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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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상징물[편집]

大邱-象徵物

대구광역시를 상징하는 꽃은 목련, 나무는 전나무, 새는 독수리이다.

대구의 자연[편집]

-自然

대구는 영남지방 및 경상북도의 중앙에서 서남쪽으로 치우친 대구분지의 중앙에 위치한다. 시 주변에는 구릉 또는 산이 둘러 있는데, 북쪽은 팔공산(1,192m)·환성산(809m), 동쪽은 용암산(379m)·초례봉(536m)·문암산(426 m) 등이 있고, 남쪽은 산성산(670m), 비슬산(1,084m)·최정산(915m), 서쪽은 와룡산(臥龍山) 등이 있다. 북쪽에는 금호강이 흐르며 유역은 기름진 평야를 이루고 있다. 팔조령(492m) 근방에 발원하는 신천(新川)은 시가지의 동부를 흘러 금호강에 합류한다. 신천은 하도(河道)를 누차 변경했는데 대구는 그 범람원에 발달해 있다. 부근 일대는 신라통(新羅統)의 지질로 덮여 있다.

기후[편집]

대구는 위도상으로는 북위 36 01 에 위치하여 온대 기후에 속하고 경도상으로는 동경 128

46

으로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하고 있어 뚜렷한 대륙 동해안 기후의 세력하에 놓여 있다. 해안거리 100km 이내에 있지만 겨울에는 대륙의 한랭한 고기압과 여름에는 고온한 저기압의 영향을 받아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몹시 더우나 강우량은 적다. 연평균 기온은 13.2

이고 1월 평균 기온은 -2.2

, 8월 평균 기온은 27.9

로 기온의 연교차가 약 30

로 비교적 크다. 최고기온이 40

에 달해 경주(43.5

)·김천(41.5

) 등지 다음으로 고온을 나타내고 있다. 부산의 36

에 비해 4

, 서울의 38.2

보다 1.8

가 높다. 혹서의 기간이 긴 것도 특색인데, 연중 1일 최고 기온 30

이상의 일수가 52일(서울 39일, 부산 23일)이나 된다. 최저 기온은 -20.2

로서 위도에 비해 낮으며 부산의 -14

에 비해 6

나 낮다. 강수량은 1,000mm 미만으로서 동위도상의 외국 도시에 비하면 많은 편이나 국내에서는 비교적 소우(少雨) 지역에 속한다. 강우의 계절적 분포는 6∼9월의 우기 중에서도 7월에 가장 많아서 연 강수량의 23%에 해당하는 양이 내린다. 연평균 강수량은 1,005.3mm이다.

대구분지[편집]

大邱盆地

북부의 팔공산맥(八公山脈), 서부의 소백산맥(小白山脈) 및 그 지맥인 가야산맥(伽耶山脈), 동부의 태백산맥(太白山脈), 남부의 성현산맥(省峴山脈) 등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또한 영천(永川)·경산·달성·대구·칠곡·청도 등 일대를 포함한 지역으로 평야가 넓다. 팔공산맥에는 팔공산(1,192m)이 솟아 있고 그 남록(南麓)에는 거찰 동화사(桐華寺)가 있다. 그 남쪽 백안분지(白安盆地)는 대구분지에 연결된다. 동쪽 태백산맥은 세력이 약화되어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고, 남쪽에는 태백산맥의 고헌산(高獻山:1,133m)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뻗은 성현산맥이 있다. 경부선은 성현의 준령을 터널로 통과한다. 이 지역에는 낙동강과 그 지류 금호강·감천(甘川)·고령천(高靈川) 등이 흐른다. 금호강은 영천 부근에서 여러 소지류를 합하여 하양(河陽)·경산·대구 부근을 서쪽으로 흘러 본류인 낙동강에 합친다. 이 유역에는 대상평야(帶狀平野)가 열려 있다. 대구 분지는 금호강 유역평야와 낙동강 중류 연안의 남북 방향의 대상평야가 결합한 T자형의 대평야, 그리고 김천평야를 비롯한 여러 개의 산간 소분지를 총칭한다. 이 지역에 높은 산지는 별로 없고 구릉 또는 구릉성 산지가 기복하고 있다. 서부와 남부 산지가 높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므로 대륙성 기후를 이룬다.연평균 기온이 서울보다 1.6

가 높고 부산보다는 1.1

가 낮다. 1942년 8월 1일에는 40

를 기록하였고, 1915년 8월에는 35

이상의 더위가 무려 23일이나 계속된 때도 있다. 강수량은 1,000mm 내외로서 혹서 소우지대의 특이한 기후형을 나타내고 있다.

대구의 연혁[편집]

-沿革

신라 시대에 달구화현 또는 달불성으로 일컬어 오다가 경덕왕이 대구(大邱)로 개칭하였다. 조선 세종 원년(1419) 대구현(大邱縣)을 군(郡)으로 승격하고, 세조 12년(1466) 진을 설치하여 도호부로 하였다. 그리고 종래 경주에 있던 경상도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대구로 옮기게 되자 경상도 내의 행정 중심지와 군사상 요지가 되었다.그 후 경상감영을 설치했다가 고종 32년(1895) 이를 폐지하고 대구군으로 칭하였다. 1910년에 대구군을 폐지하고 대구부라 칭하고, 1911년에는 시가지 일부 동명을 변경 개칭하였다. 1918년에 달성군의 봉덕동, 대명동 일부를 시역에 편입하고, 1938년에는 다시 달성군의 수성면, 달서면, 성북면을 편입하여 도시를 재편성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일부 노(路)·동(洞)의 명칭이 바뀌었다.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부가 시로 개칭되었으며, 1958년 1월 인접 달성군의 공산면, 동촌면, 가창면, 성서면, 월배면을 시역에 편입함으로써 시구역은 대폭 확장되었다. 시세확장으로 1963년 1월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서변동, 동변동과 공산면, 파동을 제외한 가창면, 성서면, 월배면 등의 농촌 지역은 다시 달성군에 환원하고 중, 동, 서, 남, 북의 5개 구제를 실시하였다. 1980년 7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직할시로 승격, 달성군의 월배읍, 공산면, 성서읍,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고산면을 편입하였다. 1988년에 달서구를 설치했고 1995년 1월 광역시로 개칭했다. 2003년 12월 현재 행정구역은 7구, 1군, 3읍, 6면이다.

대구의 인구[편집]

-人口

다음의 인구 추세표에 보이듯이 대구의 인구는 근래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다.1944년 20만을 겨우 넘던 인구가 1955년에는 50만에 육박하였고, 1969년에는 드디어 100만을 돌파하였는데, 그 증가율은 서울보다는 낮으나 부산보다는 높다. 이와 같은 인구증가는 한국전쟁 때 피난민의 집중, 농촌·도시간의 소득격차, 농촌과잉 인구의 이동, 공업발전으로 인한 고용증대 등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사회 증가가 높기 때문이다. 인구의 성별 구성을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4∼5,000명이 많은데, 이것은 섬유공업 부문에 종사하는 여자가 많기 때문이다.2000년 1월 현재 가구수는 78만 9,899가구이며 인구는 250만 5,722명이다.

대구의 산업[편집]

-産業

대구는 한마디로 상공업 도시이며,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예부터 시장이 발달하여 평양(平壤)·강경(江景)과 더불어 한국의 3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영남 상권의 중심지인 대구에는 현재 서문시장, 약령시장 외에 농수산물 도매시장 1개소를 비롯해 정기시장 7, 일반시장 105, 백화점 5, 쇼핑센터1, 대형점 9개소 등이 있다.한편 주변의 농촌지대로부터 면화·누에고치·곡류 등의 원료를 충분하게 입수할 수 있는데다가 용수·교통·노동력 등의 호조건이 겹쳐 경공업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섬유공업은 업체 업종별 비율이 가장 높다. 그러나 내륙도시라는 불리한 입지조건과 섬유에 편중된 공업구조의 취약성 및 제3차 산업의 후진성과 시 재정의 미약 등으로 대구의 경제는 전국 경제의 성장세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된 상태이다.농업에 있어서는 수익성이 높은 청정재배 채소나 양돈·양계 등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하여 근교에는 양돈·채란계·육계 단지가 조성되었다. 또한 이 지방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사과는 대구능금이라는 명칭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산업구조를 보면 1999년 12월 기준으로 경제활동인구 중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가 72.0%를 차지하며, 광공업 25.3%, 농림업이 2.7%를 차지하고 있다. 취업인구 비율에 있어서 1차산업 인구의 감소는 시역 전반의 도시화가 큰 원인일 것이나, 고등 원예에 종사하는 인구는 증가할 것이 예상된다. 2차산업에 있어서는 주로 제조업인데, 경제개발계획이 5차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5곳의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입주가 완료되었다.

농업[편집]

1997년 12월 말 현재 농가 1만 4,667가구가 논 5,630ha에서 쌀(조곡기준) 3만 1,724t, 과수원 9,597ha에서 과일 2만 483t을 생산했다. 과일 가운데 사과는 307ha에서 4,289t, 배는 11ha에서 24t, 포도는 839ha에서 2,100t, 자두는 38ha에서 250t이 생산됐다.한편 한우는 2,990가구가 2만 5,409마리, 젖소는 282가구가 7,551마리, 돼지는 199가구가 4만 3,931마리, 닭은 439가구가 41만 7,729마리를 키우고 있다.

공업[편집]

대구의 산업 중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국내 타도시에 비해 상당히 높다. 공업 중에서도 특히 섬유·방직공업이 규모·생산량 등에 있어서 여타의 업종보다 훨씬 비중이 크다.1999년 12월 말 현재 5인 이상 종사 제조업체는 총 5,800개소이며 이 가운데 20명 미만의 소규모 업체는 전체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업종별로는 섬유가 2,172개로 전체의 37.4%, 기계는 1,842개로 31.7%, 금속이 732개로 12.6%, 화학은 355개로 6.1% 기타는 699개로 12.1%다.공업단지는 제3공단, 검단공단, 서대구공단, 비산염색공단, 성서공단, 달성공단, 현풍공단, 구지농공단지, 옥포농공단지 등 9개소로 2,800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성서공단 3차단지 2단계 49만 평은 첨단산업단지로 조성중이다.

상업·수출[편집]

대구는 예부터 한국의 3대 시장의 하나로서, 그 상권은 경상남도·전라도·충청도에까지 미치며, 상품의 생산지와 중개지로서 상업이 발달하였다. 공·사설 시장 113개 중 서문시장이 제일 크다. 또한 한약제 전문 시장인 약령시장은 한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수출에 있어서는 참가 업체와 수출실적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섬유공업이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수출은 섬유류 수출이 타업종에 비해 월등히 많다. 주요 수출품목은 모복지·면직물·화섬직물·홀치기·잡화류 등 경공업제품 외에도 철강·금속·석유화학제품 등 100여 개 품목으로 미국·일본·중동·영국·동남아·아프리카 등 50여 개국의 세계시장으로 수출하고 있다.

대구의 교통[편집]

-交通

철도는 경부선과 대구선이 있고 도로망은 도내 각 지방은 물론 인접도(道) 사이에 발달해 있다.즉 대구를 기점으로 포항·울진을 거쳐 삼척으로, 안동·영주를 거쳐 영월로, 김천·문경을 거쳐 충주로, 김천을 거쳐 청주·고령을 거쳐 거창으로, 직접 창녕·마산 방면으로, 경산을 거쳐 밀양·부산 방면으로, 경주를 거쳐 울산·부산 방면으로 통하며, 기타 도로망도 잘 정비되어 교통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또 경부고속도로가 서구와 북구를 스쳐 동쪽으로 빠져나가고, 1977년에 개통된 구마 고속도로가 서쪽을 지나가고 있다. 또, 대구와 서울·부산·진주·광주·포항간에는 국내 항공로들이 열려 정기적으로 운행하고 있다. 시내 교통량의 증가 추세는 해마다 증가하는 반면, 교통수단은 이에 따르지 못하여 러시아워에는 대혼잡을 이룬다.대구역은 1904년 1월 1일, 당시의 인구 30만에 따른 도시 규모에 맞추어 세워졌으나, 도시권이 급격히 팽창해짐에 따라 1970년 9월, 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지하도공사와 시의 동부개발 계획과 때를 같이 하여 동구 신암동에 동대구역을 개설하여 대구역의 거의 모든 기능을 그곳으로 옮겼다.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에는 철도여객이 급격히 감소되고 있으나 사과와 야채를 제외한 화물에는 큰 변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철도가 대량 수송 수단임을 보이고 있다.사과와 야채는 대소비시장인 서울·부산 등지에 직접 화물자동차에 의해 수송된다. 대구의 도로망은 3개의 순환선, 7개의 방사선형으로 노선이 도심에 집중돼 도심 교통의 과밀현상을 빚고, 남북간 중앙로가 협소, 교통소통에 지장이 많아, 중앙로 확장계획 및 간선도로망개설과 함께 도시 고속화도로와 97년 지하철 1호선 개통에 이어 2020년까지 지하철 6개 노선을 건설할 계획이다.대구의 도로는 총연장 2,052㎞가 포장돼 포장률은 98.3%다. 1999년 12월 말 현재 도시 외곽을 연결하는 4차순환 도시고속도로 건설사업(65.5㎞)인 구안국도∼서변동(5.9㎞), 상인지구(1.2㎞), 범물지구(1㎞), 대곡지구(3.2㎞) 등 4개 구간은 이미 완공했고, 범물지구∼안심국도(7.3㎞)구간과 유천교∼성서공단(2.4㎞) 구간은 현재 공사중이며, 성서공단∼지천∼칠곡읍내동 구간(21.5㎞)과 서변동∼도동∼안심국도 구간(15.1㎞)은 2000년 2월까지 설계를 완료할 계획이다.내부순환 도시고속도로는 팔달교∼서대구IC간 확장사업을 98년 12월 완공했고, 성서IC∼옥포JC구간은 2000년 2월에 설계를 완료하고 상반기에 착공할 계획이다. 매천로(4.6㎞), 황금동∼담티고개(2.8㎞), 공산댐 우회도로(2.9㎞), 삼덕동∼시지택지(3.7㎞), 서변동∼북대구IC(0.9㎞) 등 18개 노선의 간선도로 건설공사를 추진하고 있다. 대구의 도로율은 21.76%(전국 2위)이다.등록된 차량은 2003년 6월 30일 현재 81만 41대로 자가용은 76만 7,328대, 영업용은 4만 642대, 관용 2,071대이며, 차종별로는 승용차 58만 829대, 승합차 6만 2,484대, 화물차 16만 5,586대, 특수차 1,142대로서 월 평균 2,762대가 증가했다.

대구의 관광[편집]

-觀光

대구의 관광자원은 타도시에 비해 빈약한 실정으로 관광대상지라기보다는 시민 휴식장소로 두류, 달성, 중앙, 앞산, 망우, 동인 등 6개 공원과 수성, 동촌, 팔공산 등 4개 유원지가 있다. 이에 따라 대구시는 관광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팔공산에 민자 22억원을 들여 팔공곤도라·리프트카(국내 최장거리 1.2km)를 설치 완료하였고, 86아시안경기와 88올림픽을 앞두고 총 391억여 원의 사업비를 들여 이곳 팔공산을 국민관광지로 개발했다. 대구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999년 12월 말 현재 8만 7,000명이며 외국인이 이용한 관광업소는 총 366개소로 여행업 295, 관광숙박업 26, 외국인전용 유흥음식점 8, 유원시설업 14, 기타 23개소 등이다.대구시의 문화재는 국가지정 문화재가 32점(보물 24점, 사적 3점, 천연기념물 1점, 중요 민속자료 4점)이고, 시지정 문화재는 유형문화재 41점, 무형문화재 9점, 기념물 11점, 민속자료 4점 등 57점이며 문화재 자료가 32점이다.

동화사[편집]

桐華寺

팔공산(八公山)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이다. 493년 극달(極達)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였다. 832년(흥덕왕 7)에 왕사 심지(心地)가 중창하였는데, 그때가 겨울철인데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934년에 선사 영조(靈照)가 중창하였고, 그 뒤 수차례에 걸쳐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1732년(영조 8)의 중창 때 세워진 건물로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연경전(蓮經殿)·천태각(天台閣) 등이 있다. 동화사의 지정문화재로서는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과 동화사비로 암삼층석탑(보물 제247호) 등이 있다.

팔공산[편집]

八公山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4개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 1,193m이다. 주봉인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동서로 16km에 걸쳐 능선을 이루고 있다.대구의 진산(鎭山)이며, 신라 5악(五嶽)의 하나로서 부악(父嶽)·중악(中嶽)·공산(公山) 등 여러 옛 이름을 가진 영남지방 유수의 명산이다. 기암괴석, 아름다운 산세, 이름난 고찰 등으로 일찍부터 많은 유람객의 발길을 끌었으며, 원효(元曉)·의상(義湘) 등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한다. 1980년 5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대구향교[편집]

大邱鄕校

대구 중구 남산동에 있는 향교이다. 1398년(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교동(校洞)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었으며, 1400년에 불타자 곧 재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어 1599년(선조 32) 현재의 달성공원 부근에 재건하였다. 1605년 교동으로 이건하여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932년에 현위치로 이건하였다.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문묘·삼문 등이 있으며, 향교내에는 대구성(大邱城)의 축성 및 유래를 기록한 축성비와 수성비, 경상도관찰사·판관·군수 등을 지냈던 사람들의 불망비(不忘碑)·송덕비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의 인물[편집]

-人物

서거정[편집]

(1420~1488)

조선조의 학자. 호는 사가정(四佳停). 시호는 문충(文忠). 6세 때부터 글을 읽고 신동이라 칭찬받았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문학과 역사와 법률을 비롯해서 천문지리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의술과 점술에까지 조예가 깊었다.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했고 25세에 문과급제, 벼슬길에 들어선 그는 6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 여섯 임금을 섬기면서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으며, 대제학을 23년간이나 지냈다.주요 저서로는 '경국대전' '동문선' '삼국사절요' '오자주해' '동국여지승람' '필원잡기' 등이며 그 중 가장 큰 업적은 1498년에 완성한 '동문선'이다.동문선은 신라, 고려 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의 시문 중에서 잘된 것만 뽑아 묶은 책으로 신라의 설총·김인문·최치원을 비롯, 백제의 무명작가, 고려·조선 초기의 명문들을 모두 수록한 133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인데, 동문선이라는 책이름은 중국 소명태자의 '문선'에 비겨 성종이 ‘東’자를 붙여 '동문선'이라 한 것이다.'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운 이래 삼국시대 고려시대에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음을 자랑하고 있어 그의 역사의식을 볼 수 있다.

현진건[편집]

(1900~1943)

소설가이자 언론인. 본관은 정주(廷州)이고 호는 빙허(憑虛). 한말에 득세한 개화파 집안에서 대구우체국장이었던 경운(擎運)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성성중학 4학년을 중퇴하고 상해로 건너가 호강대학에서 수학 후 1919년 귀국하였다.'개벽'에서 「희생화」를 발표함으로써 문필활동을 시작하여 다음해에 「빈처」로 문명을 얻었고, 이어서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백조'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였다. 1922년에 동명사에 입사했고,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셋째형 정건(鼎健)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던 중,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1943년 결핵으로 죽었다.그는 장·단편 20여 편과 7편의 번역소설, 그리고 여러 편의 수필, 비평문 등을 남겼다. 그의 작품 경향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사실주의 계열로서,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자서전적 신변소설, 하층민과 민족적 현실에 눈을 돌린 소설, 1930년대 장편소설과 역사소설들의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1930년대의 암울한 시대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외면적인 통속성이 강화되고, 민족정신은 내재화·추상화의 경향에 빠졌다.이 밖에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과 같은 비평문을 통해 식민지시대의 조선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 하기도 했다. 그는 김동인·염상섭과 더불어 근대문학 초기에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특히 신민지시대의 현실 대응문제를 단편기교와 더불어 탁월하게 양식화한 작가로서, 문학사적 위치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1996년 대구문인협회 주관으로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문학비를 건립하였다.

이상화[편집]

(1901~1943)

시인.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량(無量)·상화(相和)·백아(白啞). 7세 때 아버지를 잃고 14세 때까지 큰아버지 일우(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 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백기만·이상백과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활동을 하였다. 21세 때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홍사용·나도향·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白潮)'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 등과 함께 1925년 파스큘라라는 문학연구단체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義烈團李鍾巖)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7년 3월에는 독립운동가이며 중국군의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여 민족독립의 기운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 「불란서시정석」 등의 저작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죽었다.'백조' 동인으로서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 「단조(單調)」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 「이중의 사망」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시가 있다.

현제명[편집]

(1902~1960)

음악가. 본관은 연주. 호는 현석(玄石).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난 그는 계성학교에 들어가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숭실학교에 입학, 성악과 피아노에 관심을 가지고 음악수업에 열중하였다.1925년에는 미국으로 가서 음악교육을 받은 뒤, 1929년 귀국 독창회를 비롯하여 1930년대에 주도적인 성악가로 활동하였으며 1933년에는 홍난파와 함께 한국 최초의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195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 「춘향전」을 작곡 지휘하고 1958년에는 가극 「왕자호동」을 작곡하였다.그의 작품세계는 가곡에서 오페라까지 그 형식은 음악 전반을 포용하고 있다. 특히 그가 만든 곡 중 아직도 널리 애창되고 있는 「희망의 나라로」는 해방 후 진취적인 기상을 국민들에게 심어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이 가득한 신생대한민국을 가꾸려는 국민적인 의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향생각」 「산들바람」 「나물캐는 처녀」 등을 작곡했다.

대구의 시황[편집]

-市況

대구가 영남지방의 중심이 된 것은 조선 이래의 일이다. 특히 선조 34년(1601) 경주에 있던 경상도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대구로 옮겨 경상도 관찰사가 대구부사를 겸하게 된 이래 경상북도의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되었다.평양·강경과 아울러 한국 3대 시장의 하나로서 전국적인 상업 중심지로 발달하여 왔으며, 근래에는 각종 공업이 일어나 상공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시가지는 동·서·남 3방에 낮은 구릉지를 등지고 북방은 금호강의 범람원에 임하고 팔조령에서 발원한 신천이 시의 동쪽을 북류하여 금호강에 유입한다. 그리하여 시가지는 신천 범람원의 충적층(沖積層)에 발달하였다. 신천은 옛날에는 범람이 심하여 현 제방을 축조하기 전까지는 늘 홍수의 위협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신천 연안의 충적층은 전부 도시화하였다. 시가는 대구역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대체로 북으로 향하여 발전하였는데, 남쪽은 비파산(683m)이 가로막고 있다. 또 북은 금호강과 팔공산의 여맥이 미치어 그 지형의 제약으로 오늘날에는 남북방향의 발전은 주춤하고 동부와 남서로 향하여 발전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동부로 향하여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시가지는 대구역전의 중구 일대에 관공서·은행·회사 본지점, 시장 등이 모여 업무지구를 이루고, 북구는 공장지대, 동구는 주택과 농가, 서구는 시장, 남구는 학교가 많다. 시가는 한국전쟁 때 파괴된 일이 없어 도시계획을 과감히 할 수 없어서 지금도 좁은 골목이 많다. 근래 각종 공업이 크게 일어나고, 그 여파로 시가지가 팽창함에 따라,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경산·영천·경주·포항 방면의 교통이 편리한 신천 이동의 동구 방면에 원심적으로 급속히 도시화하고 있으며, 이 지역이 점차로 도심지의 기능을 분담할 수 있는 부도심지로 발전하고 있다.이러한 경향은 특히 동대구역이 생긴 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대구의 공업은 섬유공업을 위시하여 금속제품·기계공업 부문이 크게 발전하고 있는데, 대기업의 대부분은 섬유공업이 차지하고 있다.이들 공업이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 때 피해가 없었고 섬유·금속제품·기계 등 부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으며 또한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공업용수 등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의 분포를 보면 섬유공업은 대구역 북쪽 침산동·칠성동·원대동 일대에는 대규모의 공장이 모였고, 달성공원의 서남쪽인 비산동·내경동 일대는 영세규모의 직물공장이 많다. 동인동과 칠성동 부근에는 대소 제사공장이 모여 있다. 금속제품 공업은 태평로·원대동·칠성동에, 기계업은 칠성동·달성동·신암동에, 화학공업은 대명동·침산동·칠성동에 각각 분포되어 있다.대구는 전통적으로 교육도시로서의 역할이 크다. 전통 교육기관으로는 대구향교, 서산서원, 연경서원 등이 있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경북대학교, 계명대학교, 영남전문대학, 대구교육대학교, 영진전문대학, 계명전문대학, 신일전문대학, 대구전문대학, 대구공업전문대학, 대구보건전문대학이 있다.그 밖에 대학 본부를 경산으로 옮긴 대구대학교, 영남대학교, 효성가톨릭대학교 단과대학의 일부가 남아 있다. 공공 도서관으로는 대구중앙도서관, 두류도서관, 서부도서관, 북부도서관, 효목도서관 등이 있다. 박물관으로는 국립대구박물관, 한국무속박물관이 있다.

대구의 금융[편집]

大邱-金融

정부의 금융산업 구조조정에 따라 중소기업 전담은행인 대동은행이 퇴출되고 경일종금 대구종금이 폐쇄되면서 한 때는 지역 금융산업이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국민은행이 대동은행을 인수하고 대구은행과 영남종금이 증자를 통해 지역 금융산업의 안정을 기하게 됐다. 또한 담보여력이 부족해 자금난을 겪고 있는 지역 유망 중소기업에 구조조정 자금 등 각종 자금을 지원하고, 대구신용보증조합을 통해 356개 업체에 259억원을 보증지원했다. 대구의 금융기관은 1999년 12월말 총 345개로서 수신고는 28조 8,234억원, 여신고는 18조 5,461억원이다.

대구의 국제교류[편집]

大邱-國際交流

대구는 미국 애틀랜타, 카자흐스탄 알마티, 중국의 칭따오, 브라질 미나스 제라이스, 일본 히로시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6개 도시와 자매결연을 체결한데 이어 98년 12월 14일에는 세계적 섬유패션 도시인 밀라노시와 자매결연을 체결하여 ‘밀라노 프로젝트’ 사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앞으로 폴란드 크라코프, 프랑스 리옹, 체코 프라하, 캐나다 몬트리올 등의 도시와도 자매결연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경제, 문화, 교육 등의 분야에서 민·관 협력체계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