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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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향수하고, 딸의 이름 징상을 얻다.

1[편집]

××빌딩 맨 위층 한편 구석으로 네 평 남짓한 장방형짜리 한 방을 조붓이 자리잡고 들어앉은, 잡지 춘추사(春秋社)의 마침 신년호 교정에 골몰한 오후다.

사각, 사각…….

사그락, 삭삭…….

단속적으로 갱지(更紙)에 긁히는 펜 소리 사이사이, 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만 유난히 바스락거릴 뿐, 식구라야 사원 셋에 사동 하나 해서 단출하기도 하거니와, 잠착하여 아무도 깜박 말을 잊는다.

종로 한복판에 가 섰는 빌딩이라, 저 아래 바깥 거리를 사납게 우짖으며 끊이지 않고 달리는 무쇠의 포효와 확성기의 아우성과 사이렌과 기타 도시의 온갖 시끄런 소음이, 그러나 이 방 안에선 그리하여 잠깐 딴세상의 음향인 듯 마치 스크린의 녹음처럼 바투 가까이서 아득하니 귀에 멀다.

스팀이 푸근히 더워, 사동은 구석 걸상에서 입을 벌리고 편안찮이 졸고 앉았고…….

정면 상좌의 대영(大永)은 다른 두 사원과 한가지로 수북이 쌓인 아카지에 머리를 처박고 골치를 찡그리면서 한동안 교정을 하고 있다가, 이윽고 두통과 연달아 담배 생각에 정신이 번져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든다.

맞은쪽으로, 방 드나드는 한편 머리에 놓인 응접 소용의 원탁 앞 소파에서는 스미코(澄子)가 이내 고즈넉이 아까 올 때 끼고 온 『성좌(星座)의 이야기』를 펴들고 앉아 잠심해 읽고 있다.

빼뚜룸한 베레 아래로 굵다랗게 웨이브져 내려온 머리와 더불어, 윤이 치르르 새까만 모피 외투의 넓은 깃에, 정통은 거진 다 덮이고서 조금만 벌어진 귀 뒤의 하얀 목덜미, 거기에 무심코 대영은 주의가 끌려 조용히 시선이 가서 멎는다.

남자 같으면 훤히 잘 틘 이마라고나 할는지, 가 닿는 눈의 촉감이 보드랍게 용해되는 희고 연한 목덜미의 살결, 그것은 적실히 여자가 지닌 하나의 여자다운 매력이었었다.

대영은 그리고 지금에야 그걸로 해서 비로소 이 스미코에게 대하여 한 여자를 느낄 수 있는, 그의 여성적인 매력을 발견했던 것이다.

어느덧, 펜을 쥔 채 양손을 받쳐 턱을 괴고 곰곰이 여자를, 고운 목덜미 한곳만 앉아서 바라다보고 있던 대영은, 얼마 만인지야 두어 번 가볍게 고개를 끄덱끄덱, 내심으로,

'역시 그랬던가!'

하면서 왼팔을 뻗쳐 건성 담뱃갑을 더듬는다.

이 여자에게도 또한, 여자다운 매력이 있기는 있었더니라는 새삼스런 사실을, 그러나 그것이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극히 당연한 노릇임을 마침내 깨달은, 즉 이중의 강화된 긍정이었었다.

비로소 또는 마침내라고 해도, 하기야 오늘로 두 번째요, 따라서 인제 겨우 두 번쯤 만나는 여자이거니 한다면 그역 별로 괴이쩍을 것은 없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실상 한편으로는, 은연중 궐녀를 두고 수월치 않은 관심을 가지던 터이면서, 그러고서도 벌써 두 번이나 만나도록 여태, 여자를 갖다가 순전히 한 여자로서는 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한 것은 막상, 저편이 같은 한 인물은 한 인물이로되 이편의 관심하는 바 초점이 오로지 애먼 데에 가서만 무심코 잦아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가사 두 번이건 세 번이건 그 만난 차례수가 상관될 것은 없는 것이었었다.

2[편집]

그저께 석양 때, 평소엔 별반 상종도 없는 영화관계자 김종호란 사람이 돌연 전화를 걸고는, 며칠 전 동경서 온 귀객인데 긴히 문(文)선생을 만나 뵙고자 한다고, 시방 시간은 어떠시냐고, 그 수다가 빠안히보이게 선통을 하더니 이내 데리고 와 초면인사를 시켜 주는 게 바로 이 스미코이었었다.

김종호는 대영을, 현재 조선문단의 혁혁한 '중견 대가'요, 방금 조선안에서 십만 독자를 거느리고 가장 '인기'가 높은 이곳 문학잡지《춘추》의 주간이요, 그 밖에 무언 어떻고 무언 어떻다면서 마치 거리의 약장수가 만병수를 놓고 풍을 치듯이 갖은 최고급의 형용사를 종작없이 씨월데월, 소개랍시고 손에게 설명을 하는 것이었었다.

그리고 스미코는 가리켜 조선의 각반 예술, 그 중에도 특히 영화에 대해선 이해와 관심과 동정이 깊은 분으로, 거기 관한 연구와 조력을 하기 위하여 멀리 이렇게 조선엘 찾아왔는데, 그래 아마 어쩌면 영주를 할 듯하다고, 더욱 기쁘고 경사스럽기는 그 첫 선물로 이번에 제가 원작·각색·감독을 하는 '청춘아, 왜 우느냐!'에 찬조 출연을 하기로 이미 내락까지 했느니라고, 그러니 부디 잡지를 통해 많은 원조를 아끼지 말아 달라고, 대영에게 소개인지 선전인지를 한바탕 떠들어 놓는 것이고…….

대영은 마지못해 코대답이나 응 응, 고개를 끄덱거려 줄 뿐, 하는 수작이 벌써 시쁘디시뻐, 하나도 흥미라곤 생기지를 않았었다.

별, 세상엔 일 좋아하는 여자도 다 있던가 보다고…….

심심하거든 차라리 가만히 앉아서 낮잠을 자든지 할 것이지 대체 무엇이 어쨌다고 이 어설픈 구석엘 찾아오는 것이며, 그나마 하필 얻어 걸린다고 얻어 걸린 양반이 어디서 저 알량한 김종호 서방님이니, 참 딱한 일도 많지야고…….

그러나저러나, 웬걸 제법 중추가 있고 내로라는 여자라고 한다면야 아예 쓰잘데없이 그 따위 허무맹랑한 거조를 하려고 들 이치는 만무한 것, 소견머리없는 품이 매양 김종호와 한 바리에 실을 꼭 같이 데데한 축일 테지야고…….

아마 모르면 몰라도 뉘네 집 하찮은 오피스 걸이 아니면 다직 삼류 사류의 영화배우로, 실행(失行)을 했든지 실연을 했든지 하고서 홧김에 도피행을 해 왔기가 십상일 것, 한 것을 멀쩡한 저 활량이 얼씨구나 좋다구 실끔 들춰업고는 바로 조선의 예술이네, 영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네, 게다가 동정은 무어며 연구란 어디 당한 것인지, 시방 저렇게 통나팔을 불고 돌아다니는 속이겠지야고…….

이렇듯, 대영 제류의 심술스런, 그래서 자못 무책임한 판단이었으나, 하여간 판단이 그러하고 보니 자연 그 나그네가 대단할 것도 달가울 것도 없을밖에 없었다.

대영은 그 자신이 소위, 세대의 룸펜으로 제 코가 석자나 빠져 가지고는 '삐뚤어진 빈집〔廢屋〕에서 거주를 하고 있는' 터이매, 모든 사물에 대하여 좀처럼 흥미와 관심이 일지도 않는 형편이었지만, 우환 중 선입지감이 없지 못한 김종호가 웬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또 횡설수설한다는 게 여전히 부황한 소리요, 한 데에 그만 그는 (일종의 자기 암시랄 것에 걸려) 우선 초면한 객의 행색이나 상모 같은 것이라도 일단 차근차근 음미를 해볼 나위도 없이 덮어놓고 긴찮은 생각과 멸시부터가 앞을 서,

'부질없은 짓을!'

'오죽할 여잘라구!'

이쯤, 인물까지도 통틀어 치지도외를 해버리고 만 것이었었다.

인사를 하고 난 즉시는 (어쨌건) 관념한 바가, 그리고 태도가 무릇 이러했었다.

그러나…….

이내 주저앉아서 김종호는 스미코의 편리를 위함인지, 와락 유창하지는 못하나마 종시 국어로다가 작금 내지 영화계의 현상에 대한 비판을 요령이 없는 대신 심히 장황스럽게 설론을 늘어놓고 있었다.

당하는 대영으로서는 대단히 괴로운 응접이요 억울한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대영은 그러노라니, 응접 처소를 만들어 둔 것이나 부질없이 후회를 하면서, 처음 얼마 동안은 그대로 저대로 말대꾸를 해주는 시늉을 하던 것도 엔간히 감당을 못 해, 필경은 건성으로 우두커니 마주 앉았기나 해야 했었다.

하다가 우연히, 하 무료타 못해 부지할 바를 모르고 한만하게 두루 떠돌던 주의가 마침내 스미코한테로 향해질 기회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었다.

훨씬 값진 모피 외투와, 윤 좋게 새까만 그 모피 자락으로 덮은 무릎 위에 놓였는 흰 손가락의 상당히 굵고도 잘 빛나는 다이아, 이 두 가지 물품의 썩 호사스러움에 문득 눈이 띄었던 것이다.

의외로워, 고개가 절로 깨웃,

'흐응!'

하면서 다시금 보아야 역연 녹록지 않은 사치요, 그러나,

'저만큼이나 호사를 할 수 있는 신분이라면은……?'

하고 되짚어 생각을 하노란즉, 방금 아까 뉘네 집 하찮은 오피스 걸이니 삼류 사류의 영화배우붙이니 한 것은 아무려나 좀 동떨어진 짐작이던 성도 불렀다.

'그렇다면?'

하고, 그래도 심술로,

'……부잣집 영감쟁이의 소위 인텔리 이호(二號)……? 싫증이 나 도망질을 빼 온…….'

이렇게 둘러붙여 보다가, 또 고개를 깨웃,

'……대관절 어떻게 생겼더라?'

하면서 눈을 드는데, 얼굴은 생각잖이 몹시도 (인상적으로) 침울하여, 퍼뜩 놀라웠다. 얼굴을, 어떻게 생긴 얼굴인지 본다고 심상히 올려다보았던 것인데, 뜻밖에 표정만 그렇듯 인상적이던 것이다.

어떻게 생긴 얼굴인지 본다고 보았다지만 물론 처음 비로소 정면으로 대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무심했던 탓이겠는데, 하여튼 그다지 침울한 줄은 몰랐었다.

세 번째 고개를 깨웃,

'왜 그럴꼬?'

하면서, 그제야 이것저것 두루 여살펴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지적으로 세련된 총명한 기상이 매우 노블했고, 뿐만 아니라 거진 제 살결에 가깝도록 가볍게 다스린 화장이랄지, 색채와 무늬가 야하지 않고 잘 조화된 의복이랄지, 통틀어 전체의 풍모가 다 기품이 있어 보였다. 이러한 걸로 미루어 (아직은 속단의 혐의가 없지야 않지만) 아무커나 우선 교양이 쌍스럽지 않음을 알겠었다.

고개가 필경 이번에는 앞뒤로 끄덱거려지면서,

'으응! 그래애!'

함은, 애초의 그와 같은 짐작과 판단에 대하여 시방의 새로운 발견이 적이 신통스러웠던 때문이었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애먼 수확이요, 오히려 명랑할 조건일지언정, 그러므로 저렇듯 침울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재료는 아니었었다.

'말도 잘 않고!'

생각하니 참 그러했었다.

그는 맨 처음, 김종호가 대영더러 하라 스미코상이라고 성명을 일러 소개하는 뒤를 받아,

"도조 요로시쿠(잘 부탁합니다)……."

하고 단 한마디 항용 인사에 쓰는 말을 했을 뿐, 졸연히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그저 잠잠히 앉아 김종호가 저 혼자서 연신 지껄여 쌓다가는 중간중간,

"……아,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요? 스미코상……."

하면서 고개를 들이대고 두번 세번 조르듯 다져야만 겨우,

"글쎄……."

라거나, 혹은,

"네에……."

라거나, 짧은 대답을 해주곤 할 따름이었었다.

그러고는 한 번도 제가 자진하여 말참견을 한다든가 이야기를 꺼낸다든가 한 적이라고는 이내 없었다.

그야 막상 초면인사를 하고 난 낯선 타방(他方) 남자의 앞이라서, 자연 여자답게 삼가를 하는 조심도 없지는 못했을 것이었었다. 그러한데다가 또 줄곧 들이 생철동이 두어 몫 혼자서만 떠들어 대는 김종호의 수선에 치여, 가령 무어라고 말을 내고 어쩌고 하기는새레, 좌석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겠는 모양인 것도 사실이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것이려니와) 문제인즉슨 도시에 기분이 차악 갈앉아 조금치도 남과 함께 섭쓸려서 담화를 나누고, 어우렁더우렁 놀고, 그리하잘 경황이란 것이 나지를 않는 때문인 것이었었다.

하되, 그렇다고 해서 또 가사 하찮은 오피스 걸이나 삼류 사류 영화배우의 실연도피행은 아니더라도, 좌우간 저렇듯 배젊은 여자겠다 첩경 그럴 성싶은 걸로, 역시 연애 등속의 사단에서 오는 순전히 감정적인 번뇌 이것이냐 하면, 그러나 심각하되 훨씬 침착하여 맑은 이성의 빛을 지니고 있음을 보아, 일변 흔히 그 바지직바지직 아픈 고민을 깨무는 표정적인 상심(傷心)의 자취가 전혀 없음을 보아, 아무래도 그와 같은 일종 근육적인 심장의 사건과는 판연 계통이 닯은 자라 안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필경 갈데없이 그것은, 저 깊이 머릿속에 가 서려 있는 어떤 사색적인 세계로부터 우러나는 정히 절망된 한 개의 상심(喪心)…… 이 증상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었었다.

드디어 대영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와 동시에 불현듯 여자에게서 저 자신의 많은 일부분이 느껴짐을 느끼면서 새삼스럽게 정신이 들어, 더럭 더 호기심이 끌리지 않질 못했다.

김종호는 여전히 귀 먹은 토키 같은 열변을 토하고 있고.

스미코 역시 그대로 절에 간 색시인 채로 앉았고.

대영은 절절히 감심스러워 여자가 다시금 쳐다보이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일이 하도 상상 밖이요 당돌했던 만큼 미심조로 한걸음 물러나,

'그렇기로서니……?'

'글쎄, 원…….'

하고 혹시 천착이 지나쳤던 게 아닌가 하여 넌지시 의심을 일으켜도 보았다.

그러하잔즉슨 과연 그 이상의 확증을 잡을 만한 조건은 미상불 찾아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하나 반대로, 이미 도달한 결론을 갖다가 도로 번복을 시킴직한 조건도 마찬가지로 발견은 할 수가 또한 없었다.

그러므로 역시, 먼저의 결론은 어쨌거나 일단 승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인데, 그러자니 문득,

'대관절 웬 여자길래?'

하고 그의 정체랄 것이 비로소 궁금했다.

아닌게아니라, 여자의 과거 일체가 드러난다면 시방 현재의 행위도(간접으로써) 자연 판명이 될 것이었었다.

그래 아쉰 대로, 처음 김종호가 너절하니 주워섬기던 명색 소개의 말을 돌이켜 두루 생각을 해보았고, 해는 보았으나, 그러나 막상 그런 걸 가지고서는 바라는 바 여자의 정체를 캐치할 수가 도저히 없었다.

해서, 정통은 종시 막연한 채 다만 그 대신 애초에 여자를 한낱 하잘것없는 잡동사니의 룸펜―---천민(賤民)인 걸로 보아 버렸음은 역연 온당치 못한 편견이었다는 것만은 재삼 자인을 해야 했었다.

따라서, 가령 이번 일로 하더라도 무어 조선의 각반 예술이라더냐 영화라더냐 관심이네 연구네 하던 소리는 정녕 김종호의 어지빠른 고안일 테고, 당자는 (어찌 된 내력은 모르겠으나) 십상 마음이 울적한 나머지 구경삼아 놀기 겸 미지의 세계라서 그저 와보느라고 와본 것이겠는데 자연 사정이며 형편을 모르는만큼, 또 지리에도 생소하고 하여 전자에 우연한 안면이 있었거나 혹은 누구의 (무책임한) 소개로 저 살뜰한 안내자를 찾았던 모양 같고, 한 것이 시방 아무 영문도 모르고서 저렇듯 덤덤히 꺼들려 다니며 애꿎이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참이고…… 이렇게 인식을 시정할 수까지 있었다.

이쯤 호의롭게 생각이 기울자 연달아 그 다음부터는, 만일 그렇다면 인제 보나 안 보나 톡톡히 망신이나 하고 나설 게 빠안한 야바윗속인걸, 그러니 저 일을 장차 어떡한단 말이냐고, 당초에 출발한 코스는 어디로 가고서, 어느덧 저도 모를 사이 걱정이 한참 고부라져 딴전을 보고 있었다.

괜히 걱정이 되는 것, 이것이 그의 부질없은 다심(多心)이요 그걸로하여 항상 자기 혐오를 느끼는 것이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일면의 천품이었었다.

과연 반동은 와, 이윽고 제정신이 들자 그제는,

'흥! 별, 다아…….'

하면서 냉소로 더불어 한 다른 제 버릇을 내어, 예의 '삐뚤어진 빈집' 속으로 저 자신을 거둬들이는 것이었었다.

마침 그러자 김종호가 그 동안 한 삼사십 분은 착실히 콩이야 팥이야 지껄이고 앉았던 그 소위 영화비판의 일석을 어름더름 끝을 막고서, 겨우 무거운 뒤를 일으켜 세웠다.

하마 네시가 다 되었고, 그런대로 대영은 불행 중 다행스러 냉큼 마주 일어서는데, 김종호는 그러나 이번엔 또 같이서 밖으로 나가자는 청을 하는 것이었었다.

매양 찻집이나 가자는 뜻인 듯싶은데, 하기야 대영도 인제는 엔간히 일도 시간도 무방했고 겸하여 종일 아프던 골치겠다, 명과나 금강산의 진하게 끓인 한잔 커피가 따끈한 맛이 미상불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었다.

하나, 그렇더라도 가면 넌지시 혼자서 가는 것이지 어쨌으니 이 귀 아픈 동행과 함께 번다한 거리의 다방을 찾아가, 차나 아니나 구정물 같은 사탕국을 마시면서 또다시 그의 무지한 소음을 듣고 앉았잘 며리는 없는 것이었었다.

그래, 무어라고 핑계 댈 말이 얼른 생각이 안 나,

"글쎄……."

하고 시계를 올려다보면서 잠깐 망설이는데, 그런데 뜻밖에 스미코가 (웬일로) 입이 떨어져서는,

"바쁘시지 않거든, 저어 저녁진지나 같이……."

하면서 더 의외의 제의를 하는 것이었었다.

대영은 섬뻑, 여자의 그만큼이나 소탈한 파격의 태도가 미소(微笑)롭고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사람 근천스럽고 체신 아니게 즉시 거기에 응을 할 의사는 조금도 없었고, 그저 고맙다고, 그러나 이편이 명색 주인인데야 원래의 귀한 손님을 위로할 겸 먼저 경의를 표해야 도리가 옳지 않으냐고, 하니 종차 그러한 기회가 있은 다음에 혹시 나를 부르는 경우라면 그때는 기쁘게 나아가겠노라고, 흔연히 좋은 말로 (한다는 것이 부지중 외교관 본으로) 사퇴를 한 것쯤 되었었다.

여자는 한번 웃을 뿐 다시 더는 아무 소리도 없고 한 것을 김종호가 부득부득, 아 우리네 '문화인' 서로들끼리 무얼 다 그런 체면과 절차를 차리고 어쩌고 한단 말이냐고, 자 어서 같이 나가자고 졸라 쌓는 것이나 종내 불응을 했고, 하다못해 그러면 이왕 말을 낸 초면 나그네의 낯을 보아 잠깐 차라도 한잔씩 마시자고 하여, 그것마저 물리치기는 차마 박절한 것 같아서 부득이 근처의 다방으로 자리를 옮아 앉았었다.

다방으로 가서도 (미리서 다 각오야 했던 것이지만) 역시 김종호의, 이번에는 저만 빼놓고 죄다 아무것도 아닌 조선의 영화감독 '올 바보론'을 지지리 들으면서 무의미한 부역(賦役)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미코는 여전히 거기서도 침묵을 하고 있었고.

대영은 기위 이편이 찾음을 받은 사람쯤 된 입장이요, 연거푸 이렇게 자리를 같이 한 터이겠다, 노상 소 닭 보듯이 멀거니 바라다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저라도 들어서 이것저것 말을 붙여 담화가 얼리도록 이야기를 리드하고 하는 것이 한갓 대접이겠고, 따라서 그리 하자면 물론 못 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저편이 결코 무슨 화제를 가지지 못했다거나 또는 파겁이 되지를 못해서라느니보다도 근본적으로 제 기분이, 그리고 좌석의 분위기에 대하여 마음이 내키고 흥이 일고 하질 않아하는 기미가 번연한 것을, 구태여 눈치코치없이 지분지분 성가시게 굴어 주잘 내력이라곤 없는 것이었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첫인상이 하여커나 '말 않는 여자'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히려 말을 않고 있는 태가 차라리 자연스런 것 같은, 일종 막연한 풍치감(風致感)도 또한 없지가 않았었다.

한데다가 또 이편따나 매한가지로 경황이 더얼하여, 이야기 같은 것을 힘써 하고 싶은 정성도 일변 나지를 않는 터이고 해서,

'쯧! 나그네 국 마다자, 주인네 장 없자, 실없이 잘 되었지…… 무어 발벗고 나서서 억지엣건사를 물러 들 까닭이 있을 게 있나…… 제 떡 저 먹고, 내 떡 나 먹고 했으면 다 고만이지…….'

야고, 내뻗어 버리자니까는 그 동안 무엇인지 모르게 걱정스럽던 어떤 의무감이 후련히 씻겨 나가면서 마음이 거뜬해지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마지막 식어빠진 차를 주욱 들이마셨고, 그러나 언제까지고 앉았어야 언제까지고 별 내력이 없는 노릇, 그런데 김종호는 차례를 잡는 품이 좀처럼 자리를 뜰 채비가 아니고, 그래 무때리고 먼저 돌아가겠노란 말을 하면서 모자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아니나다를까, 김종호는 그대로 반만 엉거주춤 마주 일어서더니, 아 그러냐고 대영의 손을 잡아다가 흔들어 싸면서 오늘은 참 실례가 많았노라고, 그리고 내일이고 모레고 긴히 좀 찾아가 상의를 할 일이 있노라고, 그러면서 일변 스미코더러는 우릴라컨 예서 시간까지 더 기다려 방이 났는지 아파트엘 가보기로 하자고, 자 문선생 우리는 그러면 이대로 실례를 하겠노라고, 한참 들이 너스레를 떤 후에야 겨우 악수를 놓아 주었다.

하는 동안 대영은, 그 살 많지 못한 손가락이 소당깨 같은 손바닥 속에서 당분간 악형을 받되, 아프단 소리도 못 하고 참아야 했고.

여자는 작별차로 같이 따라 일어서서는, 그러나 제 격에 맞게 간단히 한마디 '사요나라'란다든지, 폐를 끼쳤노란다든지 하는 게 아니고,

"저어, 오늘낼 새 거접할 곳이나 얻어서 몸이 갈앉혀지는 대루 수이 한번 찾아뵙겠어요!"

하면서 여러 말로 된 인사를 하는 것이었었다.

이것이 초면의 두 시간 가까운 교제에, 또 자리를 두 번이나 바꾸어 앉았으면서 그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 가운데 비로소 말다운 말이었었다.

대영은 실러블이 여럿인 것은 신통했으나 내용은 단지 인사엣말이거니 하여, 저 역시 인사성으로,

"네에! 부디 놀러 오십시오!"

하는 것을, 여자는 실상 지날말이 아니었던 듯 더,

"그렇지만, 바쁘실 텐데……! 놀러라구 해두 어디 정말 놀러야 가겠어요? 가면 다가 시간을 뺏어 디려야 하구, 그러니깐 말씀이죠!"

하면서 어떡하다가 말문이 터져 가지고는 겸하여 이야기가 자못 구체적인 바가 있었다.

대영은 속이 시원했고, 워너니 그렇겠지, 무슨 청승에 필요까지도 억누르고서 침묵을 고집하여 생으로 벙어리짓을 하잘 까닭은 없겠지야고, 일변 흔연히 고개를 끄덱끄덱,

"머어 좋습니다! 무슨 그리 대단스런 노릇을 하구 있다구 손님을…… 다 손님을 맞아서 응댈 하구 이야길 해디리구 하는 것두, 쯧! 사무요, 일은 일이니깐요!"

하는데, 김종호가 덜렁 내달아,

"아! 거 참, 옳은 말씀이여!"

하면서 왁자지껄,

"……그렇구말구……! 다가 참, 문화 동지를 맞아설랑 이야길 나누구 친절히 상황을 소개하구 하는 건 말하자면, 같은 우리 문화인의 생활 가운데 당연한 한 조목이요, 또 의무요, 허어허 허허…… 거 참, 지당한 말씀이여!"

하고 떠들어 대는 것이었었다.

설레에, 여자는 무어라고 대영더러 짤막하게 대꾸를 했으나, 그만 소리가 먹혀 없어지고 말았고.

그날은 좌우간 그쯤 하고서 갈렸고, 그리고는 하루를 지나 뜻밖에 속히 오늘, 조금 아까 퍼뜩 혼자서 이렇게 찾아왔었던 것이다.

오늘은 그리고 여전히 침울한 얼굴은 얼굴이었으나, 자청해 또 저 혼자서 오느라고 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입만은 앞서처럼 무겁지가 않아 대영이 마주 나서서 자리를 권하면서,

"……그런데, 사처는 어떻게……? 정하셨나요? 아파트를 구하신다더니……."

하고 인사 겸 묻는 말에,

"여관은 아무래두 번폐스럽구, 또오 출입하기두 편찮구 해서요…… 이왕이니 아파트를 하나……."

하면서 이내 종알종알 이야기 대꾸를 곧잘 하는 성했었다.

"임의러워서 좋긴 하지요…… 그렇지만 요새 아파트가 도무지, 머어 부흥채권 빠지기 같아서……."

"일류라구 하는 덴 그래서 땅뗌두 못 하겠어요……! 그리구서 겨우 ×××아파트라구, 부청 앞으루 아따 저 거시키, 커어단 빨강문이 있구 한, 아따 무슨 대궐?"

"덕수궁?"

"오오 참, 덕수궁…… 거기 그 옆댕이……."

"그거라두 용히 얻으셨지! 아파트래야 와락 출 수는 없어두…… 퍽 음침하잖아요?"

"네에, 좀…… 그렇지만 괜찮아요, 앞으루 어떻게 될는지두 모르구……."

대영은 그 말에 속으로,

'뭣이냐, 조선서 예술을 연구하네, 영화에 출연을 하네, 또 영주를 하네 한다던 건 어떡허구?'

이런 생각이 나던 것이다. 뒤미처, 역시 짐작한 대로 김종호의 조작이요 저 혼자 놀음이거니 싶어 짐짓 암말도 않고 말았다.

이야기는 그로써 무뚝 끊기고, 오래도록 서로 덤덤히 앉아 있었다.

대영은 대체 이 맹랑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을 해야 좋을지 통히 가늠을 할 수가 없어 작히 걱정스러 못했다.

설마 김종호 본으로 이리저리 끌고 돌아다니면서 문단 사람들한테 지면이나 시키자니 차마 쑥스러운 짓이고, 역시 김종호처럼 (영화론 대신) 문단 고현학이나 작가론의 일석을 들려 주고 앉았재도 마찬가지 싱거운 짓이고, 그렇대서 언제까지고 또는 만나는 족족 (자주 찾아올 눈친데, 하니) 아무렇지도 않은 잡담이나 지껄인다고야 더욱이 못 할 노릇이고.

그러나마 여자라도 제가 자진해, 무엇이 되었든 알고자 하는 것이라든지 혹은 듣고 싶은 이야기라든지를 가지고 줄곧 화제를 만들어 이것저것 묻곤 한다면 이편도 요령을 짐작하고서 두루 설명이라도 해주고 하겠는데, 보아야 이건 몇 마디 이야기를 하는 시늉 하다간 다시금 입 따악 봉하고서 가만히 앉았으려만 드는 것 같고 하여 일은 무던히 딱한 형편이었었다.

하되, 그런데 여자는 그와 같은 침묵과 무료함을 별반 부자연스러하지도 어색해하지도 않고 썩 아주 천연덕스럽게 하나도 불편한 기색 없이 의젓하니 앉아 있는 것이고, 앉았는 양이라니 어쩌면 시방 지독한 히스테리가 엉뚱한 얌전을 떠는 변덕이나 아닌가 싶어 속이 섬뜩하기도 했다.

대영은 그러자 문득 또 오스카 와일드의『비밀이 없는 스핑크스(The Sphinx without a secret)』가 생각이 나서, 미상불 임자한테도 이름만은 그렇게 제수를 함직하다고 혼자 빙긋이 웃는데, 그제야 스미코는 주의가 들었던지 천연히,

"참 저어, 절라컨 상관 마시구……."

하면서 권을 하는 것이었었다.

"……어서 일보세요……! 보시구서 파하시거들랑 혹시 거리라두 같이 데리구 나가 주시든지……."

"아! 거리요……? 쯧! 것두 좋겠죠……."

대영은 역시 그렇게나 하는 도리밖에는 없으련 싶어, 아무려나 자 그러면 미안한 대로 거기 앉아서 신문이든지 그 책이든지 좀 들춰 보면서 잠깐만 기다려 달란 말을 이른 뒤에, 일단 제 자리로 돌아와 얼마 동안 내처 하던 일을 하고 난 참이었었다.

그리고 종시 그때까지도 깜박 그는 여자에게 대하여 한 남자로서의 고유한 흥미가 끌린다거나 또는 얼굴이랄지 기타 가령 수족이며 몸맵시랄지의 어떤 부분에서 궐녀의 여성적인 독특한 매력이 눈에 띈다거나 하는 줄을 통히 몰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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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으로 모든 남자란 것은 언제든지 아무 여자한테고 반드시 그 은근한 흥미를 가지는 법이니라고 한다면, 그야 데마에 많이 가깝고 피상적인 공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저 유명하게 강심한 서화담으로도 단 한 꺼풀만 입은 엷은 여름 속옷이 물에 찰싹 젖은 몸뚱이를 해가지고 코앞에서 나풀나풀 춤을 추는 황진이만은 멀끔히 바라다보다 못해 필경 슬며시 돌아앉았다는 일사라든지, 또는 속계(俗界)엘 내려왔다가 마을 앞 개천에서 빨래를 빨고 있는 젊은 여인네의 부우연 너벅다리를 한번 보고는 그만 마음이 현혹하여 몇십 년 닦은 도가 하루 아침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는 옛 스님의 이야기라든지를 미루어 두루 생각을 할진대, 그 데마가 다분히 요망스럽기는 하다지만, 역시 한 귀퉁이 반쪽의 진실성이 머금겨 있음을 또한 승인치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물 묻은 준나체(準裸體)로 춤을 추는 황진이의 앞에서는 화담의 근엄도 별수가 없듯이, 몇십 년 쌓은 수도가 촌녀(村女)의 빨래 빠는 너벅다리로 하여 일시에 허사가 되는 수도 있듯이, 항차 범상한 시속 사람인데야, 모든 남자란 것은 그가 어떤 종류의 불구자라거나 늙어 꼬부라진 영감이 아닌 이상 언제든지 아무 여자한테고, 여자가 흉악한 추물이라거나 합죽합죽 노파가 아닌 이상 반드시, 그 소위 은근한 흥미토록은 몰라도, 단지 여자의 순전히 여성적인 매력에 대해서까지 나무토막처럼 무감각하진 못한 것이 거진 생물학적인 운명이어서 말이다.

대영은 나이 삼십을 약간 넘었을 뿐 아직 젊고, 가정은 가졌다지만 수염 없는 불구자도, 삼가로운 퓨리턴도 아니고 하여 그 '모든 남자'의 규범에서 조금인들 벗을 게 없는 사나이이었었다.

또 스미코는, 그런데 보기 싫은 추물도 오바상도 아니요, 알뜰한 묘령의 몸이면서 홋홋이 원방의 낯선 타지에 와 이편과 생활을 섞고자 한다는 활달스런 나그네요, 누구의 상사하는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버젓한 남의 아낙은 십상 아닐 것이고, 따라서 그 '모든 남자'네로 하여금 그의 여성적인 외양의 매력은커녕, 작히 예의 그 은근한 흥미라는 것을 가지게 하도록 컨디션에 미흡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과연 김종호 같은 사람은 그 첫소리를 치고 나선 인물이었을 것이고, 대영 또한 열에 열 깐의 프로버빌리티를 그만큼이나 갖춘 터이면서, 다만 시간적으로 얼마쯤 활동기(감염 후의 활동기)가 우연히 천추되었을 따름이었었다.

이를테면 소조한 정원이라든지 혹은 산야의 숲 사이를 호올로 가을을 낙막해하면서 초요하고 있는 옷깃에 가 공교로이 한 잎의 단풍 든 낙엽이 날아와 앉은 형용이라고 할는지, 스미코의 출현이 대영에게 대하연 정히 그와 방사한 바가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감회가 감회이던만큼 초요하던 객은 한 잎의 그 낙엽을 얻고서도 한시름 더 가을을 느끼는 정만 골똘하여 졸연히 그 단풍잎의 단풍으로서의 운치나 아름다움은 깨닫지를 못함과 일반으로, 그와 마찬가지로 대영도, 그는 여자의 안색이 그대도록 침울한 거기에만 온전히 정신이 쏠려 있느라고, 그래서 미처 여자에게서 한 '젊은 여자'를 발견하기까지는 채 이르지를 못했던 것이었었다.

하나 그것은 그러므로 언제까지고 그와 같은 무관심한 상태인 채 있을 수는 역시 없는 것이어서, 마침내는 그처럼 여자의 (우선 우연히) 고운 목덜미를 알아봄으로써, 궐녀의 또한 여자다운 매력에 필경 주의가 끌리고라야 만 것이었었다.

3[편집]

건성으로 궐련을 뽑아 올려 건성으로 입술에 물었을 뿐, 대영은 이내 박인 듯이 스미코를 바라다보고 앉아 여념이 없던 시선이 한참 만에야 차차로, 머리털과 모피의 깃 속에 하얗게 묻힌 그 목덜미로부터 이동을 하여, 소곳이 숙인 프로필을 어루만진다.

단명해 보이게 부리가 촉하고 작은 귀, 그 앞으로 하늘거리는 듯 연한 살쩍, 갸름하니 하관이 빨아 약간 나온 듯싶은 광대뼈, 그 위로 길게 팬 눈초리를 지나, 심은 듯이 가조롱하고 촉이 긴 속눈썹, 그리고 유난히 오똑 날이 선 콧대.

이렇듯 제각기 한부분 한부분은 말하자면 조각적으로 인상이 또렷또렷했고, 물론 의식하고서의 음미인만큼 처음 비로소 머릿속에 들어와 박이는 결정적인 인식이었었다.

한데, 그러나 이미 한 꺼풀 망막(網膜) 위에 드리운 관념의 베일이란 매우 기묘한 것이어서, 한부분 한부분을 차례로 그렇게 한번 씻어 보고 난 다음 일순간 후에는 그와 같이 인상적이던 부분부분의 특징이 삽시간에 죄다 해소가 되면서 따로이 전체의 모습만 오래오래 사귀던 친구랄지 혹은 집안 권솔 아무고 누구처럼, 조금도 낯이 설거나 어색한 구석이 없는 얼굴로 어느덧 통일 전화가 되어 가지고는 담쑥 와서 마음에 안기는 것이었었다.

그러하되 실상인즉 일찍이 친한 적도 없고, 따라서 기대도 상상도 하지를 못한 모습인 것이 사실인데, 그런데 그것이 전혀 의외로운 느낌이 없이, 응당 다 그러한 것인 줄로 여기고 기다리던 기정사실인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수감이 되던 것이었었다.

술잔이나 얼큰히 먹고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백년 묵은 여우가 둔갑을 하여 이쁜 각시로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만일 허랑한 미신에만 그치지 않고, 한편으로 우화(寓話)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대영을 거기에다가 한번 견주어 보는 것도 노상 실없은 편은 아닐 것이다. 일방의 인물 스미코한테는 물론 애먼 악담이기야 하겠지만…….

그리하여 아무튼 다년간 상종하던 친구라거나 오랫동안 동거를 해온 아내라거나 할 것 같으면, 그들의 모습이 웬만큼 잘생겼다든지 반대로 웬만큼 못생겼다든지 하더라도 항용 거기에 관해서는 좀처럼 주의가 가질 않고 대개 심상하듯이, 시방 대영의 스미코에게 대한 것도 바야흐로 그와 근리함이 있어, 가령 어디가 이쁘게를 생겼다거나 또는 어디가 밉게를 생겼다거나 하는 시각적인 미·추의 분별과 거기 따르는 감각은 (어느 겨를에 벌써 후방으로 물러가 침착이 되었는지) 통히 일지를 않고, 그리고는 한갓 마음이 가서 차악 안주(安住)를 할 수가 있도록 훨씬 임의롭고 반가움이 곰곰 솟는 모습일 따름이었었다.

너무도 급작스럽고 또한 부전스러움이 없지 않았으나, 이른바 동류감으로부터 오는 보통 이상의 강한 친화력이라고 할는지, 진작 요전날 만났을 때 벌써 여자에게서 저 자신을 느낀 것이, 수월히 오늘 지금의 이것이 있도록 씨앗을 뿌렸음일 것이다.

여태껏 앉은 자세도 그대로, 스미코한테 가 자지러졌던 상념이 이윽고 한단 더 주관적인 가치의 판단을 얻어 대영은 아까처럼 속으로 혼자, 그러나 더 적절하게,

'역시 그랬던가!'

하면서 연해 수없이 고개를 끄덱끄덱, 딴사람인 양 얼굴은 흔연히 화기가 좋아진다.

굴져서, 그를 갖다가 한 여자임을, 여자다운 매력으로서가 아니라 이번에는 눈에 함빡 고이는 그 여자로서의 여자임을 짐짓 저 자신에게 새 채비로 관념시키는 것도 또한 흥그러웠을 터이고…….

그러느라고, 그 끝에 연달아 (아무리 골똘해 있었던 끝이기로서니) 별안간 걷잡을 사이도 없이 소리를 내어 불쑥 한단 소리가,

"스미코상이 여자드랬지이?"

해놓았으니, 가뜩이나 짝소리 없이 조용하던 방 안이겠다, 모두들 퍼뜩퍼뜩 놀라서는 제가끔 고개를 쳐들고 대영에게로 눈이 모인다.

주로 영업사무를 맡아 보는 왼편의 박(朴), 편집을 맡아 보는 바른편의 김(金), 둘이는 다 그러면서야 대영이 하던 말을 되생각하고서, 혹시 졸다가 잠꼬대를 했나 하여 빙긋빙긋 한번씩들 웃는다.

스미코는 무심결에,

"마아(어머)……."

하면서 하도 어이가 없는 듯 대영을, 말을 해놓고는 그만 겸연쩍어 싱그레니 웃고 앉았는 그의 얼굴을 빠안히 바라다본다.

대영으로 하면, 당장 일 망신스런 품이 허허 한바탕 웃어 젖히기라도 할 것 같았다.

스미코는 한참을 그렇게 꼼짝도 않고 말끗이 바라다만 보고 있다가, 이윽고 남자의 그 미묘한 비밀을 어쩌면 알아채기나 한 듯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가 드러나는 입을 오믈트리면서, 조용히 다시 책 위로 머리를 숙인다.

마침내 그제서야, 다. 점직했던 건새레, 비로소 저 자신을 완전히 객관하는 순간 대영은 얼굴은 더럭 비양스럽게, 코웃음을 흥 한번, 그리고는 자포적으로 드윽 성냥을 그어 당겨 여지껏 입술에 물고만 있던 담배에다가 커다랗게 불을 붙이면서, 걸상째 허리를 뒤로 버얼떡 풀씬풀씬 천장으로 대고 연기를 뿜어 올린다.

여자에게 대하여 그와 같이, 더구나 어느새 색다른 흥미가 기울고 있는 저 자신을 막상 발견을 하자니 우선 자조가 앞을 서는 것도 그로서는 일변 그럼직하다 할 것이었었다.

이윽고 그는 혼자서 속으로 뇐다.

'……묵은 책력이……! 흥!'

묵은 책력이란 건 대영이 저를 두고서 스스로 비웃어 이르는 그의 새로운 어휘이었었다.

진실로 대영 저 자신이 묵은 책력일진댄, 그 묵은 책력이 뻐젓이 기상(氣象)을 말하고 계절을 가리키고, 즉 연애를 하고 하는 등 적극적인 '생활'을 갖는다는 것은 가히 냉소와 민소 거리이기에 족한 것이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그는 아무려나 일단 생겨진 사실을 갖다가 구태여 들어서 애를 써 배척을 하네, 아등바등 거비를 하네 하며 청렴을 부리잘, 역시 적극적인 의사는 또한 없었다.

그것이 이를테면, 묵은 책력의 결국 묵은 책력다운 면목이겠고,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

'쯧! 어떨라구!'

'아무려나 묵은 책력인걸!'

하는 것으로 손쉽게 처단을 할 수가 있었다.

대영은 몸을 다시 바로잡고 앉아 교정 아카지를 들여다보았으나, 연해 주의가 여자에게로 헛갈리고 일에 정신이 잘 쓰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바른편의 김이 별안간 커다란 소리로,

"뚫, 뚫…… 에잇 그놈의……!"

하면서 짜증스럽게 두런두런,

"……온, 이게 글자람……! 쌍디귿에 리을을 하구, 또 그 옆댕이다가 ㅎ을 붙이구, 이게 무슨 놈의 천하 괴벽들이람!"

하다가,

"……네? 문선생……."

하고 부른다.

"응?"

"우리두, 요? 우리두 우리 춘추사식 한글을 좀 만들어 가지구 이 흉악한 뚫자 따위, 끊자 따위 이런 괴물일라컨 보이코틀 합시다?"

"글쎄……."

대영은 덤덤한 대답을 하고 마는데, 마침 김과 마주 앉은 박이 내달아,

"하아! 그기야 어데 델 말잉가!"

하고 박의 의견에 반대를 한다.

김은 농삼아 히죽히죽,

"왜 안 될 말잉가아?"

하고 박의 영남 사투리를 전라도 악센트로 흉내를 낸다.

박은 그러나 상관 않고 벌써 결이 나,

"안 데지 않고……? 그랄세라 여보……."

하면서 대들고, 김도 그제는,

"안 될 건 어딨어? 제기……."

하고 같이서 성군다.

이 둘은 다 같이 열심한 문학청년이었고, 그러나 박은 체집도 깔끔하니 조그맣고 선비처럼 미목이 곱살한데, 한편 김은 덜퍽 큰 덕대에 얼굴도 우툴두툴 아무렇게나 생기고, 외양이 이렇듯 제각기 다르듯이 하나는 얌전스럽디얌전스런 그래서 소극적이로되 정확하고 현실적이요, 또 하나는 덜렁덜렁 선머슴처럼 거칠고 그래서 일변 적극적인 기상이 있되 독단적이요 하여, 정반대의 성격이었었다.

그러한만큼 둘이는 사사이 의견이 서로 달라, 앉아서는 곧잘 싸우곤 했었다.

"아 여보, 그르세……."

박은 일손을 멈추고 테이블 너머로 몸을 내실면서 대들던 것이다.

"……항글통일안만 하더래도 우리 선배네들이 오래오래 두고 애로 써가문서 정성으로 디리서 다아 그만침이나 통일 정리항 기 아니오?"

"그래서?"

김도 고개를 쳐들고 마주 응한다.

"……누가 아니래……? 나두 그분들의 성의만은 높이 사구, 또 경의두 표해요. 그리구 통일안을 대부분은 지지를 하구…… 그렇지만 불편한 것두?"

"참아야 하제!"

"억지루?"

"질서로 위해서 참아야 하제!"

"질서까진 너무 엄살스런데!"

"와아 엄살고?"

"무어가 질서야?"

"질서 아니고……? 항글통일안이……."

"항글이 뭐야? 항글이…… 한글광두 그 따위루 발음을 하나?"

"하아! 가마안있자…… 그런데 보소, 항글통일안이 그르키 제정이 데에 각고, 시방 우리가 다아 그대로 쓰지 않소? 그라니……."

"어디가 다아 써? 첫째 왈 신문산데 세 신문 중에 하나나 제대루 써?"

"그기사 또 다르제……! 신문들도 항글통일안으로 지지는 하문서도 미처 활자로 갖추지 몬해서 그룽 기 아니오? 그라니 종차 신문도 다 통일안으로 통일이 델 기 아니오?"

"소용 없는 소리야……! 통일안은 말구서, 제엔장 천하 없는 거래두 불합리한 걸 어쨌다구 그대루 쫓나……? 그러나마 불합린 해두 편리하기나 하다면 또 몰라! 그렇지만 불합리해서 불편한 데야 안 고칠 택이 뭐람!"

"가사 불합리하다고 하고…… 실상 불합리하지도 않지만 말이제, 가사 불합리하다고 하고…… 그기 질서 아니오? 잉……? 약간 불편 불합리해도, 벌써 일반이 다아 그대로 쓰고 있능 기니 당분간 참고 쫓다가, 차차로 정세로 따라서 개량도 하고 하야제, 아 고만에 쪼고매 불편하다고 아침에 뜯어고치고, 또 쪼꼬매 불합리하다고 지냑에 뜯어고치고, 어느 천년에 완성으로 하노? 또오, 쓰는 백성들은 정신이 사나 워여 하노?"

"미완성에 만족하는 건 천민근성이야!"

"이 세상에 완성은 어데 있노? 역사는 앞으로 나가고 제도는 임시임시 만등 긴데……."

"데데한 현상유지파……! 고만 해두구서, 일이나 해! 인전."

"하하하……! 히틀러의 어데서 나쁜 본만 뜨고…… 흉악한 파괴주의자!"

"허허 허허!"

"하하 하하!"

둘이는 일껏 싸우고 나서는, 보는 사람도 미소롭게 같이 어우러져 유쾌한 웃음으로 끝을 둥글리고, 벙글벙글 이내 다시 일에 잠심을 한다.

성질이나 주장이랄 것은 달라도 공리적인 충돌이 생길 세계가 아닌 이상, 또 둘이 다 학자 타입으로 착하고 하여 감정의 갈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은 언제든지 한갓 머리의 스포츠에 그칠 뿐 뒤가 없고 끝이 명랑했다.

스미코는 둘이서 주거니받거니 떠드는 것을 눈에 호기심이 가득하여, 말은 전연 못 알아듣는다지만 눈치로나마 기분이라도 좀 이해를 하고 싶어하는, 맛보아 보고 싶어하는 그런 열심한 얼굴로 연해 바라다보고 있었고, 그러다가 마지막 그들의 쾌활한 웃음에 섭쓸려 빙긋이 저도 웃는다.

대영은 또 대영대로 처음부터 그들의 하는 양을 곰곰이 미소를 드리우고 앉아 재미스럽게 구경을 하고 있었고, 그러나 맨 나중에 가서는 그는 남과 더불어 명랑하지가 못하고서 얼굴이 흐려들었다.

젊은 그들의 발랄한 기운에 대한 감심이라고 할까, 흠망이라고 할까, 그리고 저 자신과의 대조되는 괴치(乖馳)라고 할까…….

물론, 그들이 서로 우기며 고집을 하는 바, 즉 박의 소위 질서를 위한 기성의 긍정이니, 또는 김의 소위 완성을 전제로 한 불합리의 비정이니 하는 주장이, 그야 결국은 다 같이 어떤 한 개의 상식적인 세계와의 타협이라는 점에서 일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결코 그대도록 상극이게 피차간 거리가 멀 것은 없는 것이고 해서, 그 내용이랄지 이론이 별반 그리 새삼스럽거나 추앙할 만한 것은 아니었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박이며 김과는 진작부터 친험이 없는, 그래서 그들에게 대하여 우선 인간적인 우정을 가진 그들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어디 다른 좌석에서 낯모를 혹은 평소에 경멸을 하던 (가령 김종호처럼) 그런 어떤 젊은이들이 앉아서 그와 같이 하찮은 주장을 가지고 천하에 없는 노릇인 듯 우김질을 하는 양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는 영락없이,

'흥! 천민들이……! 저게 요샛날 고작 젊은것들이 안고 늘어지는 세계람?'

하고 입이나 삐쭉했을 따름일 것이었었다.

따라서 그는 곧 죽어도 그렇듯 속스런 내용이며 이삼은 육(2×3=6)쯤의 범상한 이론이 구차히 부러운 것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들 박이나 김은 제각기 그런데, 좋건 궂건 또 남이야 무어라고 하건 말건 버젓이 저네들 스스로의 현실을 (크게는 세계를) 파악하고 있고, 파악한 바 그 현실 그 세계의 유지를 위하여 혹은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하여 끊임없이 안으로는 탐색을 하고 밖으로는 대고 주장을 하고 해서 마지않는 기개가, 싱싱한 기개가 그들에게는 지녀져 있는 것이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실과 일치되는, 신념과 생활의 병행…… 이것이야말로 가난하나마 젊음의 패기요, 산 정열인 것이었었다.

거기에 비하여 대영은 저 스스로를 돌아볼진대, 만약 그들이 근검하고 착실한 소상인이라고 치더라도 대영 저 자신은 '삐뚤어진 빈집에서 홀로 거주하는' 몰락된 귀족의 신세에 지나지 못했었다. 세대의 룸펜, 즉 거지…….

박처럼 긍정하는 현실과 세계를 가지지 못한 것은 물론, 모조리 죄다 비정은 하는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김처럼 현실적인 이 지구를 위한 비정인 것이 아니라 화성을 욕망하는 비정이니, 인간 세상에선 용납지 못할 유령〔否定〕인 것이다.

신념이야 오죽 오만하며 찬란한고!

그러나 아무리 산을 뽑잘 신념인들 대지의 현실을 딛고 서지 못한 이상, 즉 생활이 따르지 못한 이상 그는 결국 남의 집 식객이요 걸인에 지나지 못하는 것…….

그리하여 좌우에서는 바람 소리가 휙휙 날 만큼 사실이 세찬데, 제 앞은 보면 회색의 안개가 자욱하고 등뒤에만 옛 양식의 고성이 구중중 섰을 따름…….

대영은 마음이 부지할 수 없이 울적하면서, 남 또들 놀라라고, 손에 쥐었던 펜을 교정 아카지 위에다 타앙 놓고는 벌떡 일어나 스미코의 앞으로 쿵쿵 걸어간다.

"나가시까? 거리루나……."

스미코는 책에서 고개를 쳐들고 바투 앞에 와 막아 섰는 대영을 빠꼼 올려다보다가,

"벌써……? 괜찮으세요?"

하면서 소매를 헤쳐 팔목시계로 눈을 잠깐 떨어뜨린다.

"머어, 쯧!"

대영은 여자와 나란히 앉으면서, 저도 건너편 벽의 전기시계를 올려다본다.

네시 하고 마침 반.

스미코는 보던 장을 접어 책을 덮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지분 냄새가 고요히 스며 싫지 않았고, 대영은 아까 그 마음 울적한 대로 애먼 데다가,

'빌어먹을, 모르겠다!'

면서 그래 위정 그렇게 여자의 앞으로 바싹 다가섰던 것이며, 또 건너편 자리를 두어 두고도 이렇게 옆에 가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붙어 앉았는 것이며를, 스스로 피쓱 웃어야 할 것인지,

'흥!'

하고 코웃음을 해야 할 것인지, 저로서도 섬뻑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대영은 이윽고 혼자말하듯 여자의 의향을 묻는다.

"……어디루 안낼 해디린다?"

여자는 그러나 잠깐 그대로 앞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런데 말씀예요……! 저어 전요오……."

하면서 약간 구체적이게 이야기를 낸다.

"……절, 무어 그렇게 손님으로 취급을 해주실라 마시구서 말씀예요. 저어 그냥 거저…… 아따 걸 무어랬으믄 졸지."

"동무? 친구?"

"물론 동무나 친구루 여겨 주시는데, 그렇지만 동무나 친구두 손님으루 취급할 수두 있구, 또오 손님 아니루 취급할 수두 있구, 그렇잖아요?"

"그러니깐 한집안 식구처럼 말이죠?"

"거예요, 참!"

여자는 속이 시원해서 마주 바라다보고 좋아 웃는다.

"한집안 식구처럼…… 손님이란 생각은 두지 마시구……."

"한집안 식구처럼……! 손님이란 생각은 두지 말구!"

"무릴까요?"

"찬성입니다!"

대영은 단지 저 한 사람을 두고서 하는 소린 줄 알고 대답이었었다. 그러나……

여자는 반가워라고 고개를 까땍,

"고맙습니다!"

하면서 다음을 다시,

"……그리구, 그래 주서예지…… 일테믄 여기 이 춘추사만 하더래두, 지가 찾아왔다구 위정 따루 시간을 내서 또박또박 응접을 해주시구, 어딜 안내해 줘야 할 텐데…… 걱정을 하시구, 그게 벌써 손님이거니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은 거 아녜요……? 더구나 여자요, 에트랑제라구 어려워하시구, 그러시믄 전 백날 가야 거저 그대루 손님이구, 정말 참 에트랑제인 채 비잉빙 따루 나가 돌 게 아니겠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러니깐 마치 이 경성 안에 기신, 늘 상종하시는 동무 어떤 분이 이 앞으루 지나다가 거저 잠깐 들른 것처럼, 아주 소탈하구 그리구 심상하게, 네?"

"그리구?"

"그래 주셔야 첫째 지가 어려운 생각이 없구…… 그렇게 여러분이 여러분의 일상적인 생활에다가 절 임의럽게 참옐 시켜 주신다 치믄, 그러는 동안에 전 제 육체루다가 여기 이 조선이란 걸 배우구……."

"조선이란 걸 배우구……! 그리구 배워선?"

대영은 말결에 물어 놓고 보니 부전스럽기도 하고 박절한 것도 같아 속으로 민망했다.

"다른 건 없어요! 거저 그렇게 해서 맘을 붙이구 생활이랄 것을 가질 수가 있을까 하는 것뿐이지……."

"자알 알았습니다! 힘껏 노력을 해디리죠…… 그렇지만……."

"그런데 저두……."

"그렇지만 과연 몇 사람이나 그 기모치를 올바루 이해해서, 뜻에 맞두룩 해디릴 사람이 있을는지, 건 좀 의문일 것 같군요!"

"그야 단 한 분이나 두 분두 상관없구, 또오 문학이랄지 예술 방면에 간여하시는 분들이믄야 비교적……."

"김종호 군을 통해서 여러 사람 소갠 받으셨지?"

"다아 잊어버렸어요!"

여자는 배시기 (딴속 있이) 웃고 나서 다시,

"……영화에 관계하시는 분은 죄다 소갤 받은 것 같아요. 그리구 극단에 기신 분두 여러 분…… 참, 문예봉! 영화에서 보더니보다두 더 얌전하구 좋던데요?"

"그 밖엔? 영화 관계자나 극단 사람말구?"

"신문기자 두 분…… 그리구 미술하신다는 저어, 남씨라구……."

"좋은 친구지……! 그런데 참, 김종호 군은 전부터 아셨던가요?"

"송죽에 아는 이가 있어서, 발이 설다구 걱정을 했더니…… 허긴 다른 이두 동경 기신 조선 양반을 아는 이가 있었지만……."

대영은, 김종호와의 반연이란 역시 짐작했던 대로 그런 무엇이겠지 하고 고개를 끄덱거리는데, 여자는 조금 만에,

"그런데 참, 아까 말씀예요……."

하면서 음성을 낮춘다.

"……저기 마주 앉은 두 분이 무얼 가지구 아마 논전을 하셨죠?"

"응…… 그런데?"

"분명 그런 것 같은데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예죠……! 그래두 눈치루나마 기모치만은 짐작할 수가 있어서 기뻤어요!"

마침 사동이 전화를 받아 가지고 대영을 청한다.

대영은 무심히,

"네에."

하는데, 저편에서는 장모가 전화통이 떠나가게,

"거, 대영이가아?"

하면서 그야말로 와아짝 고온다.

대영은, 집에서 해복을 했나 혹은 달리 사고라도 생겼나 하면서 또 한번,

"네에!"

하는데, 저편에서도 또다시,

"거, 대영이가아?"

하고 재차 소리를 지른다.

"글쎄 대영이여요!"

"오오……! 데 거사니 데, 날래 돔 오라마, 얘!"

"왜요?"

"와안 머어가! 날래 와야디!"

"글쎄, 가더래두 내력이나 알구 가야죠!"

"오오, 참! 내 정신 돔 보라! 흐흐흐흐……! 아일 났이요! 아일……."

"네에!"

대영은 낳았다는 그 어린것과 더불어 산요에 누워 있을 아내의 모양이 상상될 뿐, 덤덤하지 이렇다거나 저렇다거나 특별한 감상은 일지를 않았다. 비로소 남의 아비가 되었느니라 하는 생각조차도…….

"날래 시방, 오라 잉?"

장모는 전화통 속에서 연해 재촉이다.

"가죠…… 산파 왔어요?"

"으응, 와기는 왔는데 머어 일없이요! 에미네 혼자서 쑤웅 낳아 놓았시요! 흐흐흐흐! 아, 그런데 에미나일 났이요, 에미나일. 흐흐흐흐……! 그르티만 에미나이문 메래나! 머. 이전 던화 고만하구, 니어 오라 잉? 던차 타구 뽀쓰 타구 올래문 한 시간이나 오야 하니, 자동차 타구 오라 잉?"

대영은, 외딸에 또 첫 외손이니 그야 기쁘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저렇게 덤비고 덜렁대는 마나님 속에서 어떻게 하다가 딸은 세상 의젓하고 차분한 걸 낳았으며, 겸하여 제대로 길렀는지 모를 노릇이라고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박과 김이 벙글벙글 기다리다가,

"해복하셨소?"

"해산하셨어요?"

하고 한꺼번에 묻는다.

"쯧! 낳았다는군요!"

"그름, 어서 가보시지?"

"어디루 갈라구……? 천천히 가지……."

"하아! 그래두!"

"그런데 참……."

김이 깜박 급해하면서,

"……무어? 아들? 딸?"

"여자라껀 본디 심술이 많아서, 이왕이면 저처럼 생긴 걸 만들어 놓으러 드는 법이니깐!"

"딸이구나! 에잉, 쯧!"

박은 안됐어하고, 김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면서,

"저어런……! 아, 문선생이 득남을 하시믄 한탁 단단히 쓰시게 할려던 참인데……."

"그래도 일없소! 기르기는 딸이 더 귀엽다 않능기요? 또 인제……."

"귀엽다?"

대영은 혼자말로 되뇌면서, 생각삼아 비로소 남의 어버이라는 것의 마음이 되어 보느라고 우두커니 유리창 밖으로 한눈을 판다.

박은 하던 말끝을 다시 이어,

"……그라고 인제, 퀴리 부인맹이로 위대한 따님이 될지, 뉘 아오?"

하고는 하하하 웃는다.

"퀴리 부인? 그렇지!"

김이 박의 말을 받아 일단 동의를 하다가 그러나 고개를 깨웃,

"……그렇지만 퀴리 부인은 영광은 영광이래두 행복이랄 순 없지!"

"하아! 영광이니 그기 행복 아니오?"

"죽두룩 고생만 한 게 행복할 건 어딨어?"

"고생한 대상이 그렇게 영광이고, 영광이니 행복 아니오?"

"영광이라지만, 영광의 배후에서 알짜 이익을 보는 건 실상 세상이지 그 당잔 아냐……! 시방 라듐의 혜택을 누가 받길래?"

"그르세……! 그 혜택 대신으로 세상은 퀴리 부인한테 존경과 감사로 영구히 바치지 않소? 그러니 그 영광이 행복일 기 아니오?"

"저―런 벽창호가! 대체 행복이란 걸 행복하는 주체가 누군데 그래? 당자가 몰라두 행복야……? 생리가 파괴되두룩 고생을 했는데, 무덤 앞의 차디찬 기념비가 어쩌니 행복야?"

"그름, 아무것도 하능 기 없고 안일한 기가 천하 행복가?"

"행복과 영광은 달라요! 이 서방님아……."

"그거는 흉악한 물질주의자의 궤변이라꼬나 헤에!"

"남 지지리 고생한 덕을 보믄서, 영광이겠대서 행복꺼정두 했거니 하는 건 무모한 찬사야! 잔인한 맘씨야!"

대영이 마침 그제야 이편으로 돌아서면서 혼자말같이,

"흐음! 행복이라……? 영광이라? 그리구 자식이라? 애정이라?"

하다가 제풀에 고개를 끄덱끄덱,

"아무튼지 남의 어버이 된 사람이, 제각기 제 자식의 행복이라껏을 바라는 게 상정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난 차라리 딸자식이 안심이겠어! 아직은 실감이 없으니깐 모르겠구면서두……."

"와 그르쏘?"

"여자란 건 남자와 달라서, 일반으로……."

대영은 대답을 하다가, 그러자 스미코와 눈이 마주쳤다.

스미코는 여태 셋이서 담론이 요란한 것을, 무언가 싶어 혼자 궁금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대영은 방금 여자라는 것은 남자보다도 더얼 불행할 수가 있다는,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러하다는 설명을 하자던 말의 그 산 반증(反證)이 바로 궐녀인 것 같아 문득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리고는 커다랗게,

"스미코상?"

하고 부르면서 그의 앞으로 걸어간다.

여자는 얼굴을 바로 들고 눈으로 대답을 하고,

"……대체루, 세상에서 남자허구 여자허구 비굘 한다면 어느 편이 더 불행한가요?"

"불행, 요? 어느 편, 요?"

여자는 한참이나 그대로 깜작깜작 생각을 하다가,

"……글쎄…… 그런데, 양으루요? 질루요?"

하고 되묻는다.

"양이냐? 질이냐……? 그렇지만 질루야 여자가 어디 남자의 고통이나 불행만침 크구 심각한 걸 겪나!"

"어쩌나!"

"허허……! 여자가 걸핏하면 울긴 잘들 하니깐, 양으룬 더할는지 몰라?"

"행복이나 불행이라껀 결국 주관 나름 아닐까요?"

"그렇다구두 하겠지만……."

"그런데 여자들은 많이 주관적이니깐……."

"그 대신 남자보다는 바람은 더얼 타지 않나!"

"또 그 대신 약하구 만만하니깐 구박이 심하잖아요?"

"굳세지? 당당히……."

"굳세믄 시방 말씀 짝으루 남자네처럼 바람을 타죠!"

"허! 그런 불편이 또 있나!"

대영은 휙 돌아서면서,

"……좌우간 오늘은 거리나 나갑시다!"

하고 옷걸개에서 모자와 외투를 떼어 걸친다.

스미코를 뒤에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내리다가 마침 뛰어드는 병수를 쭈적 만났다.

"아, 형님!"

지체로는 사의 주인이지만 그런 것은 상관이 없고, 같은 한고향이요 나이 네댓 살 떠어질 뿐더러, 겸해서 존경을 하는 터라, 그는 대영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번민 같은 것은 없고, 임의로운 가정에 생활 또한 유족하겠다, 늘 명랑하지만 오늘따나 어디서 무슨 재미있는 일을 본 모양, 연해 싱글벙글,

"……지금 나가시우?"

하고는 이편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아니나다를까),

"……내 오늘, 쫓아다니면 광골, 전페이지짜리루다가, 이놈들 다섯 장이나 뺏었지!"

하면서 눈을 찌긋째긋 좋아해 쌓는다.

"흐응! 거, 주우정한데! 새서방님 광고 외교원이……."

"하하 하하……! 치들이 내가 마구 조르는데야 안 듣구 배기나? 두루 후길 바야겠으니……."

"이 사람, 그렇지만 춘추사는 사장이 광고 모집 다니더라구 창피한 호 나리!"

"하하 하하! 뭣이냐 사장 겸 광고 외교원 겸, 또 고쓰카이 겸? 하하 하하! 괜찮아, 일없어……! 그런데 참, 아직 머어 늦잖겠다요?"

"넉넉해……! 올라가서 박군한테 넹겨 주게 그려나!"

"자아, 그럼……."

"자아……."

한마디씩 하면서 돌아서다가,

"아, 형님!"

하고 또 불러 댄다.

대영은 마주 되돌아서고, 병수는 다른 속이 있이 대영의 얼굴을 빠안히 바라다보면서,

"오늘 저녁에 술 좀 먹을까?"

"술?"

"망년회합시다?"

"망년횐 인제 신년호 내놓구서, 사에서 주최하지."

"그럼, 우리 둘이만 단출하게, 이따가……."

"고만 둬!"

"왜……? 추태가 또 나올까 바서? 통곡 좋잖우?"

"사―람두!"

"여보, 형님!"

"일없어!"

"형님은 술 한잔 자시구, 통곡이라두 하는 게 차라리 나아 봬요! 저렇게 잔뜩 찡기리구 있느니보담은……."

"……"

"그러지 말구, 기운을 좀 내요!"

"……"

"왜, 바싹 요새루 더, 저렇게 으설푼 표정을 하구 다니시우? 저녁은 자셨을 테구, 신어머니두 아닌데……."

"어서 올라나 가게!"

대영은 돌아서서 층계를 내려가고, 병수는 끄은히,

"이따가 어디 기시우?"

"몰라!"

"댁으루 나가겠지, 머어…… 차 보내께 꼭 오시우?"

"나 집엔 늦어야 가……."

스미코는 길로 나가 한편으로 비껴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마 다섯시, 가뜩이나 저물기 쉬운 겨울날의 오후가 금세 눈송이라도 희끗희끗 날릴 듯 납빛으로 자욱이 흐려, 한결 더 음산했다. 석양인 데 겸하여 대목이거니 하고 보아 그런지, 거리는 유난히 바빠들 하면서 정신 아득하게 복닥거린다.

"미안합니다!"

대영은 스미코와 나란히 네거리 쪽으로 걸어가면서,

"……지금 그가 우리 사 주인입니다."

"사 주인?"

"사 주인이라면 처음 듣기엔 생소하겠지만, 사장과는 좀 다르니깐……."

"배애젊으시던데……? 그이두 문학……?"

"아―뇨."

"그러믄서……! 들으니깐 늘 결손만 본다구 그러든데요?"

"그러니깐 고마운 노릇이죠……! 조선서야 그렇게 이해 다아 몰시하는 파트롱이래두 없이는 반반한 잡지 하나 제대루 해가들 못 하니깐요……! 흥! 한심하죠!"

"이왕이니, 장사를 한다기보담 차라리 그게 질겁지 않아요? 파는 게 아니구 주는 거…… 준단 말이 목사님 말씀 같아서 불쾌한 거라믄, 더불어 같이 질기는 거……."

"그야 그렇기두 하겠죠! 나두 그리구 한때는 그걸 질겁게 여기기두 했더랍니다마는……."

대영은 문득 그 동안이야 한 번도 마음이 내켜 가까운 친구랄지 아무한테고 일찍이 술회를 한 적이라고는 없는, 문제의 심경을 시방 무슨 내력으로 이렇게 섬뻑 만나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리고 어쩌면 노방의 사람에 지나지 못할 이 여자더러 두루 그것을 설파하는 것인지 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마음성이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는 하면서도 웬일인지 별반 그것이 어색하거나 또 부질없은 짓이거니 싶지를 않고, 차차로 이야기는 곰곰 풀리어지는 것이었었다.

"문학이구 잡지구, 문학을 한다는 것이 지금은 하나두 흥이 없구, 그러느라니 통히 신명이라는 게 나질 않구, 쯧."

여자는 고개를 돌이켜, 길 위로 숙인 대영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또 보고 하면서 따라 걷는다.

"……문학이 질겁기두 했구, 내 문학을 알아주는 남과 더불어 질긴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두 했구, 물론 보람두 있는 성싶었구…… 그러는 동안엔 문학이 다아 엄숙하기두 하구, 내라는 인생 이상으루 중난스럽기두 하구…… 하던 것이 인제 와서는!"

대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뚜벅뚜벅 잠깐 말이 없다가 조금 만에 다시 그 뒤를 잇는다.

"……일언이폐지하면 생활을 잃어바렸다구 하겠지……! 하루 아침 그렇게 생활을 잃어버린 다음부터는, 문학이란 것이 꼭 유령 같아요! 현실성이 없구, 도무지 무의미하기라니…… 그렇게 무의미하구 쓰잘디없는 노릇이, 문학이 말씀이죠, 가뜩이나 그게 짐스럽기까지 하군요……! 그런 걸 보면 인간의 습관처럼 어리석구 밑질긴 건 없나 바요……! 깨끗이 내다가 버렸어야 할 테니만서두, 그것이 문학에의 미련이 아니라, 아직두 한 조각 인생에의 미련이 남은 탓인지……! 그러구저러구 간에……."

대영은 자포적으로 음성을 높이면서 씹어뱉듯,

"……당금 이, 지굿뎅이가 사뭇 터지기라두 할 만침, 사실이 핍절하게 긴장이 돼가지구, 융케르 시속 육백 킬로짜리 전투기같이 웅웅 디리 전진을 하구 있는 이 판국에, 뭣이냐 쇠달구지만도 못한 문학 쳇것이, 어딜 괜히……! 어마어마한 그 현실을 제법 갖다가 한 귀탱이나마 감각을 하며, 정통을 캐치할 근력이 있어야 말이지!"

네거리를 남쪽으로 꺾여 마침 종각 앞을 지나고 있었다.

먼지조차 수부욱 저어 멀리 사멸된 시대를, 만국박람회의 아프리카 토인관(土人館)처럼, 썩 요령 있이 클로즈 업해 가지고 근처 일대로 가장 첨예하게 반영·생동하는 당세기와 더불어 어엿이 동거를 하는 게 이 종각 보신각(普信閣)이었었다.

그 대조의 야숙하게 절창인 품이, 그리하여 가령 유심한 타방 사람은 말고서, 응당 여기에 그것이 저 모양을 하고 있는 줄은 번연히 알면서도, 그리고 하루 한두 번씩은 이 앞을 오고 가고 하는 터이면서도, 그러면서도 깜박 속아서는 (진실로 속아서는) 부지중 그리로 눈이 가지곤 하는 게 이 알량한 물건짝이었었다.

"자아, 저건 어떻죠?"

대영은 고개를 돌려 짯짯이 종각을 가리킨다. 여자는 그러나 땅만 그대로 내려다보면서 걸을 뿐, 거기엔 주의를 하려고 않는다. 안 보아도 벌써 다 안다는, 그런 낯꽃이었고.

대영은 그 다음을, 혼자말로 두런거리듯,

"……낡은 시대가 새로운 현대와 동거를 하는, 저 궁상스럽구 초라한 꼬락서니……! 흥! 나두 진작엔 지금과는 다른 감정으루다가 저걸 지지리두 비웃었더라니!"

그러자 여자는 (종각 앞을 거진 다 지나쳐서야) 갑작스레 얼굴을 쳐들고는, 거듭 뒤를 돌려다보아 쌓더니 필경 발길을 주춤 멈추고 서면서 고갯짓으로 대영을 청한다.

대영은 두어 걸음 건성으로 되돌아오면서, 여전히 방금 방백(傍白)을 하던 무연한 그 기분인 채,

"……오직, 오직 그저, 신념만은 버리질 않구서 있으니 유일한 위안이랄는지……! 공기만 먹구 생명을 지탱하면서 봄을 기대리는 양서류의 동면처럼……."

하는 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여자는 대영이 옆으로 와서 나란히 서기를 기다려,

"저어, 제가 말씀예요?"

하고 저는 저대로 딴청을 한다.

"……제가 만일 경성시장이란다믄 말씀이죠……."

"경성은 시장이 아니라 부윤이랍니다!"

대영이 이렇게 정정하는 것을, 여자는 고개도 끄덱거리지 않고 그 뒤를 잇대어,

"그렇던가요, 참…… 아무튼 그렇다믄 말씀예요! 그렇다믄 전, 절대루 이걸 예다가 이렇게 둬두질 않구서 담박 헐어 버리겠어요!"

불쾌함을 어찌하지 못하겠는 듯 다뿍 찡그리고 돌아서는 얼굴이, 고적의 관광자다운 호기(好奇)의 눈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음은 물론, 그걸로써 대영은 여자의 그 비밀한 반감의 실체를 수월히 기수 챌 수가 있었다.

대영은 그러나 천연덕스럽게,

"머어, 보장을 해두 좋은데……."

하면서 천천히 다시 가던 길을 걷는다.

"……절대루 무슨 폴리티컬한 위험성은 없구…… 일찍이 그러한 혐의가 다소간 있을 시절에두 매우 도량 넓은 처분을 받았거든, 하물며 지금이야……! 다아 선량한 관리 경성시장, 시장이 더 좋군요…… 그 경성시장으루 앉아서, 고적 보존의 본의를 어겨서까지, 그런 거조를 하려 들 이치는 없을 겝니다……."

여자는 제 생각에만 잠겨 들은 둥 만 둥 반응이 없다.

대영은 우선 그쯤 해두고는 덤덤히 한참이나 걸어가다가 이윽고 광교를 지나면서,

"스미코상?"

하고 불러 놓는다.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쳐드는 시늉만 하다가 만다.

"아까 그 종각, 그거 말인데……."

대영은 저도 앞을 바라다보면서 생각생각, 한마디씩 느릿느릿,

"……그, 다뿍 주접이 든 낡은 종각을 가령 거울이라구 하구 말이죠…… 그 거울에 가서…… 거울에 가서 스미코상의 얼굴이…… 일테면 뭣이냐, 눈곱이 다닥다닥 끼구…… 분 자죽이야 무엇이야 얼룩얼룩 얼룩이 지구…… 이렇게 생긴 스미코상 자신의 얼굴이…… 고대루 그 거울에 가서 빠안히 비쳐져 보이는 게, 더럭 고만 마음이 불쾌합디까? 마구 무너트려 버리구 싶두룩?"

자신이 있는, 그래서 단정적인 속떠보기이었었다.

말을 맺고는 얼굴을 돌리는데, 여자는 종시 앞만 보고 걷던 눈을, 볼에 남자의 시선을 느끼자 그 긴 속눈썹으로 더불어 조용히 내려뜨린다.

얼마를 묵묵히 걸어갔고, 가다가 여자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눈이 올려나 보죠?"

"좀 오는 것두 좋겠죠! 이런 땐……."

그리고는 또 서로 말이 없이 걷다가,

"분상?"

"네에!"

"저어 예전…… 그쪽측에선들, ××를 갖다가 아편이라구 하잖었어요?"

"으음!"

"지금은 그런데 말씀이죠…… 남을 아편이라구 하던 그 자신이 고만 아편이 됐겠죠!"

"그 자신이!"

"적어두 저한텐……."

"……"

"……"

"스미코상?"

"네?"

"스미코상 올에 몇?"

"셋……."

"스물셋! 으음……! 아직두 젊은데……! 오히려 어리지!"

"……"

"……"

"분상은? 올에……."

"나두 셋……."

"남자 나이루 서른셋인다 치믄, 인제 한참……."

"아! 난 까마득해……! 생각하면 대체 그 삼십삼 년투룩 어떻게 살어왔던고오 싶우니……! 요새 같아서는 하루가 지리한데!"

"영화에서 보던지, 이야기나 또오 책에서 보기엔 퍽 로맨한 것 같더니, 저 흰옷들 말씀예요, 왜 저렇게 사뭇 못 견디게스리 걱정스러 뵌대요?"

느닷없이 딴소리를 하곤 하는 것은 마음이 줄곧 방심이 되고 헛갈리고 하는 표적이었을 것이다.

"분상두 흰옷이 그렇게 걱정스러 뵈세요?"

"난 스미코상의 노스탤지어는 없으니깐…… 그 대신 모주리 한 대씩 쥐어질러 주구는 싶어!"

"뭐라구 하시믄서?"

"졸면서 거릴 나와 다니는 건 도시의 미관상으루두 불가하거니와 교통 방해가 되지 않느냐구……."

"남더러만? 자긴 어떡허시구?"

"딴은!"

"……"

"……"

"버릴 양으루 왔더니……! 무어나 생활허구 바꾸구서 아편일랑 버려 볼 양으루 왔더니……."

"신념의 탓이겠지!"

"그런 건 잃어버린 지 오래구……."

"그렇다면야…… 나이 바야흐로 제대의 적령기겠다……."

"……아무짝에두 쓰잘디없는 찌꺽지를……."

"……보나 안 보나, 환경이 호강스럴 테었다……."

"……독이 그대지두 밑이 질긴 물건인지!"

"……또오, 스미코상은 혈통이 더구나……."

이로써 둘이는 완전히 십 년의 지기인 듯 하나도 사이에 막힘이 없되, 또한 조금치도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4[편집]

명치정 어귀의 다방으로 들어가 목을 축이던 길에 내처 간단한 저녁을 마치고 이어서 영화를 구경했다.

대영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싱싱한 전선의 뉴스 영화가 좋아, 봄직했고, 겸하여 크라우스의 '뿔그극장'이 근래에 드문 순수작품이어서 무던했었다.

교대 전 한 삼십 분, 끝을 미리서 보았기 때문에 좀 얼추 아홉시 반쯤 되어 극장을 나왔다.

굵지는 않으나 눈발이 제법 날리고 길바닥으로 가냘프게 한 꺼풀 덮이고 있었다.

눈도 오고 아직 밤도 여리어, 지향없는 마음들이라 발길 또한 지향없이 거닐기 시작했다.

극장을 막 나와 문 앞에서 잠깐 충그리면서,

"어떡헐꼬?"

"거닐죠?"

"쯧! 아무리나……."

하는 걸로 그만이요 더 상량이 필요치 않았었다.

천주교 성당의 어둔 고개를 거진 다 올라와서다.

"인생은 풍부하다구요오?"

문득 생각이 나는 모양, 스미코가 비로소 입을 열어, 방금 보던 '뿔그극장'의 다이얼로그를 한마디 되뇌던 것이다.

"남은 단조해 죽겠는데?"

대영이 주를 다는 것을, 여자가 다시,

"그러게 말씀예요……."

하고는 조금 있다가,

"……그런데 말씀이죠? 가만히 생각하믄 생활의 매력이랄 게 수월찮이 큰 건상불러요."

"생활의? 매력이?"

"좋거나 궂거나 제 자신의 생활…… 어떤 도저한 신념을 가지구 몸과 정신을 고스란히 다아 거기다가 쏟구서 달리 여념이 없두룩 진지한 생활, 그런 생활은 비극적이라두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러니깐 부럽구……."

"부럽구……."

"생활 그것이 부러운 건 아니죠. 그렇게시리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뭣이냐, 태도라구 할는지, 그게 부럽더란 말씀이지. '뿔그극장'을 보믄서 퍼뜩 그런 생각이 났어요."

"일종의 관극심리(觀劇心理)가 아닐까요?"

"혹시 그런지두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한평생을 흔한 연애두 아무것두 일체 모르구서, 연극 한 가지만 가지구 정성껏 생활을 해왔구…… 그러믄서 어찌다가 좀 잘못된다 치믄 비관을 하구 걱정을 하구 다시 더 노력을 하구…… 그러다가 다아 늙게야 남 애인 있는 어린 색시한테 짝사랑이 걸려 가지구는 우롱을 당하구 지지리 번민을 하구, 아이고 코앞에 문이 타앙 닫히는 바깥에서 후루루 한숨을 쉬는 형용허구…… 뺨싸대길 때리던 건 위선이나 훈계가 아니라 정말 불타는 증오겠다요?"

"리얼하더군."

"그렇게 모두 심각하구, 그래서 어디 한구석 빈틈이 있거나 할 만한 무엇이 없이, 생활과 주체가 꽉 달라붙어설랑은 싸움을 하구 있잖아요? 물론 비통한 거야 사실이지만……."

"스미코상 자신이 만일 그 사람이었다구 한다면?"

"아무것두 없는 지금 이 상태보담은 월등이죠."

"실상 아까 우리 사에서두, 그 젊은 두 친구가, 그 비슷한 걸 가지구 또 한바탕 싸웠습니다마는…… 퀴리 부인이 연상 나오잖습디까?"

"오오……! 건데?"

"퀴리 부인의 영광이 행복이냐, 행복이 아니냐, 그거야……."

"딴은!"

"그래, 스미코상두 그러지 않으셨소?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건 결국 주관 나름이라구…… 세상엔 스미코상이나 스미코상은 또 몰라! 날보담은 나으니깐…… 그렇지만 날 같은 사람의 생활을 가져가 미(美)라구 볼 사람이 더러 있을는지두 모르잖습니까? 마치 기집을 추하게 그려 놓구서 소위 미술적인 미를 발견하구, 졸라류의 자연주의 작가가 인생의 치부와 암흑면을 묘사해 놓구서 소위 문학적인 미를 발견하구 하듯이, 마치 그러하듯이 병적인 퇴폐의 미를 말이죠!"

이야기를 하면서 오는 줄 모르게 온 것이, 전차가 달리는 황금정 큰거리였었다.

눈은 꽤 쑬쑬히 내려, 두 사람의 머리와 옷에도 앉고 거리를 허옇게 덮는다.

"고만 하구, 사처루 가십시오. 바래다드리죠……."

대영은 네거리를 향해 길을 잡고, 여자는 미흡스레 잠깐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따라 선다.

"……눈두 오구 해서 좋은 밤이긴 합니다마는, 머어 밤을 새면서 걷구 다닐 정취라군 없는 바닥이니깐요."

그렇게 타이르기는 했어도, 대영 저 자신부터가 말없이 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만 들으면서 벌써 인적 드문 포도 위를 여자와 더불어, 괜히 마음 우수스러운 이 여자와 더불어 눈을 맞으며 눈을 밟으며 걸어가는 정은, 결코 회포 연연한 바가 없는 게 아니었었다.

부청 앞을 바라고 거진 당도했을 무렵하여 여자가,

"분상 참, 약주 잡숫죠?"

하고 묻는다.

"좀 먹죠. 많인 못 하구……."

"잡수시까요?"

"자시려우?"

"술이 정말 맛이 어떤 건가요?"

"쓰구……."

"또오?"

"톡 쏘구……."

"또오?"

"위가 아프구, 심장이 늘어나구……."

"또오?"

"마취가 되구……."

"그뿐?"

"과대망상증이 생기구, 반대루 솔직해지기두 하구……."

"그뿐?"

"신경의 한 부분은 되려 흥분이 돼서 동물적으로 흉포해지기두 하구……."

"술하구 담배하구는 근심을 잊게 한다구 이르잖아요?"

"얼마쯤은…… 그렇지만 고통이나 근심을 잊자구, 더욱이 화가 난다구 곧잘 술들을 먹는데 흔히 핑계구, 실상은 일종의 분풀이 같더군요. 상전한테 닦이운 남의 집 종이 발길루 개를 걷어지르는, 그런 심리 비슷한……."

"왜장녀는 천하 왜장녀래두 술허구 담배허구는 여태 못 먹어 봤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하두 구짜에 엄하게 해놔서……."

부청 건너편의 낡은 다방엘 찾아 들어, 마침 구석진 자리를 자리잡고 마주 앉았다.

이왕이니 압생트로 할까 했으나 독해도 너무 독할 것 같아, 위스키를 청했다.

사동이, 단골이어서 대영을 잘 아는 놈이라 싱글싱글, 조그마한 글라스에다가 마노빛으로 노오란 액체를 남싯남싯, 한 잔씩 붓고는 병째 놓아 두고 물러간다.

레테르만은 멀끔하니 백마를 그렸지만, 속알맹이는 내일 아침 골치가 팰 산또리인 것쯤 각오를 한 터.

대영은 잔을 들어 쭉 마시고는,

"이렇게 먹는 법이랍니다."

하면서 곁들인 냉수로 입을 가신다.

술을 먹는 게 아니라, 술 먹는 법을 가르치는 판이어서 우선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수밖에.

여자는 잔을 입술에 대고 죄꼼 혀끝으로 찍어 맛을 보다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도로 내려놓는다.

대영은 빙그레 건너다보다가 자작으로 또 한 잔을 부어 마신다.

여자는 부러운 듯, 이번에는 조금 한 모금 마시는 시늉을 하더니, 마구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술잔 대신 손수건으로 얼른 입을 가린다.

뱉은 모양으로, 냉수를 집어다가 양치를 하고 나서,

"어쩌믄 그래요, 맛이……."

"그게 술맛이래두."

대영은 필경 얼굴을 흐트리고 웃으면서 세 번째 잔을 마신다.

"어쩌믄 저렇게두 잘 잡술까! 아무렇지두 않아요?"

"보시구려?"

"쏘지두 않구?"

"아아니……."

"쓰지두 않구?"

"아아니……."

여자는 아직도 걱정으로 찡그린 채 바라다보던 얼굴을 배시시 웃으면서,

"아이, 먹구퍼…… 술은 다아 이렇게 맛이 야만인가요?"

하고 묻는다.

"야만이라? 됐어……! 그야 문명한 술두 있죠."

"그럼 그거 좀……."

"그렇지만 그 따윈 어디 술 축에 가야지……."

대영은 페퍼민트가 생각이 났으나, 남이 보기에도 잡스럽겠어서 작파를 하고, 큐라소는 또 떨어지고 없다는 것이고, 할 수 없이 포도주를 가져오게 했다.

"어디?"

여자는 선혈빛으로 고와진 글라스를 올려다 대고, 먼저에 혼이 난 가늠이 있대서 조심조심 맛을 보아 보더니 방싯 웃으면서 한 모금, 그리고는 홀짝 죄다 들이마신다.

"……이렇게 좋은걸! 진작 안 멕여 주시구서!"

"술값에 안 간대두?"

"그래두 카아 쏘는데요? 죄꼼……."

"쯧? 처음이니깐 오히려 그게 적당할는지두 모르지."

여자는 술을 따라서 또 마신다. 그리고는 연거푸 석 잔.

"저 이 술, 병째 사가지구 가요."

"아가씨가 왜 저럴꼬?"

"아무래두 안 맞는 시곈데, 머!"

"안 맞는 시계라? 것두 좋아…… 난 묵은 책력이라구 했더니……."

"묵은 책력……? 옳아……? 묵은 책력……? 안 맞는 시계보담두 꼬옥 아주 적절한데요?"

순하다지만 명색이 술은 술이요, 또 먹어 보지 못하던 장부라, 거푸 석 잔이나 들이켜 놔서 눈가가 제법 붉고 볼도 발그레, 완구히 숨이 찬 모양이다.

대영은 연달아 대여섯 잔이나 기울인 술이 그의 주량에 마침맞아, 이를테면 마악 이야기하기에 좋은 정도이었었다.

"자, 가세요."

술의 풍도를 알 턱이 없는지라, 저 볼일은 다 보았대서 여자는 발딱 일어서더니 카운터로 조르르 간다.

셈을 못 하게 하고 맡으려고 따라가 보니, 돈을 치르면서 포도주를 사자고 교섭이다.

저기 가게에 가서 사주마고 달래 가지고 다방을 나서노라니까, 그새 눈은 훨씬 더 쏟아지고 거리가 모두 눈이다.

못 견디겠는지 여자는 팔에 매달릴 듯 다붙어 따르면서,

"길루 더 돌아다녀요? 네?"

하고 조른다.

"사처루 가시오."

"싫어요?"

"동경과두 좀더 달라서, 밤거리를 늦게 남녀가 거닐구 다니면 우선 경찰부터가 질끔으루 알구 금을 합니다."

"어떤가요, 머어……."

"하찮은 일을 가지구 시비를 당할 까닭이 있나요?"

"퍽 선량하셔!"

"자아, 그 대신 내 포도주 사드리께시니……."

"이대루…… 이 부지할 수 없는 맘으루 오늘 밤을 지낼 일이 아득해요!"

"아까 그, 영화 가운데의 생활을 객관하듯이, 넌지시 스미코상 자신을 객관하구 지내요. 그런다 치면 좀은 마음이 편안할 테니…… 방관적이어서……."

"당돌한 체하더니 고작이냐구 웃으실 테지만, 역시 남자하구두 달라서 센치하기 쉬운 여자 아녜요? 그런데 전 또, 노스탤지어가 있잖아요…… 누가 시킨 밴 아니지만서두, 이렇게 밤이 생소하구 사람두 설구 한 여길 와서……."

"사처루 가서, 내 그럼 스미코상 마음 갈앉히구 잠들두룩까지 이야기 벗 해드리지."

"것두 실상, 말하자믄 분상한테 책임이 노상 없진 않으셔요."

"내게? 책임이?"

대영은 어떤 짐작 밑에, 너무 헤프지 않은가 하는, 그래서 도리어 가벼운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그러나,

"책임이라믄 엄살일는지 몰라두…… 여자란 것은 절 너무 잘 알아주는 남자한테는 일상 약하구, 그래서 여자답게 응석을 부리구 그러는 법예요, 믿는 맘에 수동적인 본능으루다가…… 그 고팰 잘 못 넘기믄 고만 딴걸루 발전이 돼버리구……."

"그런데 알콜 기운이 들어서 가뜩이나 작희를 하죠?"

"아마 그런가 봐요."

"그러니깐 이 다음엘랑 술 자시지 말아요!"

"분상하구만 먹구…… 이왕 다아 약점 들키구 났는데야. 자아, 포도주 사주세요, 약속하셨으니깐……."

🙝 🙟

스미코가 든 방은 여러 채로 된 이 아파트 가운데, 바로 들어가는 첫 채의 맨 끝에 가 붙어 있었다.

스팀이 훈훈하고 조그마한 방인데 역시 조그마한 침대와 조그마한 양복장은 낡은 손탁자로 더불어 방에 딸린 세간인 듯했으나, 방이 그들먹하게 큰 소파와 비단 쿠션과 침대에 편 새털깃 이불과 저편으로 또 하나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차찬장과 두 개의 걸상과 이런 것들은 죄다 사치스런 신품인 것이, 여자가 제라서 장만한 게 분명했다.

"이걸 글쎄, 모두 들여오구 늘어놓구 하느라구, 어제 온종일 그리구 오늘 한나절……."

여자는 외투와 모자를 벗어 양복장 안으로 아무렇게나 들여뜨리고 돌아서다가,

"……분상 모자, 외투랑……."

하면서 방 가운데 우두커니 섰는 대영에게 손가락을 꼼질꼼질 팔을 내뻗친다.

초록줄이 널찍널찍, 가로세로 번듯하게 진, 회색 천의 원피스가 몸에 차악 달라붙어 훨씬 더 후릿하고, 그 속에서 근육과 사지는 탄력이 있었다.

대영은 의관을 벗기도 혐의쩍었지만 그렇다고 청백을 부리는 것도 도리어 제 발이 저려하는 노릇 같아서, 아뭇소리 않고 저 하자는 대로 했다.

"거기, 소파에 편안히 좀 앉으세요……."

스미코는 남자가 벗은 것을 제 것처럼은 함부로 다루지 않고, 잘 가조롱이 걸어 두고 넣어 놓고 하느라 한참 수고를 한다.

"……아 글쎄, 앞으루 다만 얼마 동안이라두 맘을 잡구 배겨 있게 될는지 어떻게 될는지, 아직 작정두 변변히 없으믄서 웬 살림을 이렇게 모두 장만을 하구 해요……? 그런 걸 보믄, 여잔 괭이 성밀 닮았다구 하는 게 노상 애맨 욕두 아닌가 보죠? 거처에 먼점 정을 들이자구 한대서……."

여자는 미상불 대영이 이렇게 함께 와 있어 주어서 작히 심란스럽지 않고 마음이 놓이는지, 연해 쌔와려 싸면서 마지막 양복장 문을 찰그랑 닫고는 이리로 돌아온다.

"자아, 인전 잘 대접해예지?"

"거 무어, 그림을 하나구 둘이구 좀 걸었더라면……."

대영은, 손탁자 위에 수선이 한 접시 놓여 있을 뿐 민틋하니 아무것도 없는 사면의 벽을 다시금 둘러본다.

여자는 같이 시선을 따르면서,

"생각은 있었지만, 시방 형편에 틀집에서 사는 것밖에 별수가 없는데, 그 그림이야 차마 어디……."

"나한테 족자가 좋은 게 하나 있는데, 그렇지만 이런 양실엔 얼리잖아. 또오 고화가 돼서 스미코상의 취미에 맞지두 않을 테구……."

"고화두 집에두 많이 있어서 늘 구경은 했어요. 무언데요? 누구?"

"허소치(許小痴)라구 스미코상은 그래두 모를 거야…… 그이 진필 모란인데……."

"가져다주세요."

"쯧……! 거무테테한 묵화니 그리나 아시우."

"있을 동안 자알 걸어 두구 보다가, 또 자알 돌려보내 드리께, 네?"

"기념으루다 영 드려두 좋구."

"나두 그럼, 인제 갈 때 기념될 거 무어 드리지?"

여자는 차관을 들고 나가다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려다보면서,

"참! 시장하시믄 토스트 만들까요?"

하고 묻는다.

대영은 고개를 두르면서,

"좋습니다."

"그래두우…… 계란은? 반숙해서……."

"스미코상이나……."

"전 생각 없어요…… 아이, 그런데 참, 어쩌나아! 하하하!"

여자는 비로소 처음 보게 명랑히 웃던 것이나, 대영은 웬 영문을 몰라 두릿두릿하고.

"……두 양주서 글쎄, 세간살일 하는 것 같군요, 하하하하!"

그러다간 미처 무어라고 대꾸를 할 사이도 없이 급작스레 얼굴에서 웃음이 물 쓸리듯 쓸려 없어지면서 금세, 아미를 담뿍 찌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을 밀치고 나가 버린다.

남자와의 세간살이란 말을 하던 끝에 별안간 좋잖은 내색이 드러남은, 필시 저 자신이 겪은 불쾌한 기억의 소생일 것이었었다.

아닌게아니라 아까 그와 같이, 남자의 의관을 달래다가는 얌전하게 다 건사를 하던 것이며, 시방은 또 요기할 것을 토스트야 계란이야 해싸면서 알뜰히 마음을 쓰곤 하는 양이 정녕, 잠시나마 남의 아낙 노릇을 해보던 솜씨지, 노상 생내기의 뉘네 집 얼뚱 딸내미는 아닌 성싶었다.

대영은 그렇다고 한다면 여자를 가져다 머리에서 우러나는 상심(喪心)이거니만 했던 것은 잘못이요, 역시 심장의 사건도 한 모가치 거기에 결련이 되기는 된 거로다고, 따라서 그가 이쯤 이른 전후 경위도 어느만큼 구체적으로 짐작이 들어서는 것 같아, 두루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귀에서 김이 오르는 차관을 대롱대롱, 해망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스미코는 그새, 가스를 피우는 동안 다시 생각이 또 많았던 모양으로, 기색은 도로 변하여 여느 때의 침울한 그 얼굴로 돌아갔었다.

말이 없으련 했더니 무슨 생각에 입안엣소리로 혼자,

"눈두 잘두 오지!"

하면서 손탁자를 소파 앞까지 바투 다가다 놓고는, 그제부터야 눈을 내리깔고 잠잠히 차를 거르기 시작한다.

향긋한 홍차 냄새가 풍기고, 조르륵조르륵 차 거르는 소리만 조용한 방 안에서 유난히 높다가 만다.

또한 제격이게, 대영의 담배 끝에서는 파르스레한 연기가 세 가드락 두어 가드락 소옴솜 피어오르고.

자릿한 애수가 곱게곱게 어린 침정의 한동안이었었다.

마침내, 정갈한 사기 찻종에 노리볼깃하니 진하게 받쳐진 차를 두 잔, 또 뒤미처 생각이 나 찬장으로 가더니 초콜릿을 접시에 담아다 놓고, 그리고는,

"오래 기다리셨지요! 자, 어서……."

하면서 손에게 권을 한다.

"……설탕일랑 성미대루 넣으시구……."

"스미코상, 가뜩이나 잠 안 오면 어떡허자구?"

"일없어요!"

여자는 소파의 이편 끝으로, 팔고이개에 쿠션을 놓아 등을 기대고, 대영의 옆을 향해 넌지시 앉는다.

더운 차가 들어가서, 둘이는 다 같이 술기운이 한번 더 올라, 새 채비로 얼굴이 단다.

"저어 어떤…… 어떤 천하에두 몹쓸 사람이 있었더랍니다!"

밑도끝도없이 여자의 입에서, 한동안 차를 마시고 있던 채, 퍼뜩 이야기가 한 토막 흘러나오던 것이다.

하다가 또 잠깐 말이 뜬 사이 대영은, 으레 그 (어떤) 이야기가 조만간 나올 줄을 미리 다 알고 있던 것처럼 (마침 자리의 기분이 십상 그럼직하기도 했었고) 그래, 손에서 찻잔을 내려놓고 담배를 새로 한 개 피워 물고, 그러고서 몸을 뒤로 편안히 기대고는 마지막, 눈은 앞벽을 올려 바라다보면서 귀로 신경을 모은다.

그럴 즈음 여자는 웬만큼 저도 차를 물린 후 잠깐, 남자의 그렇듯 주의스러운 포즈를 건너다보다가 인하여 그의 프로필에 시선이 멎는 대로 천천히,

"……마악 여학교를 마친…… 나이래야 갓에 겨우 열여덟 살배기……."

하면서 이야기를 다시 이어, 비로소 술회는 차분하니 풀려 나오는 것이다.

"……무얼 알았으리……! 아아무 철두 없구, 세상 물정두 모르구, 단지 호기심허구 감성만이 남달리 예민한, 그러니 아직 입에서 젖비린내두 안 가신 계집아이던 걸…… 그런 계집아일 갖다가…… 생계가 유족한 집안이것다, 달리 사나이 손이라군 없구, 단 딸 형제, 그 중에서두 망낭딸…… 조옴 응석받이며 얼뚱애기던고. 선머슴 사나이와 다를 게 없었구, 그렇게 철두 안 들구 한 계집아일, 그런 계집아일 갖다가 말이죠. 야속두 하지…… 그 몹쓸 사람이 들어서 고만 아편을 멕여 주었더랍니다. 소위 연애란 것두 과한데, 아직 일른데, 아편을 말이죠…… 연애라지만 실상 어디 연애랄 게 있었다구……? 연연한 애정은커녕, 하다못해 인간 그 자신에게 이렇다구 할 무슨 친험이라두 느낀 적이라군 없구, 한갓 그저 그 사람이 가진 아편, 순전히 그 아편의 색다른 매력에만 함빡 반했던 노릇이지…… 그래두 그걸 제법, 아아니 전혀, 연애거니 여겨 의심치 안했구…… 체에! 태양을 집어삼킬 듯 기개 좋은 그 정열이더라니!"

차차로 이렇게, 지나간 회상에 폭신 잠겨들면서, 실꾸리 풀리듯 잔지란히 풀어지는 설화의, 그 고요한 음성과 나직하니 한결같은 억양하며 일변 몽상적으로 방심된 얼굴에 꼼짝 않는 몸 자세하며, 모든 하는 양이 어쩌면 누구의 혼백에 씌어 사자의 넋두리를 푸념하고 앉아 있는, 강신술의 피술자(被術者)랄까, 혹은 신 내린 젊은 무녀(巫女)랄까, 자못 요기스러움이 없지 않았다.

"그것이 아무튼, 시방으로부터 여섯 해 전, 햇수루 여섯 해 전……."

여자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그럴 사이 이건 마치 또 그 강신술의 시술자(施術者)인 양 대영이, 예의 포즈 그대로 앉아 한눈을 파는 채 한마디,

"여섯 해 전…… 여섯 해 전이면……."

하면서 조용히 퉁긴다.

"……그때쯤이면, 으음…… 그때쯤이면 그 아편이 별반 그리 드세게 유행할 시절두 아니것다? 한물 지나구 나서, 조수가 쓰이느라구……."

"그건들 알 턱이 없구, 또오 알았은들 상관두 아녔을 것이구……."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면서 다음을 다시 계속한다.

"……명색 연애라구 하는 것의 수단을 통해서 그걸, 그 마약을 멕여 주는 대루 죽을 동 살 동 모르구서 받아 먹었구, 하길 한 달? 아아니, 다직 보름…… 그리구 나니 아무것두 눈에 뵈는 것이 없을 만침 미쳐 버렸구…… 필경 하루 아침 모든 것을 죄다 내던지구서 뛰쳐나가 그 사람과 더불어 소위 세간살이란 걸 시작했구, 빈민굴 나가야의 삼 조짜리 방에서 부둥개미 조각에 밀가루범벅을 해먹어 가믄서 말이죠. 허나 그래두 즐거웠구…… 천하 깜찍스런 계집아이더라구야……! 하여튼 그 짓을 계속하기 반년, 반년을 대껴나니 그제는 한다하는 아편쟁이가 됐구, 그러자 그 사람은 마침내, 대세요 정해진 코스라 글러루 수양을 떠났구…… 의지가지없은 전 요행 살뜰히 안아 주는 부모의 품으루 일단 돌아왔구, 그 두호두 입었구…… 돌아와서 기대리기 이 년 반, 그 이 년 반 동안을 어느 사립대학으루 청강을 다니믄서, 또는 안일한 환경이것다 침착한 가운데 규칙적인 많은 독서를 한 걸루 해서, 병은 드디어 골수에까지 사무쳤구, 결국 한 독립한 아편쟁이랄 수가 있었을 테죠. 다만 서재적이어서, 말하자믄 아편을 안 먹는 아편쟁이라구 할는지, 무어라구 할는지…… 그렇게 아무튼 이 년 반을 지냈구, 지내구 나선 그 사람을 다시 만났구."

여자는 한숨을 호오 내쉬면서,

"……만났더니!"

하고는 잠깐 말이 그쳤다가 훨씬 만에 다시,

"……깜박 그때까지두, 애정으루다가 기대린 것이 아니구서 다만 아편을, 아편적인 것을 기대린 줄은 몰랐다가, 막상 만나구 봤더니……! 큰 환멸이라구 할까, 그 사람은 벌써 나허구는 아무 상관두, 또오 상관을 가질 결련두 없는, 그래서 나한테는 언뜻 지나치는 노방의 사람처럼 전연 무의미한 존재. 이것이 아편의 독을 말끔 다아 씻어 버리구서 이미 완인이 돼가지구 돌아온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순간의 제 기모치더랍니다. 남…… 아무것두 아닌 남, 이거죠. 일껀 날 가져다 아편에 중독을 시켜 주구서, 오래두룩 기대리게 하구서, 자기는 실끔 손을 씻구 돌아서구. 돌아선 그 자태의 보기에 헤멀끔하구두 능청스럽더라구야. 당하기에 허망하더라구야. 그러다가 비로소 그제야, 본디 무슨 조곰인들 애정으루다가 맺혀진 사이두 아니요, 또한 애정으루다가 지탱을 해온 관계가 아닌 바엔, 애당초에 둘이를 비끄러맨 아편의 매력을 저편에게서 찾을 수 없는 이상, 오히려 지당한 결과임을 깨달았구…… 그러나마 인간만이라두 족히 취할 한 구석이 있었다믄, 변했거나 말았거나 예대루 그를 맞아들였으련만, 아편의 탈을 벗구 나선 정첸 세상 고약한 파락호……! 오카다라구 하는 짝패와 부동이 돼가지군, 날 지지리 볶아두 대구, 필경 꼬여 내다가 감금을 시키구서 협박을, 협박을 안 듣는다구 린치를 하구. 우리 부모두 끕끕수 많이 받았지. 모두가 방탕하느라구 돈을 뺏어 내가는 수단이죠. 통속소설이래두 되엄즉한 스토리 고대루……."

스미코는 스스로 말을 그치면서 소스라쳐 한숨을 내쉬더니 어느덧 오랫동안 놓았던 정신이 드는 모양으로, 표정도 자세도 일시에 다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 길에 팔을 뻗쳐 초콜릿을 한 개 집다가,

"네? 분상……."

하고 부르는 음성도 역시 항용 제 음성이다.

"응?"

대영은 그러나 그대로 멀거니 얼뜬 대답을 한다.

"분상은 단 거 안 좋아하시나 봐?"

"머어……."

"네? 분상……."

"응?"

"그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대영은 도리질만 하고, 여자는 초콜릿의 은지를 벗겨 입으로 올려가다가 말고는 한참이나 남자를 건너다보더니,

"분상허구 같은 혈통?"

하면서 날름 과자를 씹는다.

"뭣이?"

소리도 엉뚱 크게, 대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이키고 짯짯이 여자의 얼굴을 주목한다.

"깜짝이야……! 그렇게 싫으세요!"

대영은 듣고 보니 비로소, 내가 어째 그만 것을 가지고 사뭇 그렇게 놀랐더란 말인가 싶어, 담뿍 점직해 못 하겠고, 그래 방금 그 딱딱해진 낯꽃을 눅이느라 애가 쓰였다.

"분상?"

"응!"

"아까 그 말씀, 실례?"

"괜헌!"

"그럼 왜 그렇게, 더럭……."

"하두 뜻밖이어서……."

"그렇다믄 몰라두…… 정말 분상 아무렇지두 않지이?"

"정직하게 말하면……."

대영은 벌떡 일어나서, 뒷짐을 지고 방 안을, 그다지 길지도 못한 거리를 오락가락 거닌다.

"……섬뻑 치욕을 느낀 것만은 사실인데, 말이지……."

"그런데?"

"결국 혈통에서 오는 반사적인 편견이랄까…… 그렇지만, 왜? 그까짓 녀석이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했기루니, 내가 무슨?"

"그러게!"

"그러니 더구나, 피해자 스미코상한테야…… 스미코상이 결코 그걸루 해서 또는 그걸루 미루어 가지구서, 일반을 적시를 한다거나 모욕을 하자는 의사는, 그런 편견은 아닐 테니깐…… 그렇잖우?"

"그랬다간 싸개 맞구서 경성서 쫓겨나게?"

대영은 싱그레 여자의 앞에 가 멈춰 서서, 빠꼼 치뜨고 웃으며 기다리는 눈을 들여다본다.

"자아……."

여자는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다독다독, 그리고는 대영이 가리키는 대로 바투 와 앉기를 기다려,

"차 더 디리까?"

"아니……."

"그럼, 이거?"

여자는 아까 사가지고 들어온 포도주가, 잊어버린 채 여태 손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냉큼 집어 든다.

"……깜박 잊었어……! 잡수시죠?"

"배만 부르구 슴슴해서!"

"한목 많이 잡숫죠! 그리구 나두 좀 먹구요, 네?"

찻종을 그대로 술잔삼아, 각기 한 보시기씩 부어 가지고, 대영은 오히려 맛보듯 하는데, 스미코는 홀짝홀짝 서너 번에 죄다 마셔 버린다.

"여자가 술을 먹어 취해 버릇 하면 흘게가 없구 헤풉닌다!"

"그러니깐 분상 기신 데서만 먹는대두!"

대영은 여자의, '그러니깐 분상……' 이라고 하는 그 '분상'의 한계를 어디만큼 잡아야 할는지 몰라 궁금했다.

"자아, 그리구 이저언?"

"응!"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하께요오?"

대영은 고개를 끄덱거려 준다.

"죄꼼 남았으니깐요, 네?"

술이 미처 몸에 돌기도 전인데 벌써 음성과 말씨가 약간 다름은, 먼저의 한번 경험으로 하여 (처음 한번 경험이던만큼 도리어 효과적이어서) 술을 먹으면 기분이 으레 달뜨는 것인 줄, 제풀 암시에 걸려 든 때문일 것이다.

"아, 그래서…… 한 일년 장간이나 두구 그 단련을 받다가, 요행 참 면하질 안했겠어요?"

"용히 면하느라구?"

"어디 가서 사람을 궂히군 진짜 수양살일 갔죠! 한 십 년……."

"흐응!"

"아, 그리구 나서 겨우 맘을 좀 놀 만하니깐, 그 다음엔 집에서 절 졸라 쌓는군요?"

"매양, 시집이나 가라구 하던 게지!"

"누가 아니래요……! 지참금이 자그만치 오만 원……! 본디 삼만 원이더랬는데, 계집아이 험값으루 이만 원 더 얹어서……!"

"쯧! 헐친 않군!"

"너두나두죠, 머……! 아, 그런데 정작 당자 지가 들어먹얼 줘예죠……? 개중엔 오만 원 하나 바라구 나선 사람두 많기야 했지만, 또 더러는 무얼루 보던지 보통 신랑 재목으루 부족할 게 없는 사람두 없잖아 있었어요. 그렇지만 첫짼 근본적으루 지가 결혼 그것에 도무지 뜻이 없구, 그리구 막상 결혼을 한다구 하더래두, 색시 쳇것은 아편쟁이구 저편은 선량한 시민인 걸, 그러니 며칠이 못 가서 파탈이 나구래야 말 건 빠안한 이치 아녜요? 뭣이냐, 유도 삼단짜리 우락부락한 색시허구, 저어 체중 십이 관두 못 되는 빼빼 마른 새서방허구 콤비처럼…… 밤낮 유도루다가 새서방을 둘러 메꼲기나 하믄 어떡해요! 하하하!"

대영은 섭쓸려 빙긋이 웃으면서, 여자의 빠알갛게 피어 가지고는 까알깔 웃는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본다.

보는 동안에 덮어놓고 와락 그 입술을 뺏고 싶은 충동이 슬그머니 일어나, 그것을 가까스로 누르고서 어려운 고패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그럴 즈음 낯꽃이 매우 수상했던 모양으로, 고개를 돌리던 순간 무심히 웃고 있던 여자의 얼굴에서 졸연 웃음이 지워지며 퍼뜩 눈이 긴장하는 것 같더라니 정녕 속을 들킨 성불렀고, 그래 외면한 귀때기가 자꾸만 점직해 못 했다.

"피차간 못 할 노릇이 아녜요?"

여자가 앞서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던 것인데, 제 발이 저리더라고 대영은 저더러 나무라는 소린 줄 알고서 움칫 놀랄 뻔했고,

"……애먼 남의 젊은이한테두 차마 못 시킬 노릇…… 또오 저두 번연히 다아 실패할 것을 알믄서 잠자꾸 쫓는다는 것두 어리석은 짓이구…… 더구나 전 두 번째 그런 실팰 한다믄 영 아주 고만 아니겠다구요……? 아, 이런 깊은 속은 몰라주구서 글쎄들 졸라 대는군요! 어머니가 조르구, 언니가 조르구, 아저씨가 조르구, 아버진 머어 꾸우중 꾸중 무섭구, 작년 가을인가는 동대 연구실에 있는 어떤 소장 의학자란 사람허구 미아일 다아 시키려 들겠죠……! 죽여라구 마구 뻗었죠. 아, 그랬더니 하다하다 만자저서 올 봄엔, 아버지가 정말 역정이 나서가지군, 나가라구 쫓아내겠죠! 이년, 넌 부모한텐 불효한 자식이구 나라엔 불충한 백성이니 용서할 수가 없다구…… 널 기르는 밥과 옷이 내 것인 동시에 나라의 것인데, 어찌 너 같은 불충불효한 년을 둬두구서 멕이구 입혀 길를까 보냐구…… 쫓아내길래 쫓겨 나왔죠 머…… 집에서 밤낮으루 졸리기보담두 차라리 다행했구…… 또 고생두 별반 안 했어요. 어머니허구 언니허구 둘이서……."

여자는 초콜릿을 집으러 가던 손을 대신 술병을 치켜 들면서,

"저 이거, 더 먹어요?"

하고 묻는다.

"조선 속담에, 늦게 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단 말이 있습닌다!"

"죄꼼만……? 목이 말라서 그래요!"

"나중에 부대낄 일이나 각오하구서……."

여자는 먼저대로 찻종에다가, 한 반이나 되게 그 새빨간 액체를 부어 가지고는 빠알간 입술로 쪼옥쪽, 단 꿀 빨듯 마신다.

대영은 고놈 잔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을 (핑계를) 하고, 또 말았다.

"참, 그렇게 어머니허구 언니허구……."

여자는 잔을 물리고 바투 앉으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루가람 둘이서 아파트엘 종종 찾아와선 드뿍드뿍 용돈을 주구 해서 하나두 옹색을 당하거나 아따 그 어느 때처럼 밀가루범벅을 쑤어 먹구 지내던 안했어요…… 아, 그리구 참, 분상을 그때 첨으루 알았구먼요!"

"분상이라니? 날?"

"네에……! 그런 게 아니라……."

"그저끼 첨 만나구서?"

"이웃 방에 마침 조선 학생이 내외 양주가 있었는데, 그이들을 알았죠…… 내외가 사람들이 어떻게 어질구 삭삭한지, 정이 들어서 퍽 가깝게 지냈구, 그리구 그제야 참, 조선 사람한테 대한 제 편견을 곤쳤군요……! 그래 그 두 내왼데, 내외가 같이서 일대(日大)엘 다녀요. 그리구 또 둘이 다아 아주 맹렬한 문학지망자겠죠! 그래서 자연 조선 문학에 대한 이야기두 가끔 듣구 지가 또 문학이라믄 쑬쑬이 좋아하는 성미겠다, 호기심이 생겨 가지굴랑 이것저것 물을라치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구. 그러믄서 잡지며 단행본 같은 것두 장님 단청 구경이나따나 구경을 시켜 주구. 그리구 시방 문단에서 누군 어떻구 누군 또 어떻구 하단 이야기 끝에 분상두 한몫 나왔구, 필경엔 작품을 내놓구서 따듬따듬 번역을 해가믄서 읽어까지 주구…… 그런데 말씀예요, 죄다 잊어버렸는데두 유독 분상 한 분이 끝까지 인상이 남았겠죠!"

"하필……! 그 설명을 해줬다는 요새 젊은 문학지망자네가 도저히 날 호평했을 이치는 업구, 아마 욕이 대단했던 모양이지?"

"알아맞히신 말씀예요……! 그런데 전 그거보담두, 하하하! 노여 마세요, 네……? 아, 작품이 여간만 껄렁했어예죠! 하하하!"

"영명이 사해에 떨치도다가 아니라, 추태가 멀리 동경까지 퍼지니라루군?"

"껄렁하다구 한 건 지가 악담이구, 이를테믄 소설이라느니보담두 논문이라구 하는 게 졸 뻔했어요!"

"무어던가? 허긴 죄다 그 모양이니깐 이거구 저거구 할 것두 없지만……."

"저두 이름은 잊었어요…… 그런데 논문처럼 그렇게 빡빡하구 맛은 없어두 어쩐지 맘에 차악 앵겼어요……! 그래서 분상이 우연히 인상에 남았었구, 인상이 그렇게 남은 덕에 이번 조선으루 올랴믄서두 실상 분상을 우선 연줄삼아서 찾을까 했는데, 아 이웃 방의 그 학생 내외가 지가 떠나기 얼마 전에 딴 곳으루 옮아가군, 미처 어딘지 알 수가 있어예죠. 허긴 그이들두 분상허구 즉접 안면이야 없을 테지만서두…… 그래, 급하긴 하구, 그러자 마침 그이, 송죽에 있는 그일 길에서 무뜩 만나서 말말 끝에 걱정을 했더니, 그렇다믄 썩 좋은 사람이 있다믄서, 명함에다가 김종호 씨한테 소갤 해주더구먼요. 그리구 따루 자상하게 편질 띄워 두겠노라믄서……."

"좌우간 조선이라구 하는 곳하구는 이상한 인연이 있으란 팔자루군? 스미코상이……."

"아마 그런가 봐요……! 정말 참 그런 무엇이래두 아니구서야, 좋건 궂건 이렇게 연해 인연줄이 맺혀져 나갈 까닭이 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스미코상?"

"네?"

"그런 게 아니라, 아마 스미코상네 선조 누가 말이지…… 저어 임진란, 일본 역사룬 문록역…… 문록역 알죠? 풍신수길의 조선정벌……."

"교과서에서두 배우구, 장혁주 씨『가등청정』두 읽었어요."

"그래…… 그런데 그때 말이지…… 그때 스미코상네 선대 할아버지가 누구 한 분, 역시 조선으루 출정을 왔다가…… 와서 싸움을 하다가, 응?……잘못 고만, 어떤 원통한 비전투원을 혹시 살상을 한 일이 있나 보군 그래? 전시엔 부득이 그런 수가 간혹 있는 법이니깐……."

"글쎄…… 그런 이야기 못 들은걸? 그런데 건 왜?"

"정녕 그랬나 봐……! 그래서 그 원한이 후손 스미코상한테 시방 액이 와 단 거야!"

"정말?"

여자는 눈이 동그래, 파고들듯 묻다가, 그제야 대영이 벌씸 웃는 것을 보고는,

"……가지뿌렁!"

그러나, 그러면서도 반신반의, 좀 마음이 섬뜩한지 말긋말긋 남자의 낯꽃을 여살핀다.

밉지 않게 구는 여자를 데리고 앉아, 생각잖은 일로 우연한 말 끝에 딴청을 하여 짐짓 한번 놀려 주는 것도, 요외의 심심치 않은 흥이었었다.

"역시 여자란 건, 웬만해서 미신엔 저항력이 약하기루 마련인가 봐!"

"누군 곧일 안 들어요? 깜빡 속은걸……! 시침을 뚜욱 따시군…… 재료가 또 번연한 역사 사실인데다가……."

"내 소설을 갖다가 껄렁하다구 욕한 복수여든!"

"오옳지! 난 또…… 걸루 그럼 쓱삭했나?"

"쯧……! 내가 좀 밑졌지만……."

"제엔장……! 자아, 그럼 서루 물시하구우. 그리구 인전 그 다음 이야길 해예죠……? 이야기나마나, 모두 딴 갈래루 나가구, 선후가 뒤바뀌구 해놔서…… 아, 그래 아무튼지 그렇게 집을 쫓겨나 가지굴랑 아파트 살일 하믄서, 봄 여름 가을을 그럭저럭 지냈구. 지내구 나서 다시 겨울루 접어들자, 차차루 그제부텀은 가만히 생각을 하니깐, 못쓰겠어요…… 뭣이냐, 당분간 고생은 않는대지만, 그렇다구 언제까지구 그 모양으루 지낼 수야 없잖아요? 그리구 한편으룬, 것두 꼽시랑꼽시랑 나이 차 가는 탓인지, 막연하나마 장래란 것이 걱정스런 생각두 더러 들구. 안 맞는 시계가…… 분상 말씀 짝으루 묵은 책력이, 어떡허다가 썩 그런 염량을 다아 채릴 줄은 알았는지……! 그래서 하여턴 그 다음부터선 아무래두 맘을 곤쳐 먹어예지만 싶구, 그러다가 한번은, 그럭허자믄 바닥을 어디 좀 떠보는 게 좋잖을까 하는 궁리가 들겠죠? 그러믄서 그 끝에 문득, 대체 그 조선이란 데가 어떻게 생긴 고장인구? 예라, 기왕이믄 한번……! 이런 담보가 생기겠죠……! 그리군 머어 다시 더 생각할 나위두 없이 당장 그 이튿날루 떠나자는 참인데, 아 어머니허구 언니허구서 그 말을 듣군, 고만 질색들을 하는군요! 어머닌 한단 말씀이, 얘야 글쎄 조선엔 시방두 호랭이가 시글시글하다는데, 무슨 수루 게를 가며, 조선이라믄 말만 들어두 머리가 내둘리질 않느냐구, 가뜩이나 울기 잘 하시는 이가, 디리 눈물을 짜믄서 어쩔 줄을 몰라하구…… 언닌 또, 조선은 하두우 하두 추워서 겨울엔 귀가 마구 얼어빠진다는데 어찌자구 그런 델 가려 드느냐구, 말려 쌓구…… 들 그러다가 필경 지가 떠나던 날은, 동경역으루 배웅을 나와선, 그냥 울어 싸시믄서 어머니가, 이 에미 얼굴 마주막 잘 보구 가라구, 그리구 참…… 반질, 이걸……."

여자는 차차로 음성이 차악 갈앉다가 왼손의 반지를 내밀어 보인다.

백금으로 대를 했고, 대가 가는 푼수하면 알이 너무 굵어 본새는 없어도, 약간 노릿한 돌은 불빛에 찬연히 광채가 서린다.

대영은 그러나, 진귀한 그 보석보다도 여자의 이쁘게 조그마한 손을 담쑥 쥐어다가 조물조물 만지고 싶어 못 한다.

여자는, 저도 한참이나 반지를 내려다보면서 고요히 회상에 잠겼더니, 훨씬 만에 가벼운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다시,

"……그래, 이걸 그렇게 손에다가 끼워 주시믄서, 돈을 나우 좀 마련하쟀던 게 미처 못 됐다구, 이거라두 끼구 갔다가 여엉 아숩거들랑 돈으루 바꿔 쓰라구…… 당신이 시집오실 제 삼천 원인가 딜여서 해 끼구 오신 건데, 막내딸 절 시집 보낼 때 주실 양으루 했더니, 이렇게 슬픈 날에 소용이 될 줄은 몰랐다구…… 언닌 그러자 또, 지가 외투를 얄따란 스코치루다가 입은 걸 보구서, 조선은 그렇게 귀가 빠지두룩 칩다는데 저걸루 어디 배기겠느냐구, 자기 핼 벗어서 입혀 주구…… 그러믄서들 당부가, 부디 맘 잡아 가지구 수히 돌아오라구…… 널 그 먼 델 보내 놓구 어떻게 날을 지낼 거냐구, 또들 울어 쌓구…… 그때 참, 첨으루 비로소 지가 눈물이 났어요……! 멀리 낯선 이향으루 떠난다는 회포두 있었을 테지만, 어떻게두 그이네의 애정이 살이 아푸두룩 몸에 스미던지, 고만 감격해서 같이서 울었죠! 허긴 부모 동기간의 저한테 대한 살뜰한 애정이 그때 처음 비롯은 건 아니지만서두, 그걸 지가 옳게 느껴 보긴 첨이댔어요!"

여자는 또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더니, 그리고는 음성과 말에 약간 힘을 주어 다시,

"……그리구 그때! 그때 지가 아주 핍절하게 한 가지 생각을 한 게 있는데 말씀예요…… 자아, 어머니가 저대지두 날 사랑하셔…… 언니가 그래…… 남이랄 값에 아저씨가 그래…… 또오 아버지두 내가 당신 뜻만 좀 받들어 디리믄 다시없이 귀여하구 위해 주실 터…… 아 그러니 제 주위엔 극진하구두 풍부한 애정이 골고루 다아 쌔서 있잖아요? 과장이 아니라…… 그런데 또, 집안은 넉넉해…… 문벌두 과히 만만하던 않어…… 좋잖아요……? 그리구 마주막, 저 자신을 보더래두, 빈약하나마 조고만치 학식이 들었어…… 나이 스물셋에 한참 젊은데 몸은 건강해…… 얼굴이 잘생기던 못했어두 곰보딱지나 과한 추물은 면했어…… 무던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말씀예요…… 어디루 대구 보던지 하나두 부족하거나 꿀릴 것이 없는 환경이요 컨디션이니, 아 그러니 다만 한 가지 병증, 아편 그것만 선뜻 버리구 나믄…… 가뜩이나 시대와 세상허구 양립할 수두 없는, 그래서 진작 현실을 떠난 전설이요 아무짝에두 소용이 닿지 않는 한갓 우상…… 전 그걸 우상이라구 생각해요! 우상이지 별거예요……? 그러니깐 제발 그 우상만 그 아편만, 내다가 버리는 날인다 치믄 말씀예요…… 전 이내 그 좋은 환경 가운데서 기를 펴구 맘대루 질겁게 자알 이 청춘을, 인생을 갖다가 누려 갈 수가 있을 게 아니겠다구요? 얼마나 좋아요……! 그렇잖아요? 네? 분상…… 그게 지가 잘못 생각일까요? 무리예요? 괜헌 욕심……? 네? 분상! 그게 지가 잘못 생각예요? 억질까요?"

여자는 알콜 기운에 휘둘리거나, 그래서 좀 해롱거리거나 하는 거동이 하나도 없고, 마지막엔 마침내 열을 띠고서 안타까워하는 양이 정상 곡진한 바가 있었다.

대영은, 아까 석양 때 거리에서 일껏 제 입으로도 그러한 말을 했던 터요, 시방 이 자리에서는 더구나 그것이 당자 자신의 아주 절절한 부르짖음이라는 것을, 동시에 지당한 의욕이라는 것을 동감을 하기는 하면서도, 그러나 한편으론 그렇듯 파닥이는 이 여자에게 뉘엿이 서운한 거리감을 느끼지 않질 못하여, 그래 선뜻 무어라고 대답을 해줄 시름조차 없이 우두커니 등신처럼 앞만 바라다보며 앉았을 뿐이었었다.

밤은 몰래 깊어 가고…….

여자는 그러자, 죄었던 기운이 일시에 타악 풀어져서는 소스라치게 한숨을,

"그런데 말씀예요!"

하는 음성도 다뿍 하염없더니, 이내 그대로 몸을 갖다가 (생각도 주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실리듯 남자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는, 깍지 낀 손을 어깨에다 걸면서 가붓이 논다.

"네? 분상……."

"응!"

"그런데에 말씀예요!"

"……"

"왜 글쎄 사람은…… 사람은 왜, 생각허구 행하는 것허구가 제가끔 네……? 제가끔 두갈래 세갈래루 갈라져 가지구는 네……? 괜시리 괴롭구, 고생을 하구 다아 그러게만 마련이래요……? 네? 분상!"

"……"

"나 그거 해득해 줘예지 해요!"

"……"

대영은 벌써 마음이 도로 다 놓였고, 그리고 가득히 시방 솟아오르는 연민한 정으로 해서는, 얼른 다독다독 등을 다독거려 주면서,

'기미와 스쿠와레루! 낭에카와시도데나이! 이마니 스쿠와레루 기미와(너는 구조되겠군! 걱정하지 마! 이제 곧 구조될 거야 너는)…….'

하고 위로를 시켜 주면서, 하고픈 생각이 간절은 하나, 또 그렇게 하고 나면 어쩐지 여자를 다시금 저 멀리다가 느껴야 할 것만 같아, 차마 아까워 그리하지를 못한다.

"아하……."

여자는 한참 만에야 탄식 소리를 지으면서 몸을 도로 가누고 앉는다.

"……생각하믄 쓸디 있나! 아무렇게나 돼가는 대루, 그럭저럭……."

혼자 이렇게 뇌사리다가 급작스레,

"……아이, 시장해……! 몇 시나 됐어? 대체……."

하면서 팔걸이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라,

"아이머니! 세시야아……! 네? 분상……."

하고 대영의 팔을 잡아 흔든다.

"……세시가 다아 됐어요!"

"그렇게 됐나? 벌써……."

대영은 기지개를 뻗치려다가 말면서 벌떡 일어선다.

"분상 어떡허세요? 댁이 예서 머세요?"

"머나마나…… 스미코상이 인전 좀 자야 할 텐데 눈이 저렇게 초랑초랑해서 어떡허나!"

"전 일없어요……! 이렇게 늦어선 택시두 없대죠?"

"없지만, 머어……."

"댁이 머세요?"

"한 이십 리 되죠."

"저를 어째애……! 그럼 걸어가셔야 하게?"

"아―니……."

대영은 이 밤에 청량리 저쪽 회기정까지 터벅터벅 걸어서 나가잘(가정에의) 정성은 본디 없고, 늦으면 늘 하는 버릇대로 어디 여관이나 친구의 하숙을 찾아갈 생각이었었다.

하기야 오늘 같은 날은 아내가 해산을 한 터이고 하니 여느 때보다는 좀 다르다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아침나절에 고뿔쯤 앓고 누웠는 것을 보고 나온 푼수밖엔 더 마음 걸리는 것이 없었다.

"아―니가 뭐예요!"

여자는 성화에 얼굴을 찡그리고 마주 일어서면서,

"……차라리 예서 그럼 지무세요……! 전 이 소파에서 자구……."

"걸 뭘, 옹색스럽게!"

"아이 참, 나 좀 봐……! 댁에서 또 기대리시지? 부인께서…… 댁에 부인 기시죠?"

"명색이……."

"거 보죠……! 그러니깐 가서예지……! 그렇지만 또 어떻게 가시구……? 댁엔 부인 혼자 기세요?"

"요새 장모두 와서 있구, 뭣이냐……."

대영은 그 끝에, 아내가 오늘 해산을 했단 말을 하려던 것이나, 또 한바탕 걱정이 대단할 것 같아 짐짓 그만두고서,

"……그리구 난, 첨부터 버릇을 그렇게 딜여 놔서, 한 며칠씩 안 들어가구 해두 서루 이상이니깐…… 기대리지두 않는걸, 허허……! 그러니깐 글랑은 조곰두 염려 할라 마슈!"

"정말이세요?"

"거지뿌렁할 택이 있나!"

"부부간에 그렇기두 한가!"

"우린 예외야…… 내 아내란 위인이 아주 신경이 유들유들해서…… 그런데다가, 난 또 가정이란 걸 세탁소까지 겸한 여관으루 여기니……! 객담이지만, 사실 일년 가야 둘이서 다투는 법이라군 별반 없군요! 허허!"

"것두우……! 난두 좀 부인처럼 그렇게 유유했으믄!"

"지나 사람의 만만디처럼!"

"그러게 말씀예요!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두 꿈쩍두 않구……."

"잘못하다가 대포 탄환 줏으러 가게?"

"하하하……! 참, 정말 그럴까?"

"상증이겠지!"

"그런데 참, 댁엔 정말 염려 없으시겠다요?"

"응!"

"그럼, 예서 지무세요?"

"그럴 건 또 없어!"

"왜? 예절?"

"글쎄…… 결국 그런 비슷한 거겠지!"

"걱정 마세요……! 그리구 아무래두 묵은 책력이시믄서, 하하하!"

"옳아! 묵은 책력두 쓰이는 데가 있는 거루군!"

여자는 침대 밑으로 밀쳐 둔 큰 트렁크를 열고 털 푹신푹신한 담요를 꺼내서 소파에다가 안아다 놓는다.

"난, 예서 이거믄 되구우…… 또오 분상은 침대루 가시구…… 이불은 새루 사서 어제 하룻저녁 덮었어두 그대루 참구 견디세요, 네?"

"그럴 게 아니라, 이왕 그러면, 자아……."

대영은 여자를 침대로 데리고 가서 어깨를 눌러 따악 걸터앉혀 놓는다.

"……스미코상일랑 예서 제대루 편안히 자구……."

"쥔이?"

"날라컨 절러루 가서, 좀 비끼구 싶으면 비끼구……."

"손님이?"

"쥔이구 손님이란 예절루 보면 그렇다지만, 사내꼭지 된 도리루야 어디 그렇소? 여잘 고생시킨다는 것두 일이 아니구 또오 여자의 빈 침대엘 침노한다는 것두 멀쩡한 짓이구, 응?"

"선량두 하셔! 샌님매니네!"

"잠이 또 무슨 그대지 올 건 있나! 이야기나 조꼼 더 하다가, 쯧! 졸립거들랑 잠깐 눈을 붙이는 시늉 하는 거구, 오래잖아 인제 밝을 텐데……."

"참! 내일은? 내일은 어떡허구? 전 인전 영 혼자선, 혼자가 무서워서, 영 혼자선 못 견딜 것만 같은데!"

"푸욱신 자구, 오후에 절러루 오시구려?"

"오늘처럼 함끼 다니구, 함끼 있구, 그래 주실래요!"

"그야!"

"오라잇! 고맙습니다, 분상!"

여자는 고개를 까땍 좋아라고 연해 방싯방싯 웃다가,

"……또오, 모렌?"

"모레두……."

"글핀?"

"글피두?"

"또 그 댐은?"

"또 그렇구!"

"아― 인전 맘놨다……! 정말이죠오?"

"물론!"

"오라잇……! 그럼 내, 분상 시키시는 대루 하께, 네……? 자아, 절러루 가서 잠깐 돌아서세요."

"이건 좀 벌역인데!"

대영은 시키는 대로 창 앞으로 걸어가서 그 길에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내다본다.

희미해도, 눈은 아까 스미코가 하던 말따나 잘도 오고.

서서 문득 생각을 하니, 이건 어디서 이십 그 또래의 어린애도 아니요 먹을 나이 다 먹은 터에 이게 대체 무슨 치기며 무슨 청승인지, 여태도 이대도록 철이 안 들었던고, 사람이 이대도록 의젓하지가 못하던고 싶으면서 자꾸만 가소롭고 저 자신이 물끄러미 쳐다보여 못 하겠었다.

여자는, 들이비치는 침대의 휘장을 아물리고는 자리옷을 갈아입은 후 파자마를 가운 자락으로 여미면서 도로 나와 대롱대롱 변두리에 걸터앉는다.

"인전 다아 됐어요."

"응."

"일러루 오세요!"

"응."

"분상?"

"응?"

"아, 그렇게 샌님으루 선량하신 이가 말씀예요?"

"그래서?"

"어째 가정엔, 그러니깐 부인한테…… 부인한테 그대지 냉랭하세요?"

"냉랭하다기보담두 등한이지!"

"그럼, 등한이라구 하구……."

"만만하니깐…… 또오, 경황이 없구……."

"그건 선량이 아닌데?"

"스미코상?"

"네?"

"내가 언제까지구 스미코상한테 그렇게 소위 선량하겠거니 해선 파야!"

"아이, 어쩌나아……! 그럼, 앙― 하구 잡아 잡수시나?"

"그건 그때 가봐야 알지!"

"일러루 오세요! 돌아서서 그러지 마시구……."

대영은 비로소 몸을 돌이키고 천천히 걸어오면서, 옷 맵시 달라진 여자가 새삼스럽게 더 여자다워 보여 눈이 훨씬 흥그러웠다.

"또 이야기 들으세요, 네?"

"한꺼번에 죄다 해버리군 바닥이 나면 이 담은 어떡허나?"

"그땐 또 그때구……."

대영은 소파로 가서 비스듬히 앉고, 그걸 보더니 여자는 저도 쪼르르 내려와 나란히 같이 앉는다.

"멀구, 저만 높이 앉었으니깐 승거워!"

"좀 안 잘려우?"

"잠잘 시간을 안 자구서 살믄 생명의 확대가 아녜요……? 이, 모처럼 좋은 밤을!"

말은 이렇게 가끔가다가 도발적인 대목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얼굴을 보아야 지극히 심상하고…… 대영은 혹시 여자가 저보다도 한등 더 감정이 세련·침착된 때문이 아닌가도 싶었다.

5[편집]

새벽 바람에 잔뜩 웅숭크리고 집 문 앞으로 들어서다가 마침 빗자루를 들고 나오는 장모와 딱 마주쳤다.

"건 무슨 개짓이가 얘……!"

장모는, 반은 성이 나고 반은 웃으면서 단박 몰아세우던 것이다.

대영도 히죽 웃다 말고,

"첫국밥이나 잘 먹나요?"

"여니 때두 아니구…… 내가 던활 열 번두 더 했구나 얘!"

"순산했다면서 내가 없으면 좀 어떤가요?"

"데거? 하는 소리하구……! 에미네서껀 에미나이서껀 둘터 업구서, 고만에 피양으루 갈래다 말았시요! 하―두 밸이 나서……."

"제발 좀 그럭허시덜랑 않구……!"

"데거! 내가 건 업어다간 멜 하누? 헌에미네하구, 삐약삐약 우는 놈에 핏뎅이하구……."

대영은 속으로, 저 생억지와 천하 떡심에 만일 남자로만 태어났었다면 시방쯤, 요샛날 그 소위 '사회 브로커' 한몫 툽툽히 잘 해먹었으련 싶으면서, 다시금 장모 노파의 천생 뻔질한 얼굴이 물끄러미 쳐다보였다.

병풍으로 머리맡을 가린 산요의 아랫목에서 아내는 위아래 분간도 못 할 만큼 잔뜩 뭉뚱그린 어린것을 한옆에다가 위해 뉘고는, 산모답게 흐트러지고 지친 자세로 일어나 앉아 마악 국밥상을 받고 있었다.

대영은 어쩐지 서먹서먹하여, 들여다보듯 다뿍 고개를 내밀고 들어서고, 그 하고 들어서는 양이 하도 딱하던지 발자국 소리에 미리서 앞문을 올려다보고 있던 아내는 그만 실소를 해버린다.

그리고는 남편의 시선을 따라 어린것한테로 눈이 가다가, 또 한번 빙긋 하면서 고개를 떨어뜨린다.

겸손한 본능이랄까, 계집아이를 난 여자의 마음은 부질없이 남편에게 민망함이 섬뻑 앞을 서지 않지 못하던 것이다.

"괜찮우?"

"산파한테 되려 미아내서……."

"쯧! 다행히 걱정될 건 없겠지…… 너무 일찍 바람이나 쐬지 말구려!"

"국허구 진지가 뜨듯해 존데…… 좀 지무세요? 한술 뜨시구 나가세요?"

아내는 남편의 까칠하니 창백한 얼굴을 걱정스럽게 양미간을 찡그린다.

"글쎄……."

대영은 망설이면서, 품에서 시계를 꺼내 본다. 여덟시가 지났고…….

간밤에 네시가 다 되어서야 편안찮은 소파에서 두어 시간 눈을 붙였을 뿐, 그래 가뜩이나 골치가 무겁고 몸이 찌뿌둥한 깐으로 해서는 푹신 한잠 잤으면 하겠는데, 일변 사의 일이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하나도 정성이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늘 보다 더 잘 하고 싶은, 보다 좋게 하고 싶은 욕심과 애착으로 부절히 거기에 주의가 끌리고 애가 쓰이고 함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가 보아야겠어!"

대영은 거처인 건넌방으로 건너가려고 돌아서서 미닫이를 연다.

"좀 누셨다가 나가서예지, 어떡허시우?"

"괜찮아!"

"약주 잡섰수?"

"응…… 아―니……."

"어머니더러 무어 얼큰한 국물을 좀 만들어 주시라구 한다는 게, 깜박 고만 잊어버려서!"

대영은 안방을 나와 마루를 건너가면서,

'선량한 아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끝에는,

'너무 선량한 아내!'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러다가 마지막,

'나한테는 차라리 짐스러운 아내의 선량……! 순산을 해서 산파에게 미안하듯이, 다행이 도리어 걱정이 되는 것처럼.'

하고 쓰디쓰게 혼자 웃는다.

지난밤 스미코에게 약속한 소치의 모란 족자를 잊지 않고서 신문지에 뚤뚤 말아 옆에 끼고 나온 것이, 사엘 당도하니 그럭저럭 열시가 훨씬 지났고, 교정은 기가 딱 질리게 쌓여 있었다.

흥분제를 한꺼번에 두어 봉 털어 넘기고는 부지런히 준을 한참 보고 있는데, 전화를 돌려 주어서, 혹시 스미콘가 하고 받자니까, 전달부터 졸리던 ××사의 소설 재촉이었었다.

못 썼노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쓸 가망이 없노라고 지지리 졸리며 승강을 하며 하다가, 피차간 끝장은 못 낸 채 전화를 끊는데, 김이 말긋말긋 돌려다보고 하더니,

"문선생, 인전 소설 영 안 쓰세요?"

하면서 졸연찮이 이야기를 하잔다.

"좀처럼!"

"왜 그러세요? 무슨 이유루다가……."

"아무 이유두 없는 이유……."

"내, 온……! 그럭허시믄 어떡허세요!"

"밥벌일 한다는 게 소설을 쓰는 이유의 구십 프로를 더 차지한 적이 많았는데…… 아 우선 당분간 월급 수입이 있으니 양식 걱정은 없겠다…… 소설 쓸 내력 도저히 없지!"

"큰일 아녜요?"

"무엇이?"

"우선 문단이……."

"별……! 중 하나 없다구 재 못 지내나……? 항차, 염불두 염불답게 못 하는 중, 없어두 고만인 중……."

"하나씩 둘씩 자꾸만 그래 가믄 나중엔 어떡허나요?"

"죄다가 그럴 이치두 절대루 없구…… 허긴 중 다아 없어져서 차라리 재 안 올리는 게 좋지……! 펄프가, 문학 아니래두 쓰일 곳이 긴한 이 판국에 말야……."

"정말 큰일날 소리 하시네!"

"아―니, 문선생 대체 무슨 이유요?"

듣고만 있던 박이, 답답하다고 저도 거들고 나서던 것이다.

"이유 없는 이유래두!"

"하아! 그리 말고오……! 좀, 그 심경 좀 들읍시다!"

"단 한마디루, 응……? 내가 어디루 가버리구 없는데, 누가 문학은 하나?"

"건 궤변이오! 어데 그기 이론이 성립이 되오?"

"박군?"

"예?"

"짐은 즉 법이니라구 고함친 루이 14세의 말따나, 사실 즉 이론일 수는 없을까?"

"사실하고 이론하고는 다르지 않소?"

"거! 지당한 말야!"

대영은 왼손으로 턱을 괴고, 펜대를 거꾸로 테이블 복판을 또옥똑 치면서,

"……그러면 사실에서 이론을 발견할 수는 있겠다?"

"그기야 물론!"

하나가 하품을 내면 온 방 안이 죄다 하품을 한다는 푼수로, 박은 그리고 김도 어느덧 다 같이 대영의 자세처럼 청승맞게 얼굴을 되들어 턱을 치받치고는 오도카니들 이편을 바라다보고 앉았다.

사동은 그래서 혼자서 히죽히죽 웃으며 구경을 하고 있고.

"난 그래요……."

대영은 차근히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여,

"……박군 말짝으루, 그게 궤변이라구 해두 좋아요! 내가 어디루 가구 없단 소리가 말이지…… 또오, 아니라구 변명을 하구 싶지두 않구…… 그런데 말이지, 그 궤변을 갖다가 한 개의 사실루 볼 수는 있을 테었다? 그렇잖아?"

둘이는 못 알아듣고서 눈만 깜작깜작 생각을 해쌓는다.

"……그 뜻 몰라……? 문대영이라구 하는 사람의, 그와 같이 궤변적인 인식태도…… 태도 그것만은 한 실재가 아냐……? 물론 불건강이야 하지…… 그렇지만, 저 뭣이냐, 절름발이가 병신은 병신이래두 병신인 것 그것이 버젓이 독립한 한 개의 가치, 즉 사실이듯이……."

둘이는 그제야 알았노라고 연해 고개를 끄덕거리고, 대영은 다음을 다시,

"……그러니깐 말이지…… 그걸 갖다가 한 개의 사실루 일단 승인을 하구서, 응……? 승인을 한 이상, 거기서 이론을 발견을 해야 않소……? 구태라 내 설명을 요구하자구 들 것이 아니라, 또오 설명을 들었자 노형네들의 생리엔 맞질 않는, 역시 궤변적인 결론일 테니깐…… 그러니깐 노형네들 스스로가 노형네들 독자의 결론을, 응……? 궤변적인 것, 불건강한 것 그것을 놓구서 말야…… 뭣이냐, 노형네들은 오늘날의 사실적인 현실의 담당자인만치 벌써, 이 문대영이의 인식태도를 병적이요 궤변이라구 보질 않소? 그것까지는 좋아……! 그렇지만 사실을 갖다가 사실대루만 보구, 사실대루만 받아들여선 못쓰는 법이거든! 그건 학문적으루는 상식의 노예요, 생활적으루는 천박한 모리배(謀利輩)의 짓이지 적어두 세대의 소위 담당자루 앉아서 감히 취할 길은 아니거든!"

대영은 퍼뜩, 말이 너무 박절하게 된 것 같아, 또 탈선도 되었고 해서 짐짓 중단을 하고는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문다.

그리고는 훨씬 신경을 가라앉혀 가지고 나서 다시,

"……이야기가 고만 탈선이 돼서…… 그런데 저 뭣이냐, 내지 사람들 중세기의 사무라이네가 셉부쿠하는 거 있잖소? 그 셉부쿠가 그런데, 약간 그저 배나 가르구 자살이나 하는, 단지 생리적 수단만인 줄 알아두 실상 그게 큰 정신의 힘이야! 큰…… 그리구 그 정신이 그대루 흘러내려와서, 지금 오늘날 일본 민족의 장한 민족정신을 갖다가 형성한 게어든…… 아, 저 거시키 우리 일본 군인으루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루 잽히는 일이라군 별반 없잖소……? 이번 지나사변만 보더래두, 가령 적진으루 공폭을 가다가던지 혹은 돌아오는 길이던지, 만약 비행기에 고장 같은 것이 생겨서 불시착륙을 해야 할 경우다 치면 고만 자폭을 해버리구 만다! 응……? 그게 무어냐 하면, 중난한 무기와 더불어 적병한테 구차스럽게, 구차스럽게 말야, 포로가 되질 않겠다는 용기요, 즉 일본 군인의 정신이 아니겠소……? 그리구 그 배후를 더 캐구 보기루 하면, 비행기에 고장이 생겼다는 건 곧 전투력을 잃어버린 것인데, 군인으루 전쟁에 나왔다가 전투력을 잃어버린 이상 그는 전장에 임한 군인으루서의 생명과 의의를 따라서 잃어버린 게 아니겠소? 그리구는 남은 거라군 군인 된 생명두 의의두 없는 단지 육체와 포로의 치욕……! 그러니까 구차스럽게, 생명두 의의두 없는 고깃뎅일 위해 구차스럽게, 포로의 치욕을 받지 않으려구 자폭을 해버리구…… 그러나 그것은 단지 구차한 치욕을 면하는 데만 근치는 게 아니라, 그와 같이 자폭을 함으로써 전장에 임한 군인의 생명과 의의를, 그러니깐 절개랄 수두 있는데…… 그걸 일단 더 강조하는 게거든……."

대영은 불 꺼져 가는 담배를 뻐억뻑 한참이나 맛있게 빨고 있다가 나직이 음성을 고쳐,

"……구차할 며린 없어! 구차할 며린 없어……! 규각(規角)이라구 않나? 각(角)에다가 원(圓)을 씌우자구 드는 건, 저 스스로는 어리석은 짓이요, 세상에 대해선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되는 거야…… 그 세댈랑 그 세대의 담당자한테 맺기구서 가만히 그대루 죽은 듯기 앉었으면 구차스럽지 않구, 세상에 사폐 끼치지 않구, 두루 좋잖아……? 그런 걸 왜? 무슨 망령으루……? 뭣이냐, 비유가 꼬옥 적절하던 않애두 마침 생각이 난 길에 이야긴데, 아따 저 ×××씨!"

대영은 빙그레 웃고, 김·박 둘이도 벌써 알아채고서 같이서 웃는다.

"그 양반이 한때, 신문에다가 명색 소설이랍시구 천하 괴상망칙한 물건을 몇 번 연재한 일이 있잖소?"

"××?"

"○○?"

김과 박은 ×××씨의 소설 이름을 하나씩, 제각기 외운다.

"그러니 글쎄, 그게 무슨 주접이요. 망신이냔 말야……! 허긴 그 뒤에 듣자니깐 생활이 궁해서 한 노릇이라는 가십이 있길래, 한 숟갈의 동정을 애끼지 않었소마는…… 뿐만 아니라, 요새는 가만히 생각을 하자니깐, 그게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단 말야! 도저히…… 허허!"

대영은 마지막 서글픈 웃음을 한번 웃고 나더니,

"……자아, 인전 쉬……! 막설하구서, 교정! 교정!"

하면서 제가 먼저 일을 바싹 차고 앉는다.

마침 그럴 즈음 문이 펄쩍 열리더니 김종호가 커다란 덕집을 쑥 들이민다.

옆에다가는 핸드백을 끼고, 대단히 바빴던 모양, 숨을 허얼헐, 얼굴엔 그득하니 웃음을 헤뜨리면서, 문을 뒤로 탕 닫으면서, 모자를 벗으면서 꾸뻑,

"문선생, 굿모닝!"

하고 외치면서, 연달아 김과 박더러도 한번씩 꾸뻑, 안녕헙쇼! 꾸뻑 안녕헙쇼!

대영은 뜨윽해서 내키잖게,

"안녕하슈?"

할 뿐 앉은 채 일이 바쁜 시늉을 하는데, 그런 건 다 거리껴할 며리도 없이,

"문선생, 스미코 만나셨어요?"

하면서 쭈르르 옆으로 쫓아온다.

"네, 어제…… 찾아왔드군요……."

"거, 잘했군요!"

김종호는 거진 테이블 모서리에 걸터앉을 만큼(키가 커놔서) 남 답답하라고 그들먹하니 옆을 가로막고 서서는 수작이 나오기 시작한다.

"……거 좀, 자알 지도두 하구 그래 주세요!"

"글쎄……."

"아, 우릴 바라구, 또 우릴 위해설랑 멀리 찾아온 사람인데…… 거 고마운 일 아녜요……? 그러니깐 우리가 다아 참, 진심으루 환영을 하구 대접에 유감이 없어야만…… 그리구 그러자면 문선생 같은 분이 솔선해서 다아……."

솔직히, 이편을 믿거라고 하는 소리거니 하면 대영은 금세 어깨가 옴츠러들고, 수그린 뒤통수가 간지러워 못하겠었다.

미상불 드러내 놓고 말하기로 하면 김종호란 이 사람을, 항상 떠들고 인찌끼하고 쌍스럽고 하대서 경멸을 한다지만, 그가 (분명) 어떤 야심과 더불어 또는 영화 제작이며 그 선전에 여자를 이용까지 해먹고 하려고 들세나…….

일껏 믿는 마음에 지도를 해달라고 데리고 와 맡기다시피 한 노릇쯤 된 그 여자를 갖다가, 어느새 뒷줄로 정복을 하며 있는 대영 저 자신일세나…….

어쩐지 일이 좀 떳떳하지가, 점잖지가 못한 것 같아 은연중 한 팔이 결리고 민망한 생각이 듦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제자와 배가 맞아 연애 도망을 빼는, 여학교의 남선생다운 몰염치한 짓인 것도 같아서…….

"그러니깐 말씀이지……."

김종호는 연해 (속없이) 흠선을 피우면서, 건사를 피우면서,

"……그러니깐 너무 범연히 구지 마시구, 네……? 잘 좀 지도두 하시구…… 네? 문선생……."

"지도를 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천만에 겸사의 말씀을……! 그리구 내가 통 바뻐서 도무지 그럴 새가 없는데, 거 문선생이래두 우선, 응? 박물관 같은 데랑, 또오 명승고적이랑, 틈 나시는 대루 구경을 시켜 주세요."

"글쎄…… 그 사람이 관광단이 아니구, 또 내가 투어리스트 뷰로가 아닌 바에야, 머어……."

"그건 그렇잖죠! 그 사람은 무엇보다두 우선 조선의 고적과 그리구 자연을 만끽할 필요가 있으니깐……."

"……"

"건, 그렇구우…… 그런데, 문선생?"

"네에."

"저―어……."

"말씀하세요!"

"저어, 문선생한테 꼬옥 한 가지 소청이 있어엉!"

"눈깔사탕 사달래는 애기 소리 같구려?"

대영은 그제야 고개를 쳐들고, 방 안에는 재그르르 웃음이 터진다. 그 중에서도 김종호의 너털웃음이, 맨 크고 맨 오래 간 것은 물론이고.

"다른 게 아니라, 문선생?"

"말씀하시래두!"

춘추》이번 신년호에다가, 응……? 요전날 말씀하던 시나리오를 좀 실려 주시라구……."

"시나리오?"

"네에…… 내가 이번에 만들 작품인데, 요전에두 말씀했지? '청춘아 왜 우느냐!'라구…… 스미코두 찬조출연을 하구…… 아, 요새 그걸 쓰느라구, 꼬바기 매달려선 오늘야 겨우……."

"글쎄…… 우리 잡지엔 그 시나리오라구 하는 문명한 물건이, 좀……."

"불가해요?"

"불가하달까, 외람하달까……."

"그래두 각본은 가끔 실리잖어요?"

"희곡은, 극문학으루 이미 완성된 문학의 한 장르니깐 그야……."

"그럼? 시나리오 문학은 문학이 아닌가요?"

"당장 가치를 인정할 만한 예외의 특출품이 있다면 임시루 가승인을 해두 좋지만…… 조선의 시나리오는 원고지에서 아직 좀더 자라야지……! 그렇잖소? 이 김주사……."

대영은 걸상 얼러 몸을 뒤로 버얼떡 젖히면서, 시무룩해 섰는 나그네를 빙긋이 올려다보다가,

"……시나리오가 문명은 했는지 몰라두, 문명만 가지군 좀…… 양반이 되자면 훨씬 문학적 세련과 훈도를 받아야……."

"난 그런 까다라운 이론보담두, 아 선전을 좀 해예죠? 선전을……."

"삐라를 박아 돌리지!"

"내, 온!"

"신문에 광고루 연잴 하던지?"

"놀리려구만 드셔!"

"토키 하나에 일만이천 원이니 일만오천 원이니 딜이면서, 그 비용쯤……."

"어떡허실래요?"

"요새, 영화전문잡지두 하나 생겼나 보던데? 또오, 취미잡지에서두 환영을 할 테구……."

"권위가 있어예죠!"

"하는 소리가……! 괜히, 그 사람네한테 몽둥이 맞일 양으루…… 독자가 그리구 얼마나 더 많다구!"

"수만 많으믄 무얼 해요? 너줄한 저급독자!"

"옳아……!《춘추》독자는 고급이구?"

"날더러 왜 물으슈?"

"그래,《춘추》독자는 고급이라구 하구…… 그래, 그 고급독자들이 조선의 시방, 시나리오니 또 영화 그 자체를 문제시라두 하는 줄 아시오?"

"그러니깐들 잘못이라는 거예요……! 아, 문선생부터두 왜 영활 갖다가 적극적으루 지질 안 해주세요? 다 같은 예술운동에……."

"여보 김주사?"

"주산!"

"저기,『추월색』이니『강상미인』이니, 그런 걸 만들어 파는 책장사가, 왜 이것두 예술인데 문단이나 사회에서 통히 지지를 안 해준다구 두덜거린다면, 거 어떻겠소?"

"아무려면 그래, 조선 영화가『추월색』이나『강상미인』그 따위밖엔 안 된단 말씀이슈?"

"저렇게 디리 아니라구 우기면서, 저급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백년을 가야 그 이상엣것은 못 만들어요…… 브레인이 그렇게 가난해 놔서, 조선 영화의 향상 향상 하지만 결국은 기술이나 능란해질 뿐이지, 갈 곳이라군 아메리카의 쌍놈영화가 되는 것밖엔 없어요!"

"관중은 있거나 없거나……? 판판 밑져 가믄서……? 그런 장사에 누가 돈을 대요?"

"나운규의 '오몽녀'가 '강건너 마을'보다두 더 밑졌단 소릴 못 들은걸……? 간밤에 '뿔그극장'을 보러 갔더니 조선 사람이 삼분지 이는 되나 봅디다? 초만원인데…… 영화 '무정'이 원작이 나뻐서 실패했나? 원작을 잘 살려 가지구 연극은 하니까 만원이데?"

"고만두슈! 다아……."

"듣기 싫여두 가만 좀 있어! 이 김주사…… 백성들에게 마음의 양식을 주는 데 영화만침 좋은 것이 다신 더 없어요! 문학이니 연극이니쯤 어림없지……! 그렇건만서두 시방까지의 조선 영화는 너무 불초했어……! 기술이 아직 유치했으니까 충분히 그게 노현은 못 된다구 하더래두, 적어두 그러고자 하는, 즉 백성에게 마음의 양식을 주고자 하는 의욕…… 지향…… 그것이 전혀 없었거든……! 팔이 짧어서 주던 못 할 값에 내밀긴 했어야 할 건데, 내밀 생각두 안 했다……! 그러니깐 조선 영화는 백성들한테 배임을 한 셈이구, 배임의 형벌 대신 이렇게 악담을 좀 들어야 해……! 알겠소?"

"몰라요……! 갑니다아, 안녕히 기슈우……."

풀이 죽어 돌아서서 흐느적흐느적 나가고 있는 양이 우습기도 하려니와 어쩐지 측은하기도 했다.

그 끝에 머리를 짚고 생각했다.

사람이란 사귈 나름 보기 나름이지, 저 김종호만 하더라도 천하 무도한 악당인 바 아니요, 차라리 심약하고 호인다운 한구석이 없지 못한 것을, 부질없이 경멸을 하고 미워를 하고 함은 오로지 나의 비뚤어진 심성의 탓이 아니던가…….

이렇듯 곰곰이 자성을 하는, 일종 회오의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오후가 되어 하마 세시.

스미코한테서는 꼭이 시간을 정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태 웬일인지 전화도 없고 아직 찾아오지도 않았고, 그래 적이 궁금했고…….

그러자 공굘시, 신년호 거리로 인터뷰를 온 신문사의 학예부 친구에게 근처의 다방으로 붙잡혀 나가 그럭저럭 한 시간 가까이 한담서껀 이야기가 장황했다가 다시 돌아와 보니, 그 동안 여자는 마침 다녀갔었다. 한 삼십 분 혼자서 앉아 기다리더라고.

또 오든지 전화를 걸든지 하겠거니 했으나, 훨씬 다섯시가 지나서 퇴사를 하도록 종시 소식이 없었다.

소치의 모란 족자를 아침에 들어올 때처럼 해서 끼고 바람만 바람만 아파트까지 가본 것이, 십상 그러련 했었지만 역시 방문은 잠겼었다.

명함을 한 장 문 밑 틈사구니로 들이밀고는 족자는 손이 주체스럽겠어서 아파트의 관리인더러 ×호실에 전해 달라고 맡겨 둔 후, 일단 그곳을 나와 본정통으로 향했다.

헌책점을 주욱 더듬어 마루젠까지 갔다가, 그 길에 명과의 쌉싸름한 커피를 한잔 천천히 마신 다음, 재차 여자의 아파트엘 들러 보았다.

방문은 그러나 여전히 잠겼고.

거진 여덟시가 되었고.

다시 다방이라도 가서 기다리다가 한번 더 오든지, 메신저를 보내든지 했으면 하는 생각이 일변 없잖아 있었으나, 그래 잠깐 서서 망설여 보았으나, 당장 몸이 많이 피곤했고, 만나면 자연 또 밤을 밝히다시피 하겠으니 무리가 과할 것 같기도 하고 하여, 마침내 두어 자 글발을 적은 명함만 새로이 아까처럼 밀어 넣고는 좀 섭섭한 대로 발길을 돌려 놓았다.

이튿날은 일찌감치, 열시가 조금 지나선데…….

사동이, 내지인 하라상이란다면서 받아 넘겨 주는 전화를, 그래 미리 국어로, 그러나 옆이 조심이 되어,

"스미코상이신가요? 나 문이올시다."

하고 정중히 대답을 하노라니까, 저편에서는 그만 급해,

"마아! 야토 스카마에타와, 분상오(어마! 겨우 통했군요, 분상)……."

하면서 좋아하는 양이 선연히 보이게 반기던 것이다.

그러고는 연달아 응석을,

"……데모 히도이와, 분상다라(그렇지만 너무해, 분상)!"

"미안했습니다, 어젠 참……."

"왜, 말씀이 쩨가 좀 별나!"

"으응, 머어…… 시방 전화 어디서 하시나요?"

"바루 그 앞 공중전화…… 오오, 참! 인제 알았어……! 그렇지만 전 이 공중전화니깐 좀 까불어두 괜찮죠?"

"찡기리구 있느니보담은……! 그런데, 어떻게? 지금 일러루 오시겠어요?"

"가두 괜찮아요?"

"그야……! 그렇지만 내가 틈이 나자면 아무래두 오후 네시 다섯시 이후래야겠는데, 그러니깐 제아무리 조선 기모치를 배우는 것두 좋지만, 어디 온종일 남의 입허구 눈치허구만 치어다보구 앉었는 수야 있다구요?"

"그러게!"

"그러니까 인제루부터 한 댓 시간 영화구경이라두 하든지, 바루 그 옆이니 덕수궁에 들러서 그림을 보든지……."

"그럼, 지가 좋두룩 하구서, 이따가 오후에 갈까요……? 몇 시쯤?"

"네시나 다섯시……."

"그럼 그럭허기루 하구…… 그렇지만, 야단났어요!"

"왜?"

"시간 보내기가……! 어제 하룻낮 하룻밤에 벌써 고만 넌덜머리가 났어요! 지리하구 답답해 곧 죽을 것 같은걸……! 그러니 그게 어제뿐이며, 또 오늘뿐일세 말이죠!"

"거, 정말 야단 아닌가!"

대영은 일이 자못 딱하기는 했으나, 전들 당장 (당장이나마나) 어떻게 하잘 도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하루 이틀이 아니고…….

그런데 실상은 그것이, 즉 혼자서 시간 지우는 고통을 여자가 능히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는 그 사실이, 앞으로 장차에는 다른 어떤 중대한 사태를 갖다가 빚어 낼 태반인 것이었었다.

하나, 당자 스미코도 그러했지만, 대영은 물론 일 그 자체가 딱한것으로 곤란을 느끼는 데 그쳤을 따름이지, 이상 발전될 사태에까지는 생각이 미칠 겨를은 미처 없었다.

"아, 어제두 말씀예요!"

여자는 비로소 어저께의 소경사를 이야기하느라고,

"……아, 잠이 다시 깨보니깐 오정이길래, 이내 나가서 점심 조반 얼러 요길 좀 하구는……."

"전화라두 미리서 거시들랑 않구서!"

"곧 갈 양으루 그랬죠……! 그래, 나온 길에 애프터눈을 한벌 맞출까 하구서 가네보오엘 들렀다가…… 아이 참! 어제 거기서 천을 몇 가지 봐놨으니깐, 이따가 함끼 가시서 분상이 골라 주세예지 해요?"

"쯧! 아무리나…… 그렇지만 내가 그 방면엔 눈이 도무지 무식해서……."

"좋아요, 그러셔두…… 아, 그리군 세시가 다아 됐길래 부랴부랴 전찰 타구 쫓아갔더니 금방 나가셨다는군!"

그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여자는 어제 그 길로 거리엘 나갔다가 마침 김종호를 만나, 다방으로 같이 들어가서는 여섯시까지, 그 이번에 제작한다는 영화의 대본 내용을 이야기 들었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놓여 나와 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나오지를 않고, 일곱시쯤 아파트에 돌아가 보았더니 명함이 있고, 그래 진득이 앉아 기다리지를 못하고서 도로 나와서는 행방도 없이 찾아다니다가, 또 가보았더니 또 명함만 있고 한데 그제는 잘 자란 말이 적혔고, 그만 안타까워서 가뜩이나 밤새껏 한잠도 못 잤다는 것이다.

족자는 그리고, 조금 아까 잘 받았노라고.

대영은 아무튼지 미안했으니 그 대신 이따가 오면 눈물이 나도록 맛있는 고지소오를 하마고 이르고서 전화를 끊었다.

약속한 시간대로 네시 반 가량 해서 스미코는 찾아왔었고, 얼마 동안 기다리게 앉혀 두었다가, 김과 박 두 사람까지 같이 데리고 사를 나섰다.

무얼 대접하려면서 여자만 따가지고 나오기도 민망했거니와, 또 서로 주축을 하도록 가까이할 기회를 주고도 싶었던 것이다.

데리고는 나섰으나, 막상 생각하니 발길을 두르고 갈 곳이 막연했다.

아까 전화로는 눈물이 나도록 맛있는 고지소오라고 했고, 시방은 와서 무어냐고 자꾸만 물어 싸서, 입으로 조선 기모치를 배우게 해주마고 했고, 그러니 조선 음식을 대접해야 할 판인데 그게 도무지 어중떴다.

설렁탕이나 비빔밥이나 또 상밥집이며 목롯집은 그 조선 기모치가 너무 지독하니 (아직) 이르고.

요릿집은 너무 크고, 또 크기나 할 따름이지 특별 맞춤상은 혹시 몰라도, 진소위 논메강경이는 은진미륵으로 꾸려 가고 과붓집 종놈은 왕방울로 한몫 본다듯이, 요즈막 조선 요릿집의 음식이란 게, 명색 신선로 하나가 (그것도 알고 보면 내용보다 외관―---그릇이 더) 조선 음식이랍시고 잔명을 지탱할 뿐, 그 밖엔 흡사 만국 요리의 빈약한 성관을 발휘하는 괴물인 걸, 하니 본의도 아닌 터에 돈 낭비하면서 애꿎은 미각의 노스탤지어를 탐하잘 며리는 없고.

집에는 동치미가 마악 맛이 들고 배추김치 또한 으수했으나, 여자들을 그토록까지 노둔하게 모욕할 수는 없고.

그리고는 겨우 화신의 조선 정식이라고 하는 것이 남는데, 촌 쟁퉁이처럼 그 야단스런 걸 그들먹하니 차고 앉아 먹어 대기란 약한 비위론 못 할 짓이지만, 그저 초학 방예하는 셈 잡고서 그놈 신세를 지는 게 유일한 방책일 것 같았다.

네거리를 향해 걸어가면서 곰곰 생각하자니, 무슨 그리 푸달진 재산이라고 구태여 자랑을 한다거나 생색을 낼 염량은 추호도 없는 것이지만, 막부득이한 경우에 타방의 손을 위하여 제 맛을 지닌 음식 한 끼 변변히 대접할 주제도 못 되는가 하면, 한심하기는새레, 몰골들이 오히려 고소했다.

약속이, 눈물이 나도록 맛있는 고지소오이던 고로, 속는 줄을 모르고서 시키는 대로 우선 맨입에다가 그 지독한 깍두기를 냄새조차 참아 가며 한 젓갈 덥석 물었고…….

뻐언한 노릇이지, 단박 눈물이 핑―

"히도이와! 히도이와(너무해! 너무해)!"

하고 원망을 해싸면서, 그렇다고 체모에 얼른 도로 뱉지도 못하고 그대로 먹잔즉슨 입 안이 시베리아 같고, 그래 꼼짝수없이 한동안 고생을 하여 좌석은 덕분에 한 흥을 얻었고.

저녁을 마친 후 다시 일행은 훨씬 돌아다니며 혹은 음악 좋은 집의 차도 마시며 심심찮이 놀았고, 마지막 두 친구에게는 바래다준다는 명목으로 혼자서 여자와 더불어 아파트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소치의 모란 족자가 자못 어색히 걸려 있고, 경대는 뻬삐, 과실이 큰 접시에 소담했고, 그리고 포도주가 조금도 굻지 않고서 반 병 그대로 있는 게 어쩐지 여자가 무던한 것 같아 마음 믿음직스러웠다.

전번처럼은 이야기가 많진 못했으나, 그래도 세시 그 무렵에야 제각기 제 자리에서 조금씩 잠이라고 자는 시늉을 했고.

새벽에 헤어지면서는 미리서, 이따가 석양 때 만날 시간과 장소가 잘 서로 언약이 되었었다.

한 것을 대영이 그만 실없어 버렸다.

집으로 나가 일껏 정신이 들라고 말끔히 소쇄를 마치고는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마악 조반을 한술 뜨노라니까, 아니나다를까 차차로 사족이 맥이 풀려 오더니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피로가 쏟아지면서 밥이고 무엇이고 필경 수저 하나 들었다 놓았다 하기조차 대견했다.

게다가 일변, 감기 기운인지 몸살이 나려는지 등골이 오싹오싹 아예 좋지가 않고…….

아내의 걱정과 권이 아니라도 영 또 배겨날 것 같지가 않아, 한 두어 시간 요량을 하고서 자리에 드러누웠다. 한 것이 온종일 날이 저물어 전깃불이 켜질 때까지 내처 그대로 일지를 못했다. 그러면서 자다가, 이뭉자뭉하다가, 열이 있어서 절로 앓는 소리가 제법 나와지곤 했고…….

어두워서야 조금 정신이 들기는 했지만, 한번 눕기가 망정이지, 몸은 눌어붙은 듯 무거운데 그 모양을 하고서 가뜩이나 이 밤중에 찬바람을 쏘여 가며 기동을 할 강단은 도저히 날 수가 없었다.

전보가 되었거나 속달이 되었거나 무어라고 기별이라도 좀 해는 주어야 하겠는데, 그것 역시 장모 마나님밖엔 손대가 없는 걸, 우편소는 초원하겠다 어둔 밤길에 그 심부름을 시키자니 막상 못 할 노릇이었었다.

이튿날도 몸이 별양 가볍지가 않았으나, 그래 무리인 줄은 알면서도 두루 궁금하여 오정 후 한시쯤 해서 사에로 나와 보았다.

전화가 여러 차례 왔다는 전갈이고, 우선 안심이나 하도록 메신저에게 몇 자 사연을 적어 보냈더니 방문이 잠겼더라면서 되가지고 왔고.

마침 병수가 부우옇게 달려들더니 거 보라고, 혼자만 다니면서 술을 먹으니깐 그 벌로다가 주독이 나설랑 그렇게 욕을 보는 법이니라고, 그리고 어제 저녁에 꼭 망년회를 하쟀던 것이 형님이 안 나와서 못 했는데, 오늘은 천하없어도 해야 한다고, 바싹 서둘러 대고…….

대영이 찔끔하여 제발 오늘만 살려 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을, 그러면 하루만 더 용서를 하지야고, 그러고는 다시 꼼짝달싹 못 하게 해놔야 한다면서 당장 선 자리에서 저어 멀리 시외에 있는 요정에다가 전화를 걸어, 말끔 다 분별을 시키는 것이었었다. 밤늦게 놀자면 시외라야 하고, 또 설경이 좋지 않으냐면서…….

대영은 제 말따나 많이는 못 해도 쑬쑬히 애주를 하는 터라, 언제고 술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었다.

겸하여 병수랄지, 김이나 박이랄지, 나이들은 어려도 술자리에 임하는 법도하며 술 뒤끝이 쌍스럽지가 않아 종종들 한집안 식구끼리서 얼려 가지고는 조용한 처소를 골라 가무 좋은 기녀나 택해서 은근히 한밤씩을 놀곤 한다 치면,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었다.

하던 것이 여자 스미코가 머릿속에 들앉아 있어 가지고 줄곧 그리로 정신이 쓰인다, 시간을 대부분 떼어 바쳐야 한다, 여승 바가지 몹시 긁는 마누라한테 늘 부대껴 지내는 남편처럼 압박을 느끼고 술이 조심이 되고 하는 것이었었다.

🙝 🙟

막상 나와 앉아서 기다리는 데는 또 까마득하니 소식이 없고, 기위 사엔 나온 길이라 한참 바쁘기도 하겠다, 열이 오르며 찌뿌드한 것을 참아 가면서 그럭저럭 저물게까지 일을 거들고 하는 시늉을 했고.

그리고 나서 아파트로 찾아가 보았으나 방문은 종시 잠겨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 깐으로 하면 이내 돌아가서 눕든지 조리를 하든지했어야 할 것이었었다.

그러나 한번 드러누운 게 불찰이요, 용이히 나아지질 않던 것과 마찬가지로 늘 밖에 나돌아다니던 사람이겠다, 일단 나오기가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나온 이상에야 웬만한 감기나 몸살이 조심이 되어 냉큼 발길을 돌이키도록은 어려운 계제이었었다.

고의는 아니었을 값에, 그새 꼬박이 이틀 동안이나 모른 체 내던져 두었으니, 단 한 시간도 부지를 못해하는 판인 걸 무던히 구박을 한 셈쯤 되었고, 또 그 소위 보고도 싶었고…….

명함에다가 다시 곧 올게시니 나가지 말고서 기다리고 있으란 글발을 적어 들이민 뒤에, 요전날처럼 본정통으로 가서는 역시 요전날처럼 책점을 뒤지고 차를 마시고 했다.

그러나 되돌아나오다가는 무어나 강렬한 놈으로 서너 잔 했으면 몸과 기분이 다 같이 피어날 것만 같아, 혼자서 몰풍치한 대로 취인소 근처의 가끔 더러 다니던 한 집을 들른 것이 그만, 수야니 모야니 문단 방면의 평소 임의로운 일당을 만나고 말았다.

싫지 않은 친구들을, 겸하여 술자리에서 쭈뻑 만났으니, 계집이 기다리는 경황은 아무려나 한옆으로 젖혀 놓아도 무방했고…….

다 같이 심술깨나 있는 패들인데 술이란 만만한 물건이겠다, 조옴들 했나, 상제 귀를 가리며 시끄럽구나! 할 지경이었고, 자연 자리는 짧지가 않아 자정이 가까워서야 파하고 헤어졌고…….

대영은 술이 (꾀를 했기 때문에) 취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약간 거나하여 혼자 비어져서 겨우 아파트로 여자를 찾아갔다.

노크는 미처, 몇 번 잠겼던 가늠만 여겨 무심코 먼저 손잡이를 쥐고 당겨 본 것이 힘없이 절로 돌면서 여세엔 문까지 펄쩍 열어졌다.

그대로 밀치고 불쑥, 문턱 안으로 들어설밖에…….

여자는 그러자 외투야 모자야 구두야 모두 외출을 했던 채, 눈꺼풀이 또 완구히 보숙보숙해, 오도카니 (기다리고) 앉았던 소파 귀퉁이에서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서다가 일순간 맥이 타악 죄다 풀리는지, 펄씬 도로 주저앉으면서 금세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하고는, 그러면서도 눈은 남자의 조용히 앞으로 걸어와 바투서 허리를 꾸부리고 (깨꾸우는 아니라도) 어르듯 들여다보아 주는 얼굴을 이내 빠꼼 마주 올려다보며 놓치지 않다가, 이윽고 무령하디무령하게 한마디,

"시라나이와, 아다시(몰라요, 난)……."

암상이거나 푸념을 하던 것이 아니라, 시름없이 흘러져 나오는 탄식이었었다.

그러하되 그것은, 하도 그 농압더라니 안타깝더라니, 일변 그새 이틀 동안 혼자서 이미 향하는 남자에게의 정열은 괼 대로 잘 괴어 있겠다, 지금은 바야흐로 그 격정을 와락 터뜨려, 몸과 더불어 다 그의 품에다가 내맡기고서 마음 막힘 없이 편안히 원정을 하며 하소연을 하며, 그러면서 갖추 애무를 받으며 해야지만 들이 못 견디겠는 것을, 그러나 문득 어떤 뜻 안 한 장벽에 부딪뜨려, 또한 어찌하지 못하는 자저이었었다.

이편에 대한 남자의 향의도 진작 눈치를 챘었고, 또 사람 그 자체에 대하여 마음 서먹거리는 무엇이 있던 것도 아니고, 단지 피의 낯가림에서 오는 한 여자다운 조심이요 부질없은 (일시의) 자벽(自僻)이었었다.

만일 그러므로, 이때에 남자가 조금만 더, 가령 손을 들어서 머리를 쓸어 준다든지 가만히 등을 다독거려 준다든지 하기만 했어도, 여자는 바로 그 팔에 가 그대로 안겨 버리고 말도록 그와 같은 장벽에 대하여는 족히 대담했을 것이었었다.

대영은 미상불, 여자의 (풀죽어 하기는 하면서도) 눈에서는 가득히 넘치는 정열을 능히 알아볼 수가 있었고, 입술에 어린 곡진한 원념을 또한 몰라보지 않았었다.

정당한 기회요, 어심에 흡족했었다.

밉지 않고, 마음에 안긴 여자요, 번번이 제라서 입술을 뺏고 싶어하던 터인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여자마저 저렇듯 그러하고 하니 이상 다시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한다는 것조차 괜한, 한 절대의 경우이었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또 손쉽게 천하 공통의 어떤 형식 하나를 통하여 둘이의 그 정열과 욕망은, 애정이라고 하는 한 새로운 계단으로 전화가 되면 그만일 것이었었다.

대영은 그러나 정반대로, 느닷없이 허리를 불끈 펴고는 휘익 돌아서서 어정어정 방 안을 거닌다.

아닌게아니라, 마음을 턱 놓고 마악 그 어떤 형식을 가지려고까지 했었고, 하던 참인데 별안간 빙충맞은 생각이 불쑥 들어 일시에 그만 흥이고 긴장이고 죄다 풀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시방, 가슴이 약간 두근두근하고…… 여자를 끌어다가 서로 껴안고…… 입술을 조청 빨듯 마주 빨고……! 핏!'

그 멀쩡한 저 자신의 모양새가 차마 낯이 간지럽고, 저어 귀때기 새파란 어린애들의 장난을 흉내내는 것만 같아, 도저히 쑥스러워서 못 하겠었다.

무슨 일이고, 일에 외곬으로 파고들지를 못하고서 으레 한옆으론 그것을 갖다가 객관하여 비양하려 들고, 그만큼 그는 부질없음이랄까가 대단했었다.

스미코는 남자가 졸지에 그렇듯 기수가 심상치 않은 데 걱정이 되어, 제 경황은 어언간 어디로 가고 말긋말긋 앉아서 눈치만 보아 쌓는다.

대영은 이내 방 안을 거닐면서 다시금 생각을 하잔즉, 이번에는 저라는 사람이 도무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미흡한 정열…….

하기야 시방도 그대로 여자가 밉지 않고 마음에 안기고, 따라서 포옹과 접문을 즐기고 싶고, 그리함으로써 애정을 누리고 싶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제라도 또는 이따가라도 그렇게 하면 그만이고, 할 수가 있고, 할 생각이고 하다.

그러나, 그러는 하면서도 일변 거기에 대하여 자조와 치기를 종시 느끼지 않질 못하겠고, 하니 그것은 결국 정열이 어느 미지근한 정도에 가 멈추고서 이상 더 치열하게는 타지를 않는 탓일 것이다.

미지근한 정열, 그것은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하고 오히려 주접인 것이다.

어디, 여든을 먹어 흰 터럭이 허얘 가지고 입 삐뚤어진 곰보딱지와 가사 연애를 하기로서니, 불붙는 심장이 있기만 하다면야 이대도록이 힝기레밍기레할 법은 결단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에 열을 가지지 못하는 터이매, 그보다도 나라는 것이 어디로 가버렸으매, 즉 혼백을 잃은 인간인 셈이고 보매 그도 용혹무괴라 하겠지만, 그렇기론들 서른셋 이 나이에 연애조차 고지식하게 열중을 할 수가 없단다면 진정코 생명의 고갈이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대영은, 생각을 하면서 오락가락 (여자와는 눈을 피하여 한데를 보면서) 몇 번이나 방 안을 거닐다가, 마지막엔 푸우 한숨을 몰아 내쉬며 한번 더 저리로 돌아선다.

스미코는 마침내 더 참지 못하여 발딱 일어서더니 남자의 뒤를 따라가 옷소매를 잡고 앞을 막아 서면서 말끗이 얼굴을 올려다본다.

눈이 애처롭고, 조금 만에야,

"분상?"

하면서 다뿍 성화겹게 부른다.

대영은 괜한, 시방 중뿔난 짓을 했거니, 제야 속으로 점직해 강잉하여 빙긋이나마 웃어 주자고 해도 안면 근육이 얼른 말을 듣지를 않고, 입도 곧은 떨어지질 않았다.

"네? 분상!"

"……"

"노여우셨어요……? 편찮으셨더라는 걸 미처 그런 인사도 안 이쭙구서…… 깜빡 고만, 제 암상만……."

그러자 대영은 그때 느닷없이 여자를 거진 볼품 사나울 만큼 함부로, 여자를 와락 품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아스러지도록 안는다.

자포적인 발작이요 그 완력이지, 난데없는 정열의 더 높은 연소는 그러나 아니었었다.

다만 그 맹렬하고 빈틈이 없는 깐으로 하면 포옹하곤 자못 극치라 할 것이었고, 그러므로 여자는 누르고 누르던 격정을 필경 누르지 못해 그렇듯 우악스럽게 폭발이 된 줄 여기기에 족했다.

허깨비같이 끌려들어 차악 저도 바지직바지직 마주 껴안으면서 잠깐 동안 숨소리만 가빴고.

그러다가 이윽고 고개를 조금 젖히면서 얼굴을 든다.

더 중요한 순서가 막상 하나가 빠졌던 것이고, 그래서 입술은 유난히 윤기 있이 발그레 붉었다.

대영은 그렇듯 발작적인 기회이었을망정 아무튼 그 포옹이며 등속을 일단 치르잔즉슨, 그리고 치르고 난즉슨, 생각더니보다는 훨씬 피가 우꾼거리고, 새 채비로 여자가 사랑스럽고 한 것 같고 하여 자못 만족을 느낄 수가 있었다.

🙝 🙟

대영은 여자를 소파로 데려다 앉혀 주고, 웃옷도 손수 벗겨다가 제 해까지 옷장 안에 걸고, 그리고는 와서 같이 앉는다.

여자는 한편 팔로 등을 안으면서 이마를 짚어 본다.

"열이 있어! 어떡허시나!"

"괜찮아……! 고만 거야, 머……."

"그래두우……! 좀 누우시까?"

"아니……."

"그러나저러나, 이렇게 무릴 하시구 해서 어떡허세요? 저 때문에……."

"때문이라니, 이 노릇이 부역인가?"

스미코는 그 말이 재밌어라고, 배시기 웃으면서 남자의 젖가슴에다가 머리를 뉜다.

"그렇지만서두, 네에? 분상……."

"응?"

"가만히 보믄, 별루 건강하지두 못하신데 어떡허세요?"

"돼가는 대루…… 쯧!"

"그래두우……! 앞으루두 줄곧 그새처럼 이렇게 밤을 샌다, 늘 무릴 하셔야겠으니, 몸은 차차루 더 축져 가시구…… 그러니 필경은 지탱을 못 하게 될 거 아녜요?"

"할 수 없지!"

"그렇잖구선 우리 둘이 생활이 전연 무의미해지구…… 무의미가 아니라, 아주 없어지구 말지……! 혹시 분상께서 그새까지의 일이나 생활을 죄다 버리시구서, 저허구만 기셔 주신다믄, 그땐 우리 둘이 생활두 훨씬 아늑할 수가 있을 테지만, 그야 어디……."

"낼을 걱정하기루 들면, 난 벌써 사약이라두 집어 먹었게!"

"어이구 참……! 분상은 그러셔두, 전 오늘부텀은 안 그런걸……? 그리구 그게 어디 낼 일인가? 오늘 일이지!"

연애는 겨우 어떻게 얽어매졌어도, 그러고 나니 걱정이라, 둘이는 거기에 자지러져 한동안 생각만 두루 깊는다.

그러하던 끝에 스미코가 별안간 무릎이라도 탁 칠 듯이,

"아, 참!"

하면서 고개를 들고 눈이 빛난다.

"……우리, 함끼 저어 어디 가요!"

"저어 어디?"

대영은 섬뻑 못 알아들었다가, 이내 그것이 아주 가자는 뜻임을 깨닫고는 쾌히,

"가지!"

"가? 정말?"

여자는 제가 도리어 놀라면서, 파고들듯 묻는 것을, 대영은 여전히 시원스럽게,

"정말 가!"

"꼭?"

"꼭!"

"언제?"

"아무 때구……."

"아무 때구? 꼭?"

"꼭!"

"어디루?"

"스미코상 가구 싶은 데면 아무 데라두……."

"정말?"

"정말!"

"마아 요카타(아이, 좋아)!"

숨이 차서 들이 캐다가 마지막 소담하게 한숨을 그 마아 요카타라면서 감격에 겨워 눈물이 핑, 남자의 목을 얼싸안고 볼비빔을 해쌓는다.

"……고마워라! 우리 착한 분상……! 네? 분상……."

"응!"

"같이 가줘요오, 응?"

"걱정 말래두!"

"전, 정말 하루두 이 조선엔 더 못 있겠어요! 인전…… 어떻게두 그 표정이 으설푸구 심란스런지, 없는 시름두 되려 자아내게 하는걸요……! 그런데다가 또 분상은 자꾸만, 절 혼자 오도카니 둬주시구…… 네? 분상……."

"응!"

"동경으루 가요, 응?"

"동경……? 좋겠지…… 아편을 띠러 왔다가 되려 아편쟁일 하나 업구 간다?"

"괜찮아요! 머…… 아버진 영 더 노하시겠지만, 고만 각오야…… 건데, 언제 떠나꾸?"

"내일이라두……."

"정말?"

"정말!"

"정마알……!"

여자는 갑자기 풀기가 없으면서 물러나 앉는다.

"……그래두 인제 생각하니깐, 분상 못 가!"

"왜?"

"가정은 어떡허시구? 부인을……."

"난 또 무얼 그런다구…… 가정이나 아내를 생각해서 나 하구 싶은 노릇을 못 할 내면, 제법 되려 괜찮게?"

"그래두 당장, 분상이 떠나시믄 부인께선 어떡허세요? 분상이야 괜찮다시지만……."

"저의 집으루 가든지, 우리 아버지한테루나 가든지!"

"그러니 그게 못 할 노릇 시키는 게 아녜요? 저 때문에……."

"쯧 그걸 거리껴서 스미코상이 고만두겠다면 할 수 없는 것이구……."

"아니! 가요! 같이……."

여자는 질끔을 하여 그결에 와락 와서 안기면서,

"……같이 가요……! 그렇지만서두, 애맨 그이한테 죄스럽잖아요?"

"그 뜻 내가 대신 맡아 뒀다가 후일에 만일 기회가 있다면 당자한테 전해 주지!"

🙝 🙟

마침내 차시간표를 꺼내 놓고 앉아서 떠날 배비에 대한 상의를 했다.

차는 이튿날 정밤중, 세시 사십육분 부산행 히카리…….

대영은 실상 낮차도 좋다고 했으나, 여자가 들어서 아무리 뒷수습거리가 없다기로서니, 사와 집안이 있는데 어디 그렇게 촉박히야 떠나지느냐고 밤차를 주장했었다.

여자는 그리고, 내일 하루는 떠나는 그 시각까지 대영을 그의 아낙에게 돌려보내 주겠노라고, 그러니까 이따가 아침에 갈리고 나서는 아주 제 시간에 정거장에서나 다시 만나기로 또한 약속이 되었다.

대영은, 집과 사에야 차중에서 편지나 한 장씩 띄우면 그만일 생각이었지만, 마침 내일 밤에 망년회를 하기로 되었은즉 마지막삼아 식구끼리 하룻밤 놀고 떠나는 것도 무방하려니 싶었다.

여자의 세간은 그대로 내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파네 어쩌네 하자니 치사하기도 하거니와 또한 번폐스런 노릇이고, 두루 궁리를 하던 끝에 차라리 대영의 집으로 떠실어 보내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종차에는 게서도 성가셔하게 될 날이 있겠거니 하면 가뜩이나 미안한 일이었지만, 역시 딴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서 내일 저녁에 여자가 운송부나 메신저를 불러 발송을 시키기로 하고, 대영은 아주 회기정의 저의 집 주소까지 적어 놓았다.

🙝 🙟

길 떠날 준비에 대한 상의가 끝이 난 뒤에도 둘이는 훨씬 과실을 벗긴다, 차를 마신다, 또 여태 그대로 남아서 있는 포도주를 죄다 기울여 노나 먹는다 하면서, 늦도록 놀았고…….

마지막, 자려면서는 여자는 많이 망설이는 눈치더니, 우선 대영에게 (앓는대서) 침대를 사양하고 소파에다가 제 자리를 보았다.

제 의사보다는, 또 저로서는 판단을 할 길이 없어 남자의 뜻을 기다렸음일 것이다.

대영은 (천연스럽게) 아뭇소리 없이, 여자를 도로 침대로 데려다가 뉘어 주었다.

여자는 순순히 좇으며, 그제야 좁아도 그러면 예서 같이 자자고 했다.

대영은, 인제 동경으로 가서 더블 베드를 장만해 놓고…… 라면서 물러났다.

여자는 간지러운지 바특바특,

"젠료네(선량하군)!"

하면서 침대전으로 나와 걸터앉아 옆을 가리킨다.

"……잠깐 여기 앉으세요!"

대영은 혼자 속으로, 결단코 선량이 아니라 소심이요 비겁이요 그리고 허영이라고 부인을 했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그 이상, 이 밤에 스미코와 더불어 한 베드에 들지 않을 이유와 조건이라곤 가지질 않았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네?"

여자는 와서 앉는 대영에게 자기 전의 인사로 입술을 주면서,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그리구, 동경 가선 분상 착한 아낙 돼드리께, 응?"

"고마우이……! 그렇지만 머, 요술을 하나? 착한, 아낙이, 돼, 주구, 하게!"

"아니라우……! 그런 게 아니구, 분상이 하두 얌전하시니깐 스미코 고만 기뻐서어…… 그러니깐 인제 우리 둘이 더블 베드 가질 때꺼정은 연애루다가 둬두구, 그리구 그 다음부터서 분상은 새서방님…… 스미코는 색시, 응?"

"결국, 무어니무어니 해두, 허영이요 습관적인 위선이라……! 하, 그런데 그 위선을 뿌리치잔즉슨 그 다음 것은 위악이니……! 인간이란 성가신 물건야!"

"그렇게두 선량하시믄서, 반면엔 또 아주 박절한 구석이 있으셔……! 차갑구!"

이런 지천을 (제법 인제는 다) 하면서 여자는 한번 더 입술을 나누고 어깨의 팔을 풀어 준다.

대영은 소파로 돌아와 담배를 붙여 물고 앉아서 곰곰 생각이다.

'내일은 저걸 데리고, 데리고가 아니라 따라서 동경으로 간다?'

'간다…… 동경으로…… 저걸 따라서…… 내일…….'

'쯧! 가는 거지!'

대단히 쉬웠다.

내일, 여자와 같이서, 동경으로, 가는 것, 이것이 있을 뿐, 말하자면 절대이었었다.

사면을 다 돌아보아야 저 여자와 더불어 내일 동경으로 떠나가지말 아무런 구애도 주저도 할 일이 없었다.

'그러면, 막상 간다고 하고…… 대체 무엇 하러 가노?'

'하기는 무얼 해? 계집 따라가는 거지…… 위지 왈, 바람맞아서…….'

'으음, 바람맞아서……! 싱거운데?'

'좀 싱겁지…….'

'고만둬?'

'쯧! 고만두지!'

또한 쉬웠다.

아무리 생각해야, 내일 저 여자를 데리고 구태여 동경으로 꼭 가잘 필요와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고만두나?'

'쯧! 고만둬도 좋지만, 또 고만두면 무얼 하나?'

'그러면 가는 거지!'

'고만둬도 고만이고…….'

'안 고만둬도 또 고만이고…….'

꼭 같았다.

가지 말 조건과 내력이 없으니 가는 것이었었다.

마찬가지로, 갈 필요와 이유가 없으니 안 가는 것이었었다.

그러므로 결국은, 가면 가는 것이 선(善)이요, 반대로, 안 가면 안 가는 것이 선이었었다.

따라서 결론은, 내일 여자와 더불어 동경으로 간다는 것이었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내일 여자를 데리고 동경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었다.

'잘못하다가 놓치느니라!'

'놓치면 대순가?'

'구태여 놓칠 며리야 있나? 저 묘한 걸…….'

'그렇다고 한평생 갈 텐가!'

'쯧! 놓쳐도 고만, 안 놓쳐도 고만…….'

'내일 가도 고만, 모레 가도 고만…….'

'글피 가도 고만, 내일 아주 가도 고만…….'

'가도 고만, 안 가도 고만…….'

'돼가는 대로…….'

'쯧! 돼가는 대로…….'

6[편집]

이튿날.

오전 두시가 거진 가까워 오는 정밤중, 예정했던 대로 춘추사의 망년회가 배설이 된 동소문 밖 저 우이동 근처의 한적한 요정에서…….

대영, 병수 그리고 김과 박까지 도통 네 사람 한집안 식구에 다만 이삼 명의 기녀가 시중을 들며 있어 물론 조촐한 자리였으나, 배반은 엔간히 낭자했고 술들도 적이 취했다.

그러나 그 중 대영만은 처음부터 양을 조심도 했거니와, 따로 끊이지 않고 촉량을 하는 데가 있는 터라 초랑초랑 정신이 맑았다.

그는 간밤 그때부터 이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이 같은 그 생각이었었다.

가면 가는 것이 좋고, 안 가면 안 가는 것이 좋고, 오늘 떠나도 좋고 내일 떠나도 좋고…… 이것이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예미결이나 주저가 아니라, 아무렇게 해도 상관이 없다는 하나의 버젓한 결정이었었다.

자리는 술이 몇 물 지나간 뒤라, 제각기 상으로부터 물러앉아 이야기가 어우러지고…….

대영은 한 기생의 무릎을 베고 버얼떡 누운 채 마침 또 시계를 꺼내서 본다.

한시 사십분.

인제 한 시간 후에는 자동차를 몰아 경성역으로 달려야 하고, 그리하여 다시 두 시간 후에는 스미코와 더불어 부산행 제5호 급행열차 히카리를 잡아타야 한다.

대영은 손뼉을 쳐 보이를 불러서 아까 시킨 대로, 두시 사십분까지에 어김없이 차 한 대를 대비해야 하느니라고 다시금 신칙을 한다.

그러자 저만치서 병수가 커다랗게,

"아, 형님!"

하고 불러 댄다.

"말씀하시게……! 방금 숨은 안 넘어가니……."

"허어허 허허…… 그래 그여코 가보셔야 하겠소?"

"가봐야 한다네!"

"아따아, 뭐얼 그러시우……? 고만 내던져 두구서, 눌러 술이나 먹읍시다!"

"안 돼!"

"거, 대체 누가 그대지 요란스런 사람이 떠나길래, 이 밤중에 부둥부둥 전송만 나가야 한다는 게요? 여보 형님!"

"애인이래두!"

"허어! 아냐…… 우리 형님이 이뭉해 놔서, 정말 애인이면 애인이라구 하덜 않지!"

"허허실실(虛虛實實) 모르나?"

"아냐 아냐……! 아무튼지 꼭 도루 오시지? 두 시간 안에……."

"아무렴……! 내가 선량한 자넬 저바릴 택이 있나!"

제 입으로 말을 해놓고 보아도 어쩐지 마음이 좀 언짢았다.

'그러면 오늘 저녁은 작파하나?'

'쯧! 그래도 좋지…….'

'기왕이니 떠나도 좋고…….'

덤덤히 기다리기가 갑갑하여, 판은 헤식으나따나, 가야금 병창을 한 대문 듣고, 그리고 나서 이럭저럭 두시 반이 된 것을 보고는 병수와 김, 박 세 사람을 상 앞으로 모이게 한 후 (마지막 작별인 양) 쓰렁둥 술잔을 나누었다.

이윽고, 차가 대령이 되었다는 전갈을 한다.

몸을 일으키다가, 넉넉하니 오 분만 지체하도록 일러 두고서, 또 한 순 술을 돌렸다.

그리고는, 정말 인젠 동경으로 떠나느니라고 벌떡 일어서는 것을 옆에서 병수가 팔을 붙잡아 앉히더니, 형님 눈치가 아무래도 좀 수상하다면서 꼭 도로 온다는 명세로 큰 잔에 한 잔을 먹인다.

그 다음에는 또 제가 제풀에 주저앉으면서 (안 떠나도 그만이라고) 술잔을 들었다.

그러나 이내 일어섰다.

그러나 다시 또 앉았다.

또다시 일어섰다.

또다시 주저앉았다.

이렇게 연해 앉았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섰다가는 주저앉고, 그러면서 줄곧 시계는 꺼내 보았다, 집어넣었다 하면서 하는 동안에 어언간 세시가 되고, 이어서 오분, 연달아 십분, 마침내 십오분…… 십오분이자 드디어 최후의 시간은 완전히 지나 버리고 말았다.

이 최후의 시간이 지나고 말면서, 그리하여 오늘은 필경 일이 파가 되었느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관념을 하는 순간, 웬일인지 이상스럽게 가슴이 울적한 것도 같고 일변 거뜬한 것도 같아, 예라 이왕지사 술이나 맘껏 먹어야지야고, 보이를 높이 불러 위스키를 청했다.

그러고 나니, 정거장에서 저 혼자 그만 허탕을 치고는 애를 태우다가 하릴없어 돌아설 여자의 추렷한 양자가 자꾸자꾸 눈에 밟혀 싸 못내 가엾어 못 하겠었다.

그래, 이따가 회로엔 아파트로 가서 잘 위로도 시켜 주려니와, 내처 같이 거기서 기다렸다가 내일 낮차엘랑 꼭 떠나도록 하려니, 이쯤 단단 유념을 해 마지않았다.

그러다가 뒤미처 또 생각을 하잔즉, 일단 아파트를 비워 주고 나갔는데, 그러니 십상 그리로 되짚어 찾아들지는 못했으련 싶고, 해서 깊은 물에 고기를 놓친 것같이 자못 막막하기도 했다.

하나, 그렇더라도 막상 모를 노릇이니, 어쨌든 들러는 보아야 하고 그게 또한 도리겠지야고, 그랬다가 역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상필 역 앞의 가까운 여관에서 하룻밤 묵는 시늉을 하는 게 분명하니, 내일 일찌감치 사에로 무슨 소식이 있을 테지야고…… 마지막엔 이만큼 안심을 해두었다.

제가 아무려면 그 그물 속에 들어 있지 어디로 가리요, 하는 일종 취중의 장담이었던 것이고…….

긴장은 풀렸는데 술은 더욱 독했겠다, 그제부터 한꺼번에 와락 취하기 시작하여, 미구엔 억병이 돼가지고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서 새벽녘 다섯시에는, 동행들의 지시를 받은 운전수가 동대문 밖을 향해 내달리는 자동차의 쿠션에 쓰러져, 세상 죄다 모르고 떠실려 가며 있었다.

🙝 🙟

밝은 아침, 해가 높아서야 겨우 잠이 깨자 비로소 저네 집 건넌방에 누워 있는 저를 발견함과 동시에, 스미코의 일이 퍼뜩 생각이 났다.

늦어서는 안 되지야고 번쩍 고개를 쳐들곤 책상의 좌종을 올려다보는데 (열시가 지났으나, 그보다도) 배 불룩하니, 조간신문 위에 포개 놓은 한 장 편지에 눈이 더 띄었다.

연필로 갈겨 썼고, 문대영 양(文大永樣)이란 투가 벌써 아무것도 없는 뒷등이야 넘겨 보나마나 알 속이고.

간밤의 일로 소갈찌가 단단히 났을 건 빠안한 노릇, 마침 주소도 알겠다, 선길에 아마 새살깨나 적어 넣었으려니쯤 생각하고 빙긋이 웃으면서 피봉을 뜯어 읽는데, 허두가 나오기를 느닷없이,

'용서해 주세요! 분상. 분상을 떼어놓고 스미코 혼자서 고만 대륙을 향해 떠나고 있답니다!'

대영은 정신이 화닥닥 나 눈을 쥐어뜯듯 마음을 급히 내려 읽는다.

……많이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그러고도 어떻게 할 바를 몰랐어요. 그렇지만, 스미코, 사랑이 하도 소중해서, 하도 아까워서, 그야 차마 못할 노릇이긴 해도, 필경 이 도리가 부득불 옳을 것 같아요.
스미코, 스물셋도 다 가는 이 나이에, 실은 처음이라고 해야 할 사랑이고, 겸해서 빈틈이 없는 진정이었어요. 어진 우리 분상 덕분에 말씀예요.
그리고, 그런만큼 예정대로 분상 모시고 동경으로 가서, 둘이서 즐겁게 그 사랑을 누려야 마땅하고, 또한 그리하고픈 원념은 시방도 간절하여 종시 잊지를 못하겠어요?
그러나 아무리 해도 안 될 말이겠어요. 처음 얼마 동안이야 물론 별일 없이 다만 즐겁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둘이 같이서 그렇게 한 달이면 한달, 두 달이면 두 달, 반년이나 혹은 요행히 일년이라도 지내느라고 지내고 난 그 다음엔?
처음의 즐거운 시기가 지나고 난 그 다음엔, 반드시 우리에겐 무위의 권태에서 오는 파탈이 생기고라야 말 것 같아요.
번연한 노릇이지, 분상도 어둔 얼굴, 스미코도 어둔 얼굴, 이 두 어둔 얼굴이 밤이나 낮이나 우두커니 서로 바라다보고만 앉았어야 할 게 아니겠어요? 이야기도 없고 웃음도 없고, 그저 덤덤해설랑…….
그러니 글쎄, 생각만 해도 그 일을 어쩌랴 싶어, 고만 무섭고 기가 딱 질리지 않아요?
생활이 있어야죠!
분상이나 스미코나 생활을 가질 기운을 잃어버린, 다 같이 아편쟁이…… 아편쟁이요 혈액만 통하는 육괴인 것을, 그 두 개의 육괴가 어떻게……?
건강스런 생활과 병행해야만 사랑도 애정도 생명이 있는 법이라는데, 그렇게도 답답하고 애브노멀한 두 개의 육괴와 육괴가 주야장천 마주 붙어만 있으니, 그 사이에서 어떻게 사랑이 살아 있어지며 지탱이 될 수가 있겠어요?
잠깐 생각해 보세요? 분상…….
우리 둘이서 앞으로 동경서 지내게 될 그것보다는 월등이라고 할 수가 있는 분상의 지금 현재의 생활…… 그래도 생활이랄 것이 있는 지금도, 분상은 분상의 가정 즉 '낡은 여자'한테 대해서 그처럼 흥이 없고 범연치 않으세요? 더욱이 부인께서만은 건전하신가 보던데…….
하물며 그러니, 둘이 다 폐인이면서 전혀 생활이라곤 없는 우리 둘이의 장차 그날은 어떻겠어요?
필경 그래서, 우리는 시방껏 이 즐거운 사랑일랑 죄다 까먹어 버리곤, 그 대신 서로 불쾌한 기억만 안고서 손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잖으면 견디다 못해 스미코, 미치든지 자살을 하든지 할 것이고…….
그러니 말씀예요, 고까짓것 한 달이나 두어 달, 혹은 반년 조금 더 기쁨을 탐내어, 시방은 스미코 이대도록 즐겁고 소중한 사랑을 갖다가, 불쾌한 오점을 칠해서 영 장사를 지내야 하겠어요?
스미코, 그거 싫어요! 그리곤 슬퍼도 이 사랑 이대로 좋이 간직을 하는 게 오히려 행복이고 자랑이겠어요.
'뿔그극장'의 미테라가 탄식을 하고 고민을 해도, 보기엔 행복이듯이요. 다카야마 조규가 그랬죠? 인간은 도야지로서 즐겁느니 인간으로서 괴로워야 한다고. 스미코, 지금에 분상 모시고 동경으로 가는 거, 마치 그 도야지예요!
그러니깐 못써요.
그런데, 그런 줄은 알면서도 자꾸만 그 도야지가 제발 되고가 싶으니요! 차마 애달퍼서 도야지라도 되고만 싶으니요!
아까 새벽에 분상 돌아가신 후 이내 그 생각으로 시간을 지우다가, 종시 결단이 없이 조금 일추 아무튼 역엘 나오지 않았겠어요! 했더니, 우리 둘이 동경으로 가기로 언약을 한 시간보다 삼십 분 앞서, 세시 십오분, 대륙을 향해 떠나는 차가 마침 있겠죠! 그걸 보고서야 문득, 비로소 결심을 했어요. 오냐 기왕이니 대륙으로나 가보리라고.
슬퍼도 미련겨워도, 자랑과 행복 속에 사랑을 보전하겠으니 좋고, 아울러 그곳에다가 아편을 버릴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니 막상이겠어요.
요전날 밤, 분상도 이야기를 하신 대로, 일청(日淸)·일노(日露) 전역 때부터, 더는 풍신수길, 또 더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일본 민족의 유구한 민족적 사명이요, 그래서 한 거대한 역사적 행동인 중원 대륙의 경륜…… 이는 누가 무어라고 하거나, 현 세대를 전제로 한 인간정열의 커다란 폭발인 것 같아요.
스미코, 이 길로 거기엘 가서, 보고 대하고 접하고 하겠어요.
새로운 건설을 앞둔 무서운 파괴가 중원의 천지에 요란히 전개되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무대와 행동을…….
스미코와 혈통을 더불어 했고 동시에 한사람 한사람의 인간인 그네 씩씩한 장정들이, 그렇듯 세기적인 사실의 행동자로서 늠름히 등장을 했다가 끊임없이 시뻘건 피를 흘리고 넘어지는 그 핍절하고도 엄숙한 사실을…… 스미코 직접 목도를 하고 접하고 할 때에, 진정으로 한 조각의 붕대를 동여 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날 것 같아요. 반드시 어떤 흥분과 감격을 느끼고라야 말 것 같고, 아편의 독을 잊어버릴 것 같아요.
방금 라우드 스피커가 대륙행의 개찰을 고하는군요!
봉해서 포스트에 들여뜨리고 인젠 가겠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가요! 자꾸만 뒤가 돌려다보이고, 눈물이 어려 쌓는걸. 어떡하면 좋아요?
시방쯤 분상께서, 우연히 만일 일찍 당도를 하셔서 저 육중한 문을 밀치고 쑥 들어서신다면, 제발 그러시기만 한다면 스미코 얼른 이 편질라컨 숨겨 버리고, 곱다시 분상 따라서 동경으로 가겠구먼서두요! 어떻게 글쎄, 안 그러겠어요. 스미코가……! 생각하면, 우연이란 것이 쉽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파요?
분상 부디 틈틈이 그 소파에 앉으셔서, 또 그 찻잔에 차 잡수시면서, 스미코 항상 생각해 주세요, 네?
그래 주시려니 생각만 해도 스미코 죄꼼은 눈물이 걷히면서 이렇게 기쁜걸!
스미코, 그 칙칙한 모란 족자 평생토록 고이 신변에 두고 바라보면서, 분상 사모하겠어요.
매점에서 아쉰 대로 산 간찰지 한 축이 거진 다했건만, 할 말씀은 여태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시간도 촉하고, 자아 인젠 고만…….
부디부디 안녕히.
남다른 분상이시겟다, 스미코의 이런 마음과 근경 잘 이해하실 뿐더러 또한 동감하시고, 괘씸타 노여워는 안 하실 줄 꼭 믿어요!
자 그러면 한번 더, 안녕히.
착한 우리 분상께.
나쁜 스미코

몰아치듯 주욱 다 끝까지 읽고 난 대영은, 마지막 한꺼번에 후― 막혔던 한숨을 내쉬면서 맥은 풀려, 편지째 방바닥으로 힘없이 팔을 내려뜨린다. 그러면서, 눈을 스르르…….

가슴은 다직 그저 주먹만한 무엇이 그 새깐은 들어와 묻혀 있었던 성싶은데 막상, 몸이 한 귀퉁이나 통째로 뭉떵 패 달아난 것 같은, 그리고 이대로 영영 채워질 길이 없을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겠으면서도, 머릿속은 한갓 벙벙만 하여 섬뻑 어떻다고 할 수가 없었다.

죽은 듯 그대로 한동안 누워 있었고.

마음은 부지할 수 없이 고달픈 어떤 고독감이, 이윽고 어디선지 모르게 조이듯 사면으로부터 몸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애정을 놓친 그, 가슴의 다만 허전함과도 일변 다른 것이어서…….

어렸을 적, 밤에 늦도록 동무들과 더불어 밖에서 잠착하여 놀다가,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하나씩 둘씩 스실사실 헤어져 가고, 마지막…….

마지막 단둘이만 남았던 맨 친한 동무 하나마저 어느덧 온다간다 소리도 없이 사라져 불러도 대답이 없고 찾아도 나오지 않고…….

필경 그리하여, 혼자서 으슥한 고샅에 가 호출하니 남아 섰던 그때의 그 외롭고 고만 울고 싶게 그지없던 마음…….

대영의 시방의 고독감은 마치, 그렇듯 동무들을 깜박 어느결에 죄다 잃고서 홀로 처진, 버림을 받은, 그러한 소년 적의 이슥한 밤처럼 안타까이, 지향할 바를 모를 막막함이었었다.

참으로 울 수라도 있다면, 그래서 실컷 울기라도 했으면 조금은 마음 후련할 것도 같았다.

아무도 없이 외로운데, 또한 가버린 사람에게는 혼자서 어떻게 가눌 바가 없는 정의 미련이 간절하니 더욱이나 말이던 것이다.

하기야 한편 생각을 하면, 둘이는 역시 길이 합쳐지기 어려운 형편에 피차간 처해 있는만큼, 오히려 지당한 괴치요 그 귀정임도 알기는 하겠었다.

또, 제 편지에 쓰인 말따나, 아무래도 둘이는 즐거움은 짧고 이내 서로 남이어야 할 운명일 터이면, 미련을 탐하여 환멸과 불쾌한 날을 장만하느니 차라리 애련한 한 폭의 그 하찮은 그림이나마 추한 덧칠을 할라 말고서, 미흡한 대신 곱다시 오래도록 간직을 함도 또한 낙이 아님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득이한 단념이요, 인제 오랜 후 많이 애를 삭인 날에 비로소 효험이 있을 낙이지, 지금 당장껏은 도리어 대륙에로 부르르 그 뒤를 쫓아서 가고 싶은 마음이 더럭더럭 솟으며 있는데야…….

여자의 환영을 밟아 줄기차게 대륙에로 쏠리는 마음, 그를 연해 몽스려 가며 자제를 하자매, 아픈 노력이 쓰이지 않지 못했다.

여자와 더불어 동경으로 가기가 그만큼 수월하던 대로, 대륙인들 가지 못할 아무런 이유나 불가함이 있음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어젯날 여자와 함께 동경으로 떠나는 것과, 오늘에 여자의 뒤를 쫓아 대륙으로 가는 것과는 그 사이에 인간 구차스러움이 천양지차가 없지 못하던 것이다.

아파도 참지, 구차스럽고 싶지는 않았었다.

🙝 🙟

방문이 바시시 열리면서, 푸석하니 아직도 산태(産態) 가시지 않은, 아내가 조용히 들어선다. 대영은 문 소리에 눈을 돌리다가 말고, 벌써 바람을 쏘이나 싶어, 부질없거니 했으나 무어라고건 참견해 말을 하잘 신명은 날 경황이 없었다.

그 길에 마침 담뱃갑만 더듬어 한 개 붙여 물고는 도로 반듯이 누웠는데, 아내는 대견스레 머리맡으로 와 앉으면서,

"어쩌믄 약줄 그리 몹시두……."

하고 요 밑에 손을 넣어 본다.

"……무어, 속 좀 안 푸실려우?"

물어도 대영은 못 들은 성, 우수 서린 담배 연기만 소옴솜 천장으로 피워 올리며 꼼짝 않고 누워 있다.

늘 그러한 남편이라, 아내는 아무 내색도 않고 한참이나 잠잠히 그대로 앉았다가 생각결에,

"그리구 참…… 뭣이냐, 신고를 해야 할 텐데…… 어린년 이름이나 하나 지어 주시우?"

가뜩이 신산한 중에 대영은 마음조차 없는 성가신 소리여서, 계집아이 이름쯤 아무렇게나 할 것이지 그예 나까지 조를 건 어딨단 말이냐고 버럭 지청구를 하자는데, 그러자 문득 (진실로 문득) 도저히 그렇지 않을 생각 솔깃한 일이 한 가지 있음을 깨달았다.

"계집애자식이래두 아버니가 계신데, 에미 혼자서 어떻게……."

처음 언뜻, 남편이 상을 찌푸리며 마땅찮아하던 것을 보고서, 아내가 달래듯 변명을 하던 것이고.

대영은 그 동안 안색을 다스리느라 잠깐 있다가 밑도끝도없이,

"맑을 징……."

하고 불러 준다.

"맑은 징?"

아내는 뜻밖이라서 반가운 듯,

"……맑을 징……! 삼수변에 오를등 한 그 자지요?"

하면서 책상의 지필을 내려다가 징(澄)자를 또박이 써놓는다. 대영은 여자 스미코한테서 의식하고 그 징자를 따오는 것이 일변 자식에게 죄스러울 것도 같았으나, 또 한편 생각하면 노상 그렇지도 않았었다. 기념을 하자는 게 아닌 이상…….

아내는 써논 징자를 연해 들여다보고 고개도 깨웃거리고 하다가,

"쯧! 수수해 좋수! 쓰긴 좀 까다라워두…… 그리구 그 다음, 아랫자는?"

"거, 뭣이냐…… 절개란 글자루, 무어 마땅한 자가 없나!"

"송(松)…… 죽(竹)…… 또오 설(雪)……."

"정조만을 의미하는 절개가 아니라…… 으음 문징…… 문징…… 상! 문징상!"

"상?"

"상서상…… 옷의변에 염소양……."

"오오, 상서상……! 문 징 상……."

아내는 다시 새로 문징상(文澄祥)이라고 석 자를 써가지고는 들여다보면서,

"……문징상…… 징상…… 쯧! 좋군요……! 문 징 상, 문징상…… 어디서 듣던 이름 같다……! 그러나저러나 상서상자가 어디, 절개란 뜻이야 되우?"

"여고쯤 마치구서, 그걸 알면 제법이게……? 아무튼 임잘랑은, 효도를 보구 싶을 테니, 따루이, 왕상(王祥)이라는 그 상자루 해석을 하구려……."

"듣느니 고마운 말씀이오……."

아내는 농엣말을 하자다가 도리어 마디지게 한숨을 내쉬면서,

"……인전 자식이나 기루구, 잘 길러 주구서 즈이한테 효도나 조끔 바라구 해야지, 달리야 내가 무슨 여망이 있수?"

아내는 말을 맺고 우두커니 생각에 잠겨 앉았다가 문득 남편더러,

"난 그래, 효도나 바란다구…… 당신은 무얼 바라구서 뜻있는 이름을 다아 지어 주구 그러시우……? 설마, 저……."

"냉동어(冷凍魚)의 향수(鄕愁)는 바다에 있을 테지!"

대영은, 이번에는 제가 한숨을 후르르 길게 내쉬면서 혼자 하는 말로,

"……잘들 한다……! 푸달진 계집애 자식 하나를 낳아 놓구서…… 그나마 첫이레두 미처 안 간 핏뎅일 놓구서…… 에미는 에미대루, 애비는 애비대루, 제마다 제 원념을 그것한테다가 살려 보자구 들구……! 에잇, 구차스러!"

혀를 끌끌 차면서 돌아눕는데, 그러자 마침 안방으로부터 빼액 하고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려 온다. 부부는 다 같이 소리가 새삼스럽게 반가우면서도, 그러는 한편으로는 또 어쩐지 더럭 더 한심스러워 못 했다. 그들은 그 끝에 제각기 제 몫의 고달픈 수심에 잠겨드느라, 산모조차도 깜박 어린애의 자지러진 울음 소리를 잠시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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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