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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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리 오너라.』
왕(세종대왕)은 손에 들고 보던 물건을 고즈너기 놓으며 고함쳤다. 그리고 영외(楹外)에 꿇어앉아 있는 정승황희(政丞 黃喜)를 건너다보았다. 황희를 보면서 혼잣말 비슷이 입을 열었다.
『나보다도 동궁이 더 쓸 데 있을 걸……』
『절도사(節度使)도 혹은 그런 뜻으로 진상했는지도 모르겠사옵니다.』
황희의 복주─
왕의 앞에는 함길도(咸吉道) 절도사(節度使) 김종서(金宗瑞)에게서 진상한 돈피 이불이 놓여 있었다. 건장한 왕은 이런 것까지 쓸 필요가 없어서 약질인 세자(후일의 문종(文宗))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왕의 부름에 내관(內官)이 툇마루 아래 국궁하고 대령하매 왕은 내관에게 동궁(東宮)을 부르라 명하였다.
이윽고 쿵쿵쿵 땅이 울리는 소리가 사정전(思政殿) 앞으로 돌아와서 멎었다.
『동궁 대리 등대하왔습니다.』
우렁찬 이 소리에 굽어보니 거기 등대한 것은 왕이 부른 동궁이 아니요, 왕의 둘째 아드님 진평대군 유(후에 수양(首陽)대군이라 고쳤다)였다. 벌써 스무 살이 넘은 진평이었지만 한 개 소년 장난꾸러기다왔다.
눈에 미소를 띄고 손을 읍하고 허리를 굽히고 씨근거리며 뜰 아래 대령하고 있었다.
왕은 이 씩씩한 둘째 아드님을 굽어보았다. 굽어볼 동안 눈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너를 부른 게 아니라 동궁을 불렀다.』
『동궁은 어디 갔느냐?』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왜 네가 왔느냐.』
『승전빛(承傳色─內侍)이 동궁마마를 찾기에 신이 대리로 나온 따름이옵니다.』
『너는 모를 일이로다. 동궁이래야지……』
왕은 미소하며 백발동안(白髮童顔)의 정승 황희를 돌아보았다. 황희도 이 부자지간의 대화(對話)를 미소하며 듣고 있다가 왕이 보는 바람에 좀 더 허리를 굽혔다.
뜰에 읍하고 서 있던 진평이 발꿈치를 조금 높이고 머리를 좀 들고 전내(殿內)를 들여다보았다. 돈피 이불을 종내 발견한 모양이었다.
『옳아, 상감마마 저 돈피 이불을 동궁마마께 하사합시려고 부르셨읍니까?』
『그렇다. 부러우냐?』
『원 천만에! 신은 그런 걸 쓰면 몸이 썩어집니다. 그런 건 동궁께나 하사합시지 아예 신께는 생각도 마십시오. 신은 또 다른 무슨 분분가 하고 달려왔읍더니…… 그러면 동궁마마를 찾어 보내오리다.』
『아니 네가 동궁께 갖다 드려라.』
왕은 이불을 문 가까이로 밀어 놓았다. 그것을 진평은 끌어 당겨 가지고 어깨에 걸치고 무슨 콧노래를 부르면서 내전으로 물러나갔다.
왕은 물끄러미 그 모양을 바라보다가 다시 황희에게로 향하였다.
『어떻게 보시오?』
『네?』
『유를 어떻게 보시오?』
『활발하신 기상이옵니다.』
『동궁과 비겨서?』
『…………』
황희는 대답지 않았다. 손을 양 무릎에 놓고 머리를 좀 더 숙였다. 대답할 바를 몰랐다.
왕이 잠시 뒤에 다시 한 번 채근하여 보았다─
『동궁과 유와 그 사람됨이 어느 편이 낫(優)겠오?』
드디어 황희가 입을 열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단지 그 사람됨을 하문하셨는지?』
이번은 왕이 대답치 못하였다.
『그 사람됨으로 말씀하옵자면 동궁께서는 인자하시옵시고, 진평 대군은 활발합시어서 일장일단이 있아옵니다.』
왕은 이 만족치 못할 대답에 한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한편은 인자하고 한편은 활발하다는 이 간단하고 평범하고도 요령부득의 대답을 듣고자 함이 아니었다. 좀더 투철한 대답, 좀더 요령 있는 대답─말하자면 좀더 세자(世子)와 제이 왕자(진평)의 사람됨을 적절히 지적하는 대답이 왕에게는 듣고 싶었다.
왕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자식을 알기는 어버이에게 지나는 자 없다. 번히 왕도 아는 바다. 아는지라 늘 마음에 걸렸다.
맏아드님 동궁은 그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약하고 부족하였다. 동궁이라면 장래의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귀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약하고 부족한 점이 많았다.
둘째아드님 진평은 또 그 사람됨이 너무 과하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그 성격이 억세고 커 가서 그것은 재상감이 아니요 오히려 왕자(王者)의 감이었다. 만인의 위에 서서 만인을 지휘할 감이지 남의 아래 설 감이 아니었다.
이 두 아드님의 상반(相反)되는 사람됨을 보면서 왕은 늘 마음에 엉기는 덩어리가 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다시 이 문제에 직면하여 왕은 신임하는 원로 재상 황희에게 그 의견을 물어 본 것이었다.
왕이 자기의 대답에 불만족한 의향이 있음을 짐작하였는지, 황희는 조금 뒤에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전하, 신이 두 분 왕자께 대한 우견을 직언하오리까?』
『탓하지 않으리다.』
『네이, 신이 직언하겠습니다. 정인지, 황보인, 김종서, 남지(鄭麟趾, 皇甫仁, 金宗瑞, 南智) 등 아직 장년의 명신들이 조정에 그득히 있아옵니다. 동궁저하(東宮邸下)께오서 장래 등극을 하오실지라도 보필할 명신들이 그득하오니 무슨 근심할 배야 있사오리까마는 신의 우견으로는 동궁저하는 황공한 말씀이오나 명신의 보필이 없아오면 그─좀─그!』
말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왕이 보충하였다─
『감당키 힘들겠단 말이지요? 나도 짐작하는 배요─그러고 유(진평)는?』
『진평대군께는 더 말씀할 배가 없아옵니다. 진평대군은 현재의 왕자(王子)요 장래의 왕제(王弟)오며 그 뒤는 다시 왕숙(王叔)일 따름이옵니다. 왕자, 왕제, 왕숙의 인물은 논해서 무슨 필요가 있아오리까?』
왕은 당신의 뜻과 꼭 부합되는 이 명신의 명찰에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쓸쓸한 미소였다.
『아니, 나도 그 점은 모르는 배가 아니지만 쓸데없는 말이나마 진평의 사람됨을 어떻게 보시오?』
『네에. 만약 대군께서 동궁으로 탄생하셨다면 보필의 신하가 쓸데없으실 분이옵니다. 전하께오서도 그러셨아옵지만 명군의 아래는 단지 「신하」가 있을 따름이옵지 「명신」은 없아옵니다. 나랏님의 명하시는 대로 복종만 하오면 저절로 명신이 되옵는 것으로서 신 또한 전하의 성대(聖代)에 태어난 덕으로 아무 소능이 없이 무위한 세월을 보냈읍지만 청사(靑史)에는 「명상」 칭호로 오를 줄 굳게 믿사옵니다.
이 모두 전하의 여덕으로서, 진평대군께서도 세자로만 탄생하셨더라면 보필의 신하가 쓸데없아옵고 단지 고지식하고 부지런한 신하만 있아오면, 무엄한 말씀이오나 전하의 성대에 손색없을 광휘 있는 세월에 백성들은 배를 두드리며 살 것이옵니다. 그러나 어찌하오리까. 원자로 탄생치 못하오시고 진토에 묻혀서 일생을 보내실 수밖에 없겠아오매……』
『늘 그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