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애사/제1편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顧命篇[편집]

지금부터 사백 구십년 전 조선을, 가장 잘 사랑하시고 한글과 음악과 시표(時表)를 지으시기로 유명하신 세종대왕(世宗大王) 이십삼년 칠월 이십삼일. 이날에 경복궁 안 자선당= 동궁이 거처하시던 집에서 큰 슬픔의 주인 될 이가 탄생하시니 그는 세종대왕의 맏손자님이 시고, 장차 단종 대왕이 되실 아기시었다. 아기가 탄생하시기는 진시초였다. 첫가을 아침 별이 경회루 연당의 갓 피는 연꽃에 넘칠 때에 자선당에서는 아기의 첫 울음 소리가 난 것이다.

궁녀는 이 기쁜 기별을 일각이 바쁘게 대전마마께 아뢸 양으로 깁소매 남치마를 펄펄 날리며 달음질로 경회루로 달려 왔다. 이때에 왕께서는 매양 하시던 습관으로 집현전(集賢殿)에 입적(入直)하는 학사들을 데리시고 경회루 밑에서 연꽃을 보시고 계시었다. 이날에 왕을 모신 학사는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두 사람이었었다.

왕은 연꽃을 보시면서도 자선당에서 기별이 오기를 고대하시었다. 세자빈(세자빈)께옵서는 지난밤 술시부터 아기를 비르지시와 밤새도록 심히 신고하시었다. 왕께서는 옷을 끄르지 아니하시고 때때로 나인(內人)을 보내시와 물으시고 친히 내의(內醫)를 불으시와 약을 마련하시며 거의 밤을 새이시었다.

두 나인이 달려 오는 것을 먼저 본이는 왕이시었다. 아직도 젊은 두 학사는 연꽃 보기와 글짓기에 정신이 팔리어 있었다.

나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보시고 용안에는 근심되는 긴장한 빛이 보였다.

『상감마마 세자빈께옵서 시방 순산하시어 계십니다.』하고 앞선 늙은 상궁(尙宮)이 읍하고 허리를 굽힐 때에야 비로소 용안(龍顔)이 풀리시며 웃음이 돌았다.

『매우 신고하옵시다가 옥 같으신 아들 아기를 탄생하시옵고는 세자빈께옵서는 곧 잠이 듭시고 아기씨는 자선당이 쩡쩡 울리도록 기운차개 우시옵니다.』

왕께서는 원손(元孫)이 나시었다는 기별에 매우 만족하시와 용안에 웃음이 가득하시어 두 학사를 돌아보시며,

『이해에 경사가 많구나. 종서가 육진(六鎭)을 진정하고 돌아오고, 또 왼손이 났으니 이런 경사가 또 있느냐.』

『막비 성덕이시옵니다.』

하고 숙주, 삼문이 허리를 굽힌다.

『내 몸에 무슨 덕이 있을꼬. 막비 조종의 성덕이시라. 하늘이 큰 복을 이 나라에 내리심 이로다. 이봐라. 그래 아기가 크더냐?

“네 크옵시오.”

하고 한 상궁이 아뢰니 다른 상궁이,

“갓 납신 아기로 뵈옵기 어렵삽고 몸이 크옵심이나 울음 소리 웅장하옵심이나 삼칠일은 지녑신 듯하옵니다.”

왕께서는 만족하신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학자를 돌보시며,

“어떠할꼬? 오늘로 국내에 대사를 내리어 팔도 죄수를 다 놓아 주려 하나 어떠할꼬. 법도에 어그러짐이나 없을까?”하심은 혹시나 그릇됨이 있을까 삼가시는 성인의 뜻이시다.

신숙주가 나서며,

“대사를 내리심은 하해 같은 성은이시니 어찌 법도에 어그러짐이 있사오리까. 또 국가에 원자원손이 나옵시면 죄인을 대사하옵고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진휼(賑恤)하옵심은 열성조(列聖祖)의 유범(遺範)이신 줄로 아뢰오.”

한즉 왕은 다시 성 삼문을 보신다. 무슨 다른 의견이 있는가 하심이다.

삼문도 왕의 뜻을 살피고 국궁하며,

“하해 같으신 성은으로 대사를 내리시옵고 환과고독을 진휼하옵심이 지당하온 줄로 아뢰오.”

한다. 왕은 두 학사의 말이 일치함을 기꺼하시어 고개를 끄덕이시었다.

왕은 오늘 조회(朝會)에 어떤 모양으로 여러 신하의 하례를 받고 어떤 모양으로 팔도 죄수에게 일제히 대사령을 내리실 것을 생각하시면서 새로운 기쁨을 가지시고 연당 가으로 옥 보를 옮기신다.

수은 같은 이슬 방울을 얹고 밝은 가을 물 위에 뜬 연잎과 금시에 아침 하늘에서 내려 온 듯한 우뚝우뚝한 향기로운 분홍 꽃, 다 핀 꽃, 덜 핀 꽃, 있다가 필봉오리 이따금 꿈틀꿈틀 물결 일으키는 물고기. 늙은 손나무와 무성한 나무숲 사이로 불어 오는 첫가을 아침나절의 서늘한 바람, 그것에 날려 오는 새소리. 연당 가으로 걸어 돌아 가는 대로 눈에 뜨이는 중남산(終南山), 인왕산(仁旺山), 백악(白嶽). 파랗게 맑은 하늘에 활짝 날아 오를듯한 근 정전(勤政殿)의 가초 끝. 어느 것이나 태평 성대의 기쁨을 아뢰지 아니함이 없었다.

게다가 보산(寶算)이 겨우 사십 오 세밖에 아니 되신영기와 총명이 겸비한 임금과 그를 모신 이십 칠팔세 되는 충성 있고 재주 있는 두 신하.

왕은 문득 거니시던 발을 멈추신다. 두 학사는 무슨 말씀이 계실 것을 살피고 왕의 좌우로 한 걸음쯤 뒤떨어 지어 선다.

왕은 몸을 돌리어 두 학사를 이윽히 바라보시더니,

“경들에게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 나를 섬기던 너의 충성으로 이 어린 손자를 섬겨 다 고.”

하신다. 그 어성은 심히 무겁고도 슬픈 빛을 띠었다. 왕의 두 눈에는 눈물까지 빛나는 듯하였다.

젊은 두 학사는 왕의 말씀에 전신이 찌르르하여 굽힌 허리를 오려 들지 못할 뿐이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왕은 두 신화의 분명한 대답을 들으려 하였다.

『숙주야.』

하고 왕은 숙주를 먼저 돌아 보시었다. 숙주는 삼문보다 나이 위이므로 왕은 언제나 삼문보다 숙주를 먼저 하신다. 그것도 장유으 차례를 소홀히 아니하시는 깊으신 뜻이었다.

“네.”

하고 숙주는 더욱 감격하여 왕의 앞에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엎드렸다.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 내가 천추 만세한 후에라도 내 부탁을 잊지 말아라.”

숙주는 이마를 조아리며,

“상감마마. 성상을 섬기옵고 남는 목숨이 있사옵거던 백 번 고쳐 죽사와도 원손께 견마의 역을 다하옵기를 천지 신명 전에 맹세하옵나이다.

이렇게 아뢰는 숙주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엎디인 박석(薄石)을 적시었다.

왕은 다시 삼문을 향하여 같은 부탁을 하시니, 삼문은 다만 땅에 엎드려 느껴울 따름이요, 대답이 없다.

왕은 두 학사의 충성된 맹세를 들으시고 만족하시나 용안에는 추연한 빛이 맽히어 풀리지를 아니하였다.

“일어나거라. 진시 중이 되었을 듯하니 조회가 늦어서야 되겠느냐. 오늘 일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여라.”

하시고 걸음을 내전으로 옮기시었다.

왕께서 내전에 듭심을 허리 굽히어 지송하고 숙주, 삼문 두 사람은 서로 눈물에 젖은 얼굴 바라보며 맥맥히 말이 없었다. 살이 죽이 되고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새로 나신 아기에게 충성을 다하리라고 천지 신명에게 속으로 거듭거듭 맹세한 것은 무론이다.

땅땅하는 쇠 소리가 들리는 것은 벌써 내불당(內佛堂)에서 아기의 수명 장수를 축원하는 발원을 함인가.

왕께서 이렇게 아기의 전도를 근심하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세자궁(世子宮)께서 병약하심이다. 세자궁은 이제 삼십밖에 안 도신 젊으신 몸이 시지마는 나면서부터 포유지질(蒲柳之質)이신 데다가 연전에 한 일년 동안 이름 모를 병환으로 누워 계신 뒤로부터는 더욱 몸이 연약하여서 성한 날보다 앓는 날이 항상 많으시었다.

그러한 데다가 동궁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이신 세종께 혼정신성을 권함이 없으심은 물론이어니와 조석 수라를 숩실(잡수신다는 뜻)때에는 반드시 결에 읍하고 서서 수라 끝나시기를 기다리시고 또 밤에도 자리에 모시면 아무리 밤이 깊더라도 「물러가거라」는 명이 계신 뒤에야 물러나시었다.

이 모양으로 낮에 온종일을 부왕께 모시고 나서 밤 깊어 자선당에 돌아오신 뒤에도 곧 침소에 듭시는 것이 아니라, 늦게 저녁 수라를 숩시기가 바쁘게 좌필선(左弼善) 정 인지(鄭麟趾)와 우문학(右文學) 최만리(崔萬理) 두 사람을 비롯하여 신숙주, 성삼문,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최 항(崔恒), 이계전(李季甸),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같은 젊은 어학우(御學友)들을 부르시와 삼경이 넘도록 성리(性理)를 토론하시고 민정을 들으시었다.

그중에 정인지는 스승으로, 신 숙주 성 삼문은 벗으로 가장 경해하시와 오경이 되도록 붙드신 일이 가끔이었다. 이러한 일이 모두 세자의 건강을 해한 것은 물론이다.

세자께서 형제에 대하여 우애지경이 지극하심도 내의 가 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바다.

세자께서 세종 대왕의 맏아드님이시고 같은 모후(母后)심씨(沈氏)를 어머니로, 둘째가 후일에 세조 대왕이 되실 수양 대군(首陽大君)이시고, 셋째가 풍채와 문장과 글씨로 일세를 진동한 안평 대군(安平大君)이시고, 그 밖에 후일에 단종 대왕을 회복하려다가 청주(淸州) 옥에서 돌아간 금성 대군(錦城大君), 세종께서 가장 사랑하시었던 영응대군(永膺大君)같으신 이들이 계시어 팔 대군(八大君), 이 공주(二公主), 십 군(十君), 이 옹주(二翁主)나 동기가 있으시었다.

세자께서는 한 달에 몇 번씩은 반드시 이 여러 형제들을 번갈아 부르시와 우애하는 뜻을 표하시었고 여러 아우님들도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형님 되시는 세자궁께 달려 와서 청하였다.

열 여덟 아우님 중에 가장 말썽꾸러기로 부왕께 걱정을 듣는 이는 수양 대군과 안평 대군 두 분이었다. 수양은 호협하고 안평은 방탕하였다. 수양은 열 네 살에 남의 ㅈ비 유부녀의 방에서 자다가 본서방에게 들키어 발로 뒷벽을 차서 무너뜨리고 달아나기를 십리나 하였고, 열여섯 살 적에는 왕방산 사냥에 하루에 노루와 사슴을 스무 마리나 쏘아 잡아서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이 영기(李英奇)로 하여금,

“뜻밖에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신무(神武)를 다시 뵈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세종께서는 수양 대군이 너무 날래고 날뛰는 것을 지르기 위하여 항상 소매 넓은 웃옷과 가랑이 넓은 바지를 입히시고,

“너같이 날랜 사람은 넓은 옷을 입어야 쓴다.”

하여 경계하시었다.

이렇게 수양 대군은 부왕께는 걱정거리가 되고 궁중에서는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세자께서는 그것이 가엾어서 더욱이 아우님을 돌아보시었다. 그래서 한번은 수양 대군의 피 묻은 활에다가,

“철석기궁(鐵石其弓)이요, 벽력기시(霹瀝其矢)로다. 오견기장(吾見其張)이나 미견기이(未見其弛)호라. (활은 철석 같고 살은 벽력 같도다. 내 그 켕김을 보았으나 늦춤을 보지 못하다.)”

라고 쓰시었다.

안평 대군은 소절(小節)을 돌아 보지 아니하고 주색을 즐겨하였으나 수양 대군과 같이 우락부락하고 왁살스러워 말썽군은 아니었다. 다만 세상이 무에라거나 나는 술이나마시련다 하는 태도였었다. 그렇지만는 안평 대군에게도 숨길 수 없는 영웅의 기상이 있는 것은 말할 수 없었다.

그 밖에 금성 대군은 사리에 밝고 의리가 있고, 영웅 대군은 얌전하고…… 이 모양으로 여덟 분 대군이 모두 한가지 특색을 가지시었다. 그러나 이 여러 가지 성미를 가진 아우님들을 한결 같은 우애로 사랑하시는 세자에게는 성인의 도량과 인자함이 있으시었다.

이러한 모든 사정을 생각할 때에 세종께서 아기의 전도를 염려하심은 당연하다고 하지 아 니할 수 없다.

세종께서 세자를 사랑하시고 아끼느니만큼 세자의 병약하심이 더욱 가슴에 찔렸고 남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세자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아니한 것같이 생각키었다.

아드님 팔 형제(적지만)중에서 다른 아드님 다 건장하신 중에 세자 한 분이 가장 어지시면서 병약하심이 아버지의 마음에 더욱 애처로왔다.

게다가 세자께서는 삼십이 되시도록 자녀간 새육됨이 없었다. 휘빈 김씨(徽嬪金氏)와 순빈 봉씨(純嬪峯氏)가 다 생산이 없이 폐함을 당하고 지금 아기를 낳으신 현덕 빈 권씨(顯德 嬪 權氏)도 열 네 살에 양제(良娣)로 동궁에 들어와 오 년 전에 양원(良媛)으로 봉함이 되어 처음으로 잉태하시매 세자빈에 봉함을 받아 경혜 공주(敬惠公主)를 낳으시고는 다섯 살 터울로 이제 원손을 낳으시니 세자의 기쁨인들 어떠하며 세자빈의 기쁨이야 더욱 말할 것 도 없지마는 세자를 애처롭게 생각하시는 왕께서 기뻐하심이 결코 심상할 것이 아니다.

불행히 세자는 비록 왕위에 올라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시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기가 자라면 그 뒤를 이을 것이라 하여 왕의 마음은 기쁘시었다.

그러나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수양 대군, 안평 대군 이하 「칠 대군이 강성하여」하고 일컫는 여러 대군들이 있고, 그중에도 수양 대군 같은 패기 만만(覇氣滿滿)한 이가 있으니, 원 천석(元天錫)의 말과 같이 장차 형님 되시는 세자를 극(克)하려는 기미도 있거든, 하물며 세자마저 돌아가시고 어린 아기가 등극하시게 되면 필시 무슨 불길한 사단이 있을 것은 누구나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한 일일 뿐더러 더구나 이 아드님 저 아드님의 성미와 장처 단처를 잘 아시는 명철하신 부왕의 마음이시랴.

왕이 신숙주, 성삼문에게 아기를 부탁하심도 이 때문이다. 숙주, 삼문이 지금은 비록 나읻 어리고 벼슬도 낮지마는 아기가 자라 왕위에 오르실 때에는 황희(黃喜), 황보인(皇甫仁), 정분(鄭笨),김 종서(金宗瑞)같은 이들은 벌써 늙어 죽거나 살아 있더라도 권세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이렇게 왕께서 생각하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든든히 하기 위하여 그날 조회가 끝난 뒤에 황희, 황보인, 김종서, 정분, 정인지 다섯 사람을 머물리시고 다시 아기의 후사를 부탁하시었다.

사흘 안에 대사의 은명이 팔도에 다 돌아 여러 천명 죄수들이 일제히 청천 백일을 바라보게 되고 전국 백성들은 국가에 원손이 탄생하시었다는 것보다도 인자하고 병약하신 세자궁께서 아드님을 얻으심을 진정으로 송축하였다.

불쌍한 환과 고독들은 넉넉히 진휼함을 받았고, 벼슬아치들은 일품씩 가자를 받았고, 전국 각 대찰에서는 일제히 새로 나 신 원손의 수명장수를 축원하는 큰 재를 베풀어 중들과 거지들이 배를 불리게 되었다.

왕께서 불도를 숭상하시므로 아기 나신 날부터 칠월 이십 오일까지 사흘 동안 일체 짐승을 죽이지 말라시는 전교를 내리시어 금수까지도 아기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었다. 진실로 팔도 강산에 귀신과 사람과 짐승이 한가지로 이 아기나심을 기뻐하였다. 이렇게 축복받아 나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되 랴.

그러하건마는 아기에게는 벌써부터 슬픔이 오기 시작하였다.

아기가 나신 이튿날, 칠월 이십 사일에 아기의 어머니 되시는 세자빈 권씨는 사랑하는 아 기에게 젖꼭지 한 번도 물려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었다.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들으신 때부터 꼭 일주야 동안 아기를 만져 보시었다. 고통이 심하고 기운이 탈진항 도저히 살지 못할 줄을 알으신 때에 세자빈께서는 그의 친정 어머니 되는 화산부 부인 최씨(花山府夫人 崔氏)와 세종 대왕께 모시어 한 남군(漢南君), (永豊君)영풍군 두 아드님을 낳고 장차 아기에게 진유(進乳)할 혜빈 양씨(惠嬪楊氏)에게 아기를 부탁하시었다.

세상에 나오신지 일주야만에 어머님을 여의신 아기는 혜빈 양씨의 젖으로 자라나시었다.

혜빈은 본래 천한 집 딸로서 인물이 아름다운 까닭으로 열 세 살에 나인으로 뽑히어 들어와 중전마마의 귀염을 받으며 궁중에서 자라났다. 십 오륙세가 되매 대단히 자색이 아름답고 또 영리하여서 점점 왕의 총애하심을 받게 되어 열 여덟 살에는 한남군(漢南君)을 낳았고 스물 네 살인 작년에는 둘째로 영풍군(永豊君)을 낳았다. 영풍군은 아직 돌을 바라보는 어린 아기로서 원 손 아기와 젖을 나누어 먹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아기를 위하여 따로 유모를 구하려 하였으나 왕께서는 특별하신 처분으로 총애 하시는 혜빈으로 하여금 아기에게 젖을 드리게 분부하시었다. 혜빈도 세자궁과 동갑일 뿐 아니라 혜빈이 지체가 낮다 하여 궐내에서 항상 휘둘려 지낼 때에 세자빈께서는 부왕이 사랑하시는 서모로 정답게 대접하시었음을 매양 감격하게 여기던 차라 왕의 분부가 계시기 전에도 아기에게 젖을 드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왕의 뜻이나 혜빈의 뜻이니 비록 기출 되는 영풍군에게 다른 유모의 젖을 드리더라도 아기에게는 남의 젖을 아니 드릴 결심이었다.

그러나 우애지심이 많으신 세자께서는 아드님 되시는 아기를 위하여 아우님 되시는 영풍으로 하여금 어머니의 젖을 잃게 하기를 차마 하지 못하시와 혜빈의 젖을 두 아기에게 같이 나누어 드리도록 분부가 계시었다. 그 때문에 따로 유모 하나를 가리어 부족한 젖을 채워 두 아기에게 드리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매 혜빈은 한 달이면 이십일은 동궁인 자선당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기는 마치 혜빈의 친아들과 같은 사랑을 받고 길러고서삼촌 되는 영풍군과 아기와는 마치 쌍둥이와 같았다. 후일에 영풍군이 단종 대왕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것도 오랜 인연이라 할 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 세자께서는 반드시 아기를 부르시와 안아 주시었다. 세자께서는 아기를 안으실 때마다 돌아가신 세자빈을 생각하시와 낙루하시는 일도 있었다.

세자께서 아기를 불러 안으실 때에는 반드시 영풍군도 안아 주시고 그 귀애하심이 조금도 차별이 없으신 듯하였다.

다섯 살 되는 경혜 아기는 반은 동궁에 있고, 반은 외조모 최씨를 따라 있었다.

최씨는 외마님인 세자빈이 국모(國母)라는 존칭도 못받아 보고 한창살 나이에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여 아직 육십도 다 못되었건마는 갑자기 눈이 어두워질 지경이었다. 부인은 늦어도 열흘에 한 번씩은 궐내에 들어와 외손자 되시는 어린 아기를 안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세자의 특별한 주선인 것은 물론이다.

“눈 모습이, 눈 모습이……”

하고는 말이 맟지 못하여 목이 메었다. 아기의 눈 모습이 천연 그 어머니 되시는 세자빈 권씨였다.

그러나 이 아기가 자라시면 장차 세자궁이 되시고 상감마마가 되실 것을 생각하면 슬픈 중에도 희망과 기쁜이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웬견이 아기 상감님 되시는 것을 보고 죽으리?

하고 부인은 입 밖에 말을 내지는 못하나 아기를 대할 때마다 늘 혼자 한숨을 쉬었다. 십 칠년 후에 자기도 이 외손자 때문에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은 뜻도 못하였을 것이다.

어머니를 여윈 아기와 그 단 한 분 동기 되는 누님 경혜 아기는 남달리 인자하신 아버지와 늙은 외조모와 혜빈 양씨의 사랑 속에--- 또 조부님 되시는 왕의 특별하신 자애 속에서 모락모락 자랐다. 삼칠일, 백일 다 지내시와 아바마마께 안기실 때에는 그 기르신 수염을 잡아뜯게 되시었다.

이렇게 아기가 목을 가누고 사람을 알아보게 되신 때부터 세종 대왕께서는 가끔 아기를 데려 오라 하시와 몸소 품에 안으시고 대궐 뜰로 거니시기를 자주 하시었다.

한번은 아기를 안으신 채로 집현전으로 행차하시었더니 마침 입직하던 신숙주와 성삼문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지영하는 것을 보시고,

“이 애를 부탁한다.”

고 한 번 다시 말씀하시었다. 두 사람은 지난해 경회루 하교를 생각하고 황송하여 땅ㅇ 엎드려 눈물을 흘리었다.

어느덧 십 이년이 지났다.

아기가 자라나시어 왕세손(王世孫)이 되시고 왕세자가 되시었다가 임신(壬申) 오월 십 사 일에 등극하시와 왕이 되시니 이 양반이 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시는 단종대왕(端宗大王)이시다.

그렇게 조선을 위하여 큰일을 많이 하신 세종 대왕께서 경오(庚午)년 이월에 승하하신지 삼년이 지나서 지난 이월에 대상이 지나고, 그 후 석달이 못되어 임신 오월 십 사일에 우리가 지금껏 세자라고 불러 오던 문종 대왕께서 승하하시어 이게 열두 살 되시는 아기께서 왕위에 앉으신 것이다.

오년 내에 연해 세 번(오년 전에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승하) 국상이 나고 어리신 임금이 등극하시니 국내는 슬픔과 근심에 찼다. 장차 큰 폭풍우가 오려는 천지와 같이 조선 팔도는 암담한 구름에 싸였다.

처음 세종 대왕께서 승하하시매 세자께서는 부왕의 영구(靈柩) 앞에서 왕위에 오르시었다. 왕께선 애통하시는 양은 진실로 차마 뵈올 수 없었다. 때는 이월이라 중춘절후라 할 만 하건마는 그해 따라 늦추위가 심하여서 세종께서 승하하신 때에는 풀리었던 한강이 다시 붙을 지경이었다.

그러하건마는 왕께서는 병약하신 옥체도 돌아 보지 아니하시고 잠시도 여막으 ㄹ떠나심이 없으시었다. 아무리 신하들이 추운 동안 방에 듭시기를 청하여도 왕은 우시고 듣지 아니하시었다. 본래 병약하신 몸인 데다가 지난 일년 동안 등에 큰 종처를 앓으시와 아직 합차이 덜 된 몸이시니 가까운 신하들이 염려함은 물론이어니와 누구나 이 일을 아는 이는 인자하시고 병약하시고 효성이 출천하신 왕을 위하여 근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종 대왕께서도 오십이 가까우시며부터 매양 옥체 미명하신 날이 많으시와 승하하시기 육년 전 을축년부터는 세자께 참결서무(參決庶務)하랍신 하교가 계시어, 이래 육 년간 세자께서는 부왕을 대리하시와 군국 대사르 참결하시었다. 이렇게 낮에 종일 정사를 보시고도 밤이면 부왕의 곁을 모시어 시탕의 정성을 다하시었다. 밤이 늦더라도 왕께서 두세 번 물러 나라시는 분부가 계시기 전에는 물러나시는 일이 없으시었다.

더구나 세종께서 승하하시기 전 두어 달 동안은 세자께서는 거의 하루도 옷을 끄르고 편안히 쉬신 적이 없으시었다.

이리하여 왕이 되신 뒤에도 첫째는 혼전에 모시기에, 둘째는 만기(萬機)를 친재(親裁)하 시기에, 셋째는 학문을 연구하시고 민정을 살피시기에 잠시도 한가하신 적이 없으시었다.

그렇게 병약하신 몸으로 그렇게 번극하게 일을 보시니 건강은 갈수록 더욱 쇠약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판서(判書) 민신(閔伸)같은 이는 간일시사(間日視事)를 주장하였다. 자세히 말하면 왕께서 하루는 쉬시고 하루는 정사를 보시게 하자는 뜻이다. 당시 영의정(領議政)이던 황희(黃喜)도 민 신의 뜻에 찬성하였고 다른 노신(老臣)들도 왕을 사랑하는 진정으로 속으로는 민 신의 말에 찬성하였다. 그래서 가끔 왕께 간일시사하시고 이양정신(頤養精神)하 시기를 간하였으나 왕은,

“임금이 게으르면 천년을 사들 무엇하리.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면 일년만 살아도 족하다.”

하시고 듣지 아니하시었다. 게다가 정인지(鄭麟趾) 일파는 임금이 정사를 게을리하심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 하여 민 신 일파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이리되면 기운 없는 늙은이들은 성인의 뜻을 내세우는 정 인지 일파의 의견을 반대하고 기어코 왕을 휴야하시게 할 용기가 없었다.

이래서 왕께서는 부왕의 거상을 다 벗자마자 그렇게도 지극히 사모하시던 부왕의 뒤를 따르시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하늘이 왕의 효성을 보사 삼년상을 마칠 수명을 왕에게 허하신 것이다.

현덕왕후(顯德王后)승하하신 뒤로 심년이 넘도록 문종 대왕은 다시 왕후를 책봉하신 일이 없으시고 지존의 몸으로 혼자 계시었다. 세종 대왕 승하 전에 세종께서도 세자비 책립에 대하여 근심이 계시었으나 세자께서 장남하실 뿐더러 덕이 높으심을 아시므로 굳이 혼인을 하 시도록 명하심도 없으시었고 혹 근신(近臣)이 그러한 뜻을 여쭈오면 왕은,

“남녀와 음식은 사람의 욕심 중에 가장 큰 것이지마는 나같이 병약한 사람은 그것이 다 긴치 않으이.”

하고 웃으실 뿐이었다.

왕은 두 분 아기(세자와 경혜 공주)를 지극히 사랑하시었다. 정사가 끝나시고 내전에 드옵시면 두 분 아기를 부르시어 그날그날 배운 글도 외우라 하시고 온종일 무엇하고 논 것을 아뢰라 하시와 칭찬하시고 책망하실 것이 있으면 앞에 불러 세우시고 엄숙하고도 인자한 낯빛과 말소리로 책망하시었다 그리하되 . 과도히 익애(溺愛)하심도 없고 과도히 엄히 하심도 없으시었다.

아기들도 아바마마 한 분을 아버지 겸 어머니 겸으로 사모하고 따르시어 아무리 장난에 정신이 없으시더라도 왕께서 내전으로 들어오실 시각이 되면 먼저 들어와서 부왕이 듭시기를 기다리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경혜 공주가 참판(參判) 정충경의 아들 영양위(寧陽尉) 정종에게로 시집 간 뒤에는 오직 세자 한 분만을 곁에 두시고 사랑하시었다.

이 모양으로 왕은 다만 병약하실 뿐 아니라 가정지락이 없으시었다. 동궁으로 계실 때에 두 번이나 세자빈을 폐하게 된 것도 무론 왕의 뜻은 아니었다.

초취이신 휘빈(徽嬪) 김씨는 상호군(上護軍) 김오문(金五文)의 딸로 심히 자색이 아름다웠다. 그때 세자의 나이 열 다섯 휘빈도 동갑이었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골격이 강대하시고 얼굴이 동통하시어 이 어린 신랑 신부는 마치 빚어 놓은 듯이 아름다우시다고 근시하는 사람들이 혀를 찼었다.

두 분의 첫사랑은 자못 깊으시어 세자께서 공부를 폐하시는 난이 있고 얼굴에 핏기가 적어지신다고 수근거릴 지경이었다. 가례(嘉禮) 후 이태를 지나서 두 분이 열 일곱 살이 되어 세자는 남자다운 기상이 더욱 씩씩하시고 휘빈은 아침 이슬 받은 함박꽃같이 환하게 피실 때였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서로 사랑하는 젊은 한 쌍을 축복하는 이보다도 새우는 이가 많았으니, 그중에 가장 심하게 새운 이가 세자의 모후(母后)이신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시 었음은 물론이다. 며느리 귀애하는 시어머니 없다고 하거니와 원체 기숭하시기로 호랑이같 이 두려움을 받으시는 왕후께서는 아드님이신 세자를 대단하게 사랑하시느니만큼 그 아름다 운 며느님을 미워하시었다. 중전께서 세자빈을 미워하시는 눈치를 본 궁녀들은 나도 나도 하고 휘빈의 있는 흉 없는 흉을 중전마마께 아뢰어 바치었고 원체 며느님이 미우신 왕비께서는 며느님을 흉보는 말이면 다 옳게 들으시었다.

문종(文宗), 세조(世祖) 두 분 대왕과 그에지지 않는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같으신 영걸을 낳으신 그가 결코 범상한 아낙네가 아닐 것은 물론이요, 동방의 요순(堯舜)이라고 부르는 세종 대왕을 도우실 만할진댄 덕으로도 부족하시지 아니하련마는 휘빈 을 미워하실 때에는 오직 시기뿐인 범상한 아낙네시었다.

마침내 자선당에서 요기로운 것을 찾았다. 김씨가 이것으로 세자를 혹하게 하였다 하여 어떤 물건을 휘빈 방에서 집어다가 중전께 바친 궁녀가 있었다. 이것이 휘빈이 열 여덟 살 적 일인데 그것이 이유가 되어 휘빈은 폐함이 되었다.

휘빈이 세자를 호리기에 썼다는 요물이란 것은 부적이었다. 이 부적을 한 장은 몸에 지니고, 한 장은 남편의 옷 속에 넣고, 한 장은 내외가 자는 방바닥에 감추고, 한 장은 땅속에 묻고, 한 장은 불에 살라 하늘로 올려 보내면 남편의 마음이 그 아내에게 혹하여 다른 계집에게로 가게를 못하는 것이라고 궁중에 출입하는 어떤 늙은 승이 중전마마께 설명을 하였다.

이러한 요기로운 부적이 휘빈의 방에서 드러났다 하여 궁중은 간 곳마다 수군거리고 휘빈에게 대한 흠담은 더욱 많아지어 그 말을 다 듣고 보면 휘빈은 마치 세상에 무서운 요물인 듯하였고, 어떤 간사한 궁녀는 휘빈이 구미호(九尾狐)의 화신이어서 밤이면은 어디를 나갔 다가는 이슬에 폭 젖어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는 년까지도 있었다.

마침내 세종께서는 중전마마와 자리를 같이 하시와 며느님인 휘빈을 부르시와 전후 시말을 물었다 여러 날 괴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초훼한 세자빈의 모양은 참으로 가련하였다. 시아버님 되시는 왕께서는 본래 휘빈을 귀애하시던 터이라, 마음에 측은히 여기시어 이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시었다.

“아가 듣거라. 네가 요기로운 부적을 몸에 지녔다 하니 그런 일이 있느냐. 만일 그렇다 하면 그것은 용서하 수 없는 큰 죄로다. 필부의 집에서도 괴변이라 하려든 후일에 일국의 국모가 될 자리에 있어서 말이 되느냐. 고래로 이런 일은 애매한 누명을 쓰는 수가 많은 것 이니 네 바른 대로 아뢰어라.”

하고 마음에 느끼시는 자애지정을 억제하시고 가장 엄숙하게 말씀하시었다.

만일 왕께서 휘빈을 특별한 자애가 없으시면 이만한 일이면 휘빈은 대궐 마당에서 무서운 국문(鞠問)을 피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 되면 좌우에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서 그 부끄럽고 욕됨이 비할 데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중전과 궁녀들은 물론이어니와 승정원(承政院),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말썽 좋아하는 신하들도 세자빈을 엄하게 국문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휘빈은 부왕의 물으심에 대하여 다만 느껴울 뿐이더니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한 번 일어 절하고 들릴락말락 가늘고 떨리는 소리로,

“상감마마 모두 미천한 소신이 덕이 없는 탓이옵니다.”

이 말에 중전이 펄쩍 뛰며,

“흥, 그래 네가 애매하단 말이냐. 상감께옵서 인자하신 것을 믿고 그렇게나 말씀 사뢰서 네 죄를 면해 보려고? 천지 신명이 다 아시고 미워하시려든!”

하고 독한 눈매로 마루 위에 엎드린 휘빈을 노려보았다.

왕은 중전의 성나신 양을 보시고 잠간 양미간을 찡그리시더니,

“듣거라. 말 한 마디에 네 목숨이 달렸으니 분명히 대답을 하여라. 네 방에서 요기로운 부적이 나왔다 하니 그것이 진실로 네가 지녔던 것이냐, 아주 모르는 것이냐.”

휘빈은 입술을 물어 울음을 참고 이윽히 생각하더니 잠간 눈물 어린 눈을 들어 중전을 우러러 보고,

“신명을 그일지언정 어찌 상감마마를 그이리이까. 부적은 몸에 지닌 적이 없사옵고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본 적도 없사옵니다.”

하고 느껴 울었다.

이 말에 중전은 뛰어 일어서서 분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펄펄 뛰며,

“오, 요망한 것이 이제는 나를 잡으려 드는구나. 내가 너를 해하려고 이 일을 꾸며 내었 다는 말이로구나. 상감께서 밝히 살피시오.”

하고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사내바람이 나서 부르르 띠신다.

왕은 부적을 찾았다는 궁녀를 불러 세자빈과 대질을 시키려 하였으나 세자빈은 다시는 입을 열지 아니하고 울지도 아니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면 도리어 벗어나지 못할 줄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휘빈의 이 태도는 부왕은 무론이어니와 세상 사람의 동정을 끌어서 중전의 비위를 맞추려는 간사한 무리들을 제하고는 대개는 휘빈의 애매함을 불쌍히 여기었다.

그때 세자는 세자빈을 사랑하시는 정이 더욱 깊으시었으나 열 여덟 살 되신 세자로는 어찌할 도리도 없었다.

아버지 되시는 왕의 특별하신 처분으로 국문을 당하기를 면하고 휘빈은 영광스러운 세자빈의 지위에서 쫓겨나한 죄인 김씨가 되어 한 깊은 눈물을 뿌리고 그날 밤이 들기를 기다려 겨우 시녀 두 사람을 데리고 궁녀 타는 가마에 앉아 말 없는 무리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건춘문을 나서 삼청동 아버지의(建春門) (三淸洞)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에 친정에서도 곡성이 진동한 것을 말할 것도 없다.

휘빈이 폐함이 되어 동궁에서 쫓겨나감으로부터 세자는 며칠 동안 침식을 폐하시고 휘빈 을 생각하시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길이 없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그렇게 쾌활하시던 세자의 용모와 태도에는 침울한 빛이 돌게 되고 매사에 비감하고 상심하시는 일이 많게 되었다. 그 뒤에 뜻을 나라 다스리는 큰일에 두시었으나 이 인생의 첫 비극의 쓰린 기억은 세자의 일생을 어둡게 하였다.

휘빈이 폐함이 된 뒤에 곧 다시 간택(揀擇)이 계시어 종부사 소운(宗簿寺少尹)봉려(奉礪)의 딸과 둘쨋번 가례를 이루시니 이 이가 순빈(純嬪)이시다.

순빈은 중전의 영지(令旨)로 고르신 재색이 아름답지 아니한 어른이었다. 얼굴만 수수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영리하다 하기보다는 어리석한 편이었다. 아름답고 재주 있는 휘빈에게 데이신 까닭이다.

순빈 봉씨는 아무 일이 없이 무사히 지내기는 하였으나 세자빈으로 계신지 팔년 동안에 한 번도 성태함이 없으니 이것이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중전께서는 여러 번 근시하는 사람 들을 시키시어 세자께 후사(後嗣)를 구하심이 마땅하단 말씀을 사뢰고 세자빈이 성태를 못 하시니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실 것을 권하며 여러 번 자색 있는 나인을 거천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원래 여색에 마음이 적으신 데다가 정실밖에 다른 여자를 가까이함이 가도(家道)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라 하여 이러한 꾀임에 웅하지 아니하시었다.

마침내 중전께서는 참다 못하여 직접 세자를 부르시와 속히 다른 여자를 들이어 후사를 얻으시기를 권하실 때에 그 간절하심이 명령이나 다름이 없었다.

“동궁은 내 말도 아니 들으려나?”

하실 때에는 효성이 깊으신 세자는 더 거역할 도리가 없으시었다.

중전의 근심하심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다. 사삿집에서도 아들이 삼십을 바라보도록 손자를 못 보면 근심이 되려는 하물며 왕가이랴. 더구나 세종 대왕께서 항상 미령하신 때가 많으시니 언제 세자께서 즉위하실는지 미리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세자께서 즉위하시어 왕이 되시면 다시 세자를 책림하시어야 할 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궁중에 항상 불안이 있 는 것이다. 언제 어떠한 음모가 일어나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사단이 있을는지도 모르는 것 이다.

이 때문에 세자빈이 신 순빈께서 생산을 못하심은 다만 중전마마의 걱정이 될 뿐더러 대전 께서도 근심하시는 바가 되었다. 말하자면 내외분이 걱정하신 결과로 중전께서 동궁께 재촉 하시는 것이다.

이리하여 수칙(守則) 양씨(楊氏)가 뽑히어 세자의 침석을 모시게 되었다.

양씨는 자색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양씨를 택한 것은 이유가 있다. 순빈이 너무도 자색이 없으시기 때문에 세자께서 예전 휘빈 때 모양으로 그 방에 듭시는 일이 드물다는 까닭이다. 그래서 아무쪼록 아름아운 여자를 택하노라 한 것이 곧 수칙 양씨였다.

양씨가 동궁에 들어온 뒤로 순빈 봉씨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그렇게 순하고 어리석해 보이는 순빈의 마음 속에는 사람들을 놀랠 만한 질투의 불이 들어 있었다.

세자께서 양씨와 자리를 같이하신 날인면 순빈은 온종일을 울음으로 지내고 좌우에 모시는 시녀들을 까닭없이 못 견디게 굴었다.

이렇게 되면 순빈과 수칙 양씨와는 아기 낳기 경쟁을 하게 된다. 순빈 편으로 보면 아무 리 자기가 지금은 세자빈이라 하더라도 후사 될 아기를 낳지 못하면 장래가 캄캄하고 아무리 시방은 종이나 다름없는 양씨라도 세자빈보다 먼저 사내 아기만 낳아 놓으면 비록 당장에 세자빈으로 승차는 못한다 하더라도 생전 융숭한 대접을 밤을뿐더러 그 아기가 자라 임금이 되시는 날에는 그의 영화가 그지없을 것이요, 잘 된면 왕후로 추숭을 받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양씨의 자색은 젊으신 세자의 마음을 끌었다. 아무리 남녀에 담박하신 세자께서도 품속에 들어온 어리고 아리따운 양씨를 떠밀어 내일 아무 까닭도 없었다. 점점 순빈께 발이 머시고 양씨에게 발이 잦으시었다.

게다가 양씨가 동궁을 모신지 일년쯤 되어 세자와 금술이 한창 좋을 때에 양씨가 잉태했 다는 소문이 궁중에 퍼지었다. 이 소문은 대전마마, 중전마마께도 들리었다. 이것이 기쁜 소문인 것은 물론이다.

양씨가 입맛이 제치고 머리가 아프고 구역을 하여 눕게 된 때 상감께서는 친히 내의를 명하시와 태모에 좋은 약을 쓰게 하시고 중전마마께서는 하루 두 번씩 궁녀를 동궁으로 보내 시와 보약을 달이게 하고 양씨에게 여러 가지로 고마우신 말씀을 내리시었다.

이렇게 되면 세력을 따르는 동궁에 있는 궁녀들은 하나씩 둘씩 거의 다 양씨를 가까이하고 순빈은 우습게 여기게 되었다. ‘시집 온 지 팔년이 되어도성태 못하는 사람이 인제 성 태할라고’하는 것이 여러 궁녀들의 의견이었다. 또 능하지 못하신 순빈은 평소에 궁녀들의 마음을 살 줄도 몰랐다. 고마운 말 마디, 피륙 자, 먹다 남은 음식 부스러기…… 이런 것들이 의리 없고 욕심 있는 우리외혼까지 사는 줄을 순빈은 모르시었다.

순빈은 분한 생각과 질투에 몸이 타는 듯하였다.

이때에 순빈의 친정 어머니 되는 이씨는 옳은 말을 따님 되시는 순빈에게 가르치었다.

그 말은 이러하다---.

“성태 못하는 것도 천생 팔자지요. 아무리 자녀를 많이 낳더라도 여편네로 태어나서 시앗을 보는 것은 사삿집에서도 면치 못할 일이어든 하물며 궁중일까 보오리까. 국모(國母)가 되려면 삼천 궁녀를 다 시앗으로 알고 거느려 갈 도량이 없으면 아니 되는 것이요. 질투는 사삿집에서도 칠거지악에 돌거든 하물며 궁중이오리요. 질투하는 빛이 드러나기만 하면 실 덕(失德)이라 하여 물러날 것이니 애시에 그러한 빛도 보이지 마시오. 여편네로 태어났으면 참는 것이 일생으로 아시오.”

이렇게 우는 딸을 간곡히 권하고 나중에는,

“양씨에게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물어 보고 이따금 맛나는 음식도 만들어서 보내되 어머니가 딸에게 하듯 하시오. 그러하면 인자하신 세자께서 그 덕에 감동하시와 정을 물리실 것 이요. 대전 중전께옵서도 칭찬하실 것이니 이러하면 비록 일생에 잉태하지 못하더라도 그 지위가 위태하지 아니하오리다.”

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순빈은 이 말대로 실행할 만만 능력이 없었고 게다가 순빈의 비위를 맞추어 꾀이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의 지혜로운 계책보다도 간사한 꾀임이 질투로 흐린 순빈의 마음에 잘 들어 왔다.

간사한 꾀임이라 함은 궁녀 수규홍씨(守閨洪氏)의 꾀임이다.

홍씨는 얼굴이 아름답기로 남도 알아 주었지니와 저도 믿었다. 열 다섯 살에 궁녀로 들어 와서부터 동궁에 있었다. 그가 궁중에 들어 올 적에 그의 부모(아비는 늙은 별감이다)와 이 옷은 다 얼마 아니하여 반드시 영화를 누리리라고 믿었다. 홍씨가 집에서 자라날 때에 그를 보는 사람이야 누구나 그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지 아니하였을까.

그러나 동궁에 모신지 십년이 되도록 아직 좋은 운수가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휘빈이 생존하신 동안에야 어느 누가 감히 세자를 눈걸어 보았으랴. 후궁 삼천을 다모아 놓더라도 휘 빈의 아름다움을 당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휘빈이 나가시고 순빈이 들어오신 때부터는 적이 아름다운 자색에 자신이 있는 동궁 궁녀들은 혹시나 세자의 눈에 들어 볼까 하고 외기러기 사랑을 바치는 이도 한둘만이 아니었다. 홍씨가 그중에서 자색으로나 세자께 가까이 모시기로나 으뜸이었다.그러나 세자께서는 누구에게나 다정하시면서도 누구에게나 엄정하시었다. 좌우에 모시는 어린 궁녀들을 마치 동생같이, 자식같이 귀애하시었다. 그렇지마는 세자께서는 어느 궁녀의 손목 한 번 아니 잡으시기로 유명하시었다.

세종 대왕께서는 아주 색에 범연하신 양반은 아니시어서 귀여운 궁녀를 보시면 가까이 부르시기도 하고, 농담도 하시고, 혹 손목을 만지시기도 하고, 마음에 듭시면 잠자리도 모시게 하시었다. 그래 그들의 몸에 아드님 열분, 따님 두분(살아서 자란 이만)이나 두시었다.

그러나 세자께서는 영 그런 일이 없으시었다.

그래도 홍씨는 기어코 세자의 마음에 둘려고 결심을 하였다. 비록 나이는 스물 다섯이나 되었건마는 아직도 처녀로 있는 그는 세 살은 넉넉히 젊어 보이었다. 여자로는 익을 대로 익은 시대였다. 피부에 기름은 오를 대로 오르고 윤택은 날 대로 났다. 그렇지마는 앞으로 이삼ㄴㄴ만 지나면 이 꽃은 아주 쇠어버리고 만다. 홍씨는 그런 줄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였다.

이때에 수칙 양씨의 사촌 되는 지밀나인 양씨가 이제 겨우 열 일곱 살이면서 왕의 귀여움을 받아 거의 밤마다 왕을 모시게 되어 단박에 상침(尙寢)이 되었다. 중년이 되신 왕께서는 남은 사랑을은 통으로 어린 양씨에게 쏟으시는 듯하였다. 중전께서는 왕이 어린 양씨에게 혹하신 것을 보고 중년된 부인의 질투로 불같이 화를 내시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이 이가 장차 우리 불쌍하신 어린 임금 단종 대왕께 젖을 드리고 마침내 그 어른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게 된 혜빈(惠嬪) 양씨다.

이런 것을 보면 홍씨의 심중이 자뭇 조급하다.‘모두 양씨 판인가’이렇게 궁중에서는 수군거리었다.

그런데 수칙 양씨가 세자를 모시어 아기를 배었다. 인제는 홍씨의 운수는 영영 가버린 것이다. 홍씨는 한껏 슬프고 한껏 분하였다. 저도 상감을 모시는 궁녀만 되었더면 벌써 사랑을 받아 아들 딸도 낳고 빈(嬪)도 봉함이 되었을 것을 어찌어찌하여 자선당(資善當) 시녀가 되어 부처님 같은 동궁을 만난 탓으로 꽃 같은 인생을 허송하게 되었다. 마지막 기회를 빼앗아 가는 양씨를 곱게 둘 내가 아니다. 홍씨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마마!”

하고 홍씨는 울고 앉았는 순빈 앞에 읍하고 섰다. 순빈은 혹시나 아침에나 세자께서 자선당으로 들어오실까 하고 몸을 꾸미고 계시다가 해가 높아도 소식이 없으시매 우시는 것이다.

홍씨의 눈에는 눈물이 있었다.

“왜 그러느냐. 양가년이 뒈졌단 기별이나 있느냐?”

하고 순빈은 눈물에 젖은 낯을 들었다. 그 눈에는 원망과 독이 가득 찬 듯하였다.

“양씨는 오늘부터 적이 입맛도 나서 아침 진지는 이제 한 주발을 다 자시고 있다가 점심에 드린다고 시방일변 곰국을 끓이고 일변 녹용을 달이노라고 눈코 뜰 새 없사옵고 상감마마, 중전마마께옵서도 여러 가지 음식을 하사하시와 마치 잔치나 벌어진 듯하옵니다.”

“잘들 하는구나. 그래 동궁마마는 또 양가년한테 계시더냐?”

네 마침 동궁마마께옵서는 양씨의 “ , 머리와 손을 만지고 여러 가지 정다운 말씀을 하시는 모양을 뵈오니 자연분하고 비감하와 눈물이 흘렀습니다.”

순빈은 이를 뽀드득 갈았다. 그렇게 순한 순빈의 속에 어디 그러한 독이 들었던고 하고 홍씨도 놀랐다.

순빈은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뛰어 나가려 하였다.

홍씨는 꿇어 앉아 순빈의 옷소매를 잡았다.

“놓아라. 왜 붙잡느냐. 내가 동궁마마 앞에서 양가년과 사생 결단을 할란다. 밤새도록 불어 자고도 무엇이 부족하여 아침에도 놓지를 못한다더냐. 인자하신 동궁마마께옵서야 그렇게 야멸치게 나를 잊으실 리가 있겠느냐마는 그 여우 같은 양가년이 동궁마마를 흐리는구나. 에라 놓아라, 내가 고년을 물어뜯어서라도 죽여버리고 말란다.

“순빈마마. 분을 참으시고 진정하시겨오. 이렇게 뛰어가시면 남이라도 웃고 옳으신 일도 그르게 됩니다. 궁중에서는 이러한 법이 없습니다. 진정하시겨오.”

“그러면 어찌하란 말이냐. 이 터지는 가슴을 어떻게 참으란 말이냐. 고년 양가년을 살려 두고야 내가 어떻게 몰인들 목에 넘긴단 말이냐.”

하고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몸부림을 한다. 곁에서 보면 나인들은 고개를 몰리어서 입을 삐쭉댄다.

홍씨는 순빈을 뒤로 안아 일으키는 서슬에 입을 순빈의 귀에 가까이 대고 얼른,

“마마. 이년이 양가년을 없이 해 드리리다.”

하였다. 홍씨는 다른 궁녀들이 다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마마. 양가년 하나를 없애기야 어려울 것이 있습니까. 그까짓 년 하나 소리도 없이 없애기는 여반장입니다. 소인이 팔년 동안 순빈마마를 모시와 하는 같으신 은혜를 지었사오니 마마를 위하여서야 목숨인들 아끼오리까. 만일 마마께옵서 하라고만 하옵시면 사흘 내에 양가년을 짹 소리도 못하게 없애버리겠습니다.”

하였다. 없엔단 말에 순빈은 깜짝 놀라며,

“없애다니? 사람을 어찌 죽이기야 하느냐.”

“양씨가 살아 있으면 마마께옵서는 앞날이 어찌 되시올지 생각만 하와도 가슴이 아프옵니다.”

“그러하기는 하다마는 사람을 죽이기야 어이하라. 그저 고년이 동궁마마를 꼼짝 못하시 게 호리지만 못하게 하였으면 좋겠다.”

“아기는 낳아도 상관이 없습니까?”

순빈은 이윽히 생각하더니,

“밴 아기를 아니 낳게 할 수야 있느냐?”

“양씨는 아들을 낳고 마마께옵서는 성태를 못하시면 어찌 되올지.”

순빈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러면 어찌할꼬?”

“양씨를 두고 동궁마마를 도로 찾으려 하심은 나무를 세워 두고 그늘만 없이 하렴과 같사옵니다.”

“그러면 어찌할꼬?

“여쭙기 황송하옵니다.”

“아나 무슨 말이나 하여라. 내가 지금에 너 하나 밖에 머 믿을 데가 있느냐. 동궁마마는 양가년한테 홀리시어 저 모양이시고 중전마마께옵서는 인제는 나를 돌보아 주시지 아니하시는 모양이시고 내가 누구를 믿으랴, . 아무런 말이라도 하여라. 나를 살려 주려무나.”

홍씨는 일어나 옆방과 좌우를 둘러보고 순빈 곁으로 가까이 와서 입을 순빈의 귀에 대고,

“한 범을 잡는 것과 두 빈을 잡는 것과 어느 것이 쉬웁니까?

“하나 잡는 것이 쉽지.”

“그와 같습니다.”

하고 홍씨는 뜻 있게 웃었다.

순빈은 그래도 못 알아듣고,

“그와 같다니?”

하고 눈이 둥그렇다.

“양씨 속에 듭신 아기가 납시면 마마 편이 되리까. 양씨 편이 되리까.”

“양씨 편이 되지.”

하고 그제야 홍씨의 말을 알아 들은 듯이 순빈은 입맛을 다시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홍씨는 그리 힘들이지 아니하고 비상(砒霜) 한 봉지를 구하였다.

이런 무서운 약을 구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 같지마는 궁중에서 살아가는 여자로는 다 길이 있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기어서 내 몸이 죽어야 될지도 모르고 또 언제 내 원수 될 사람을 죽여야 될지도 모르고 또 시녀의 몸이 되어서는 언제 자기가 직접 모시는 상전을 위하 여 남을 죽일 준비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더구나 세력 있는 어른을 가장 가깝게 모시는 궁녀일수록에 그러한 것이다.

위로서 미운 사람을 죽이려면 미친 개 잡듯이 철여의(鐵如意) 하나로 후려갈겨서 거적에 싸서 내어던지면 그만이지마는 아무 세력도 없고 미천한 목숨 하나만 가진 나인 따위로서 힘있는 사람을 죽이려면 방자질을 하거나 음식에 독약을 치거나 하는 길 밖에 없다. 궁중에 있는 사람들의 이러한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서울장에 여러 가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직업을 하여 먹고 산다. 중, 무당,태주, 도사(道士), 의원, 방물 장사 이런 등속들.

홍씨도 이런 무리에게 많은 재물과 혹은 몸까지도 내어 주어서(이것이 여자로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이 비상한 봉지를 구한 것이다. 비록 이것으로 목적을 달한다 하더라도 그는 두고두고 이 비밀을 말은 사람에게 입을 틀어막을 뇌물을 끊임없이 대어주거나 이로 그것을 당해 낼 수가 없으면 이 비밀을 가진 자까지 없애버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러한일과 이러한 약은 더욱더욱 횡행하게 되는 것이다.

홍씨는 그 비상한 봉지를 품에 품고 수칙 양씨에게 먹일 기회를 엿보았다.

순빈은 그래도 사람을 죽인다면 벌벌 떨고 겁을 내어서 아무리 양씨가 밉더라도 목숨은 죽이지 말고 세자를 호리지만 못하게 하기를 원하였다. 홍씨는 속으로 픽 웃으면서도 네, 네 하였다.

“이애. 그 약을 먹이면 어떻게 되느냐?”

하고 순빈이 물을 때에 홍씨는,

“이것을 먹으면 낯바닥과 은 몸뚱이가 푸르둥둥해진다고 합니다.”

“살빛이?”

“네.”

“그러면 미워지겠지?”

“낯바닥이 죽은 년의 낯바닥같이 되면 그년을 누가 거들떠 보기나 하겠습니까.”

순빈은 끄덕끄덕하시었다.

만일 모든 모험을 무릅쓰고 양씨 죽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 하면 그러한 기회를 얻기는 그다지 어렵지 아니할 것이지마는 저는 살고 양씨만 죽이자니 기회를 타기가 심히 어려운 것이다 나 한 몸 잘 되어 보자고 하는 . 일이니 섣불리 하여 발각이 되어 내 몸 하나만 없어 지면 아무리 양씨 죽이는 일은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런 싱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므로 홍씨는 고양이 것을 훔치려는 쥐와 같이 조심조심하여 물 부어 샐 틈 없이 일을 하기로 매를 썼다.

홍씨는 양씨가 거처하는 여경당(餘慶堂)에를 하루에 한 번씩 갔다. 겉으로는 동궁빈마마의 뜻을 받아 양씨의 문안을 왔다는 것이 핑계이지마는 기실은 양씨 먹는 음식에 독약을 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저것이 왜 요새는 날마다 와?”

“무슨 낌새를 보러 온 게지. 그 여우 같은 것이.”

이렇게 여경당 시녀들이 홍씨를 보고는 눈을 흘기었다.

여경당 뒤 툇마루에는 날마다 시녀 하나가 양씨 먹을 보약을 달이느라고 지키어 앉았다.

중전마마의 특별한 분부라 하여 약 맡은 시녀는 잠시도 탕관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홍씨가 유심하게 엿본 것은 이 약탕관이다.

열 사람이 지키어도 한 도둑을 못 당한다고 마침내 홍씨는 엿보던 틈을 얻었다.

하루는 홍씨가 여경당에를 가서 양씨에게 문안을 하고 물러 나와 뒷 툇마루에 혼자 앉아서 약을 달이는 중전 시녀와 무심한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이야기는 요사이 어디서나 그러한 모양으로 왕의 사랑을 한 몸에 모두어 일년이 못하여 상 침(尙寢)을 봉함이 된 양씨(장차 혜빈이 될)의 이야기와 한 번 궁에서 나 잘 때마다 한 번씩 오입을 하여, 장안에 예쁘장한 계집을 둔 사나이가 마음을 놓지 못한다는 수양 대군의 이야기였다.

한참 이야기에 꽃이 피다가 약 달이던 나인이,

“약 넘지 않나 잠간만 보아 주오.”

하고 뒷간으로 가버리었다. 여러 날 동안에 홍씨에게 대하여 여편네들 사이에 흔히 보는 얕은 정이 든 것이다. 홍씨는,

“응, 얼른 오우. 내가 은지가 너무 오랫으니깐 곧 가야 하겠어. 또 제조(提調尙宮=여러 나인을 감독하는 나인)이 짱짱거리게.”

하고 홍씨는 가장 바쁜 태도를 보이었다.

홍씨는 빠른 눈으로 사방을 둘러 보았다. 거기는 아무도 없었다. 홍씨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큰일을 저지른다는 생각이 천 근이나 무거운 들 모양으로 전신을 내리 눌렀으나 오랫동안 별러 오던 뜻을 갑자기 변할 힘은 없어서 그의 손은 운명적으로 허리춤 속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 초록 명주 헝겊에 싸인 봉지가 나와서 노르끄무레한 가루를 김이 나는 약탕 판 속에 뿌리었다. 그 모든 행동이 실로 번갯불 같았다. 홍씨는 초록 헝겊을 마루 구멍에 집어 넣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시치미 떼고 앉아서 약탕관에 김이 오르는 것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이 가슴이 설레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약 달이던 나인이 뛰어 와서,

“에그, 오래 지체해서 미안하우. 약이 끓어 넘지는 안 했수?”

하고 약탕관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더니 안심한 듯이 제 자리에 앉았다.

홍씨는 후끈거리는 자기으 낯빛이 혹시나 이상해 보일까 보아,

“그럼, 난 가우.”

하고 한 번 웃어 보이고 일어섰다 다리가. 마음대로 놓이지를 아니하고 힘없이 떨리었다.

자선당(資善堂)에 다다르매 홍씨는 마음이 턱 놓이었다. 아무러한 일을 저질렀더라도 이곳에만들어오면 안심이 되던 옛 습관이 있는 까닭이다.

홍씨는 눈으로 ‘되었다’는 뜻을 순빈께 고하였다. 순빈의 낯빛은 갑자기 변하였다. 겁이 나신 것이다. 그러나 모래 위에 엎지른 물이라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다. 인제는 다만 던지어진 윷가락이 도가 되어 떨어지나 모가 되어 떨어지나를 기다릴 뿐이다. 이렇게 생각 하면 마음이 모질어지고 진정이 되었다.

순빈은 두통이 난다는 핑계로 근시하는 나인들을 다 물리고 혼자 자리에 드러누웠다. 무슨 큰 변이 생기는고 하고 순빈은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하나도 빼놓지 아니하고다 엿들었다. 모든 발자취 소리와 말소리가 다 자기의 죄를 나토는 것만 같아서 아직도 삼월 선선한 때언마는 전신에 땀이 쫙 흘렀다.

홍씨도 다른 나인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돌아다니건마는 그 태연한 듯한 것이 도리어 태연치 못하고조그마한 소리에도 가슴을 두근거리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는 기둥 뒤 벽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는 제 손으로 제 얼굴을 만지었다.

“아, 쉽지 아니한 일이다.”

이렇게 한탄하였다. 일각일각마다 십년 살 목숨은 줄어드는 듯하였다.

그러나 순빈과 나인 홍씨가 오래 마음을 줄일 사이도 없이 중전께서 수칙 양씨에게 내리신 보양에 독약이 들어간 것은 곧 발각이 되었다.

양씨가 약 그릇을 당기어 마시려다가 문득 너무 뜨겁지나 아니한가 하는 생각이 나서 왼 손 무명지로 약을 저어 보았다. 그러한 때에 양씨의 운수가 좋아서 그 손가락에 끼었던 은 가락지에 약이 묻었다. 묻자마자 은가락지는 연빛으로 변하여버렸다.

“에그머니!”

하고 양씨는 약 그릇에 떨어뜨리었다.

“누가 내 약에 독을 쳤네.”

하고 양씨는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소리를 질렀다.

곁에 섰던 약 달이던 나인은 입을 버리고 사지를 떨었다. 다른 나인들도 놀래어 약 그릇 가까이로 모여 들었다. 양씨 앞에는 까만 약이 흥건히 고이어 있고 약 그릇에도 엎지르고 남은 약이 말없이 번적거렸다.

“누가 나 먹는 약에다가 독을 쳤어?”

하고 양씨는 약 달이던 중 전 나인을 흘겨 보았다. 다른 나인들의 눈도 그 나인한테로 모이었다.

“나는 애매하오.”

하고 중전 나인은 겨우 떨리는 입을 벌리었다. 그러나 이약에 만일 독이 든 것이 사실이라 하면 도저히 자기가 그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줄을 깨닫고 얼른 양씨가 엎지르고 남은 약을 들어 마시었다.

그러나 약을 먹어버지 아니하더라도 은가락지가 까맣게 죽는다 하면 독이 든 것은 분명하 다 하여 곧 동궁마마께 이 연유를 아뢰었다.

동궁은 그때에 집현전(集賢殿)에서 여러 학자들과 글 토론을 하시다가 이 놀라운 기별을 들으시고 곧 여경당(餘慶堂) 양씨의 처소로 오시었다.

동궁은 양씨와 나인들에게서 전후 시말을 들으시고 엎지른 약과 죽은 은가락지를 낱낱이 보시옵고 남은 약을 먹었다는 중전 나인을 부르시었다.

중전 나인은 이때에 벌써 복통이 난다고 괴로워하고 입술이 파랗게 되었었다.

인자하신 동궁도 이 일에는 대단히 진노하시와 높은 어성으로, 이봐라 인명이 “ , 지중하거든 네 무슨 연유로 약에 독을 넣었어?”

하고 중전 나인을 노려보시었다.

중전나인은 마루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떨리는 소리로,

“동궁마마 살피시오. 소인이 수칙 양씨와 아무 은원이 없살거든 약에 독을 칠 리가 있사오리까. 과연 애매하옵니다.”

하고 하소하였다.

이 일이 인명에 관계 있는 중대한 일일 뿐더러 독약을 친 혐의를 받은 나인이 모후(母后) 궁에 속하였은즉 동궁이 자의로 처결할 수 없고 또 이러한 일이 동궁에서 생긴 것은 동궁의 덕이 부족하여 부모 두 분 마마께 걱정을 끼침이니 불효 막심하다 하여 우선 대전 내전에 사람을 보내어 사연을 아뢰고 뒤따라 동궁이 몸소 양전에 입시하여 석고대죄(席藁待罪)하기로 하시었다.

이렇게 되니 동궁이 크게 소동하여 다만 서로 마주 볼 뿐이요, 감히 입을 열어 말하는 이 가 없었다. 이런 때에 입 한 번 잘못 놀리었다가는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지 모르게 목이 날아가는 줄을 궁중에 살아 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는 까닭이다.

파조(罷朝) 후에 상감께서는 내전(內殿)에 듭시와 중전으로 더불어 독약 사건에 대하여 이윽히 말씀이 계신 뒤에 곧 약 달이던 나인을 잡아 들이어 내전에서 친국(親鞫)하시기로 하였다.

약 달이던 나인은 독약을 먹었으나 분량이 적었기 때문에 아직 죽지는 아니하고 일지만 못하고 있었다. 누운 대로 널쭉이 담아다가 내전 뜰에 내려 놓았다.

양전께서는 대청 정면에 좌정하시옵고 곁에는 동궁이 읍하고 서 계시고 이십여 명 궁녀가 좌우로 웅위하고 계상에는 근시하는 내시들이 대령하고 계하에는 철녀의든 관노 네 명이 호랑이라도 때려 잡을 듯이 벼르고 갈라서 있고 뜰 한가운데 널쭉 위에는 얼추 다 죽은 나인 이 엎드려 있다.

상감께서는 어성을 높이시와,

“듣거라. 네 무슨 연유로 태중에 있는 아기를 해하려고 약탕관에 독약을 넣었어?”

하시니 내전이 뜨르르 우는 듯하였다.

“상감마마, 소인(小人)이 하늘 같은 성은을 입사옵거든 무엇이 부족하여 태중에 계읍 신 아기씨를 해할 생각을 하오리까. 천지신명이 내려다 보시거니와 소인은 진실로 애매하옵니 다.”

목과 입이 부어 어음은 분명치 아니하나 독이 난 때라 말소리는 힘있게 들렸다.

“어쩐 말이냐. 그러면 네가치지 아니한 독이 어떻게 약에 들어간단 말이냐. 바로 아뢰어라.”

하시니 계상에 선 내시들이,

“바로 아뢰어라.”

하고 소리를 길게 뽑는다.

“생각하오면 소인이 죽을 죄로 잠간 남더러 약을 보라 하옵고 자리를 떠난 일이 있사오나 그 밖에 느 아무 죄도 없사옵니다.”

“남더러 보라 하였다니, 남이란 누구냐?”

“자선 당나인이요.”

이 말에 중전은 무릎을 치시었다. 생각하던 바와 같다는 뜻이다.

곧 내시와 관노가 자선당으로 달려가서 발이 땅에 붙지 않게 홍씨를 끌어다가 약 달이던 나인 곁에 엎드리게 하였다.

홍씨는 얼굴이 약간 상기는 하엿으나 태연하였다.

상감께서는 홍씨의 아름다운 자색을 이윽히 바라보시더니,

“네가 약 달이는 것을 맡아 본 일이 있느냐?”

하고 물으시었다.

“네.”

하고 홍씨의 대답은 싸늘하였다.

“그 약에다 독약을 친 일이 있느냐?”

“과연 소인이 그 약에다 비상을 탔습니다.”

양전께서와 세자궁께서와 좌우가 다 놀라고 약 달이던 나인도 놀라서 고개를 들어 홍씨를 바라보았다. 독약을 친 것이 놀라운 것보다 쳤노라고 실토하는 것이 놀랍던 것이다.

한참 동안은 서로 바라보고 몸들도 꼼짝 아니하였다.

“네 무슨 연유로 약에다가 비상을 타서 인명을 해아려하였어.”

하고 왕은 얼마 뒤에야 물으시었다.

“소인이 죽사온들 하늘 같으옵신 상감마마를 어찌 그이오리까. 이실직고(以實直告)하오리다. 소인이 궁중에 들어와 동궁마마를 모시온 지 십년이 되옵거니와 천한 몸이 분수를 아 지 못하옵고 매양 동궁마마께옵서 돌아보시와 거두어 주시옵기를 고대하오나 동궁마마는 성인이시라 일체 여색에 뜻을 두시지 아니하시오니 소인은 금생에 이루지 못할 소원을 품고 지내옵더니 천만 뜻밖에 수칙 양씨가 밖으로서 들어와 동궁마마의 고이심을 받는 것을 보오니 미련한 계집의 맘이라 새우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사옵고 또 근래에 동궁마마께옵서 양 씨만 귀애하시옵고 빈마마를 돌아보시지 아니하와 빈마마께옵서 주야에 눈물로 지내시오니 이것이 다 양씨의 소위로 생각하옵고 차라리 양씨를 죽여 빈 마마와 소인의 분한 마음을 풀 까 하와 이런 일을 저질러 상감마마 성려(聖慮)를 끼치식 하였사오니 소인의 죄는 만사 무 석이옵니다.”

하는 홍씨의 어성은 아름답고도 분명하고 조금 떨리는 빛도 없었다. 그러나 말이 끝나고는 참았던 울음이 터지는 듯이 등을 들먹거려 울었다.

이 말에 상감은 중전을 보시고 웃으시며 처음부터 고개를 숙이고 계시던 세자궁께서도 고개를 드시와 홍씨를 바라보시고는 더욱 고개를 숙이시었다.

이리하여 독약 사건은 판명이 되었다.

그러나 중전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이것이 순빈이 시킨 것이라는 판명이 되기가지 알고야 말려 하였다. 예전 휘빈(徽嬪) 김씨는 너무 아름답고 영리한 것이 미웠지 마는 이번 순빈(純嬪) 봉씨는 너무 못나고 어리석은 것이 미웠다. 게다가 팔년이 넘도록 잉태를 못하니 중전의 눈에 날대로 났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는 폐하여버릴 생각이 드신 것이다 그것은 어렵지 아니하였다. 중전은 순빈이 정직하고 어리석음을 알기 때문에 한 번 불러 물어보기만 하면 곧 실토하리라고 생각하여 독약 변이 있은지 며칠 후에 순빈을 내전으로 불렀다.

순빈은 두 마디도 기다리지 아니하고 실토를 하였다. 그러나 양씨를 죽이자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미워지고 남자를 혹하게 하는 재주만 없어지게 하려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 이 사실이지마는 세상에 그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없었다. 홍씨는 벌써 때려 죽여버렸으니 순빈의 말을 증거하여 줄 이는 이 세상에 없다.

순빈은 당연히 ‘실덕(失德)’이란 죄명으로 폐함이 되었다.

“무자(無子)함도 칠거지악(七去之惡)에 들거든 질투하고 살인하고…….”

이것은 중전의 순빈을 면책하신 말씀이다.

순빈은 울면서 모든 수치를 당하고 마침내 궁중에서 쫓겨 나간 때에는 체면불고하고 ‘아이고 아이고’목을 놓아 울었따. 한 번 더 동궁마마의 낯을 뵙게 해달라고 애걸하듯이 간청하였으나 이미 죄를 짓고 폐하여진 세자빈의 말을 들어 주는 이는 없었다.

이렇게 순빈 봉씨도 폐함을 당하였다. 세자궁은 이 일을 퍽 슬프게 생각하였다. 그렇게 일심으로 자기를 따르던 순빈이 울고 나가는 것이 불쌍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하시는 일은 자식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다만 얼마 동안 순빈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그렇게 일을 저지르게 한 것을 후회하는 생각이 날 뿐이었다.

그 후 두 달이 못하여 양원권씨(良媛權氏)를 세자빈으로 봉하니 이가 나중 경혜공주(敬惠公主)와 단종 대왕 두 분을 낳으시고 후에 현덕왕후(顯德王后)라고 추숭(追崇)을 받은 양반이시다.

현덕빈(顯德嬪) 권씨는 한성부 판윤 권 전(漢城府判尹權專)의 따님으로 열 세 살에 나인으 로도욱ㅇ에 뽑히어 들어와서 양반집 따님인 까닭으로 곧 승휘(承徽)로 봉함이 되고 얼마 아니하여 양원(良媛)이 되고 처음 들어온 지 칠년 만에 열 아홉 살에 봉씨가 폐한 뒤를 이어 세 자빈이 되시고 되시자 마자 잉태하시어 경혜 공주를 낳으시고 스물 네 살 되는 해에 단종 대왕 되실 왕손을 낳으시고 그 이튿날 승하(昇遐)하신 것이다.

동궁빈으로 계신지만 오년에 그 사나우신심 중전께도 아무 탈을 잡히지 아니하시고 유덕하시다는 칭찬속에 지내시었다.

현덕빈 권씨가 돌아가신 뒤에 세자궁의 아까와하시고 슬퍼하심은 밖에까지 들리었다. 세 자께서는 다시 여자를 가까이 하시지 아니하시고 경혜 공주와 왕세손(王世孫)두 분 아기를 어루만지시며 일생을 지내시었다.

수칙 양씨도 순빈이 폐함을 당하던 때에 따님 경숙옹주(敬肅翁主)를 낳고는 이내 동궁을 모시어 보지 못하고 말았다.

세자는 개인으로 이만큼 행복되지 못한 어른이시었다. 남달리 감정이 예민하시고 인자하 신, 성품이 많으신, 세자는 가만히 일생을 회고하면 비감이 항상 많았었다. 왕위에 오르신 후 이 개년 남짓한동안에도 십에 팔구는 병환으로 계시고 웬 일인지 민간에도 기근(饑饉)과 여역(癘疫)이 맣아 국사에도 근심되는 일만 많았다. 세자궁으로 수년간 대리(代理)하시는 동안이나 왕으로 이 개년 계시는 동안이나 이러한 모든 불행을 다 당신으 ㅣ허물로 여기시어 슬퍼하시었다.

문종 대왕께서 부왕이신 세종 대왕의 대상(大祥)을 지내 탄상하신 임신(壬申) 이월 그믐께 왕의 병환은 심상치 아니하시었다. 정월 이래로 오후가 되면 한열이 왕래하고 구미가 없어지고 밤에도 잠이 잘 드시지 아니하시와 신고하시던 것을 그 추운 날에 대상을 치르고 나시어부터는 열기도 더 오르고 구미도 더욱 없어지게 되어 사오일래에 눈에 띄게 용안(龍顔)에 초췌하신 빛이 보였다.

그러나 부왕도 승하하시고 모후 되시는 심 중전은 부왕보다도 이년 전에 돌아 가시고 세 자빈도 아니 계시고 경혜 공주도 작년에 하가(下嫁)하시니 나인과 내시 밖에는 가까이 왕의 기거 범절을 돌아보아 드릴 이가 없었다. 오직 혜빈 양씨가 뒤에서 나인을 시키어 간접으로 왕의 잡수시고 입으시는 것을 돌아보아 드리었을 뿐이다.

혜빈 양씨는 현덕 왕후 권씨 동궁빈으로 (돌아가신)의 유촉(遺囑)을 받은 이래로 어린 왕세손(王世孫=아기가 아홉 살 되시던 때에 세종 대왕께서 왕세손을 봉하시었다)을 친 기출이 나 다름없이 젖을 드리고 양육하였다. 젖도 왕세손을 드리고 남는 것이 있어야 기출인 영풍군을 먹이었다. 어느 친어머닌들 이에서 더 하랴 하고 그렇게 혜빈을 미워하시던 심 중전조차 승하하실 때에 특히 혜빈을 부르시와 칭찬하는 말씀을 하시었고 세종 대왕께서 승하하실 때에는 세자궁과 다른 여러 아드님들이 모시어 앉은 곳에서 혜빈을 앞에 부르시와,

“혜빈이 비록 친한 집에 생장하였으나 내가 사랑하던 배요, 십년 동안 왕세손을 양육하였고 또 부덕(婦德)이 있으니 왕후의 예로써 공경하여라.”

하시는 어명(御命)까지 계시었다.

이러하므로 원래 효성이 지극하신 문종 대왕께서는 그때부터 혜빈을 공경함이 모후를 대함과 같으시었고 혜빈도 미렁하신 왕과 어리신세자를 위하여서는 목숨을 아니 아끼기를 스스로 맹세한 것이다. 경혜 공주 하가시에도 혜빈ㅇ 어머니의 할 일을 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왕의 환후(患候)가 더욱 침중하여 갈수록 혜빈의 근심함은 여간이 아니었으나 친근히 모실 도리가 없어 오직 심복되는 궁녀를 시켜 범절을 보살피게 하니 매양 마음에 차지 아니 하여 애를 썼다.

그렇지마는 왕은 당신의 병환을 염려하시지는 아니하는 듯하였다. 이번 병환이 심상치 아 니한 줄을 모르심이 아니지마는 왕은 죽고 사는 것은 도시 천명이라 하여 사는 것을 욕심 내지도 아니하시는 동시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시지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모든 것에 초탈하신 왕이시라도 외아드님 되시는 어린 세자궁을 위하여서는 마음을 아피지 아니하실 수가 없었다. 더구나 당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아니함을 깨달을 때에 그러하였다. 열두 살 되시는 어린 세자가 세상 모르고 내시들과 나인들을 따라 뛰노로 장난하는 양을 보실 때에는 장차 국왕이라는 높고 위태한 자리에 앉아 수 없는 시기와 음모의 표적이 될 것이 무한히 가엾으시었다. 귀신 아닌 바에 앞날에 일어날 모든 슬픈 일을 미리 내다 보지는 못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ㅇ는 그 아기의 전도가 험한 것만 같아서 마치 풍랑 많은 바다에 일업주를 태워 내어보내는 것만 같았다.

며칠 밤 뜬눈으로 밝히신 끝에 이월 그믐께 어느 날 잔치를 베풀시고 집현전 여러 신하를 내전으로 부르시었다.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최항(崔恒) 이하 이십 명 집현전 학사와 왕이 세자궁으로 계신 동안 날마다 번갈아 시강(侍講)하던 좌필선 정인지(左弼善鄭麟趾) 우 문학 최만리(右文學崔萬理)가 자리에 모시었다. 이때에 정인지는 우참찬(右參贊)이요, 최만리는 부제학(副提學)으로 다 높은 벼슬에 있었다.

와은 병환 중 초췌하시었으나 평소에 친구같이 사랑하고 믿으시는 집현전 제신이 한자리에 모여 즐겁게 담론함을 보시고는 기쁨을 금치 못하시는 듯하시었다.

그러나 일래로 병색이 더욱 ㅎ녀저하신용안을 우러러볼때에 뜻 있는 몇 신하는 마음이 놓이지를 아니하여 이 잔치가 곧 파하기를 바랐다.

이 자리에 모인 이십 명 집현전 제학사(集賢殿諸學士)는 세종 대왕이 필생의 정성을 다하 여 기르신 국가의 보배다. 비복 아직 사십이 못된 젊은 사람들이지마는 세종께서는 그들을 가장 존경하고 가장 믿었다. 왕이 무슨 일을 하시려다가도 집현전 학사가 ‘못하십니다’하고 간하면 아니하실 만큼 소중히 여기시니 이것은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어진 선비의 말을 쫓게 하는 본을 보이려 하심이다.

한 번은 이러한 일까지 있었다.

세종께서 불도를 (佛道) 존중하시와 대내(大內)에 내불당(內佛堂)이란 것을 두고 때로 중을 부르시와 법문도 들으시고 몸소 불전에 예배도 하시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대내에 불당응ㄹ 둠이 태조 대왕의 유교입국(儒敎立國)의 뜻에 어그러진다는 이유로 내불당을 폐하고 궁중에 일체 승니(僧尼)를 들이시지 맙소서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대대로 불도를 존중하던 것이 골수에 젖어 차마 내불당을 폐하실 뜻이 없으실 뿐더러 왕후 심씨가 더욱 들지 아니하시므로 세종께서는 이때 처음 집현전 제신의 말을 듣지 아 니하시었다.

이리하기를 세 번이나 한 뒤에 집현전 학사들은 일제히 물러나가 사흘 동안 다시 입시하 지 아니하였다.

“상감께옵서 신 등의 간함을 아니 쓰실진대 신 등이 무엇하러 국록을 먹사오리이까. 상감께서 버리시오니 신 등은 물러가나이다.”

함이었다.

이때에 세종대왕은 수상황희(首相 黃喜)를 돌아보시고,

“이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가는가.”

하고 우시었다.

이러한 집현전이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보다도 높아서 삼사(三司)의 수위(首位)에 처하였고 직접 왕의 뜻을 좌우하는 데는 정부(政府)와 정원(政院)보다도 유력한 것이니 이렇게 되도록 세종 대왕께서 만드신 것이다.

문종 대왕도 삼십년 세자로 계시어 부왕의 뜻을 뜻으로 하시게 되어 집현전 제신을 가장 존중하시와 좋은 음식이 있더라도 반드시 집현전에 하사(下賜)하시고 만사에 반드시 집현전에 하문(下問)하시었다. 집현전 학사를 부르실 때에는 친구의 예로 자(字)를 부르시는 일조 차 있었고 세자로 계실 때에는 때로 밤에 집현전에 미행하시와,

“근보(謹甫).”

하고 부르시어 입직하는 학사를 놀라게 하시는 일이 있었다. 근보는 성 삼문의 자이다.

그래서 입직하는 학사들은 언제 부르심을 받을지 몰라서 관복(冠服)을 끄르지 못하고 입은 채로 누워 잘 지경이었다.

이러한 집현전이다.

이 집현전은 다만 정치(政治)와 도덕(道德)으로만 가장 높은 데가 아니라 모든 학문--- 천문학(天文學), 기상학(氣象學), 역사학(歷史學), 지리학(地理學), 문학(文學), 예술(藝術), 철학(哲學)의학(醫學), 본초학(本草學), 농학(農學) 역학(譯學=語學)에도 최고 학부(最高學部)였었다.

조선이 보배요, 자랑이 되는 훈민정음(訓民正音)도 집현전 학사들의 손으로 된 것이다 그중에도 신 숙주, 성삼문이 자초지종으로 전력하여 세종 대왕이 승하하시기 사년 전에 발표 하신 것이다.

문종 대왕은 집현전의 어느 학사보다도 학식이 많으시었다. 경사(經史)는 말할 것도 없거 니와 시문서화(時文書畵)에 능하시어 그림의 매화와 글씨의 초서는 당대에 으뜸이었고 학술 중에는 천문학을 가장 잘하시와 우레와 소나기가 올 방향과 시간을 예언하시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집현전 제신들은 문종 대왕께 대하여는 다만 군신지의(君臣之毅)가 있을 뿐 아니라 모두 수십 년간 거의 매일 대한 벗이요, 동창이었다. 그처럼 사사정분도 두터웠던 것이다.

이날의 잔치는 극히 검소하였으나 좋은 벗 좋은 술, 좋은 풍악으로 십분 즐기었다.

밖에는 봄눈이 펄펄 날리고 바람조차 불었으나 내건 대청인 사찬장(賜餐場)에는 사방에 숯불을 피워 훈훈한 것이 꽃 피는 봄날과 같았다.

정면에 옥좌(玉座)가 있고 옥좌 좌우에 늙은 상궁 한쌍, 젊은 궁녀 한쌍이 모시어 서고 그 좌우로는 반쯤 핀 매화 두 분이 담한 향기를 토하고 있다.

매화분에서 시작하여 옥좌의 왼편 줄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수석이 되고, 그 다음에 정인지가 앉고 오른 줄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수석이 되고 그 다음에 대제학(大提學) 신석조(辛碩祖)와 최만리가 앉고 그리고는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 신숙주(申叔舟), 원호(元昊), 권절(權節),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가 늘어 앉았다.

신석조, 정인지, 최만리 세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중로여니와 기타는 대개 사십 이하의 장년이었다.

비복 병중에 게시더라도 여러 신하들을 부르실 때에 왕의 위의를 갖추시기를 소홀히 아니 하시어 익선관(翼善冠)을 쓰시고 곤룡포(滾龍袍)를 입으시었다. 초췌는 하시었을망정 원래 좋으신 풍신이시라 위풍이 늠름하시고 그러면서도 웃으실 때와 말씀하실 때에는 춘풍 같은 화기를 발하시었다.

순배와 달론이 끝날 바를 몰라 벌써 날이 저물어 내시들이 분주히, 그러나 발잒 소리 하나 없이 안팎에 등축을 밝히어 낮과 같이 휘황하게 되매 임금이나 신하나 흥은 밤으로 더불어 깊어 가는 듯하였다.

장식(掌食) 나인은 말없이 음식을 나르고 주궁(奏宮), 주상(奏商), 주각(奏角), 주변치(奏變緻), 주치(奏徵), 주우(奏羽), 주변궁(奏變宮)의 노래말은 일곱 쌍 궁녀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만세락(萬歲樂), 가빈곡(嘉賓曲)같은 여러 가지 노래를 부르고 악기 맡은 내시들은 금석관현(金石管絃)의 여러 가지 풍악을 아뢰었다.

술이 취하고 풍악이 울리더라도 과도히 질탕함이 없음이 군자의 잔치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때에 왕의 가슴 속에 있는 무거운 근심을 알아 보는 이는 없었다. 어린 세자에게 나라를 맡기는 근심---이 근심을 말씀하시려고 이 잔치를 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 는 그들은 그저 즐거워하는 이가 많았다.

왕의 부르심을 받아 세자궁께서는 복건, 청포의 평복으로 두 협시(夾侍)의 부액을 받아 대청으로 들어오시와 부왕의 옥좌 곁에 읍하고 서신다. 열 두 살로는 키가 크신 편이나 몸은 호리호리하게 가느시었다. 남아답다기보다는 아름다우신 편이었다.

일동은 일제히 일어나 국궁하여 세자를 지영하였고 왕께서도 웃음을 머금으시고 고개를 돌리시어 세자를 바라보시었다.

왕은 어탑(御榻)에서 내리시와 평좌(平坐)하시고 세자를 부르시와 앞에 앉히시고 세자의 등을 만지시며 눈을 드시와 수양 대군과 정 인지에서부터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최항, 하위지, 유성원, 이 개 등을 차례로 보시와 최만리, 신석조와 안평대군까지 둘 살피신 뒤에 약간 떨리는 듯한 음성으로,

“경들에게 이 아이를 부탁하오.”

하시었다.

이때에 수양, 안평 두 분 대군을 비롯하여 모든 신하들은 일제히 엎드리어 그 넓은 방안에는 먼지 하나 움직이지 아니하는 듯 고요하고 오직 촛불만 춤을 추어 분벽에 그림자를 흔들었다.

왕의 이 말씀에 여러 신하들은 취하였던 술이 일시에 깨는 듯하였다.

왕은 다시 말씀을 이으시와, 내 병이 심상치 “ 아니한 줄을 알매 오늘 경들에게 이 부탁을 한다.”

하시었다.

비장(悲壯)이라고 할 만한 엄숙한, 무거운 기운이 온 방안을 내려눌러서 사람들은 숙인 고개를 치어들 힘이 없었다. 모두 돌로 깎아 놓은 사람같이 고요하고 오직 왕의 초췌한 해쓱한 모양만이 움직이는 듯하였다. 어리신 세자궁조차 약간 고개를 숙인 대로 꼼짝하지 아 니 하시었다. 궁녀들의 얼굴에는 벌써 눈물이 흐르는 이 조차 있었다. 이 인자하시고도 병약하신 임금은 궁녀들의 애틋하게 사모하는 정을 함몸에 모으시었다. 문종 대왕이 등극하신 이래로 일찍 어느 궁녀 하나를 죽이기는커녕 때리신 일도 없으시었다. 왕은 오직 관대하시 어 모든 것을 용서하시었고 더구나 불쌍한 궁녀와 내시들을 어여삐 여기시와 그 잘한 것은 칭찬하시되 잘못한 것은 못본 체하시었다.

세종 대왕께서는 그렇지 아니하시었다. 그 어른은 엄하심이 있어서 궁녀나 내시나 잘못한 것이 눈에 뜨이면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시었다. 그러므로 세종 대왕은 무서웠다. 그러나 문종 대왕은 무서운 어른은 아니시었다. 이것이 왕의 지극히 인자하신 특장도 되지마는 동시에 제왕으로는 흠점일는지도 모른다. 수양 대군의 말을 빌면 왕은 무능하시었다. 왕이 너무 위엄을 아니 부리시기 때문에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지는 것이다. 왕이 벽력과 같은 위엄을 부리시어 신하들이 벌벌 떨어야 나라 일이 되어 간다는 것이 수양 대군의 의견이 다.

“이놈의 말에도 귀를 기웃, 저놈의 말에도 귀를 기웃, 이러니까 조정의 위엄이 없어지고 신하들이 기를 펴는 것입니다.”

하고 수양 대군은 왕께 아뢰인 일까지 있었다.

그때에는 왕은,

“경의 말이 옳다.”

하고 칭찬까지 하신 일이 있었다.

오늘같이 주둥이만 고 아무 힘 없는 선비(이것이 집현전 제신에게 대한 수양 대군의 의견이다)들을 모아가지고 과공이라 할만치 정중한 대우를 하는 것도 긴치 아니한 일이라고 수양 대군은 내심에 불평하였다. 진실로 궁녀로 하여 근 술을 치고 가무를 하게 함은 종친(宗親)을 모은 연락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만일 이 무리들응ㄹ 시킬 것이 있거든,

“이리이리하여라, 하면 상을 주마 아니하면 죽이리라.”

한 마디면 족할 것이지 이렇게 융숭하게 저 못난 무리들을 대접할 것은 없는 것이다. 만일 어린 세자를 부탁하겠거든 수양 대군 자기에게만 부탁하면 그만이 아닌가--- 이렇게 수양 대군은 생각하고 형님 되시는 왕의 하시는 일이 모두 부질없이만 보인다.

수양 대군이 이 잔치에 불평을 품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이러하다---.

형님 되시는 왕과 아우님 되는 안평 대군은 다 어느 학자에게지지 않는 문장과 학식이 있기 때문에 모인 신하들과 말이 어울리지마는 유독 수양 대군은율(律) 한 수 지을 줄 모르고 저 무리가 꾄 듯이 떠드는 한(漢), 당(唐), 송(宋)의 곰팡내 나는 옛 이야기는 알지도 못할 뿐더러들고 있자면 골치만 아파질 뿐이다. 그런 고린 소리는 묵은 책 좀먹는 집현전 구석에서나 할 것이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궁전에서 할 것은 아니라고 수양 대군은 본다.

“이러고 나라 일이 어찌 되나.”

하고 수양 대군은 문종 즉위 이래로 형님이신 왕의 하시는 일이 매양 볼만하였다. 왕이 상 제 노릇하시느라고 세월의 대부분을 허비하시는 것도 못마땅하였다. 왕이란 그런 헛된 일에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효자가 반드시 좋은 왕이 아니다---이것이 형님을 빈정대는 수양 대군의 생각이다.

“거상은 일년이면 족하다.”

이렇게 수양 대군이 주장하는 것도 형님께 대한 반감이 가장 큰 원인이다.

형님 되시는 왕의 문약(文弱)을 볼만히 여기는 수양 대군은 자연히 문학과 풍류를 좋아하 는 아우님 안평 대군이 미웠다. 더구나 안평대군이 근래에 와서 명망이 크게 떨치어 그 외 한강(漢江) 정자인 담담정(淡淡亭)과 자하문(紫霞門)밖 무이정사(武夷精舍)에는 날마다 천하의 문장재사(文章才士)와 풍류호걸(風流豪傑)들이 모여들어 질탕히 놀므로 세상에서 안평대군 있는 줄은 알고 수양대군 있는 줄은 모르는 것이 분하였고, 더구나 형제분이 혹시 서로 대할 때면 안평이 형님 되시는 수양을 가볍게 보는 빛이 있을 때에 분하였다.

한 번은 무슨 말 끝에 안평이,

“형님이 무얼 아신다고 그러시오? 형님은 산에 가서 토끼나 잡으시오.”

하고 수양 대군이 활 쏘는 것 밖에 능이 없는 것을 빈정거릴 때에 수양은 분노하여,

“요 주둥이만 깐 것이.”

하고 벽에 걸린 활을 벗겨 든 일까지 있었다. 그후부터 수양은 안평을 만나려고 아니하다가 왕께서(세자로 계실 때에) 들으시고 두 아우님을 부르시어 화의를 불이시었다. 그렇지마는 패기 만만하여 안 하에 무인한 두 분이 진심으로 화합할 리는 없었다.

이 연락의 자리에서도 수양, 안평 두 분 대군은 가끔 힐끗힐끗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불꽃이 이는 듯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그 눈치를 알기 때문에 이상한 흥미를 가지고 가끔 두 대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왕이 옥좌에서 내려 앉으시고 세자의 등을 만지시며 슬픈 부탁을 하실 때에는 아무리 철석 같은 수양 대군이라도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일동이 엎드렸던 고개를 들기를 기다려서 왕은 한층 더 힘있는 어성으로 세자를 바라보시고,

“너는 평생에 여기 모인 여러 현인(賢人)들을 고굉(股肱)과 감이 믿고 스승과 같이 공경하여라. 이 사람들은 다 나의 옛 친구들이니 네게는 부집(父執)이니라. 군신지분(君臣之分) 이 있다고 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라. 수양, 안평 등 여러 숙부가 있고 이 모든 현 신(賢臣)이 있으니, 비록 네가 어리더라도 염려 없을 것이다. 부디 오늘 일과 내가 한 말을 잊지 말아라.”

하고 다시 한 번 세자의 등을 만지시고 낙루하심을 금치 못하신다.

세자는 일어나 부왕의 앞에 절하고 엎디며 낭랑한 목소리로,

“아바마마, 소신이 비록 어리고 몽매하오나 하교를 지어버리지 아니하오리이다. 아바마마, 천추 만세 후에라도 수양, 안평 숙부를 주공(周公)과 같이 믿삽고 집현전 모든 부집을 스승으로 공경하려 하옵니다.”

하시었다.

어린 세자의 이 말씀은 모인 사람들이 폐부를 뚫는 듯 하였다. 성 삼문 같은 이는 느낌을 겨우 억제하였고 수양 대군도 자기에게 세자를 부탁만 하면 주공이 되어 보리라 하였다.

세자가 영민하시다 함은 전부터 소문이 있는 바이어니와 오늘에 비로소 모든 사람이 목전에 그 총명하심을 뵈옵고 감격하였다. 젊은 학사들은 ‘마정방종(磨頂方踵)을 하더라도 세자를 도와 요순 같으신 성군이 되시게 하리라.’ 하고 속으로 맹세하였다.

왕은 눈물을 거두시고 잔을 올리라 하시와 친히 잔을 들어,

“오늘 내가 경들과 큰 언약을 하였으니 손수 사례의 술을 권하리라. 인생이 덧없으니, 뉘라 목숨의 조석을 알리오. 이렇게 군신이 모여 즐김도 늘 있지 못할 성사라, 경들은 내가 권하는 술을 받아 온 밤이 맟도록 취하여 즐기지 아니하려는가.”

하고 손에 드신 잔을 먼저 수양 대군에게 주시었다.

수양 대군은 황감하여 꿇어서 어전에 나아가 두 손으로 어사하시는 잔을 받자왔다. 이 모 양으로 잔을 받을 때마다 장진주(將進酒) 노래가 울어났다.

술은 취하고 밤은 깊어 간다. 촛농은 흘러내리고 불꽃은 튀었다. 비단 장을 두른 대궐 안에도 찬바람이 휘돈다.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린다. 대궐 지붕과 마당에 눈이 한 뼘이나 쌓 였다.

사람들의 취한 눈은 촛불 빛에 빛났다.

왕은 아무리 흥이 깊으시더라도 늙은 신하의 사정을 잊으실 리가 없다.

“학역재(學易齋), 나가오.”

하시었다. 학역재는 정인지의 호다. 정인지는 왕이 세자궁으로 계실 때에 좌필선으로 있었기 때문에 스승 대접을 하여 부르실 때에는 반드시 학역재라는 호로써 하였다. 스승을 존경하시는 뜻이다.

정인지는 이때에 벼슬이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이요, 나이 쉰 일곱이었다. 몸은 작으나 기품이 좋아서 백발은 있어도 아랫수염이 조금 있는 얼굴에는 아직 주름이 없고 목소리가 쨍쨍하여 쉿 소리와 같았다.

위인이 하턱이 빠르고 코가 날카롭고 얼른 보기에 작고 간사한 듯하지마는 성품은 자못 호매(豪邁)하고 자부심이 많았다. 그는 일찍 술이 취하여 말하기를 자기가 만일 공자의 제 자가 되었으면 안자(顔子), 증자(曾子)는 바라지 못하여도 자유(子游), 자하(子夏)만큼은 되었으리라고 장담하였다. 좀 경망스러운 흠이 있지마는 모략과 수완이 있어서 세종 대왕의 칭찬을 받았고 특별히 교제를 잘하므로 명 나라 사신이 올 때며 매양 관반(館伴)이 되었다.

그때에는 소위 천사(天使)의 접반은 어려운 일 중에도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명 나라 사신 예겸(倪謙)이가 왔을 때에도 그 관반이 되어 조금도 꾸림없이 직분을 다하여 예겸으로 하여금 탄복케 하였으니 그의 득의를 짐작한 것이다.

그의 재주는 무서웠다. 열 아홉 살에 태종(太宗) 갑오(甲午)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이 되고 서른 세 살에 중시(重試)에 또 장원이 되어 재명이 일세에 진동하였다. 글을 알기로나 짓기로나 당대 일류였으나 실제 정치에 더욱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세종 대왕에게 인지는 재승(才勝)하다는 비평을 받은 것처럼 그는 덕이 재보다 부족하다는 말을 흔히 들었다.

어찌하였으나 문종 대왕이 왕자(王者)의 학을 배운 것은 정 인지에게서다. 그러므로 왕이 정 인지를 공경하시고 소중히 여기심이 진실로 극진하시었다.

인지의 늙음을 생각하시와 먼저 물러나가라는 하교를 내리심은 진실로 황송한 일이어서 모두 정 인지를 위하여 영광으로 알았다.

정 인지는 황송하신 왕명을 받자와 탑전에 엎드리어 이마를 조아리고 다시 세자궁 앞에 국궁으로 하직하는 예를 행하였다.

왕은 기립하여 정인지의 부복례(俯伏禮)를 받으시고 세자는 정 인지의 국궁함을 읍함으 로써 대답하시며,

“선생(先生), 추우시겠소.”

하시었다. 부왕이 정 인지를 공경하는 뜻을 본받은 것이어니와 또한 세자(世子)빈객(賓客) 에 대한 예도 되는 것이다.

정인지가 왕과 세자의 융숭한 대우를 황송히 생각하면서 최만리와 함께 어전에서 물려 나왔다.

정인지가 물러난 뒤에도 수 없이 순배가 돌아 밤이 자정이 넘을 때쯤하여서는 하나씩 둘씩 칠팔인이나 상감 앞에 쓰러지었다. 겨우 쓰러지지나 아니한 사람들도 눈이 내려 감기고 혀가 얼어 이야기한다는 것이 팔과 고개만 내어 젓고 속으로는 어전인 줄 알면서도 입이 말을 아니들어 허허하고 너털웃음을 막지 못하는 이조차 있었다.

신하들이 술이 대취하여 몸을 거누지 못하여 모으로 쓰러질 때마다 왕은 궁녀를 시키어 벨 것과 덮을 것을 주라 하시었다.

몇 번 눈을 떠서는 어전인 줄 알고 황송하여 정신을 차리려고 몸을 들먹거리다는 그만 아주 코를 골아버리는 이도 있었다.

제일 먼저 코를 곤 이는 최항(崔恒)이었다. 통통하고 키가 조그마하고 수염이 한 개도 없 는 최승지(崔承旨)는 술도 사람 갑절 먹고 떠들기도 사람 갑절 떠들었으나 그 대신 맨 먼저 코를 골아버렸다.

왕은 최항이 코 고는 것을 보시고 웃으시며,

“저 사람은 본래 잠으로 유명하거든.”

하시고 목침을 주라 하시었다.

최항이 잠으로 유명하다는 왕의 말씀에는 이유가 있다.

선조(先祖) 세종 대왕께서 장차 과거를 보이려 하시던 어떤 날 꿈에 성균관(成均館) 서정(西亭)잣나무 밑에 용 한 마리가 서리어 있음을 보시고 이상히 여기시어 곧 무감(武監)을 보내시어 보고 오라 하시었다. 무감이 달려가 본즉, 어떤 통통하고 작달만한 작자가 보따리를 베고 누워 자는데 한 다리를 잣나무에 뻗고 자는 것을 보고 그대로 왕께 고하였더니 이튿날 과거에 장원한 사람을 보니 그 사람인데 이것이 최항이래서 유명한 이야기거리가 되고 성균관 잣나무까지 이름이 나서 장원 나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기 때문에 세종께서 특히 최항을 사랑하시어 과거한지 몇 해가 아니하여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을 하이시고 십 사년 만에 정묘년 중시(重試)에 입격하매 부제학(副提學)을 삼으시어 강설(講說), 사명(詞命), 편찬(編纂), 제술(製述)을 다 주관하게 하시었고 그중에도 명나라에 보내는 소위 사대표전(事大表箋)은 도맡아하였다.

문종 대왕도 부왕의 사랑하시던 신하라 하여 최항을 사랑하시와 즉위하시는 머리에 우승지(右丞旨)를 삼으시었다.

이러한 옛일을 생각하시고 ‘잠으로 유명하다’ 하신 것이다.

제신은 이 뜻을 알기 때문에 웃었다.

평시 같으면 남보다 삼갑절 먹고 삼갑절 떠들 성삼문이 오늘은 매우 조심하는지 꼬빡꼬빡하면서도 좀체로 쓰러지지 아니하였다. 눈초리가 쑥 올라간 큼직한 눈은 보기만 해도 쾌활하였다. 더구나 왕이 주시는 술을 사양할 수 없어 받아 먹고도 아니 취하려고 애를 써서 졸음이 매어달리는 커단 눈을 더욱이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는 양은 우스울 만하였다.

곁에 앉은 신숙주는 가느단 눈으로 성삼문을 곁눈질해 보고 웃었다. 집현전 여러 학사들 중에 성 삼문과 가장 절친하기는 신숙주였다. 성삼문과 신 숙주와는 서로 같은 점보다도 서로 다른 점이 더욱 많았다 삼문은. 키가 크고 눈이 크고 숙주는 그와 반대로 키도 작고 눈도 작았다. 삼문은 눈초리가 봉의 눈인데 숙주는 팔자눈인 것같이 반대요, 성질로 보더라도 삼문은 서글서글 하나 아무렇게나 하는 점이 있으되 숙주는 집으로 서글서글한 체하면서도 속은 매우 깐깐하여 이해 타산을 분명히 하였다. 삼문이 아무리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일을 도모하기에는 도저히 숙주와 겨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삼문은 무엇에나 일에는 항상 수주엑 졌다. 삼문은 속에 무엇을 하루를 숨겨 두지 못하는 성미나 숙주는 필요로만 생각하면 일생이라도 마음에 감출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삼문의 속은 숙주가 빤히 들여다 보지마는 숙주의 속을 삼문은 삼문지 일도 알지 못하였다.

“요 눈 조꼬맹이가 또 무슨 꾀를 부려.”

하고 삼문은 숙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더할 수 없이 친하였다.

신 숙주, 성삼문이 다 취하여 쓰러지되 아직도 까딱없기는 점잖기로 유명한 박팽년과 가냘프기로 유명한 이개(李塏)다. 그렇게 근엄(謹嚴)한 하위지(河緯地)도 쓰러지고 말았건마는 핏기 한 땀도 없고 불면 넘어갈 듯한 이 개가 버티고 있는 것을 왕은 이상하게 보시고 웃으시며,

“조상의 힘이로군.”

하시었다. 이는 이 개가 이목은(李牧隱)의 증손인 것을 말씀하심이다.

마침내 이들조차 쓰러지고 말았다. 오직 왕이 홀로 깨어 취한 눈으로 여러 신하들을 돌아 보시었다.

왕은 내시(內侍)를 시키어 이 사람들을 문짝에 담아 입직청(入直廳)으로 옮겨다 누이라 하시고 침전 이불을 내어 주라 하시고 그도 부족하여 왕의 잘두루마기까지 내어 손수 덮어 주시었다.

신 숙주가 잠을 깬 것은 벌써 해가 높은 때였다. 이상한 향기가 들리기로 돌아본즉 몸에 덮은 것은 상감의 잘 두루마기였다.

숙주는 벌떡 일어나 꿇어 앉아서 잘 두루마기를 두 손으로 받들고 감격한 눈물을 흘리었다.

“이 임금 위하여 몸을 아니 바치면 어디다 바치리.”

하였다. 그러고 어젰밤 왕이 자기들을 어떻게 융숭하게 대접한 것을 아울러 생각할 때에 더욱 감격함이 깊었다.

곁에 자던 성삼문도 그 커단 눈을 뻔히 떠서 숙주의 하는 양을 보았다. 살펴 본즉 자기가 덮은 것도 왕의 갖옷이었다. 숙주보다도 감격성이 더 많은 삼문은 그 갖웃을 안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범옹(泛翁)이, 이런 일도 있는가.”

하고 삼문은 어찌할 줄 모르는 동생이 철난 형을 바라보는 모양으로 숙주를 바라보았다. 범 옹은 숙주의 자다.

삼문의 이 말에 숙주는 잠간 고개를 들어 삼문을 바라보았다. 삼문의 얼굴에 눈물이 종횡 하였다.

그러고는 말이 없이 맥맥히 마주보고만 있었다.

이것은 신숙주, 성삼문 두 사람의 일만이 아니다.

정인지, 최항 같은 이도 이와 같은 감격을 가지었다. 그 증거로는 이 일이 있은지 며칠이 아니하여 정인지가 그의 심복되는 승지 최항을 통하여 왕께 수양 대군이 녹록한 사람이 아 니요 근래에 사람 사귀는 모양이 수상하니, 지금에 수양을 제어하는 것이 후환이 없으리란 뜻을 아뢰인 것이다.

무론 왕이 이 말을 들으실 리는 만무하다. 비록 수양 대군이 딴 뜻을 품은 줄을 정확히 알았다 하더라도 왕의 맘으로는 굴욕을 해할 수가 없으려니와 형제간에 우애지정이 지극하 신 왕으로는 도저히 수양 대군이 딴 뜻을 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상감께 사뢰었나?”

“네, 그 이튿날.”

“상감께서 무에라 하시던가.”

“빙그레 웃으시고는 다른 말씀을 하십데다.”

“상감께서 너무 마음이 약하시니까 웬 걸 들으실라고.”

이러한 담화가 며칠 뒤에 정인지 최항 사이에 교환되었다. 그 끝에 정인지는 무엇을 목전에 보는 것이,

“허, 허.”

하고 한탄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웃고는 최항더러,

“발설 말게.”

하고 당부하였다. 그 뒤부터는 정인지는 다시는 수양 대군에 관하여 아무 말이 없었다. 정인지는 이런 말을 낸 것을 깊이 후회하였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 왕의 병환은 더욱 친중하시와 오월 이십 사일에 마침내 어리신동궁에게 나라를 맡기시고 승하하시었다.

왕이 승하하시기 전날 마침내 회춘 못하실 줄 아시고 영의정 황보인(領議政皇甫仁), 우의정 김종서(右議政金宗瑞), 좌찬성 정분(左贊成鄭笨), 우찬성이 양(右贊成李穰), 이조 판서 이사철(吏曹判書 李思哲), 호조 판서 윤형(戶曹判書 尹泂) 예조 판서 이승손(禮曹判書 李承孫) 병조 판서 민 신(兵曹判書閔伸), 지신사 강맹경(知申事姜孟卿), 집현전제학 신석조(集賢殿諸學辛碩祖) 등을 부르시와 세자를(輔佐)하기를(顧命)하시었다.

왕은 경복궁(景福宮) 천추전(千秋澱)동녘 방(지금으로 이르면 동은돌)에 누우시고 방 안에는 세자와 공주와 혜빈 양씨와 지밀나인(至密內人) 두엇이 모시고 대청에는 승정원(承政院)이 주야로 입직하고 정부와 육조(六曹)의 대관들도 때때로 입시하였다.

고명이 계신 날에 신 숙주, 성삼문은 승지(承旨)로 입직하여 있었다.

왕은 겨우 손을 드시어 수상(首相)을 부르시와 황보인이 병석 앞에 엎드린 때에 세자의 등을 만지시면서,

“부탁하오.”

한 마디를 하시고는 기운이 없으시어 다시 말씀이 없으시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는 듯이 입을 움직이시는 모양이나 어성은 들리지 아니하였다.

왕의 입술과 눈은 움직이시어도 말씀이 없으시고 세자의 등을 만지시던 손이 두어 번 세자의 등을 가볍게 만지시고는 흘러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보인(皇甫仁)은 떨리는 늙은 음성으로,

“상감, 염려 부리시겨오. 소신 등이 충성을 다하여 세자궁을 보좌하오리이다.”

하였다. 이 말이 들리신 모양인지 왕은 약간 고개를 끄덕이시는 듯하여 그 기신 용수(龍鬚) 가 가슴 위에서 흔들리었다.

김종서, 이 양, 민 신 같은 노신들은 왕이 뼈만 남고 핏기 없으신 얼굴을 우러러 뵈옵고 그 곁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느껴 우는 세자궁을 뵈옵고 울음을 머금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도승지 강맹경 입직 승지 신숙주, , 성삼문은 곧 어전에 필목을 들어 이 날에 고명받은 사람의 이름을 정원일기(政院日記)에 기록하였다.

고명하심이 끝난 뒤에 얼마 아니하여 수양 대군과 각 대군이 입시하였다. 왕이 부르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하시던 아우님들을 한 번 보시려 함이다. 세자는 수양 대군이 들어옴을 보시고 일어나 수양의 소매를 잡으며,

“숙부, 어찌하오?”

하고 우시었다.

대군들이 왕의 곁에 꿇어 앉아 왕이 정신 드시기를 기다린지 이윽하여 왕은 한 번 눈을 뜨시었다. 오랜 병환에 기운은 더할 수 없이 쇠약하시었으나 정신은 끝까지 분명하시었다.

두 번째 눈을 뜨시었을 때에 왕은 적이 기운을 회복하시는 모양으로 방 안에 둘러 앉은 대군들을 돌아 보시었다. 돌아 보시던 눈이 양녕 대군에 미칠 때에 왕은 고개를 드시려는 뜻을 보이시었다. 상시에 양녕 대군이 들어오면 왕께서는 반드시 일어나시던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개가 움직여지지 아니한 때에 왕은 다시 눈을 감으시고 한숨을 쉬시었다.

육십이 가까운 양녕 대군(讓寧大君)은 귀 밑과 수염이 눈같이 희였다. 양녕 대군은 태종 대왕의 맏아드님이요, 세종 대왕의 형님이요 문종 대왕의 백부 요 따라서 종친 중에는 가장 항렬이 높은 어른이다. 태종 대왕께서 위(位)를 셋째 아드님이신 충녕 대군(忠寧大君)에 전하실 뜻이 있으심을 보고 당시 세자로 있던 양녕 대군은 거짓술 미치광이가 되어 일생을 술에 취하지 아니하면 산수같에 방랑하기에 보낸 양반이다. 그래서 충녕 대군이 태종 대왕의 뒤를 이어 세종 대왕이 되시고 당연히 왕이 될 양녕 대군은 지금은 한 늙은 선비로 행세를 할 뿐이다.

양녕 대군이 왕위를 피한 것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는 조부 되시는 태조 대왕과 아버지 되시는 태종 대왕과의 부자분이 보기 싫게 싸우는 것과 정종 대왕(定宗大王)과 태종 대왕 간의 왕위의 이동과 방간(芳幹)의 변과 이러한 모든 피비린내 나는 사변을 목도하였다. 이것은 모두 왕위를위한 다툼이니 자기가 왕이 되어도 반드시 패기만만한 셋째 아우님 충녕 대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것을 알았고 또 한 번 세사를 달관할진대 그까진 왕위란 그리 탐낼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좋은 산수를 찾아 경개 보기로 낙을 삼고 달 아래 꽃 아래 술이 취하여 미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인생의 낙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테면 태조 대왕의 정치의 야심과 천재를 받은 이가 세종 대왕이시오, 그 어른의 염세적(厭世的),초세간적(超世間的)인 방면을 이은 이가 양녕 대군이라 할 것이다.

양녕 대군은 뢰 위에 새덫을 놓고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걸리는 것을 보고 새덫으로 뛰어 갔다는 것으로 유명하고, 또 양녕 대군이 장차 폐함이 되려 할 때에 그 바로 아우님 되는 효녕대군(孝寧大君)이 아마 자기가 세자가 되는 줄 아로 갑자기 얌전하게 되어서 글 공부 하는 것을 보고 발로 그 등을 차며 ‘충녕이 성덕이 있지 아니한가’ 하고 웃었고 효녕은 그제야 깨닫고 책을 집어 던지고 문밖 절로 뛰어나가 복을 치고 염불을 하여 하루 새에 북가죽이 노닥노닥 떨어지었기로 유명하다.

이러한 내력을 가진 이이기 때문에 평소에 궁중에 출입함이 없었으나 문종대왕의 임종에 소명(召命)을 받아 들어와 천명이 장차 전하려는 왕과 그 곁에 울고 계신 세자를 대할 때에는 그의 흉중에 태조 대왕 이래의 보든 광경이 구름 일 듯 일어나와 실로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양녕 대군의 늙은 눈에 맺힌 한 방을 눈물 --- 그 속에 끝없는 감회가 들어 있었다 강성한 대군을 어린 임금 이렇게., --- 생각할 때에 양녕 대군의 경험 많고 지혜 많은 생각에는 수 없는 어려운 일, 슬픈 일이 역력히 떠돌았다.

양녕대군은 고개를 들어 세자궁을 뵈옵고 다시 수양(首陽), 안평(安平), 광평(廣平), 금성(錦城), 평원(平原), 영응(永膺) 등 여섯 대군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양녕 대군이 여러 대군을 돌아보매 여러 대군은 다 근심된 얼굴로 잠간 눈을 들어 왕과 세자를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어 왕의 입이 열리어 무슨 말씀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지낸 양녕 대군의 눈은 이 여섯 대군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하였다.

(임영대군은 이때에 벌써 작고하였다).

‘일은 이 속에서 나는구나.’ 하고 양녕은 생각한다.

‘다만 이 중ㅇ 어느 사람이 일의 장본인이 될는지가 문제다.’ 세상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말한다. 안평이 남호(南湖) 담담정(淡淡亭)과 자하문 밖 무 이정사(武夷精舍)에 수 없는 문객을 모은다 하여 혹 딴 뜻이나 품은 것이 아닌가고 어떤 사람은 의심한다. 안평을 해치는 이러한 소리는 근래에 수양 대군 궁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더욱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 말의 장본인은 아마도 수양 대군의 심복인 권람(權擥)이 다. 비록 안평 대군에게 호의를 가진 이라도 왕자의 처지로서 문하에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다는 비난은 한다. 그렇지마는 양녕 대군은 안평의 뜻을 잘 안다.

“안평은 흉한 생각을 할 사람은 아니야.”

하고 지혜로운 양녕의 눈이 보는 것이다. 그 까닭은 안평 안평 대군이 반드시 대의를 중히 여기어서 그런다는 것보다도 양녕 대군 자기 모양으로 귀찮은 권세의 자리를 즐겨하지 아니 하기 때문이다. 양녕이 보기에 안평은 왕이 되라고 하면 달아날 사람이었다.

제일 마음 놓이지 아니하는 이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다.

‘암만해도 가만히 있지 아니할걸.’ 하고 양녕 대군은 수양 대군의 어리었을 때 일을 생각한다. 원천석(元天錫)이 ‘이 아이 모습이 내조(乃祖)와 흡사하오’하던 말도 생각한다. 내조라는 태종 대왕은 곧 양녕 대군 자신의 아버지시어니와 태종 대왕과 같다고 한 말에는 형을 극하고 아버지를 극한 것도 포함 된 것이다. 문종 대왕이 오래 사시었더면 수양은 형을 극하였을는지 모르고 세종 대왕이 오래 사시었더면 아버지까지라도 극하였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이신 세종도 돌아가시고 형님이신문종도 돌아가시었으니 수양이 아비와 형을 극하였단 말은 들을 기회가 없이 되었지마는 앞에 당할 것이 어린 조카 --- 열 두 살 되시는 세자--- 장차는 어린 임금을 순순히 섬길까. 이렇게 생가하면 양녕 대군은 머리를 흔들고 속으로, ‘아니! 안될 말!’ 하고 수양 대군의 붉은 광채 나는 살기등등한 눈을 한 번 더 아니 볼 수 없었다.

‘만일에 수양이 무슨 일을 저지른다. 하면 또 늙은 몸이 서울을 떠나서 종적을 감추어버리는 것이 상책이겠군.’ 양녕 대군은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의 신세를 웃는다. 세종 대왕께서 양녕 대군을 형님으로 극진히 대접하였건마는 그래도 양녕 대군은 세종 대왕 생전에는 아무쪼록 도성에 들기를 피하다가 세종 대왕 승하 후에는 마음 놓고 서울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마는 궁중에 다시 무슨 변이 생긴다 하면 종실의 어른으로 간참 아니할 수 없고, 한다 하면 모두 뒤숭숭하고 위태한 일 뿐이다. ---이렇게 양녕 대군은 벌써부터 보신책을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누가 수양을 당해낼고?’ 대군의 생각과 눈은 다시 육 대군 위로 돌아간다.

임영 이 덕이 있었으나 불행 (臨瀛) 조사하고, 광평(廣平)은 나이 지긋하였으나 수야, 안평에 비길 수가 없는 인물들이요, 평원(平原), 영응(永膺)은 아직도 이십세 내외의 약관이니 장차 날개가 돋고 톱이 나면 몰라도 아직은 수양에 비기면 수리와 병아리 격이다. 그러면 안평이냐. 안평은 명망으로나 실력으로나 적어도 수양을 누를만하지만는 그러할 뜻이 없으니 반드시 수양의 손에 없어질 것이요, 오직 하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아직 삼십 미만이로되 기개로나 식견으로나 수양 대군의 적수가 되려면 되겠지마는 그는 아직 나이 젊고 명망과 우익이 부족하다.

양녕 대군은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육 대군 외에도 장남한 군(君)이 여러분되지마는 별로 뛰어나게 잘난이도 업섰거니와 설사 잘난 이가 있다 하더라도 톰날 같은 대군들이 살아 있는 동안 군으로는 궁중에서 성명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면 종실 중에는 수양의 적수가 없다. 수양이 하려고만 들면 무슨 일이나 될 형편이다.

그러면 신하 중에는 어떠한가.

양녕 대군은 신하들을 생각해 본다.

황희(黃喜)거 팔십세만 되었으면야 아무도 감히 조정을 배반하여 고개를 둔 생념을 못할 것이지마는 나이 구십이니 아무리 황 희인들 무엇하랴. 게다가 근래에는 병으로 눕고 귀가 절벽이 되어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겨우 의사를 통하는 형편이다.

다음에는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이어니와 나이 칠십이 넘어 늙기도 하였거니와 본래 세종 대왕 같은 명군(明君)밑에서 임금이 시키는 대로 예 예 하기나 할 호인들이지 수완이 있거나 아귀통이 센 인물은 아니다. 난 대로 있는 황보 정승이란 별명은 못난이란 뜻 이다. 은후 겸양의 덕은 있다 하더라도 난셍 다스릴 힘은 바랄 수가 없다.

좌의정(左議政) 남지(南智)는 식견이 있으나 몸을 아끼어 국가사보다도 일신 일가의 안전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어려운 일에 믿을 수는 없다. 벌써 무슨 기미를 보았는지 남지는 병탈하고 집에 누워 있다. 그러나 그 병이란 게 얼마나한 병인지 알 수 없다. 그는 안평 대군이 혼사 청하는 것을 거절하도록 조심하는 사람이다. 안평 대군이 강청하므로 부득이 그 아들 우직(友直)을 사위를 삼았다가 나중 우직이 그 아버지와 함께 죽임이 되는 통에 시호(諡號) 하나를 믿지었으나 몸은 온전함을 얻었다.

“에익 얄밉게 약은 것!”

하고 양녕 대군은 가만히 남지를 향하여 혀를 채었다.

삼공(三公) 중에 가장 믿을 만하기는 우의정(右議政) 김종서(金宗瑞)라고 양녕은 생각하였다. 그 아래 위 똑 자르고 가운데 토막만 남겨 놓은 듯한 조그맣고 몽록한 몸---그것은 도시 충분(忠憤)덩어리요, 달덩어리다. 동그란 눈을 흡뜨고 소리를 지를 때에는 그 소리가 벽력 같다고 한다. ‘호랑이’라는 그의 별명은 어느 점으로 보거나 합당하였다. 두만강(豆 萬江)가의 표한한 야인(野人)들의 무리도 이 호랑이의 벽력 같은 소리에 벌벌 떨고 달아난 것이다.

‘장차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다 하면 믿을 사람은 절재(節齋) 하나야.’ 하고 양녕은 생각한다. 절재는 김 종서의 당호다.

그 밖에는 늙은이는 기력이 없고 그렇지 아니하면 세력을 따라 사제사초(事齊事楚)를 예사로 할 무리들이다.따는 그렇기도 할 게다. 제 아비, 한 아비도 왕씨(王氏)의 녹을 대대로 먹다가 일시에 이씨의 녹을 바라고(李氏) 무릎을 꿇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변통 잘하는 정신은 처세(處世)의 비결로 자여손에게 전하여 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양녕 대군은 ‘응’하고 구린 것을 입에 넣었던 것같이 입맛을 다시었다.

이때에 왕은 다시 눈을 뜨시어 여러 대군들을 돌아보시었다. 돌로 깎아 놓은 듯이 가만히 있던 대군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모양으로 몸을 움직이었다.

수양 대군이 특별히 왕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있다. 만일 세자의 제숙부(諸叔父) 중에서 특별히 섭정(攝政)의 고명을 받는다 하면 그것은 수양 대군을 두고는 다시 없을 것을 아는 까닭이다. 안평 대군이 비록 명성이 있다 하나 항렬로나 정치적 수완으로나 도저히 자기를 당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할 뿐더러 왕은 어려서 모양으로 자기를 신임할 것을 믿었다. 요전 집현전에서도 자기에게 특별한 고명이 계실 것을 고대하다가 실망하였거니와 이번 임종의 소명에는 반드시 그 뜻이 있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이것은 수양대군뿐 아니라 다른 대군들도 혹시나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어젯밤 권람(權擥)이가,

“나으리, 장차 크게 운수가 트이시오.”

하고 수양 대군을 보고 유심히 웃을 때에,

“그 무슨 말인고?”

하고 수양이 시치미를 때었으나 속으로는 은근히 큰일을 기약하였던 것이다. 세자가 성년이 되시기까지 섬정의 고명을 받거나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세자를 보도(補導)하는 무슨 직함은 반드시 내리리라고 생각하여 그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낙랑부(樂浪附) 대부인(大夫人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도 반드시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을 믿었다. 권세에 대한 야심으 로는 부인이 도리어 수양 대군보다 성하였다.

‘주공(周公)과 성왕(成王)’ 이것이 수양 대군이 그윽히 혼자 생각하고 자부하는 바였다. 군국대사(軍國大事)를 한 손에 쥐고 천하에 호령하느 것---이것이 수양 대군이 몽매에 잊지 못하는 야심이다. 그 야심은 바로 목전에 달하여질 것 같았다.

그러나 왕은 느껴 우시는 세자의 등을 또 한 번만지시고 들릴락 말락한 어음으로,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

하고 세장게,

“제 숙부(諸叔父) 있으니 무슨 염려 있느냐.”

하시고는 이내 수양 대군에게는 아무 특별한 고명도 없으시고 말았다.

이것이 왕의 마지막 말씀이시었다. 그 뒤에 몇 번 눈을 뜨시었으나 말씀은 못하시고 운명 하시었다.

이날에 수양 대군의 실망이 어떻게 컸던 것은 궁에 돌아오는 길로 사모를 벗어 동댕이를 치어서 모각이 부러진 것을 보아 알 것이다. 부인 윤씨도 낯빛이 변하였다.

더구나 대군들이 입시하기 전에 벌써 영의정 황보인이하에게 보좌의 고명이 계시었음을 들은 때에 수양은시안을 치며 통분히 여기었다.

큰 기회는 가버리었다. 지금껏 마음에 그리었던 공중누각은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수양 대군 궁사랑에서 대군이 궁중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낮잠을 자고 있던 권람(權擥)이가 밖에서 떠들썩하는 소리에 잠을 깨어 머리맡에 놓인 냉수 그릇을 잡아당기어 벌꺽벌꺽 들이켜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었다. 안으로 대군의 성난 소리가 들리었다.

“틀린 게로군.”

하고 권람은 혼자 픽 웃었다 그렇게 자존심. 많고 성미 급한 수양 대군이 궁중에서 실망하고 분통이 터지는 양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그것이 우스웠다. 그러나 자기가 나설 날이 왔다. 만일 쉽사리 권세가 수양 대군의 손에 돌아올진댄 자기는 수양 대군에게 아무 공로도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자기는 수양 대군에 가장 긴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권람은 혼자 기뻐하였다.

안으로서는 수양 대군이 또 한 번 소리 지르는 것이 들린다. 아마 꿎은 어떤 궁인이 애매한 분풀이를 당하는 모양이다. 권람은 또 한 번 픽 웃고 일어나서 마른 손으로 얼굴과 목덜미를 세수하듯이 두루 비비고 망건과 갓을 바로 잡고 툇마루에 나가 앉아서 난간에 기대어 마당으로 가래침을 퉤 뱉고는 소매로 입을 씻었다. 그러고는 왼장치고 앉아서 두 손으로 두 발을 만지며 몸을 흔들었다.

나이는 삼십 사오 세밖에 아니 되었으나 십 칠팔세부터 부족증이 있어서 몸에는 살이 없고 얼굴은 움에서 나온 듯이 희었다. 오직 영채 있는 두 눈이 그의 목숨을 부지하는 듯하였다. 모시 두루마기는 까마헤 때가 묻고 버선 끝은 더구나 고린내가 날 듯하였다. 궁한 샌님인 것은 얼른 보아도 알았다.

그는 유명한 권근(權近)의 손자요, 권제(權制)의 아들이다. 권근은 고려조(高麗朝)의 명 대부(名大夫)로서 계룡산(鷄龍山)에서 태조 대왕께 올린 송덕표 한 장으로 태조의 충신이 된 사람이다.

“공은 고려 말의 명대부라. 만일 당시에 유방(流放)으로 만족하였던들 그 문장명론(文章 名論)이 어찌 목은(牧隱)같은 이들만 못하였으리요마는(계룡산에서 한 송덕표가 문득) 그를 개국총신(開國寵臣)을 만들었으니 슬프도다. 이미 항복한 뒤에도 벼슬이 삼사(三司)에 차지 못하고 나이는 육십을 넘기지 못하였으니 그 얻은 바도 적도다. 오직 그 자손이 서로 이어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여 지금까지 성한 고로 사람이 다 양촌 양촌(陽村)하거니와, (권 근 이)덕행이 있는 듯이 말하는 이가 있거니와, 심하다, 그 도명(盜名)함이여!”

이렇게 상촌(象村)은 말하였다.

권근이 태조 대왕에게 절개를 변하기까지는 전국 선비들이 글를 종(宗)으로 삼아 명성이 삼은(三隱)에 내리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개국하신 뒤에도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목은(牧隱) 이색(李穡)같은 이와 다름없이 그의 시골인 충주(忠州)에 숨어 있어 고려를 위하여 절을 지키었다. 태조는 사림(士林)의 뜻을 거두는 것이 민심을 거두는데 심히 요긴함을 알므로 여말의 여러 문신들을 비사 후폐로, 혹은 군신(君臣)의 예로 아니하고 빈례(賓禮)로까지 하여 청하였으나 목은, 야은 같은 이들은 준결하게 거절하여버리었다. 그래서 태조, 태종 두 분 대왕께서는 마침내 그네의 절을 꺽지 못할 줄을 알고 가만히 여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상책으로 알게 되었다.

권근도 이러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태조는 그의 문장과 지식과 명망을 알므로 아무리 하여서라도 그를 유혹할 결심을 하고 우선 근의 아버지희(僖)를 달래어 그가 데리고 있던 손자 즉 근위 아들인 규를 태조 대왕의 손녀되는 태종 대왕의 따님(나종에 경안 공주(慶安公主)될 이)과 혼인을 하게 하고 다시 희를 달래어근을 서울로 불러 올리게 하였따. 이는 왕의 힘으로는 근을 움직일 수 없는 줄 태조 대왕이 생각한 때문이요, 또 행여 근에게 서울 ㅇ 올 핑계를 얻게 하고자 함이다. 근은 부명을 어길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서울로 올라 오게 되니 이것이 벌ㅆ 훼절의 시초다. 연로 관원의 대우가 융숭하였다. 그래도 근은 차마 바로 서울로 들어 올 면목이 없어서 이리저리로 길을 돌아 간신히 수원(水原)까지 왔을 때에 희가 사람을 수원까지 보내어 성화같이 근을 재촉하고 근은 또 부명을 거스를 수 없다 하여 곧 서울을 향하여 한강에 다다랐다 (漢江). 아비희는 한강까지 친히 마중 나와서 근과 함께 밀실에서 종일 무슨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근이 곧 서울로 들어가는 만에 대궐로 향하여 빈례(賓禮)로 태조께 뵈오니 이것은 무른 첫 번뿐이요, 둘쨋번부터는 조그마한 벼슬아치로 칭신하고 부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태조대왕이 청하시는 대로 전국 명승지에 기(記) 를 지어 올리고 고려 왕조의 역사를 편술한다는 핑계로 지제교(知製敎)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렇게 권근은 절을 헐었다. 이 일이 있은뒤로부터 사람은 다 권근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침을 뱉았다. 그의 친구인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은 그의 훼절을 평하는 시를 지었는데 후에 그 자손이 후환을 무서워 하여 불에 던진 것이 기구만 타버리고 나머지 세 짝만 남은 것이 이러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권근은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까지 되어 태조, 태종 두 분 대왕의 충실한 대서인(代書人)이 되었다.

그러한 권근으 손자요, 권 제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 권제도 세종의 사랑을 받아 일생 대제학(大提學)을 내어 놓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권근이나 권 제나 다 벼슬은 좋아도 재산은 없었다. 재산이라고는 남산 밑 비서 감(秘書監) 동편에 태조 대왕께서 권근에게 하사하신 집 하나가 덩그렇게 있을 뿐이다. 이 집은 찾아 오는 사람 없기로 유명한 집이다. 권근이 한 번 절개를 굽히어 전국 선비가 고개를 돌린 뒤로부터 권근을 이 집에 찾는 사람이 없었다. 충주(忠州) 모옥(茅屋)에는 문전여 시(門前如市)하더니 장안 갑제(長安甲第)에는 찾는 이가 없다고 세상은 권근을 비웃었다.

아무리 왕의 세력이 커도 인심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장안에 벼슬하는 사람들 치고 누구는 고려 왕씨의 신하 아닌 이가 있으리요마는 다른 사람 훼절한 것은 그다지 심히 책망함이 없으면서 하필 권근을 책망함이 그리 심한가. 그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세상에서 평소에 권근에게 바라던 바가 큰 것이다. 비록 대세가 다변한 뒤에 그가득려긍로 천운을 만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모든 권세와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고 하늘은 무너질지언정 끝끝내 고절(苦節)을 지키다가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

둘째는 그가 예사 정치가나 관료가 아니요, 천하에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가르치던 사람인 까닭이다.‘머리 허연 양촌(陽村)이 의리를 말한다면’하고 운곡(耘谷)이 빈정댄 것이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이런 연유로 남산 밑 권근의 구택인 후조당(後凋堂)은 권근의 생전에도 친구 아니 찾기로 유명하였거니와 그 아들 권 제도 대제학이라는 맑은 벼슬을 하기는 하나 집현전(集賢殿)에서는 잘 고개를 들지 못하였고, 세상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교제하기를 꺼려 여전히 그 집은 찾는 사람 없는 일종의 흉가가 되었었고,또 그 아들 권람(權擥)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권람으로 말하면 권근의 손자라, 권근 때부터 삼대나 지났으니 세상이 권근의 일을 잊을 만도 하건마는 그렇지를 아니하였다. 전하고자 하는 공명은 곧 잊혀지어도 잊어 주었으면 하는 허물은 전하는 것이다. 권람도 재주 있고 글 잘하고 하건마는 선비를 틈에 끼어지지를 아니하여 매우고 격하게 살았다.

그뿐더러 세종께서 병환이 계시어 정사를 친히 보시지 못하게 된 때로부터는 권람을 권근의 손자라 하여 특별히 끌어 올릴 사람도 없고 또 웬 일인지 나이 삼십 오세나 되도록 과거에는 연하여 낙제를 하게 되어 권람의 신세는 더욱 궁하게 되었다. 그 친구 서거정(徐居正) 이 일찍,

“옛날 맹교(孟郊)가 낙제를 하고서 출문즉유애(出門卽有碍)하니 수위천지관(誰謂天地寬) 고 하여 몸 둘 곳이 없는 듯이 슬퍼하더니 자네 지금 신세가 꼭 그러이 그려.”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에 권람은 웃으며,

“팔잔걸 어찌하나.”

하고 태연하였다.

권람은 결코 녹록한 장부가 아니라고 서거정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권람은 결코 녹록한 장부가 아니라고 서거정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권람은 별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또 찾아 갈 곳도 없어서 자기 집인 후조당 벼랑 위에다가 조그맣게 초당한 채를 짓고 소한당(所閑堂)이라고 부르고 거기서 혼자 글 읽기로 일을 삼았다.

이 소한당은 후일에 세조 대왕이 임행한 일까지 있은 곳이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하여 수양 대군과 사귀게 되어 저주 수양 대군 궁에 출입하게 되었다.

피차에 뜻이 맞아 수양 대군은 때때로 궁노(宮奴)를 시키어 남산골 권 생원(權生員) 댁에 시량을 보내었다. 권 생원이라 함은 물론 권람을 가리킨 것이다.

이번 문종 대왕 임종에 소명이 내렸을 때에도 수양 대군은 권람에게 미리 말을 하였고 권람도 그 하회를 기다리노라고 사랑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것이다.

이윽고 수양 대군이 장히 불쾌한 얼굴로 사랑으로 나왔다. 원체 기골이나 몸집이나 남보다 큰이지마는 무슨 일에 성이 나서 밖으로서 들어올 때에는 몸이 더 커지어 방에 그득 차는 듯하였다.

권 람은 일어서서 읍하여 대군을 맞이며, ‘벌써 대권에서 나오이었소? 상감 환후 어떠하오시니까?’ 하고 슬쩍 눈치를 살피었다.

수양 대군은 상감 환후에 대해서는 대답도 없고,

“늙은 것들한테 보좌(輔佐)의 고명(顧命)을 내립시었다네.”

하고 아랫목에 앉는다.

“늙은 것들이라시니 누구를 말씀이오니까?”

“황보인(皇甫仁), 남지(南知), 김종서(金宗瑞)이런 것들이지 누구여?”

“황보인은 영의정이요, 남지는 좌의정이요, 김 종서는 우의정이니 삼공(三公)이 보좌의 명을 받잡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오니까.”

하고 권람은 슬쩍 한번 수양 대군의 비위를 건드리고 하희가 어찌되는가 하고 수양의 뒤룩뒤룩하는 눈자위를 본다.

수양은 벌떡 일어설 듯이 몸짓을 하며,

“이 사람, 자네마저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자네 마저 그 늙은 것들의 편당이란 말인가. 그따위 귀신 다된 것들이 무엇을 한단 말인가.”

하고 소리 소리 지르며 펄펄 뛴다.

권 람은 수양이 자기의 놓은 덫에 걸린 것을 보고 속으로 웃으며, 그러나 겉으로는 가장 엄숙하게 무릎을 다시 꿇며,

“아니요, 소인이 황보인의 편당이 되는 것이 아니외다마는 달리는 그만한 중임을 말을 사람이 없길래 그리된 것이란 말씀이요.”

하고 또 한 번 단단히 수양 대군의 간을 건드리었다.

수양 대군은 그제야 권람의 말 뜻을 알아 듣는 듯이, 이 사람아 “, 글쎄 상감께서 그리하시는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하고 푹 누그러지며 권람을 바라본다.

“글쎄외다. 나으리 모르시는 일을 소인이 어찌 아오리까마는 막비 천명이니 천명을 상감께선들 어찌하오리까. 모두 어수선한 일이요, 또 소인 같은 무리가 알 바는 아니나 나으리가 작히나 잘 알으시겠소. 이런 때에 여러 말하는 것이 다 긴 하지 아니한 일이요. 또 소인 이 소간사도 좀 있으니, 소인 물러가오.”

하고 권람이 벌떡 일어나서 읍하고 물러나가려 한다.

권람의 말이 황당해서 무슨 소린지 알 수는 없으나 그래도 무슨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을 수양이 모를 리가 없다. ‘천명을 상감께선들 어찌하랴’하는 말이 수상하였다. 또 겉으로는 아무렇게 구는 듯한 권람의 일언 일동에는 다 무슨 의미가 있는 줄을 수양 대군은 미리부터 잘 알거니와 오늘은 특별히 권람의 말이 무슨 참언(讖言)같이 들리었다.

“이 사람 앉게.”

“아니요 일후 또 오지요.”

수양 대군의 만류도 묻지 아니하고 권람이가 부득부득신을 신는 것을 보고 성급한 수양 대군이 참다 못하여 벌떡 일어나서 권람의 소매를 끌어당기어서,

“정경(正卿)이, 오늘 내가 꼭 자네를 붙들어야만 할 일이 있네.”

한다. 정경(正卿)은 권람의 자다.

권 람은 부득이한 듯이 수양 대군에게 끌리어 들어갔다.

수양 대군은 권람을 끌고 큰 사랑을지나 안 사랑 가장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권람은 수양 이끄는 대로 끌리어 들어갔다. 권람이 말없는 술책은 생각하던 바와 같이 효과를 생하여 수양 대군의 흉중에는 자못 알 수 없이 풍랑이 일어난 모양이다. 무른 이 술책은 오늘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수양 대군은 술을 내오라 명하고는 좌우를 물리고 권람과 단 둘이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마주 볼 뿐이요,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수양 대군은 권람이가 먼저 입을 열기를 바랐으나 권람은 아주 무심한 듯이 벽에 걸린 서화와 활과 전통, 검(劒) 등속을 이것 저것 돌아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권람이가 진실로 무심할 리는 만무하다. 다만 수양 대군의 비위를 가장 힘있게 건드리어 성급한 그의 오장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를 기다릴 뿐이다.

장차 조선 팔도를 흔들려는 큰 뇌성 벽력과 폭풍광랑이 지금 이 자리에서 비롯는 것이다. 벽상에 걸린 활시위가 스르릉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사람이 헛들음인가.

“여보게, 자네가 내게 할 말이 있지 아니한가. 있거든 하게.”

하고 수양 대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하는 수양 대군의 사색은 매우 은근하였다.

권람은 무엇을 주저하는 듯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모든 것은 나으리 마음에 있사외다.”

하고 대답하였다.

“하면 된다는 말인가?”

“그러하오이다. 잘하면 된다는 말씀이외다."

“자네가 나를 도우려는가?”

수양 대군의 이 말에 권람은 대답이 없다.

수양 대군은 초조한 듯이 권람이 손을 잡아 당기며, 자네 오늘 나허구 맹학하려나 “ ? 나는 오직 자네르 믿으니 자네가 나를 도우려는가?”

그래도 권람은 대답이 없다.

수양 대군은 다른 손으로 권람의 다른 손을 마주 잡으며,

“왜 대답이 없는가? 내 인물이 부족하다는가, 또는 내 정성이 못 미쳐 그러함인가.”

수양 대군의 사색은 더욱 간절하여졌다. 그제야 권람이 수양 대군 앞에서 자리를 피하여 앉으며,

“나으리께서 그처럼 소인을 믿으신다면 인생(人生)이 감의 기(感義氣)라니 소인이 견마 지역(犬馬之役)을 다하오리이다.”

하였다. 권람의 허락하는 대답을 듣고 수양 대군은 극히 만족하여 다시 한 번 권람의 손을 힘있게 잡고는 이내 주안을 대하여 술을 마시었다. 큰일을 생각하면서도 만사를 잊은 듯이 술을 마시는데 수양 대군이나 권람은행내기 아닌 기상이 있다.

상감이시오, 수양 대군에게는 친 형님이 되시는 이의 목숨이 정각에 있는 이때에 술을 마시고 취흥이 도도하다 함은 심히 불충부제(不忠不悌)한 일이어니와 수양 대군이나 권 람은 그런 것을 교계하도록 양심이 예민한 살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동기에 이르러서는 두 사람이 다 달랐다. 수양 대군은 충효(忠孝) 같은 것은 남이 내게 대하여 가지기를 바랄 것이 지마는 내가 남에게 대하여 가질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권 람은 충효란 것은 할 형편이 되면 하여도 좋고 못할 형편이 되면 말아도 좋은 것같이 생각한다. 이를테면 충효란 술과 같은 것이다.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권람의 생각에는 남이 내게 불충 불효를 하더라도 ‘그러면 어떠냐’하고 치지도외하겠지마는 수양 대군은 그렇지 아니하여 자기의 불충 불효는 용서하더라도 남이 내게 대한 불충 불효는 추호만큼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술을 마신다기로 가슴에 큰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속까지 취할 리는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 취한 눈을 무심히 굴리는 듯하면서도 피차에 서로 저편의 눈치를 엿보고 일시의 해학(諧謔)같이 나오는 말 한 마디에서도 피차의 속을 들어다 보려고 칼날 같은 마음이 저 편의 가슴 깊은 속으로 들락날락하는 것이다.

“무릇 큰일을 하는 법이 선살후생(先殺後生)이요, 먼저 살(殺)하는 후에 생하는 법이외다. 죽이는 일이 첫일 이외다.”

“꼭지를 먼저 따는 것이지요.”

“나으리께서 사냥을 아시니 만사가 사냥과 같습니다. 먼저 몸을 숨기어 가만히 엿본 뒤에 분명히 겨누어 번개같이 활을 당기는 것이요. 살이 맞은 뒤에는 크게 소리를 치는 것이요.”

이러한 말을 권람이가 수양 대군에게 한 것도 무른 취답에 섞였었다. 이런 기회 저런 기회에 지나가는 소리를 한 마디씩 권람이가 던지면 수양 대군은 듣는 체 만체하는 동안에다 귀담아 듣는 것이다.

위선 몇 사람을 죽일 것, 죽일 때에는 꼭지 되는 큰 사람부터 먼저할 것, 죽이되 가만히 죽이고는 질풍같이 몰아 들어 갈 것---이런 뜻을 수양 대군은 권람이가 지나가는 말로 던지는 말 속에서 다 알아 들었다. 그뿐 아니라 그 먼저 죽여야 할 꼭지가 김종서(金宗瑞)인 것까지 이 자리에서 모르는 결에 말이 다 되었다. 수양 대군은 처음에는 황보인(皇甫仁)을 죽일 사람이 꼭지로 알았었다. 황보 이이 영의정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권람은 ‘양호유환(養虎遺患)’이란 말을 슬쩍 한 마디 던지었다. 김종서의 별명이 ‘호랑이’이다. 이만하면 수양 대군은 김종서가 죽일 사람의 꼭지란 뜻을 알아 들었다. 실상 무섭기는 김종서 하나다.

점점 이야기가 노골하게 되어 서로 꺼림이 없이 된다.

“이 일에는 세 가지 사람이 있어야 하오. 첫째는 모략(謀略)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용력(勇力) 있는 사람이니, 이 두 가지 사람은 일을 이루는 데 쓰오. 그러나 일이란 이루기보다 도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요. 수성(守成)이 창업(創業)보다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이른 것이요. 그런데 모사(謀士)와 용사(勇士)는 창업에 쓰지마는 수성지재는 따로 있는 것이요.”

하며 어떠한 사람을 구하여야 할 것도 말하였다.

“모사야 자네를 두고 달리 구하겠나마는 용사와 치평지재(治平之材)는 어떻게 구할꼬?

이것도 자네 방촌(方寸)에는 있을 것이니 아끼지 말고 말하소.”

하고 수양 대군은 다시 권람의 손을 잡았다.

수양대군의 말에 권람은,

“나으리아시는 바에 소인 같은 썩은 선비가 무슨 모략이 있으리까. 그뿐 아니라 매양 몸이 성치 못하니 모든 일이 다 귀찮을 뿐이외다. 남산 밑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소인의 일이외다.”

이런 말로 한 번 슬쩍 몸을 빼었다.

“그 웬 말인고? 자네는 천하 호걸이 많이 교유(交遊)하니까 사람을 많이 알 것이니 내게 말을 하게. 내가 오직 자네만을 믿는 뜻을 자네가 모르겠나. 만일 사양하는 말로나 모피하면 그것은 친구에게 대한 도리가 아닐세. 자네 말이 세 가지 사람이 요긴하다고 하였으니 심중에 먹은 사람이 없을 리가 있겠나. 자네 마음에 쓸 만한 사람이면 내가 쓸 것이요, 자네가 믿는 사람이면 내가 믿을 것일세. 원체 이런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 자네 말을 듣고 하 는 것이니까 무엇은 자네 말을 아니 듣겠나. 언청계종(言聽計從)할 것일세.”

권람의 목적은 수양 대군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나오게 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수양 대군이 자기를 믿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양 대군 자신의 높은 지위를 더 많이 믿었었다. 그러나 이미 보좌의 고명이 황보인, 남지,김종서 등에게 내리었으니 이제 문종 대왕이 승하하시고 세자궁이 즉위하시는 날이면 수양 대군은 일개 권세 없는 종친에 불과할 것이다. 어제부터는 수양 대군은 자기 지위르 지혜와 힘으로 획득할 길 밖에 없으니 이리되면 권람은 수양 대군에게 있어서 가일충 중요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수양 대군의 입으로 한 번 선언하게 하는 것이 권람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하여서나 장차 일을 하여 갈 때에 자기으 말이 수양 대군에게 큰 위력이 되기 위하여서나 긴요하다고 권람이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수양 대군은 완전히 권람의 수중에 쥐어진 것이다.

이만하면 권람도 만족이다. 권람의 눈앞에는 자기의 부귀가 번쩍번쩍 빛나는 듯하였다.

“나으리가 그처럼 소인을 믿으시니 소인도 생각하는 바를 아뢰오리다. 첫째 모략 있는 사람으로는 한명회(韓明澮)만한 이가 없소이다.”

하는 권람의 말에 수양대군은,

“한명회---그 뉘 아들인가?”

하고 묻는다.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오이다.”

“나이는 몇 살이나 되었나?”

“지금 서른 여덟이외다.”

“무슨 벼슬을 하나.”

“경덕궁직(敬德宮直)이요.”

“어? 경덕궁직?”

하고 수양 대군은,

“이 사람아, 나이가 서른 여덟에 벼슬이 겨우 궁직이야? 허허허.”

하고 대소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권람은 정색하고 수양 대군이 웃기를 그치기까지 가만히 있었다. 수양 대군은 한참 웃다가 권람에게 대하여 미안한 생각이 나서 웃음을 그치고,

“그래, 그 한 무슨 횐가가 그렇ㄱ 모략이 용하단 말인가. 자네가 그만큼 칭찬하는 것을 보면 엄연하겠나마는 어떻게 출세가 늦은가?”

하고 아직도 수양 대군의 입 언저리에는 억지로 누른 웃음이 늠실거리고 남아 있다.

권람은 그제야말을 이어,

“한생(韓生)의 재주는 옛날 관중(管仲)에나 비길까 지금에는 비길 사람이 없소이다. 나으리가 만일치평대업(治平大業)을 하시려거든 한생이 아니면 불가하외다.”

하였다. 수양 대군은 곧 송도(松都)에 사람을 보내어 한명회를 불러 올리라 하고 다시 권람을 향하여,

“지금 공경(公卿)으로 있는 사람 중에는 쓸 만한 사람이 없을까?”

“우의정(右議政) 김종서(金宗瑞) 한 살마이요. 하지마는 김종서는 호랑이니까 호랑이는 길드는 법이 없소이다. 정분(鄭笨)이가 있으나 무해무익하니 말할 것 없고, 혹 반연이 있 으시거든 정인지를 끌어 보시겨오. 첫째 인지는 명(明) 나라 대관 중에 안면이 넓고 집현전에도 최항(崔恒) 이하로 인지의 당여(黨與)가 있으니 끌어 둘 만하외다.”

인지가 내게로 끌릴까?“ 하는 수양 대군의 말에 권람은 웃으며,

“인지는 절개보다도 부귀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외다.”

하였다. 수양 대군도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맨 위로

失國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