조각된 예는 극히 드물며 또한 이렇게 석면불을 조성한 예 역시 우리나라의 귀중한 불상의 자료가 아닐 수 없다.이 불상은 일부에서 전형적 양식의 퇴화가 엿보이며 기법의 순화 의문의 도덕적 처리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철천리 석불입상[편집]

鐵川里石佛立像

보물 제462호.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산 124-2. 이 석불은 낮은 야산인 구릉지대의 정상에 있는데 주변에 민묘(民墓)가 있고 그 옆에 미륵사라는 소규모의 절이 있다.5m가 넘은 거불로 불신 높이만 해서도 3.94m나 되며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과 대좌까지 한 돌에 조각하였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상호는 4각형에 가깝고 얼굴 전체가 다소 비만스럽게 보인다. 그러면서도 길게 내려뜨린 귀, 호형을 그린 눈썹과 눈꼬리가 귀 위로 치켜진 모습, 위아래 입술이 두툼하게 생긴 모습에서 어딘가 강한 인상을 풍긴다. 이는 통일 신라말 이후 고려로 넘어오면서 나타나는 기량의 한계석이라 할 것이다. 더구나 뒤바꿔진 시무외인의 어색한 손, 넓은 어깨에 비해 목이 너무 두껍고 짧은 것은 마치 목 위에 머리가 얹혀져 있는 듯한 부조화를 낳고 있으며, 상체의 발달된 양감에 비해 하체, 특히 다리부분이 너무 빈약하게 처리되었다.그러나 상호에서 보여준 강한 인상, 어딘가 멀리 바라보면서 기원하는 듯한 눈, 다소 몸에 바짝 붙여지긴 하였으나 촘촘하게 주름이 진 활발한 의습, 아직도 전대에서만 볼 수 있는 당당한 어깨 등은 당대의 저력과 힘을 충분히 살려준 작품이라 하겠다.이 석불은 얼굴의 비만감과 또는 괴체화 되어가는 신체적 조형 및 형식적인 의문 등이 고려 초부터 유행하던 거불양식을 알 수 있게 한다. 정북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석양을 바라보면 햇빛을 받아 석상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죽림사 괘불[편집]

竹林寺掛佛

보물 제1279호.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죽림사. 괘불은 야외에서 불사를 할 때 장엄하게 쓰이는 것으로 보통은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괘불함에 보관했다가 불사가 있을 때마다 꺼내서 쓰기 때문에 대부분 말았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안료가 많이 훼손돼 있다.죽림사 괘불은 광해군 14년(1622)에 제작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괘불로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속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 괘불은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독존인 좌상으로 비단 바탕의 채식화로 연화대 위에 가부좌를 한 상이다. 색조는 주로 홍색을 띠고 있으며, 항마인을 결한 여래상이다. 하단에 “천계이년임술십일월십칠일 죽림사(天啓二年壬戌十一月 十七日 竹林寺)”라 기명되었으나 죽림사 부분을 지우고 옆줄을 다시 쓴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한다.괘불은 석가 독존도로 정면에서 볼 때와 올려다 볼 때 차이가 크다. 대개 경배의 대상물로 제작되는 조형물은 경배의 위치에서 보는 것이 올바른 감상법이라고 할 때 죽림사 괘불은 정면에서 볼 때 약간 가분수형이지만 아래서 올려다 볼 때 원만상으로 보인다.

나주 읍성 남문지[편집]

羅州邑城南門地

사적 제337호. 나주시 성북동·교동 일대. 나주읍성은 보성읍성과 함께 읍성축조론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태종 4년(1404)에 긴급 수축(修築)되었다. 이는 동년 7월에 왜선 33척이 전라도로 침입해 오자 수군지휘관인 김영열(金英烈)을 보내 격퇴한 뒤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서 불과 3개월 만인 동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다. 따라서 이 때의 나주읍성 수축은 계획적인 읍성축조였다기보다는 기왕의 토축(土築) 부분을 석축화하는 정도에 만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후에도 나주읍성에 대한 본격적인 수축 논의는 계속되었다.이처럼 조선시대에 들어 세 차례에 걸쳐 증·개축이 이루어진 나주읍성은 한말에까지 그 골격을 유지해 오다가 1910~1920년 사이에 일제에 의해 4대문과 성벽에 대한 훼철작업이 빠른 속도로 행해졌고, 그 읍성터는 식민통치건물지, 일반대지, 혹은 도로망 등으로 전용되었다. 해방 이후 나주의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훼손이 더욱 격심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광양시[편집]

광양의 상징물[편집]

光陽-象徵物

광양시를 상징하는 꽃은 동백, 나무는 고로쇠, 새는 갈매기이다.

광양의 자연[편집]

-自然

전남의 남동부를 차지하며 섬진강을 경계로 경상남도의 하동군과 경계를 짓고 있는 도의 동쪽 관문이다. 시의 남단 낙동통을 제외하면 시 전체가 화강편마암으로 덮여 있다.북부의 소백산맥 줄기인 백운산(白蕓山, 1,218m) 일대는 산악이 중첩하나 동쪽 섬진강유역과 남쪽 해안지대는 경사가 완만하고 비교적 넓은 평야가 광양만 연안에 발달해 있다.

기후[편집]

남해안에 면하고 북쪽에 높은 산이 가로 막혀 있어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며, 특히 여름에는 전국에서 가장 덥고 비가 많이 오는 지방의 하나로, 농작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연평균 기온 13.7

, 1월 평균 0.1

, 8월 평균 27.8

(전국 1위), 최고 기온 38

(1942. 8), 최저 기온 -15.7

(1943. 1), 연평균 강수량 1,296㎜이다.

광양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마로현(馬老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희양현(晞陽縣)으로 고쳐서 승평군(昇平郡)에 속하였다. 고려 때 광양으로 고치고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 승격하여 현감이 되었으며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승격하였다.또한 1949년에는 광양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태금면이 신설되었는데, 1989년 1월 제철소가 있는 골약면·태금면 및 옥곡면 광영리를 합병하여 동광양시로 승격시켜 분리하였다. 1994년 동광양시는 광양군과 통합하여 광양시로 승격됐다. 현재 5동 1읍 6면을 관할하고 있다.

광양의 산업[편집]

-産業

광양 제철소, 즉 제2종합제철소는 금호도 남단 공유수면 매립지에 세워졌으며, 제철소의 부지만 해도 1,500㏊에 이른다. 고로를 비롯하여 19개의 공장 설비와 27개의 부대 설비를 갖춘 일관 생산체제의 대규모 제철소이다. 1985

1987년의 1기 시설공사로 270만t의 강철을 생산한 데 이어 1987

1988년의 2기 시설 공사의 완공으로 총 540만t의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곧 이어 1988년 말에 3기 공사를 착공하였다. 이로써 포항 제철의 960만t의 생산과 합쳐 연간 총생산 1,500만t의 생산 규모가 되었다.광양만 일대는 난해성 어족의 산란장으로 좋은 어장이고 염전이 있어 수산업도 상당히 발달해 있다. 목재·죽재 생산이 많다.경지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18%이며 논밭 비율은 80:20으로 논이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면화·누에고치·대마·죽세공품 등이다. 겨울철에 행해지는 촉성재배에 의해 오이가 많이 생산되며 밤나무 단지가 조성되어 연 5,543t의 밤이 생산된다.

특산물[편집]

장도·궁시·고로쇠·밤·매실·작설차 등이 유명하다.

광양의 교통[편집]

-交通

경전선이 군 남부 해안을 따라 순천과 경상남도의 진주를 연락하며, 도로는 동부 군계인 섬진강을 연하여 국도가 통해 있으므로 전반적으로 불편했으나 남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많이 개선되었다.

광양의 시황[편집]

-市況

2002년 12월 현재 광양의 면적은 447㎢이고, 인구는 13만 8,162명이다. 시에는 북부에 백운산이 있어 다도해와 광양만을 관광할 수 있으며 백운사·중흥사·법봉사·성불사 등의 이름난 사찰이 있다. 진월면의 망덕해수욕장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백운산[편집]

白雲山

한반도의 남단 중앙부에 우뚝 솟은 해발 1,218m의 백운산은 봉황·돼지·여우의 세 가지 신령한 기운을 간직한 명산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호남벌을 힘차게 뻗어 내리는 호남정맥을 완성하고 섬진강 550리 물길을 갈무리한다. 또한 900여 종이 넘는 식물이 분포하고 있는 식물의 보고이다.한라산 다음으로 가장 다양한 식물의 종류를 보유하고 있는 백운산은 온대에서 한 대에 이르기까지 900종의 식물이 천혜의 기후여건 속에서 자라고 있다. 또한 이른 봄이면 신비의 약수인 고로쇠가 흘러내리고 백년 묵은 산삼이 종종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백운란·백운배·백운쇠물푸레·백운기름나무·나도승마·털노박덩굴·허어리 등 희귀식물을 품고 있다.

옥룡사지[편집]

玉龍寺址

사적 제407호. 옥룡사지는 옥룡면 추산리 소재. 옥룡사지는 통일신라 말의 뛰어난 고승이자 한국풍수지리의 대가인 선각국사 도선이 35년간 머무르면서 수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다 입적한 곳으로 우리나라 불교역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천년의 불교성지이다.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지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옥룡사는 신라 말에 조그만 암자였던 것을 도선국사가 864년에 중수하였으며, 수백 명의 사문들이 그의 법문을 듣고자 몰려들어 옥룡사파란 지파가 형성되자 몰려드는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인근에 운암사라는 사찰을 추가로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1878년 화재로 소실된 후 폐찰 되었으며 현재 서 있는 대웅전은 1969년에 건립되었다.옥룡사지에는 도선국사와 수제자인 통진대사의 비와 탑이 세워져 있었으나 1920년경에 모두 없어져 버리고 비문만이 탁분되어 '동문선' 등에 전해온다.옥룡사지 주변에는 도선국사가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심었다는 것으로 전해 오는 동백나무 7천여 본이 7ha에 거쳐 울창한 동백 숲을 이루고 있다.

중흥사[편집]

中興寺

임진왜란 때 왜군과 의병의 격전지였던 중흥산성 옛 터전에 둘러싸여 있는 호국사찰. 통일신라 말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폐사되어 이후 작은 암자가 건립되어 유지되어 오다 1936년 중건하였으나 다시 폐사가 되었다. 1936년 독지가 하태호에 의해 재중건되어 오늘날의 규모를 갖추었다.중흥사에는 국보 제103호인 쌍사자석등(광주 국립박물관에 보관)과 삼층석탑(보물 제112호), 석조지장보살반가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2호) 등의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중흥사 삼층석탑[편집]

中興寺三層石塔

보물 제112호. 통일신라 말에 건립된 고탑으로 3.8m의 높이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기단면석의 각 면이 양분되어 인왕(仁王), 사천왕(四天王), 천부상(天部像), 신장(神將)과 보살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1층 탑신의 4면에는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처상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옥개받침은 3단씩인데 옥상(屋上)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었으며, 옥개석은 받침이 너무 짧고 두터운 특징이 있으며 상륜에는 보주만이 있다.

광양의 인물[편집]

-人物

황현[편집]

黃玹 (1855~1910)

한 말의 문장가·시인·우국지사.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長水)로 황희 정승의 후손이지만 가계가 가난하고 몰락하여 농민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7세에 서당에 다니기를 시작하였는데 7세 때 지은 시가 전해온다. 매천은 이처럼 어릴 때부터 체격은 작고 약했지만 총명하였고 특히 시문에 뛰어나 당시 호남의 대유학자 기정진도 그의 재능을 높이 칭찬하였다.19세 때인 고종 20년(1883)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초장에서 장원에 뽑혔으나 시험관이 그가 몰락한 가문 출신임을 알고 차석으로 떨어뜨렸다. 이에 당시의 부패한 과거제와 조정의 현실을 간파한 그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였다.매천은 집필에도 열중하여 그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깊이 배어있는 역사비평서인 '매천야록'을 비롯하여 시문집인 '매천집', '매천속집'과 '동비기락'을 저술하였다.

최산두[편집]

(1482~1536)

호는 신재. 태어날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내린 까닭으로 산두로 이름하였다. 8세 때에 시문을 지어 보이는 등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소양을 보였다. 1504년(22세) 진사에 올랐고 1513년 31세 때 별시문과에 급제 하였다.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당대의 대학자들과 사귀면서 실력을 쌓아 빼어난 문장과 덕행으로써 홍문관을 거쳐 마침내 젊고 재주있는 신하들이 임금의 특명을 받아 공부하던 호당에 올랐다.최산두는 당시 조광조 등이 주창한 도덕정치, 혁신정치에 뜻을 같이 하여 기존의 권력세력으로 부패한 훈구파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최산두가 속한 신진개혁세력은 지나치게 도학적인 언행과 급격한 개혁으로 왕의 신임을 잃고 보수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을 받았다.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를 맞아 당시 의정부 사인으로 있던 최산두는 화순군 동복으로 유배되었다. 최산두의 유배지에는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으로 교유하였으며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 등 후진들이 최산두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 적벽을 오가며 많은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이때 유명한 관광명소인 ‘적벽’을 이름지었다.최산두는 유배 15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3년 후인 1536년 5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한편 선생이 돌아가신 후인 1578년 현 광양읍 우산리에 봉양사가 세워져 그의 위패를 모셨으며 그 후 동복에도 도원서원이 세워졌다. 묘소는 봉강면 부저리에 있다.

담양군[편집]

담양의 상징물[편집]

潭陽-象徵物

담양군을 상징하는 꽃은 매화, 나무는 대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담양의 자연[편집]

-自然

광주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영산강 최상류의 지류인 증암천과 용천, 담양천 등 여러 소하천이 흘러, 군 중앙은 비교적 넓고 비옥한 평야로 되어 있다. 북쪽에는 노령산맥의 추월산(秋月山:720m), 금성산(金城山:573m), 광덕산(廣德山:563m) 등 여러 험난한 산들이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이 산맥의 지맥인 병풍산(屛風山:822m), 불대산(佛臺山:738m) 등의 산이, 남동쪽은 국수봉과 무등산의 여맥이 솟아 있다. 그리하여 남서쪽만이 틔어 전남평야와 연접하여 담양분지를 이루고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과 편상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면적은 455㎢, 인구 5만 1,954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내륙에 있고 또 지형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비교적 크다. 연평균 기온 12.5

, 1월 평균 -1.5

, 8월 평균 26.5

,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담양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추성군(秋成郡)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995)에 담주 도단련사(潭州都團練使)를 두었다가 후에 담양으로 고치고 나주(羅州)에 속하게 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고 공양왕 3년(1391)에 율원현감(栗原縣監)을 겸임했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군으로, 정종 1년(1399)에 부로 승격하였다가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사(都護府使)를 두었다. 그 후 격하·승격을 거듭하다가 고종 32년(1895) 담양군으로 남원부 관할하에 속했다가 창평군(昌平郡)의 폐지와 동시에 군에 속했던 10개 면과 장성군에서 1개 면, 광산군에서 2개 면을 합하여 담양군으로 하고 1943년 담양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담양의 산업[편집]

-産業

다른 군과 마찬가지로 농업을 주로 하는데, 특히 전라남도에서 생산되는 대나무를 원료로 하는 죽세공품이 유명하다. 담양댐에서는 풍부한 농업용수를 얻고 있다. 경지 면적은 122.9㎢, 논밭의 비율은 74:26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나맥·콩·면화·누에고치·명주·삼베 등이다. 담양 지방에서 생산되는 죽세공품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어 외화 획득에 한몫을 하고 있다.

특산물[편집]

죽향딸기·방울토마토·죽향메론·시목단감·죽향비가림포도·용면 한봉·한과·창평 쌀엿·추성주·죽엽청주·동충하초·죽제품·염장죽순 등이 유명하다.

담양의 교통[편집]

-交通

국도가 담양을 지나 남북으로 달리고 기타 지방도로가 담양에 집중되어 비교적 편리하다. 호남고속도로는 군 남부를 동서 방향으로 지나가고 있다. 또한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개통된 이래 교통이 매우 편리해지고, 화순

담양간의 국도, 장성

남원간의 국도 등을 비롯한 지방도가 많아 경제 생활에도 크게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담양읍[편집]

潭陽邑

군청 소재지이며 담양분지의 중심지이다. 부근에서 만드는 죽세공품의 집산지이며 수박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근래 공업이 일어나 섬유·전자·피혁 제품을 생산한다. 읍내를 88올림픽 고속도로와 서울∼순천간 고속 국도, 국도 및 지방도가 지나 교통의 요지를 이루며 문화재로는 내리 석당간·내리 오층석탑 등이 있다.

불조역대통재[편집]

佛祖歷代通載

보물 제737호. 담양군 담양읍 남산리 106 소재. 중국 원라라의 염상(念常)이 편술한 것으로 석가여래 탄신으로부터 원나라 원통 2년(1344)까지 사이의 고승대덕들에 대한 전기를 편년체로 수록한 것이다. 이 책을 옮겨 쓴 김수온(金守溫, 1409~1481)의 발문에 의하면 조선 성종 3년(1472)에 인수대비 한씨(덕종비)가 승하한 세조와 예종의 명복과 정희대왕비 윤씨, 성종,성종비 공혜왕후 한씨의 장수를 빌고자 목판의 소재처를 나누어 법화경 등 29종의 불교경전을 인출케 하였는데 본경은 바로 그 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판각이 정교하고 인쇄가 깨끗하며 발문은 갑인소자로 찍어냈다. 이 통재는 당시 30부를 인쇄한 것 중의 1부인데 현재까지 알려진 완질의 전래로서는 이것이 유일본인 듯하다.

읍내리 오층석탑[편집]

邑內里五層石塔

보물 제506호. 담양군 당양읍 지침리 45 소재. 총높이 7m(1기). 고려시대의 탑. 담양읍에서 순창으로 향한 도로를 따라 1km쯤 올라가다 보면 평지가 전개되는데 광활한 지역에 경영된 가람(伽藍)으로 짐작된 가운데에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이 오층석탑만 유존되고 있다.탑의 형태는 1층 기단에 오층석탑으로 일반형과 약간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부 지대석은 1석으로 구성하였고 중석은 중앙에 탱주가 생략된 4개의 모서리 기둥이 배치되었는데 특히 기단부 높이가 다른 오층석탑에 비해 매우 낮게 조성되었음이 특이하다. 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기단부 중대석이 짧은데 비해 1층 옥신이 높아 고준한 감이 있으나 각부의 체감률이 적당하여 탑의 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 중기를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에 석당간(보물 제505호)이 있다.

오룡리 석불입상[편집]

五龍里石佛立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92호. 담양군 무정면 오룡리 산38 소재. 총높이 345cm. 고려시대의 입상. 상호에 비해 몸체가 협소하게 조각되었고 모자와 광배가 완연하다. 장방형의 광배와 한돌이 돌로 구성되었다. 하단 중앙에 길이 22cm, 깊이 3cm 크기로 단을 만들어 광배를 끼웠다.오룡리 석불입상은 전체 높이 345cm의 거불로서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지만 사각형에 가까운 상호, 짧은 목과 팔에 걸친 법의자락의 형식화, 하체의 조각기법상 다소 퇴화현상을 나타내고 있어 고려 중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의 머리 위에 많은 돌들이 올려진 것으로 보아 아직도 치성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옛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석불의 코 부분을 갈아 마시면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 하여 석불의 코 부분이 상당히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개선사지 석등[편집]

開仙寺址石燈

보물 제111호. 담양군 남면 학선리 593 소재. 총높이 3.5m(1기). 통일신라 때의 석등. 팔각형을 기본으로 삼는 고복형(鼓複形) 석등으로 높이는 3.5m이다.세부양식을 살펴보면 넓은 방형 지대석 위에 팔각하대석을 올렸는데 1992년에 새로운 석재로 교체하였다. 그 위의 상대석의 복련은 복판팔엽의 양련으로 하대석의 복련과 대칭을 이룬다. 상대갑석 위에는 둥그런 괴임을 마련하였고 화사석의 각 면에는 장방형의 호창을 내고 간주 양쪽을 이용하여 조등기(造燈記)를 음각하였다. 팔각지붕 마루 끝에 귀꽃을 장식하였으나 현재는 대부분 깨졌고 하나만 남아 있다. 화사석 기둥면에 새겨진 조등기는 한 기둥에 각기 두 줄씩 기록되어 있고, 9행과 10행에 쓰여진 세주(細注)는 각기 두 줄로 되어 있다. 조등기는 총 10행 136자이며, 자경은 4cm, 서체는 해서(楷書)이다.

담양의 인물[편집]

-人物

정철[편집]

鄭澈 (1536~1539)

조선조 선조 때의 명신·문인.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 본관은 연일(延日). 어려서 담양 창평에서 김윤제(金允悌)·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명종 17년(1562)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선조 13년(1580)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관동팔경의 경치를 읊은 「관동별곡」가사는 유명하다. 선조 17년(1584) 동인의 논척(論斥)으로 조정에서 물러나와 창평에 머물렀는데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로 나타냈다.선조 22년(1592) 임진왜란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임금을 맞았다. 그 뒤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임금과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하다가 강화에서 병사했다. 본래 성격이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쟁의 화를 입어 장기간 유배생활을 했다.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었으며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등의 가사(歌辭) 작품은 국문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백미들이다.

유희춘[편집]

柳希春 (1513~1577)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학자·충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字)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岩), 별호는 연계,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하여 언사나 행동이 뛰어났던 미암은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에 별시문과 병과에 합격했다.내직에 있다가 1543년 무장현감(현 전북 고창)을 제수 받았고, 인종 2년(1545)에 경연직(經筵職)에 추천되어 5월에 수찬이 되고 6월에 궐하에 이르렀다. 1547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고 이어 함경도 종성에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뜻을 세우고 저술에 주력하였는데 글을 배우기 위해 원근에서 모여든 선비가 수백 명에 달하여 종성변지(鍾城邊地)의 문학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재등용되었고 홍문관 직제학, 전라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등을 거쳐 예조참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정이품(正二品)에 승격되었으나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담양의 의암서원(義岩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해남의 해촌사(海村祠) 등에 향사(享祀) 되었다.주요 저서로는 '미암일기(眉岩日記)', '어류(語類)', '전석(箋釋)', '대 전서집람(大全書集覽)', '속휘변(續諱辯)', '강목고이(綱目考異)', '역 대요록(歷代要錄)' 외 2편 '속몽구(續蒙求)', '천해록(川海錄)', '헌근록(獻芹錄)', '경서석소(經書釋疏)', '수초일기(手抄日記)' 등이 있다.

양산보[편집]

梁山甫 (1503~1557)

총명·단정한 성품으로 어렸을 때부터 글을 깨우쳤다. 열다섯이 되던 해에 정암 조광조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여 1519년 기묘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숫자를 줄여 뽑는 바람에 낙방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중종이 그를 친히 불러 위로의 말과 함께 지필묵을 하사하셨다.그해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괴수가 되었다 하여 화순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무등산 아래에 소쇄원이라는 별서정원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스스로를 소쇄옹이라 하였다.그 후에도 여러 번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해왔으나 끝내 버티어 나가지 않고 한가롭게 산중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연구하며 지냈다.

곡성군[편집]

곡성의 상징물[편집]

谷城-象徵物

곡성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

곡성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북동부에 위치하는데 지/리산의 여파로 500m 고도로서, 본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다. 여기서는 산맥이 종횡으로 달리면서 4개의 소지역으로 갈라 놓았다. 이들 소지역은 각각 생활권을 이루고 있다. 이중 곡성은 지리산맥·팔량치산맥(八良峙山脈)과 육십치산맥(六十峙山脈) 사이에 있는 남원권에 속한다.한편, 섬진강과 지류 보성강, 기타 소하천은 이들 산지를 남북에서 개석하면서 유역의 평야를 관개한다. 평야 중에서 동북부 곡산을 중심한 곡산분지는 비교적 넓고 비옥한 편이다. 지질은 화강편마암계와 편상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면적 547㎢, 인구 3만 6,916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내륙 산간 분지에 있기 때문에 한서의 차가 꽤 심한 편이다. 강수량은 섬진강 유역이어서 다우지대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 13

, 1월 평균 -1

, 8월 평균 26.7

,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곡성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시대에는 욕내(欲乃) 혹은 욕천(浴川)군으로 불리었는데 우리말을 한자로 빌려 표현한 것으로 욕의 훈인 골이 골짜기의 의미로서 골짜기가 많은 곳(지역)을 의미하는데 지세에 따라 산맥과 하천의 흐름을 본따 신라 경덕왕때 곡성(曲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시골장을 떠돌아 다니는 장꾼들이 교통이 불편하여 통행에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곡성(哭聲)이라 불렀고, 그 후 곡성(穀城)으로 되었으나 국가에서 지명만을 생각하고 조세를 부과한다는 주민여론에 따라 이를 개칭 곡성(谷城)으로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려 초에 승평군(昇平郡)에 속하였다가 후에 나주에 속하고 명종 2년(1172) 감무(監務)를 두고 조선 때에 현으로 되었다.임진왜란 후에 남원에 예속시켰다가 광해군 1년(1609) 다시 현을 두었다. 고종 32년(1895) 군으로 승격, 1914년 창평군의 옥산면 등 8면을 합쳐 지금의 곡성군이 되었다. 1979년 곡성면이 곡성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3년 석곡면 운룡리가 승주군 주암면에 옥과면 송전리가 입면에, 겸면 봉산리가 옥과면에 편입되었다. 1읍(곡성), 10면(오곡·삼기·석곡·목사동·죽곡·고달·옥과·입·겸·오산)을 관할한다.

곡성의 산업[편집]

-産業

주산업은 농업이며 미맥이 성하고 양봉·양잠·축산도 활발하다. 전체 면적의 75%가 임야이다. 경지 면적 9,935.9㏊ 중 논 7,188㏊, 밭 2,747㏊이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면화·삼 등이고, 농가 부업으로 양잠이 성하여 많은 수익을 올린다. 또, 유축 농가가 많아 한우·돼지 사육이 성하다.야산을 개간하여 조성한 왜성(矮性) 사과단지에서는 당도가 높고 맛이 좋은 사과가 많이 생산되며 참깨와 땅콩 등의 특용작물도 많이 생산된다. 가내 수공업으로 부채·종이·도자기와 그 밖에 죽세공품들이 생산된다.

특산물[편집]

사과·배·대추·딸기·오이·수박·멜론·칠봉 파시 등이 유명하다.

곡성의 교통[편집]

-交通

전라선이 남북으로 종관하고, 인접 각군으로 도로가 뻗어 산간지방치고는 교통이 편리하다.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어서 더욱 편리할 뿐더러 고등원예작물, 포도, 복숭아 등 과수를 재배하여 대도시로 공급하고 있다.

곡성읍[편집]

谷城邑

섬진강 곡성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으며 군청 소재지이다. 인접 각군에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발달한 지방이다. 또 전라선이 개통된 후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활기를 띠고 있으며, 그리하여 전라북도의 남원과 더불어 섬진강 유역에 있어서 교통의 요지로 되어 있다. 시가는 서쪽에 700m 이상의 고봉이 솟아 있으나 동쪽으로는 저평하다.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목기·죽기 등의 가내수공업이 성하며 이의 집산지이기도 하다.

관음사[편집]

觀音寺

오산면에 있는 사찰. 백제 분서왕 3년(300) 처녀 성덕(聖德)이 창건하였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까지 다섯 번을 고쳐 지었으며, 이때 건축된 원통전(圓通殿)은 고려 말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경내 면적은 약 4정보 가량 되며 13채가 있다.

도림사[편집]

道林寺

신라 무열왕 7년(660)에 원효대사가 사불산 화엄사로부터 이주하여 지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웅진당·지장전·칠성각·요사채 등이 있고 절 입구에는 허백련 화백이 쓴 「오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도선국사·사명대사·서산대사 등 도인이 숲같이 많이 모여들었다 하여 도리사라 하는데 인근에는 도림사 계곡이 있다.해발 735m의 동악산 남쪽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동악계곡·성출 계곡에는 아홉 구비마다 펼쳐진 반석 위로 맑은 물줄기가 마치 비단을 펼쳐놓은 듯이 흐르고 수맥이 연중 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송과 폭포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는 도림사 계곡은 지방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림사 괘불[편집]

道林寺掛佛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9호. 주존이 좌상이며 협시는 입상인 특이한 예로 후불벽화(탱화)의 한 잔영으로 보인다. 평소에는 괘불함에 넣어 두어 대웅전 불상 뒤편에 봉안해 두었다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꺼내어 신도들 앞에 내놓기 때문에 쉽게 접할 기회가 적다.이 삼존불정화(三尊佛幀畵)는 17세기 후반기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본존불은 결가부좌(結跏趺座)를 한 좌상인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는 전형적인 석가여래좌상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머리는 뾰족한 보주형의 정상발주가 있고 나발은 극도로 형식화되었고 얼굴은 둥근 원망상으로 긴 눈썹에 눈은 작은 편이다.좌우대칭으로 서 있는 두 보살은 거의 비슷한 형태인데 왼쪽 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묘사된 것으로 오른쪽 향좌가 다르다. 이 괘불정화는 전체적으로 청·홍·녹, 그리고 연분홍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어 조선 전기의 조화된 색감을 엿볼 수 있으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는 화기(畵記)가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태안사[편집]

泰安寺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신라 경덕왕 원년(724)에 동리산파를 일으켜 세웠던 혜철스님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대안사로 불리웠으며 우리나라 불교의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파의 본산지이다. 선암사·송광사·화엄사·쌍계사 등을 거느려 꽤 오랫동안 영화를 누렸던 사찰로 혜철선사와 도선국사가 득도한 정양 수도의 도량이다.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광자선사가 32칸으로 넓혀 지었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조계종의 본산지로 지위를 굳혀 따로 분리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효령대군이 머물며 왕가의 온당으로 삼았다.

태안사 대웅전[편집]

泰安寺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근래 새로 중수하였으며 4벌대의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삼고 원형초석 위에 원형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기둥 위에서 결구한 다포형식의 겹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전면과 측면의 중앙칸에는 주간에 2구의 공포를 얹고 나머지 칸에는 주간에 1구씩 내 3출목의 공포를 얹었다. 전면의 중앙칸에는 4분합 솟을빗살문을 달았고 나머지 4칸에는 2분합 솟을빗살문을 달았다.

구례군[편집]

구례의 상징물[편집]

求禮-象徵物

구례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산수유, 새는 산비둘기이다.

구례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북동 모퉁이에 위치하며, 거의 화강편마암계로 되어 있다. 군의 동북부는 지리산계에 속하므로 대체로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동쪽의 지리산의 지봉인 노고단, 반야봉(般若峰:1,751m), 황장산(黃獐山:942m) 등과 북에 역시 그 열매인 만복대(萬福臺:1,437m), 대두산(大頭山:775m), 서쪽 곡성과의 경계지대에는 천마산(天馬山:691m), 천왕봉(698m)의 제봉 등 여러 고준한 산들이 사방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중앙부의 섬진강 유역에는 동서 4㎞, 남북 8㎞ 가량의 비교적 비옥한 분지가 있다. 면적 443㎢, 인구 3만 1,846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반도의 남쪽에 위치하여 있지만 산간 내륙 지방이므로 기온의 교차가 심하나 강우량은 섬진강 유역이기 때문에 많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 12.5

, 1월 평균 -1

, 8월 평균 26.8

, 연평균 강수량 1,400㎜이다.

노고단[편집]

老姑壇

해발 1,507m의 영봉으로, 신라 시대에 산신을 봉안하였고 화랑 국선의 연무 도장이었다. 과거부터 외국인들의 피서지로서 유명하며 현재도 그 시설이 많이 있다. 구례군과 남원시 사이에 있으며 반야봉·도솔봉·왕증봉·만복대 등과 같이 소백산맥 중에 솟아 있다.

구례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구례로 고쳐서 곡성군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가 고려 초에는 남원부에 속하였고, 인종 21년(1143)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 13년(1415)에는 다시 고쳐서 현감(縣監)이 됐고, 연산군 5년(1499) 현을 부곡(部曲)으로 고쳐 남원에 예속했다. 중종 2년(1507) 다시 현으로 되었고, 1906년에 전라남도로 편입되었으며 1963년에 구례면이 구례읍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읍(구례), 7면(문척·간전·토지·마산·광의·용방·산동)을 관할하고 있다.

구례의 산업[편집]

-産業

주요 농산물은 쌀·면화·보리 등이며, 농가 부업으로 양잠·무명·삼베·명주·목기 등을 생산한다. 근래에는 비닐 하우스 재배에 의한 원예농업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구례읍과 문척면·가전면 일대에는 채원이 있어서, 여기서는 무·배추·마늘·고추 등의 소채류가 많이 생산된다.임야가 80%를 차지하나, 용재 산출은 별로 없고 수목을 이용하여 목기(木器)와 신탄제조가 성하다. 또 작설차·표고·송이버섯 및 한봉(韓蜂)꿀 등이 생산되며, 특산물인 산수유는 산동면이 주산지이다. 그 밖에 백지(白芷), 생지황(生地黃), 산삼, 복령(茯?), 당귀 등의 약재도 많이 산출된다.

특산물[편집]

구례오이·산수유차·고로쇠약수·우리밀가루·죽도·나물·작설차·은어·섬지들배·단감·방울토마토 등이 유명하다.

구례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전라선이 섬진강 대안을 달리고 있어서 교통은 주로 승주군과의 경계에 있는 구례구(求禮口)를 통한다. 그 외 구례∼순천, 구례∼하동 등지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으며 지리산을 횡단하는 도로가 있다. 섬진강은 구례까지 소항(溯航)할 수 있어 주운이 편한 좋은 수송로이다.

구례읍[편집]

求禮邑

소백산맥 중벽지의 중심지이다. 전남지방에서 지리산을 탐승하는 데 있어서 관문 역할을 하며, 섬진강의 협곡미와 부근의 울창한 준봉 노고단·반야봉 등을 등지고 있다. 남원과 진주에 통하는 도로가 있으며 섬진강을 따라 이곳까지 배가 올라온다.

구례의 관광[편집]

-觀光

지리산의 등산구이고, 노고단을 비롯한 명승 고적이 부근에 많이 있어 연중 관광·유람객이 끊일 사이 없다. 따라서 본군에서는 구례를 관광 도시화하고, 지리산 관광개발 및 문화재를 보수하는 사업을 벌여 더욱 관광객의 유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화엄사[편집]

華嚴寺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소재. 백제 성왕 22년(544)에 연기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만 세워졌다가 그 후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고 신라 헌강왕 1년(875)에 도선국사가 또다시 증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인조 8년(1630)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 만인 인조 14년(1636) 완성하였다.사찰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와 20여 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는 일주문을 지나 약 30

꺾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金剛力士), 문수(文殊), 보현(普賢)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는데 금강문과는 서쪽방향으로 벗겨놓은 것이 독특하다.천왕문을 지나 다시 올라가면 보제루(普濟樓)에 이르고 이 보제루는 다른 절에서는 그 밑을 통과하여 대웅전에 이르는 방법과는 달리 누의 옆을 돌아가게 되어 있다. 절내에는 동·서 두 개의 탑이 사선방향으로 보이며 동측탑의 윗부분보다 한단 더 높은 위에 대웅전이 있고 서쪽탑의 윗부분에는 각황전이 위치하고 있다.

화엄사 영산회괘불탱화[편집]

華嚴寺靈山會掛佛幀畵

국보 제301호. 가로 7.76cm, 세로 11.95m에 이르는 거대한 화면에 석가모니불과 문수·보현 보살을 중심으로 사천왕과 십대제자, 2구의 분신불, 십장제불 등이 적절하게 배치된 군집도 형식이다.중앙에 높다랗게 마련한 단의 연화좌 위에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 본존불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키모양 광배를 지니고 있어 좌우 협시보살과 함께 3존상 중심이지만 하단부에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는 사천왕상 2구(동방의 지국천왕, 서방의 광목천왕)는 화면 상단 좌우에 그려놓아 네 모서리를 지켜주는 것과도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본존불을 위시한 각상들의 형태는 균형잡힌 모습으로 둥근 얼굴에 어깨 또한 동그스럼하게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각 상의 이목구비는 커다란 코와 입, 길다란 귀를 하고 있으며 육계가 뾰족해진 석가불의 머리에는 중앙 계주와 정상 계주가 뚜렷하며, 커진 화면과는 달리 사용한 필선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여 각각 상들에게 개성과 함께 세련미를 더해주고 있다.홍색과 녹색 위주의 색조는 밝고 화사한 중간색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은은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을 주며, 특히 화려한 채색무늬와 금색무늬는 한층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전반적으로 늘씬하고 균형잡힌 형태인데다 치밀하게 장식된 꽃무늬와 작고 둥근 꽃무늬는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등은 17세기 중엽경의 불화에서 보이는 양식적 특징으로 이 괘불은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편집]

華嚴寺覺皇殿-石燈

국보 제12호.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높이 6.36m로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큰 것이다. 전체의 모습은 인도의 우단바라 꽃모양이며 지대석은 팔각형이며 간석(竿石)의 형태가 특이하다. 연화대석 중간의 간석은 장구모양으로 둘레에는 꽃무늬띠가 둘려 있고 팔각화사석(八角火舍石) 사면에는 화창이 뚫려 있고 상륜부는 팔각주형(八角柱形), 팔각제형(八角悌形), 팔각앙련(八角仰蓮), 운문복발형(雲紋覆鉢形) 등이 층층이 있다. 구조의 안정감과 웅건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엄사 각황전[편집]

華嚴寺覺皇殿

국보 제67호. 본래 이름은 장육전. 부처님의 몸을 가리켜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해서 본래 장육전에는 석가 여래의 모습만한 금색의 불상을 모셔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장육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당시의 모습이나 불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본래 이 건물은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의상대사가 3층, 사면 7칸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30년 만인 조선 인조 14년(1636) 벽암선사가 복구했으나 각황전만은 복구되지 못했다가 조선 숙종 25년(1699) 계파대사가 중건했다.정면 7칸(26.8m), 측면 5칸(18.3m), 높이 15m로 내부 전체가 한 칸의 방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안에 세워져 있는 기둥 하나 하나는 한 그루의 나무로만 만들어져 있다.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고 천장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주변이 경사지게 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그 예가 드물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편집]

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35호. 높이 6.7m. 사사자삼층석탑은 불국사 다보탑과 비교되는 탑으로 그 형식면에서도 아주 독특하다.기본구조형은 2층기단 위에 삼층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서 특이한 의장(意匠)을 보인다. 하층기단면에는 3구씩의 안상을 조각하여 그 안에 천인상(天人像)을 양각하였고 모두 보관(寶冠)과 영락(瓔洛)으로 몸을 장식했다. 삼층기단은 우주(隅柱)를 대신하여 암수 두 쌍의 사자를 배치하고 두상에는 연화대를 얹어 갑석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일반형의 탑신과 같으나 1층 탑신 사면에 문살형을 모방하여 조각하고 그 좌우로 인왕상, 양측면에 사천왕상, 배면에 보살상을 양각했다.석탑 바로 앞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하면 석등의 무릎을 꿇어 앉아 있는 숭상은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던 연기조사가 차공양을 하는 모습이라고 한다.이 탑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당시 신앙의 일면과 함께 조각의 독특한 재주를 엿볼 수 있으며 현재 국내에 남은 사자탑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불국사의 다보탑과 함께 한국석탑의 쌍벽을 이룬다.

연곡사 북부도[편집]

?谷寺北浮屠

국보 제54호. 높이 3.10m로 4각형의 지대석위에 구름 무늬가 조각된 8각형의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무늬를 돌려 가운데 돌(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8각형의 탑신 각 면은 문짝(門扉-문비), 향로, 사천왕상이 장식되었고 비교적 넓은 불집(화사석) 위의 지붕돌(옥개석)은 나무로 만든 건물의 양식을 따라 기왓골 등을 정성 들여 새기는 등 각 부분의 조각이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연곡사 동부도[편집]

?谷寺東浮屠

국보 제53호. 부도란 이름난 스님의 사리나 그 유골을 안치한 돌탑을 말한다. 연곡사 동부도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가운데 가장 형태가 아름답고 장식과 조각이 정교한 작품이다. 밑면이 8각형으로 각 기둥의 집모양(8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고 평면이 네모꼴인 지대석 위에 8각 2단의 아래 받침대 돌을 얹었는데 구름 속의 용과 사자가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 받침돌과 윗부분의 돌에는 눈모양 속에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장(8부신중)과 가릉빈가(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 머리는 사람, 몸은 새) 사천왕상 및 문짝 등 갖가지 형태의 무늬를 조각하였다. 탑 아래 기단 부분이 높기는 하나 안정된 비례를 잃지 않았고 각부의 조각수법 또한 정교하다.이 부도는 도선국사부도라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고 전체적인 형태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짐작된다.

고흥군[편집]

고흥의 상징물[편집]

高興-象徵物

고흥군을 상징하는 꽃은 동백꽃, 나무는 유자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고흥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남해안 중앙부에서 돌출한 반도로서 동은 순천만, 서는 보성만을 끼고 있다. 거금도, 내·외 나로도 등을 비롯하여 대소 160개의 섬(유인도 40, 무인도 120)으로 되어 있다.소백산맥의 한 지맥이 벌교 부근에서 뻗어 내려 침강한 이 반도는 면적 약 776㎢(2002)인데, 가장 좁은 부분의 폭이 2m에 불과한 좁고 100m 이하인 낮은 지협(地峽)에 의하여 육지에 매달려 있다. 산맥이 침강한 곳이므로 군내는 거의 산지로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팔영산(609m)·척대봉(592m)·마복산(539m)을 비롯하여 400m 이상 되는 산이 여기 저기 솟아 있다.좁은 평야이기는 하지만 지협부와 보성만 연안에 분포되어 있고, 해창만에 넓은 간석지가 개척되었으며 오마도도 완공되었다. 지질은 반도의 남반부는 신라통, 외나로도와 반도 북반부는 반암, 남해안과 서해안 거금도 일대는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면적 776㎢이고 인구는 9만 2,798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해안에 위치한 반도이고, 부근을 흐르는 해류 때문에 해양성 기후로, 우리나라 유수의 휴양지를 이루고 있다. 난대성 식물이 무성하여 남국적 정취를 풍긴다. 연평균 기온 13.7

, 1월 평균 1.5

, 8월 평균 26.3

, 최고 기온 39.3

(1932.7), 최저 기온 -13.5

(1922.1), 연평균 강수량 1,411㎜이다.

고흥의 연혁[편집]

-沿革

처음에는 고이부곡(高伊部曲)이었는데 충렬왕 11년(1285)에 고흥이라 개칭, 감무(監務)를 두고 현으로 승격하였으며, 조선 태조 6년(1397)에는 진을 두고 병마사 겸 현사(縣事)로서 다스렸다. 세종 5년(1423)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바꿔 두원(荳原)현으로 옮겨서 흥양(興陽)이라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고종 32년(1895) 군으로 승격, 군수를 두었으며, 1914년 고흥군으로 개칭하였다. 1973년에 도양면이, 1979년에 고흥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도덕면을 신설하였다.2읍(고흥·도양), 14면(풍양·도덕·금산·도화·포두·봉래·점암·과역·남양·동강·대서·두원·동일·영남)을 관할한다.

고흥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을 주로 하며 삼면이 바다이고, 특히 다도해의 어장에 연해 있기 때문에 어업도 성하여 반농반어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저류·저마(모시) 및 누에고치 등이다.또 해창만(海昌灣) 간척 사업을 완공시켜 2,560정보의 농토를 얻게 되어 연간 10만의 미곡을 생산할 수 있다. 또 오마도(五馬島) 간척사업으로 농경지 832정보를 얻었다.

수산업[편집]

주요 수산물은 도미·멸치·삼치·조개류·굴·김 등이다. 훌륭한 어장을 끼고 있으며 또한 연안은 패류·굴·해태양식이 성하며 나로도에 어업 전진기지를 설치, 근해어업을 중심으로 원양 및 연안 어업의 안방노릇을 부담시키고 있다. 패류양식은 광주지방에 공급하기 위해 더욱 성하다. 해태양식은 금산면을 중심으로 풍양면, 기타 해안에서 수십만 속을 생산하는데, 전국에서 완도 다음가는 산지이며 질이 좋아 주로 대일수출을 많이 한다. 굴양식은 해창만의 간척사업 완성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으나 봉래면·점암면, 기타 해안에 새로운 양식장을 개척하고 있다.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오마도의 새우양식장에서는 매년 200톤의 보리새우가 생산된다.

특산물[편집]

홍화씨분말·유자차·마늘장아찌·참다래·오이·단감·갯논쌀·마른돌김·건미역 등이 유명하다.

고흥의 교통[편집]

-交通

한 줄기의 국도가 반도의 중앙을 따라 내나로도까지 통하고 있으며 기타 도로가 이 도로에서 뻗어 있다. 연안에는 좋은 항만이 여러 개 있어 편리하다. 또 당오리에는 제주와의 해저전신연락이 있다.

고흥읍[편집]

高興邑

군청 소재지이며 반도의 대략 중앙부에 있는 분지에 발달한 지방. 교통의 중심지이며 해산물의 집산지이다.군내에는 교육청 산하의 도서관 1개 소, 극장 2개 소, 병·의원 27개 소와 한국방송공사의 라디오·텔레비전 중계소(中繼所)가 있다. 교육시설로는 고등학교 7개 교, 중학교 16개 교, 초등학교 22개 교(2002)가 있다.

능가사 범종[편집]

楞伽寺梵鐘

지방유형문화재 제69호. 고흥군 정암면 성기리 371-1. 높이 157cm, 입술지름 101cm(1구). 쌍용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관(용통)을 두지 않고 조그마한 운형 구멍으로 대신하고 있다. 천판(天板)은 이중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는 바 상단은 16엽이고 하단은 활짝핀 무늬다. 그 밑으로 상대(上帶)에는 범자문(梵字文)을 돌렸으며 4면에 장방형의 유곽안에 9개의 유두를 뚜렷하게 조각했다. 양 옆에는 천의를 걸친 보살입상과 문짝 모양을 장식하였는데 그 안에 ‘주상전하수만세’라는 문구가 양각되었다.또 종신 중앙부에는 주역에서 나타나는 전양(全陽)인 건(乾·

)에서 전음(全陰)인 곤(坤·

)에 이르기까지의 팔괘를 양각으로 둘렀는 바 이는 조선 범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팔괘 밑에 음각의 명문대가 있는데 여기에 능가사 창건주인 정현대사(호·벽천)의 이름이 보인다. 하대로 내려와서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그 안에 꽃잎과 당초문대(唐草紋帶)를 돌렸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편집]

多島海海上國立公園

1,7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은 섬 하나하나가 모두 자연의 조각품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이 지역은 신라시대 때는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원나라 등과 통상을 하던 해상무역로에 해당되며, 조선시대에는 이 충무공이 왜적을 격파하던 전쟁터로 곳곳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소록도공원[편집]

小鹿島公園

나환자가 집단정착하여 요양하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으나 앞으로 세계 속의 해양 관광지로 개발이 가능한 곳이다.녹동에서 1km가 채 안 되는 곳에 있는 섬으로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 부르며 섬의 길이는 14km,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1.5배 되는 작은 섬이다. 이곳은 경치가 뛰어나고 기후가 따뜻하며 울창한 소나무 숲과 고운 모래사장이 길이 1.2km, 폭60cm, 평균 수심은 1.5m~2.5m이다.이곳에는 나환자를 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시설이 완벽한 국립소록병원이 있으며, 섬 내에서의 숙박은 금지되어 있다. 섬의 동쪽에는 해수욕장이 있다.

보성군[편집]

보성의 상징물[편집]

寶城-象徵物

보성군을 상징하는 꽃은 연산홍,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보성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남해안 중서부에 위치하고 해안은 신라통에 속하며 대부분의 지역은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백이산(伯夷山:584m)·망일봉(望日峰:650m)·존제산(尊帝山:740m)·방문산(方文山:576m) 등이 남서

북동방향으로 해안을 따라 솟고, 제암산(帝岩山)에서 발원하는 섬진강의 지류 보성강을 사이에 두고 제암·벽옥·천마 등의 여러 산이 솟아 좁은 해안지대와 중앙의 보성강 유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산으로서 호남지방에서는 설봉(雪峰) 다음 가는 고지대를 이루고 있다. 면적 663㎢, 인구 5만 7,392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쪽에 위치하고 난류가 근해를 흘러 온난하고 우리나라 최다우지 중의 하나이다. 연평균 기온 12.6

, 1월 평균 -0.5

, 8월 평균 27.8

, 최고 기온 36

(1942. 7), 최저 기온 -16.1

(1925. 11), 연평균 강수량 1,450㎜이다.

보성만[편집]

寶城灣

전라남도 고흥군 남해안에 발달된 만으로서 고흥반도에 의하여 가로 막혀 있다. 해안선의 연장은 55.5㎞이다.연안 일대는 산란장으로 적합하여 산란기인 봄·여름에는 남해해류를 따라 물고기가 북상하는데 조기·갈치·삼치·도미·민어·전갱이 등의 난해성 어류가 많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며, 또한 김과 굴의 양식업도 성하다.보성강 웅치의 제암산에서 발원하여 보성·곡성·곡지를 흘러 구례와 곡성 중간 지점에서 섬진강에 합치는 지류이다. 길이는 약 120㎞이며 상·중류 지방은 연안에 약간의 평지가 발달되어 있으나, 하류 지방에서는 협곡을 이룬다. 상류에는 전라남도 유일의 수력발전소가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여 농업용수로도 쓰여 그 이용도가 높다.

홍교[편집]

虹橋

보물 제304호. 벌교읍 소재. 영조 13년(1737) 송광사 주지 사미성습보제(沙彌性習普濟) 등이 건조한 후 광무 3년(1899)에 중수하였다. 용두가 한 개씩 조각되어 3개의 석교를 만들고 특히 벌교강의 조수를 받아들이는 부분에 이 홍교를 만들어 옛날에는 홍교를 통해 어선이 왕래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구름교만이 남아 있다.

보성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 복홀군(伏忽郡)으로 신라 경덕왕 때 대로(代勞)·계수(季水)·오아·안정(安定) 4현을 예속시켜 보성군으로 개칭, 고려 성종 15년(996)에 패주(貝州)로 하여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곧 보성(일명 山陽)으로 복귀, 속현 7현이었다. 조선 때에 다시 보성군으로 칭하였으며, 1929년 4월 순천군에서 5개리를 벌교면에 편입, 1937년 7월 이를 읍으로 승격시키고, 1941년에는 장흥군의 3개면이 편입되고 보성면은 읍으로 승격되었다. 2읍(보성·벌교), 10면(노동·미력·겸백·율어·복내·문덕·조성·득량·회천·웅치)을 관할한다.

보성의 산업[편집]

-産業

대부분이 산악지대를 이루나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많아 각종 농작물이 매우 잘 자라 미곡 외에 면화는 1만 1,000톤 이상 수확을 올린 때도 있다.연안에서는 제염도 하고 근해에서는 어로작업·양식업도 성하다. 특히 다원(茶園)·용문석(龍紋席)이 유명하다. 전라남도 유일의 수력발전소가 보성강에 건설되어 전력을 공급하게 되어 공업 발전이 크게 기대된다.

농수산업[편집]

논이 많고, 농가 1가구당 경지 면적은 1.3㏊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면화·콩·고구마·감·누에고치 등이다. 특히 조성면 축내리에서 만드는 용문석은 국내에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외국에 수출도 한다. 또 여기서 나는 차(茶)는 국내 수요를 충당할 목표로 생산하고 있다.조성면과 득량면 일대에서 조성된 1,700㏊의 간척지에서는 품질이 우수한 쌀이 생산된다. 주요 해산물은 새우·굴·김·멸치 등이다.

광공업[편집]

무연탄과 금의 매장량이 많은데 명봉 보성·우산·신명 등의 탄광과 청월광산의 금이 유명하다. 보성강에는 시설용량 3,120kW의 수력발전소가 있어 부근 일대에 송전하고 있으며 20여 개 지류는 수량이 풍부하여 농업용수의 이용도가 높다. 벌교읍과 미력면에 각각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고용 효과가 크다.

특산물[편집]

녹차·고막·쪽파·어성초·방울토마토·배·딸기·참다래·오이·느타리버섯·조성수정미·녹우·녹돈·매실닭·삼베·유기·옹기·전통염색 등이 유명하다.

보성의 교통·관광[편집]

-交通·觀光

철도는 광주선이 해안을 달리고 또 국도가 병주하기 때문에 해안지방은 편리하나, 내륙은 산지이기 때문에 벌교에서 북서쪽 화순으로 통하는 국도가 통할 뿐 큰 도로는 없다.보성은 산악이 중첩하여 절경이 많다. 보성만에 위치한 율포(栗浦)는 백사청송과 천연의 환경이 이상적인 해수욕장으로서 이름이 높다. 이 밖에 보물로 지정된 홍교(虹橋)가 있으며 명승 고적으로 대원사(大原寺)·용추폭포 등이 있으며 서재필 사당과 생가, 천연기념물 제90호인 은행나무가 있다.

보성읍[편집]

寶城邑

군청 소재지이며 1930년 광주선의 개통과 더불어 발전하기 시작한 교통의 요지이고 농·수산물의 집산지이다. 읍의 남부 봉산리에는 우리나라 제일의 다원(茶園)이 있다.

벌교읍[편집]

筏橋邑

장흥·강진과 더불어 부근 평야지대의 농산물의 집산시장으로 또 교통의 요지로 발달한 소도읍이다. 이 지방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인구도 보성읍의 2배나 된다.

벌교 홍교[편집]

筏橋虹橋

보물 제304호. 벌교읍 벌교리 153 소재. 길이 27m, 높이 3m. 3간(間)의 홍예(虹霓)를 연결축조하고 석교로서 외벽과 난간에 변모가 적지않게 나타나 있다. 궁융형(穹隆形)으로 된 이 석교는 각처에 있으며 또한 선암사(仙岩寺) 승선교(昇仙橋)와 함께 구조형식이 아주 뚜렷한 예이다. 이 홍교는 원래 숙종(肅宗) 44년(1718)에 당시 낙안현(樂安縣)의 주민들에 의해 현지에 떼다리(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놓은 다리)를 놓았는데 영조 4년(1728)에 전남도 지방에 내린 대홍수로 이 다리가 유실되자 그 이듬해 선암사 주지 호암화상(護岩和尙(약휴:若休))이 제자인 초안선사(楚安禪師)를 화주(化主)로 습성대사(習性大師)를 공사감독으로 천거 착공하였으며, 이 공사는 6년후인 영조 10년(1734)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1981~1984년까지 4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실시, 호예의 밑부분과 석교 외벽의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로 교체하여 원형을 되찾았다.

유신리 마애여래좌상[편집]

柳新里磨崖如來坐像

보물 제944호. 율어면 유신리 소재. 전체 높이 4.3m, 좌상 높이 2.1m. 통일신라시대 때의 좌상. 율어면(栗於面)의 존제산(尊帝山:해발 704m)으로 올라가는 입구 산기슭에 있다 유신리 마을에서 약 1km 떨어진 지점인데 가로 4.3m 높이 5m의 암벽에 부조(浮彫)로 양각한 마애불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 그 예가 거의 없는 양 어깨의 어깨걸이라는 특이한 의문을 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북위나 북조시대 금동불에서 유행을 보았던 양식으로 이곳 전남지방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불상의문연구에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성연대는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비봉리 공룡알화석[편집]

飛鳳里恐龍-化石

천연기념물 제418호. 보성군 득량면 비봉리 소재. 119필지 156,685㎡. 중생대 백악기 때의 화석으로 추정된다. 보성군 득량면 비봉리 해안 3km 구간에 걸쳐 보존상태가 완벽한 세계적 규모의 공룡알화석 및 집단산란지이며 공룡알은 해안일원 5개층군에 넓게 분포되어 있으며 대부분 알둥지를 형성하고 있다. 하나의 둥지에서 최소 6개에서 80여 개의 공룡알을 함유하고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한 10여 개의 공룡알둥지와 100여 개의 공룡알이 발견되었으며 수백 개의 알 파편들이 산재되어 있다.알둥지 가운데는 세계적 규모의 공룡알둥지(초대직경 1.5m)가 매우 특징적으로 발견되었으며 공룡알 껍질이 8겹이나 중첩되어 산출되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드문 초식공룡 집단산란지로서 공룡의 부화습성 및 산란지 환경을 밝힐 수 있는 세계적인 학술자료 가치로 평가된다.공룡알 및 둥지 및 공룡알들이 거의 완벽한 모양으로 보존된 세계적 규모의 공룡알화석 집단산란지인 것으로 판명된 보성군 공룡알 화석지는 이곳 해안 일원에서 약 100여 개가 발견되었고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더 많은 공룡알들이 발견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성군의 인물[편집]

-人物

나철[편집]

(1863~1916)

대종교 창시자. 철종 14년(1863)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났다. 1892년 문과에 합격해 훈련원 권지부정자직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에 분개하고 도미하여 미국정부에 한국독립을 호소했으나 당시 일본 공사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이등박문 등 정계요인들에게 동양평화와 한국의 독립보장을 요구하다 역시 실패했다. 을사 5적인 박제순 일당을 제거하고자 1905년 폭발물선물상자를 보냈으나 미리 폭발되어 실패한 후 200여 명의 장사를 모집하고 권총 등을 구입해 1907년 두 차례 거사하였으나 사전 누설로 체포되어 귀양 중에 광무황제의 특명으로 풀려났다.평소 단군을 신앙하며 항일투쟁을 하다가 1910년 대종교를 창교하여 만주에서 30만의 신자를 확보하고 10여 개 소의 학교를 세워 민족사항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다.1916년 구월산에서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며 54세를 일기로 자결하였고, 아들 둘은 목단강 형무소에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교수형을 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에 추서되었다.

서재필[편집]

(1866~1951)

독립운동가·의학박사.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다 7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교류하면서부터 개화사상에 감명받아 신문물에 심취하였다.1884년 갑신개혁을 주도해 3일 천하를 이룬 뒤 이의 실패로 망명하여 미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가 되었다. 1896년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국민을 계도하는 한편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독립문을 세워 민주훈련을 쌓게 하면서 민중운동을 이끌어 우리나라 근대화에 공헌했다. 특히 그는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의 주도로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계몽하다 다시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데 해외에서 자신의 사재를 바쳐 가며 독립운동을 추진하다가 1951년 8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서재필기념사업회가 1991년 설립되어 그의 고향인 문덕면 용암리에 기념사업을 펴고 있다.

양수아[편집]

(1920~1972)

화가. 조선시대 문인화의 거장이며 호남 화단의 원조인 양팽손 선생의 15세손으로써 한국의 피카소라 불린다. 일본의 전쟁화가로 유명한 미야모토의 문하에서 삽화를 공부하며 기와바다 미술전문을 나왔다. 1948년 오지호 화백의 영향으로 아카데믹한 구상회화가 주조를 이루었던 호남 화단에서 파스텔로 그린 추상화전을 가져 충격을 주었다. 6·25 이후 지리산에 입산, 1972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채동선[편집]

(1901~1953)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음악사상가로서 민족정신을 실천한 음악가. 벌교읍 세망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퇴학을 당하고 도일해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려다 적성에 맞지 않아 독일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해 바이올린 독주회와 실내악 운동을 펴면서 연희전문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그는 이화여전 외국어 강의 외에는 창작과 바이올린에 열중하면서 한복에 두루마기, 고무신을 신고 낮에는 농사꾼으로 밤에는 국악채보에 전념하는 등 민족음악 기초 수립에 힘을 기울였다.주위의 친일 권유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한 채 은둔하다가 광복이 되자 고려음악회를 창설해 관현악 합창, 취주악 활동 등을 했다.가곡 「고향」, 「추억」, 「동백꽃」 등이 있다. 벌교 공원에는 정지용 시에 곡을 붙인 대표작 「고향」이 친필 악보대로 새겨지고 작품목록이 수록된 기념비가 서 있다.

화순군[편집]

화순의 상징물[편집]

和順-象徵物

화순군을 상징하는 꽃은 들국화,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화순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서쪽의 하천 유역을 제외하면 해발 고도 400∼900m의 산지로 되어 있다. 소백산맥의 지맥 무등산맥(無等山脈)이 연연히 솟아 무등산(1,187m)·모후산(母後山:919m)·백아산(白鴉山:804m·천운산(天雲山:602m)·화학산(華鶴山:614m) 등 높은 산의 기복이 많아 대체로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는 한편 영산강과 섬진강의 여러 지류가 흘러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고 관개가 편하다. 면적 787㎢, 인구 7만 8,767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대체로 온난한 편이나 내륙지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비교적 심한 대륙성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 12.6

, 1월 평균 0.7

, 8월 평균 26.1

, 연평균 강수량 1,350㎜이다.

적벽[편집]

赤壁

백아산의 창랑천과 무등산의 신령천이 합류한 다음 곡류하여 장학리 옹성산 밑 수십 척의 바위 병풍 아래 와서 적벽강을 이룬다. 조선 중엽 신제의 적벽송(赤壁頌)으로 유명해졌다.

화순의 연혁[편집]

-沿革

마한시대에는 여래비리국(능주·화순), 벽비리국(동북)이었는데, 백제시대 때 화순·능주(綾州)·동복(同福)의 3군을 합친 것으로 화순은 백제의 잉리아현(仍利阿縣)이었고 신라에 와서 여미(汝湄)로 고쳤으며 능성현(陵城縣)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화순으로 고쳐 나주에 속하였다. 후에 능성현에 속하고 감무를 두었다. 공양왕 2년(1390)에는 남평현(南平縣)을 겸하고 조선 태조 3년(1394)에는 동복감무로써 이를 겸하게 하였다.그 후 많은 변천을 거쳐 1895년에 군이 되고, 1914년 능주·동복 양군을 합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능주는 고려 인종 21년(1143)에 현령을 두었고 조선 태종 16년(1416)에 화순에 합쳤다가 갈라졌으나 1914년 다시 화순군으로 병합되었다. 동복도 우여곡절 끝에 조선 태종 5년(1405) 화순에 합하였다가 분리하여 현이 되었다. 그후 군이 되었으나 1914년 다시 화순군에 병합되었다. 1963년 화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1읍(화순), 12면(한천·춘양·청풍·이양·능주·도곡·도암·이서·북·동북·남·동), 1개 출장소가 있다.

화순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이 주업으로 주요 농산물은 쌀이 80%를 차지하며 보리·콩·팥·면화·삼·담배와 양봉·양잠, 소의 사육 및 죽세공품 등이 생산된다.산지가 75%나 되어 석탄을 비롯한 석회석·고령토·규석·납석 등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소량의 금 외에 무연탄의 매장량과 생산량이 많다. 총매장량은 약 1,600만t이며, 이 중 가채매장량은 약 500만t 정도로 추정된다. 연간 약 50만t이 생산되고 있으며, 주로 서울·부산·인천 등에 공급된다.1993년 이후 민영탄광은 문을 닫고 화순공업소에서만 채광작업을 하고 있다.

특산물[편집]

복숭아·방울토마토·배·느타리버섯·단감·참외·누에·포도·더덕·파프리카·영지버섯·표고버섯·마포 등이 유명하다.

화순의 교통[편집]

-交通

광주선이 남북으로 종주하고 장동리(壯東里)에 이르는 탄광선이 화순에서 분기한다. 국도는 장동리에서 광주·순천·벌교의 3방면으로 통하고 호남선에서 분기한 경전선이 군내를 통과한다. 기타 도로도 비교적 잘 정비되어 편리한 편이다.

화순의 문화·관광[편집]

-文化·觀光

능주면 일대에는 역사적 유적지가 비교적 많은데, 특히 조선 중종 때 개혁 정치를 폈던 정암 조광조가 귀양 와서 죽음을 당한 터와 적려유허추모비가 있다. 동복면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맑은 물로 유명한 화순적벽이 있다. 그 밖에 남면 벽송리에 고인돌군, 북면 백아산에 천연 동굴이 있다. 천태산에는 비자나무 숲과 수령이 500년이 넘는 나무들이 있다.관광자원으로는 도암면에 있는 운주사를 비롯해 만연사·쌍봉사·유마사·개천사가 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 운주사에는 석불과 석탑이 많다. 그 밖에 오성산성·예산산성·철옹산성·물염정·화순적벽이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1995년에는 화순온천과 도곡온천이 개장되었다.

화순읍[편집]

和順邑

군청 소재지이고 광주와 가까우며 철도·도로 교통이 편하여 광주의 동남쪽 관문인 동시에 위성도시이기도 하다. 따라서 근교농업이 성행하고 여기서 화순탄광의 철도가 분리된다. 무연탄 외에 죽기(竹器)·농산물·임산물의 집산지이다.

도원서원[편집]

-書院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도수동 915번지 소재. 신재 최산두가 기묘사화로 화를 입고 동북으로 유배되어 이곳 도수동에서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당시 문인들과 교분을 두텁게 하며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자 후세 사람들이 신재 최산두, 우산 안방준, 석천 임억령, 한강 정구 4분을 모시고 향사를 모셨다.

운주사[편집]

雲住寺

화순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2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천태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개천사, 서쪽에는 운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운주사의 창건과 천불천탑의 건립은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한 것을 전해지고 있다.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에 의거해서 이곳 지형이 배형으로 되어 있어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 하여 일명 천불천탑이라 한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전해진 사료에는 아직까지 이 점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조'에 “雲住寺在千佛千塔之左右山背石佛塔名一千又有石室二石佛像異座”란 기록이 있어 현존 석불석탑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사찰경내의 많은 석불 및 석탑은 조각수법이 투박하고 정교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조성연대는 고려중기인 12세기 정도로 평가되며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기간을 두고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984년 이후 4차례 발굴과 석조불감해체복원, 원형다층석탑 보수, 일주문 신축, 보제각 신축 등을 했으며 97년에는 와불진입로를 정비하였다. 현재 사찰경내에는 석탑 21기, 석불 93구가 보존되어 있다.

운주사 구층석탑[편집]

雲住寺九層石塔

보물 제796호.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며 석탑 옆면의 꽃문양이 이색적이다.

운주사 와불[편집]

雲住寺臥佛

도선국사가 하룻날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고자 했으나 공사가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꼬끼오”하고 닭소리를 내는 바람에 석수장이들이 모두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결국 와불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와불이 일어나는 날 이곳이 서울이 된다고 전해온다.

운주사 석조불감[편집]

雲住寺石造佛龕

보물 제797호.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43 소재. 높이 5.0m. 고려시대의 작품. 팔작지붕 형태로 그 안에 석불좌상 이체(二體)가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대고 있다.불감의 평면은 방형으로 평평한 기단석 위에 5매의 판석을 이용하여 짜 맞춘 단상이 있고, 그 위에 1매의 갑석이 있는데 각면에 13엽(葉)의 앙련이 음각되어 있다. 불감내에는 1매의 판석을 세워 공간을 2분(分)하였다.상단은 터져 있고, 양쪽에 화염문이 조각되어 광배역할을 하고 있다. 양 측면은 1매석을 세워 벽체를 구성하였고 전면은 좌우의 벽체로 막아져 있고, 중앙은 열려 있는데 문설주 부분에 여닫이문 시설로 보이는 구멍이 상단 좌·우에만 있다.지붕은 팔작지붕 형태이며, 팔매석으로 이루어졌고, 굵은 용마루가 수평으로 설치되어 있다. 높이 507cm, 넓이 363cm.

운주사 원형다층석탑[편집]

雲住寺圓型多層石塔

보물 제798호.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43 소재. 높이 4.7m. 고려시대의 탑. 이 석탑은 지대석, 기단부분부터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에 이르기까지 모두 원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기단중석만은 10각인데 이 10각도 원에 가까우므로 이 석탑의 명칭을 원형다층석탑이라고 칭하였다. 이 석탑의 구성석재는 원형의 지대석이 1석이고 기단중석이 5매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기단갑석과 탑신부의 탑신 및 옥개석은 모두 1석씩으로 조성되었다.구성은 원형의 지대석 위에 높직한 원형괴임을 각출하고 5매의 석재로 10각의 기단중석을 받았으며 그 위에 갑석을 놓았는데 갑석 하면과 측면에는 앙형의 연꽃 문양을 얇게 조각하였다. 갑석 상면에는 평평하게 별다른 시설 없이 탑신부를 받고 있다.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형태에 있어 이색적인 것으로서 고려시대에 이르러 많이 나타난 특이형 석탑이다.

쌍봉사[편집]

雙峰寺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사동마을에 있다. 곡성 태안사에 있는 혜철 부도비에 혜철이 신무왕 원년(839)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839년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여러 번의 중창을 거듭하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대부분의 건물과 재산이 소실되었고 1950년 6·25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극락전과 대웅전만이 보존되어 오다가 1984년 3층 목조탑 대웅전이 소실되었다. 1986년 대웅전이 복원되고 해탈문·요사채·종각이 건립되었고 97년에는 철감선사탑 탐방로 정비와 육화당 신축공사가 있었다.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과 탑비(보물 제170호)가 있고 목탑으로 쌍봉사 삼층목조탑이 있다.

쌍봉사 철감선사탑[편집]

雙峰寺澈鑑禪師塔

국보 제57호. 총 높이 2.3m. 나무를 다룬 듯 석재가공이 뛰어난 모습이며 8각원당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그 비례감각이 훌륭하다. 당대 최고의 석수장이가 조각했을 것으로 보이며 철감선사의 당시 위치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무등산[편집]

無等山

해발 1,186.8m. 무진악이라는 이름은 무돌의 이두음으로 신라 때부터 쓰인 이름이다. 무돌이란 말은 무지개를 뽑는 돌이란 뜻이다. 서석산은 고려 때부터 불려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상서로운 돌이라는 뜻으로 서석대와 관련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무당산은 신령스런 산이란 뜻을 가졌는데 이 산을 옛사람들은 신적인 산으로 보았던 것이다. 무덤산이란 말은 무등산이 홑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모습이 마치 둥근 무덤처럼 생겼기에 이렇게 부른 것 같다. 무정산은 조선왕조의 이성계가 왕명에 불복한 산이라 하여 무정한 산으로 지칭한데서 연유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무등산이란 명칭은 서석산과 함께 고려 때부터 불려진 이름으로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뜻이다.

장흥군[편집]

장흥의 상징물[편집]

長興-象徵物

장흥군을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 나무는 동백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장흥의 자연[편집]

-自然

전남의 서남부 해안에 위치하며 장흥반도의 동반부를 차지한다. 대부분이 신라통에 속하는 지질이지만 장흥반도의 남단은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동부는 소백산맥의 지맥인 제암산맥이 있어 토지가 높으나 서부는 비교적 낮다. 높은 산으로는 일림산(日林山:664m)·제암산(帝岩山:778m)·국사봉(國師峯:613m)·천관산(天冠山:723m) 등이며 국사봉에서 발원하여 군 중심부를 흘러 강진 쪽으로 빠져 나가는 탐진강(耽津江) 유역은 비옥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기타 계곡지류에 연하여 대상(帶狀)의 농경지가 발달하여 있다.면적 618㎢, 인구 5만 373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해안에 위치한 까닭에 매우 온난하여 피한과 보양에 적당하다. 강수량은 비교적 많은 편이며 여름에 집중한다. 연평균 기온 12.7

, 1월 평균 0.8

, 8월 평균 26.5

, 연평균 강수량 1,500㎜이다.

장흥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으며 경덕왕 때 오아현(烏兒縣)으로 고쳐 보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는 안정현(安定縣)으로 고쳐서 영암군에 속하였다가 부로 승격하였다. 원종 6년(1265)에는 회주목(懷州牧)으로 되고 충선왕 2년(1310)에 다시 격하되어 장흥부가 되었다. 후에 왜구의 침입 때문에 주민이 전부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여 빈 땅이 되었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수녕현(遂寧縣) 중녕산(中寧山)에 성을 쌓고 치소(治所)로 하였다.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가 되고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었다.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고 1924년, 1936년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1942년 장흥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0년 관산면과 대덕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5년 대덕읍에 회진 출장소가 설치되어 다음해 회진면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대덕읍에서 회진면이 북면, 3읍 7개면이 되고, 1986년 관산읍 옥당, 용산면 인암, 풍길리, 안양면 해창 3구, 장동면 북교 1구, 장평면 용강2구, 봉림리, 우산리, 청용리, 회진면 진목 2구가 분할 3읍 7개면 293개리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3읍(장흥·관산·대덕), 7면(용산·안량·장동·장평·유치·부산·회진)을 관할한다.

장흥의 산업[편집]

-産業

농수산업을 주로 하는데 농토가 비옥한 까닭에 농산물의 단위 수확량이 많다.

농업[편집]

주로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경지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24%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고구마·땅콩 등이 있다.어업은 어로보다 양식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근해는 연중 어로작업을 할 수 있으며 멸치·갈치·도미·고등어·새우·전갱이 등이 많이 잡히고 김의 생산이 많은데, 장흥김은 유명하다.

특산물[편집]

표고버섯·관산딸기와 참다래·방울토마토·유자·오이·단감·쌀·은어·바지락·키조개·장흥김·가시파래·영지 등이 유명하다.

장흥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없으나 장흥을 중심으로 4차선으로 확장되어 도로가 사방으로 통하고 있어 비교적 편리하다. 또 연안은 수운이 편하다.

장흥의 문화·관광[편집]

-文化·觀光

해마다 보림문화제가 열려, 별신제·산신제 등 민속제의와 등불 행렬, 고시조 경연 같은 다양한 민속놀이가 펼쳐진다. 관산읍 방촌리에 위(魏)씨 가문의 후손들이 수백 년 전부터 동족촌을 이루고 살아온 전통 문화 마을이다. 또한, 고인돌을 비롯해 선사시대의 유물·유적과 장승, 정통 가옥이 남아 있다. 그 밖에 관광자원으로는 탐진강 유역·수문포해수욕장·천관산·남산공원·창랑정·보림사·수인산성·조선백자 도요지가 있다. 보림사에는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림사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장흥읍[편집]

長興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군청 소재지이며, 교통의 중심지와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발달한 소도읍이다. 탐진강의 우안 구릉(177m)에 발달하고 강 건너 동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끝에 제암산·삼자산 등 높은 산지가 가로막혀 있다. 읍내에서는 탈곡기·제초기 등 농기구와 가구·운동구 등을 생산하고 있다.

수인산성[편집]

-山城

유치면 대리 산 225 소재. 초초 축성연대와 규모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석성으로 사방주위가 6km에 이르며 4~5m 높이를 유지하고 성벽과 수구 등이 완전한 석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말 도강·탐진·보성·장흥·영암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서 왜구를 피했으며, 조선시대에 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성은 물림쌓기를 하였으며 조개껍질에 생석회를 사용하여 고정하였다. 고려 때 축조한 것으로 보며, 구한말 의병들이 사용하기도 했고 6·25 때도 사용되었다. 성내에 봉수지와 수인사지, 창고지 등 많은 건물지와 유구 등이 남아 호국성지로 활용되고 있다.

장흥향교[편집]

長興鄕校

장흥읍 교촌리 4 소재. 태조 7년(1398)에 건립되어 그 위치가 한번도 옮겨지지 않고 오늘에 이른 건물이다. 5성 10철 송조 6현, 우리나라 18현을 봉안하고 있는 대성전은 전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이다. 정면의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이며, 동·서재는 대성전의 좌우에 배치되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이다. 600여 년 동안 위치를 변경하지 않고 장흥지방의 유학진흥과 교화를 담당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천관사[편집]

天冠寺

관성읍 농안리 740 소재.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동국여지승람'에 통일신라시대 통영화상이 세웠다고 하는 절로 천관산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천관사의 옛 이름은 화엄사라 하였고, 옛날에는 89암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폐찰되었다. 현존하는 법당은 1963년도에 장한택 스님이 극락보전을 그 터에 다시 세우고, 다시 천관사라 칭하였고, 신도들이 요사채를 짓고 주위에 산재해 있는 탑 등의 유물을 모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천관사 삼층석탑[편집]

天冠寺三層石塔

보물 제795호. 양질의 화강암에 이중기단의 일반형으로 매우 안정감이 있으나 옥개석 상면의 추녀 끝 전각이 밋밋하고 중후하여 전체적으로 담담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 여러 개의 지대석 위에 중석을 놓아 각 면에 우주를 새겼으나 탱주가 생략되었고 하대갑석은 약간 두꺼운 편이나 상면은 가벼운 경사와 함께 2단괴임으로 상층단을 받치고 있다. 또한 상층갑석의 부연이 생략되고 옥개석 층급 받침이 얇은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보림사[편집]

寶林寺

유치면 덕봉리 45 소재. 유치면 가지산 계곡(봉덕리 45번지)에 위치한 고찰이다. 동양 3보림(인도·중국·한국)의 하나로 우리나라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이곳에 원표대덕이 터를 잡은 당시인 759년에는 초암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며, 옛 모습의 보림사는 웅장하고 수려한 모습이었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쇠락하다가 한국전쟁 때 병화를 겪기도 하였다.현재 보림사에는 철조비로자나불 등의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가 남아 있어 역사의 흐름과 우리나라의 불교미술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보림사에는 선승들이 즐겨 들었던 작설차가 특산품으로 전한다.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편집]

寶林寺三層石塔-石燈

국보 제44호. 남탑 높이 5.4m, 북탑 높이 5.9m, 석등 높이 3.12m.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때의 작품.보림사의 대적광전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삼층석탑과 1개의 석등으로 신라의 전형적인 탑 양식으로 옥개석 위에 연꽃을 아로새긴 보주를 얹어 석등의 전체적인 인상이 경쾌하고 화려하다.또한 석등은 석탑과 함께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이 시대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아하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걸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흥의 인물[편집]

-人物

김필[편집]

(1426~1470)

조선시대의 정치가이며 대문장가. 21세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이조·병조 정랑을 거쳐 홍문관 교리 및 승정원 부승지와 사인 홍문관 부제학과 충청·경남·경기도 감사를 거쳐 이조참판을 지냈다.그가 사인으로 있을 때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단종이 즉위하여 숙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흥으로 내려와서 자연과 글을 벗삼아 사인안 바위 아래 정자를 짓고 낚시와 술로 인생을 즐겼다.

백광홍[편집]

(1522~1556)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에서 출생하여 대과에 장원한 수재이다. 부모님 밑에서 공부하여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 1552년(명종 7)에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평사에 이르렀으며 시와 문장에 능하여 8대 문장가로 손꼽혔다. 특히 그가 지은 '관서별곡'은 기행가사문학의 정수이다.

위백규[편집]

(1727~1798)

호남파 실학의 대가. 전라도 장흥부 계항동(지금의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서 태어났다. 영조 34년(1758)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지리서 겸 팔도지리서인 환영지를 저술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정현신보를 저술하여 당시 민정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비판 고발하고 제도상의 개혁을 주장하며 다산의 목민심서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작품으로는 가사인 '농가', '자회가', '권학가', '오륜가' 등 90여 편이 전해오고 있다.

강진군[편집]

강진의 상징물[편집]

康津-象徵物

강진군을 상징하는 꽃은 동백꽃,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강진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서남부 해안에 위치하며 편상화강암·신라통, 기타 여러 가지 지질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남북으로 럭비공 모양으로 생겼으며 중앙에는 강진만이 좁게 깊숙이 만입하고 해안선은 83㎞에 이르고 만내에는 유인도 1, 무인도 5개가 있다. 월출산(月出山, 809m)·수인봉(修仁峰, 561m)·부용산(芙蓉山, 608m)·천관산(723m) 등 산이 솟아 있는 외에는 대체로 낮은 구릉성 산지이나 장흥에서 발원하여 강진만에 유입하는 탐진강(耽津江) 유역은 비옥한 농토로서 남해안에서 가장 넓은 평야이다. 면적 496㎢, 인구 4만 6,475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해안에 면해 있고 난류의 영향으로 매우 온난한 해양성 기후를 나타내며, 강수량도 많아 난대성 식물이 무성하다. 연평균 기온 13.5

, 1월 평균 1

, 8월 평균 26.5

, 연평균 강수량 1,450㎜이다.

강진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시대에는 도무군의 도강과 동음현의 탐진이 영합된 지역으로 도강의 “강”자와 탐진의 “진”자를 합하여 강진이라 불렀다. 도강현은 백제시대에는 도무군,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도무군이 양무군으로, 동음현은 탐진현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 때 도강군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탐진현 지역 일부가 영암군과 장흥부에 속했다. 명종 2년(서기 1172) 이곳에 감무를 두어 행정과 병사를 병무하게 하였고, 조선 태종 17년(1417) 도강현 지역의 일부인 현 병영면 지역에 전라도 병영(병마도절제사의 영)을 신설함과 동시에 도강현 일부와 탐진현을 합하여 강진현이라 하였다. 그 치소를 도강의 치소이던 송계로 옮겼으나 조선 성종 6년(1475)에 다시 탐진의 치소(현 강진읍)로 복귀하였다.조선 고종 32년(1896)에 지방제도개혁에 따라 강진군으로 개칭하고, 1914년에 백도면(현 신전면과 해남군 북일면의 일부)의 월성·향리·만수·좌일·금당·내봉·속리·중산·방책·남촌 등 10개 리를 해남군 부평면에 이속시키는 동시에 완도군 관할이던 가우도를 본군 도암면에 영속시켰다. 1936년 7월 1일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도암면 남부의 7개 리를 분할하여 신전 출장소를 설치하였고, 도암면 영파리를 강진읍에 편입하였으며, 서기 1974년 10월 26일 도암면 신전출장소를 군 출장소로 승격시켰다. 1980년 1월 1일자로 강진읍 송전리를 2개 마을에서 3개 마을(송정·장전·화전)로 분리하였으며, 1982년 5월 10일 대구면 남부의 5개 리를 분할하여 마량출장소를 개소하였고 1983년 2월 15일 신전출장소가 신전면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4월 1일 마량출장소가 마량면으로 승격되었고, 1990년 8월 1일 해남군 옥천면 봉황리 일원이 도암면으로 편입되었다.1읍(강진), 10면(군동·칠량·대구·도암·신전·성전·작천·병영·옴천·마량)을 관할한다.

탐진강[편집]

耽津江

국사봉(國士峰, 영암군)에서 발원하여 작천·주교천 등 지류를 합하여 강진만으로 들어간다. 이 강은 비록 작은 하천이지만 농업용수로 이용가치가 적지 않으며 유역에는 비옥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강진의 산업[편집]

-産業

주생업은 농업이지만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 온 강진만은 풍파가 없어 좋은 어업 근거지를 이루고 있다. 연안에는 염전과 양식업이 발달하여 이곳 경제에 곧 도움을 주고, 특히 도자기 제조는 예로부터 유명하다.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쌀보리·맥주보리와 마늘·고추·배·포도와 다양한 원예작물, 그리고 죽세공품·면직·견직물 등이다. 수산물은 조기·갈치·김·조개류·소금 등이며 연안에는 패류와 해조류를 비롯한 양식업이 성하다.규석광산과 고령토가 산출되어 도자기제조업이 성하다. 고려청자의 산지로 유명하며 대구면에는 고려시대의 도요지가 많이 있다.

특산물[편집]

딸기·오이·방울토마토·파프리카·배·단감·유자·느타리버섯·표고버섯·영지·아가리쿠스·토하젓 등이 유명하다.

강진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아직 없으나 강진을 중심으로 국도가 북으로는 영암, 서로는 해남, 남으로는 마량, 동으로는 장흥에 연결된다. 강진만은 연안항로가 트여 수륙이 모두 편리한 교통의 요지이다.

강진의 문화·관광[편집]

-文化·觀光

만덕산 계곡의 백련사(白蓮寺)는 동백나무숲으로 유명하며 도암면 만덕리에 정약용(丁若鏞)이 유배되어 머물던 다산초당이 있다. 대구면에는 100여 개의 도요지가 산재해 있다. 강진읍 탑동(塔洞)에는 시인 김영랑(金永郎)의 생가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13호인 무위사극락전을 비롯하여 선각대사편광탑비 등 보물 4점, 대구면 사당리(沙堂里)의 푸조나무 등 천연기념물 4점이 있다.

강진읍[편집]

康津邑

해발 420m 내외의 무두봉에서 남으로 나란히 뻗은 두 능선 중 동쪽 능선 끝에 발달하여 강진만에 임한 소도읍으로 군청 소재지이다. 해남·보성·장흥과 더불어 농수산물의 집산지이자 교통상의 요지이기도 하다. 쌀과 면화, 그리고 김의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군내에는 중학교 10개 교, 고등학교 5개 교(1994)가 있으며 병원과 의원이 17개 소, 공회당, 문화원 등이 있다.

금곡사 삼층석탑[편집]

金谷寺三層石塔

보물 제829호. 높이 5.6m. 군동면 파산리 산 143 소재. 기단중석의 전·후·측면에서 각기 1매씩의 판석이 유실된 상태였고 갑석에서도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원형의 모습을 잃은 채 보존되어 왔었다. 1988년 해체 복원공사를 실시하였으며, 이때 세존진신사리 32괴가 발견되었다.삼층석탑으로서는 5m가 넘는 거탑이다. 전형양식을 고수하면서도 기단부 구성이나 옥개석의 우동마루 등 일부에서 백제계 석탑의 분위기가 약간 가미되고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 초반기로 추정된다.

무위사 극락보전[편집]

無爲寺極樂寶殿

국보 제13호. 정면 3칸, 측면 3칸.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소재. 무위사는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서기 617) 원효대사가 관음사로 창건하였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려왔던 사실이 경내에 현존하고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명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네 번째 중건인 서기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전만은 1956년 경에 실시된 보수공사에서 보존 후벽의 벽화명문 기록이 판독됨으로써 성화 12년(서기 1476) 보다 앞서는 건물일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했었다. 그러나 1983년 옥개부 이상을 해체 보수할 때 중앙칸 종도리 장혈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1430)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건물 내부에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뤘고 내부 벽에는 여러 보살 및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당대 인물화가인 오도자의 신필이라고 전한다.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편집]

無爲寺先覺大師偏光塔碑

보물 제507호. 탑신 높이는 2.35m, 폭은 1.12m이다. 고려 초기의 탑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소재. 탑제는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암탑명병존”이라 시작하여 찬자 최언위와 서자 유훈율의 관등성명을 기록하고 있다.대사의 법휘는 형미, 속성은 최씨이다. 신라 헌강왕 8년(882) 18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폐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가지산 보림사 구산선문의 태두인 보희선사에게 선법을 배운 뒤 27세에 인당 운거도응의 심인을 받고 효공왕 9년(905)에 귀국하여 강진 무위갑사에 머물렀다. 비를 세운 개운삼년은 고려 정종 원년(946)으로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이다.비는 극락보전 서방 약 30m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재 원장 내에 남향을 하고 있다. 명부의 조기는 당대의 타비에 비해 사실성의 경향을 띠었다. 특히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월남사지 모전석탑[편집]

月南寺址模塼石塔

국보 제298호.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소재. 중국의 전탑양식을 따른 모전석탑으로 그 분포상황은 우리나라 중부지방에 많은 밀도를 보였으나 일부에서는 지방으로도 그 전파의 예를 남겼다.탑의 구성은 단층 기단 위에 삼층석탑으로 기단구조에서부터 전탑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이 석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단부나 탑신부에서 다수의 소석재로 각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석탑은 모전탑이면서 석재결구에 있어 다분히 백제탑의 양식이 엿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탑의 기본양식을 따르면서도 백제탑 구성을 전승한 예로서 이 지역에 백제계 석탑 양식이 계승되고 있음이 주목된다.한편 월남사는 폐사되고 현재는 탑과 석비만 남아 있다. 이 탑 후방 약 30m 지점 민가에는 법당의 주초석과 석탑의 결구석으로 보이는 석재 등이 산재하고 있다.

영랑생가[편집]

永郞生家

1930년대 대표적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의 생가로 이곳에서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6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고 1948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다. 현재 군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그의 시비가 있다.

해남군[편집]

해남의 상징물[편집]

海南-象徵物

해남군을 상징하는 꽃은 동백, 나무는 동백나무, 새는 산비둘기이다.

해남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최서남단에 위치하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으며, 산이(山二)·화원(花源)·해남(海南) 등 삼대 바다로 구성되어 있다. 소백산맥의 말단이 해남반도의 끝까지 뻗쳐 내려가 구릉을 기복시킨다. 해남반도 동쪽 중앙의 대둔산(大芚山, 672m)을 최고봉으로 가학산(駕鶴山, 650)·달마산(489m)·금강산(金剛山,481m)·관자산·두륜산·고다산·관두산 등 제산이 솟아 있다. 해남 북쪽에서 서쪽으로 화원반도와 산이반도를 일으켰으며, 이들 반도는 굴곡이 심하여 지협부도가 몇 군데 있다.또 연안에는 크고 작은 여러 섬이 산재해 있으며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에는 급한 조류가 흐르는 유명한 명량해협이 있다. 화원반도와 해남반도 서해안은 화강암, 해남반도 서해안과 해남을 중심한 화원반도의 기부는 편상화강암, 그 밖에 평안계와 신라통 등이 교대로 갈려 지질 구조가 복잡하다. 면적 882㎢, 인구 9만 2,459명(2002.12)이다.

기후[편집]

서해안에 오리발모양으로 갈라진 반도인 까닭에 해양성을 나타내 매우 온화한 기후로서 난대식물이 무성하다. 그렇지만 겨울에는 서북풍을 막아주는 산지가 없어 기온의 교차가 현저히 나타난다. 연평균 기온 13.5

, 1월 평균 1.9

, 8월 평균 26

, 최고 기온 38.1

(1939. 7), 최저 기온 -14.5

(1931. 1), 연평균 강수량 1,400㎜이다.

해남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 성왕 16년(538) 새금현, 고서이현, 황술현을 설치했는데, 신라 때 침명(浸溟)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때 해남으로 고쳐 영암군에 속하였다가 조선 태종 9년(1409)에 진도현에 합하여 해진현(海珍縣)이 되었다. 세종 19년(1437)에는 현감을 두고, 또 수군전라우수영을 두어 남쪽 해상 방비의 요지로 삼았다. 1895년 군으로 되었고, 1955년 해남면이 해남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북일면이 신설되었다.1읍(해남), 13면(삼산·화산·현산·송지·북평·북일·옥천·계곡·마산·황산·산이·문내·화원)을 관할한다.

해남의 산업[편집]

-産業

곳곳에 있는 넓은 평야는 비옥하고 관개시설이 잘 되어 수리안전답이 50%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화원반도에서 목포를 잇는 간척사업의 결과 100㎢ 내외의 농지를 얻게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물고구마는 호남 일대의 명물이며, 연안에서는 어획·양식·제염이 성하고 명반석 또한 이곳의 특산물이다.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면화·고구마·담배·인삼 등이다.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가구가 많다. 주요 어획물은 고등어·전광어·갈치·도미·새우 등이며, 김·굴의 양식과 제염이 성하다.

옥매산에서는 납석·고령토·석회석·규석·규사 등이 산출되는데 그 중 고령토는 백암 광산에서 많이 난다.

특산물[편집]

참다래·옥성공예·녹향주·아가리쿠스·겨울배추·오청자 등이 유명하다.

해남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의 개통은 없으나 도로가 광주와 완도, 영암

강진

해남으로 통하며 진도대교로 해남에서 진도까지 통하고 연안에는 양항만이 있어 연안 항로가 열려 수륙교통이 편하다.

해남의 문화·관광[편집]

-文化·觀光

추석을 전후해 해남강강술래 향토축제가 열린다. 대표적인 관광자원은 두륜산 도립공원과 윤선도의 유적지, 그리고 땅끝 마을이다. 두륜산 중턱에 있는 대흥사(대준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라남도의 3대 사철에 속한다.해남읍 연동리에는 고산 윤선도의 옛 집인 녹우단이 있다. 송지면 갈두리 남쪽 끝은 토말(땅끝)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한반도 육지의 최남단이다. 1981년에 이 곳에 토말비석과 토말탑을 세웠다. 황산면 우항리에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많이 발견되어 세계 공룡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곳에서 발견된 ‘물갈퀴가 달린 새’의 발자국 화석은 미국에서 발견된 것보다 2천만

3천만 년 앞선 것이다.

해남읍[편집]

海南邑

군청 소재지인 해남읍은 화원반도의 기부(基部) 금강산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영매산, 만대산이 금강산과 더불어 북쪽을 가로막고 있다.만대산은 동쪽에서 남으로 굽어 뻗고, 중간에 우술치라는 고개를 만들어 동서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되어 있다. 서쪽에는 남곽산이 있어 결국 사방 6㎞되는 평야의 북변에 위치하는 셈이다. 인접 각 군과 각 섬으로 통하는 도로가 집중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그리하여 정기시(定期市)가 열리며 농수산물의 집산이 성하다.

윤두서상[편집]

尹斗緖像

국보 제240호. 해남읍 연동리 82 윤씨 종가 소재.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描寫力)을 보여주는 윤두서의 자화상은 안면(顔面)의 붓질이 많이 물리는 곳에서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가는 선으로 처리된 수염은 안면을 보다 부각시켜서 예리하게 응시하듯 그려진 눈동자와 함께 강한 힘과 생기를 느끼게 하며 거짓 없는 외모와 그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동양인의 자화상으로는 최고(最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흥사[편집]

大興寺

13대 종사와 대강사를 배출한 대흥사는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이다. 지금은 대한 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22교구본사(敎區本寺)로 해남(海南)·목포(木浦)·영암(靈巖)·무안(務安)·신안(新安)·진도(珍島)·완도(莞島) 등 8개 시군의 말사(末寺)를 관할한다. 해남읍에서 12km 지점, 행정구역으로는 해남군 삼산면(三山面) 구림리(九林里)에 속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5년(544)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였다.사찰 경내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침계루(枕溪樓)·명부전(冥府殿)·백설당(白雪堂)·대향각(大香閣)·봉향각·동국서원·표충사(表忠祠)·강례재·서산대사유물관(西山大師遺物館)·보련각(寶蓮閣)·일로향실(一爐香室)·청신암(淸神庵)·진불암(眞佛庵)·일지암(一枝庵)·만일암(挽日庵)·북미륵암(北彌勒庵) 등이 있다.석탑으로는 대흥사 응진전(應眞殿) 앞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320호)·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북미륵암 동탑·만일암지(挽日庵址) 오층탑 등이 있다. 대흥사는 56기의 부도가 있는데, 한 사찰의 경내에 이처럼 많은 부도가 조성된 예는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이렇게 많은 부도가 조성된 것은 조선시대의 불교조각사와 불교사상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대흥사는 입구에서 시작되는 4km쯤의 수림터널을 지나서 4계절 내내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약 2,400ha의 산세(山勢)로 유명하다.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유명한 도량이며 창건한 후 한번도 재앙이 없었다.

미황사[편집]

美黃寺

미황사는 우리나라 불교 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하는 고찰로서 옛날에는 크고 작은 가람이 20여 동이나 있었던 거찰(巨刹)이다. 대웅전은 보물 제947호로서 규모나 정교함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건물로 신라시대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일부 소실되었으며 현종 원년(1660)에 중수를 거듭하였다. 최근 1982년 대웅전 해체복원시 대들보에서 묵서명이 나왔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나한전도 건륭 16년(1751) 3월 16일에, 대웅전은 같은 해인 4월 11일에 각각 상황 되었다고 한다.위의 기록으로 보면 대웅전과 응진당은 모두 18세기 중엽의 건물이며 이곳에 있는 벽화는 19세기경의 그림으로 추정되어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울돌목[편집]

바다가 운다고 해 명량(鳴梁)이라고 하는 울돌목은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 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 사이를 소용돌이 치는 급류가 흐른다. 이러한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튕겨져 나오는 바다소리가 20리 밖까지도 들린다고 한다. 하루 몇 차례 밀물과 썰물이 한길 넘게 턱이 지고 거품이 일며 용솟음치는 특수한 형세로 세계적으로 유사한 곳을 찾아 볼 수 없는 천혜의 해협이다. 따라서 목포에서 제주도나 완도 쪽으로 가는 대형 페리호들도 지름길인 이곳을 지나려면 썰물 때를 기다려 지나갈 정도로 물살이 거세다. 울돌목 바다 위로 지금은 아취형 진도대교가 놓여 있다.

해남의 인물[편집]

-人物

서산대사[편집]

(1520~1604)

조선 선조 때의 고승·승병장. 호는 청허(淸虛)·서산(西山), 성은 최(崔), 승명은 휴정(休靜)이다.안주에서 태어나 영관 대사에게서 불법을 듣고 승려가 되었다. 1549년에 승과에 급제하고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으로 8도 16종 도총섭이 되어, 승병을 모아 승군장으로 활약했다. 1593년 한성 수복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군권을 제자인 사명당(유정)에게 넘긴 후 묘향산 원적암에서 여생을 보냈다.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받아들여, 이때부터 우리나라 불교는 선종인 조계종으로 일원화되었다.서산대사는 갑진년 1월 23일 입적하기 전에 유촉(遺囑)하기를 “내 의발(衣髮)을 해남 대흥사에 전하라”하였다. 제자들의 말하기를 “문도(門徒)가 1천여 있고 묘향산(妙香山) 또한 명승인데 어찌하여 벽지해우(僻地海隅)에 전하라 하십니까?” 하니 서산대사가 말하기를 “하나는 그곳이 기화이초(寄花異草) 편시광경(片時光景)하고 포백숙율(布帛菽栗)이 항구하며 월출산과 달마산 천관산(天冠山) 선은산(仙隱山)이 위호(圍護)하고 수류구곡(水流九曲)하니 만세불훼(萬歲不毁)의 땅이요, 하나는 왕화미급(王化未及)의 땅이라 나라의 관심을 받으라는 것이며, 하나는 처영(處英) 및 제자들이 모두 남녘에 있고 내가 출가한 곳이니 소귀처(所歸處) 함이 당연하지 않겠나”하였다.저서로 '청허당집', '선가귀감'이 있다.

김남주[편집]

(~1994)

1980년대 이후 한국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저항시인. 70년대 초반부터 줄기차게 반민족 반민주적인 시를 썼다. 1973년 제4공화국이 유신을 발표하자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내용의 지하신문 '함성', '고발'을 발간하여 10개월 간의 처절한 감옥생활을 경험하고 「잿더미」라는 시로 '창작과 비평'에 데뷔했다. 삼산면 봉학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70년대 격변의 시기에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 3선 개헌반대, 교련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1970년대 유신독재체제와 맞서 칼날같은 시를 쏟아내고 민주주의로 향하던 1980년대를 옥중에서 보내면서도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 등의 옥중시집을 발표해 현실비판의 당당한 문학지평을 열어왔다.

윤두서[편집]

(1668~?)

조선시대의 문인·화가. 호는 공재(恭齋).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 해남 연동에서 태어났다. 1693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시서화·음악·공예 등 다방면에 능통했고 지리·천문·수학 등 폭넓은 학식을 지닌 실학자였으며 겸재 정선(謙齋 鄭善)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과 함께 조선 후기 삼재(三齋)로 꼽히는 화가이다.공재의 그림은 보물 제481호로 지정된 해남 윤씨 가전고화첩 두 권에 수록된 700여 점, 그 외 50여 점 등 120여 점이 전하고 있는데 소재는 산수(山水)·자화상(自畵像)·풍속화(風俗畵)·초상화(肖像畵) 등으로 다양하다. 그는 모든 인간이나 동식물을 그릴 때 종일 관찰한 뒤에야 비로소 그려 그의 그림은 사실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정신의 표현까지 이르고 있다.

영암군[편집]

영암의 상징물[편집]

靈巖-象徵物

영암군을 상징하는 꽃은 매화,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산비둘기이다.

영암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서남부에 위치하여 영산강(榮山江)을 사이에 두고 무안반도와 목포를 바라보며 대소 26개 도서를 거느리고 있는 본군은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영산강 안에 부분적으로 신라통 지질이 깔려 있다. 소백산맥의 말단이 군의 남동부까지 다달아 화학산(華鶴山, 613m)·월출산(月出山, 809m)·달마산(達磨山) 등 여러 산이 솟아 비교적 높은 산지를 이루고 서쪽은 저평한 해안 평야로서 비옥하다. 목포만 일대는 서호·삼호 등 반도를 비롯하여 갑각(岬角)이 많다. 영산강의 지류인 영암천·장천 등 소하천이 있다. 면적 566㎢, 인구 6만 5,069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쪽 해안에 위치한 까닭으로 온난한 편이나 겨울에는 서북풍의 영향을 받아 기온의 교차가 크게 나타난다. 연평균 기온 13.2

, 1월 평균 1.4

, 8월 평균 26.1

, 연평균 강수량 1,350㎜이다.

영암의 연혁[편집]

-沿革

삼한시대 마한에 속했고, 백제 때 월내군(月奈郡)이었으며, 신라 때 영암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성종 14년(995)에는 낭주안남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로 승격했다. 또 현종 19년(1028)에 영암군으로 고쳤다. 1896년, 1910년, 1973년에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1979년 영암면이 영암읍으로 승격하였다.2읍(영암·삼호), 9면(덕진·금전·신북·시종·도포·군서·서호·학산·미암)을 관할한다.

영암의 산업[편집]

-産業

기후, 관개시설 등으로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여 토지 이용률은 160% 내외이며 특히 이 지방은 예부터 면작이 성했는데 서호·삼호반도를 비롯하여 곶(串)이 많아 연안에서는 천일제염도 행해지고 있다. 목포·영산강 지역 종합개발이 완성되면 이곳도 넓은 간척지를 얻게 된다. 죽세공품인 빗과 새우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콩·면화·누에고치·채소류 등이다. 주요 수산물은 해조류·어류·패류 등이다.

특산물[편집]

참빗·무화과·오이·어란·배·장어구이·단감·수박·간척지쌀·고구마·김장무·상추·풋고추·애호박·방울토마토·한우·돼지고기·흑염소·결명자차·느타리버섯·장미·긍정토하젓·메주된장 등이 유명하다.

영암의 교통[편집]

-交通

군내에 철도는 아직 없으나 도로망은 잘 정비되어 북은 영산포에서 호남선과 접촉이 되며, 남은 반월치(半月峙)·돈밭재(錢田峙)를 넘어 장흥·강진 방면과 연락된다. 또 서쪽으로 영산강 연안의 해창과 목포 및 지호지간의 대안에 있는 용당은 매일 정기항로가 있으며 국도도 4차선 도로로 확장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영암의 문화·관광[편집]

-文化·觀光

1980년대 중반에 서호면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시종면에서는 돌도끼·삼각형돌칼·돌화살촉 등의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으며, 시종면 일대는 우리나라 최대의 독무덤 밀집지역이다. 군서면에는 백제의 학문과 문화를 일본에 전파한 왕인박사의 유적지가 있다. 이 곳은 신라 말의 승려이자 음양설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영암읍[편집]

靈巖邑

군청 소재지이며, 남쪽 소금강이란 별칭이 있는 월출산의 북록 평야에 위치하며 교통의 요지이다. 남동쪽은 산지대이지만 북쪽과 서쪽은 비옥한 해안평야이기 때문에 농산물이 풍부하고 농산물의 집산지로 활기가 있다.

월출산[편집]

月出山

신라시대에는 월나산이라 불려졌고, 고려시대에는 월생산이라 불렀다. 월출산국립공원은 1988년 6월 11일 19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1.88㎢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국립공원이다. 주봉 천황봉(天皇峰, 807m)을 중심으로 구정봉, 미왕재 등에서 펼쳐지는 경치는 천하절경으로 일찍이 호남의 소금강이라 칭해 왔다.월출산의 또 다른 매력은 구름다리이다. 지상 120m의 높이에 건설된 이 다리는 길이가 52m, 폭이 60c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또한 칠치폭포·바람폭포·무지개폭포·안개골 폭포 등이 장관이다.월출산은 동백나무·소사나무·신갈나무·산닥나무·조릿개 등 식물 621종이 있다. 희귀식물로는 끈끈이주걱·이삭귀개·땅귀개 등 특산식물을 비롯한 555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도갑사[편집]

道岬寺

본군 군서면 도갑리에 있는 절이다. 신라 문무왕 1년(661) 도선(道詵)이 창건하고 그 후 신미(信眉)와 수미(守眉)가 중건하였다. 이 절에 있는 국보 제50호인 해탈문과 보물 제89호인 석조여래좌상은 후세에 길이 남을 미술품이며, 이

밖에도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있다.이 절 입구에는 벚꽃나무가 1㎞ 이상이나 국도 양편에 늘어서 있어 봄철에는 꽃의 터널을 이룬다.

월출산 마애여래좌상[편집]

月出山磨崖如來坐像

자연암석에 조각한 높이 8.5m의 마애석불. 9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모양이 원만하고 상하구조의 비례가 알맞아 안정감과 장엄한 인상을 준다. 조각수법이 매우 정밀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모습이 웅대하다.본존불의 우측에는 주불에 비해 매우 작은 87cm의 협시입불이 양각되어 있다.

영암의 인물[편집]

-人物

김완규[편집]

(1876~1949)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 호는 송암(松巖). 1898년 여수 통신주사(麗水通信主事),한성부주사(漢城府主事) 등을 지내고, 국권상실 이후에는 천도교에 입교하여 봉도(奉導)·법암장(法庵長) 등을 역임하였다.1919년 2월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하여 상경하여,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그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그 달 27일 김상규의 집에서 최린·오세창·권병덕 등과 서명·날인하였다. 3월 1일 태화관(泰華館)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가 검거되어 1920년 경성 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왕인[편집]

(?~?)

문장·도덕군자·일본 비조문화의 원조. 근초고왕 때는 백제가 융성하던 시대로 문화도 대단히 발달하였다. 이때 아직기(阿直岐)가 근초고왕의 지시로 말 두 필을 끌고 일본에 건너가서 왕에게 바친 뒤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다가, 그가 경서에 능통함을 안 일본 오진왕(應神王)이 태자 토도치랑자(兎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일본 왕은 아라타(?田別) 등을 보내어 학덕 높은 학자를 보내주기를 청했다. 이에 왕인이 추천되어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왕의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경서에 통달하였으므로 왕의 요청으로 군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다.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치(河內)에 살면서 기록을 맡은 사(史)가 되었으며, 일본조정에 봉사하여 일본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의 역사책 '고사기(古事記)'에는 그의 이름을 화이길사(和邇吉師) 또는 백제국왕 조고주(照古主)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왕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때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는 아신왕 말면경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처럼 기록되어 있어서 전후 30~40년 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에는 전혀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있다.이후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비롯하여 재봉녀(裁縫女)·직공(織工)·야공(冶工)·양주자(釀酒者)·도공(陶工)·안공(鞍工)·화원(畵員)·금공(錦工)·의사 등이 건너가서 백제문화를 일본에 전수해 주어 일본의 고대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왕인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으며, 무덤은 일본 대판(大阪)과 경도(京都)의 중간지점인 히라카타(枚方)에 있다.

도선[편집]

(827∼898)

신라의 승려. 영암에서 태어나 15세에 입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어 불경을 연구하고, 846년 혜철 대사 밑에서 수학했다. 굴 속이나 움막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평생을 보냈는데 죽을 때에는 제자들에게 “인연으로 와서 인연이 다하여 떠나는 것은 떳떳하고도 일상적인 이치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그의 풍수지리설과 음양도참설을 골자로 한 '도선비기'는 신라·고려의 정치·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그 후까지도 계속 국민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효공왕으로부터 국사(國師)라는 시호를 받았고, 고려 현종 때 대선사, 숙종 때 왕사에 추증되었으며, 인종 때 다시 선각국사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무안군[편집]

무안의 상징물[편집]

務安-象徵物

무안군을 상징하는 꽃은 국화,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백로이다.

무안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중앙 서해안에 위치하며, 무안반도를 주체로 임수반도와 망운반도, 그리고 48개의 섬(유인도 7, 무인도 41)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령산맥의 한 지맥이 옥토 전남평야를 지나 무안반도를 일으키고 이 전면에 무수한 섬을 뿌려놓았다. 200m 내외의 구릉이 남북으로 물결치듯 기복하여 저평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농경지는 많으나 강이 적고, 지형 관계상 논보다 밭이 많다. 지질은 무안반도 동반은 편상화강암, 영산강구와 망운반도 기부를 남서·북동방향의 대상을 이룬 지대는 신라통, 임수반도 끝부분은 반암, 나머지 두 반도 부분은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면적 436㎢, 인구 6만

6,240명(2002.12)이다.

기후[편집]

우리나라 남쪽 서해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난류의 영향으로 해양성 기후를 이루고 있어 난대림이 무성하다. 강수량은 적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 13.3

, 1월 평균 0.9

, 8월 평균 26

, 연강수량 1,110㎜이다.

무안의 연혁[편집]

-沿革

삼한 가운데 마한의 땅이었으며, 백제 때 물아혜군(勿阿兮郡)으로서, 신라 경덕왕 때 무안군으로 개칭, 고려 혜종 1년(944)에 물량군(勿良郡)으로 하였다. 성종 10년(991)에 무안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다.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고, 공양왕 3년(1391)에 성산극포 방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 현을 두고, 고종 33년(1896)에 군이 되고, 후에 부(府)가 되었다가 다시 군(郡)으로 되었고, 경술국치 후에는 목포에 예속했다. 1914년 목포·지도군의 일부를 합쳐 군으로 독립했다가 1963년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1968년 말 신안군을 분군(分郡)하였다. 1979년에 무안면이, 1980년에 일로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다. 1999년 초 전남도청이 삼향면 남악리로 이전키로 확정됨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2005년 5월 이전할 예정이다. 또 2006년에는 무안국제공항이 개항한다.2읍(무안·일로), 7면(삼향·몽탄·청계·현경·망운·해제·운남)을 관할하고 있다.

무안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편집]

경지 면적은 논 1만 834㏊인데,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고구마(무안 밤고구마는 해남의 물고구마와 더불어 유명)·콩·양파·담배 등이다. 광복 전까지만 해도 면화재배가 성하였다. 광복 후에는 면방직이 사양화하게 되자 이곳 면화경작지에 양파를 심기 시작하여, 전남 제1의 산지를 이루었다. 마늘은 전남 총생산의 약 24%, 양파는 약 38%, 유채는 약 71%를 차지하고 있다.

수산업[편집]

주요 수산물은 전갱이·고등어·갈치·새우·조기·소금 등이다. 군의 연안은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되어 있어 수산자원이 풍부하다. 각종 양식장에서는 미역·피조개·새고막 등이 생산된다.

특산물[편집]

고구마·양파·세발낙지·톱머리 단감·인삼·마늘·양다래·몽평요·도자기(몽평도요지, 무안도요지) 등이 유명하다.

무안의 교통[편집]

-交通

호남선은 무안반도 동안을, 국도는 서안을 달리고, 기타 도로는 각 반도 끝까지 통해 있고 해상 교통은 목포를 통해 행하여진다. 2006년까지 망운면에 국제공항이 건설될 예정이다.

무안읍[편집]

務安邑

군청 소재지이며, 기차역이 없고, 세력이 목포에 흡수되어 발전이 부진했으나 무안군 내에 전남도청 이전과 국제공항건설로 비약적인 발전이 예상된다. 무안반도의 기부 대략 중앙에 위치하며 철도로부터 떨어져 있으나 도로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5일장이 서고 쌀·담배·면화의 집산시장이다. 종합대학으로 목포대학교(일부)가 있다.

법천사 석장승[편집]

法泉寺石- 전라남도지정 민속자료 제24호. 승달산 중턱에 있는 법천사의 장승. 무안군 몽탄면 발산리 144 소재. 사찰 입구에 세워져 제액과 잡귀를 막는 수문장으로 절을 지키고 사역 내의 살생과 나무채취를 금하며 사원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표적기능을 가진 무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신앙석상이다.조선 인조(1623~1649) 무렵 원명 스님이 법천사 중창 당시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며 투박한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황소만한 주먹코와 조용한 웃음을 선각하여 뚜렷하게 하였다.

목우암 삼존불[편집]

-庵三尊佛

전라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72호.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 956번지 소재. 2m가 넘는 지(紙) 불상으로 양편에 관음, 대세지 보살이 협시하여 전형적인 아미타삼존불임을 알 수 있다. 이 지(紙) 불은 좌상으로 머리와 육계에 나발을 하였으며 상호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원만상이다. 법의는 통견으로 강진 무위사의 아미타삼존불의 형식과 유사하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조성연대는 17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함평군[편집]

함평의 상징물[편집]

咸平-象徵物

함평군을 상징하는 꽃은 백일홍(목백일홍),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함평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서해안 북쪽에 위치하며, 노령산맥의 말단 부분으로, 북쪽 영광군과의 경계선에 불갑산(佛甲山, 517m)이 솟았고 그 여세는 군의 중앙에서 마지막으로 고산봉(高山峰, 359m)을 일으켰다. 북은 구릉성 산지가 물결치고, 남은 영산강 지류인 함평천과 금강천이 군의 중앙을 남류하다가 본류에 합류하여 비교적 비옥한 저평지를 이루어 놓아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이다. 함평만은 수심이 얕아 만조시에라도 겨우 주포와 목교포에 범선이 들어올 정도이다. 함평만 안의 일부는 화강암이고 기타 지역은 신라통의 지질로 되어 있다. 면적 393㎢, 인구 4만 2,123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부 해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비교적 온난하나 겨울에 북서 몬순을 직접 받고 또 바다가 얕은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상당히 크다. 연평균 기온 13

, 1월평균 0

, 8월 평균 26.3

, 연평균 강수량 1,400㎜이다.

함평의 연혁[편집]

-沿革

함풍(咸豊)과 모평(牟平) 양현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함풍은 백제의 굴내현(屈乃縣)인데, 경덕왕 때 함풍으로 고쳐서 무안군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 영광에 속하였다가 명종 때에 감무를 두고, 공양왕 3년(1391)에는 영풍(永豊)·다경(多竟)·해제(海際) 권농사(勸農使)를 겸하였다. 모평 역시 백제의 다지현(多只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다기(多岐)로 고쳐서 무안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가 모평으로 고쳐 영광에 속하였다. 조선 태종 9년(1409)에 함풍·모평 두 현을 합쳐 함풍에서 “함”자, 모평에서 “평”자를 따서 그 이름을 함평으로 고쳤고, 1963년 함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1읍(함평), 8면(손불·신광·학교·엄다·대동·나산·해보·월야)을 관할한다.

함평의 산업[편집]

-産業

주민의 약 60%가 농업에 종사한다. 하천을 이용한 관개 시설과 도내 굴지의 함평저수지 등 수리시설이 발달하고 토지 이용도도 높고 토지가 비옥하여 각종 농산물을 풍부히 산출하며 인구밀도가 매우 높다.쌀 이외의 작물로 쌀보리·맥주보리를 재배하며, 고구마, 양파, 인삼, 연근 등을 많이 생산한다. 특히 손불면에는 4㎢ 내외의 간척지가 있어 연간 1만 석의 쌀을 산출하고, 석두는 굴양식이 유망하며 풍치 좋은 백사장을 끼고 있어 유원지로서도 적당한 곳이다.수산업은 어로어업보다 수산양식이 성하여 굴·김의 양식과 고막·바지락 등이 채취된다. 1972년부터 시작된 대규모양식장이 개발되어 이후 양식업이 성하다. 함평만의 갯벌에서는 낙지·굴·바지락이 많이 나며 특히 보리새우·세발낙지·투석식 굴이 유명하다.

특산물[편집]

춘란·왕골돗자리·함평 윤황소의 붓·느타리버섯·함평천지 토속주·엽삭젓·토하젓·순불간척지쌀 등이 유명하다.

함평의 교통[편집]

-交通

호남선이 군의 남부를 달리고, 국도가 중앙을 남북으로 종주하며 기타 도로망도 잘 정비되어 있다. 연안의 주포·목교포에는 범선이 출입하고, 영산강은 주운이 열려 수륙 교통이 편리하다.

함평읍[편집]

咸平邑

군청 소재지이며, 군의 서남부 호남선 학다리(鶴橋)역에서 4㎞ 북쪽 함평천의 우안의 구릉지에 있다. 동북쪽으로 고산봉을 바라보며, 배후의 구릉은 200m 이내의 낮은 구릉이 서남방향으로 기복하고 있다. 쌀·보리·면화·양파 등의 재배가 성하고, 농산물과 수산물의 집산지이다. 부근에는 기산영수·용천사·약마등 등의 명승고적과 주포해수욕장이 있다.

용천사[편집]

龍泉寺

통일신라 8세기 중반경에 국행사존사(國幸師尊思)가 창건했다. 폭포수 같은 물이 땅속에서 솟구쳐 나오므로 용천사라고 이름지었다. 순종 7년(1634) 임신(1632)에 보전(寶殿:대웅전)을 신설 중창하고, 이후 무인년(1638)에는 쌍연(雙衍) 스님이 새로 단청했다. 탑비각서(塔碑刻書) 공양시주질(供養施主秩)에 의하면 재차 단청을 하기 위해 숙종 11년(1685) 6월 공양시주를 받아 기금을 마련한 다음, 쌍연 스님이 단청한 이래 67년이 지난 숙종 31년(1705) 윤 4월에 단청을 마무리지었다. 1685년에 석등, 1688년에 괘불석주, 그리고 이러한 중창불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입적한 회백당 대사의 부도가 1692년에 만들어졌다.한편 창건 당시의 용천사는 이웃한 영광군 불갑면에 있는 불갑사와 함께 전남의 서해안지역에서의 대표적인 거찰(巨刹)이었다. 6·25 전쟁 당시 전소당한 후 한동안 복구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64년 금당(錦堂0 스님이 약 10평의 대웅전을 복원했고, 1984년에는 박상철 스님이 요사채 21평을 건립하였다. 1996년에 10평의 대웅보전을 헐고 새로이 28평의 대웅보전을 복원하였고 1997년에 사천왕문을 신축하였다. 용천사는 대웅전 1동과 요사채 2동 등 소규모의 사찰이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석탑과 석등이 있으며 그 외 괘불석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는 상당한 규모의 가람을 갖추었던 것 같다.

용천사 석등[편집]

龍泉寺石燈

지방유형문화재 제84호. 석등의 재질은 쑥돌. 높이 2.37m의 이 석등은 1685년 6월에 만든 것으로 크기나 짜임새에 있어 투박하면서도 정감이 있어 조선조 석등으로서는 대표급이다.개석 네 귀에 조각한 거북이형상은 간략한 수법이나 그 모양이 세련되어 볼품이 있다. 용천사가 6·25 당시의 화재로 모든 유물이 분실 또는 손상되었는데 이 석등만은 개석 두 귀의 거북만 파손되었을 뿐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용천사 해시계[편집]

龍泉寺-時計

세로 39cm, 두께 14cm의 정사각형 중 반쪽만 남아 있는 것으로 재질은 쑥돌이며 용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제작연대가 명기되어 있는 석등과 같은 재질의 돌인 점으로 미루어보아 강희 24년(1685) 석등을 만들면서 함께 제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6·25 때 절이 불탄 후 유실되었으나 1980년대 경내 흙덩이 속에서 반쪽의 해시계가 발견되어 보관 중이다. 묘시(卯時:6~8시)부터 유시(酉時:18~20시)까지 표시되어 있다.

보광사 범종[편집]

-寺梵鐘

보광사는 함평읍 함평리 대사동에 있는 절.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범종은 높이 2.1m, 윗둘레 2m, 밑둘레 2.65m, 직경 0.83m이다. 종의 주조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범종으로 약 26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즉하고 있다. 종면에 새겨진 바로는 범주(梵主) 가선(嘉善) 이순창(李淳昌), 주지 계잠(戒岑) 덕현(德賢) 정해(丁亥) 3월이라 되어 있다.종의 무게는 500근(약 300kg)이며 종의 출처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탐문한 바에 따르면 원래 무안의 원갑사(圓甲寺), 일명 강산사(糠山寺)의 종이라고 하는데 원갑사는 백양사의 말사로 무안군 해제면 강산에 있었다고 '면성지(綿城誌)'에 기록되어 있다.원갑사가 폐사되면서 해보면 용천사로 옮겨졌으며 6·25전쟁 때 용천사가 소각되자 기동대원들이 현재의 보광사로 옮겨왔다. 썅용두통으로 중국계통의 주조형식이며 종의 윗부면에 문양이 8개, 중간둘레에 큰 문양 4개가 새겨져 있고 소리가 해맑은 우수한 범종이다.

함평척화비[편집]

咸平斥和碑

전라남도 지방문화재자료 제176호. 함평읍 기각리 함평공원내 공적비군과 함께 있는 척화비. 처음 함평 어느 지역에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구전되는 바로는 함평읍 석성리 구주포 부근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1977년 함평공원을 정화하면서 군청 뒤뜰에 있던 것을 역대 함평현감, 전라도관찰사 등의 공적·선정비 19기와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이 비의 유래는,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4월 미국함대(함장 로저스)가 경기도 남양(南陽)에 침입한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이후 외적을 배척하고 쇄국을 해야 한다는 정신을 국민에게 심어주기 위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중요지역에 세우도록 명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비의 크기에 있어서는 일정한 규정이 없었으나 다만 그 내용만은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다.이 척화비는 재질에 있어 쑥돌을 사용한 호패형의 비로 높이 135cm, 폭 52cm, 두께 20cm, 자경(字經) 8~10cm(대) 4~5cm(소) 이다.비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들이 침범을 하면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해야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 이를 우리 만세 자손에게 일깨운다. 병인년(1866)에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웠다(洋夷侵犯非戰則 和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고 되어 있다.전국에 남아 있는 척화비들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크고, 전라남도 내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개화기의 역사적 유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영광군[편집]

영광의 상징물[편집]

靈光-象徵物

영광군을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 나무는 소나무, 새는 까치이다.

영광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서북부에서 전라북도와 연접한 군이다. 노령산맥의 말단이 이곳까지 미치어 군의 동부에서 북동-남서방향으로 고성산(高城山, 545m)·대청산(大淸山, 592m)·장암산(場岩山, 483m)·불갑산(佛甲山, 517m) 등 여러 산지를 이루었고, 또 남쪽에서는 삼각산(351m)·월암산 등을 이루었다.전체적으로 동남은 비교적 높은 산지가 기복하고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불갑천은 서류하여 황해에 흘러 들어가는데, 이 유역은 비교적 넓고 저평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북쪽 법성포만은 부근 유일의 좋은 기항지일 뿐만 아니라 근처에 우리나라 3대 어장의 하나를 끼고 있어 어업의 근거지로서도 유명하다. 리아스식 해안으로서 출입이 많고 간만의 차가 심하며 간석지가 넓어 좋은 항구가 없다.대소 86개의 도서(유인도 18, 무인도 68)가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192㎞이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이 많고 서부해안은 신라통이다. 면적 474㎢, 인구 6만 7,192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부지방 해안에 위치한 관계로 온난한 편이나 겨울에는 북서풍을 받아 같은 위도상에 있는 동해안 지방과 비교하면 기온이 훨씬 낮다.연평균 기온 13.1

, 1월 평균 -0.5

, 8월 평균 26.5

, 최고 기온 37.1

(1942. 7), 최저 기온 -21.8

(1934. 12), 연평균 강수량 1,250㎜ 내외이다.

영광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무시이군(武尸伊郡)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무령군으로 고쳤고, 고려에 들어와서 영광(靈光 또는 靜靜)으로 고쳤다. 조선 인조 7년(1629)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승격, 이를 거듭하다가 영조 40년(1764)에 군으로 복구하여 고종 32년(1895) 전주부(全州府) 관할이 되었다. 1914년과 1949년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1955년 영광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61년 위도면이 전북 부안면에 편입되었고 1980년 백수면이 백수읍으로 승격하였다. 백수읍에는 원불교의 창시자인 박중빈이 태어난 원불교 성지가 있으며, 묘량면에는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있다.3읍(영광·백수·홍농), 8면(대마·묘량·불갑·군서·군남·염산·법성·낙월)을 관할한다.

영광의 산업[편집]

-産業

농수산업이 주업이다. 북쪽과 황해에 면한 서쪽은 비교적 넓은 평지이고 관개·수리가 발달하여 농산물이 풍부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담배·누에고치·고구마·면화·감·채소 등이며 복숭아·포도 등 과수재배도 성하다. 부근의 안마(鞍馬)군도와 위도(蝟島)군도 일대는 유명한 조기 어장으로서, 영광 굴비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법성포 부근에는 염전이 발달되어 있다.연안 주민은 반농반어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주요 수산물은 조기·낙지·조개류·새우·해조류 등이다. 법성포는 어업의 근거지로서 서해안 유수의 어항이고, 특히 조기는 위도 근해에서 주로 잡히는데 영광 굴비와 왕새우는 예로부터 유명하다. 연안에는 염전이 발달하여 도내 굴지의 소금생산지이다. 기타 굴·대합·고막·바지락 등의 양식도 성해지고 있다.

특산물[편집]

영광굴비·홍화씨·태양고추·새우젓·청결미·화훼·토마토·포도 등이 유명하다.

영광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아직 없으나 군의 중앙부를 법성·영광·광주를 잇는 도로가 사방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서해안의 법성포는 좋은 기항지구실을 하고 있어 수륙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영광읍[편집]

靈光邑

군청 소재지이며 교통의 중심지이다. 북·동에 150

260m의 구릉이 둘려 있고 서남이 트여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농산물과 수산물의 집산이 성하다. 부근에는 불갑산·선은사·금정암·영광팔경 등의 명승고적이 있다.군내에는 초등학교 36, 중학교 10, 고등학교 7개 교가 있으며 극장, 문화원, 종합경기장 등이 있다.

법성포[편집]

法聖浦

법성포는 이른바 ‘영광굴비’의 본고장이다. 이 부근의 해안은 대체로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하여 양항이 드물지만 법성포만은 좋은 기항지로서 유명한 ‘칠산바다(七山灘)’에 가까운 어업근거지로 일찍부터 알려져 있으며, 앞 바다의 안마군도(鞍馬群島)와 위도 등 유명한 조기어장이 있어 4월부터 약 3개월은 파시(波市)가 생겨 흥청댄다.과거에는 부근 12군의 행정·경제의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한촌에 불과할 정도로 쇠퇴했다. 그러나 광주의 외항으로 지목되어 장래가 촉망된다. 부근에는 가매미 해수욕장이 있어 남도의 와이키키라고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서, 1만여 평의 백사장과 아름드리 거송이 있어 피서객을 유혹한다.

불갑사[편집]

佛甲寺

불갑산(516m) 기슭에 자리잡은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384년) 때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제일 처음 지은 불법도량이라는 점을 반영하여 절이름을 불갑사라 하였다.천왕문 안에는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목각하고 고종 1년에 설두선사가 불갑사를 중수하면서 폐사된, 전북 무장연기사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지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천왕문 우측에는 1층과 2층에 각각 종과 북이 걸린 육각누각이 있고 그 누각 옆에 참식나무 한 그루가 있다. 보물 제830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과 측면 모두 가운데 세 짝 문을 연화문과 국화문으로 장식했고 좌우칸에는 소슬 빗살무늬로 처리하여 분위기가 매우 화사하다.불갑사 안에는 만세루·명부전·일광당 그리고 요사채가 있고, 절 뒤에는 천연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참식나무 군락이 있다.

신천리 삼층석탑[편집]

新川里三層石塔

보물 제504호. 묘량면 신천리 1226 소재. 높이가 3.5m이고 화강석으로 쌓았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바로 곁에 석등 1기와 부도 2기가 있어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단층기단 위에 3층으로 쌓은 전통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웅대하지는 않으나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며 각 부분의 조형수법이 섬세하여 세련됨을 보인다.

영광의 인물[편집]

-人物

박중빈[편집]

(1891~1943)

종교인·원불교 교조. 영광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웠다. 9세 때 우주의 자연 현상에 깊은 의심을 품고 수도에 정진하여 1926년 크게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불법연구회를 설치하고, 하나의 둥근 원을 원불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역설하여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게 하였다.저서로 '원불교 교전', '불조 요경' 등이 있다.

공옥진[편집]

(1933~

)

판소리의 명창 공대일(남도 지방문화재)씨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창을 배우기 시작했다. 10세 전후해서 최승희 단체에 들어갔다. 병신춤의 명인이라 부를 만큼 병신춤을 재주로 피워냈고 더불어 원숭이·퓨마 등 동물을 모의한 춤까지 추고 있어 전통연예인이면서 예술적 표현력의 왕성함을 보이는 창작인이기도 하다. 심청전·흥부전 등을 일인극으로 엮어 노래와 춤, 연기 모방춤으로 이끌어냈다.

장성군[편집]

장성의 상징물[편집]

長城-象徵物

장성군을 상징하는 꽃은 백양난, 나무는 단풍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장성의 자연[편집]

-自然

전라남도의 북쪽에 있으며 전라북도의 여러 군과 연접하고 있다. 노령산맥이 이곳에서 최후로 기세를 부려 북쪽 경계 지대에 백양산(白羊山, 721m), 신선봉(763m)·입암산(笠岩山, 655m)·방장산(方丈山, 743m)·문수산(文殊山, 620m) 등이 길게 뻗고, 동쪽의 군계에는 병풍산(屛風山, 822m)·불대산(728m), 서쪽 군계에는 고성산(高城山, 545m)·대청산(大淸山, 592m)·장암산(場岩山, 483m)·불갑산(佛甲山, 517m) 등 산지가 U자를 남서방향으로 거꾸로 세워 놓은 것처럼 동·북·서가 산지로 되어 있다. 북쪽 중앙의 노령(蘆嶺, 276m)은 남북을 왕래하는 좋은 교통로이다. 영산강의 지류인 노령천(蘆嶺川)과 황룡강(黃龍江)은 여러 소 지류를 모아 유역에는 비교적 비옥하고 넓은 평지를 이루어 농경에 적합하다.면적 519㎢, 인구 5만 2,867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대체로 온난한 편이나, 바다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는 도내에서 제일 심하다. 연평균 기온 12.6

, 1월 평균 -1.5

, 8월 평균 26.3

, 최고 기온 40.2

(1944. 7), 최저 기온 -20.3

(1934. 1),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장성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갑성군(岬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초에 장성군으로 고쳐 영광군에 속하였다가 명종 2년(1172)에 분리하여 감무를 두었다. 조선에 와서 현감을 두었다가 선조 33년(1600) 진원현(珍原縣)을 병합하여 한군이 되었다. 효종 6년(1655) 부로 승격하여 고종 32년(1895) 군으로 개칭,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1936년 장성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73년 북상면이 폐면되었다.1읍(장성), 10면(진원·남·동화·삼서·삼계·황룡·서삼·북일·북이·북하)을 관할하고 있다.

장성의 산업[편집]

-産業

농업이 주업이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한천(寒天)과 한지인데, 한천은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등지로 많이 수출했으며 한지와 장판은 전라남도 총소비량의 약 80%를 생산한다.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밀·담배·닥나무·누에고치·한우 등이며, 기타 창호지·장판지·칠(漆)·도자기·삿갓·죽세공품 등이 부업으로 산출된다. 또 겨울철 주야간의 심한 기온 차를 이용하여 한천 제조업이 성하며 산지의 사면을 이용한 양잠업이 성하다.

특산물[편집]

단감·사과·포도·방울토마토·딸기·배·복숭아·솔잎차·곶감·감장아찌·감잎차·감식초·팽이버섯·고로쇠약수·참기름·잔디·전통목공예·범양선·국궁화살 등이 유명하다.

장성의 교통[편집]

-交通

호남선이 노령을 넘어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종관하고 호남고속도로 및 광주∼정읍 사이 국도가 지난다. 장성읍을 중심으로 담양·함평 및 전라북도 순창·고창과 통하는 지방도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장성읍[편집]

長城邑

군청 소재지인데, 옛날에는 황룡강의 지류 노령천(개천) 협곡을 따라 노령을 넘어 전라북도 정읍과 연락되는 길목이었고 현재는 호남선의 역이 약 3㎞ 남쪽에 있으나 자동차 도로가 주변 각 군에 통하여 편리하다.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더욱더 편리해졌다. 이곳은 양잠의 발상지로서 유명하고, 1961년 광주에서 이전해 온 잠종장이 있으며 또 소규모의 시멘트 공장이 있다. 부근에서는 신탄(薪炭)의 생산이 많고 한지와 장판지 제조가 성하다. 시가 서쪽을 남류하는 황룡강은 비만 오면 홍수가 일어나 큰 피해를 입어왔으므로 50㎞의 대제방을 축조하고, 장성댐을 건설하여 수해를 극복하게 되었다.

백양산[편집]

白羊山

전라북도의 내장산(內藏山) 줄기에 있는 산.

한국 8경 중의 하나로 선정된 명승지로, ‘가을의 내장’에 대하여 ‘봄의 백양’이라 할 만큼 봄 경치가 아름답다. 산 속에는 천연기념물인 비자(榧子)나무숲이 울창하여 남국의 정취를 돋워준다. 학바위(鶴岩)도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특히 이 산에는 백양사(白羊寺)라는 절이 있는데, 백제의 무왕 33년(632)에 여환선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덕종 3년(1034) 중연선사가 증축하고 정토사라 하였다. 호남 유일의 거찰이었으나 불타버렸고 고종 원년(1864) 도암선사가 재건하고, 1917년 송만암(宋曼巖)선사가 개축했으며, 다시 배학산(裴鶴山)선사가 크게 개수하여 완성하였다.

원덕리 미륵석불[편집]

院德里彌勒石佛

지방유형문화재 제13호.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36-1 소재. 석불 1기(높이 5m, 폭 95

65cm), 대지 648평. 백제시대 이곳에 암자가 있었으며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석상으로 신체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석불이다. 구조가 2개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진 석주에 얼굴과 손·삼도·옷주름 등을 간신히 표현한 것으로 근엄한 인상보다도 왕방울 눈, 몽뚱한 코, 두툼한 입술이 친근감을 더해주고 있다.

장성 향교[편집]

長城鄕校

지방유형문화재 제105호.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 110번지. 1,151평. 건물 12동. 연 2회(춘·추향) 향제를 지낸다. 태조 3년 북일면 오산리에 창건. 선조 33년(600년) 장성, 진원 합현시 장성읍 장안리로 이전했다. 효종 9년(1658) 입암산성이 수진관으로 설치되면서 장성현이 도호부로 승격됨과 동시에 현 위치로 재이전했다.향교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형태로 앞쪽에 동서양제, 명륜당을 두고 뒤쪽에는 동서양무, 대성전을 두고 있으며 대성전에는 공자를 위시한 5성과 주자·정자 우리나라 18선정을 포함하여 25분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필암서원[편집]

筆巖書院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 378 번지 소재. 대지 1,764평, 건물 18동. 국가지정 보물 제587호로 14책 64매가 장서각에 보존되어 있다.봉안인물은 하서 김인후(1510~1560:1796년 문묘 배향)와 고암 양자징(1523~1594:하서의 제자 겸 사위)이다. 1590년 하서 김인후를 추모하기 위해 호남유림의 공의로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고 1624년 황룡면 증산동에 복설하여 1659년 필암서원이라 사액받았다.

백양사[편집]

白羊寺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 백제 무왕 때(632)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명찰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고 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정토사로 불렸다.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밤 스님의 꿈에 흰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한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상주 교직자가 80여 명이며, 신도수가 3,500여 명으로 대한조계종 18교구 본사이다. 보유 문화재로는 극락보전(지방문화재 제32호:조선 중기 건축물,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대웅전(지방문화재 제43호:1917년 건축), 사천왕문(지방문화재 제44호:1985년 복원), 소요대사부도(지방문화재 제56호:1650년), 청류암(문화재자료 제179호:1350년 건축), 백양 법계비(백양사 입구 좌우에 2기의 석비), 진영각(정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우측 1칸은 칠성전으로 되어있고 현재 역대 스님들의 영전이 봉안되어 있다), 「蔓庵」이라 쓰여진 김정희의 친필 등이 있다.

동학기념공원[편집]

東學記念公園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356번지 외 17필지. 20,388㎡(6,167평). 1894년 4월 21일 반외세, 반봉건을 외치며 동학군이 서울의 관군과 싸워 이긴 사실을 길이 남기기 위해 전국적인 헌수운동을 통해 조성된 곳이다. 까치능선이라고 불리던 이곳 동학격전지는 전봉준이 이끄는 약 3,000명의 동학농민군과 서울에서 파견된 관군과의 전투가 벌어져 동학군이 승리했으며, 관군 지휘관인 이학승마저 전사한 곳이다. 동학군이 관군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나무를 길게 쪼개 횡으로 엮어 만든 장태를 굴리며 관군을 물리쳤다. 이 장면을 재현해 놓은 기념공원의 조각상이 매우 인상적이다.

장성의 인물[편집]

-人物

변이중[편집]

(1546~161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庵). 본관은 황주(黃州). 이이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조 1년(1568)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7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전라도 소모어사(召募御使)가 되고 그 뒤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화차 300량을 제조, 권율(權慄)을 지원하여 행주대첩에 기여하였다. 이이·성혼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리학·경학에 밝았고, 군사전략에도 뛰어나 임진왜란·정유재란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화차를 제조한 공로는 한국 과학사에 위대한 업적이 되었다.

박수량[편집]

(1491~1554)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군수(君遂). 본관은 태인(泰仁). 김개(金漑)의 문인이다. 중종 8년(1513) 진사에 합격하고 151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예조좌랑·정언·충청도도사 등을 지냈고, 1534년 함경도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안원보권관(安原堡權管) 전주남(全周男)이 야인에게 우마를 준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아 투옥되었다. 명종 1년(1546)에 다시 상호군(上護軍)에 나가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0년 우참찬에 임명되어 지경연사·지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고, 1551년 경기도관찰사를 겸임하였으며 숭록대부에 올랐다. 1552년 우참찬을 비롯, 호조찬서·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54년 지중추부사를 지냈다.주세붕과 교유가 깊었으며 사람됨이 신밀(愼密)하고 예법을 잘 지키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30여 년의 관리생활에서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뽑혔다. 시호는 정혜(貞惠).

완도군[편집]

완도의 상징물[편집]

莞島-象徵物

완도군을 상징하는 꽃은 동백꽃, 나무는 동백나무, 새는 갈매기이다.

완도의 자연[편집]

-自然

한반도의 남서단 해남반도의 남동 해상에 유인도 60, 무인도 143으로 구성되어 있는 도서군(島嶼郡)이다. 소백산맥의 지맥인 중조산맥의 말단부가 침강하여 생긴 도서이다. 주요한 섬은 완도·고금도·보길도·청산도·신지도·조약도·노화도·소안도·평일도·생일도 등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554.24㎢에 달한다.면적 393㎢, 인구 6만 3,036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해에 있는 도서지방이고, 부근을 흐르는 난류 때문에 온난 다우한 순 해양성 기후이다. 난대 활엽수림과 상록수림이 무성하고, 특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이 객손을 매혹시킨다. 연평균 기온 13.9

, 1월 평균 2.2

, 8월 평균 26.3

, 최고 기온 36

, 최저 기온 -12.4

, 연평균 강수량 1,500㎜이다.

완도[편집]

莞島

해남반도의 남창(南倉)에서 20여 ㎞, 달도(達島)와는 600m 떨어진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 큰 섬으로, 해안선 길이 33.5㎞, 면적 62.6㎢이다. 섬의 북쪽에는 상황봉(644m)·숙증봉(432m)·백운봉 등 높은 산이 솟아 있고 해안선을 따라 약간의 평지가 있어 농경지로 이용된다. 도로도 이 평지를 따라 북·동해안에만 통하고 있다. 겨울에 해남반도가 북서풍을 막아 주고 위도상 남쪽에 위치하며 난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난하여 남국의 정취를 자아내게 하는 식물경관을 이루고 있다.목포와 제주도 사이의 중요 기항지이며, 신라시대에는 청해진(淸海鎭)을 두어 장보고(張保皐)가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잡아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동방 무역의 패권을 잡은 중계 무역항으로서 해로의 요충이었다. 수산업의 중심지로서 어로 및 양식·제염이 성하다.

고금도[편집]

古今島

장흥반도 남쪽 해상에 있는데 반도남단과의 최단 거리는 약 800m, 서쪽 완도와는 약 2㎞, 동쪽 조약도와는 약 300m씩 각각 떨어져 있다. 해안선 길이 54.5㎞, 면적은 40.1㎢이고 섬의 북서 반부에는 고도 143m, 226m, 215m의 급경사한 여러 암석산이 솟아 산지를 이루고 동남 반부는 낮고 평평하다. 주변 바다는 어장으로서 특히 봄과 여름에는 남해성 어족이 산란하기 위해서 이 근방으로 몰려와 어로작업이 성황을 이룬다. 굴·김의 양식업과 수산 가공업이 발달하여 있다.

조약도[편집]

助藥島

장흥반도의 남쪽 해상에 있는데, 서쪽 고금도와 약 300m 떨어져 있다. 면적 26㎢, 해안선 길이 50㎞이다. 섬의 남부에는 400m 높이의 삼문산이 솟아 섬의 2/3 가량을 지배하고 있다. 150여 년 전에 이 섬의 한 어부가 어전(漁箭)에 김이 착생한 것을 보고 이것을 양식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굴과 김의 양식이 성하며 수산가공업도 활발하다.

완도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색금현(塞琴縣)에 속하였으나 신라 흥덕왕 때에 청해(淸海)라 부르고 진을 두어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대사(大使)로 삼았으며, 그는 해상에서 크게 활약한 바 있다. 문성왕 8년(846)에 진을 폐지했고, 고려에 들어와서 서남부는 낭주(朗州:영암)에 동북부는 강진현(康津縣)에 속하였다. 건양 1년(1896) 인근 4군에 속했던 섬들을 합하여 완도군을 신설했다. 1914년 몇 개 섬이 분리되어 인접군에 속하고 1943년 완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에는 금일면과 노화면을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 해상권을 장악했던 이 일대에서는 화살촉,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다. 고산 윤선도의 문학 산실이었던 보길도가 유명하며 그밖에 ‘죽청거리 동백림’ 소안도 일대의 상록수림이 있다. 명사십리 해수욕장, 예송리 해수욕장이 많이 알려져 있다.1982년 노화읍 보길출장소 설치로 3읍 6면 5출장소가 되었고, 1986년 금일읍 금당출장소가 금당면, 노화읍 보길출장소가 보길면으로 승격 3읍 8면 3출장소가 되었으며 1989년 금일면 생일 출장소가 생일면으로 승격 3읍 9면 2출장소가 되었다.3읍(완도·금일·노화), 9면(군외·신지·고금·약산·청산·소안·금당·보길·생일)을 관할한다.

완도의 산업[편집]

-産業

취업 인구 중 제1차 산업이 90%를 차지하며 반농반어를 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쌀·고구마 등이다. 평일도에서는 전국 유자 생산량의 50%를 생산한다. 근해어장에서는 고등어·전광어·새우·멸치·삼치·도미·해삼 등이 어획되고, 특히 고등어는 청산도(靑山島), 새우는 주로 죽도(竹島)에서 잡힌다. 기후가 온난하고 넓은 간석지가 발달했으며, 해수가 잔잔하여 양식업에 대단히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김·미역·톳 등의 양식이 성하다.

특산물[편집]

사슴·녹용·유자·흑염소·김·미역·다시마·굴·전복·멸치·멸치액젓 등이 유명하다.

완도의 교통[편집]

-交通

선박에 의하여 각 도서간이 내왕된다. 기선(汽船)은 주요 도서를, 민선은 기타 도서를 연락하며 해남

강진

광주간 도로가 완도대교를 통해 연결된다.

완도읍[편집]

莞島邑

군청 소재지이며 어업의 중심지이다. 완도의 남쪽 부분에 있는 조그만 만안에 위치한 이 읍은 동·서·남의 150m 내외인 낮은 산으로 둘려 있고 북쪽으로 트인 어촌이다. 3

4백만 속의 김이 일본으로 수출되던 때도 있었다. 300m 앞 바다에 있는 주도(珠島)는 둘레가 1,000여m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목이 우거져 있고, 또한 100여 종의 식물군이 분포하여 경치가 아름답다.

청해진 유적[편집]

淸海鎭遺蹟

사적 제308호.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809 외. 완도군청 소재지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장좌리 앞 바다에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넓적한 섬 장도(일명 장군섬)가 있다.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80m쯤 되고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 있다.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명한 무장인 장보고 장군과 그가 이룩한 청해진의 유적지이다. 장보고 장군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삼해의 해상권을 장악, 신라·일본·당나라 3국의 해상교역에서 신라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당시의 유적으로 장도에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 유적 성역화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당시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와·토기 등 원래 청해진을 방비하기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 둘레에 박아놓았던 목책의 흔적이 있다. 유적으로는 청해진성, 와당편 다수, 토기편, 사당, 법화사지터 등이 있다.

보길도 윤선도 유적[편집]

甫吉島尹善道遺蹟

사적 제368호.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202 외. 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원양식. 윤선도(15897~1671)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제주로 향하던 중 이곳의 절경에 매료되어 머물게 되었으며 「어부사시사」 등 주옥 같은 한시를 이곳에서 창작했다.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조그마한 세 채의 기와집을 동쪽과 서쪽, 그리고 중앙에 각각 짓고서 주자학을 연구하는 등 주로 기거하던 곳이다. 낙서재 바로 건너 산 중턱 절벽 바위 위에는 동척석실이라는 한 칸집의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주변의 석문·석천·석폭석대도 장관이다.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있는 세연정은 정자의 중앙에 세연지, 동편에 호광루, 남쪽에 낙기, 서편에는 동화각과 칠암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판석포는 일명 굴뚝다리라고도 하며, 반반한 자연석으로 내부가 비도록 세워 만든 것으로, 한국정원의 독특한 유적이다. 이것은 세연지에 물을 저장하였다가 회수담으로 흘려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법화사지[편집]

法華寺址

기념물 제131호.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461 외. 7,800㎡. 전면에 바라다 보이는 장도 청해진과 함께 완도 출신 장보고 대사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법화사지는 통일신라 말 장보고 대사가 창전한 사찰로서 그의 해상활동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중국 산동성 적산촌에 있는 법화원관도 서로 교류가 되었던 곳이다. 주변에는 논밭이 형성되어 지형이 변경되었으나 1989~1990년에 있은 문화재연구소의 발굴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완도 객사[편집]

莞島客舍

문화재자료 제109호.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782 소재. 객사란 일종의 숙박시설로 이중처마를 가진 전형적인 한국의 단층건물로 완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조선 경종 2년(1722) 가리포진(加里浦鎭) 124대 첨사(僉使) 이형(李炯)이 창건하여 궐패(闕牌)를 모셔놓고 삭망마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망궐례를 올리던 곳이다. 숙종 6년(1896) 가리포진 204대 첨사 이위소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삼문의 중앙에 ‘湖南 第一番’이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이는 철종 5년(1854) 가리포진 196대 첨사 홍선(洪善)이 썼다고 한다.

완도의 인물[편집]

-人物

장보고[편집]

(?~846)

신라의 무장. 궁복이라고도 한다. 흥덕왕 때 당으로 들어가 무녕군 소장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에 잡혀 와 노비가 된 사람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 해적들이 사람들을 붙잡아서 팔고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왕으로부터 1만 명의 군사를 얻어 청해(지금의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그는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과 일본을 왕래하며 동방 무역의 패권을 잡았다.한편, 김우징(신문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이 왕이 되자 감의군사가 되었다. 그 후 딸을 문성왕의 둘째 비로 삼게 하려다 실패하고 불만을 품고 있던 중 문성왕이 보낸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다.

진도군[편집]

진도의 상징물[편집]

珍島-象徵物

진도군을 상징하는 꽃은 동백꽃, 나무는 후박나무, 새는 백조이다.

진도의 자연[편집]

-自然

한반도의 남서부 화원반도(花源半島)의 우수영에서 불과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진도를 중심으로 대소도서 238개(유인도 59, 무인도 179)로 이루어진 도서군이다. 소백산맥의 지맥인 옥매산맥이 해남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이 섬의 최고봉인 첨찰산(尖察山, 485m)을 비롯해 죽체산(427m)·덕성산(385m)·여귀산(女貴山, 467m)·철마산·망적산 등을 일으켰으며 대체로 동고서저하다. 연안에는 벽파진·녹진·굴포·남도진·금갑진·창포 등의 포구(浦口)가 있다. 면적 431㎢, 인구 3만 9,673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쪽 바다에 위치하기 때문에 매우 온화하나 겨울에 북서풍을 직접 받아 부산지방보다 기온이 낮다. 연평균 기온 13.8

, 1월 평균 1.7

, 8월 평균 26.4

, 최고 기온 37

(1942. 8), 최저 기온 -18

(1931. 1), 연평균 강수량 1,400㎜이다.

진도[편집]

珍島

이 섬은 우리나라 제3위의 큰 섬으로서 면적 334㎢, 해안선의 길이 257.5㎞이다. 육지에서 300여 m의 명량해협(鳴梁海峽: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물살이 세어 옥동(玉洞)에서 벽파진 나루터로 왕래한다. 지질은 주로 반암이며, 동남은 첨찰산·여귀산 등의 500m에 가까운 산지로 되어 있으나, 서남에 향하여 낮아져 경지가 총면적의 32%나 된다. 평지는 대부분 구릉성이고 욕실천·침계천 유역이 비옥하여 농경지에 적당하다. 근해어업의 중심지로, 조기를 비롯하여 도미·갈치·김 등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천연기념물 제53호로 보호를 받고 있는 진돗개(珍島犬)가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토착견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진도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 때의 인진도군(因珍島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진도군으로 개명하여 무안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 나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후에 현령을 두었다. 1270년에는 삼별초군이 몽골군에게 저항하다가 피해 섬이 황폐화 되기도 했다. 충정왕 2년(1350)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세 번이나 육지로 옮겼다. 조선 태종 9년(1409)에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이 되었으며, 세종 19년(1437)에 다시 분리되어 군이 되고 광무 10년(1906)과 1932년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1963년에는 7면으로 개편하였고, 1979년에는 진도면을 진도읍으로 승격하였다. 199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안군에서 저도 외 5개 섬이 진도읍으로 편입되었다.1읍(진도), 6면(군내·고군·의신·임회·지산·조도)을 관할한다.

진도의 산업[편집]

-産業

주체를 이루고 있는 진도가 넓고 육지와 같은 조건을 이루고 있어 농업 인구가 대부분이다. 해산물이 목포 등 항구로 직송되기 때문에 해변 산중이라 불릴 만큼 해산물이 귀하다. 주민의 일부가 농사와 어업을 겸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면화 등이며, 목우 사육이 성하고 진도개가 유명하며 한약재 구기자(枸杞子)를 비롯한 미역·꽃게·유자 등의 특산물이 산출된다.도서 지방이면서도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에 불과할 정도로 어업이 부진하기 때문에 어물을 육지에서 구입하는 실정이다. 연안에서는 조기·갈치·민어·멸치·삼치 등의 어획이 적지 않으나, 직접 목포 등 육지 항구로 반출되기 때문에 주민들은 생선 구경을 못할 정도이다. 또 김·톳 양식도 성하다.

특산물[편집]

구기자·전통홍주·돌미역·돌김·검정약찹쌀·검정약쌀·호박농축액·조청·멸치·대파·유자 등이 유명하다.

진도종합개발[편집]

珍島綜合開發

지산간척(智山干拓) : 진도 서부 마구만(馬口灣)을 간척하여 582㏊의 국토가 확장된 결과, 320㏊의 농지가 생겨 5,760석의 식량을 증산케 되었다.진도만간척사업 : 진도만을 간척, 국토를 확장하여 식량을 증산하고 용수원을 개발할 목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사업이 완성되어 1,258㏊의 국토가 확장되고 810㏊의 농지가 조성되어 2만석 이상의 식량이 증산되고 또한 400세대 가량의 농가가 정착되었다.

진도의 문화·관광[편집]

-文化·觀光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바닷길 열림 현상’은 해마다 음력 2월 보름과 3월 보름 사이에 나타난다. 이때 뽕할머니의 넋을 기리는 ‘영등살’이라는 제사를 지낸다. 또한 용왕제, 진도씻김굿, 남도들노래, 다시래기, 진도북놀이 같은 다채로운 문화·예술 행사도 펼쳐진다.울돌목은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이순신 장군이 빠른 물살을 이용해 왜적을 물리친 전승지이다. 울돌목 양쪽 해안의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가 사장교 형태인 진도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삼별초군이 몽골 항쟁의 본거지로 삼았던 용장성터와 용장산성, 남도석성도 남아 있어 이 일대가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의신면에 있는 운림산방은 조선 말기 남화의 정통 화가인 허유의 화실로서 당시의 민가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이 밖에 용맹스럽고 영특하기로 유명한 진돗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혈통을 보호하고 있다. 진도아리랑의 본고장이다.

진도의 교통[편집]

-交通

육지와 진도 사이의 내왕은 목포와 벽파진 사이에 하루에 몇 차례의 정기 연락선이 있으며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이에 진도대교가 있어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하다.

진도읍[편집]

珍島邑

행정·산업의 중심지이며 섬의 중앙 깊숙이 만입한 진도만의 북동안에 자리잡고 있다. 북·동·남은 200m 내외의 산지가 둘려 있고 산지 사이의 낮은 곳을 통하여 섬 안의 사방으로 도로가 통하여 있다. 섬의 입구이고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인 명량해협에 임한 벽파진에는 조선 때에 이곳을 통과하는 명나라의 사신을 맞기 위해 건립한 벽파정(碧波亭)이 있고, 이 근방에 고려 명장 김방경이 삼별초군을 격파한 고전장인 위왕성이 있다. 이 밖에 충무공 전첩비·금갑진(金甲鎭)·쌍계사(雙溪寺) 등의 여러 명승고적이 있다.

운림산방[편집]

雲林山房

지방기념물 제51호.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소재.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소치(小痴)는 미산(米山)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제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다. 따라서 운림산방은 소치-미산-남농-임전 등 4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다.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 면이 35m 가량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했으며 정문조는 여기에 시를 더하여 삼절(三絶)이라 하였고,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대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大痴)’라 했는데 그와 견줄만 하다고 소치(小痴)라 했다고 한다.

금골산 오층석탑[편집]

金骨山五層石塔

보물 제529호.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소재. 석탑의 초층 탑신부의 구성형태는 갑석이 두껍고 밋밋하며 경사를 주지 않아 수평인 데, 이러한 점은 정읍 은선리(隱仙里) 삼층석탑과 일맥상통하여 백제양식의 남하를 입증하고 있다.높이 4.5m로 단층기단의 오층석탑으로 1층 탑신이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다. 기단 높이 104cm, 갑석 폭 180cm로 맨 밑의 지대석은 4장의 판석을 깔고, 기단면석은 4장의 판석인데 각 면에 우주와 중앙에 장주 1주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1개씩인데 1층 탑신에서만 판석 4장으로 결구되었다.이 오층석탑의 기단부 및 초층 옥신에서 정읍 은선리의 삼층석탑의 양식을 따랐음은 주목할만한 일이며, 한국 육지의 최남단인 이곳 섬에 이르기까지 백제양식의 모형이 전파되었다는 사실은 불교문화의 발달사적 견지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예라 할 수 있겠다.이 석탑은 석질 등이 별로 좋지 않고 우주(隅柱)간의 체감비례 등이 맞지 않으나 보물로 지정한 것은 고려 후기의 작품이면서도 백제탑의 양식이 채택되고 있기 때문이다.

용장산성[편집]

龍藏山城

사적 제126호.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106 소재. 고려 원종 때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이 원종의 육촌인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였는데, 이때 고려의 장군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1270~1271)의 근거지로 삼은 섬이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섬의 둘레는 3만 8,741척, 높이 5척이라 하였을 뿐, 그 이상의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상만사지 오층석탑[편집]

上萬寺址五層石塔

지장유형문화재 석조물 제10호.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675 소재. 높이 4.2m. 탑의 형식을 보면 이중 기단인 5층탑으로 맨 밑의 지대를 보면 군데군데 파손이 심하다. 하대갑석(下臺甲石)은 4매 판석으로 결구하였으나 중석의 결구상태가 좋지 않아 균형을 잃고 있으며 상하에 별 조식이 보이지 않는다. 상대중석은 4매의 판석으로 짰는데 전후면은 판석으로 세우고 좌우면은 삽입하였으며 각 면에 우주가 희미하게 모각되었다.이 탑은 기단부에 이중기단임을 보여주고 있으나 상하층에서의 우주와 탱주가 선명치 않고 또한 갑석 하면의 부연이 생략되는 등 일부 기법의 퇴화현상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규모의 탑일지라도 우리나라의 최남단인 도서지방에까지 탑의 조성이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탑의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74년 4월경에 새로 절을 지으면서 정지(整地) 작업 중 고려자기 2점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로 추정된다.

진도의 인물[편집]

-人物

소치[편집]

(1808~1893)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세 때부터 두륜산방(지금의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였다.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서(書)·화(畵)에 능하여 40세 되던 1847년 7월 낙선제에서 헌종을 뵐 수가 있었고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권돈인·민영익·정학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신안군[편집]

신안의 상징물[편집]

-象徵物

신안군을 상징하는 꽃은 해당화, 나무는 소나무, 새는 갈매기이다.

신안의 자연[편집]

新安-自然

전남의 남서부, 황해의 남부에 흩어져 있는 대소 830개(유인도 110, 무인도 720)의 도서로 구성된 다도해 중의 최다도부를 이루어 우리나라 전체도서 3,305개의 25%, 전남(1,921섬)의 43%를 차지하고 있다. 노령산맥의 말단부가 침강하여 육지와 분리되고, 높은 산지가 섬으로 바다 속에 남아 삭박되었다. 따라서 대개의 섬은 구릉성 산지이지만 소흑산도의 독실산(犢實山, 639m)을 최고봉으로 대흑산도의 깃대봉(378m), 문암산(門岩山, 375m), 우이도의 우이산(359m), 자은도의 두봉산(斗峰山, 364m), 임자도(荏子島)의 대둔산(大屯山, 319m) 등은 높은 편이다. 비교적 큰 섬으로는 도초도(都草島, 42㎢)·압해도·비금도·암태도 등이다. 이들 섬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으며 그 중 도초도의 고란평야(古蘭平野)는 이름이 높다. 홍도(紅島)나 흑산도도 큰 편이나 평지가 거의 없는 산지이다. 본군의 해역은 거의 대륙붕 지대로, 15m 내외의 천해로서 간척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면적 654㎢, 인구 4만 9,733명(2002.12)이다.

기후[편집]

남서해에 있어 해양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특이한 현상은 서해안을 남하하는 연안수의 냉수대와 황해를 북상하는 황해해류가 만나 조목·조경을 이루는 곳에는 짙은 안개가 발생하여 선박의 운항과 농작물에 큰 지장을 주는데 그 발생 일수가 많다. 연평균 기온 12.5

, 1월 평균 2

4

, 8월 평균 24

, 연평균 강수량 1,100㎜ 이다.

흑산군도[편집]

黑山群島

목포에서 남서쪽 약 60㎞ 해상에 있는 이 군도는 대흑산도를 중심으로 대소 68개의 섬으로 형성되었으며 면적은 50여 ㎢ 이다.소흑산도에는 639m, 대흑산도 378m, 홍도 368m의 산이 솟아 평야는 거의 없고, 농산물의 생산량은 2개월 분의 자급량 밖에 안되지만, 포경의 중심지이고 전갱이·고등어·조기·상어·갈치·홍어 등이 풍부하여, 어업가구는 총가구의 80% 가까이 차지하고 있어 진도와는 대조적이다.흑산도의 중심지인 흑산항은 천연적 양항으로서 어업기지인 동시에 인근 항해선박의 보급과 휴식처이고 대피항이다. 또 통신 연락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이 항구 근방 예리(曳里)에는 3

10월까지 파시(波市)를 이룬다. 부근 홍도(매가도)는 제2의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암과 괴석, 그리고 노송이 우거져 경승을 이루고 있다.

홍도[편집]

紅島

전남 신안군 흑산면(黑山面)에 딸린 섬. 면적은 6.47㎢, 해안선 길이는 8㎞, 남북 길이는 6.7㎞, 동서 길이는 2.4km이다. 목포에서 서쪽으로 113.5km 지점에 있는데, 본섬과 13개의 부속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 전체가 1965년에 천연기념물 170호로 지정되었다. 섬을 형성하는 기반암의 성분이 붉은색의 규암과 규암질사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층리와 절리(암석에 수평 또는 수직으로 있는 틈)가 잘 발달되어 있어 절경을 이룬다.

신안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물아혜군(勿阿兮郡)으로 신라 경덕왕 때 무안군(務安郡)으로 개칭하였다. 명종 2년(1172) 감무를 두었고, 공양왕 3년(1391) 성산극포 방어사(城山極浦防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조선 초에 현을 두었으며, 고종 32년(1895) 군이 되고 1897년 목포를 개항하였다. 그 후 1910년 목포부로 되었다가 1914년 독립되었다. 따라서 나머지 면으로 무안군을 설치하였다. 1963년 일부 행정구역이 변경되고 1969년에는 무안군에서 신안군을 분리하였는데 본군은 특히 섬만으로 이루어진 군이다. 1980년 지도면이 지도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는 증도·신의·팔금면이 신설되었다. 1990년 장산면, 소재도, 작도, 송도, 골도, 희어도와 진도군에 편입되었다.1읍(지도), 13면(증도·임자·자은·비금·도초·흑산·하의·신의·장산·안좌·팔금·암태·압해)을 관할한다.

신안의 산업[편집]

-産業

주산업은 농업이지만 대개 반농반어를 생업으로 한다. 밭이 약간 많고,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유채·면화·양파·마늘 등이다.주민의 약 24%가 수산업에 종사한다. 부근의 바다는 15m 내외의 얕은 대륙붕이고 한난해류가 교류하며, 뱅크가 발달하여 많은 어군이 모여들어 대어장을 이루고 있다. 조기·갈치·고등어·전갱이·장어·도미·새우·고래 등이 많이 잡힌다. 얕은 바다와 간석지는 간척사업과 염전, 그리고 굴·조개류·해조류의 양식지로 개발을 촉진시키고 있다. 염전면적은 30㎢ 가까이에 달한다.광업은 거의 산지와 암석으로 되어 있어 유용 광물이 많다. 금·은·동·규석 등의 매장이 있는데 가사도(加沙島)의 광산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규소율 99.5% 이상의 양질의 규사가 무진장 널려 있어 우리나라 유리·주물공업 원료로서 전망이 밝다.

특산물[편집]

신간척지쌀·시금치·압해배·유자·포도·참다래·섬한우·섬돼지·홍어·전복·낙지·굴·미역·김·새우젓·오징어·대하·가리비·우럭 등이 유명하다.

파시[편집]

波市

옛날에는 파시평(波市坪)이라고도 하였다. 바다 위에서 성어기에 각처에서 모여드는 어민들로 형성되는 계절적인 어시장을 말한다.현재에는 연안의 육지시장 일대를 합친 어촌취락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계절에 따른 어장이 달라짐에 따라 어선·어업 관계자, 접객업자, 기타 상인들이 후조(候鳥)처럼 이동하므로 어기가 지나면 한촌으로 되돌아간다.파시가 서는 대표적인 곳은 본군의 흑산(흑산도 예리)·사월포(자은도 고장리)·개원(임자도 재원리)·원평(비금도 신원리) 등인데 3월부터 9

10월까지 선다.이 밖에 위도·칠산바다·개야도·녹도·고군산제도·연평도·어청도·용호도 등이며, 거문도·청산도·추자도 등은 파시에 유래되어 발달한 취락이다.

신안의 교통[편집]

-交通

본토와의 교통은 목포항을 중심으로 정기 연락선에 의하여 행해진다. 목포와 홍도 사이를 1시간 40분에 운항하는 쾌속선이 달리고, 목포항을 기점으로 하여 연안항로의 정기여객선이 큰 도서에 기항하고 도서간에는 나룻배에의해서 연락된다.

흑산항[편집]

黑山港

대흑산도의 북쪽에 있고 예리항(曳里港)이라고도 하는데,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되어 이미 육상시설로 500 MTD의 급수시설, 경유 600MTD, 중유 1,100MTD의 급유시설을 갖추고 제빙(製氷) 일신 10t, 저빙(貯氷) 300t, 냉장 200t을 하고 있다.또 공동창고, 무전시설(SSB 50W), 어항시설방파제(382m), 물양장(210m) 등을 완성하여 명실공히 어업기지로서의 면목을 갖춘 항구이다.

지도읍[편집]

智島邑

군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1987년 12월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육지와는 연륙교로 이어졌고, 읍의 중심은 읍내리이며, 송·원대 유물 매장 해역인 앞바다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군내에는 교육기관으로는 실업계 고등학교가 5개 교, 인문계 고등학교가 2개 교, 중학교 14개 교, 초등학교 23개 본교와 37개의 분교가 있다.

송·원대 유물 매장해역[편집]

宋·元代遺物埋藏海域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 해상(반경 2km 이내). 1975년도 이 지역 주민 최영근 씨와 박창석 씨가 어로작업 중 그물에 인양된 도자기를 신고함으로써 발굴이 시작되어 1976년부터 1984년까지 10차에 걸쳐 침몰선과 유물 인양작업으로 도자기 20,661점, 금속제품 729점, 석제품 43점, 자단목 1,017점, 기타 574점 등 총 23,024점과 동전 28톤 18kg, 선편 445편을 인양하였으며, 위도 35도 1분 15초, 경고 126도 5분 6초를 중심으로 한 반경 2km 해역을 81년 6월 16일에 사적 제274호로 지정하였다.발굴 유물은 중국 송·원대의 제품이 주류를 이루며 고려자기 등 고려 유물이 몇 점 확인되었고, 나막신 칼코 등 일본유물도 20여 점 있어서 당시 동북아 삼국의 교류상황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신안해저문화재는 중국원대 14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대량으로 출토된 도자기는 세계 수중 고고학 사상 유례없는 것으로 편년과 생산지 등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침몰선은 용골을 갖춘 첨저형(尖底型)으로 격벽이 시설된 구조로서 당시의 조선술을 알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자산어보[편집]

玆山魚譜

자산어보는 조선시대 후기 문신이자 실학자였던 손암 정약전이 저술한 우리나라 5대 고수산문헌 중 하나이다.정약전은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으로 인해 신안군 흑산도로 유배되어 사망할 때까지 15년간 흑산도에 머물면서 흑산도 인근에서 생산되는 각종 어패류와 해산물 등 227종에 대한 생태계를 집중 연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완성시켰다.이 책은 227종의 수산 동식물이 유형별로 구분되어 있는데 그 중 비늘이 있는 고기류 70종, 비늘이 없는 고기류 42종, 조개류 60종, 기타 해조류가 46종으로 나누어 서술되어 있다. 어패류에 관하여 학문화되어 있지 않은 것을 정립하기 위해 학명을 정리하였고, 어패류의 생태계와 이동경로·습성·맛·방언·약효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후세 학문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자산은 흑산도의 흑산을 대신한 말이며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수산 자연과학연구 5대 서적 중 최고로 손꼽힐 정도로 기술이 잘 되어있다.'자산어보'는 순한문으로만 기술되어 있어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으나 19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신안군에서 '자산어보'에 대한 번역과 해설 그리고 원색도감, 정약전의 일대기, 정약전의 친동생인 다산 정약용과의 유배생활 중 오고간 서신을 곁들여 책으로 묶어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팔금 삼층석탑[편집]

八禽三層石塔

신안군 팔금면 읍리 350-번지 소재. 높이 2.3m, 둘레 3m, 662㎡. 고려 말에 세워진 고찰.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으며 당시에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에 마을주민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모시고 즐겼다고 하나 지금은 제사를 모시지 않고 있다.

흑산도 진리의 초령목[편집]

黑山島鎭里-招靈木

천연기념물 제369호. 신안군 흑산면 지리 산 17번지 소재. 흑산면 당산내에 있는 희귀 수목으로 수령 약 3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와 흑산도에서만 서식한 수목으로 거의 멸종되었고, 지정된 초령목은 현재 고사되었으나 주변에 어린 초령목 3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가지를 꺾어 불전에 꽂아 영령을 부른다 해서 초령목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