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복한 베드로
원문
[편집]- 馬可福音第十六章一---八節의讀解
- 叅照: 馬太第二十八章一-八節
- 路加第二十四章一-十二節
- 約翰第二十章一-十八節
聖書本文을一讀하면 右四福音書에共通한大意는 누구의게든지 明瞭하다. 卽女人들이 예수의復活한 무덤에 가보왓던事實을 記載한것이다. 大體로는四福音書相同한것이나 細節에關하야는 多少差異함이不無하다. 例之 天使를보왓다는것은一般이나, 馬可에는‘한少年’,路加와約翰福音에는 ‘두天使’라하엿고 馬太에는 그數를明記치않고, 다만‘얼골이 번개 갓고 오의 히기가 白雪갓다’하엿다. 如斯한仔小한 差違가 잇음은 오히려 當時에 그非常한光景을目睹한者의 興奮한心情그대로를 如實히傳術한것이라는 是證이되는것이다.
時間에對하야 馬可에依하면 ‘安息日이지나매’(一節)라고하엿고 또‘七日첫날 매우일즉이’라고하며, ‘해돋을때에’라云하야定確한時間을 難測이며 馬太에는 ‘安息日저녁, 週日첫날黎明에’라고하엿다.(國文聖書馬太二十八章一節에‘安息日 읻흔날 새벽에’라고한것은 意譯이고, 忠實한原文譯은아니다) 要컨대 四福音書를 綜合하야 時間은 日曜日黎明 햇발이 처음 빛히기始作할 때 로 解함이可할듯하다.
復活問題는 지금 이에서小論할바가 아님으로 記載된事實대로取하고 第七節의弟子等及베드로와 復活한 예수와의 關係를 詳考하고저한다.
七節의 天使의 말은 두가지로 解釋할수가잇다. 첫재로 ‘弟子들과베드로의게’닐아라 云함은 弟子들의代表 或은首弟子의 意味로써 베드로의 名義가 씨워잇으나이것은 베드로를特別히指示한것이아니고, ‘弟子들’이라는데에 重點을置한다는것.
둘재解釋은 베드로를格別히 指摘하엿고 또 그러케할必要가 잇엇다는것이다. 그必要는무엇인가.
十二使徒는 모다 特別한選任을 받은者이엿음은 論할것이없다. 그러나 그中에도 세베대의아달 요한과 시몬 베드로는 主예수의格別한 寵愛를 받얻던것을 볼수잇다. 會堂어른 야이로의 딸을蘇生케할때에 伴行을許한것도 뎌들이엿고(馬可五章) 高山에 올나가 예수의 얼굴이 白雪가치 變貌하엿을때에 이를 다라가 본것도 뎌들이엿고(馬可九章) 겟세마네의 最後勝利의祈禱를 가장 갓가운 자리에서 보고들은것도 뎌들이엿고(馬可第十四章三十三節) 유다가 接吻으로써 其師예수를 敵의게賣渡하야 祭司長의게 잡혀가게 하엿을때에 그門內에까지 따라간것도 베드로와 요한이엿다(요한傳十八章十五節)
이와갓치 남달은 사랑과 信任을 받엇고, 또主를熱愛하던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十字架를當하야 남달은失望과 特殊한悲痛에 무처잇엇음도 推測키 어려운事理가아니다.
加之에 베드로는 最後의晩餐이畢한뒤에 主예수끼對한 굳은決心을 告白한바잇얻다.
“베드로 엿자오대 다 슬혀 바릴지라도 나는 그러케 안켓삽나이다........베드로가 懇切히 말하대 내가 主와함끼 죽을지언정 모른다 하지 안켓삽나이다....”(馬可第十四章二十九,三十一節) 라고, 베드로는 自身의眞心을吐露하는同時에 모든弟子들의 本願을 表示한것이며(仝十四章三十一節), 또한 二千年後今日까지의 온 信徒들의 赤誠을 代言하여준것이엿다 基督者로써 누가 베드로를敬愛하지 안하리잇을가. 그런대 痛忿한일이아닌가. 베드로의게對한 예수의 豫告은 넘어도速하게 的中하엿버렷다. 爲先 베드로는 師오主이신 예수의 一生最大危機인 겟세마네의祈禱에, “땀 흘으는것이 큰 피 방울이 흘너 따에 떨어지는것 갇을때”(路加二十二章四十四)에도 一時를 깨여잇지몯하고 肉畜同樣의本能이 支配하는대로 수면에 빠저잇어 乃終 예수끼서 “마암에는 願이로되 肉身이弱하도다”라는 同情의 말삼을 甘受치아니치 몯하엿다.
다음에 베드로는 祭司長의 압마당에서 三次나 예수를 모른다 고하엿버렷다. 이 一節을 읽을때는 讀者自身의 名義를 베드로에 換置하고 읽음이 第一有效한讀法의 한아일가한다.
- (一) 베드로는 아래 마당에 읻더니 大祭司長의 婢子 하나이 왓어 베드로가 불쪼임을 보고 갈아대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끼한者로다’하거늘, 베드로가 아니라하야 갈아대 ‘나는 네 말하는것을 아지도몯하고, 깨달지도 몯하겟노라’ 하며 압마당으로 나가니 닭이우난지라
- (二) 婢子가 또보고 겯헤 섯는사람다려 다시 닐아대 ‘이사람도 뎌 무리라’하되, 또 아니라 하더니
- (三) 조곰 잇다가 겯헤 섯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 다려 말하대 ‘너는 갈닐니사람이니 分明히 뎌무리로다’하거늘 베드로가 詛呪하며 盟誓하야 갈아대, ‘너 말하는 이사람을 아지 몯하노라’ 하니 닭이 곳 두번재 울
거늘 베드로가 예수끼서 저다려 말삼하사대 ‘닭이 두 번 울기前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 하리라’ 하심을 記憶하야 생각하고 울더라. (馬可十四章六十六節以下).
이尾末의 一句, ‘생각하고 울더라’의 原文은 매우 强한 意味인대, 譯文에는 그것이 낟하나지 몯하엿다. kia epibalon eklaien의 原意는 ‘몸을 따에 더저 울엇다’ 又는 ‘머리를 가리우고 울엇다’는 뜻임으로 이것을 路加二十二章六十二節의 ‘곳밧게 나가 甚히 痛哭하니라’는 記述과 綜合하야 ‘全力을 다하야 몸부림치면서, 放聲痛哭하니라’고 읽으면 當時의베드로를 想見함에 有助할가한다.
한번 입박게 나온 虛言을 固執한것이 瞬間에 뎌를 惡에서 더惡한데로 떨어지게한(A lie once told was persisted in, and he quickly went from bad to worse.) 結果의 自我를 發見할때에 아아同情할 베드로는 처음으로 戰慄한것이엿다. 發憤하고 또痛悔한것이엿다. 嗚呼라 이(齒)를갈고 헤ㅅ줄기를 切取한들快할손가, 頭髮을 뽑고筋骨을 서로 찢은들 및흘손가. 뎌는 오직 ‘하날이여 문허지라, 따이여飛散하라’하고 聲量을 다하야 呼泣하는 박게 能事가업서진것이엿다. 베드로가 ‘생각하고 울더라’하야이一句를 無心히 讀過하여내는 個人과 民族과 時代는 모다 그順境에 處하엿음을 感謝할것이다. 그러나 그痛哭이얼마나 重大한意味의것이뎟든것은 恩惠로말미암아 아는니만이 알것이다. 洗禮요한이女人의産出한中에 가장偉大한者이엿음은全人類를代表하야 하나님의 獨生子를證據함에잇엇다 할진대, 시몬 베드로의三次否定도 全人類을 代表하고 또 나를代身함에 잇섯어 痛歎스러운것이다. 萬一와름쓰會議에서 루터가 屈服하엿다고 假想하라. 이때에 우리人類는 鑛夫의子息의 咆哮하는音聲으로써 ‘베드로의痛哭’을 다시함번 더들엇을 것이엿다. 其後의世界史를 想像하기만 하여도 몸솔이 짗히지안는가? 루터여莊하도다. 베드로여 憤하고 앞흐도다.
베드로는 요한 其他의 弟子들과 가치 主의十字架事件으로써 失望과 悲哀에 떠러젓을뿐더러 그우에 三次나 主를 몰은다고 하야 自己의 卑怯과 不信에覺醒할떼에 다시는 主예수끼 뵈올面目이 업슴을알고, 可能하면 主를背離하려는 생각이잇섯을것은 吾人의 日常經驗으로도容易히推測할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網으로써 意外의 大漁를 獲得하엿을 때에 ‘主여나를 떠나소서, 나는罪人이로소이다’라고(路加五章八節) 한것도 同一한心事엿고 始祖아담이 善惡果를 먹은後에 ‘동산나무 사히에 숨어 여호와 하나님의 낯흘 避하고......내가 동산에서 主의 소래를듯고, 나의 몸을 벗음으로 두려워하야 숨엇나이다’(創三O八,十節)함도 또한 同樣의 理由인 것이엿다.
이런때에 하나님 끼서는 ‘우리의 罪대로 우리를 待接지 아니하시고 우리의不義대로 우리의게 갑지아니하실뿐더러, (詩百三篇十節) 主예수는 七을 七十倍하엿어 赦癒하시고 自己를 三次否定하던 베드로를 爲先 몬저찾엇어 慰撫하시고 勸勵하섯다. 하나님便에는 그必要가 잇덛던것이다. 路加福音二十四章三十四節과, 고린도前十五章四,五節의記事와 並讀할때에 예수가 復活後에 格別히 베드로를 맛나신것과, 또 그必要함을推察할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福音二十一章一節以下에 “요나의子 시몬아 네가 이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나냐?......내 어린羊을 먹이라.....”고 三次나 寄托하시고 새로히信任하심을보면 베드로의 多福을 부려워안할수업다. 그러나 ‘베드로의痛哭’이 全人類와 또나自身의 痛哭이엿던것럼 나도 또한 多福한 베드로인것을 깨달을것이고 感謝할것이며, 부려워 할것이다. 이것이 福音의 事實이다.
번역문
[편집]- ‘마가복음’ 제 16장 1~8절의 독해
- 참조 : 마태 제28장 1~8절; 누가 제24장 1~12절; 요한 제20장 1~18절
성서 본문을 일독하면 위에 적은 4복음서에 공통한 대의는 누구에게든지 명료하다. 즉, 여인들이 예수의 부활한 무덤에 가보았던 사실을 기재한 것이다. 대체로는 4복음서가 서로 같으나 세절(細節)에 관하여는 다소 차이가 없지 않다. 예컨대 천사를 보았다는 것은 일반이나 ‘마가’에는 “한 소년”, ‘누가’와 ‘요한복음’에는 “두 천사”라 하였고, ‘마태’에는 그 수를 명기치 않고 다만 “얼굴이 번개같고 옷의 희기가 백설같다”하였다. 이러한 사소한 차이가 있으믄 오히려 당시에 그 비상한 광경을 목도한 자의 흥분한 심정 그대로를 여실히 전술(傳述)한 것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시간에 대하여 ‘마가’에 의하면 “안식일이 지나매”(1절)라고 하였고 또 “7일 첫날 매우 일찌기”라고 하며, “해 돋을 때에”라 하여 정확한 시간을 난측(難測)이며, ‘마태’에는 “안식일 저녁 주일 첫날 여명에”라고 하였다.[1] 요컨대 4복음서를 종합하여 시간은 일요일 여명 햇발이 처음 비치기 시작할 때로 해(解)함이 가할 듯하다.
부활문제는 지금 이에서 상론할 바가 아니므로 기재된 사실대로 취하고 제7절의 제자 등 및 베드로와 부활한 예수와의 관계를 상고하고자 한다.
7절의 천사의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첫째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함은 제자들의 대표 혹은 수제자의 의미로서 베드로의 명의(名義)가 씌어 있으나 이것은 베드로를 특별히 지시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라는 데에 중점을 둔다는 것.
둘째 해석은 베드로를 각별히 지적하였고 또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필요는 무엇인가?
12사도는 모두 특별한 신임을 받은 자이었음은 논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것을 볼 수 있다. 회당 어른 야이로의 딸을 소생케 할 때에 같이 따르게 된 것도 저들이었고,[2] 고산에 올라가 예수의 얼굴이 백설같이 변모하였을 때에 이를 따라가 본 것도 저들이었고,[3] 겟세마네의 최후 승리의 기도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보고 들은 것도 저들이었고,[4] 유다가 입맞춤으로 그 스승 예수를 적에게 매도하여 제사장에게 잡혀가게 하였을때에 그 마당에까지 따라간 것도 베드로와 요한이었다.[5]
이와 같이 남다른 사랑과 신임을 받았고, 또 주를 열애하던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를 당하여 남다른 실망과 특수한 비토에 묻혀 있었음도 추측키 어려운 사리가 아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최후의 만찬을 필한 뒤에 주 예수께 대한 굳은 결심을 고백한 바 있었다.
“베드로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게 않겠삽나이다 … 베드로가 간절히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모른다 하지 않겠나이다 …”[6]
라고. 베드로는 자신의 진심을 토로하는 동시에 모든 제자들의 본심을 표시한 것이며 또한 2천년 후 오늘까지의 온 신도들의 적성(赤誠)[7] 을 대언하여준 것이었다. 기독시자로서 누가 베드로를 경애하지 않으리이까.
그런데 통분한 일이 아닌가. 베드로에게 대한 예수의 예고는 너무도 속(速)[8] 하게 적중하여버렸다. 우선 베드로는 스승이요 주이신 예수의 일생 최대 위기인 겟세마네의 기도에 “땀 흐르는 것이 큰 핏방울이 흘러 땅에 떨어지는 것 같은 때”[9] 에도 일시(一時)를 깨어 있지 못하고 육축과 같은 본능이 지배하는 대로 잠에 빠져 있어 나중 예수께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동정의 말씀을 감수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다음에 베드로는 제사장의 앞마당에서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라고 하여버렸다. 이 1절을 읽을 때는 독자 자신의 명의를 베드로에 바꿔놓고 읽음이 제일 유효한 독법의 하나일까 한다.
- 베드로는 아랫마당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쪼임을 보고 말하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한 자로다”하거늘, 베드로가 아니라 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하며, 앞마당으로 나가니 닭이 우는지라.
- 여종이 또 보고 곁에 섰는 사람에게 다시 말하되 “이 사람도 저무리라”하되, 또 아니라 하더니,
- 조금 있다가 곁에 섰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분명히 저 무리로다”하거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말하되 “너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하니 닭이 곧 두번째 울거늘 베드로가 예수계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닭이 두 번 우리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 하리라” 하심을 기억하여 생각하고 울더라.[10]
이 미말(尾末)의 일귀(一句) “생각하고 울더라”의 원문은 매우 강한 의미인데, 역문에는 그것이 나타나지 못하였다. Kai epibalon eklaien의 원의(原意)는 “몸을 땅에 던져 울었다” 또는 “머리를 가리우고 울었다”는 뜻이므로 이것을 ‘누가’ 22장 62절의 “곧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는 기술과 종합하여 “전력을 다하여 몸부림치면서 방성통곡하니라”고 읽으면 당시의 베드로를 생각함에 유조(有助)[11] 할까 한다.
한 번 입 밖에 나온 허언을 고집한 것이 수난에 저를 악에서 더 악한 데로 떨어지게 한(A lie once told was persisted in, and he quickly went from bad to worse.) 결과의 자아를 발견할 때에 아아, 동정할 베드로는 처음으로 전율한 것이었다.
발분하고 또 통회한 것이었다. 오호라, 이를 갈고 헛줄기를 끊어버린들 괘할손가. 두발(頭髮)을 뽑고 근골(筋骨)을 마구 찢은들 미칠손가. 저는 오직 “하늘이여, 무너지라. 땅이여, 비산(飛散)[12] 하라”하고 성량(聲量)[13] 을 다하여 호읍(呼泣)하는 외에 능사(能事)가 없어진 것이었다. 베드로가 “생각하여 울더라”하여 이 일귀를 무심히 독과(讀過)하여내는 개인과 민족과 시대는 모두 그 순경(順境)에 처하였음을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그 통곡이 얼마나 중대한 의미의 것이었던 것은 은혜로 말미암아 아는 이만이 알 것이다. 세례 요한이 여인의 낳은 자중에 가장 위대한 자이었음은 전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를 증거함에 있었다 할진대, 시몬 베드로의 3차 부정도 전인류를 대표하고 또 나를 대신한 점에서 통탄스러운 것이다. 만일 보름스 회의에서 루터가 굴복하였다고 가상하라. 이때에 우리 인류는 광부의 자식이 포효하는 음성으로써 ‘베드로의 통곡’을 다시 한번 더 들었을 것이었다. 그 후의 세계사를 상상하기만 하여도 몸서리쳐지지 않는가? 루터여, 장하도다. 베드로여, 분하고 아프도다.
베드로는 요한, 그 밖의 제자들과 같이 주의 십자가 사건으로써 실망과 비애에 떨어졌을뿐더러 그 위에 3차나 주를 모른다고 하여 자기의 비겁과 불신에 각성했을 때 다시는 주 예수께 뵈올 면목이 없음을 알고, 가능하면 주를 떠나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은 오인(五人)[14] 의 일상 경험으로도 용이히 추측할 수 있다. 시몬 베드로가 그물로써 의외의 대어를 획득하였을 때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지인이로소이다”[15] 라고 한 것도 동일한 심사였고, 시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여호화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 내가 동산에서 주의 소리를 듣고 나의 몸이 벗었음을 두려워 숨었나이다”[16] 함도 또한 같은 이유인 것이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대접치 아니하시고, 우리의 불의대로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실”[17] 뿐더러 주 예수는 7을 10배 하여서 용서하시고 자리를 3차 부정하던 베드로를 우선 찾아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셨다. 하나님 편에는 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누가복음’ 24장 34절과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기사와 병독(竝讀)할 때에 예수가 부활 후에 각별히 베드로를 만나신 것과 또 그 필요했음을 추찰(推察)[18]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하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3차나 부탁하시고 새로이 신임하심을 보면 베드로의 다복을 부러워 안할 수 없다.
그러나 ‘베드로의 통곡’이 전인류와 또 나 자신의 통곡이었던 것처럼 나도 또한 다복한 베드로인 것을 깨달으 것이고 감사할 것이며 부러워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