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부인전
그는 무엇이라고 아명도 있었으나 그것은 그의 친정 친족이나 아는 이름이요, 또 호적상 이름도 있으나 그것은 아마 자기나 마음에 기억하고 있었는 지 몰라도 그 자녀들도 들어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삼남 이녀를 남기고 늙은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임종이 심히 아름다왔다 하여서 칭송이 있기 때문에 이 전기를 쓰게 된 것이다.
김씨 부인은 어떤 상인의 세째 딸로 태어났다. 아들을 기다리던 집이었기 때문에 그의 탄생은 그 집에 환영되지 아니하였다. 벌써 나이 오십이 넘은 그의 아버지는 또 딸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 담뱃대를 물고,
『에잉.』
하고 돌아 앉았고 그의 어머니는 울었다. 그 형들까지도 그가 나기 때문에 더욱 빛을 잃었다.
『이년들 보기 싫다. 저리 가거라.』
그들의 아버지는 밥상을 받았다가도 말 같은 딸들이 눈에 보이면 소리소리 질렀다. 그러면 딸들은 건넌방 구석에 들어가 숨었다. 갓난 그만이 이런 줄도 모르고 보채다가는 볼기짝을 손자국이 나도록 얻어 맞았다.
김씨 부인의 형들은 하나씩 하나씩 시집을 갔다. 하나는 벼슬하는 집에 가고 둘째는 아무것도 아니하는 부잣집에 갔다. 시집을 간 뒤에는 집에 오더라도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아니하였다. 두 형이 시집을 가고 김씨 부인이 혼자 남게 된 때에는 부모의 귀염도 받을 상싶건마는 아들 하나도 없는 집에 계집애 하나만 있는 것이 청승맞게도 보여서 그 아버지는 가끔 양미간을 찌푸렸다.
김씨 부인의 어머니도 벌써 나이가 오십이 가까와서 다시 성태할 것 같지 아니하게 될 때에 그의 아버지는 딴 계집을 보아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행세요?』
『그럼 대를 끊으란 말야?』
김씨 부인은 안방에서 그 부모가 이런 말다툼을 하는 것을 가끔 들었고, 또, 어머니가 계집애를 내 세워서 아버지의 뒤를 밟게 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남편의 외도를 아내로는 막을 길이 없는 것 같았다. 남편의 염탐군으로 내세웠던 계집애가 남편과 하나이 된 줄을 안 그의 어머니는 죽는다고 야단을 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큰형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시집에서 쫓겨 왔다. 이것이 더욱 그 아버지를 괴롭게 하여서 더욱 주색의 길에 나서게 하였다. 젊어서부터 근검하여서 자주성가한 그 아버지가 늦바람이 난 것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의외에도 그 어머니 오십이 다 되어서 성태를 하였다.
『어머니가 아들이나 낳았으면…….』
김씨 부인은 어린 마음에 이렇게 빌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성태한 것을 보고는 아버지의 태도가 돌연히 변하여서 밤에 밖에 나가는 일을 중지하였다. 집안은 다시 화락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절에를 다니고 무당 집에를 다녔다. 아버지는 산수를 돌아보기 시작하여서 그 무후한 삼촌의 산수에까지 석물을 하였다. 딸들도 귀염을 받 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또 딸을 낳았다! 환영받지 아니하는 생명이 무엇하러 또 이 집에 들어왔는고. 김씨 부인은 울었다. 그 어머니는 미역 국밥을 아니 먹는다고 버티었다. 그러나 이제는마지막이었다. 더 낳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김씨 부인도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그는 여러 형제들 중에 가장 얼굴도 어여쁘고 얌전하였다. 학교에 보낼 리도 없지마는 재주가 좋아서 한글을 혼자 깨뜨리고 아버지 몰래 책도 읽었다. 침선도 잘하고, 모든 것이 알뜰하였다. 청혼하는 데도 있었다.
그러나 손금장이와 무당의 말이 그는 초취에 시집을 가면 과부가 될 것이라는 것과, 북쪽 수성 가진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어야 한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좋은 혼처를 다 물리치고 북방 수성 가진 홀아비를 구한 것이었다.
그러한 결과로 그는 홍 ─ 이라는 어떤 장목전 하는 사람에게로 시집을 갔다. 나이는 십 오 년인가 틀렸다. 열 여덟 살인 처녀, 사십이 훌쩍 넘은 홀아비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은 결코 기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씨 부인은 혼자 울었을 뿐이요 한 마디 항의도 한 일이 없었다.
시집을 가 보니 구지레한 헌 문짝과 석가래와 널쪽과 기왓장과, 이런 것들이 앞을 콱 막고집이란 것도 친정집에는 비길 수도 없이 적고 더러웠다.
오래 홀아비 살림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 몰랐다.
전실의 세간은 새색시의 눈에 아니 뜨이도록 치워버렸으나 전실 아이 사 남매는 치워버릴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큰애는 아들인데 열 다섯 살이나 되어서 벌써 중학생이니 김씨 부인에게는 동생이나 마찬가지요, 다음으로는 딸인데 열 두 살, 그 다음은 또 딸인데 여덟 살, 그 다음은 세 살 먹은 아들 이었다.
김씨 부인은 시집가는 날부터 을씨년 같았다. 첫날밤은 그렇지 아니하였으나 이튿날부터 젖먹이를 옆에 누이고 잤다. 친정에서 천더기 동생을 보아 주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젖먹이 돌보기는 그다지 힘들지 아니하였으나 큰 아이들이 말썽이었다. 첫째로 큰아이들이 어머니라고 부르지를 아니하였고, 셋이 한데로 몰려서 이 젊은 계모를 적으로 삼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김씨 부인은 곧잘 네 아이를 거두었다. 이래 삼십 년에 김씨 부인 는 전실 소생 네 아이를 다 길러서 성취를 시켰다. 그리고 손주새끼도 다섯이나 업어서 길렀고 제 소생도 넷이나 낳아서 길렀다.
『무던해.』
라는 칭찬을 받아 온 김씨 부인은 바짝 말라버렸다. 이 가난한 사람 많이 사는 우대에서는 드물게 보는 미인으로, 얼굴 잘나고 몸매 나고, 재주 있고 한다던 그도 사십이 얼마 넘지 아니하여서 아주 노파처럼 바스러지고 말았다.
전실 아이들을 다시집, 장가를 보내고 나서 그의 남편은 그를 편안히 하려고 전실 아들을 따로 내고 제 소생 네 남매만 데리고 장목전 집에서 새 집을 하나 장만하고 떠났다.
『이제 좀 편히 살아 봅시다.』
남편은 이런 말로 바짝 마른 아내를 위로하였다.
김씨 부인은 머리에 기름도 발라 보고 비단 옷도 입어보았다. 분도 발라 보았다. 그러나 늙고 마른 뒤라, 아무런 짓을 하여도 쓸 데 없었다.
게다가 김씨 부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것은 김씨 부인이 자기는 일생을 고생으로 지냈으니 딸이나 한 번 실컷 잘 살게 해 본다고 전문학교 공부까지 시킨 딸이 졸업과 혼인을 앞두고 죽어버린 것이다.
이 딸이 죽은 뒤로부터 김씨 부인은 아주 귀신같이 되어버렸다. 몸은 더욱 마르고 마음은 더욱 어두워졌다.
『별로 적악을 한 것도 없는데…….』
하고 그는 애통하였다. 옆에서 보기에 그는 딸의 뒤를 따라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잊는 재주가 있다. 딸이 죽은지 오륙 년을 지나니 김씨 부인이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떠도는 때도 있게 되고 또 살도 약간 붙는 것 같았다. 늦게 낳은 두 아들 한 딸도 다들 자라서 소학교에를 다니게 되었다. 이 집에는 또 한 번 봄이 오는 것 같았다.
『앞으로 십 오년만 더 살고 죽으면 저것들이 다 성취하는 것을 보겠지.』
김씨 부인은 이런 소리를 하고는 웃었다.
형제들과 아는 사람들도 다 진정으로 다행하게 여겼다.
그러던 것이 지난 겨울에 김씨 부인이 감기 모양으로 앓기를 시작하였다.
봄이 되어도 낫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필경은 그것이, 오늘날의학으로는 나을 수 없는 폐육종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김씨 부인이 죽기 사흘 전에 그 남편이 비로소,
『당신은 살아나지 못하오. 폐육종이래.』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 말을 듣고 김씨 부인은 울었으나 곧 마음을 잡았다.
『당신이 끝까지 내게 끔직이 해주셨으니 나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요. 아이들이 성취하는 것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지마는 당신 앞에서 죽어서 당신 손에 묻히는 것이 오죽 좋은 일이요?』
김씨 부인은 이런 말을 하였다.
죽는 날 아침에 김씨 부인은,
『나는 오늘 아침 한나절 나무아미타블 관세음보살을 불렀어요. 그렇지만 저승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가보았나요.』
이런 말도 하였다.
그날 밤이었다. 오월 단오를 며칠 아니 남긴 비오는 날 밤이었다. 그 비는 온 천하가 오래 기다리던 비였다. 김씨 부인은 늙은 남편의 손을 잡은 채로 세상을 떠났다.
병으로 누운 반년 동안에 김씨 부인의 마음은 거울 같이 맑아진 듯하였다.
양같이 순하고 어린애같이 착하게 되었다. 더구나 임종 전 사오 일간은 성인이라고 할 만하게 깨끗하였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직 감사와 만족뿐이었다.
『도무지 시체가 무섭지를 않어.』
김씨 부인 죽어서 오일장을 지내는 동안에 조상 온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말하였다.
김씨 부인이 길러낸 전실 아들과 며느리와 딸들과 손녀들이 모두 거상을 입고 울었다. 김씨 소생인 자녀들은 아직도 상제 노릇 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이가 언제 도를 닦았을까.』
장례날 이런 말이 났다.
『전실자식 사남매를 길러내는 동안이 수도생활이어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다들 진심으로 그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一九四〇年 七月[일구사공년 칠월] 《文章 [문장]》소재[所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