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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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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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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象徵物

광주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광주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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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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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2대 지형구(地形區)인 북부의 전남평야, 남동부의 남령산지의 경계지역인 무등산(無等山:1,188m) 북서 산록에 위치한다. 경위도적으로는 동경 127

01

126

49

, 북위 35

04

35

16 에 해당한다. 남동쪽은 무등산에서 연속되는 산지와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서쪽은 전남평야를 향해 열려 있다.광주천이 시내 중심을 흘러 북서류하다가 서쪽에서 극락천과 합류,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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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지질은 전한무리대통의 연천계, 구암층 중생대통의 상부경상층, 시대불명의 화강암 신생대통의 제4기층이며, 그 주요 모암은 화강암 분암 및 분암질 응회암충적층으로 되어 있다. 화강암은 북서부 극락강 유역의 본촌동에 널리 노출하여 표고 100m 내외의 구릉이 기복으로 연속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풍화가 잘 되고 토층이 깊고 경사가 급하지 않다. 분암 및 분암질 응회암은 무등산을 중심으로 남쪽에 분포되어 산형이 험준하고 선상 추토로 토층이 박하다. 충적층은 극락강 유역에 평야를 이루고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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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류(황해해류)와 남서쪽에서 이동해 오는 저기압의 영향으로 온난하고 강수량이 많으며, 전남평야와 남령산지의 경계지대에 위치하여 양 지역의 점이형의 기후를 나타낸다. 여름에는 주로 남풍과 서풍이 불어오고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이 불어온다. 연평균 기온은 13.1

, 1월 평균 -1.9

, 8월 평균 27.3

, 최고 기온 37

, 최저 기온 -13.5

, 연평균 강수량 1,271mm이다.

무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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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等山

시의 동쪽에 있다. 옛날에는 무진악 또는 무악이라고도 하고, 고려시대는 서석산이라고도 했는데, 해발 1,188m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제주 한라산과 경상남도 남해 거제도가 바라다 보인다.이 산의 정상에서 서쪽으로 돌아가면 수십길이 되는 북모양의 석조 수십 개가 울을 둘러막은 듯 서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서석대(瑞石臺)이다. 산허리 남쪽에는 입석대가 있고 동으로 가면 수백 척 되는 세 개의 거석이 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삼존석(三尊石)이다.그 부근에는 송하, 광석, 풍혈, 장추, 청학, 송광, 능암, 법화, 설법, 은신 등 10개의 석대가 있는데, 그 중 광석, 풍혈은 강봉의 입석과 함께 절경이다. 그리고 산의 동서 두편 사이에는 바위돌을 깎아 세워놓은 듯 솟아 있는 석벽이 있고, 그 석벽 가운데는 지공(指空) 터널이라는 천작의 석실이 있는데 옛날 지공과 뇌공(懶空)이라는 두 선사의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원효, 증심, 규봉의 세 절이 있는데 모두 신라의 고찰이며, 규봉암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임진왜란 당시의 명장이었고 또 정충(精忠)으로 시민의 숭상을 받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여기서 무예를 닦았고, 산중도처에 유적이 많다. 특히 장군의 여러 가지 기적을 남긴 주검바위가 가장 유명하다. 지금은 원효사 건너편에 관광호텔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아든다.

광주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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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본래는 백제의 무진주(武珍州)로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이곳에 도독(都督)을 두고, 경덕왕 16년(757)에 무주(武州)로 고쳤다. 또한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甄萱)이 이곳에 웅거(雄據)하여 후백제라 일컬어 이곳을 도읍으로삼았다가 전주로 옮겼다.고려 태조 19년(936) 이곳에서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을 멸하고 23년(941)에 광주(光州)라 개칭하였다. 성종 15년(996) 자사(刺史)로 격하하고, 후에 또다시 해양현령(海陽縣令)으로 내렸다가 고종 46년(1259) 김인준(金仁俊)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익주지사(翼州知事)로 올렸으며, 후에 또 무진주(武珍州)로 올렸다. 충선왕 2년(1310) 화평부(化平府)로, 공민왕 11년(1362) 무진부(武珍府)로 내리고, 22년(1373) 광주라 다시 부르게 하여 목(牧)으로 삼았다.조선 세종 12년(1430) 무진군으로 내렸다가 문종 원년에 복구하고, 성종 20년(1489)에 광산현(光山縣)으로 내렸다가 연산군 7년(1501) 다시 광주로 회복하였다.1895년 전국을 23개의 행정구로 구분할 때 나주부(羅州府)에 속하게 되었고 1896년 23부를 13도로 개정할 때 광주는 도청 소재지로 되었다. 1911년 기례방(현 대인동 일대), 공수방(현 수기동 일대), 부동방(현 삼성동 일대), 성내방(현 충장로·대의동 일대)을 합쳐 광주면을 신설, 1923년 인근 서목면·효천면·지한면의 일부를 편입하고, 1931년 읍·면제 실시에 따라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35년 10월에 인근 서목면·효천면·지한면의 나머지 부분을 합하여 광주부(光州府)로 개칭하였다.1945년 광복과 동시에 방을 동으로 개칭하고 일부구역을 합하여 36개 동회로 확정하였으며, 1949년 8월에는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광주시라 개칭하였다.1952년에는 동회제를 없애고 동으로 개칭되면서 28개 동을 폐합하고 기구를 축소하였으며, 1955년의 행정구역 변경조치에 의하여 광산군 서방면·효지면·극락면과 석곡면 등 4개면과 담양군 남면 일부를 합하여 광대한 행정구역으로 확장되었다. 1957년 관할구역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정비하였고, 외곽 지역의 주민을 위하여 석곡·지산·서창·대촌 등 4개 출장소를 설치하였으며, 1961년 3월로 중부·남부·서부·북부·지북 구청을 설치하였고 1986년 11월 직할시로 승격하였다. 산·서창·대촌 등 8개 출장소를 개편하여 시 전역에 출장소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1988년 광산군·송정시를 편입하여 광산구를 신설하였으며, 행정구분은 5구 85동으로 되어 있고 1995년 광역시가 되었다. 1997년 비아출장소의 비아동, 신가동 분동에 따라 2003년 현재

5구 87개 동을 관할하고 있다.

광주의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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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口

1942년 8만이던 인구는 1955년 28만으로 급증하여 1차 시역확장을 거친 후 계속되는 인구증가로 1957년 2차 시역확장을 하였다. 1966년 40만, 1970년에는 50만, 1980년에는 70만을 넘어 2002년 12월 현재 인구수는 140만 1,425명으로 100만을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980∼1990년 사이의 연평균 증가율은 5%로 전국 평균 1.56%보다 약 3배 정도 높다.그러나 50만 이상의 대도시인 6개 도시 중에서는 가장 낮은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70년대 중반 이후 광주의 발전이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체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그와 같은 현상은 광주가 호남지방의 중심지이나 다른 대도시에 비해 사회적 인구증가를 야기시키는 2차산업의 발달이 미약한 데 그 이유가 있다. 인구밀도는 2,672명/㎢로 전국 인구밀도의 472명/㎢에 비하면 5.7배에 달한다. 도심지역인 대금동·충수동·충금동 일대는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어 광주에서도 도심의 공동화(空洞化)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서구 방림동·지원동, 북구 임동·동운동, 서구 쌍촌동 등의 외곽지대의 인구증가가 커지고 있다.

광주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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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1차산업 6.5%, 2차산업 13.6%인 반면 3차산업은 79.9%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 생산도시기반조성을 통해 2001년까지 2차산업 비중을 25%로 높일 계획이다.평야와 산지의 경계지역에 위치하는 지정학적 특징 때문에 행정 군사상 중심도시, 교육·문화 도시 등의 기능을 반영하여 도시의 발전이 2차산업보다 3차산업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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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면적이 광주 전체 면적의 32.7%를 차지한다. 그 중 논이 62%, 밭이 38%로 논의 비율이 훨씬 높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해 콩, 고구마, 감자, 쌀보리 등을 생산하며 영농의 현대화와 수익성이 높은 농산물 생산으로 전환하여 채소와 과일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농경지와 임야지가 총면적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농가인구로 보아 농촌지역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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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은 상업으로 광주의 상권은 호남지방 전역에 그 세력이 미친다. 상업은 충장로 5가·금남로 1가·대인동·양동 일대가 중심지이다.공업은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제사·면방직·피혁 등의 공장과 광주 공업단지의 핵심체인 아세아 자동차 공장이 있는 정도이고 대공장이 없는 형편이다.이렇게 제2차 산업이 부진한 것은 주위에 공업 원료의 생산지가 없고 농업지대인 것과 중앙과의 교통이 불편한 두 가지 점에 큰 원인이 있다.그러나 나주비료공장이나 장성 시멘트공장, 송정지구와 송암지구·하남지구 일대의 공업단지 조성, 그리고 고속도로망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망의 확충 등으로 앞으로 광주의 공업은 국토 균형개발과 서해안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제조업 기반이 지속적으로 확충되고 있으며 평동공단과 첨단과학산업단지 건설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공업단지는 하남 1·2·3차, 본촌, 송암, 소촌 등 367만 7,100평에 83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평동 1차공단 82만 평은 분양 중이며 첨단과학산업단지(1단계) 49만 6,000평을 조성 중이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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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베라·고추·국화·낙삼탕·느타리버섯·메론·수박·방울토마토·배·사과·분청자·붕어즙·오이·왕골돗자리·춘설차·화훼 등이 유명하다.

광주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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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호남선 철도가 광산구 송정동(松汀洞)을 지나고, 이곳에서 경전선(慶全線) 철도가 분기하여 순천·마산 등지와 연결된다. 도로 교통은 잘 발달되어 있어 운수업이 활발하다.광주를 중심으로 국도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지방도 도내 각 지역을 연결하고 있어 도로 교통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시내 교통은 중앙로·광남로 등 5개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또한 광주의 교통은 고속도로 개통으로 큰 변화를 이루었다. 호남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동서고속도로 서울·부산 등의 중앙과의 연락은 물론 영남내륙과도 연결이 용이해져 경제·문화·사회적인 면에서도 큰 발전이 기대된다. 상무대 근방에 비행장이 있어 서울을 비롯하여 여러 선의 국내선이 개설되어 있다.도로계획 총연장은 1,681㎞로 고속도로가 17㎞, 일반국도 87㎞, 광역시도 1,577㎞로 구성돼 있다. 도로율은 18.2%로 저조한 반면 포장률은 97.3%로 양호하다. 백운광장에서 남광주역까지 48억원을 들여 2.1km를 폭 35m로 개설하여 화순 방면에서 목포로 통행하는 하루 1만 5,000대의 차량이 시가지를 통과하지 않고 순환도로를 이용하여 시내 교통난 해소에 큰 몫을 하게 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현재 차량등록대수는 31만 968대로서 1일 평균 63대씩 증가하고 있다.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교통문제 해결을 위해 제2순환도로와 지하철을 건설하고 있고 시내버스 증차, 노선 신설 및 조정, 버스전용차선제 실시 등 대중교통수단 운영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지하철 제1호선은 총 20.1㎞이며 이 가운데 1구간(11.96㎞)은 동구 용산동

광산구 옥동까지 나누어 건설하게 된다. 96년 8월 발주해 2004년 개통 계획으로 추진중이다.

광주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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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

무등산과 광주호 주변의 가사문화권, 광주비엔날레, 광주김치대축제, 5·18 묘역 등 예향·의향의 역사현장을 관광과 연계한 관광 코스가 다양하게 개발돼 있다. 더욱이 2002년 월드컵이 개최됨에 따라 특급호텔 등 관광기반시설이 확충되었다.한편,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하고 있는데, 간추리면 고려 때의 석등인 재명석등(在銘石燈)과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정지 장군의 석조로 된 묘, 증심사(證心寺), 약사암(藥師庵), 원효사(元曉寺), 충장사 등이 있다.문화재로는 광주 동오층석탑,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금계일기, 안중근 의사 유묵, 김덕령 장군 의복, 최희량 임진왜란 첩보 서목 등이 있다.

무등산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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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等山-

무등산의 운림골을 본산지로 하여 높은 산록에서 재배되는 순재래종 수박이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수박을 ‘푸랭이’라고 부르는데, 암록색의 겉빛깔에서 유래된 듯하다. 보통 수박보다 배로 커서 작은 것은 10kg, 큰 것은 20kg 이상이며, 다른 수박보다 더 달고 시원한 맛을 지녀 옛날에는 왕에게 바치는 진상품이었다. 8월말부터 9월말에 걸쳐서 수확하는데, 이때가 되면 재배하는 농민은 상가(喪家)를 방문하지 않고, 상중에 있는 사람과 가까이 하지도 않으며, 목욕재계하고 수박밭 가운데 제단을 만들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민속이 있다. 그러나 이 무등산수박은 고지에서 재배해야 하는 입지조건과 무등산 일대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재배면적이 넓지 못하여 생산량이 많지 않다.

증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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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心寺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9세기 중엽에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였고, 1094년(선종 11)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으며, 1443년(세종 25) 전라도관찰사 김오(金傲)가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 1)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였고, 그뒤에도 중수를 거듭하다가 1951년 50여 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으며, 1970년에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오백전(五百殿)·명부전(冥府殿)·회심당(繪心堂)·학산장서각(鶴山藏書閣)·요사채 등이 있다.

원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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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曉寺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절 주변에는 무명의 고려시대 묘탑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의 회운당부도(會雲堂浮屠) 등이 산재되어 있다.이 중 부도는 높이 2m, 4각 지대석(地臺石) 위의 4우(隅)에 신장(神將)을 세운 중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연화대로 받쳐진 탑신을 얹고 있는데, 옥개는 역시 8각으로 각 마루에는 용·거북·비둑기 등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이 절에서 무등산의 정상 쪽으로 골짜기를 넘은 곳에 의상대(義湘臺)라는 매우 수려한 바위 봉우리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의상토굴이 있다.

광주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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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

1995년 9월 광주광역시에서 처음 열린 국제 미술행사이다. 두 달간 광주 중외공원전시관 등에서 세계 50국 90여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가운데 본전시·특별전·기념전 등 13개의 대형 전시회가 열리고 행사기간 동안 민속·무용·음악·연극 등의 부대행사도 벌어졌다. 주최측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신축과 이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182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였으며, 행사기간 중 국내외에서 약 200만 명이 관람하였다. 본전시(국제현대미술전)는 ‘경계를 넘어서’라는 주제 아래 회화·조각 등 미술의 고전적 장르 개념을 넘어 첨단 테크놀로지와 정보, 예술의 접목을 시도하는 설치작업들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여기에 세계 50국 92작가의 작품 88점이 전시되었다. 이 밖에 특별전은 ‘증인으로서의 예술전’ ‘광주 5월정신전’ 등 6개전, 기념전은 ‘한국근대회화 명품전’ 등 3개전이 열렸다. 매 2년마다 열리는 이 행사는 97년, 99년, 2000년, 2001년에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5·18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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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念公園

상무 신도심 지구내 6만 2,000평 부지에 5·18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5·18기념공원에는 국제회의장, 대공연장, 다목적실 등을 갖춘 기념문화관과 5·18상징탑, 5·18추모공간 등이 들어서 있다.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재판을 받고 형을 살았던 군법정·영창이 이전된 후에는 망월동 5·18묘지와 연계, 민주성지 순례코스로 운영되고 있다.

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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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壯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장군을 모신 사당. 김덕령 장군의 본관은 광산, 시호는 충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와 장성현감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로부터 익호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선전관이 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무고로 체포·구금되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68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78년(숙종 4) 벽진서원에 제향되었고, 영조 때 의열사에 형 덕홍, 아우 덕보와 병향 되었다.

광주읍성 유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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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光州邑城遺墟

문화재자료 제20호. 성벽 높이 1.9m.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에는 석축 둘레가 8,253척, 높이 9척이며 성안에 1백 개의 우물과 여첩(女堞)이 있으며, 못은 지금은 없어지고 성문으로 서원(瑞元 동), 광리(光利 서), 진남(鎭南 남), 공북(拱北 북)의 4문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904년 광주 읍성의 인구는 1만 명 내외였으며, 성은 그때까지 잘 남아 있었다. 1931년 기록에는 관찰부(觀察府)가 무덕전(武德殿) 자리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읍성의 철거는 1909년 일본군이 한말 의병항쟁을 탄압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자리에는 도로가 개설되어 일본인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는데 오늘날 충장로 2, 3가이다. 동헌 등 조선시대 광주읍성 관아가 있었던 전라남도청은 고려 초기 무진년명석등(시유형문화재 제5호) 등의 유물로 보아 원래는 절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읍성은 조선시대 이후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현재는 성벽과 관련된 돌들과 흙으로 된 둑만 일부 남아 있다.

취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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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歌亭

충효동 광주호 옆 성안마을 뒷동산 동쪽에 있는 정자다. 189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 난실 김만식과 친족들이 충장공의 성장지에 지었다. 그 후 1950년 6·25 동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난실의 후손인 김희준과 친족들이 1955년에 중건하였다. 정자의 이름을 취가정이라 한 것은 권필의 꿈에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이 술에 취해 나타나 서로 시를 나누었는데 외로운 혼을 달래기 위한 「취시가」를 읊은 데서 유래된다.

환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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環碧堂

환벽당은 식영정 건너 광주호 상류 청계천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있다. 높다랗게 자리잡은 이 정자는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지은 정자다.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광주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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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광주는 산지와 평야의 2개 이질 지역 접촉지대에 발달한 군사·행정상 및 교역상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충장로·금남로 일대가 상업의 중심지이며 ‘교육도시’라고 일컬을 정도로 대학 및 각급 학교가 많아 전남 문화의 중심지로 되어 있다. 광주에는 국립 전남대학교를 비롯하여 조선대학교·광주대학교·대건신학대학·광주교육대학 등 8개의 4년제 대학교, 전남대학교 부설 간호전문대학 등을 포함한 8개의 전문대학이 있어 비슷한 규모의 다른 도시에 비해 많은 대학이 있으며 초등학교 108, 중학교 69, 고등학교 58개교 등에 38만여 명이 수학하고 있다(2000). 그리고 각 대학에 많은 연구기관이 부설되어 있어 교육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인다.한편 광주에는 8개의 방송국과 6개의 신문사가 있다. 주요 스포츠 시설로는 총면적 9만 2,400㎡의 무등경기장이 있으며, 풍암동에 광주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