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인천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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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상징물[편집]

仁川-象徵物

인천광역시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 나무는 목백합, 새는 두루미이다.

인천의 자연[편집]

-自然

경기도의 중서부 경기만에 돌출한 도부를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총면적은 958.32㎢이며 동경 126

, 북위 37

에 위치한다. 시내는 계양산(桂陽山:395m)·소래산(蘇萊山:279m)·문학산(文鶴山:233m) 등에 의해 부천시·김포·광명시·시흥시 등과 접해 있고 전역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시내는 낮은 구릉이 기복하고 있다. 북동부 부평천 유역의 비옥한 김포평야에 연속된 넓은 평야는 부평 공업단지로 공장 지대화하였고, 구릉지대도 경지화하였다가 점차 시가지화하고 있다. 항만은 월미도가 가로막아 내항(內港)을 이루고, 영종·용유·영흥 등 제도가 만구에 있어 외항을 이루고 있다. 해안선의 굴곡이 심해 이른바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는데 강화도를 비롯하여 영종도·영흥도·덕적도 등 대소 80여 개의 도서가 산재해 있다. 해안은 간만의 차가 심하고 수심이 얕아 천연적 양항으로서의 조건은 좋지 못하나, 굴곡이 심하고 간석지가 넓어 염전이 발달하였다.

기후[편집]

해안에 위치하지만 바다의 영향이 적고 기온의 교차가 심하며 겨울에 북서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동위도상의 삼척에 비하여 연평균 2

, 1월 평균 3.6

가량이나 낮다. 연평균 기온 10.8

, 1월 평균 -3.9

, 8월 평균 25

, 최고 기온 38.9

, 최저 기온 -21

, 연평균 강수량 1,049.6mm이다.

인천의 연혁[편집]

-沿革

백제의 시조 온조의 형인 비류(沸流)가 현재의 인천에 정착하여 이 곳을 미추홀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데, 이것이 인천 최초의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 때는 매소홀현(買召忽縣)이라 칭하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소성(邵城)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숙종 때 경원군(慶源郡)으로, 인종 때는 인주(仁州)로, 공양왕 2년(1390)에 경원부로 계속 승격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인천군(仁川郡)이 되었고, 세조 6년(1460)에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으나, 영조 24년(1748) 현(縣)으로 강등, 1757년 다시 부로 환원되었다. 고종 20년(1883)에 개항되었으며, 개항 이전 인천부의 행정구역은 부내·주안·남촌·조동·신고개·황등천·전반·이포·다소 등 10면을 포괄하고 있었다. 개항과 더불어 부내면의 소어촌에 불과하던 제물포(현 인천시)로 부치(府治)를 이전함에 이어 우리나라 최초의 조약인 한·미통상조약(1876년, 고종 13년), 제물포조약(1876년, 고종 13년), 한영 및 한독조약(1883년, 고종 20년) 등의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구미 각국과 통상을 하게 되어 인천은 국제항으로서, 근대 항만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고 각국 거류지로 구획되어 국제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개항과 더불어 정부는 인천항 감리서를 개설하고 부사로 하여금 겸직케 하는 일방 계포리를 두어 경찰 행정도 겸해 왔다.고종 32년(1895)에 인천관찰부를 개설하고 관찰사를 두게 됨에 따라 감리서를 폐지하였다가 관찰부 폐지와 동시에 다시 감리서를 부활시켰으나 광무 10년(1906)에 인천 부윤을 두고 감리서를 폐지하였다. 한편 일본은 경성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종래의 인천 주재 영사관을 이사청으로 개편하였으며 융희 4년(1910) 조선총독부의 신관제에 의하여 이사청이 폐지되고 행정기구로서 인천부가 설치되었다. 그 후 1914년 3월 1일 지방제도 개혁에 따르는 부, 군, 면 폐합으로 인천의 관할 지역은 구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인천항의 신시가지로 한정 축소되고, 본래의 인천(구 인천읍)과 부평이 통합하여 부천군이 되었으나 1936년에 부천군의 다주면을 병합하여 부역을 확장하였으며 1940년 4월에 재차 부천군 관할이던 문학·남동·부내·서곳 등의 4개 면을 인천부로 편입하였다.1945년 광복 후 미군정은 인천부를 서(署)로 개칭하고 시민 자문기관으로서 고문회를 구성하였으나 그 후 1946년 3월 인천부로 환원되었으며,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최초로 제정된 역사적인 지방자치법이 시행됨에 따라 비로소 인천부를 인천시로 개칭하게 되었다. 1963년 부천군 관할이던 작약도를 병합하고 1968년 인천시 구 설치에 관한 법률에 의해 중구·동구·남구·북구 4개 구를 설치함으로써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도시 행정 수요에 대처한 방대한 기구로 개편되고, 1981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에서 분리돼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1월 광역시로 개칭되었다. 동년 3월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 강화군 전역과 대부면을 제외한 옹진군 전역, 김포군 검단면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2004년 1월 현재 행정구역은 8개구, 2개군, 4출장소, 1읍, 19면, 116동이다.

인천의 인구[편집]

-人口

1925년에는 5만 4,000명이던 인구가 1930년대 일본의 군수 공업이 입지함에 따라 20만에 달하게 되었다. 8·15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불안정한 인구 상태를 나타내었으나, 1956년 30만선을 넘었고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1979년에는 100만을 넘는 대도시로 발전하였다.인구가 급증한 원인은 제조업이 크게 발달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겠지만 서울시의 인구 분산 정책으로 서울시 인구가 수도권 내의 주변 도시로 분산된 데에도 그 이유가 있다. 인구 증가율을 보면 1970∼1975년 사이에는 23.8%, 1975∼1980년 사이의 증가율은 35.6%로서 전국 평균 7.91% 보다 훨씬 높다. 1996년 11월 인구는 238만 4,415명으로 1980년의 108만 3,906명보다 130만 509명이 늘었다.2003년 9월 현재 인구는 259만 5,602명이다.

인천의 산업[편집]

-産業

취업인구 중 3차산업이 가장 많고 다음이 2차산업 순으로 되어 있다. 경지면적은 매년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택지와 공업용지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영농 방법에 있어서도 도시에 적응하기 위하여 근교농업으로 전환, 상품작물 재배를 많이 하게 되어 경지면적 중에서 논은 줄고 밭은 증가하고 있다. 농업 규모는 영세농가가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총인구는 증가하는 데 반해 농업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이는 농경지의 감소, 산업구조의 다양화 등에 기인 된다고 본다. 1995년에 편입된 강화군과 옹진군 일대에서 쌀과 채소가 많이 나며, 근교에서는 낙농·양계가 성하다. 근해, 특히 연평도·덕적도 일대는 우리나라 3대 어장의 하나로 특히 조기·갈치·새우가 많이 잡혀 유명하다. 근년에 와서 어획고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어로 장비와 기술이 개선된 결과이며, 다른 지방에 비하여 어선이 동력화되고 대형화되어 있다.그러나 수산 가공업은 부진하다. 1974년에 인천항 신항이 준공된 이후 모든 어선은 신항 남쪽의 연안부두에서 입·출항 및 어획물 인양을 통합시켰다. 간척지가 넓어 염전과 조개 양식업이 발달하였는데, 소래·남동 염전이 유명하다. 군자 염전과 더불어 전국적인 염전 중심 지대를 이루고 있다. 지하자원도 비교적 풍부히 매장되어 있어서 철·납석·규석·고령토·규사 등이 산출되며, 철과 고령토는 잘 알려져 있는 광물이다. 지금까지 동력은 한강계 수력발전에 의존해 왔으나 북구 원창동 율도(栗島)에 인천 화력발전소와 경인에너지를 건설함으로써 자체에서 해결하게 되었다. 즉 한국 전력의 인천 화력발전소는 25만kW 용량의 발전기 2대의 준공으로 50만kW를 발전하고, 민간의 경인에너지는 16만 2,400kW 용량의 발전기 2대의 준공으로 32만 5,000kW를 발전하고 있으며, 부평에는 5,500kW 용량의 발전기 6대가 준공되어 3만 3,000kW의 전력을 생산하여 인천에서만 총 85만 4,800kW의 전력을 생산하여 자급자족하고 있다.인천의 공업은 1930년경부터 방직·제강·기계·차량 등 공장이 일어났으나 한국전쟁을 거쳐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휴전 후 특히 많은 기간 산업이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풍부한 노동력, 값싼 공장용지, 원료와 제품의 수송이 편리한 것 등 입지적 조건이 좋아 많은 공장이 집중하게 되어 우리나라 굴지의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인천의 공업은 비교적 대기업이 많고 또 중공업이 발달하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주요 공업은 금속·토석·석유·식품(제분)·화학(농약·합성수지)·제재 및 목제품(합판)·기계·자동차 및 그 부품, 전기 기기·전자 기기 등이 있다.인천의 상업은 초창기에는 번창하였으나 철도와 국도가 개통됨에 따라 저조하게 되었다. 특히 서울과의 유통시간이 단축되고 서울의 도매시장이 팽창하게 되자 인천은 서울의 세력에 눌리게 되었다. 개항할 당시의 시장은 현재의 신포동 일대에 형성되었으며 한국인·일본인 각각의 전용 시장이 있었다. 광복과 더불어 이 시장은 기능을 상실하고 인현동 중앙 도매시장과 동중앙시장 등이 번창하였다.2000년 현재 유통시설로는 백화점 7개 소, 쇼핑센터 3개 소, 도매센터 1개 소, 소매시장 98개 소, 대형점 3개 소, 농산물 도매시장 1개소가 있으며, 앞으로도 대규모 유통시설이 개설될 계획이어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천의 무역은 1876년 강화조약에 의해 부산·원산·인천의 3개항이 통상지로 개항됨으로써 우리나라의 대외무역이 시작되었다고 보며, 특히 1895년에 이르는 기간에 있어서는 지리적 관계로 인천항의 상권은 청국 상인이 잡고 부산항의 상권은 일본 상인이 차지했다. 이와 같이 인천은 중부지방의 넓은 배후지와 서울의 관문으로서 주로 대중무역을 행해 왔으나 광복 후는 미국·일본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 시장을 개척하여 자못 활발한 바 있다. 1968년 무역 총액은 3억 6,015만 6,000달러로 서울·부산에 이어서 제3위이었다. 이중 수출이 2,371만 3,000달러, 수입이 3억 3,644만 3,000달러였으며, 주요 수출품은 합판·직물류·기계류·차량·목재·섬유 원료·석유·석탄 등이었다. 그러던 것이 수출 실적은 1970년에 5,447만 달러, 1975년에 5억 9,942만 달러로 급격히 증가하고 1985년에는 15억 8,503만 달러에 이르렀다. 인천의 주요 산업단지에는 모두 3,500여 개 업체에 8만여 명이 있다. 또 시 전체로는 21만 6천여 명이 금속, 기계, 자동차, 전자 업체에 종사하고 있다.

농목업[편집]

농가 1만 9,353가구 6만 9,460명으로 총가구대비 2.6%, 총 인구대비 2.9%다. 농경지는 논 2만 1,320ha, 밭 8,955ha를 포함해 총 2만 275ha로 총면적 대비 31.5%다. 5,8891t을 생산했으며 이 가운데 48만 9,099가마를 수매했다. 축산농가에서는 한(육)우 2만 3,014, 젖소 8,200, 돼지 9만 3,963, 닭 47만 6,345마리를 사육했다. 1995년에 편입된 강화군은 주민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임업[편집]

1990년 현재 임야 총면적은 시 면적의 32%인 97.8㎢로 국유림이 22.03㎢, 공유림 0.97㎢, 사유림 74.8㎢ 등이다. 임산물로는 밤·은행·도토리 등이 있다. 인천시는 ‘도시속의 산지’를 감안하여 삼림 행정의 기본 방침을 종전의 속성수 녹화 위주에서 조경수 조림으로 전환했다. 시는 또 산지의 관광화와 풍치림 조성으로 시민의 정서 함양, 조림의 육림과 생활화로 주택가 공장주변, 도로변 녹화 등에 역점을 두고 있다.

수산업[편집]

7,322가구에 2만 2,163명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어선은 동력 1,702, 무동력 122척을 보유, 척당 평균 25.4t으로 전국대비 2.4%를 차지하고 있다. 수산물은 96년 말 현재 7만 9,374t에 2,513억원어치를 생산했다. 어항 3개소, 수산제조업체 23개소, 어업지도선 10척에 어민후계자는 218명이다.연평도, 덕적도 일대는 국내 유수의 어항이다. 특히 송도 앞 4,500여 개펄은 패류 양식어장으로 가꾸어 1981년 초엽 등 5개 어촌, 1,851가구 8,951명이 해마다 7만 2,000여 톤의 조개를 잡아들였다. 1994년의 어획고는 6만 4,000톤으로 2,140억원의 소득을 올렸으며 양식장은 9,876ha이다.해운은 무역항이므로 국제적 연결의 비중이 크다. 항만은 간만의 차가 매우 크고 수심이 얕아 천연적 양항으로서의 조건은 좋지 못하다. 따라서 내항에 수문식 도크를 축조하였고(1911

1918), 1974년에는 선거(船渠)의 완성으로 5만t급 대형 선박의 접안이 가능해졌다.그러나 연안어업은 남동공단 조성과 송도 앞 개펄매립 등으로 패류의 어획고가 해마다 줄어 사양길에 놓여 있다.

인천 임해공업지구[편집]

仁川臨海工業地區

인천의 공업은 1930년경 일제하에 있어 방직·제강·기계·차량·전기 기기·화학비료·알루미늄·제마(製麻) 공업 등 대규모의 공장이 북부의 만석동·송현동 일대와 남부의 용현동·학익동 동북부의 부평동에 일어났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공장이 파괴되었으나, 휴전 후 급속히 복구되고 또 많은 기간 산업이 발전되었다. 인천의 북부 및 남부의 임해지구는 매립지로서 염가로 넓은 공장부지를 얻을 수 있고 원료와 제품의 반출입이 편리한 것 등 입지적 조건이 양호하여 많은 공장이 집중되어 있다. 인천공업의 특색은 비교적 대기업이 많고 또 중공업이 발달하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주요 공업은 금속(제철·제강), 토석(유리·타일), 섬유(면방직·화학섬유·염색), 식품(제분), 화학(농약), 제재 및 목재품(합판), 기계(수송 및 각종) 장비 등 공업이다.한편 시내 남구 연수지구에 인구 20만을 수용할 수 있는 남동공단 배후 주택단지가 1986년 초부터 조성되었으며 2000년 1월 현재 인천 시내에는 현재 약 6,760여 개의 공장이 입지해 있는데 19만 1,000여 명의 종업원들이 주로 금속·기계·가구·합판·자동차·판유리·철재·전자 등의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부평 공업지구[편집]

富平工業地區

부평에는 대규모의 자동차 공장이 있고 수출공업단지가 건설되어 최근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주요 공업은 섬유 제품·전기 기기·전자 기기·플라스틱제품·기타 각종 공업이 일어나 있으며 제품은 주로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인천의 교통[편집]

-交通

경인선 전철과 경인국도, 경인고속도로 수인산업도로(수원∼인천) 이외에도 김포·강화도·성남·의정부 등을 잇는 직행 및 일반시외버스 노선, 그리고 서울·대전·전주·천안 등지를 운행하는 고속버스 노선의 시발 및 종착지로 되어 있다. 경인선의 전철화로 서울과는 1시간대 거리로 서울과 경기 일원과는 거의 동시생활권대로 좁혀졌다. 한편 1999년 10월 인천지하철 1호선 24.6km가 개통되어 시내 교통이 더욱 원활해졌다. 2

3호선도 건설할 계획이다. 시내도로 총 연장 2,857.1km, 포장률이 55.9%로 포장도로의 길이가 1,596.3km에 달한다. 주안·부평 등 신시(新市)는 직교상의 발달된 도로를 가지나, 제물포를 비롯한 구시가지는 도로폭도 좁고 복잡한 가로망의 도로를 가지고 있다. 인천시는 도시기반시설의 확충을 위해 1996년 945억 6,100만 원을 들여 도로 교통망 확충, 하천 및 상하수도 정비보강산업 36건, 푸른 도시 조성 등 모두 196건의 중점사업을 펼친 바 있다.동양 최대규모이자 세계 제6위를 자랑하는 갑문식 도크항인 인천항은 국내에선 부산항에 이어 두 번째로 꼽히는 무역항이다. 연간 하역능력은 도크항 내에서만도 929만 3,000t에 이르고 항내 각 부두에는 하역 장비, 창고 등의 부대시설들이 현대식으로 고루 갖춰져 있다.경인공업지대를 배후지로 갖고 있는 인천항은 수출입량이 앞으로 계속 증가 일로에 있으므로 항내 확장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백령도·덕적도 등 각지와 연락되는 정기 항로가 20여 개로서 연안 항로도 발달되어 있다.

인천의 관광[편집]

-觀光

봄철에는 살구꽃으로 여름에는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월미도 유원지가 있는데 시가지와 이 섬 사에는 폭 12m의 석축제방식 포장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남쪽에는 유명한 송도(松島) 유원지가 있어 시민의 피서지이고 월미도 쪽 에는 작약도가 있다. 이 섬은 천혜의 지형과 울창한 수림으로 서해의 피서지로 유명하다. 서쪽 응봉산의 자유공원은 시가와 항만의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 산책지이고 전에는 만국공원 또는 서(西)공원이라 불리었다. 이 밖에 문학산·계양산·소래산·약사암·동양유원지·율목풀 등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사철 찾아온다.시내에는 관광호텔 4개소를 비롯, 국민관광지, 야외 골프장 각 4개소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과 UN군 참전비 및 반공회관,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어린이 놀이시설이 고루 갖춰진 수봉공원 등이 있다. 이 밖에 해수풀장 2개소, 인공담수풀장 5개소 등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송도 해수욕장 주위와 월미도 해면매립지, 연안부두변 해안지역에는 무려 2백여 생선횟집들이 들어서 있어 관광을 겸한 해산물의 미각을 즐기려는 인파가 연중 끊이지 않고 있으며 1999년도에 인천을 찾은 관광객은 내·외국인을 합해 약 226만 541명에 이르렀다.

강화도의 호국 유적[편집]

江華島-護國遺蹟

한강 하구에 위치한 강화도는 고려시대에는 전란으로 인하여 임시 왕도로 되기도 하였고, 특히 조선시대 말기에는 외세에 대항하기 위한 국토 방위 시설이 여러 곳에 설치되어 병인·신미양요, 병자수호조약

등을 겪은 근대 개항 백년의 피와 눈물의 역사가 생생하게 담겨져 있는 곳이다. 이 유적들은 1977년에 완전 복원되어 호국 정신의 교육 도장으로 함과 동시에 부근의 전등사 등과 함께 새로운 관광 명소로 개발되고 있다. 이곳의 주요 호국 유적지로는 갑곶돈대·외성·광성돈대·광성제단·초지진·덕진진 등이 있다.

연평도[편집]

延坪島

경기만 서북쪽 휴전선에 접근한 고도(孤島)로서 대·소연평도를 중심으로 주위의 여러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연평도라고 하면 대연평도를 가리키는데, 본도 어업상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다. 즉 5월의 조기철에는 1,500척 이상의 어선이 모여들어 파시(波市)가 선다.

백령도[편집]

白翎島

인천의 서북쪽 옹진반도 앞바다에 있는 휴전선 최북단의 섬이다. 면적이 약 47㎢ 이며 대체로 대지상(臺地狀)의 산지를 이루며, 해식애(海蝕崖)는 장관을 이룬다. 주민은 반농반어자가 많으며 중요 어업은 조기잡이이다. 예부터 중국 산둥반도와의 교통 중계지로 중요하였고, 현재는 군사상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소래포구[편집]

蘇萊浦口

남구에 있는 포구로 어민들이 10t 미만의 어선을 이용해 어업에 종사하는 작은 포구 마을로, 어종은 새우·꽃게·민어·농어·홍어·광어·낙지 등 다양하다. 이 지역의 생선은 매일매일의 조업으로 그 선도(鮮度)가 높기로 이름이 났으며, 하루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관광포구로 발전하여 서울·인천을 비롯한 주변 도시의 주민들이 많이 찾고 있다.

월미도[편집]

月尾島

인천 중구에 있는 육계도로 소월미도와 함께 인천 내항의 북서쪽 방파제 역할을 하며, 이곳 내항에 세계적 규모의 도크(Dock)가 설치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1965년 매립 공사로 완전히 이어졌다. 이곳에는 측후소·세관검역소·무선전신국 등이 있고, 80년 이후 각종 위락시설과 해수욕장·호텔 등이 갖추어진 관광지로 조성되었다.

전등사[편집]

傳燈寺

인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충정왕(忠定王)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308)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답동성당[편집]

沓洞聖堂

사적 제287호. 중구 답동에 있는 유서깊은 성당으로 벽돌조 고딕양식이다. 1890년대에 건축된 한국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프랑스 코스트(한자명 高宜善) 신부의 설계로 1897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 코스트 신부와 같은 소속인 P. 시잘레(한자명 池士元) 신부의 설계로 증축되었다. 앞면에 설계된 3개의 종탑은 건물의 수직 상승감을 더해주며, 8개의 작은 돌로 된 기둥(pilaster)이 8각(角)의 종머리 돔(dome)을 떠받들고 있다. 앞면의 출입구는 화강석을 사용하여 벽감(壁龕) 모양의 아치로 하였다. 1979년에는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여 그 위용과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녹청자도요지[편집]

綠靑磁陶窯址

서구 경서동 일대의 언덕에 있는 고려시대 녹청자가마터이다. 모두 5곳으로 10

11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마는 3

4

의 자연경사를 이용하여 기울어져 있고 내부는 칸이 없는 통가마이다. 평면은 아궁이(봉통)와 가마 사이가 약간 좁고 긴 형태이다. 이 가마에서 구워낸 것은 녹청색이 짙은 청자로, 바탕흙〔胎土〕에는 불순물이 섞이고 기공(氣孔)이 많다. 유색은 녹갈색과 녹청색인데,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며, 소문(素文)이 대부분이다. 형태는 대접·접시·병류가 많고, 이 가운데 입큰병은 중국 당(唐)나라 말기 오대(五代)의 양식을 보인다.

인천국제공항[편집]

仁川國際空港

중구 영종도에 위치하고 있는 국제공항으로 2001년 3월 29일 개항했다. 인천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에 용유도 사이에 펼쳐진 갯벌을 매립해 공항 부지를 조성했다. 계획 면적이 47㎢로, 일본 나리타국제공항의 약 8배에 이르는 규모이다. 1991년부터 2020년까지 4,000m의 활주로 4개를 건설하고, 그 밖에 여객터미널·화물터미널·항공보완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이 공항은 연간 약 1억 명이 넘는 여객과 700만 톤의 수출·입화물을 처리하게 된다.한편, 인천국제공항에서 시흥시를 거쳐 서울외곽 순환고속국도를 잇는 13.6km의 제3경인고속국도를 2001년까지 완공할 예정이며, 2020년까지는 총 40.2km의 8차선 고속도를 건설할 예정이다. 처음에는 영종도신공항이라고 했으나 인천국제공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향약제집성방[편집]

鄕藥齊集成方

보물 제1178호.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1201 가천문화재단 소재. 향약집성방은 조선 태조 때 김희선과 권중화 등이 의료 경험과 종래의 의약서 등을 참고로 하여 제생원(濟生院)에서 편찬한 것을 정종 1년(1399)에 김희선이 강원도에서 간행한 의학서이다. 총 30권 가운데 일부(제6권)로서, 처음 발간된 유일한 책이다.책의 내용은 각종 질병을 부분별로 제시하고 있으며, 세종 15년(1433)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자생하는 약초를 이용해 우리 풍토와 체질에 알맞은 향약을 적용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의약서와 인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신응경[편집]

新應經

보물 제1180호.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1201 가천문화재단 소재. 신응경은 중국 명나라 유근이 출간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성종 5년(1474)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침구(鍼灸) 전문서적이다. 이 책은 서(序) 등이 결락되고 본문도 훼손된 상태이나 우리나라에서 처음 간행된 침구서라는 점에서 서지학 및 침구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식물본초[편집]

食物本草

보물 제1227호. 이 책은 명(明)나라 세종 5년, 즉 조선 중종 21년 요문청(姚文淸)등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을 중종~명종년간(1526~1566)에 다시 갑진자판(甲辰字板:1484년에 만든 동활자)으로 간행한 전문 의학서이다. 각 류에는 조목마다 해당식물의 맛·본성·이익·독성 등을 적어놓았다. 희귀본 의서로서 의학 및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강화 고려궁지[편집]

江華高麗窮地

사적 제133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이곳은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1232년 6월 고려 고종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 든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에 도읍을 옮겼으며, 1234년 궁궐과 관아를 완공하였다. 1270년 몽골과의 강화(講和)가 성립되어 개성(開城)으로 환도(還都)한 뒤 궁궐과 성곽은 무너졌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이곳에 행궁(行宮)과 강화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吏房廳)만 남아 있다.

강화산성[편집]

江華山城

사적 제132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 고려 제23대 고종이 몽골의 제2차 침입 (1232)에 항전하기 위하여 내성·중성·외성을 쌓았다. 초기에는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나 조선 초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시 파손되었다. 효종 3년(1652)성곽 일부를 수축하고, 숙종 3년(1677) 유수 허질이 전면을 돌로, 후면은 흙으로 개축, 확장하여 길이가 7,122m에 이른다.

참성단[편집]

斬聖壇

사적 제136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도면 흥왕리. 참성단은 단군께서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제단의 축조 형식은 다듬은 돌로 하부는 둥글게, 위는 네모난 단을 쌓아 올렸다. 둥근 단의 지름은 4.5m이며, 네모난 단은 1.98m의 정사각형이다.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하였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에 덧쌓았고, 숙종 26년(1700)에도 보수하였다.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단군의 제사를 지내며, 전국 체육대회 성화도 참성단에서 칠선녀에 의해 채화(採火)되어 대회장으로 봉송하여 성화대에 점화하고 있다.

초지진[편집]

草芝鎭

사적 제225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그 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와 1871년 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미국의 아세아 함대, 그리고 1875년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운양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이다. 당시 프랑스·미국·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하여 조선군은 빈약한 무기로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특히 운요호의 침공은 1973년 초지진의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여 역사 교육 현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인천의 항세[편집]

-港勢

경기만이 월미도·소월미도 등에 의한 내항과, 영종·용유·영흥 등의 섬에 의한 외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외항은 넓고 수심이 깊은 위에 외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외항은 넓고 수심이 깊은 위에 풍랑이 심하지 않아 천연적 양항만이다. 그리하여 외항에는 거선이 정박할 수 있으나 내항은 수심이 얕고 조차가 심하여(최대 10.2m) 소선일지라도 접안이 불가능하여 1911∼1918년에 수문식 도크를 축조하여 인천항이라고 하였다.또 만내에 유사(流砂)를 막기 위하여 본항과 월미도 사이에 돌제(突堤)를 축조하고 또 만내의 풍파를 막기 위해 월미도와 소월미도간에 방파제를 축조하였다.이 수문식 도크는 규모가 작아 많은 하역을 부담할 수 없고 최대 접안능력도 4,500t급 선박에 불과하므로 반입물자는 부선(艀船)에 의하여 이중 작업으로 양륙하게 되어 연간 25억원의 손실을 가져왔다. 이에 5만 톤급 대형 선박의 접안과, 연간 370만 톤의 하역 능력을 1,500t까지 하역할 수 있는 새로운 대규모의 도크가 1974년에 완공되어 부산항에 의존하던 많은 화물이 인천항을 이용하게 되었다.한편, 이로 인하여 경인지구 개발에 더욱 활기를 띠고 있으며, 이 공사로 생긴 1만 평의 매립지는 공업단지로 개발되고 있다.

인천의 계획과 전망[편집]

仁川-計劃-展望

인천은 일찍이 임해공업 수출공단·국제항구·관광위락 등 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어, 앞으로 200만 이상의 대도시로서 발전될 것에 대비하여 237.0㎢ 로 시역을 확장해 왔으며, 인천국제공항건설, 항만확충사업, 송도 정보화신도시 조성 등 세계 속의 인천으로서의 건설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또한 한국형 실리콘 밸리가 될 미디어 밸리의 후보지 선정 중 인천시가 제1순위로 선정돼 고부가가치의 첨단정보통신 및 물류 중심도시로 발전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